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는 사람 (창 37:1-11)
1.
꿈꾸는 요셉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은 꿈 때문에 인생을 망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많은 형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는데, 형들과
부모 위에 군림하게 될 것이라는 가당치 않은 꿈을 꾸고 떠벌이는 바람에 눈에 가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골치아픈 동생 때문에 늘 아버지에게
불려가서 질책을 받았던 형들에게 마침내 복수의 기회가 왔습니다.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이 동생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멀리서
동생이 오는 것을 본 형들은 즉시 그를 죽일 궁리부터 합니다. 그만큼 그 동생을 미워했던 모양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사지에
보낸 아버지도 한심하기 짝이 없군요. 그런데 형들이 이 동생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단순히 아버지의 편애나 동생이 자기들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한 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동생의 꿈 때문입니다. 형들이 뭐라고 하는지 보세요.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그리고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동생의 꿈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형들의 속이 뒤집혔습니다. 생각할수록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을 죽여서라도 그 꿈이 개꿈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이 순진한 동생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반갑게 형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꿈을 꾸었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큰 죄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나마 큰 형의 자비 덕분에 당장 죽음은 면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장사꾼들에게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형들과
부모까지 복종할 만큼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리라는 꿈이 너무 부끄럽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
요셉의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애굽으로 가서 왕의 경호실장 쯤 되는 사람 집에서 노예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노예에게 무슨 희망이 있으며 과거에 꾸었던 꿈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노예소년에게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성실함과
지혜에 감복한 주인이 집안의 모든 일을 요셉에게 맡길 만큼 신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잘만 하면 주인의 총애를 받아 노예에서 해방되고
자기 능력에 따라 출세를 해서 그 꿈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다시 한번 좌절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의 성실함과 정직함의 대가로 요셉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참 세상이
야속하기도 하지요. 그 온갖 파란을 극복하고 이제 좀 허리를 펴고 살아볼까 했더니 이번에는 아무 죄도 없이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단
말입니다. 주인을 배신한 노예, 주인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내를 겁탈하려고 했던 파렴치한으로 몰렸으니 이제야말로 무슨 희망을 가지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옛날의 그 화려했던 꿈이 이 어두운 감옥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2.
꿈을 가진 사람들
이처럼
요셉의 인생은 고난과 불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셉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꿈이
실현되지 못하고 오히려 불운이 계속되는 것을 인하여 좌절하거나 그 꿈을 포기한 것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형들 손에 죽을 뻔 하다가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노예로 팔려온 그런 지경에서도 그가 보여준 성실함과 부지런함은 그 주인을 감동시켰습니다. 꿈을 잃어버린 사람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지요. 또 감옥에서는 어땠습니까? 그야말로 내려갈 때까지 내려간 상황에서도 그는 얼마나 성실하고 정직했던지 이번에는 그만 교도소장이
감복해서 요셉을 감옥 안의 총무로 삼았습니다.
꿈을
꾼다는 것, 그 꿈을 잃지 않고 간직한다는 것은 그만큼 큰 능력입니다. 느헤미야는 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조국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황폐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는 그 성을 재건하고자 하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는 당시 대 페르시아 제국의 왕의 술관원으로 권력의 핵심에
있었습니다. 고대에 왕의 음식이나 술을 관장하는 사람은 왕의 가장 신임을 얻는 최측근이라는 의미입니다. 왕을 독살하려는 시도가 얼마든지 가능한
직책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꿈을 해석해 주었던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지요?
그런
권력의 핵심에 있으면서도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며칠동안이나 울며 금식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을 재건하리라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꿈이 느헤미야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했고, 결국
왕의 허락을 얻어 온갖 방해와 위험 속에서도 성 재건에 성공하고 맙니다.
신약에서
꿈을 가졌던 대표적인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상 최초로 선교사가 되어 많은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꿈은 좀처럼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습니다. 땅 끝으로 여겨졌던 스페인에까지도 가서 복음을 전했지만, 이상하게도 로마로 가는 길은 늘 막혔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복음으로 세계의 중앙을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죄수가 되었습니다. 죄수의 신분으로라도 로마를 보아야 했습니다. 비록 죄수의 몸이었지만 바울은 로마가 기독교의 본거지도
되도록 하는 초석을 놓았습니다. 그가 꾸었던 꿈이 결국 그렇게 놀랍고 위대한 결과를 낳은 것이지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연설은 "나는 꿈을 꿉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몇 세대에 걸쳐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고 노예로 살아왔던 흑인들의 인권이
존중되고 모두가 평등하게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그는 꿈꾸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꿈에 불과한 이야기였고 그도 총에 맞아
죽고 말았지만 그의 헌신과 그 정신이 살아서 결국 그 꿈을 실현시키고야 말았습니다.
