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

민수기 강해,21장~25장

공 상희 2017. 4. 5. 07:03

민수기 21

 

하나님을 향한 신앙 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게 됩니다. 구약성경을 상고할 때면 백성들이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수기 20장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였고 또 다시 21장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민수기16장에는 하나님을 원망하여 14,700명이 염병(장티푸스)로 죽임을 당하게 될 뿐 아니라 지도자급 250명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 때문입니다. 그렇게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지만 원망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습니다. 민수기 14장에서는 12명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온 사실에 대해 열 명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통계적인 발표를 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또 다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결국 그들의 원망(14:1-3)은 가나안 정탐 날수를 계수하여 하루를 일 년으로 하여 40년간 광야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또 다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게 됩니다. 불 뱀을 통하여 원망했던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자(21:5-6)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해결책을 내 놓았습니다. 그것은 놋뱀을 만들어서 높은 장대 위에 매어다는 것입니다. 뱀에 물린 자가 그 놋뱀을 쳐다보면 치유되는 것입니다.(21:8-9) 그러나 백성들 중에는 놋뱀을 쳐다본다고 살겠는가 반분하며 쳐다보지 않아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는 마귀의 속성아래서 죽임을 당하는 자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음을 예언하는 것입니다.(3:14-15)

오늘날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등한히 여기게 됩니다. 광야에서의 백성들이 불순종한 것과 오늘날과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4-9)

일반적으로 사람에게는 오감이라는 다섯 가지 감각이 있습니다. 다섯 가지 감각은 외부 세상을 만나는 통로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죄의 유혹이 침투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첫 인류가 타락을 할 때, 오감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죄의 통로가 되었던 곳은 바로 인간의 눈, 시각이었습니다.(3:6)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에 매우 약합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나 자주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보는 것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는 아주 놀라운 사건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제 에돔의 거절로 인해, 가나안 땅으로 직행할 수 있는 왕의 큰 길로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던 길을 우회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던 길을 아주 멀리 돌아서 가게 되자 그 마음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한 마음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한 원망으로 표출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듣고 불뱀들을 보내 심판을 하십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과 달리 바로 회개를 합니다.(21:7)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와 모세의 중보기도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수 있는 구원의 방편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신 구원의 방편은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뱀에 물린 사람이 그 장대 위의 놋뱀을 보기만 하면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21:8-9)

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쳐다본즉 모두 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났다고 오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놋뱀에 자신을 비유하십니다.(3:14-15) 광야에서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면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린 당신을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갈수록 사람들은 믿음으로 보는 것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욕망으로 보는 것은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10-20)

호르산을 출발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까지의 지름길을 포기한 채 홍해 길로 우회해서 비옥한 모압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비스가 산에 도착합니다. 14절에 포현된 여호와의 전쟁기는 여호수아 1013절과 사무엘하 118절에 등장하는 야살의 책과 함께 성경에 제목만 알려져 있는 고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여호와께서 베푸신 사역을 찬양하기 위해서 모세시대에 기록된 송시 모음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의 내용이 성경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상당히 귀중한 책으로, 그리고 가나안 여정 중에 언급된 것으로 출애굽 여정을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는 관점에서 기술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브엘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은 노래를 했습니다(16).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브엘에서 우물을 파서 물이 솟아났을 때를 기억했습니다. 죽음의 땅 광야에서 생명의 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그 은혜를 감격하며 찬양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의 광야 인생을 끝내는 이스라엘 민족의 찬양이 생동감 있게 전달되어 지고 있습니다. 광야의 삶이 얼마나 목마른 삶이었겠습니까? 마음껏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노예의 삶에서 해방이 되긴 했지만 안정적인 삶에 또한 얼마나 목말라했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들이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말라있던 목을 하나님께서 친히 그 갈증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21-35)

가나안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로삼아 아모리 족속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에돔 족속에게 그 땅을 통과케 해 달라는 청원을 했다가 거절당했던 20장의 내용과 같이 아모리 왕 시혼에게도 사신을 보내 그 땅을 지나가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지만 역시 거절당했습니다. 자신들의 땅을 통과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아모리 왕은 자신의 군사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선제공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아모리 땅을 점령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34절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나아오는 옥 왕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결과로 35절을 통해 이스라엘의 승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민수기 22

 

불순종으로서의 순종

 

지도자는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 사람의 열매로 그의 본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7:16-20) 이 말씀은 영적인 지도자들에 관한 것입니다.

