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1-11)
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2.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3.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4.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6.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이 시간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주의 새벽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시고 이것들로 밤과 낮을 나뉘게 하시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셨기에 가만 두어도 시간이 되면 새벽이 옵니다. 닭이 울든 울지 않든 새벽은 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새벽은 그렇지 않습니다. 깨우지 않으면 오지 않습니다.
그 유명한 예로 1864년 덴마크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남부의 기름지고 거대한 실레스비히와 홀스타인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호남 영남 충청을 잃고 강원도 산악지대만 남았습니다. 전쟁 때문에 경제는 파멸 직전이요, 남자들은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고, 여자들은 살기 위해 몸을 팔았습니다. 덴마크 민족사에 있어서 가장 어두웠던 순간입니다.
그때 민족의 어두움을 밝히려고 그룬트비 목사와 달가스 대령이 얼어나 국민들을 계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룬트비 목사는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자연 사랑을 부르짖었습니다. 달가스 대령 역시 밖에서 잃은 국토를 안에서 찾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민족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서 애썼습니다. 그 결과 어려움을 극복했고 현재는 최고의 개인소득을 올리는 선진국가로 발전했습니다.
또 새벽을 깨운 이들이 있었습니다. 중세 종교암흑기에 마틴 루터와 칼빈, 존 위클리프, 얀 후스, 쯔빙글리, 존 낙스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중세기에 종교활동은 활발했지만 성경은 회중이 볼 수 없도록 법으로 가두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신득의 교리는 행위 구원에 덮여졌으며, 매관 매직으로 글조차 알지 못한 문맹인 사제가 수두룩했고, 성직자들의 도덕적 부패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이 때 종교개혁자들이 나타나 무소불위의 교황권세와 싸우며 이 암울한 새벽을 깨웠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깨워야 할 어둠이 많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죄악과 어둠과 절망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무엇이 구언원고 소망인지 모르고 방황합니다. 혹은 나라의 위기를 맞아 국내외적으로 심히 암담하기만 합니다. 최근 중국에서는 교회를 폭파하고 새로운 종교법을 만들어 더욱더 종교의 자유를 옥죄고 있다고 합니다. 이리 봐도 암담하고 저리 봐도 암담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우리의 환경이 칠흑 같이 어두워도 예수 이름으로 새벽을 깨우면 어둠은 물러가고 깨워진다는 사실입니다. 깨우면 기쁨의 밝은 날이 옵니다. 시편 57편은 본문 표제에도 나와 있듯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아둘람 굴에 숨어 있을 때 지은 시입니다. 삼상 22장에 나오듯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어두웠던 때입니다.
얼마나 절망스럽든지 4절을 보면 “내 혼이 사자(獅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했습니다. 그 뿐 아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 왔는데 그들은 환란 당한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였습니다. 수심과 어둠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무려 사백 명가량이었습니다.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아둘람 굴은 400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굴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아둘람 굴은 이리 보아도 어둠, 저리보아도 절망, 이 사람 저 사람 문제 없는 사람이 없어 한숨과 탄식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이제 붙잡히면 모두가 함게 죽을 운명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다윗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새벽을 깨우기로 작정을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어둠을 물리칩니다. 절망을 물리칩니다. 여러분 얼마나 어둠 가운데 계십니까? 여기 아둘람 굴은 온갖 어둠으로 가득 찬 우리 마음일 수도 있고 우리 불우한 환경일 수도 있고, 또 우리 민족과 세계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새벽을 깨우는 것일까요?
1. 부르짖는 기도로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1-2절에 다윗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얼마나 간절한 기도입니까?
다윗을 찾아온 400명은 다윗을 장관으로 삼고 따르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칼로서 광명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사울이 스스로 이 굴에 들어와 볼 일을 볼 때 그를 죽일 기회가 충분했지만 다윗은 그의 옷자락만 몰래 베었을 뿐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기도했습니다.
미국의 빌리그래함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세계를 순회하면서 캐나다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아침에 숲속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그 때 나는 캐나다가 자연의 아름다운 나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일본에 갔었는데 공장의 요란한 엔진소리와 출근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에 아침을 깨었습니다. 그 때 나는 일본은 산업의 나라요 경제의 나라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 갔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새벽기도회를 알리는 차임벨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그 때 나는 한국은 주님이 지키시는 나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 했습니다. 기도하면 우리 한국을 하나님께서 그냥 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시112:4에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난다는 말씀처럼 절망 가운데서라도 한 줄기의 소망의 빛이 비쳐올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새벽기도를 하지 아니하면 마귀가 승리한다.", 요한 웨슬리는 "새벽기도 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배신의 도배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는 "새벽기도하고 질병이 나았다." 하였고, 이엠 바운즈는 "새벽기도 하고 잘못된 자가 없고 세계적으로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은 전부 새벽기도 한 사람들이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8)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밝은 빛이 비쳐온다는 말씀입니다.
2. 하나님을 높임으로 새벽을 깨웁니다.
