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과 동방 박사
마 2:1-1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
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
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
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
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
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
배하게 하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
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
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
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올해 성탄절은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지구상
의 모두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기 예수
를 위해서, 아기 예수 때문에 성탄절을 축하하고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그 누구의 생일이 아니라, 바로 "아기 예수의 생일"입니다. 따라서 이 날만큼은 모든 영광
과 존귀와 찬양이 "아기 예수"에게 돌려져야 합니다. 성탄절 때 실시되는 여러 행사와 이
웃 사랑 또한 아기 예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성탄절
은 아기 예수를 위한 날입니까?
그러면, 이방인으로서 가장 먼저 아기 예수께 경배한 동방 박사의 자세를 살펴봄으로, 아
기 예수께 드려야 할 온전한 경배와 찬양의 모습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먼 길을 찾아온 동방 박사
동방 박사들은 목숨을 걸고 아기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
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마 2:1). 학자들에 따
르면, 여기서 "동방"이란 바벨론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곳으로부터 유대 베들
레헴까지는 아주 먼 길인데, 동방 박사들은 강도, 질병, 사막, 강, 짐승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유일한 목적을 가지고 멀고 먼 길을 나
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예수 한 분
만으로 기뻐하고 눈물 흘렸던 첫사랑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습니까? 우리는 금번 성탄절을
맞아 잃었던 첫사랑을 다시 회복할 뿐 아니라, 동방 박사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모
든 것을 초월하는 신앙으로 성장, 성숙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먼 길을 온 동방 박사들과 달리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예수
님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동방 박사들에게 메시아가 베들
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성경의 예언을 가르쳐 준 사람들입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
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마 2:4-5). 그들이 성경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전히 믿었다면, 쉽게 이 예언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먼 길을 온 동방 박사들과 달리, 그들은 베들레헴으로부터 8
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메시아가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즉, 경험과 환경에 근거해서 말씀을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그 결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은 아기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데 앞장
섰습니다(마 27장).
이처럼 우리에게도 말씀보다는 경험을 의지하고 환경을 바라보는 성향이 있습니다. 우리
는 하루빨리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베뢰아 사람처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말
씀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
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
로』(행 17:11).
둘째,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한 동방 박사
동방 박사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부귀와 명예를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학문
적 호기심이나 정치적 목적, 또는 개인적 욕망을 위해서 아기 예수께 나오지 않았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먼 길을 온 이유는 오직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유
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
노라』(마 2:2)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처럼 이 땅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깨달았
고,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은 배설물로 여긴 것입니다(빌 3:8). 이러한 동방 박사들의 자
세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떤 목적으로 예수님께 나오며, 어떤 마음
으로 성탄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크리스마스"란 "그리스도"와 "경배"란 말의 합성어입니
다. 다시 말해서 성탄절은 놀고 즐기는 날이 아니라, 아기 예수께 경배 드리는 날입니다. 예
수님을 아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며, 예수님께 경배 드릴 수 있는 것이 최고의 특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먼 길을 찾아 온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 드렸습니다.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동네에, 방도 없이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왕이라고 믿고 엎드려 경배 드렸습니
다. 이처럼 동방 박사들은 하나님의 역사(별)와 성경을 굳게 믿었기에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 드릴 수 있었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
드려 아기께 경배하고』(마 2:11상). 여기서 "경배했다"는 것은 "몸을 던져 엎드렸다"는 뜻
입니다. 이 말은 동방 박사들이 모든 지위와 체면, 그리고 자존심을 버리고 아기 예수 앞에
완전히 엎드렸음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앞에 온전히 나를 드리는 것, 바로 이것
이 참된 경배입니다. 이러한 동방 박사의 자세, 즉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한 세례 요한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온전히 경배
하는 것입니다.
셋째, 세 가지 예물을 드린 동방 박사
동방 박사들은 가장 귀한 것을 아기 예수께 드렸습니다.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11하).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때는 그 사람에게 어
울리는 것을 준비합니다. 따라서 동방 박사들의 세 가지 선물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영광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황금"은 예수님이 이 땅을 통치하시는 "왕"이심을 상징합니
다. 그리고 "유향"은 제사 때 쓰는 것으로, 예수님이 "대제사장"이심과 "하나님"이심을 의미
합니다. 끝으로 "몰약"은 시체 보존을 위해 쓰는 것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인
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동방 박사들은 예수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는
예물을 드렸습니다. 우리도 동방 박사들과 같이 금번 성탄절은 우리의 왕이자, 구세주이시
며, 다시 오실 예수님께 가장 잘 어울리는 예물을 드리는 날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을 예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에게 독자를(창 22장),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양식을 요구하신 것(왕상 17장)은 그것이
모자라거나,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이 마리아의 향유(요 12장)와 과부의 두 렙
돈(눅 21장)을 기쁘게 받으신 것은 그 마음의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은 우리로부터 황금같은 믿음과 유향같은 기도와 몰약같은 헌신을 받기 원하십니다. 그런
데 우리는 성탄절을 맞아 자녀들이나 개인을 위해서는 무슨 선물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가장 좋은 것을 쓰면서, 예수님께는 어떤 것을 드리고 있습니까? 준비된 예물을 드리고 있
습니까? 금번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은 내 생애 최고의 예물을 예수님께 드리는 성탄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아기 예수를 "보고", "경배" 드리는 성탄절의 영광을 누린 사람은 얼마 되
지 않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아기 예수를 기다렸고, 사모했으며, 하늘의 음성에 귀
가 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탄절을 해마다 돌아오는 관례적인 절기
로 맞이할 것이 아니라, 동방 박사들처럼 아기 예수를 보고, 몸과 마음과 뜻을 바쳐 경배 드
리는 영광의 날이 되도록 합시다.
성탄절을 맞는 자세
본문 눅1:26-38
강림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예수 님을 기다리는 설렘이 절정에 달하는 주간입니다. 예수 님은 온 인류의 소망이요 사랑이요 믿음으로 오셨습니다. 그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해들은 사람은 나사렛 동리에 사는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정혼이란 결혼식만 남겨 놓은 부부를 말합니다. 정혼한 관계는 같이 살지는 않지만 결혼을 약속하고 준비하는 사이입니다. 만약에 이 기간에 부정한 관계를 가지면 공개 석상에서 돌로 쳐서 죽여 불에 태우는 엄격한 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주 예수를 세상에 보내실 계획을 세우셨고 그 사실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통보한 것입니다. 일이 이쯤 되면 당사자인 마리아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처녀인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큰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놀랍게도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 아기 예수가 잉태된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리아의 그 자세를 살피면서 금년 성탄절을 맞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코자 합니다.
⑴ 겸손해야 합니다(29)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 "은혜를 받을 자여 평안 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
시도다"고 하자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천사가 찾아온 것도 큰 일인데, 아니
하나님이 함께 하신 다니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은혜였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겸손히 자신
을 주의 계집종(38)이라고 낮추었습니다. 이와 같이 마리아와 하나님의 관계가 겸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게 낮아졌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감당키 어려운 명령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자존심을 내세우거나 자신의 신변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종은 주인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신분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종들입니다. 우리가 종이므로 당연히 주님을 위해서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각오
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치 못하고 내가 살아 있고 나른 높이는 마음이 있으면 이웃
과 마찰이 생기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강림 절기에 겸손의 자세가 첫
번째로 가져야 할 자세임을 알아야 합니다.
⑵ 순종해야 합니다(38)
천사가 와서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천사의 소식을 들은 마
리아는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이이 있으리이까(34)"하고 반응을 했습니다. 천사
가 다시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답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그 말씀에 마리아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 지
이다"(38)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자세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마리아는 믿음
의 자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처녀인 자신에게 잉태된 사실을 그것도 그
사실이 알려지면 공개 처분을 당하는 죽음의 길을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머
리로 도저히 계산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 이상의 어떤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길,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의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고, 상
식을 동원해도 이해할 수 없고, 인류역사의 어떤 경험으로도 없었던 일이지만, 하나님의 말
씀이므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초림을 기다리게 되었습니
다.
이처럼 믿음은 순종을 통하여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 지이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원하시면 저를 사용하여 주십시오 제가 말씀 앞에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의미입니
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순종의 자세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당시 마리아와 상황은 정혼한 상태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각오가 아니
면 순종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어떤 비싼 대가도 각오했습니다. 가족들의
따가운 시선, 친구들의 비웃음, 이웃 사람들의 조롱, 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
에도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때
로는 부부 사이에 의견 차이로 오는 어려움도 각오해야 합니다. 때로는 가족들과의 마찰도
각오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후 순종하려고 부모 아래서 응석부릴 나이에
전쟁터에 나가서 싸워야 했고, 사회로부터 보호를 받고, 국민의 한사람으로 왕의 보호를 받
아야 할 사람인데도 왕에게 쫓겨다니는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좋은 가문, 많
은 지식, 물질 명예 등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갖추었으나 순종의 길을 가려
고 굶주리고 매맞고 옥에 갇히고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으면서 세계 복음 화의 초석이 되
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헌신짝 같이 버림받아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바랐습니다. 놀라운 순
종의 자세를 우리도 본 받아야겠습니다. 마리아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순종과 깊은 연관이
있는 헌신의 자세로 들어갑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자신의 몸을 온
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로 드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마리아를 쓰시는가? 35절에서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덮인 것을 의미할
때 쓰인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아무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
력이 마리아를 붙잡고 역사 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겨우내 얼었던 대지 위에 봄기운이 덮
이면 새싹이 돋아납니다. 그와 같이 무력한 인간이지만 성령의 능력이 입혀지면 기적이 일
어납니다. 그래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의 드
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그러면 하나님이 쓰십니다. 우리는 멸망에서 구원받은 자들입니
다. 죽음에서 구원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마리아처럼 하나님께 붙잡혀 크게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
다.
⑶ 찬양해야 합니다(46).
46-56절까지는 유명한 마리아의 찬양입니다. 마리아가 당한 상황을 미루어 보면 결코 찬양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기쁨으로 찬양하며 장차 구세주로 자신에게서 태어
나실 예수 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특권
입니다. 현실적으로 어둡고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는 망하지 않는 다는 소망 때문입니다.
장차 예수께서 오셔서 어둔 세상을 밝게 해 주시고, 무질서한 세상에 질서를 잡아 주시고,
불공평한 세상에 공의로 이끌어 가난 한자, 억울 한자, 소외된 자, 포로 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실 것을 영광이 있습니다.
고난 뒤엔 영광이 있습니다. 지금 고통스러워도 찬양하십시오. 찬양은 믿음을 확증하는 신
앙의 표현입니다. TV나, 라디오, 또는 테이프를, 통해 들려지는 기계적인 찬양이 아니라 마
리아의 찬양처럼 영혼의 찬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찬양은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여 불안,
두려움, 근심, 걱정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부
르며 경건하게 맞이하는 성탄이 되게 합시다.
히브리 민족은 대대로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아왔습니다. 이것은 온 인류가 예수 님을 기다
리는 자세를 대표합니다. 오늘도 거리에는 캐럴이 울려 퍼지고 크리스마스 트리가 휘황찬란
하고 백화점마다 선물 인파가 늘어섰고 유흥가에는 마시고 춤추며 즐기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만약에 오늘 예수 님이 세상에 오신다면 예수 님은 외로우실 것입니다. 누굴 찾으
시겠습니까?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도 가장 외떨어진 나사렛 동리에서도 무명의 사람을 통
하여 오셨듯이 오늘도 사람들의 관심과는 먼 곳 그러나 준비된 자들의 삶 속에 찾아오실 것
입니다. 겸손, 믿음, 순종, 헌신, 찬양의 자세로 예수 님을 맞은 마리아처럼 우리도 금년 성
탄절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성탄절과 영적 전쟁
계12:1-17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 찬양하여라]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성탄절은 누가복음에
서 천사들이 노래한 것처럼 예수님의 오심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왠지 모르게 기쁘고 즐겁고 복되고 행복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성탄절을
하루 앞둔 오늘, 여러분들도 행복하고 기쁘시죠? 행복하고 복된 성탄절이 되시기를 축복합
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의 성탄절이 참다운 의미를 드러내기는커녕, 사탄이 던져 놓은 세속
적인 물결에 묻혀 흥청거리고 있습니다. 본래 첫 번째 성탄절의 분위기는 오늘날처럼 화려
하지도 풍요롭지도 흥청거리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대인의 왕, 메시아가 나셨다는 소식
을 접한 헤롯의 비롯한 지도자들은 위기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
의 왕권을 지키기 위한 술책과 계략을 세우느라 분주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엄청나게 치열한 영적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그
전쟁은 바로 오늘날 교회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탄
절은 기쁨이 넘치는 축복의 절기임과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엄청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하는 긴장된 절기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요한계
시록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성탄절을 맞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
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영적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한 여자에 대한 묘사로 시작됩니다.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
하게 되었고 극심한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5절에서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 아들은 장차 철창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철
창으로 만국을 다스릴 권세는 시편 2장 9절에서 메시아에 대한 묘사에서 사용되었으며("네
가 철창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요한계시록 2:26-27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권세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
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을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그러므로 여자가 낳을 그 아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낳은 여인은 마리아, 또는 교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3절과 4절에 큰 붉은 용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나 달린 붉은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세상을 장악한 사탄의 권세는 모든 인간들을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영원
히 종노릇 하다가 지옥에 던져지는 운명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 있는 것 같으
나 실상은 죽은 자들입니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의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세상을 보시
며 하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손을 펼치셨습니다.
