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부활절

제목/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 (4/15)

공 상희 2010. 4. 2. 14:12

제목/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 (4/15)
본문/ 눅 24:28-35  
설교자 박봉수 목사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다. 희망 없이 산다는 것은 삶을 중단하겠다는 것과 같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희망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희망이 오늘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시 무려 2 만 명의 미군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있었답니다. 그런데 2차 대전이 종료될 때보니 그 중에 8000명이나 사망을 했답니다. 종전 후에 미 국방성에서 조사단을 파견해서 살펴보니까 그 죽은 사람들 대부분은 놀랍게도 굶주려서, 심한 학대를 받아서, 질병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고 바로 절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갈 희망이 없고, 앞으로 살아 돌아갈 희망을 잃게 되면서 그 삶이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쉽게 죽어간 이유가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독일 나찌 하의 유대인들은 600만이 학살  당하는 끝없는 절망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끔찍한 절망 속에서도 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2차 대전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2차 대전 후에 그들이 수감생활을 했던 지하 감방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바로 그 감방 콘크리이트 벽에 손톱으로 긁어 새긴 글이었습니다. "우리는 저 하늘의 태양을 볼 수는 없지만 분명 저 하늘에 태양이 빛나고 있음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를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렇습니다.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들이 이런 실험을 했답니다. 쥐를 잡아서 독 안에 넣은 다음 빛이 전혀 들어갈 수 없도록 밀폐를 했답니다. 그 안에서 쥐들은 3 시간 이내에 모두 죽었답니다. 밖으로 나가려는 희망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똑 같은 독에 쥐를 넣고 뚜껑을 닫을 때 빛이 조금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니까 쥐들이 무려 36시간이나 살아있었답니다.

똑같은 조건인데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죽고 살고가 달라진 것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요 신학자인 키에르케가르는 그래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희망을 얼마나 갖느냐에 따라 우리 삶이 차이가 납니다. 같은 조건이라도 그 사람이 큰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의 삶 자체가 역동적이고 힘이 넘칠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조건이라도 그 사람이 희망을 거의 포기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시들고 무너져 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는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희망을 되찾은 사람들입니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 두 사람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논란은 많지만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단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이라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 이후에 이들이 그 동안 따르던 주님께서 허망하게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자 더 이상 의지할 것 없어 고향으로 낙향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장면을 떠 올려볼 수 있습니다.

 

우선 13절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오늘 우리 거리 단위로 볼 때 약 12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입니다. 두 사람이 이곳을 향해 쓸쓸하게 걷고 있었습니다.

 

이 지금 이 두 사람이 걷고 있는 엠마오 길은 상징적으로 한 가지 두드러진 이미지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엠마오는 서쪽 방향입니다. 그리고 엠마오는 하산 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바다를 향해 긴 고개 길을 따라 내려가는 내리막  길입니다. 중요한 것은 29에 보면 지금이 바로 해가 질 무렵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군 생활을 동해안 철책 선에서 했기 때문에 매일이다 시피 일출을 보았습니다. 해 뜨는 장면은 매일 봐도 무엇인가 마음을 밝게 해 줍니다. 내게 희망을 불어 넣어줍니다.

 

언젠가 서해안 대천 해수욕장에서 석양의 낙조를 본 일이 있었습니다. 바다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저녁 노을이 장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낙조는 다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왠지 쓸쓸하고 왠지 저도 저물어 가는 것만 같아서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오르막일 때는 신이 납니다. 그러나 그 인생이 내리막일 때는 허탈하고 쓸쓸합니다. 청소년시기 청년기에는 그 인생이 밝습니다. 그러나 나이 들어 인생이 노년이 되면 그 인생이 참 쓸쓸합니다.

 

그렇습니다. 상징적으로 제자들이 걷고 있는 엠마오 길은 앞에 석양의 허무함이 또 내리막길의 쓸쓸함이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17절을 보면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라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이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거운 슬픔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이 슬펐던 이유는 두 가지였을 것입니다.

 

하나는 자기들이 사랑하고 따랐던 그 주님께서 돌아가신 것에 대한 슬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도 인자하시고, 그렇게도 자기들을 사랑해 주셨고, 그렇게도 좋은 분이셨는데 그분께서 그렇게 끔찍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다니... 그 충격과 그 안타까움에 이들 마음이 며칠이 지난 지금도 슬픔을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들의 앞 길 때문입니다. 그토록 의지하고 따르던 주님께서 자기들 곁을 떠나셨으니 이제는 누구를 믿고 살 것인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뭐하며 살 것인가? 고향 사람들 그들이 자기들을 뭐라고 말할 것인가? 앞날을 생각하니 안타깝습니다. 그 또한 슬퍼집니다.