민수기 22장에는 발락과 발람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발락은 십볼의 아들로서 모압의 왕입니다. 모압 족속은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던 족속이었습니다. 그들의 하는 행위는 항상 악했기 때문입니다. 모압 족속의 시작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딸에게서 탄생한 족보가 아주 애매합니다. 롯의 입장에서는 아들이자 외손자요, 딸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이자 남동생입니다.(19:30-38)

모압과 암몬 족속은 후일에 하나님의 선민의 행로에 걸림돌이 되어 왔습니다. 발락은 오압 족속의 왕으로서 당시 최고로 번창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모압의 출생은 약 BC1890년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모압 왕인 발락을 만난 때는 BC1410년경입니다. 모압이 왕국을 건설하고 약 500년이 지났기에 모압 족속은 가장 발전한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현으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해결책은 악을 도모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 발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거였습니다. 발람은 모압 족속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발람을 소개할 때 브올의 아들이라 소개하였고, 발락을 소개할 때도 십볼의 아들이라 한 것은 브올이나 십볼은 모두 모압 족속이었습니다.

다만 발람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러하기에 죄악이 관영한 모압 족속의 도시에서 생활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발람 선지자는 성경에서 경고하는 가장 타락한 지도자중의 한 사람입니다. 발람의 최후는 모세가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일 때 그도 함께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31:8) 발람의 이름의 뜻은 백성을 파괴시키는 자입니다. 그 이름대로 끝이 아름답지 않는 선지자요 영적 지도자의 대표가 발람입니다.

 

(1-)

아모리 족속을 전멸시키고 모압 평지에 진을 친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는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대하는 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요단 건너편 여리고 맞은편에 서 있는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압 땅을 공격하지 않았음에도 모압 사람들은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3절을 통해 알게 됩니다.

민수기 22장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약탈자라는 뜻을 지닌 모압 왕 발락탐닉하는 자’, ‘백성을 파멸시키는 자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메소포타미아의 유명한 점술가 발람입니다. 발락은 이스라엘 군대가 아모리 남 왕국인 시혼의 모든 성읍과 아모리 북 왕국인 옥의 모든 성읍을 완전 초토화 시킨 일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영토를 정복했던 강력한 아모리 왕 시혼이 이스라엘을 섬멸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에 의해 점멸당한 일을 모두 보았기 때문입니다.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이스라엘을 무찌를 수 없다는 판단하에 생각해 낸 것이 미디안 장로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술사나 점술사들의 도움으로 나라를 지키고 위험으로부터 돌파구를 찾으려는 행위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행해졌으며, 행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

 

발락은 발람에게 예물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도록 부탁합니다. 그러자 발람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대답하겠다고 말합니다.(22:8)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은 복을 받은 자들이라고 단언하십니다.(22:12) 모압 왕 발락의 기대와는 달리 이스라엘은 결코 저주 받을 수 없는 민족임을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발람을 찾아온 모압과 미디안의 장로들이 손에 예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22:7)을 통해 발람이 불의의 삯을 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결국 발람의 거절을 받은 발락 왕은 더 높은 사절단과 더 많은 물질을 보내게 됩니다(22:15).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면서도 발락 왕이 보낸 사신들을 돌려보내지 못하는 발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친히 일깨워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라는 단서(22:20)와 함께 발람으로 하여금 모압의 고관들을 따라 가게 하셨습니다.(22:12) 발람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불의의 삯, 탐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을 위해 하나님의 사자를 준비시키셨습니다. 그 사자를 먼저 알아본 것은 발람이 아니라 바로 발람이 타고 가던 나귀였습니다. 나귀는 동물의 타고난 감각으로 여호와의 사자를 감지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귀의 눈을 밝히 여심으로 가능했던 일입니다. 탁월한 복술가인 발람은 탐욕으로 인해 그의 눈이 스스로 닫혀 있었던 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나귀는 거듭 여호와의 사자를 피하려고 주인의 발을 상하게 했으나 이를 알지 못하는 발람은 노하여 지팡이로 나귀를 세 번씩이나 때렸습니다.

