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화

말에 대한 예화 모음

공 상희 2011. 7. 30. 18:55

말에 대한 예화 모음

 

내 입의 말은...
작은 시골 천주교회의 주일 미사에서 신부를 돕고 있던 한 소년이 실수를 하여 제단의 성찬으로 사용할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다. 신부는 즉시 소년의 뺨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어서 물러가고 다시는 제단앞에 오지마!" 이 소년은 장성하여 공산주의의 대지도자인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이 되었다.

다른 큰 도시의 천주교회당에서 미사를 돕던 한 소년이 역시 성찬용 포도주 그릇 을 떨어뜨렸다. 신부는 곧 이해와 동정이 어린 사랑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여 주었다. "응, 네가 앞으로 신부가 되겠구나." 이 소년은 자라나서 유명한 대주교 훌톤 쉰이 된 것이다.
티토 소년은 그 말대로 제단 앞에서 물러가 하나님을 비웃는 공산주의의 지도자가 되었고, 쉰 소년은 그 말대로 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이다. 내 입에서는 어떤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을까? 그것은 축복과 믿음의 긍정적인 말들일까, 아니면 의심과 저주의 부정적인 말들일까?

 

말씀을 나누어 주는 가게
어떤 목회자가 목회에 관한 좋은 충고를 얻고자 선배 목회자를 방문하였다. 선배 목회자는 그를 응접실로 영접하고 인사를 나눈 후"목사님께서 오늘을 위하여 삶의 양식으로 정한 말씀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다.
후배 목회자가 약간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떡집에 손님이 왔을때 '떡이 오늘은 없습니다'하거나 생선집에 손님이 왔을때 '오늘은 생선이 없습니다.'라고 하면 그 가게는 신용을 잃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 주는 가게 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하루라도 없으면 우리는 폐업을 할 수 밖에 없지요."

 

새빨간 거짓말
친구: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여자들: 어머, 너 어쩜 이렇게 이뻐졌니?
비행기 조종사: 승객 여러분, 아주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학원 광고: 전원 취업보장! 전국 최고의 합격률!!
아파트 신규분양: 지하철 역에서 걸어서 5분거리!
수석 합격자: 그저 학교수업만 충실히 했어요…
자리를 양보받은 할머니: 에구, 괜찮은데…
술 취한 사람: 나 하나도 안 취했어!
간호사: 이 주사 하나도 안 아파요~~

 

*** 중생의 낱말뜻 ***

1. 다시 중요하게 태어남.
2. 원어로는 '팔린케니시아'로서 출생하다(게네시스)와 새롭게 다시한번
(팔린) 에서 온 말로 영적으로 다시남. 메사야적인 회복이란 뜻.
3.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영적 새사람으로 거듭남.(벧전1:3).
4. 새로온 피조물이 됨.(고후5:17).
5. 다시 나게 함.regeneration.(딛3:5).

 


*** 중생에 대한 성구 ***

1. 중생의 필요성
중생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됨.(요3:35).

2. 중생의 방법
성령으로 중생됨.(겔11:19,요3:8,딛3:5).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생됨.(약1:18,벧전1:23).

3. 중생의 결과
영적으로 성장하게 됨(벧전2:1,2).
의를 행하게 됨 (요일2:29).
성도를 사랑하게 됨.(요일3:10).
신령한 것을 분별하게 됨.(고전2:12-16).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됨.(고후3:18).
신령한 열매를 밍게 됨.(요15:1-8).
세상을 이기게 됨.(요일5:4).

* 새롭게 됨으로서 알 수 있는 것들 *

1. 황송함과 감사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게 함
- 히12:28-29, 출3:4-5, 사6:1-3
2. 우리의 죄의 검고 추함을 깨달아 알게 함
- 사6:5-6, 욥42:5-6
3.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을받을 수 없음을 알게 함 - 히9:22
4.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신 사랑을 알게 함 - 롬5:8

`다시 태어나다' 또는 `회복되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단지 두 번밖에 나오지 않지만(마19:28, 딛3:5), 많은 유사한 표현들을 통하여 이 단어의 기본적 의미를 추적할 수 있다. 이 단어와 관계되는 용어들은 "거듭나다"( 요3:3), "하나님께로서 나다"(요1:13,요일3:9), "살아나다"(엡2:1,5), "새롭게 되다"(롬12:2, 딛3;5) 등이다.


누구나 이해 쉬운 복된 말씀
 권성수 목사의 그리스도인과 성경]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녀들의 수준으로 말씀하신 ‘베이비 토크’(baby-talk)이다.
성경이 명료하다는 것은 성경 자체가 주장한다. 성경은 모든 백성들이 이해하고 자손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하다(신 6:6∼7). 성경은 밤낮으로 묵상할 수 있도록 돼 있는 분명한 책이다(시 1:2). 성경은 단순한 자들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시 19:7,119:130). 신약 대부분의 서신들도 지도자들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보낸 것으로 성도들 전체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고전 1:2,갈 1:2). 성경의 예언은 사사로이 해석될 것이 아니라는 말씀(벧전 1:20)은 보통 성도들은 성경을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도들과 교제하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명료한 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자격이 필요하다.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 데는 지적인 능력보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능력이 더 필요하다(고전 2:14,히 5:14,약 1:5∼6,벧후 3:5). 성경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읽고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이 명료한 책이라면 왜 성경을 오해하게 되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구약 성경과 예수님의 교훈을 왜 이해하지 못했는가(마 15:16,막 4:10∼13,8:14∼21,눅 18:34,요 8:27).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구원역사의 사건들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요 12:16,13:17).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또한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거나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다(눅 24:25). 그들은 또한 이방인들을 교회에 영입하는 것과 같은 교리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해에 성숙성이 없었기 때문이다(행 15:7,갈 2:11∼15).

성도들간에 교리나 윤리(가령 세례방식,예정,교회정치 등)면에서 의견이 다른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성경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것을 우리가 이렇다,혹은 저렇다 하고 주장하기 때문이거나 우리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경우는 우리가 성경 해석에 사용한 데이터가 부적합,혹은 불완전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 자신이 부적합(교만 탐욕 불신앙 이기심 나태 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 자체가 어떤 주제에 대해서 혼란을 초래한다든지 정확하게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명료하다면 히브리어나 헬라어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학자들의 역할이 무엇인가? 성경학자들은 ‘교사’의 은사를 가지고 성경을 분명하게 가르칠 수 있다(고전 12:28,엡 4:11). 그들은 성경의 진리들을 서로 연관시켜 종합하고 그것들을 새로운 세대에 적용하여 새로운 이해의 분야를 발굴할 수 있다. 그들은 성경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공격에 대해서 성경을 변호할 수 있다(딛 1:9). 그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역사적으로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성경연구를 보완할 수 있다.
성경은 명료한 책이기 때문에 누구나 읽고 듣고 순종하여 복을 받을 수 있다.


말씀의 울타리
어느 도시에 있는 국민학교의 운동장이 번잡한 길과 연결되어 위험했기 때문에 교사들은 항상 학생들에게 조심하라고 주의시켰고, 또한 학생들도 운동장에서 놀다가 자칫 공이 길거리에 굴러 나가도 곧 바로 쫓아 나가지 못하는 것은 혹시 달려오는 차에 치어 큰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시당국에서 그 국민학교 운동장에 담을 쌓아 복잡한 길거리와 분리시켜 놓았다. 그 담이 완공되자 학교 교사들은 안심하게 되었고 특히 학생들은 이제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않고 뛰어 놀며 안전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학생들은 운동장을 둘러싼 담장안에 갇혀 부자유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자유와 안정감을 찾게 된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의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담장이 없을 때에는 억압을 받지 않아 자유스러운 것 같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의 울타리 밖에서 사는 생활은 항상 불안하고 위험한 것이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 말씀의 울타리 안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이 더 자유스럽고 평안하며 안전하고 복된 생활이 되는 것이다.

 


말씀을 전하라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을 마치고 천국에 갔을 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지상에서 비참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끄러운 죽음을 한 흔적을 가지고 천국에 갔습니다. 이 때 가브리엘이 가까이 와서 그에게 가까이 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주님, 지상에서 무리들을 위해 심히 고통을 받으셨지요?"
"그렇다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이 계속했습니다. "지상의 사람들은 주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그들을 위해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이 모든 것을 다 알았습니까?"
"아니지, 아니야."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아직은 모르지. 지금은 오직 손가락으로 셀 만한 사람들만 알고 있어."
가브리엘은 당황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주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글쎄, 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몇몇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주라고 했을 뿐이야.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겠지. 그렇게 해서 복음은 지상의 아주 먼 곳까지 전해지게 될거야. 종래에는 모든 인류가 나에 대해 듣게 될 것이고 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알게 될 거야."
가브리엘은 이마살을 찌푸리고 회의적인 표정을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란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지치고 피곤해지면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20세기나 21세기가 되어 사람들이 너무 바빠져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할 시간이 없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뭐 다른 계획은 없으십니까?"
"아니야, 가브리엘 다른 어떤 계획도 없어."
예수님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믿고 있어."