이제 사탄의 권세를 멸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역사를 시작하시려 하
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
나 이 소식을 이 세상에서 죄악에 얽매여 사는 인생들에게는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지만 사
탄들에게는 선전포고였습니다. 이제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은 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든지 메시아가 이 땅에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온갖 방해공작을 다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첫 번째 성탄절의 모습은 피로 얼룩진 역사였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붉은 용은 사탄입니다. 일곱 개의 머리와 열 뿔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싸울
태세를 갖춘 사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사탄은 헤롯을 움직였습니다. 유대의 분봉 왕이던 헤롯은 자신의
권좌를 위협할만한 새로운 인물, 즉 예수님이 탄생했다는 했다는 소식을 동방의 박사들을
통해 듣고, 예수께 경배한다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걸고 박사들에게 예수를 경배하고 돌아올
때, 예수가 탄생한 곳을 알려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박사들을 다른 곳
으로 가게 함으로 헤롯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두 살 아래의 모든 남자 아기를 죽이는
엄청난 살생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애굽으로 피하여 약 3년간을 지내
시다가 헤롯이 죽자, 나사렛에 돌아와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6절). 이렇게 예수님의 탄
생은 사탄에게 두려움이었기에 어떻게든 그의 탄생을 막기 위해, 또 그의 사역을 막기 위해
몸부림을 치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사탄과의 영적 전쟁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면
서 본격화되었습니다. 사십 일을 금식하며 기도할 때, 물질로, 권세로, 명예로 예수님을 시험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넘어지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에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통해 끊임없이 시험하게 만들고, 급기야는 사랑하는 제자인 가룟 유다 속에 들어가 배신하
게 만들고, 동족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사탄은 자신들의 승리를 자
축하였지만 그것도 잠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시더니, 40일 후에 승천하심
으로 사탄의 작전을 실패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영적 전쟁에서 패배한 사탄은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제, 7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하늘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의 모
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권세를 위임받은 미가엘과 용, 즉 사탄이 전쟁을 벌이고 있습
니다. 그러나 용은 이 전쟁에서도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8절을 보면 "이기지 못하여 다
시 하늘에서 저희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용이 하나님의 권세에 대적하였다가 참패를 당
하고 하늘에서도 있을 곳을 찾지 못하고 하늘로부터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용이 쫓겨나자
하늘에서는 큰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습니다(10-12).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영적 전쟁에서 사탄은 완전히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탄도 그냥 물러서지를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승천으로 인하여 하늘에서의
영적 전쟁에서 패한 사탄은 이제 영적 전쟁의 장소를 바꾸었습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용
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4절에서 용은 여
자가 낳을 아이를 삼키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처음 공격대상은 여자가 낳을 남자
아이, 즉 예수 그리스도였는데, 그 아이가 하늘로 올라가자(그리스도의 승천) 그 용은 하늘
까지 올라가 전쟁을 치르다가 그곳에서 완전히 패배를 당하고 땅으로 쫓겨났고, 이제는 여
인, 다시 말해서 교회를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14절부터 보면 아들을 여자가
사탄의 핍박을 받게 되자 큰 독수리 날개로 광야로 데려가 보호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
호는 신실하여 그곳까지 따라온 뱀(마귀)이 그 입으로 강물을 토해서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
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땅으로 하여금 그 입을 벌려 강물을 모두 삼키도록 하였습니다. 처
음에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나중에는 교회를 파멸시키려는 사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용은 분노하여 여자의 남은 후손들, 즉 교회의 성도들과의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한 준비
를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요한 계시록 12장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1. 성탄절을 앞둔 우리는 영적 전쟁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웃고 즐기고 기뻐하기만 하는 날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오실 때처럼, 원수
마귀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주 오심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
여 그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없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들의 성탄절에는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계시는 것입니까? 언제부턴가 성탄절
의 주인공이 산타클로스로 바뀌었습니다. 첫 번째 성탄절에 탄생하신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
해 마구간을 찾은 사람들은 저 이방의 동방박사 세 사람과 양을 지키던 몇몇의 목자들뿐이
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에 많은 화려한 장식이 있고, 춤과 노래와 연극이 있
지만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지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상업주의와 세속주의로
화려하게 포장된 유흥, 사치, 향락의 문화만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사탄이
뿌려놓은 영적 전쟁의 무기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사탄은 지금 교회를 향해 총공격을 퍼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
서 하늘 나라의 모든 일을 그의 제자들에게 위임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를 세우심으
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게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끝 부분을 보면 "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나오는데 예수님의 손에 들
려진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
하셨고 지금 이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 대신 교회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
수님이 하시던 일을 행하도록 위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의 핵심이
요, 중심인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귀중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부흥하고 거룩하
게 구별되면 그 시대는 부흥하였습니다. 교회가 능력이 있으면, 그 시대는 거룩한 일들이 많
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교회가 타락하면 그 사회도 덩달아 타락하고 부패해졌습니다.
어떤 시대든지 간에 교회는 세상의 바로미터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공격하다가 실패한 사탄은 지금 이 땅의 교회를 공격대상으로 삼고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
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속화하게 만들고, 교회의 목사들을 타락하게 만들고, 교회의 성도들
에게 분열을 일으켜서 교회가 세상을 향한 자정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세상을 집어삼키려
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렇게 살벌하게 움직이는 사탄의 궤계 앞에서 우리들의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
까? 과연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기도의 능력을 잃지 않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 즉 복음의 열정은 살아 있습니까?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이 있
습니까? 자신의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 세상 법정에 사람을 고소하고 정죄하려다가 오히려
세상의 법정으로부터 부끄러운 소리를 듣고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무엇인가에 미쳐 가고 있고, 사탄은 바로 교회마저 그 본질을 잃게 만듦으로 자
기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불을 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 교회는 사탄의 밥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거룩하고 능력 있는 교회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이 귀한 교회에서 시기와 질투와 싸움의 소리만 꽹과리처럼 요란하게 울
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마귀가 건드릴 필요도 없는 죽은 교회는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가 영적 무장해야 합니다. 성도들이여 깨어나시기를 바랍니
다. 근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고 있습
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정신을 차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기를 힘쓰고,
말씀을 붙잡고, 경성하여 이 시대와 역사를 깨우는 선지자의 사명을 다하는 능력 있는 교회
가 될 수 있게 합시다.
제 목 : 세 사람의 성탄경험
구 절 : 눅2:25-35 눅3:15-18
우리들은 성탄절이 되면 수없이 많은 성탄의 멧세지를 듣는다.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 목자들의 이야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재
하신 이야기등을 통해 많은 은혜와 진리를 깨닫기도 하고 경험하기도 하였
다.
그러나 예수가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그를 그리스도로 발견하고, 그
에게서 인류구원의 미래를 통찰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별로 듣지 못하였다.
인류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들을 거의 지나쳐 버렸거나 모
르고 버려 두었던 사실들을 다시 찾아 성탄의 뜻과 감격을 더해 갈 필요가
있다.
첫번째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시므온"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
을 기다리던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성령이 항상 임
재해 계셨다. 성령께서는 마침내 그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인도하여 아기
예수를 만나게 하셨다.
의롭고 경건하게 가족과 겨레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성령께
서 늘 함께 하신다. 성령께서는 그 사람으로 하여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고
구원의 실체를 만나게 하신다.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의롭고 경건하
게 가족과 겨레의 구원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그 밖의 것은 있으면 더 좋고
없어도 탈이 없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의롭고 경건하게 가족과 겨레의 구원을 갈구하는
사람과 동행하신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구원의 진리, 구원의 실체이
신 예수를 만날 수 없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시므온"의 경우를 통해 우리
가 배우는 성탄의 첫번째 멧세지이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만나자 자기 팔에 안고 그 감격을 견디지 못
해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편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주의 백성 이스
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누가 2:29-32)"시므온"이 만난 예수, 인류의 구
원은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에게 미치는 구원이었다. 하느님의 선민과 버
림받은 백성 모두에게 미치는 구원이었다. 예수의 탄생을 통해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차별이 폐기되고 그들은 다같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것이
"시므온"이 경험한 성탄사건이었다.
두번째 사람은 세례 요한이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누가 3:3)이라
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미 알려진 그 소리였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누가 3:4-5)세례 요한이 경험한
하느님의 구원은 모두가 회개하고 세례받는데서 이루어지는 구원이었다.
그것은 굽은 길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에 오는 구원이었
다.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이 고르게 되는 날에 오는 구원이었다. 산과 골짜
기의 차별이 없어지는 날의 구원이었다.
세례 요한은 그 구원에 이르기 위해 사람들은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
라고 촉구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누가 3:9)이라고 경고했다. 세례 요한
이 경험한 하느님의 구원, 성탄사건은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를 갈라 놓는
구원이요 성탄사건이었다.
"시므온"이 경험한 성탄 사건은 신분의 차별, 인종의 차별, 문화의 차
별을 폐기하는 하느님의 구원이요 성탄사건이었으나, 세례 요한이 경험한
성탄사건은 좋은 열매, 나쁜 열매를 갈라 놓는 하느님의 구원이었다. 그래
서 세례 요한은 감히 예언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멀지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
실 분이 오신다. ------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
이 가려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
이다" (누가 3:16-17)
세번째 사람은 예수 자신이다. 예수 자신은 하느님의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셨을까? 예수 자신은 자신의 존재이유, 성탄사건을 어떻게 이해하셨
을까?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서 성경강론을 행하셨다.
이사야서를 가르쳤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말씀으로 하느님의 구
원 - 성탄사건을 해석해 주셨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주가 4:18-19)예수가 경험한 하
느님의 구원 - 성탄사건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구원이었다.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 주는 구원이었다. 눈먼 사람들에게 빛을 주는
구원이었다.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구원이었다. 예수가 이 세상
에 태어난 이유가 바로 이런 소외지대에 하느님의 구원을 알려 주는 데 있
었다.
우리는 지난 12월 19일 우리가 사랑하기로 약속한 할아버지 할머님 그
리고 어린 소년과 함께 성탄축하 잔치자리를 마련했었다. 그때, 그곳에서
하느님의 구원 - 성탄사건이 일어났다. 기력이 쇠해질대로 쇠해지신 그분들
의 안색에 원기가 빛나는 것을 우리들은 보았다. 대화의 상대를 잃은 그
분들의 입에서 감사의 합창소리가 울려나오는 것을 우리들은 들었다. 딸
과 같은 젊은 여성들, 목사인 나를 보고도 일어서서 허리를 굽히며 기뻐하
는 참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들은 모두가 그분들 보다 건강하고, 넉넉하고, 많은 가족들과 어
울려 산다. 얼마나 큰 행복이요 특별한 축복인가? 무슨 근심이 있고 무슨
소원이 또 있는가? 진실로 우리들이야말로 있는 것을 족한 줄로 알고 지금
의 자신의 삶은 자신의 분수에 넘치는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며 보다 더 하
느님의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힘쓰는 성탄경험을 해야 할 것이다.
