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의 베데스다 (요 5:1-9)
이 시간에 “소망의 베데스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겠습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그의 저서를 통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절망이 삶에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지적하면서, 제2편에서는 '절망은 죄'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희망의 신학자로 알려진, 위르겐 몰트만 박사도, "오늘날 인류를 비참한 상태로 몰아넣는 것은, 절망하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 말씀은, 절망은 죄다."라고 말하면서, 그 역시 "절망은 재앙을 부르는 가장 나쁜 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그리스도인들이 진짜 절망하지 않아야 할 확실한 이유가 있습니다.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의 연못에 누구보다 먼저 뛰어들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수고하고 노력 했지만, 매번 허사였습니다. 이제는 지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며 절망하는 순간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 병을 고치고 소망을 얻었다는 말씀 입니다.
♣그 병자는 병을 낫기 위하여, 기적의 베데스다 연못에 뛰어들기 위해, 38년 동안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물이 동할 때, 먼저 뛰어든 사람에게, 치료가 임한다는데, 병이 너무 중하여 뛰어들 수 없었고, 뛰어들고자 해도, 병이 가벼운 사람들이 양보하지 않고 먼저 뛰어들기 때문에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 오셔서, 병을 깨끗이 치료해 주시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세상의 베데스다는 그 병자에게 소망을 주지 못했어도, 참 된 베데스다 연못 되신 주님은, 그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만나면, 절망에서 소망을 얻게 됩니다.
왜 예수님 만나면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게 될까요?
1. 예수님께서 모든 저주와 절망을 담당 하셨기 때문입니다.
♣2절에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여러 문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양이 출입하는 양문, 어민들이 출입하는 어문, 말이 출입하는 마문, 동문, 함밉 갓 문(군인들이 출입하는 문) 등 여러 문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양문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 제물로 드려지기 위한 양이, 출입하는 문입니다. 그런데 치료의 베데스다연못이, 바로 양문 곁에 있었습니다.
♣이 양문 곁에,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다는 것은, 그 연못이 암시하는 바가 큽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저주와 절망을 담당 하시고,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실 것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1:29에서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했고,
♣갈3:13에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 만나면, 모든 죄와 저주와 절망에서 구원받아 소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는, 우리 민족이 얼마나 많은 저주 아래 살았습니까? 그래서 이사도 맘대로 못하고, 나무 하나 베지 못하고, 돌 하나 옮기지 못하고 벽에 마음대로 못하나 박지 못했습니다. 만약 귀신의 허락 없이 맘대로 했다가는, ♣미신 같지만, 저주를 받아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고 귀신을 달래는 굿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이 땅이 삶이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이제는 무엇을 해도, 불신자들까지도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귀신으로부터 자유 함을 얻어, 맘대로 해도 저주가 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보이는 저주나, 보이지 않는 저주나, 예수이름으로 부르짖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때문입니다.
♣마음의 고통이 있습니까? 슬픔이 있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저주를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조금이라도 불행한 생각이 있거든, 나사렛 예수이름으로 명령하며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저주는 우리 곁에서 떠나고 말 것입니다.
2.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2절에 그 연못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합니다. 왜 성경 기자가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라고, 그 연못의 이름을 부각시켰을까요?
♣그 이름에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란, ‘자비의 집’혹은 ‘긍휼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데스다 연못의 중앙과 주위에는 행각이 다섯이 있었습니다. 3절에 보니까, 그 안에는 많은 병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베데스다 연못 주위에 있는, 행각 다섯이 있는데, 병자들도 올 수 있었습니다. 소경도, 절뚝발이도, 혈기 마른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곳은 불쌍한 사람들이 올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인 긍휼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와서 불편한 몸을 쉬게 했습니다. 3절과 6절을 보면, 누웠다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즉 누구든지, 행각에서 마음껏 누워 쉴 수 있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와서, 쉴 수 있는 긍휼이 있는 행각 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자비와 긍휼을 의미 합니다.
그래서 ♣마11:28-30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소망을 얻게 됩니다.
♣악의 영은 임할수록 불안하고,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진정한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독생자를 대속 제물로 보내사, 우리를 죄와 저주와 절망에서 구원해 주시고 소망을 주셨기 때문 입니다.
3. 예수 만나면 새 능력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4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온천으로, 간혹 물이 나오다가, 치솟아 오르는 간헐천이었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분출하는 베데스다의 솟아오르는 물은, 무엇을 의미일까요?
힘을 상징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사40:29-31에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예수 만나야 새 능력을 받습니다.
다른 종교로서는 새 힘을 주시는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잘 믿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면, ♣하나님께서는 지혜가 필요하면 지혜를 주시고, ♣재능이 필요하면 재능을 주시고, ♣믿음이 필요하면 큰 믿음을 주시고, ♣용기가 필요하면 용기 주시고, ♣신유의 치료도 주시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자신감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충만 받기를 사모해야하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 능력을 힘입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기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1절에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했고, 5-6절에는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셨습니다. 38년 된 중환자를 연못에 넣어주는 자가 없어 그는 사실상 절망상태였습니다.
♣물론 물이 동할 때 뛰어들면, 낫는다는 것은, 자기 믿음으로 낫기도 하고, 심리적인 효과로 낫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베데스다 연못이 동할 때, 뛰어든 사람들 중에는 낫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못의 물이 동하면, 병이 가벼운 사람들이 먼저 뛰어 들어가서, ♣이 병자에게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이기심이 팽배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곳에 오셨다 한들, 예수님이 누구시고, 어디 계신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혹 물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미신일 뿐 낫는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예수님께서 그 중환자에게 다가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그대로 순종했더니 그 순간 그의 오래된 병은 깨끗이 치료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는, 내가 주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가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찾아오셨고, 우리에게 복음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어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이 시간도 변함없이 우리들의 소망의 베데스다이십니다. 38년 된 병자와 같이 절망 가운데 있을지라도, 주님은 자기를 소망하는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 충만으로 거듭나, 우리의 억만 가지 죄와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보혈로 대속 받고. 예수 안의 아버지의 참 사랑과, 성령의 새 능력을 받아, 저주는 사라지고 온전한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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