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

민수기 강해,31장~36장

공 상희 2017. 4. 5. 07:08

 

민수기 31

 

모세의 마지막 사역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로 부름받기 전 마지막 사역은 미디안을 징벌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입성하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렀던 곳은 모압 평지입니다. 모압 나라의 왕인 발락뿐 아니라 그 지역에 함께 동맹하고 있는 미디안 족속들이 서로 연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범죄케 합니다. 그 발단은 발락으로부터입니다. 발락은 모압 족속의 선지자 발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을 저주케 합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자 발락은 화를 내며 발람과 약속한 물질과 권력을 주지 않을 것이라 단언합니다. (24:10-11)

발람은 대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케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을 것이라 발락에게 고합니다. 발락은 미디안 장로들과 연합하여 바알브올의 우상 제물과 술과 여인을 풀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접견하여 그들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행음하는 백성들을 향해 진노하사 염병을 내려 24,000명이나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 숫자는 어린아이와 여자나 노인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로 나갈 수 있는 지도자급 용병들의 숫자입니다. 참으로 엄청난 숫자가 순식간에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그 올무를 놓은 사람이 발락왕과 발람 선지자입니다. 이뿐 아니라 발락은 미디안 사람들과 동맹을 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시작합니다.

 

모압의 조상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고, 미디안 족속들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노년에 그두라라는 후처를 얻게 됩니다. 그녀를 통하여 6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한 명이 미디안이며 후처에게서 얻은 아들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이삭과 떨어져 살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머물렀던 지역이 동방인데 그곳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요단강 건너편인 모압평지였던 것입니다. (25:1-6)

미디안 족속 역시 쉼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한 행군에 방해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요단강을 건너기 전 마지막 임무를 명령합니다. 그것은 모압과 미디안의 다섯 왕을 징벌하는 것과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입신영달을 꽤했던 패역한 발람 선지자를 처형하는 것입니다. (31:7-8)

광야에서의 마지막 전쟁은 하지 않아도 될 전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신앙의 순결성을 강조하는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을 위해 매 지파에서 천 명씩을 책출하여 12,000명의 무장을 한 군인들로 미디안 다섯 왕을 징벌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전쟁에 나가는 대열 앞에 선 것은 군대의 선봉부대가 아니라 제사장입니다. (31:6)

제사장은 전쟁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럴지라도 제사장을 앞세워 전쟁에 나가게 한 것은 이번 전쟁이 징벌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택함 받은 선민으로서의 신앙적 순결성을 회복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속에서도 이러한 전쟁은 매일 매순간 치러집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영적인 순결성으로 승리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본 장에서부터 36장까지 에서는 가나안 정복을 위한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활동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중 본 장은 가나안 입성 직전에 이스라엘이 브올에서 바알을 우상으로 섬긴 사건의 원인 제공자였던(25:1-9) 미디안족속을 전멸시킴으로써 여호와께 영광 돌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 장은 미디안 정복 전쟁이 미디안의 우상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 싸움이었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쟁을 위한 군사로서 부름 받았음을 상기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적은 미디안입니다. 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고 말씀합니다.(31:2) '여호와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되'라고 말씀합니다.(31:3) 미디안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도록 유혹하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 징계를 받게 했던 나라입니다(25:1-9).

여호와의 원수라는 것은 어떤 국가나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되는 사고방식 자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미디안이라는 족속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라기보다 하나님을 반대하고 무시하고 우리를 죄악으로 끌어가는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과 전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천부장과 백부장들은 모세와 엘르아살에게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자들을 다 살려두었느냐"고 합니다.(31:15)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책망이었습니다. 모세와 엘르아살이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것은 여자들을 살려둔 것 때문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여자를 살려둔 것에 대하여 책망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수기25장에서 있었던 사건을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25장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여인과 음행함으로서 염병에 걸리는 징계를 받습니다. 그때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하심으로 미디안 여인과 동침한 이스라엘 자손을 죽임으로서 염병이 그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미디안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의 행동을 가리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했다고 하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즉 미디안을 치라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비느하스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가운데 살아갈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치고 나서 여자를 살려서 데리고 옵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들로 하여금 음행 하게 하고 우상숭배하게 해서 염병에 걸려서 24,000명이 죽었던 하나님의 징계를 잊어버린 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미디안 사람을 쳐서 죽이라는 것은 사랑이신 하나님으로서는 이해가 안 될 명령이고, 오히려 다 치지 않고 남겨서 데려온 것이 더 인간적이고 사랑이 있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죽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 여호와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이로운 것, 좋은 것은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했다기보다는 자기의 생각과 뜻을 앞세워서 행동한 것입니다.

