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로 인하여 믿음으로 우리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이 관계의 회복이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성전의 기둥이 되고 진정한 예물을 드리는 성도가 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
(신 16:9-12)
칠 주를 계수할찌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 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신 16:9, 10),
본문을 보면 칠칠절이라는 명절을 꼭 지키라고 명령하시면서 그 절기를 지키는 법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칠칠절이 무엇인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칠칠절은 오순절이라고 하고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밀이나 보리의 첫번 추수한 날(첫단을 묶어서 하나님께 흔들어 드리는 제사)로부터 계산해서 7주를 지난 다음 날이니까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7×7=49일 지난 50일째라고 해서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밀 보리가 주곡이 되는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중요한 감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날에 반드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시면서 그 예물 드리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물이란 상대방에 대한 감사와 정성의 마음을 표하는 것으로서, 받는 이에게 진정 기쁨과 흐뭇함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참된 예물이란 그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성이 보다 귀하게 취급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역시 그 안에 담긴 정성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흐뭇하게 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을 드려서 하나님을 진정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1. 자원하여 예물을 드립시다
하나님은 율법에 의해서 억지로 드리는 예물은 기뻐하시지 않고 자원(freewill) 하는 예물을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몇 해 전에 주일밤 예배를 마치고 땀을 흘리며 들어 갔더니 아이들 셋이서 냉 사이다 한 병을 사가지고 들어와 뚜껑을 따고 컵에다 부어 주는데 얼마나 맛있게 마셨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집사람보고 '당신이 시켰소?'하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합니다. 그 애들이 자원해서 용돈을 모았다가 사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 아빠의 마음이 기뻤는지 몇 해가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사이다 몇 병 값되는 용돈을 다 나눠주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묻기를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신데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만들었습니까? 아예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그 대답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선악과를 따 먹을 수도 있고 따 먹지 않을 수도 있게 하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자원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생명과와 선악과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았다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보트이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기계나 로보트 같은 인간들로부터 경배 받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한 사람을 전도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예 하나님이 천둥소리 같은, 큰 소리나는 스피커 수천 개를 합한 크기만한 소리로 하늘에서 한번 소리내어 '이 못된 인간들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벼락을 쳐서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 모든 인간들이 벌벌 떨고 무릎 꿇고 회개할텐데 왜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힘들게 전도를 해야됩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절박한 형편에서 믿고 회개하는 것은 억지 회개이지 자원하는 믿음과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과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물도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6장에도 보면 성막을 지을 때 '자원하는 자'를 불러다 일을 시켰고 '자원하는 예물'을 받아서 지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릴 때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드린 것입니다. 양을 하루에 한마리씩 드린다면 1,000마리를 근3년이라 걸려서 제사 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자원하는 예물과 정성을 기뻐 받으셨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만 구한 솔로몬에게 부귀, 영화, 장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책임상 억지로 하는 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으나 로마서 16장에 보면 그 가정이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자원하는 봉사, 자원하는 예물입니다.
시 51:12에서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하고 기도한 것처럼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2. 힘을 다하여 예물을 드립시다
신 16:10에서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드리라"고 한 말씀은 힘을 다하여 정성껏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자원해서 드린다고 해도 정성을 곁들이지 않고 힘을 다하여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네게 베푼 축복을 생각해 보고 힘껏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로 예수 믿고 아직 세례도 받지 못한 분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가장 아끼고 마지막 남은 재산인 대전에 있는 땅 5, 60평을 자꾸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감동이 와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권리 증서를 바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부인이 무당이어서 방안에 부처상을 모셔놓고 있던 가정이었고 자기는 간암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기타 치질과 여러가지 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이 싹 고쳐 주시고 부부가 다 성령 충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 구원받은 것과 죽을병에서 고쳐주신 은혜를 생각한다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하고 간증하면서 마지막 남은 귀한 재산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과부는 비록 동전 두푼을 드렸으나 그날의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녀가 가장 많이 바쳤다고 칭찬하셨습니다. 힘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가 없고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하고 그대로 행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즐거움으로 예물을 드립시다
11절에 보면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물을 드리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감격스러워 주체할 수 없는 즐거움과 기쁨으로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미국이 왜 복을 받았습니까? 청교도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거둔 소산물을 하나님 앞에 감사 예물로 기쁘게 드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지키는 감사절의 유래가 이러한 미국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없이 드리는 예물은 형식적인 모양만의 예물일 뿐 그 안에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마음과 정성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물을 기뻐 받으시기는 커녕 오히려 가증히 여기시고 돌아보시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물을 드리되 한없는 주님의 은혜에 대해 작게 나마 보답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예물을 기뻐 받으실 뿐만 아니라 그에 비교할 수 없는 크신 축복을 기쁘게 베푸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껏 많은 예물을 하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예물이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것이 되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혹 억지로 무성의하게, 그리고 감사하고 기쁜 마음없이 드림으로써 하나님이 고개를 돌려버리시는 예물이 되지는 않았는지요? 진정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진실한 것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이 되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분 앞에 진실된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그리고 즐거움으로 감사 예물을 드려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축복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믿음의 고비를 넘어서...
(창 22:9-19)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우리는 언제나 깨어 기도하며 조심스럽게 생활하므로 마귀의 유혹에 빠지거나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는 때때로 마귀의 시험과 유혹이 닥쳐오므로 그것이 이기고 넘어서야 할 믿음의 고비가 됩니다. 그 중요한 고비를 믿음으로 이기고 넘어서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뿐만이 아니라 신앙도 성장하고 하나님의 귀한 그릇이 되며 큰 축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비에 쓰러지고 넘어지면 믿음을 잃고마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은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이 어떻게 그러한 믿음의 고비를 넘어섰는가를 살펴보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혈육의 정에 의한 믿음의 고비를 넘어 승리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독자 이삭을 인간의 생각으로는 생산하기 불가능한 나이 100세에 낳았습니다. 젊은 사람들도 자식이라면 귀하고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데 아브라함은 100세나 되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웠겠습니까?
