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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종합편12

공 상희 2008. 5. 22. 15:29
 

절망은 없다   출애굽기 15장 22 ~27절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대장관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불기둥의 인도를 받으며, 홍해가운데로 난 마른 길을 건넜고,

애굽의 병사들은 구름기둥의 저지를 받음 홍해가운데서 모두 수장되었습니다.


똑같은 길을 가는데 - 한 편은 축복의 가나안에 가는 길이었고,

한편은 죽음의 길을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광경을 보면서 손뼉 치며, 춤추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출15:2~18).

그러나 그들의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홍해를 건너자마자 그곳이 가나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황량한 광야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만난 광야는 몹시 낯설고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모래 폭풍! 회색빛 석회석평원! 몹시 뜨겁고, 딱딱한 지표면! 물도 없고,

나무도 없고, 그늘도 없는 땅만 있습니다.

이제는 애굽에서 메고 온 가죽부대의 물도 떨어졌습니다.

삼일 길을 헤매어도 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목이 타고, 백성들은 아우성을 치고, 원망은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실로 절망적인 환경이었습니다.

그들이 큰 소망을 가지고 출애굽을 하고, 불기둥,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는 행선의 길이었지만 가나안에 가는 길에는 예기치 못한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 중에 실망이 가장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에서 실망이 아닌 절망에 빠진 인생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코 절망일수만 없는 소망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절망은 없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Ⅰ. 마라의 인생! 쓴 물 같은 인생이 있습니다.


본문 23절에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영광의 대탈출! 출애굽의 역사는 성공 중에 이루어졌습니다.

장정이 60만! 노인과 어린 아이와 부녀자들은 이 수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줄잡아 2-3백만 명! 거기에 그들에게 딸린 수많은 짐승들은 모두 물을 마셔야 사는 생명체들입니다. 그런데 큰 낭패를 만났습니다.

“그들이 나와서 수르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함으로 물을 얻지 못하고”라고 했습니다(출15:22).

사막에서 물을 얻지 못한 그들의 고통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천신만고 끝에 샘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의 기쁨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그물은 석회석에 오염된 쓴 물 - 마라였습니다.


그들의 실망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물 없는 사막! 건강을 잃어버린 육신! 돈 떨어진 주머니! 바닥난 쌀독!

애정이 파탄된 가정! 마실 수 없는 쓴 물!

이것들이 모두 인생의 삶에서 만나는 마라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타락한 인생에게는 실패와 고통과 좌절과 절망이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들의 기대만큼 실망도 크고, 실망이 큰 만큼 깊은 절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청천벽력 같은 사고!

하늘같은 남편 잃고 기둥 같은 자식 잃고, 직장 잃고, 일자리 잃고,

거리에 내몰린 사람! 어느 날 듣게 된 사형선고 같은 질병의 소식! 부도 맞고,

도적맞고, 사업장은 문 닫고, 빚에 몰려 망연자실한 사업가 - 이들이 모두 쓴 물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Ⅱ. 단물 같은 인생이 있습니다.


본문 25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뿌리 깊은 불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24절에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우리는 지금 마실 물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도대체 우리에게 물을 줄 수 있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목소리입니다. 그들은 눈앞의 현실에서 필요한 물만을 생각했습니다.

모든 관심을 오직 물에만 집중했습니다.

한 일에 집착하고, 필요한 것에만 집착하면 다른 것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재물에 집착하면 돈밖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땅에 것에 집착하면 하늘의 것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목이 말라서 물에만 집착하다 보니 역사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감의 사람 모세는 환경 가운데서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한낮의 하늘을 캄캄한 흑암으로 덮으시던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마른하늘에서 돌덩이 같은 우박을 쏟으시던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멀리 - 높이 동서남북을 바라보면, 자산에도 풀이 나는 축복의 땅이 보이는데, 눈앞의 것만 바라보면 멸망 받을 소돔과 고모라만 보이는 것입니다. 모세가 엎드려 기도하니 “저 나무를 물에 넣으라 - 물에 넣으니 물이 달아 졌더라” - 고 했습니다.

그 나무에 어떤 신통력이 있었는가? 아닙니다.

모세의 지팡이에 신통력이 있었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기적의 도구로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오늘 날 우리도 아무능력 없는 타다만 부지깽이 같은 나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주님의 구속사역에 쓰임 받는 도구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도 주시고, 물질도 주시고 사업체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가정도 주시고 일터도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때 이 쓴물을 단물로 바꿀 수가 있는가?

에스겔 47장의 “에스겔의 환상은 성전문지방 밑에서 발원한 물이 동방으로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어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생물이 살고 고기가 심히 많더라”고 했습니다(겔47:8~9).


열왕기하 13장 20절엔 “즉은 엘리사의 뼈에 시체가 닿으니 곧 회생함을 입어 일어섰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만난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중풍병자는 나음을 받았습니다(요5:9).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된 혈루병 여인은 고침을 받았습니다(마9:9).

예수를 만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요8:11).

예수를 만난 맹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요4:1).

무엇이 문제입니까? 환경이 문제가 아니고 예수를 만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를 만난 쓴물인생은 단물인생으로 변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엘림 같은 인생이 있습니다.


본문 27절에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 70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라의 곁에 엘림을 창설하심으로 광야 같이 삭막하고 황량한

이 세상에 풍요와 휴식의 장소를 예비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샘물하나 만이라도 원했습니다.

뜨거운 햇볕을 기리워 줄 종려나무 하나만이라도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풍성하고 차고 넘칩니다.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70주를 준비하셨습니다.

고기를 먹기를 원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룻길 사방에 두규빗의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밥이나 얻어먹기를 원하는 히브리 종에게 애굽을 먹여 살리는 요셉의 창고를 주셨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자들의 감옥이 아닙니다.

축복 받은 천국 백성들을 양육하는 훈련장입니다.

축복의 엘림은 마라의 곁에 있습니다.

조금만 더 참고, 조금만 더 견디면, 엘림의 샘물 곁에 장막을 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정망은 없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절망의 마라를 축복의 엘림으로 바꾸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태복음 15장 21 ~28절



여호와의 전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겠나이다 -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했다함이더라”(삼상1:20)


낮을 벽을 향하고 누워 기도하던 왕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소서 -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15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이성을 보호하리라”

- 그 날 밤에 앗수르군대 18만 5천명이 진멸 당했습니다(왕하 20:5)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여리고성의 길가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 지르던 소경 거지 바디메오는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보기를 원하나이다” -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그 시간에 그는 눈을 떴습니다.