미디안을 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미디안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이스라엘에게는 자신들도 죽어야 할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살아있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죄로 따진다면 미디안이 음행을 선동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내가 심판 받아 죽어야 할 존재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여자를 살려서 데리고 온 이스라엘처럼 살아갑니다. 자기편에서는 잘한 일이고 칭찬들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하나님 편에서는 책망할 것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하며 교만해져 살아가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심판 속에서 무엇이 남는가를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22,23절의 말씀은 누가 심판을 지날 수 있는 깨끗한 인간인가를 말합니다. 심판의 불속에서 견디는 자만 깨끗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불 가운데를 지나고도 남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은혜의 물을 지남으로서 깨끗케 되었을 때 남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살아가는 자이지 결코 땅의 것으로 사는 자가 아님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합니다. 나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원수된 것만 보여줄 수밖에 없지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죽기까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로 엎드린바 되었을 때 비로소 주님께 쓰임받는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민수기 32

 

거룩한 성공

거룩한 성공이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성공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성공은 다른 말로 정상을 정복하는 고지론 입니다. 사람마다 고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지가 정해지지 않아서 고지를 점령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구하지 않은 것은 얻지 못함이라 야고보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4:2-3)

우리의 구하는 것에 현실적인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를 전문용어로 표현한다면 미시적기도입니다. 현재의 상황들에 대한 기도를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도 중요하겠지만 거시적기도가 더욱더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내 미래뿐 아니라 나를 통하여 태어나는 후손들의 미래를 포함하는 것이며, 교회의 미래, 국가의 미래에 대한 기도입니다. 구약성경을 상고하노라면 선지자들의 거시적기도와 예언을 볼 수 있습니다. 거시적기도 중에서 성공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는 욕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1:28)

땅을 정복하라는 것은 사람이 사는 물질세계 전체에 대한 다스림입니다. 군사력이나 독재자처럼 무분별한 정복이 아니라 명예가 있는 정복입니다. 섬김이 있는 다스림의 정복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성공의 풍성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 성공을 하나님은 복이라 표현하시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11:26-28)

우리 앞에 복이 놓여 있습니다. 물론 저주도 함께 놓여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복을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복은 성공입니다.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고지론적인 성공입니다. 그런데 성공은 반드시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계획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것을 취하여, 하나님의 방법대로 성공을 통하여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성공을 향해 나가는 두 가지 방법입니다. 하나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은 간편할 수 있습니다. 성공의 빠른 길을 택할 수 있습니다. 타인들로부터 성공했다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순식간에 많은 돈을 벌거나 사업을 크게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뿌리가 말씀위에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작은 비바람에도 안절부절못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하는 사람처럼 보일뿐이지 실상은 믿음의 뿌리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좀 늦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인 말씀에 뿌리를 내려 반석위에 성공의 주춧돌을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 그가 별로 기도 많이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이미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비바람이 불어와도 염려할 것이 없이 순조로운 성공의 정상을 밟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32장에는 루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재산이 많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광야의 척박한 환경에서 성공한 셈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32:1,5) 우리가 꿈꾸는 성공은 거룩해야 합니다. 성공하면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성공의 기초를 놓는 것부터 말씀위에 놓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거시적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이뤄지기를 축복합니다.

