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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종합편19

공 상희 2008. 5. 22. 16:26
 

행복한 가정, 행복한 자녀   에베소서 6장 1 ~ 8절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축복하시기를 가정이 복되고 왕성하고 창대케

되라고 축복하셨습니다(창1:26).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하므로 이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에덴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덴을 상실한 인간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작은 에덴,

가정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가정은 영적 오아시스요. 행복을 만들어내는 샘과 같은 곳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이상이요 꿈입니다.

가정이야말로 고달픈 인생의 안식처요. 사랑과 행복의 요람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가리켜 작은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는 천국을 소개할 때 가정의 질서와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아들로, 성령님을 모성과 같은 보혜사로, 주님을 신랑으로, 성도를 신부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정이야말로 천국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 가정의 어린이들이 어떻게 복되고 아름답게

자랄 수 있으며 우리들의 가정을 어떻게 행복한 가정으로 가꾸어갈 수 있는가?

성경은 그 방법과 해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Ⅰ. 자녀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교육이 우선되어야합니다.


잠언 22장 6절 말씀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마땅히 행할 길이 무엇인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가운데 최상의 선물은 무엇인가? 자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자녀는, 부모에 속한 자녀가 아닙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의 양육을 위탁받은 부모는 하나님의 뜻대로 자녀를 양육해야합니다.


어린아이는 무엇이나 주는 대로 받습니다. 그리고 받은 대로 나타납니다.

사랑을 주면 사랑을 나타내고, 믿음을 키우면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자신이 풍성해야합니다.

자녀를 가르치기에 앞서, 부모가 믿음 위에 바로서고, 부모가 말씀 위에 바로서고, 부모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가 이웃을 사랑할 때, 그 자녀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 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잘 양육하는 길은 하나님의 교양과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Ⅱ.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 6절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는 가정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요. 방향을 제시하는 등대입니다.

부모는 가정의 기둥이요. 가정의 대들보입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가정이라는 왕국의 전제군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용서와 사랑과 안식을 무한정 공급하는 원천이고, 그들에게 든든함과 편안함과 소망과 힘을 공급하는 원천입니다.

자녀가 죽을죄를 짓고도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 받을 수 있는 곳은

오직 가정뿐입니다.

설사 그 자녀가 국법을 어긴 죄가 있어도 부모자식 간에는 불고지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오직 사랑의 법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우리 자녀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가?

이해의 결핍에서 오는 대화의 단절입니다.

어른과 아이들이 말이 통하지 안는다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파스테르나크의 “의사지바고”에 “사람은 살기위해서 태어난 것이지 사는 준비를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어린이는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기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어린이의 세상에서 살도록 배려해야합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어른들의 가치기준으로 자녀를 키우게 될 때 자녀는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같이 호흡을 하고, 그들의 눈으로

보려고 하고, 그들의 귀로 들으려고 하고, 그들의 가슴으로 느끼지 않으면 전정한 자녀교육의 성과를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맹목적인 사랑이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과잉보호를 받는 다든지 과잉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자녀들이 잘못되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절제된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지나치게 사랑하게 되면,

그 자녀들은 자기는 사랑은 받는 사람이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되는 사람 인줄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장한 후에도 남을 사랑하는데 아주 서투른 사람이 됩니다.

이러한 병폐가 오늘 이 사회에 사랑이 메말라가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자녀들이 부모를 통해서 어떤 모습을 보기를 원하는가?

어떤 부모의 모습이 자녀들에게 좋은 감동을 줄 수 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역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부모가 손잡고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부모님들이 경건히 예배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하나님 사랑, 부부사랑의 본을 보일 때 우리 자녀들이 사랑 안에서

행복하게 잘 자라날 것입니다.


Ⅲ.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합니다.


본문 6절 말씀에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교양이란 행동을 통한 훈련을 말하고, 훈계란 말을 통한 훈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주님의 뜻에 맞는 행동과 말씀으로 키우라”는 뜻입니다.

부모의 행동 하나, 하나는 어린아이들에게는 산교육이 됩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선생은 부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자식이 누구한테 배우겠습니까?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만약 내 자식이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된다면 어떻겠는가? 내가 믿음 없는 삶을 살았다면 내 자식이 믿음 있는 되겠는가?

