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부활절

"사순절 설교 21편"

공 상희 2011. 3. 14. 14:26

호산나를 부를 수 있는 사람

 

마21:1-9

 

성문교회 /문성준목사

 

 

[예화] 어떤 소년이 학교에 지각을 했습니다. 평소에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던

 

학생이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소년에게 지각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소년은 학교에 오는 도중

 

어떤 분이 동전을 떨어뜨려 그걸 찾는 것을 기다리다가 늦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선생

 

님은 물론 동전을 같이 찾아드리는 일도 좋지만, 학교에 오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미

 

안하다고 말하고 지각하지 않게 와야 한다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럴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의아해진 선생님이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자기가 그 동전을 밟고 서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찾기를 포기할 때까지는 올 수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우리들의 현실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 같아서 답답합니

 

다.

 

먼저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세계 인구가 61억이랍니다. 그 중에 기독교 인구가 약 19억을 상

 

회한답니다. 가히 30%에 육박합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 나가도 3명이 지나가면 1

 

명이 기독교 신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 주변에서도 보면 전보다 근래에 와서 교인의

 

수가 많이 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툭'하면 어느 교회 출석하고, 만나보면 집사․장로라고

 

합니다. 거기다가 우리의 현실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목사 또한 많습니다. 심지어는 미국의

 

신학교들이 한국 목사님들 덕분에 경영 수지를 맞춰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랍니다.

 

요즈음 카나다와 미국 서부 지역에는 교회를 맡지 않은 한국 무임 목사님이 2,500여명 정도

 

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런 말합니까? 세계와 함께 우리나라에 신자

 

가 많고, 직분자가 많고, 목사가 많은 것은 은혜스럽고도 고무적인 일이지 뭐가 잘못입니까?

 

아니요. 잘못 된 것은 없습니다. 신자가 많다는 것이 뭐가 나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홍수가 나면 온 사방

 

이 물입니다. 앞에도 물이고 뒤에도 물입니다. 그야말로 물난리가 납니다. 그런데도 홍수가

 

나서 동서사방이 물 천지가 되면 마실 수 있는 물은 없어집니다.

 

요즈음은 신자라고 믿고 기대하면 큰 코 다치는 수가 있습니다. 집사․장로라고, 목사라고

 

믿었다가는 낭패 보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넘쳐는 나는데 마실 물은 없기 때문입니다. 실

 

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下)"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대로입니

 

다. 신자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다운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도우려고 기다리

 

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애써 찾을 때, 그가 지칠 때까지 밟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

 

상이나 신자나 모두 말입니다.

 

- 1 -

 

[본문] 오늘 본문에서도 여기저기에서 '호산나' 라고 떠드는 소리가 넘쳐납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의 히브리어 '호시아 나'를 음역한 것으로 본래 구원에 대한 '

 

간구', '기원'을 포함하여 찬양이나 기쁨의 환호를 말합니다.

 

여기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마치 시골 초등학교의 가장 행렬 비슷한 초라한 모습

 

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호산나' 라고 부르는 구호의 홍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종

 

려가지와 자신의 겉옷까지도 길에 펴며 '호산나'를 외쳤던 저들의 다수가 예수의 십자가 처

 

형을 찬성하는 소리로 바뀐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패한 유대교적 전통과 세대를 거듭한 사

 

회적인 병리현상에 깊이 젖은 모든 사람들의 심리 속에 자리 잡은 고질적인 사고는 예수 그

 

리스도조차 그 틀에 집어넣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인 구세주로서 '호산나'를 부르

 

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저들은 건강한 신앙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저들은 건강한 예배자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병적인 사회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저들 또한 병적인 사고의 신앙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환호 속에는 진정한 인생의 주인을 만난 기쁨과, 진리와 의로 자신

 

들을 다스려 주실 왕에 대한 예의의 희열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를 통하여

 

자신들이 지금까지 민족적으로 바래왔던 그 어떤 것들을 얻고 싶은 욕망으로 충전되어 있었

 

습니다. 그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예수가 나서서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그 엄청난 능력으

 

로 어떤 일을 해도 상관이 없는 저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게 선택되었다고 믿는

 

자신들이 편하게 살기 위해서는 그 어떤 부적절한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는 메시아가 오셔야 한다는 편견과 신념을 만족시켜주기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를 바라보며 '호산나'를 부르고 있으나 실인즉 저들에게 필요한, 자신들이

 

요구하는 그 편견과 신념을 만족시킬 우상을 만들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기억하십니까? 그 첫 계명이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사 44:6)." 여기 이사야서를 비롯한 성경 여러 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신 사상을 천명하

 

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우상

 

을 다른 이방 종교의 신상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이들은 남의 불상을 훼

 

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우상이 이방 종교의 신상을 가리키

 

는 것이라면, - 2 -

 

그것은 하나님의 이율배반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유일신 되심을 천명하신 하나님께

 

서 다른 신상을 운운하시는 것은 그들의 신 자체를 인정하시는 자기모순일 수밖에 없기 때

 

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계명을 통하여 우상을 만들지 날라고 하신 진의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해답은 출애굽기가 직접 제시합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

 

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출 20:23)"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신상은

 

절대로 다른 종교의 신상이 아니라, 하늘이나 땅에 있는 모습들로 하나님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만드는 그 어떤 틀 속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라

 

는 뜻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세상의 유한한 것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을 표시할 수 있겠습니

 

까?

 

신약의 그 유명한 바울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사울이었을 때에 그 누구보다도 하

 

나님을 향해 열심이었지만, 그리고 자기 손으로 하나님의 신상을 만든 적은 없었지만, 그가

 

믿었던 유대교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편견과 신념이 만들어 낸 하나님의

 

신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좌충우돌하고 다녔지만 오늘 '호산나'를 부르는

 

사람들처럼 우상 숭배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도대체 예수를 향해 참으로 '호산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왕(王)으로 모시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니, 신자치

 

고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분을 항상 주로, 왕으로 고백하지 않

 

습니까? 그러나 그 의미를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자신의 편견과 신념으로 하나님의 신상

 

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초청되어질 뻔했다가 주위의 반대와 당국의 초청 불허 방침으로 내한하지 못

 

했던 티벳 불교의 고승 딜라이 라마에 대하여 작년에 미국 CNN방송이 달라이 라마와 티벳

 

불교에 관한 특집을 방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달라이 라마가 티벳 불교의 특징을 설명

 

하면서 첫마디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대 외부에 창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주가 있

 

다면 그대의 내적 마음이다." 오늘날 서구인들은 그것 때문에 그의 설법에 심취합니다. 그들

 

은 과학의 진보와 물질문명의 발달로 자신들이 이미 신의 자리에 앉기를 원하기에 더 이상

 

청교도적인 신앙과 외부의 창조주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라파는 교회마다 텅텅

 

비고, 미주는 '호산나'를 부르나 사회악이 범람할 대로 범람한 겁니다. 저들은 이미 신이 되

 

어 있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는 달라이 라마야말로 오늘날의

 

자신들의 그리스도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달라이 라마 - 3 -

 

는 위대한 종교인일지는 모르지만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가 세상에 창조주가 계시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가 비록 장삼 하나만 걸치고 한 평생을 살며 인

 

생을 연구해왔지만 결국 그는 진정한 주인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언제나 자신

 

이 자신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자에겐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계시하시지 않기 때문에 발견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헛소리하지요. 방자해지지요. 인생 그 자신이 창조주라

 

고... 그 자신이 우상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로마 카톨릭 교황이 교황으로 등극할 때 쓰는 모자에 박혀 있는 모든 보

 

석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요한 바오로 2세가 취임하던 그 때의 가격으로 우리 돈 65억 원이

 

랍니다. 교황이 타는 승용차는 독일 벤츠 사가 특별 제작한 자동차입니다, 보통 자동차는 타

 

려고 하면 낮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도 일단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벤츠는 교황

 

이 앞에 서면 자동차의 천장이 열리고 그대로 서서 자동차를 타면 곧 저절로 닫힙니다. 그

 

자동차에는 교황의 문양이 새겨져 있답니다. 그 왕관을 쓰고 그 왕의 옷을 입고서, 그가 진

 

정 예수를 주로 섬기며, 왕으로 모시며, 그분을 향해 '호산나' 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하겠습

 

니까?

 

혹시 여러분들 중에 그건 딜라이 라마이야기이고, 교황의 문제인데 왜 우리에게 따지냐고

 

물으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예수를 주로 부르는 우리를 보십시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참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누가 여러분을 오늘 이리로 부르셨습니

 

까? 당연히 그분을 주로 고백하니까 그분이 주인이시라구요? 그러나 우리보다 훨씬 먼저

 

그분을 알고 우리에게 그 신앙을 전해주었던 서구 사람들은 그걸 몰라서 오늘날 딜라이 라

 

마의 헛소리에 빠지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 있지는 않으십니까?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편견과 신념의 틀에 예수님을 가두어 두고 그분을 향해 '호산나

 

' 라고 외치는 것은 아니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건 절대로 잘못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

 

내리라(3절)."

 

무엇이든 그분이 주인이십니다. 그분이 쓰시겠다면 무엇이든 내 놓습니다. 그것도 즉시 말입

 

니다. 그건 왕의 명령입니다. 내 인생의 절대 가치가 그분입니다. 거기엔 이유를 물을 필요

 

도, 사람의 편견도, 자신의 그 어떤 신념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내 인생의 주인이신 그분의

 

말씀만 있을 뿐입니다. 나는 거기에 따를 뿐입니다. 비록 그분이 겸손히 나귀새끼를 타고 이

 

해 안 되는 입성을 하셔도, 그리고 나에게 따르라 하셔도 나는 이유를 달지 아니하고 거기

 

에 승리가 있는 줄 믿을 것입니다.

 

- 4 -

 

한때 왁자지껄 하는 형식으로 겉옷을 펴며, 요란스레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펴며, 그렇게 그

 

분을 왕으로 모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는 그 많은 재물과 시간을 낭비하면서도 그분

 

을 위해 아주 작은 것을 드리고는 마치 할 일을 다 한 것 같은 모습의 외식하는 신앙으로는

 

그분을 향해 '호산나' 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나 더 해드리고 오늘 말

 

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나라 국악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황병기 선생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1989년도에 정부가 에밀레 종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해를 마지막으로 타종을 금지키

 

로 했기에 그 마지막 타종을 듣기 위하여 경주로 내려갔습니다. 마침 타종을 위해 종각 위

 

로 올라 선 박물관장이 군중들 제일 앞에 서 있는 이 황 선생을 발견하고는 같이 타종을 하

 

자고 요청했습니다. 영광스럽게 생각한 황 선생은 함께 긴 통나무를 잡고 타종을 했습니다.

 

첫 번째 타종을 했습니다. 세계에서 여운이 제일 긴 에밀레 종을 그 여운이 끝난 다음에 다

 

시 치는데 황 선생은 세 번을 치고는 내려와 버렸답니다.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마당에 운

 

집한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호성 때문에 막상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

 

분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맞은 편에 있는 반월성 언덕으로 올라가십시오. 그러면

 

들립니다.' 반신반의하며 올라간 황 선생은 놀랐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인간의 함성소리를

 

뚫고 신비스러운 종소리가 자기의 귀를 울리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우리들 속에서 끓어오르는 온갖 욕망의

 

소리들을 하나님 앞에다 쏟아놓으며 떠들썩하는 정도에 머문다면, 그 순간에는 우리가 아무

 

리 '호산나'를 외치며 겉옷을 내고 나뭇가지를 길에 까는 척봉사를 해도 그것은 진정한 섬

 

김도 아니요, 오로지 자신의 자아만족에 불과할 것이며, 아마 그 순간엔 진리이신 주님의 음

 

성을 제대로 들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인 맞습니까?

 

그분이 여러분의 왕이십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은 신앙적인 편견과 신념의 틀에 그분을 가두

 

지 않았습니까? 이제라도 우리가 묵묵히 욕망의 소리를 내려놓고, 조용히 내 인생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가치를 두며, 무엇을 하던 그분을 왕으로 섬기는 우선순위를

 

둘 수만 있다면 우리는 승리의 입성을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진정으로 '호산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될 것이며, 주님께서는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

 

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

 

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 25)."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

 

사53:1-12

 

덕산교회/이성권 목사

 

 

오늘은 고난 주일입이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번 주간에 우리 주님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하신 고난의 절

 

정기를 맞으신다. 최후의 만찬, 가룟 유다의 배신, 겟세마네의 기도, 제자들의 도망,

 

베드로의 부인, 십자가에 죽으심과 장사되심으로 이어지는 고난의 한 주간이다.

 

마태복음 26: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시던 우리 주님의 이 기도에서 고난의 절정

 

기를 맞은 주님의 고통을 읽을 수 있다. 실상은 내가 당해야 할 고통인데, 주님이 대

 

신 당하시건만 우리는 이 고통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고, 또 곧잘

 

잊어버리기도 한다.

 

어느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선교하기 위해 배를 타려고 항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노예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흑인 모자가 경매에 붙여졌는데, 어린아이는 필

 

요 없고, 어머니만 사겠다는 사람이 나서서 어머니만 팔리게 되어 두 모자는 헤어지게

 

되었다. 두 사람 몫의 일을 하겠으니 어린 아들을 함께 데려가 달라고 새 주인에게 호

 

소했으나, 두 모자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두 모자를 강제로

 

떼려하나 말을 듣지 않자, 주인이 칼을 들어 어린아이를 향해 내리 찔렀다. 그때 선교

 

사님이 자신의 손으로 그 칼을 막아 아이의 생명을 구했다.

 

그 선교사님이 후한 값에 두 모자를 샀다. 그리고 자유롭게 살라고 했다.

 

그러나, 흑인 모자는 이곳에서는 언제 또다시 잡혀 노예가 될지 모르니 선교사님을 따

 

라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 선교사님께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들은 함께

 

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선교사역을 감당했다고 한다.

 

아들의 생명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자유를 주신 선교사님....

 

그 은혜 백골난망(白骨難忘)이라 흑인 모자는 선교사님의 손발이 되어 아프리카의 선

 

교사역에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그 흑인도 인간인지라 때로는 화도 내고,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을 때도 있었다. 그때 선교사님은 아무 말씀도 않고, 손을 내밀어 아이

 

를 살리려 대신 칼을 맞았던 그 손의 흉터를 보여주면.... 그 흑인은 잘못했노라고 용

 

서를 빌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

 

우리 주님 예수께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 흑인 노예를 구한 선교사님처럼

 

주님이 가진 돈으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우

 

리를 사신 것입니다. 주님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심으로 우리의 생명을 사

 

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

 

갈보리 산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서 두 손과 두 발에 못을 박히신 주님, 그 주님의

 

못자국 난 손을 바라보세요. 흑인 노예처럼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우리 성도들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소리칠 수밖

 

에 없는 세리와 같은 나입니다(눅18:13).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

 

그 주님이 가시는 고난의 길을 너무도 생생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600여년 전에

 

일러주신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의 모습을 살펴보며 날 대속(代贖)하신 주님의 은혜에 젖어보고자 합니다.

 

 

1.그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본문 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고난의 주, 수난의 메시아,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의 초라한 모습을 말해주고 있

 

다. 연한 순 같이 나약한 모습이요, 메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충실하지 못하여

 

무력한 모습이요,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어 그의 외모에서는 위인다운 큰 사람의 모습

 

이 없다는 말씀이다.

 

바로 인간적인 매력이 없다는 말씀이다.

 

온 유대 백성들이 고대하는 메시아상으로는 영 아닌 모습이다. 적어도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고, 해방의 기쁨을 주고, 메시아 왕국의 평화를 가져

 

다 줄 인물로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참으로 흠모할 만한 인물이 아니란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

 

그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

 

의 어린 양으로(요1:29) 고난의 주님은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온 유대 백성들이 고

 

대하던 메시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참으로 무언가 해 낼만한 걸출

 

한 모습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그는 유대인에게 소망을 줄 수 없

 

는 나사렛 사람이었습니다(요1:46). 적어도 유대인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는 "베들

 

레헴 사람"이어야 하는데.... 실로 그는 "베들레헴 사람"이건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그에게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삼상 11:24절/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이스라엘의 최초 왕으로 추대된 사울의 모습입니다. 모든 백성 중에서 짝할 이가 없는

 

걸출한 모습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

 

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고 했습니다(삼상9:2). 이런 사울을 향해.... 유대

 

의 모든 백성들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불렀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를 향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로 대표할 수 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택하실 때.... 사람을 외

 

모로 취하지 아니 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현실이기도 합니

 

다. 「나는 예수보다 더 훌륭한 석가를 믿고 있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일깨우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

 

우리 주님은 나의 죄뿐만 아니라 이들의 죄도 담당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

 

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하시던 주님(눅23:34).... 이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저들에게 전하고 일깨워야 합니다.

 

 

2.그는 사람에게 멸시를 받았다.

 

 

본문 3절/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

 

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고난의 주, 수난의 메시아,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 그에게는 흠모할 만한 아

 

름다운 것이 없어서 "만세!"를 외쳐 부르며 사울을 왕으로 맞이하던 모습과는 달리 유

 

대의 백성들이 그를 멸시했다.

 

그 멸시의 최절정이 십자가의 처형이다.

 

십자가의 처형은 그 당시에 가장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죄인에게 내리는 극형이다. 그

 

래서, 성경에서도 십자가에 달린 자를 저주받은 자라고 했다(갈3:13). 물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나무에 달리셨지만, 빌라도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지 않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협박하여(요19:12)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

 

한마디로 그는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메시아라는 그를 오히려 더 멸시했

 

습니다(눅23:35). 십자가에 매달고 그를 조롱했습니다(막15:31). 「이 사람이 마리아

 

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

 

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그러하거늘,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느냐"

 

하고 예수를 배척하였습니다(막6:3).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면 지금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주님을 향해 침을 뱉으며 조롱했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

 

십자가에 달리시어 멸시를, 천대를, 조롱을 당하신 주님....

 

그는 실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거늘,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3년간 함께 하며 주님의 사랑을 남달리 받았던 제자들.... 가룟 유다는 스

 

승을 팔아먹었습니다. 수제자라 자랑하던 베드로는 스승을 욕하고, 저주하며 모른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그 밤에 모두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

 

그는 십자가에 달리시어 멸시를, 천대를, 조롱을 당했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향해

 

침을 뱉는 자나, 스승을 팔아먹는 자나, 스승을 욕하고 저주하며 모른다고 하는 자나,

 

"죽기까지 따르오리라" 약속하고서도 나 몰라라 도망친 자들이나.... 무엇이 다를까요

 

? 아니 나는 그들과 무엇이 다른가요? 스스로를 한번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3.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셨다.

 

 

본문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

 

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는 실로.... 지금까지의 고난의 주, 수난의 메시아,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의

 

초라한 모습과 멸시 천대는 그의 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실로.... 그의 진

 

정한 모습은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셨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다는 것이다. 그

 

는 실로.... 그의 겉모습만 보았지, 그의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여기의 "질고(疾苦)"는.... [호리(ylij?)]란 단어로 "질병, 근심, 재난"을 뜻한다. 그

 

리고 "슬픔"은.... [마크오-브(baok]m')]란 단어로 "슬픔, 고통, 괴로움"을 뜻한다.

 

곧 질고로 인한 괴로움을 대신 우리 주님이 당하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질고와 슬픔"....

 

그것은 죄로 인한 것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롬6:23). 이 사망이 죄인에게 이루어지

 

는 과정이 "질고와 슬픔"이다. 다시 말하자면, "질고와 슬픔"은.... 죽음을 향해 달려

 

가는 과정인 것이다. 곧 죽음을 대표하는 말이라 하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

 

그의 모습이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 주님의 참 모습이 아닙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대

 

신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참 모습입니다. 이 참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알

 

지 못하기에....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는 실로...." 하시면서, 그의 실상을 알려주

 

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고 했습니다.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고 있다".... 그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

 

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 유대인들뿐만 아닙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오늘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롬5:8). 그러나, 실상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

 

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

 

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본문5절)」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

 

셨습니다(본문6절). 이것이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확증이라고 했습니다

 

(롬5:8).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지 못하는 자는 말합니다.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았다"고 합니다. 이들을 일깨워야 할 사명이 우리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고 일깨워 주어야 합

 

니다.

 

그는 실로....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습니다(요1:29).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

 

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본문6절). 여호와께서 그로 질고를 당하게 하셨습

 

니다(본문10절). 그래서, 그는 실로.... 우리 무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본

 

문11절). 그는 실로.... 많은 사람의 죄를 지셨습니다(본문12절). 그 주님이 지신 죄

 

속에 "내 죄"도 포함되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롬5: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

 

그는 실로.... 우리 무리의 죄악을 지고, 곤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실로....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습니다(본문 7절). 실제로 우리 주님은 대제사장들과 장

 

로들의 고소에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마27:14).

 

히브리서 4: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를 가리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자"라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

 

해서 우리와 한가지로 질고를 지고 곤욕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주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

 

그는 실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

 

께서 그에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키셨습니다.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의 확정으로

 

하나님은 그를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를 먼저 사랑하신 사랑입니다(요일4: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

 

그로 인해 여호와의 뜻이 성취되어졌습니다(본문10절). 우리 무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

 

하시고(본문11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

 

루셨습니다(히9:12). 이것이 바로 대속의 은총이요, 우리 주님이 당하신 고난이었습니

 

다. 그 주님의 고난을 되새겨 보는 고난 주일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

 

흑인 노예는 아무리 화가 나고, 불평스러워도.... 선교사님이 보여주는 손의 흉터를

 

보고,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고 했습니다. 어린 아들의 생명을

 

구해주고, 자유를 준 그 은혜를 다시금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 주님은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대속의 길을 가셨습

 

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그 대속의 은총을 압니다. 그는 실로....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

 

자를 위하여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압니다(본문12절). 아니 나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 대속의 은총에 힘입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압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

 

그 사랑에 감격하여 늘 찬송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 사랑에 감격하여 늘 다짐합니다.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의 발자취를 따르리라, 해처럼 밝게 살

 

면서 주의 이름을 전파하리라,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의 사랑을 나누리라....

 

이런 다짐이....

 

오늘 고난 주일을 맞아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 길....

 

골고다의 거친 언덕 길, 지치신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짐하는 우리 모두의 다짐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막 15:20~27

 

관악교회/최낙중목사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

 

니라.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

 

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

 

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십

 

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쌔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그 위에 있는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막 15:20~27>

 

 

저는 작년 여름에 중고등학생, 그리고 대학생 50여명과 함께 이스라엘 나라를 갔습니다.

 

성서고고학 협회에서 청소년 유대광야캠프를 실시하는데 저를 주강사로 초청했기 때문에 함

 

께 가서, 비아 돌로로사, 즉 그 말은 슬픔의 길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그 길에 가서 먼저 저는 청소년들을 앞에 놓고 십자가의 의미에 대

 

해서 설교한 후 학생들 여러명에게 번갈아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올라가도록 했습니다.

 

그때에 찬송을 함께 불렀는데,

 

왠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왠일인가. 왠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주 십자가 못 박힐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이 찬송을 부르는데 학생들이 흐느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앞선 학생 뒤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서 간증을 하는데 어느 한 대학생이 나와서 펑펑 울면서 이렇게 말했

 

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20m밖에 걷지 못했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

 

이야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십자가를 마땅히 져야 하지만 죄없는 예수님이 이 십자가 지신

 

것을 생각하니까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한 것을 돌이켜보니 너무 잘못했구나, 죄없는 예수

 

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내 죄를 없애 주기 위한 대속의 십자가였다는 생각을 하니까 너

 

무 마음이 아팠다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눈물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누가 울면 함께 울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갈보리산 언덕

 

에 올라가서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면서 50여명이 서로 껴안고 울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는 이미 십자가 지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기도하셨고, 온

 

밤을 지새워 가야바의 법정, 빌라도의 법정, 헤롯왕의 법정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심문

 

을 당하시고, 그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은 흔적에서 피가 나고, 그런 몸으

 

로 180근이 넘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너무 힘들어 쓰러지셨고, 그때마다 로마 병정이

 

내려치는 채찍에 맞아 다시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중에서 18번이나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힘이 없어 십자가 지지 못하기에 저 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온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으나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서는 주님이 그 십자가를 다시 지셨

 

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이 오후 3시에 운명하시기까지 6시간동안 피흘리시

 

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원래 십자가라는 것은 페니키아라고 하는 나라에서 흉악무도한 죄인

 

을 처형시키는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좌우편에 두 살인강

 

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던 것은 그들이 지은 죄때문에 형벌로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그

 

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죄가 있기에 흉악무도한 살인강도나 반역자들에게만 지게 했던 십자

 

가 형틀을 주님에게 지워서 죽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죄인된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랑의 확증이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태어

 

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었으니 이것을 유전죄, 원죄라고 말합니다. 이 죄의 결과로

 

사망이 왔으니 사망이라는 말은 죽었다, 끝났다는 의미에 앞서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영역을 정해주었습니다.

 

한 예를 들면 고기는 물 속에서만 살라, 그렇게 고기의 삶의 영역을 물로 한정시켜 주었는

 

데 고기가 물이 싫다고 물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그것을 분리된 상태라고 말하고 결과를 사

 

망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의 영역을 하나님 말씀으로 정해 주었습니다.