때문에 아브라함은 아들이 생기자마자 하나님 제일주의에서 아들 제일주의로, 즉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던 것이 아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것으로 변하였을 것입니다. 쥐면 깨질세라 놓으면 날을세라 사랑이 지나쳐 자식의 종이 될 정도가 되고 그 아들 생각 때문에 아들이 눈앞에 어른거려 기도도 못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할 예배 또한 못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을 보시다 못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해 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별빛이 고요하게 빛나던 밤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날이 새자마자 아침 일찍이 일어나 나무와 칼과 불을 준비해 가지고 아들을 앞세우고 삼일 길을 걸어가서 모리아 산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아브라함은 단을 쌓아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칼로 그를 잡아 제사를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급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 아들, 네 독자까지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하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수양 한 마리가 수풀에 뿔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은 그 양을 대신 잡아 제사를 드리고 그 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하나님이 준비 하심)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제야 알았다'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룬 학생에게 합격 통지서와 같은 것입니다. 믿음이냐 혈육의 정이냐 하는 이 고비에서 아브라함은 당당히 합격하고 넘어섰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어빠진 자기 몸에서 귀한 아들을 낳게하신 하나님이 그 아들을 다시 데려가신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러한 시험의 고비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두번째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불러 축복하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 하였으니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고개가 높으면 오르기가 힘들고 어렵지만 그 다음 내려가는 것은 훨씬 쉬운 것같이 넘기기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승리하면 그만큼 큰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신앙 생활에서 예수님이냐 혈육의 정이냐, 믿음이냐 애정이냐 하는 갈림길에 설 때가 있습니다. 이 때에 용감히 이 고비를 넘어서야 믿음도 성장하고 축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2. 쾌락의 유혹에 의한 믿음의 고비를 넘어 승리한 요셉
소년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 상인에게 팔려 애굽 보디발 장군 집에서 종노릇을 하게 되었을 때에 요셉에게는 쾌락의 유혹에 의한 믿음의 고비가 닥쳐 왔습니다.
청년기에 접어든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정력이 넘쳐보이는 미남이었으므로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그를 유혹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눈짓을 하고 그 다음에는 요셉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나중에는 육탄 공세로 요셉을 유혹하였습니다.
이 청년 요셉은 본능을 가진 남자요, 애굽의 여자들은 아름답고 관능적인 매력을 가졌다고 여행가들은 말을 하는데 게다가 보디발의 아내는 한 나라 유명한 장군의 부인이니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였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요셉은 얼마나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하고 단호히 물리치며 그 자리를 뛰쳐 나왔습니다. 그 여자가 붙잡고 간청하자 옷을 벗어 던지고 뒤쳐 나왔습니다. 그러자 보디발의 아내는 사랑이 미움으로 변해 남기고 간 그 옷을 내보이며 '그가 나를 겁간하려다가 소리치니까 도망갔다'고 남편에게 허위 보고를 하므로 요셉은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일로 인해 요셉은 애굽의 총리 대신까지 되었습니다. 쾌락의 유혹에 대한 믿음의 고비를 넘기었기 때문에 그는 존경받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단은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생각 속에 쾌락주의적인 죄악된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사람은 이런 사단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쉬운 약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늘 이런 고비에 직면할 때마다 사단을 완전히 이기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승리하여야 합니다. 이런 쾌락의 유혹에 의한 믿음의 고비를 잘 넘기고 승리하면서 점점 더 거룩하고 존귀하게 되고 점점 더 큰 축복과 은혜를 받기 바랍니다.
3. 고난에 의한 믿음의 고비를 넘어 승리한 욥
당대의 의인 욥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경건한 믿음을 인정받던 자였습니다. 그러한 욥에게 하루아침에 닥친 재난은 실로 크고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하루 아침에 잃고 자식까지 모두 잃었을 뿐만 아니라 온몸에는 악창이 생겨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는 고난이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그에게 그러한 고난이 임했다는 것이 실로 부당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이에 욥도 얼마간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대해 답답해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 소망을 둠으로써 회복과 축복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에 의한 고비를 능히 넘어서서 승리의 기쁨을 누린 것입니다.
우리도 불의하고 악한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난은 우리의 믿음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고비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믿음 생활을 잘하던 중 겪게 되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적인 실패에 빠지게 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믿음을 지켜 그 고난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단지 순간적인 것일 뿐 우리를 영원히 해치지 못합니다. 더욱이 우리가 받는 고난은 이후에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고난이 닥칠 때마다 담대하게 믿음을 지켜 그 고비를 넘어 끝내 승리의 기쁨을 누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4. 물욕에 의한 믿음의 고비를 넘어 승리한 삭개오
세상의 물질에서 만족을 찾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 동안의 물욕을 버리고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는 사랑의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어느날 밤 예수님을 찾아온 한 청년은 끝내 물욕을 버리지 못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물욕에 의한 믿음의 고비를 넘지 못하고 하나님을 속이려 하다가 멸망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물욕으로 인한 믿음의 고비가 많습니다. 우리의 물욕은 하나님의 것까지 내 것으로 하려고 하며, 하나님의 일과 믿음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세상 물질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게 합니다. 우리 주위에도 세상 물질을 지나치게 추구하다가 믿음을 버리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머지 않아 썩어 없어질 물질에 대한 욕구로 인해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보장하는 믿음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진정 물욕에 의한 믿음의 고비가 있을 때마다 믿음을 더욱 귀히 여기고 지켜나감으로써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하십시다.
5. 생명의 위험에 의한 믿음의 고비를 넘어 승리한 다니엘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포로 생활시 그는 대제국의 총리 대신의 바쁜 생활 중에서도 하루 세번씩 자기 집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반드시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리오왕 때에 다니엘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방백들이 왕에게 간청해서 왕 이외에 무슨 신에게나 아무 사람에게나 무엇을 구하거나 기도하면 사자굴 속에 집어 넣는 법을 만들게 했습니다. 왕은 그들의 속셈도 모르고 그 조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다니엘은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을 열어놓고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단 6:10).
죽느냐, 사느냐 하는 고비에서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믿음을 지켰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적당히 속으로만 기도하고 장소라도 바꾸어서 은밀한 곳에서 기도할 수도 있었겠으나 다니엘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여전히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했습니다. 거기다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고 감사의 기도까지 올렸습니다. 얼마나 여유있고 늠름한 믿음의 자세입니까?
음식에 조미료를 섞듯이 우리 기도에 감사를 더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놀라운 응답을 주십니다. 그 결과 다니엘은 사자 굴속에 던지워졌으나 사자들이 입을 봉하고 잡아먹지도 못했습니다.
