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에 대한 예화 모음
유대인의 교육 - 배신
유대인들의 육아법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다. 어린 자녀가 차츰 자아의식을 형성해 가면 아이들과 신나게 놀던 아빠가 어느날 갑자기 그 아들을 홱던져버리고 냉정하게 돌아선다.
꼬마는 평생 처음당하는 엄청난 쇼크에서 쉽게 헤어날 수가 없게 된다. 그들은 이런 경험을 통하여 인간에게는 까닭없는 배신이 있다는 것과 인간은 이렇게 변화무쌍한 존재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어린 아들로서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 절망과 배신을 딛고 또 다시 아빠품으로 돌아오면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던 아빠가 다시한번 호되게 밀쳐내 버린다.
어린 아들에게 아빠는 사랑의 대상이요 다정한 친구요 자신의 삶은 몽땅 송두리채 책임지고 있는 존재로서 이 아이에게만은 하나님 방불한 실존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까닭없는 배신의 아픔은 어린이가 재대로 소화하기에 힘겨운 과제임이 분명하다. 이럴 때 아빠는 자기 아들에게 [아들아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이 아빠가지도 너를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교훈한다. 그리고 인간이 영원히 믿을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3-5)
한눈에 매정해 보이는 유대인의 아비들은 이 진리를 아이들에게 바로 가르치기 위하여 애간장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참고 견디며 이런 방법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없이 온 세상을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면서도 2천 수백년 동안 자기들의 민족성을 굳게 지키고 오늘의 세계를 이끌어 가는 힘의 상당 부분은 이와같은 육아법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떠한가?
[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나만 굳게 믿어라 나는 너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단다. 너는 아무 걱정 말고 편하게 살아라]라는 식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 않는지.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 주는 것, 시집가는 딸에게 엄청난 혼수를 장만해 주는 것 등이 바로 그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뿐만이겠는가? 엄마는 아이들의 학교 성적까지 책임질 작정으로 맹렬한 치맛바람을 날리고 다니지 않는가?
이런 식의 육아법은 결국 자녀들로 하여금 남을 의지하는 졸장부로 만들고 또 지극히 무기력한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 사람들은 하늘같이 믿었던 인간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면 그 엄청난 충격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결과 적으로 파탄의 인생을 살게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오직 하나님외에는 우리가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자가 없음을 가르쳐야 한다.
배신의 열매
당나라가 망국의 말기 증상을 나타내고 왕조의 지배 질서가형편없이 붕괴되고 있을 때다.
중국 천하를 무정부 상태의 혼란으로 몰고간 농민 반란으로 황소의 난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때 황소의 부장으로 주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 자기를 키워준 황소를 배신하고 당나라에 투항하여 절도사라는 직임을 지니고 있다가 마침내 황소를 파멸시키고 말았다.
당나라에서는 그의 공로를 크게 기려 각가지 특혜를 베푸는 가운데 그에게 주전충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했다.
"그대 당나라를 위하여 온갖 충성을 다하였도다 앞으로도 나라를 위하여 온전한 충성을 다할지어다"라는 뜻이 그 이름에 담겨져 있었다.
본래 은인이요 주인이던 사람을 배신하고 당나라의 충신으로 변한 주전충이다. 그때부터 당나라의 병권과 함께 정권을 한 손에 거머쥐고 온갖 호사를 다 누리더니 다시한번 배신하여 290년을 이어오던 당나라를 멸하고 스스로 후량국의 태조가 되었다.
이렇게 배신과 배신의 연속선상에서 황제가 된 주전충는 온갖 호사와 포악을 자행하더니 미처 5년이 다 가기전에 자기 아들 주우규의 칼을 맞고 그의 최후를 장식했다. 전충이라는 이름으로 배신을 뿌리고 배신을 가꾸던 사람이 마침내 엄청난 배신의 열매를 거둔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다.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녀석은 1년이 채 못되어 자기 동생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형을 죽이고 천하를 차지한 주우정은 어떠했던가?