- 아 멘 -
제 목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구 절 : 마 1:1-25
만유인력을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 뉴우톤과 '나는 그리스도의 처녀탄생을
의심없이 믿는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또한 로이드 존스,에브라함 링컨과
같은 많은 사람들도 예수의 탄생을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의심
하고 그의 탄생에 대하여 부정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
다.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마태복음 1장은 명확하고도 분명한 해답을 던져
줍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성경 전체의 개요를 보면, 신구약 성경 66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장차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
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는 것을 기록하였으며, 신약성경은 예수 그
리스도가 이미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와 사망에서 우
리를 건져 주셨다는 구원완성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신구
약 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
음의 사복음서입니다.
사복음서를 보게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일평생에 대해서 네가지 관점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가복음에서는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누가복음에서는
온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으로
선재하시던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성육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예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복음서가 기록된 당시 이스라엘 나라의 종과 노예에게
는 족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생애만을 기록하고
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성육신하신 예수의 강조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인 족보는 생략한 것입니다.
족보를 통해 본 예수 탄생의 의미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 기록된 족보를 보면 서로 다른 점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으로 부터
십이대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조상으로부터 기록되어 있습
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아브라함과 아담 아담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기록되어 있습니
다.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가 이렇게 상이하게 기록되었습니까? 이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한 마태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아브라함과 다윗을 가장 존중하며 아브라함과 다윗왕의 족보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족보 속의 예수
그리스도를 거론함으로 예수를 갈릴리 바다에서 활동하던 혁명가로 생각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고 예수가 유대인의 진정한 구세주 메시아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와 반대로 누가복음은 이방 사람들에게 기록한 말씀입니다. 오늘날로 말
하면 예수 믿지 않는 불신자들로 인본주의 문화를 지니고 있는 이방 사람들
에게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인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족보를 연구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
다. 그러므로 인과 유래방법에 의해서 족보를 연구해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
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네명의 여자
이름이 나옵니다.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은 여성의 이름은 족보에 전혀 올리
지 않을 정도로 성의 차별이 대단했습니다. 그럼에도 마태 다말과 라합과
룻,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넣었다는 것은
파격적인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
님의 백성은 남녀와 신분, 종족의 차별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만민평등하다
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족보에 기록
된 여자들 모두가 부정한 여인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할때 예수 그리스도 안
에서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생각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만큼 중
요하다고 위대한 구원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성경을 살펴보면 456회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이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예정된 탄생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장차 인간이 범죄하여 타
락할 것이며, 그 죄의 삯으로 죽을 수 밖에 없지만,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구원사역을 이루시고자 하는 놀라운 계
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 구원사역의 완성입니
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시간과 장소와 방법까지 예정하
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16절을 보면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
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큰 빛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시대는 정치적, 종교적, 영적인 흑암의 시대였고, 오직 하나의 소망, 메시
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때였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이 시대 또한 그때와 동일한 시대입니다. 정치적
으로는 암담하고 신앙은 겉돌며,영적으로 타락한 죄악이 만연한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 그리스도 탄생은 유일한 소망이며 기쁨입니다. 빛으로 오
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둠에서 빛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우리들을
생각할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태어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장소에 대
한 예언은 미가서 5장 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
는 유대 족속 중에서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내게서 내게로 나
아올 것이라' 여기서 말하는 베들레헴은 떡집입니다. 이는 바로 예수께서
우리의 "생명의 떡"으로 오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베들레헴은 '열
매'라는 말로 예수가 우리 부활의 첫열매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의 예수를 믿고 생활할 때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 18절을 보면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
습니다.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
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의 결합이 아닌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이사야 7장 14절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과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칠것이라"는 말씀의 성취입
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태어나야 했습
니까? 그것은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범죄했기 때문에 육체로 범죄한 인간
은 죄의 삯으로 반드시 육체적 죽음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어 마땅한 우리를 살리기 위해 또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공의를 마땅히
지키기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신 것
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다시 사심으로 죄에서 해방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
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육체를 가지고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은 복음
중에 복음이요 최고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
생을 의미깊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임마누엘의 예수님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만을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일평생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 오심은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보면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마지막 하신
말씀이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이었습니
다.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함께 하십니다. 성령으
로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절대로 낙심하거나 좌
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지금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그의 탄생은 얼마나 큰 은혜이며 축복입
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며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대하고 기쁨의 좋은 소식
로마서 1:1-7
성경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복음이라는 단어입니다. 복음은 곧 기쁨소식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복된 소식을 말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받은 하나님의 사도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바로 그 복음을 위해 로마서를 썼으며. 로마서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는 1장 1절부터 17절에 복음이라는 단어를 일곱 번씩이나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복음에 빚진 자(14절)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바울은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박해하고 죽이던 자였습니다. 그의 고백대로라면 그는 폭행자요, 박해자요,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폭행자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선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박해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로, 그의 삶은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자인지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이후로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복음에 빚진 자가 되어 복음의 중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복음에 빚진 자 되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을 불렀고, 우리를 부르고 있는 그 복음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께서는, 복음은 하나님의 위대하고 좋은 소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복음이 좋은 소식인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실제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려고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더욱 좋은 소식인 것은 이 복음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약속하신?(2절)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내리신 모든 계시들이 지향한 목표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 있는 사도들의 설교에서 이런 사실들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행 13장), 빌립의 설교(행 8장), 베드로의 설교(행 2장) 등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이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분명히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즉 복음은 하나님께서 선포하고, 성취하고, 사도들을 보내 전파하도록 명령하신 복음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 (2절)하셨습니다. 이렇게 약속된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아들이신 주 예수님을 보내셨고, 그 결과 복음은 그 아들에 관한 것이 되었습니다(3절). 그러므로 복음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주신 위대하고 좋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믿고 담대하게 전해야 할 복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영국의 스로스츠란 죄수는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40년간이나 교도소 생활을 하고 가죽 채찍으로 50번씩 여덟 차례나 맞았으나 그의 생활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경찰이나 교도소에서도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구세군 숙박소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인연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고 거듭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구세군 출옥자 보호소에서 18년간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간증했습니다.
?400번의 가죽 채찍이나 40년간의 교도소 생활로도 변화되지 않은 내가 그리스도로 인해 불과 1, 2분 만에 변화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예수님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거듭나서 새사람이 됩니다. 믿음으로 거듭난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빚진 자가 됩니다.
2. 하나님께서는, 복음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복된 소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향한 위대한 구원 계획의 주체라는 의미에서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그 복음이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2절),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 신적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이 복음의 본질임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 아들이 누구인가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먼저 그분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분입니다(3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참된 인간?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그분의 탄생에 대해 많은 예언을 했습니다. 태어나실 장소. 자기 백성에게서 받으실 대접, 죽음의 경위, 부활의 사실 등이 모두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윗의 가문에서 나실 것과 다윗의 보좌에 앉아 영원히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다스리기에 적합한 분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예언과 약속의 말씀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실지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권능이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되셨으니? (4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능력의 부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의 증거를 봅니다. 그분은 바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따라서 그분은 곧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이십니다(4절). 복음은 바로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에 관한 사실에 대한 내용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 신자들이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여기서 편지의 수신인들인 로마의 신자들을 향해, 그들이 바로 이 복음을 위해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6절).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요(7절),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7절)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명칭은 오늘의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 명칭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고 선한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엡 2:10). 우리는 이전에 허물과 죄로 죽었고,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으나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존재가 아니었으나 이제는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바울은 자신을 복음에 빚진 자(롬 1:14)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빚진 자 된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복음에 빚진 자로 살고 있습니까?
어느 전도사 한 분이 부산 영도다리 위에서 집안 웃어른을 만났습니다. 인사를 여쭌 후 ?할아버지, 예수님 믿고 천당 갑시다!?라고 전도를 했더니 ?그래 천당을 보여주면 믿지!? 라고 가볍게 받아 넘기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할 말이 없이 가만히 서 있었더니 개선장군처럼 유유히 걸어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링?위에서 첫 라운드에 ?다운?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문득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뒤따라가면서 ?할아버지! 할아버지!?하고 큰소리로 불러 발걸음을 멈추게 한 뒤 ?천당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하고는 손을 꼭 잡고 다리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할아버지는 놀란 표정으로 ?어데 가노??라고 물었습니다. 따라 오시면 알게 될 겁니다!?하고 옷을 입은 채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이 사람이 와이라노?? 하고 몸부림을 쳤지만 젊은이를 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나는 죽으면 예수를 믿었으니 천당 가지마는 할아버지는 안 믿었으니 죽으면 지옥 갑니다. 거기 가면 확실히 천당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같이 죽읍시다.?하고 힘차게 잡아당겼더니, 할아버지는 질 겁을 하고는 ?이 사람아, 알았다. 믿을게!? 라고 항복을 하더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복음의 빚진 자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함으로 빚을 갚아야 합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몸과 물질로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것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음을 알리는 참으로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부르심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복음을 위해 복음에 빚진 자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날마다 자라나서 영적으로 성숙한 신자가 되어 예수님을 보여주고 복음을 전파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탄생하신 날
본문 마1:18-25
크리스마스는 세계적 명절입니다. 그래서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으며, 심지어 다른 종교가 국교로 지정된 나라들도 이 날을 기쁜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나신 날입니다. 그는 마구간에서 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나사렛에서 목수일을 하며 살았는데 정혼한 마리아와 호적을 하러 조상의 본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었을 때 예수님께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다윗의 동네라 많은 사람들이 살았으며, 당시에는 작은 베들레헴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여 오는 사람들은 많은데 유할 만한 곳은 적어서, 만삭이 되어 늦게 도착한 요셉과 마리아는 유할 만한 여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겨우 얻은 곳이 마굿간이었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은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면 불륜의 아들이 아닌가 걱정할 수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대로 태어났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되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그러므로 예언에 의한 탄생이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신지 물었을 때, 서기관은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예언된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미 5:2). 그러므로 박사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또한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갑자기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이 전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 2:11-12) 하셨습니다. 그 후 하늘에서 천군과 천사들의 노래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그들은 급히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 예수에게 절하였습니다.
예수의 나심은 이렇게 성령의 역사로, 또는 하늘의 별과 음성으로 알려졌던, 하나님의 역사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2천년 역사중에서 12월 25일을 성탄일, 즉 크리스마스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날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며 어떻게 전할 것입니까? 모든 성도들이 바로 알고 즐거워하며,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바르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기쁜 날입니다.
인류의 죄악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셨으므로, 모든 인간은 그를 기쁜 마음으로 맞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하면 "축하합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나심은 그렇게 기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은 인간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는 것은 일시적이며, 내가 만든 기쁨도 오래가지 못하고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만든 기쁨은 희극에서 웃기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얼굴에서 시작해서 얼굴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식고 맙니다.
