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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기념주일을 위한 설교 9편

공 상희 2011. 6. 22. 07:00

제목: 6.25를 통해 기억해야 할 것

성경: 창세기 35:1-8, 신명기 32:7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35:3)

 

어느덧 6.25동란이 일어난 지 수십여 년이 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다 보니까 그 때의 처절했던 참상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얼마나 잔악한 마귀의 사상인지를 모르고 '공산주의자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지 뿔이 달렸나 몸이 빨간가?' 하면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도 좌경 세력이 난무하고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하는 소리를 공공연히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붉은 용의 간교함이 얼마나 능란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줍니다.

이러한 때에 6.25를 맞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6.25를 통해 기억해야 할 것'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벧엘이 어떤 곳이기에 신앙이 해이해진 야곱에게 그 곳에 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했습니까? 벧엘은, 야곱이 팥죽 한 그릇에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고 축복 기도를 받은 뒤 에서가 죽이려고 들자 부모 형제 고향을 떠나 야밤 도주하여 이르게 된 곳으로,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하늘을 지붕삼고 잠을 자다가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와 땅 끝에 닿고 수많은 천사들이 그리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곳입니다. 신앙의 놀라운 체험을 한 곳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야곱의 신앙이 해이해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잊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야곱이 세겜 땅에 거할 때에 그의 딸 디나가 세겜족의 추장에게 요새말로 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추장이 디나와 결혼하게 해 달라고 졸라대니까 야곱의 아들들이 '그렇다면 당신 부족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으십시오.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는 결혼하지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세겜족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았고, 그로 인해 그들이 끙끙 앓고 꼼짝 못하고 있을 때 야곱의 아들들이 전부 쳐들어가 세겜족의 모든 남자를 다 죽여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들은 야곱이 생각해보니 큰일났습니다. 그 주위의 부족들이 쳐들어와 복수할까봐 무서워 떨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가서 이방 신상과 귀고리 등을 다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밑에 묻고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하여 범죄하고 해이해졌던 신앙이 다시 소생하고 영적으로 재무장했더니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35:5)고 했습니다.

오늘 6.25 사변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민족, 아니 우리 성도들도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는 기회를 삼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6.25를 통하여 받았던 은혜와 체험을 되새기는 기회를 삼아야 되겠습니다.

32:7에 보면 "옛날 일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6.25를 상기하고 기억함으로써 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교훈을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1. 죄의 값은 무서운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6.25사변은 한국 교회의 죄 때문에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들어오고 큰 교회들이 세워져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 다 북한에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기독교를 탄압하고 억압책을 쓰니까 하나님이 가장 가증히 여기는 다른 신을 섬기는 일과 우상 숭배의 죄에 빠졌습니다. 즉 신사참배, 궁성요배를 했습니다. 그뿐아니라 자진해서 거룩한 성전의 종과 거룩한 기구들을 떼어다 바쳐서 무기를 만드는데 쓰게 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 연맹'에 가입하라고 강요하니까 거기에 가담하여 타락한 목사도 많은데 그 중에 부수상까지 지낸 사람이 '강량욱' 목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공산당이라는 몽둥이를 들어 다 치시고 만 것입니다.

타협할 수 밖에 없어서 타협하고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범죄하지만 죄의 값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12:6, 8, 11).

야곱은 큰 재난을 당할 위기에 처해서야 회개했습니다. '이방신을 버리라'고 했는데 야곱은 신앙이 해이해져서 가족들이 이방신 우상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묵인했으므로 그 죄를 회개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정결케 하라'고 했는데 전에 아버지와 형과 외삼촌을 속이고 잘못한 죄를 회개했던 것입니다. '의복을 바꾸라'고 했는데 거짓된 행위 이방인의 풍속, 습관 등 더러운 행위를 끊고 돌아서지 못했으므로 그 죄를 회개했던 것입니다.

죄의 값으로 무서운 재난과 위기가 닥친다고 할 때, 26.25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이 나라의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먼저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북한에서는 핵무기를 개발하여 6개월 안에 완성한답니다. 세균 무기를 250톤이나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붉은 용의 사자들이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 지 누가 알겠습니까? 실로 우리는 항상 회개하고 정신차리며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2. 극심했던 고난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35:3)고 하면서 옛날에 다급하게 도망하다가 인적이 없는 광야에서 돌베개 베고 잠자던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 주시고 은혜 베푸시던 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팡이만 가지고 괴나리 봇짐 하나 걸머지고 도망가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큰 부자가 되고 많은 처자식들을 거느리게 되었지만, 위기를 만나 이전의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그것을 다시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는 각오로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편안하고 잘 살게 되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한다는 말대로 비천하고 가난했던 때를 잊어버리고 교만해지고 세속화되고 사치하고 음란 방탕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편안할 때 오히려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더욱 겸손하고 경성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상 낙원이라고 할 만큼 부요한 나라 덴마크에서는 청년들이 호화스런 파티에 들어가기 전에 옛날 선조들이 먹던 까만 호밀빵과 맹물을 마시고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선조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고 그 고난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자신들의 자세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지요. 이렇게 우리도 6.25의 불행을 되새기며 기억함으로써 더욱 경성할 때 6.25와 같은 불행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만나던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35:1)고 했습니다. 위기와 고난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구출받던 때를 항상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후 돌아서서는 '우연이겠지, '라고 말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삭개오가 가끔 말없이 나가곤 해서 그의 아내가 뒤를 밟아보니까 전에 예수님을 만났던 그 뽕나무를 찾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쓰다듬고 또 물을 주더랍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처음 기도하다가 성령세례 받고 은사받던 그 기도원을 찾아가 해마다 기도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2:4, 5에 보면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3, 4에서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흘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라고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은혜받던 때와, 구원받던 때를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항상 자기의 비천하고 가난하고 죽을뻔 했던 때를 기억하고 겸손하게 그 때에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4. 하나님의 축복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지금 이만큼 번창하고 잘 살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임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 축복의 보장을 받았던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지금 부자가 되고 처자식을 거느리고 잘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지 제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닙니다. 고후 3:5에 보면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옷을 입어도, 음식을 먹어도, 아이들이 잘 자라는 것을 보아도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축복임을 깨달아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감사와 감격이 사라지고 신앙의 열정이 식어지면 언제부터인가 시험에 든 것입니다.

성군 다윗 왕은 나라가 부강해지고 명성이 높아져도 늘 자기는 비천한 목동 출신이며 이새의 말째 아들이었던 것을 잊지 않고 자신의 부와 명예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삼하 7:8, 9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고 했습니다. 이 때에 다윗은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라고 하나님 마음에 쏙 들도록 대답하였습니다.