 

그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면 인간에게 죽음이 온다,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했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선악과를 범하므로 인간에게는 사망이 왔습니다. 이 사망은 하나님과 분리

 

된 상태, 즉 영적인 죽음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스럽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

 

인의 모습을 시 107:10절에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

 

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죄로 타락한 인간은 사망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

 

지, 왜 사는 것인지, 한 세상 살고 난 이후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여 흑암, 캄캄한 밤에

 

방향을 잃어버린 나그네처럼 그런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지

 

음 받은 인생들이 이렇게 사망길에서 허덕이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기로 작정하셨

 

습니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

 

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마을에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얼굴에 흉터가 너무

 

많아서 동네 아이들이 그 어머니를 문둥이라고 놀려댔고, 그 아이는 문둥이 아들이라고 비

 

방을 했습니다. 그 아이는 집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했고, 학교에서도 놀림 당하다 보니

 

학교 가기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학교 안가겠다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왜 그

 

러느냐고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나보고 문둥이 아들이래 하고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때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얼굴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네가 두 살 때 일이었다. 나는 밭에서 일하고 있었고, 넌 방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

 

자기 집에 불이 났단다. 내가 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너는 불 속에 갇혀있었단다. 그러나 난

 

네가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갔지. 담요로 너를 감싸고 뛰어나왔는

 

데 너는 담요에 감싸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나는 불에 휩싸이는 바람에 얼굴을

 

너무 많이 데여 오늘날 이렇게 되었단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아이는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자기 어머니의 얼굴이 문둥이처럼 돼버린

 

것은 바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후 그는 어머니의 얼굴이 그

 

렇게 된 것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다시 가게 되었고 동네 아이

 

들에게 이 세상에 우리 어머니처럼 멋있는 어머니가 없다고 자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젊은이가 예리한 칼을 들고 동네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는 5분이내

 

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소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칼로

 

하늘을 향해 내지르면서 하나님이 만약 있다면 5분내로 이 칼을 가지고 나를 죽여 보시오

 

당신께 도전하는 이 나쁜놈을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분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5분을 세기 시작합니다. 5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무런 일도 나타나지 않았습니

 

다. 그는 큰 소리로 선언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라고 외쳤습니다. 나 같이

 

악한 사람을 벌할 수 없다면 그는 신이 아니요, 또 악한 사람을 심판할 줄도 모르는 신이라

 

면 혹시 있다 할지라도 무슨 유익이 있겠냐고 외쳐댑니다. 그러자 교회를 잘 다니는 어느

 

할머니 한 분이 그 젊은이 앞에 나가서 그 칼을 뺏어 들고 그 젊은이에게 아이가 있냐고 물

 

었습니다.

 

그러자 귀여운 아들이 하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렇다면 당신은 그 귀여운 아들이 이런 칼을 들고 와서 아버지, 이 칼로

 

나를 5분내로 죽여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젊은이는, 그런 소리가 어디 있느냐,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때에 할머니가 젊은이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요. 하나님은 어떤 죄인,

 

악한 사람이라도 벌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같은 악한 사람이

 

라도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참고 계시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는 독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죄인을 심판하러 보내신 것

 

이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보내주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

 

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했고, 회개하라. 천국

 

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콩쥐, 팥쥐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또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들으

 

면서 자랐습니다. 이야기의 내용과 교훈에는 선하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나쁜 사람

 

은 벌을 주신다는 권선징악의 의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한 자라도 벌하기

 

를 원치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다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줄 믿습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롭지 못하고 선하지 못하며 경건하지도 않다 할지라도

 

그를 벌하지 않고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면 그것이 조건을

 

초월하는 사랑인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 4:5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착한 일을 하거나 경건한 삶을 살지 않았다 할지라도 믿는 자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었으니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피 공로를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니 이것은 인간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이며 값없이 주시는

 

주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큰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때, 아들이 저희가 살고 있던 아파트 마당에서 친구하고 장

 

난치다가 그만 아파트 현관문을 깨버렸습니다. 수위 아저씨가 화가 나서 달려오니까 얘가

 

겁에 질려 도망와서 내 뒤에 숨었습니다. 막 떨면서 큰일났다고, 유리를 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뒤쫓아온 수위 아저씨가 당신 아들이 유리 깼으니 빨리 유리 값 물어내라고 성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15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제 아들에게 네가

 

깼잖아? 네가 물어줘 했더니, 아빠 나 돈 없어 하고 울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아들은 15만원이 없었습니다. 단돈 15원도 없었습니다. 돈 없으면 경찰서에 가서

 

며칠 살다가 와. 그러자 아니야, 싫어. 나 무서워, 하며 막 울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15만원

 

을 수위 아저씨에게 주며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3시간 후에 가서 보니까 깨진 유리는 깨끗이 치워지고 아파트 현관에는 새유리가 끼워져 있

 

었습니다. 유리가 박살나 있을 때는 우리 아들이 수위 아저씨를 보면 구석으로 도망다녔습

 

니다. 그런데 새유리가 끼워지자 어깨를 쭉 펴고 목에 힘을 주고, 수위 아저씨를 봐도 하나

 

도 겁내지 않고 떳떳하게 그 길을 걸어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아이가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자기 공로는 1원도 없었습니다.

 

15만원 내가 다 물어주었습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지 자기 행위

 

는 0.01%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고 어린양 예수의 피로 된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으니 이것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과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된 것이니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그 주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될 줄

 

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비밀,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에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켜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두번째 십자가의 의미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화목을 위한 화목제물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난 이후부터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는 죄악의 담이 있

 

었습니다. 불러도 대답할 수 없었고, 하나님이 올 수도 인간이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다 이루었다고 외치실 때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가로놓여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내렸습니다. 이것은 누구든

 

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하

 

나님과 원수된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평생

 

자랑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욥기서 22:21절 말씀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

 

게 임하리라고 했으니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 우리 죄를 없애버리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마 16:24절 말씀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도 십자가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따르는 방법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이겠습니까?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죽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수치와 고난을 감수하라

 

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병고침 받고 복 받았고, 아들 딸 잘

 

되고 그런 간증은 많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은혜주신 목적이 그런 것 자랑하라고 준 것

 

이 아니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하고 방황하는 인생들을 바른 길

 

로 인도하기 위해서 은혜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런 십자가를 일컬어 사명의 십자가

 

라고 말합니다.

 

사명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는 에스더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에 유태인으로서 한 관리였던 모르드개라는 사람이 있고, 유태인 여인으로서 아하

 

수에로왕의 부인, 왕후 에스더가 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가 세계를 제패하여 모두 127도나

 

되는 큰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데 그때 국무총리의 이름이 하만입니다. 그런데 이 하만이 교

 

만합니다. 또 그렇게 교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왕이 그를 신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

 

서 하만이 길을 지나가면 누구든지 다 엎드려 절을 하는데 유태인 모르드개는 절하지 않습

 

니다.

 

자기에게 굽신거리지 않고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 때문에 화가 나서 신분을 조사해보니 유대

 

인이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되 그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을 죽여야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래서 언제 죽일까 하고 제비를 뽑았는데 그 날이 12월13일이었습니다. 그 날 모

 

든 유대인들을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려는 엄청난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 안타까운 사실을 알게 된 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성중에 나가서

 

방성대곡하다가 대궐 문 앞에 와서 엎드렸습니다. 모르드개가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있다는

 

사실을 왕궁에 있는 에스더가 알게 되어 무슨 일인지 묻자 모르드개가 사실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왕궁에 홀로 있으니 모든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할 때 너만 홀로 살아

 

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 오늘날 왕후가 되게 한 것은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고 말이 없으면 하나님은 다

 

른 방법으로 유대인을 구원할 것이요 너와 네 집은 망할 줄 알라고 경고합니다.

 

사실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관계는 사촌지간입니다. 모르드개는 나이가 많았고, 에스더는 일

 

찍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 모르드개가 친딸처럼 길렀던 그런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로 왕후가 된 것입니다. 그때 에스더가 이 나라 경호법은 엄한여서 왕후나 왕의 아들

 

딸이라도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나가면 죽이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얼마전에 내가 신문을 보니까 북한의 김정일에 대한 경호법이 얼마나 엄하든지 김정일 별장

 

2km안에 어떤 사람이 실수하여 들어왔는데 총살해서 죽였습니다. 아마 페르시아 왕 경호법

 

도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때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통지합니다. 내가 사명감을 가지고 십자가 지겠습니다. 3일동안

 

내 시녀와 더불어 금식을 하고 왕 앞에 나가서 이 사실을 구하겠습니다. 그러니 모르드개여

 

당신과 수산궁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은 나를 위해서 3일동안 금식해 주십시오.

 

금식을 마치고 에스더가 민족을 구원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왕후복을 차려입고 왕궁 맞

 

은편 뜰에 서있습니다. 보좌에 앉아있던 아하수에로왕이 에스더를 바라보니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인지라 금홀을 내어밉니다. 금홀이란 금으로 된 왕의 지휘봉입니다. 내어민다

 

는 말은 너를 용서한다하는 의미와 함께 무슨 소청이 있기에 왔느냐, 말해 보라하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에스더가 금홀 끝을 만지면서 내가 왕을 위해서 잔치를 한번 벌일테니 하만과 함께 오시라

 

고 초청을 합니다. 그 후 잔치자리에서 하만의 모든 음모를 폭로하자 왕이 노하여 국무총리

 

하만은 높은 장대에 달아 처형시키고, 유대인이 죽임을 당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12월13일

 

날에는 하만과 합세해서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을 대신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악한 자들은 처형당하고 모르드개는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에스더는 왕의 사랑을 더

 

입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 은혜로 편안히 살 수 있었고, 많은 페르시아 사

 

람들은 유대인들을 부러워하여 유대인으로 적을 바꾸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이스라엘 민족의 명절중의 하나인 부림절에는 삼일동안 잔치를 벌이는데 그 절기는 그런 역

 

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져야 할 십자가, 주님이 지라고 명한 십자가가 어떤 것입니까?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고난과 수치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와서 대우받거나 자기 이름을 내려는 사람은 많아도 이름 없이 빛 없이 힘들

 

고 어려운 짐을 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 지는 사람

 

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주의 뜻을 이루어 가시며 그에게 복을 주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

 

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하면 희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썩지 않은 밀알은 언제나 한 알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많이 알아도 십자가 지지 않은 사람들은 항상 그 모양 그 꼴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될 때 금세에서 백

 

을 얻고 내세에 영생 얻지 못할 자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막 10:29-30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

 

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역리적 진리입니다. 버린 만큼 얻게 하시고, 낮아진 만큼 높여주시며, 희생한만큼 얻

 

게 하시는 비밀,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할 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

 

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낮아지면 주님이 높이십니다. 희생하면 주님이 보상하십니다. 그런 십자가를 능히 지라는 것

 

입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는 이유가 자기는 희생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남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라도 자기가 출세하겠다는 마음 때문에 이 세상에 전쟁이 있는 것이고, 작게는 부부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결심만 갖고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아들이시라도 이 대속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

 

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고, 눅 22:40절 이하 말씀에 보면, 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얼마나

 

깊은 기도, 애절하고 간절한 기도를 했든지 그 때가 겨울인데도 얼굴에서 땀이 솟구쳐 나오

 

는데 핏방울처럼 되기까지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위로부터 천사가 내려와 힘을 도왔다고 했습니다. 위로부터 힘이 와야 십자가 질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지혜가 임해야 주의 일 할 수 있습니다.

 

시계추처럼 교회에 왔다 갔다 한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힘있고 능력있고 권능있는 십자가의 군병이 될 수 있습니다.

 

나무는 그 뿌리를 강변과 진토에 내릴 때 수분, 양분 다 뽑아 잎으로 공급하고 가지로 공급

 

해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 인간을 나무로 비유했습니다. 나무를 의인화하여

 

가르친 말씀이 아주 많습니다.

 

렘 5:14절 말씀에 보면,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좋은 열매 맺

 

는 나무는 더 많이 맺도록 깨끗케 하고 나쁜 열매 맺는 나무는 찍어버린다. 그것은 나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인간을 나무로 비유한 것입니다.

 

나무가 땅속에 뿌리를 내려야 거기로부터 모든 것을 얻어 생명을 유지하고 어떤 것을 생산

 

해 내는 것과 같이 인간의 뿌리는 어디이겠습니까? 인간의 뿌리는 머리이고, 이 머리는 하

 

늘을 향하여 하나님이 지었으니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때 위로부터 내리는

 

능력이 모든 것을 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출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6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부리던 바로왕은 그 백성을 다시 찾기 위해서 많은 군사를 찾

 

기 위해서 다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그때에 모세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합니까?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군

 

대를 바라보면 오금이 저립니다. 앞에 있는 바다도 보지 않았습니다. 길이 막혔으니 답답할

 

뿐입니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어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강한 동풍을 불어오게 하사 바다 가운데 길을 내셨

 

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가운데로 열려진 길을 따라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

 

백성 괴롭히는 애굽군대는 수장되어 심판을 받게 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앞으로 전진할 수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 인간의 한계상황의

 

벽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사는 길은 위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현장에서 경험되어지고 얻어지는 지혜

 

와 경험으로만 살지 말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베트남 전쟁시에 존슨대통령은 군사들을 향해서 미국이 개발한 신무기를 가지고 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신무기를 가지고 10년동안 싸웠는데 결과는 패전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걸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당시 대통령은 빌리 그래험 목사님을 백악관으로 초청해서 이틀동안 기

 

도회하고 전쟁했는데 6일만에 승리했습니다. 신무기를 가지고 싸우라고 명한 대통령과 하나

 

님께 기도함으로 전쟁을 했던 대통령은 전혀 차원이 달랐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학교에서 배운 공부나 학

 

원에서 배운 기술, 그리고 많은 경험을 토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은 모든 일반적인 삶

 

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의 방법은 조금 달라야 합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역대상 10:7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블레셋 군대와 싸우다가

 

패하여 그의 아들과 함께 전사합니다. 성경은 그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당한 사울은 갑옷이 벗겨지고 잘려진 그의 목은 블레셋 사람의 우상, 다곤 신앞에

 

전리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역대상 10:13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 앞에 범죄함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

 

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였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로 옮기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는 매사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

 

면서 백성 통치하라고 세운 것입니다. 사울도 처음엔 잘 했지만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습니

 

다.

 

처음 가졌던 복된 마음을 끝까지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간만 못합니다.

 

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칩니까?

 

왜 처음엔 겸손하다가 나중엔 교만해집니까?

 

그러나 다윗은 정반대입니다.

 

역대상 14장에 나오는 말씀, 사울의 뒤를 이어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블레셋에서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쳐들어옵니다. 르바임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이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저들을 내 손

 

에 붙이시겠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올라가라. 내가

 

저희를 네 손에 붙일 것이니 올라가라 하매 다윗이 하나님 말씀을 믿고 올라가 치니 승리하

 

였습니다.

 

그 다음 몇 년 지난 뒤에 블레셋 사람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침범해왔습니다. 그때도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가로되 마주 올라가서 치리이까? 이번에는 마주쳐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가라.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

 

리가 들리거든 나가서 싸우라. 하나님이 네 앞에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매 이번

 

에는 뒤로 돌아가서 적을 치니 또 승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반복된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 이것 하리이까, 그만두

 

리이까,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여러분, 범사에 그를 인정하십시오.

 

그가 여러분의 길을 지도해 주실 것입니다. 잠언서 3:5-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지

 

혜로운체 하지 마십시오. 잘난 체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학벌, 지위, 명예,

 

권세, 경험 가진 사람일수록 무릎 꿇지 않습니다. 하나님 도움없이 내 멋대로 살아보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이 돕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보다는 사울이

 

훨씬 훌륭했습니다. 키도 컸고, 싸움도 잘하고, 힘도 세고, 가문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릎 꿇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고, 선지자의 말을 우습게 알고 곁길로 가더니 망했습니다.

 

모든 것을 볼 때 감정적으로 인간적으로 볼 때 약했던 다윗이지만 때마다 일마다 무릎꿇고

 

기도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높이 들어 쓰셨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똑똑하고 잘난 사람보다는 좀 부족해도

 

십자가 의지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지혜롭게 하지 않느냐, 모든 것을 가진 자를 부끄럽게 하

 

지 않느냐?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보십시오. 반드시 주님은 보상하시고 함께 하실줄로 믿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의 성전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

 

다. 그래서 우리 몸이 의의 병기로 쓰임받을 때 주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좋은 것들을 아끼

 

지 않고 넉넉하게 채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사울처럼 살지 말고, 다윗처럼 삽시다.

 

시련과 연단이 와도 좋은 날을 기대하면서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그 날이 오기까지 참으십

 

시오. 십자가는 참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참는 것입니다.

 

모든 전쟁은 참지 못한 데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모든 실패도 참지 못한 데서부터 옵니다.

 

구레네 시몬은 자원해서 십자가 진 것이 아니고 로마 군병이 시켜서 억지로 십자가 졌습니

 

다.

 

우리가 교회 생활하다보면 자원해서 지는 십자가도 있지만 때로는 억지로 지는 십자가도 있

 

는데 억지로라도 주를 위한 십자가를 지게 된 사람은 복을 주십니다.

 

그의 가족이 다 예수 믿게 되었고, 그의 십대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는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의 제물이 되고 교회를 위해서 십자가 지며, 안 믿는 영혼

 

을 위해서 전도하다가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있을 때 주님은 반드시 우리 당대 아니면 우리

 

후손에까지라도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지금은 사순절기입니다. 근신할 때입니다. 정신차리고 기도하고 회개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사순절기에 주님 만나고 영성을 강화시켜 예수 닮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변

 

화받아 주님과 동행하는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

 

히2:9

 

금란교회/김홍도목사

 

 

붉은 안경을 끼고 붉은 색 물체를 보면 하얗게 보입니다. 이와 같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

 

는 방법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죽음을 해결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죽으실 이유가 없는 분이 죽으시고 죽으실 수 없는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으신 것은 바로 인간의 죽음을 해결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1.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죽음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죽음이며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의 궁극적인 문제는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는 죽음과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

 

각하거나 인간의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며 불안의 대상인 죽음의 문제를 애써서 잊고 살아

 

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죽음이 닥치면 당황하면서 두려워 벌벌 떨게 됩니다.

 

오랫동안 호스피스 생활을 해 온 이화대학 최화숙 교수가 ?아름다운 죽음을 위한 안내서?

 

란 책을 썼는데 베스트 셀러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책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

 

올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명예를 추구하고 육신의 쾌락만 좇고 돈 버는데 만 몰두하다가

 

의사의 사형 선고를 받고는 당황해하고 공포에 벌벌 떠는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 예수를 믿고 영접하고 빛을 보기도 하고 천국을 보기도 하고 천사가 마중 나와 서 있

 

는 것을 보기도 하면서 환하게 빛나는 얼굴로 세상을 떠나는 몇 사람들의 예를 들고자 합니

 

다.

 

 

 

◎ 유방암에 걸린 한씨 부인은, 6년 전에 암 선고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분인데, 전에는

 

?인간이 노력하면 안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후에는 ?아! 인생에 있어서 내 힘으로

 

되는 것은 3분의 1 밖에 없구나?했다가 나중에는 ?인생이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전부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구나!?라고 하더니 다가올 죽음을 예측하

 

면서 ?떨어지는 낙엽을 내가 다시 볼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을 생각해요? 조금 후에는

 

?이게 마지막이구나. 지금 보는 것을 다시는 보지 못하겠구나?하고 아이들이 TV를 보며

 

웃는 것을 보면 ?저게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을까?하고 말하면서 호스피스에게 자기는 지

 

금까지 모두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 온 삶이요, 이웃과 국가를 위해서는 아

 

무 것도 한 것이 없어서 너무나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필요하면 시신 전부라도 연구를 위해

 

드린다고 하고 소천했다고 합니다.

 

 

 

◎ 골수암으로 오른 다리를 절단한 17세 난 이군은 암이 폐와 뇌에까지 전이되어 호흡이 곤

 

란한데도, 무엇이 보인다고 하며 웃고 놀라워하더랍니다. 하늘을 쳐다보며 ?아! 베드로가

 

보인다!?, ?그 옆에 빛나는 분은 누구시냐?하기도 하고, 엄마가 ?무엇이 보이냐? 나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하니까, ?큰일났다, 우리 엄마는. 나는 천국 가는데 우리 엄마는

 

지옥 가겠다?고 하더랍니다.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보인다?고 했더니, ?엄마, 저거 보

 

았지요? 나는 먼저 갈테니 엄마는 나중에 오세요?하더니 숨을 거두더랍니다. 사람이 죽음

 

에 임박하면 이세상과 저 세상을 동시에 보기도 하고, 장갑을 끼었다가 벗으려면 시간이 조

 

금 걸리는 것처럼 우리 안에 영혼이 떠날 때 시간이 걸리면서 양쪽 세계를 다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 49세 된 김영찬씨는 밤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라

 

고 해서 잠을 못 자니까 불안에 못 견디어 각목을 휘두르며 병원 진료를 마비시키곤 했습니

 

다. 이것은 밤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고통?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아들이 밥을

 

먹고 있으면 때리곤 했는데 나중에는 후회하며 미안하다고 했는데 교회에 나간 다음부터

 

?눈이 부시다?고 해서 ?무엇이 보이느냐?고 하니까 ?흰 옷 입은 사람이 머리 쪽과 발

 

쪽에 와 있다?고 하면서 그 사람들은 빛이 나고 어깨에 날개가 달려있다고 하더니 후에 평

 

안히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최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내세를 미리 봄으로써 자신 뿐 아

 

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확신시켜 준다?고 했습

 

니다.

 

 

◎ 김연준씨란 분은 세 회사를 경영하던 분인데 간암에 걸려 말기에 접어들었는데 온 몸이

 

굳어져서 말을 못했습니다. 누워 무릎을 세운 채 와들와들 떠는데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들

 

릴 정도였습니다. 몹시 무서워 공포에 질린 모습이어서 ?무엇이 그렇게 무서우세요?하니

 

까, ?지?옥?에?갈?까?봐?서…?하더랍니다. ?그럼 지옥에 안 가는 법을 가르쳐 드릴까

 

요??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더랍니다. 친구 민박사가 몇 달 안 남았다고 알려준 다음부터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면서 자신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꼼짝

 

없이 지옥에 가게 생겼구나?하며 지옥의 공포로 덜덜 떨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고 누구든지 어떤 죄인이

 

라도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지옥 가는 대신 천국에 간다?는 것을 일러주고 예수님을 영접

 

하더니 안심하고 온 몸이 풀리더랍니다. ?빛이 보인다?고 말하며 ?지옥에 안 가는 법을

 

알려 주어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숨을 거두더랍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도 울어주는 사람 하나 없고꽃 한 송이 가져오는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정직하게 살며,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며 살고, 굶는 사람이 있으면 사랑을 베풀며

 

살라고 권면합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 보아야 한

 

다고 합니다. 유언장을 써 두는 좋은 일이라고 합니다. 9?11테러 사건 때 죽은 6,000여 명도

 

그날 아침 죽으리라고 아무도 예측 못했던 것입니다.

 

 

 

 

2.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

 

 

 

 

뭐니뭐니해도 인생의 가장 큰 문제 궁극적인 문제는 ?죽음?입니다. 우선 이 문제부터 해

 

결하고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본향을 찾아가는 나그네 생활입니다. 인생은 100년을

 

산다 해도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영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한 부자가 어리석은 하인을 데리고 있었는데, 너무나 바보 같아서 어느 날 지팡이를 하나

 

주면서 ?이 다음에 너보다 더 큰 바보를 만나면 이 지팡이를 주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에 그 주인이 죽어가면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먼길을 떠난다?고 해서 하인이 ?그럼,

 

먼길을 떠날 준비는 하셨습니까??고 물으니까 ?아무 준비도 못했다?고 하더랍니다. ?몇

 

일 동안 여행을 떠나도 준비를 하는 법인데, 돌아오지 못할 먼길을 떠나면서 아무준비도 안

 

했다니 그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이 지팡이 도로 가져가십시오?하고 건네주었다고 합니

 

다.

 

 

시성 괴테(Goethe von Johann Wolfgang)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없는 자는 아무리 화

 

려한 성공을 하였을지라도 처량한 나그네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무신론자 협회 회장이었던 프란시스 뉴포트(Francis Newport)는 그렇게 하나님도 없고, 내

 

세도 없다던 사람이 임종시에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 분의 분노

 

하신 면전에 있다. 지옥이 없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이미 나는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소망이 있다는 쓸데없는 말은 집어 치우라. 나는 영원히 잃어버린 자 임을 안다?고 했습니

 

다.

 

 

 

 

 

불란서의 계몽주의 철학자이며 유명한 무신론자인 볼테르(Voltaire)는 임종시에 의사에게

 

?6개월만 더 살게 해주면 내 보물의 절반을 주겠다?고 할 때 ?죄송하지만, 6주간도 더

 

못산다?고 하니까, ?그러면 나는 지옥에 가겠구나. 당신, 나하고 같이 좀 갑시다?하고 하

 

더랍니다.

 

 

 

자기는 죽음과는 아무 상관없는 줄 알고 큰소리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해결할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목회자도 무엇보다 먼저 영혼구원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하는데, 잠깐 있다가는 나그네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만 설교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비결만 가르쳤다면 이 다음 하나님 앞에 설 때 뭐라고

 

변명하겠습니까? 예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리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목적도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땅 끝까

 

지 복음을 전하라?는 것도, ?성령을 받으라?는 것도 모두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것입니다.

 

 

부흥사 빌리 선데이(Billy Sunday)씨는 말하기를 ?나는 그분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는데 그

 

분을 만나보면 나는 그분 발 앞에 엎드려 나를 구원하시고 사용해 주심에 대해서 감사드리

 

겠습니다?고 했고, 터툴리안(Tertullian)은 ?우리 기독교인은 이 땅에서는 순례자이며 우리

 

의 확고한 지위는 천국에 있다?고 했고, 칼빈(Calvin)은 ?천국은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므

 

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 어디서 살든지 이 세상은 유랑의 장소이다?라고 했습니다.