그리고 인간의 기쁨은 물질로부터 옵니다. 어떤 여인이 미국에서 복권이 당첨되었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크게 소리를 질렀는데, 그만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었습니다. 물질은 좋은 것이지만 위험한 것입니다. 물질이 반드시 인간에게 기쁨을 주지는 못합니다. 어떤 때에는 기쁨의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은 인간적이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며, 생명력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오래 지속됩니다.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왔습니다. 아니, 앞으로 세상 끝날까지 성탄일은 기쁨의 날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쁨의 날로 모든 사람들이 축제를 벌이고, 교회마다 좋은 순서로 축하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사는 자신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축하하는 순서들입니다. 교회당에서 밤을 새우며 찬송하고 또한 성도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새벽송을 부르는 것은 매우 즐거운 행사들입니다. 누가 기뻐합니까? 인간적인 목적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은 향락적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신앙인들의 성탄에 대한 기쁨은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려고, 그 높은 하나님 나라의 보좌를 버리고 이 낮은 세상에 오셨다는 데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보다 바로 자신에 대한 긍휼과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에 신앙인은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기쁨은 본질적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2. 깊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 날은 모든 신앙인들이 깊이 감사해야 할 날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으로 보내셔서 희생제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죄는 구약시대에 제사들처럼 짐승을 잡아 희생함으로 용서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는 항상 드렸습니다. 아니, 매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몸으로 직접 드린 제사는 단번에 드려졌습니다(히 9:28).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를 흘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장 고귀한 피를 흘리심으로 나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고 하셨습니다. 가장 고귀한 피로 인하여 용서해 주셨으니 이 어찌 감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적 에로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가페입니다. 에로스는 남녀간의 성적 사랑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아가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사랑을 예수님을 통하여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어떤 조건이 있어서도 아니요, 아무 조건 없이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주시기 위하여 이 낮은 세상에까지 오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신 사건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직접 고쳐 주셨고, 직접 귀신을 내쫓으셨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도 직접 집에까지 가셔서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은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기적입니다. 이렇게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전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서도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비유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천국을 소개하셨습니다. 그의 복음은 곧 천국을 전하는 데서 나타났습니다. 그가 세상에 오심은 천국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만큼 천국은 귀중한 나라이며, 그 소식은 인간에게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어디서 들을 수 있습니까? 새로운 뉴스라고 해도 이런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들리는 것은 모두 비극적인 것 뿐입니다. 그리고 나를 두렵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소식은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나라, 생명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소식을 전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3. 전파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를 기뻐하고, 노래부르는 이유 중 하나는 천군천사들의 모범을 따르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떠나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까지 내려와서 예수의 나심을 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별을 동원해서까지 예수의 나심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나에게도 같은 책임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기쁜 소식이니 내가 좋아하는 친구에게만 전할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옥 창살 앞에 가서 성탄 축하송을 부르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세상에 물들어 있는 죄인들을 향해서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전할 것입니까? 노래로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성탄절에는 반드시 음악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이유도 모른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음악예배를 드리는 것은 천군천사들처럼 찬송으로 주님의 오심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성도들에게만 들려 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세계를 향한, 아니 우주를 향한 찬송입니다. 이 노래는 교회에서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란 이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많이 불러서,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 가서 노래하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노래하고, 어두운 곳이라도, 한 사람이 들어도 필요한 사람에게 성탄절 노래를 들려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선물로 전합니다. 성탄절에 반드시 있는 것이 선물교환입니다. 교회행사에서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반인들도 성탄절에는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보냅니다. 가정에서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라는 전설에 의해서 자녀들에게 양말에 선물을 담아서 줍니다. 이 선물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에서 수용해야 합니다. 선물을 받는 것보다 선물을 하는 사람이 성탄을 전하는 일을 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의 이름으로 선물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선물은 꼭 물질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할 수도 있으며, 또한 사랑의 마음으로 이룩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전합니다. 우리는 성탄절에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때 목사님으로부터 성탄메시지를 듣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나심을 전달받는 시간입니다. 몰라서 받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는 사람들도 새로운 은총의 역사로, 오늘을 맞는 기쁨의 소식으로 듣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평생을 들어도 싫지 않고, 새로운 것이며, 누구에게나 필요한 소식입니다. 말씀은 귀중한 것입니다. 메시지를 잘 듣는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책임이 있습니다.
성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축하해야 할 날입니다. 현대인은 휘황찬란한 네온싸인 속에서 기쁜 성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박해가 심한 시대에는 토굴 속에서, 또는 감옥에서 성탄을 맞았고, 표면적인 기쁨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갈 때, 실제로 공포와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찬미하며 가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매를 맞고 쓰러졌을 때, 그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그 찬송은 슬픔의 찬송이었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부르는 찬송이었습니다. 그러나 찬송이란 기쁨의 표현입니다. 오늘도 저 북녘 땅에서 성탄을 맞아 찬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많이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나심을 기뻐할 것입니다. 진실로 마음속으로부터 성탄을 축하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자세로 성탄절을 맞이해야 하겠습니까? 바른 믿음으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그를 찾아왔던 박사들이나 목자들은 오늘 우리들과 같은 기쁨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초조와 공포 속에서 축하했습니다. 그리고 편하지도 못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성탄은 왔습니다. 우리들은 진실로 가장 아름다운 때에 성탄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치있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성탄이 되어야 합니다. 최선의 축하를 드립시다.
제 목 : 첫번 크리스마스 이브
구 절 : 사 9:1-7 눅 2:8-20
* 옛 언약의 말씀 . 이사야 9 : 1 - 7
* 새 언약의 말씀 . 누가복음 2 : 8 - 20
예수가 탄생할 즈음 팔레스타인에서는 추운 계절을 피한 3월과 11월 사
이에 양들을 들판에 내어 놓고 방목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그러
나 예루살렘 근방(특히 베들레헴)에서는 성전 제사에 쓸 양을 충당하기
위해 1년 내내(겨울철인 12월-2월에도) 양을 방목했다. 그래서 6세기 당
시 서방교회의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하여 예수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잡았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들은 최초의 사람이 다름아닌 베들
레헴 들판의 양치기 목자들이었다고 전한다. 구주탄생의 소식이 목자들에
게 먼저 전해진 것은 의미있는 사건이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목자들이 매
우 천한 일을 하며 그들이 늘 양떼와 같이 있어서 서기관들이 요구하는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하찮케 취급하였다. 그러한 취급을 당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비천한 목자들이 예수
의 탄생소식을 최초로 듣고 이를 증거하는 증인들이 될 수 있었을까? 오
늘의 본문은 그것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8절은 ; 목자들이 맡겨진 직분에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었음을 전한다.
당시 예수 탄생의 때는 팔레스타인의 겨울이었다. 더욱이 베들레헴은 해
발 600m의 고산지대였기 때문에 한밤중에 목자들이 양을 지키는 것은 매
우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들은 성전에 바쳐질 희
생양(제물)을 돌보면서 들판에서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그러한 충성과
열심이 그들을 많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최초로 구주 탄생의 복된 소식을
접하는 축복을 얻게 했다.
15-16절은 ; 목자들이 사명감에 불타는 자들이었음을 전한다. 목자들은
베들레헴 교외의 들판에서 양을 치던 중 천사들을 통해 구주 탄생의 실로
어마어마한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천사를 통해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베들레헴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그토록 오랫동안 대망하던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듣자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구주탄생 장소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즉시로 아기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
이다. 성전의 희생 양을 돌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들에게는 참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 속죄양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 일이 더 중
요하고 시급한 일이었던 것이다.
17-19절은 ; 목자들은 보고 들은 대로 충실하게 증거하는 자들이었음을
전한다. 아기 예수를 찾아간 목자들은 천사에게서 전해 들은 말을 그대로
요셉과 마리아에게 전하였다. 즉 목자들은 그들이 믿고 들은 내용을 한
치도 더하거나 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예수의 부모들에게 전한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천사들이 목자에게 선포한 말씀과 당시의 상황은 목자들
밖에 아는 자들이 없었지만 그들이 충실하게 증거함으로써 또 다른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결국 누가복음에 묶여져 성서 말씀의 일부로 기록되
었으며, 이것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일점 일획의 더함
이 없이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들려 주고 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의 말
씀을 선포하는 자의 올바른 자세를 교훈한다. 진실로 복음전파의 사명을
맡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해야 한다.
20절은 ; 목자들이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자들이었음을 전한다.
목자들은 당시 팔레스타인의 최하위 계급에 속한 자들이었지만 자신의 신
분에 불평하지 않고 맡겨진 직분에 묵묵하게 충성한 결과 구주 탄생에 관
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첫번째 축복을 입었으며, 놀라운 이 소식을 널
리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아기 예수를 방문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가
사실로 나타난 것을 목도하는 두번째 놀라운 축복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
여 하룻밤의 짧은 시간에 말할 수 없이 놀랍고도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직접 체험한 목자들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 놀라
운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향해 조용히 찬양과 영광을 돌렸던 것이다.
목자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어렵고 힘들었
지만 그들은 인생 최고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는 확신과 자기들이
본 것이 한없이 전파될 것이라는 믿음을 안고 기쁨으로 발걸음을 내딛었
다. 실로 인생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며 하나님께서는 그
행복의 초점을 인간에게 두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
기 위한 방법으로 인간의 가족 어린아이를 택하셨고 베들레헴 마굿간을
찾으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
다.
하나님께 '영광', 사람들에게는 '평화'는 인생의 가장 큰 희망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인간이 요구하는 영광은 자기중심의 부귀영화이지만 예수가 행한 '하나
님께 영광'은 넘어진 자를 일으키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가난한 자들과
어린 것들에게 친근히 하시고 잔인과 부정을 미워하시며 모욕을 당해도
반항치 않으시며 원수의 사유를 구하신 영광, 곧 주린 자를 먹이시고 헐
벗은 자를 입히시며 실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시고 차별없이 사랑하시며
인간의 평화를 위해 일하시고 만민을 한 형제로 포용하신 그 영광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화'의 모습을 우리는 신약성서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식에 고통당하는 자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신다.
그것은 참된 회개와 결심을 통하여 가능하며, 될 수 있으면 피해자에게
보상할 것을 명하셨고 다음에 요구되는 것은 사유함을 얻을 수 있다는 확
증이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 크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자비
와 구원이 확보되었으며 참으로 회개하는 자는 사유, 고침, 평강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근심과 공포에 싸인 자에게 평화를 주신
다. 근심과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믿음이다. 생(生)이란 허무한 것이
아니라 목적이 있으며, 세상은 무관심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과 능력
을 믿을 수 있을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역경에서 헤어날 수 있
다. 그러나 생의 허무, 세상의 무관심만을 주장하는 자는 살 길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고뇌와 공포에서 신음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믿도
록 도와주는 동시에 사랑과 성실로 남을 돕는 과정 중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줌으로써 평화를 주신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오늘 본
문에 나타난 천사들이 노래한 평화이다. 예수가 오심으로 이루어진 유대
인과 이방인의 화해를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세계 평화도
우리가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만민을 위한 관심'에 동참할 때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의 탄생에 있어서 '목자들의 경배'가 지상의 반응이었다면 '천사들
의 찬양'은 곧 하늘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천사들은 한 입을 모아 찬양
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노래했다. 이 찬양
을 투해 예수탄생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던 것이다. 실로 인류 구
원을 위해 메시야를 보내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선하심은 정녕 찬양
받아야 마땅하다. 즉 하나님은 다른 일로도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하지만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신 사건은 특히 지극히 높은
곳에서 그 분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한편 메시야를 보내신 하나님의 이
러한 선하심은 이 낮고 천한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주었으며, 참 평화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
롯되었다.
이처럼 허다한 천군천사들에 의해 증거된 믿음의 외침, 즉 하나님의 선
한 의지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가
된다는 이 말은 복음 중의 복음이요, 진리중의 진리가 아닐 수 없다.
예수의 탄생후 최초의 경배자가 바로 목자들이었다는 오늘의 본문은
예수는 영혼의 목자장(牧者長)이시라는 것과, 선한 목자되신 예수는 양
들, 곧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주신 분이라는 것,
예수는 유리방황하는 자들의 생명의 길과 안내자가 되신다고 하는 영적
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 인생의 영원한 목자가 되어 주시는 예수탄생의 소식을 기쁨으로
증거한 2,000년 전 목자들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우리의
입술과 행위로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선포해야 함을 촉구하고 있다.
그렇게 될 때 이 기쁜 소식은 진정 모든 인류의 영혼을 구원할 복된 소식
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
시니라"
메리 크리스마스 !! (Merry Christmas!!)