 

(1- )

오늘 본문 민수기 32장의 기록은 열두 지파에게 땅이 분배되기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을 정복하고 보니 그곳은 풀이 많은 목초지대였습니다. 마침 가축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던 르우벤 지파 사람들과 갓 지파 사람들이 그 땅을 보고 이곳이야말로 자신들이 살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르우벤과 갓 지파사람들이 모세를 찾아가 "요단 동편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이곳에서 우리를 짓고 양을 키우며 자녀를 위해서 집을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간곡하게 부탁을 합니다. 이에 대해 모세는 단호히 거절할 뿐 아니라 그들을 호되게 책망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곳 저곳을 정복은 했으나 계속 전진, 우상을 섬기는 가나안 원주민들과 싸워 그들을 궤멸, 정복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 정복 이라는 목적 때문에 피흘려 싸워야 할 희생의 삶이 남아 있었습니다. 헌데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는 타 지파의 희생은 아랑곳 하지 아니하고 자기들만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려는 이기적인 안일을 택하려고 했습니다.(32:6-7)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망각하고 현재에 안주하려는 두 지파는 공동체에 먹구름을 덮은 무리요, 하나님께 범죄한 집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은 현실과의 타협, 안주가 아닌, 전진, 도전, 희생, 모험, 정복입니다.

루우벤, 갓지파는 결국 길르앗을 분깃으로 분배 받았고, 한 동안은 편안하게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주변 국가들로부터 많은 고난, 시련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해서 두 지파는 한시도 평안한 날이 없게 되었습니다. 길르앗은 지역적으로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였습니다. 까닭에 주변 국가들의 침공이 끊이지 않았고, 전쟁의 계속이었습니다(삼하2).

우리는 순간, 순간 정확히 분별하고 바른 선택을 위하여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께 지혜로운 분별력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 복된 새로운 영역을 소유하기 위해 하나님 편에서는 도전, 모험, 희생을 감당해 나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민수기 33

광야에서

민수기의 원래 제목은 광야에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시내산에 도착한 후부터 여리고 맞은편 모압 광야에 도착(BC 1406)까지 36년간의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광야에서 긴 시간동안 하나님은 백성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것은 교만한 마음이 낮아지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 명령을 지키는지에 대한 훈련이었던 것입니다.(8:2)

기원전 3세기에 히브리어로 된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되게 됩니다. 이 때 헌신된 번역자가 72명이어서 보통 이 성경을 70인역이라 지칭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성경이 이 성경인 것입니다. 70인역에 광야에서라는 제목을 민수기로 정정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민수기서에서는 두 번의 인구조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1장에서 4장까지 시내산에서의 조사입니다. 출애굽하여 몇 년이 지난 후에 본격적인 광야 생활을 위한 인구조사였습니다. 두 번째 인구조사는 민수기26장에 광야생활을 마무리 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조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는 두 번의 신앙적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첫 번째 강은 홍해 바다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기 전에 모든 죄악을 씻어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세례의 의미인 것입니다.

두 번째 강은 광야생활을 정리하고 그들이 건너야 할 강은 요단강입니다. 이는 신앙적 순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홍해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편적으로 건널 수 있었던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단강은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신앙이 없다면 결코 건널 수 없는 강입니다.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마지막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신앙적 순결을 의미합니다. 순결을 표현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성도들을 신부로 표현한 것입니다.(21:8-11)

 

