예수 다시 사셨네 마태복음 28장 1~6절
이 아침에 무덤에 장사 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죄에 대한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죄 아래 출생한 모든 인생의 종국은 사망입니다.
모든 인생이 모두 죄 아래 팔렸으므로 죽음은 모든 인생에게 공평히 임합니다.
부자도, 거지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석가모니도 공자도 죽었습니다.
영웅, 호걸, 재사, 가인 - 세상에 왔던 모든 인생들은 조그마한 무덤하나를 세상에 남기고 모두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들에게 훌륭했던 선생, 탁월했던 도덕군자, 뛰어난 사상가 -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역사상 세상에 무덤을 남기지 않은 분이 한 분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이 땅에 사셨습니다. 땅위에 인생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세상에 계실 때 배고픔을 느끼시고 목마름을 느끼셨습니다.
피 흘림을 느끼시고, 슬픔을 느끼셨습니다.
우리와 한결같은 삶을 사셨는데, 한 가지 우리와 다른 것은 그분은 죄와 상관없는 분이셨습니다.
왜 그런가?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출생하심으로 죄와 상관없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롬6:23).
죄인은 반드시 죽게 되고, 죽으면 무덤하나를 세상에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와 상관없는 예수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의 돌문에 인봉했습니다. 로마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아침 그 돌문이 열린 것입니다.
천사는 “너희가 찾는 예수는 다시 사셨다” 고 했습니다.
열린 빈 무덤을 중심으로 은혜 나누길 원합니다.
Ⅰ. 인봉한 무덤 문이었습니다.
본문 27:65~66절에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은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시고(눅23:46) 운명하실 때 이 땅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 났는가?
온천지에 흑암이 임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땅이 진동하고 지진이 났습니다.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렸습니다.
무덤 안에 많은 사람들이 부활했습니다.
백부장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되어지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했습니다(마27:54).
병사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물과 피가 쏟아졌습니다.
존귀한 공회원이요. 숨어서 예수를 따르던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백근이나 되는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품을 가져와 예수님의 시체를 세마포에 쌌습니다.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성대히 장례를 치루고 자신이 쓰기 위해 마련한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했습니다.
군사들은 큰 돌로 무덤 문을 막았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은 이제는 유대 천지에 평안이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고, 장사하여 무덤에 묻어두고, 큰 돌로 무덤 문을 막았는데도 여전히 그들의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왜? “인자가 사흘만에 살아나리라”(마27:63)란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부탁하여 무덤의 돌문을 인봉하고, 병사들로 굳게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날 아침 새벽미명에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다” - 고 했습니다(마28:2).
인봉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돌문은 열릴 수 있다는 것을 전재로 하여 “열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무덤 무은 열렸습니다.
로마 총독의 인봉은 “이 문은 반드시 열리고야 만다”는 부활의 진리를 역설적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Ⅱ. 돌이 굴려진 무덤 문이 있습니다.
본문 1절에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2절에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옮기운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지금 여인들이 예수님 무덤을 찾아서 새벽에 왔더니, 여전히 병사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고 무덤 문이 여전히 인봉되어 있다면, 그 안에 예수님의 시체가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열린 예수님 무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위해서 열고 나온 출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인봉한 돌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오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출구가 필요 없으신 분이십니다.
무덤이다. 돌문이다. 인봉이다. 죽음이다.
- 그것들은 인간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예수님에게는 아무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해 계신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굳이 돌문을 여실 필요도 없으십니다.
그러면 그 문은 왜? 열려야합니까?
그것은 인간들에게 빈 무덤을 보여 주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알리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열린 무덤문은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타파하셨다는 부활의 선포입니다.
열린 무덤문은 예수님께서 나오신 출구가 아니고, 인간이 그 문을 통해서
부활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였습니다.
Ⅲ. 천국으로 가는 구원의 문이 있습니다.
이 아침에 천사가 전해준 기쁜 소식은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지구상에 살다간 모든 사람은 무덤을 통해서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한 인생은 하나의 무덤을 삶의 흔적처럼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만약 인봉한 무덤 문을 열고 보니 그곳에 예수님의 시체가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터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라면 모든 사람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거기에 누워 있었다면 그분은 성자는 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아들은 될 수없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거기 계셨더라면 공자나, 석가나, 마호멧 처럼 교주는 될 수 있어도, 구세주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열린 무덤은 그분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요. 그분이 진정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 되심을 무언의 언어로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덤이 비어있음으로 우리의 마음은 소망으로 가득차고, 그 무덤의 열려 있는, 돌문이 우리 앞에 열려 있는 구원의 문이요. 영생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었습니다. 열려있는 돌문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하늘문이 되었습니다.