큰 기쁨의 좋은소식
눅2:8-14
1.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람의 마음속에는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래서 신문을 들려다 보기도하고 라디오나 TV앞에 모여 귀를 기울이는 것은 좋은 소식이
있지 않나 해서입니다 편지가 올만 한곳이 없지만 우체부가 지나가면 혹시나 소식이 없는가
기다려지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농사를 짖는 농부들은 내년에 농산물 가격이 올라간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월급이 인상되기를 기다리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경기가 풀려서 장사가 잘되리라는
소식을 기다릴 것이며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가는 문이 쉬워 진다는 소식일 것입
니다
그러나 이 땅에 들려오는 수많은 소식들은 기쁘고 좋은 소식보다는 어둡고 염려가 되는 불
행한 소식이 더 많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타락
된 소식은 기쁨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습니다
세금이 올라가고 실업자가 늘어나고 정치가 불안정하여 사람들은 앞날들을 염려하며 걱정하
고 있는 시대가 지금의 현실입니다
좋은 소식 큰 기쁨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들려오는 절망적인 소식은 오늘날이나 옛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실 때에도 사람들에게서
들려오는 소식은 기쁘고 좋은 소식보다는 불안과 염려의 소식뿐이었습니다
유대 땅을 다스리던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자기 다스리는 모든 나라들에게 명을
내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호적을 하도록 했습니다(눅2:1-2) 유대 땅을 다스리고 있던 구
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모든 유대인들은 자기의 고향으로 가서 호적을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호적을 정리하도록 한 이유는 한 사람이라도 더 세금을 걷어 드리기 위한 것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소식을 기대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마지못하여 자기 고향에 가서 호적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들려오는 소리 세상
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 세상을 다스리는 왕들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어두운 소식뿐이었습
니다
좋은 소식을 기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가져다 주는 소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
는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기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고 죄악 된 세상이기 때문에 항상 불안전하고 고통과 아픔이 끝날 날이 없는 것입니다
2. 큰 기쁨 좋은 소식을 전하는 주의 사자가 이 땅에 찾아 왔습니다 2:9
큰 기쁨과 좋은 소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입니다 어두운 밤에 큰 광명이 비치듯
이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에게서 들려오는 소식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절망적인 소식
이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천사를 통하여 들려오는 하나님의 소식은 광맥을 찾다가 포기한
광부 앞에 반짝이는 금 맥과도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요히 잠든 밤 베들레헴 근처에서 잠을 자지 아니하고 자기의 양떼들을 지
키고 있는 목자들에게 주의 사자가 찾아 왔습니다 주님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깊은 잠에 빠진 자가 아니고 깨여 있는 자가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절망적인 소식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희망
소망이 넘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말의 귀를 막고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하늘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큰 기쁨 좋은 소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소식입
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고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동원하여 밤에 자기의 양떼를 지키는 목자
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도록 주의 사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천사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명령을 전하러 찾아 왔습
니다 캄캄한 밤에 주의 영광의 광채가 어두움을 환하게 비치고 천사가 그들 곁에 서매 갑
자기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인하여 양을 치는 목자들은 두려워 떨게 됩니다
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러 찾아온 주의 사자들을 보고 무서워서 떨고 있을 때에 음성이
들려오기를 10절-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보라 내가 온 백
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
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
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시더니" 지금 목자들이 천사들을 통하여 전하여 듣는
이 소식은 모든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기다리고 이 소식을 듣기를 원했던 소식이었습니다 유
대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구원자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러 찾아온 천사들을 두려워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간들의 죄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가 없다면 두려움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이전
에덴동산에서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사자도 늑대도 이리도 함께 있었으나 그러
한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한 순간부터 인
간에게 두려움이 찾아 왔던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죄
인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는 모두가 두려워서 떨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
의 부르심 앞에서 떨었으며 이사야 역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여 두려워서 떨
었으며 베드로 역시 주님 앞에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말했습니다
또 인간들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려워서 떠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천사들을 양치는 목자들에게 밤중에 보내신 것은 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
님의 특별하신 은혜였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받은 자 들임을 알았다면 두려워서 떨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를 망각했을 때입니다
마리아도 요셉도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그들에게 아기 예수님이 잉태되었음을 알려주려고
찾아 왔을 때에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입은 자란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크게 기뻐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러한 인생들에게 천사가 전하여준 큰 기쁨 좋은 소식은 어떤 소식일까요
3. 천사가 전하여준 큰 기쁨 좋은 소식
이 세상에는 큰 기쁨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이 되어도 어떤 사람에게
는 기쁨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아들이 서울대학에 수석으로 합격
했다고 했을 때에 그 가정과 그가 다니고 있는 학교나 지역에서는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기
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에서 떨어진 사람에게까지 기쁨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복권을 사서 일억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당첨 된 사람과 가족이 기뻐하는 것
이지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기쁨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세상의 기쁨이란 지극히 한정되
어 있고 상대적인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 한쪽에서는 기뻐하고 한쪽에서 가슴아파 하는
것이 이세상의 기쁨이요 소식들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모든 백성이 기뻐하고 즐거워 하
지만 한쪽에서는 전쟁의 슬픔 때문에 통곡하며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운동경기에서 금메달
을 딴 사람은 기뻐해도 메달을 따지 못하면 괴로워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큰 기쁨
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천사가 전해준 큰 기쁨 좋은 소식은 개인과 가정을 초월
하고 민족과 나라를 초월하여 빈부와 귀천을 초월하여 건강한 사람이나 병들어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이나 아무것도 알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나 박사들이나 남녀 노소를 초월하여 모든
이 에게 큰 기쁨이요 가장 좋은 소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천사를 통하여 이 땅에 전해 졌습니
다 그 소식이 성탄의 소식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소식인 것을 믿으시기 바
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탄생했다고 하는 탄생의 소식은 가장 귀한 소식이요 나라
와 민족과 족속 각 나라 방언을 뛰어 넘는 가장 큰 기쁨이요 가장 아름다운 소식인 것을 믿
으시기 바랍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큰 기쁨이요 좋은 소식이 되는 것일까요
1)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라고 하는 이름은 구원자란 뜻입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란 뜻입니다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질병 때문에 고통을 당
하기도 하고 자녀들 때문에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부모형제 때문에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은 아담 때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원죄와 내가 태어나서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그 죄에 끌려서 살아온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값은 사망이니라 하신 말씀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신
대로 모든 인간은 죄 때문에 죽어야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인생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죄의 빠진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죄 문제 해결 받지 못하고 고
통 받은 모든 자들에게 가장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온 천하를 당신에게 준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신
말씀대로 사형선고 받은 자에게 박사 학위 논문이 합격되었소 당신의 부동산값이 열 배나
올라갔습니다 주식이 100배를 남겼습니다 어떤 소리도 기쁘질 않습니다 지금 사형선고 받은
사람에게는 오직 한지 소식 당신은 무죄로 석방되었소 당신의 죄는 더 이상 당신을 벌 할
수 없소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말씀을
합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 하려하심이 아니고 그 아들 예수를 믿어 구원받게 하는 것이 목적
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더 이상 죄가 우리
를 주관하지 못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죄 때문에 고통을 받은 자들에게 참으로 놀라우신 희소식입니다 이
소식은 이세상 모든 사람들이 듣고 즐거워해야 할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하시기
전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소망하고 살았다면 오늘 우리는
이미 이 땅위에 오시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탄을 구원의 감격 속에서 기쁨으로 맞이해야 할 것입
니다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서 기뻐하는 심정으로 성탄절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들과 함께 하심이기 때문에 큰 기쁨이요
좋은 소식입니다
만약에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우리교회에서 이틀만 쉬
었다간다고 해도 이주변이 완전히 달라 질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대단한 영광
으로 생각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년 전에 이 땅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건만 사람들은 방 한 칸 내
어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뉘실 곳이 없어서 말구유에 뉘었다는 말씀을 포면 마굿간이 깨끗
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그렇게 오셔
야만 했을까요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
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절망 중에 있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내
가 너희를 버리지도 않고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탄절
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친히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은 세상의 어떠한
소식보다도 큰 기쁨에 좋은 소식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오면 세계 모든 메스켐이 서로 먼저 보도하기 위하여 야단 일 것입니
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쫒겨 난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화해하시
려고 친히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복되고 축복된 날이 성탄절
이요 우리 모두 기뻐하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날에는 음식값도 받지 않고 서비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
랑을 베푸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날이기 때문에 큰 기쁨과 좋은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시기 몇 백년 전부터 당신께서 세우신 선지자들을 통
하여 구체적으로 예언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윗의 후손을
통하여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실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그 메시야가 태어날 때에 어떠한 일들
이 일어나며 어디서 태어나며 태어날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까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약속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수없이 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그 약속을 믿고 기다
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그 약속이 예언이 성취된 날이 성탄절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약속이 이루어지기만 해도 사람들은 기뻐하는데 우리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이루어 졌으니 모든 만민이 기뻐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가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변하기도 하고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은 반듯이
약속을 지키십니다
성탄절은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이기에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4)예수님의 탄생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에 큰 기쁨이요 좋은 소식입니
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었던 천사들이 노래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탄
생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범 죄 하여 하
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욕되게 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그 영광을 회복하시며
그 영광 온 세상 끝까지 펴 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통
하여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모든 사람이 기뻐해야 하며 즐거워 해야합니다
이제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환영하며 영접하는 것
이 곧 하나님을 영접함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소식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예수가 우리
를 구원하시려 오셨다고 그를 믿으면 영생함을 얻는다고 전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를 전해주
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큰 선물을 하는 것입니다
세계 모든 민족이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그 날이 오도록 복음을 전하시기를 주님의 이
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나셨다
사9:1-7마4:12-17
주님의교회 /임영수목사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때때로 문득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에게 좋은 인상을 준 분으로 기억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고 부정적인 인
상을 준 사람으로 가끔 기억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에게도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 가운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분으로 기억되는 한 분이 있습
니다. 그 분은 거창 고등학교 설립자이신 故 전영창 교장이십니다. 저는 그 분에 대한 자세
한 소개는 생략하고, 그 분에게 있었던 일화 한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분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서 첫 번째 부름을 받은 곳이 폐교 직전에 있던 거
창에 있는 한 학교였습니다. 교장에 취임하기 위해 서울에서 거창으로 내려가 그 다음날 교
장 취임식을 가졌을 때 전교생 이백여명의 학생 중에서 취임식에 참석한 학생은 겨우 여덟
명이었습니다. 나머지 학생들은 다 인근 학교로 가버렸습니다.
그는 빚더미 학교를 인수하고 나서 확고한 신앙심에 바탕을 둔 신념을 지닌 선생들외에 교
사로서 자질이 부족한 선생들을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선생들의 월급을 삼만환으로 조정했
습니다. 그러나 그 삼만환마저도 지불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얼마 안되어 학교의 어
려운 사정을 안 선생들은 교장을 찾아와서 자진해서 월급을 반으로 줄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교장으로 취임한 후 처음으로 희망의 빛을 보았다고 술회했습니다.
월급을 자진해서 반으로 줄인 선생들의 열정은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보충수업을 서로 하
려는가 하면 수업시간도 서로 맡으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꽁보리 밥만 삶아 먹다가 그것
도 없으면 국수를 삶아 먹고 그것도 없으면 감자를 삶아 먹었습니다. 그마저 없으면 굶었습
니다. 선생들의 뜨겁고 숭고한 열정에도 아랑곳없이 학교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전임
교장이 남긴 빚의 이자가 날로 불어났습니다. 매일같이 빚쟁이들이 교장실로 들이닥쳐 아우
성을 쳤습니다. 그 많은 부채 중에는 정부 기관으로부터 대부받은 것도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 기관으로부터 학교를 차압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장실 문을
닫고 의자 앞에 엎드려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천정 이상 더 올라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를 해봐도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는 교장실 문을 박차고 나가 운동장 한 가운데 서서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외쳤
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약 있다면 내 기도를 듣고나 계십니까?
내 기도에 응답을 하실 겁니까??
차압 기간이 점점 다가오는데도 응답은 없었습니다. 그는 견디다 못해 하나님과 최후 담판
을 하기로 작정하고 거창읍에서 40리쯤 떨어진 웅양면에 있는 굴을 찾아 갔습니다. 일주일
작정하고 금식기도를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불평을 다 털어 놓았습니
다.
?하나님, 내가 거창에 돈을 벌려고 왔소?
아니면 내 명예를 위해서 왔소? 복음을 전한다고 당신이 보내서 왔지.
그런데 왜 학교 운영할 만한 돈을 주지 않습니까?
만약 빚을 못갚아서 제가 거창서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나가면 누가 더 창피하겠소?
하나님이 더 창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 제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과 찬송가 외에 평소 탐독하던 우찌무라 간조의 로마서 주석과 담요 한 장만을 가지고
산에 온 그는 성경을 읽다가, 찬송을 하다가, 우찌무라의 책을 읽다가 너무 피곤하고 답답하
면 잠깐동안 눈을 붙이면서 나흘 동안을 하나님께 애걸복걸 하였지만 아무 도움도 없었습니
다. 마음만 더욱 초조하고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나흘째 되던 날 오후에 그는 더 견디지 못하고 동굴에서 나와 그 앞에 있는 바위위로 올라
갔습니다. 참담한 심정으로 바위 위에선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고 무엇이고 다 집어치우고 하나님이 없다는 광고를 일간 신문에다 큼지막 하게 내
고 싶었습니다. 고향에 마지막 남아있는 전 재산인 논 열세 마지기를 다 팔아서라도 광고를
내서 다른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아서 피해를 입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위 아
래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아래는 깊은 골짜기였습니다. 그는 문득 학교에서 배운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 지구는 자전
을 하면서도 공전을 한다는데 그 속도는 제트기로 백두산과 한라산을 한 시간에 오갈 수 있
는 속도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털털 소리가 나고 어지러울 텐데 아무소리도 없이 털
털거리지도 않고 아주 조용하게 달리지 않는가. 기계는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소리가 없고
또 부드럽게 움직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큰 지구가 이렇게 빨리 달리는데 그것도 자전을
해가면서 소리 하나 나지 않고 부드럽게 달리는 그 배후에는 이 지구를 지으신 분이 없단
말인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바로 그때, 해는 함양쪽에 있는 산 너머로 막 넘어가려는 순간이었
습니다. 석양의 아름다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면서 산능선에 걸린 태양은 장엄하다 못해 신
비로웠습니다. 어디 그뿐인가, 저녁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연두빛 잎새들의 생명의 윤기, 저
녁 노을에 비친 풀잎과 나뭇잎은 한 폭의 그림 이상의 그 무엇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영창아, 이 아름다운 그림의 배후에 화가가 없을까?