내 자녀는 나의 모습을 그대로 닮는 삶을 살고,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들에게 믿음과 착한 양심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믿음과 죄악은 유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의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딤후1:5).

우리들의 귀한 자녀들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물려줄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신앙을 우리들의 귀한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는 지혜로운 부모가 되시길 바랍니다.

어버이의 사랑   에베소서 6장 1~4절



송강 정철선생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훈민시 16수를 발표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어버이 살아신제 섬길일 다하여라! 지난후엔 애달프다 어찌하리! 평생에 고쳐 못 할 일 이 뿐인가 하노라!”하였습니다.

제국을 두루 시찰하던 공자가 어느 날 슬피 애통하는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공자가 “당신은 어찌하여 그렇게 슬피 울고 있는가?”라고 물으니

“제가 젊어서 학문을 좋아해서 천하를 주유하고 늦게 귀향해 보니 양친은 노한으로 이미 세상을 떠난 후 였습니다. 수욕정 풍부지요 자욕양친부대(樹欲靜風不止, 子欲養親不待)니 - 부모를 잃은 불효 때문에 한탄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잠언 23장 22절에 “너 낳은 아버지께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여,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하라”고 했습니다(잠23:25).

본문 1절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나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효도는 윤리에 속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효도는 윤리에 속한 것이 아니고 계명, 진리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3절의 말씀에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경외”라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는 심리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은 너희 부모를 하나님께 대하 듯 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버이 주일을 지키면서 기독교의 효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기를 바랍니다.


Ⅰ. 기독교의 효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계명입니다.


본문 2절 말씀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공경한다는 히브리말은 “카베드” 무겁다는 뜻이고, 명사의 뜻은 “간”을 말합니다. 이 말은 부모를 섬기는데 간처럼, 생명처럼, 세상의 어떤 것 보다 귀하고,

중하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계명이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누구나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은 어겨서도 안 되고 소흘히 대하여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열 가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1계명에서 4계명가지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켜야할 대신 계명이고,

5계명에서 10계명가지가 인간이 세상에 대하여 지켜야할 대인계명입니다.

그 대인 계명의 첫 번째 계명이 부모 공경의 계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5계명이 되는 부모 공경이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하는 계명 가운데

제일 큰 첫째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55장 11절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부모 경외는 어길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지엄하신 계명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경외 없이 하나님 경외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요일4:20).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그 부모를 사랑할 수 있고, 부모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낳아 주신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Ⅱ. 효도는 축복이 약속된 계명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습니다.

본문 1~3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적극적인 계명과 소극적인 계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소극적인 계명은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1,2,3,6,7,8,9,10계명들입니다).

소극적인 계명은 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 도적질 하지 않으면 되고, 살인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적극적인 계명은 “하라”는 계명입니다.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적극적인 계명은 적극적으로 힘써 행해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라 하셨으니 반드시 지키고,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으니 반드시 공경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효도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적 계명이 아닙니다. 반드시 자식은 부모를 공경해야하고, 성도는 주일을 성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안식일 계명을 주시면서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사58:13~14).

그런데 분명히 제5계명에는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습니다(출20:11).

본문의 말씀에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축복이 약속된 계명! 이 축복의 계명을 잘 지키시고 약속된 부귀와 장수의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Ⅲ. 어떻게 부모를 공경할 것인가?


부모공경은 살아계실 때 효도해야합니다.

그리고 자녀의 부모에 대한 효도는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첫째, 신효(身孝)입니다. 부모님을 편안히 모셔야합니다.

부모님이 쓰시는 생활용품, 의식주 문제, 부모님의 용돈문제 등에 부족함이 없게

해야 합니다.

둘째, 심효(心孝)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려야 합니다.

공자는 제자 자하(子夏)가 “선생님 효라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효는 얼굴빛이야”라고 대답했습니다.

부모 앞에서 내 얼굴빛을 편안하게 가짐으로 부모님에게 심려를 끼쳐드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부모님의 육신을 편안하게 모셔도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리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셋째, 영효(靈孝)입니다. 효도 중에 가장 큰 효도가 역시 영효입니다.

육신이 건강하고, 편안하여도. 그 영혼이 구원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식의 불효입니다. 또한 믿는 부모를 둔 사람은 부모의 뜻을 받들어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효도 중의 효도입니다.