눈을 떠서 밝히 보라 ! 마가복음 8장 22~26절
눈은 지식과 이해의 통로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이 있어도 눈으로 보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꽃이 피었는지 단풍이 들었는지 사계절의 아름다운 변화가 소경과는 아무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경이라 하면 모든 장애의 대명사처럼 생각 되는 것입니다.
우리말에도 “본다”는 말은 퍽 광범위한 뜻으로 사용됩니다.
“들어본다, 만져본다, 맛본다, 맡아본다, 걸어본다, 먹어본다....”
모든 동작과 체험을 표현할 때 “본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보는 기능을 상실한 소경이야말로, 모든 기능을 정지당한
사람이 아닌가?
오늘 본문은 빛 잃은 소경에게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없는 소경에게 소망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실패한 인생을 회복시키시는 회복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Ⅰ. 누가 눈을 떴는가? 예수님 앞에 나온 소경입니다.
본문 22절에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벳새다는 요단 동편 지방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고, 오늘 본문에서는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사야 49장 6절에 예언되었습니다.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지만 오늘날도 팔레스틴 동쪽 지방은 소경이 많은 곳입니다. 강렬한 태양이 풀 없는 열사의 땅에 내리 쬐이고 5월부터 11월까지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으면서 동쪽 사막으로부터 건조한 동풍이 모래먼지와 함께 몰아치기 때문에 안질이 많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금 이 소경을 치료하신 것은 가장 흔하고 일상적인 질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벳새다에 있는 모든 소경이 눈을 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참으로 네게 이르노니 엘리야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에게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고 했습니다(눅4:26~27)
누가 눈을 떴는가?
벳새다 지방의 그 많은 소경가운데 오직 예수님 앞으로 나아온 소경만이 눈을 떴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올 수 있고, 아내의 권유로 교회에 나올 수 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 어떤 까닭에 교회에 나왔더라도, 그것이 축복인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소경이 눈을 뜨는 길이 예수를 만나는 길 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문제를 해결 받는 길도 예수님 만나는 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길도 오직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믿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큰 물결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인연 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찬503장)라고 했습니다.
바람이 불어야 연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고, 바람을 만나야 돛배가 앞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닥친 고난은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인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Ⅱ.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이 눈을 떴습니다.
본문 23절에 “예수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 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셨다”라고 했습니다. 모두 예수님과 “접촉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만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접촉한 사람은 살아났습니다.
열 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고서 혈루병을 고침받았습니다(마5:25).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 하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앉은뱅이가 일어섰습니다(행3:6).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접촉한 앉은뱅이가 일어섰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14:6).
“나는 빛이라”고 했습니다(요9:12).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했습니다(요6:48).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했습니다(요11:2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했습니다(요15:11).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접촉한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접촉한 사람은 빛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접촉한 사람은 부활의 생명을 받습니다.
Ⅲ. 점진적인 축복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24절에 “무엇이 보이느냐 우러러 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했습니다.
25절에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점진적인 회복, 점진적인 축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여러 곳에서 많은 소경과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여리고 성의 소경거지 바디메오를 고치셨습니다(마20:29~34).
그는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보길 원하나이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즉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를 지나시던 예수님께서 열 문둥이를 만나셨습니다.
그들은 멀리서 소리 질러 가로되 “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은 제사장에게 보이러 가는 중에 문둥병이 나았습니다(눅17:14).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간청하는 여인에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 딸이 병고침을 받았습니다(마16:28).
그런데 본문의 소경은 간절히 부르짖는 부르짖음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 소경은 친구들의 권유 때문에 예수님께로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소경의 치료의 조건은 믿음입니다.
그의 믿음의 성장속도 따라 차츰차츰 고침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성장 속도가 축복의 속도입니다.
믿음의 크기에 따라 받는 축복의 양이 결정됩니다.
하나님은 물 주전자를 채우시되 넘치게는 붓지 아니하십니다.
내 믿음의 그릇만큼 내가 받습니다(왕하4:3).
성경은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했습니다(시81:10).
큰 믿음을 통해서 큰 능력을 체험합시다.
복 있는 사람의 삶 시편 1편 1절~6절
시편 전체를 대표하는 시편 1장의 말씀은 인간의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의 말씀에는 복 있는 사람의 삶이 있다고 했습니다.