8:12-14에 보면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 8:17, 18에서는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25를 기념하는 오늘 죄의 대가를 받던 극심했던 고난의 때와, 그 때에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받던 것과, 그때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축복받은 것을 기억하여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6.25와 같은 비극이 다시 오지 않도록 겸손하고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제목: 하나님의 위험 신호

성경: 아모스 4:12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1950625일 주일, 새벽에 남한이 전쟁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하고 있지 않을 때 북한은 전쟁 준비를 완료하고 있다가 갑자기 남침해 들어왔습니다. 이 때문에 수백 만 명이 죽고 국토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집니다. 준비없이 사변을 만났다는 것이 큰 비극의 원인이었습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그러한 무참한 전쟁이 없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어떤 목사님의 전쟁체험 간증입니다.“6.25 사변이 나던 날 저희 가족은 월남하려고 해주에 와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예배를 드리고 바닷가에 나가서 조개를 잡고 있었는데 대포 소리가 ', ' 들려 왔습니다. 그 후에 1월달 추운 저녁에 눈길을 밟고 배를 타고 피난 내려 오던 일, 수 많은 사람이 총과 포탄에 맞아 죽어있던 모습, 피난 다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 있던 모습들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런 무참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깨어 기도하고 준비해야 되겠습니다.언젠가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6.25 사변 때 고생하던 일들을 얘기했는데 어떤 젊은이가 '정말 그랬을까?' 하면서 믿지 않고 의심하니까 옆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이고 말고. 나도 다 그 고생을 겪은 사람이야'라고 말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우리 교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들었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위험 중의 하나는 일부 젊은 세대들이 전쟁이 얼마나 비참하고 무서운가를 모르고 공산당이 얼마나 잔악무도하고 상대 못할 인간이라는 것을 모르고, 단지 국가에서 정권을 잡기 위해서 위기 의식을 불어 넣기 위해 위협하는 것으로만 잘못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위험을 위험인 줄 모르고 정신 못 차리고 준비할 줄 모르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준비할 줄 알고 위험에 대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보이스카웃의 모토(motto)'준비하고 있으라'(Be prepared)는 것입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복음 전하는 사역자는 세 가지 준비 즉 설교 준비, 이사갈 준비, 죽을 준비를 항상 하고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예비하고 있으라.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항상 깨어 있어 준비하라"고 누누히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모든 인간에게는 죽음의 날과 심판의 날이 다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날을 예비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큰 영원한 불행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살이의 위기에 대해서는 대비하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경고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경고하신 심판의 날이 이르면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14:10) 서게 되고 거기서 그의 모든 공로와 업적이 심판을 받고 거기에 해당하는 상급을 받게 됩니다. 간신히 예수만 믿고 구원받아 주를 위해 아무런 한 일이 없으면 '불가운데서' 받은 구원과 같이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됩니다.

반면 불신자들은 '크고 흰 보좌'(20:11)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멸망을 받되 평생에 행한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고 거기에 대한 보응으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에 들어가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다 그 날을 항상 예비해야 합니다.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1. 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강물이 흐르듯이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명하십니다. 9:27에도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곡한 하나님의 명령을 믿지 않고 불순종한다면 그것은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의 장례식에서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어느 하인에게 '당신의 주인이 하늘나라에 갔으면 좋겠다'라고 했더니 '아마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주인은 여행을 가시든지, 산이나 강으로 놀러 가시든지 언제나 준비를 철저히 하곤 하셨는데 죽음을 위해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살았으며 더구나 하늘나라 가실 준비는 하나도 하지 않고 사셨기 때문에 천국에는 가시지 못하셨을 것입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만날 준비를 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을 위해 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둘째, 우리의 죄 때문에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인데 우리는 죄가 많고 불의하고 더럽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준비 없는 죄인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거룩하고 정결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인으로 바뀌어야만 하나님을 만나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귀한 잔치집에 초대를 받아 깨끗하고 멋있는 옷을 차려 입고 집을 나서려는데 그녀의 아들이 흙먼지 속에서 놀다가 더럽혀진 옷과 손으로 자기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 나선다면 그 어머니는 그의 아들을 그대로 데려가지 않고 다시 집에 들어가서 손과 발을 깨끗이 씻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히고 난 후에야 잔치집에 데려갈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더러운 죄악 가운데 행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를 씻어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는 길은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뿐입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거룩함과 의로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잃어버린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왔노라"(19:10)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자'라는 구절 속에는 얼마나 큰 비극이 숨겨져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 '조두형' 군을 잃어버렸을 당시 라디오, TV와 신문에서 찾아주자고 하는 뉴스가 매일같이 나오고 시청 앞에는 무사히 돌려 보내라고 범인들에게 호소하는 커다란 현수막도 걸어 놓았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온 국민이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비극은 잃어버린 영혼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소망없이 살다가 영원히 죽을 지옥으로 떨어지는 잃어버린 영혼은 참으로 비참한 것입니다.

사람이 직업을 잃어버렸다고 그것이 제일 큰 손해가 아니며, 건강을 잃었다고 해도,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다고 해도 가장 큰 손실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손실은 자기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2)고 하셨습니다만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없는 사람은 그 곳에 가서 주님과 함께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사람은 모든 축복에서 단절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떨어지는 것입니다.

또 잃어버린다는 것은 영원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13:3)고 했습니다.

한 부자가 지옥 불에 떨어진 후에 부르짖기를 "아버지여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16:24)라고 하면서 우리 집 마당 밑에서 음식 찌꺼기를 얻어 먹던 그 거지 나사로를 시켜 물 한 방울만 떨어뜨리게 해서 갈증을 해소하게 해 달라고 호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20:15에는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잃어버린 영혼들은 누구나 "영원한 불못"에 던지우게 되고 거기서 밤낮으로 고통을 당하더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삽니다. 영원히 천국에서 살든지 지옥에서 살든지 합니다. 하나님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끝없는 고통과 수치로 보내게 됩니다.

 

2. 어떻게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까?

 

첫째,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죄에서 떠나는 것을 성경은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란 하나님을 등졌던 사람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려는 것입니다. 죄와 타협하던 생활에서 떠나 죄를 대항하여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어떤 소년이 단지 안에 손을 넣고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에 손을 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손 안에 백 원짜리 동전을 꽉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다가 그 고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죄를 꽉 움켜 잡은 채 하나님을 등지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꽉 붙잡고 있는 한 결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모든 죄를 내게 맡기라. 내가 너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고 구원해 주리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 주리라"고 지금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한편 우리는 죄에 대해서 두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죄를 붙잡고 있다고 영원히 버림을 받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 편에 서서 영원히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가운데 아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은 분이나 믿었다 낙심하신 분이 계시면 지금 이 순간에 회개하고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그리스도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에서 떠나되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로 완전히 돌아와야 합니다. 약삭빠른 고기는 낚시 밥을 보자마자 도망가지만 미련한 고기는 '위험한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주위를 빙빙 돌다가 '에라, 모르겠다'하고 덜컥 삼켜버려서 끝내는 미끼에 걸려 잡혀 죽게 되고 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도 그렇습니다. 죄인 것을 알면 즉시로 떠나야 살 수 있습니다. 죄인 줄 알면서도 거기서 떠나지 않으면 결국 죄에 빠져 영원한 죽음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1:18"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죄에서 완전히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3. 언제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까?

 

지금 곧 해야 합니다. 지금 말씀을 듣는 이 순간부터 마음을 돌이켜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미루지 마십시오. 다음 순간에는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했습니다. 지금이지 내일이 아니요, 다음이 아닙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3:15)고 했습니다. 또한 27:1"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믿어야 삽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님의 전도와 권고를 들으면서도 자꾸 다음으로 미루고, 돈 좀 번 다음에 믿겠다고 하더니 어느날 갑자기 죽을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후회하면서 '이젠 늦었어, 이젠 너무 늦었어'라고 하면서 구원받지 못한 채 죽더랍니다.

