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1장
다문화속에서의 신앙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였을 때 히브리 민족만 출애굽한 것이 아닙니다. 애석하게도 광야 40년 동안 히브리 민족 외에 다른 민족이 섞여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머물렀을 때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하였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불을 내려 그들의 진영을 사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디베라’라 불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불이 그들 중에 붙었다는 의미입니다.
1. 다베라 원망 사건(민 11:1-3)
10장이 시내산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이르는 수일간의 행군 과정에 대한 개괄적인 언급이라면, 본 장부터 12장까지는 그들이 가데스바네아(12:16)까지 행군 할 동안에 발생한 구체적인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맥락에서, 본 단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 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출발한 직후에 처음으로 나타낸 불평으로 하나님의 불진노가 내리신 사건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후에도 빈번하게 불평하였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민 21:5).
2. 만나로 인한 원망(민 11:4-9)
앞 단락에서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본 단락에서는 섞여 사는 무리(출 12:38)로 표현된 이방 잡족들로부터 기인한 탐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과거 애굽에서 먹었던 고기를 아쉬워하며 그들의 양식으로 주신 만나에 대해 심증을 내 불평했음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장의 육신적인 욕구에만 빠져 영원한 자유와 구원을 보장하는 출애굽의 궁극적 의미를 망각한 소행이었습니다.
3. 모세의 탄원과 하나님의 응답(민 11:10-30)
본 단락은 끝없이 불평할 소지가 있는 백성들 문제로 고민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주시는 장면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해결책은 이적적 방법으로 메추라기를 이스라엘 진중으로 동원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배불리 먹게 하는 동시에 모세의 통치를 보좌하고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70인의 장로를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본 단락은 모세의 호소(10-15절), 70인 장로 선정 명령(16, 17절), 불평하는 백성들의 입을 메추라기로 막음(18-23절), 70인 장로를 세움(24-30절) 등으로 세분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인간들의 불신앙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은혜로 응답해 주고 계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4. 만나 불평 사건의 결과(민 11:31-35)
본 단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에 대하여 그 대가를 지불하시는 장면입니다. 즉 그 불평의 주동자들에게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재앙을 내리셨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적적 방법으로 메추라기를 공급하심으로 그들의 부족을 해소시키는 동시에 광야생활이 주는 연단의 의미를 깨닫기는커녕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자유보다 노예 생활 때 얻어먹던 육신의 안일을 더 높이 평가하는 자에게는 분명한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를 통해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라는 하나님의 양면적 속성을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약 교회 성도 중 구원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세상에 연연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민수기 12장
영적 권위
영적인 권위의 근본은 하나님과의 대면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너무 막연합니다. 그 권위는 사회적인 윤리와 도덕적 양심이 뒷받침 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위대하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열매로 그들의 본질을 알 수 있다 하셨습니다(마7:16-20).
하나님과 대면했다 할지라도 그에 따르는 열매가 없다면 영적 권위는 상실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는 이러한 영적 권위가 절대적입니다. 리더십은 인격에서 오는 것이지만 영적 권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물론 인격도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면 영적인 권위가 있게 됩니다. 영적 권위에 리더십의 열매가 따른다면 가장 좋은 모습일 것입니다. 바로 삶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마7장).
하나님의 전에는 예나 지금이나 영적 권위에 대한 시기심이나 다툼이 있어왔습니다. 영적 권위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야 하는 것이며, 그것을 성도들이 인정할 때 영적권위는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권위는 군림의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적권위는 낮아짐, 섬김으로 주어진 것처럼 영적 권위는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민수기12장에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하게 됩니다. 그 사건에 대해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였습니다. 비방의 내용은 구스 여인을 취한 것을 문제 삼아 모세의 영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민12:2). 미리암과 아론의 지적은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민12:5-9)
모세가 잘못했다 생각했는데 벌은 그것을 지적한 미리암과 아론이 받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의 종이 잘못한 것이라면 무조건 덮어 두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제가 존경하는 칼빈 목사님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모세가 결혼한 아내는 십보라 입니다. 그런데 십보라가 바로 구스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미리함과 십보라는 보이지 않게 여성으로서 충돌이 있었던 것입니다. 미리암은 아론과 상의했고 모세는 언제나 십보라를 감쌌던 것입니다. 구스여인은 흑인계열의 이방여인이기에 모세의 부인으로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것에 대해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 구스여인은 그의 아내 십보라였을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의 지도권 도전 사건
11장은 가데스 바데아 행군 중에 있었던 일반 백성들의 반역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면 12장은 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던 불순종 사건을 기록한 기사입니다. 즉 미리암이 아론을 부추겨 모세가 구스 출신의 이방 여자를 첩으로 삼은 것을 비방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모세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으신 여호와께서 미리암과 아론에게 징벌로 문둥병을 내리신 내용 입니다.