 

그건 말이다..
어느 소녀가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를 하고 있었다.
“신부님, 저는 아주 큰 죄를 지었습니다”
“말해 보거라. 아가야”
“신부님, 저는 허영심으로 가득찬 아이입니다. 하루에 두번 정도 거울을 보는데, 볼때마다 이렇게 말하죠.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이쁘다고요…”
그러자 그 신부는 소녀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말했다.
“얘야~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죄가 아니란다. 공주병이지…”

 


말조심

한 농부의 아내가 그 동네 목사님을 헐뜯는 말을 퍼뜨렸다. 그래서 곧 온 마을에 그 소문이 퍼졌다.
얼마 후 그 여인은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목사님을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 늙은 목사님은 `당신이 저의 한 가지 바램을 따라준다면 기꺼이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말했다. `
기꺼이 하겠습니다`하고 여인은 대답했다. `집에 가서 검은 암탉 한 마리를 잡아 그 깃털을 뽑고 그것을 바구니에 담아 가져오십시오` 30분 후에 그녀가 돌아왔다. 목사님이 말했다. `이제, 마울로 가서 각거리 모퉁이마다 이 깃털을 뿌리고 돌아오십시오.` 그녀는 그렇게 했다. `이제 마을로 가서 그 깃털을 모아 오십시오
. 그리고 한 개도 잃어버린 것이 없나 봅시다.` 그 여인은 놀라서 목사님을 쳐다보며 `그것은 불가능해요!
바람이 그것들을 들판 저너머 사방으로 날려 보냈을테니까요.` `그렇다면` 하고 그는 말했다.
`제가 당신을 용서는 하겠지만 당신이 말한 그 거짓된 말들이 일으킨 피해를 취소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 두십시오.`

 

한 말씀만 하소서
소설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일기를 통해 아들을 잃은 아픔을 썼습니다.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소설가 박완서씨 이야기입니다. 올림픽으로 온 나라가 들썩거리던 1988년 25살 된 아들을 잃었습니다. 다섯 중에 아들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내고 그 충격을 일기로 모았다가 출판사의 간곡한 부탁으로 활자화되어 최근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 놓았던 것입니다. 신앙인이 아니었지만. 아들을 떠나보내면서 절규하듯이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녀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은 제아무리 독한 저주에도 애타는 질문에도 대답이 없었고 오히려 잠잠하기만 한 하나님을 향하여 급기야 "한 말씀만 해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아들 원태는 25년 5 개월만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신은 황폐해졌고 무심한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을 하였습니다. 하나님도 실수를 했다고 치부하며 잊으려 애썼지만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자식이라던가요? 한참이 지난 후에, 사람의 죽음 앞에 아무 말이 없는 그 분의 전능하심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고 결국 고난을 감당하기에 이른 자신의 심경을 처절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제 자신의 경우 고통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더불어 살수 있게는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해서 고통이 면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고통을 이길 힘을 얻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지나간 날의 고통은 잊고 새로 설계하는 여러분 되십시오.

 

격려해 주기 위한 말
본문: 살전4:18 * 찬송: 415장

시인 아나톨에게 어떤 시인이 찾아와서 시집 한 권을 전해주고는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매우 존경합니다. 저의 이 조그만 시집을 한번 보아주십시오."하고는 떠나갔다. 그러나, 아나톨은 그 시집을 들여 다 볼 틈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젊은 시인이 찾아와서 느닷없이 묻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 저의 시집을 다 읽으셨습니까?" 아나톨은 청년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아 그럼 읽고 말고 단숨에 읽었다네."
그러나 젊은이는 이 말을 듣고도 못 믿어져서 "선생님, 저의 시는 선생님이 보시기엔 아주 보잘 것 없으실텐데 정말 다 읽으셨나요?" 하고 다구쳐 물었다. 그러나 아나톨은 서슴치 않고 또 대답했다.
"암 읽고 말고 자네 시집의 52페이지에 있는 것이 특히 감명을 주더구먼, 정열적인 시였어" "선생님, 정말 읽으셨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청년이 기뻐하며 돌아갔다. 함께 있던 제자들이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안 읽으셨을 텐데 어찌해서 그 같이 말씀하셨습니까?"
"사실 나도 거짓말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에게 실망을 주지 않고 격려해주기 위해 한 말일세" "하지만 선생님, 아까 52페이지란 말씀은 하지 않으셔도 되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 페이지에 청년이 좋아하지 않은 시가 있다면 어떻게 하실려구요." "아니야, 시인은 자기의 시를 똑같이 사랑하게 되어 있어. 자기 자식처럼 말이야" "그래도 선생님, 만일 그 페이지가 백지였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음, 백지일 수도 있지, 그러나 나는 그 청년을 격려하려고 했던 것뿐이니까... 만일 그 청년이 52페이지가 백지인 것을 알더라도 그 친구는 내가 깜박 페이지를 잘못 기억한 것으로만 생각할 터이니 염려 없다네"

 


마귀의 선물 - 거짓말
옛날 어느 마을에 남의 집살이를 하면서도 거짓말을 잘하는 머슴이 있었다. 하루는 이 머슴이 주인 어른과 함께 목욕을 하러 갔다. 한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가 이 머슴은 먼저 나와서 옷을 갈아 입고는 아직 목욕을 끝내지 못한 주인을 향하여 집에 불이 났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급히 집으로 돌아와 주인 마님에게는 지금 주인 어른이 목욕을 갔다가 미친 것 같으니 빨리 가보라고 말했다. 주인 영감이 미쳤다는 말을 들은 마나님이 허겁지겁 목욕탕으로 달려와 보니 정말 영감은 벌거벗은 몸으로 "내 집에 불이 났다니! 내 집에 불이 났다니!"하며 들낙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미친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짓말을 꾸며낸 종의 나쁜 계략 때문에 주인 부부는 멀쩡한 날에 희극을 연출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을 보면 "사탄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이간하고 서로 반목질시하게 하여 가정과 교회를 파괴시키고 망하게 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마지막 때에 사탄은 많은 하나님의 종들을 거짓말로 모함하여 희생시킬 것을 (계12:9)말씀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자칭 유대인이라하며 자기들이 가장 잘 믿는 것처럼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와 예수님을 시험하던 서기관과 바리새 인들에게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약3:6)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9-10)
아이들에게 한 번도 욕심 부리고 싸우라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거짓말하라고 가르쳐 준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나 잘 싸우고 거짓말을 쉽게 하는지 모릅니다. 입이 닳도록 '형제들과 사이좋게 지내라., 좋은 것은 나눠 써라, 서로 돕고 살아라'하고 가르치는데, 실천이 안 됩니다. 친구를 미워해라, 싸워라, 욕심 내라, 울어라, 이런 것은 안 가르쳐 줬는데 완전 자동입니다. 거짓말하는 것 가르쳐 줘서 거짓말하는 아이를 봤습니까? 옳지 않은 일은 완전 자동으로 배웁니다. 가만 내버려 두면 죄 된 모습이 나타납니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격려의 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 25:11.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같고 쏘다 위에 초를 부음같으니라”-잠 25:20.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온량(溫良)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2,4.

시기적절한 격려의 말은 절망하고 있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고, 상처받은 이 에게 치료약이 되며, 자신의 결점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 새롭게 자신에 대해 평가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문제에 짓눌려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확신을 불어넣어 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로, 과학이나 예술이나 언론 등 많은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위기 상황에서 누군가의 격려를 받고 일어선 사람들입니다. 당신의 입술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디 당신의 입술이 사람을 살리는 입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의 입술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선한 도구로 쓰여지게 인도 해주시옵소서.”

 

마든이 말하는 성공 비결
크리스 스위트 마든
1.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시고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길가에 굴러 다니는 돌맹이 처럼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꼭 필요하기 때문에 나를 세상에 내신 것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적극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 모든 일을 기쁜 마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적극적인 사고를 가질 때 남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3.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4. 창조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창의력을 주실 때에 그것을 그때 그때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5. 집중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주의가 산만한 사람은 이 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6. 소박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복잡하고 지저분한 생각을 버리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삶을 경영해 나갈 때에 마침내 성공한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처럼
주일 예배시간이었다. 경건한 성도가 맨 앞줄에 앉아 있다가 설교가 시작되었는데 왠 일인지 신발 한짝을 벗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기이한 행동에 시선이 쏠려 있었다.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듯 이 신도는 다시 양말을 벗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목사님이 계속 설교를 할 수 없어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별일 아닙니다. 양말 한 짝을 뒤집어 신은 것을 발견해서요."
목사가 점잖게 말했다.
"그렇다면 형제여, 예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양말을 고쳐 신을 순 없겠습니까?"
"아닙니다. 목사님. 잘못된 게 있으면 당장 고쳐야죠. 성경 말씀 처럼요."

 

거짓말 논리
보이스카우트같은 소년소녀단의 게임에 [메시지 릴레이]라는게있다. 줄지어서있는 선두에게 기다란 메시지(文章)를 구두로 전달 -,차례로 구전시켜 최후의 자에게 보다 사실에 가깝게 전달시키는 편이이기는 게임이다. 물론 그 메시지가 정확하게 전달된다는 법은 절대없고 구전되는 도중에 놀랍게 변질되어 전혀 딴 메시지로 둔갑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엉뚱하게 변질된 소문을 미국에서는 [러시안 속삭임]이라하고 소련에서는 [아메리칸 메시지]라 한다. 확률론(確率論)의 대가 마르코프는 이를 추이확률항렬(推移確率行列)이라 개념화하고 진위(眞僞)가 절반이상으로 변질된다고 증명하고 있다.