본문 6절의 말씀에는 악인의 삶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복 있는 사람의 삶은 어떤 것인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니하며”“아니하며”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복 있는 자의 삶은 부정의 삶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아니하고, 무엇을 아니하여야 복 있는 삶이 될 수 있는가?
Ⅰ. 악인의 꾀를 부정하는 삶입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악인”은 “도덕에 해이하여 인격이 결실치 못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민첩하다(qulck), 활동하다(Activity), 혼란스럽다(confusion)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악인은 꾀도 많고, 말에도 능하고, 행위에 민첩하고 기동성이 있어서
어두움의 일에 많은 성과를 나타내고 지능적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악인은 어두움의 세상에서 민첩합니다.
악한 일에 능력이 있으며, 악을 행하는데 부지런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했습니다(눅16:8).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악인은 어떤 측수한 죄인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악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법에서 떠나있는 모든 사람을 통칭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의 택한 백성을 연다나는 도구로써 잠시 동안 머물게 하는 한시적인 존재를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 37편 1절은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욥은 “악인은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고 했습니다(욥21:13).
악인은 하나님의 장중에서 의인의 성화를 위해서 필요한 도구로 사용되는 어둠의 무리들입니다.
이러한 무리들을 시편에서는 죄인이라고 했습니다(시1:5).
오만한 자(잠1:22), 행악 자(시22:16), 강포한 자(시18:48), 간사한 자(시26:4),
살인 자(시26:9), 피 흘리기를 즐겨하는 자(시139:19), 허망한 자(시26ㅣ4),
불의한 자(시43:1), 비방하는 자(시 44:16),후욕하는 자(시44:16),
복수하는 자(시44:16), 거역하는 자(시68:8), 흉악한 자(시71:4),
모해하는 자(시71:13), 교만한 자(시119:78), 대적 자(시38:20) 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다채로운 이름은 바로 악인의 성격, 악인의 존재가 어떤 것인가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이 악인을 가리켜 황소(시22:12), 사자(시7:1),
젊은 사자(시17:12), 개들(시22:16), 들짐승(시74:19) 등으로 비유해서 말했습니다.
이러한 짐승들은 이성 없는 존재들입니다.
본능대로 살고, 본능대로 먹고 마시고 욕구와 충동 따라 움직입니다.
이러한 악인들이 창궐하는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합니다.
악인의 생의 목적은 항상 의인들을 헤치고 괴롭게 하는데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 앞에서 종교적, 윤리적 비행을 감행하는 자들입니다.
저들은 또한 철저한 무신론자들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없다”고 합니다(시14:1).
저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감찰치 아니하신다”고 합니다(시10:13).
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무시하며(시28:5),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믿지 아니합니다(시78:24).
저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피난처로 삼지 않습니다(시74:8).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합니다(시10:3).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시36:1).
그러므로 악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시119:85),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않습니다(시119:85).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도 아니합니다(시119:158).
복은 어디 있는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시2:12).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고 했습니다(시73:28).
Ⅱ. 죄인의 길을 부정하는 삶입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죄인이란 말은 히브리말로 “하타임” - 목표를 맞추지 못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맞추어 드리는 것입니다. “하라” 하는 것을 힘써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맞추어 드리는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 어떠한 이유와 변명의 여지가 있어도 하지 못한 것은 하지 못한 것이고 한 것은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맞추어 드리는데 손해가 오고, 박해가 오고,
핍박이 오고, 때로는 돌이 날아오고, 칼이 날아와도, 그것을 성취하는데 때로는
생명까지도 내어 놓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의 길은 반역자의 길입니다. 불순종의 길입니다.
죄인은 불법자란 의미로 사용됩니다. 성경은 “불법은 죄”라고 했습니다(요일3:4). 그것은 구부러졌다. 어긋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죄”라는 고유명사는 히브리어는 “하말티아”라고 합니다.
“관역에서 화살이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 길은 가인의 길이요. 발람의 길이요. 가롯 유다의 길입니다.
그 길에 발람처럼 부귀와 명예가 있더라도 단연코 그 길에서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Ⅲ. 오만한 자의 자리를 부정하는 삶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란- 고 하였습니다.
“오만한자” 히브리어 “레침”은 하나님께 속한 신성하고, 거룩한 것을 멸시하고,
조롱하며 비웃는 자입니다. 오만한자는 자기 힘만 믿고, 자기 재물만 의지하고,
자기 신념을 신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들은 조롱하기를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시10:4).