우리의 신앙은 애굽에서 광야로,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입니다. 우리는 이미 홍해를 건넜습니다. 불신앙에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몰랐던 자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요단강을 건너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건네주시는 초급단계가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순결한 그리스도인만이 건널 수 있는 영적인 강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광야를 벗어나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은혜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영원토록 광야에서만 머물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심이 아니라 내 신앙적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광야를 통하여 순종을 배워서 우리의 신앙적 사역지인 가나안을 통하여 영광이 되는 삶이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기억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수많은 장소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다음에, 지금 서 있는 모압 평지로 올 때까지, 그동안 진을 쳤던 다양한 장소의 이름을 오늘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고향집과 고향의 산과 들을 기억하면서, 어린 시절을 상기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본문의 수많은 장소를 기억하면서, 자신들의 불순종을 상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마음 속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부족해서 불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앞두고 불신앙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 본문 36절에 언급된 가데스라는 장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결정적인 불신앙을 드러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데스라는 장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결정적인 불신앙을 드러내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처음 인구조사를 했을 때처럼 아주 잘 보존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첫 번째 인구조사와 두 번째 인구조사 사이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얼마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었습니까? 민수기 16장에서 고라의 반역사건과 관련해서 염병으로 죽은 자가 만 사천칠백 명이었고, 민수기 25장 브올에서, 이스라엘이 모압 여자와 음행을 해서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명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민수기를 읽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차 없이 죽음의 심판을 내리신 것만 기억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민수기에는 그런 죽음의 심판만 기록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보존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수많은 장소들의 기억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있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런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이 우리들에게 말하는 핵심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핵심주제는 하나님이시고, 두 번째 핵심주제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핵심주제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인 바로 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땅에서 시작해서 땅으로 끝난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한번 말씀드린 것처럼 구약의 역사는 땅에 대한 약속, 땅을 소유하며 사는 것과, 그리고 죄로 인해 땅을 상실한다는, 세 가지 흐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만큼 성경은 땅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구약성경에서 땅이라는 단어가 네 번째로 가장 많이 사용될 정도로, ‘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땅에 대해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예상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땅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말할 정도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들이 구원을 이해할 때, 자꾸만 이 땅과는 유리된 구원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땅도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땅도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된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 땅을 버리고 다른 별나라로 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이 땅 밖으로 나가버리는 구원이 아니라, 이 땅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 땅 밖으로 나가버리는 구원과 이 땅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이 땅 안에서의 구원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당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곳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자하심이 크다는 증거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통해 설명했다면, 본문은 바로 땅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자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삶의 모습으로는 결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기정사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한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54절 말씀에 나오는 대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땅을 분배하는 방식은 딱 하나였습니다. 고대 왕이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신하에게 일방적으로 땅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땅을 나누라고 말씀하십니까? 54절 말씀을 보면, 땅을 나누는 기준이 지파별 종족을 따라서 나누고, 인구별로 균등하게 땅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강한 지파가 자신의 마음대로 땅을 미리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제비를 뽑은 결과대로 땅을 분배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한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우상을 섬기는 원주민을 다 쫓아내고, 원주민이 섬긴 우상을 또한 다 깨뜨리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 지, 하나님은 땅을 분배하는 방식을 다룬 54절 말씀 앞뒤로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이렇게 두 번째 명령을 강조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 에서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의 통치를 이 세상에 반영하는 데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직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어떠한지를 반영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땅의 우상을 다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그 땅에서 우상을 섬기면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런 우상 숭배적인 땅의 가치관에 충실했던 왕이 있습니다. 바로 선지자 엘리야 시대의 아합 왕입니다. 아합 왕 당시는 다윗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 못지않게 부강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아합 왕은 매우 경제적으로, 정치적, 외교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합 왕이 이룬 부강함에 대해서는 전혀 긍정적인 평가를 하시지 않았고, 오히려 가장 나쁜 왕으로 평가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그렇게 평가하시는지 아십니까? 아합 왕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땅에 대한 가치관을 정면으로 부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돈을 주고 사려고 했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그 땅을 팔지 않겠다는 나봇을 이세벨의 계략을 통해 죽여 버리고 그 땅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이 사건은 평범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아합 왕이 저지른 그 사건은 이스라엘의 가장 핵심적인 근간인 땅의 제도를 뿌리까지 뽑아버린 아주 악한 죄였습니다.

 

오늘 본문 55절과 56절 말씀을 보면, 그런 사실을 매우 냉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55절과 5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55)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56)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여러분 단순히 우상을 몰아내고 우상을 깨뜨리는 게 다가 아니라,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우상의 가치관을 뽑아버리고,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우상의 가치관을 깨뜨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아주 철저하게 우상의 가치관을 깨뜨려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의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물질주의입니까? 기복주의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들의 영혼과 우리들의 마음을 좀먹는 우상의 가치관을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습니다.