지금 오늘 믿어야 합니다. 늦으면 결단을 내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는 위험 경계선(past redamption point)이 있는데 그 지점을 지나면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져 죽게 됩니다. 실제로 그 경고선을 무시하고 지나가다가 죽는 경우도 발생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모험심이 많은 미국 사람들 중에는 타이어 튜브 수십 개를 묶어서 타고 떨어져 보기도 하고 별스러운 일을 다해 떨어져 보기도 했는데 일단 한 번 떨어졌다 하면 다시는 솟아나지도 않고 시체도 찾을 수 없게 사라져 버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위험이 따름에도 불구하고 시험삼아 모험삼아 하다가 죽고 맙니다. 그러나 지옥은 그것보다 더합니다. '설마, 정말로 지옥으로 내가 떨어질까' 하고 '설마, 설마' 하다간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죽게 되고 맙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경고와 위험 신호를 무시하면 그 결과는 비참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지금 이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여 구원받고 천국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 평화에의 추구

 

성경 ; 11:6-9 5:9

 

6.25 동족상잔의 비극이 이 땅을 할퀴고 간지도 53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같은 민족이 이데올로기 때문에 미움이 자라서 잔인한 행위를 하였고 마침내 전쟁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미움이란 참으로 무서운 죄를 잉태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미움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승화시켜 평화를 이루어나가 주님의 역사를 이 땅에 이루어 나가야할 것입니다.

 

왜 평화를 추구하여야 합니까?

1)세계평화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동전을 보십시오. 걸프전,아프가니스탄전,이라크전 모두가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이고 세계평화가 과연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그리고 평화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화평케 하는자>라고 합니다. 이는 <평화를 만드는 자>(PEACE MAKER)란 뜻입니다. 평화란 만들어가는 것이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를 만드는 것은 왕의 일입니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EIRENEPOIOS)라는 말은 황제의 흉상이 있는 동전에서만 발견되는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평화를 만들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합니다. 그의 신분이 어떠하든지간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특수한 인물로서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1. 이 땅은 평화를 원합니다.

 

 

아담 이후 인간의 역사는 투쟁사입니다.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은 동족상잔입니다. 인간의 적대관계는 자연에도 영향을 미쳐 모든 만물도 고통을 당하고 저주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극단적인 상대화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남북이, 동서가 긴장 내지는 대결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오염, 파괴와 살상이 공공연하게 계속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결과는 식견이 있고 조금이라도 윤리성이 있다면 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땅은 오염으로 파괴의 결과를 안아야할 까닭에 계속 신음하고 있기에 자연의 거부반응도 마찬가지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를 가르쳤고 화평을 요구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이 바라시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1)하나님과 사람 사이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복종, 적대관계에서의 화해입니다.

 

2)인간 자신의 마음 속의 평화입니다. 마음의 평화요 영혼의 평화입니다. 마음의 불화, 걱정, 근심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3)모든 사람과의 평화입니다. 신불신, 인종과 문화, 내나라와 외국, 남녀와 계급간의 모든 것을 초월한 모든 인간과의 평화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12:18)는 것입니다.

 

1)2)는 사람 스스로 만들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믿음으로 됩니다. 그러나 3)은 사람의 노력으로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우리가 피차 노력할 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3. 우리는 회개하여야 합니다.

 

 

무엇을 회개하여야 합니까?

 

1)원하는 평화를 성취하지 못하고 오히려 살상무기 생산에 급급하였던 것, 다툼에 앞장섰던 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역사상 수많은 피를 흘렸고 지금은 더욱더 가공할 원자, 생물학, 화학무기 때로 화생방무기(ABC무기-ATOMIC,BIOLIGICAL,AND CHEMICAL)로 생명 파괴에 온갖 시도를 하고 있는 현실을 회개하면서 막아야할 것입니다.

 

2)분별력을 잃어버린 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도덕적 분별력도 잃어버린 세대입니다. 이기적, 정욕적, 자기중심적, 무정, 무감동, 무이성, 무분별의 상태가 심화되고 있음을 알고 인류 자멸의 소용돌이 속으로 달려가고 있음을 회개하여 돌이켜야할 것입니다.

 

3)하나님이 창조세계를 무질서와 파괴로 오염시켜 살수 없는 세계로 만들었음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경이롭고, 참여할 수 있으며 존속가능한 사회>(JUST, PARTICIPATORY AND SUSTAINABLE)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파괴하고 있음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책임을 망각하고 살았던 것을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이 평화의 첫걸음입니다.

 

4. 평화는 만들어야 합니다.

 

평화를 저해하며 파괴하는 기아와 빈곤, 핵 그리고 인권유린은 우리가 노력하여 저해요인을 제거하므로 진정한 평화가 이 땅에 오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까지 아무결과도 없다고 탄식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더 평화를 향하여 도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1984. 7. 19-23(45)에 열린 미국교회여성연합회 제16차 에규매니칼대회가 인디에나 퍼디대학에서 2,800명의 교계대표가 모여 <우리함께 모여 평화로운 새땅을 조성하자>(BUILD A NEW WORLD-PIECES TO PEACE)라는 주제로 모여 평화리본증정식을 가졌습니다. 대표들이 만든 1.6의 긴 리본에는 “1)지구를 보호하자 2)폭탄을 방지하자 3)평화를 위하여 일하고 기도하자는 뜻을 담았으며 그들은 다음해인 1985. 8. 6. 미국방성 펜타곤으로 이 리본을 가져가서 세겹으로 둘러싸고 평화시위를 하였는데 이날이 바로 미국이 40년전에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날이었습니다. 여하한 경우에도 전쟁은 당위시 될 수 없습니다. 평화만이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각오와 약속의 실천이 없으면 인류는 자멸할 수밖에 없으며 문제는 인류 스스로가 이 같은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전쟁 놀음을 그치지 않고 더 가속 가열화 시키고 있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영원한 해답을 찾을 필요가 있고 그 해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재림하셔야 전쟁 없는 평화가 온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후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걸프전을 치루고 10년 그리고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났으나 각종 테러로 인하여 아프가니스탄전 그리고 대이락크전으로 온 세계는 그 아픔을 지금도 함께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끊임없는 전쟁의 소용돌이는 멈출 수 없는 것입니까? 멈출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No War!를 외치던 모든 바램이 전쟁의 포화에 묻혀버린 현실을 가슴아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슴 아픈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반도는 지금도 전쟁이 종결되지 않은 분단지역으로 그대로 남아 있고,서해교전과 같은 부분적인 분쟁이 여전히 끊임없이 도발되고 있고,북한핵개발은 전세계적인 전쟁에 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언제 다시금 6.25이상의 전화에 휩싸일지 모르는 이것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가슴을 치면서 다시는 전쟁없는 세계,전쟁없는 한반도를 위하여 마음을 모아야할 것입니다. 평화를 만들기 위하여 최선의 길로 나가야할 것입니다.평화로운 남북통일을 위하여 마음을 모으고 ,지혜를 모아야할 것입니다. 그 진정한 해답은 무엇일까요?