자기를 절대화하고, 자기의 힘을 절대시한 나머지 하나님의 거룩을 목독하며
다른 사람의 경건과 의를 비웃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한다.”고 했습니다(잠1:22).
예컨대 노아시대의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들이었고, 소돔과 고모라의 롯의 사위
같은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오늘날 하나님에 대하여 냉소적인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노아의 방주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현장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유물론의 붕괴 현장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입니다.
신앙은 의지적 결단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참신이면 하나님을 좇고, 바알이 참신이면 바알을 좇으라”고 엘리야가 촉구했습니다(왕상18:21).
복된 사람의 삶은 악과 죄와 오만의 부정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부정의 정도는 죽기까지입니다(단3:15).
다니엘이 그러했고, 스데반이 그러했고, 세례요한이 그러했고, 주님의 제자들이
그러했고, 오늘 나와 여러분의 삶이 그러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복된 삶인 것입니다.
자기 이름에 책임을 집시다 요한복음 1장 12~13절
뉴욕 부룩클린의 노예시장에 많은 노예들이 팔려가기 위해 나왔습니다.
많은 노예들은 슬픔과 불안과 절망감으로 인하여 어깨가 축 처진 채 모두 땅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젊은 노예 하나만이 머리를 반드시 들고 하늘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 노예를 주시하던 농장 주인이 물었습니다.
“저 젊은 노예는 어떤 사람이요?” 노예상은 “예” 이 젊은이는 추장의 아들이었답니다 아프리카의 비록 작은 부족의 추장의 아들이지만 그 부족 사람들은 지금도 그를
왕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비록 노예 시장에 팔려나온 노예였지만 그는 “나는 자랑스러운 부족의 후계자”란 자긍심 때문에 결코 머리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노예 시장에 팔려나온 추장의 아들도 그 이름에 걸 맞는 당당한 기품을 가졌다면 오늘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Ⅰ.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합니다.
누가복음 6장 43절에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식을 보면 그 부모를 안다”고 말합니다.
이는 자녀가 그 부모를 닮는다는 말입니다.
사실 자식은 그 부모의 외모뿐 아니라 그 성품까지도 닮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창1:27).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는 성도들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성품이 발견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이름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된 이름의 명예를 손상시킴으로, 하나님의 존엄하신 책망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고 했습니다(롬8:15~16).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예수를 믿으므로 예수로 말미암아 존귀한 신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롬8:17).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소속이 달라졌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벧전2:9).
이름만 존귀한가?
그 이름에 걸 맞는 가치관과 물질관과 새로운 세계관을 가져야 합니다.
존귀한 왕자가 거지 같이 살아서야 되겠는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책임을 지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Ⅱ.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에 책임을 져야합니다.
사도행전 11장 25~26절에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그리스도의 교훈과 행동을 본받는 자”란 의미입니다.
실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삶을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는가?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행2:42~47).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의 특징은 무엇인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기도에 힘쓰는 삶을 살았습니다(행2:42).
사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의 진리를 성도들에게 가르쳤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 힘썼습니다.
또한 그들은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 기도하는데 열심을 다했습니다.
성도들이 말씀을 보며 기도하기를 힘쓸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기사와 표적이 많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성도의 능력의 원천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섰습니다(행3:8).
시도들이 기도할 때 모인 곳이 진동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행4:29).
교회가 기도할 때 예루살렘 옥문이 열렸습니다(행12:12).
바울과 실라가 기도할 때 착고가 풀어지고,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렸습니다(행16:26).
바울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든 자 위에 얹으면 고침을 받고 악귀가 떠났습니다(행19:2). 그러므로 사람들이 성도들을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행2:43).
초대교회 성도들은 교회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그리고 서로 애찬을 나누며 신령한 교제를 하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삶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아! 저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다” - 하는 소리를 듣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받았습니다.
이 이름에 책임을 지는 능력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Ⅲ. 성도라는 이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합니다.
성도란 하나님에 의하여 “거룩하게 구별된 자”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레11:45).
이 이름을 받은 성도는 죄악 된 세상에서 분리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성도라고 하여 세상에서 떨어져 나온 구분된 무리들이 아닙니다.
별세계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곡식이 가라지와 섞여서 함께 자라고 있는 것처럼
죄악 된 세상 속에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까마귀 속에 백로가 구별되는 것처럼 세상 속에서 성도는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죄 짓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삶을 산다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성도를 구별하겠는가?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적인 욕망을 버리고, 세상적인 유익과
세상 낙을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할 때 세상은 우리를 거룩한 무리! 성도라 부를 것이고, 우리는 이 귀한 이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거룩한 우리들의 이름에 책임을 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기적을 체험하는 삶을 삽시다 열왕기상 17장 1절~16절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죄악이 만연하여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때마다.