 

민수기 34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있어서 첫 번째 넘어야 할 신앙 관문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해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시작이 창세기부터 시작하는 것은 일의 순서의 의미보다는 신앙의 우선순위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있어서 창조주 신앙이 빠져 버리면 기독교라는 종교로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움직인 선진국들의 핵심 신앙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집을 짓기 전에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거룩한 장소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이 사는 집보다 월등히 큰 예배당을 짓고 그들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집사의 직분이란 교회에서 주어지는 모든 직분을 의미합니다. 그 직분을 잘 감당한 자에게는 아름다운 지위를 주신다는 약속입니다.(딤전3:13) 아름다운 지위는 이 땅에서의 잘됨입니다. 영적 질서 안에 있을 때 그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지위는 구약적 개념에서 지경을 넓히는 것입니다.(대상4:10)

민수기 34장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주실 가나안 땅의 경계선을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소 황당한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에는 이미 많은 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시절에는 10족속이 살았습니다.(15:19-21) 그 후 약 500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는 7족속으로 변경이 됩니다. (3:10)

이 족속들은 나름대로 윤리와 도덕, 사회질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땅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일곱 나라가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황당한 일일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천지의 주재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도덕과 윤리 사회적인 모든 질서가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것이 영적이며 지경이 넓어지는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인 제도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 두 가지를 명령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번째로 가나안에서 우상을 섬기는 원주민을 다 쫓아내고, 원주민이 섬긴 우상을 다 깨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가나안 땅을 분배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 명령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확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때에 그 땅은 너희의 기업이 되리니 곧 가나안 사방 지경이라고 말씀하십니다.(34:2)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변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사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땅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약속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하게 되는 가나안 땅의 구체적인 지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34:3-15)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하는 가나안 땅의 동서남북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구체적인 지명을 통해 상세하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것은 매우 섬세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물로 받는 가나안 땅을 동서남북으로 아주 구체적인 지명을 언급한 것은, 그만큼 땅에 대한 약속이 전보다 더욱더 확실해졌다는 의미입니다.

가나안 땅에 대한 두 번째 구체적인 약속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땅을 분배하는 것을 주관하는 각 지파의 대표자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34:16-29) 여러분 땅 분배를 주관하는 각 지파의 대표자를 세웠다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충분히 배려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분명히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이런 저런 불평과 공정성의 시비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만 땅 분배의 책임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각 지파별로 한 사람씩을 더 선출해서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앞으로 발생할 문제를 미연에 방지한 것입니다.

땅 분배를 주관하는 각 지파의 대표자를 세운 두 번째 의미는, 역시 가나안 땅 입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현실로서 다가왔다는 뜻입니다. .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땅에 대한 약속을 왜 이렇게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고, 왜 이렇게 좀 더 구체화해서 보여주는 것일까요? 출애굽 제1세대는 갈렙과 여호수아만 제외하고 광야에서 전부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제2세대는 출애굽 제1세대로부터 가나안 땅에 대한 간접적인 교훈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 2세대들에게 믿음을 더욱 더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가나안 땅을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실체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주 신축성 있게 당신의 인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인간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처음 정한대로만 끝까지 밀고나가는, 그런 기계적인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형편을 충분히 고려하십니다.

 

민수기 35

 

도피성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히브리 민족이라 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붙여진 신앙고백의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는 교회가 결정해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는 총칭이었습니다.(11:25-26)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을 사람들은 히브리인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강을 건넜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건넌 강은 유프라테스입니다. 그 강을 건넌 것은 개인적인 야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12:1-4)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 땅에는 이미 열 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15:18-21)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실행하기 위해 강을 건넜기 때문에 그를 일컬어 강을 건넜다는 의미로 히브리 사람이라 부른 것입니다. (14:13)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많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특히 사람을 죽였을 경우 죄를 면할 수 있는 도피성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관리하고 제사 일을 중점으로 하는 레위족속들에게는 기업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기업은 이스라엘 12지파에게서 떼어 48성읍을 주셨습니다. 그중 6성읍은 살인한 사람들을 위해 도피성을 만들게 하셨습니다.(35:6-7)

실수로 살인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부지런히 가장 가까운 도피성으로 피해야 죽임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그 도피성에는 그곳을 관할하는 대제사장이 있는데 그 대제사장이 죽게 되면 살인한 사람이라는 죄명에서 자유하게 됩니다.(35:25,28)

이는 우리의 영원한 도피성이 되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주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서 자유 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도피성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해 출발한지 40년의 세월을 지나 모압 평지에 진을 친 상태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기 전 모압평지에서 가나안 주민이 된 이후에 지켜나가야 할 규례들에 대한 말씀을 모세를 통해 들려 주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레위 지파를 제외하고 땅을 분배 받은 다른 지파들이 레위지파를 위해 할당해야 할 땅에 대한 내용입니다.