“나는 부활이여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인줄 내가 믿나이다. -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울며 부르짖던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무덤에서 나오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요11:25).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아들을 얻기도 하고, 생명을 연장 받기도 하고,

나라를 지키기도 하고, 죽은 자가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는 사람! 기도에 응답 받는 사람! 소원을 성취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 인가?


Ⅰ. 절박한 심령으로 부르짖는 자가 소원을 성취합니다.


본문의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 7장 26절은 이 여인을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수로보니게는 지중해 연안의 기름진 평원에 사는 블레셋 족속입니다.

이 여인은 헬라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혈통이나 언어를 의미하기 보다는 바알신과 아스다롯 등, 우상을 섬기던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은 이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여인이란 말은 팔레스틴 지방에 사는 모든 족속을 통칭하는 말로,

선민 유대 민족에 대칭되는 하나님 밖의 인생이란 뜻입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는 종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유대인인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는데 2중 3중의 난관과

장애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여인의 딸이 귀신에 들린 것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자기의 모든 것입니다.

어쩌면 지식은 자기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세상의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의 불행 앞에서 어머니는 절박한 것입니다.

모성은 목이 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 그러나 주님은 대답이 없으십니다.

더욱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왜 여인은 이토록 부르짖어야 하는가?

딸의 생명이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구원의 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나는 이스라엘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 대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노라”

- 이제는 주님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더욱더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욱더 냉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기가 시험의 절정입니다. 여기가 축복의 마지막 관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더 크게 부르짖어라!” “더 간절히 부르짖어라” “애타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주리라” -입니다.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주님! 저는 개입니다. 주님의 개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제가 주님의 가지신 것 다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은 주님의 자녀들에게 주시고, 저는 부스러기 은혜라도 족하옵니다.

- “저에게도 주시옵소서” -입니다.

그때 주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여자야!(헬:오 귀나이!)

“개야!” 이렇게 부르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절박한 기도! 간절한 기도! 목마른 기도! 허기진 기도!

이 기도가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기도신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Ⅱ. 큰 믿음이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본문 15절에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큰 믿음이 그녀의 소원을 성취시켰습니다. 어떤 믿음이 큰 믿음인가?


1. 예수님께 나오는 믿음입니다.


본문 22절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아와서”라고 했습니다.

가나안은 이방인의 땅입니다. 그 지경은 두로와 시돈입니다. 그 지경은 헬라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곳입니다.

영양분이 풍부하여 바닷물에 녹조현상을 일으키고 적조현상을 일으키는 것처럼

두로와 시돈은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영혼이 죽어가고 육신이 병들어가는 땅입니다 이 빛없는 땅에서 빛 되신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이 생명이 없는 땅! 소망이 없는 땅에서 생명이 되시고,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께로 나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 예수님을 향하여 물을 여는 것! 이것이 큰 믿음입니다.


2. 애원하는 기도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본문 22절에 “소리질러 가로되”, 23절에 “소리를 지르오니”라고 했습니다.

그 내용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은, 그것이 은혜였던지, 축복이었던지,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결과입니다.

이 여인의 부르짖음은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 가 아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였습니다.

이 여인은 자녀의 불행과 자신의 불행을 동일시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부르짖음은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최후적 몸부림입니다.

그녀는 다윗의 자손 예수!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만이 구원자요, 그만이 치유자요, 그만이 생명이 되는 이름을 붙잡고 생명을 건 기도를 하였습니다.

Ⅲ. 불굴의 믿음이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은혜를 입는 데는 많은 난관과 장애가 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과 제자들의 제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하지 아니하시니” - 예수님의 냉담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시는 거절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방해도, 어떠한 제재도, 어떠한 난관도 그의 소원을 포기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갈급하고, 그 만큼 그녀는 절박하고, 그 만큼 그녀의 믿음은 확고했습니다.


백전불굴의 믿음! 이 믿음이야 말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응답을 받을 수 있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떠한 환경을 만났다 할지라도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 가 문제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나라도, 민족도, 혈통도, 종교도, 환경도, 초월하는 믿음을 통하여 그의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 소원성취 하시는 성도님 도시길 바랍니다.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어라   창세기 6장 13 ~22절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축복하시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창1:28).

그런데 인간은 이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로 바꾸었습니다.


인간이 번성하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다”고 했습니다(창6:5).

하나님께서 인간의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은 심판 중에도 의인 노아에게 구원 계획을 계시하셨습니다.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어라”고 하셨습니다.

이 방주계시는 노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총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오늘 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성도에게 주시는 사랑의 명령입니다.

이 방주계시는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요,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교회의 예표입니다.


이 시간 우리들의 가슴마다에 구원의 방주가 아름답게 지어지기를 바랍니다.

왜? 우리는 오늘 이 구원의 방주를 지어야 하는가?


Ⅰ. 세상의 끝이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셋의 후손들도 영적인 유산을 잃어버리고 점점 세속화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습니다(창6:2).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란 무슨 뜻인가? 본능적인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정욕 따라 사는 삶입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경제전쟁에서 패하여 망하지 않습니다.

영토전쟁에서 패하여 망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 세상이 망하는가? 죄악으로 타락하여 망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성적으로 타락할 때 세상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노아의 시대가 그러했고, 소돔과 고모라의 때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부패와 타락을 감찰하신 것입니다.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방주를 지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이 세상의 끝이라는 것입니다. 심판의 때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방주를 지을 것을 명하시면서 노아에게 아무것도 주시지 아니하셨습니다. “너는 잣나무로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고 하셨습니다(창6:14).

재료도 주시지 아니하시고, 연장도 주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살길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는데, 그 길을 네 스스로 찾아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때부터 노아에게는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이 시대의 노아와 아들들이 놀고먹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이후에 인간은 이마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생업에 종사하여 경제생활을 영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애써서 일해가지고 무엇하는 데 썼습니까? 배짓는데 썼습니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이 배의 길이가 171.5M, 폭 28.5M, 고 17.2M, 총 톤수 13960톤 - 화물차량 522대의 용적과 맞먹는 규모입니다.

이정도의 배가 건조 되려면 수백억의 건조비가 필요합니다.


이 배는 1884년 이탈리아의 “에투리아”호가 진수되기 전까지는 세계 최대의 선박이었습니다.

노아가 이 일을 하는데 한 두 해가 걸린 것이 아닙니다.

무려 120년이나 걸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배가 지어지기까지 120년 동안 심판을 유보하셨습니다.