그는 형의 피가 다 마르기도 전에 후당이라는 나라를 세운 이존욱이라는 사람에게 자기의 목숨과 함께 황제의 면류관, 그리고 나라까지 몽땅 빼앗기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주전충이 세운 후량국은 겨우 14년을 지탱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실로 숨가뿐 배신과 배신의 세월이요 역사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상고하다보면 인간의 역사란 실로 한없이 계속되는 배신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가롯 유다의 배신
1. 질투심 때문에 배신했다는 것이다. 가롯 유다는 12 제자중 높은 지위를 차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처럼 친밀한 그룹에 들지 못했다. 그 때문에 까닭없는 질투심이 생겨서 그 질투심은 노를 격동했고 이 격노가 마침내 미움으로 변하여 예수님을 배반햇다는 심리학적인 해석이다.
2. 유다의 판단 착오설이다. 유다는 정세 판단에 밝은 사람이다. 자신의
판단으로서는당시의 사태가 점점 로마 정부와 예수님과의 정면 충돌이 불가피해져감을 느꼈고 그 충돌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격화되어 갈것으로 판단한 유다는 예수님을
로마군에 일찍 넘겨주어 감금시켜 더 크고 격화된 충돌을 피하려고 배반했다는 것이다.
3. 예수님의 대한 기대가 어굿나 배반했다는 설이다. 유다는 과격한 국수주의자로 로마인을 무슨 수단으로든 팔레스틴 땅에서 추방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이 유다가 예수님의 능력과 교훈과 행동을 보고 예수님을 통해 자기 꿈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 했으나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택하심을 보고 자기의 기대가 어긋났다고 판단해서 배반했다는 것이다.
4. 돈에 대한 탐욕설이다. 돈에 탐욕심이 나서 즉 은 30이 그의 눈을 가리워 예수를 팔게 된 것이라는 설이다. 탐심의 죄 때문이다. (요12:4-5)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던 가롯
유다는 처움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명예와 돈이었다.때문에 반역자가 되었고배신자의 행동을 낳게 된 것이다.
배신(背信)
1.배신의 열매
당나라가 망국의 말기 증상을 나타내고 왕조의 지배 질서가 형편없이 붕괴되고 있을 때다.
중국 천하를 무정부 상태의 혼란으로 몰고간 농민 반란으로 황소의 난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때 황소의 부장으로 주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 자기를 키워준 황소를 배신하고 당나라에 투항하여 절도사라는 직임을 지니고 있다가 마침내 황소를 파멸시키고 말았다.
당나라에서는 그의 공로를 크게 기려 각가지 특혜를 베푸는 가운데 그에게 주전충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했다.
"그대 당나라를 위하여 온갖 충성을 다하였도다 앞으로도 나라를 위하여 온전한 충성을 다할지어다"라는 뜻이 그 이름에 담겨져 있었다.
본래 은인이요 주인이던 사람을 배신하고 당나라의 충신으로 변한 주전 충이다. 그때부터 당나라의 병권과 함께 정권을 한 손에 거머쥐고 온갖 호사를 다 누리더니 다시한번 배신하여 290년을 이어오던 당나라를 멸하고 스스로 후량국의 태조가 되었다.
이렇게 배신과 배신의 연속선상에서 황제가 된 주전충는 온갖 호사와 포악을 자행하더니 미처 5년이 다 가기전에 자기 아들 주우규의 칼을 맞고 그의 최후를 장식했다. 전충이라는 이름으로 배신을 뿌리고 배신을 가꾸던 사람이 마침내 엄청난 배신의 열매를 거둔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다.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녀석은 1년이 채 못되어 자기 동생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형을 죽이고 천하를 차지한 주우정은 어떠했던가?
그는 형의 피가 다 마르기도 전에 후당이라는 나라를 세운 이존욱이라는 사람에게 자기의 목숨과 함께 황제의 면류과,그리고 나라까지 몽땅 빼앗기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주전충이 세운 후량국은 겨우 14년을 지탱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실로 숨가뿐 배신과 배신의 세월이요 역사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상고하다보면 인간의 역사란 실로 한없이 계속되는 배신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2.유대인의 교육
유대인들의 육아법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다. 어린 자녀가 차츰 자아의식을 형성해 가면 아이들과 신나게 놀던 아빠가 어느날 갑자기 그 아들을 홱 던져버리고 냉정하게 돌아선다.