 

 

 

 

3. 예수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래 지금까지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오신 분

 

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것은 사망의 원인이 되는 죄를 씻어 주기 위한 것이며 3일

 

만에 부활하여 승천하신 것도 우리의 죽음을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활이 없고 내세가

 

없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종교는 다 같은 줄 알지만,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영생

 

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

 

생을 주시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장 25-26절)하셨

 

습니다. 예수님만이 죽음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예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봄에 콩이나 옥수수를 땅에 심으

 

면 죽어 없어집니까? 아니지요. 다시 살아서 수 십 배, 수 백 배 열매를 맺는 것을 보지 않

 

습니까? 어떤 꽃씨는 2,000년만에 다시 살아 꽃을 피웠습니다. 어떤 곡식은 3,000년 전의 미

 

이라에서

 

발견하여 심었는데 다시 살아 열매 맺는 것을 봅니다. 바울은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고린도전서 15장 36-37절)이라고 했습니다. 즉 곡식을

 

심으면 그 알갱이가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곡식이 살아 올라오는 것처럼 이 몸이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썩지 않고 죽지 않고

 

병들지 않고 늙지 않는 영원한 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기독교인이 죽

 

으면 그 영혼은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되고, 그 몸은 무덤에 묻혔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한

 

몸과영혼이 결합하여 후에 영원한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더 원하지만, 살아서 복음 전하는 것도 좋다?고 하시고 빌

 

립보서 1장 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삶과 죽음)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

 

나....? 즉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죽음이 임박

 

해 올 때, ?꼭 살아야 되겠다?고 발버둥칠 필요도 없고 ?빨리 죽어야겠다?고 자포자기

 

하거나 원망해서도 안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궁극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

 

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큰 불안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

 

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

 

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재림) 너희를 내게로 영

 

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장 1-3절)고 위로하셨습니다. 본문

 

히브리서 2장 9절에 ?.....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께서 죽으심으

 

로 우리의 죽음을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안 믿으면 지옥에 형벌을 받게 될까

 

요?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는데? 예수께서 죄 없는 피를 쏟아 우리 죄를 대속

 

해 주셨기 때문이며, 예수님만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

 

나님이 말씀하셨으므로 피 흘림이 없이 죄 사함 받는 길이 없으므로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

 

원받습니다. 아무리 죄가 많아도 예수를 믿으면 용서받고 구원받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천국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9절에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의롭

 

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함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하셨고,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이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죽음이 해결될 뿐 아니

 

라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갑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죽기 몇 일 전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을 부르시더니

 

?내가 죄 사함 받은 것과 천국에 갈 수 있는데 대해서 말씀 좀 해 주십시오? 부탁했습니

 

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 내 선행 때문도 아니고 교회에 헌금

 

한 것 때문도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공로 때문에 가는 것입니

 

다. 예수님이 당신의 죄 값을 다 지불했으니 안심하십시오?하고 기도해 드렸더니, ?감사합

 

니다. 이제는 준비되었습니다?(Thank you. I'm ready.)하고 소천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 죄인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합니다. 내 모든 죄를 예수님의 피로

 

씻어 주심을 믿습니다.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빌2:1~11

 

갈보리교회/박조준목사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대환영을 한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라고도 하고,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기념

 

하는 '고난주일'이라고도 하는 날입니다.

 

언제인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마는, 특별히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이 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보고 그 주님의 마음을 우리도 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

 

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귀한 것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

 

까?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이 시간 생각하는 가운데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라는 말의 뜻을 우리가 잘 압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저 '부드러운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위로 올라오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

 

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둘기 모양으로 임한 것은 비둘기의 순결성을 상징하

 

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둘기의 온유한 성품을 표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증거하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소개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어린양에는 우리의 죄를 대속

 

하는 제물이란 뜻이 내포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냥 빈손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양을 잡아 피를 흘리고 대속의 제

 

물로 하나님께 드리고 나아가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것

 

은 그 모습 가운데서 온유한 성품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양은 본래 그 성품이

 

온유합니다.

 

그래서 성품이 유순한 사람을 가리켜 양과 같이 순한 분이라고 합니다. 양은 다른 짐승에게

 

해를 당하는 일은 있어도 다른 짐승을 해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메시야

 

에 대한 예언이 있는데, 거기서도 메시야를 가리켜 "양이 털 깎는 자 앞에 입을 열지 아니

 

함같이 잠잠하였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의 예언을 인용했는데,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하면서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온유한 성품을

 

나타낸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보통 심지가 꺼져 가면 아주 비벼 꺼버리고 맙니다. 갈대가 상하면 아예 짓밟아

 

꺾어버리고 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유하시기 때문에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보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보내는 나중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

 

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너희를 친히 권면한다"고 했습니다. 바울도 주님을 생각할 때 그 온

 

유한 마음을 생각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할 때 베드로전서 2장 23절에 보면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주님의 온유한 마음을 가

 

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약한 분은 아니십니다. 그리스도는 강한 분이십니다. 그러

 

나 그리스도는 온유한 마음의 소유자이셨습니다.

 

옛날 초대교회 때에 예수님을 그린 것을 보면 보통 양을 품에 안고 있는 목자의 모습을 그

 

렸습니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목자처럼 온유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

 

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따랐고 아기 엄마들은 예수님이 어린 아기를 품에

 

안고 축복해주시기를 바랐기 때문에 많이 데리고 왔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린애들은

 

조용하지를 못합니다. 시끄럽습니다. 떠들어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생각에는 어린애들이

 

가까이 오는 것이 시끄럽게 보여서 귀찮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어린아이들

 

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늘나라에 있는 자들이 바로 이런 어린아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환영하고, 어린아이를 영접하고,

 

그 어린애들을 안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신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어떤 때는 문둥

 

병자들이 와서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겨서 어루만져달라는 요청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때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친히 손을 내 밀어 그 더러운 문둥병자를

 

어루만져주시고 고쳐주신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한번은 주님께서 여리고 지방을 지나가실 때입니다.

 

두 사람의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이 멀리서 예수님의 소문을 들고 주님께 가까이 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면서 소리질렀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

 

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따라오고 또 바쁜 행차인데 맹인들이 소리지르니까 시끄럽다고,

 

떠들지 말고 좀 잠잠하라고 야단쳤습니다. 그러나 맹인들은 계속 소리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들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때 예수님은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불

 

러오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달려오니까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어이냐? 너희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맹인들이 뭐랬어요? "주여,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들의 간구를 들으신 주님께서는 당장 그들의 눈이 볼 수 있도록 은혜

 

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보실 때 그냥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

 

가 로마의 속국으로 있으면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딱

 

한 사정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목자 없는 양처럼 여기셔서 백성들을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아, 예루살렘아, 내가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려 한 것처럼 너희를 품으려 한 적이

 

몇번이나 되었더냐? 그러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이제 얼마 있지 아니해

 

서 예루살렘이 망할 것인데, 그때는 돌 위에 돌 하나도 겹놓이지 아니할 정도로 다 망해버

 

릴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원수들에게 붙잡히실 때 옆에 있던 베드로는 홧김에 차고 있던

 

칼을 빼서 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다시 칼

 

집에 넣으라고 하시면서, 대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경계하시고 조용히 체포당하

 

셨습니다. 그리고 법정에 끌려 다니시면서 많은 곤욕을 당하셨지만, 예수님은 그의 제자 베

 

드로가 친히 기록한 대로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잠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면서 못박히실 때에도 예수님

 

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온유하신 주님의 성품을 보여주

 

신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게도 향기를 풍긴다"는 말이 있습

 

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이 온유하셨기 때문에 자기를 해치는 원수에게까지도 온유하셨습니

 

다.

 

이 말은 예수님이 약하셨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강하셨습니다. 예수님

 

은 담대하셨습니다. 더구나 주님의 온유한 마음은 죄를 용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

 

니다. 예수님은 죄를 미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하지만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백성을 긍휼히 여기신 것은 그 온유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산상보훈을 가르치실 때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

 

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지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는 이깁니다. 온유한 사람이 마지막에는 이 땅을 차지합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는 온 세상을 차지하게 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일생을 가만히 돌이켜 살펴보며, 그의 생활 가운데 조금이라도 교만했다든

 

지 자기 자랑을 했다든지 하신 일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교만한 자취가 전혀 보이지 아니합니다.

 

가령, 예수님이 나신 곳이 어디입니까? 그는 마구간에 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가 왕궁

 

에 나지 아니하시고 마구간에 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가난하다고 하지만 마구간

 

에 나신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보다 더 겸손하실 수는 없습니다.

 

나셔서 처음 누우신 보금자리가 말구유였습니다. 예수님이 젊어서 하신 생활 가운데도 사실

 

은 세상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볼 때 가난하게 지내셨

 

습니다. 친히 말씀하신 대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

 

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실 정도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사실 예수님만큼 가난한 사람은 오늘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벌 옷이 없었습니다. 한

 

벌뿐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옷 한 벌로 사시는 분은 아마 안 계실 것입니다. 갈아입을 것

 

은 있을 것입니다. 겨울 옷 가지고 여름까지 입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벌 옷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일생 동안 사귄 사람들을 보면 어부 아니면 농부같이 별로 공부도 많이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세력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교계에 나타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요사이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목사들 가운데도 대통령이나 장관과 자

 

리를 같이하면 큰 대접받고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두고두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런데 예수님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원수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으실 때 빌라도

 

앞에 선 것 외에는 권력자와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뭐라고 비난했습니까?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했습니

 

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권력자나 부자의 친구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 무식한 사람,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의 친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33년 사시는 동안 사람들에게 보이시는 행동을 좀 달리하신 적이 꼭 한

 

번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따르는 사람들이 앞서고 뒤서면서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성

 

으로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좀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세히 보게 되면, 나귀 중에도 제일 작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

 

다. 유대 나라의 나귀는 우리 한국 나귀보다 더 작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예수님이 타신 나

 

귀가 작기 때문에, 예수님의 발이 땅에 거의 닿았을 줄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는 왕이시지만 겸손한 왕이십니다.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도 그렇습니다. 제자들 사이에는 예수님의 사정도 모르고 "누가 우리

 

가운데 제일 높으냐? 누가 제일 크냐?" 하는 것 때문에 토론이 벌어지게 되고, 기분들이 상

 

해서 아주 어색한 분위기였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는 먼지가 너무 많아서 밖에서 들어

 

올 때면 꼭 발을 씻어야 했는데, 넉넉한 집에서는 종들이 주인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그러

 

나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종이나 하는 일을 하나' 해서 누구 하나 발을 씻어주려고 나서

 

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내가 왜 종이나 하는 발을 씻기는 일을 해' 하고 생각하면

 

서 서로 눈치만 보면서 버티고 앉아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손수 대야에 물을 떠다가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네 발을 내 놓으라. 내가 씻겨주마" 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하나

 

씩 씻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생이 되어서 제자들인 너희의 발을 씻겠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이 말씀은

 

한마디로 "너희도 겸손하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도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

 

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높은 분이시지만 그것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낮아지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

 

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더러 겸손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멸시의 눈을 보내는 사람들을 위해서 비

 

유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를 합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 앞에서 청산유수처럼 기도를 잘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한마디 한마디가 다 자기를 자랑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하늘을 향해

 

감히 우러러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자기의 지은 죄를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겸손하게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는 받으셨다고 말씀하시면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겠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사야

 

57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고 거룩한 곳에 거처를 삼으셨지만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같이 계셔서 겸손한 심령을 부흥케 하신다"고 말씀하셨습

 

니다.

 

성경은 겸손을 최고의 덕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지혜와 어진 것, 그리고

 

용기를 덕으로 생각합니다. 서양의 윤리를 보아도 이 세 가지에 '절제' 하나를 더해서 소위

 

4덕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면서 겸손을 별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겸손을 가장 귀한 덕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르친 것만 아니고 예수

 

님께서 친히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의 도, 종의 도를 보여주

 

셨습니다. 기독교 사상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어거스틴도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덕을 말하

 

면서 "첫째가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한 말은 의미 깊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교만하기 짝이 없던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 준비했던 형틀에 자기가 목이 매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아주 교만해서 자기의 능력과 지혜로 모든 것을 건설

 

했다고 장담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한 지 얼마 안되어 정신이 나가 미쳐 버리고 말았

 

습니다. 들로 나가 소처럼 풀을 뜯어먹고 머리털은 독수리 머리털처럼 되었다가 죽어버렸습

 

니다. 벨사살 왕은 교만해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빼앗아온 기명으로 고관대작들을 불러 술을

 

마시다가, 바로 그날 밤 메대와 파사 연합군이 들어와 베사살 왕을 죽였고 그 나라는 완전

 

히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잠언에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교만은 모든 죄의 어머니입니다. 교만하므로 많은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

 

는 개인이나 나라나 반드시 망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교만할 조건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것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받은 것인데,

 

어떻게 받지 않은 것처럼 교만할 수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교만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위대한 인물이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제일 위대한 사람이 누굽니까? 아마 모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신약성경 중에도 예수님을 제외하고 누가 가장 위대

 

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예수 믿기 전

 

에는 아주 강퍅하고 교만했었습니다. 자기 이상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이 없다고 교

 

만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처럼 믿지 않는 사람은 쫓아다니며 잡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님을 만나고 영접한 다음에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아주 겸손해졌습니다. 그의 신앙은 우리

 

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깊이가 있었고 놀라운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할 정도로 겸손해졌습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마음은 용서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해서 그럽니다." 여러분, 용서하기 위해서는 십

 

자가의 고통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얼마나 강퍅합니까? 사막과 광야 같아서 나무들이 가시가 돋쳤

 

고 건드리면 찌르고 고통을 줍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꼭 품으면 사회가 달라질 것입니다. 백합이 찔리면 향기를 더 발하는 것처럼, 우리가 찔리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고난 주간에 우리 하나 하나가 주님의 마음을 품어서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 앞으로 초대

 

하는 놀라운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빌2:5~11 (이사야 50:4~9 참조)

 

광야교회/강석공목사

 

 

오늘 봉독한 이사야서의 말씀은 "여호와의 종의 노래"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노래입니다.

 

그 내용은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달게 받고 죽기까지 충성한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허물과 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받고 있는 고난을 억울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들과는

 

극히 대조적으로 여호와의 종은 그와 같은 수치와 모욕과 고난을 당할 까닭이 전혀 없었음

 

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이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통해

 

서 우리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은 어떻게 그

 

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그토록 철저히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저는 오늘

 

그 이유를 올바른 마음가짐에서 찾고 싶습니다.

 

 

요즘 여야를 막론하고 연말 대통령 선거에 내세울 후보를 뽑기 위해서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민주당에서 최초로 도입한 당원이 아닌 국민도 참여하는 후보 경선은 그 반

 

응이 이외로 좋은 것 같습니다. 그 바람에 바닥을 맴돌고 있던 민주당의 인기가 많이 회복

 

되었고 한나라당에서는 매우 긴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민주당 쪽에서 좀 이상

 

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처음에는 이인제 후보가 독주할 것으로 예상했는

 

데 느닷없이 노무현 후보가 강세를 보이자 이인제 후보 측에서 음모론을 제기한 것입니다.

 

자세한 내막이야 우리가 알 수도 없고 또 알 필요도 없지만 간단히 말해서 김 대통령이 측

 

근들을 시켜서 슬그머니 노 후보를 밀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평하지 못한 처사

 

라는 것이 이 후보 측의 불평인 것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김심(金心) 즉 김

 

대통령의 마음입니다. 누가 들여다 본 것도 아닌데 측근들이 대통령의 마음을 들먹거리면

 

그것이 경선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정말 재미있지 않습니까? 하여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많은 사람들의 속이 속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을 것입니

 

다.

 

 

우리의 마음이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삶을 지배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특히 우

 

리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천국 가는 것

 

이 지상 목표요 또 하나님을 뵙는 것보다 더 간절한 소원이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

 

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뿐만 아니라

 

솔로몬도 마음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생과 사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그의 잠언을 통

 

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 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에게 문제가 아주 없을 수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가정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도 있습니다. 사회 생활을 하

 

다 보면 문제들이 그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 안

 

에서도 우리는 종종 풀기 힘든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까

 

지나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립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문제는 아무리 풀기 어

 

려워도 풀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인 문제를 비롯해서 모든 문제는 꼭 풀어야 합니다.

 

외면하거나 회피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덮어둔다고 해서 그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반드시 모든 문제는 풀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먼저 문제의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원인을

 

알아야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 원인을 찾는데

 

서부터 실패합니다. 왜 그럴까요? 엉뚱한데서 원인을 찾기 때문입니다. 주위 환경에서 문제

 

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고 또 나 자신이 아닌 상대방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기 때

 

문에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원인을 찾아야 실패하지 않을까요? 그

 

해답을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7장 21절부터 23절

 

까지의 말씀입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

 

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주위 환경이 문제가 아니고 다른 사람

 

도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이 바로 문제의 원인이라는 말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문제의 원인을 알았으니 문제를 풀어야 하지 않

 

겠습니까? 문제를 풀기 위해서도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

 

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헛된 욕심 때문에 서로 상처를 입히며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

 

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 것을 성경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

 

인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

 

예수를 참 구주로 믿고 따른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며 서로 물고 뜯고 싸운다면 이

 

세상에 더 이상 소망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땅히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과연 어떤 마음일까요?

 

 

첫째,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자기를 비우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은 곧

 

비우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비우는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가 비운 것은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주님은 근본적으로 하

 

나님 아버지와 같은 분인데 스스로 다 비워버렸습니다.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렸습

 

니다. 권리와 지식과 경험과 능력 등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스로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를 비우는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런 비우는 마음이 있습니까?

 

 

둘째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자기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또한 품어야 할 마

 

음은 자기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자기를 낮췄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

 

로 비웠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낮췄습니다. 여기 낮췄다는 말은 자기를 철저히 비

 

하시켰다는 뜻으로 진정한 의미의 겸손을 가리킵니다. 이 겸손은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

 

과 같이 된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종의 형체를 가졌습니다. 원래 자기의 신분과

 

는 도저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낮고 천한 신분으로 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바로 우

 

리가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 있습니까? 아직도 헛된

 

자만심 때문에 남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참된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

 

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했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는 바로 그 마음

 

이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우리가 반드시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여기서 죽기까지 복종했다는

 

것은 무조건 복종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뭐라고 했

 

습니까?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

 

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과연 그 말씀처럼 십자가

 

에 죽기까지 복종하지 않았습니까? 십자가는 결코 낭만이 아닙니다.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그 십자가는 수치이고 고통이며 또한 모순이자 부조리입니다. 사실 역사상 우리 주님이 달

 

린 십자가처럼 억울한 것은 또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달릴 그 어떤 잘못도

 

없는 분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그렇

 

게 죽는 것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죽기까

 

지 복종했던 것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도 그렇게 주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왜 마음의 평화가 사라졌습니까? 왜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입니까? 어째서 심지어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불협화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자기를 비우는 마음이 우리에게 없기 때

 

문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이 없기 때

 

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직도 자아가 살아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지 못했기 때문

 

에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마음을 품

 

고 자기를 온전히 비울 때, 자기를 철저히 낮출 때, 그리고 죽기까지 주님의 말씀에 복종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참된 은혜와 평강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놀라운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러분 모두의 삶에 넘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가신 이유

 

본문 욘4:9-11 눅19:28-40

 

서울안동교회/유경재목사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활동하신 장소는 크게 두 곳으로 나타납니다. 한 곳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또 대부분의 시간 동안 활동하신 갈릴리이고, 다른 한 곳은 시간적으로는 짧지만 그 비중과 의미에 있어서는 갈릴리 못지 않게 중요한 예루살렘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구원의 역사를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펼치십니다. 물론 때로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비밀로 하라고 당부하시기도 하시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또 적대자도 있었지만 추종자의 기세에 눌려 별다른 반발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역의 전성기를 보내고 계셨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셨습니다. 누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가서 환영받을 곳도 아닌 예루살렘으로, 있다면 예수를 반대하던 자의 본거지가 있고, 기다리고 있다면 예수의 적대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을 받고 죽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실 리 없는 예수님이 왜 그런 무모한 길을 떠나셨을까요? 갈릴리에 그냥 있으면 더 많은 구원사역을 더 오랫동안 하실 수 있을텐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유대인 남자라면 일 년에 한 번 예루살렘에 가야 했지만, 지난번처럼 그냥 조용히 들어가서 할 일만 하시고 조용히 나오실 수도 있었을텐데, 이번에는 왜 마치 왕이 행진하듯이 요란한 환영 가운데, 마치 제왕이 즉위하듯이 그렇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까요?

 

 

가장 단순한 대답은 죽기 위해서라는 것일 겁니다. 누가복음 8:31~33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아시면서,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선지자들이 이미 기록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예수님께 맡긴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뜻에 순종해서,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고 그 일이 즐겁고 편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신 장면들을 보면, 비장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도 죽음은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예수님은 모든 두려움과 고통을 감수한 채 말없이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모습을 우리가 봅니다.

 

 

구약의 예언자 가운데 요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예수님과 비교가 됩니다. 특별히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낮 사흘 밤을 지내고 나오게 된 것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사흘을 지내시고 부활하신 것을 미리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과는 아무 상관없는 곳으로 가려다가 억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요나는 그리고 나서도 계속 불평과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예수님과 요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가 되는데, 특별히 이 점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비교가 됩니다. 요나는 그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는 것도, 그 대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부하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손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말없이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에게 그렇게 하기를 요구하셨을까요? 그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게 되어 있는 우리를 대신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해 그 아들 예수가 예루살렘에 가신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려고, 죽음의 장소, 예루살렘에 가신 것입니다.

 

 

정말로 예루살렘은 죽음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부와 권력을 독점하던 성전 체제의 본거지요, 정점이 바로 예루살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율법을 독점하여 그것으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던 곳, 그뿐만 아니라 이방인이요 침략자인 로마와 결탁하여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훼손하던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던 것입니다. 생명의 이름은 있지만 죽음이 지배하던 곳, 예루살렘으로 예수는 죽기 위해 가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장소 한복판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는 바로 그 곳,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곳,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세계에 부활의 복음이 선포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가시고기라는 물고기의 전설이 있습니다. 이 물고기는 크기가 작아서 큰 물고기들의 먹이가 되곤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시고기는 온 몸이 날카로운 가시로 되어 있어서 자기를 잡아먹은 물고기 배를 가르고 나와 오히려 큰 물고기를 죽게 한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그 죽음의 세력은 예루살렘을 찾아 온 예수를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덤 속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시어 오히려 그 죽음을 정복하고 말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갈릴리에서 많은 사람의 환영과 추종에 안주하지 않고, 죽음을 위하여, 그리고 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대한 순종 하나만 가지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종려주일을 맞는 오늘, 우리는 지금 어디쯤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세상이 혹시 예루살렘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예루살렘처럼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려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전 체제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구속하고, 억압하고,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을 오히려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아직도 갈릴리에서 떠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교인이 늘었다고 해서 교회에만 파묻혀 사회를 외면하고 역사를 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순종하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 있는,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을 향해 고난을 받더라도, 그러다가 혹시 죽게 되더라도 떠나라고 하십니다. 거기에는 새로운 생명, 부활의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

 

출4:10-17, 눅23:26-33

 

서부교회/김오동목사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신 지 약 30여 년이 지난 후 베드로는 로마로

 

갔습니다. 거기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나타

 

나자 시몬의 마술이 전혀 엉터리라는 것이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로마에는 마술사 시몬의

 

추종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여러 가지로 불리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세례 요한이 헤롯의 불륜을 지적했다가 목베임을 당했듯이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던

 

알비누스 부인의 순결문제를 지적했기 때문에 황제와 알비누스 부인은 대노하여 베드로를

 

죽여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당시 교회는 베드로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여 생명을 보전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야 어려움에 처한 교회와 성도들을 계속 지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권유를 이기지 못한 베드로가 마침내 로마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로마를 떠

 

나 도망을 가는데 우리 주님께서 로마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

 

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주

 

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로마로 간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

 

은 베드로는 "주여,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시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

 

서는 "그렇다, 베드로야. 나는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

 

다.

 

 

비로소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 대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로마로 가시는데 자기는 로마

 

로부터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로 되돌아갔습니다. 베드로

 

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내가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순교하였습니다. 드디어 베드로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신은 결코 주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힐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하면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겠다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장 진하게 체험해야 하는

 

이 종려 주일, 고난 주간에 우리는 다시 한번 십자가에 대하여 상고할 이유가 있는 줄 믿습

 

니다.

 

 

오늘 신약 본문에는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시몬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막15:21에 보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라고 했습니

 

다. 베드로는 자진해서, 그것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혔으나 구레네 시몬은 전혀 자기 의지

 

와 상관없이 징발 당하다시피 하여 억지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크신 뜻

 

은 비록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 이 사실

 

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

 

니다.

 

 

1. 그러면 도대체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1) 그것은 당시 극악한 죄인을 죽이는 사형 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거기서 죽으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는 새로운

 

의미의 사형 틀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옛 사람이 죽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정

 

과 욕심을 거기 못 박아야 하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2) 십자가는 순교를 가르칩니다.

 

교회의 역사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교부의 말처럼 그 순

 

교자의 피가 교회의 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사실은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3) 십자가는 우리가 신앙 때문에 당하는 모든 고난을 말합니다.

 

우리 찬송가에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할 때 마침내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도 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는 말이 생겼습니다.

 

(4) 십자가는 우리 주님의 대속을 말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의 값을 지불하셨으므로 나는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

 

녀가 되었고, 하늘나라 영광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를 구원해 주신 우

 

리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단지

 

내 몫에 태인 십자가만을 지고 따를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수 있

 

어야 하겠습니다.

 

 

2. 그러면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진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 비록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간 구레네 시몬이야말로 역사상 최초로 주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실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것도 맨 처

 

음 십자가를 지고 따른 사람이 바로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그렇게 큰 소리치던 다른 제자

 

들은 어디가고 주님의 그 무거운 십자가를 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 지게 되었겠습니까? 어쩌

 

면 그날 이 구레네 시몬은 몹시 언짢았을 것입니다. 매우 불행한 하루였다고 생각했을 것입

 

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해서 억지로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이 그와 그 가정에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주님이 맡겨 주신 사역을

 

위하여 즐겨 십자가를 지면 더 큰복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억지로라도 지고 가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큰복이 되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2) 구레네 시몬은 그 십자가를 지고 따라갔기 때문에 그 은총의 현장을 친히 목격하고 체

 

험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피와 땀을 흘리시면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우리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 누구

 

입니까?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묵묵히 모든 고난을 다 받으시면서 오히려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그 거룩한 모습을 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회개한 강

 

도에게는 천국을 약속해 주시고, 울고 서 있는 어머니를 위하여는 요한에게 그 장래를 부탁

 

하는 그 모습을 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마침내 "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운명하시는 모습을 지켜 본 사람이 누구였습니

 

까?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그는 이 놀라운 은총의 현장을 목격하고 체험하고 "아! 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

 

오 우리 구주로구나!"라는 확신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온 가족

 

들에 그 놀라운 말씀을 증거하고 모두 함께 믿기로 작정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롬16:13에

 

보면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

 

라"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루포가 누구입니까? 구레네 시몬의 아들로서 그와

 

그 어머니가 함께 초대 교회의 기둥과 중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주님을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놀라운 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억지로라도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위하여 예비하신 은혜와 복이 바로 거

 

기에 있습니다.