넷째, 부모사후의 효도입니다(死後孝道). 솔로몬은 다윗의 사후에 다윗의 유지를 받들어 솔로몬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잠언 22장 28절 말씀에 “네 선조의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이룩하신 신앙의 업적을 계승발전 시키는 것이 돌아가신 부모님께 대한 효도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신앙의 유산을 자자손손대대토록 아름답게 물려주는 부모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의 주권적 명령   마태복음 28장 16 ~ 20절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 땅에,

복음을 들고 첫 발을 내딛었던 아펜셀러에 의하여,

한국선교의 문이 열린 후, 한국교회는 선교 제 2세기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2세기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각오와 결단으로서 선교 2세기의 출발을 힘차게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일찌기 하나님께서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셈족의 후손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명하시기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고 하셨습니다(창12:2).

이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시는 뜻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의 선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Missio Dei).

다시 말해서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는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살펴보아도, 예수님께서는 전도, 교육, 봉사의 세 분야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 말씀에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메” -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의 교육에 힘쓰셨습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여” - 전도에 힘쓰셨습니다.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 봉사의 사역입니다.

이 세 가지가 예수님 공생애 사역의 중점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관찰해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은 역시 전도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마4:17).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도 성경이었습니다.

병든자를 고쳐주시고 대중들을 먹이신 것도 그 근본정신이 이생의 구제와 육신상의 복리가 목적이 아니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여야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냄을 입었노라”고 말씀하심으로(눅4:43) 예수님의 성육신은 인간의 영혼구원에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여 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고 감람산 꼭대기에서 열한 사도와 500여 형제에게 주신 예수님 최후의 대사명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금년도 선교주일의 메시지에 대신하고자합니다.


Ⅰ. 가라(G0)는 명령입니다.


본문 28장 1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모든 족속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각 나라와 방언과 족속들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곧 제자들의 선교영역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입니다. 이는 가까운 가족친척 이웃으로부터 시작하여 땅 끝까지입니다.

내나라 내 민족, 이방의 민족까지입니다.

복음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은 만민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어디든지 가야합니다.

이유는 이 땅위의 모든 인류는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Ⅱ. 제자를 삼으라(Make Discipler)는 명령입니다.


본문 19절에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제자를 삼는다는 “마테튜오”는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학습자, 생도로서 명부에 올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선교의 두 번째 명령은 완전히 이적을 시키는 호적변경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천당교인을 만들라는 명령입니다.

그렇게 등록시켜야할 사람이 “모든 족속 중에” - 많이 있단 말씀입니다.


Ⅲ. 세례를 주라(Baptize)는 명령입니다.


본문 19절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례를 준다”라는 것은 “씻다, 잠그다, 목욕하다, 뿌리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 예수의 보혈로 씻어주고, 그 보혈에 잠그고, 그 보혈로 목욕시키고, 그 보혈을 뿌려 주라는 말씀입니다.

씻기고, 잠그고, 목욕시키고, 뿌려 준다는 것은 곧 “인을 친다”는 것입니다.

인을 친다는 말은 소유의 확보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로 확보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자들의 권위로서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인을 쳐서 하나님의 소유를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Ⅳ. 교훈하라(Teach)는 명령입니다.


본문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고 했습니다.

“가르친다”는 디다스코는 “자라게한다, 성장시킨다” 즉 양육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선교명령에는 4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가야하고, 등록시켜야하고, 세례를 줘야하고, 영화에 이르도록 양육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선교 명령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발하신 명령입니다.

우리는 이 지엄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지난 한 해 동안도 37명의 교단 파송 선교사들을 통해서 217개 선교지의 교회들에서 15,000여명의 주님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또한 교단산하 교회들은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이 사역을 쉬지 않고 힘 있게 전개해 나갈 것입니다.

이 성스러운 사역에 동참하는 복스러운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Ⅴ. 교회에 주신 사명에 상급이 있습니다.

본문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명을 감당한 충성스러운 종들에게 주시는 축복은 임마누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있는가?

그래서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고 했습니다(빌3:14).

히브리서 11장 26절엔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받습니다. 그러나 상급은 행위 따라 받습니다.

상급은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고, 한 일 따라 받는 것입니다.

많이 일한 사람에게는 많이 주시고, 귀한 일 한 사람에게는 귀한 것을 주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대사명의 말씀을 받고 충성한 종에게 주시는 상급은 무엇인가?