이 어려운 생명의 위험에 대한 믿음의 고비를 넘기고 이긴 다니엘은 더욱 왕의 총애를 받고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크게 보이면 사람 앞에서도 크게 보이는 때가 옵니다. 기도할 수 없는 고비를 넘기고 기도하고, 믿음을 지킬 수 없는 고비를 넘기고 믿음을 지키고, 드릴 수 없는 고비를 넘기고 드리고자 할 때 그 고비를 안겨주었던 사단은 슬피 울며 도망갈 뿐 아니라 귀한 은혜와 축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고비를 넘기고 승리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무엇으로 믿음을 알 수 있는가?
(누가복음 8:22-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눅 8:25)
많은 사람들이 '나는 믿음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믿음이 없이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발소에 간 사람은 새파란 면도칼을 든 이발사를 전혀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얼굴을 내밀고 면도를 하게 합니다. 심지어 잠을 자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의 신분은 모르지만 믿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또 버스나 택시를 탈 때 그 차의 성능도 모르고 운전사도 전혀 모르지만 타게 되는 것도 믿기 때문입니다. 비행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상 따지고 보면, 검사해 보고 이치에 맞아서 행동하거나 합리적이어서 행동하는 경우보다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때가 더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도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그것이 곧 또 하나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믿음들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사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믿는 것들은 불완전하고 유한한 것으로 진정 믿을 만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에 매해서는 너무도 쉽게 믿음을 가지면서, 실로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믿음을 갖기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 중에도 그 믿음이 흔들리고 바르지 못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과 만날 수도 없고 교제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가장 칭찬하고 기뻐하신 사람들은 돈 많은 부자도 아니요, 지식 많은 사람도 아니요, 권세가도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큰 사람을 보고 기뻐하셨고 칭찬하셨습니다. 또한 히 11:6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흔히들 보는 것이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라 합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듣고 만져 보아야만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지도 듣지도 만져 보지도 않고 믿는 것이 곧 참 믿음인 것입니다. 성경대로 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입니다.
공기나 전파나 소리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지만 분명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젼이 스위치를 올리고 채널을 맞춰야 들을 수 있고 볼 수가 있듯이 하나님은 영이신 고로 볼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다이알을 맞추고 믿음의 스위치를 올리게 될 때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알 수가 있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도 할 수가 있는 것이요, 따라서 그 믿음을 통하여 매일매일 순간순간 그분과 교제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의 믿음도 심히 부족하고 체험도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은 털끝만큼도 의심하지를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매일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하는 사실을 간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있는 자가 되십시오. 농담이라도 '나는 믿음이 없다'라는 불신앙의 말을 하지 말고 날로 날로 믿음이 크고 굳세어져서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의 분량에 따라 맡겨집니다. 믿음이 적으면 적은 일밖에 할 수 없고 믿음이 크면 큰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또 믿음이 큰지 작은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하여 잠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말씀 드릴 수가 있습니다.
1. 환난과 시험의 풍파가 닥칠 때 그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다의 제비는 폭풍이 불 때만 떠다닌다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또 믿음이 크냐 작으냐는 환난과 고통이 닥쳐 올 때에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볼 것 같으면 제자들이 평안할 때는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았으나 광풍이 일어나 거센 물결이 배를 치고 배에 물이 가득 차니까 제자들은 배가 침몰해 죽을까 하여 두려워 떨며 주무시는 예수님을 황급히 깨우면서 하는 말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급했던지 두번씩이나 주여 주여 하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풍랑중에서도 태연히 주무시다 일어나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뒤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꾸짖었던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타신 배가 뒤집히겠습니까? 모든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기고 태연하고 안심했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큰 시험이 닥쳐 보아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태평 무사할 때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큰지 작은지도 풍파가 일어나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환난, 고통, 시험이 닥쳐와야 비로소 그 믿음이 나타나게 될 뿐만 아니라 없던 믿음이 솟아나게 되기도 하고 약한 믿음이 커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에는 가끔 풍랑이 있는 법이고 풍랑이 있어야 기도도 열심으로 하게 되고 믿음도 점점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보다 성숙하고 올바른 신자가 되려면 어린 아이들이 홍역을 치르듯이 한 고비의 시험을 겪게 됩니다. 믿음이 좀 자라는 것 같을 때에 병이 나거나 사업에 실패를 하거나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은 크게 낙심하여 당장 일어나는 일만 보고서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그럴까? 또는 예수 믿어 보아야 별수 없다고 떨어져 나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하나님을 의뢰하고 간절히 찾습니다. 키에다 곡식을 넣고 까불어 보면 쭉정이는 까불수록 멀리 나가 떨어지지만 알곡은 안으로 바싹바싹 다가 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풍파가 오고 시험이 오면 더욱 잘 믿고 더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께 가까이 하라는 사랑의 신호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The end of self is the beginning of the God)'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 (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라는 말도 있습니다. 고로 믿음이 큰 사람은 풍파를 역이용하여 믿음이 자라는 기회로 만드는 것입니다.
약 1:2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고, 또 요 16:33에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환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이 오지만 이기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약 1:12에 보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했을 때 마르다는 '죽은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라고 했던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절망 속에서도 믿어야 합니다. 믿음 위에 굳게 선 자는 시험을 이기게 되고 그것을 통해 믿음을 하나님께 인정받아 시험이 축복으로 바뀌며 더 크고 영원한 영광에 참여케 되는 것입니다.
