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선지서

말라기의 저주와 십일조(말 3:6-12)

공 상희 2007. 1. 23. 15:25
말라기의 저주와 십일조(말 3:6-12)  

오늘 우리 한국교회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십일조에 관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함께 읽었습니다. 말라기서 강해 첫 시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미 여러차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 대개의 신자들이 말라기서 하면 가장 먼저 십일조를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 뿐 아니라 십일조를 강조하는 말들에서 가장 흔하게 드는 성경구절이 바로 이 본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에 되어져 있는대로 풀어서 십일조를 설명한다는 것이 제게 있어서는 대단히 부담스런 일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여러 설명들을 앞세워 십일조를 해야한다는 결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되어지는 모든 말들을 여러분들이 혹 잘못 듣고 십일조를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던가, 또는 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속단해서 십일조에 관한 열심이 사라진다면 이 강해는 상당한 비판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 여러분 앞에 이 본문을 풀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결론은, 오늘 일반적으로 강조되는 십일조에 대한 말들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말라기서를 중심에 놓고 보면 더 더욱 그렇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말라기서에 언급된 십일조에 관한 말씀은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십일조 헌금을 바치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 되어진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서 십일조를 말할 때, 대개는 이 본문을 들어서 십일조가 성도의 본분이니 또는 의무니 하는 여러 말로 강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다시 말씀드려서 이 말라기서에 되어져 있는 말씀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 즉 복음신앙을 하는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부분을 그렇게 보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목소리가 이 시간 대단히 작은 소리로 밖에는 취급되지 않을 것입니다만, 여러분들은 누구의 말을 듣기보다는 스스로 성경을 깊이 보셔서 올바른 판단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주변 이야기를 좀 하면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저의 동기 목사님들 모임이 있어서 참여했었는데, 여러 환담 가운데서 가장 문제가 된 관심사가 목회상에서 성도의 수가 많은 것, 교회당을 얼마나 크게 지었는가에 관심들이 집중되어 있더군요. ..


 그 대화 중에 어느 여목사님에 대한 말이 나왔는데, 그 여목사님이 몇년전 강원도 어디에 소사육하던 자리를 마련해서 거기에다 기도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근간 그 기도원이 크게 부흥되어서 요즘은 엄청나게 큰 건물을 짓고 있다 하더군요. 소사육하던 논 가운데 땅이니까 상당히 넓겠지요.


 어쨌든 요즘은 그 여목사님이 갑자기 유명해져서 외국에도 자주 불려 다닐 만큼 높아졌다고 모두 부러워들 하더군요. 그 뿐아니라 어제 저희들 모임이 낮 12시에 있었는데 이미 아침부터 그곳에 들렀다 오신 목사님들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화제가 그렇게 이루어졌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어느 목사님은 그 여목사님을 평가하기를 “하나님께서 귀히 쓰는 종이다” “능력의 종이다” 라는 평가로 열을 올리는가 하면, 또 어떤 목사님은 여자가 목사라는데 대단히 부정적인 시각에서 평가를 하고, 또 어떤 목사님은 기도원이 사단의 온상이라는 등, 그야말로 저마다의 견해들을 피력하더군요.