 

 

(3)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우십니까?

 

우리 자녀들이 어렸을 때 혹 병이 나면 가루약을 엄마 젖에 타서 먹였습니다. 처음에는 모

 

르고 마시지만 그 맛을 보고 나면 다음부터는 숫가락만 얼씬하면 애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

 

을 갑니다. 그래도 약은 먹여야 하니까 둘이서 붙잡고 씨름을 하면서 먹입니다. 애들은 발버

 

둥을 치면서 거부합니다. 왜 부모들은 그런 강제를 합니까? 그 약을 먹여야 애들 병이 났기

 

때문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처음에 십자가의 뜻을 제대로 알았다면 왜 억지로 졌겠습니까? 오히려 십자

 

가가 자기에게 돌아왔다고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숨겨진 엄청난 은혜

 

와 복을 보는 눈이 열리기 전까지 그것은 원망거리요 불평거리였습니다.

 

옛날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애굽에 가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바로를 향하여

 

"내 백성을 보내라"고 요구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바로의 심기만 자극하여 몇 배나

 

더 심한 노역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를 원망하면서

 

돌로 쳐죽이려고 까지 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내가 이 백성을 낳기라도 했습니까?" 하

 

고 불평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십자가를 통하여 모세를 능하게 쓰셨고, 마침내 그를 통하여 이

 

스라엘 해방이라고 하는 놀라운 드라마를 연출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십

 

자가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요나는 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가당치도 않게 여겨져서 다시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다시스는 성공을 향한 길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온갖 좋은 조건들이 기다리

 

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풍랑이 일어서 요나는 바다에 던져 집니다.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더 이상 생각할 수도 없는 한계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에

 

게 돌아간 십자가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다시스행을 막으셨습니까? 왜 순탄한 길을 보장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거기에

 

멸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아버지께서 어찌 그 길을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억지로라도 지워주시는 십자가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피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즐겨 지고 주님을 따

 

르십시오. 그렇지 못하다면 억지로라도 지고 따르십시오. 거기에 주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은

 

총이 있습니다.

 

 

(4)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 찬송가 가사에서처럼 "내 몫에 태인 십자가"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십자가가 있고, 가

 

정적인 십자가도 있습니다. 그리고 민족적인 십자가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부간에도 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십자가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 때문에 직장을 선택하는데 어려

 

움이 있습니다. 가정적인 십자가입니다. 오늘 이 민족은 아직도 남과 북이 통일을 이루지 못

 

한 채 분단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민족적인 십자가입니다. 이 모든 십자가에 내 역할이 있습

 

니다. 내가 지고 가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일수도 있고, 그것이 전도일수도 있고,

 

충성일 수도 있고, 또 그것이 가난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내가 지고 가

 

야할 몫은 내가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십자가를 찬양하기는 좋아하고, 바라보기는 좋아하고, 목에 걸고 다니기는 좋아하지만

 

그것을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즐겨지면 더 큰 축복이요, 억지로라도 지고 가면 거기 놀라운 은총과 복이 있다는 이 사실

 

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옛 성도의 십자가 노래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주여 오늘은 비가 옵니다 / 비오는 이날도 주를 따라 가리다 / 산이 무너져 길이 막히고 /

 

다리가 끊어져 건널 길 없어도 / 십자가 지고서 주를 따라 가리다.

 

주여 오늘은 바람이 붑니다 / 바람 부는 이날도 주를 따라 가리다 / 물결은 노하여 하늘을

 

찌르고 / 가 없은 바다에 파선을 하여도 / 십자가 지고서 주를 따라 가리다.

 

주여 오늘은 눈이 옵니다 / 눈오는 이날도 주를 따라 가리다 / 갈 길은 만리요 또 아득하고

 

/ 눈보라 몰아와 앞길을 막아도 / 십자가 지고서 주를 따라 가리다.

 

주여 오늘은 죽음이 옵니다 / 죽음이 오는 날도 주를 따라 가리다 / 앞에는 칼이 가로막히

 

고 / 뒤에는 총이 위협하여도 / 십자가 지고서 주를 따라 가리다"

 

 

 

 

 

 

십자가의 고통

 

갈3:1

 

순복음성남교회/엄기호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33년 일생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부터 아리마대 부자 요셉의 새 무덤까지

 

어느 하나 사랑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갈보리 산상 십자가에 못 박혀 거

 

룩한 몸이 높이 달려 계시는 주님의 형상을 바라볼 때마다 새삼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 앞에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가신 믿음의 선진들은 다 하나같이 이 십자가의

 

감격 속에 살아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외에는 다른 것은 일체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했고, 십자가의 예수님만 자랑했고, 십자가의

 

신앙만 말했고, 십자가의 진리만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달린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빙거요 인류 역사의 중심이요, 기점이며 상도의 생

 

활 표준이요, 하늘 나라 가는 데에 길이요 개방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자기 서재 안에 ?십자가는 우주의 중심이요 인류의 생명이니라?

 

고 쓰고 십자가를 늘 묵상하였으며, 성 프랜체스코는 자기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는 제

 

군에게 전해 줄 만한 책자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나는 제군에게 전할 만한 설교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내가 제군들에게 전해 줄 유일한 것은 바로 이것밖에 없습니다?고 하며 십자

 

가 지팡이를 들어 보여 주었답니다.

 

한국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는 ?학생이 배우는 길은 학교로 가야 되고 어부의 고기 잡는

 

길은 물로 가야 되고 인간의 활로는 십자가로 가야 한다?며 평양 감옥에서 일본 경찰의 박

 

해 중에 ?영문 밖의 길?이라는 십자가를 명상하는 가사를 짓고 친히 십자가 제단에 순교

 

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옛 성도들은 이처럼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시간 우리 같은 흉악한 죄인을 위하여 내가 죽는 대신 그 거룩하신 몸이 상하시고 죽어 보

 

배로운 피로 나를 구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앙망합시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미련한 갈라디아 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

 

신 형상이 ?밝히 보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육신의 눈을 감고 신령한 마음

 

의 눈을 열어 저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 위에 두 손, 두 발이 못 박혀 붉은 피를 흘리며 달

 

려 계시는 주님의 형상을 주목합시다.

 

지금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달린 형상이 보입니까? 거룩하신 주님의 성체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선지 핏자국이, 그 머리 위에 씌워진 끔찍스러운 가시 면류관이 보입니까?

 

가시로 상한 머리에서 점점이 떨어지는 붉은 피로 얼룩진 예수님의 얼굴이, 악인들의 무자

 

비한 단련으로 피곤해서 움푹 들어 가 버린 주님의 눈, 창상으로 그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핏자국이 보입니까? 불법한 빌라도 채찍에 맞아 터지고 멍든 그 몸의 상처, 지금 우리 주님

 

의 전신에서 예리하게 흘러내리는 보배로운 피를 다시 한 번 쳐다봅시다.

 

우리 주님의 고통의 그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인간의 적은 두뇌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

 

합니다. 그러나 그 주님의 고통을 우리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주님의 신성으로 당한 고통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만물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며,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시며, 지존 지성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분에게 모욕을

 

가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영광의 면류관 대신 가시관을 씌웠고, 왕의 홀 대신에 갈대

 

를 그 손에 들리어 주었고, 황금 옷 대신에 낡아 떨어진 홍포를 입혔고, 화려한 궁전 대신에

 

감옥에 가두었고, 의장병 대신에 포악한 로마병정을 부쳤고, 호산나 만세 대신에 십자가에

 

못박으라 아우성 쳤고, 최대의 존경대신에 모독적 언사로 농락했고, 예물 대신에 침뱉고 뺨

 

을 쳤으며, 최대의 경례 대신에 불법한 태장으로 쳤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배 대신에 십자가에 못박아 무참히도 살해했습니다. 이 얼마나

 

큰 고통이요 큰 모욕이며 큰 희생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그 본체의 형상이시

 

고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이처럼 모욕과 고통을 주었습

 

니다.

 

 

주님의 영혼에 고통

 

 

본래 주님은 이 세상에 도성인신하여 들어오실 때에 우리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고 자원

 

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전 인류의 죄를 자기 자신의 한

 

몸에 인수하시고 이것을 담당하려고 하실 때 너무나 많은 죄에 놀라셨습니다. 그 수많은 죄

 

를 하나 하나 바라보시니 그만 놀랍고 민망하여 탄식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여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내게서 이 잔을 떠나가게 하소서? 부를 짖지 않을 수 없습니

 

다. 그것도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죄가 아니라, 만국, 만민, 만세, 만대, 억조 창생의 죄짐을

 

바라보니 그 슬픔, 그 고통, 그 답답함, 그 민망함 가히 형언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매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기도하시는 주님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핏방울같이 되었습니다.

 

인간들의 끝없는 무거운 죄짐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렸을 때는 주님도 너무도 답답하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

 

까??라고 외쳤습니다. 육신의 형제들, 친척들, 제자들 그 누구도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율법사, 제사장, 장로들 모두 예수님을 쉴새없이 괴롭혔습니

 

다. 제자가 배신하고(막 14:10), 다른 제자들은 도망했습니다(막 14:50). 벌거벗음과 침 뱉음

 

을 당하셨습니다. 옆에 못 박힌 강도까지 십자가에 계신 주님을 회롱했습니다. 주님의 이 큰

 

고통을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습니까? 성부 하나님 마저 예수 그리스도 그 아들을 버리셨

 

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주님이 영적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육체의 고통

 

 

우리 주님이 하늘 영광 보좌를 내놓고 낮은 세상에 내려오신 것부터가 고생이셨습니다.

 

식민지 나라에서(눅 2:1), 말구유에서 나시고(눅 2:7), 가난하고(눅 2:24; 레 12:8), 천대받는

 

목수의 가정에서 자라나셨으며(마 13:55), 집 없이(눅 9:58), 산에서 기도로 지내시고(요 8:1),

 

행로에 곤하셨으며(요 4:6),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막 6:31), 죄인(마 9:11), 병자(요 5:6), 귀

 

신들린 자(막 5:6), 슬픔당한 자(눅 7:11) 들을 돌보셨고, 곳곳에서 전도하시느라(막 1:38) 고

 

생이셨습니다.

 

십자가는 페니키아 인들이 생각해 낸 심히 악한 죄인들, 특히 노예들을 못박아 죽이던

 

형틀이었습니다. 온몸은 줄어들고, 손발의 피는 마르며 머리와 장부에는 피가 몰려 두통, 창

 

상열, 파상풍을 일으킵니다. 온 몸에 채찍에 맞으시고, 몸에는 멍들어 있고, 그 몸 군데군데

 

는 터지고 미어져 핏빛이었고, 그 무릎은 칠전팔기하시며, 터지고 깨졌고, 그 말은 돌 뿌리

 

에 채어서 붉은 피로 물들고 그 얼굴은 로마 병정들에게 맞아 멍들어 부풀어올라 분간할 수

 

없이 되었습니다. 겨우 겨우 갈보리 산상에 올라오니 악당들은 주님의 입은 옷을 다 발가벗

 

기고 십자가 위에 눕힌 채 사지를 결박하고 양손 양발에 모진 무쇠 못으로 못박으니 그 고

 

통이 얼마나 하셨겠습니까?

 

가시관을 쓰시고 고통을 덜어주는 쓸 개탄 포도주도 안 받으시고,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

 

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리셔서 몸부림치시고 목마르셨습니다. 옆구리에 창을 받아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버림을 당하고 심지어 유일한 피난처이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마저 버림당

 

하는 슬픔을 맛보셨습니다. 관리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헤롯왕은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

 

급했습니다. 대 제사장은 예수님이 참람하다고 정죄하였고,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면

 

서도 채찍질하며 사형언도를 했습니다. 민중들도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삼 사일 전에만 해도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 호산나?하며 종려가지를 손에 들고 환영하던 그들이 돌변하여

 

피에 굶주린 사자 떼 같이 ?그를 죽이소서, 그를 죽이소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소서? 하

 

며 아우성을 쳤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모시던 제자들은 어디 갔습니까? 병고침 받은 사람은 다 어디 갔습니

 

까? 죽었다가 다시 산 나사로는, 순교를 각오했던 베드로는 어디 갔습니까? 모두 다 예수님

 

을 버린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고독하게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셨습니다. 해조차 빛을 잃어 천지가

 

캄캄해지고, 땅은 지진으로 진동하고, 바위는 터져 잠자던 성인의 무덤이 열리고 죽은 사람

 

은 다시 살아나며, 성전 휘장은 위에서 밑에까지 사람이 손대지 않고 갈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 형상을 밝히 바라봅시다.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새 출발합시다.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 그 고통이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과 영생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아래서 내 재산, 내 시간, 내 생명 다 바쳐 헌신합시다. 그러면 네 영혼

 

이 잘됨같이 범사에도 잘되고 강건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을 믿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왕

 

마27:32-44

 

서울교회/이종윤목사

 

 

왕이라는 사람은 모든 백성을 자기 노예처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권세를 가졌습

 

니다. 나라의 모든 재산, 땅이 왕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왕은 대궐(궁궐)에서 삽니다.

 

이렇듯 모든 것을 누리고 사는 것이 왕입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 우주를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Ⅰ. 십자가는 저주받은 자가 받는 사형틀

 

시세로(106-43 B.C.)는 십자가를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틀이라 했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페르샤의 사형틀이었으나 칼타고를 거쳐 로마로 전수되었던 것인데, 너무 잔인하고 추

 

하여 노예를 죽이는 데만 사용하고 로마인에게는 사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박히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십자가가 있었는데, '나무에 달린 자

 

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신 21:22-23)고 생각하여 십자가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

 

로 지게 되었었는데, 유대인을 증오하는 로마인이었던 그는 알렉산더(행 19:33)와 루포(롬

 

16:13)의 아버지로 예수를 만난 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 가족은 앞서가는 교인이 되었습

 

니다.

 

 

Ⅱ. 예언의 성취로서의 십자가

 

마태는 예수님이 구약의 예언을 6가지로 성취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로 쓸개 탄 포도주

 

를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예수님에게 마시게 하였다는 것(34절-시69:21), 둘째로 군인들이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눠가졌다는 것은 모두 이미 예언이 되었던 것(35절-시22:18)들입니다.

 

셋째로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쓰여진 죄패(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명패)를 붙인 것(37절)

 

과 넷째로 두 강도가 함께 못박혔다는 것(38, 44절-사53:12) 역시 예언된 말씀들입니다. 다

 

섯 번째로 지나가는 자들로부터 모욕을 받았다는 것(39, 40절-시22:7)과 마지막으로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조롱하였다는 것(41, 42절-시22:8)이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세워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Ⅲ.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 세워졌다.

 

인간 편에서 십자가를 봤을 때, 그것이 세워진 이유는, 유대인이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저주하였기 때문이고, 로마인에게는 예수님을 정치적인 반란꾼으로 몰았기 때문이며, 가롯

 

유다의 배신 때문이었습니다. 또 가롯 유다의 탐욕과 대제사장의 시기, 빌라도의 비겁함이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본 십자가는, 첫째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입

 

니다. 둘째로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여 화해케 하시려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구속, 용

 

서, 구원하시려고 죽으셨고(negative), 중생, 영생, 화평케 하시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positive). 셋째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죄는 원자탄 미사일의 암세포보다 무섭

 

습니다. 그러한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해방시키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새 언약의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고전

 

11:23)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십자가는 피투성이에 천박하고 추하고 혐오감에 찬 사형틀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왕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달리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겁고 컸으면 이 같은 형벌을 받으셔

 

야 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이며 사랑이고 하나님의 자비인 것

 

입니다. 당신을 위해 예수님은 그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모범을 보이시기 보다 내가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으심으로 우리 대신 매를 맞으신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

 

이 없이는 우리 구원은 없습니다. 모두 그 은혜를, 그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성도들 되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자

 

사53:4-6

 

김해양문교회/박병지목사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의 고통을 기억하

 

고, 주님의 십자가를 명상하며 십자가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 고난주간의 의미입니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인 동시에 기독교의 본질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그런

 

데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점차 멀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십자가는 소홀히 여기고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만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습니

 

다. 멸시 천대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셨으니 우리는 부활 영광만 취하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

 

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의 중요성을 백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십자가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부

 

활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없는 십자가는 또한 의

 

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며 기독

 

교신앙의 핵심입니다.

 

 

초대교회는 오직 십자가와 부활만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교회안에는 하나님

 

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자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잃어버린 것은 고사하고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와 전혀 관계없는 신앙의 생활을

 

하기도합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자타가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와 관계없는 신앙

 

은 무익합니다. 마치 서울가려는 사람이 광주가는 버스표를 10장을 가졌다 하더라도 서울가

 

는 차표 한 장 없으면 서울을 갈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 1:18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

 

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신앙을 가졌다 할지

 

라도 십자가의 신앙이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

 

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

 

하니라』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이 시간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듣는 중에 십자가의 신앙이 여러분께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TV를 통해서 종종 텔런트의 목거리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신앙적인 사

 

람들이 걸고 다니기도 하지만 마치 부적처럼 걸고 다니는 사람,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하고

 

자기 멋을 드러내기 위해서 차고 다니는 사람, 가지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의

 

십자가를 영광의 십자가로 생각하고 차고 다닐 뿐 거기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조차 십자가를 영광의 십자가로만 생각하고 십

 

자가에 담겨있는 참뜻을 외면하려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거기에 담겨있는 제자도의 의미를 다시한번 새겨보

 

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다시한번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

 

자가를 바라볼 때에 우리의 생명은 구원받고, 영적인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십자가에 대

 

한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중요성을 깨닫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룩한 희생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줍니다.

 

 

구약시대에는 1년에 한 번씩 속죄의 절기가 있었습니다. 속죄일이 되면 제사장은 두마리

 

의 염소를 준비하여 하나는 여호와를 위하여 속죄제사를 드립니다. 속죄제사는 죄지은 사람

 

이 용서받기 위해서는 짐승을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짐승이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희생제물을 드려서 그 짐승이 불에 탐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

 

기 죄가 불살라 없어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또하나는 아사셀을 위하여 모든 백성들 앞에

 

서 수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어 백성들의 죄를 염소에게 지운 다음 광야로 쫓아 버립니다(레

 

16:10). 염소는 광야에서 맹수의 먹이가 됩니다. 이로써 백성들의 죄가 사해지는 것이었습니

 

다. 이러한 구약의 종교행위 모습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하였습니

 

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인간의 역사는 죄악의 역사였습니다.

 

 

죄는 사망을 낳습니다. 사망은 곧 인간을 지옥으로 이끄는 멸망입니다. 이처럼 죄로 말미

 

암아 지옥으로 가게 된 온 인류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악을 등에 질머지시고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은 동물이나 사람의 희생과는 다르

 

기 때문에 거룩한 희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어린양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들의 무거운 죄악의 짐을 벗겨 주었습니다. 광야에 장대위에 달린 구리뱀을 바라본 자

 

가 죽음에서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못박힌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바라 볼 때에 죽음에서 벗어나 살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피와 살로 우리의 생명을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살과 피를 희

 

생하심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신 것입니다. 북미 일대에서 사는 고기 가운데 King Salmon

 

이라는 연어가 있습니다. 연어는 매년 2월을 전후해서 알을 낳고 분화하게 됩니다. 새끼가

 

부화하게 되면 어미 연어는 곧 죽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어린새끼가 어미의 살을 먹고 자라

 

나게 하기 위해서 어미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어디에선가

 

어미 거미의 잔등에 달라붙어서 어미의 살을 파먹고 있는 수십마리의 새끼 거미를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미물이지만 새끼를 위한 어미의 지극한 사랑의 발로로서 거룩한

 

희생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영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

 

도는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혈로써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었고, 그분의

 

살의 찢음을 인하여 우리는 마치 연어가 제 어미의 살을 먹듯이, 거미가 제어미의 살을 파

 

먹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서 영혼이 살찌고 자라고 사는 것입니다. 벧

 

전2:24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느니라"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는 너희를 위한 내 살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잔에 포도주를 잔에 나눠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언약

 

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나와 여러분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살이 찢기셨고, 피를 흘리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나

 

와 여러분의 영을 살리셨고, 지금도 생명으로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보는 사람은

 

오늘도 그분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고 생명이 구원받습니다.

 

 

일본의 삼포능자라고 하는 여류 소설가의 '양치는 언덕'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그 소설

 

에는 나오미라고 하는 목사 딸이 나옵니다. 나오미는 료오이찌라고 하는 남자에게 반해 부

 

모를 버리고 도망 합니다. 그러나 그 료오이찌라고 하는 사람은 술꾼이요 바람둥이이었기

 

때문에 원만한 결혼생활을 할 수가 없어서 결국 얼마 후 친정으로 돌아 오고 맙니다. 그때

 

료오이찌라고 하는 사람이 폐병에 걸려 나오미에게로 옵니다.

 

 

나오미는 그 사람을 받아 들이기가 싫었지만 목사인 아버지가 그를 받아들입니다. 처가

 

집에서 요양생활을 하는 동안 료오이찌는 처가집 식구들의 믿음에 감동을 받아 예수를 영접

 

하게 됩니다. 요양 생활을 하면서 료오이찌는 다락방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아무도 보지 못

 

하게 흰 천으로 그림을 덮어 놓곤 합니다. 그리고 부인에게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선물로

 

그림을 완성하여 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고 그림도 다 완성 되었을 때

 

전에 사귀던 좋지 못한 여자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할 수 없어서 나가 만납니다.

 

 

술을 권하지만 마시지 않습니다. 하룻 밤 자고 가라고 유혹하지만 그 유혹에 빠지지 않

 

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몰래 술에 수면제를 탑니다. 그리고 이 한잔만 마시면 보내 주겠

 

다고 속입니다. 술에 수면제가 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술을 받아 마신 료오이찌는 그곳

 

에서 잠들지 않으려고 길을 나섰다가 길에서 잠이 들어 그만 동사하고 맙니다. 소설의 클라

 

이막스는 료오이찌를 장사하고 그가 다락방에서 그렸던 그림의 천을 벗기는 것입니다. 힌

 

천을 벗기자 거기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발아래 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예수님의 발을 붙잡

 

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손등위에 예수님의 피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료오이

 

찌 자신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십자

 

가의 피가 자신의 죄를 씻어주심을 그는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와 같은 마음과

 

믿음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면 그가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든지 간에 상관없

 

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없이 받아 들일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능력이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게 된 우리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그 십자가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 구원을 받았

 

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

 

는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매우 중요합니

 

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다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중보자란 중매장이란 말과 같습니다. 처녀, 총

 

각을 중매하여 연결맺어 주는 중매장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매맺

 

으신 분이시기에 중보자라고 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맺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바로 우리와 하나님을

 

관계맺어 주셨습니다.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

 

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인간은 양처럼 어리석습니다. 방향감각도 없습니다. 방어

 

무기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산다고 목자를 떠나서 제길로 갔습니

 

다. 제길로 갔다는 것은 목자를 따라가지 않고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

 

것이 인간의 타락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교만이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어리석음이 있습니

 

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르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떠나 독립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인간의 정복하고 지배하여 자기 왕국을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인간이 교만의 바벨탑을 쌓습니다. 그렇게 자기 멋대로 하

 

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고집만을 주장하고 자기 생각대로 주장하는 인간, 하나님이 보실 때

 

희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

 

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

 

다. 거기서 죄인의 구원을 완성시켜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상에 예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인간의 구원을 완성시키신 것입니

 

다. 인간의 죄값을 십자가의 보혈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 때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막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중보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4층 아파트에서 불이 나서 아래층에서부터 물이

 

윗층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윗층에는 미쳐 피하지 못한 여러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4층에 아버지와 세 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래 층에서 불이 타 올라오자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으나 출입구가 막혀 있고 불이 워낙 세게 타올라서 도저히 탈출할 수가 없었

 

습니다. 아래 층에서 타올라 오는 불길과 연기로 세 아들은 질식할 것 같았고 기침을 하며

 

견뎌내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아들들을 데리고 옆에 있는 건물을 향한 창문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 창

 

문에서 옆집 창까지는 불과 1m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향하여 건너 뛰라

 

고 재촉했으나 아이들은 건물 아래를 내려다 보고는 그 높이에 질려서 떨고만 서있는 것입

 

니다. 불은 자꾸만 타올라서 이제는 사층까지 번졌습니다. 더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된 아버지

 

는 자기 편의 창문에 발을 걸고 건너편 건물의 창문을 향하여 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

 

는 창틀을 붙잡고 몸으로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얘들아 어서 내 몸을 타고 건너라 어서!" 아버지의 외침을 들은 아들들은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몸을 밟고 무사히 옆집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세 아들을 살리고 자신은 결국 희

 

생하였던 것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다리

 

가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몸을 밟고서 우리

 

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며

 

다리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선언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

 

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결코 가롯 유다의 배반때문은 아

 

니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것은 우리들의 죄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

 

라"고 오래 전에 이미 말씀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머리에 쓰시

 

고, 양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찔려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는 1)죄씻김을 받

 

았으며, 2)그분의 살과 피로서 생명을 얻고 3)그분의 희생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 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뿐 만 아니라 밖에 나가서

 

십자가를 자랑해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는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나의 십자가를 확인하고 바로 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본문 : 마 21장 1-11절

 

 

오늘은 교회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공생애의 마지막 주간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므로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입성을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고, 손에 들고 흔들어 환영했습니다.

 

여기서 종려주일의 명칭이 유래했습니다. 따라서 종려주일은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성도들은 이 종려주일로부터 일주일을 고난주간으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보내게 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 본문의 정황을 먼저 살펴보자.

 

1절 상반절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감람산은 예루살렘 성의 동쪽에 위치한 산이다. 벳바게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감람산의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생각이 된다.

 

 

예수님은 벳바게에서 두 제자를 마을로 보내시어, 나귀새끼를 끌고 오게 하셨다.