꼬마는 평생 처음당하는 엄청난 쇼크에서 쉽게 헤어날 수가 없게 된다.
그들은 이런 경험을 통하여 인간에게는 까닭없는 배신이 있다는 것과 인간은 이렇게 변화무쌍한 존재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어린 아들로서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 절망과 배신을 딛고 또 다시 아빠품으로 돌아오면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던 아빠가 다시한번 호되게 밀쳐내 버린다.
어린 아들에게 아빠는 사랑의 대상이요 다정한 친구요 자신의 삶은 몽딴 송두리채 책임지고 있는 존재로서 이 아이에게만은 하나님 방불한 실존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까닭없는 배신의 아픔은 어린이가 재대로 소화하기에 힘겨운 과제임이 분명하다.이럴 때 아빠는 자기 아들에게 [아들아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이 아빠가지도 너를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교훈한다. 그리고 인간이 영원히 믿을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3-5)
한눈에 매정해 보이는 유대인의 아비들은 이 진리를 아이들에게 바로 가르치기 위하여 애간장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참고 견디며 이런 방법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없이 온 세상을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면서도 2천 수백년 동안 자기들의 민족성을 굳게 지키고 오늘의 세계를 이끌어 가는 힘의 상당 부분은 이와같은 육아법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어떠한가?
[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나만 굳게 믿어라 나는 너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단다 너는 아무 걱정 말고 편하게 살아라]라는 식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 않는지.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 주는 것,시집가는 딸에게 엄청난 혼수를 장만해 주는 것 등이 바로 그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뿐만이겠는가? 엄마는 아이들의 학교 성적까지 책임질 작정으로 맹렬한 치맛바람을 날리고 다니지 않는가?
이런 식의 육아법은 결국 자녀들로 하여금 남을 의지하는 졸장부로 만들고 또 지극히 무기력한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 사람들은 하늘같이 믿었던 인간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면 그 엄청난충격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결과 적으로 파탄의 인생을 살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오직 하나님 외에는 우리가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자가 없음을 가르쳐야 한다.
3.누가 배신자일까?
3.1절이면 기억해 줄만한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신 철이라는 한국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종로 경찰서 고등계 형사로 있던 그는 특히 수상한 조선인을 색출하는 데는 귀신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사십이었다. 종로 경찰서에 10년간 근무해온 고참이기도 했다.
신철, 그가 일본 경찰의 고위 간부들에게 인정 받기까지는 수많은 동족들의 피와 눈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는 내놓은 민족 반역자였고 천황의 사냥개였다.
기미년 2월 26일께의 늦은 밤이었다.
지금의 안국동 자리에 있던 인쇄소 보성사에서는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창문을 안에서 가리고 무엇인가를 찍어 내고 있었다.
그때 보성사 부근을 지나고 있던 신철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인쇄소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인쇄 중이던 독립 선언문을 집어 들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문을 읽어 보고 놀란 표정의 인쇄소 사람들을 한번 둘러 본 후 말없이 그곳에서 사라졌다.
이 소식은 즉각 거사를 준비중이던 핵심인사들에게 전해졌다.
33인의 민족 대표 중의 한 사람이던 최린이 신철의 소재를 수소문해서 은밀하게 신철과 마주 앉았다.
{당신은 이제까지 우리 동족들에게 참으로 많은 나쁜 짓을 저질렀소, 이제 마지막으로 한번 우리 민족을 위해서 큰 일을 해 주시오. 당신만 입을 다물어 준다면 우리나라는 머지않아 독립할 수가 있을 것이오, 그러면 역사는 신철이라는 이름을 명예롭게 기억할 것이오}
최린은 당시 돈으로 거금인 5천원을 신철 앞에 꺼내 놓았다.
{이 돈이면 만주에 들어가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을 것이오. 우리 민족 전체의 미래가 당신 한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 보시오.}
최린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신철은 한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라졌다.
3월 3일로 독립선언은 서둘러 3월 1일에 앞당겨 행하여졌다.