다니엘 12장 3절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때 존귀와 영광이 있습니다.

전도하는 교회가 부흥하고, 선교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전도하는 성도를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임마누엘 동행하여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우리들의 상급 중의 상급입니다.

승리의 깃발을 올려라  누가복음 19장 28~40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소박한 퍼레이드는 2000년 전 벳바게에서 예루살렘까지 이어졌고,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타보지 않은 작은 나귀새끼를 타시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백성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퍼레이드에는 백마도 없었고 황금마차도 없었지만, 주님의 제자들이

겉옷을 벗어 나귀 등에 얹고,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지나가시는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서 “호산나 만세”를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퍼레이드는 장차 십자가를 통하여 사탄을 물리치시고

“다 이루었다”고 승리를 선포하실 최후의 승리를 예표하는 행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축복스러운 LG 시대의 마지막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지난 14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 00교회를 축복하셔서 교회사에 유례없는

부흥의 역사와 축복을 교회와 우리 성도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2000년 전 예수님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의 감격을 되새기면서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제 2기의 하늘문교회 시대의 개막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의 감격을 안고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축복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주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하는데 온 힘을 경주할 것입니다.

누가 이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

누가 승리의 깃발을 높이 올릴 수 있는가?


Ⅰ. 승리자가 되는 길은 승자의 확신과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당신이 평화의 왕이시고 메시야가 되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했습니다(눅 18:32).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님께서 메시야 되심을 만방에 공개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시면서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은 나약한 패자의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승자입니다.

계시록 6장 2절의 말씀처럼, “이기고 또 이기는 삶”이 크리스천의 삶인 것입니다. 마귀 사탄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죄와 죽음을 이기는 승리자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성도의 삶은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죄악과 싸워 이기고,

세상과 싸워 이기는 승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으므로 오늘 우리도 승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으므로 그를 믿는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당당해야 합니다.

힘 있고 능력 있고 담대한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나폴레옹이 하루는 말을 타고 가다가 고삐를 놓쳐서, 하마터면 낙마할 뻔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한 병사가 잽싸게 몸을 날려 고삐를 붙잡는 바람에 위기는 무사히 넘겼습니다. 나폴레옹은 감사하며 “대위 수고했네.”라고 치하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병사는 장교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사병막사로 가지 않고 장교막사로 가는 것입니다.

사병식당에서 식사하지 아니하고 장교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입니다.

장교들이 “너는 왜 사병이 장교 틈에 끼어드느냐” 하니까 “나는 나폴레옹 장군이 대위로 임명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나폴레옹은 그에게 대위 계급장을 달아주고 대위로 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승리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부활합니다.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드시기 바랍니다.


Ⅱ. 열심 있는 사람이 승리의 깃발을 올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백성들과 주님의 제자들은 어떤 개선장군의 퍼레이드보다 더욱더 뜨거운 환영을 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예수님의 나귀 위에 얹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다 깔았습니다.

종려나무가지를 베어서 흔들면서 “호산나”를 목청껏 외쳤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열심히 믿어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이나 부정적인 사람이나 냉소적인 사람이나 비판적인 사람이나

소극적인 사람은 이 축복스러운 대열에 참예할 수 없습니다.


옷을 벗어서 길에다 까는 열정! 열심을 품고 주를 따르는 신앙인이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승자는 항상 일을 만들고 열심히 힘써서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승리자의 공통점을 열심입니다.

자동차 엔진은 가솔린이 탈 때 에너지를 얻습니다.

열정이 불탈 때 인생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에너지를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생활과 여러분의 사업도 가정생활도 열정을 가지고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봉사도, 전도도, 선교도 열정을 가지고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합니다(롬 12:11).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을 품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정상을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Ⅲ. 승리자는 방해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39절에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눅 19:40).

항상 좋은 일에는 사탄이 역사합니다. 세상 말에도 “호사다마”란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승리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방해물을 이겨야 했습니다.

누가복음 18:35에는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을 지나가실 때 소경거지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께서 머무르시고 명하여 “그를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8:43). 소경 바디매오는 승리하였습니다.

승리자에게는 언제나 부정적인 세력이 따릅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것이 세상법칙입니다.

