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원을 누립시다 본문 : 행16:27-34 이 시간 여러분과 함께 은혜 나눌 말씀은 “구원을 누립시다”라는 제목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참된 종교라는 것은 바로 구원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죽어 가는데 그 길을 공자가 지나갑니다. 공자는 그것을 보고는 그래서 내가 조심해서 가라하지 않았소 이렇게 교훈만하고 지나가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교는 윤리와 도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 길을 석가가 지나갑니다. 석가는 말하기를 여보시오. 당신 자신의 힘으로 헤쳐 나오시오 하고 역시 지나가 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불교는 스스로 도 닦아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력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예수님이 지나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곧 바로 강물로 뛰어 들어가더니 그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찾아와 주셔서 건져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인간이 다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왜 필요하고 구원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할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구원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시기에 우리를 온갖 것에서 건져주시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기억할 점은 구원이란 추상이 아니고 실재라는 것입니다. 실재로 영육 간에 누리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께서 베풀어 놓으신 구원을 누릴 수 있을까요? 1. 우리는 믿음으로 그 구원을 누릴 수 있습니다. 롬10:10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했습니다. 어떻게 믿습니까? 성경말씀에 전해 주신대로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믿으면 됩니다. 그래서 롬10:8-9에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라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이 곧 내 죄의 죽음이요 주님의 사심이 곧 우리의 삶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심을 믿습니까? 그러면 구원을 얻으신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너무나도 간단해서 오히려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쉽지 않으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에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이 믿어짐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믿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이 믿음이 구원의 실재를 누리게 합니다. 2.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통해서 구원을 더욱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요10:10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이제는 더욱 풍성히 누려야 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가지인데 가지가 할 일은 잘 붙어서 진액을 열심히 빨아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풍성한 은혜를 맺습니다. 늘 하나님과 교통의 생활을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려면 개인적으로나 모여서나 기도하고 예배하는 생활이 더 많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생명으로 풍성하고 구원적인 아름다운 열매가 많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것은 우리와 똑 같지만 다른 것은 날마다 하나님께 더 기도하고 더 찬송하고 더 예배하였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차이입니다. 기도의 차이입니다. 찬송의 차이입니다. 감사의 차이입니다. 박해 가운데서도 목숨 바쳐 신앙생활한 차이입니다. 여러분 목숨 바쳐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좋은 습관 하나가 있었는데 매일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습관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전통입니다. 좋은 전통은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다니엘도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승리 비결입니다. 백부장 고넬료 가정이 성령으로 충만했던 것도 그 유대인들의 좋은 관습을 본 받아 그대로 해보았더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좋은 관습은 초대교회 제자들도 그대로 본 받아 지켰습니다. 그랬기에 그 큰 능력을 계속하여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귀한 축복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교에 빼앗겼습니다. 지금 이슬람교인들은 세계 어디에 있든지 하루에 세 번식 정한 시간만 되면 메카를 향하여 기도합니다. 그것은 본래 우리 기독교의 것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관습을 되찾는 날 우리 기독교는 가장 힘 있고 가장 행복하고 가장 생명으로 풍성한 면을 온 세상에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바로 구원의 실재를 누리는 귀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가장 큰 적은 게으름입니다. 이 게으름만 극복할 수 있다면 신앙생활의 정상을 달리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근신하도록 늘 연단을 주십니다. 특히 초대교인들은 신앙의 모델로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연단을 많이 시켰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함이 넘쳤고 보지 못했지만 성령으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었던 것입니다(벧전1:8-9). 그래서 시편기자는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시116:13-14) 했습니다. 구원이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가운데서도 기도하시고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풍성한 구원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3. 구원의 실재를 부르짖을 때 누리게 하십니다. 시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셨습니다. 구원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 받는 것도 구원입니다. 질고에서 건짐 받는 것도 구원입니다. 결핍에서 건짐 받는 것도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실재를 누리기 위해서는 가만있어서는 안 됩니다. 부르짖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배타고 가다가 풍랑 만났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8:25) 부르짖었습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혀 다음 날 헤롯의 칼날에 순교하기 직전에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셔서 그 깊은 감옥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바울과 실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고 찬송할 때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려지고 간수마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문제를 가졌다면 더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특별히 이 나라를 위해서 구국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하구한날 당파 싸움, 성경은 피차 물고 먹으면 함께 멸망한다고 했습니다. 사회는 날로 속화되어 가고 무수한 가정이 파괴되고 있으며 성도들마저 속화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난국을 이길 길은 기도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날마다 모여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예비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의 구원의 실재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누리십시오. 늘 예배함으로 누리십시오. 늘 부르짖음으로 누리십시오. 그래서 매일 매일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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