이처럼
꿈은 위대한 결과를 낳습니다. 요즘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어떤 젊은 목사님이 쓰신 책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꿈꾸는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과학문명은 과거에 꿈을 가진 사람들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결과입니다. 하늘을 한번
날아보겠다는 꿈 때문에 라이트 형제는 수많은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 꿈 덕분에 지금 우리는 하룻밤만에 한국까지 갈 수
있습니다.
3.
우리 교회를 위한 꿈을 꿉시다
꿈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살아가는 모습이 다릅니다. 그 모진 시련과 불운 가운데서도 그렇게 멋지게 살았던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은
비록 힘들고 괴로울지언정 내일의 꿈을 가진 사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힘겨운 오늘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 바로 꿈을 꾸는 일입니다. 그
꿈은 오늘의 괴로움을 아주 작은 것으로 만드는 신비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결코 오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힘든 오늘을
이겨보자고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꿈이 오늘의 고통을 잊기 위한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을 가리켜 일장춘몽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거지가 있었습니다. 이 거지는 늘 공원 벤치에서 잠을 잤습니다. 한번은 어떤 백만장자가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이 거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춥고 딱딱한 벤치에서 매일 잠을 자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럽습니까?" 백만장자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거지의 대답이 의외였습니다.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밤마다 나는 호텔의 편안한 침대에서 자는 꿈을 꾸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감동한 백만장자가 그 거지의 꿈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거지는 샤워를 하고 깨끗하고 푹신한 호텔의 침대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난 다음 거지가 백만장자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다시 공원의 벤치에서 자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호텔 침대에서 자면서 매일 밤 춥고 딱딱한 공원 벤치에서 자는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꿈이란
이처럼 현실과 전혀 상관없이 그저 힘들고 고통스러운 오늘을 잊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꿈은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해야 진짜 꿈입니다. 그래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과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것이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꾸는 꿈이 진짜 꿈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위한 꿈이 하나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멋진 예배당이 있으면 언젠가 우리 교회가 이 예배당을 사야겠다는 꿈입니다. 또 넓은 공터를
보면 이 땅을 사서 우리 교회 예배당을 멋지게 지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상당히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꿈인지도 모르지만 셋방살이하는
신혼부부가 언젠가 자기 집을 장만하려는 꿈을 가진 것과 다를 것은 없지요. 정해진 시간에만 잠깐 사용해야 되고 우리 교회 앞으로 온 우편물이
주인을 찾지 못해 되돌아가는 일도 생기고, 이런 저런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우리 예배당에서 우리가 편안한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마음껏 사용하게 될 날을 꿈꾸며 이 불편한 점을 참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꿈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꿈이 아니라 장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꿈입니다.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또한 우리 교회 역시 많은 노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를 위해 꾸는 꿈이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 예배당을 갖게 될 꿈이 장기적인 꿈이라면 이 꿈은 단기적인 꿈입니다. 우리 교회의 회복과
부흥입니다. 저는 처음에 하나님께 올해에는 열 가정을 새로 보내주시리라는 꿈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스무 가정이 함께 우리 교회를
구성하게 되리라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열 가정이 새로 오고 열 가정이 나가면 수적인 성장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바꿨어요. 그냥 스무 가정이 되게 채워 주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50여 명이 모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또 여기에도 허점이 있어요. 스무 가정이 되기는 했지만 남편 혼자 나온다거나 부인 혼자 나오게 되면 50명이 안되잖아요? 그래서 또 기도를
바꿨습니다. 스무 가정이 되게 해 주시되 우리 교회 멤버가 50명이 되게 해 주시라고요.
저는
계속해서 또 새로운 꿈을 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새로운 비전과 꿈을 주실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우선 올해 우리가 스무 가정이
되는 꿈을 꾸는 것입니다. 꿈은 꾸는 사람의 것입니다. 이 꿈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이루기 위해 저와 여러분은 모두 한 마음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꿈을 허락해 주시도록
간구하십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