소문이 사람들을 거쳐가는 동안 끼어드는 거짓의 비중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된다.

거짓말이론에 [에피메니데스의 역설(逆說)]이라는 것도 있다. 에피메니데스는 기원전 5백년에 예언자노릇을 했다던 크레타 출신의 전설적 인물이다. 2백99세까지 장수했다는 자체가 거짓말이요, 청년시대에 아버지분부로 길잃은 아기양을 찾아 나섰다가 동굴에서 낮잠을 자고났더니 57년이 지났다는등 거짓투성이의 인물이다.

이 에피메니데스가 [크레타 사람은 모두가 거짓말 쟁이다]고 말했다한다. 크레타출신인 자신마저 싸잡아 거짓말쟁이로 만든 것이 되니 그렇다면 그가 한말은 모두가 거짓말이 되고 자신은 정직한 사람이된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곧 에피메니데스의 역설...하면 거짓말투성이가 합리화되어 버젓이 행세되는 모순을 의미한다.

옛 우리 조상들의 글 놀음에 모순문(矛盾文)이라는 것이 있었다.
한가하게 정자에 둘러앉아 누군가가 [옛날 옛날 아주 그옛날의 바로일전에...] 하고 모순문의 서두를 꺼내면 이 말을 받아 [달도 별도 없는 달 밝은 밤에...]한다. 다시 이 말을 받아 [두개의 가마가 삼렬(三列)로 서서] [구불구불한 반듯한 길을...] [바른쪽으로 외로 돌아...]하고 받아 나간다.

이세상에는 [러시안 속삭임]이며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이며 그리고 [모순문]이며 거짓말이 버젓이 살 땅을 마련해 주고 있고 또 거짓말 아닌 것처럼 행세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하지만 [웅진여성의]의 에이즈를 둔 그 큰 거짓말이 그렇게 계획적으로 시도 되리라고 까지는... 황색상혼(黃色商魂)에 책동된 에피메니데스의 조작이 [러시안 속삭임]을 타고 번져 나아가 모순문속에 얽어매 놓은 해프닝이었다.


말조심
한 선비가 두 마리 소로 밭을 갈고 있는 농부에게 물었다.
`여보시오!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합니까?`라고 묻자, 농부는 곧장 밭 가장자리로 나와서, 귓전에다 대고 조용한 목소리로 `힘은 검은 소가 세고, 꾀 안부리고 일 잘하는 건 누런 소요`라고 일러 주었다. `
그런 말을 뭘 그리 비밀스레 하시오`라고 했더니, `말 못하는 짐승일 지라도 나쁜 말을 듣게 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듣은 선비는 바로 황희정승 이였다.
그 후 황희정승은 평생 남을 헐뜯는 말은 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거짓말/탈무드에서 허락하는
거짓말/탈무드에서 허락하는
어떤 경우에 거짓말을 하고도 용서를 받을 수 있는가.
탈무드에서는 다음 두 가지 경우에는 거짓말을 하라고 하고 있다.
먼저 이미 누군가가 사버린 것에 대하여 의견을 물어 왔을 때에는 비록 그것이 나
쁘다 하여도 `훌륭한 것이오.`라고 거짓말하라.
다음에, 친구가 결혼했을 때에는 반드시 `굉장히 미인입니다. 행복하게 사십시오.`
하고 거짓말을 하라.


거짓말 하면 망한다.
옛날 중국 주나라 12대 유왕은 나라일보다 여자들을 좋아하여 술마시며 즐기기를
계속하였다.
그는 특히 포사라는 여자를 더욱 좋아하였는데 그 여인은 좀처럼 잘 웃지를 아니했다. 유왕은 포사를 웃기고 싶었지만 잘 웃지를 않으니 마음이 답답하였다. 유왕은 어떻게 하면
포사가 웃을까 생각한 끝에 어느날 그는 봉화대에 횃불을 올리라고 신하에게 명
령을 내렸다.봉화대를 올리는 것은 군사를 모으는 신호였다.
봉화대를 올려 횃불이 타오르자 각 지방 영주들이 전쟁이 터진 줄 알고 군사들을 이끌고 나왔다.이것을 본 포사는`호호....아이 우수워...`하고 웃기 시작했다. 유왕은 대단히 마음이 흐뭇하게 여겨 그 후부터는 열흘이 멀다고 반복하였다.
영주들은 몇번 속은 후에는 다음부터 나가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때 진짜 이번에는 서북쪽에서 견융(적)들이 쳐들어 왔다 유왕은 당황하여 횃불을 올리게 하였으나 제후들은 임금의 장난인 줄 알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오지 아니하므로 결국 나라는 망하고 유왕은 도망가다가 죽고 말았다. 하여 자주 굿을 하였다.
그 때마다 전사한 본 남편이 아내의 사랑을 못잊어서 실려있다고 햇다.그러면서 한번은 굿을 하는데 무당들이 대끝에다 그 사람의 혼을 실어 결국은 단지(옹기그릇)안에 가두어 땅에 묻어버리겠다는 작전이었다. 그런데 전사했다고 하던 청년은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그의 부무님들은 아들이 살아온 것을 믿었다.이때 아들은 저의 처는 어디 갔습니까? 물을 때 부모님의 답변이 저가 전사하였다고 <뼈가> 오므로 우리들의 권유로 건너 마을00에게 시집을 갔네 하면서 오늘 저녁에 처가 아프다고 하여 굿을 한단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그길로 찾아갔다. 그때 마침 무당들이 대를 잡으면서 대끝에 혼이 찼다 단지를 준비하여 가두자 하면서 야단이었다.그때 처 되었던 여인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에는 가두지 마세요.그는 내가 사랑했던 남편입니다 했다.그때 본 남편이 실례합니다 하고 찾아들어 갔다.모두는 다 놀랐습니다.
그때 그 청년은 내가 죽어서 온 것이 아니고 살아서 왔다고 했다.
이와 같이 마귀의 거짓말하는 귀신일 무당에게 붙어서 계속 거짓말하였다.

 


누구의 말을 따를 것인가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엡 4:17.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사내 대장부가 술도 즐길 줄 알아야지." "그런 거짓말쯤은 해도 돼. 누이 좋고 매부 좋으라고 하는 것인데 뭐." "약간의 외도는 결혼 생활에 오히려 도움이 되는 거야." 우리는 이런 식의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리고 그럴 듯 하게 들리는 이런 식의 말에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런 식의 말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 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롬 13:13).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잠 19:9).
이와 같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뒤섞여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말을 따라야 할까요 ?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우리를 향한 숭고한 사랑과 책임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로 저희를 허망한 데로 이끄는 사람의 말을 따르기보다는 저희를 영원한 의(義)로 이끄는 주님의 말씀만을 따르게 하시옵소서."

 

거짓말의 습관
박목사님이 어느 지방에서 목회를 하실 때에 20년 동안 무당질한 김 세현씨에게 전도하여 예수믿게 하였다고 한다.
김 세현씨는 처음부터 구신을 철폐할 뿐더러 무당의 소유물 전체를 불놓았다. 그리고 그 후부터 교회를 잘 나올 뿐아니라 예수를 잘 믿어 교회 나온지 일년 만에 학습,세례 다
받았다.
그리고 찬송도 잘 부르고 기도도 잘하며 성경도 늘 읽었다.
그런데 그에게 한 가지 결점은 거짓말을 잘하는 것이었다.
박 목사님이 어느날 그 집에 심방을 가서 예배를 드린 후에 목사님이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진실한 신자이나 한가지 틀린것이 있어요 한즉 그가 반문하기를 무엇이 틀린 것입니까? 할때 목사님은 거짓말을 일수로 잘하는 것이 틀린 것이예요 한즉 그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내가20년 동안 사람을 속여 먹었는데 내가 왜 거짓말을 못하겠소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거짓말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어느집에 어리석은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건너 마을에 심부름을 갔는데 저녁시
간이 지나서야 그 집에 당도하였다.
그 집 어른이 이 아이에게 물었다. 너 저녁 먹었니?
소년이 대답하였다. 네 먹었습니다.
너 저녁 안 먹고 먹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고 주인이 재차 물었다.
정말 먹었습니다. 소년은 힘주어 말하였다.
아이는 고픈 배를 움켜쥐고, 허기가 져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튿날 자기
집에 돌아온 소년은 어머니에게 제 자랑을 늘어놓았다.
엄마, 어젯밤 그집 아저씨가 날더러 저녁 먹었느냐고 묻지 않아? 그래서 먹었다
고 그랬지, 그 아저씨 잘 속더라. 내가 저녁을 먹고 온 줄 알지 않아! 헌데 밤에
배가 고파 죽을 뻔했어. 누가 정말 속은 건지 알 듯 모를 듯 하다.


거짓말
베네주엘라의 어느 성당에서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불이야`라는 소리가 들려 성당안에 있던 6천여명이 공포에 질려 밀고 밀치는 바람에 46명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소매치기 들이 작업을 벌이기 좋은 여건을 만들기 위해서 저지른 술책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로 고함을 쳤던 소매치기 일당들도 문제이지만 거기에 휩쓸려 46명의 사상자를 낸 군중들도 문제였습니다. 화재의 사실 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무조건 소란을 피웠던 것이 문제이지요.
거짓말을 하는 자는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계22:15)
우리 주변에는 거짓 경보가 너무 자주 울립니다. 양심없는 사람들이 양심을 외칩니다. 거짓 종교의 탈을 쓴 사람이 비상벨을 울립니다.

