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리앗으로 본 쓴 뿌리 (삼상 17:1-7)
1.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2.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을 대하여 전열을 벌였으니 3. 블레셋 사람들은 이쪽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쪽 산에 섰고 그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4.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5.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며 6. 그의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7. 그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 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가 앞서 행하더라
이 시간에 “골리앗으로 본 쓴 뿌리”라는 제목입니다. 쓴 뿌리라는 말씀이 히12:15에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라"
쓴 뿌리란 넓은 의미에서는 죄를 가리키고, 좁게 보면 우리 속의 크고 악한 비정상적이고 기형적인 죄의 인격을 가리킵니다. 연산군이나 히틀러나 다 쓴뿌리 때문이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죄란 마음속에 숨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죄가 상상할 수 없이 커져서 비정상적이고 행동하는 죄의 인격으로 변모되는데 그것이 바로 쓴 뿌리입니다.
좀 더 자세히 쓴 뿌리란 무엇일까요?
1. 한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1절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치매" 그랬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온 이유는 믹마스 전투에서 사울과 요나단에게서 큰 설욕을 당하고 그 치욕을 갚기 위해서였습니다.
믹마스 전투 때 그들은 완벽한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크게 당했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그들의 치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때의 설욕을 잊지 못하고 천추의 한을 품고 힘을 길러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
유다에 속한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여기 ‘소고’란 '가시가 많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세가’는 '파헤친 땅'이라는 뜻입니다. 그 두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을 쳤는데 “에베스담밈”은 '피의 경계선'을 뜻합니다. 이처럼 아프고 찌르고 패이고 상하고 피를 흘렸으면 흘렸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마지노선과 같은 곳에 진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동안 한이 맺히고 고통을 당하고 속이 패이고 패인 고통 속에서 생긴 어떤 한이 우리를 인격의 괴물로 만듭니다. 평생 가난하게 살던 사람은 돈에 한이 맺혀 한 푼도 자기를 위해서 쓰지 못하고 하나남께 헌금조차 드리지 못하고 모으기만 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한이 치유되지 않는 한 그것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복 받지 못하게 합니다.
2. 쓴 뿌리는 기형적 인격입니다.
4절에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골리앗이라는 사람 정말 대단합니다. 골리앗은 네피림 아낙의 후손으로 장대한 거인족입니다.
키가 여섯 규빗 한 뼘이면 1규빗을 45cm로 작게 잡고도 6규빗에 한 뼘 20cm를 더하면 290cm입니다. 50cm로 계산하면 3m 20cm입니다. 여기 천장만큼 혹은 더 높은 키입니다. 몸무게를 따지면 300kg은 될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장수였으니 무술에 단련된 사람을 누가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기형적인 사람입니다. 평범하게 자란 인격이 아닙니다.
사람을 고를 때도 평범하게 자란 사람이 좋습니다. 너무 없이 살고 소외 되고 학대 받았거나 상처 많은 사람들은 평안할 때는 일반과 같지만 조그만 일이 생겨나면 순식 간에 변하여 어떤 일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친구를 삼을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모르고 아픈 부분 건드리면 당장 원수로 변합니다. 혹은 무서운 구두쇠 돈벌레가 되기도 하고, 인정사정을 두지 않는 폭군이 되기도 하고, 지나칠 만큼 성실한 완벽주의자가 되기도 하며, 남의 잘못을 용납하지 못하는 율법주의자가 되기도 합니다.
3. 쓴 뿌리는 안에서 밖으로도 나옵니다.
4절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당시 블레셋은 헬라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전군을 대표한 선봉장끼리의 전투를 시도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골리앗이라는 거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장점을 십분 활용했습니다. 그러니까 골리앗이 블레셋 군대의 대표요 얼굴입니다.
이처럼 보통 사람들의 죄는 안에 감추어져 있지만 쓴 뿌리가 되면 죄가 표면으로 나타나 대표가 되고 얼굴이 되어 나타납니다. 죄가 활성화됩니다. 행동하는 죄의 인격입니다. 행동하는 것 쉽습니다. 소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3:9에 “그들의 안색이 불리하게 증거하며 그들의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이 소돔과 같으니” 쓴 뿌리는 죄가 밖으로까지 나오기 때문에 파괴적입니다.
4. 얼마나 파괴적입니까?
5절에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심판과 파괴의 상징인 놋투구는 파괴적인 생각을 가리킵니다. 건설적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자비하고 파괴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그래서 테러분자들이 생기거나 아니면 스스로 자살할 때도 있습니다.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원수를 만들어 냅니다.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왜곡되게만 보입니다.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며" 여기 비늘 갑옷이란 비늘 모양의 철판을 다닥다닥 붙인 갑옷입니다. 그런데 그 무게가 오천 세겔이라. 오천 세겔이면 한 세겔이 11.5g이니까 약 57.5kg이라는 무게입니다. 완전 철갑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교훈도 받아들이지 않는 완악함을 가리킵니다. 교훈 그 자체를 싫어합니다.
6절에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놋경갑은 다리를 보호하는 호신구입니다. 놋이므로 놋다리입니다. 놋다리는 짓밟는 심판의 상징으로 예수님 다리를 그렇게 묘사하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나쁜 의미입니다. 이처럼 남 잘한 것을 보지 못하고 남을 밟아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입니다.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직성이 풀립니다. 알고 보면 열등감이 지나친 사람들입니다.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놋단창은 던지는 짧은 창입니다. 놋단창을 어께 사이에 맨 것은 신속하게 사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옳고 그름보다 내용도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즉시 공격합니다. 독 오른 독사와도 같습니다. 자기의 상처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7절에 "그 창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자루가 베틀 채처럼 가죽으로 칭칭 감겨 있어 손에서 쉽게 미끌어지지 않도록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손에서 창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한 번 쥐면 놓지 않는 강한 집착력을 가리킵니다. 쥘 뿐 아니라 휘두릅니다. 그래서 돈이라면 그 돈을 강하게 쥐어 모두의 원성을 사고 혹은 수전노가 됩니다. 한 번 쥐면 놓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권력을 쥐면 죽어서나 내려올까 스스로 내려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철은 강함, 창날은 상처를 주는 부분인데, 600세겔이라 함은 6은 세상 혹은 짐승의 수요, 100은 10에 제곱을 한 수로 만수 곱하기 만수니 완벽이나 철저를 뜻합니다. 종합해 보면 남에게 상처를 주는데 아주 본능적인 기질을 가졌습니다. 상처 받은 자가 상처를 줍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기도하고 생각하는 그런 과정은 없습니다. 최근 그 유명한 화성연쇄 살인사건의 피의자가 잡혔습니다. 그는 그 많은 사람들을 단순히 자기 욕망을 채우고 감추기 위해서 저질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약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했듯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멀리해서 생긴 것들입니다. 쓴 뿌리의 상처는 외형으로 나타난 합리적인 듯한 구실일 뿐, 이 모든 것은 은혜 받지 못해서 생겨난 죄악의 쓴 뿌리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더 악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 안 믿고 하나님 멀리한 것이 원인이요 죄악임을 깨닫고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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