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부활절

부활하신 주님의 행적을 통해 본 주님의 뜻 요한복음 20:11-18

공 상희 2019. 4. 21. 06:12

부활하신 주님의 행적을 통해 본 주님의 뜻 요한복음 20:11-18

(설교자: 마경훈 목사 비전교회)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할렐루야!

기독교 진리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믿고 지켜도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구원과 영생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와 부활이 없다면 윤리와 도덕일 뿐 생명은 아닙니다.

저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믿고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도 믿습니다. 제가 부활을 믿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주님은 성경대로 죽으셨다가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진리인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입니다.

세상은 무덤의 크기를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나 기독교의 자랑은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기 때문에 무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빈 무덤에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증거입니다.

주님은 복음서에만 25회 이상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을 하셨습니다. 진리이신 주님이 직접 부활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저는 부활을 믿습니다.

제자들이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베드로는 주를 위해서 죽겠다고 장담했지만 두려움 때문에 나는 예수와 상관없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성령을 받고 담대하게 주님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초대 교회사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목숨을 걸고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습니다. 안드레는 헬라에서 전도하다가 아가야성에서 엑스자형(X)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칼로 목베임 당하여 죽었고, 빌립은 서아시아 부르기아에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고, 도마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죽었으며, 마태는 에티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목베임을 받아 죽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시몬은 애굽에서 전도한 후 다시 유대에 돌아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야고보의 동생 유다는 바사에 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고, 가룟 유다 대신 선출된 제자 맛디아는 에티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만약 주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이 이렇게 까지 변화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설교의 내용이 십자가와 부활뿐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의 여러 편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들의 설교는 언제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라는 내용뿐이었습니다. 그들이 핍박 중에도 부활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사실이 부활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일주일의 끝 날인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지켰습니다. 안식일이 주일로 변경된 것은 그들이 목격하고 체험한 부활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일에 부활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 땅위에 주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아들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교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부활을 믿게 하시고 부활을 증거 하게 하십니다.

믿는 사람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활의 주님을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믿는 자 속에서 증거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기적입니다.

이제부터는 부활하신 주님의 승천까지의 행적을 살펴보며 부활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나누겠습니다.

 

1. 기쁨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11절에 보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는 무덤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에게는 슬픔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16:10에 보면 부활의 주님을 만난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갔을 때 제자들도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슬픔에 가득했던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니 그들에게 새로운 기쁨이 샘솟게 되었습니다. 28:8을 보겠습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픔이 가득하던 마리아와 여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후에 큰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갔습니다.

한약방을 하시는 정달숙권사님이라고 계십니다. 그 권사님의 남편 장로님이 퇴근하시면서 문 앞에서 오만원을 주워오셨습니다. 장로님은 권사님에게 5만원을 주면서 잃어버린 사람이 저녁에 잠을 못자니까 빨리 경비실 가서 얘기하고 주인을 찾아 주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권사님이 5만원을 들고 경비실로 가서 이 돈 주인 찾아 주세요라며 경비원께 주었더니 경비아저씨께서 권사님을 쳐다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줌마네는 맨날 행복해 보여요. 아줌마 교회 다니시죠? 어디교회 다니세요?”라고 하더랍니다. 권사님이 맨날 행복해 하니 경비 아저씨께서 권사님의 식구들이 예수 믿는다는 것을 알아봤습니다. 할렐루야! 진짜 예수 믿으면 행복합니다. 가짜로 믿으면 행복한 척 할 수는 있지만 맨날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마약이 사람 속에 들어가면 그 사람의 감정적인 변화가 크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마약을 안 해봐서 마약을 하면 어떤 기분인지 모릅니다. 결과는 좋지 않다는 것만 알지요. 부활을 믿는 성도 안에는 성령께서 거하십니다. 성령님은 마약과 다릅니다. 성령님은 희락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당연히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2. 평강과 담대함입니다.