일깨움을 받고도 모압 왕에게 자신의 사악한 꾀를 알려 줌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케 하는 일(2:14)을 하게하고 자신은 결국 비참한 종말(31:8)을 맞이한 발람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모압의 최고 권력자인 발락 왕은 일개 술사에 불과한 발람을 영접하기 위해 국경 지대까지 마중 나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그가 얼마나 조급한 상황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발람을 유혹하기 위해 간교한 회유책(22:37)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만들기 위해 이스라엘의 진영 끝부분까지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발람은 잠시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잠기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이 저주하도록 부탁을 받은 이스라엘은 전능자께서 보호하시고 복을 받은 민족이라고 친히 선언하신 백성입니다. 발람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기억하지 못함으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두 마음을 품고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우리의 내면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오늘도 겸손히 자신을 내어드림으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찾으시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민수기 23

 

발람의 교훈

요한 계시록 말씀에 오늘날에도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버가모 교회에 경고한 말씀입니다.(2:12-14)

버가모(Pergmos)의 뜻은 높이 졌다라는 의미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지은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버가모 도시는 주전 2세기에 화려한 도서관을 세울 정도로 문화와 학문이 발전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제우스 신전 탑이 12미터나 되는 거대한 도시로 사단의 위가 있었다고 표현한 곳입니다. 제우스 신 뿐 아니라 로마황제의 신전이 있는 곳입니다. 이들의 신전은 어마어마한 규모였으며 하늘을 치솟을 만큼 그들의 위용을 드러냈습니다. 당연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도 그들 못지않게 높은 탑을 쌓았을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버가모 교회는 이방신전과 건물 짓기의 경쟁에 몰입한 교회로서 건물에 집중하는 현대 교회의 좋지 않은 모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하신 교회는 건물로써가 아니라 무형의 교회입니다. 이 말씀은 많은 신학자들이나 영적 지도자들이 주장했던 무교회주의자의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 건물은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시대에 신앙의 대표는 성전이었습니다. 성전 역시 하나님께 제사하고 기도하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건물을 목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건물을 강조해야 만이 종교적 수입이 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그렇게 세워진 화려한 성전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19:41-46)

하나님을 이용하여 발람은 자기의 욕망을 채우고자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발람은 모압왕인 발락의 부름에 응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발락이 보낸 재물과 명예에 영적인 눈이 가려졌던 것입니다. 그는 끝끝내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청하게 됩니다. 발락의 달콤한 명예, 욕망이 그의 목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발락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처럼 서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불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에게 어떠한 말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발람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욕망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욕망이란 목적과 수단이 바뀐 것입니다. 건물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성공도 수단일 뿐입니다. 건물이 목적이 되고, 성공이 목적이 될 때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던 욕망이 분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건물은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입니다. 성공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이어야 합니다.

 

1-12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의 맞은편, 요단 건너편, 모압 평지에 진을 치게 되었는데 모압 족속이 그 숫자의 많음을 보고 압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백성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듣고 보았기 때문에 두렵고 떨게 됩니다. 그래서 모압의 왕인 발락은 복술인인 발람을 오게 하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부탁을 하게 됩니다.(22:6)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발람이라는 사람은 그 시대에 아주 유명한 복술가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 왕이 먼 거리를 장로들을 보내어서 모셔올 정도의 인물이었으니 말입니다. 발람이라는 사람은 메소보다미아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23:4) 그러니까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닌 것입니다.(640킬로) 그렇게 먼 거리를 한 사람을 데리러 많은 사람들을 보냈던 것입니다.

모압왕 발락은 이 발람의 복술적인 힘을 빌려서 이스라엘 민족을 몰아낼 생각을 한 것입니다. 분명히 저주하기 위해 부름을 받아서 이곳까지 왔고 또 저주를 해야 이익을 볼 수 있었던 발람은 저주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축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발람이 저주하기를 원치 않아서가 아니라 그 생각과 입술이 하나님께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필요하실 때에 믿는 자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라도 감동을 시키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감동의 역사를 행하실 때 그 감동으로 인해 성령 충만한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신앙이 아닐 수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은 의지적인 결단 속에서 바른 신앙인으로 살려고 하는 몸부림 속에서 결정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발람이 이렇듯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욕망의 사람이요 기회주의자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주권은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충분히 임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주권은 못 미치는 곳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게 됩니다. 아무리 마귀가 판을 치는 것 같은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주권행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소빔 들이라는 곳은 사해 북동쪽 비스가산을 접하고 있는 고원지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산봉우리가 많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전체 진영을 한꺼번에 볼 수가 없는 지형적인 특징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으로 인도하여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백성을 저주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23:17)고 발락이 발람에게 묻고 있습니다. 모압의 왕으로서의 발락은 이제까지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말을 듣는 입장이었습니다. 또한 신들까지도 그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할 줄로 알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발락에게 네가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할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십볼의 아들이여라고 말씀하십니다.(23:18) 인간의 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구별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 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과 인간이 다를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23:19) 이 말씀은 하나님은 인간들처럼 때를 따라 그 약속하신 바를 지키지 않고 그 뜻을 시시각각으로 변경하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하신 바를 온전히 지킴으로써 당신의 영광과 명예를 보존하시는 분이시다(딤후 2:13,6:18)는 것입니다.