 

제자들은 나귀를 끌고와서,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 위에 얹었고,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셨다.

 

벳바게에서 예루살렘 성까지는 직선거리는 1km가 조금 넘는 거리였고, 벳바게와 예루살렘 사이에는 기드론 꼴짜기가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기드론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서, 다시 예루살렘성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교회에서 출발해서 한샘약수터 정도까지 올라갔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얼마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까? 새끼 나귀의 보통 걸음으로 30분정도?

 

 

그런데 그냥 갈 수 없었다. 왜? 환호하는 무리들로 인해서...

 

따르는 무리들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8절의 '무리들 대부분은'을 직역하면, '아주 많은 무리들', '매우 큰 무리'라는 뜻으로,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의 수가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리들이 예수님을 앞에서 뒤에서 따랐다.

 

 

요한복음에 보면

 

요 12: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큰 무리가 예수님을 맞으러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골짜기로부터 언덕으로 난 길을 따라 나귀를 타고 올라가실 때, 아주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따라가며 열열히 환영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마중나온 무리들이 합세했다.

 

학자들에 의하면 유월절 행사 기간 중에 예루살렘에는 2백만 이상의 유대인들이 모인다고 한다.

 

예수님이 입성할 당시 예루살렘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2백만이 넘는 사람 중에 상당 수가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하며 따랐다고 보면, 환영하는 인파는 적어도 수만명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무리들이 어떤이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깔았고, 또 어떤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깔았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겉옷과 종려나무를 밟으시면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무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된다.

 

사직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6월 4일 한국과 폴란드가 축구 게임을 한다고 상상을 해 보라. 5만 4천의 관중이 입추에 여기자 없이 꽉 들어찼다. 운동장 거의 2/3가 붉은 색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런데 전반 내내 졸전을 펼치다 결국 1대0으로 뒤진채 마쳤다.

 

후반전, 답답한 상황의 연속 가운데 40분경 결정적인 찬스를 잡은 황선홍이 멋진 슛으로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온 구장 안에 태극기의 물결, 그리고 환호성!!!!

 

그런데 그기에서 끝이 아니다. 종료 직전 문전 혼전 중에 황선홍의 발이 움직이는 순간 드라마와 같이 역전 결승골이 골네트를 갈랐다.

 

그때 온 경기장 안의 분위기가 상상이 되는가?

 

미친듯이 발을 구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얼싸안고, 옷을 벗어서 흔들고, 태극기를 흔들며, 떠나가도록 외치는 함성 소리가 상상이 되는가? '황선홍' '황선홍'

 

여러분 그 광경을 상상해 보라. 바로 그 장면을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의 광경을 떠 올리면 된다.

 

 

10절에 보니까 환영 인파의 물결과, 환호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온 예루살렘 성이 소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동했다는 단어는 땅이 흔들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입성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이 진동한 것이다. 모인 수많은 군중들 사이에 급속도로 예수님의 이름이 퍼져 나갔다.

 

예수님이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하셨으므로, 예수님을 아직도 잘 모르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흩어진 디아스포라 가운데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객들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모를 수 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등장은 실로 충격이었다.

 

온 성안에 이 외침 소리가 가득찼다. '이는 누구뇨?'

 

요즘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노무현 바람이 부는 것처럼, 성안에 바람이 불었다.

 

예수 바람!

 

 

이것이 본문의 정황이다. 본문의 분위기가 그려지는가?

 

 

● 자 그렇다면 왜 그렇게 무리들이 환호했을까?

 

무리들이 예수님께 취한 태도를 통해서, 그 이유을 발견할 수 있다.

 

8절을 한 번 읽어보자.

 

마 21: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겉옷을 펴는 것은 왕에 대한 충성을 나타낸다.

 

구약에서 예후가 왕이 될 때 이런 행위가 있었다.

 

왕하 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여기서 '나무가지'는 '종려나무가지'였다(요12:13).

 

요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그런데 종려나무 가지는 보통 승리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그래서 주로 왕이 지나는 길에 펴놓거나 그것을 들고 흔들었다.

 

결국 무리들이 종려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또 흔든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환영하고 있는 것인가? 왕으로 환영하고 있다.

 

 

자 그런데 9절에 보니까 예수님을 향해 무리들이 지르는 함성이 있다.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 함성에도 의미가 있다.

 

-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환호에는 예수님이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인정뿐 아니라, 메시아이길 희망하는 기대가 담겨 있다.

 

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환호성은 시편 118:25-26에서 따온 것이다.

 

시편 113-118편을 할렐 시편들이라고 하는데, 유월절 축제 기간에 정기적으로 낭송되었던 시였다.

 

유월절이 무엇을 기념하는 절기인가? 이스라엘의 애굽의 압제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그런데 바벨론의 침공으로 멸망을 당해, 나라없은 설움 속에서 헬라와 수리아, 그리고 로마의 압제를 계속해서 받아오던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민족의 해방을 대망하는 절기로 의미가 부여 되었다.

 

유월절에 낭송되었던 이 시편들의 내용은 순례객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노래였고, 이 시편에는 그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높이 외치던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란 뜻이 아닌가?

 

무리들의 함성은 이것이다. '다윗의 자손이여 하나님이 보내신 바로 그 메시야이신 예수님!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무리들은 지금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하나님의 메시야로 환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오랜 메시야 대망을 가졌던 무리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인식하고 그가 당장에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을 압제와 고통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의 왕으로 오시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당신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메시야로 환영합니다.

 

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다윗의 무너진 왕조를 회복하시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소서.

 

이것이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함성을 지른 이유였다.

 

 

● 옹위하는 무리들 속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섞여 있었다.

 

제자들은 지금 굉장히 흥분된 상태이다. 왜냐하면 평소와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나눈 대화가 있다.

 

마 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선지자로부터 예언된 메시야가 행하실 일들

 

사 35: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은 바로 내가 그 예언된 메시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소경을 보게 하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시고, 벙어리가 말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므로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셨다.

 

 

제자들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마침내 이분이 오실 메시야이심을 확신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다윗의 왕조를 회복할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할 것을 결심했다.

 

대권을 향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메시야이심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기를 숨기려는 태도를 취했다. 병을 고쳐 주신 후에도 아직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고, 한번은 많은 무리가 와서 그를 억지로 왕으로 세우려고 할 때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버리기도 하셨다.

 

제자들이 보기에는 이것이 너무나 이상했다. 능력도 있고 인기도 있고 기회도 주어졌는데, 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지 않으실까? 왜 왕으로 군림하지 않으실까?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의 태도가 그와는 정반대였다.

 

제자들을 시켜서 나귀새끼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시고,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아가시면서, 무리들이 즐거이 부르는 호산나와 찬양을 받으셨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눅 19: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어떤 바리새인이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제자들을 책망하려고 할 때 주님은 "만일 이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오늘 왕으로 말씀하고 행동하고 계신 것이다. 제자들은 흥분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예수님이 왕으로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기 위해, 행동하시기 시작하신다고 생각했다.

 

마 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제자들이 가장 먼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는 표를 했다. 그들의 마음에 이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셨다.

 

환호하는 무리들 속에서 그들을 황홀했다. 상상의 나래를 폈다.

 

화려한 예수님의 대관식, 그 자리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려한 의상으로 높은 단상에 도열한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이제 수고는 끝났어, 조롱과 수치와 배고픔과 가난과 무시는 다 끝났다."

 

"이제 부귀와 영광과 안락과 연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제자들은 이런 꿈으로 한껏 부풀어 있었을 것이다.

 

 

● 그런데 여러분!

 

사랑하는 제자들의 동행 속에서,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수많은 무리들 속에서, 홀로 외로이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메시야로 만왕의 왕으로 입성하시나, 그러나 그 입성은 세상 임금의 입성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고, 그 나라를 제자들에게 주시지만, 그러나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나귀 새끼를 타심으로 나타내셨다.

 

나귀는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실어 나르는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왕들은 나귀를 타지 않았다. 나귀는 일반 평민들이 타는 동물이었다.

 

그러므로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온다는 것은 이 세상의 임금들과 다른, 예수님이 겸손과 평화의 왕이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대로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 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고, 죄악으로 인해 참된 평화를 잃어버린 세상에 평화를 주기 위해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 평화는 전쟁으로 무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압제자에게 받은 그대로 더 큰 힘으로 짓밟고 보복함으로 임하는 평화가 아닙니다.

 

 

그 평화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만이, 죄로 막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을 허시고, 원수된 관계를 회복하실 수 있음을 아셨기에,

 

섬김을 받는 왕이 아니라, 겸손히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주시는 겸손의 왕으로 입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영광을 위하여 나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수치와 고통과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0: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십자가를 향한 결단의 한 걸음 걸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환호하는 군중들도,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제자들도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은 긴여정의 마무리를 향해 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여정은 나사렛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늘 위에 지극히 높은 보좌에서, 이 낮고 낮은 땅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골고다 십자가를 향해서 지금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의 영광을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죄인들과 같이 되셨을 뿐 아니라, 수치와 모욕과 저주의 고통스런 십자가를 향하십니까?

 

 

왜 수많은 동족들이 환호하며, 자신의 왕으로 영접하며, 군림하며 절을 하는 그 자리에서, 묵묵히 저주의 십자가를 향하십니까?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바로 우리들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죄의 저주로부터의 해방과 평화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3: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십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 때문입니다.

 

조금만 손해를 봐도 예수님을 원망하는 우리 때문입니다.

 

조금만 바빠도 예수님이고 교회고 사역이고 다 내 팽겨쳐 버리는 우리 때문입니다.

 

모든 것, 목숨까지 다 주신 예수님 앞에서, 그 예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으려는 지극히 이기적인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발을 씻으시고, 이제는 나를 대신해서 지체를 사랑으로 섬겨라 하신 예수님 앞에서, 나와 맞지 않다고 지체를 비난하고 헐뜯고 여전히 욕하는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자신 위해서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는 시간과 돈과 정열을 아낌없이 다 사용하면서, 예수님을 위해서 몸된 교회를 위해서는 조그만 것 드리는 것도 벌벌떠는 아까와하는 우리들 때문에, 이 부족한 우리들 때문에 이 패역한 우리들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당신의 십자가로 인해 죄사함을 누리고 하나님과 화목하는 복을 누릴 우리들을 위해서 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굴복하므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생애를 던질 우리들의 가능성을 위해서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십니다.

 

군중들의 환호속에서, 제자들의 흥분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십니까?

 

 

종려나무를 흔들며 환호하는 무리들 속에 바로 나의 모습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나귀새끼에 겉옷을 걸쳐주며 헛된 욕망으로 가득차 있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향해서, 자신의 몸과 피와 물을 다 쏟아서, 바로 우리들의 구원과 평화를 주시고자 나아가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예수님을 기억하는 이 종려주일을 지키며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욕망이 내 안에 가득차 있습니까?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이 나를 지배하고 있습니까?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여전히 나의 마음입니까?

 

나의 바람은 오직 물질적인 회복입니까?

 

세상적인 회복과 성공을 바라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십자가를 향한 그 길에, 사랑하는 제자들, 그리고 수많은 군중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홀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외롭게 십자가의 길을 걷는 그분의 옆에 이제 여러분이 함께 걷으시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는 일주일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됩시다.

 

 

 

그리고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십시오. 예수님! 왜입니까? 왜 십자가입니까?

 

예수님의 이 한마디를 들으십시오. "바로 너 때문이다. 바로 너 때문이다

 

 

십자가로 승리하시다

 

골로새서 2:8-15

 

소망교회/곽선희 목사

 

 

아프리카 우간다 어느 교회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당시의 우간다는 독재자 이디아민이라

 

고 하는 악명이 높은 그러한 대통령이 통치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케파쎔팡기 라고 하는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는 7000명이 넘는 큰 교회로 영적 지도자로서 귀한 역사를 담당하

 

고 계셨습니다. 그는 부득불 정부를 비판하는 설교를 종종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독재

 

자에게 억압을 당하고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는 그런 설교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정부

 

에 알려졌습니다. 부활절 아침입니다. 다섯명의 비밀경찰이 찾아왔습니다. 모두는 다 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배 후에 그들은 사무실에 총을 가지고 겨누

 

며 들어와서 "반국가 사범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처단하기 위해 왔소"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이미 각오했던 것처럼 태연스럽게, 온유하게 대답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 아침

 

입니다. 나는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내게 2분간의 시간만 주시면 기도하고

 

나의 생을, 내 목회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랬습니다. 그러라고 허락을 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또박또박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간다 통치

 

자 이디아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 명령을 원치 않으면서도 받아들여야 하는 불행한 이

 

다섯 사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우간다 국민에게 자유를 주시옵소서. 내 사랑하는

 

조국이 사랑의 땅, 의의 땅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죽음으로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아멘." 기도하는 목사님의 눈에서는 한없이 눈물이 솟았

 

습니다. 비밀경찰도 울었습니다. 마침내 그 대장되는 사람이 그렇게 말합니다. "엄청난

 

실수를 범했습니다. 못본 것, 못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하고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갔습

 

니다.

 

여러분, '가장 강한 것이 무엇이냐?'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장 강한 것은?'

 

하는 제목의 글입니다. "가장 강한 것은 돌이다. 그러나 돌을 깨뜨리는 것은 쇠다. 쇠를

 

녹이는 것은 불이다. 불을 끄는 것은 물이다. 물은 구름에 흡수되어 버린다. 구름은 바람

 

에 날려간다. 바람은 사람을 어찌하지 못한다. 사람은 죽음을 향해서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런고로 죽음이 가장 강하다. 죽음보다 강한 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죽음을 이

 

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하겠습니다. 크리스챤이 누구입니까? 도대체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뭡니까? 크리스챤이라는 것은 바로 십자가 이해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어떤 측

 

면에서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올시다.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속성이 결정됩니다. 여

 

러분, 분명히 알 것은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아주 처참한 죄인에 대한 처형법입니

 

다. 아주 부끄러운 죽음입니다.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인류역사상의 가장 비참한, 가장

 

부끄럽고,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합

 

니다. 십자가 안에 무궁무진한 비밀이 숨겨있습니다. 그 속에 미스테리가 있습니다. 엄청

 

난 생명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바로 몇 시간 후에 십자가를 지실 것인데 제자들

 

앞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말씀하시고 십자가를

 

집니다.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신 게 아니라 승리하시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승리로 십자가

 

를 졌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안에 나타난 신비입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는 시간에 말씀하

 

십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

 

다" 엄청난 선언이요 여유요 엄청난 위세입니다. 비록 죽으면서도 그렇게 죽이는 자들을

 

여유 있게 용서하고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에

 

짓궂은 생각입니다만은 한마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어떨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

 

을 좀 할 때가 있어요. 십자가 위에서 내려다보시면서 "이놈들, 두고보자" 만일에 그렇게

 

말씀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한마디가 역

 

사를 바꿉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완전히 다른 의미로 만든 것이올시다. 여러분, 십자가는

 

절대로 불가피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속에 자발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돼요. 그

 

것이 승리올시다. 억지로 도망가다가 능력도 없고 지혜도 없고 일이 꼬여들어서 할 수 없

 

이 죽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절대로 실패가 아닙니다. 성경이, 복음서가 계속 증거하는

 

그 주제의 초점이 어디 있느냐 하면 십자가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요. 십자가는 예정된

 

것이요 십자가는 계획된 것이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미리 약속된 것이요 그리

 

고 십자가를 진 거라고.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성경책 전부입니다. 총 주제올시다. 이걸

 

모른다면 성경을 못 본 사람이지요. 예수님의 많은 이적이 무엇을 말합니까? 병든 자를

 

고치고 귀머거리를 열게 하고 아,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

 

로를 무덤에 가서 "나사로야 나와라"고 소리를 칩니다. 죽은 사람이 걸어 나옵니다. 이건

 

뭘 말하는 겁니까? 이러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십자가에 죽었다 이 말이에요. 그걸 설명

 

하자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설명하는 내용이에요 이게. 그 능력을 가지신 분이 말없이 십

 

자가를 집니다. 그래 빌라도는 그것이 알 수가 없어서 "Behold this man, 이 사람을 보라.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말없이 죽어가느냐" 하는 거지.

 

그걸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거기에 십자가의 비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예언해

 

왔습니다. 예표로 확증을 해왔습니다. 수많은 양,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대한 예표입니다. Prototype 입니다. 계속해서 보여주고 예언해주고 그 예언이

 

오늘 와서 십자가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클라이막스에 와서 이루어진 것이에요. 십자가

 

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하나님의 오묘한 우주적 섭리 속

 

에서 이루어진 계획적인 일이라는 것이죠. 거기에 진정한 승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완성이

 

요 이것은 예언의 성취요 이것은 본래부터 계획되었던 것이요 그것이 이 시간에 와서 결정

 

적인 시간에 이루어진 것이올시다.

 

그런가 하면 십자가는 뭐니뭐니 해도 사랑의 계시요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승리올시

 

다. 여러분, 사랑이 뭡니까? 사랑 자체도 설명하기 어렵지만 사랑의 소위 말하는 커뮤니케

 

이션, 사랑을 전달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울 수가 없어요. 여러분, 쉽게 사랑한다는 말했다

 

가는 뺨맞아요. 안 그렇습니까? 이 사랑이 전달이 돼야겠는데 이 사랑의 뜨거운 마음을

 

전달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의 진실한 언어는 희생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죄

 

송하지만 부잣집 아들딸들이 이게 문제라고요. 부모님이 아무리 사랑한다, 사랑한다 해도

 

그리고 뭐, 이거 해주고 저거 해주고. 그저 못마땅합디다만은 저로서 볼 때는 그거 지금 철

 

따구니 없는 아이들 장가가고 시집가는 데다가 뭐 큰집을 사주고……. 난 마음에 안들어요.

 

그렇게 하는 게 아니거든요. 저들도 저들대로 고생을 하고 살아야지. 그런데 부모가 옛날

 

에 고생했다고 해서 "너는 고생하지 마라"해서 집 사주고 차 사주고 다 사주는데, 틀림없는

 

것은 이렇게 사랑 받은 자녀는 불효자가 됩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어려워서 밥 한끼를 제

 

대로 못 주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면서 키운 그 자녀는 커서 철저하게 효자가 됩니다. 그

 

걸 아셔야 되요. 오직 희생만이 사랑의 효과적 언어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경험했습니다.

 

너무 가난하고 어려워서 겨울에 추운 때에 어머니가 메리야스 장사를 해요. 메리야스 몇

 

가지를 들고 다니면서 그저 이집 저집 다니면서 팔아요. 아들은 남의 사무실에 가서 청소

 

하면서 일을 하고 밤에 야간 고등학교를 다닙니다. 밤중에 돌아온 아들을 놓고 "미안하다.

 

오늘은 밥을 못했다" 구워놓았던 고구마 하나를 까주면서 "이거를 먹고 오늘은 때우자." "

 

어머니 시장하실텐데 어찌하여 이걸 제게 줍니까?" 그 고구마 하나를 받아먹으면서 눈물을

 

뚝뚝뚝뚝 흘렸어요. 이 아들이 고려대학교 상과 수석으로 들어갔어요. 그 어려운 가운데

 

고학을 해서 졸업을 했어요. 졸업식 날 제가 같이 참여했어요. 그 아들이 졸업장을 갖다가

 

어머니에게 주면서 "이것은 제게 아닙니다. 어머니의 졸업장입니다." 어머니가 "내가 너를

 

위해서 해준 게 뭐냐. 밥도 제대로 못 주고 학비도 못 줬는데……." 둘이 끌어안고 우는

 

장면은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저도 함께 울었습니다. 고구마 얻어먹고 자란 아이는 효도하

 

더라구요. 자동차 준 아이는 효도하지 않습니다. 그걸 알아야 되요. 이래서 많은 고난 속

 

에 희생, 사랑은 분명합니다. 저 분이 얼마나 희생하나? 나를 위해서 얼마나 희생하나?

 

그걸 보고야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을 수용합니다. 사랑을 믿게 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살리기 위하여 그는 죽으십니다. 끝까지 사랑

 

하셨습니다. 십자가 안에 엄청난 사랑이 계시되어있고 그 사랑 안에 나의 삶의 의미가 계

 

시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여러분, 이것은 의의 개시입니다. 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에요. 죄란 그저 흐

 

지부지 용서할 수가 없는 거예요. 죄 값은 사망입니다. 누가 당하든지 당해야 되는 것이에

 

요. 우리나라 정치처럼 흐지부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분명하게 밝혀서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으로 벌을 받아야지요. 누가 당하든지 당해야지요. 그냥 슬쩍슬쩍 넘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심판은 엄연합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런고로 주님께서 우리

 

를 대신해서 죽어야 했던 것이에요. 죽지 않고는 절대로 살리지 못하니까요. 그걸 아셔야

 

됩니다. 어느 마을이 아주 Puritan 마을인데 깨끗하게 정결하게 술집도 창녀도 없는 것을

 

자랑삼고 사는 좀 엄격한 마을이 있는데, 어느 처녀가 어쩌자고 결혼하기 전에 얘를 가졌습

 

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한 수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

 

요 또 그런가 하면 마을 사람들의 궂은 일은 온 마을의 궂은 일은 그 수도사가 하는 거예

 

요. 이런 수도사 한사람이 그 마을에 있었는데 이 처녀가 임신을 했는데 그 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대지 못하면 이것은 간음죄로 추방을 당하게 되고 잘못하면 맞아죽게 됩니

 

다. 그런데 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말을 안해요. 그래서 지금 추방당하게 되었는데 직

 

전에 하는 말이 "저 수도사"라고 했어요. 수도사는 그대로 끌려가서 많은 몰매를 맞고 고

 

역을 당하고 감옥에 처넣어졌어요. 시름시름 앓다가 감옥에서 죽었어요. 죽은 다음에 시신

 

을 염하면서 보니까 이게 남자가 아니고 여자예요. 남장 여인이었다고요. 모든 사람은 숙

 

연해졌습니다. 이 여자는, 이 수도사는 왜 '그것이 내 아이가 아니라'는 말을 왜 안했을까?

 

저 처녀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했어요. 내가 죽어야만 그 누군가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십자가는 의의 승리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먼

 

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거기서 완전히 충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충족원리라

 

고 합니다. 충족돼요. 그리고 죄인이 의인처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긍휼의 승리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거예요. 율법과 은혜? 은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만이 이 십자가만이 이 긍휼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음을 확증해 주시

 

는 것이올시다.

 

또한 이 십자가는 죽음의 승리입니다. 죽음을 넘어섭니다. 죽음을 초월합니다. 십자가는

 

생의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의 시작입니다. 그것을 믿고 죽음의 세계를 훌쩍 넘어서

 

는 것이 십자가의 말씀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생명의 길입니다. 칼 바르트 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는 그의 교회 교의학 속에서 "사람의 생의 단 한번의 기회"라고 하는 논

 

문을 씁니다. 사람에게 많은 기회가 있는 것 같으나 가장 중요한 기회는 딱 하나 있어요.

 

단 한번의 기회. 그것은 바로 곧, 죽음이다. 그 기회를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향하는 길로 맞이하느냐? 아니면 영원한 저주로 끝내는

 

시간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삽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그 한

 

순간을 작품처럼, 클라이막스로 그렇게 맞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모멘토리(Mementori)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곧 죽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사십시오. 모멘토리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모멘토 도

 

미니(Memento Domini), 모멘토 도미니,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주

 

님을 생각하라.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하라. 바로 이것이 나의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기회를 가장 귀한 기회로 의미를 바꾸어 놓을 수 있고 방향을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저는 이래저래 북한을 자주 내왕을 합니다. 북한에

 

있는 고관들과 자주 만나서 얘기도 해봅니다. 언젠가는 여러분 아시는 대로 평양과학기술

 

대학을 세우려는 큰 계획을 세우고, 재단 이사장의 임명장을 받고, 큰 행사를 치루고 저녁에

 

이렇게 파티를 하는데, "목사님, 목사님은 왜 우리를 돕는 겁니까? 무엇 때문에 도우려고

 

하는 겁니까? 목사님의 아버지가 우리 공산당원에 의해 총살당한 것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북한을 10여년 동안 돕는데, 그 돕는 이유가 뭡니까? 무슨 대가를 요구하는 겁니까?" "대

 

가 없습니다. 내가 평양시내에다가 굉장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그런

 

얘기는 안하겠습니다. 내가 목사니까, 뭘 요구한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보느냐?"

 

그러니까 "그래도 한 말씀 해주세요." "딱 한마디만 할께요. 예수믿는 사람들 죽이지 마세

 

요. 이것만 약속해주면, 제가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작년에도 400명 죽였다며. 인

 

정을 하더라고요. 그런고로 기독교인들 죽이지 말아달라고. 그는 말합니다. "안 죽일 수

 

가 없어요." "왜요?" "반동이거든요." "어째서?" "공산당보다 기독교인은 훨씬 셉니다."

 

왜 세냐고 물었더니 "공산당원들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무

 

서워하지 않습니다. 전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그

 

래서 죽는 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죽기를 기독교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거기서 죽을 뻔

 

하고 산 사람들 만나보니까 그 때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더라고요. 기독교인은 죽

 

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예수의 이름으로 죽을 수 있다면 그건 지상의 영광입니

 

다. 단 한번밖에 없는 기회입니다. 그러니 사양할 리가 없죠. 두려워할 리도 없죠. 승리

 

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승리를 위하여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를 보장받고 사는 것입니다. 승리를 믿

 

고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를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나의 승리의 계시가 바로 십자

 

가에 확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이 길을 통하여 승리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고 승리의 호산나를 먼저 부르고 당당하게 갈보리 언덕으로 가신 것입

 

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늘 십자가를 쳐다보며 십자가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주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직도 우리 마음은 어둡고 비겁하고 나약할 때가 많음을 용서하옵소서. 십자가 안에 있는

 

감추어진 승리의 의미를 날마다 확인하면서 영원한 승리의 생을 오늘 살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을 벗으라

 

출3:4-5, 엡 4:22-24

 

연동교회/이성희 목사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

 

여 '감추어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은 자

 

신을 계시하신다고 하여 '드러내신 하나님'(deus revelatus)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

 

게 비로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성경은 '여호와'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이란 하나님의

 

보통명사가 함께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라고 하

 

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자존

 

자, 영원한 자란 뜻입니다. 반면에 엘로힘은 전능자, 위엄을 가진 자란 뜻입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신이 유일하신 야훼 하나님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절대자이며 다른 신이 없

 

음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아덴 사람들은 신을 많이 믿고 있었습니다. 얼

 

마나 신이 많은지 이름 없는 신까지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신앙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그들을 미신적이라고 합니다. 일본도 신을 많이 섬기고 있습니다.