 그런 여러 말들이 오가는 가운데서 제가 느낀 것은, 누구든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더라는 점입니다. 자기의 생각이 높든지 낮든지 옳든지 잘못되었던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과 판단만이 절대적이라는 것과 역시 교회가 얼마큼 크냐 작으냐 하는 것이 목사들 세계에서 최대 관심사이고, 따라서 교회가 작으면 능력이 부족한 목사이고 그러한 목사의 의견은 별 볼일 없는 말로 무시해 버리고들 마는...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목사님 자체가 미자립 실정에 있으면서도 생각들은 그렇게 하더라는 것을 보며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목사님들과의 대화에서, 어느 조그만 한가지에도 의견이 좁혀지지 아니할 뿐더러 방금 앞에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절대 옳다고 주장하는 입장에 있으니 그런 자세와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현실에서...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줄곧 말씀드려 오는 복음의 믿음으로서만이 구원에 이른다는 말이나, 그와 관련해서 율법에 관한 설명이라던가, 또 오늘 이 쯤에 와서 드리고자 하는 십일조에 관한 말들이 그런 목사님들에게 과연 어떻게 들리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서론이 좀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만, 모두 저를 보시면서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그 기도원은 저도 수년전 가 보았었는데 그 곳에서 되어지는 내용은 요즘 흔하게 되어지는 소위 귀신론에 편승한 그런 말이더군요. 즉, 머리에 안수하면 귀신이 나간다던가, 병이 낫는다던가, 아니면 방언이 터진다던가 그야말로 제가 늘 비판하는 그런 잡술에다 성경 말씀을 다른 이들 보다는 좀 많이 끌어들이는... 그래서 얼핏 들으면 좀 지적인 듯한 느낌을 주는... 그리고 소위 한국교회의 저급한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능력이라고 보는 그러한 것을 겸비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스타일의 사람이고 그런 분위기의 기도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날 모임에서 그 기도원을 평가할 때 귀신론에 유사한, 하여간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한 스타일이였다는 것을 느낀대로 한마디 했더니, 이 말에 모두가 남을 함부로 평가하면 안 된다 이렇게 제지를 하더군요. 그러면서 역시 앞에서 말씀을 드린대로 기도원을 개원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큰 건물을 짓고 외국에 드나들고 또 기도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분명히 능력의 종이라는 식으로 말들을 하더군요. 예를 드린다는 것이 너무 길어진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본론으로 들어 가겠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절대 움직이지 않는 것 중 십일조와 십계명, 더 나아가 성수주일이 있습니다. 물론 그 외 여러가지 즉, 사도신경이라던가 삼위일체설이라던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한 것들은 교리적인 논제에서 되어지는 복잡한 부분들이고 실제 현실에서는 십일조와 십계명, 성수주일, 이 세가지가 한국교회의 구조상 절대적 요건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그 중 십일조 부분을 살펴보면, 대개가 오늘 읽은 본문을 들어서 강조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십일조를 말씀하기 위해서 쓰여진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교회에서 강조하는 십일조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저와 같이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도처에 있습니다만 아직은 목소리가 작은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십일조와 십계명, 성수주일에 이견을 제시하면 곧바로 이단시비에 말리게 됩니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 이 말라기서 3장, 십일조에 관한 말씀을 드려야 하는 처지에 제가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 귀를 기울여서 조심스럽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질문부터 하겠습니다. 지금 이 강해를 듣는 여러분들의 마음 자세는 어떠한지요? 그것부터 점검을 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오늘 주제가 되어질 십일조에 관한 관심도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


 성경공부 한다 하니 그저 막연한 입장에서 참여하신 것인지..? 아니면 이 부분에 관해서 지대한 관심을 두고 올바른 해결과 정의를 받고자 하는 그러한 입장에서 참여를 하셨는지요..? 만약 여러분들이 아무것도 생각지 않으신 입장이라면 제가 여러분들의 판단을 환기시키기 위해 한국교회의 되어진 여러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번거러움이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자칫 저의 말을 비판조로 들으시거나 더 나아가 십일조에 관한 이 강해를 듣고 앞으로 십일조를 안 내도 된다던가, 또는 내지 말아야 된다던가 하는 쪽으로 오해하실수 가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혹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시면 필히 질문을 하셔서 다시 설명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강조 드립니다. 제가 지금 성경을 들어서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말라기서에서 되어져 있는 십일조에 대한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고, 또 오늘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십일조, 즉 이 말라기서를 인용해서 하는 말, 이런 말들이 과연 이 말라기서에 되어진 말씀과 일치하는가? 하는 판단을 여러분들 스스로가 가져야 한다는 목적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서 자칫 구사되어질 수 있는 인색을 오늘 이 말씀을 듣는데서 합리화시킨다던가 하면, 과거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기득에 사용한 것과 다름없는 똑같은 입장에 여러분들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들이 다니시는 교회에서 십일조에 관한 요구를 받고 있다던지 또는 십일조를 열심히 하고 있다던지 할 때는 이 말씀을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다니시는 교회에서 십일조를 강조한다면.. 그러한 교회에 다니는 중이라면 그 교회에서 말씀하는 대로 따르시길 바랍니다.