 

(결론)

본문 말씀을 보면 발락은 또다시 발람을 자신의 욕망의 도구로 사용하려하고 있습니다. 천하의 복술가인 이 발람을 발락은 또 다른 장소로 인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주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락은 발람을 데리고 브올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특별히 바알 신을 제사하는 신당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바알브올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 오른 이 무리들은 이곳은 바알 신만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신이 힘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한편 복술가 발람은 자신을 휘감고 있는 어떠한 힘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매료되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큰 힘이 자신의 입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241절에 보면 사특한 이 발람은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쓰기로 하였습니다. 그 방법은 점괘를 받으러 특정한 장소로 가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방법을 바꾸면 이스라엘의 신이 혹시 힘을 못 쓰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여전히 제물에 눈이 어둔 이 발람은 그냥 눈을 들어 이스라엘의 천막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냥 의지적으로라도 이스라엘을 저주를 할 수 있으면 할 생각이었습니다. 많은 물질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영이 또다시 발람위에 임하셨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입만 붙드시는 것이 아니고 전인격을 붙잡으셔서 황홀경에 빠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장래와 주변국들의 운명까지 예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엎드려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노펠이라 하여 떨어지다 누워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신에 압도되어 발람이 영적 .육적으로 포복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몇 번이고 실패하고도 거듭되어지는 이악한 계획에 결코 틈을 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이번에는 발람을 황홀경에 빠뜨리기까지 하시며 지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노래하게 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백성들은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이스라엘의 내면적인 복을 노래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에 주어질 탁월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기반을 하나님께 두지 않았다면 주어질 수 없는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6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마치 침향목 같고 백향목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침향목은 인도 지방에서 자생하는 귀한 나무입니다. 높이가 3-3.7m정도로 성장하는데 주로 고급 향품의 재료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또한 백향목은 매우 위품이있고 아름다운 나무로서 높고 곧게 뻗은 자태로 인해 위엄과 영광을 상징하는 나무인 것입니다. 고급향기가 풍겨나면서도 위엄과 영광이 있는 이스라엘백성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며 또한 오늘날의 선택받은 주의 백성들의 모습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또한 7절에 보면 아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말은 그 시대의 가장 위대했던 왕의 이름입니다. “아각보다 높으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 이 말씀은 영원한 왕이 되신 예수님과 영원할 그의 나라를 예언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재 확인시켜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또 지키실 것을 재확인 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민수기 24

 

불의의 삯

 

목사는 세상의 직업을 가질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는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 밖에서의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가 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목회에 전념하기로 부름 받고 결심한 목회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생활에 허덕이게 되면 삯이 목적이 되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 멸망당한 사람이 대표는 발람 선지자입니다(벧후2:15-16)

모압왕 발락도 예외는 아니어서 발람에게 이스라엘의 저주를 부탁했다가 오히려 축복을 빌게 되자 화가 난 발락은 발람을 쫓아내려 했습니다. 이에 발람은 마지막으로 장차 이스라엘이 행할 일에 대해 예언을 하게 되는데 아말렉과 가인 족속에 대한 예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아말렉에겐 불순종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아말렉은 에서의 손자입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던 자입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에 관심이 없던 자입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 알기를 우습게 알았습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명분을 중요시하여 그것을 얻었던 야곱은 어떠한 축복을 받았습니까? 오늘 본문 민24:17 의 예언대로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그는 그 후손에게서 메시야가 탄생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야곱은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주고라고 장자의 명분을 쟁취했던 반면에 에서는 이미 자기에게 주어진 장자의 명분조차도 하찮게 여겨 동생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즉 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으라는 복음에 대해 철저하고도 명백하게 불순종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피가 에서의 손자인 아말렉에게도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아말렉은 하나님의 영원한 대적자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큰 기사와 이적을 통하여 탈출하였고 홍해를 건넜으며 마라의 쓴물이 달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방의 여러 나라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사역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 여러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말렉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최초의 대적자 됩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명백한 대적 행위입니다.

3.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대적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는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17:14)고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을 대적한 아말렉은 바로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아말렉의 공격 목표가 되지만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공격 목표는 바로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야비하고도 끈질긴 무리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원한 대적자인 사탄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4. 아말렉은 최종적으로 멸망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최종적인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아말렉은 열국 중 으뜸'이라고 하였습니다. 확실히 그들은 강대하며 용감했습니다. 감히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인 이스라엘을 대적할 나라는 그들밖에 없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보면 그들은 이스라엘과 막상 막하의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말은 멸망이었습니다.