화가 없이도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질까??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면서 어둠이 서서히 짙어지자 주위의 새들이 울기 시작하고 이름 모를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들렸습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계곡에서 흐르는 물 소리,
그것은 자연이 완벽한 화음을 이루어 빚어내는 아름다운 합창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영창아, 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가 없을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깊이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께 숙연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다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제 빚을 다 갚아 주시든지 갚아 주시
지 않든지 거창고등학교에서 일하겠습니다.?
기도를 하는 그의 두 뺨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기도를 마친 그는 그날 밤 굴속에서
평온하게 잠을 잤습니다. 학교에 돌아오니 미국에서 온 전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신 구좌에 2,050불. 조우 보기.?
?곧장 서울로 올라가서 달러를 바꾸어 정부 기관의 빚을 다 갚았습니다.?
학교 채무로 깊은 흑암에서 고통받던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빛이 비치었습니다. 그가 무겁
게 멘 채무의 멍에에서 그를 해방시키셨습니다. 무거운 채무의 멍에를 메고 고통을 겪는 한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역시 한민족 공동체가 겪는 어두움의 고통도 외면
하시지 않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본문에서 바로 그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메시아의 노래입니
다. 어두운 가운데서 하나님의 빛으로 오실 메시아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이사야서에는 고난
의 종의 노래가 있고 메시아의 노래도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스불론과 납달리는
이스라엘 남단과 북단에 위치한 이스라엘 지파들로서 강대국 앗수르 침공 때 가장 고통을
많이 받았던 지파입니다. 그 대지 위에는 흑암이 짙게 덮여있었습니다. 예언자는 그 흑암 가
운데서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고 기뻐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 때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의 기쁨은 추수때의
즐거움이나, 탈취물을 나눌 때의 기쁨보다 더 클 것입다.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은 반드시 어
느 지역을 국한 시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타난 지역은 어디까지나 상징적 의미
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고통과 억압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장차 하나님의 구원의 빛
이 임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흑암 가운데 행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인간의 역사에서 한 아기의 탄
생의 사건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한 아기의 탄생이 흑암 가운데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빛의
사건입니다.
그 아기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현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십니다.
이렇게 한 아기에게 많은 이름이 부여되는 것은 그가 고통받는 사람에게 주는 다양한 영적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역사에서 한 아기의 탄생과 함께 그들이 메고 있던 무거운 멍에서
풀려나는 경험을 여러 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의 억압의 사슬에 얽매어 신음하
고 있을 때 모세의 탄생은 그들의 억압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기회였습니다. 그들이 블레셋
의 억압의 사슬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아이 사무엘의 탄생은 흑암 가운데서 고통받든 이스
라엘 백성에게 빛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기 삼손의 탄생 역시 그들이 억압의 사슬에
서 풀려나는 해방의 시간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예언하는 한 아기의 탄생 역시 흑암 가운데서 고통하는 백성들에게 빛을
비추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전의 아기들과 차이점은 이 아기의 탄생으로 미치는 그 빛의
영향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 인류에게 파급됩니다.
예수께서 유대땅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을 방문하셨을 때 복음서 기자
마태는 그 사건이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로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어두운 역
사의 밤이 새로운 아침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내다보았습니다. 궁극적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
시는 하나님께서는 지난날 역사의 한 시점에 인간으로 방문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계획을 분
명히 드러내신것입니다.
태초에 온 우주가 어둠으로 덮여있을 때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시면서 먼저 어두움
가운데 빛이 있게 하신 하나님은 그 후 계속 빛으로 어둠이 우리의 대지를 뒤덮는 것을 허
락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피조물들이 어두움 가운데서 신음하며 고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
으십니다.
한 아기의 태어나심 가운데서 빛으로 임재해 오시는 하나님의 현존이 어두운 대지 위에 새
로운 형태로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은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이
아기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포기하시지 않으셨다는 유일한 확인입니다. 어둠의 세
력이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없다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대강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기간입니다. 일년중 한 해를
거의 다 보내면서 대강절을 맞이 한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에서 언제나 희망의
시간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때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비록 어둡고 고통스러운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적절한 때에 우리
에게 기묘자(카운셀러), 모사, 전능하신 분, 영존하시는 분, 평강의 왕으로 찾아오셔서 우리
의 멍에를 벗겨 주시곤 합니다.
금번 대강절에 우리는 평강의 왕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우리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평강의 왕으로 오시는 하나님이 기다려지
는 때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새해, 좀더 나아가서 우리의 미래가 영원한 흑암의 고통으로
끝난다면 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새해에 우리에게 평강의 왕, 우리의 고통과 멍
에를 벗겨주시는 위로자로, 모사로, 우리에게 찾아 오실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어두운 역
사의 현실에서 빛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대강절에서 내다보는 새로운 한해는 우리에게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합니다. 그 희망은 공허
한 것이 아닙니다. 오시고 계시는 하나님께 대한 희망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언제나 실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실재 앞에서 초조, 불안, 조급함에서 벗어나 젖먹이가 어머니 품에 안
겨 깊이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평온 가운데서 잠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이 진정 하나
님 되심을 보곤 합니다.
우리 개인의 역사,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반복 가운데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반복 가운데서 계속해서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되어가게 됩니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모
든 멍에를 벗어 버리며 자유인으로 되어갑니다.
금년 한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지 않았다면 금년 한해는 매우 어두웠을 것이며, 우
리의 삶은 매우 무미건조하고 지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금년 한 해도 오시고 계시는 하나
님은 우리의 삶에 깊이 찾아오셔서 개입해 주셨습니다. 금년 한해 살아온 결론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정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히 그분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 금년 한해의 삶의 결론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시작되는 한해를 그 하나님의 오심과 함께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어두움이 있는 현실에서 희망으로 시작해서 위로와 감사로 한해를 마감하게 됩니다.
제목 : 성탄을 맞이한 세가지 사람
본문 ; 마태복음 2: 1 -12 ,눅 2:11-14
서론 ;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본문 마태복음 2장 1절 ---12절에 기록된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 성탄을 맞이하는 세가지 사람의 자세” 에 대하녀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탄절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매우 다양하고 다채로왔습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아주 경건하게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혹 어떤 사람들을 성탄절을 맞이하면 공연히 마음이 들떠가지고 자기의 기분과 감정에 초점을 맟추어 현식과 의식을 따라 무의미하게 맞이하는 사람들도 많이있습니다.
금번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는 진리와 같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맞이하시를 바랍니다. 왜야하면 우리들의 죄와 죽움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꼐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하늘 영광 보좌를 더나 인간역사 현장에 찿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중심으로하여 나타나는 세가지 사람의 형편을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헤롯왕이 나타납니다.
여기 헤롯왕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기쁘고 반가운 소식을 그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들은 사람입니다.
1) 이 소식을 전달해 준 사람은 동방의 박사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동방의 박사들은 메데파사 나라에서 점성술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들로서 저희들은 하늘의 이상한 별빛을 따라 예루살렘 헤롯의 왕궁을 찿아와서 “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시뇨 ? ” 라고 문의를 했습니다.
2) 이 소식을 들은 헤롯왕의 자세를 정리해 봅니다.
a 먼저 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 예수 그리스도가 즉 메시야가 어디서 탄생하였느냐 ? 고 질문을 했습니다 . 이때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옜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 유대땅 베들레헴 ” 이라고 미가서 5장 2절말씀에 있는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b 다음으로 헤롯 왕은 다시 동방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희 알아보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자기도 아기 예수님께 경배 하겠노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물론 이 고백은 진심에서 울어난 고백이 아니고 예수님을 찿아 죽이기 위한 흉악한 마음의 표현이 였습니다.
c 다음 헤롯왕은 예수님을 찿아 죽이기 위하여 베들레헴과 그 지경안에 있는 사내 아이들을 두살부터 그 아래 어린아기를 몽땅 잡아 죽이게 되였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촉군의 잔안한 행동이였습니다.
여기 헤롯왕이 이와 같이 잔인한 행동을 퓌하게 된 그 배경을 알아봅니다.
첯째; 자기의 왕위를 길게 유지하기 위해서 입나다.
둘째; 시기와 질투심의 발로입니다.
새째; 욕심과 증오심의 발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경배하려고 하면 이 세가지 요소를 제거해애 됩니다.
3 제사장과 서기관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헤롯왕을 통하여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기쁜소식을 두번째로 들은 사람들입나다. 헤롯왕은 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동방의 박사들이 나를 찿아와서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고 하는데 대관절 어디에 탄생하겠느냐 ? 고 질문을 합니다. 이때 저희들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예언을따라서 유대 베들레헴에 탄생하셨다고 밝혀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께서 탄생 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기도 하고 전파하고 아기 예수님께 먼저가서 경배를 드렸드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먼저가서 예수님께 경배를 드려야할 사람들이 경배 하지도 아니하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밖아 죽이는 일에 앞장섯던 사람들 입니다.
이 역시 종교적 지도자들로 자기의 지위를 유지하고 자기의 권위와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점에 대하여 주경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첯째;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외식자 들이라고 합니다.
둘째; 남은 가르치면서도 자기를 가르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세째; 남에게는 전파하면서도 자기들은 실천실행하지 않는 위선자 들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형식주의 , 외식주의 , 위선을 제거하고 바른 경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동방의 박사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을 찿아와서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고 돌아간 배경을 말씀드립니다.
1) 세가지 계시를 따라 예수님을 찿아와 경배하고 예물을 드렸습니다.
a 자연 계시입니다. 이말은 자연계에 나타난 별빛의 안내와 인도를 받았다는 말씀닙니다.
B 특별 계시입니다. 이말은 성경의 인내와 인도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C 성령의 계시입니다. 이 말은 꿈에 헤롯에게로 가지말고 딴길로 즉 새길로 돌아가라고 했씁니다.
여기서 깊은 의미와 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2) 여기서 헤롯에게로 가지말고 딴길 새길로 가야할 이유를 말씀 드립니다.
A 먼저 헤롯에게로 가면 예수님의 생명도 위태롭고 자기들의 생명도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악마와 같은 헤롯에게로 가면 않됩니다.
b 다음 딴길로 즉 새길로 가라는 말씀은 예수님께 경배드린 참 신앙인은 과거에 예수님을 믿기전에 행동하던 죄를 범하던 옛길을 떠나 진리와 신앙의 새로운 생명의 길 . 즉 천국의길로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리 합니다.
오늘은 성탄절을 맞아 예수님 탄생하실 당시에 있었던 세가지 사람을 상고해 봣습니다 .
성탄의 기쁜소식을 들은 우리 성도들은 본문의 세 인물중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
헤롯왕 과같이 시기질투하고 무죄한 피를 흘리는 일이없어여 합니다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같이 알면서도 행하지안는 외식과 형식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모두 동방박사들과같이 예수님계 찿아와경배드리고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제 목 : 세 사람의 성탄경험
구 절 : 눅2:25-35 눅3:15-18
우리들은 성탄절이 되면 수없이 많은 성탄의 멧세지를 듣는다.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 목자들의 이야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재
하신 이야기등을 통해 많은 은혜와 진리를 깨닫기도 하고 경험하기도 하였
다.
그러나 예수가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그를 그리스도로 발견하고, 그
에게서 인류구원의 미래를 통찰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별로 듣지 못하였다.
인류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들을 거의 지나쳐 버렸거나 모
르고 버려 두었던 사실들을 다시 찾아 성탄의 뜻과 감격을 더해 갈 필요가
있다.
첫번째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시므온"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
을 기다리던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성령이 항상 임
재해 계셨다. 성령께서는 마침내 그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인도하여 아기
예수를 만나게 하셨다.