3.1만세 운동이 일제의 잔인한 탄압에 눌려서 독립의 희망이 점차 사그라들던 두 달 후,신철은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고 만다.
고등계 형사 신철과 관련해서 분명한 것 하나는, 그가 독립 선언 계획을 사전에 탐지했지만 이를 일본 경찰에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3.1운동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최근 3.1운동 당시 33인 민족 대표로 불리는 이들 중 일부가 나중에 적극적인 친일 행각을 벌였다는 주장들이 대두 되고 있다.
청주시 3.1공원 안에 있는 청주 출신 33인 대표 한 사람의 동상이 시민 단체들에 의해서 강제 철거 될 위기에 있다고 한다.
해방 이후 이제 까지 우리 정부의 각료를 지낸 분들의 상당수가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이었다는 조사 결과가 몇일 전에 발표됐다.
그런 저런 믿기 싫은 이야기가 발표될 때마다 신철이라는 사나이가 생각이 난다.
그는 결코 훌륭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의롭게 살다가 후에 변절한 사람들과, 개처럼 살다가 후에의롭게 죽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 1995.3.1, 동아일보"어느 고등계 형사의
자살" -
4. 일관된 대답
몇 년전 홍콩에서 한 친구가 중공에서 감옥 생활을 하다가 최근에 풀려난 어떤 분을 소개시켜 주겠다며 나를 좁은 언덕 아래에 있는 연립주택 2층으로 안내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그 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리자 약 60세 가량 되어 보이는 중국 노인이 문을 열고 우리를 맞아 주었습니다. 그 분의 얼굴은 반가운 미소로 환했으나 허리는 반쯤 굽어 있었습니다. 그 분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약간 초라한 방으로 들어섰습니다. 거의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중국 여인이 차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녀가 차를 놓고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자기 남편과 얼마나 정겹고 사랑스럽게 마주 보고 있는지, 나는 넋놓고 그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친구에게 묻자. “아무 일도 아니야. 지금 이 분은 서로 대단히 만족해 한다는 것을 자네에게 보여 주고 싶어 그러시는 거야. 이 분들은 신혼부부거든.”나는 1949년 이 노인이 난킹 신학교의 학생일 때 이분들이 약혼을 했는
데, 결혼 하루 전날 중국 공산당들이 신학교를 점령하고 학생들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고 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뒤 30년 동안 그녀는 신부가 되어 보지 못하고 일 년에 단 한 차례 수용소 사무실에서 몇 분 동안만 그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만일 기독교인이 되기를 포기한다면 네 신부와 함께 고향으로 보내줄 수도 있지.”
담당 공산당원의 이러한 말에 그는 해가 거듭 바뀌어도“아니오”라는 단 한 마디 말로 일관된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어떻게 가족도, 결혼도, 심지어 자기의 건강도 마다하고 그토록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그 분께 질문을 하자 그 분은 내 질문에 오히려 놀라는 기색으로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저를 위해 치르신 그 모든 것을 받고서 어떻게 그 분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배신의 역사
역사라는 것을 [배신]의 관점에서 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이성계는 고려왕조를 배신함으로써 왕권을 잡았다. 수양대군은 나어린 조카 단종을 배신했고, 이시애 이징옥등 역대의 반란군 대장들도 대부분 부하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동학 농민혁명의 영웅 전봉준 역시 마지막엔 배신한 동학교도의 신고로 관군에 붙잡혔다. 만주벌판의 항일대장 김좌진은 다른 사람도 아닌 동족에 의해 등뒤에서 총을 맞았고, 똑같은 독립군 대장 양세봉 윤세주사령도 모두 전투가 아닌 기습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그들의 [동족 후손들]은 지금 별로 기억하지 않고 있다. 이
것 역시 분명한 배신이요 반역이다.
8·15후 최대의 반역은 김구 암살이었다. 일제 침략자들도 감히 건드리지 못한 백범 김구-- 그 거목을 그의 동족 [안두희와 그 비호세력]이 죽였다.
그리고 그 배신자들은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잘먹고 잘살았다. 그런[민족에 대한 배신자]들을 처단하겠다며 [반민특위]라는게 생겼었다.