종들을 보내 사 위기를 극복하게 하셨습니다.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께서 인간 지으셨음을 한탄하실 때 노아를 부르시고 심판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앗수르의 죄악이 관영할 때 요나를 보내 사 니느웨의 심판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의 죄악이 관영하고, 하나님 백성에 대한 바로의 압제가 극에 달했을 때
모세를 부르시고 출애굽의 대 역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중세 카토릭의 부패가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독일의 한 수도사
마르틴 루터를 통하여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하셨습니다.
영국을 구원하기 위하여 죤 낙스를, 미국을 구원하기 위하여 무디를,
오늘 말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예비 된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성취해 가십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왕상17:1).
메마른 광야에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는다면 이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는 중에도 노아와 그의 여덟 식구를 구원하시고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하시는 중에도 의인 롯을 구원하신 것처럼 기근과 재난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중에도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적의 축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 오늘 이 기적의 축복을 체험할 수 있는가?
Ⅰ. 연단을 통과한 자에게 기적과 축복이 있습니다.
본문 5절에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 때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라”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릿 시냇가에 머물 때,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침, 저녁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물어왔습니다.
그런데 까마귀들은 아침 먹고 저녁 먹을 하루분의 양식을 물어오지 아니했습니다. 아침 먹고 나면, 저녁에 또 먹을 떡을 물어 오는 것입니다.
먹고 남을 만큼 주시지 아니하시고, 한 끼 식물을 아침, 저녁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까마귀가 물어오는 떡과 고기로 배부를 수 있겠는가? 만족하게 먹을 수 있겠는가? 죽지 않을 만큼,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물을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훈련시키실 때 고난과 연단을 통하여 훈련시키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는 고통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쌓아 두려는 데서 오는 탐욕의 고통입니다. 우리는 우리 집 마당의 창고가 천국의 창고보다 더 크고 안전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아침, 저녁 까마귀를 통하여 먹이시는 것입니다.
왜? 아침에도 까마귀를 기다리고, 저녁에도 까마귀를 기다리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광야에 내렸던 만나도 그러했습니다. 하루에 이틀 분 양식을 주시지 않으시고
일주일 분 양식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루에 하루 분 양식만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은 매일 매일 하나님을 바라봐야 살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까마귀를 의지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불같은 연단을 통과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Ⅱ. 삶의 우선순위가 지켜질 때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 13~14절에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고 했습니다.
먼저는 누구인가? 하나님입니다. 그 후는 누구인가? 너와 네 아들 - 인간입니다. 먼저와 그 후의 법칙은 삶의 법칙입니다. 생존의 법칙입니다.
먼저와 그 후는 축복의 법칙입니다. 신앙의 법칙입니다.
먼저와 그 후는 기근으로 죽어가는 모자에게 생명의 소리입니다.
구원의 소리입니다. 먼저와 그 후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보다 먼저 계신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먼저를 요구하십니다.
첫 소산, 첫 이삭, 첫 단, 맏물 광주리.... 그래서 축복 받은 믿음의 선조들은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였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여호와께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창8:20).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해에 백배나 얻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번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창26:13).
축복의 비결은 이삭이 이사하는 곳 마다 먼저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창26:25).
먼저는 축복의 길이요. 먼저는 번성의 길이요. 먼저는 성공의 길이요.
먼저는 100배나 받는 기적의 길입니다.
Ⅲ. 기적과 축복을 체험하는 길은 오직 순종입니다.
본문 5절에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났는가? 까마귀의 역사 - 아침저녁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물어왔습니다.
본문 15절에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인은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순종은 어디서 오는가? 믿음에서 옵니다. 절대 믿음에서 절대 순종이 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는 언제나 희생이 요구됩니다.
떡이냐? 말씀이냐?
이 여인에게 있어서 한 덩이 떡은 가장 귀한 것입니다.