 


말로 할 때 하라
여기에 간단한 시험문제가 있다.이 문제는 우스워 보이지만 결코 웃어 넘길 수만은 없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문제)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켰습니다.이 심부름을 꼭해야만 합니다.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울까요? 알아 맞혀 보세요.
1.말로 할 때 한다.
2.조금 얻어 맞고 한다.
3.많이 얻어 맞고 한다.
4.끝내 버티다가 쫓겨 난다.
당신은 과연 몇번에 동그라미를 치겠는가? 그리고 실제로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두 말할 필요없이 1번형 인간이 가장 지혜롭다는 데에 의의가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1번대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4번형 인간이야
도무지 소망이 없는 존재이지만,뜻밖에도 3번형 인간이 많다는 사실은 우리가 한번 그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하기야 교회에 초청되어 신앙간증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실컷 두들겨 맞고 절뚝거리며 주님께 나온 사람들 얘기뿐이니 한국성도들이 그런식의 삶을
정상적으로 여기는 비정상에 빠진 경향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고 눈치가 빤하면서도 미련하게 굴다가 얻어맞는 어린아이들 처럼 하나님의 낯빛을 분명히 느끼면서도 끝내 버티다가 혼찌검이 나서야 두손들고 엎어지는 그 미련함의 원인이 무엇일까? 1년을 걸려도 한번 제대로 읽지 못하는 방대한 양
의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고 또 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은 도대체 어느 귀로 듯고 어느 귀로 흘리는 지 모를 일이다.가슴 한 복판에 주님을 모시고 그 음성 듣기를 즐거워 하여 주님의 부드러운 숨결에 실려 춤추는 난초 잎사귀처럼 사는 것이 정말 이토록 힘든 일일까?
이 모든 소치가 다 `나`있고 `예수`있다는 식의 교만한 사고 구조 탓이 아닌가 싶다.
입술로는 화려하게 그 영광을 말하지만 가슴엔 여전히 내가 왕으로 남아 거룩한 통치권을 향해 빨치산처럼 출몰하는 교만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어쩌다가 짜놓은 행주처럼 후줄근한 영혼을 남나게 되면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된다.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부드럽고 온유한 신앙인에게서 오히려 압도당하는 힘을 느끼게 된다.바로 사지선다의 4번에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1번의 모양으로 살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이다.물론 순종에도 노예의 순종이 있고 자녀의 순종이 있다.품삯을 바라는 파출부의 수고와는 다른 사랑
에 겨운 새색시의 수고로 주님을 섬길때,이것이야 말로 주님이 받으실만한 향기가 될 것이다.
지금도 주님의 음성은 꽃닢위에 내리는 햇살처럼 내게도 다가온다.
한국말로는 번역하기 어려운 부드러운 터치(Touch)로 다가오는 주님의 사랑,그것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불감증만으로 우리는 이미 죄인이다.야구 방망이로 두들기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 나겠지만 주님의 마음이야 어디 그런식으로 자녀들을 대하고 싶으실까? 그 세미한 간섭을 느끼지 못하는 세가지 원인은 있다.하나는 죽었을 때,두번째는 잠들었을 때,마지막으로 엉뚱한데 정신을 팔고 있을 때이다.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신다.우리는 `말로 하실 때` 주님께 응답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말이 씨가 되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시편 50:23)
부드러운 바람과 연초록 기운이 몽실몽실 피어나는 청명절. 미루나무는 한창 봄을 틔우는 탓에 온몸을 돋움하느라 바쁩니다. 아래서 돌멩이는 푸념을 합니다. "
난 참 불행해. 이렇게 길거리에 버려져 온갖 사람들의 발길에 함부로 밟히고만 있으니..." 미루나무는 돌멩이에게 말합니다. "넌 어쩜 그렇게 세상을 슬프게만 사니! 맨날 똑같은 한탄, 지겹지 않아?" "넌 뭐가 달라? 겨울에 벗은 몸으로 떨었던 주제에 기쁜 일이 뭐 있니?" 미루나무는 기운차게 팔다리를 내두르며 대꾸합니다. " 난 다시 푸른 옷을 입고 사람들을 즐겁게 할 생각을 하면 얼마나 기쁜지 몰라! 너도 좋은 생각을 가져봐.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넌 단단한 몸이 있지 않니. 네 몸은 오랜 세월에 걸쳐 밟히면서 갈고 닦여져 옥돌이 되는 거야. 그때를 위해서 참고 기다려." 그때, 뚱뚱한 신사가 돌멩이를 밟고 지나갑니다. "아, 난 이렇다니까. 역시 난 불행해. 이렇게 세상을 살아서 뭐해. 살고 싶지 않아." 그때 돌멩이를 지나가는 아이 하나가 "에잇!"하면서 발로 툭 걷어찹니다. 돌멩이는 시궁창에 빠졌고 미루나무도 더는 말이 없습니다.

누구나 좋은 상황과 나쁜 상황이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사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할 조건 한 가지 이상씩을 주셨다. 지금과 같이 IMF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감사할 조건을 찾아 우리의 입술에 감사가 떠나지 않으며 살아갈 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아닐까?

 

선한 말 (good word)
한 남자가 친구의 집 저녁식사에 초대되었습니다.
음식은 너무나 훌륭했으나 애플파이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그 파이의 좋은 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몇 주일 후 이 사람은 친구의 집을 다시 방문하여 저녁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맛있는 체리파이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손님은 체리파이에 대해서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주인의 아내는 언짢아진 나머지 이렇게 불쑥 말했습니다.
"지난번 오셨을 때는 형편없는 파이가 나왔는데도 칭찬을 해 주셨잖아요.
그런데 오늘 저녁에는 지금까지 제가 만든 파이 가운데 가장 잘 만든 것을 내놨는데 어쩌면 말씀 한 마디도 없으시네요. 어떻게 된 건가요?"
그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오늘 밤에 먹은 체리파이는 환상적이었고, 지난번 주신 애플파이는 이번것 만큼은 좋지 않았지요.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애플파이에게 칭찬이 더 필요했던 것이지요!"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비록 불완전하게 보이거나 일을 잘 하지 못하더라도 항상 칭찬할만한 부분들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변과 심지어 우리 가정 안에는 용기를 잃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이들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선한 말(good word)'이 필요합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격려를 해 줄 방법들을 찾아봅시다.
Anxiety in the heart of man causes depression, but a good word makes it glad.(Proverbs 12:25)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지만,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한다.(성경 잠언 12:25)

 


거짓 증거하지 말라
십계명의 제 9계명은 법정적 위증문제보다 근본적인 허언과 허위의 인간을 문제 삼고 있으며 진실에 관한 계명인 것이다. 사탄의 대표적 악성은 거짓과 살인이다(요 8:44). 성
성의 위증죄는 피고와 동일한 벌을 받거나 유대인의 시행령은 위증벌칙이 피고의 배나 무거웠다. 흥미있는 것은 알고 있으면서 책임회피로 침묵하는 경우도 위증죄와 같은 벌을
받았다.
성서는 거짓말을 간음죄, 살인죄, 하나님 모독죄와 동류로 취급하고 있다 (렘 23:14,겔 13:17-19). 중상 모략으로 인격 살인을 밥 먹듯하는 거짓의 살인자는 악마의 정손이다.
현대의 사교.외교 선전 언어들은 고도로 애매하여 구렁이 언어, 안개 언어를 쓴다. 사상 가장 체질화된 거짓말은 무신론적 진화론 교육이다. 그것이 바로 살인죄와 음란죄의
원천이다.

 

거짓말/시베리아 유형지와
유대인 사무엘 비넨슈티히는 수 년간 시베리아에 유형당하였다가 가까스로 석방되 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친구들이 동정하며 위로하였다.
참 애썼네. 그 동안 고생이 많았지?
그런데 사무엘은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다.
아니야, 그렇게 고생스러웠다고는 생각지 않아. 아침 7시에 기상, 조반은 빵과 차 한잔, 그 차가 좀더 뜨거웠으면 더 좋았겠지만 말야. 그리고는 자동차에 실려 통조림 공장에 끌려가서 거기서 상표를 붙이는 일을 하였지. 12시에는 또 자동차로 점심을 먹으러 가고. 점심은 좀 싱겁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어. 그 뒤에는 낮잠 자는 시간이 좀 있었고, 티 타임에는 빵과 코오피가 나왔고, 그리고나서 카아드 놀이 등을 하고 있으면 저녁 식사 시간이야. 물론 메뉴는 보잘 것 없지만 사람의 욕심에는 한이 없잖은가. 다음엔 다음날 분의 담배를 배급받고 텔레비젼을 보고 있으면 끝나지. 10시나 10시 반에는 모두 잠자리에 들게 되고. 그래애? 정말이야? 아이젠슈타프도 역시 시베리아에 갔었는데 네 이야기와는 딴
판이던데 그래. 그야 그렇겠지. 그러니깐 그 놈은 다시 시베리아로 되돌아 갈 밖에.