그런데 그게 불과 몇달도 안가 친일 실권파에 의해 하루아침에 [쿠데타] 당하고 말았다. 반역자들에 의한 2중, 3중의 배신이었던 셈이다.
4·19후에도 배신의 역사는 끊이지 않는다. 장면 총리에 대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의 배신부터가 비겁하기 짝이 없었다. 반란군을 제압하고 응징했어야 할 참모총장이 반란군의 앞잡이가 되었으니 더이상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그러나 코미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런 배신자를 박정희는 [실컷 이용만 하고서] 탁 차버렸다. 배신자의 배신당함
이었다. 그후 장도영은 서울구치소에 들어가 그가 배신했던 제2공화국각료들과 함께 똑같은 옥사에 수감되었다.
박정희는 배신과 반란에 의해 정권을 잡았지만 그 역시 배신에 의해끝장을 만났다. 서로마 제국이 궁정 수비대장 오도아켈의 배신으로 멸망했듯이, 유신정권도 적이 아닌 [같은 패거리]에 의해 장송당한 것이다. 배신의 행렬은 도도히(?) 계속된다. 전두환 노태우 등 [30단에 모인별들]이 참모총장 정승화한테 총칼을 들이댔다. 그러나 노태우는 훗날 [그날의 동지] 전두환을 배신하고 그를 백담사에 보냈다. 광주에서 그토록 용감했던 전두환도 배신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드디어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문민이 반드시 [약속]의 정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3당합당, YS의 JP축출, DJ와 이기택의 [그짧았던] 동거생활 -- 온통 너나 할 것 없이 [토사구팽]에 의한 토사구팽이었다. 이런 배신사관의 관철과정에서 우리들 한국인들은 몇 개의 전형적인 처신방법들을 만들어냈다. 첫째가 능력있는 배신자. 바로 쿠
데타에 성공한 사람들의 경우다.
둘째는 속수무책의 책임자. 12·12 당시 3군 사령관 이건영의 경우가 그러하다. 두눈 멀겋게 뜬채 {그럼 이걸 어떻게 한다?}하며 당했던 것이다. 셋째는 [좌고우면]하는 기회주의자들이다. 장도영 노재현의 처신법이 그러하다. 네번째는 배신자에 충성을 다한 [배신적 충신파]의 경우다. [더 높은] 사령관을 철저히 물먹이면서 오직 [패거리 선배]한
테만 충성을 다했던 구창회란 사람의 처신법이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정몽주 사육신처럼 [죽기로 작정한 놈]들도 있기는 있었다. {다 알면서 왜 그래? 그러지 말고 당신도 이리 와…}하는 [30단]의 회유를 끝까지 물리친 장태완이란 무장도 있었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과는 달리 평생을 그저 적당히 얼버무리며 오로지[장수 제1주의]로만 나간 전직 대통령도 있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이
모든걸 녹음한 테이프마저 몰래 빼돌린 [신통한 배신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쯤해서 우리는 이 [적과의 동침]으로 [성공한 쿠데타]를 수없이 만들어낸 [배신사관]을 이제 그만 졸업해야 하겠다. 이제는 [누가] 비참하게 망하는 방식에 의해 또다른 [누가] 비정상적으로 득세를 하는 모양새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 오직 곧은 길을 걷겠다는 사람들이 서로 축복해 주며 주고 받는 [순리의 역사]를 만들수 있어야 하는 것이
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려면 [정직사관]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거짓말과 양설행위를 근절시켜야 한다. 이쪽에 가선 이말하고 저쪽에 가선 저말하고, 아침엔 이랬다가 해만 지면 뒤집어버리고, 정치의 이름으로 배신과 번복을 오히려 [위기관리]라면서 정당화하는 정치문화일랑철저히 뜯어고쳐야 한다. [후 3김] 정국은 그래서 87년과 92년의 되풀
이여서는 안된다.
[3김싸움]이 아닌 [정직과 부정직, 신의와 배신]의 대결로 앞으로의 판을 짜나가야만 하겠다.
배신의 열매
당나라가 망국의 말기 증상을 나타내고 왕조의 지배 질서가형편없이 붕괴되고 있을 때다.