 한가지 질문을 더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동안 십일조 강조를 받을 때, 오늘 이 본문을 들어서 하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앞에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오늘 우리 한국교회 실정에서 십일조는 손대기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십일조에 관한 한 평신도이든지 지도자들이든지 간에 바치는 것이 의무라 말하고 또 대개는 그렇게 받아 들이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모름지기 여러분들도 십일조를 그러한 입장에서 해 오셨을 것이고, 따라서 그동안 십일조에 대한 강조를 분명히 이 말라기 3장에 되어진 말씀으로 받았을 것입니다. 즉 십일조를 안 내거나 못 내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는 이런 말들로.. 사실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 흔하게 되어지는 말 아닌지요?


 어쨌든 그런 말들이 타당한 말인지를 생각해 보시고 하셨는지요? 아니면 그도 저도 생각지 않고 했는지요? ..그에 대해 그동안 마음에 아무런 도전도 없었던가요? ..내가 십일조를 왜 해야 되는지? 또 십일조가 너무 지나치게 강조된다던가 하는 이런 생각들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흔히 듣는, 돈 없어서 예수 믿기 힘들다는 말, 여러분들은 해 보신 적 없는지요? 그런 생각 한 두번쯤 했었다면, 그리고도 십일조에 관한 부분을 한번 연구해 보겠다는 생각들을 안 해 보았습니까? 지금 저희 교회에서 십일조 하시는 분은 손 좀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


 십일조를 안 하시는 분이 더 많군요. 십일조를 못하시거나 안 하시는 분은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그동안 십일조에 관한 말을 많이 해 왔습니다. 그래서 하면 안 된다 생각해서 안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안 해도 된다 생각해서 안 하셨습니까? .. 그도 저도 아니면 아주 높은 차원에서.. 그것을 모두 넘은 차원에서 못하거나 안 하셨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좀 더 쉽게 말해서 자유함을 얻어서 안 하신 입장인지요? 그렇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모름지기 그렇다면 제가 지금까지 드려 온 말씀을 자기 인색에 합리화시킨 것입니다. 제가 수년 동안 이 십일조에 관한, 이 뿐아니라 모든 연보에 관해서 말씀을 드릴 때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십일조라든가 하는 그런 계산으로 연보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 전체가 하나님 것이다. 내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드려야 할런지 우리는 참으로 부족한 입장에 있다. 따라서 연보든 십일조든 그런 신앙적 차원에서 해야 된다. 의식적으로 하는 연보나 ‘십의 일은 하나님 것이다’ 라는 입장에서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연보정신이 아니다. 내게 주신 생명이 너무나 감사하고 고마워서 그 시시각각 주어지는 감사한 마음으로서 해야 하는 것이다. 결코 ‘십의 일은 하나님 것이다’ 라는 식의 계산은 있을 수 없다. 성숙한 신자라면 마땅히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교회는 여러 성도들이 모이고, 또 여러 일들을 해야 하니까 그런 입장에서 성심 성의껏, 말 그대로 마음에 감동되어지는 대로, 그 액수가 얼마가 되던지, 그야말로 자신의 환경과 여건을 고려해서 십의 일이 되든지 혹은 그에 못 미치던지, 또는 십의 십이 되던지 간에 자율적인 입장에서 드려야 된다는 말씀을 줄 곧 드려 왔습니다.


 사실 신앙이 성장하기 이전에는 연보에 넉넉함을 보인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계속적으로 인색이 들어오고, 더 나가서 자기 현실에서 쓸 일이 계속적으로 생기고... 수입은 시원치 않은데 말씀이죠.

