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를
꿈꾸는 당신, 떠나라 (창 50:18-21)
저는
어제 송구영신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영화를 한 편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많이 보셨으리라고 짐작되는 쿼바디스라는 영화입니다. AD 1세기
당시 네로 치하의 로마제국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비밀단체의 회원이 된다는 뜻입니다. 무슨 특권을 누리고 권력을 휘두르는 비밀단체가 아니라
발각되면 죽음을 당하는 비밀단체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움을 당하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생겨날 것인지 충분이
짐작이 가고도 남지 않습니까?
그
사연 가운데 하나를 그린 것이 바로 쿼바디스라는 영화인데, 이 영화에서 부각되는 중요한 한 가지 테마는 용서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을
용서하고 그 목숨을 구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화형을 당해 죽어가는 순간 자신을 고발한 원수가 눈앞에 나타나자 그를 용서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들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할까요?
용서할
일이 있다는 것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용서할 일도 없고 용서받을 일도 없이 살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용서받지
못하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용서를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여기 나오는 요셉을 볼까요? 그는 지금 형들을 용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용서하는 요셉을 보고
참 훌륭한 사람이라고 쉽게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용서가 필요하기까지 일어난 일들이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지는 용서라는 화려한 행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무슨 원한을 살 일은 더더욱 아니지요. 그러나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 때문에 형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한번 단추가 잘못 꿰어지면 그 다음 단추도 어긋나고, 처음에 일이 꼬이면
그 다음에는 뒤틀리게 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로 요셉을 미워하게 된 형들의 눈에 요셉이 하는 짓은 무엇이든지
아니꼬웠습니다.
요셉은
꿈을 꾸었습니다. 무슨 꿈을 꾸든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양심과 자유의 문제입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는 특정한 사상을 갖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특정한 생각을 한다는 이유로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 고초를 겪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마찬가지로 특정한 꿈을
꾸었다는 것 때문에 미움을 받고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요셉이 무슨 꿈을 꾸든 형들은 그것 때문에 요셉을 미워할 권리가
없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입을 다물었더라면 더 좋았을지 모릅니다.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더 안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꿈의 의미나 꿈
이야기를 함으로써 야기될지도 모를 일을 깨닫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 같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과 형들의 심사를 자극할 만한 꿈을 꾸었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해를 끼친 적도 없습니다. 굳이 찾는다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요셉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매우 행복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나 보세요. 광야에서 수고하는 형들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요셉을 형들은 다짜고짜로 붙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저는 요셉에 대한
형들의 분노가 그렇게나 컸어야 할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악하고 무지막지한 사람들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아버지가
사랑한다는 것이 동생을 죽여야 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쳤다면 나중에 꿀밤이나 한 대 때려주면 충분했을
것입니다. 동생이 무슨 꿈을 꾸든 그 꿈 때문에 동생은 죽인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겨우
죽음을 면한 요셉은 물이 말라버린 우물에 던져졌습니다. 캄캄하고 추운 그 우물 안에서 요셉은 얼마나 울었을까요?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도대체
형들이 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지 짐작이라도 가야 용서를 빌든지 살려달라고 애원을 할 것 아닙니까?
결국
형들은 마침 지나가던 노예상인들에게 동생을 팔아버렸습니다. 지나가는 사람 백이면 백을 붙잡고 물어보십시오. 이 패륜적인 형들의 행위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을 좋아하는데, 이들의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는지 아닌지 투표를 해볼까요? 아니면 사법부의 판단에
맡겨볼까요?
제삼자가
그렇게 분노할 만한 일이거늘, 그 일을 당한 요셉 자신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요셉을 죽이려다가 노예로 팔아버린 그
형들이 이제 요셉 앞에 엎드려 자비를 구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대제국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이들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마침내
기회가 온 것입니다. 복수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겪었던 끔찍한 고통들, 눈물샘이 마르도록 흘렸던 눈물들, 허공을 향해 쏟아냈던 메아리
없는 그 흐느낌들을 이제 복수의 칼날에 실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설령 요셉이 그들을 모두 죽인다 한들 요셉을 비난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복수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복수란
무엇입니까? 내가 당한 만큼의 고통을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한 사람은 복수와 용서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복수를 택하든 용서를 택하든 그것은 누구를 위한 선택입니까? 물론 자신을 위한 선택이지요. 복수를 해도 나를 위한 것이고, 용서 역시
용서받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이 왜 복수 대신 용서를 선택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 요셉의 인격이 훌륭해서 용서했다면 우리에게는 절망입니다. 훌륭하지 못한 우리
인격으로는 용서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배반하고 밀고한 원수를 용서한 카타콤의 그리스도인들이 원래 성품이 착해서
용서했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내가 희생하고 내가 손해를 보면서까지 나를 해치는 사람을 용서할 만큼 성품 착한 사람이 우리 중에 몇이나
됩니까?
자,
그럼 요셉이 왜 그의 형들을 용서했는지 봅시다. 요셉은 형들의 악한 행위 배후에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오게 된 것은 대흉년으로부터 만인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형들이 자기를
팔아넘긴 사건은 아주 사소한 개인감정의 문제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형들의 악한 행위를 선한 결과로 바꾸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으로서는 더 이상 형들에게 복수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 앞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총리 된 것과 형들이 자기를 팔아넘긴 것을 분리해서 기어이 복수를 하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을 때 복수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 대신 용서가 그 자리를 채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은 형들이 그를 노예로 팔아넘겼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대흉년으로부터 만인의 생명을 구하게 된 것은 형들이 그를 애굽에 노예로 팔았기 때문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악행이 용서되거나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가룟 유다가 배신해서 팔아넘긴 것 덕분이기 때문에
유다의 행위가 우리의 구원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겨서 예수님이 죽으셨고 그래서 우리가 구원얻게
되었으니까 결국 우리가 유다에게 감사해야 됩니까?
18년의
기나긴 박정희 독재정권은 권력 내부의 붕괴에 의해 종말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해서 독재정권이 무너졌기 때문에
김재규를 민주투사로 인정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도 있거든요. 결과로 원인과 과정을 설명하려고 하면 이런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하셨어요. 가룟 유다의 행위는 우리의 구원에 공헌을 한 것이 전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을
배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형들의 행위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도록 한 원인이 아니라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긴 패륜적 악행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을 뿐입니다.
요셉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 복수를 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복수할 권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미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형들의 악행은 하나님이 적절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하는 말이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는 것입니다. 복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즈니스이고, 요셉이 해야 할 일은 용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2005년 새해를 맞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새해가 과거에 사로잡힌 날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해결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인간은 용서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성품으로는 용서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같이 너희도 용서해라.” 용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파악한 요셉이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용서했던 것처럼, 우리가 당한 괴로움과 고통의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가 볼 수 있다면 우리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누구를 용서하지 못했습니까?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을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에게 해를 입히고 나에게 괴로움과 눈물을 안겨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어둡고 괴로운 과거로부터 우리가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용서가 우리를 고통스러운 과거로부터 자유케 할
것입니다.
형들을
용서함으로 커다란 승리를 거둔 요셉처럼, 우리는 복수가 아니라 용서함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실패하고 패배하는
것이지만,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새로 맞는 이 새해를 우리가 용서로 시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용서함으로 자유를
누리게 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용서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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