그러나 승리자는 방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승리자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실패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찬송가 503장은 “이 풍랑 인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승리자는 방해자를 딛고 승리의 깃발을 높이 올리는 사람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창세기 35장 1~ 7절


여기 벧엘을 향하여 떠나야할 나그네 인생이 있습니다. 그는 야곱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벧엘에서 시작하여 벧엘에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간교하고 탐욕스러운 야곱이 약속의 자녀로 부름 받은 곳이 벧엘입니다(창28:13~15). 30년의 세월이 흐른 후 하나님의 축복을 다시 확인한 곳이 벧엘입니다. 쌍둥이 형 에서의 장자권과 축복권을 도적질한 야곱은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하란 밧단 아람의 외가집으로 허겁지겁 도망길에 올랐습니다.

어느 한 곳에 이르러 해가지고 그는 돌을 주어 베개하고 잠을 청했습니다.

그 밤에 야곱은 사닥다리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사닥다리의 끝이 하늘에 닿았고, 주의 사자가 그 사닥다리를 오르락 내리락 하였습니다.

본즉 그 꼭대기에 여호와께서 서계시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창28:12~15).

야곱이 잠이 깨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나님의 문이로다.”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베개 했던 돌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꿇어 엎드려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이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창28:20~22).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서원을 받으시고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야곱을 축복하시되 아내를 하나나 둘을 주시지 아니하시고, 네 명이나 주셨습니다. 자녀를 둘이나 셋을 주시지 아니하시고, 열한 자녀를 주셨습니다.

먹고 입을 것만 주시지 아니하시고, 큰 부자가 되게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20년 동안 하란에 주저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야곱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란의 아들들의 질시를 통하여 하란을 떠나게 하십니다.

하란을 떠난 야곱은 세겜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10년 동안 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야곱의 딸 디나의 강간사건을 통해 세겜을 떠나게 하십니다.

벧엘에 가야할 야곱은 결코 세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하십니다(창35:1).


“벧엘로 올라가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야곱이 경험한 벧엘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어떠한 연고로 그 벧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잊고 살아왔다하더라도 이 시간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벧엘을 향하여 축복의 길을 떠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Ⅰ. 신앙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하나님이 나와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고 먹을 양식과 옷을 주사 나를 평안히 아비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창28:20~22).

그러나 성경에 20년 동안 야곱이 하나님께 제사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심으로 엉거주춤 하란에 머물러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란에 먹을 것이 풍족하고 입을 것이 풍족하고, 아내와 자식이 많고,

재물이 많아도 야곱은 하란에 머물러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야곱은 하란에 살아야할 사람이 아니고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섬겨야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아내를 주시고

자녀를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거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그 이외의 것은 수단이요. 방법인 것입니다.


혹시 오늘 벧엘을 찾는 길에 풍요로운 하란이나, 편안한 세겜에 머물러 있는 분은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일어서시는 성도님 되실 바랍니다.

야곱이 만났던 파란 만장한 환란과 고난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결과 였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Ⅱ. 예배를 회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본문 1절에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단은 응답이 떨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단은 기적이 임하는 단입니다. 하나님의 단은 축복이 떨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단을 쌓기 위해서 벧엘로

올라가는 사람은 “먼저 이방신상을 버리라”고 했습니다(창35:2).


이방신상을 버리는 것은 영혼을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옷을 바꿔 입으라”고 했습니다. 삶의 패턴을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벧엘로 가는 데는 라헬이 친정에서 훔쳐온 드라빔을 버려야했습니다.

쉬고리 걸이 우상의 상징물을 모두 버려야합니다.

그들은 그것들을 “세겜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뭍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신앙개혁 운동이었습니다.

오늘 벧엘을 향하여 올라가는 성도는 물질이란 우상을 버려야합니다.

명예라는 우상을 버려야합니다. 자식, 남편 사업 - 하나님 보다 귀히 여기는

모든 것을 땅에 묻고, 벧엘을 향하여 떠나야합니다.


Ⅲ. 벧엘로 가는 길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본문 5절에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 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크게 보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잠언 16장 7절에서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케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벧엘로 올라갈 때, 하나님께서 라반의 분노를

잠재우셨습니다.

에서의 원한을 녹이셨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벳 속에 들어가서도 물고기 밥이 되지 않고 바닷가에 토해내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자의 입을 봉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의뢰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단7:2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벧엘을 향하는 발걸음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체험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