 또 언젠가는 이런 말씀을 드린적도 있었습니다. 수입보다 씀씀이가 헤프면 죽는 날까지 돈은 모자란다는... 어쨌든 자신이 한 주일 동안에 얼마만큼 연보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가도 막상 주일쯤 되면 이리저리 다 쓰게 되거나 아니면 인색이 들거나... 이렇게 되다 보니 연보에 관한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여기에다 더 어려운 것은 연보를 자신의 신앙차원에서 하라 할 때, 사실 어떤 때는 연보액수 정하기가 어려울 때가 간혹 있기도 합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돈 계산이 발발한 인색한 사람들은 자율이라는 것이 더 부담스러운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차라리 십의 일이면 일, 아니면 대략 얼마 정도, 이런 식으로 말하면 쉬울텐데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거듭나기 전에는 그런 어려움에 있게 됩니다.


 때때로 어떤 이들은 연보를 얼마나 하면 좋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때에 저의 말은 “대략 수입의 십분의 일 정도를 생각하면 좋지 않겠는가?” 라고 답변해 줍니다. 왜냐하면 연보 액수를 묻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계산이 설정되어 있는 중에, 즉 인색의 속성에서 묻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답변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김권사님의 말씀] “저는 이 교회 오기전 부터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제 마음에 은혜가 되는대로 했었는데, 지금 이 교회로 와서 십일조에 대한 말을 새롭게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에는 제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말씀하는대로 성경이 그렇게 보아지더군요. 어쨌든 저는 십일조는 신자의 당연의무라고 생각하고 있고, 따라서 십일조를 내야 마음이 편합니다. 그리고 십의 일 뿐 아니라 십의 십 모두가 하나님 것이라고는 생각하면서도 저의 경제여건이 어렵기 때문에 저로서는 십의 일, 그 이상은 바치지 못하겠더군요”


 예~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대개는 자신의 경제에 따른 어떤 계산이 있겠지요?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지금 권사님 같은 경우는 인색해서 그렇습니다. 이 말에 오해는 마시고 귀담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 십일조를 철저히 하고 있다는 말은, 십일조에 대한 강조를 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가 신앙이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다른 연보는 못한다 할지라도 십일조만은 철저히 한다는 것이 언뜻 신앙이 좋거나 높은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십일조를 철저히 계산하는 것은 지독한 인색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 할 때 자동적으로 ‘십의 구는 내 것’이라는 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설령 자기 자신이 양심적으로 ‘십의 구가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결과는 그렇게 됩니다. 또다시 말씀드려서 ‘십의 일이 하나님의 것’ 이라는 계산을 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인색과 불신앙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높은 신앙처럼 위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죠. 어쨌든 일반 연보도 자율적으로 못하는 사람이 십일조만은 의무적으로 했다면 더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말을 이해하기엔 쉽지 않을 것입니다만, 십일조를 바치면 마음이 편하다는 것은 결국 그런 계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권사님께서 십일조를 내는 것이 신자의 당연의무라고 생각한다 하셨는데.. 그 당연의무라는 것, 권사님 스스로 아셨습니까? 아니면 누구에게 듣고 아셨습니까?


 모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누구에 의해서 십일조가 신자의 당연의무라는 것을 아셨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입니까? 아니면 누구에 의해서 입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이나 사도들께서 십일조가 예수 믿는 자들의 의무, 또는 당연한 것이라는 가르침이 있었습니까..??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께서 십일조를 내는 것이 신자의 당연한 의무라고 말씀하신 곳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요? 아니면 여러분들 스스로 알아서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인지요..?