이에 시 119:71에서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다'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레이놀드 그린(Reynold W.Green) 목사는 말하기를 '인생에 가장 좋은 일들은 흔히 고난이나 슬픔의 보따리에 싸여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큰 축복을 우리 인생에게 줄 때는 때때로 슬픔이나 고난의 보따리에 싸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환난과 시험이 닥칠 때마다 보다 굳건한 믿음을 하나님 앞에 내보임으로써 예비된 축복을 얻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믿음은 그 행위로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약 2:15에서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였습니다. 이는 결국 참된 믿음이란 그 행위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만약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그것은 거짓 믿음이 됩니다. 진정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대로 행하는 실천적인 믿음의 열매가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회사 사장은 자동차로 회사까지 15분 정도 걸리는 길을 가면서 항상 옆의 빈 자리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 것으로 믿고 친구와 의논하듯이 주님께 회사의 모든 문제를 아뢰이고 의지하면서 출근하곤 했는데, 놀랍게도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되고 회사가 크게 발전되어 갔다고 하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Henry Ford)는 국민학교도 제대로 못나온 사람이지만 마차를 보고 생각하기를 말없이 가는 차를 만들어 봐야겠다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연구한 결과 자동차 왕이 되었습니다. 그 부부가 죽은 후 디트로이트에 기념관을 세웠는데 그 안의 포드 사진 아래에는 꿈꾸는 자(The Dreamer)라고 쓰여 있고 부인의 사진에는 믿음의 사람(The Believer)이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큰 꿈을 가지고 굳게 믿고 의지하고 실천하는 자에게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다 이루어 진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노만 빈센트 피일(N.V.Peale) 목사의 말 중에서 제가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고 무엇이나 성취하고 승리하는 비결에 대하여 세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첫째는 마음 속에 그림을 그리라 둘째는 기도하라 셋째는 현실화 하라'고 한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 우선 마음 속에 그 실상을 그려 놓고 불타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확신이 오면 그대로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빌 4:13에 보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을 분명하게 믿는 자들은 그 행위와 삶 속에서 믿음대로의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끈기있고 변함없는 신앙 생활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참 믿음이나 큰 믿음이란 것은 물러설 줄 모르고 끝까지 믿고 맡기고 나가는 모습 속에서 증거됩니다. 시험삼아 좀 믿어 보다가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부정하고 마는 것은 믿음이 아니요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을 시험해 보는 죄인 것입니다. 병 낫는 것도 끝까지 믿고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지, 속으로는 믿지도 않고 아무리 기도를 받아 보아야 그 병이 낫지 않는 것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은 분명히 내 병을 고쳐주신다. 주님은 내 죄뿐 아니라 내 질병도 담당하셨다는 확신을 가져야 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설사 병이 낫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후에 있을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믿음을 변치 않는 것이 바른 믿음인 것입니다. 약 1:6에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했고 막 11:24에도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을 어기고 풀무불에 던지워졌을 때 타죽지 않게 된 것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죽으면 죽었지 우리는 왕의 명령을 들을 수 없다고 하며 변함없는 믿음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믿을 때 믿음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히 11:13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고 했습니다. 믿어 보다가 도중에 그만 두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이냐 아니냐, 큰 믿음이냐 적은 믿음이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끈기있고 변함없는 모습으로 신앙 생활을 하느냐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디 환난과 시험속에서, 그리고 그 행위를 통해, 또한 끈기있고 변함없는 신앙 생활로 여러분들의 보다 분명하고 큰 믿음을 확증해 보임으로써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되돌리는 신앙
(계 4:1-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어떤 목사님의 일화입니다."해마다 제 생일이 되면, 저희 집 아이들이 용돈을 모았다가 선물을 사오곤 했는데, 작년에는 제 생일이 지난지 두 주일이 지나도록 이 애들이 선물을 사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며칠을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선물이래야 아빠가 준 용돈을 얼마씩 거두어서 손수건이나 양말, 아니면 설교노트 몇 권인데 물론 그것들이 별것도 아니고, 부흥회 다니는 곳마다 손수건이나 양말을 선물하기 때문에 흔한 것이긴 하지만 어린 자식들이 용돈을 쓰지 않고 정성을 보인다는 것이 기특해서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생일 차린다고 할 때는 송구스럽고 미안해서 기쁘기보다는 어디로 잠시 피했다가 오고 싶은 심정이지만, 자식들은 교육상 그게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큰 아이는 이제 대학에 들어갈 나이까지 되었는데 아빠 생일을 잊고 지내다니... 그래서 드디어 아이들 넷을 다 불러다 무릎을 꿇게 한 후에 '너희들 아빠한테 뭐 잘못한 것 없느냐?'라고 했더니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책 한 권씩 두 손으로 치켜들고 무릎 꿇고 앉아서 생각날 때까지 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5분도 못되어 한 아이가 '알았어요! 아빠. 생일 선물 안해 드려서 그렇지요?' 하길래 '그렇다. 이 녀석들아! 해마다 가져오더니 이 번에는 왜 꿩꿔 먹은 소식 이냐?'라고 했더니, 아빠가 부흥회를 계속 나가시기 때문에 의논만 하고 사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나가서들 사오라고 해서 손수건과 노트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나한테 타 쓰는 용돈이지만, 그 일부를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되돌려 줄 때 마음이 기쁘고 흐뭇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상으로 보너스 용돈이란 명목으로 또 주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주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 일부를 되돌려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 몫으로 주신 것이지만 어느 부분은 마땅히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섭섭해하시고, 나아가서는 괘씸하게 보시기까지 하시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 되돌려 드려야 할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1. 영광을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밧모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사도 요한이 영계에서 하늘 문이 열리며 펼쳐진 천성 세계를 들여다 본 장면이 나오는데, 먼저 하나님의 보좌가 보이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같고 홍보석 같고 녹보석 같은 무지개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횐옷 입은 24장로가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여기 24장로는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을 대표하는 분들입니다. 또 네 생물이 나오는데 이것은 일반 천사들과는 구별되는 스랍, 흑은 그룹 천사들로서 하나님을 근위 시종들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천사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웠고 둘로는 발을 가리웠고 둘로는 날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하면서 창화하고 있었습니다. 날개 둘로 얼굴을 가리웠다는 벗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고, 날개 둘로 발을 가리웠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며, 나머지 날개 둘로 날아다닌다는 것은 하나님께 신속히 순종하며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도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조심하고, 하나님 앞에 항상 겸손해야 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신속히 순종하고 봉사해야 될 것을 보여 줍니다.
특별히 이 네 생물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찬송했는데, 여기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이렇게 세번 창화하는 것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온전한 찬양을 드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네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세세토록 영원하신 하나님께 돌리는데, 24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자기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면서 이르기를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하고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즉 우리 성도들을 상징하는 24장로가 수고했다고 상급으로 받은 금면류관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면서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듯 24장로들이 수고의 대가로 하나님께 받은 금 면류관을 자기들이 쓰고 기뻐하지 않고 영광과 존귀와 능력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한다고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듯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때, 내가 잘나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즉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되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할렐루야!'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로서 모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3:5에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 뜻 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전 15:9,10에서는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고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벧전 4:11에 보면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에 영광과 찬양을 받을 때, 그것을 하나님께 되돌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는 그를 더욱 높여 주시고, 더 큰 영광을 주시고, 더 큰 축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큰 능력과 은사를 받았던 하나님의 종들 중에는 이 비결을 망각하고 교만하게 되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타락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영광의 면류관을 항상 하나님께 되돌려 보내는 신앙을 소유합시다.