‘목회자 비판 콤플렉스’란 말이 있습니다.
목회자의 파행적인 행동을 조금이라도 지적하는 듯한 발언을 하면 “주의 종은 설사 잘못 했더라도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며 어울리지 않게 다윗과 사울의 예를 끌어대는 등의 것들 때문에 함부로 목회자를 비판할 수 없어서 생기게 되는 콤플렉스 입니다. 일종의 열등의식입니다.
오늘 본문의 문제는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사건입니다.
“성직자가 독재를 하게 되면 그것은 세상의 어떤 독재보다 더 나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재중의 가장 안 좋은 경우가 성직자의 독재입니다. 세상의 독재자들은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의 삼권만 장악하지만, 교회의 독재는 삼권보다도 더 무서운 영권까지 장악하여 무당과 같은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목사를 목회의 전문가로 세워주고 인정해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목회의 전문가라는 것을 빙자하여 독재하는 목회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목사가 독재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생각 없이 아무나 목회를 간섭하고 제한한다면 약방 수준의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목사가 마음대로 목회를 하게 맡겨둔다면 교회의 독재가자 되어 교회위에 군림하게 되는 딜레머에 빠지게 될 우려 또한 배제할 수 없습니다.”(생사를 건 목회개혁. 김동호, 편집 요약)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 목회의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목회의 전문성을 말하는 것은 교만이나 독선, 차별이 아니라 검증된 목회자를 세움으로 독선이나, 탈선을 막고, 전문 성직인으로 구별하여 바른 목회로 이끌어가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문적인 정규 신학교육을 받고 절차에 따라 성직에 임명된 검증된 목회자를 양성하고 세워야 합니다.
둘째, 아무리 그러한 과정을 거쳐 임명된 성직자라 할찌라도 언제든지 잘못된 판단으로 잘못된 길을 갈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론과 미리암의 불평은 율법을 어긴 모세의 행위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세의 이스라엘 지도자 직을 시기함에서 기인한 신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스 여인은 이미 할례를 통하여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자이므로 모세의 재혼은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었고 따라서 모세는 비방 받을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미리암과 아론의 근거 없는 비방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신적 권위를 부여받은 모세를 비방하는 것은 곧 여호와를 비방하는 것으로 여겨 문둥병으로 미리암을 심판하셨습니다.
♣민수기 13장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2:4) 구원이란 예수 믿어서 죽으면 천국 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구원의 궁극적 목적은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라 했습니다(벧전1:9). 구원받는 것의 영적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예수를 구세주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는 과정과 광야에서 40년간 생활한 후에 가나안에 정착하는 모든 과정은 구원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셨습니다. 바란 광야에서 모세는 12지파의 두령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탐할 것을 지시합니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40일간 가나안을 돌아보면서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하는 것입니다. 결코 자기 임의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탐자들 중에 눈의 아들 호세아를 불러 이름을 여호수아로 명명합니다. 이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기도는 상황 그 자체를 보고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하실 차례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경험하기를 축복합니다.
(1-3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이스라엘 각 지파중에서 한 사람씩 선별하도록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 정탐은 백성들의 요청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형식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신명기 1장 19-23절을 통해 밝혀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백성들로 하여금 곧바로 가나안으로 올라가 취하도록 하였지만 백성들이 그 땅을 먼저 정탐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요청을 받아들인 모세가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4-16절)
가나안 정탐 임무를 부여 받은 12지파의 족장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열거되어 있는 12명의 정탐꾼의 이름 중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은 유다지파의 갈렙과 에브라임지파의 호세아입니다. 두 사람의 이름이 익숙한 이유는 가나안 정탐을 다녀온 후 다른 열 명의 이름은 더 이상 성경에 거론되지 않지만 두 사람의 이름은 지속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중대한 일이 맡겨졌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불신앙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 열거된 삼무아 외 아홉 사람은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됩니다.
8절에 등장하는 눈의 아들 호세아를 16절에서 모세는 여호수아로 개명하였습니다. ‘구원’이라는 뜻의 호세아 앞에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의미의 여호수아로 개명한 것은 호세아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가나안 정복의 지휘자로 앞서 행할 막중한 책무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에브라임 지파의 족장으로 선별이 되었지만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변모되어 감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집트 노예 신분에서 출애굽의 지도자인 모세를 수행하게 되었고 모세와 함께 시내산에 올라간 유일한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세의 계승자가 되어 약속의 땅을 정복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처럼 이집트 왕실에서 교육 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겸손히 소명에 충실하게 될 때 그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일군이 되었습니다.