 여러분! 만일 십일조가 신자의 당연의무라는 생각을 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유대교인으로서 육적 이스라엘 민족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바치려면 당연히 레위족을 찾아 바쳐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십일조 계산 방법과 목적을 정확히 아셔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십일조가 당연한 것 아닙니다. 십의 일을 나눈다면, 모든 인간은 그 말을 받아들일 때 ‘십의 구는 내 것’ 이라는 판단을 갖게 됩니다.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 중 특별히 ‘십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이 인간적 입장에서 하는 말이지 성경에서는 어디든 그렇게 되어져 있는 곳이 없습니다. 구약에서도 그렇게 되어져 있는 곳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십의 일이 하나님의 것’이라 할 때, 오늘 본문 3장 8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는 구절을 놓고 말들 하는가 봅니다만, 여기서 ‘하나님의 것’이라 할 때는 십일조와 헌물, 즉 성도들이 바치지 못하거나 안 하는 헌금을 뜻하는 말이 아니고 그 십일조와 헌물이 쓰여지는 용도를 하나님 명령대로 하지 않고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착복하는 제사장들과 그 일당들의 악행을 뜻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 해당 구절에서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모두 저를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신앙은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이치를 따져서 그에 따른 믿음을 구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대로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어쨌거나 대개의 사람들은 이 십일조라든가 하는 문제를 성경대로 하는 것으로 알고들 있습니다. 물론 구약적 입장에서 본다면 그럴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선택받은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와 실제로 함께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구약 끝에 와서 말라기의 경고와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바로 당시의 제사장들이 경고의 대상자들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십일조를 착실히 바친다 해서 구약의 제사장들보다, 이스라엘 민족들보다 더 깨끗하고 우월하고 의롭고 행위완전한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착각입니다.


 여러분!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가 아닙니다. 성도의 기본의무는 이 세상에 대한 가치와 목적을 버리고 오직 하늘나라만 바라보고 사는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세상의 목적을 벗어나서 성령이 인도하시는대로 사는 삶이 성도의 의무이고 하나님 뜻대로 봉사, 헌신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자신의 돈 몇 푼을 계산해 교회에 바쳤다 해서 그것이 곧 신앙은 아닙니다. 혹, 십일조든 연보든 진실되게 하셨다 할지라도 그것은 신앙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하는 자들의 신앙윤리에 속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연보의 행위가 곧 신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신앙의 성숙과 연보행위가 더러는 비례되긴 합니다만, 신앙 그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연보의 행위는 신앙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여러 행위들 중에 지극히 작은 행위 중 하나인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에는 십의 일이라든가 이라든가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내게 감화감동 역사하시는대로 그 형편을 따라서, 어떻게 해야 내 모두가 하나님께 헌신되고 그 뜻대로 살 것인가? 하는 그 마음속에서 그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런지의 지혜가 주어지는 그대로 하는 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고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의무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자신의 신앙을 돈으로 환산해서 표현하십니까? 십일조 등으로 말입니다. 돈의 액수와 가치를 따진다면, 분명히 어떤 사람의 십의 일은 어떤 사람의 백분의 일만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백분의 일이든 십분의 일이든 손해 볼 건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십니까?


 속지 마십시오.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연보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유로 계산이 서지 않으신 분들은 대략 십의 일 정도 계산하시면 편하실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편한 방법을 구사하시려면 아예 안 내시는 것이 좋습니다. 십의 일도 계산하기가 마음에 여의치 않으면 안 내시는 것이 오히려 죄를 안 짓는 입장일 것입니다.