중국 천하를 무정부 상태의 혼란으로 몰고간 농민 반란으로 황소의 난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때 황소의 부장으로 주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 자기를 키워준 황소를 배신하고 당나라에 투항하여 절도사라는 직임을 지니고 있다가 마침내 황소를 파멸시키고 말았다.
당나라에서는 그의 공로를 크게 기려 각가지 특혜를 베푸는 가운데 그에게 주전충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했다.
"그대 당나라를 위하여 온갖 충성을 다하였도다 앞으로도 나라를 위하여 온전한 충성을 다할지어다"라는 뜻이 그 이름에 담겨져 있었다.
본래 은인이요 주인이던 사람을 배신하고 당나라의 충신으로 변한 주전충이다. 그때부터 당나라의 병권과 함께 정권을 한 손에 거머쥐고 온갖 호사를 다 누리더니 다시한번 배신하여 290년을 이어오던 당나라를 멸하고 스스로 후량국의 태조가 되었다.
이렇게 배신과 배신의 연속선상에서 황제가 된 주전충는 온갖 호사와 포악을 자행하더니 미처 5년이 다 가기전에 자기 아들 주우규의 칼을 맞고 그의 최후를 장식했다. 전충이라는 이름으로 배신을 뿌리고 배신을 가꾸던 사람이 마침내 엄청난 배신의 열매를 거둔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다.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녀석은 1년이 채 못되어 자기 동생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형을 죽이고 천하를 차지한 주우정은 어떠했던가?
그는 형의 피가 다 마르기도 전에 후당이라는 나라를 세운 이존욱이라는 사람에게 자기의 목숨과 함께 황제의 면류과,그리고 나라까지 몽땅 빼앗기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주전충이 세운 후량국은 겨우 14년을 지탱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실로 숨가뿐 배신과 배신의 세월이요 역사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상고하다보면 인간의 역사란 실로 한없이 계속되는 배신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누가 반역자인가?
3.1절이면 기억해 줄만한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신 철이라는 한국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종로 경찰서 고등계 형사로 있던 그는 특히 수상한 조선인을 색출하는 데는 귀신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사십이었다. 종로 경찰서에 10년간 근무해 온 고참이기도 했다.
신철, 그가 일본 경찰의 고위 간부들에게 인정 받기까지는 수많은 동족들의 피와 눈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는 내놓은 민족 반역자였고 천황의 사냥개였다.
기미년 2월 26일께의 늦은 밤이었다.
지금의 안국동 자리에 있던 인쇄소 보성사에서는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창문을 안에서 가리고 무엇인가를
찍어 내고 있었다.
그때 보성사 부근을 지나고 있던 신철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인쇄소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인쇄 중이던 독립 선언문을 집어 들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문을 읽어 보고 놀란 표정의 인쇄소 사람들을
한번 둘러 본 후 말없이 그곳에서 사라졌다.
이 소식은 즉각 거사를 준비중이던 핵심인사들에게 전해졌다.
33인의 민족 대표 중의 한 사람이던 최린이 신철의 소재를 수소문해서 은밀하게 신철과 마주 앉았다.
{당신은 이제까지 우리 동족들에게 참으로 많은 나쁜 짓을 저질렀소, 이제 마지막으로 한번 우리 민족을 위해서 큰 일을 해 주시오. 당신만 입을 다물어 준다면 우리나라는 머지않아 독립할 수가 있을 것이오, 그러면 역사는 신철이라는 이름을 명예롭게 기억할 것이오}
최린은 당시 돈으로 거금인 5천원을 신철 앞에 꺼내 놓았다.
{ 이 돈이면 만주에 들어가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을 것이오. 우리 민족 전체의 미래가 당신 ㅅ한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 보시오.}
최린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신철은 한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라졌다.
3월 3일로 독립선언은 서둘러 3월 1일에 앞당겨 행하여졌다.
3.1만세 운동이 일제의 잔인한 탄압에 눌려서 독립의 희망이 점차 사그라들던 두 달 후,신철은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고 만다.