 

8백만의 신이 있다고 합니다. 신이 많은 것은 신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하

 

나님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는 거룩한 땅입

 

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는 그 어디나 거룩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

 

이 계시기 때문에 거룩한 자리인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님의 눈을 피하여 삼촌의 집

 

으로 도망을 갑니다. 도망가던 날 밤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약속하고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이것이 벧엘의 체험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자리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장소가 하나님의 집입니다. 거룩한 곳입니다.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우

 

리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면 얼마나 달라질까요?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면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롯이 살던 소돔에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있던 불풀무 속에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베드로가 갇혀

 

있던 감옥 속에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임재하셔서 보호하시고, 인도하

 

시고, 지시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이 삶의 자리에도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로랜스형제라 불리는 니콜라스 헤르만은 17세기의 평신도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얼마나 거

 

룩한 삶을 살았던지 부엌의 성자라고 불렸습니다. 그의 열망은 늘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그는 "영적인 생활은 하나에서 열까지 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연습으로 이루어진다", "우

 

리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가장 거룩하고 가장 필요한 연습은 곧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다

 

",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기술도 필요하지 않고 지식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오직 필

 

요한 것이 있다면 그 어떤 것들보다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고자 하는 그분께만 드려진 마음이

 

라 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그의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았습니다.

 

일전에 로버트 모건이 쓴 '홍해의 법칙'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시련을 당

 

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은 시련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복이다. 지독한 시련의

 

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보다 더 달콤한 것은 세상에 없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지금 가장 달콤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40년의 미디안의 생활의 위대한 끝은 하나님

 

의 임재를 맛보는 달콤한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순간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멋진 순

 

간입니다. 왕궁에서 바로를 알현하는 것에 비할 수 없는 감격이 있습니다. 어떤 세상의 사람

 

을 만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순간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가까이 오는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난 불꽃을 보려고 나아갑니다. 그 불꽃을 보려고 나아오는 모

 

세를 하나님은 보십니다. "보려고"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라아입니다. 이 말은 '관찰하다', '

 

깊은 주의를 기울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관찰하는 자세로 깊은 주의를 기울

 

이며 하나님께 나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라아라는 말을 명사로 사용하면 독수리라는 뜻

 

이 됩니다. 독수리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수리가 먹이를 향해 내려올 때보

 

면 먹이에만 집중하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의 눈이 독수리의 눈이었습니다.

 

지도자의 요건 가운데 하나는 세심한 통찰력과 집중력입니다. 지도자는 어느 하나도 적당히

 

보거나 흘리지 말고 세심히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동작을 통하여 지도자의 자질

 

을 주시하고 계십니다. 미국의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유명한 포수 가운데 요기 베라라

 

는 선수가 있습니다. 그 분이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하였

 

습니다. 관심을 가지게 되면 눈을 통하여 수많은 것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을 보려고 오는 것을 하나님도 보셨습니다. "보신지라"란 말은 모세가 보려고 오는 것같이

 

하나님도 보셨다는 뜻입니다. 두 말은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과 모세가 서로 응시하며 집

 

중적 관찰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

 

야". 하나님이 모세를 두 번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다급하심과 관심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

 

함을 부르실 때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사무엘을 부르실 때도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십니다. 괜히 부르신 것이 아니라 소명을 주시기 위한 초대였습니다. 소명을 수행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소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신 것은 일을 위한 초대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친밀하게 아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직 하나님의 실체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친밀하게 아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이

 

름도 아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

 

10:14)라고 말씀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이름으로 아십니다. 친밀하게 아십

 

니다. 우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가 내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나 아내나 남편이 나를 아는 것 보다 하나님이 나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아신 자이십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롬 8:29)라고 하였습니다. "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롬 11:2)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

 

금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지만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2)고 합니다.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를 때에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

 

다"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의 겸양으로 하나님께 응답하였습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위대한 선교 업적을 이룩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 선교단체에서 그에게 편지를 보냈

 

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도울 선교사를 파견할 예정입니다.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쉬운 길이 있으면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이 편지를 받

 

고 이렇게 회신하였습니다. "당신들이 쉬운 길로 오려는 선교사들을 파송하려면 나는 그들

 

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전혀 길이 없어도 오려는 사람들을 원합니다." 전혀 길이 없어도

 

오는 사람이 참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전혀 길이 없어도 올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 사람을 부르시고 찾으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가까이 하지 말고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지 말

 

라고 하십니다. 죄악된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가 에덴에서 범죄한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볼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동산

 

쫓아내시고 화염검으로 둘려 쳐 접근을 금지하셨습니다. 이 전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둘이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

 

간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구별된 곳입니다. 모세

 

는 아직 하나님의 자리에 가까이 갈 만큼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19:12에도 하나님

 

은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왜 신

 

을 벗어야 합니까? 경외와 존경의 표시로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어야 합니다. 성경은 신을

 

벗어야 하는 경우를 여러 번 말씀합니다. 여호수아 5:15에는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신을 벗

 

으라 하신 명령을 듣습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발의 신이란 세속에 살면서

 

더러워진 인간성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워진 인간성을 다 벗어야 합

 

니다. 신명기 25:9에는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

 

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신명기에서 신은 지위와 권리를 표시합니다. 신을

 

벗기웠다는 것은 지위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룻기 4:7-8에는 "옛적 이스라엘 중에 모

 

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의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

 

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 신을 벗는지라"라고 합니다.

 

 

신을 벗었다는 것은 권리를 양보하거나 권리를 이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었습니다. 세속에 살면서 더러워진 인간성을 벗었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포기

 

하였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이양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애굽의 왕자로서, 양치기로서 모든 지

 

위와 권리를 다 포기하고 이양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신

 

발 하면 필리핀의 전 대통령부인 이멜다를 생각합니다. 이멜다는 의상이나 구두에 욕심이

 

많아 2천 켤레의 구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백만 원대를 넘는 구두만도 그 중의 반

 

이 넘었다고 합니다. 오래 전 황영조선수의 운동화는 특별히 제작하여 만든 것으로 당시 돈

 

으로 1억 원이 넘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비싼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편한 것이 좋은 것입

 

니다. 신은 신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벗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이 그들이

 

회당인 모스크에 들어갈 때는 신을 벗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 올라갈 때에 신을

 

벗습니다. 인도인들은 간디의 무덤에서 신을 벗습니다. 그들의 경외와 존경을 표시하는 것입

 

니다. 성경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엡 4:22)라고 합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골

 

3:9)라고 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히 12:1)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벗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더러워진 우리의 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더러워진 신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 놓기조차 부끄러

 

운 것입니다. 벗어 던져야 합니다. 사람의 다리는 수천 년간 노출해서는 안 되는 금단의 제

 

2의 치부라고 여겼습니다. 특히 여성의 다리가 그러합니다. 영국의 상류 사회에서는 오래 전

 

에는 피아노 다리도 그냥 나와 있는 것이 상스럽다고 양말을 만들어 신겼습니다. 지금도 영

 

국에서는 숙녀 앞에 닭다리를 내놓으면 실례가 된다고 합니다. 18세기 영국의 작가 헨리 필

 

딩은 "여인이 신발 벗은 발을 노출시키는 것은 죽음에 버금가는 수치다"라고 했습니다. 이

 

것이 전통이 되어 그런지 서양 사람들은 신을 잘 벗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침실에서도 신발

 

을 신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신발을 벗습니다. 비행기에서도

 

앉으면 신발부터 벗습니다. 신발을 잘 벗은 우리가 모세를 더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결론

 

어떤 취객이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에 타자마자 옷을 벗기 시작합니다. 택시 기사가 "손님,

 

옷은 왜 벗습니까? 입고 계세요"라고 했더니 취객은 "아, 여기가 우리 집 아닙니까?"라고

 

하더랍니다. "여기는 댁이 아니라 택시 안입니다" 그랬더니 취객은 "그럼 진작 얘기하시지,

 

나는 우리 집 방안인줄 알고 들어올 때 신을 벗고 왔잖아요" 그랬답니다. 서양사람들은 신

 

발을 잘 벗지 않으니 이런 염려는 없겠지요. 아무데서나 신발을 벗는 생활의 습관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늘 신을 벗는 신앙적 의식을 가지세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우리의 자아를 벗어 던지세요. 신은 벗기 위해 신습니다. 신은 벗기 쉬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언제든지 벗어 던질 수 있는 신발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못된 구습,

 

더러워진 인간성, 쥐꼬리만한 자신의 권리, 알량한 지위를 언제라도 벗어 던집시다. 하나님

 

의 거룩한 곳에 설 자는 더러운 신발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더러운 신을 십자가 앞에 벗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부활을 향하여 나아가는 고난주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승리의 입성

 

막11:1-10

 

 

인류가 살아온 역사 중에 가장 크고 위대한 일이 일어났던 때가 언제쯤이었을까?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에 명성을 떨친 철인, 영웅, 학자, 예술가...등 이런 사람들이 살고간 시기를 말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센트헤르나 섬에 정배되어 갔을 때, 말하기를 '나는 나의 모든 생애를 잊을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잊혀질 수 없다'고 했듯이 좁은 나라에서 비록 화려하지 않은 극히 천박한 삶을 살고 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기간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신 33년은 역사의 중심이며 전환점이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더 중요한 기간은 공생애 3년 3개월이었을 것이고 다시 이 기간 중에 더욱 중요한 기간을 말한다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1주일간의 기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간에 해당하는 종려주일(Palm Sunday)로부터 부활주일(Easter day)의 한 주간을 특별히 거룩한 주간(Holy Week) 혹은 고난주간(Passion Week)으로 지키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회개하는 자세로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오늘은 세계적으로 모든 교회가 뜻있게 지키는 종려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 중에 제일 즐겁고 화려한 날의 한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 제자를 보내어 나귀를 몰고 오게하여 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기분이 좋아서 어쩔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옷을 벗어 안장을 만들고 남은 것을 길가에 깔아 카페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기뻐하였습니다.

 

 

나면서부터 환란과 핍박이 겹쳤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많은 무리들이 "찬송하리로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라고 영접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셔야 할 십자가를 바라보며 올라가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내용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능하신 일을 인하여" 하고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통하여 행해진 기적으로 주어질 행복만을 위하여 이렇게 왕으로 모시려고 옹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보니까 죽었던 사람을 살리고 보리떡 다섯개로 많은 사람을 먹고 남게 하고 바다도 잔잔케 하는 등 여러가지 이적을 볼때, 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잘못된 사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슥 9:9에 예언한대로 나귀새끼를 타고 지금 입성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수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길가에 펴고 나무가지를 꺾어서 손을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왕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에서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의 한 장면을 연상시켜 줍니다.

 

우리는 이 날을 종려 주일로 기념하여 지킵니다. 이 날은 승리적인 입성의 날(The triumphal entry)임에 틀림없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네 왕이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리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그리스도는 왕입니다. 그러나 그의 왕국은 지상에서의 그의 선교기간동안 사람들에게 잘못 이해되어 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왕으로 군림할 자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그러한 왕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왕으로서의 상징의 의미는 인간 영혼의 깊은 요구에 응답하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나귀와 예수와 나무가지의 관계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An ass's Colt)를 탔습니다. 여기 나귀새끼의 의미를 스가랴 9:9에서 찾아보면 나귀새끼는 '겸손의 상징'(Marksof his humiliation)이며 그리스도인의 승리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기본적인 자세는 마치 주님이 쓰시는 이 새끼나귀와 같이 되는데 있습니다.

 

비록 힘이 모자라 끙끙 앓으면서도 힘을 다해 주님을 등에 모시고 사는 생활입니다. 이 새끼나귀의 삶은 때로는 예수 믿는 것이 괴롭고 부담스러울찌라도 오히려 예수님(십자가)을 등에 진 기쁨으로 사는 삶입니다. 만일 등에 진 이 십자가가 싫다고 내려 놓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미는 없어집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이 겸손히 엎드려져야 주님이 내 위(속)에 왕이 될 수있습니다. 만일 이것을 못참고 엎드려 있지 못하겠다고 벌떡 일어서면 그만 내 등에 탄 주님은 떨어질 것입니다. 즉 나의 삶은 예수가 없는 모습이 되고 만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 없는 신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는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사는 자세가 아니라 혹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정도이거나 장식품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혹 십자가를 짓밟고 다니는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종려 주일,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모습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해서 이 찬송가의 가사와 같은 결심과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도다."(367장)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하여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하던 이들이 몇일 사이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아우성치는 행동으로 바꿔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요 1:11에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했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행동입니다. 이렇게 영접지 아니한 백성이었지만 이러한 백성들에게 주님은 오히려 자신을 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로마의 투기사들이 야수들과 싸우기 위해 투기장에 섰을 때, 그들은 원형 극장에 모인 많은 군중들에게 '죽을 사람이 문안합니다'라고 인사했듯이 예수님은 죽음을 기대하시며 사셨으나 그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이 없습니다. 그는 그 죽음을 결코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요 10:17, 18에 있는대로 '내가 목숨을 버림이나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는 자의적 죽음의 선언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한가지 중요한 교훈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충성이 어디까지 미쳐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 답은, '죽기까지의 충성'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들 하면서 그들의 충성이 그들의 안락과 인기와 안이와 쾌락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 안에 국한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주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이 사건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충성을 재확인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이들이 사용한 나무는 두가지 대조적 의미를 가진 나무였음이 주목됩니다. 종려나무는 기쁨의 상징(레 23:40)이며 의에 대한 전망(시 92:12)으로 결혼식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버드나무는 슬픔과 포로와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장례식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이 두가지 나무를 함께 사용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이것이 바로 '고난의 신비'(The Mystery of Suffering)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가지를 연결시켜 보면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이 깊은 슬픔의 심연 속에서 인내함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욥 2:10, 13:15).

 

 

여기에 승리적인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승리적인 입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귀새끼를 통해서 겸손을 보여주며, 예수님께서 하신 입성의 결단을 통해서 충성을 보여 줍니다. 또한 나무가지의 의미에서 인내를 보여 줍니다. 이 종려 주일 후 한주간 즉 고난 주일 동안 예수님의 고난의 승리적 의미를 이 3가지면으로 다시 한번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 보고 우리 자신의 생활 원리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폈다고 하는 것은 최고의 존경과 최고의 존귀를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가 기뻐하시는 일, 그를 존귀케 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희생도 각오하고 드릴 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갈 1:10에 보면 바울도 '나는 사람에게 좋게 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산다'고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오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 이것은 곧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라고 어떤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 심판주로 나의 구주가 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예수님의 지배만 받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 선포후 기도 평강의 왕이시며 의의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 ! 아버지께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께서는 우리 인간 영혼의 깊은 요구에 응답하시오니, 먼저 저들에게 참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찾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마음의 왕좌에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뜻을 좇아 살게 하옵소서.

 

주님 ! 우리의 삶의 승리는 겸손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 좀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주님께 능력과 지혜를 구하며 십자가를 등에 진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행여나 저들이 미련하거나 교만 방자하여 십자가를 짓밟고 다닐까 두렵사오니 주님 ! 때마다 일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춰보게 하옵소서.

 

주님 ! 주께서 죽기까지 저들을 사랑해 주셨사오니 이제 저들도 주께 죽기까지 충성하는 사람들로 삼아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이 형통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결 같게 해 주시옵소서.

 

고난의 주님 ! 주께서 당하신 고난의 신비를 깨닫게 하시사 저희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언제 주님 다시 오실는지 저들은 알 수 없사오나 주님 오실 그날을 잘 준비하였다가 반가이 나가 맞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세상을 이긴 주님

 

요16장 29-33절

 

분당사랑의교회/이한규목사

 

 

오늘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주님의 고난의 한 주간이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마지막으로 다락방에서 설교하신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주님이 설교를 마치니까

 

제자들이 밝히 말씀해 주셔서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믿는다고 하지만

 

너희들은 나를 혼자 남겨두고 흩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님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담대함을 잃지 말라고 권면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는 몇 가지 메시지를 살펴볼까요?

 

 

1. 사람은 고독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고독할 때가 있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얼마나 고독을 느끼셨겠습니까?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 따르면 무엇인가 있을 것 같아서

 

즉 축복, 명예, 지위를 생각해서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의 화살이 날라 오면서

 

예수님 따르는 것이 점차 불리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시점에

 

제자들은 한사람씩 스승의 곁을 떠납니다.

 

 

최선을 다해 제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는데

 

그 제자들이 다 나를 떠나간다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게다가 예수님은 십자가를 져야 함을 이미 아시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처럼 주님이 고독했다면 우리도 당연히 고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독한 순간을 만난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도 고독하셨습니다.

 

따돌림당하는 것이 그렇게 가슴이 아프십니까?

 

주님도 중요한 순간에 따돌림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따돌림당하는 것에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돌림당하는 때는 반드시 있습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슬기롭게 마음의 준비를 하면 됩니다.

 

우리보다 고독을 경험한 사람들은 훨씬 많습니다.

 

 

지금 정치하는 것을 보면

 

어제 동지였던 사람이 오늘 배반하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봅니까?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쇠고랑을 차는 모습도 많이 봅니다.

 

조금 잘못해도 아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수모를 당합니다.

 

 

일전에는 한 때 대통령이었던 분도 엄청나게 수모를 당했습니다.

 

옛날에 어떤 전 대통령이 구속당하면서 눈물을 조금 흘리니까

 

언론에서는 "악어의 눈물이다!"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런 얘기를 제 3자로서 듣기만 해도 그 치욕이 엄청나게 느껴집니다.

 

 

그런 치욕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현재 당하는 치욕들은

 

치욕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 치욕을 당한 분들이 위장병 걸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당연히 위장병 걸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씩씩하게 살고 있다면

 

우리도 씩씩하게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데 우리가 삶을 포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러분! 어느 곳에서 따돌림당한다고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저도 미국에서 공부할 때 외국인들로부터

 

따돌림당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넉넉한 여유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습니다.

 

 

따돌림당하는 것과 같은 환경에서도

 

따돌림당하는 느낌을 가지지 않는 넉넉한 삶에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사람이 그 사람 주변으로 몰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따돌림당했다고 생각하고 표정이 어두워지고

 

무엇인가 위축되어서 자신감을 잃어버리면 점차 매력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점차 진짜로 따돌림당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가 나를 따돌리는 것 같은 환경을 만들 때

 

나는 스스로 전혀 따돌림당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스스로 내 할 일을 하고, 내 갈 길을 가면 됩니다.

 

 

교회생활에서도 따돌림당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공동체 생활에서 처음 오면 약간의 집중적 관심은 받을 수 있지만

 

계속적으로 본인이 그 공동체에서 최대한 협조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본인을 화려한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이 끊임없이 참여하고 함께 힘을 써야

 

점차 따돌림당하는 느낌이 없어지는 환경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공동체에 처음 왔을 때에 소외되는 느낌들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같이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소외되는 느낌이 있어도

 

자꾸 남이 나에게 관심을 써 주기만 바라지 말고,

 

그래서 "교회가 사랑도 없어!"라고만 말하지 말고,

 

내가 꾸준히 공동체와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 가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고독할 때도 있는 법이고 군중으로 있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때만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고독할 때는 다 공평하게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다만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고독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고독할 때가 좋습니까? 군중으로 있을 때가 좋습니까?

 

군중으로 있을 때가 더 좋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것이 더 좋은지 우열을 가릴 수 없습니다.

 

얼마나 그 순간을 잘 활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정말 의식이 있는 사람은 군중의 때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집단이 되면 최면적이 되고 악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람은 고독을 통해서 진리를 추구하고,

 

의미 있는 만남을 추구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조금 고독해야 겸허하게 됩니다.

 

지난 수요일 한 집사님을 만나 이런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여동생 부부가 정말 신앙에 냉소적이었는데

 

OO회사에 다니던 동생 남편이 실직을 당한 후에

 

놀라울 정도로 겸손해지면서 열심히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에게 고독한 순간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성도들은 어려움 당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잘 찾을 수 있는 의식 있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어려움이 없으면 좋지만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을 더욱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고독이 꼭 나쁜 것, 고통스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관점에 따라서 고독은 하나님의 선물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고독을 선물로 만드셨습니다.

 

3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나는 혼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얼마나 멋있는 선언입니까?

 

우리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어떤 문제가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가장 고독할 때는 죽을 때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렵고 고통스런 이유는 죽을 때의 고통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죽는 순간 인간의 모든 고통은 떠나갑니다.

 

죽음이 두렵고 고통스런 이유는 인간관계의 단절 때문입니다.

 

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내가 단절된다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떤 고백을 합니까?

 

다윗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시 23)

 

가장 고독해질 수 있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독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주님께 함께 하심을 느끼게 하는 고독은 좋은 것입니다.

 

 

3. 주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결국 승리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환경과 상관없는 절대적 승리입니다.

 

우리의 승리의 원천은 주님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너무 신뢰해서도 안됩니다.

 

 

만약 그 사람이 훌쩍 떠나버리면 어떻게 살려고 하십니까?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사랑하면 그것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사람도 신뢰하기 힘든데, 돈이나 권력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습니까?

 

그것들은 더 무섭게 훌쩍 내 곁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일은 항상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기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순간에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길이 열리게 됩니다.

 

 

여러분! 어려움이 있거든 정말 이제 고개를 드십시오.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다 떠나도 그분은 떠나지 않습니다.

 

부모, 남편, 아내, 재산, 청춘, 자녀, 미모가다 떠나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실 것입니다.

 

 

옛날부터 제가 잘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찬송가 440입니다.

 

"멀리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와/ 정처없이 다니니

 

예수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인천에 있을 때 제가 좋아해서 이 찬송을 부르면

 

저의 아내는 제가 이 찬송 부르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마치 제가 멀리 멀리 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위 찬송은 멀리 멀리 가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없이 살았을 때의 비참했던 삶을 생각하고

 

다시는 예수님 멀리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멀리 멀리 가지만 않으면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가지 않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이 약속 때문에 우리에게는 용기가 생기게 됩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용기가 솟구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근심이 있는 이유는 문제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극으로 달려가는 불행한 인생들을 보자

 

마26:1-5,14-16

 

강성교회/박요일목사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으로 이 땅에 오셨고, ?유월절 희생양?으로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오셨고, 이

 

제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예수님은 주일날 입성하시고(21:1-11), 월요일에 성전 청결과 무화

 

과나무를 말리셨으며(21:12-22), 화요일에는 유대 지도층 인사들의 악의에 찬 질문을 지혜롭

 

게 받으시고(21:23-23장), 제자들에게 말세에 대한 예언과 심판을 비유로 말씀하셨다(24-25

 

장). 이제 예수님의 구속의 행위는 시작된다. 먼저 예수님의 구속의 십자가의 예표로 주신

 

유월절 행사를 역사적으로 살펴보자.

 

본래 유월절은 니산월 10일 가족의 규모에 따라 그달 10일 흠 없는 양을 선택한다(출

 

12:3-5). 그 양은 14일 해질 때 잡으며, 그 피는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출 12:6-7). 가

 

족들은 뼈를 꺾지 않은 채(출 12:46) 그 양을 구워(출 12:9, 대하, 신 16:7, 35:13)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었다(출 12:8). 이 때 할례 받은 종들과 타국인들도 동참했으며(출 12:44,

 

48), 그들은 음식을 급히 먹어야 했고, 그 다음날부터 무교절이 시작되는데 15-21일까지 7일

 

간 누룩 없는 빵만 먹어야 했다(출 12:15, 17-20, 13:6-7). 첫날과 제 칠일은 성회로 구별되

 

었으며, 두 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출 12:16). 그리고 이 의식은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였다(출 12:14, 24, 42). 이제 예수님의 구속을 위한 일정을 보자.

 

고난주간동안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감람원에서 쉬셨다(눅 21:37). 이제 수요

 

일에 수난을 예고하시고 한 여인에게 기름부음을 받으시고(26:1-13), 목요일(14일) 유월절

 

양을 잡는 날 유월절 잔치를 통해서 성찬을 제정하시고(26:17-46) 이 날 유다가 배신하였다

 

(26:14-16). 목요일 늦은 밤, 금요일 이른 시간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후 체포당하시고

 

심문을 받으시고 사형선고를 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사 무덤에 묻히셨다

 

(26:47-27:61). 토요일 무덤에 계시고(27:62-66) 주일에 부활하셨다(28장).

 

이제 26장 전반부에서는 주님은 모든 교훈을 마치시고 십자가를 지려고 제4차 수난을 예고

 

하셨다(1-2).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3-5). 한 여인이 예수님의 장례

 

를 예비한 기름을 부었다(6-13). 가룟 유다가 예수를 죽이는데 참여하다(14-16) 이 말씀을

 

두편(1-5, 14-16, 6-13)으로 나누어 상고하고 한다.

 

본문 말씀(26:1-5, 14-․16)의 중심사상을 살펴보자.

 

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하나님의 정한 때에 오셨다(갈 4:4). 이 땅에 오시어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는 일에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시행하시어 우리의 죄를 구속하셨다. 이제 주

 

님의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를 지시려 가시는 주님의 너무도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

 

신다. 이를 보는 성도들도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감사하면서 주의 모습을 닮아갈 것을

 

보여주시는 말씀이다.

 

②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항상 살피고 계시듯이 사단도 그러하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가장 선한 도구로 쓰임 받을 대제사장, 서기관, 사도가 악마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일에 가장 큰 적대 세력이 되었다. 이를 보고 있노라면 사람은 의(義)의 병기

 

든지, 악(惡)의 병기든지 어느 한편에 속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쓰임 받게 됨을 감사하면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자.