 

 

5.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인류의 모든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진실로 평화의 왕으로 오신 그를 모시고, 그를 닮고, 그를 따라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운동만이 오늘의 병든 세계를 살리는 진정한 처방입니다. 피차 사랑의 빛 외에는 아무것도지지 말라는 사랑의 실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용서했습니다. 이해했습니다. 관용했습니다. 겸손했습니다. 예수님 같으신 이가 세상에 역사가운데 없습니다. 주님을 그 중심에 모신 자가 그 마음에 평화의 왕국이 임하고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기에 마땅할 것입니다. >

 

그가 오시면,평화는 온전히 성취됩니다.그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9:6-7)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마음에 임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충만하여 지면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이것은 오늘날 성령의 임재로 성취되는 측복입니다.온 인류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평화는 누구나 원하는 것입니다.그러나 평화를 명분으로 내세워 전쟁을 시도하는 이들과 집단이 있는 이상 세상에서 분쟁과 전쟁은 종결되지 않습니다.이것이 오늘 세계의 현실입니다.국가와 국가,집단과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세상은 끊임없는 전쟁을 시도하고 있고 이것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평화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이 오셔야 되는 것입니다.그가 오시면 전쟁은 끝납니다.그는 세상을 온전하게 합니다.새로운 세상을 이루실 것입니다.천국입니다.그때 온세상은 진정한 평화를 이룰 것입니다.주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제목: 6.25가 주는 교훈

본문 : 8:1-10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옳은 말이요, 바른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오늘 우리가 참으로 얼마나 잘 잊어 버리는지 ... 아마 우리 가운데 지난 주일 드린 말씀의 제목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는 분이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인간은 그냥 시간이 지나면 그만 지난 일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기 마련입니다. (요셉이 꿈을 해석해 준 술 맡은 관원장...) 그러나 오늘 우리가 아무리 망각의 동물로서, 잘 잊어 버릴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그런 중에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지요!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내 죄가 해결이 되고, 화해와 더불은 화목이루게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어, 만날 수가 있어, 대화 할 수가 있어, 교제할 수가 있어, 소망을 얻어, 생명을 얻어, 구원을 얻어, 천국을 얻어, 하나님의 권속이 되고, 백성이 되고, 자녀가 된 이 놀라운 사건을 결정채인 십가를 우리가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울러 오늘 이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일들이 참으로 한 두가지가 아닌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또한 오늘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6.25입니다. 그 고통과 처참했던 6.25 참으로 오늘 이 나라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이날을 우리가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그러나 언제 부터인가 우리에게 이 날을 잊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당시에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김일성을 찬양하고 이북을 미화시키는 이들이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지성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가에서 인공기가 펄럭이고 불순 책자가 나돌고 하는 것을 볼 때 참으로 걱정이 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사

이런 말이 있습니다. 6.25를 기억하면 6.25가 안오고, 6.25를 잊으면 6.25가 다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픔을 기억하고 다시는 그러한 아픔을 당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이제 요단강을 건너면 꿈에도 그리던 가난안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난 40년 동안 고난길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고난을 주셨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난의 때를 기억하라고 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처참했던 6.25를 다시 기억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1. 6.25는 죄의 값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후 시내산 에서 율법을 주시어 하나님을 섬기는 훈련을 시킨후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가데스바네아로 인도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바로 들어가면 되는 데 이들 은 먼저 그땅을 탐지하자고 하여 12명의 정탐꾼들을 보내어 40일 동안 정탐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탐꾼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도리어 들어가면 죽는다고 하면서 불평하므로 모든 백성들이 그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40년동안 광야를 헤매게 되었습니다.이스라엘 백성아 광야에서 40년의 고난을 겪은 것은 죄로 인함이었습니다.

A.D. 70년에 디도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인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이 되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던 110만명이 죽임을 당했고 97천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히틀러가 다스린 나치시대에는 600만이나 되는 유태인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가면 야아드 마심 이라고 하여 600만 학살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학살당하면 유대인들의 비참한 모습의 사진과 그들이 입었던 피묻은 옷 찢어진 신발 등 가슴이 저미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무서운 고난의 때에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죽어갔습니다. 유대인들이 그처럼 엄청난 고난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그 죄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려 주소서 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죄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처참했던 6.2544주년째로 맞이했습니다.

6.25는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6.25때 죽은국군이 141,956명이며 유엔군이 149587명경찰 11,303명 민간인 244,763명 그리고 점령지에서 죽은 사람이 123,936 합계676,545명이나 됩니다.

또한 전쟁중에 부상한 사람은 국군이 194,068명 민간인 229,625명으로 합하면 423,693명으로 죽은자와 부상자를 합하면 1,100,238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납북자 84,532명 행방불명자 363,212 등을 합하면 1,547,982명입니다. 여기에 북괴군 사상자 294,151명 중공군 189,000명에 전쟁고아와 전쟁시 죽은 사람을 합하면 300만명이상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6.25는 사람의 시체가 이 땅을 덮고 피가 강을 이루는 참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6.25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좁게 보면 적화야욕에 불타는 김일성의 욕망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참새 한 마리조차도 하나님의 간섭이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300만이나 되는 사람이 죽거나 부상을 당한 이 엄청난 재난이 그저 되지는 않은 것입니다. 이 엄청난 재난은 우리 민족의 죄악 때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1938910일 제27회 장로회 총회때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일본의 신도에 절을하고, 국민의례라 하여 연약한 성도들에게 우상숭배를 권장한 죄를 범하여 온 교회가 함께 우상숭배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종을 떼어서 전쟁무기 만드는데 헌납을 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주의 종들을 파면할 뿐 아니라 도리어 감옥에 집어 넣어 온갖 고문을 다하여 죽였습니다. 이처럼 무서운 죄를 범하고도 해방이 되자 회개를 하기는 커녕 도리어 서로 교권 싸움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민족의 죄를 징벌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전쟁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의 눈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6.25를 기억하며 범죄할때 하나님의 징계가 있음을 알고 범죄하면 겸손히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알 수 있습니다.

6.25때에 북괴군이 파죽지세로 쳐 내려와 마산 부산 대구를 남겨놓고 다 점령을 당하고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엔군이 급파되고 밀리기만 한 국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전열을 재 정비하였고 인천 상륙작전을 통하여 전세를 뒤집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연합군이 파송될때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에서는 안전보장 이사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안전보장 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 5개국인데 여기서는 한나라라도 거부하면 안 되었습니다. 이 회의에 소련의 대표는 유엔군 파송을 반대하기 위하여 작정한 시간에 차를 타고 유엔본부로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갑자기 차의 시동이 꺼져서 운전수가 내려서 보니 별 이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동을 걸면 걸렸다고 조금 가다가 스르르 꺼지고 하여 결국 시간이 조금 늦었습니다. 소련 대표가 참석했을때에는 이미 한국에 유엔군을 파송하자는 결의는 통과된 후였습니다. 소련의 대표가 시간안에 참석했다면 한국에 유엔군의 파병은 부결되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한국은 공산화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이 눈물로 기도하는 것을 보시고 잘가는 차의 시동을 꺼지게 하여 참석을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무서운 징계를 내리는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안됨을 가르쳐 주신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 주의자들이며, 모든 것을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이나 인격을 조금도 생각지 않으며 짐승이나 같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어떠한 잔인한 일도 저질를 수 있음을 정당화 하는 이들입니다. 이러한 무신론을 이길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외에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 무장을 하고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평안하게 살게 될때 애굽의 노예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도해 내시고 광야의 그 무서운 고난의 길을 지켜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의 힘으로 잘살게 되는줄 알까봐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해서 그는 외쳤습니다.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광야 40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이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6.25는 이 백성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믿는 자들이 하나님앞에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중에도 하나님이 도와주심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앞으로도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목 : 국가 민족의 살길

본문 ; 사무엘상 73---11

 

 

서론 ; 6월달은 국가 보훈의 달로서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잊을래야 잊을수 없고 또 잊어서도 안될6,25 사변이 일어났던 뜻깊은 달입니다.