2. 자유 의지를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는 놀라운 특권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결코 로보트처럼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기계와 같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고 반역할 수도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특권이라고 그것을 내 멋대로 쓰면 안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제 멋대로 하다가 범죄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인 예수님은 항상 자기의 뜻대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요 6:38에서도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실 때도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물러가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지만, 곧이어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고 자유 의지를 하나님께 맡겨 버렸습니다.
한 마디라도 내 뜻대로 하는 것은 실패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성공입니다.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하기가 지옥불을 보는것 만큼이나 무서워져야 신령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우리의 자유 의지를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처분대로 인도해 달라고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억지로 빼앗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원하여 되돌려 드려야 하나님이 맡아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나 기도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전에 내 뜻대로 하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 의지이지만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며 순간 순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3. 맡겨진 축복을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24장로가 자기 몫으로, 자기 것으로 받은 금면류관이지만 하나님께 다시 주고 다시 되돌려 드리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내 몫으로 맡겨진 어떤 소유라도 그것을 다 내 멋대로 쓰지 말고 반드시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해지고 부패해지고 타락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은 받지 못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쓰라고 준 돈이지만, 그것을 또다시 아빠한테 쓸 때는 써야 기특하고 예뻐서 더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다고 홀딱 내가 다 집어 먹어버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영국 신사가 크리스마스 전날 과자가게 앞을 지나노라니까 거지 같이 불쌍해 보이는 소년이 가게 유리창 안을 들여다 보면서 몹시 먹고 싶어해서, 이 신사는 소년을 데리고 들어가 먹고 싶은 과자를 한 봉지 사서 안겨 주었습니다. 어서 먹으라고 해 놓고 '그 과자 맛있니? 어디 나 하나 먹어볼까?'하고 손을 내밀으니까 안색이 변하면서 '싫어요 '하고 도망을 가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가 이렇게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맡겨주셨지만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보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보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더 큰 것을 주시려고 우리 마음을 시험해 보시느라고 좀 내 놓으라고 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아무리 많이 드린들 우리에게 손해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정적으로 되돌려 드리기를 원하시는 것으로는 일주일의 하루, 주님의 날을 구별해 바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을 인정하는 태도로 십일조를 온전히 구별해 바치라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십일조를 구별해 바치면 더욱 차고 넘치게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까지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우리 성도들 중에는 앞에서 언급한 그 과자 받아든 소년이 도망하듯이 하나님의 것을 떼어 먹는 사람들이 많고, 아니면 속임수 십일조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릴 것은 마땅히 되돌려 드려야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사실 우리의 시간도, 물질도, 일도, 권세도, 우리의 자식도, 우리의 생명도 다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대로 사용하면 영원한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 뜻대로 내 만족을 위해서 만 사용하면 그것들은 모두 허무하게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영광의 면류관도, 우리에게 주신 자유 의지도, 모든 축복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 멘-
성전의 기둥이 되려면...
(계 3:7-13)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 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
오늘 봉독해 드린 본문의 내용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가 있으면서 당시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향하여 칭찬과 책망을 한 말씀 가운데 빌라델비아 교회에 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를 비롯하여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이렇게 일곱 교회들에게 책망과 칭찬의 말을 하던 중에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만 책망함이 없이 칭찬과 축복을 해주었던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축복과 권면의 말씀을 하시던 중에 12절에 보면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의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두 기둥이 서 있었습니다. 이 두 기둥은 이름이 각각 있었는데 하나는 '야긴'이라고 하고 다른 한 기둥은 '보아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기둥의 이름은 다 뜻이 있습니다. '야긴'이라는 말은 <저가 세운다> 혹은 <견고하다>은 뜻이요, '보아스'라는 말은 <능력>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또 왜 이 기둥을 세웠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옛날에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을 향해 가면서 광야를 지날 때에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 기둥이 나타나서 저들을 인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보호의 상징이었으며 광야 여정 중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서 그것의 상징으로도 세웠던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한다는 말씀은 하늘 나라에서나 세상의 교회에서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요긴한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하나님의 교회에 기둥이 되고 정말로 중요한 위치에서 요긴한 인물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또 성전에 기둥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을 떠나지 아니하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하나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을 해 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기둥들이 되어 하나님의 일에 요긴하게 사용되고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큰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전의 기둥이 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튼튼한 기초 위에 서야 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만세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하여 세워진 신앙과 인격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물질이나 지식이나 명예에 기초를 둔 기둥은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은 무엇보다 그 믿음의 기초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을 교회의 기둥으로 세워 놓으면 무너지고 맙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천하의 만가지 재주가 있어도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혜사 성령으로 내 속에 내주하고 있고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으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튼튼한 신앙의 기초, 즉 그리스도 위에 세움받는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는 조건에 대해서 말씀 드렸는데 아무쪼록 우리 모든 성도들은 바른 기초 위에 곧고 견고하며 요동함이 없는 신앙을 굳게 지켜 교회에 반드시 필요한 기둥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곧아야 합니다
집을 짓는데 있어서 꾸불꾸불하게 비틀어진 나무는 재목으로 쓰지 못하듯이 하나님의 교회 기둥이 되기 위해서는 곧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가리켜 거룩하고 진실하신 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주님의 마음에 맞아 성전의 기둥이 될 만한 자도 역시 거룩하고 진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거룩하고 진실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욕심에 끌리고 세상 죄에 빠져서 의와 진리에서 어긋난 비뚤어진 삶을 산다면 그는 성전의 기둥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말하기를 '거짓이 많은 국민으로 망하지 않은 국민이 어디 있으며, 거짓이 많은데 부흥된 국민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모른다는 것은 별로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닌 동시에 또 해로운 것도 아니다. 무엇이나 다 안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다만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일을 아는척 하는 것, 이것이 두려워 해야 될 일이고, 해로운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진실을 가장한 거짓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언제나 진리에 입각한 바르고 의로운 삶과 정직과 진실을 지켜 나가시기 바랍니다. 시편 84:11에 보면 "여호와께서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래된 전래 동화 중 어느 나뭇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그만 도끼가 연못에 빠져 들어간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가난한 나뭇꾼이 연못가에 앉아서 울고 있노라니까 그 산의 신령이 나타나서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이 나뭇꾼은 사정을 다 이야기 했습니다. 그랬더니 신령이 연못 속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후에 금도끼를 가지고 나와 서는 주면서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뭇꾼은 자기 것이 아니라고 받지를 아니 했습니다. 