주님은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평강과 담대함을 주시는 분입니다. 19절을 보면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는데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고 있었습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두 번이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에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게 되고 그들에게 평강과 담대함이 임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전날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두려워하던 베드로가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설교를 하다가 잡혀서 심문을 받을 때에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생명에 대한 위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자신들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임을 알게 되면 자신들도 죽이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담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담대하기 때문에 어떤 형편에 처해도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어린이 사역을 하시는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건이 생각납니다. 목사님이 아들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붕어빵을 보더니 아빠, 붕어빵 먹고 싶어요라고 하더랍니다. 목사님이 장난으로 , 돈 있어. 돈도 없는데 어떻게 붕어빵을 먹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붕어빵을 집어서 먹더랍니다. 그 모습을 보고 목사님이 돈도 없는데 붕어빵을 먹으면 어떻게 해?”라고 하니 아들이 나는 없지만 아빠가 있잖아라고 하더랍니다. 잠시 후에 아들이 걷는 것이 힘든지 아빠, 택시 타요라고 하더랍니다. 목사님이 아들에게 , 돈 있어? 없잖아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지나가는 택시를 세우더니 무조건 타더랍니다. 목사님이 아들에게 돈도 없으면서 택시를 잡으면 어떻게 해라고 하니 아들이 나는 없어도 아빠는 읺잖아라고 하더랍니다. 이 아이는 아빠 때문에 담대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 때문에 담대하고 평안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주님은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만물을 붙들고 게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힘입어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하고 평안한 것입니다.

 

3. 믿음입니다.

주님은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입니다. 24절 이하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도마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말했으나 도마는 믿지 못했습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8일이 지났습니다. 주님께서 도마와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부활의 주님을 만난 도마가 대답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도마는 주님을 보기 전에는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보고 나니 부활과 부활의 주님이 믿어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를 믿는 것은 우리들에게 특별한 종교성이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믿어지는 것입니다. 믿어진다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성령님께서는 부활의 주님이 믿어지게 하셔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어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하고, 성령으로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하고, 주님은 하늘로 가신 그대로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4. 사명의 회복입니다.

주님은 사명을 망각한 자들에게 사명을 회복시켜주시는 분입니다.

21장에서는 제자들과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가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나는 물고기 잡으로 간다라고 말하고 갈릴리 바다로 향합니다. 이 때 함께 있던 제자들이 우리도 함께 가자하고 베드로를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사명을 길을 가지 않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간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난 곳이 어디입니까?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 잡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날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엄청난 고기를 잡았습니다. 기적을 체험하고 난 후에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그때 베드로는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특별한 부르심으로 사명을 받은 베드로였지만 이제는 자신의 사명을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사명을 버리고 물고기 잡으로 갔지만 주님은 그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그의 사명을 회복 시켜주셨습니다. 그날 밤 제자들은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153마리의 물기를 잡았습니다. 많은 물고기를 잡은 후에 베드로는 그분이 주님이신 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헤엄을 쳐서 주님 앞에 갔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잃어버린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사명을 알고 사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영국의 런던 광장에 영국을 위기에서 구했던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는 영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영웅입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먹을 것이 없어서 12세에 해군에 지원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에 참여했고 인도제도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지중해를 지키다가 오른쪽 눈을 잃고, 오른쪽 팔을 잃고 말았습니다. 1798년 나폴레옹과 이집트에서 싸울 때 대승을 거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때 가슴에 적탄을 맞고 죽었습니다. 그는 죽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승리자라고 믿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알았고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면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로서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자신의 사명을 모르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방황하는 분이 있다면 부활의 주님을 깊이 체험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따라 살기바랍니다.

 

5. 사랑의 회복입니다.

주님은 사랑을 잃은 자들에게 사랑을 회복시켜주시는 분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를 만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네가 나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헌금을 할 수 있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주님을 사랑하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헌신이나 헌금 이전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관심입니다. 혹시 사랑에 빠져본 일이 있습니까? 두 가지 예민한 관심이 생깁니다.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이 나의 관심거리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상대에게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여 자신의 모습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에게 관심을 보이고 자신의 모습이 상대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관심을 갖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모든 것이 나의 관심거리입니다. 주님의 말씀, 주님의 일, 주님의 교회 등 그리고 나의 모습이 관심거리가 됩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면 주님은 어떻게 보실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주님은 뭐라고 하실까?

신학자 칼 바르트는 사랑은 보고 싶은 마음이다.”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사랑하면 자꾸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자꾸만 찾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가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더 자주 찾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는데 갈등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 사랑을 회복시켜주시는 분입니다.

 

6. 소망의 회복입니다.

