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와 비둘기의 교훈 (창 8:6-12)

이 시간에 “까마귀와 비둘기의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홍수가 그치고 물이 감하여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고 물이 더 감하여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 후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방주의 창을 열고 지상의 형편을 살피는 내용입니다.
이 일을 수행함에 두 종류의 짐승이 쓰였습니다. 그 짐승은 바로 까마귀와 비둘기입니다. 처음에 까마귀를 내보내 임무를 감당하게 하더니 그만 두자 대타로 비둘기가 투입되어 사명을 이어가게 함을 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 귀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 영적세계에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까마귀와 같은 사람입니다. 7절에 까마귀를 내어놓았다고 했습니다. 본문의 까마귀가 일하는 모습을 통해서 까마귀의 속성을 봅니다. 참고로 욥38:41에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까마귀는 배가 고프면 소리를 크게 내고 오락가락 날아다닌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해석에 도움을 줄 귀한 말씀입니다.
아라비아 신화에도 까마귀는 날씨를 예측하는 새로 기록되어 있듯 날씨에 관한 한 까마귀가 비둘기보다 더 영특한 지혜가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까마귀 울음소리가 보통 때보다 시끄럽게 울면 폭풍우가 다가온다든지 까마귀가 배가 고플 때라고 합니다.
본문에도 보니까 까마귀가 지면에 거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 위로 날아다니는 장면입니다. 이 모습은 지면의 상태가 거할 곳도 없지만 먹을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귀소본능이 없는 까마귀를 왜 먼저 놓아주었을까요? 노아가 그렇게 한 것은 까마귀가 귀소본능은 없지만 먹을 것만 있으면 질퍽이는 땅도 아랑곳하지 않는 까마귀가 다시 돌아올 정도라면 밖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까마귀가 돌아오되 방주 안 노아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7절을 보면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왕래하였더라”의 원문 뜻은 ‘날아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나 방주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고 방주 주변을 배회하면서 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까마귀는 원래 야성이 강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는다고 하나 까마귀와 같은 신자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하나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아직도 세상을 추구하며 방황하는 심령들이 그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교회를 출석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 한 발 세상에 한 발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도 만족을 찾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도 아직 체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성경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3:3에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했습니다. 성도라고 불리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방주에서 구원을 받은 까마귀이니 완전히 불신자라고 할 수는 없지요. 그러니까 까마귀 신자는 세상을 더 추구하는 아직 영적 어린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전3:1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했습니다.
까마귀가 방주 주변에 날아다닌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면에 발 붙일 곳이 없어서입니다. 이처럼 까마귀 신자는 상황이 좋아지면 언제든지 세상에 나갈 사람입니다. 까마귀는 어느 기간 왕래라도 했지만 그 까마귀는 지면 상황이 좋아지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물이 걷힌 곳은 아직 질퍽하긴 하지만 어느새 연한 새 풀이 돋아나 먹을 것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도 은혜입니다. 고통을 주지 않으면 그 영혼이 멸망의 길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성향이 충분히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늘 육체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만사형통하고 부하고 고난이 없어 봐요. 환경이 좋아지면 믿음이 나빠집니다. 평안하면 교회출석 범하기 시작합니다. 기도시간도 줄어지고 사명보다 다른 일이 더 급합니다. 세상사는 재미에 빠져 그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목숨 바쳐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까마귀 신자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까마귀 신자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2.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봅니다.
비둘기 같은 성도입니다. 까마귀는 좋아서 열심히 먹이를 먹었지만 지면은 아직 비둘기가 살기에는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9절에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다고 말씀합니다. 지면이 질퍽거려 비둘기가 거할 수 없었습니다. 아직 방주를 떠날 때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웁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준비합니다. 초조하거나 성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9절 후 반절을 보면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였다 했습니다. 비둘기의 귀소본능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까마귀와 다른 점입니다. 까마귀는 나갔다가 방주 주변만 날아다닐 뿐 돌아오지 않았지만 비둘기는 방주 노아의 품에 정확히 돌아왔습니다.
비둘기의 귀소본능이 놀랍다고 합니다. 상자에 담아 수백 km를 운반하여 풀어놓아도 어떻게 아는지 정확히 그 풀어준 지점으로 돌아옵니다. 12절 보면 그런 비둘기도 나중에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것은 귀소본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봅니다.
이 비둘기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비둘기는 까마귀와는 달리 정확한 귀소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본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육신의 감정이 아니라 영적인 감동과 이끌리심을 받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육신의 열매를 맺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내 중심 속에 성령의 감동이 있어 신앙 생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의충만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 안에 돌아오는 것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60:8에 “저 구름같이,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오는 것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뇨” 까마귀 같이 날아온다고 하지 않고 비둘기 같이 날아온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성령의 은혜로 온전히 죄악을 떠나 교회의 품, 하나님의 품에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11절에 다시 돌아온 비둘기 부리에 감람나무의 새 잎사귀가 있었습니다. 감람나무는 올리브기름을 내어 성령의 상징입니다. 비둘기 자체도 성령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습니다. 감람의 어린 잎은 비둘기의 먹이가 됩니다.
이처럼 항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육으로 살면 죽을 것이요 성령으로 살면 영원히 삽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위해 심어야 합니다. 육을 위해 심는 자는 육으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둡니다.
까마귀가 검다고 속까지 검을 쏘냐 말들 하지만 인생 까마귀는 속까지 검습니다. 아직 영적으로 까마귀라면 겉도 속도 하얀 비둘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비둘기 같은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아2:14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하셨습니다. 이처럼 비둘기와 같은 성도가 되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까마귀입니까? 비둘기입니까?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품안에 온전히 안기지 않고 세상을 아울러 사랑한다면 까마귀 신자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품 안에 안겨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세상 떠나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여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명 감당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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