 

민수기 25

 

질투하시는 하나님

종교와 문화는 상호 의존적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문화는 곧 그 나라의 종교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민수기 25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브올이란 신을 섬기는 문화에 속하였다가 24,000명이나 죽임을 당하는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의 전말은 끝을 맺는 광야 생활 중에서 큰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평지에 진을 치게 됩니다. (22:1) 이곳은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의 장소로서 평야입니다. 그 지역을 주관했던 나라는 미디안이라 불리는 모압 나라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모압은 롯의 큰 딸이 낳은 모압이 조상입니다. 모압은 브올산을 중심으로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바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섬기는 바알과는 차별을 두었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종교적 의식을 그들 나름대로 토착화 시킨 것이 바로 바알브올입니다.

 

모압 왕인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군해 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대항하기 위해 브올의 아들 발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게 합니다.(22:41 - 23:1) 발람은 장소를 옮겨가며 일곱 단을 세 차례나 쌓고 하나님께 제사합니다. 그 때 마다 발람은 노래를 지어 하나님의 마음을 발락과 미디안 두령들에게 전했습니다. 발락은 화가 났습니다.(24:10-11) 발람이 꿈꿔왔던 화려한 명예와 재물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발람은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멸망하게 할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바알브올의 종교적 문화에 빠져서 스스로 범죄케 하는 것입니다.(2:14)

발락은 발람의 제안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강경정책이 아니라 속임수를 쓰게 됩니. 바알에게 드려진 우상의 제물과 바알의 여사제를 풀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음행케 한 것입니다.(25:15)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 바알브올 숭배와 음행 사건 (25:1-5)

우리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려한 발락과 발람의 술책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본문 민수기 25:1-5 에서는 그 같은 하나님의 도우심에도 아랑곳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혹되어 모압 여인과 행음(行淫)하며 저들의 우상 바알브올을 섬겨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았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1-3).

한편 이러한 비극적 사건의 배후에 발람의 사주(使嗾)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31:16) 그렇지만 이로 인해 그는 결국 이스라엘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31:8 ; 13:22).

 

. 비느하스의 열심 (25:6-15)

여기에서는 악과 의 사이에 주목할 만한 투쟁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결국은 의가 반드시 승리하는 것처럼 여기서도 의가 승리합니다.

(1) '시므온인의 종족 중 한 족장'시므리가(14) 저지른 악만큼 뻔뻔스러운 것은 없었습니다. 그는 모세와 이스라엘의 모든 선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공공연하게 미디안의 창녀를 이끌고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공의를 모욕하고 그것에 반항하는 무례한 행위였습니다. 또한 그것은 국가의 신앙을 모욕하고 경멸하는 행위였습니다.

(2) 비느하스는 시므리의 뻔뻔스러운 행동을 보고서 거룩한 분노를 느껴 기도하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을 들고 그 뻔뻔스런 죄인들을 쫓아 장막에 들어가 둘 다 찔러 죽였습니다(7,8). 비느하스가 한 일을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직의 법정 추정 상속인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모세에게서 바알브올에게 부속되었던 모든 자를 죽이라고 명령을 받았던 이스라엘의 재판관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비느하스의 경건한 열심을 받아 들이셨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106:81).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를(그가 어린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애국자요 최고의 친구라고 선포하셨습니다(11). 그리고 제사장 직분을 그의 후손에게 영원히 언약해 주셨습니다. 이 제사장직은 이전부터 그에게 위임될 것으로 정해진 것이었지만 이제는 확정 되었던 것입니다.

 

. 미디안인들에 대한 보복 25:16-18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서 염병으로 그들을 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자기의 자녀를 막대기로 징계하신 것입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꾀어 음행을 행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끼친 해악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아말렉이 그들과 싸워 끼친 해만큼 (17:14) 심각한 것으로 기억되어야 하고 따라서 엄하게 징벌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되어지는 모든 것은 우상숭배로 이어지게 됩니다.

우상숭배는 곧 하나님의 진노를 뜻합니다.


'◉민수기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수기 강해,31장~36장  (0) 2017.04.05
민수기 강해,26장~30장   (0) 2017.04.05
민수기 강해,16장~20장  (0) 2017.04.05
민수기 강해,11장~15장  (0) 2017.04.05
민수기 강해, 6장~10장  (0) 2017.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