5절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사울은 교만하여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다가 버림 받았지만, 다윗은 하나님만 높아지기 만을 소원합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높이길 사모했든지 이 다엥서만 아니라 하늘 위에와 모든 세계 위에 하나님이 높아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11절).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면 새벽이 옵니다. 시84:1에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했듯이 해가 더야 새벽이 오듯 하나님을 높여야 새벽이 옵니다. 내가 높아지면 어둠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높이면 소망이 옵니다. 이것은 영적 공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높였더니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을 높였더니 바벨론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만 높였더니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높인 루시퍼 천사장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어둠 속에 떨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입니다.
그래서 유1:6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약4:6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3. 찬송으로 새벽을 깨웁니다.
7-9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다윗은 아둘람 굴의 그 터질 듯한 절망 속에서도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기도하고 찬송하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여기 비파와 수금이 나오는데 악기는 찬송을 도와줍니다. 그렇게 찬송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찬송이 쉽게 나옵니까? 진짜 어려움 당하면 누가 곁에 와서 위로해 줘도 위로가 되지 않고 마음이 얼어붙어서 기도도 찬송도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한단다 하면서도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 이해가 중요하고 거기에 준한 단단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주님은 나를 구원하셨다. 그래도 주님은 나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지셨고, 예수 안에서 승리와 부요와 영화로움을 주셨다고 복음에 서야 합니다. 우리 환경까지도 예수 안에서 보면 이미 다 해결하신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만 믿어서는 안 됩니다. 입으로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에 선 선취적인 믿음에 서서 찬송합니다. 일국의 왕이 한 생명을 취하려고 군대를 이끌고 추격합니다. 이리 숨고 저리 피하고 한숨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탄식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두려움과 절망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믿을 분은 하나님 밖에는 없었습니다. 블레셋의 거장 골리앗 앞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나갔던 다윗 아닙니까? 그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라. 어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 없으니 그대로 될 것이라고 노래하리라 다짐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 입술이 열리기 시작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흑암의 교황권과 대결할 때 힘찬 찬송을 많이 불렀습니다. 새뮤얼 테일러 코울리지는 마틴 루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루터는 성경 번역만큼이나 찬송가 작곡으로도 공헌했다. 독일에서는 모든 농부가 찬송가를 암송하고 있다. 그들은 찬송가를 근거로 조언하며 논쟁하고, 교회의 모든 영혼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의 여명은 찬송으로 깨운 것이었습니다.
200여 년이 지난 후, 미국의 뉴잉글랜드주에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흥과 영적 대각성을 일으킨 조지 휫필드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운동도 찬송을 통해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때 필라델피아에는 한밤중에도 도시의 거리마다 여기저기 가정집에서 찬양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때를 같이해 일어난 모라비아 신앙 운동, 그리고 웨슬리의 운동 역시 강한 찬양 운동과 함께 일어났습니다. 찰스 웨슬리를 통해서만 거의 6,500여 곡의 찬송가가 생겨났습니다. 20세기 후반부에 일어난 다양한 부흥 운동도 찬송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빌 하이벨스는 "기도를 찬미 혹은 경배로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찬미 없이는 기도생활을 잘 해 나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찬송을 부르면 새벽이 옵니다. 그런데 복음의 선취적 진리에 서서 찬송한다면 그것은 더욱 놀라운 기적이 될 것입니다.
4. 진리의 말씀으로 새벽을 깨웁니다.
시편 57편 곳곳마다 말씀에 선 다윗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진리가 있습니다. 상선벌악의 공의를 믿습니다. 이렇게 말씀에 서야 새벽을 깨웁니다. 천지는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많이 보고 많아 아는 것도 좋지만 그 말씀을 믿고 또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행 28장을 보면 바울이 지중해에서 로마로 가다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2주간이나 표류하며 죽을 위기 가운데 있었으나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3-25절) 한 것처럼 말슴에 서서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제자교육으로 유명하신 옥한흠 목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옥목사님에게는 제자훈련을 해오는 가운데에서 풀 수 없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성장했는데 교회의 외형에 비해서 능력은 무력하다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교회 앞의 유흥가는 갈수록 번창하고 교인들은 무언가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조용기 목사님를 만났습니다. “목사님! 저는 우리 사역자들에게서 성령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돕느라 몸부림을 치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조목사님은 “우리 교인들은 어떻게나 뜨거운지 내가 할 일은 날마다 물통에 물을 잔뜩 담아 가지고 가서 끼얹는 것입니다. 잘못될까봐 너무 뜨거워지지 말라고요”
그 때 옥목사님이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성령운동을 해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자교육도 좋지만 그만큼 성령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적으로 풍성해야 하나 정적으로도 풍성해야 한다. 뜨거움이 없는 믿음은 이미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옥목사님은 기도하면서 성령 충만 받자고 선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진리에 선 모습입니다. 진리에 선다고 지식의 증가나, 빼빼마른 교리만 붙들고 진리에 섰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짜 서시기 바랍니다. 행하시기 바랍니다. 잠4:18에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른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바로 새벽을 깨우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어려움 가운데 계십니까? 어떤 절망 가운데 계십니까?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며, 예수님은 어둠을 이기는 광명한 새벽별이십니다. 그래서 이 순간에도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광명한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어둠아 물러가라 외치면서 다윗처럼 마음을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새벽을 기도로 깨우고, 하나님을 높임으로 깨우고, 찬송으로 깨우고, 진리로 깨워서 절망은 물러가고 소망으로 충만한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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