한 덩이 떡을 자식과 함께 나눠 먹고는 세상과 자식과 이별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떡을 포기하는 것은 생명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녀가 세상을 포기하고, 생명을 포기하고, 가장 귀한 것을 포기 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축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영원히 다하지 아니하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 축복을 믿음의 그릇에 풍성히 받으시는 복된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기르오리까? 사사기 13장 8절~14절
가정은 하나님께서 이땅에 건설하신 작은 천국이며, 작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을 통하여 꿈도 소망도 가꾸어가며, 가정을 통하여 천국의 삶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가정이라는 만남의 장소에서 삶의 과정에서 필요한 기초적인 지식을 배우게 되며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가정을 중심으로 하여 행복을 창조해가며, 이것이 점점 세상으로
확산해 갈 때 세상에는 사랑과 평화가 있고, 자유와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야 말로 행복과 축복의 요람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가정은 부모와 자녀를 기본 단위로 하여 구성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가정은 있는데 자녀가 없었던 소라 땅 단지파 마노아의 가정이 있습니다.
가정에 자녀가 없다면 꽃에 향기가 없는 것과 같고, 음식에 소금이 빠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녀는 가정의 기쁨이요. 사랑이요. 꿈입니다.
지금 삭막한 마노아의 가정에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졌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라”고 했습니다(삿13:7).
마노아가 기도하여 가로되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무엇을
행하오니까?”(삿13:12).
자녀를 축복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어떻게 기르오리까?”
막중한 사명을 깨닫는 마노아를 만나길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를 양육할 책임을 부여 받고 어떻게 자녀를 양육할 것인가?
Ⅰ. 하나님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을 다 지킬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무엇을 가르칩니까?
교과 과정의 내용 안에서 가르칩니다.
배우는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무엇을 배웠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진로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자란 아이는 장사하는 법을 배울 것이고, 공동묘지 근처에서 자란 아이는 상여 메는 것을 배울 것이고, 서당 근처에서 자란 아이는 글 읽는 것을 배울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 지니라”고 했습니다(신6:4~9).
그래서 그들은 일평생 일 년에 세 차례씩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율법을 강론하고 율법을 묵상하고 하나님 말씀을 외우고 율법을 가르치는 것을 생활화하여,
자기의 생일을 잊어버리고, 나이를 잊어버려도 하나님 말씀은 잊어버리지 아니함으로 이천 년 동안 나라 없이 세상에 떠돌며 살았어도 언어와 신앙과 혈통과 전통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 후서 3장 16절의 말씀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가정에는 자녀의 교육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한 자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녀로 성장할 것이고,
세상 방법으로 양육한 자녀는 세상이 원하는 자녀로 성장할 것입니다.
애벌레에게 무엇을 먹이느냐에 따라서 여왕벌이 되기도 하고 일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Ⅱ. 기도로 양육해야합니다.
본문 8절에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 우리가 그 낳은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부모는 일평생 희생하며 살도록 가정에 파송된 일꾼이며, 자녀의 영혼을 책임지는 선교사입니다.
일꾼은 남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놓고 땀 흘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가족을 위해 날마다 땀 흘리는 수고의 순교자가 되어야합니다.
가족을 위하여 일하는 일꾼 된 부모가 소홀히 해서 안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자녀의 영혼에 대한 관심입니다.
우리는 우리자녀들이 세상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세상 교육에 대해서는 열심이 특심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자녀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백성이 되는데 필요한 영적 교육에는 너무도 등한히 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어데 있습니까? 성공이 어데 있습니까? 형통한 삶이 어데 있습니까?
하나님의 장중에 있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그것의 근원이 되십니다.
성경은 온갖 귀한 것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고 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신다”고 했습니다(엡1:3).
그런데 이러한 복을 받기를 원하면서도 받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 다면
그 부모야말로 자녀의 행복에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마노아 부부는 자식이 없어서 수치를 당하는 문제를 높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녀를 주신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자식을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를 놓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로 자식을 받고, 기도로 지식을 양육하는 방법을 응답받았습니다.
기도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함을 받는 통로입니다.
우리들의 자녀를 위하여 그들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부모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Ⅲ. 부모가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잠언 22장 6절 말씀에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부모는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스승입니다.
자녀가 어데서 무엇을 배우겠는가? 부모를 통하여 모든 것을 배웁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어린아이의 운명은 언제나 그 어머니가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링컨의 어머니는 “너는 백정보의 논밭을 갖기보다 한권의 성경을 갖는 사람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말씀이 중심이 되는 생활을 가르치기 전에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생활의 본을 보여야합니다.
부모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일 때 자녀들은 부모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부모가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들을 겸손히 섬길 때, 자녀들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부모가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고, 구제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 때 자녀들은 댓가 없이 베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것입니다.
가정은 세상에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곳입니다.
가정은 잃어버린 기력을 회복하는 곳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들의 모든 허물을 덮고, 모든 아픔을 치료하는 최고의 명약입니다.