의롭고 경건하게 가족과 겨레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성령께
서 늘 함께 하신다. 성령께서는 그 사람으로 하여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고
구원의 실체를 만나게 하신다.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의롭고 경건하
게 가족과 겨레의 구원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그 밖의 것은 있으면 더 좋고
없어도 탈이 없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의롭고 경건하게 가족과 겨레의 구원을 갈구하는
사람과 동행하신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구원의 진리, 구원의 실체이
신 예수를 만날 수 없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시므온"의 경우를 통해 우리
가 배우는 성탄의 첫번째 멧세지이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만나자 자기 팔에 안고 그 감격을 견디지 못
해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편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주의 백성 이스
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누가 2:29-32)"시므온"이 만난 예수, 인류의 구
원은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에게 미치는 구원이었다. 하나님의 선민과 버
림받은 백성 모두에게 미치는 구원이었다. 예수의 탄생을 통해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차별이 폐기되고 그들은 다같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것이
"시므온"이 경험한 성탄사건이었다.
두번째 사람은 세례 요한이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누가 3:3)이라
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미 알려진 그 소리였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누가 3:4-5)세례 요한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은 모두가 회개하고 세례받는데서 이루어지는 구원이었다.
그것은 굽은 길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에 오는 구원이었
다.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이 고르게 되는 날에 오는 구원이었다. 산과 골짜
기의 차별이 없어지는 날의 구원이었다.
세례 요한은 그 구원에 이르기 위해 사람들은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
라고 촉구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누가 3:9)이라고 경고했다. 세례 요한
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 성탄사건은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를 갈라 놓는
구원이요 성탄사건이었다.
"시므온"이 경험한 성탄 사건은 신분의 차별, 인종의 차별, 문화의 차
별을 폐기하는 하나님의 구원이요 성탄사건이었으나, 세례 요한이 경험한
성탄사건은 좋은 열매, 나쁜 열매를 갈라 놓는 하나님의 구원이었다. 그래
서 세례 요한은 감히 예언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멀지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
실 분이 오신다. ------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
이 가려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
이다" (누가 3:16-17)
세번째 사람은 예수 자신이다. 예수 자신은 하나님의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셨을까? 예수 자신은 자신의 존재이유, 성탄사건을 어떻게 이해하셨
을까?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서 성경강론을 행하셨다.
이사야서를 가르쳤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구
원 - 성탄사건을 해석해 주셨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주가 4:18-19)예수가 경험한 하
나님의 구원 - 성탄사건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구원이었다.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 주는 구원이었다. 눈먼 사람들에게 빛을 주는
구원이었다.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구원이었다. 예수가 이 세상
에 태어난 이유가 바로 이런 소외지대에 하나님의 구원을 알려 주는 데 있
었다.
하나님의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힘쓰는 성탄경험을 해야 할 것이다.
- 아 멘 -
제목:여관집 주인과 목자들
성경:눅2:1-13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헤롯의 태도이다.그는 예수님을 미움과 증오로 대했다.심지어 그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그는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해 주실 구원자인 것을 알지 못했다.여기서 그의 인생은 비극으로 끝난다.
둘째는 동방박사 세 사람과 목자들의 태도였다.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찬양했고,또 그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렸다.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유명한 사람들이 된 것이다.
셋째로 여관집 주인의 태도이다.여관집 주인에게 일생일대에 가장 놀라운 행운이 찾아왔다.메시야가 그의 집에서 탄생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어떤 사람은 동방박사처럼 그 먼 거리를 걸어서야 겨우 만날 수 있는 그 메시야를,그는 가만히 앉아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런데 그는 그 기뢰를 잃고 말았다.
1.왜 여관집 주인은 축복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는가?
첫째로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사람은 어떤 면에서 바빠야 한다. 세상에 할일없는 사람처럼 비참한 사람은 없다,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영광의 바벨탑을 쌓기 위해서 너무 바쁘게 일하고 있다.바로 이 여관집 주인이 그렇가.사람은 지금 내가 어디 서 있는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과연 나는 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하고 항상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우리는 생업에 얽매여서 ‘바쁘다 바뻐’하면서 보다 중요한 일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일을 위해 사는 것이다.주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고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선행해야 한다.그런데 이 여관집 주인은 그러지를 못했다 여기서 그의 비극은 시작된 것이다.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떠한가?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바쁘지 아니한가?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있는가?
둘째로 최소한의 인심마저도 베풀지 않았다.여관을 당시처럼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만원이 될 수 있고 나중에 온 사람에게 방을 주지 못할 수가 있다.그러나 여관집 주인은 요셉과 마리아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랐어도 최소한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만삭이 된 산모에게 방을 줄 수 있었어야 했다.그런데 그 기회마저 잃고 만 것이다.
손님을 열심히 대접하다가 불식간에 천사들을 대접한 경우를 우리는 성경에서 뿐아니라 현대에도 많이 알고 있다.그런데 이 여관집 주인은 메시야께 자기 방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우리 신자는 항상 사랑을 베풀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작은 자를 돕는 일을 기쁨으로 실천해야 한다.부지불식간에 천사를 대접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너희가 여기 내 형제중에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하셨기 때문이다.
셋째로 무관심했기 때문이었다.그는 자기 방은 못내주어도 최소한 자기의 이부자리는 내어줄 수 있어야 했다.여관집이니 그 정도의 여유가 없었을리 없다.그런데 그 여관집 주인은 무관심했기 때문에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만것이다.무관심 이것이 문제이다.종교에 대한 무관심,하늘나라에 대한 무관심,위엣 것에 대한 무관심,이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된다.자녀에 대한 무관심이 자녀를 문제아로 만들고 사회에 대한 무관심이 이 사회를 불의한 사회로 만든다.교회에 대한 무관심이 교회를 병들게 만든다.무관심은 바로 사랑이 없는 증거이다.무관심이 그 사람을 지배할 때 그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요한계시록 3장에 사데교회를 가르켜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했는데 이런 교회는 바로 영혼에 대한 관심이 없는 교회를 말한다.그런 교회는 전도도 없고,기도도 없고,뜨거운 교제도 없다.형식만 무성하다.쓸데없는 전통만 주자한다.없는 권위만 내세운다.혹시나 우리는 이런 죽은 신자,죽은 교회가 아닌가? 성탄절을 맞아 반성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2.성탄절을 맞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로 목자들처럼 천사의 말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한다.동방박사처럼 별을 보고 먼 길을 달려 찾아오지는 못할지라도 천사가 나타나서 말할 때 그 소리는 들을 수 있어야 한다.목자는 24시간 눈코 뜰새없이 바쁜 직업니다.더구나 밤에는 피곤하고 졸립고 그래서 힘들다.그런데 밤에 이 목자들은 천사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그것은 기쁨의 좋은 소식(Good News=God News)이었다.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이었다.당시 목자라는 직업은 세리와 마찬가지로 무시당하고 죄인시 당하던 때이다.이런 소외계층에 천사의 음성이 나타난 것이다.이들은 종교에 대해서도 깊이 모르는 사람들이다.그들의 장점이 있다면 그것은 편견이 없었다는 점이다.우리가 천사들의 음성을 들을려면 무엇보다도 편견을 버리고 하나님이 말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둘째로 목자들처럼 즉각적으로 순종하여야 한다.15절에 보니까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빨리 가서”라고 했다.세상에는 빨리 할 것과 천천히 할 일이 있다.그런데 사람들은 천천히 할 일은 빨리 하고 빨리 할 일은 천천히 한다.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한다.인간의 지시나 생각은 오랫동안 생각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결재를 받고 천천히 일해서 잘못이 없다.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셋째로 빨리 가서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16절에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라고 했다.바로 이것이 중요하다.우리는 교회에 와서 아기 예수님은 못보고 목사님만 보고 갈 때가 종종 있다.이것이 문제이다.목사님도 물론 보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기 예수님을 보고 가야한다.예수님을 보기까지는 우리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났는가? 만나기까지는 집에 갈 생각 말라.아기 예수님을 만나 그를 찬양하고 대화를 나누어라.그 어떤 어려운 문제도 다 해결된다.
넷째로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큰 소식을 전해야 한다.목자들은 빨리 가서 고했다.예수님을 보는 것으로 그들의 사명은 끝난 것이 아니다.“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전도 생활까지 해야 모든 일은 끝난다.여러분이여! 목자처럼 행복한 사람,영원히 남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는가? 그러려면 목자들처럼 예수님을 만난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사람들에게 고해야 한다.생명의 소식,복된 소식을 전해야 한다.땅끝까지…….
예수님의 탄생(I)
성경:이사야 9:6
지금은 강림절입니다. 강림절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4주간 동안의 절기입니다. 그래서 강림절을 대강절, 혹은 대림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강림절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2천 년 전 성탄절에 예수님이 오신 것과, 오늘 구원 받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신다는 것과, 마지막 때에 재림주로 예수님이 오실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접할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탄절을 예비하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과연 우리는 아기 예수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기 예수를 영접하기 위해서 정말로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까? 성탄절에 빛나야 할 것은 트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아기 예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이런 성탄을 보내기 위해 강림절 기간 동안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묵상해야 하고, 세상을 향해서 아기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아기 예수를 찬양하고, 아기 예수를 전하고, 아기 예수를 자랑하는 시간으로 보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구약의 예언을 살펴봄으로, 성탄을 거룩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성탄의 빛을 세상 가운데 비추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창세기 3:15
예수님의 탄생은 창세기 3장 15절에 최초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예수님의 탄생은 후대의 예언이 아니라, 가장 먼저 선포된 예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예언의 근거가 되고, 모든 예언의 성취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약속 중에 약속이며, 복 중의 복입니다. 뿐만 아니라, 절망하고 고통당하는 인간들에게 최고의 희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언은 사람에 의해서 선포된 것도 아닙니다. 이 예언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직접 성취하실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이 예언되어 있지 않다면 죄지은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고, 절망만 가득할 뿐입니다. 아무리 열심을 내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결국은 죽음이고, 결국은 지옥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을 주신 것 보다 더 큰 은혜가 창세기 3장 15절의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범죄한 인간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2천 년 전 하나님은 그 약속을 그대로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귀한 은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집니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성탄의 기쁨을 기다립시다.
둘째, 이사야 7:14
예수님의 탄생은 동정녀 탄생입니다(눅 1:34). 동정녀 탄생은 예수님이 아담의 후손이 아니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범죄자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담의 후손으로 오실 수가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마 1:18). 이것은 절대로 신화가 아니며 누가 조작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은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전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함입니다. 첫 아담의 후예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질 수 있으셨습니다. 동정녀 탄생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은총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놀라운 사랑을 삶 속에 가득히 체험합시다. 그리고 받은 사랑만큼 거룩하고 순결한 삶 가운데서 성탄절을 맞이합시다.
셋째, 미가 5:2
예수님은 미가가 예언한 그대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미 5:2). 예수님은 이처럼 유다 지역에서 가장 낮은 곳에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포에 싸여 마굿간의 말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낮아지고, 또 낮아지셨습니다. 이는 낮은 우리를 높여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고,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미가의 예언이 성취된 것은 인류역사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역사라는 뜻을 가진 영어, ‘히스토리’(history)는 his와 story가 합쳐진 것입니다. ‘그분의 이야기’, 즉, ‘예수님의 이야기’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세계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미가는 예수님이 오시기 7백 년 전에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을 예언했습니다. 메시아에 관한 구약의 예언 가운데 가장 분명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예언의 성취에는 로마의 황제도 한 몫을 감당합니다. 로마 황제의 명령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가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나시게 된 것입니다(눅 2:1,4,5). 로마 황제조차도 실상은 예수님의 나심을 준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살 때,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시작된 새 역사가 우리의 삶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넷째, 시편 132:11
예수님은 다윗의 가문으로 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기 원했지만,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다윗에게 놀라운 언약을 주셨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삼하 7:12). 이 예언은 본질적으로 예수님을 지칭하고 있습니다(시 132:11). 그러므로 예수님은 약속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왕 중 왕이십니다. 세상에서 위대하다고 존경 받았던 다윗 왕 조차도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우리 역시 왕의 왕이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왕의 오심을 예비하고 있습니까?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과연 진정한 마음으로 높여드리고 있습니까? 성탄절에 나의 즐거움을 위한 캐롤을 부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왕 되시는 예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성탄절을 나의 기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왕 되시는 예수님을 높여드리는 날로 보내야 합니다. 내 모든 것을 왕 되시는 예수님께 드립시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통치가 우리 안에 가득해질 것입니다.