 

말씀과 인간의 거부감

흔한 예수의 초상은 매력있고 선한 모습이나 예수의 모습이 이사야에서 처럼 `아무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고 없는, 마치 벌레 같은 모습을 `상기해야 한다. (54) 우리가 예수가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죄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거부감을 느낀 후에야 비로서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십자가가 우리를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것처럼 설교도 우리에게 거부감을 일으킬수가 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도 거부감을 갖게 하셨고 지금도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보고 마음에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진실로 예수 자신이 `누구든지 나를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11:6).(P. 55) -> 그러나 제자들 까지도 실족하였다. (요6:60ff)

시므온이 예언하였듯이 예수님은 그 시대의 `비방의 표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헌신의 메세지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일이 희귀하다. 진실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는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을까(심지어 맘에 드는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차목사 주)하고 골몰한다.(P. 56)
그러나 심리학적 피해가 영적인 유익이 된다.(56)
쇠랜 키엘케골은 말하기를 신약적인 기독교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가지 기본개념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믿음이고 또 다른 하나는 *거부감이다. 그는 확실히 이 거부감에 대해서 지적인 측면에서 이해를 하였다. 인간의 이성적인 논리로는 영원한 것을 일시적인 것으로. 무한한 것을 유한한 것으로 믿으려고 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이것 만큼 인간의이성을 어리석게 만든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키엘 케골이 분류한 신약적인 거부감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든지 간에 그의 주장 가운데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할 때에 신약의 메시지는 왜곡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P.58)
-> 예를 들면 세례 요한의 실수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마11:2-6)
심판을 기대했던 요한에게 예수는사랑과 긍휼이라는 은혜의 방법을 사용하신다.
-> 요나도 거부감을 가졌다.(요나3:10-4:2) 즉 요나의 마음을 거스리게 하고 반발을 일으켜 그가 다시스로 도망하게 했던 요소는 악한 것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이다.
-> 품꾼의 비유에서도 첫 시간의 고용된 일꾼의 마음은 거슬렸다. 그러나 그 주인의 대답은 은혜의 우위성에 대해 더욱 강조하는 것이었다.
-> 고전1장에서 바울은 십자가의도가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유대인에게는 꺼리끼는 것이었다.

 


거짓말을 하지 맙시다.

어린 시절부터 자주 들어왔던 이야기 가운데 늑대와 소년 이야기가 있습니다. 늑대가 왔다고 거짓말을 해서 사람들을 속여 놀라게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그것이 재미가 있어 또 거짓말로 늑대가 왔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또 한번 대소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진짜 늑대가 나타난 것입니다. 놀란 소년은 고함을 지르고 울면서 나타났다고 외쳤지만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어 결국 늑대에게 해를 당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거짓말이란 얼핏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요, 큰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정도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말을 잘해서 위기를 피해 가는 것이 세상사는 지혜라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농담처럼 하는 거짓말이나 선의의 거짓말이나 사소한 거짓말이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처음부터 큰 거짓말이나 큰 죄를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옛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처럼 나중에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거짓말을 큰 죄로 여기기보다는 전술과 전략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거짓말을 섞어서 정치를 하고 목회도 합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정당화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사회가 있다면 폭력의 사회보다도 거짓말의 사회일 것입니다. 신뢰를 잃어버린 정부나 부부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신뢰를 잃어버린 목사나 교인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지옥 그 자체일 것입니다. 모든 죄악의 뿌리에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사단의 거짓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을 등지게 되었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에 인간은 언제나 거짓말의 위험과 유혹 속에서 살아갑니다. 성경에 나타난 거짓말에 대한 세 가지 모델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모델은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입니다. 그는 병고침을 받은 나아만을 쫓아가 우리 주인 엘리사가 보냈다고 거짓말하여 은 두달란트와 옷 두벌을 취해 집에 감추었다가 결국은 나아만의 문둥병이 자신과 자손에게까지 옮겨졌습니다.(왕하5:20-27)
둘째 모델은 아간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승리의 비결을 성결과 순종에 두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도 법궤를 앞세우게 했고 백성들을 스스로 성결케 했습니다.(수3:5),여리고 정복 때도 여호수아로 하여금 모세처럼 선 곳에서 발의 신을 벗게 했습니다.(수5:15),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청결을 위해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게 했고 전리품을 취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수6:16) 그러나 아간은 노략질한 물건 가운데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러한 작은 실수가 급기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이성 전쟁에서 참패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는데 있어 거짓말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거짓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입니까? 아간을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게 했고 그 모든 탐욕의 물건을 불에 태워 없에 버린 것입니다.
셋째 모델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모델입니다. 그들은 밭을 판 돈의 얼마를 몰래 감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사도행전5장3-4에 보면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거짓말은 사람에게 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에게 한 것이요, 그것은 아나니야와 삽비라의 거짓말이 아니라 사단의 조정을 받아서 한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사단의 전략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의 거룩하고 성결한 공동체 안에 거짓말을 심는데 있습니다. 사단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에게 거짓말로 선악과를 따먹게 함으로 범죄를 심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단은 부흥하며 기적을 일으키는 교회에 거짓의 영을 몰래 심어 놓으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역이 왕성하고 활동이 많은 교회나 사역자나 단체 안에 거짓의 영을 심어서 결국에는 사단의 역사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제 9계명에도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짓은 마귀의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에 대하여 특별히 모든 크리스챤들은 영적인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작은 거짓말을 쉽게 하고 있지 않은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형편과 때에 따라서 작은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거짓말이나 큰 거짓말이나 다 똑같은 것입니다. 거짓말의 영이 내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요, 더러운 일입니다. 작은 거짓말을 계속하면 언젠가는 곧 더 큰 거짓말을 쉽게 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농담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나를 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웃기기 위하여 유머로 거짓말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죄라기보다 재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농담처럼 하는 말속에 무서운 사단의 궤계가 자리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이는 유머나 농담으로 말을 하면서 상대방을 비꼬거나 비판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것은 아주 교활하고 정직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셋째, 과장에서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을 말하고 있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과장입니다. 이것은 합리적으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과장이란 진실이 없는 포장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는 도덕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레19:11)
넷째, 선의로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선의로 거짓말을 합니다. 또는 그 사람을 위로하거나 두려움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좋은 동기라 할 지라도 결국에는 아닌 것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거짓의 반대는 진실입니다. 우리는 진실에 목말라 있습니다. 진실이 없을 때 정의도 없습니다. 그리고 거룩과 순결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직한 정부를 원합니다. 우리는 정직한 국민을 원합니다.
오늘, 우리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최대 위기는 정직하지 않다는 평가를 세상으로부터 듣는데있습니다. 정직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하고 정직하려면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정직의 대가는 하늘의 축복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린 것 같이 보여도 모든 것을 다 얻게 되는 것이 정직입니다. 결혼 대상자의 첫번쨰 조건을 인물보다는 정직한 사람으로 생각해보십시오. 회사나 조직에 사람을 구할 때 첫번째 조건으로 능력보다는 사람에게 초점을 마추어 보십시오. 정직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있고(신6:18-19, 시11:7, 잠12:19, 22, 잠14:11), 거짓말하는 자는 망합니다.(잠19:9, 계21:27, 계22:15)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 데 이르느니라"(잠13:5)

 

헐리우드 영화, 그리고 거짓말
예수님의 일대기나 사도들의 시대를 재현한 헐리우드의 영화들 가운데는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이 여럿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시각에서 보면 그런 명작들 가운데도 허구적인 요소들도 적지 않게 띄어서 영화의 감동을 반감시키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를 들면 로마 기병이 말을 타는 장면을 꼽을 수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로마 기병들마다 안장과 발을 고정시키는 등자를 이용해서 말을 탄다. 이것이 사실일까? 이것은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완벽한 허구이다.


말을 탈 때 안장과 함께 사용되는 등자는 5세기 중엽에 가서야 발명되었다. 물론 고구려 같은 일부 국가들의 경우에는 5세기 이전에도 이미 진보된 야금술을 이용해서 청동이나 철로 등자를 만들어서 강력한 기마 부대를 유지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등자가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로마군은 물론 이집트, 바빌론, 그리스, 페르시아 등의 군대들은 등자를 사용할 수 없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자랑을 아끼지 않은 기병들의 경우에도 중앙 아시아를 횡단할 때는 안장에 앉았지만 다리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어정쩡한 자세를 계속해서 취해야 했었다. 또 기병들은 등자가 없었기 때문에 말을 타고 질주하거나 뛰어오를 때 낙마하지 않도록 말의 갈기를 단단히 붙들어야 했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로마 기병이 등자가 달린 말을 타는 장면은 배우의 낙상을 염려한 감독의 배려가 빚어낸 거짓이거나 아니면 1세기 당시에는 등자가 발명되지 못했다는 것을 소품 담당자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데 따른 무지의 결과였을 것이다.