레위인은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자 종교 관원으로의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경작하도록 분배받지 못했습니다(18:23-24). 그러나 레위인들 역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지파들이 분배받은 땅 중에서 일부를 레위인들을 위해 제공하도록 하셨습니다.

레위인들을 위해 각 지파에서 땅을 분배해 주도록 하신 것은 레위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게 될 이스라엘 온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동안 중앙 성소를 중심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백성이 가나안 땅 각지에 흩어져 살아가면서 항상 중앙의 성소에 모여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로 하여금 각 지파들 속에 분산되어 살아가면서 종교적인 임무를 감당케 하셨던 것입니다. 레위인들은 다른 지파 사람들과 같이 목축을 하거나 농사를 짓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제사할 때 찬송을 부르거나 나팔을 불므로 음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직분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레위 족속을 그들의 삶속에 존재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제비를 뽑아 땅을 기업으로 얻게 하셨습니다. 가족의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얻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얻을 수 있도록 제비뽑기로 인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레위인에게 성읍을 배정할 때에도 넓은 지역을 지닌 지파는 많이, 좁은 지역을 지닌 지파는 적게 떼어서 주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법칙대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도피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살인 사건이 발생하였을 경우 그 고의성 여부를 따져서 비고의적인 경우에만 도피성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도피성은 모두 여섯 성읍으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거하는 요단 강 동편에 세 성읍이 배정되었고, 나머지 세 성읍은 요단 강 서편에 배정되었습니다.

고의적인 살인에 대한 동기를 20절에서 밝혀 주고 있는데 남을 미워한 나머지 불타는 분노와 적개심으로 이웃을 살해한 자에게는 결코 긍휼의 성읍인 도피성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일 기회를 엿보아 범죄하게 되는 경우는 집념어린 살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도피성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도피성을 허락해 주셨는데 도피성을 허락하신 참 목적은 살인할 고의가 없이 부지중에 살인한 자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35:11).

 

재판의 규례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있으며 일반적으로 각종 송사는 회중을 대표한 재판관들에 의해 시시비비가 가려졌습니다.(35:24) 그러나 회중들이 그 재판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판결 방법은 온 백성의 객관적인 동의와 나아가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했습니다.

도피성으로 피신한 살인자는 보수자의 손에 넘겨지지 않고 그의 생명을 보복하려는 자로부터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비록 그 생명을 보호받고는 있지만 그 살인의 대가인 죽음의 문제가 완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의 죽음이 보류되어 있는 상태에서 생명이 연장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을 대신하여 속죄 사역을 담당하는 대제사장의 죽음은 바로 이러한 도피성에 있는 자가 받을 죽음을 대신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28). 따라서 그 살인자가 치를 죽음은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대속되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이 도피성에 있는 살인자의 피 흘림을 대신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면 죄 아래 태어난 우리의 죄 값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럼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주셨습니다. 도피성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죄인에 대한 구원입니다.

살인은 행위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도 살인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되지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보혈을 흘리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만이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말하는 한 날이 되도록 애씀으로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에게 참된 도피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민수기 36

 

천국의 모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지옥과 같은 곳이 아니라 천국의 모퉁이 있습니다. 물론 이 땅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가치중립적인 곳입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이 땅은 천국입니다. 아름다워서 천국이 아닙니다. 사랑이 충만해서 천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서가 있기에 천국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성도의 심령에 하나님이 임재 하셨기 때문이요, 전능자의 다스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천국이 가까이 왔다.” 고 하신 것입니다.(4:17)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이 땅에 있는 성도의 심령에 건설되는 신앙적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가변적 천국입니다. 영국이나 한국 모든 나라들은 가변적인 나라가 아니라 실존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건설되는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믿음으로 영적으로 건설되는 가변적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가변적인 나라란 실존의 나라가 있다는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시민권은 천국에 있지만 이 땅에서의 문화와 문명을 초월할 수 없는 것이 이 땅에 영적으로 건설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두 번째 천국은 우리의 심령이 아니라 실존적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을 이 땅에 건설되는 실존적인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랜 세월동안 이방 나라로부터 식민지나 노예로 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압제했던 적국들을 물리치고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셨기에 많은 백성들이 당시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고 있었던 로마로부터 독립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18:36)