우리 한국의 5천년 역사 가운데서 크고 작은 전쟁을 비롯하여 끔찍한 고난을 수없이 많이 당하였다고 하지만 사실은 6,25와 같이 우리 민족에게도 처절했던 기억들과 영영 지울수 없는 쓰라린 상처 투성이의 갖가지 사연들을 남긴 사건은 일찌기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 전국민의 80% 가까이 되는 6,25 전후세대는 6,25 동란을 격지 않았으니 그렇다할찌라도 더욱 안타까운 실정은 전쟁을 격은 기성세대까지라도 그 비극적인 사건을 얼마전에 있었던 무서운 전쟁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6,25를 역사속에 뭍혀있는 비사로 여기며 너무 안일하고 나태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시간 저는 동족상쟁의 비극적인 전쟁 6,25 44돌을 맞이하여 현하 우리나라와 민적의 활로 즉 살길은 무었인지를 본문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1 우리 국가와 민족이 살길은 무었입니까 ?

온백성이 회개하는 길 즉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중 3절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 합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 께로 돌아오려거든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 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아 이 민족의 살길은 어느 특정인 어느 한 사람의 회개보다는 거교회적 거 민족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돌아오는 운동과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사무엘이 전개한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운동의 구체적인 방법이 무었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

 

1) 우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본문 3절 중반절 말씀을 보면 우상을 제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우상을 척결하라고 촉구 하십니다. 그러면 우상은 무었입니까? 골로새 35탐심은 곧 우상 숭배니라 하신대로 하나님과 나사이에 가로막고 있는 모든 세상욕심이 바로 우상이요 따라서 이것을 구약 성경에서는 영적 간음이라고 했씁니다,

 

2) 여호와 께로 방향을 고정 시키는 것입니다.

본문말씀 3절 하반절에 보면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 향하라 고 하였는데 여기서 향한다는 말씀은 곧 고정시킨다는 뜻입니다.

즉 성도는 모든 중심을 여호와 하나닙께 초점을 맞추어 그에게만 시선을두고 살아야 합니다. 대하 193,3019,

 

대하 19:03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이하고 마음을 오로지하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 하였더라

 

대하 30:19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아무 사람이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케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 하였더니

 

3) 여호와만 섬기는 것입니다.

본문 4절말씀을 보면 회개자의 참모습은 오직 여호와만 , 우리주님만 바로 섬기는 것입니다, 2414---15절은 보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모두가 다 이방신을 섬긴다 하여도 오직 자신과 자신의 집은 여호와만 섬기겟노라 고 선언합니다.

바로 이 신앙이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54절 호 61--3,

05:0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05:0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05:0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05:07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05:08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 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06:0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06:0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06:0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2 이민족의 살길은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본문 5절말씀을 보면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 ” 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무엘이 고백한대로 이 민족이 살길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길밖에 다른 뽀족한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무엘이 전개한 브르짖는 운동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었입니까 ?

 

1) 희생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 사무엘이 젖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고 했습니다 . 830

08:30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기도하니

08:31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사 파리를 바로와 그 신하와 그 백성에게 몰수히 떠나게 하시니라

08:32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09:0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 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 결단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본문 6절말씀을 보면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붓고 라고 한것을 보면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여호와께 지신의 모든것을 다 쏟아붓는 기더를 드렸습니다. 18, 610,

01:0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 에게 구하니

0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 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

3) 결사적인 기도를 드리는것입니다,

본문 6절 하반절말씀에 그날에 금식하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다시말하면 금식기도를 한다는것은 결국생명을 바쳐서 에스더 처럼 죽으면 죽으리라 고 하는 결사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212--13, 586

0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0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 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3.이민족이 살길은 전적인 여호와의 도우심과 그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본문 10절 말씀응 참고하여보면 이스라엘이 불레셋과의 싸움에서 싸워서 승리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 1211

121:0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121:0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121:06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121:07 여호와께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121:0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과 형편이 비슷한 우리 한국도 여호와께서 이나라와 민족을지켜주시고 도와 주시고 보호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도 벌써 옜날에 붉은 마수들에 의 하여 고통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께서 유엔 UN 안전보장 이사회를 통하여 북한의 행위를 침략으로 규정하여 즉각 유엔 UN 16개국을 파병하여 한국을 도와주심은 분명코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 말할수 없습니다,

 

결론 ;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리 합니다.

오늘은 호국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국가 민족의 살길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했습니다,

진정 6, 25 사변은 우리 민족에게 1천명만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생기게한 가장 비극적인 전쟁입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하기를 이 전쟁의 이면에는 반드시 새로운 역사의 교훈과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줄 압니다, 왜냐 ? 하면 인간의 생사화복 나라의 흥망성쇠는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1271.

 

127:0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127:02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 다

 

그러므로 이시간 여러분들은 이땅위에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이 재발되지 않기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꿈에도 소원인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하는 성도들이 다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제목: 진정한 애국자는 누구인가?

성경: 다니엘 6:10-18

195062557년 전에 6. 25전쟁은 일어났습니다.

6. 25180만명이라는 막대한 인명피해, 1천만 이산가족을 내고 우리 민족을 둘로 갈라놓은 민족최대의 비극이었습니다. 매년 또다시 전쟁 상처를 기억하게 하는 이 날, 비극을 딛고 민족통일과 번영을 위해 우리는 새로운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라마다 애국자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애국자는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애국자라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를 중심한 애국지사도 있고 자손을 위한 애국자도 있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민족과 나를 위한 애국자가 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진정한 애국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말씀을 통해 다니엘의 애국심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진정한 애국자는 누구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 앞에 의를 지킨 자가 진정한 애국자 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의를 지킨 애국자였습니다.

유대나라가 망할 때에 다니엘의 몸은 원수 바벨론 나라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포로신세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의로웠습니다.

권력 앞에 아부하거나 개인의 욕심에 이끌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의 길을 걸었습니다.

애국자는 먼저 의로워야 합니다. 개인의 욕심을 끊고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다른 사람이 알아 주든지 안 알아 주든지 고생스럽든지 평안하든지, 죽든지 살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놓고 하나님을 중심한 애국자의 생활을 하였으니 진정한 애국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2. 자기 민족과 동고동락한 자는 진정한 애국자입니다(4).

주께서 공평을 견고히 세우시고 야곱 중에서 공과 의를 행하시나이다

하나님을 중심한 진정한 애국자는 자기 만족과 동고동락한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3년동안 국비장학생으로 공부를 마치고 임금님 앞에서 고시를 본 결과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네 사람은 그 성적이 특출했습니다.

그리하여 느브갓네살 왕은 다니엘을 박사장으로 임명해 모든 도를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다니엘은 친구를 생각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자기보다 앞선 사람이 있으면 중상모략하고 미워하기 쉽고, 자기보다 뒤떨어지는 사람이 있으면 못난 것하고 업신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렇게 놀라운 위치에 올라갈 때 자기가 잘살게 되었다고 친구를 업신 여기지 아니하고 세 친구도 도지사의 직위에 앉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 친구가 기뻐하면 나도 같이 기뻐하며 그 기쁨을 배로 늘려줄 줄 아는 자가 애국자이고, 친구가 어려움을 만나면 내가 손을 펴서 그 어려움을 절반으로 갈라서 나도 한 몫 져주는 것이 애국자입니다.

진정한 애국자는 내 민족과 함께 울고 웃는 생활을 지니는 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중심 하여 애국하는 방법입니다.

3. 민족을 위하여 계속 기도하는 자가 진정한 애국자입니다(6).

저희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

하나님을 중심한 애국자는 어떤 사람인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국무총리와 박사장의 지위에서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일이 많겠습니까?