부모는 가정의 화평과 사랑을 창조하는 창조자입니다.
효도하면 잘되리라 출애굽기 20장 12절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종교에도 효도를 계명으로 정한 종교는 오직 기독교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꼭 필요한 삶의 규범을 10가지로 간추려 두 돌 판에
새겨서 모세에게 주신 것이 10계명입니다.
첫째 돌 판에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가?를 대신 계명으로 주신 것이 제 4계명까지이고,
두 번째 돌 판에는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를 대인 계명으로
5계명, 6계명, 7계명으로 주시고 8계명 9계명 10계명은 대물 계명으로 사람이
물질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제 5계명 - 효도의 계명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 다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계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이 효도가 이렇게 중요한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인 것 같이 부모는 나의 존재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간은 다른 포유류와는 달리 양육기간이 특별히 길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이 독립된 인간으로서 제구실을 하는 데는 최소한 2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합니다.
그 20년이라는 세월은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수고와 정성과 희생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기간입니다.
낳으신 은혜, 기르신 은혜, 가르쳐주신 은혜, 축복의 은혜는 실로 백골난망의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의 효도는, 윤리나 도덕적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이요. 인생의 본분이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도 “효는 백행지본이요 만복지원”이라고 했습니다
효도하는 자에게 축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장수의 복과 범사가 잘되는 형통의 복과 부귀와 영화의 복이 효도에서 얻는다.
- 해서 “만복지원”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지키면서 효도의 의미와 그 신앙적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Ⅰ. 효도는 부모님의 은혜를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부모님의 희생과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인간이 나타낼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부모님의 자식 사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이 땅위에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하게 성공한 사람의 배후에는 의례히 어머니의 고귀한 사랑과 희생이 뒷받침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가 그러했고,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가 그러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를 키우기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는 자녀 교육의 귀감이 되며, 이율곡이라는 훌륭한 사람을 키우는데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올바른 가정교육이 뒷받침 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효도는 부모님이 날 낳아 주시고, 가르쳐주시고, 길러 주신데 대한 보답으로 하는 효도가 아닙니다.
비록 부모님이 내게 해주신 것이 없을지라도, 나에게 물려주신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부모님은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자로 믿고 순종하고 공경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효도는 하나님의 계명이기 때문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며, 이 계명을 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책망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Ⅱ. 효도는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이 세상에 처음 날 때에는 도덕관념도, 선악의 분별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기가 인격이 형성되고, 의를 알게 되고, 교양을 갖추는 것은
부모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를 “가장 훌륭한 인생의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기 위해서, 어떤 고난도, 어떤 희생도 기쁨으로 감내합니다.
거기에 어떤 조건이나,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식이기 때문에 그를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식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주는 것입니다.
진나라 환온이 촉나라로 가는 도중에 심협을 지나게 되었답니다.
수행원 한 사람이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서 배에로 가지고 왔습니다.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쫓아왔으나 이미 배는 육지를 떠나서 강물 따라 흘러가는 것입니다.
어미 원숭이는 배를 따라서 울면서 쫓아오는 것입니다.
몇 백리를 내려온 배가 어느 선착장에 닫자, 어미 원숭이는 배에로 뛰어 오르더니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도 이상해서 죽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어미 원숭이의 창자가 극심한
슬픔으로 가닥가닥 끊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일로부터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단장의 사연”이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원숭이도, 인간도 그러한 마음으로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를 양육하였으니,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Ⅲ. 효도는 순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에베소서 6장 1절의 말씀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자녀의 효도의 근본은 순종입니다.
유대민족이 2천년동안 나라 없는 유랑민족이 되었지만, 오늘날 세계적으로 우수한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에게 엄격한 가정교육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도, 가정이 바로 유태국가였고, 유대민족이었습니다.
유대의 자녀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곧 율법이요, 율법의 표준이었습니다.
그들의 부모에 대한 절대 순종이 유대민족을 그토록 위대한 민족으로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모에 순종하시어, 목수 일을 하셨고, 애굽의 총리대신이었던
요셉도,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야곱의 평생에 효도를 다 했습니다.
구약성경은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신27:15).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자는 상관에게도 순종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자는, 나라에도 충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순종은 하나님 말씀 안에서의 순종입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도, 부모님 말씀에 대한 순종도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 뜻 안에서의 효도와 순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녀는 부모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야합니다.