 연보를 내든지 안 내든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그렇게 행위에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생활이 어려운 성도가 있다던지 할 때 이들의 어려움을 보고도 외면하는 입장에 있다면 바로 그 때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본인이 얼마나 깨달았는가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깨달았다면 일차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살피게 되고 내가 넉넉한 가운데서가 아니라, 없는 가운데서도 무엇이든지 나누어 먹기를 바라는 마음이 당연히 설정됩니다. 그러한 마음에서 액수가 얼마가 되던지 간에 연보를 성심껏 하게 되고, 더 나아가 기꺼이 하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연보를 말씀하실 때 바로 그 정신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이 흉년으로 어려움에 있을 때 각교회마다 연보를 좀 거두어서 예루살렘으로 보내 달라는 간청을 했습니다. 그 결과, 당시 가난한 빌립보교회는 성심껏 많은 액수의 연보를 해서 올렸는데, 반대로 가장 넉넉한 지역에서 의식이 깨이고, 그래서 누구보다도 높다고 자처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서는 한 푼도 연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바울이 다시금 연보 부탁을 하는 중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기뻐하시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방금 앞에서 드린 말이 바로 이 바울의 말씀을 따라 드린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연보를 할 때, 들숙날숙 이렇게 하지 말고 매주일 첫날에 거두라고 당부하십니다. 여기서 부터 오늘의 주일연보 기원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 성경 어디에든 신자들이 연보를, 그것도 얼마를 내야 한다는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모든 사재를 털어서 가난한 성도와 복음사역 하는 이들을 열심으로 돕던 자들의 기록은 간간히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십일조와 더불어 일반연보를 말할 때, 방금 말한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말을 들어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는 강조를 흔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러 어떤 교회에서는 ‘심고 거두는 법칙’이다 해서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둔다’ 라는 말로 연보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즉 “연보를 많이 내면 축복을 많이 받고, 반대로 연보를 적게 내면 축복을 적게 받는다”는 말로 목청을 높이는 것을 봅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바울의 그 말씀은, 연보를 많이 내면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성도를 많이 도울수 가 있고, 연보를 적게 내면 그 만큼 적은 구제를 할 수 밖에 없으니 넉넉한 연보를 바란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인데... 하여간 그러한 말에 속는 자가 더 많으니 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어쨌거나, 연보라는 것은 신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을 때 연보에 대한 자유로움을 가질수 가 있습니다. 여기서 자유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안내도 된다는 그런 뜻의 말이 아니라, 십의 일조라든가 하는 것에 매이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권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느때 십일조 정도를 내는 것이 마음에 와 닿더라 하는 것은 모름지기 신앙 성장과정에서 연보와 관계되는 첫번째 해당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 마음의 느낌을 귀하게 생각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에 그대로 안주하면 안 됩니다. 십일조 계산을 벗어날 줄 알아야 됩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된다는 말은 십의 일 이상을 해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십의 일에 못 미치든 혹은 더 미치든 일단 십의 일이라는 계산을 벗어나야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앞서 드린 질문 다시 하겠습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은 모두 십일조를 해 오셨지요? 누가 하라고 해서 했습니까? 아니면 스스로가 알아서 했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성도의 의무라는 생각은 어떻게 했고 또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들을 하셨습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십일조든 또는 몇 푼의 연보를 바치고 그것으로 성도의 의무를 다한 것이라 생각했다면 정말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것입니다. ..십일조든 연보든 한국교회에서 그것을 말할 때, 항상 따라 붙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축복 받는다는 말 아닙니까? 특히 십일조에 대해서는 더 더욱 그런 것 아닌지요?


 앞서 권사님께서 십일조를 당연의무니 하는 표현을 하셨습니다만, 그 표현 누구에게서 들은 말인가요? 아니면 스스로 생각하신 말인가요..? 만약 누구에게서 들은 말이라면 그렇게 말한 사람이 십일조만 말한 것이 아니고 분명히 축복 받는다는 말도 함께 말했을 터인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말라기 본문이 십일조와 축복을 함께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권사님께서 십일조 강조를 받을 때 당연의무라는 말만 받아 들였을리는 없지 않습니까? 체면상 축복 받는다는 말씀을 안 하신 것 뿐이지 내심 축복 받는다는 보상심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 앞에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십일조입니까? 여러분들은 예수 믿기 이전의 속성을 변화 받으셨습니까? 예수를 믿는데서 세상적 소욕을 버리셨습니까?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삶의 가치와 목적을 바꾸셨는가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 요구되는 일차적인 문제인데요. 그러한 문제들은 하나도 의식 못하고 돈에 대한 가르침이나 돈에 대한 생각은 어떻게 그리 쉽게들 받아 들이셨고 또 당연의무라는 넉넉한 생각들을 하십니까? 내심 축복에 관심들이 있어서 그런 말에 귀가 먼저 깨인 것이 아닌지요? 그리고 축복이라 할 때 여러분들이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결국 이 세상에서 남보다 잘 사는 그런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 믿고 버려야 할 세상적 소욕을 오히려 더 합리화시키고 있는 것 아닌지요? 듣는 말로, 어떤 이는 예수 믿고 가난하면 이웃에 덕이 안 된다 하더군요. 도대체 무슨 돌머리 같은 말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내가 어떻게 해야 주 뜻 안에서 이 세상 소욕을 벗어나 살 것인가 하는 생각이 성령께서 누구에게나 주시는 가장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생각은 전혀 못하고 오히려 믿기 이전에 가졌던 세속적 생각을 더욱 이루고자 뛰는 가운데서, 십일조든 연보든 하셨다면 모름지기 축복은 고사하고 오히려 저주아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지요? 교회는 여러분들이 연보를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참 교회라면 말씀입니다. 교회는 결코 돈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세워지고 운영되어지는 곳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만사를 모두 다 돈으로 계산해서 생각들 하시죠? 허다 못해 삼풍백화점에서 압사한 사람들, 그들의 죽음도 돈으로 계산하지요? 여러분! 신앙을 돈으로 계산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돈으로, 여러분의 신앙의 열심을 돈으로..?? 착각을 깨시기 바랍니다. 누가 그렇게 가르치던가요? 참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교회의 형편이 어렵다던지, 또는 각자 생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던가, 감사함을 깨달았다고 할 때 자연적으로 연보액수도 설정되어 집니다. 내 봉급이 백만원인데 여느 때는 구십구만원을 생활비로 쓰고 주일연보 만원 정도만 하자 했다가도... 그런 생각이 있다가도 성령께서 감동하시면 때로는 백만원 다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참된 신앙에는 결코 계산이 뒤따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 그 달의 수입 전부를 연보로 바치면 생활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반문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불행히도 성경에는 그 해답이 현실적 논리로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기쁨 가운데서 어떻게든 살게끔 되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에 주의하셔야 할 것은, 자기가 설정해 놓은 생활 계산에 들어맞는 생활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자기 자신이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살게 된다는 점입니다.


