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성탄절(요1:14-16)
딸아이가 돈을 한화 100여만원이 조금 넘는 1,000$을 모으고 너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돈을 세어보고 또 세어보며 제 엄마에게 '뭐든지 원하는 것을 사 주겠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마치 재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때 저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나 없으면 어떻게 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달 생활비도 못되는 돈을 가지고 재벌이라도 된 것처럼 하는 순진한 모습이 부모 없이 어떻게 살아가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손에 쥔 1,000불이 커 보이지만 그 돈으로 한 달 생활비도 되지 못할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내 손에 잡힌 것만 볼줄 알고 손 밖에 천 배나 더 큰 은혜가 있는데도 그것은 보지 못하는 인간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는 날 동안에 누구에게 평생에 기억될 큰 은혜를 입은 일이 있습니까? 늘 생각나는 은혜, 늘 갚고 싶은 그런 은혜가 있습니까? 우리 인간은 빚을 지고 사는 존재입니다. 살면 살수록 빚을 많이 지게 됩니다. 낳아준 부모 앞에 진 빚, 스승에 대한 빚, 몸담아 살고 있는 사회와 국가와 이웃에 대한 빚, 그리고 생명을 있게 한 하나님에 대한 빚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빚은 갚으려고 해도 갚을 수 없는 빚도 있습니다. 빚이란 적으면 무시하고 갚으려 하지 않고, 반대로 크면 클수록 갚을 수가 없으니까 갚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빚은 본질적으로 떼이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 은혜란 깨달을 때 은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토리 목사가 설교를 할 때 설교 중에 한 예화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미시간 호수에서 큰배가 파선되어 많은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그 중에 한 용기 있는 사람이 사력을 다 하여 무려 열 일곱 명이라는 사람을 물 속에서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용감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의 용기를 배우자고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나자 그 설교를 듣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손을 들고 하는 사람이 "제가 바로 그 사람이올시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토리 목사는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그를 강단 위에 올려 세워 놓고 칭찬을 하고 마지막에 이와 같이 좋은 일을 했는데 무슨 느낀 바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조금 생각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뭐 특별히 느낀 바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내가 그 때 열 일곱 사람을 구해주기는 했는데 그 중 한 사람도 후에 나에게 찾아와서 고맙다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큰 은혜를 받고도 잊어버립니다. 문둥이로서 고침을 받았다면 고쳐주신 그 주님을 위하여 평생 봉사하고 희생해도 부족할 터인데 오직 한 사람만 제하고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다 그냥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깨닫는 것입니다. 참 성도는 고난을 많이 당하고도 공통적으로 하는 고백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고난을 많이 받은 한 목사님이 자신은 고난 후에 세 가지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겸손해야 한다는 깨달음, 둘째는 참아야 한다는 깨달음, 셋째는 죽도록 희생하라는 깨달음이었다고 합니다. 고난을 받는 것을 위로 받고 격려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하나님은 그에게 겸손과 인내와 희생을 가르치시더란 것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예배드리고 한 가지라도 깨닫고 가야 합니다. 일년을 살았으면 그 만큼 깨달아야 합니다. 설교를 들었으면 깨달아야 합니다. 고난을 받았으면 깨달아야 합니다. 은혜란 은혜의 가치를 인정하고 깨달을 때에 은혜가 됩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고 은혜의 도가니 속에 있다고 해도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은혜를 알지 못하면 전혀 은혜가 아닙니다. 어떤 은혜는 갚으려고 하기보다 깨닫는 것으로 족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은혜가 크면 클수록 갚지 못합니다. 단지 깨닫는 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깨닫는 것으로 부모는 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으면 족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바라고 계십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은혜이며 그리고 주님은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는 은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눅 1:30)고 했습니다. 처냐가 애를 베는 것이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자랄 때를 가리켜 하는 말씀이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 2:40)고 하였습니다. 은혜로 자랐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9)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 4:22)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모든 것이 다 은혜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더욱 선명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즉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을 가리며 세 가지를 말하였는데 하나는 영광이요, 다른 하나는 진리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6)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충만한 것은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 은혜는 적은 은혜가 아니라 충만한 은혜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은혜요, 오신 목적이 은혜를 전하기 위함이요, 그리고 은혜를 충만하게 주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성탄절에 우리는 은혜의 주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은혜를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은혜를 많이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적은 은혜가 아니라 큰 은혜입니다.