왜? 노아와 그의 여덟 식구를 구원하기 위해서 기다리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그 때처럼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하십니다(막1:15).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벧전4:7).

지금은 구원의 방주를 지을 때입니다.

그러나 방주는 마음으로 짓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 짓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재료도 가르쳐주시고, 설계도도 만들어 주셨으니, 잣나무를 배어다가

배를 짓고, 역청을 퍼 다가 배의 틈새를 막는 것은 내가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내가 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힘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그 역사가 잘 이루어지도록 축복하실 것입니다.


Ⅱ. 방주 밖의 인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8장 6절에 “40일이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다”고 했습니다.


“날아 왕래하였다” 어디서 어디까지 왕래했다는 말인가?

방주에서 세상까지 왔다. 갔다. 했다는 말입니다.

노아가 까마귀를 날려 보내면서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오너라” - “네 갔다 오겠습니다”

- 그런데 방주에 갇힌 까마귀가 세상에 나와 보니, 세상에는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가도 시체, 저기가도 시체 - 본래 썩은 것을 좋아하는 까마귀에게는 어디를

가도 먹을 것이 풍성한 것입니다.

배불리 먹고 저녁 때 방주 꼭대기로 왔습니다.

“아니야, 내일 하루만 더 먹고 방주로 들어가자”

- 그래서 다음 날 다시 세상으로 갔습니다.

왔다가 가고, 왔다가 가고, 그래서 “날아 왕래하였더라”입니다.


오늘 교회에도 이러한 성도가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세례도 받고, 떡도 먹고, 포도즙도 먹고 ... 축복도 알고, 은혜도 압니다.

주일 날 교회도 나옵니다. 그런데 교회 안으로 들어오질 않습니다.

등록도 않습니다. 봉사도 않습니다. 자기를 가만히 놔두라는 것입니다.

부담주지 말라고 합니다. 알아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20).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입니다. “네가 내 곁에 내가 네 곁에”가 아닙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할 영혼이 지금도 세상과 교회 사이를 왕래하고 있으므로

그 영혼을 위하여 방주를 지어야 합니다.


Ⅲ. 방주로 돌아오는 비둘기(영혼)가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8장 8절에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 지라”고했습니다.


썩은 고기를 먹는 까마귀는 세상에 와보니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쉴 곳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날콩을 먹는 비둘기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시체에 발을 대지 않는 비둘기에게는 쉴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날아다니다가 방주로 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가 쉴 곳은 세상에 없습니다.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곡과 풍랑일어도 안전한 포구”(찬464)

예수뿐입니다. 교회뿐입니다.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다” -


오늘 여러분이 바로 그 비둘기입니다.

까마귀에게는 세상이 풍요롭고 즐거운 곳이지만, 비둘기에게는 세상에 발붙일 곳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피곤한 영혼이 있기에 - 방주로 돌아가야 할 비둘기가 있기에, 오늘 우리는 방주를 지어야합니다.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어라”

선택의 기회를 잃지 않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작은 응답 큰 확신  열왕기상 18장 41 ~45절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하는 단순한 요구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면이요, 하나님과의 대화요, 하나님과의 교통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열어젖히는 비상통로가 아니고,

아무 일 없어도 항상 열려 있는, 개방된 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에 끌려간 다니엘은 어떻게 바벨론의 총리가 되었는가?


그는 기도의 줄을 붙잡고 노예에서 총리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왕 이외에 다른 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진다”는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전에 하던 대로, 전에 드렸던 그 기도를,

전에 받으셨던, 그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에 있어서 기도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는 기도를 드린 것은 기도가 아니고는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는 대속 사역을 감당할 수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우리는 얼마나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고 있는가?

얼마나 기도를 소흘히 하고 있는가?


기도가 그의 영적 수준입니다. 기도가 그의 신앙수준입니다.

기도가 그의 능력의 수준입니다. 기도가 그의 축복의 수준입니다.

믿음이 없어도 일할 수 있고, 믿음이 없어도 헌금할 수 있는데 믿음이 없이는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시간 우리의 기도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축복이 있길 바랍니다.


Ⅰ. 엘리야의 기도는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본문 41절에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배추벌레에서 나비를 보는 것입니다.

종달새의 알에서 종달새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히11:1).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에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성경은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했습니다(롬8:24).

우리가 믿는 것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붙들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시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그 믿음을 보상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을 보려고 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실망치 말고,

오직 믿음을 붙잡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엘리야는 사환에게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저가 올라가서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 엘리야는 큰 비의 소리를 들었는데, 사환이 바라본 바다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얼굴을 무릎사이에 뭍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영적 싸움입니다. 영적 씨름입니다.

그러므로 평생을 해도 수운 것이 아닙니다.

이 기도의 영성이 흐려지면 하나님의 생명 종교는 세속 종교와 겉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20년 동안 악착같이 모아둔 재물 때문입니까?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취한 축복 기도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환도 뼈가 오긋 나는 기도의 결과였습니다.


성경에 “야곱이 어떤 사람과 씨름했다.”고 했습니다(창32:22~24)

이 씨름이 히브리어로 “야바크”입니다. “야바크는 먼지를 일으키며 싸운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먼지를 일으키며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말로는 “대굴대굴 구르며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엘리야의 무릎 사이에 얼굴을 뭍고 드린 기도가 바로 “야바크”의 기도였습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한번 드린 기도는 야곱이 이스라엘로 거듭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기도하고 보니까 환경이 변하고 세상이 변한 것입니다.

그렇게 두려웠던 에서가 하나님처럼 보였다고 했습니다(창33:10).

에서의 마음이 녹아져서 야곱을 붙들고 얼싸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나이다” “일곱번까지 다시가라”(왕상18:43)

엘리야는 큰 비의 소리가 큰 비가 되어 내릴줄 믿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막11:14)

아무것도 없는 하늘이 비구름으로 채워질 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마른하늘에서 빗소리를 듣는 것이 믿음입니다.


Ⅱ.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어떤 기도가 능력이 있는 기도인가?

의심치 않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 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약5:15).


주님의 뜻을 좇는 기도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려면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요15:7).


합심기도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고 했습니다(행12:5).

그 시간에 옥문이 열리고 성문이 열리고, 베드로의 발에 채워졌던 착고가 풀렸습니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인내의 기도입니다.

“올라가 보라” “없습니다” “올라가 보라” “없습니다” 네 번하고 다섯 번 하고

포기했다면 비를 볼 수 있었겠는가? 응답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도 자주 기도합니다.