 

두가지의 거짓말

거짓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진실인줄 잘 못 알고 하는 거짓말과 진실이 아님을 알고서 하는 거짓말이 그것이다. 먼저 거짓말은 무지에서 나온 것이니 탓할 것이 못된다. 나중 거
짓말은 자기의 양심에 어긋나는 말을 하고 겉으로 입을 씻는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죄악은 양심에 어긋나는 거짓말을 함부로 하는 점에 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어린아이
들의 잘못에 대해서 너무 엄중한 벌을 가하는데, 마음속에 흔적을 갖지 않는 무심한 행동을 가책해서는 안된다. 다만 거짓말을 하는 것만을 엄중히 경계할 것이다. 그다음 나쁜 것은 고집이 센 성미이다. 이 두 가지는 싹이 틀 때 곧 잘라 주어야 한다. 무성한 후에는 때가 늦다. 일단 혀끝에 그러한 거짓말의 습관이 붙는 날이면, 다시 고치기란 여간해서 안되
는 일이다. 진실은 분명하지만, 진실의 뒷면은 걷잡을 길이 없는 광막한 천지이다.

 

거짓말/이익을 위한
어떤 빚진 사람이 빚 독촉을 받게 되자 할 수 없이 유일한 재산인 암돼지를 팔려 고 내놓았다. 그러자 사려는 사람이 와서 새끼를 잘 낳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주인이라도 이것까지는 알 리 없었다. 그러나 팔기 위해선 어떻게 하든지 손님을 만족시켜야 하였다. 그렇고 말고요 손님! 이놈은 동네 결혼식 때면 암놈만 낳고 이웃 환갑에는 숫놈만 낳습죠 네! 사려던 사람이 놀라 설마 그럴리가 있을라구 하는 표정을 지으니까 곁에 앉았던 빚 받으러 온 사람은 한술 더 떠서 말하였습니다.
그뿐인 줄 아십니까? 이 돼지는 동네 제삿날이면 염소새끼까지도 낳는다니까요.

 

아버지 말씀에 순종
항구에 정박한 한 상선에서 선장의 아들이 원숭이와 어울려 놀고 있었다. 그런데 원숭이가 소년의 모자를 낚아채 돛대 위로 올라갔다. 소년은 모자를 빼앗기 위해 정신없이 원숭이를 뒤쫓았다.
소년이 문득 정신을 처렸을 때는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다. 발 맡을 내려다본 소년은 겁에 질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소년은 공포에 몸을 떨며 밧줄을 잡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때 선장이 돛대 위에서 울고 있는 아들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아들아, 밧줄을 놓고 빨리 바다로 뛰어들어라. 그렇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
소년은 두 눈을 감고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버지의 말만 믿고 뛰어내린 것이다. 그러나 물 속에서 솟구쳐 올랐을 때는 아버지의 아늑한 품에 안겨 보트에 태워져 있었다.
신앙이란 세상의 밧줄을 놓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하게 여겼으면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권사 부부가 주일날 저녁 식사를 온 가족이 함께 하였다. 아버지 권사 가 식사 중에 하는 말씀이 "우리 목사 설교가 설교냐?"
하니까 부인 권사가 받아서 맞장구를 치면서 "우리 교회 목사는 틀렸어."
하였다. 부모의 말을 듣던 남매는 숟가락을 놓으면서 설교 아닌 설교, 틀린 목사가 있는 교회, 이제 우리는 안 나갑니다."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알고 틀렸다고 믿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이다.

 

말씀대로 살고자 한다면

미국 시카고에서 기독교 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회의에 러시아 교회에서 3명이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변증할 수 있느냐?"
하는 사안을 가지고 사흘 동안 토의를 하는데, 러시아 교회 3명은 전혀 아무 소리를 안하였다고 합니다. 마지막에 그들에게 소감을 얘기하라고 했더니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여러 분들이 사흘 동안 이 회의를 여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살다보면 오류가 없다는 것을 저절로 알텐데 그런 것 가지고 뭘 회의를 하고 앉아 있습니까?"
그 말을 듣고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너무나 숙연해졌습니다.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말씀의 권위와 영광과 말씀의 능력을 알 것입니다. R. A. 토레이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 많은 번역이 있는데,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성경번역이 있다면 그것은 내 삶으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면 우리는 세상의 온갖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과 삶이 일치될 때 비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말씀에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비참한 삶을 살 것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말의 씨앗
연합구역예배를 마치고 목사관으로 돌아와, 밤에 있을 신교대 신병의밤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안양이라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지 못할 겁니다. 목사님께서 전에 계시던 부대인 71대대에서 근무한 임한경입니다.}
선뜻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한참 기억을 더듬어야 했습니다.
워낙 오랫만에 걸려온 전화였고 또 목소리만으로는 기억의 창고에 있던 사람들의 이름과 쉬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 예 라고 궁색한 대답만 하면서 기억의 낱가리를 헤집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전화했습니다. 부대를 옮기셨다고해서 겨우 연락처를 알았습니다. 그동안 연락 못드려 죄송합니다. 방황할 때 목사님 말씀에 힘을 얻어 군생활을 무사히 마치게되어 감사한 마음을 늘 갖고 있다가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그땐 정말 고마웠습니다.}
한참만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본부포대에 근무하며 후에는 대대장 당번병을 했고 교회일에도 열심이 있던 형제였습니다. 대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그의 얼굴이 생각난 것은 제 머리의 한계였지만 그만큼 그의 존재는 미미했습니다.
{아니 그가 그렇게 고민할 때도 있었나. 언제나 얌전하고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시간을 내서 놀러오라고 말한 후 수화기를 놓았습니다.
평범한 이 일을 이토록 장황스레 쓰는 것은 병사들과 친했다든가, 오랫동안 잊지않고 전화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군 목회를 잘했다든가 하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화를 끊자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지요. 그것은 말의 책임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도 그 형제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상대는 그것을 잊지않고 있습니다. 말 한마디가 상대를 자살에서 구하기도 하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지금껏 해 온 수만마디의 말들, 그것들이 지금 누구의 마음밭에 떨어져 어떤 열매를 맺고있을까...
직선적이고 투박한 말투인지라 자신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시금 무릎 세우고 다짐해 봅니다.

 

말버릇/습관으로 붙는
말버릇이 좀 이상해서 끝마다 * * 같은 거를 붙이는 사람이 있다.
제삿날이 가까워 제삿상에 올릴 물건을 준비하는 중, 하인을 시켜 북어를 좀 사오게 하려고, 하인을 불러 이렇게 당부하였다.
야 꺽쇠야, 오늘이 바로 장날인데, 너 장에가서 북어 같은 거 좀 사가지고 오너라. 돈을 받아들고 꺽쇠가 장으로 갔으나 북어 같은 것이 있어야지! 장터를 아래 위로 몇차례씩 훑으며 누볐으나 북어 같은 것은 도무지 눈에 띄지가 않았다.
석양이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꺽쇠는 피곤한 다리를 끌며 빈 손으로 돌아왔다.
하인이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주인이 노발대발하면서 이렇게 호령하였다.
야 이놈아, 너 여태까지 어디서 무얼하고 있었냐?
꺽쇠가 송구스런표정으로 대답했다.
장터를 샅샅이 뒤졌지 뭡니까?
그래 사오라는 물건을 사왔느냐? 주인이 물었다.
북어는 많은데 <북어 같은 것>은 눈에 띄지가 않아서, 못 사가지고 왔어요.
꺽쇠의 대답이었다.
허기야 머슴의 말도 옳지, 북어는 흔하나 북어 같은 것은 좀 구하기가 어려울걸.

 

잘못 이해하고 있던 성경말씀들...
잘못된 노래 가사가 성경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난번에 유목사님께서 지적하신 "노아방주"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 할아버지 배를 만든다 ( X 2 ) 높은산 꼭대기에 배를 만든다

물론 성경에는 높은 산 꼭대기라는 말은 없습니다.
나무를 베어서 운반, 가공하려면 산 근처가 적합하다는 점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 정도 높은 지대라는 것만 추측될 뿐이지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산꼭대기라는 언급은 없지요. 오히려 산꼭대기에는 키 큰 나무가 없고 관목림이 자랄 뿐이어서 베어낸 나무를 산 위로 운반하자면 더욱 힘이 들뿐이지요.
(이 예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나 우리는 그저 일반적인 관념으로 이해한 것을 성경의 사실로 믿어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고래 뱃 속의 요나"
(가사는 잘 모르겠군요.)
성경동화로도 듣고 했는데 아마 설명의 편의를 위한 것인 듯합니다.
어린이들 수준에서 "큰 물고기"라고 해 봐야 잘 이해가 안 될테니 고래라고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고래(whale)는 물고기(fish)가 아니지요. 고래 뱃속에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는 발상은 아마도 아라비안 나이트의 신밧드 이야기나 피노키오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일곱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요
그 중에 하나 키가 크고요 나머지는 작대요.
오른손 올려요.: 왼손 올려요: ....

유년 주일학교에서 부르는 그 유명한 아브라함 디스코입니다.
보통 여름 어린이 성경학교 때 어린이들의 주의집중과 통제를 위해서 잘 사용하는 노래입니다.
창세기를 정독하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아브라함의 아들은 7명이 아닙니다. 그리고, 키에 대한 언급은 더더군다나 없습니다.
여기다 주일학교 선생님 한 분은 한 수 더 뜨더군요.
"어린이 여러분 일곱명의 아들 중 키가 큰 한 멍이 누구지요?
네, 바로 요셉이지요. 다시 한 번 불러봅시다."
요셉이 아브라함의 아들이었나????
내 참~ 주일학교 교사라는 사람이 성경을 모르는지 아예 족보까지 바꾸어 버리길래 정말 어이가 없더군요.
(그래서 교사는 사랑이니 열정만 가지고 임명할 게 아니라
지식도 같이 구비시켜야 하나 봅니다.)