 십일조를 성도의 마땅한 의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의 그 생각... 모름지기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훌륭한 성도로 인정받는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분명하게 말씀드리자면, 그 생각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만하는 사실이라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십일조를 내는 것이 마땅하다! 더 나가서 그것으로서 성도의 의무를 다했다! 연보에 관한 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모름지기 이 말라기서를 들어서 십일조를 강조하는 이들에게는 귀한 사람으로 취급될런지 모르겠지만, 올바른 신앙적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여러분들의 인색을, 여러분들의 세속적 이론을, 또다시 말해 무속적 심성을 연보로 합리화시키고 있는 것이지 결코 신앙적 입장으로는 볼 수가 없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고 신앙을 기만하는 입장에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안 되시면 성경을 깊이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계속 반복합니다. 십일조를 냈다고 해서 성도의 의무를 다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돈으로 성도의 의무를 말씀하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두 저를 보시기 바랍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들은 무엇이든지 수입없는 사람이 없다고 말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무엇이든지...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시간의 십일조까지 말하고, 심지어는 별 기발한 십일조까지도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만...

 여러분! 일주일 동안 하루는 주의 일에 봉사를 해야 한다! 기도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스스로 지나친 생각 때문에 그렇게들 말하는 것 아닌지요?


 앞에서 말씀드린, 어제 모인 목사님 중에서 한 분은 한 달에 삼일씩 십일조 금식을 한다고 합니다. 그 분은 목사가 된 이후로 계속 그렇게 해 왔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이고 또 그렇게 하니 성도들이 자신을 귀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대한 소욕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산 제사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 가운데서 그것이 나타나지 아니하면 그 가운데서의 연보는 참으로 드려지는 연보가 아니라 종교 의식상에서 드려지는 그야말로 헌금(獻金)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해보신 경험 있으십니까?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는 죄책감을 가져 본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과연 성경 어디에 비추어서 도적질했다는 판단을 하셨습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면 여러분들은 분명히 저주를 받은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말라기 오늘 본문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저주를 받았느니라” 과거 완료형으로 되어진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 집에 돌아가시면 성경을 심각히 읽고 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제가 말을 좀 더 쉽게 할 수가 있습니다. 모름지기 그동안 여러분들이 기독교 신앙을 하시는 동안 연보에 관한 한 상당한 오해와 착각 속에 있으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돈! 하면, 일차적으로 갖는 여러분들의 계산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헌금을 말할 때, 대개는 자신의 계산을 먼저 갖다 놓고 받아들이거든요. 분명히 지금까지 그렇게들 해 오셨을 것입니다. 거듭되는 말입니다만 ‘십의 일은 하나님 것’이라는 말을 그대로 받았다면 분명히 ‘십의 구는 내 것’이라는 계산이 들어 왔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거의 모두가 “그건 아니다” 라고들 말합니다.