20일 기도도 하고, 40일 기도도하고, 100일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작정한 날이 되면 기도하기를 포기합니다.

누가 20일 하고, 40일 하고 100일 기도하면 응답 주겠다고 했습니까?


엘리야는 지금 한창 기도하고 있는데, 우리는 돛자리를 걷어가지고 산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더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응답의 축복을 담을 그릇을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고 했습니다(갈6:9). 그 때는 내 때가 아니고 하나님의 때입니다.


Ⅲ. 약속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열왕기 상 18장 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야곱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고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천지가 변해도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룬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더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더욱더 약속의 성취를 사모하라는 뜻입니다.


왜 ?

그것은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사모하는 자에게 풍성히 주시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더욱더 간절히 비가 오기를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일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보이느냐” “예 보입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아무것도 없고 손바닥만한 구름이 보일 뿐입니다.”


작은 응답! 큰 확신! 손바닥만한 구름 한 점!

그러나 엘리야는 작은 응답 속에서 큰 확신을 얻었습니다.

손바닥만한 구름 속에서 하늘을 덮는 큰 비구름을 보았습니다.

손바닥만한 구름 속에서 장대비를 보았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기도의 응답입니다.







감사로 드리는 제사  시편 50편 14~15절



속담에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나쁜 감정은 오래 가지고 있고, 은혜는 쉽게 잊어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수는 물에 새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하는 자에게 약속된 축복은 무엇인가?

첫째, “환난에서 구원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본문 14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23절에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삶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된 본분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하는 삶이 효도의 삶이요, 백성이 나라에 감사하는 삶이 충성의 삶이고 부부간에 감사하는 삶이 사랑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삶이 경건의 삶이요,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축복은 존귀케 되는 축복입니다.

본문 23절에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광범위합니다. 영육간의 구원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구원은 영혼이 구원받는 영적구원입니다.

그러나 병든 자가 질병에서 구원 받는 것도 구원이요, 실패한 자가 재기하는 것도 실패에서의 구원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이 어디서 오는가? 본문은 감사의 삶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4장의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 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막14:9).

올바른 감사는 이렇게 사람을 존귀하게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감사할 수 있는가?


Ⅰ.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데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우양이 번성하고, 은금이 증식되고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에서 살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교만입니다.

고통이 오고, 환난이 닥치고, 실패가 오고 질병이 찾아 올 때 하나님을 원망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고, 반듯하게 잘 자라줄 때,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내 자식이 똑똑하고 머리가 좋아서 공부잘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면, 일류선생한테 괴외 공부시켜서, 학군이 좋고, 학교가 좋아서 공부잘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까?


신명기 8장 17~18절의 말씀에 “또 두렵건데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사업해서 성공한 것이 내가 돈버는 재주가 뛰어나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직장에서 진급하고, 승진하는 것이 내 능력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내 자동차가 사고 없이 잘 굴러다니는 것이 내 운전 기술이 좋아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내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


6.25사변 때 대전 근교에서 포로가 된 딘 소장은, 전쟁 중에 목숨을 걸고,

그를 숨겨주고 보살펴준 무주의 어떤 촌부를, 포로교환으로 석방된 후 다시 찾아가서 그분들의 은혜를 치하하고 그들의 자녀를 미국으로 데려가서 평생 교육을 책임지는 보은의 은전을 베풀었습니다.

이렇게 그가 은혜를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그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감사는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이 아닙니다.

언제나 권리에 책임이 따르는 것처럼 은혜 입은 사람은 반드시 감사로 보답해야합니다.


Ⅱ. 생각하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 “뎅큐”는 “씽크”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감사는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자기 욕심만 채우는 사람에게서는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감사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 2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덕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라고 했습니다(시103:3).


그 첫 번째 감사가 무엇인가?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입니다.


모든 병을 고쳐주시고,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을 베풀어주시고, 내 소원을 만족케 해주시는 은혜도 감사하지만 역시 우리에게 가장 귀한 은혜는 “내 모든 죄악을 사하여 주신”은혜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죄에서 구속받은 이 은혜 하나만으로도 평생을 감사해도 못 갚을 사랑의 빚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위에 가정을, 자녀를, 일터를, 건강을

- 마지막 때에 섬길 수 있는 좋은 교회를 .... 복되고 아름다운 조국을,

- 너무도 많이 너무도 풍성히 축복하셨습니다.

주신은혜 감사하고, 받은 은혜 감사하고, 장차 우리에게 부어주실 은혜에 감사하고, 감사하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Ⅲ.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본문 14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라고 했습니다.

제사(sacriqice)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감사로 제사를 드린다는 말은 “나를 희생하여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감사에는 자기희생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 하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함에는 자기희생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고 했습니다(신16:15~17).


감사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고후9:7).

받은 분복을 따라, 믿음의 분량 따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일류 인생 · 삼류 인생   신명기 28장 11~14절



사람은 일평생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작게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 하는 일상의 사소한 문제로부터,

무엇이 될까? 어떤 일을 할까? 하는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로운 선택권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선택의 결과는 인간자신이 책임을 져야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시편 107편 33~37절에 말씀에서 “여호와께서는 강을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으로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그 거민의 악을 인하여 옥토로 염밭이 되게 하시며 - 또 광야를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으로 샘물이 되게 하시며, 또 복을 주사 저희로 크게 번성케 하시고 그 가축이 감소치 않게 하신다.”고했습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인가?

그 사람의 삶의 태도에 따라서 광야 같은 인생이 변하여 못이 되고, 마른땅이 샘이 되는, 일류의 인생이 되기도 하고, 그 사람의 삶의 태도에 따라서 강이 변하여 마른 광야가 되고, 옥토가 염밭이 되는 삼류 인생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유인생이 일류 인생이 되는 비결은 무엇인가?


신명기 28장 1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여 네게 미치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28장 15절의 말씀에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치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치리니-”라고 했습니다.


삼류 인생과 일류 인생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백성에게 어떤 복을 약속하셨는가?


Ⅰ. 소유의 풍성한 복을 주십니다.


본문 12절에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라고 했습니다.

무슨 비입니까? 축복의 비입니다. 은혜의 단비입니다.

장마철에 퍼붓는 홍수비가 아니고 곡식밭에 때를 따라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입니다.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 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신28:12).

풍성한 물질의 복입니다. 차고 넘치는 복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복이 아니고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 수 있는 요셉의 창고와 같은 물질의 복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설움이 무엇인가? 배고픈 설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가? 가난의 고통입니다.