우리는 배은망덕한 사람을 보거나 그 배은에 대하여 들으면 그를 비난하고 욕할 것입니다. 조강지처를 버린 남자를 보고 욕하고 비난합니다. 남의 돈을 빌려서 공부하여 성공하고도 한 푼도 갚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돌팔매질이라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럴 수가 있느냐?"고 흥분할 것입니다. 옛날에는 동네에서 부모의 은혜를 모르고 극악한 불효를 하면 그 자식을 멍석에 말아서 죽였습니다. 소위 멍석말이라고 합니다.
사무엘 라이프워츠라는 변호사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변호를 통해 사형 구형 받은 죄수 78명을 구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탄절이 되면 크리스마스 카드가 그토록 많이 들어오는데 이 변호사 덕택에 생명을 건진 죄수들이 보낸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큰 은혜에 대하여 어떻게 하였습니까?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마치 내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처럼 여기고 구원해주신 주님께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그 주님을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그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작은 은혜가 아니라 큰 은혜입니다. 바다로 먹물 삼고 하늘을 두리 삼아 그 은혜를 다 써도 다 쓸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주보다 더 큰 은혜입니다. 죄란 한 올도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갈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산 같은 죄를 짓고 살다가 갑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은 죄의 권능은 우주에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천국백성을 삼아 주셨으니 우리가 받은 은혜는 우주보다 더 큰 줄로 믿습니다.
한 교회당 앞에 붙은 광고 내용입니다. "강아지를 찾습니다. 8월 15일 4시경 에 요쿠샤 강아지를 잃었습니다. 혹시 보관하고 계신 분이나 목격하신 분이 계시면 아래 연락처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강아지 주인이 병원에 입원을 하여야 할 상태입니다.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꼭 연락 있길 고대합니다. 만일 강아지를 찾게 해 주신다면 그 은혜에 보답하는 표시로 현금 30만원과 대신 다른 강아지 한 마리를 사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강아지를 한 마리 잃고 죽어가는 인생도 있는데 주님을 잃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어떤 분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비행기 좌석에 비유하였습니다. 옛날에는 비행기를 타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비행기를 자주 타보면 그것보다 힘든 일이 없습니다. 잘못하면 기압의 차이와 운동부족으로 죽기고 한다고 뉴스로 보도 된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면 좋은 자리를 맡기 원합니다.
어떤 사람이 긴 비행기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보니 배정된 좌석은 비행기의 가운데 좌석이 지정되었기 때문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사람들은 가운데 좌석을 아주 싫어합니다. 먼저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고 그 다음으로는 화장실을 오가려면 옆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좁은 다리 사이를 빠져나가려면 여간 힘이 들지 않고 또 미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보니까 자기 옆에 아주 친하였던 옛 친구가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기내 인터폰에서 자기 옆에 친구를 찾는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그의 좌석을 일등석으로 옮겨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아닙니다. 제 옆에는 일등 친구가 있습니다. 여기에 있겠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승무원은 다시 돌아와서 말하기를 "선생님! 일반객실(main cabin)은 다 찼지만 일등실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의 일등 친구분과 함께 그 자리로 함께 가시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그날 친구와 함께 일등실에서 가장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 예수 따라 저 하늘 나라까지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성탄은 큰 은혜입니다. 그리고 또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성탄 속에는 구원의 은혜가 숨어 있습니다. 내가 돼지우리 속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보다 천만배나 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어그러지고 다투고 배반하고 싸우고 죽이고 도적질하고 간음하는 세상에 구원의 주로 오셨습니다. 죄로 가득차서 멸망시키는 길 외에 길이 없는 이 세상에 구원의 주로 오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큰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오직 은혜로 삽니다. 은혜를 받기 위하여 천리길도 가고 은혜 받는 길이 있다면 어떤 길도 갑니다. 은혜는 체면보다 앞서고 은혜는 이성보다 앞서고 은혜는 돈보다 앞서고 은혜는 내 노력보다 앞서야 합니다.