주님은 절망한 자들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3년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에게 주님의 죽으심은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부활하셔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로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는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성령으로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살다가 절망에 빠져 보신 적 있습니까? 저도 간혹 절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단은 저에게 절망의 늪에 빠지도록 저의 감정을 흔들어 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조용히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을 부릅니다. 그러면 내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저에게 주안에서의 나의 현주소를 보여주시고, 미래에 대한 확신도 주시며, 침체된 감정을 회복시켜주심을 경험합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덧입게 되면서 절망의 늪에서 나와 소망이 충만하게 됩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동안 병으로 누워있던 사람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연못에는 간혹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천사가 물을 동하게 할 때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치료되는 기적입니다. 하지만 그는 연못이 동할 때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연못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병이 중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오직 절망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자신의 힘이나 세상 의학이나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희망이 없던 그를 주님이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일찍 소망을 놔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환경이 어렵다고 소망을 놔버립니다. 나이가 많다고 소망을 놔버립니다. 여러분 이런 사실을 아십니까? 세계 역사상 최대 업적의 35%60대에 의하여 성취되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23%70대에 의하여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6%80대 인물에 의하여 성취되었습니다. 결국 역사적 업적의 64%60세 이상의 인물들에 의하여 성취되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이를 먹어도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절망에 깊이 빠진 분이 있다면 주님의 소망의 손이 만져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7. 성령의 인도함입니다.

주님은 어찌해야 할 줄 모르는 자들을 성령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께서 능력으로 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성령께서 임하시기 전에는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임하신 후에 그들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며 선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이고 교제하고 떡을 떼고 구제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등 구체적인 일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의 인도자가 되신 것입니다. 진짜 신앙생활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생활입니다.

오래 전 스코틀랜드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년이 지나도록 한 사람 밖에 전도하지 못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나마 어린아이 한 명을 전도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무능한 목사님으로 여깁니다. 그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한 주간 동안 계속되는 집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별로 모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예수를 영접하고 헌신할 사람을 계속해서 초청했지만 아무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흥회 마지막 날, 한 작은 소년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 소년은 헌금시간에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저는 너무 가난하여 헌금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헌금 대신 저의 몸을 드립니다. 제 인생을 주님께 바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부흥회 기간 동안 예수를 영접하고 헌신할 사람이 겨우 한 명밖에 없다는 사실에 무척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의 가슴에 뜨거운 불꽃이 일어났으며 그 소년은 ! 하나님. 저의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저에게 아프리카를 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년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냥 어린 아이가 한 번 해본 소리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소년은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제 꿈이 바뀌었어요. 저는 선교사가 될거예요. 제가 좋은 선교사가 될 수 있도록 가르쳐주세요.” 그래서 그 아이의 신앙이 잘 자라도록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리빙스턴'입니다. 그 작은 한 아이가 자라서 아프리카의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에서 자신이 살아온 봉사의 삶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했다고 격찬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희생한 일이 없소.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날마다 가슴 설레이는 감격으로 살아가고 있소. 내게 베푼 평안, 내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성령의 감동이 너무 벅찬데 어찌 이것을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소. 내가 아프리카를 횡단하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많이 넘겼지만 나는 희생한 일이 없소.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일뿐이오.”

일생을 아프리카의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한 리빙스턴이 심한 열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수행했던 토인 몇 사람이 의사를 모시고 오기 위해서 급히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그들은 한참 뒤에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리빙스턴이 당연히 침대 위에 누워서 끙끙 앓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리빙스턴은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깍지 낀 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잠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인기척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리빙스턴은 기도하면서 평온한 마음으로 생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리빙스컨의 삶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삶이었습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사역을 한지 16년이 지난 후 잠시 귀국하여 영국에서 강의를 할 때 한 학생이 그에게 질문을 합니다. “선교사님 어떻게 그 위험한 환경 속에서 기쁜 마음으로 사역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내가 했다기보다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열악한 환경에도 날마다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에 사역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선교사님은 앞으로 어떤 계획으로 어떻게 행할 것이며 다가올 어려움들을 어떻게 극복할 생각이십니까?”, “저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다가오던지, 환경이 어떠한 어려움을 주던지, 내가 한 일에 어떤 결과가 오던지 내 삶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과 함께 살며 하나님에 의해 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령님의 인도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늘 성령의 인도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