가난이 죄는 아닌데 참고 견디는데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I.M.F라는 경제위기를 체험했습니다.

국가였던지, 개인이었던지, 없으면 비참한 것입니다.

가난은 인간의 존엄성마저 앗아가고, 나라의 주권까지도 짓밟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닥친 이 경제 위기를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어금니를 굳게

다물고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유와 원인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원인을 세상에서 찾고 있지 않습니다.

그 원인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누가 잘못해서 망하고, 누가 잘해서 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의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출17:11).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면 이기고, 지게 하시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시고,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면 풍년이요, 번성이요, 존귀와 영광이요, 일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닫으시고 우로를 내리시지 아니하면, 기근이요, 실패요, 삼류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Ⅱ. 명예와 지위의 복입니다.


본문 13절에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머리(히:로쉬)는 여자적으로는 두상을 말하고, 상징적 의미는 “우두머리”, “최고”를 의미합니다.


60년대의 국정 지표는 100억불 수출, 천불 소득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국력은 2만불 소득, 몇 천 억불 수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고, 사람마다 핸드폰을 가지고 있습니다.

엄청난 물질적 축복을 받은 민족입니다.

몇 년 전 만해도 ‘K.S 마크다' 하면 어디서든지 다 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k.S마크 가지고는 통하질 않습니다.

쏘세지 하나를 만들어도, K.S 마크로는 않 됩니다.

F.D.A(국제식품위생국)의 검증을 받아야 상품으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국 제일”로는 부족합니다. “세계 제일”이 되어야 합니다.


얼마 전 북한에서는 80kg짜리 호박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사람의 줄기 세포를 만드는데 성공해서 난치병 치료에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고 했습니다.

공산품이었던지, 농산물이었던지, 생명공학이었던지, 이제는 “세계 제일”만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행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요,

-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으뜸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최고가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일류가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물건하나를 만들어도 세계에서 제일가는 물건을 만들고, 사업을 해도 세계의 일류기업이 되게 하시고, 골프를 쳐도 세계에서 제일 골프를 잘 치는 사람! 달음질을 해도 세계에서 제일 빠른 사람, 활을 쏴도 세계에서 제일가는 명궁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31장 6절 말씀에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로 내가 네게 명한 것을 만들게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야 일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야 최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면 놀랍게 변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크게도 하시고, 작게도 하시고, 흥하게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시고,

귀하게도 하시고 천하게도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Ⅲ. 자녀가 잘 되는 복을 주십니다.


본문 11절에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제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여자적으로는 자손이 번성하고 재산이 증식된다는 말씀입니다.

소산이 많아진다는 것은 열매가 많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성과가 풍성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지혜가 필요한 자에게는 지혜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건강이 필요한 자에게는 건강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낮은 자에게는 존귀를 더하고 비겁한 자에게는 용기를 더한다는 말씀입니다.

숫자가 많아서 세계 제일이 아니고 그 명성이, 존귀와 영광이 세계 제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된다는 말씀인가?


“내가 오늘 날 네게 명하는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면-”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떠나지 않는 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주님만 의지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네게 복이라”고 했습니다(시73:28).

하나님을 잘 섬겨 자여손 천대에 이르는 큰 복을 누리시는 복된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신5:10).














다락방으로 올라가라   사도행전 1장 12~14절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르시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행1:4~5).

마지막 승천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에 모인 제자들과 여러 형제들에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하셨습니다(행1:7~8).


이제 제자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주님의 제자들이 편안히 머물 수 있는 곳이 못되었습니다.

유대교적 차원에서는 출교가 기다리는 곳입니다.

정치적 차원에서는 황제숭배를 반대하는 반정부, 반 사회법으로 몰릴 수 있는 위험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다려야 하지만 그들은 마가라는 요한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유대인의 다락방은 어느 집이나 있지만, 마가의 집 다락방은 특별한 곳입니다.

그것은 마가의 집 다락방은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장소 마가의 다락방은 어떤 곳인가?


이 시간 우리함께 그들이 모였던 마가의 다락방으로 올라갑시다.


Ⅰ. 마가의 다락방은 예수님 최후의 만찬 장소입니다.


마가복음 14장 12절에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 예수님께서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마가의 다락방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세족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발을 씻기셨습니다(요13:4~5).

수건을 두르고,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는 것은 종이 상전에게 바치는 최상의 헌신자세입니다.


바울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도다”고 했습니다(빌2:6~7).

하나님이 인간으로 인간 세상에 오신 것이 하나님의 비하입니다.

그런데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겸손의 극치입니다.

비하의 극치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발 씻김을 받았다면, 그 제자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성만찬이 있었습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마26:26, 고전11:24).

식후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마26:28).


그 곳은 예수님의 구원의 언약이 있는 곳입니다.

허물의 가리움과 죄 씻음이 있는 곳입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여 질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 같이 되는”곳입니다(사1:18).

그 곳에다 우리의 죄 짐을 내려놓고, 허물의 누더기를 벗어 버리고, 사죄의 은총을 덧입어야 합니다.


Ⅱ. 마가의 다락방은 신약 최초의 교회입니다.


행 12:5절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빌더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간절히 기도하던 곳을 성경은 교회라 부르고, 그곳이 바로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왜 그곳이 교회인가?


1. 주님의 말씀이 선포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던 곳이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요20:21).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

하나님의 복음 메시지가 선포되는 곳이 곧 교회입니다.


2. 모임이 이었습니다.

본문 15절에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고 했습니다.

그곳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빌립, 도마와 바돌로메,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거기 있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입니다(행1:13). 여자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따라서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생존 시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수종들던 여인들이고, 예수님 사후에는, 예수님 몸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무덤에 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만난

여인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야,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야, 살로메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야와 예수님의 생전에는 예수를 믿지 않던 예수님의 아우들입니다(막3:30).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본문 4절 말씀에 “부활 후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도 제자들과 함께 모이시고, 부활 후에도 제자들과 함께 모이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마가의 다락방은 바로 그 모임의 장소였습니다. 교회는 모이는 장소입니다.

주일날 모이고, 수요일날 모이고, 새벽에 모이고, 저녁에 모이는 곳입니다.

모여야 힘이 생기고, 모여야 믿음이 자라고, 모여야 그들 가운데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3. 기도가 있었습니다.

본문 14절에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일치입니다.