물론 바쁘지만 기도했습니다. 바쁜 만큼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권능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자기를 위한 기도만이 아닙니다. “포로로 잡혀 온 내 민족이 억울함을 당하지 않도록 돌보아 주시고, 죽다가 남은 이 백성이 망하지 않도록 살려 주시고,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무너진 성전 짓는 날을 주옵소서이와 같이 다니엘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하루에 세번씩 기도하는 그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이 기도를 하다가 간신들의 모략에 걸려 사자굴에 던지워 죽음의 사자굴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다니엘을 위하여,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하여 천사를 보내어 사자의 입을 막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그의 보호를 받습니다.

다니엘이 하루 세 번이나 거듭 말하여 재만 남은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예배당 짓는 날을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번영과 이 백성의 영혼을 건지는 일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기를 원합니다.

 

 

제목:6. 25와 성도의 신앙자세

성경: 벧전 5:6-11

 

 

민족의 비극 6. 25를 겪은지 **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남북은 여전히 일측 즉발의 전시상태와 같은 분단대립의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기 조차 싫은 만큼 아픈 상혼을 남긴 6. 25 전란이 민족적 비극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여건이 동서양 진영의 첨예화한 힘의 대결장이 되어짐으로 빚어진 것이기에 우리 민족의 상처는 더욱 깊을 수 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북한 괴뢰집단의 어리석은 망상 때문에 동족상쟁이라는 민족사상 가장 처참한 비극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것으로 압니다.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1천만 이산가족이라는 세계사에도 없는 상처가 남은 채 아직도 북한 괴뢰집단은 무장공비를 남파하는 도박행위를 공공연히 자행하고 있으며 야만적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으니 우리는 잠시도 안심할 수 없는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는 6. 25와 같은 민족적 비극이 다시 이 민족사에 재연되지 말아야 하겠기에 이날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앞으로 우리의 신앙자세를 더욱 바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 4. 13 조치 이후 민심이 동요되고 6. 10대회 이후 학생들과 국민들의 소요가 계속 일어나고 있는 이때 우리는 신앙인으로 비상태세에 들어가야 할 시기인줄 압니다.

 

성도의 신앙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1.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8).

 

근신하라 깨어라

 

 

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물질만능주의와 사치와 향락의 깊은 잠에 빠져 있지 아니한가?

 

개인이나 교회나 사회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우리에게 더 무서운 시련이 닥쳐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본문 8절에서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고 했습니다.

 

근신은 감정, 욕망, 염려 등에 대해 자제하는 것이고 깬다는 것은 나태에 대해 눈을 뜨고 경계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정신적이고 후자는 육체적 경계입니다.

 

왜 근신하며 깨어야 하는가?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입니다(8).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는 마귀를 피하여 도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적하여 물리침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13:11절에 보면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신앙인의 세 가지 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왕상 19:5절에 로뎀나무 아래서의 엘리야의 잠이 있습니다. 이는 영혼이 피곤해서 자는 잠입니다.

 

 

(2) 요나 1:5절에 배 밑층에서의 요나의 잠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도피하는 범죄자의 잠입니다.

 

(3) 12:6 “감옥에서의 베드로의 잠이 있습니다. 이는 순교를 각오한 자의 잠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잠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의 잠이요, 하나님의 사명을 거부하는 자의 잠이요, 자신의 안일과 쾌락에 도취된 잠이라고 하였습니다. 13:3절에 이는 사망의 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엡 5:14절에 깨어 일어나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2. 믿음을 굳게 하여야 합니다(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죄를 대적하라

 

 

우리는 6. 25의 쓰라린 경험에서 약자가 당하는 비극이 어떠한 것인가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당시 우리는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뿐 아니라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아무런 방비책이 없는 약점을 이용하여 북괴는 전투장비를 총동원해서 남침했으며 따라서 우리는 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힘이란 물리적인 힘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힘을 길러야 합니다.

 

즉 신앙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는 곧 믿음을 굳게 하는데 있습니다.

 

고전 16:13절에 보면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는 데는 신앙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신앙의 잠에서 일어나야 할 이유는 마귀가 최후 발악하는 어두워 가는 시대이니 깨어 일어나야 되고, 그리고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으니 신앙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 하며 우리들의 구원 완성을 위해서 신앙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징조는 마 24:7절에 말한 대로 전쟁, 기근, 지진 등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은 롬 4:18-22절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통해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믿었고 약해지지 아니하고 더욱 강하게 믿었고 의심치 아니하고 더욱 확고하게 믿었고, 약속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이런 신앙이 믿음에 굳게 선 상태입니다.

 

 

3. 힘을 규합해야 합니다(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 라

 

 

아무리 국력이 신장되었다 하더라도 국민들의 마음이 하나로 뭉쳐져야 합니다.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10)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기도로 뭉치고 사랑으로 하나되어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 힘을 규합해야 합니다. 힘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으면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힘을 규합하여 민족구원의 파수군의 사명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파수군의 사역은 (1) 민족의 죄를 회개하도록 촉구하여 민족정화 운동을 전개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불의와 죄악에서 떠나면 살고 그렇지 아니하면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2) 이 백성들에게 소망을 불어 넣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면 다시 민족의 해방과 통일을 주시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3) 한국교회의 신앙부흥 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합니다. 골짜기의 해골의 부활과 같이 허물과 죄로 죽은 심령들이 다시 살아나는 영적 신앙부흥의 길만이 유일하게 사는 길이라고 전해야 합니다.

 

힘을 규합해서 민족구원을 위한 파숫군의 사명을 다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이 나라 이 민족 위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제목: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라

 

성경: 이사야 224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을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지금 새로운 세기, 21세기에 살고 있다. 역사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평화를 갈구해 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류는 온전한 평화를 이 땅 위에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 인류역사가 진전해 갈수록 인간이 바라는 평화도 더욱더 발전해 가기를 바랐지만, 오히려 역사현실은 그 반대로 된 것 같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평화에 대한 위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전쟁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1484-1945년 사이에 278회의 전쟁이 있었고(유럽 187, 그외 91), 세계 1,2차 대전 때는 78,270,000여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1945년 이후에도 중국내전, 한국전쟁, 인도지나 / 베트남전쟁, 이란­이라크전쟁, 아프카니스탄전쟁, 레바논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등 많은 전쟁들이 일어나서 수백만, 수천만의 인명과 재산 손실을 가져왔다.

 

오늘날 세계국가들은 매 분당 1,800,000달러 이상을 군비에 지출하며, 핵무기는 16,000메가톤(TNT 160억 톤에 해당)의 파괴력을 갖고 있는 55,000개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에 이 지구상에서 매시간 1,500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기아로 죽어 가고 있는 모순되고 슬픈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른다.

 

오늘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입을 통해 평화의 시대가 오게될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 칼이 변해 보습(쟁기)이 되며, 창이 변해 낫이 되는 참 평화의 시대를 예언하고 있다.