(17-24절)
모세는 정탐꾼들을 가나안으로 보내기 전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상세히 알려주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거하는 거민의 강함과 약함으로 가나안 원주민들의 군사적인 능력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의 인구 밀도와 전쟁에 나설 수 있는 남자의 숫자가 많은지 적은지를 살펴볼 것을 명령합니다. 또한 그들이 거하는 땅이 좋은 지 나쁜지를 살펴보게 했는데 이는 가나안의 지대와 지형이 어떠하며 그 땅의 기후 조건이 살기에 적합한가의 여부를 조사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를 알아보도록 한 것은 원주민들이 사는 곳에 방어 울타리가 쳐져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땅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는 옥토인지 그렇지 않은 박토인지도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나무의 생태에 관한 조사로 나무가 자랄 수 있을 만큼 수분이 충분한 지역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였습니다.
정탐꾼들에게 필요한 것은 보이는 것만 보는 현상적인 시각이 아니라 그 땅을 모두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을 의뢰하고 믿는 믿음을 통해 보는 신앙적인 시각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담대할 것을 요구한 모세는 또한 그 땅에서 나는 실과를 가져 올 것을 명령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지를 정탐꾼들에게 확인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물로 삼기 위해 실과를 가져 오도록 한 것입니다. 모세의 명령대로 정탐꾼들은 남북으로 펼쳐진 가나안 땅을 두루 다니며 살펴보았지만 상세한 보고는 남쪽에서 맨 처음으로 가 본 곳인 헤브론 지역에 관해서 할 따름이었습니다.
(25-33절)
광야 길을 건너 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풍요롭고 기름진 땅인 가나안은 특히 매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로 시작되는 28절 서두를 통해 그 땅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와 강대함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모든 용기를 앗아가 버렸습니다. 직면한 사태를 불안한 마음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믿는 마음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큰 차이가 생기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정탐꾼들은 상황을 사실대로 평가하기보다는 과장하고 추측해서 보고를 했습니다. 이들은 아무런 근거도 대지 못하면서 가나안 땅을 악평했는데 이는 자기 백성을 그러한 땅으로 이끌어 들이시려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비난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열 명의 정탐꾼의 말을 듣고 마음에 동요가 일었을 백성들을 향해 30절에서 갈렙이 단호하게 안도시키고 있습니다.
갈렙은 정탐꾼들의 겁먹은 보고와 그에 동요하는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환기시키며, 믿음으로 재무장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렙이 외쳤던 30절 말씀은 만용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신앙에 기초한 결단의 언어입니다.
♣민수기 14장
절망에 대한 묵상
인간은 미래지향적인 존재입니다. 절망이 오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을 순 없습니다. 그러나 염려가 되는대로 맡겨두게 되면 염려는 더 큰 염려를 낳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성경말씀에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벧전5:7).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 광야에 머물면서 모세는 각 지파에서 두령을 뽑아 12명의 정탐꾼을 40일간 가나안 땅으로 보냅니다. 그들이 두루 다니며 상황을 보고 하였는데 열 명의 보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절망케 했습니다(민13:31-33). 성경에는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상황이나 통계에 의존했던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삼무아, 사밧, 이갈, 발디, 갓디엘, 갓디, 암미엘, 스둘, 나비, 그우엘입니다.
열 명의 부정적인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망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약속을 어기신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사고로 하나님을 이해하기에 이러한 절망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절망의 강을 건너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당한 절망이 있다면 그것을 믿음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의 소망없는 보고로 인해 이스라엘은 사십년이란 세월을 방황하게 되었고, 허탄한 보고를 했던 열 명 역시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10절)
출애굽 이후 새로운 곤경에 빠질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불만과 반항의 행동을 취하였습니다. 이제 목적지를 바로 눈앞에 두고 이러한 불만과 반항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모세를 제치고 자신들이 원하는 다른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겠노라고 요동합니다. 불만과 반항의 소리를 듣고 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옷을 찢고 자기들의 당혹감을 표현하며 지금 얼마나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백성에게 똑똑히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믿음을 지킬 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1-38절)
하나님께서 불신앙 속에 빠진 이스라엘을 벌하시려고 할 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호소합니다.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모세와 하나님의 대화는 이스라엘이 타락하여 금송아지를 만든 뒤 벌어진 대화와 본질적으로 똑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예와 하나님께서 해 주셨던 자기 계시를 강조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였습니다.(출 34:6-7).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과 불평은 그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출애굽 직후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왔을 때, 먹을 물이나 먹을 것이 없을 때,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후 더디게 내려온다고 생각될 때, 광야 여행이 힘들다고 생각될 때, 애굽의 생선과 마늘이 먹고 싶을 때,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땅 정복이 어렵다고 느껴질 때 그들은 지체없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지만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 또한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며, 자기 백성을 포기하시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을 멸시함에 대한 형벌은 반드시 감당토록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악평함으로 백성들로 낙담하게 만들었던 열 명의 정탐꾼들에게는 곧바로 형벌이 집행되었는데,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격하고 확인 할 수 있는 공개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처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에 전적으로 복종했던 갈렙은 자신이 정탐 중 밟았던 헤브론을 분배받게 되는 과정을 여호수아 14장과 15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수14:6-14; 15:13-19).