성도와 성도가 마음을 같이하고, 남자와 여자가 마음을 같이하고, 가진 자와 없는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성도와 목회자가 마음을 같이 하여 한 목표를 향해서 전혀 기도에 힘쓰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4. 성령강림이 있었습니다.

행 2:1절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마18:20).

함께 모여 기도하는 마가의 다락방에 불의 혀 같은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는 부활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그의 영으로 다시 인간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이 불의 집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영, 성령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곳에 임합니다.


5. 기적의 체험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2:5절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빌더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군사 넷씩, 네 패에 맡겨 감옥 깊숙한 곳에 갇혀 있던 옥중에, 광채가 밝게 비쳤습니다.

한 천사가 자고 있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웠습니다.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손에 묶여 있던 쇠사슬이 풀렸습니다. 첫째 파수대를 지났습니다.

둘째 파수대를 지났습니다. 성으로 통하는 철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를 가둘 감옥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묶어 놓을 사슬은 없습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쇠사슬도, 옥문도 열리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지유함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고후3:17).

성도는 예수 때문에 영원히 자유한 자유인입니다.












옛 신앙의 길로 행하라  예레미야 6장 16~19절



성경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벧전4:7).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마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벧전 5:8).

우리는 지금 우리의 옛 신앙이 퇴색해 가고 있는 신앙의 위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19세기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과학과 물질문명! 인본주의적 철학사상, 유물론적

이데올로기 등 실로 외부적 여건이 좋지 않은 중에 창궐 하는 이단과, 기독교 신앙의 속화가 위기를 더욱 부추기고 있습니다.

특히 세상에 만연된 자유주의 신학 사상은 기독교 신앙을 침식하여 보수 신앙의

일대위기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종말이 가까운 지금, 기독교 신앙이 옛 초대 교회의 순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앙 운동이 바로 개혁주의 신앙운동인 것입니다.


기독교가 2000년이 경과하는 동안 여러 방면에서 여러 모양으로 유입된 잘못된

교리들을 원상으로 회복하자는 복고 운동이 곧 개혁주의 운동인 것입니다.

바울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골3:3). 우리가 새 사람의 옷을 입는 것은, 우리가 입은 것 위에 어떤 것을 덧입는 것이

아닙니다.

변질된 신앙, 변질된 형상을 벗어 버리고, 타락전의 최초의 아담의 형상, 창조주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복음은 시대에 뒤떨어진 부끄러운 복음이 아닙니다.

2천년 전 사도들이 전파하였고,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세상을 온통 뒤집어 놓았던, 바로 그 복음입니다.

본문은 옛적 길! 즉 옛 신앙은 선한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너희에게 평강을 주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평강에 이르는 옛 신앙의 길은 어떤 길인가?


Ⅰ. 옛 신앙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시편 14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기준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부정 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어리석은 자가 “하나님이 없다”고 추론할 때 하나님이 계신 것을 전제로 하여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단 성경 말씀의 특별 계시를 통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자연 계시만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삼라만상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반드시 계셔야 합니다. 힘은 생명체에서 나옵니다.

생명이 없는 곳에서는 힘이 나올 수 없습니다.

또 힘이 없으면 운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돌, 바위, 산.... 이것들은 무생물들입니다


그러므로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그 곳,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생물인 지구 덩어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구 덩어리가 자전을 하고 공전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그러면 이 거대한 지구덩어리를 움직이는 엄청난 에너지는 어디서 나와서 이 운동을 지속시키고 있는가? 이 우주에는 600억개의 은하계가 있습니다.

그들의 운행을 주장하는 법칙을 누가 만들고, 누가 컨트롤하고 있는가?

누가 산을 들어 올리고, 골짜기를 파고, 누가 바위를 조각하였는가?

누가 때를 따라 사계절을 나누고, 철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이 어느 날 밤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사파이어 보석위에 다이아몬드를 뿌린 것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노래했습니다(시 8:3).

이 모든 천하보다, 만물과 만상보다 귀한 인간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저를 생각하시고, 저를 권고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옛 신앙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지금도 살아계셔서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의 안고 일어섬을 감찰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옛 신앙의 믿음입니다.


Ⅱ. 옛 신앙은 성경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신앙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 말씀에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주전 16세기경 모세가 모세 5경을 기록하고, 다윗,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베드로, 바울 등 40여명의 기자들이 성경을 기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쓴 것은, 그들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의 성막과,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도 인간의 창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고 했습니다(출25:9).

“너는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성막을 세울지니라”고 하였습니다(출26:30).


역대상 28장 12절에는 “성신의 가르치신 모든 식양대로 성전을 건축하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과 성전은 1500여년의 장구한 기간동안 여러 사람의 손에 의하여 기록되었지만 교리, 윤리 구원 계획 시대 순서가 동일합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한 목표를 지향하고, 전체가 통일된 조화를 이루어 갑니다.


성경은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의 중심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사람의 심령을 판단하며, 우리의 죄 성을 드러내고 겸손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합니다 성경의 윤리는 가장 고상하고, 모순과 오류가 없으며, 누구에게나 적용하는 보편적 진리입니다.

성경은 사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대 계명으로 하고, 인간의 모든 문제를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행동뿐 아니라, 그 내적 동기와 사상까지도 추적하고

감찰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원리는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으리라”(요3:36).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이 명쾌한 명제를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것이 옛 신앙입니다.


Ⅲ. 옛 신앙은 예수만이 구원자임을 믿는 신앙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요3:4).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요3:16).


이렇게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으로,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유한한 것이

영원한 것으로, 추한 것이 영광된 것으로 다시 나는 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원인이 무엇인가?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인간 사랑입니다.


거듭나는 근거가 무엇인가?

“독생자를 주셨으니..” - 예수님의 내어줌,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것을 얻는 방법이 무엇인가? 믿음입니다.

“이는 저는 믿는 자마다...”


거듭남의 종국이 무엇인가? 영생입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임을 믿는 것이 옛 신앙입니다.

옛 신앙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피같이 붉은 죄를, 주홍같이 붉은 죄를 양털같이, 눈같이 씻음 받고, 먹 같은 검은 죄와 허물을 예수님의 의의 세마포로

가리움 받기를 소원하는 믿음이 옛 신앙의 믿음입니다.















신앙의 승리자가 되자 !  히브리서 3장 12~14절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반포하셨습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 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고 하셨습니다(출34:6~7).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싼타크로스처럼 주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천대까지 은혜와 복을 주시지만, 악한 자의 악은 3~4대까지 보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영생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을 결코 묵과하시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할 때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마18:21).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무한대의 용서를 말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땐가는 결산의 때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생을 이루어 가는데 절 때로 놓쳐서는 않 될 것은 무엇인가?