 

③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는 것은(눅 22:3), 유다 자신이 그 마음의 문을 사단에게 열어

 

준 것을 의미한다. 마음의 문은 바깥쪽에서는 열 수 있는 손잡이가 없고 안에서만 열 수 있

 

기 때문이다. 유다가 그렇게 된 것은 신앙인이기보다 사상적 인물이었기에 자기를 발전시키

 

는 사람이긴 하였으나 자아를 죽이는 신앙적 체험은 없었다. 이때 사단은 우리 속에 비집고

 

들어와 우리를 자기들의 활동무대로 삼게 된다. 이런 인생은 금세와 내세에 최대의 비극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상과 같은 뜻이 있고, 주의 구속사역의 최전선에서 발생한 사건을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

 

데 상고함으로 가룟 유다와 같은 비극을 사전에 예방하고, 주의 귀한 역사에 쓰임받는 성도

 

들이 되기를 결단하는 자세에서 상고하여 보자.

 

 

1. 말씀을 모두 마치시고 십자가를 지실 것을 최종 예고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자(1-2)

 

 

예수님의 일반적 가르치심은 25장으로 끝났고, 이제 남은 것은 결별의 유훈만 남았다. 지금

 

까지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가 되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당한 통치자이신 왕되심을

 

그의 말씀, 그의 인격, 그의 능력을 통해서 충분히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셨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1).

 

마태복음에는 큰 다섯가지 설교가 있는데 산상설교(5-7장), 제자파송(10장), 천국비유 설교

 

(13장), 교회 규범설교(18장), 종말의 징조와 심판(24-25장)의 설교이다. 이에 매 설교를 마

 

칠 때마다 ?말씀을 마치시고?란 표현을 썼다(7:28, 11:1, 13:58, 19:1). 예수님은 모든 말씀

 

을 마치시고 지금까지의 말씀을 피로 싸인하실 차례다. 예수님은 위대한 선생님이시지만 단

 

순한 선생님이 아니라 그가 친히 가르쳐야 할 진리 그 자체이시다. 이 점이 타종교와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자신이 ?왜 메시아인지? 그 생애의 특징을 가르치

 

시고 보여주셨다.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

 

리우리라 하시더라?(2).

 

유월절은 어떤 절기인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에서 기원한 절기이며(출 12장), 유대력으

 

로 니산월(대양력 3, 4월) 14일에 시작하여 한 주간동안 계속되는 유대의 최대 절기이다. 니

 

산월 14일 해진 후부터(15일) 아무 때나 유월절 식사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란 니산월 13일(수요일)로 믿어진다. 유월절에 잡은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

 

랐다(출 12:6-7). 그 피를 볼 때에 애굽을 치던 천사들이 넘어가 죽음의 재앙에서 멸하지 않

 

게 하셨다(출 12:13).

 

이제 예수님께서 희생양이 되시어(요 1:29)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의 칼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 유월절 희생양이 되시기 위해 십

 

자가에 못 박히시고 이를 위해 팔리우리라 하셨다. 복음서에서 유월절과 무교절 같은 뜻으

 

로 쓰이고 있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니산월 15일 하루 동안 지냈고, 누룩을 넣지 않은 떡

 

을 15일부터 21일까지 한 주간 동안 먹었고,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는 의미에서 무교절이라

 

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예수님은 유월절 희생양이 되신 것이다.

 

이 예고된 자신의 속죄의 죽음을 네번째 예고하신 것이다(16:21-28, 17:22-23, 20:17-19). 사

 

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복음의 절정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의 사역 가운데 가

 

장 중요한 사건이요, 예수님의 모든 교훈은 십자가에 죽으심과 연관되어있어 예수님의 가르

 

침도 중요하지만 그의 죽으심이야말로 더욱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방법은 십자

 

가에 달리신 것이요, 죽음의 의미는 우리의 속죄에 있다. 이같이 유월절 희생양은 예수 그리

 

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예표하는 것으로, 여기서 세가지 사실만 살피면서 은혜를 나누자.

 

(1) 유월절 희생양이 될 수 있는 자격 면에서의 예수님의 모습

 

① 유월절 양은 흠이 없어야 한다(출 12:5, 벧전 1:18-19). 예수님의 순결(무죄)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사단은 죄로 그를 더럽히려고 수없이 공격하였으나 헛수고였다. 빌라도까지 그의

 

무죄성을 증명하였다(요 18:38, 19:6).

 

② 일년된 수컷이어야 한다(출 12:5). 1년된 양이면 양으로서 가장 왕성한 청년기에 해당된

 

다. 예수님은 청년기에 속죄제물이 되셨다.

 

③ 양을 회중 앞에서 잡아 희생을 치렀다(출 12:6). 예수님을 은밀히 처형하려 하였으나 민

 

중이 보는 앞에서 재판하고 공개 처형하였다.

 

(2) 왜 유월절 절기를 지키라고 명하셨는가(출 12: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로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출

 

12:14).

 

① 사람들은 종종 지난 은혜를 망각하므로 그 은혜의 길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은혜의

 

자리에서 떠난 백성은 그 영혼이 위태로우며 큰 손해가 있다.

 

② 이스라엘 민족(오늘 교회, 성도)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소망 있는 백성임을 가르쳐 복

 

된 삶을 유지케 하기 위해서이다.

 

③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한 사건으로, 주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미리 가르쳐 주께서 죽으

 

실 때 이를 깨닫고 믿게 하려 하심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성찬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고 가르치고 전하게 하려 하신다(26:17-30, 고전 11:26).

 

(3) 유월절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인가

 

① 모세시대 출애굽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죄악에서 벗어나야 함이 절실

 

히 필요하다. 속히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로 옛 생활을 청산하자.

 

② 신앙적으로 한 가족이 구원받을 때 진정한 유월절이 이루어진다. 가족 식구대로 식양에

 

따라 계산하여 양을 잡으라 하였다(출 12:4). 진정한 가족 구원 없이는 유월절 절기를 기념

 

하면서 대대로 이어지기란 어렵다. 전 가족이 죄악에서 떠나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여야

 

한다.

 

③ 새 연대 새 역사가 시작된다(출 12: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출 12:2). 이제부터 우리는 새

 

로운 하나님의 가족이다(엡 2:19). 예수 안에 들어오므로 새 사람의 새 역사가 시작된다.

 

(1-2절 말씀의 교훈)

 

우리 예수님! 약속하신대로(창 3:15) 때가 차매 여인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오시고(갈 4:4) 예

 

언대로 때가 되자 고난을 네차례나 예고하시고 우리 죄를 속하시기 위해 유월절 희생양이

 

되셨다. 주님께서 행하신 구속 사역은 한 치도 착오 없이 잘 감당하시어 우리를 구속하셨으

 

니, 그 은혜 안에 있는 우리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자.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리며 전 가족과 이웃들이 이 구원의 역사에 참여토록 하자.

 

 

2. 예수님을 흉계로 살해할 것을 모의한 유대 지도자들의 죄악을 되풀이하지 말자(3-5)

 

 

우리는 여기서 두개의 팽팽한 평행선을 보고 있다. 예수는 이번 유월절에 공개적으로 우리

 

죄를 구속하시려 죽으려고 예루살렘에 오셨다. 예루살렘 산헤드린공회에서는 예수를 죽이려

 

고 흉계를 꾸며 비밀리에 죽이되 ?유월절은 피하여 죽이자? 하여 죽이는 방법을 모의한

 

다.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3).

 

여기서 ?그 때?는 나사로가 살아난 직후 대제사장 가야바가 공회를 개최하여 예수를 사형

 

에 처하기로 결의한 후 다시 모여 재차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한 때를 말한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이는 유대 최고 재판소 노릇을 한 산헤드린(Sanhedrin)을

 

말한다. 이들은 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각 24인씩 72명이었다. 본래는 대제사장에게 사

 

형권이 있었으나 로마 총독아래 있게 되자 사형집행권은 총독의 인준을 받게 되었다(요

 

18:31). 공회 의장은 대제사장이 된다.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은 안나스의 사위로 주후

 

18-36년 사이에 대제사장이었다. 원래는 대제사장은 종신직이며 세습제이었으나 로마 정부

 

가 개입하면서 임명제요 종신직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당대는 장인의 덕에 로마 정부로부

 

터 대제사장이 될 때는 당대 최대의 성공자였으나 역사상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는 최대의

 

주범이 되었다. 실로 불쌍한 사람이다.

 

?아문에 모여?-여기 ?아문?은 관저이다. 관저에서 산헤드린공회가 모인 것 같다. 아문

 

은 대제사장의 안뜰이라 공식회의가 아니거나 불법회의인 것 같다. 공식회의는 남쪽 뜰 돌

 

로 된 공회당에서 모이게 되었다.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4).

 

나사로가 살아난 후 예수의 인기는 절정이었다.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하였으나(요 11:47-53)

 

그들의 계획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① 예수를 공개적으로 체포하려 하였으나 관원들이 예수께 많은 감명을 받고 믿는 자가 많

 

아졌기에 잡아들이지 못했다(요 12:42).

 

② 지금까지 논객들을 동원해서 세금문제, 부활의 문제로 질문하여 예수를 곤경에 처하려

 

하였으나 스스로 곤경에 빠지고 백성들에게 자신들이 모욕을 당했다.

 

③ 이제는 궤계(흉계)를 써서 예수를 비밀리에 죽이려 하였다. 그 방법이외는 예수를 제거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종교인들이 취할 방법은 아니다. 이는 당시 외형적으로는 모세 이후

 

최고 절정에 달했지만, 타락한 종교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 종교법정이 세상 법정과 같거나 더 타락한다

 

면 존재의미가 없다. 역사 이래 가야바의 아문의 재판은 늘 있어왔다. 이 시대에 이런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된다면 외형적으로는 성공은 인정하나 그는 망한 자요, 역사에 죄인이 되

 

며,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 없어 영벌에 이르게 된다.

 

?말하기를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5).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때 당시 유월절에 모인 무리는 250만이요, 바쳐진 제물은 256,500마리

 

의 양이었다. 이들은 모두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호산나 만세!?를 부르며 영접하였다

 

(21:9-11). 이때 예수를 처형하면 민란이 일어날까 염려되어 명절 때에는 말자 하였다. 당시

 

군중이 모인 곳에는 어떤 일이 계기만 되면 소요사건이 일어났다(행 20:1, 21:34). 로마 정부

 

가 소요사건을 제일 엄하게 다스렸다. 그러므로 소요의 염려가 있는 명절(유월절)에는 말자

 

하였다.

 

예수님은 공공연하게 처형되는 십자가형으로 죽을 것을 예언하셨으나, 죽일 사람들은 은밀

 

히 하수인을 시켜 저격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예수님이 네차

 

례나 예고하신대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대로 십

 

자가에서 구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이는 우리에게 세가지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① 예수님은 사람의 손에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죽으셨다.

 

② 악인은 저를 죽였고 그 결과로 멸망을 받지만,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었고 우리

 

는 그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다.

 

③ 하나님의 뜻은 선악간에 인간을 통하여 오늘도 성취된다.

 

거기에는 유다도 대제사장도 마리아도 아리마대 요셉도 니고데모도 모두 등장한다. 오늘 우

 

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등장한 인물이다. 어떤 이는 천국을 향하여 가고 있

 

고, 어떤 이는 멸망을 향하여 가고 있다. 오늘 나는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3-5절 말씀의 교훈)

 

하나님의 섭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성취되어가고 있다. 너무도 아쉽고 서운한 것

 

은, 하나님을 대행하며 그 섭리를 추진해가는 사람들이(요 1:51-52)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악하게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아집과 독선에 빠지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보

 

여주고 있으니 우리 모두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받으므로 이런 극심한 죄악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늘 조심하자.

 

 

3. 가룟 유다가 이 범죄에 개입하여 예수 죽이는 일을 빨리 성사시키다(14-16)

 

 

가룟 유다는 범죄 집단과 접촉하였다. 사도(신자)가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한 자들과 접촉하

 

게 되었을 때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① 그 계획을 분쇄할까? ② 그 계획을 지연시킬까? ③ 그 계획을 가속화시킬까? 그러나 불

 

행스럽게도 유다가 그 범죄단에 개입하자 범죄계획을 분쇄시키거나 최소한 지연시키지 못하

 

고 가속화시킨 것은(16) 돈 때문이었다(15). 얼마나 불행한 사람인가!

 

지옥으로 향하는 이 차는 평지를 달리기보다는 언덕의 내리막길을 달려가게 되었다. 이들

 

모두의 비극적 모의는 쏜살같이 달려가 명절 후의 거사계획은 명절 때로 단축되었다. 왜 유

 

다가 보편적이요 상식 밖의 일을 하였으며, 인류역사상 가장 큰 죄인이요 가장 불명예스런

 

파렴치한 인간이 되었을까? 그렇게 그가 처음부터 부도덕한 인간이었을까. 그 이 이유를 살

 

펴보자.

 

?그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14).

 

여기서 ?그 때?는 예수를 흉계로 죽이되 명절에는 말라고 가야바 아문에서 모여 모의한

 

후이다. 이런 범죄 집단에 사도인 제자가 가담하였다. 예수님은 그 반역을 미리 아시고(요

 

6:70) 그를 택하시고 끝까지 포용하셨다는데 더욱 뜻이 깊다. 또 사람의 원수가 집안 식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3년 동안 합숙훈련 받은 식구들이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주거늘?

 

(15).

 

?은 30?은 노예의 값이요(출 21:32), 이는 성경의 예언 성취다(슥 11:12). 예수님은 마지막

 

까지 평민의 값으로 어렵고 힘든 인생의 길을 걸으시면서 죄인된 우리를 대속하셨다.

 

?저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16).

 

예수를 넘겨주어도 무리가 없을 기회를 찾으면서 예수 처형을 가속화시켜 명절 후를 앞당겨

 

명절 때에 시행케 하였다. 유다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원인을 분석해보고 우리에게도 유다

 

적 요소가 있다면 위험하니 이런 것들을 제거하는 성도들이 되자.

 

(1) 유다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실망하였다

 

유다는 다른 제자보다 민족적 메시아관이 강하였고 애국심도 강했던 것 같다. 그런데 주님

 

의 메시아에 대한 가르침이 자신의 믿음과 달랐음을 머리 좋은 가룟 유다는 제일 먼저 깨닫

 

게 되었다. 신앙적으로는 사실 이 때가 가장 좋은 기회였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며 메시

 

아를 한 나라의 왕이나 통치자로서가 아니라 세계 인류의 구주로 알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

 

다. 또 자기도 일국의 통치자의 그늘에서 성공하기보다는 세계적 구원의 비밀을 알고 그것

 

을 알리는 제자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나, 본래의 고집 때문에 여기서 더욱 깊은 구렁

 

으로 떨어졌다. 만약 그렇게 하였더라면 후대 역사에 바울 못지않게 구속사의 유능한 인물

 

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 더욱 강한 실망을 느낀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지

 

금까지 지녀온 유다의 철학이나 생의 목표나 애국심과 너무도 거리가 먼 부당한 방법이라

 

결정지었다. 얼마나 안타까운 생각인가?

 

(2) 자기의 계획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조급하였다

 

때는 유월절이어서 군중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어 거사를 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였다. 제

 

자들은 이 때에 예수님이 거사를 하여주기를 바랬다. 요한과 야고보도 그렇게 생각하고 주

 

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이것을 부탁하였다(20:21-28). 그런데 정 반대의 일이 일어

 

났다(6-13). 철없는 여자가 그 귀한 향품을 허비하여도 예수님은 그것을 막지 아니하였다.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란 이유로 칭찬까지 하신 것을 듣고 유다는 분개하였다. 이 돈이 얼마

 

인가? 300데나리온이 아닌가! 200데나리온이면 5,000명을 먹이는데(요 6:7) 7,500명분의 식량

 

을 소비하다니 정말 자기 목적과는 정 반대였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팔 결심을 하였을

 

것이다. ?내가 선생을 배신한다 하여도 평소에도 위기를 모면하였으니 지금도 틀림없을 것

 

이라?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가 스승을 은 30, 즉 노예 하나 값(슥 11:12)에 팔았다. 그 때의 화폐가치는 은 30

 

이면 100데나리온, 앞에서 허비한 항유값 1/3에 은사를 팔고 말았다. 진정 예수님은 21절 말

 

씀대로 12제자 중 하나에게 배신을 당하였으니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어 당한 비극 중 비극

 

이었다.

 

(3) 유다가 이렇게 된 결정적 이유는 사단이 그에게 들어감이다(눅 22:3)

 

왜 이런 일을 하였는가?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왜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을

 

까? 그는 돈(세상)을 너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은 돈

 

을 훔쳐감이라(요 12:6). 사람이 돈을 사랑하면 그렇게 된다. 돈이 왜 필요한가를 모르고 그

 

저 돈만 알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

 

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느니라(요일 2:15). 신자가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면 마귀가 그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돈도 소화시키지 못하고 돈 때문

 

에 영육이 죽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27:3-10). 욕심을 기점으로 마귀는 들어간다는 사실

 

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14-16절 말씀 ?유다?의 교훈)

 

①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너무도 강했다. 예수님의 교훈의 말씀에 무너짐이 없이 자기의 구

 

원관과 메시아관이 너무도 강하여, 진짜 메시아를 보고도 그 앞에서조차 가짜를 고집하였다.

 

② 심령개조가 없었다. 유다는 신앙인이라기보다는 사상적 인물이었다. 유다에게 재능, 열심

 

은 충분하다 하여도 심령의 개조, 즉 부스러진 심령의 개조가 없었다. 사상가는 자기 발전을

 

위해 살지만 신앙인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요, 그것이 새로운 삶이다(고후 5:13-17).

 

③ 최후의 기회를 놓쳤다(27:3-10). 그는 자기 죄를 뉘우칠 만한 인간이었고, 또 그렇게 했

 

다. 그러나 잘못은 예수님께 하였으니 예수께 나가야 할 것인데, 성전의 제사장과 장로들에

 

게로 갔다. 십자가 앞에 갔더라면 될 것을 그 기회를 놓치고 자기 혼자 자포자기 하였다. 그

 

러나 바울은 마지막 기회를 붙잡고 큰 일을 하였다.

 

 

결 론

 

 

① 우리 예수님! 우리를 구속하는 일을 수행하시는 일에는 그 어떤 장애와 난관도 극복하시

 

고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수행하시므로 오늘 우리가 구원의 영광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도

 

주의 뒤를 따라 주어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 나가자.

 

② 유대 백성의 지도자들의 사명은 메시아를 영접하고 백성에게 증거하는 일이었으나, 그것

 

을 위하여 일하다가 얻은 세상적인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예수를 메시아로 부인할 이유도

 

이론도 없으면서 이를 거부하고 예수를 죽이고 말았다. 그 후 그들은 자신과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③ 유다는 사도로서 이들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고쳐주어야 했으나, 오히려 가속화시키고 돈

 

을 받았다. 그 결과 그것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영벌에 들어가는 자가 되었다(27:3-10).

 

<다음주 말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증거하자 (요 20:1-18)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요 소망이다. 본문을 통해 부활의 역사성과 우리의 소망을 살펴

 

보자.

 

 

1. 빈 무덤을 찾아간 믿음 없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자(1-10)

 

 

구약성경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였고(사 53:5, 시 16:10) 주님께서도 말씀하셨다(마

 

16:21, 17:23, 20:19).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기억하지도 않고 믿지 못했다. 말씀대로 예수님

 

은 부활하셨고 무덤은 빈 무덤이었다. 예수님의 시신은 인간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

 

로 나오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의 믿음과 관계없이 역사적 사건이다. 다른 사람은 믿지 못하나 우

 

리는 믿고 그 구원의 역사에 참여한 것 감사드리자.

 

 

2.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난 영광을 차지한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자(11-16)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을 보고 믿음 없이 집으로 갔으나 마리아는 자리를 떠날 수 없었

 

다. 이때 두 천사를 발견하였다(12). 천사가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하였다. 빈 무덤은

 

슬픈 일이 아니요 기쁜 일이다.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을 찾고자 하였으나 부활하신 예수님

 

을 만나게 되었다(16).

 

*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동행할 수 있다. 오늘

 

우리들도 기쁜 일을 슬프게 보고 있지 않은가 자신과 주변을 살펴보자. 이 시간도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기쁨은 감소되어간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증거한 마리아의 열성을 본받자(17-18)

 

 

예수님과의 영적 교제는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하거나 세상을 멀리하게 하지 않고 즉시 부활

 

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된다. 마리아는 부활의 증인으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우리도 예

 

수님의 부활을 믿고 믿음 그대로를 증거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자.

 

*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여 우리의 이웃을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에 이르게 하자. 이

 

일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자(딤후 4:27).

 

 

결 론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다. 또 우리들의 부활의 예표가 된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세력은 그 힘을 잃고, 세상에 잘못된 인간의 조치를 시정하셨으니 역사의 종말에도

 

반드시 이런 역사가 있을 것이다. 이 소망을 가지고 주의 구원의 역사를 오실 때까지 전파

 

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자.

 

 

 

 

 

 

 

 

너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본문 눅23:26-28

 

광주동산교회/황영준목사

 

 

예수님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운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사53:6)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3:18) 하였습니다. 갈보리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1. 십자가를 볼 때마다 동정이 아니라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따라오면서 우는 여자들을 보고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3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병정의 채찍에 맞아 온 몸이 찢기신 채로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 골고다로 올라갔습니다. 지쳐서 넘어지고 쓰러졌습니다. 몸이 상하여 더 이상 십자가를 지

 

고 갈 수 없게 되자 병정들은 옆에 있던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우기까지 하였습니

 

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가슴을 치고 슬피 우는 여자의 무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자들이 누구인

 

지 말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제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의 어머니 그리고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이 함께 하였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이 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슬피 울면서 십자가를 따랐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을 보시며 "나를 위

 

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이렇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 나의 죄 때문이 아니라 너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

 

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 죄 값을 짊어지고 형벌을 당하는 것이니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는 말

 

씀이었습니다. 너희들이 울며 회개하고 자녀들까지도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는 마지막 권면이었

 

습니다. 동정의 눈물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얼마나 아프셨나…" 찬송하면서 동정의 눈물만 흘려서는

 

안됩니다. 그 십자가는 바로 멸망 받을 나를 위하여 대신 지신 십자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

 

다.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나와 우리 자신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

 

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울되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

 

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

 

다"(마11:17) 하였습니다. 불신자는 십자가를 보고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

 

는 자는 나의 죄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애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울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회개

 

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사실 때문에 불신의 내 가족과 이웃 사람의 영혼을 위해 기도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쉽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강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바

 

닥같이 마음이 굳어져 있는 예루살렘 성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겉으로는 하

 

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읽고 성전이 있고 그 성전에서 거룩하게 예배 드리고 있었지만 구원의 복

 

음을 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을 보고 통곡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

 

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

 

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들을 핍박하

 

고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인 판단이나 지식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

 

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통곡하였습니다.

 

히브리서에도 예수님께서 통곡하면서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그는 육체

 

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하였습니다.

 

찬송가 269장

 

웬 일인가 내 형제여 주 아니 믿다가

 

죄 값으로 지옥 형벌 너도 받겠구나

 

2. 십자가 위에서의 일곱 말씀은 구원 성취의 선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깊은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마지막

 

기도로 십자가를 짊어지실 준비를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가 앞장서서 인도해 온 유대 관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였습니다. 끌려간 예수님은 대제사장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와 로마 병정들로부터 조롱을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채찍을 맞았습니다. 온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오후 3시까지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운명하십니다. 그 때의 고통을 시편 22편에 예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하였습니다. "많은 황

 

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하였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과 같이 찢기시고 상

 

하셔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구원 성취의 선포였습니다.

 

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하였습니

 

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병정들과 조롱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음성입니다. 이 땅에 죄

 

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멸시하며 조롱하고 천대하며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

 

을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②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하였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가

 

회개하고 은혜를 사모할 때 구원을 언약하신 말씀입니다. 이 사람은 살인 강도죄로 사형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 세상법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그 어떠한 죄인이라도 죄를 깨닫고 예

 

수님께 돌아오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③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또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하였습

 

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효도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④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하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는 음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죄 때문에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를 죽음에 버렸다는 선포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

 

겠느뇨" 하셨습니다.

 

⑤ "내가 목마르다"(요19:28) 하였습니다. 채찍에 맞아서 피와 땀을 다 쏟으신 예수님의 고통의

 

절규입니다. 나중에는 창에 옆구리까지 찔려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⑥ "다 이루었다"(요19:30) 하였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습니까? 죄인들의 죄 값을 다 갚으시고

 

구원을 이루셨다는 위대한 선포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

 

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사53:5)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려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그 일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⑦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하였습니다. 다시 아버지의 영광으

 

로 돌아가는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죽어 장사 지낸바 되었지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다

 

시 살아나셨습니다. 로마서 8장 34절에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

 

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하였습니다. 이 십자가 위에서의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찬송가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구를 위한 십자가입니까? 예수님 자신을 위한 십자가였습니까? 아닙니다.

 

나와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누구를 위한 고통이었습니까?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었습니까? 아닙

 

니다. 나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를 나의 십자

 

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져야 할 저주의 십자가를 예

 

수님께서 대신 지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로 구원의 은총을 받았으니 우리도 불신의 내 가족과 이웃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면

 

서 복음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내 몫의 십자가를 감당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산상으로 올라가시던 예수님을 본 받아서 힘들고 어려워도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

 

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12:3) 하였습니

 

다.