(39-45절)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범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지만 그 회개는 잘못된 회개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지만(25절) 이스라엘은 그 말씀에 불순종하고 가나안 원주민을 정복하고자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44절에 표현된 ‘그래도’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순종이 되지 않을 때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더 크게 사게 되는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민수기 15장
인간의 평등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존중은 드러낸 행위입니다. 경외심이 없는 존중은 아부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선 굽실거리다가 자기 아랫사람들을 향해선 분풀이를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 중에 용서에 관한 사건이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정작 작은 잘못에 대해선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경외심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나 이웃을 향한 경외심은 존중의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하지 못한 것입니다.
용서는 성경에서 강조하는 평등정신입니다. 결코 마음으로 그를 경외하지 않고는 용서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시대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대해서 본토인이든지 문화가 달랐던 이방인이든지 같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차별을 두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민15:14-16)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균일하게 사랑하십니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요 사랑의 법도인 것입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길 수 없다면 우리의 성공의 폭은 좁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조금 위에 있다 하여 아랫사람을 천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사람 자체만으로도 존중을 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1-41절)
민수기 13장과 1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한 사건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아브라함의 언약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언약 때문에, 출애굽 사건이 있었고, 시내 산에서 모세 언약이 다시 있었고, 율법을 받았으며, 성막을 건설했고, 거룩이 무엇인지를 배웠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군대로 재편성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단숨에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민수기 13장과, 14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러 불순종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생명을 걸고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마치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린 가장 결정적인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부 멸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를 통해, 즉각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겨우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심판이 연기되었을 뿐이지, 심판이 취소된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 제 1세대를 광야에서 소멸시킨다는 심판이 이제 장기간에 걸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결정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회개한다는 표시로서 어리석게도 또 다른 불순종의 죄를 지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또 다른 불순종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전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배로 끝나버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참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늘 본문 민수기 15장 말씀을 통해, 놀랍게도,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민수기 15장은 얼핏 보면, 왜 여기에 이런 규례와 법도에 관한 말씀이 나오는지 그 이유를 놓치기가 쉽습니다. 민수기 13장, 14장 그리고 민수기 16장, 17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의 기록 한 가운데에,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는 말씀이 우뚝 서 있습니다. 민수기 15장은 하나님께 여러 종류의 제사를 드리는 내용이 아주 길게 나오고, 안식일 문제와, 옷단 귀에 술을 만들어 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민수기 15장은 앞뒤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의 이야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민15:1~2). 다시 땅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줄 텐데, 그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규례와 법도를 다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15장은 단순히 법도나 규례에 대한 강조로 마치는 게 아니라,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하나님은 한번만 하시는 게 아니라, 다시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민15:17~19). 땅을 다시 주시겠다는 약속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 땅의 양식을 먹게 된다(민15:19)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안식일에 대한 말씀(민15:32~36)과, 옷단 귀에 술을 다는 것(민15:37~40)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의문이 드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말씀은 30절과 31절에서 말한 고의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 대표적인 예로 든 것입니다. 그리고 37절에서 40절까지 말한 옷단 귀에 술을 다는 것도 역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 때 지켜야 할 규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민수기 15장 전체가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규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에 대한 약속을 더 이상 지키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땅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땅의 소산물을 먹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오로지 사랑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뜨겁기 때문에, 이렇게 불순종의 기록 한 가운데에 사랑의 증표를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악을 이기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불순종을 넘어섭니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를 결코 파악할 수 없습니다.
민수기 15장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수기 14장 2절에서 4절까지 출애굽의 구원을 무위로 돌리는 선언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친 선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외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런 선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바로 민수기 15장 41절 말씀입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들에게 소망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들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민수기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수기 강해,26장~30장 (0) | 2017.04.05 |
---|---|
민수기 강해,21장~25장 (0) | 2017.04.05 |
민수기 강해,16장~20장 (0) | 2017.04.05 |
민수기 강해, 6장~10장 (0) | 2017.04.05 |
민수기강해,1장~5장 (0) | 2017.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