신앙의 승리자가 되는 길은 무엇인가?


Ⅰ. 구원 받을 기회를 잃지 말아야합니다.


본문 12절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떨어질까

염려하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3장 1절의 말씀에서 “천하의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은 이룰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습니다(고후6: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셨는데,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면 구원의 기회는 잃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매사에 기회가 있습니다. 그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낭패하고, 실패하고, 후회하게 됩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전3:2).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전3:4).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으며 말할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전3:7).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전3:8).

부모에 대한 효도도 그렇습니다. 올해 효도 못했으니 다음해에 효도하자, 가난해서 효도 못했으니, 부자 되면 효도하자! 그런데 그 부모님이 그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까?

그래서 주자는 “부모불효 사후회”-라고 했습니다.

살아 계실 때 효도 못하면 부모님 죽은 후에 후회하는 것입니다.

배움의 때가 그렇습니다. 중학교가면 공부하자 - 대학가면 공부하자 -

“소불근학 노후회” - 젊어서 공부하지 못하면 늙어서 후회한다.

- “불치원장 도후회” - 담장은 고치지 않으면 도적맞고 후회한다.

- “춘분경종 추후회” - 봄에 씨를 뿌리지 않은 사람은 가을에 후회한다.

- “취중망언 성후회” - 술 취해서 실언하면 깨고난 후 후회한다.

- “색불근신 병후회” - 절재하지 못하고 방탕하면 병들어 후회한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이 힘든 고비만 넘기자! 그 후에 봉사하고, 헌신도 하고, 충성도하자!

그러나 없어서 헌금생활 제대로 못하면 있어도 제대로 못합니다.

바빠서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면 한가해도 못합니다.

병들어서 신앙생활 못하면, 건강해도 제대로 못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여가를 선용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영혼의 문제, 구원의 문제를 붙들고, 사력을 다하는 영적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의 사자에게 매달리어 환도 뼈가 위골되는 야바크의 기도를 했던 것처럼 - 나의 모든 것을 전력투구하는 삶이 “브니엘”

-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만사에 기회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기회는 역시 회개의 기회입니다.

특히 죄 문제에 대한 회개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원점에서 조금 떨어졌을 때 기회를 잃지 말고, 회개하므로 원상으로 회복시켜야합니다.

우리는 다윗 왕에게서 좋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이 간음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살인죄를 짓게 되고, 그 죄악으로 인하여

자식이 아비를 모반하는 압살롬의 난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회개한 죄 가운데 용서받지 못할 죄를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의 문도 언제까지 열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 처녀 비유의 다섯 처녀처럼 때가 되면 문이 닫히고, 닫힌 후에는 부르짖고 두드려도 “나는 네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실 때가 있음을 명심해야하겠습니다.


Ⅱ. 강퍅하게 됨을 면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하게 됨을 면하라”고 했습니다.

강퍅이란 무엇인가? 경직된다. 굳어진다. 는 뜻입니다.

굳어지고 경화되는 것은 깨어지고 부서지고 터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이 강퍅하게 되는 것은 죄의 유혹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는 죄는 어디서부터 오는가? 의심에서부터 옵니다. 의심이란? “양쪽에서 줄을 매고 잡아당긴다.”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만약에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뱀의 말 사이를 오락가락한 것이 의심이요. 이 의심이 불신앙으로 변하고, 불신앙이 굳어지면 교만이 되고, 교만이 굳으면 고집이 되고, 이것이 굳어지면 권면도, 충고도, 은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굳은 마음이 되고, 끝내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고,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고, 의와 진리의 대적자가 되는 것입니다.


Ⅲ. 끝까지 견고히 잡는 신앙이 승리하는 신앙이 됩니다.


본문 14절에 “우리가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했습니다(고후4:16).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결심도, 사랑도, 믿음도 세월 따라 차츰차츰 변해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신앙은 변하되 날로, 날로 새롭게 변해야 합니다.

날로, 날로 선하게 변해야 합니다. 날로, 날로 굳세게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든든히 붙잡을 것은 내가 예수를 처음 만난 그 기쁨! 구원 받은

그 감격을 굳게 붙잡고 우리의 믿음이 세속에 오염되지 않는 초심의 순수성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신앙에서 승리하는 길입니다.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말씀의 전신 갑주를 입고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는 성도님 되시길 축원합니다.

가장 좋은 선물   누가복음 2장 8~10절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성탄의 밤에 목자들을 찾아오신 천사는 “무서워 말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라”고 했습니다(눅2:11).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란 무엇인가?” 복음입니다. 구원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소식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마1:21).

죄인에게 죄를 용서한다는 소식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엡2:8).

죄 용서 받고 구원 받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좋은 선물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Ⅰ. 가장 좋은 선물은 낡거나 해지지 않습니다.


연인들을 그렇게 감격하게 하는 장미꽃, 꽃다발은 하룻밤 지나면 시들어버립니다. 그윽한 향기와 고상한 자태를 뽐내던 국화도 하룻밤 서리에 꽃도, 잎도 시들어지고 맙니다. 황금이나 보석이 귀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되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기 때문에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갈릴리 풍랑 가운데서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시던 주님! 오늘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셔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슬픈 자를 위로하시는 주님!

오병이어의 기적의 떡을 먹여주시던 주님! 소경의 눈을 열어 주시던 주님!

죽은 자를 살리시던 주님! 2천년 전의 예수님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예수님이십니


유명한 학설도, 고상한 철학도, 세상을 휩쓸던 이념과 사상도, 세월이 가면 퇴색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2천년 전에도 예수를 믿어서 구원 받았습니다.

오늘도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행16:3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롬10:13).

이 지구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고, 훌륭한 교훈이 있어도 그것으로서 구원을 얻는 길은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행4:12).

구원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입니다.

이 세상에 훌륭한 의사가 있고, 좋은 약이 있고, 유명한 병원이 있어도 그것으로

영혼을 살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고 생명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요5:24).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예수 이름으로 눈을 뜨라!”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고침 받을 지어다!” “청년아 일어나라” “소녀야 일어나라!” “나사로야 일어나라!”

이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과 권세는 오늘도 여전히 병든 자를 일으키고 억압 받은 영혼을 자유케 하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홍해를 가르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Ⅱ. 가장 좋은 선물은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

우리가 주고받는 선물은 꼭 물질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것은 비물질적인 것도 있습니다.