 

 

1. 평화란 무엇인가

 

 

<평화>란 히브리어로 샬롬이라고 한다. 히브리어 샬롬은 구약성서에서 동사, 형용사, 명사의 형태로 474회나 사용되고 있다. 히브리어 ?샬롬?이라는 말은 우리말 ?평화?나 영어의 ?peace?같은 말과 단순히 일치시킬 수 없는 말이다. 이들 어휘들보다는 더 포괄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핸슨(P.D.Hanson)은 샬롬을 이렇게 정의한다.?샬롬이라는 말은 카오스가 침입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며, 생명을 축소시키거나 파괴시키는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말한다.? 또 베스터만(C.Westermann)은 샬롬을 이렇게 정의한다. ?히브리어 샬롬은 ?완전하게 하다?, ?온전하게 하다?, ?안전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샬렘?에서 온 말로서 ?완전함?, ?온전함? 그리고 ?안전함?을 의미한다.? 즉 샬롬의 일차적인 의미는 어떤 유기체나 인간공동체, 도시, 민족, 가족 등이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고 완전하며 안전하게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샬롬의 사전적 의미를 품사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3)

 

동사 : 샬람 / 완성하다(느헤 6,15;열상 7,51), 배상하다(출애 21,34), 빚을 갚다(열하 4,7), 보응하다 (이사 65,6), 평화롭게 지내다(열상 22,44),

 

형용사 : 샬렘 / 건강한, 평안한(창세 38,18), 가득 찬 (창세 15,16),

 

명사 : 샬롬 / 친근함(예레 38,22), 평화(레위 26,6;민수 6,26), 건강함(창세 44,7), 인사말(삼하 18,28)

 

구약성서의 샬롬을 이해함에 있어서 잊어서는 안될 것은, 샬롬은 야훼 하나님이 주신다는 사상이다. 구약성서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샬롬을 주시며 완성하신다는 사상이 나타나 있다(판관 6,24; 시편 29,11;35,27;욥기 25,2;민수 6,26).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샬롬이란 단순히 ?비전쟁상태나, 전쟁과 집단적 폭력행위가 결여된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샬롬은 이러한 <소극적 평화>에서 한 걸음 더 나가는 <적극적 평화>를 의미한다. <적극적인 평화>란 인간과 자연이 모두 창조의 본 모습대로 샬롬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보는 <적극적인 평화>를 살펴보자.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샬롬의 본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와 그 사이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 여기에는 하나님과 사람, 하나님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자연과 자연 사이에 평화가 깃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평화: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사랑하며,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평화가 깃들어 있다. (2) 하나님과 자연 사이의 평화: 자연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관계가 유지되었다.

 

(3)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 남자와 여자가 다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고(창세 1,26-27), 서로 사랑하는 관계(창세 2,21-25)가 유지되고 있다.

 

(4) 사람과 자연 사이의 평화: 사람도 자연을 해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자연도 사람을 해하지 않는 평화 공존 상태가 지속되었다.

 

(5) 자연과 자연 사이의 평화: 짐승들도 서로 잡아 먹는 일이 없는 동물세계의 평화(Tierfrieden)가 깃들고 있었다(참고. 이사 11,6-9;65,25;호세 2,18;에제 34,25).

 

그런데 이러한 평화가 지속되지 못하고 깨어지게 된다. 성경은 그 근본원인을 인간의 욕심에서 찾는다. 하여튼 그 결과로 나타난 파괴된 평화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나타나게 된다.

 

(1)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평화가 깨어진다: 사람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게 된다.

 

(2) 하나님과 자연 사이의 평화도 깨어진다: 피조물인 뱀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땅과 나무(가시나무)도 창조의 본모습을 상실하게 된다.

 

(3)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도 깨어진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불신하고 책임을 전가한다. 평등관계가 깨어지고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전락한다. 창세기 4장에 이르면 드디어 살인이 등장하게 된다.

 

(4) 사람과 자연 사이의 평화도 깨어진다: , , 가시나무 등이 인간을 괴롭히고 사람과 동물이 서로 적대관계에 이르게 된다.

 

(5) 자연과 자연 사이의 평화도 깨어진다: 동물과 동물이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로 변하여 동물세계의 평화가 깨어진다.

 

오늘 성경에는 이 파괴된 평화가 디시 회복된다고 예언하고 있다.

 

 

 

2.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

 

 

평화실현의 때는 언제일까 ? 2절은 그 때를 '말일에'라고 한다.

 

<말일>이라는 표현은 많은 날들의 끝날이라는 말이다. 이 표현은 넓게는 메시야시대를 가리키고, 좁게는 최후의 심판의 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가리킨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인간의 지혜는 발달하고, 생활은 윤택해 지며 과학은 발전하나. 평화는 오지 않고 오히려 전쟁은 더 심각한 양상을 띠어가고 있다. 지식의 발달과 비례하여 전쟁의 수단도 발달해 왔다. 고대에는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싸웠으나, 근대에는 총과 대포로, 현재와 미래는 핵무기로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 평화가 문명이나 정치적 책략이나 지식의 산물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사실은 성경에 풍부히 그 증거가 나타나 있다. 이사야는 92_6절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한 아기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평강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이다. 누가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을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가 임했다고 노래했다.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평화를 약속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갈지 아니하니라 너회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가장 먼저 하신 약속도 평강(평화)이었다 (20: 19 21 26). 그러므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평화의 시작에 불과하다. 완전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에 실현될 것이다.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오랫동안 국경문제로 갈등상태에 있었다. 그것이 마침내는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이 전쟁을 끝낸 데는 1900년 부활절 아침 어느 아르헨티나의 목사가 외치는 평화의 호소가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두 나라에서는 국경에 배치되어 있던 대포를 녹여서 그리스도의 상을 만들어 국경지대에서 가장 높은 산 위에 세웠다. 1904313일 두 나라 국민들은 이 산정에 모여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아르헨티나인들은 칠레인들의 천막에 초대되었고 칠레인들은 아르헨티나인들의 천막에 초대되었다. 동상 제막식 테이프를 끊기 전 양국 국민들은 함께 손을 잡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리스도의 동상에는 이와 같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예수의 발 밑에서 영원히 지키자고 맺은 언약을 두 나라가 깨뜨리면 즉시 산들이 무너질 것이다.' 그 이후 두 나라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

 

평화를 궁극적으로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4). 열방을 다스리는 왕은 세상 나라의 군주나 수상이 아니요, 대통령이 아니라 창조자이시며 섭리자이시며 구속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실 때 본문이 약속하고 있는 꿈과도 같은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실 때, 사람을 찌르고 베고 죽이기 위하여 준비한 칼이 보습으로 바뀌고, 창이 낫으로 바뀌며 도처에는 평화의 촌락이 형성될 것이. 과거 일본은 괭이와 호미를 거두어다가 대포를 만들었다. 가정에서 쓰는 수저와 밥그릇을 가져다가 총알을 만들었다. 교회의 종을 가져다가 대포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결과 일본의 평화와 안전이 보장되었는가? 아니다. 일본은 비참한 파멸을 맞이해야만 했다.

 

 

 

3. 평화를 위한 불화

 

 

하나님이 평화를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치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식구리라.' 하나님이 이처럼 앞뒤가 안 맞는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왜 한쪽에서는 평화의 왕이라고 말씀해 놓고 다른 쪽에서는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우리는 예수님의 양면을 동시에 보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는 방법으로 곧 평화가 오기에 앞서서 갈등과 싸움이 있게 될 것임을 말씀한 것이다.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예수님이 먼저 하셔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곧 평화를 해치는 죄악의 요소들을 파괴하는 일이다. 발꿈치를 무는 뱀의 머리를 짓밟고 난 뒤에 비로소 평화가 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12:29). 예수님은 건설자이기에 앞서서 위대한 파괴자였다. 러스킨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은 평화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는 문명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는 죄와 수치를 정복함으로써 그것을 얻는다. 분열과 부패를 이김으로써 우리는 평화를 얻는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항상 싸움이 있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항상 유대주의자들이 나타나 그의 복음전도를 방해했다. 그들과의 싸움을 거치지 않고는 복음을 소개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 일 행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이것은 가는 곳마다 싸움을 일으킨다는 의미이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참된 평화가 임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주적인 대전쟁이 있어야 한다고 예언하고 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리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회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1 19 ;11- 16).