고등계 형사 신철과 관련해서 분명한 것 하나는, 그가 독립 선언 계획을 사전에 탐지했지만 이를 일본 경찰에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3.1운동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최근 3.1운동 당시 33인 민족 대표로 불리는 이들 중 일부가 나중에 적극적인 친일 행각을 벌였다는 주장들이 대두 되고 있다.
청주시 3.1공원 안에 있는 청주 출신 33인 대표 한 사람의 동상이 시민 단체들에 의해서 강제 철거 될 위기에 있다고 한다.
해방 이후 이제 까지 우리 정부의 각료를 지낸 분들의 상당수가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이었다는 조사 결과가 몇일 전에 발표됐다.
그런 저런 믿기 싫은 이야기가 발표될 때마다 신철이라는 사나이가 생각이 난다.
그는 결코 훌륭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의롭게 살다가 후에 변절한 사람들과, 개처럼 살다가 후에의롭게 죽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배신
한 때 로마의 삼두 정치의 한 사람이었던 폼페이우스는 씨이저와의 대결에서 패 한후 그가 지배하던 로마 판도 안에서는 숨을 장소가 없었다. 부하 몇을 데리고 낮이면 숨고 밤이면 도망가서 소아시아에 있는 애인 코네리를 데리고
그는 이집트로 다시 향했다. 생각해 보면 억울하고 서렵기 그지 없었다. 대정치가요 대장군이던 자신이 도망가는 신세가 되다니.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을 진압했고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한 자신이 아니가? 대 로마 제국을 지배하던 종신 집정관이 아닌가? 전날 이스파니아,시리아를 정복했고 개선장군으로 입성하던 때의 만세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이 아닌가?
과거 이집트를 도와 준일이 있으므로 그 인연을 믿고 이집트로 가는 길이었다.거기서 다시 기회를 보자는 속샘이었다. 그는 베르샴에 배를 세우고 이집트 정부에 자기가 왔음을 통지하였다.이집트 정부에서는 만약 그를 환영하면 씨이자의적이 되고,만일 그를 환영하지 않는다면 후에 그가 다시 세력을 얻을 때는 불리할 것으로 판단한 그를 거짖으로 환영하여 죽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폼베이우스 일행을 맞으려오는 배에 탄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있었다. 아기를 안고 불안스럽게 바라보던 아내 코네리는 남편의 소매를 당기며 이집트 배로 내려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작별의 키스를하고 이집트 배로 내렸다. 거기에는 옛날 자기의 부하였던 한 로마의 사관이 타고잇는 것을 보고 반가와서 "자네는 옛날 나를 따르던 부하가 아닌가?" 하니 그 사관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관은 해안에 상륙하자 번개같이 폼베이우스를 찔려 죽이고 그 부하도 죽였다.그는 폼베이우스의 목을 잘랐다. 가족들은 해안으로 가서목없는 시체를 안고통곡하다가 화장하여 유골만 가지고 돌아왔으니 BC48년 9월 28일, 그의 나이 59세였다. 뒤를 쫓아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한 씨이자 앞에는 폼베이우스의 머리와 원수의 도장인 반지가 운반되었다. 씨이자는 눈물을 흘렸다. 옛날의 동지요, 사랑하던 사위였기 때문이다.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4:14
황제의 독백
줄리안이 잠시 왕위에 올랐다.
원래 기독교 신자였으나 황제가 된후 권력과 영예와 영광을 누리게 되자 예수를 배반했다.
마침 로마군과 바사군 사이게 전쟁이 발발해 바사국으로 돌진 해 갈 때 쥴리안 황제는 길가에서 믿음이 독실한 군인을 비 웃는 태도로
"네가 믿는 그 목수 노릇하던 예수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아, 그분이야 폐하가 말씀하시듯 목수이니까 목수일이나 하고 계시겠지요."라고 군인이 대 답했다.
"아마도 황제의 머리에 쓰실 왕관을 짜고 계실지도 모르지요." 이는 무척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 후 쥴리안은 전쟁에서 부상해 죽기 전에
"오, 갈릴리 사람이여! 당신이 결국은 승리하였읍니다."고 외치며 자기의 배신행위를 괴로워하다 한숨을 쉬며 죽었다 한다. 우리는 항상 주님 편에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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