이 신령은 또 다시 들어가더니 이번에는 은도끼 하나를 들고 나와서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뭇꾼은 그것도 자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 신령은 다시 들어가더니 이제는 무쇠로 만든 헌 도끼를 갖고 나와서 주었는데 그제서야 이 나뭇꾼은 좋아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산신령은 너무나 이 나뭇꾼이 정직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먼저 건져온 금도끼와 은도끼를 다 주고 사라졌다는 이야기 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대에는 진정으로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찾아 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도 이 정직과 진실을 잃고 사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성전에서 중요하게 쓰임받는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3. 견고해야 합니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에 기둥으로 쓰는 것은 곧기도 해야 하지만 또 견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세워진 기둥 가운데 '야긴'이라는 기둥은 그 의미가 견고하다는 뜻입니다. 밭에 심은 옥수수나 참대나무가 아무리 굵고 곧아도 기둥으로는 쓰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견고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욥 27:5 이하에 보면 "나는 단정코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8절 하반절에 보면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라고 했고 10절에도 보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26:3에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제가 북한에 있으면서 중학교에 다니다가 1.4후퇴 때에 남한에 내려 왔습니다만, 저희 중학교에는 처음에 예수 믿는 학생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공산당들이 악랄하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핍박을 가해오니까 그렇게 많던 사람들이다 예수를 버리고 끝까지 남은 사람은 세 사람 뿐이었습니다.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운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주일에 교회만 갔다오면 언제 벌써 알았는지 월요일에 학교에 가서는 매를 맞고 자아비판을 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남은 저와 친구 둘은 죽어도 예수 믿겠다고 했는데, 그후에 남한에 내려온 후 소식을 들으니 다른 친구들은 인민군으로 나가 죽고 공산당이 되어 죽었으나 우리 세 사람은 현재까지 살아서 한사람은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장로가 되었고 한 친구는 사업가가 되었고 부족한 이 사람도 주의 종이 되어 말씀을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을 지켜 나가려면 굳센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견고한 신앙의 사람이 하나님 성전의 기둥으로 쓰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 고난과 핍박이 와도 굳센 의지로 신앙을 지켜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마 10:22에 보면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렘 1:18,19에도 보면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땅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들은 이 나라에 이 교회에 쇠기둥처럼 견고한 기둥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요동함이 없어야 합니다
다른 것들은 움직여도 일단 세워진 기둥은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기둥은 제 마음대로 왔다갔다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한 신앙을 갖고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려면 움직임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도 보면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우리 앞에 이단사설이 나돌고 우리를 미혹케 하는 것이 많아도 움직이지 않는 신앙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아 멘-
놀랍고 놀라우신 예수님
(사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성도 여러분, 연일 계속되는 매서운 추위와 꽃도, 나뭇잎도 다 진 겨울의 황량한 풍경은 다소 우리의 마음과 생각들을 메마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 신선한 활력소가 될 만한 사건이나 만남 등을 찾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크고 놀라운 사건과 만남을 주셨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과 그분을 우리가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놀랍고 놀라우신 예수님 '에 관하여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775년 어느날 볼티모어에서 가장 큰 호텔에 허름한 농부 차림의 한 손님이 들어와 방을 달라고 하니까 지배인이 거절하고 내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 그분이 바로 미국의 부통령 토머스 제퍼슨(ThomasJefferson)임을 알고는 깜짝 놀란 지배인이 즉시 사람을 보내어 방을 드릴터이니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제퍼슨이 '나는 이미 방을 얻었습니다. 그의 뜻은 고마우나 더러운 미국의 농부에게 줄 방이 없다면, 미합중국의 부통령이 있을 방도 없는 것입니다'라고 일러주라고 하고 돌려 보냈다고 합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위대한 예수님은 한 작은 나라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볼품없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구세주임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에 대해 주전(B.C.) 700여년전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은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 3)라고 했습니다.
한편 사 9:6에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Wonderful Counselor) 전능하신 하나님이라(Mighty God) 영존하시는 아버지라(Everlasting Father) 평강의 왕이시라(Prince of Peace)"고 예언했습니다. 그 중 '기묘자'란 놀라운 분이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인간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우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들은 이 놀라우신 예수님을 잘 증거해야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교회가 살고, 지옥으로 떨어질 영혼을 더 많이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이에 오늘 우리는 실로 놀랍고 놀라우신 예수님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그렇듯 놀라운 예수님을 보다 확실히 증거하며 사는 계기를 삼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탄생이 놀랍습니다
구약 성경은 예수의 탄생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창 3:15에는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 사단의 권세를 깨뜨릴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인간의 씨로 잉태된 남자의 후손이지만 예수님만은 죄없는 인간으로 오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잉태될 것을 창세기에서 이미 예언하신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탄생 장소를 분명하게 예언했는데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이라고 했습니다(미 5:2).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께서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시리라고 했습니다(사 7:14). 그리고 700년 후에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성령으로 잉태될 것과 '예수'라는 메시야를 출산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요셉이 약혼자가 임신한 것을 알고 가만히 끊고자 할 때에 천사가 나타나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탄생 때에도 놀라운 일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상한 별빛을 하늘에 비추게 하고 그 이상한 별을 본 동방의 박사들은 그 별의 인도를 받아 예수께 찾아와 경배했고 또 허다한 천군과 천사들이 나타나 찬송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목자들도 이 광경을 보고 찾아와 경배했습니다. 동방박사는 높은 계급의 인간을 대표하고 목자들은 천민 계급의 사람을 대표합니다. 즉 예수님은 높고 낮음이 없이 모든 사람의 구세주가 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로 인해 어둠의 권세가 침범을 당했고 사단이 흥분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왕을 흥분시켜 두 살 아래의 모든 어린이를 죽이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진정 역사적이고 신비하며 우주적인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생애는 놀랍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존경하는 인물을 뽑아서 그분 가까이 지내면서 살펴보면 분명 허물과 단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는 어떤 결점이나 약점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본디오 빌라도 총독도 심문한 후에 판결내리기를 '이 의로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발사가 목사님의 머리를 깎아주면서 교인들의 약점을 들추며 그래서 교회에 안나간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이발사에게 묻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했더니 '그분은 아무 결점이나 흠이 없지요' 하더랍니다. 실로 예수님은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33년간 사시면서도 죄에 조금도 물들지 않았습니다. 사단이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마음에 비집고 들어가려고 강하게 두드려 보았으나 허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전 생애 동안 죄악된 것을 말하거나 행동하거나 생각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슬픔에 가득찬 자를 위로하시고 죽은 자까지도 살리시는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 세상에서 사셨으나 그 의로움과 능력과 권세에 있어서 인간을 초월한 신적 삶을 사셨던 예수님의 생애는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3. 예수님의 메시지는 놀랍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황금율이나 산상 설교나 4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말씀 부분만이 아닙니다. 성경전체가 그분의 메시지입니다. 신구약 1169장 전체의 중심은 바로 예수님 입니다. 어떤 사람도 이런 메시지를 세상에 남긴 일이 없습니다. 공자나 모하멧이나 석가도 오래 전에 메시지를 준 바 있고, 또 요셉 스미스(Joseph Smith)가 몰몬경에다 설교를 남겼고,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또 크리스찬 싸이언스에서는 메리 베이커 엘디(Mary Baker Eldy)가 위대한 메시지를 가지고 왔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 모든 메시지를 예수님의 것과 비교해 볼 때 두더지가 판 모래 한줌과 태산을 비교하는 것 같습니다.