다섯째, 이사야 9:6
이사야는 구약 속의 복음서라고 할 정도로 예수님에 관한 예언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한 이사야 53장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53장과 쌍벽을 이루는 예언의 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이름에 대하여 예언한 이사야 9장입니다. 이사야 9장 6절은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전합니다. 예수님은 기묘자이십니다. 기묘는 ‘이상하다, 희한하다, 놀랍다, 경이롭다’는 뜻입니다. 또한 영어로는 ‘원더풀’(Wonderful)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놀라우신 분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세상이 깜짝 놀랐습니다(막 1:22).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교훈에 놀랐습니다. 이 예언은 지금도 성취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 인생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 영혼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 삶 속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샘솟게 됩니다. 또한 불가능이 가능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고 예수님의 놀라우신 은혜에 정말로 감사하는 성탄절을 보냅시다. 그리고 아직 이 놀라운 체험을 하지 못한 자들에게도 예수님을 전하고 자랑합시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대로 이 땅에 오셨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말씀을 묵상하며 사모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거룩한 빛으로 찾아오셔서, 우리의 삶을 깜짝 놀라도록 아름답게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Ⅱ)
성경:마태복음 1:18-25
2012년이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남은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 사는 것이며, 어떤 것이 성공하는 삶입니까? 참된 성공이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다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할 줄 모르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성공자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성공은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살 맛 나는 것,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 이것이 참된 성공인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목적이고, 이것이 삶의 진정한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나사렛 동네에서 살았습니다(요 1:46). 그러나 그 누구도 요셉과 마리아를 보고 실패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인들도, 불신자도 요셉과 마리아의 이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요셉과 마리아를 사랑합니다. 그들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인생이 목적한 바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에 쓰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나로 인해서 누군가가 행복해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 오심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살펴봄으로 우리 모두가 다 보람 있는 2007년이 되고, 뿐만 아니라 가치 있는 인생이 됩시다.
첫째, 마리아
마리아는 어린 소녀였습니다. 누가복음 1장 27절은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고 전합니다. 헬라어에서 말하는 처녀는 ‘소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보잘 것 없는 소녀였다고 했습니다(눅 1:48). 이처럼 보잘 것 없는 소녀, 마리아가 가장 행복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적극적인 순종 때문입니다. 주의 사자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자 마리아는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가 이런 일을 경험한다는 것, 역사 이래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경험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약혼한 상태입니다. 잉태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분명히 파혼 당하게 됩니다. 가족과 친척과 친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버려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돌로 쳐서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리아가 잉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 몸 전부를 다 드렸음을 의미합니다. 자기 생명까지 다 내놓았음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이렇게 순종하고 나서 기뻐합니다. 엘리사벳에게 가서 아기 예수를 찬양합니다(눅 1:46,47,49).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무엇을 드립니까? 하나님의 뜻 때문에 기뻐하며 찬양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까지 주셨습니다(롬 8:32). 우리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성탄을 보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성탄절에 ‘메리 크리스마스’ 하면서 자기들만 기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란,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아기 예수를 예배합시다’라는 뜻입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이 아기 예수임을 기억합시다.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고, 나로 인해 행복한 사람들이 많아지게 합시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성탄축하입니다.
둘째, 요셉
요셉도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요셉이 아니었다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지 못하고, 마리아와 함께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 요셉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요셉은 처음에 마리아의 동정녀 잉태를 믿지 못했습니다(마 1:19). 그러나 주의 사자가 알려주었을 때, 요셉은 즉시 믿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알려 주었으니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사가랴는 주의 사자에게서 직접 세례 요한의 잉태소식을 들었음에도 믿지 못했습니다(눅 1:18). 반면에, 요셉은 꿈에서 천사를 만났습니다. 꿈이라면 의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믿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를 비교해 보더라도 요셉의 믿음은 마리아의 믿음보다 손색이 없습니다. 또한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마리아를 데리고 왔습니다. 믿은 것만이 아니라,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24절은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라고 전합니다. 2천 년 전에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셨음을 믿습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만왕의 왕께서 아기 예수로 오셨음을 믿습니까? 성탄절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음을 믿는 날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아기 예수로 오셨음을 믿는 날입니다. 동시에 성탄절은 믿음을 보이는 날입니다. 요셉은 자신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아기 예수가 탄생된 것을 믿었기 때문에,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를 통해서 성탄절을 예비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5절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고 전합니다. 우리 모두 요셉처럼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통해 믿음을 보이고, 이런 삶을 통해 성탄절을 준비합시다.
셋째, 세례 요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한 자였습니다. 그는 잉태될 때부터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났을 때, 마리아는 당황했습니다(눅 1:34). 이때 천사는 세례 요한을 예로 들면서 설명합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6,37). 또한 세례 요한은 태중에서 자기 자리만 지켰습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믿음의 자리, 직분의 자리, 예배의 자리, 가정의 자리, 일터의 자리, 사역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성탄절을 맞아 성도로서의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더욱더 그리스도인다워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사람들은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와, 성탄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자리만 지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태중에서부터 예수님께 모든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41절 상반절은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고 전합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할 때, 엘리사벳 뱃속에 있는 세례 요한이 힘껏 태동했다는 것입니다. 곧,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아서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성탄절은 일 년 중, 가장 정성껏 예배드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예수님을 높여 드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가족, 친척, 친구가 있다면 불신자들까지 초청해서 함께 축제를 즐겨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최고로 멋진 성탄절 예배를 준비합시다. 우리의 마음으로,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재능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우리의 물질로 일 년 예배 중에 제일 멋진 예배, 제일 감사하는 예배, 제일 감격하는 예배를 드립시다.
마리아, 요셉, 세례 요한은 어떻게 보면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의 오심을 예비하고, 이를 통해 아기 예수의 탄생에 쓰임을 받자 하나님 나라의 별들이 되었습니다. 하늘의 스타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아기 예수께 최고로 멋진 성탄절을 선물합시다. 하나님께는 영광이 될 것이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큰 평화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Ⅲ)
성경:마태복음 2:10-11
이천 년 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러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죄악 된 세상 속으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어디 있던지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신분이나, 우리의 외모나, 우리의 능력에 상관하지 않고 찾아오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구약의 예언의 말씀으로 초청하시고, 신약의 사람들을 통해서 초청하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하늘에 별까지 띄우시면서 찾아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태어나실 곳이 없으셔서 마구간에 태어나셨습니다. 구유는 열린 공간입니다. 사람도, 천사도, 동물도 아기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고 있었습니다. 헤롯 왕도, 대제사장도, 서기관도 알았습니다.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듣고 놀랐다고 했습니다(마 2:3). 많은 사람이 듣고, 알았지만, 모두가 다 아기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성탄절에 아기 예수님을 본 사람들에 대해 알아봄으로, 우리도 그들처럼 아기 예수님을 만납시다.
첫째, 목동
가장 먼저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목동입니다. 당시 목동들은 법정의 증인도 되지 못할 만큼 천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런 목동들에게 가장 먼저 성탄 소식이 알려졌습니다(눅2:10,11). 그들은 가장 기쁜 소식을 가장 처음으로 접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누리지 못한 특권을 누렸습니다. 목동들이 얼마나 대단했기에 그런 은총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영광을 얻은 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목동들은 은혜 베풀 때에 은혜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는 호적 정리로 어수선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베들레헴으로 호적을 정리하러 다 갔습니다. 목동들의 주인도 집을 떠나서 베들레헴으로 다 갔습니다. 주인이 없기 때문에 목동들은 자기 마음대로 놀 수 있습니다. 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목동들은 자기의 일터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양들을 지키기 위해, 일터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밤에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냥 천막치고 잘 수도 있었습니다. 놀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동들은 자기 일에 충실했습니다. 목동처럼 자기 직분에,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고 성실할 때,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도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함으로, 예수님을 만납시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면 성령이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만나 주십니다. 또한 우리는 성도로서 예배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시다. 아기 예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해주실 것입니다.
둘째, 동방박사
성탄절에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의외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바로 동방박사입니다. 동방박사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도 아닙니다. 병들은 사람들도 아닙니다. 무엇인가가 필요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도 아닙니다. 게다가, 동방박사는 이방인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나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낙타를 타고, 사막 길을 지나옵니다. 아기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에게서 우리가 배울 점은 경배심입니다. 동방박사는『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 2:2)고 말합니다. 당시 여행길은 매우 위험했습니다. 강도가 들끓고, 자연재해로 죽을 수도 있고, 짐승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서 먼 길을 온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방박사는 올 때, 그냥 오지 않았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위해서 세 가지 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마 2:11). 황금은 예수님이 왕이심을, 유향은 예수님의 신성과 대제사장이심을, 몰약은 예수님의 인성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상징합니다. 이것을 드린 것은 예수님이 왕 중의 왕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물만 드린 것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과 뜻도 드렸습니다. 말구유에 누워 계신 어린 예수님 앞에 그들은 몸을 던져서 엎드렸습니다. 동방박사는 모든 지혜와 체면을 버리고 완전히 낮아졌고, 이를 통해 아기 예수님을 최고로 높여드렸습니다. 과연 우리의 성탄절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주인공이십니까? 성탄절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 드리는 날입니다. 아기 예수님께 선물을 드리는 날, 합당한 영광을 돌려 드리는 날입니다. 우리도 각자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귀한 것을 아기 예수님께 올려 드립시다. 동방박사처럼 아기 예수님을 경배합시다.
셋째, 시므온
성탄절을 가장 기다린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기다리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만큼이나 성탄절을 기다린 사람이 있습니다. 죽음까지 연기하면서까지 기다린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보리라는 성령의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눅 2:26). 시므온은 그 약속을 붙잡고 기다렸습니다. 어느 때인지도 모르는 체 기다리고 또 기다린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아기 예수님을 보았을 때, 이제는 잠들게 해달라고 했습니다(눅 2:29). 뿐만 아니라,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았습니다(눅 2:28). 그리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㰡•(눅 2:30)라고 찬양합니다. 여기서 시므온이 본 구원의 역사는 이스라엘을 위한 역사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과 이방을 비추는 구원의 빛을 보았다고 했습니다(눅 2:30-32). 기독교는 기다리는 종교입니다. 기도하고, 기다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한 것이 응답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시므온에게 말씀하신 성령님은 우리에게도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기다리며, 예수님께 소망을 두며 살아야 합니다. 눈을 예수님께 맞추면서 살아야 하고, 귀를 예수님의 음성에 기울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예수님을 만나는 삶을 살아가게 되고, 절망의 환경 속에서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광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넷째, 안나
안나는 가장 마지막으로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안나는 시므온처럼 약속을 받은 것도 아니고, 동방박사처럼 별을 본 것도 아니고, 목자들처럼 천사들이 알려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까? 안나는 교회를 사랑했습니다(눅 2:37). 성전을 떠나지 않고, 경건한 생활에 힘썼습니다. 금식하고, 기도하며, 성전을 섬겼습니다. 하루 이틀 이렇게 산 것도 아닙니다. 과부가 된지 84년 동안 교회 사랑과 경건 생활에 힘썼습니다(눅 2:36,37). 안나는 과부 된 것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도하며 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눈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안나는 어떤 외로움이 오고, 어떤 고통이 오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항상 하나님 앞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 성전에 나오다가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눅 2:38). 아기 예수님은 몸 된 성전을 찾는 자들에게 찾아오십니다. 성탄절의 영광이 빛나고 있습니다. 혹시 세상의 현란한 조명에 이끌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기 예수님보다 인간의 재미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성탄절 이브와 성탄절에는 아기 예수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해야 하고,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고통당하는 사람과 함께해야 합니다. 또한 온 가족이 교회에 나와 아기 예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안나와 같이 경건한 마음으로 거룩한 성탄절을 맞이합시다. 그 어느 때보다 더욱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2012년도 성탄절을 맞이합시다.
예수님의 탄생은 창세전부터 기다려온 일입니다. 온 피조물이 고대하던 바입니다. 성탄절을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기회로 만들어 봅시다. 예수님의 탄생을 정말로 기뻐하며, 감사하며, 축하는 우리가 됩시다.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땅에는 평화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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