창피스러운 고백을 합니다. 저는 신학교 시절에 온 종일 밖에 있다가 저녁에 기숙사로 들어가기 전에 학교 옆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집으로 갈 수가 없어 바로 그 교회로 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 있으니 발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양발을 발 오금에다 가능하면 꼭 끼고 앉아서 은혜를 받겠다고 버텼습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코를 저 쪽으로 두르고 자꾸 킹킹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참다못해 밖으로 가갔습니다. 그리고 난생 처음 약국에 가서 가난한 신학생이 거금을 들여 향수를 샀습니다. 저는 향수를 뿌리면 냄새가 없어지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발에다 향수를 왕창 뿌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조금 전에는 반경 1m 정도의 사람들이 코를 둘렀는데 향수를 뿌린 후에는 반경 2-3m 내의 사람들이 모두 코를 두르는 것이었습니다. 발 냄새가 그 향수를 타고 더 멀리 퍼져갔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그러나 지금도 마음에 확신이 있는 것은 주님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였을까 하는 점입니다.
주님은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가나안 여인을 보십시오.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소리를 지르며 따라 갔어도 예수님은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하자 주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그 여인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마15:27). 이 여인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먼저 큰 소리로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겸손했습니다. 저는 은혜를 받아야겠다고 하는 사람 중에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을 본 일이 없고,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데 은혜를 받은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인도에 가서 선교하던 영국인 선교사 한 사람이 영국으로 귀국하여 만찬 석상에서 선교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례를 하나하나 들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고, 은혜를 베푸시는지를 감동스럽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선교사 생활 2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인도인들이 회개하였는지를 보고하였고 그와 같은 일을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이 때 만찬회에 자주 인도에 사냥을 즐기러 가는 한 부자 상인이 일어서더니 거만하게 인도 선교사에게 질문했습니다. "선교사님, 거 참 이상합니다. 나는 지난 3년 동안 인도에 수도 없이 갔는데 예수 믿는 인도인들을 한 사람도 못 만났습니다. 선교사님의 말씀대로라면 인도에 그리스도로 개종한 인도인들이 상당히 많아야 할텐데 말입니다." 이 때 선교사는 조용히 일어나 그 부자 상인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선생님께서는 인도에서 호랑이를 본 적이 있습니까?" 상인은 뽐내며 대답했습니다. "호랑이요? 말도 마십시오. 나는 호랑이들을 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호랑이 사냥을 자주 다녔는데, 수많은 호랑이를 잡았고 그 가죽도 나의 집에 많이 있습니다." 상인의 말이 끝나자 선교사는 대답했습니다. "거 참이상하군요. 저는 선교사 생활 20년 동안 한 마리의 호랑이도 보지 못했습니다." 호랑이를 찾아 헤매던 사람은 호랑이를 보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던 선교사는 상처입고 방황하는 인도인들을 본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은혜는 은혜를 찾고 사모하는 사람에게 보입니다. 큰 은혜가 보이는 성도 되기 바랍니다.
우리는 늘 주님의 은혜를 찾아야 하고 또 그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하지만 또 주님의 은혜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적은 헌금도 인색해서 하나님을 속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적은 봉사를 하고 자랑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교회에서조차 세상 것을 구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내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보다 내 이성의 음성을 더 크게 듣고 살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말보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더 크게 들으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끝으로 이 성탄절에 그 주님의 은혜를 전해야 합니다. 한 사람에게라도 전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 베이비를 만드는 그런 날이 되지 않도록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이 은혜를 모든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전해야 합니다. 때를 얻는지 못 얻는지 전해야 합니다. 경험을 하지 못했어도 말씀을 의지하여 전해야 하고 겸험을 했으면 더 큰 확신 속에 전해야 합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감정에 사로잡힌 사상가가 아니다. 인간들이 죄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혼자 흐느껴 울고 계시는 분은 아니다. 그는 실천가로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를 보내신 실천기념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은혜의 성탄절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