 여러분! 양심을 속이지 마십시오. 십의 일을 하나님 것으로 구별해서 바친 다음, 나머지 십의 구를 쓸 때는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쓰지 않았는가요? 그렇게 하지들 않았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십분의 구가 자기 것입니까...?? 이렇게 말하면, 모두가 다 하나님 것이지만 그 중에 특별히 십분의 일은 하나님 것이고 십분의 구는 내 것이고... 그렇게들 하지요? 3장 5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 하는 자에게 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 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 거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늘 읽은 본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먼저 아셔야, 그리고 상황과 배경을 아셔야 오늘 읽은 본문을 정통하게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질문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이 말라기의 말씀이 누구를 향해 하신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제사장들에게 말했고 이제부터는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지금까지 제사장들에게 하신 말씀의 연장선에서 평민에게까지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볼 것은, 오늘 말라기를 들어서 십일조를 말할 때, 대개가 평민에 해당하는 일반 성도들에게 적용을 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십일조를 받는 자가 레위족과 제사장들이라는 점만을 생각하고, 반대로 바치는 자는 평민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일조 하면 으레히 평민, 요즘으로 말하면 평신도들을 향해서 계속 십일조를 강조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마디로 대단한 착각들을 하고 있는 실정인데요...


 다시 말해서, 일반 신자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십일조를 잘 내지 않거나 못 내는 것을 한마디로 “십일조 도둑” 또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이런 말로 몰아 붙이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말들에 대개가 찔끔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대개의 신자들을 살펴보면 주중에 십일조든 또는 얼마간의 연보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가도 막상 주일이 되면 이런 저런 형편 때문에 쓰게되고, 그래서 처음 작정했던대로 연보를 못하는 마음의 가책이 있는 중에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마음이 여지없이 찔리고.. 하여간 이래저래 되어지는 말과 자신의 생각이 맞물리게 됨으로 오늘까지 오는 것입니다만,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이라는 말과 여러분들의 성실치 못한 연보와는 본질상 전혀 다른 관계입니다. 즉, 여러분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연보를 성실하게 못하셨다면 그것은 자신의 인색에 관한 문제이거나 신앙의지에 관한 문제이지 결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거나, 한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3장 5절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 하는 자에게 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 하 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앞서 2장 1절에서 “너의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하신 연장선상에서 다섯번째 되어지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제사장들이 무슨 짓을 했습니까? 이 강해 초반부터 되어진 말씀을 상기하시길 바랍니다.


 도대체 제사장들이 무슨 짓을 했습니까? 지금까지 어떤 짓들을 해 왔습니까? 3장 8절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라는 말씀은, 원어로는 탈취, 또는 속여 뺏는다는 뜻입니다.


 1장 14절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 속죄 제물이라던가 감사 제물이라던가 어떤 제사의 제물도 인간이 욕심을 품고 손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라기서 전반에 걸쳐 되어진 말씀을 보시듯 제사장들이 제물을 빼돌려치기 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오히려 떳떳이 제물을 사기쳐 빼돌리는 제사장들이 십일조는 과연 그대로 놓아 둘런지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3장 5절 “술수 하는 자에게...” 지난 시간 말미에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여기서의 술수는 마술 따위의 괴사를 행하는 자를 뜻하는 말로서 바로 제사장들의 행위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신비니 은사니 하는 말을 앞세워 무엇을 보았다, 들었다, 안수기도한다, 예언기도한다, 병기도 한다며 어리숙한 사람들을 기만하는 짓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제사장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고, 백성의 죄사함을 위해서 깨끗한 제사를 드려야 하는 그런 입장에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야말로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된 제사장들이 모세의 율법과 더불어서 술수, 요즘 말로 하면 신비니 은사니 하는 것과 혼합해서 백성들을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