물질보다 더 귀하고 중한 것이 있습니다.

1620년 9월 16일 메이후라워 호를 타고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떠난 70가구 102명의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고국과 형제들을 버리고, 신대륙으로 건너 왔습니다.

그들은 세상 것 다 버려도 예수 그리스도를 버릴 수 없어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왔습니다.

왜 그런가?

그들은 그들과 늘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하고 기도할 때만 나타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소음이 가득한 공장에서 일할 때에도, 논밭에서 땀 흘려 일할 때에도,

잠 못 자고 책과 씨름하는 공부방에도, 가정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가사 일을

돌볼 때에도, 직장에도, 사업장에도, 우리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계십니다.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욘2:2).

이사야 43장 1~2절에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언제나 내 곁에 계십니다.

사자굴에 던져져도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계셔서 사자의 입을 봉하셨습니다(단7:22). 풀무불에 던져져도,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계셔서 머리터럭 하나도 그을리지도 않게 하셨습니다(단3:27).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단7:23).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곁에 계십니다.

나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좋은 선물인 것 입니다.


Ⅲ. 가장 좋은 선물은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선물입니다.


목자들이 밤중에 양을 지키다가 천사들의 찬송을 들었습니다.

본문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서 요셉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찾아와서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귀한 보배, 기쁜 소식을 자기들만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선물은 함께 나누고 함께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귀한 선물은 함께 나누고, 함께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귀한 선물을 나누면 나눌수록 커집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많아집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더 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수행하라고 여러분의 건강을, 여러분의 가정을,

여러분의 사업과 일터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외치라! 이성을 너희에게 주셨느니라  여호수아 6장 15~21절



본문 6장 2절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16절의 말씀에는 “외치라 여호와께서 이성을 너희에게 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전승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반드시 통과해야만 가나안 중부로 향하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고 가나안은 여러 부족의 결속을 저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의 말씀에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이 오만한 여리고성은 이스라엘 백성의 통과를 거부하고 문빗장을 걸어 닫은 것입니다.


여리고성! 그것은 바로 저 천성을 향하여 믿음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성도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죄악과 세상 가운데 있는 모든 악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영전에서 승리하고, 저 천국을 쟁취하는 데는,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성을 필사의 힘을 경주하여 무너뜨려야 합니다.

일생을 통하여 싸워야할 대상이고, 반드시 이기고 승리해야할 대적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 홍해가 있고, 바로의 군대가 있고, 광야가 있고,

요단강이 있고, 여리고 성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장애와 난관이 있는 것입니다.

질병의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물질의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신앙의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애정의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자녀일 수도 있고, 사회적 환경일수도 있습니다.

천재지변일수도 있고, 우리 마음에 뿌리박힌 잘못된 습관과 죄악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장애와 싸우고 승리해야할 그리스도의 군병들입니다.

지금 사단의 세력이 요지부동의 철옹성 여리고 처럼 크고 강하게 보여도,

그것은 하나님의 콧김으로도 능히 무너져 내릴, 모래성인 것입니다.

그 성은 예수의 이름으로 외치기만해도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주신 여리성은 어느 때 완전히 무너져 평지가 되는가?

Ⅰ. 여리고 성은 최선을 다하는 자 앞에서 무너집니다.


본문 12절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 나니라”고 했습니다.

15절에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라고 했습니다.


왜? 성경이 이스라엘백성들이 일찌기 일어난 것을 기록하고 있는가?

우리는 성경에서 새벽에 일찌기 일어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22장 3절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라고 했습니다.

아침에 일찌기 일어났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즉각적인 순종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여,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했습니다.


여리고성은 비록 작은 도시국가였지만, 방어체제가 완벽히 갖추어진, 가나안의 중요 요새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공략하기에 쉽지 않은 성이였습니다.

비록 작은 성을 하루에 한 번 도는 어렵지 않은 일에도, 인간 편에서 성실과 최선을 다하는 준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1절의 말씀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공장의 기계는 계속 돌아가야 녹슬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자전거는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은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문설주와 문 인방에 기록하는 “쉐마”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를 하거나 헌금을 드리거나, 봉사를 하고, 허헌을 할 때나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의 여리고성은 우리가 최선을 다할 때 무너집니다.


Ⅱ. 여리고성은 믿음 앞에 무너집니다.


성경은 히브리서 11장 30절에서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라고 했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은 이스라엘백성의 믿음의 능력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철옹성 여리고가 문을 닫고, 버티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작전

명령은 얼마나 황당한 말씀인가?

“하루에 성을 한 바퀴 돌고, 엿새 동안 그리하고, 이레 되는 날에는 일곱 번 돌고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외치라, 그러면 성이 무너져 내리리라”입니다.


고고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여리고성을 한 바퀴 도는 데는 약 45분에서 1시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한 시간을 돌고는 그냥 성을 바라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에 한 바퀴 도는 것은 너무나 쉽고, 일곱째 날 일곱 바퀴 도는 것은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일곱 시간을 산비탈을 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왜? 하루에 열 세 바퀴를 돌지 않는가?

소리 질러서 무너질 성이라면 왜?

첫 날에 한 바퀴 돌고 소리 지르지 않았는가?

엿새를 돌아도 여전히 그대로 있는 성! 일곱 번째 날 일곱 번을 돌아도 그대로 있는 성을 보고도 그들은 “들레지”않았습니다(수6:10).

왜?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오직 “예만 있고 아니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고후1:19).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 20절에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고 했습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성은 믿음 앞에서 무너지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


Ⅲ. 협동 합력하는 신앙의 공동체가 승리합니다.


본문 12절에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서 행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에서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니라”고 했습니다.


여리고성, 공략작전은 군인이면 군인, 제사장이면 제사장

- 어떤 특별한 계층만 참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전체가 그 대열에 참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영전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즉 죄악과 싸우는 영적전투에는 우리들 모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무장한 자들은 행렬의 맨 앞에서 행렬을 이끌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법궤를 매고,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후군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따라가면서 병사들과 제사장들을 후원했습니다.


오늘 날 교회의 일도 믿음 있는 직분 자들은 대열의 앞에서 그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받은 자와 가르치는, 자들은 그들의 가운데서 그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는 앞서가는 지도자들을 후원하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가정의 일은 가족 무두가, 회사의 일은 사원모두가, 나라의 일은 국민모두가,

교회의 일은 성도모두가 힘을 합하고 합력 협동할 때, 여리고성이 무너짐같이

문제의 담 벽이 무너져 내리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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