큰 진리 한가지만 살펴본다면 롬 3:23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란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정죄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롬 5:8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우리로 십자가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합니다. 또한 완전한 용서의 피가 우리 위에 떨어짐을 발견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전의 세상과 지금 이 세상과 오고 오는 모든 세상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위로가 필요합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는 나의 피난처와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한 여자 성도가 몇달 동안 앓다가 목사님이 심방을 가니까 꿈꾼 사실을 간증하는데 자기가 아름다운 강가에 섰는데 강 건너편을 바라보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섰는데 아주 행복해 보였고, 빨리 강을 건너와 자기들과 함께 살자고 웃으며 손짓을 하더랍니다. 그 말을 하고나서 '사람들이 하늘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안다면 죽음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을텐데요' 하더랍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완전한 진리이며 영원한 소망의 메시지로서 진정 놀라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모두 놀라서 말하기를 '이 사람처럼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일이 없다'고 했고, 또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모두 놀랐다고 했는데, 헬라어로 '놀랐다(Austonished)'는 말은 '녹 아웃(Knock Out)'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영적으로 K.O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예나 지금이나 놀랍습니다.
4. 예수님의 사랑은 놀랍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 놀라워서 우리는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헤아려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요 3:16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길까요? 영원부터 영원까지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넓을 까요? 모든 족속과 방언과 세상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할 만큼 넓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을까요? 한 심령한 심령의 깊은 상처와 슬픔까지도 위로하시고 세밀히 치유하실만큼 깊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높을까요? 깊고 깊은 지옥에 떨어질 죄인을 지극히 높고 영광스러운 천국으로 올려 보낼 만큼 높습니다.
5. 예수님의 죽음은 놀랍습니다
갈보리 산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역사이래 이런 장면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죽기를 원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사단은 아마도 하나님의 계획을 뒤엎어 놓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성취시켜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태양은 세 시간 동안 빛을 잃고 캄캄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뒤덮인 죄악을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갈라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인간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오직 한 사람을 주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지진이 일어나 세상을 흔들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 나라들이 흔들릴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일어난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가 죽으시고 죽음을 맛보심으로 말미 암아 우리가 모든 죄를 씻음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만 믿고 의미하면 영원히 안전한 것입니다.
6. 예수님의 부활은 놀랍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계속해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며 동시에 그 죽음에서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죽은지 사흘만에 무덤을 깨치고 부활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을 때 그가 말씀한 모든 것이 진실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의 부활 때문에 우리도 어느날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어느날 공중재림 하실 때 믿음안에서 죽은 성도들은 공중에서 주를 만나게 될 것이고 살아남아 있던 성도들은 구름속으로 휴거되어 주님을 만나서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무덤에 묻혔다가 사망 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와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사 건입니다. 그의 부활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7. 예수님의 재림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도림하셨을 때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재림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의 큰 영광과 능력과 권세와 아름다움을 볼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모든 성도들에게 큰 축복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과 믿지 않던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슬픔과 절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실로 영원한 구세주인 동시에 심판주로 재림하실 예수님은 모든 만민에게 가장 큰 놀라움을 줄 것입니다.
여러해 전에 한 중국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서 부모님 모시고 잘 살아보려는 큰 꿈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가 몇 해 후에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를 믿지 않은 채 돌아가실 부모님을 생각하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돈은 못벌었지만 고심 끝에 중국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뵙고 엎드려 절하면서 '죄송합니다. 돈은 많이 가져오지 못했지만 돈보다 더 좋은 것을 가져왔습니다'라고 말한 후에 예수님의 죄사함, 영생, 천국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해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아! 돌아오기를 참 잘했다' 라며 기뻐했습니다. 그리고는 몇 일 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돌아 가시기 직전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구원에 대해서 다시 설명해 달라고 하더니다 듣고 나서 '정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느냐? 그가 그처럼 나를 사랑하셨다구?' 할 때 아들은 분명히 그렇다고 확신시켜 드렸습니다. 이에 늙은 아버지는 '나는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내 온 마음을 주님께 드립니다'하고 곧 주님의 품안에서 평안히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놀라운 구세주이십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의 탄생과 생애, 그의 메시지와 사랑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앞으로 있게 될 그의 재림 모두가 놀랍고 위대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분명 당신의 구주가 되셨습니까? 아직 믿지 못했다면 오늘이라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의 구주가 되십니다.
'주 예수여, 내가 믿습니다. 내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옵소서. 나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막 10:35-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중요시하면서 살고 계십니까?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어떤 직위를 얻고 존경받을 만한 일을 하고 위대한 일을 성취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것만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아마 올 한해도 그 중 어떤 것인가를 목표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계획하셨는지도 모르겠군요.
