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되지 않은 부활 (고전 15:12-19)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 첫 새벽에 “헛되지 않은 부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무덤에 계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은 영원불변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성경 뿐 아니라 당시 역사가 요세푸스는 불신자이지만 여기에 대해서 역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이 새벽에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들과 제자들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었고 일부는 만나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고 당연하면서도 다행한 일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못 박은 악인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많은 이론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이론은 기절설, 사기설, 도적설 등 많지만 시간 관계상 기절설 한 가지만 반박하면 요19:33-34에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미 죽었는데 확인 사살까지 했다고 말씀합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일은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 교회는 육체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헬라철학의 영향으로 일부 교인들 사이에서 부활이 없다. 어떻게 살며 어떤 몸으로 오느냐며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100% 이설이었습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은 결코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육체의 부활은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이 부활이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설명한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헛되지 않음을 몇 가지로 말씀합니다.
1. 죄 사함이 헛되지 않다.
17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여기서 엿볼 수 있는 진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갚으셨을지라도 부활이 없다면 아직도 죄 가운데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죄를 이기고 사는 것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 생명은 우리에게 죄를 이기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8:1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면서 4절에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 짓지 말라. 의롭게 살아라. 하는 요구를 하는데 부활의 은혜를 받으면 그 요구를 다 들어 줄 수 있게 됩니다.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2. 확신이 헛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14절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7절에도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부활이 없으면 우리 믿음도 헛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습니다. 세상종교는 얼마나 헛됩니까? 그들은 죽어서 썩어진 헛된 것을 믿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도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은 모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이 헛되지 않음에 진실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부활이 없다면 믿음도 확신도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성령 받고 믿음에 선 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혜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부활의 확신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요20:19-20에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그리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하셨습니다.
3. 전도가 헛되지 않습니다.
15절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세상 종교는 아무리 외쳐도 까놓고 보면 빈 껍질입니다. 지금 승려들이 SNS상에서 얼마나 말장난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구독자와 조회수가 많으면 상상할 수 없는 수입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까놓으면 빈탕입니다. 영생의 길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조금 양심 있는 승려들은 중생을 속인 죄가 크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을 가리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근대 이후의 시대인데 그 내용은 한 마디로 절대 진리를 부정하고 상대를 존중하여 진리화하는 초라한 이론입니다. 어떻게 각자의 생각이 진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삿21:25에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한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절대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신학적으로 사도들의 증언을 가리켜서 헬라어로 ‘케리그마’라 합니다. 교회가 이 케리그마를 요약해서 정리해 놓은 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그 내용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며 장차 성도의 부활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4. 우리의 보람이 헛되지 않습니다.
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예수 믿는다고 성도만큼 자기를 희생하며 사는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종교는 가져도 자기 시간 자기 할 짓도 다하고 살지만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위해 박해를 받기도 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가장 불쌍한 자가 틀림이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이 좋은 시간에 앉아서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찬송하는 일이 헛되지만, 부활이 있기 때문에 헛되지 않습니다.
5. 우리의 소망도 헛되지않습니다.
18절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여기 잠자는 자란 예수 믿고 죽은 성도를 가리킵니다. 부활이 있으므로 그 영혼도 살아 천국에 들어가고 또 재림 때에 육체적으로도 부활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5:58에서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만난 사울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 예수는 부활의 예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논쟁이 이 부활 하나로 종지부를 찍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복된 이 새벽에 우리가 모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로서 그를 믿는 모두에게 구원의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고 사모하는 자에게 조금도 헛되지않을 부활의 생명으로 가득하게 해주신다는 것을 믿고 흔들리지 말고 더욱 하나님을 잘 섬기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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