"울면 안 돼"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요
(생략)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시네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생략)
->산타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네

또 다시 이 노래가 들려올 계절이 다가오는군요.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때 유년 주일학교 어린이들의 노래 발표에 어느 교사가 자기 반 학생들을 데리고 나와 현란한 율동과 함께 이 노래를 불러대더군요.
교회 안에서도 크리스마스는 산타 오신 날이요, 산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지한 분으로 가르치고 있다는게 이해가 안 됩니다.

"평화를 구하는 기도"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좋은 내용들 주르륵~)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그러고 보면 성가대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 노래는 이전에 다니던 교회 성가대에서 채택한 '부활절 칸타타' 중간에 실린 곡인데 연습하기 전에 지휘자님께 개인적으로 건의를 드려서 이 곡은 취소시켰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부활절과는 관계없는 내용이라는 점, 둘째, 자기 희생과 봉사로써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점. 기도 내용은 김영주님 말씀처럼 정말 감동적이고, 호소력있지만, 끝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우리의 신앙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릴 찬양, 우리의 신앙고백을 위한 찬양으로는 적합하지 않지요.

"주기도문 영창"
(가사는 다들 아시지요.)
일반적으로 교회 대학부, 청년회 모임에서 마지막에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대신해서 손에 손잡고 같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가사를 잘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한 대목을 빼먹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 주시고 (삭제) 우리들의 큰 죄 다 용서하옵시고" 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부분은 없습니다.
아마도 곡에 가사를 대입하다보니 음절 수가 맞지 않았나 봅니다.
물론, 주기도문이 무슨 주술적 효험이 있어서 글자 그대로 외워야 하는 주문은 아닙니다.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기도의 원형이지요.
그러나, 위 노래로 인하여 주기도문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은 음악적 요소를 떠나서 중대한 실책으로 보입니다.
청년들에게 위 노래에서 주기도문 중 일부가 빠져 있다고 해도 이해를 못하더군요. 성경과 악보가사를 대조시켜 주니 그제서야 알아듣습니다.
이 노래 역시 공연 중지.
(전 공윤의 심의위원도 아니지만 잘못된 것을 보면 곧잘 이의를 제기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찬송가 234장 중 2절)
옛날 용맹스럽던 다니엘의 경험과 유대임금 다윗왕의 역사와 주의 선지 엘리야 병거타고 하늘에 올라가던 일을 기억합니다.

정말 엘리야가 병거타고 하늘에올라갔나요?

왕하 2: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야는 회리바람(whirl wind)을 타고 승천했고, 불수레(병거)와 불말들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이를 떼어놓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동안 노래라는 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불러왔기 때문인지 제가 이런 주장들을 하면 성경책을 꺼내서 하나하나 대조해 주기 전에는 사람들이 믿지를 않습니다.
노래라는 것은 상당히 영향력이 크지요. 군대에서는 군가를 통해서 군인정신을 키우고,
사기를 앙양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있고, 운동권에서는 나름대로 자기들의
주장을 알리고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노래를 활용합니다.
사탄 역시 음악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잘못된 가치관을 심어주거나 하나님을 모독하고 사탄을 찬양하도록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높이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찬양은 성경에 근거한 은혜로운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노래가 성경을 왜곡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가난은 거짓말을 잉태한다(?)
-부제 :슈만의 청년기에 얽힌 눈물겨운 사연
독일의 유명한 작곡가 슈만이 젊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슈만은 그 당시 별로 유명하지않았던 독일의 역사 소설가 벌리라트 알력시스오와 함께 라인 지방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때마침 독일 황제의 대관식이 행해지는 프랑크폴트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가진 돈은 업었으나 마음만은 부유하게 가졌습니다. 값싼 호텔에서 하루를 유한 그들은 길거리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길을 걷던 슈만은 갑자기 피아노가 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피아노를 칠 수 있었을까요 ?
그는 곧 그 마을에서 가장 큰 악기점에 들어갔습니다. 슈만은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저는 영국의 어느 젊은 귀족의 심부름으로 피아노를 사러온 가정교사입니다. " 슈만은 그곳에서 피아노를 구경한다는 명목으로 여러 시간 동안 피아노를 실컷 쳤습니다. 그리고 슈만은 악기점 주인에게 이렇게 말한 후 악기점을 유유히 나왔습니다.
"저 그럼 이틀 후에 그랜드 피아노를 사러다시 오겠습니다. "
악기점 주인은 며칠이 지나도록 슈만을 기다렸으나 단지 피아노를 치고 싶은 열정만으로 거짓말을 한 가난한 작곡가 슈만이 그 앞에 나타날 리가 없었습니다.

 

거짓말을 한 적이 있으십니까 ?
미국의 39대 카터 대통령은 도덕 정치를 내세웠다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이란 인질 문제로 기자 회견을 했었는데, 한 기자가 대뜸 "대통령께서는 대통령으로서 거짓말을 한 적이 있으십니까 ?"라고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는 대답하기를 "제 기억으로는 고의적으로 알면서 거짓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권이나 국가적인 이익을 위하여 잠시 거짓말을 했다가는 그 후에 이 거짓말을 밝혀내기까지의 손실이 더 많은 것을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정말 훌륭한 대답을 했다. 사실이다.

 

사랑의 말은 상처를 치유한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세 가지가 있다.그것은 잃어버린 기회와 시위를 떠난 화살과 입에서 나온 말이다.그중 가장 무서운 것이 말이다.격려와 기쁨의 말은 사람에게 용기와 행복을 주지만 저주와 비난의 말은 한 사람의 신용과 명예를 일시에 무너뜨린다.

개구리가 뱀에게 발각돼 잡아먹히는 것은 시끄러운 울음소리 때문이다.꿩의 울음소리는 사냥꾼의 표적이 된다.물고기는 입으로 낚인다.잘못 쏟아진 말은 항상 재앙을 부른다.목소리가 큰 사람은 허풍과 과장이 많고 애매하게 말하는 사람은 거짓이 많다.수다를 떠는 사람은 진실성이 약하다.과격하게 말하는 사람은 억지가 많다.
사랑의 말은 상처를 치유한다.그러나 부주의한 말은 분쟁을 만든다.격려와 칭찬은 주변을 환하게 밝힌다.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이다.말은 나뭇잎과 같다.나뭇잎이 너무 무성한 나무는 열매가 적다.


아첨하는 말의 대가와 진실한 말의 대가는?
고대 페르시아의 코스로스 황제는 한동안 중병을 앓다가 회복되어 다시 집무실로 나왔다. 그 동안 병상에서 생각한 바가 있던 황제는 평소 정사를 논하던 고문관들을 불러 말했다.
"나에 대한 여러분의 거짓 없는 의견을 듣고 싶소. 대가는 지불하리다."
그러자 고문관들은 한 사람씩 나서서 황제에 대한 갖은 미사여구의 아첨을 다했다. 그러나 엘림이라는 사람은 달랐다.
"폐하, 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오?"
"진실은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소. 그대에겐 대가를 지불하지 않겠소. 아무튼 바른말을 해주시오."
엘림은 그제서야 입을 열어 황제의 약점과 실정을 낱낱이 들추었다. 그리고는 궁전의 무사 안일을 과감히 떨치고 나서서 일함으로써 백성의 신뢰를 회복할 것을 건의하였다.
황제는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약속한 대로 고문관들에게 각각 보석을 대가로 지불하였다. 그러나 엘림에게는 수상직을 맡아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고문관들이 황제를 찾아왔다. 그들 중 대표가 말하였다.
"폐하께서 저희에게 주신 보석을 판 상인을 붙들어 교수형에 처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보석은 모두 가짜였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대들 말도 가짜이지 않았느냐."

 


필요한 거짓말
어떤 경우에 거짓말을 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탈무드(유대인의 경전)에서는 두 가지 경우에는 거짓말을 하라고 말하고 있다.
먼저, 이미 누군가가 사 버린 물건에 대해서 의견을 구하여 왔을 때에는 설령 그것이나빠도
훌륭하다고 거짓말을 하라.
다음에 친구가 결혼했을 때에는 반드시 부인이 대 미인이며,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거짓
말을 하라.