언젠가 고 한경직 목사님이 신문기자와 인터뷰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좋은 열매를 많이 맺으려고만 하는데 사실은 먼저 좋은 나무가 되려고 하면 열매는 저절로 맺게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결과만을 놓고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 박사 학위를 얻었느냐, 사업이 얼마나 번창했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진정 우리가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바로 알 때 보다 가치있고 바른 삶을 살 수 있기에, 여기에서는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문제를 놓고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몇 가지 교훈들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1. 무엇을 했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앞에서 소개드린 고 한경직 목사님의 말씀대로 먼저 좋은 나무가 되면 따라서 좋은 열매는 많이 맺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열매를 많이 따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자랑하려고만 애쓰지 먼저 좋은 나무가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하는 것보다 되는 것이 먼저이며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위대한 일을 많이 하려고만 하지 먼저 훌륭한 사람이 되려는 마음과 노력은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 무엇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먼저 되느냐에 중요성을 더 두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크고 위대한 일을 하고 의미있는 선행에 힘쓴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받지 못하면 그 모든 일들이 허사가 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도 인격과 사람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이 큰 책임을 맡거나 많은 것을 소유했을 때는 오히려 심각한 폐해를 가져옵니다.
우리들이 먼저 사용할 만하고 축복받을 그릇이 되면 하나님께서 보다 큰 일을 하게 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더 큰 관심과 중요성을 두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2. 얼마나 소유했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능력을 가졌느냐,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 얼마나 큰 권세를 잡았느냐를 중요시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이 소유한 것을 얼마나 가치있게 쓰느냐를 귀중히 보십니다. 그래서 누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버는 돈을 계산하시지 않고 쓰는 돈을 계산하신다'고 했습니다.
수십 억의 재산을 벌었어도 자기와 자기 가족만 위해 썼거나 술먹고 도박하고 방탕한 생활에 다 써버렸다면 차라리 엽전 두푼이라도 값있게 쓴 가난한 과부보다도 훨씬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작은 돈이지만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정성스럽게 바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가장 값있게 보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기만 위해 쌓아둘 줄 아는 어리석은 부자를 향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 21)고 했습니다.
수백 억의 재산을 가졌어도 자기만 위해 사는 사람보다 꽁보리 밥에 된장찌게만 먹으면서도 자신의 전부를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도우며 사는사람이 더 가치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능과, 물질과, 직업과, 권세를 소유하게 하신 것은 그것으로 우리 자신만 만족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 보다 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자는 것이므로 우리가 진정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우리의 소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입니다.
3.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생활이 더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섬김을 받는 것에 더 가치가 있는 줄 알지만 실상은 섬김을 받는 것보다 남을 섬기는 데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섬기다 못해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시려고까지 하시는데 세베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간청하기를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형제가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좌정승, 우정승 다 하겠다는 말입니다. 이 눈치를 안 다른 제자들은 이 야고보와 요한을 미워하면서 분이 가득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 10:45)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 예수님의 말씀을 한낱 지나가는 말이나 헛된 교훈으로만 아는 이들이 많습니다. 믿음이 깊을수록 더 겸손해지고 섬기는 자세가 되어야 하는데 교회에서 중한 직분을 맡으면 세도나 부리고 대접이나 받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 없습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왕이라도 섬김이 없이는 참으로 의롭게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높아도 낮은 자같이, 있어도 없는 자같이, 부자라도 가난한 자같이, 벼슬이 있어도 없는 자같이 겸손히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에서 세상에 권세있고 큰 사람들은 권세를 부리려고만 하지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3, 44)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높아지는 비결은 섬기는 것이며 참으로 으뜸이 되는 비결은 종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우리가 애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때가 되면 높여 주시고 섬김을 받게도 해주시고 존경을 받게도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가장 귀하게 따라야 하는 우리 성도들은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삶을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4. 육신보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신을 수박의 껍질에 비한다면 영혼은 수박의 알맹이 같고, 육신이 식물의 잎과 같다면 영혼은 식물의 뿌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육신보다 더 중요하고 영혼이 먼저 잘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고 했습니다.
육신의 건강이 먼저가 아니고, 사업이 잘되는 것이 먼저가 아니며 영혼이 먼저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더욱 가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면 육신도 평안하나 육신이 잘된다고 영혼도 잘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육신은 잠깐 있다가 늙고 시들고 썩어 없어지는 것이요 영혼은 지금부터 영원히 살아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도 잘되기를 원하시고 건강하기를 원하시지만 그보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을 더욱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영혼의 파멸을 막기 위해서 육신의 고통도 허락하시고 사업의 실패도 허락하십니다.
플로리다에 나울린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교회에는 아주 신앙이 돈독한 청년이 있었는데 교회학교 총무로 충성스럽게 일하는 교인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청년의 사업을 위해 자주 축복해 주었고, 축복 받은대로 그의 사업은 자꾸 번성하기 시작해서 십일조를 한 주일에 수백 만원까지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빠서 교회 일을 그만두어야 했고 또 다른 도시에 지점들을 내자 거기서 주말을 보내느라고 교회에 출석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그를 찾아가서 '죤, 나는 자네를 걱정하고 있네. 자네는 예배에 계속 불참했어. 자네는 하나님의 일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으며 온전한 십일조도 바치고 있지 않네'라고 충고하자 '목사님 한 주일에 몇 십 만원도 많은데 몇 백만원이나 십일조 하는데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가게들 때문에 교회에 출석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때 목사님은 '죤, 우리 기도드립시다' 하고 둘이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주께서 이 형제에게 지나친 번영을 주셔서 지나치게 성공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이 형제는 당신께 너무 많은 십일조를 드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그를 위하사 그의 상점 몇 개는 불태워 주옵시고, 상점 몇 개는 실패하여 문을 닫게 하여 주옵소서. 이 형제로 하여금 그렇게도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해 충성되게 일했던 옛날의 사람으로 되돌아오도록 그의 사업의 얼마를 빼앗아 주옵소서.'
기도를 마치자 죤은 떨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이곳에서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그는 죄를 완전히 고백했고 목사님도 함께 그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그 전과 같이 충실한 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육신보다 영혼이 잘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로 영혼이 잘 되기 위해 힘쓰고 애쓰는 것이 육신을 위한 것보다 더욱 많고 열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아 항상 보다 가치있는 삶을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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