어떤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가장 좋은 효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공자가 잠시 생각하더니 “얼굴빛이야”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에게 의식주의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좋은 옷, 맛있는 음식은 누구나 돈만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기 위해서 괴로운 일이 있어도 얼굴빛을 좋게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근본이 우리의 부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부모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수욕정풍부지”나무는 고요하고 싶으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욕양친부대”자식은 부모를 봉양하려하나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마음 평안히 해드리고 물질 봉양 잘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이 일을 잘하는 자에게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였습니다. 수명장수, 부귀영화는 효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창세기 13장 14~18절
우리는 지금 한 위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축복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자신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명령입니다.
그 명령은 가나안 땅에 거하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의 후사가 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유효한 축복의 음성이요, 약속이요, 비젼이요, 또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하신 말씀입니다(창13:14). 이 말씀은!
Ⅰ. 하나님 자신의 말씀입니다.
본문 14절에 “여호와께서 ... 이르시되 -”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어떤 분이신가?
1.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스스로 계신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성호는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서야하는 모세에게 자기의 존재를 알려주신 이름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라”고
하셨습니다(출3:14).
“스스로 있는 자, 자존자, 여호와”입니다. 무시 무종하시며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곧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우주와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나를 지으시고, 내 아내를 지으시고, 내 자녀를 지으시고, 흑인도, 백인도, 황색인종도 홍색인종도 그분이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그 분 안에서 한 자녀요, 한 형제요, 한 친구입니다.
3.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창12:1).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① 아브람의 존재의 원인이 되셨습니다.
② 아브람의 존재의미와 존재목적이 되셨습니다.
③ 그 분은 아브람의 전 생애의 중심입니다.
④ 아브람의 현 주소였습니다.
바로 그 말씀이 아브람의 시간이요, 공간이요, 삶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아브람의 동쪽이요, 서쪽이요, 남쪽이요, 북쪽입니다.
4.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3) 아브람을 복되게 하시는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Ⅱ.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아브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아브람입니까?
1. 선택받은 아브람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_”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9절에 “...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함으로서 아브라함을 선택받은 삭개오의 조상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3절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4장 13절에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4장 16절에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하셨습니다.
2. 소명 받은 아브람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5절에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함께 ...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에게 있었던 믿음의 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 “믿음으로 아브람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는 갈대아우르 - 곧 본토 친척 아비집이 있는 곳에서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적으로 조명하면 불신앙의 이 세상과 골육과 친척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떠나온 자” 곧 성도를 말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불신앙의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에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가나안 땅으로 “건너온 자”입니다(히브리인 이라는 말은 강을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3. 갈라진 아브람이었습니다.
그는 갈대아우르 곧 본토와 아비 집과 친척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갈라져 나온 자였습니다.
본문 14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라고 했습니다.
어데서 떠났는가? 세상에서 떠난 것입니다. 분쟁에서 떠난 것입니다.
신약적으로 조명하면 성화의 걸음을 결단한 성도들을 뜻합니다.
성화는 세상으로부터 갈라지는 것입니다. 성화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성화는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과 혼합되지 않는 것입니다.
4. 가나안에 거하는 아브람입니다.
본문 12절에 “아브람은 가나안에 거하였고 -”라고 했습니다.
18절에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라고 했습니다.
가나안에서 거하던 아브람은 소명을 받고, 헤브론을 옮겼습니다.
“헤브론”은 “친교, 동맹”을 의미합니다. 헤브론은 하나님과 친교를 맺는 곳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자들은 헤브론인 교회로 돌아와 하나님과 사귀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5.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봐야 할 아브람입니다.
본문 14절에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에서 떠난 사람은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동서남북을 바라 봐야합니다
아브람이 바라 본 동서남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교의 사역지입니다.
Ⅲ. 축복의 비젼을 들려 주셨습니다.
1. 물질의 축복입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했습니다(창13:15).
땅은 물질의 상징입니다. 땅은 생존의 터전입니다.
땅은 온갖 생존자원의 상징입니다. 많은 물질의 축복은 세계선교의 도구들입니다.
2. 자손의 축복입니다.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창13:16).
땅의 티끌 같은 자손은 대륙(육지)선교의 영역입니다.
“네 씨가 바닷가의 모래 같게 하리니 -”라고 했습니다(창13:17).
수많은 섬들과 해양의 선교영역입니다. “하늘의 별 같은 자손”이라고 했습니다(창13:17). 전능의 자손, 빛의 자손, 고상한 축복의 자손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엔 인간의 활동영역이 땅과 바다와 공중이라고 했습니다.
하늘과 땅, 오대주 육대양은 축복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세계선교의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물질을 자녀를 가정을 사업을 일터를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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