 

말씀순종은 장수 기본원리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이 930년을 살았고 그의 아들 셋이 912년을 살았으며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아 인간으로서 최고의 장수를 기록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었던 홍수를 거치면서 인간의 수명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175세를 살았고 야곱이 147세를 살았으며 요셉도 110세를 살았다.
천년을 살아 보겠다며 불로초를 찾아 헤맸던 진시황은 49년밖에 살지 못했다. 얼마전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이 남자 71세,여자 78세가량으로 나타났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병장수를 희망사항으로 갖고 있겠지만 인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했으며 죽음을 비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질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건강과 장수에 대한 욕구도 많아졌고 첨단 의료기술과 갖가지 의약품의 개발로 평균수명도 늘어나기는 했다. 특히 수많은 건강이론이 등장하면서 건강과 장수에 대한 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고 하겠다. 성경은 진리이기에 어떤 유능한 학자의 학설보다도 정확하며 변함이 없는 기준이 된다. 성경은 지도가 아니라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쓰인 하나님의 메시지이지 건강과 장수만을 위한 건강이론서는 아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읽게 되면 인간의 존재의미를 알게 되며 삶의 목적을 찾게 되고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므로 당연히 건강과 장수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잠10:27) 말씀에 순종하고(신30:20) 부모를 공경하며(엡6:1) 탐욕을 멀리 하는(잠28:16) 사람이 장수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라

성경: 행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초대 교회사에 나오는 위대한 순교 사화입니다. 로마 교회의 식스투스 감독은 경건하고 인자하여 그의 목회에 감동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는 빈민 구제와 사랑을 실천하여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그를 처형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조용히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식스투스 감독이 사형장에 끌려갈 때 라우렌티우스 집사가 식스투스의 뒤를 따라가면서 “아버지여, 당신께서 제단으로 나아 가실 때 늘 저에게 도움을 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지금은 저를 데려가지 않으십니까?”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때 식스투스는 “사랑하는 아들아, 너희들도 며칠 후면 나의 뒤를 따르게 되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당시에 식스투스 감독의 교회 수석 집사로 거대한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막대한 재산을 알게 된 로마 시장은 교회의 모든 재산을 상납토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교회 재산을 정리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워 상납일을 연기하도록 허락받고 교회당의 모든 보물을 다 팔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의존하고 있는 수천의 민중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에 그 사람들을 모집하였습니다. 약속한 날 시장이 교회당으로 올라오면서 “보물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문을 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때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교회당 문을 활짝 열고 소경, 벙어리, 걸인, 병자, 고아, 과부의 무리를 가리키며 “교회의 보물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눈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행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를 비난하지 말아라
너희는 나를 주라고 부르면서 순종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보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생명이라 부르면서 소유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지혜라 부르면서 열망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부요하다 부르면서 추구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영원이라 부르면서 바라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신실하다고 부르면서 신뢰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고 부르면서 섬기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영광되다고 부르면서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공의롭다고 말하면서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사랑이라 부르면서 사랑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의 제자라고 말하면서 배우고 따르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말하면서 증언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의 종이라 말하면서 순종치 아니하고
너희는 나의 자녀라 말하면서 고아처럼 행동하나니
내가 너희를 정죄하거든 비난하지 말아라.

천국 입장에는 암표가 없다

 

마귀의 거짓말
6.25당시 어느 마을에 어떤 청년이 결혼한지 6개월만에 징병에 임하여 입대하엿는데 입대한지 얼마되지 아니하여 그 청녕이 전사하엿다 하여<뼈가>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족 친지 특별히 그의 아내가 더 슬퍼하는 가운데서 앞산 양지바른쪽에 매장을 하엿다.
그런데 그 후부터 그 청년의 아내가 심장에 병을 얻어 건강이 좋지 못했다.
이것을 시부모님이 애처럽게 보아<청춘을 그대로 보내겠느냐? 재혼하면 건강도 좋아지고.....아들 딸 낳고 잘 살면 되지 않겠느냐 ?> 권유를 했다. 처음에 그여인은 거절했지만 시부모님들의 계속적 권유를 이기지 못하고 이웃마을 아내 잃은 사람에게 중매가 되어 시집을 갔다.
그런데 이 여인은 시집을 가서도 계속 아파서 그 집에서 무당을 청하여 자주 굿을 하였다.
그 때마다 전사한 본 남편이 아내의 사랑을 못잊어서 실려있다고 햇다.그러면서 한번은 굿을 하는데 무당들이 대끝에다 그 사람의 혼을 실어 결국은 단지(옹기그릇)안에 가두어 땅에 묻어버리겠다는 작전이었다. 그런데 전사했다고 하던 청년은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그의 부무님들은 아들이 살아온 것을 믿었다.이때 아들은 저의 처는 어디 갔습니까? 물을 때 부모님의 답변이 저가 전사하였다고 <뼈가> 오므로 우리들의 권유로 건너 마을00에게 시집을 갔네 하면서 오늘 저녁에 처가 아프다고 하여 굿을 한단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그길로 찾아갔다. 그때 마침 무당들이 대를 잡으면서 대끝에 혼이 찼다 단지를 준비하여 가두자 하면서 야단이었다.그때 처 되었던 여인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에는 가두지 마세요.그는 내가 사랑했던 남편입니다 했다.그때 본 남편이 실례합니다 하고 찾아들어 갔다.모두는 다 놀랐습니다.
그때 그 청년은 내가 죽어서 온 것이 아니고 살아서 왔다고 했다. 이와 같이 마귀의 거짓말하는 귀신일 무당에게 붙어서 계속 거짓말 하였다.

 


근심의 낱말 뜻 / 성구

*** 근심의 낱말뜻 ***

1. 히브리어
카아브 - 아픔을 느끼다, 슬퍼하다, 상하다, 아프다.

2. 헬라어
뤼페 - 슬픔, 한숨, (싫은 것을 억지로) 근심, 서러움.

3. 한문
괴롭고 애를 쓰는 마음


*** 근심에 대한 성구 ***

1. 근심의 종류
시69:20,21 - 그리스도의 근심 마14:9 - 위선적인 근심
마19:22 - 재물로 인한 근심 요16:6,20 - 일시적인 근심
롬9:2 - 끊임없는 근심 고후7:10 - 세상 근심
고후7:11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2. 근심의 원인
창3:16,17 - 죄 창21:10 - 서자 문제로
창26:34,35 - 이방인과 혼인으로 삼상1;11,16 - 자식이 없으므로
삼하19:1,2 - 죽음으로 대상4:10 - 환난 때문에
시16:4 - 우상숭배로 잠17:25 - 미련한 아들로 인하여
잠23:29-35 - 술취함이 전1:18 - 지식의 증가로
욥30:25 - 빈궁자 사16:7 - 흉년과 기근으로(렘14:3)
단7:15 - 이상으로(단10:16) 롬14:15 - 식물 문제로
딤전6:10 - 돈을 사랑함으로 벧전1:6 - 시험 때문에

3. 근심의 결과
욥17:7 - 눈이 어두워짐 시31:9 - 혼과 몸이 쇠약해짐
시55:2 - 편치 못함 잠15:13 - 심령을 상하게 함
잠17:22 - 뼈를 마르게 함
고후7:10 - 세상 근심은 사망에 이르게 함

4. 성도의 근심
살전4:13 - 세상적이 아님 시18:4,5
때로 극심함
고후7:10 - 회개에 이르게 함
빌2:26 - 다른 성도에게 폐를 안끼치기 위함임
사25:8 - 하나님께서 제거하심(시51:11)
계21:4 - 새 예루살렘에는 완전히 없게 됨

 

말해서는 안될 거짓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발견한 해답은 이러하다. 첫째, 자기 자신에 대하여 거짓을 말하지 말 것. 나 자신의 현재 생활이 진리의 길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진리를 두려워하지 말 것. 둘째, 타인에 대한 나의 유죄를 인정할 것. 세째, 자기 및 타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싸울 것.

 

두가지의 거짓말
거짓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진실인줄 잘 못 알고 하는 거짓말과 진실이 아님을 알고서 하는 거짓말이 그것이다. 먼저 거짓말은 무지에서 나온 것이니 탓할 것이 못된다. 나중 거
짓말은 자기의 양심에 어긋나는 말을 하고 겉으로 입을 씻는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죄악은 양심에 어긋나는 거짓 말을 함부로 하는 점에 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어린아이
들의 잘못에 대해서 너무 엄중한 벌을 가하는데, 마음속에 흔적을 갖지 않는 무심한 행동을 가책해서는 안된다. 다만 거짓말을 하는 것만을 엄중히 경계할 것이다. 그다음 나쁜 것은 고집이 센 성미이다. 이 두 가지는 싹이 틀 때 곧 잘라 주어야 한다. 무성한 후에는 때가 늦다. 일단 혀끝에 그러한 거짓말의 습관이 붙는 날이면, 다시 고치기란 여간해서 안되
는 일이다. 진실은 분명하지만, 진실의 뒷면은 걷잡을 길이 없는 광막한 천지이다.

 

거짓말의 참된 진실
샬르롯빌에 있는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벨라 드 파울로(Bella DePaulo) 교수는 77명의 학생과 70명의 마을 사람을 동원하여 그들이 1주일 동안 얼만큼의 거짓말을 하는지를 조사하였다. 이들 중에서 단지 한 학생과 6명의 주민만이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았고 나머지 140명은 1,534개의 거짓말을 하였다. 이들의 거짓말은 악한 것들이 아니었고, 단지 친구나 배우자를 기분 좋게 하는 긍정적인 것들이었다. 드 파울로 교수에 의하면, 여성들은 대부분 상대편의 감정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으며,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감을 주기 위해 거짓말을 하였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거짓말을 한 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약간의 후회만을 갖게 했고 실제로 거짓말이라고 생각지 않다고 응답하였다.
예를 들면, 작년에 Josephson 윤리연구소에서는 2만 명의 중등학생들을 조사하였는데, 92의 학생들이 부모님들께 거짓말을 하였고, 73 정도는 자신들을 '심각한 거짓말쟁이'라고 간주하였다. 이러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91의 학생들은 현재 자신의 도덕성과 품성에 만족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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