이 땅에 신앙적으로 임하는 천국과 장차 우리가 가야할 천국의 개념은 다릅니다. 이 땅에 임하는 천국은 신앙적이며 영적입니다. 영적이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할 천국은 신앙적이며 영적인 천국의 소유자가 가는 실존적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천국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의 심령에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 사업하고, 직장생활하고, 공부하고 주어진 일상을 살아갈 때 천국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천국의 개념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고백한다면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이 땅에 천국을 이룬 사람들의 삶입니다.(고전10:31) 심령에 천국을 이룬 사람의 삶의 목적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14:8) 이는 종교적 노예가 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생명의 주, 이 땅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이요, 우리 죄를 속하여 주신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있었던 36년간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시내산에서부터 요단 건너편 모압 평지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는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규례니라.” (36:13) 우리는 흔히 광야생활을 이 땅에 비교하고 가나안은 천국으로 비유합니다. 그러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애굽과 광야와 가나안이 서로 혼합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때론 죄악의 상징인 애굽일 수 있으며 훈련 받는 장소인 광야일 수 있으며 사역지인 가나안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인 36장은 결혼한 여인의 상속 문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남자 후손이 없을 때 딸들에게 상속권이 돌아간다는 것은 민수기 27장에서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요셉 자손의 가족 중 므낫세의 둘째 아들인 슬로브핫이 아들이 없이 광야 여정 가운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므낫세의 자손들은 슬로브핫 딸들에게 내려진 이전의 명령인 딸들에게도 기업을 나누어 줄 것(27:7-8)이라는 내용을 진술한 다음에 그 명령을 철회해 달라고 말하지 않고 명령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딸들이 결혼을 하면 그 유업이 시댁의 것이 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새로운 결정을 모세를 통해 확인받고 있습니다. 타 지파 남자와 결혼하게 된 경우 발생하게 될 문제들을 미리 방지함으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 공동체를 잘 유지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므낫세 지파의 두령들이 슬로브핫 딸들의 상속 문제를 다시 건의한 분명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본래 가나안 땅은 영영히 팔지 못하며(25:10,23) 각 지파에게 분배된 기업의 땅은 대대로 변함없이 존속되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땅은 여호와께서 각 지파에게 선물하신 것으로, 분배 받은 땅은 각 지파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연한 증거물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각 지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기업을 영구 보존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들이 맺은 언약 관계를 뚜렷이 하고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게 하는 것이기에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진 이후에 일평생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리라 결심한 내용들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세는 5절 말씀을 통해 27장에서 행했던 모습대로 요셉 자손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모세를 통해 신앙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옳고 그름을 내 기준에 따라 결정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옳고 그른지를 먼저 분별할 줄 알아야 함을 깨닫게 해 줍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은 아버지의 가족 안에서 기업이 보존되도록 결혼하는 순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36:10). 민수기의 결론은 이 민수기 후반부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를 통하여 우리를 어떤 새로운 일, 새로운 환경으로 인도하시든지 우리는 하나님께 그 새로운 일과 새로운 환경 속에서 해야 할 우리의 의무를 가르쳐 달라고 구하며,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그 날의 일은 그 날에, 한 영혼과의 관계에서 감당해야 할 일들이 있다면 맡겨주신 일 안에서 넉넉히 감당할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리고 맞은 편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명령과 그 명령들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절차와 방법을 말씀하시면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민수기의 주인공은 모세도 아니고, 모세로부터 말씀을 전달 받는 이스라엘 백성도 아닙니다. 민수기의 주인공은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시고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공으로 모실 때 우리 삶의 모든 여정을 당신의 방법으로 섭리하시고 인도하심을 깨달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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