 

 

 

골고다의 세 십자가

 

눅23:32-43

 

금란교회/김홍도목사

 

 

기독교인에게 일년 중 가장 중요한 한 주간은 오늘 고난 주일부터 다음 주 부활절까지 한

 

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늘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고, 오는 금요일에 십자

 

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오는 주일,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비장한 각오로 입성하실 때 많은 무리들이 종려나무(Palm tree) 가지

 

를 흔들며 환영했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 하고 오는 금요일을 ?성 금요일?이라고

 

하며, 오는 주일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한 주간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한 주간입니다. 이 한 주간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에서 구

 

원받을 수도 없고, 죄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

 

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갈보리 언덕에 세 십자가가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양옆에 두 행악자 즉 두 강도가 함께 처형당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서와 시편에 예

 

언된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이사야 53장, 시편 22편 6-8절, 시편 22편 18절). 세 십자가가

 

서 있는 이 언덕을 ?갈보리?(Calvary)라고도 하고, ?골고다?(Golgotha)라고도 하는데,

 

갈보리는 라틴어이고 골고다는 ?아람어? 말입니다. 그 말의 뜻은 ?해골 곳?(The place

 

of skull)이란 뜻인데 헬라어로는 ?크라니온?(Kranion)이라고 하는데 왜 ?해골 곳?이라

 

고 하는가 하면 그 언덕을 멀리서 바라볼 때 해골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 골

 

고다 언덕의 세 십자가의 의미를 살펴보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자기 죄 값으로 멸망한 강도의 십자가

 

 

 

 

예수님 양옆에 달린 두 강도는 ?행악자?(malefactor)라고 했는데, ?도둑?과는 다른 죄인

 

입니다. 도둑은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물건을 훔치는 사람인데 반하여 ?강도?는 공개적

 

으로 죄를 저지르는 사람으로서 때로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무장한 범죄자입니다. 이 두

 

강도 중에 하나는 양심의 법에도 어긋나고 하나님의 법에도 어긋나는 범인으로서 국법에 의

 

해 처형당한 사람입니다. 이 강도는 다른 한 강도와는 달리 끝까지 죄를 회개하지 않고 도

 

리어 예수님을 비방하면서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면서 끝까지

 

죄를 뉘우치거나 죄를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은 죄인입니다. 끝까지 죄를 회개하지 않다가

 

자기 죄로 멸망한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죄의 벌을 받

 

으면서도 목이 곧고 완악하여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지옥은 불평과 탄식은 있어도

 

회개가 없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2. 죄를 회개하고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십자가

 

 

 

 

또 다른 한 강도는 죄질이 똑같은 강도였으나 예수님을 비방하는 그 강도를 꾸짖으면서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하고,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행한 죄에 합당한 보응을 받는다?고 하는 이 말은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진정한

 

회개를 보여줍니다.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자기의 죄를 인정할 줄 모르고 회개할 줄 모르고

 

끝까지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입니다. 형무소에 있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죄가 없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다 보면 두 가지 사람을 볼 수 있는데, ?나는 죄가 없

 

어서 예수 안 믿어도 구원받아요?하는 사람과 ?나는 죄가 너무 많아서 교회에 못 나가

 

요?하는 사람인데, 전자보다 후자의

 

사람이 더 소망이 있고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이 강도는 회개할 뿐 아니라, 예수를 믿고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하는 이 말은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살

 

았을 때에 예수님에 관한 소문도 들었을 것이고, 이 유명한 사람을 한 번 만나봤으면 하는

 

마음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죽으면서 그 예수님을 만나서 자기의 믿음을 고백

 

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흉악한 무리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

 

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하는 말씀을 듣고 자기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망도 가졌을 것입니다. 그 강도의 기

 

도를 들으신 예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

 

행악자는 분명히 구원을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헛소리하시거나 거짓말하실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강도는 평생 죄만 짓고 악한 일만 하던 사람인데 죽기 전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

 

받았습니다. 전혀 은혜로 값없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

 

님의 선물이라? 한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은혜?란 말씀과 ?믿음?이란

 

말씀과 ?선물?이란 단어가 기독교의 복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죄사함 받고 구원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은혜로, 거저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너

 

무 많습니다. 죽기 전에라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부끄러운 구원이지만,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면류관을 받고 상급을 받는 것은 행한 대로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

 

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고, 갈라

 

디아서 2장 16절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

 

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이 강도는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간 사

 

람입니다.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세 사람이 언덕 위에 서서

 

죽음을 함께 했네.

 

그러나 한 사람만 죽었다네

 

다른 두 사람

 

한 강도와 하나님 자신은

 

랑데뷰 했다네?(Miriam Le Fenre)

 

 

얼마나 아름다운 시입니까? 오늘도 죄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3. 남의 죄를 위하여 죽은 구원의 십자가

 

 

 

 

골고다 언덕의 세 십자가 중에 가운데 우뚝 세워진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

 

가로서 자기의 죄가 아니라 남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임을 당하신 십자가입니다. 죄인을 구

 

원하는 구원의 십자가이며 기독교의 영원한 표상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나아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찰스 딕큰(Charles Dicken)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찰스 다니

 

(Charles Darney)란 불란서 사람이 죄를 짓고 단두대에 올라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의

 

친구 시드니 카튼(Sidney Carton)이란 미국인 변호사는 그 불란서 친구를 대신하여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니씨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기 때문에 죽어선 안 될 형편이고, 자

 

기는 딸린 식구가 없기 때문에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형집행 하기

 

전 날 변호사 옷을 입고 형무소에 찾아가 면회를 하면서 옷을 바꿔 입고 그 불란서 친구를

 

대신 내보냈습니다. 죄수복을 입은 그 변호사는 마침내 끌려나가 단두대에 올라 사형을 당

 

했습니다. 죽으러 올라갈 때 두려운 마음이 생겼으나, 마음속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

 

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느니라?고 한 말씀(요한복음 15장 13절)이 생각나

 

서 담대히 사형을 당했습니다.

 

전에도 말한 것 같습니다만, 호주에서는 많은 양을 키우는데, 가끔 큰

 

독수리가 날아와서 새끼 양을 채가곤 한답니다. 하루는 목동이 이 광경을 목도하고 언덕 위

 

에 있다가 쫓아 내려가 독수리를 쫓아 버리고 나서 보았더니, 어미 양이 독수리에게 두 눈

 

이 파 먹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그 새끼 양은 어미의 네 다리 사이에 숨어서 안

 

전하게 살아 있더랍니다. 이 어미 양의 희생으로 그 새끼 양은 살고 그 어미양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까닭에 자식이 죽는 대신 기차에 깔려 죽거

 

나 물에 빠져 죽으면서 자식을

 

구원하는 예가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시므로 죄를 무조건 용납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독생자, 즉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도리를 다 가르치신 다음에 우리를 대신

 

하여 영원한 속죄 제물로, 속죄 양으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 성경에 예언된 말씀이 실현된 것입니다. 구약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는 이사야 53장

 

12절에 ?.....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

 

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

 

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주전 7세기 전에 예언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부르짖으신 것은 그가 ?우

 

리대신? 버림받고 ?우리대신? 죄의 심판을 받고 ?우리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로서 우리가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한 번은 형제가 풀밭에서 놀다가 형이 벌에게 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벌이 동생에게

 

덤벼들었습니다. 동생이 무서워서 도망가려고 하니까 형이 ?무서워 말아라. 벌은 한 번 쏘

 

면 죽는 법이다?라고 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께 사망의 독침을 쏨으로서 우리를 더 이상

 

헤치지 못합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구원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3절에 ?염소

 

와 송아지의 피와 암 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며 거룩케 하

 

거든 하물며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

 

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라고 하셨습니다.

 

속죄 제물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야만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6.25 사변 때 남편은 군에 나가고 부인 혼자서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쌀도

 

없고, 미역도 없고, 어린 아기 싸줄 옷이나 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는 선교

 

사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밤 열 두 시가 지나 눈보라를 맞으며 시골길을

 

걸어가다가 그만 진통이 심해지면서 아기가 나오려고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몹시 추운 겨울밤에 다리 밑에 앉아 아기를 낳고, 아기가 얼어 죽을

 

까봐 자기의 속옷과 겉옷을 벗어 아기를 겹겹이 싸 매주고 자기는 피를 흘리는 몸으로 벌거

 

숭이가 된 채 아기를 꼭 껴안았습니다. 몇 시간 안 가서 엄마는 얼어죽고 아기는 울기 시작

 

했습니다. 그날 밤 그 선교사는 잠이 오지 않아 애쓰는데 교회에서 본 그 만삭된 임산부가

 

자꾸 보이면서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견디다 못해 쌀과 돈을 좀 가지

 

고 지프차를 타고 달려가는데 그 다리 앞에 와서는 시동이 꺼졌습니다. 그래서 자동차를 점

 

검하려고 내렸는데, 다리 밑에서 갓난아기 우는 소리가 들려서 손전등을 켜고 내려가 보았

 

더니 바로 그 여자가 아기를 낳아 꼭 껴안은 채 얼어죽었고 아기는 살았더랍니다. 그 아기

 

를 안고 달려와 살렸고, 그 엄마는 어느 산비탈에 묻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 아이가 철들만

 

큼 자라서 자기의 부모에 대해 묻길래 설명을 해 준 다음, 크리스마스 전이라 눈이 소복이

 

덮힌 무덤으로 데리고 갔더니, 그 아이가 겉옷과 속옷을 다 벗어 무덤을 덮고 알몸으로 그

 

무덤 앞에 무릎꿇고 앉아서 ?나를 살리려고 돌아가시던 날 얼마나 추우셨습니까??하고 슬

 

피 울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피 흘려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

 

셨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핵심 되는 교리는 십자가의 피와 부활의 교리입니다. 이 두 교리 중에 어느

 

하나도 믿지 않는다면 구원 못 받는 것은 물론이요 틀림없는 이단입니다. 진리와 이단이 여

 

기서 판가름 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지만, ?그리스도 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예수를 믿지 않고는 영생을 얻고 구원받을 길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주간 저는 몹시 실망스런 말을 들었습니다. 감독회장을 지내신, 제가 존경하던 원로 목

 

사님 한 분이 목회 하실 때 어느 종교나 믿어도 다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기독

 

교를 믿으면 직선 코스로 천당 가고 다른 종교를 믿으면 먼길을 돌아서 천국 간다고 가르쳤

 

다고 하니, 아연실색했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까요?

 

요사이 이단 교수를 고소했는데, 불기소 처분되었다고 합니다. 그 교수는 예수의 신성도 부

 

인하고, 부활도 부인하고, 삼위일체와 십자가의 구속도 부인하면서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된다

 

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므로 예수를 끌어내리고 ?네가 제2, 제

 

3의 예수가 되라?는 사람입니다. 감독회장과 목사들이 싸고돌면서 불기소 처분하여 처리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교리를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서 구원과 멸망이 결정되고 진리와 이단이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고난의 연단(鍊鍛)

 

창 39:1-6

 

상도교회/김이봉목사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

 

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

 

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

 

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

 

담하였더라) <창세기 39장 1-6절>

 

 

1. 하나님은 연단의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을 혹독하게 연단하였습니다.

 

요셉이 당한 고난은 우리 주님이 당한 고난과 상통됩니다.

 

왜냐하면 죄 없이 당한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총애(寵愛)를 받고 있다는 그것으로 이복(異腹) 형들로부터 질투와 미움을 받았고,

 

더욱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자기들을 찾아온 동생을 이 모진 형들은 물 없는 구덩이에 쳐

 

넣어 없애버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형들 중 하나가 그럴 필요까지 있겠는가 하여, 마침 자기들 앞으로 지나가는 미디안

 

상인에게 종으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죄 없이 억울하게 젊음의 시절을 보내야 하였습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참으로 요셉은 억울하게 팔려갔습니다. 기가막힐

 

일입니다. 원통한 일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요셉과 같이 젊은 날에 불행스러운 과정을 지내온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 가운데서도 이와 같이 억울한 일을 당한 분들이 있다면 요셉을 생각하면서 하

 

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요셉이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낙심하지 않고 그 모든 억울함을 통하여 연단의 인물

 

이 되었기에 당대의 최고 강대국의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까지 올라 갈 수 있었다고 봅니

 

다. 믿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고난의 연단은 무엇인가 의미가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공연히 억울하게 당하는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쓰실 사람들은 쓰기 전에 먼저 요셉과 같이 연단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

 

다. 그래서 하나님은 연단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마치 자유분방하게 지내던 젊은이들이 고된 훈련을 통하여 용감한 군인으로 만들어지듯, 하

 

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연단하여 쓰십니다. 그리스도의 정병으로 원수 사탄의 세

 

력과 대항하여 싸우려면 반드시 연단의 과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언제나 연단은 젓갈의 숙성과 같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젓갈은 처음에 냄새가 나서 비린내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것이 잘 숙성이 되면 단 맛을 내는 것처럼, 사람의 사람됨도 연단을 통하여 숙성되지 못한

 

사람은 비린내 나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에서나 배척을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당히 고난으로 연단 된 사람들은 모든 사람에게 단 맛을 내게 하는 것을 볼 수 있

 

습니다. 잘 숙성된 젓갈은 비린내가 나지않고 감치는 맛을 내듯이 고난으로 연단 된 사람은

 

모든 일에서 단 맛을 내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고난의 연단을 통하여 위대한 역사를 감당할 수 있도록 합니다. 예수 그리

 

스도도 고난의 종으로 묘사된 이유가 그런 이유입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를 묘사할 때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

 

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하는 말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

 

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질고를 아는 사람이

 

었기에 그가 우리의 구세

 

주가 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하

 

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먼저 쓸려고 할 때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을 하시

 

는 하나님이란 점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은 연단하는 중에서도 요셉과 함께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지 않는 줄 알지만,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

 

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요셉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요셉이 하필이면 보디발의 집으로 팔리어 가게 된 것도 하

 

나님의 섭리의 손길이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다른 사람의 종으로 팔려갔던들 애굽의 총리대

 

신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겠는가? 할 때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같은 값에 높은 지위

 

에 있는 가정으로 팔리게 된 것 자체가 우연이 아니란 말입니다. 애굽의 바로왕의 시위대장

 

이면 당시에 최고의 권력자이었습니다.

 

 

요즘 우리식대로 말하면 청와대 경호실장에 해당되는 직위일 것입니다.

 

그런 집으로 팔려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동행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그 집에서 열심히 일하

 

였습니다. 최선을 다해 봉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주인에게 신용을 얻게 되었고, 가사(家事)의

 

모든 것을 맡아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 하나님이 복을 내리어 형통케 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요셉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이 고난 중에 있을 때도 함께 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

 

래서 하나님은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평안할 때만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들어 쓸려고 할 때는 고난으로 연단 시키면서 그

 

고난 중에서도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있을 때 성도들은 그것을 연단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연단의 고통은 하나님이 버린 것이 아니라 훈련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이것은 마찬가지이입니다.

 

요셉과 같이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있다면 요셉이 행한 것 같이 최선을 다해 현실을 극

 

복해야 하겠습니다.

 

현실을 도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맞아들이고, 그 현실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최

 

선을 다 해야 하겠습니다.

 

요셉은 바로 그 점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했습

 

니다. 그래서 그는 보디발에게도 신용을 얻었고, 옥사장에게도 신용을 얻었습니다.

 

 

6.25를 겪은 세대들에게는 비슷한 경험들을 다 했을 것입니다.

 

대학시절의 낭만이란 거의 없을 정도로 현실의 삶들이 급급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에 급급했던 시절이란 말입니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그런 세월을 어떻게 보낼 수 있었을까?

 

새삼스러움을 느끼곤 합니다. 입은 옷이란 군복 염색을 한 것들이었고, 신발이란 자기 발보

 

다 큰 구제품에서 얻어 신은 것이었고, 신사복이란 역시 구제품에서 얻어서 줄여 입었거나,

 

새로 뒤집어 만들어 놓은 옷(일본어로 우라까이)들이었습니다.

 

저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오늘 우리가 사는 형편에서는 무엇인들 감사하지 않을 것이 한가

 

지도 없습니다. 단벌 신사에 넥타이도 하나요, Y셧츠도 하나로 너무 오래 입어 깃(일본어로

 

에리)이 낡아지면 그것만 따로 사다 달아 입고 다니던 그 시절을 거쳐왔기에 오늘도 나는

 

옷에 대하여 팔과 다리만 들어가면 그것이 옷 인줄 알고 있습니다. 어느 여름날 주일 저녘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밤에 논두렁 길을 가다가 다리를 헛 짚어 논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온통 흙탕물로 옷이 더러워졌을 때, 저는 요셉의 인내를 되씹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

 

습니다.

 

 

나를 이렇게 연단하시는 하나님이 이 이상 더 내려갈 데가 없도록 까지 내려가는 연단을 시

 

키시는 하나님이란 것을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그 후에 대학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영장을 받게 되어 학보병으로 입대하게 되었는데, 저는

 

솔직히 말해 군대 생활에서 도리어 더 편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들은 어려운

 

군대 생활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세끼 밥을 다 주지, 입을 옷과 소모품까지 다 주지, 건빵

 

주지, 담배 주지(담배는 모았다가 인심 쓰는 일에 잘 썼음) 그러니 도리어 일찍 사회에서 연

 

단을 받은 것이 실제 군대 생활에서는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을 일찍 그렇게 연단시킨 하나님의 뜻은 후에 잘 나타났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하는

 

말 중에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이곳에 보내어 오늘의 흉년을 면케 하시고 우리를 살리려

 

하였다"는 말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두려워하여 떨었지만, 요셉의 마음은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지난 세월의 고난

 

을 오늘의 자기를 만들어낸 하나님의 연단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현재 고난 중에 있는 분들이 있다면 후일에 여러

 

분이 어떤 위치에 있어 귀한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연단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요셉을 들어서 최고의 지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요셉의 지난 세월의 고난은 내려가는 길이 아니라 올라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요셉

 

이 한번의 눈물을 흘릴 때마다 한 걸음씩 상승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가장 최악의 자리

 

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난 것은 요셉이 하나님의 연단을 신앙으로 받아들였기 때문

 

입니다.

 

요셉이 당한 인생의 갈림길의 가장 큰 위기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었습니다. 혈기왕성한

 

젊은 나이에 날마다 집요하게 접근해 오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

 

가 어찌 이런 죄를 범할 수 있겠는가?

 

라는 철저한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바로 이점이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입니다.

 

 

인간적 욕망으로 보면 가장 쉽게 출세하고 성공할 수 있는 찬스였습니다.

 

그러나 만일 요셉이 이 과정에서 실패했으면 모두가 끝장이 될 뻔하였습니다.

 

이 고난의 연단에서 통과되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바로왕 앞에 서게 하였고,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고, 흉년기간 동안 가족들을 살릴 수 있었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을 기근에서 구

 

할 수 있게 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바로 이 과정을 통과한 요셉과 같이 연단 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요셉은 <물질>과 <정욕>과 <명예욕>의 시험을 이기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당한 시험과도 같습니다.

 

주님도 육체의 욕망, 정신적 욕망, 종교적 욕망의 시험을 다 이기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그에게 인간적인 수많은 고난

 

의 연단으로 다져진 인격이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만일 요셉이 그러한 고난의 연단이 없었던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좋은 찬스를 만났을 때 넘

 

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 같았으면 얼마나 좋은 찬스입니까?

 

돈과 권력과 향락을 한꺼번에 쥘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었겠습니까?

 

연단 되지 못한 사람들이 권세를 잡으면 쉽게 돈에 탐심을 내게 됩니다.

 

연단 되지 못한 사람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면 쉽게 타락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요셉과 같은 인물이 나타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하겠고 또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되

 

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민족을 이끌어갈 지도자가 되려면 고난의 연단을 통과한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백성의 아픔을 알고, 가난하고 없는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 좋은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총리의 자리에 올라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7년 동안 풍년이 들때 낭비하지 않고, 방방곡곡에 창고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남아도는 양식을 사서 쌓아 들였습니다. 그 후에 연이어 가뭄이 들어 흉년이 닥쳤을

 

때 곡간의 문을 활짝 열어 모든 일반 백성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기근을 면케 하였습니다.

 

이 소문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궁핍하였을 때 애굽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애굽으로 가면 쌀을 구할

 

수 있다는 소문이 야곱의 귀에까지 들려졌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너희는 애굽으로 내려가

 

양식을 사올 생각들을 하지 않느냐고 아들들에게 재촉하여 결국 애굽으로 쌀을 구하러 내려

 

갔다가 요셉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요셉과 같은 총리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부정축재 하지않고, 이권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백성들을 위한 애국애족하는 정치 지도자

 

가 나타나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일찍이 톨스토이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라야 인생의 참 맛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눈물 젖은 빵이 무엇이겠습니까? 고난의 연단으로 다져진 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

 

까? 고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귀공자들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일반 서민층의 고통을 알며

 

없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펴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

 

지입니다.

 

고난의 연단으로 다져진 신앙의 사람들이야말로 온갖 고난을 극복해낼 수 있는 용기와 지혜

 

가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 가운데 지금 고난의 연단 속에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 연단 속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함께하심을 믿어

 

야 합니다. 하나님이 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더 큰 그

 

릇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지금 연단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욥도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나를 연단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밑바닥까지 내려갔으면 이제는 다시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도 무덤에까지 내려갔으나 그 후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

 

름을 주사 하늘 아버지의 보좌에 앉게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신앙을 가지고 오늘의 고난의 연단을 승리로 끝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고난당하신 메시아

 

사 53:4-6

 

충신교회/박종순목사

 

 

주경 학자들은 이사야 40장~66장을 구약 속의 신약(New Testament book of Old

 

Testament)이라 부릅니다. 이유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자로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

 

게 될 사건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그 중의 한 장으로 메시아이신 예

 

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겪으실 고난과 승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온갖 멸시와 천대, 굴욕과 고통을 다 겪으셨고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주님의 고난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 우리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4~5절을 보면 "우리"라는 말이 일곱 번이나 반복됩니다.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

 

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

 

라",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가끔 텔레비전 뉴스에서 떳떳치 못한 죄로 붙잡혀 끌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뉴스 카메라를 들이대면 하나같이 머리를 숙이거나 손으로 얼굴을 감싸거나 겉옷을 치켜올

 

려 얼굴을 감춥니다. 그것은 낯을 들기가 떳떳치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파렴치한 죄이든, 떳떳치 못한 죄이든 죄를 범하면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독립운동

 

을 하던 애국지사가 일경에 체포되어 끌려가면서 얼굴을 감싸거나 겉옷을 뒤집어쓰는 사람

 

은 없습니다. 이유는 떳떳하고 당당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그 어떤 잘못도 없습니다. 실정법을

 

위반한 일도 없고, 도덕률을 깬 일도 없고, 파렴치한 일을 저지른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

 

님은 십자가에 죽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 4~5절은 "우리" 때문이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6을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

 

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 인간이 지은 죄를 사함 받으려면 어린양을 잡아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속죄

 

의 제사를 드리지 않는 한 어물쩍 그냥 죄가 넘어가거나 사함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요한

 

복음 1:29을 보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 그 어린양 예수

 

님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 받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여기서 확인해야 될 것은 "우리"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 "나"입니다. 즉 나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고백해야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

 

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나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나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나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애창하는 찬송가사가 그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손과 발 날 위해 찢기셨네 왜 날 사랑하나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 사랑하나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그렇습니다. 이 찬송이 고백하는 것처럼 나 위해 십자가 지셨고, 나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2.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4절을 보면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했다"고 했고, 5절을 보면 "찔렸고 징계를 받았고 채찍에

 

맞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7절을 보면"곤욕을 당했다"고 했고, 8절을 보면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다"고 했습니다.

 

죄가 있어 고통을 겪고, 창에 찔리고, 매를 맞고,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다면 할 말이 없습니

 

다. 그러나 예수님은 잘못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온갖 수모와 멸시와 천대와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두 가지 경우에 화를 내거나 난폭해집니다. 하나는 자존심이 상했을 때입

 

니다. 자존심을 건드리면 부부도 싸우고, 형제도 싸우고, 친구도 싸웁니다. 또 하나는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입니다. 이 경우도 예외 없이 덤비고, 소리치고, 싸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시관과 못과 창에 찔리셨습니다. 멸시와 조롱을 받

 

으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뛰어내려라"고, 조롱했고 십자가에 매달고 발가벗긴

 

채 수치심을 건드리고 자존심을 자극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길을 올라

 

가실 때 군병들은 채찍으로 때렸고, 시민들은 침을 뱉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고", "도살장

 

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고 했

 

습니다.

 

예수님은 괴롭고, 아프고, 억울하고, 자존심이 상하고, 체통이 무너져도 침묵하셨습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래야 우리를 살리고 나를 구원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할말 다하고, 체면 다 세우고, 자존심 다 찾다보면 예수님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참아라, 견디어라, 침묵해라! 너의 자존심과 체면과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생각합시다.

 

 

"그 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주님 눈물로 기도했네

 

귀중한 그 보배 피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비웃는 그 무리들 주의 옷 벗긴 후에 주님 몸 깊이 찔렀네

 

귀중한 그 보배 피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주여 나의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그 때 구원을 이루셨네

 

마지막 피 한 방울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아멘.

 

 

스페인의 문인이었던 「"우나무도"」는 자신의 작품 "젊은 작가" 속에서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없는 것은 더 슬픈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사랑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행

 

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사랑할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둘러보고 찾아보고 소

 

리쳐 보아도 사랑할 사람이 없다면, 그리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시기하고 질투할 사람만 늘

 

어서 있다면 우리는 너무나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셀 퀴에스트가 읊은 시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주여, 사랑은 두 가지 뿐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입니다. 자신만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작아집니다. 그것은 사랑의 크나

 

큰 손실입니다. 사랑이란 자기를 초월하여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래

 

서 자기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시들고 썩고 말라버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 없는 예수 잘못이 없는 예수, 억울한 예수, 멸시받고 천대받은 예수, 그러나

 

침묵하고 견디신 까닭은 사랑을 실천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

 

다.

 

가치 있는 고생이 있고 가치 없는 고생이 있습니다. 고생 끝에 성공이 있고 낙이 있는 것은

 

가치 있는 고생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인간을 살리셨습니다. 생명을 주셨고, 영원을 주셨습니다. 죄에서 해방시키

 

셨고, 죽음을 영생으로 바꾸셨습니다. 그 은혜로 오늘 내가 살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3. 고난 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우리가 취할 태도가 있습니다.

 

먼저, 날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고백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왜 죽으셨는가, 왜 고통을

 

받으셨는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크신 사랑을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의 사랑을 말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때문에 죄 사함 받고 구원받았노라고, 주님

 

은 나를 살리시기 위해 죽으셨노라고, 입을 열어 다른 사람에게 말해야 합니다.

 

 

셋째로, 나도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의 빚을 갚을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받은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

 

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고, 그 사랑을 감사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 인이 되기를 축원합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