 

그렇다. 이 세상에 아직도 전쟁과 싸움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참된 평화를 이루시기 위한 전 단계로 악을 파괴시키는 작업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세계와 인류는 냉전을 청산하고 화해와 평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동서간에 화해무드가 무르익고 무기를 더 이상 만들지 말고 만든 무기도 폐기해 버리며 서로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살도록 노력하자고 말하고 있다. 분명히 역사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역사의 방향과 목표를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주관자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평화를 깨려고 한다. 그래서 평화는 어느 순간 어떤 사람에 의하여 어떻게 깨어지고 허물어질지 모른다. 항상 예측을 불허하는 엄청난 일들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항상 긴장감으로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평화를 위해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취했던 일을 소개함으로 말씀을 맺는다.

 

 

평화의비결

 

어떤 사람이 자기 가정이 복잡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남편은 아내와 말다툼하고, 형제는 서로 싸우고, 친자는 서로 욕하는 상태였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집 안엔 불평만이 가득찼다. 그런데 이웃집은 친자 2대의 대가족이므로 옥신각신하기 쉬울텐데도 풍파도 없이 언제나 온화했다. 아주 감동이 되어 물어봤다. ?댁은 어떻게 그리 평화스럽습니까?? 대답은 이상했다. ?댁은 선한 사람만 한 데 모였지만 우리 집은 악한 사람뿐이니까요.? 놀라와 하는 얼굴을 보고 그 이웃 사람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댁에서 가령 실수하여 항아리를 깼다고 합시다. 즉시'누구야. 이런 곳에 분재를 놓아둔 놈은?', '당신은 눈뜬 소경이요'라고 하게 되지요. 모두 저마다 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 내가 그런 곳에 놓아둔 것이 잘못이었어요', '아뇨, 제가 부주의한 탓이지요' 하며 모두 자기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집안이 평화롭고 안정이 되지요.? 이것이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은 휴지통이 많이 놓여 있기 때문에 깨끗하게 정리가 된 역 홀을 보고, ?나는 우리 집의 휴지통이 되겠다?고 했다. 가시돋친 말, 비꼬는 대답, 냉정한 말대꾸, 이러한 가정의 쓰레기같은 것을 모두 자기 마음 속에 받아넣어 집안을 깨끗하게 정리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욕을 먹어도 미소로 답하고, 빈정거려도 따뜻하게 웃어주는 인간이 되려고 결심한 그곳에 평화는 벌써 와 있다.

 

 

제목: 나라가 잘되는 길

성경: 요나서 3:1-10

신록이 짙어지는 6월이 되면 공산주의자들의 불법남침으로 일어났던 6. 25사변의 비극이 빚은 남북분단의 아픔이 되살아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음 뜨겁게 구국을 위해 기도해야 됨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우리 조국과 민족은 5천년의 긴 민족사를 갖고 있으면서 한번도 수난을 당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수나라가 당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하루도 영일없이 전쟁의 공포 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당과 생사가 걸린 전쟁을 해야 했고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략을 받아 40여년 동안 한반도 전로가 몽고인의 말발굽에 처참하게 짓밟혀야 했습니다. 이씨 조선시대에는 청나라의 속국처럼 되어 노략질을 당해야 했으며 이조 선조 25년에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7년동안 포악한 일본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더욱이 일정 36년동안에는 일본의 학정 밑에서 이름도 글도 언어도 잃어버린 채 귀머거리 되고 벙어리 되고 장님이 된 상황 속에서 비참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 민족은 멸절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수난은 그치지 않고 해방이후 공산주의의 마수에 의해 우리는 6. 25사변이란 처참한 전쟁을 또 겪었고 남북분단 57년을 맞는 해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나서 3장에 나타난 말씀을 통해 요나의 외침에 니느웨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은 것처럼 이 민족구원과 나라가 잘 되는 길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고저 합니다.

1. 나라가 잘 되는 길은 온 백성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4-5).

본문에서 보면 니느웨성은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한 경고의 말씀을 듣고 지금까지의 우상숭배를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 한분만을 믿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니느웨성은 창 10:8절에 나오는 니므롯이 창건한 도시로 앗수르의 마지막 수도였던 곳입니다. 인구 60만 가량의 도시로 특별히 상업의 요충지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함으로 변화한 도시였고 우상숭배도 심하고 죄악의 소굴과도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믿기란 매우 어려운 처지였으나 이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왕으로부터 시민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모든 우상은 다 헛것이요 우주의 창조자요 지배자이신 하나님 한분 만이 참신이신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46:9절에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하신 하나님만을 믿기로 한 것은 니느웨가 살게 된 첫걸음입니다.

나라가 잘되는 길은 온 백성이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믿게될 때 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왕과 온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잘 경외할 때 흥왕하였으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이방신과 우상 숭배 할 때 패망하였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이 잘되기 위해서 힘써 기도하고 온 백성이 하나님을 믿도록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나라가 잘되는 길은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5-8).

니느웨성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받고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하는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굵은 베옷을 입은 것은 죄인이라는 뜻이며, 금식을 선포한 것은 생명을 건 회개운동이라 할 수 있으며 힘써 부르짖으라고 명한것은 합심하여 기도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왕은 명령하여 짐승들까지도 먹여서는 안된다고 조서를 내렸습니다. 철저한 회개운동입니다. 이땅에도 이런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니느웨성은 형식적이거나 의식적인 것이 아닌 철저하고도 구체적인 회개를 했습니다.

성경은 회개하는 모든 죄악들은 용서해 주시고 멀리 떠나 보내시며 기억도 않으신다고 했습니다(10:17, 103:12). 하나님은 내 죄를 깨닫고 아파하고 뉘우치는 사람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나라가 잘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성도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못산 죄, 이웃을 미워한 죄, 시기하고 질투한 죄,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한 죄, 모두 회개해야 합니다.

온 백성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버린 죄, 인간이 인간에게 그릇 행한 죄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고 화목하면 반드시 우리 개인이 복 받고 이 나라가 복된 나라가 될 것입니다..

민족적 회개운동이 일어날 때 이 나라는 분명히 잘 될 것입니다.

3. 나라가 잘되는 길은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8).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때 이 나라는 잘 될 것입니다.

악한 길에서 떠난다는 것은 생활의 개선과 혁신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악한 길이란 각자 스스로가 좋지 않은 일을 행하는 것을 말함이며 손으로 행한 강포란 다른 사람에게 끼친 피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부당하게 빼앗은 것은 돌려주어야 하며 남에게 괴로움을 끼치는 일은 보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양심적이며 정직한 정치를 해야 하고 상인은 양심을 지켜 상도덕에 임해야 되며 국민 각자가 지켜야 할 분수와 도의를 철저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웃과의 벽이 무너지고 속임이 없는 사회상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나라를 아름다운 나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축복받는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온 국민이 자성하고 바로 깨우쳐 바로 사는 나라가 되도록 힘써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작은 법규 하나부터라도 철저하게 지키면서 모든 이웃에게 본을 보여주면서 복된 나라 건설에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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