 

한 마디로 본문이 그려주는 두 제자의 모습은 희망을 잃은 사람들 바로 그것입니다.
학명으로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사피엔스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생각해서 안다, 그 앎을 지혜롭게 활용한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사고할 줄 아는 것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사회 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에스페란스란 말은 희망한다, 소망을 갖는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희망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더 이상 인간다운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저희 눈이 가리워져서...'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리니까 3년 동안 동거동락했던 주님을 불과 며칠 사이에 다시 만났는데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이 변형되었기도 했지만 이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은 누가가 지적하듯이 마음의 눈이 닫혀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 마음의 눈이 닫히게 됩니다. 폐쇄적이 되고, 소극적이 되고, 모든 것을 어둡게만 봅니다. 세상 만물을 그 어두운 그림자만 보게 됩니다. 마음의 눈이 닫힌 사람은 더 이상 인간다운 삶을 산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희망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희망을 잃으면 우리 마음의 눈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찾은 사람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두 사람이 다시 희망을 찾아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됐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려 어둡고 무겁게 엠마오로 가던 사람들이 다시 희망을 찾아 밝고 힘차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이 변화했습니까? 바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절망 중에 낙향하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를 소원했고, 그래서 주님을 찾아 헤매다가 자기들의 애쓰고 노력해서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들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들이 여인들이 주님의 무덤에 갔다가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지만 이들은 믿지 못하고 낙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주님께서 분명히 사흘만에 살아나리라 말씀하셨고, 또 무덤에 가서 확인한 사람이 그 소식까지 전해주었지만 이 두 제자는 믿지 못하고 절망 중에 낙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희망을 잃어버리니까 의욕도 사라지고 열정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외 없이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만났습니다. 다메섹 도상의 사울도 느닷없이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만났습니다. 베드로도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고 있을 때 뜻 밖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만났습니다. 끝까지 믿지 못하던 도마에게도 나타나셔서 그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게 해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체험은 한결같이 주님이 찾아오셨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너무도 놀라운 사건이고, 우리 인간의 상식과 인간의 기대를 뛰어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의 부활을 예상하거나 기대하거나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나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만나 주신 사람들만 부활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영적으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가 확고한 부활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 두 사람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 눈이 밝아졌습니다.

 

본문 31절을 보면 '저희 눈이 밝아져'라고 말씀했습니다. 앞의 16절과 대조되는 표현입니다. 눈이 가리워졌었는데 이제 그 가리워졌던 것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이 말을 '디아노이고'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연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번역해 보면 저희 눈이 열리고 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두 제자는 절망 속에 엠마오로 낙향을 하던 도중 그들의 눈은 무엇엔가 가리워져 제대로 볼 것을 볼 수 없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에 그 무엇인가가 사라지고 눈이 활짝 열려 봐야 할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행 9장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사울이 갑자기 눈이 보이질 않게 되었습니다. 그가 사람들의 인도를 받아서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아나니아를 만났습니다. 그가 사울에게 안수하며 기도했을 때 행 9:18을 보면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우리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집니다. 이 세상 정욕의 비늘, 이 세상 물질의 비늘, 이 세상 자랑의 비늘, 이 세상 욕심의 비늘... 이런 비늘이 벗겨질 때 우리가 저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희망이 찾아듭니다. 우리말에 희망이 보인다라는 말이 있듯이 정말 우리 마음의 눈이 뜨이면 희망이 보입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희망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부활의 계절이 희망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본문 32절을 보면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32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라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된 원인이 바로 주님께서 성경 말씀을 풀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니까 성경을 풀어준다고 할 때 '디에노이크데산'아란 단어를 썼습니다. 이 말은 연다는 뜻의 '디아노이고' 동사의 부정 과거 수동형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열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눈이 밝아졌다고 할 때 그 눈을 열어주신 것처럼 이번에 주님께서 성경을 열어주셔서 그 뜻을 깨닫게 됨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는 이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문이 활짝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음이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해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겁다는 것은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고,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고, 마음에 결단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뜨거워지면 사람은 힘 안들이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먹기 달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마음이 뜨거워지면 우리 마음에 희망이 피어오릅니다. 우리의 삶에 희망이 가득차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성경이 열리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문이 열리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삶에 희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행동했습니다.

 

본문 33 이하를 보면 이 두 사람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우선 그 시로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시로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어두운 밤중입니다. 이들은 엠마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너무 늦어서 예수님께서 더 가실 수 없다고 함께 유숙하지고 간청을 했습니다. 즉 너무 어두워져서 출타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둡고 출타할 상황이 아니지만 너무 좋은 소식이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어둠을 무릎 쓰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서 그 밤을 그곳 엠마오에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다시 그 밤에 달려간 곳은 그들이 등을 돌리고 떠나온 곳 예루살렘이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려 떠나왔던 곳, 그곳에 아직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희망을 추수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떠나온 그 형제들, 그들이 뒤로 하고 온 그 예배처, 그들이 잊고 있었던 맡겨진 사명들... 그것들이 다시 희망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어떻게 이토록 극적으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까? 이들에게 일어난 변화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상황은 바뀐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는 한 가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찾게 해 주신 것입니다.

 

부활의 계절입니다. 우리 안에 희망을 잃어버린 채 쓸쓸히 살아가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석양을 바라보며 허전하게 눈물짓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까? 인생의 내리막길을 허망하게 걷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황이 아무리 나쁘고 여건이 아무리 최악이라 해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그분이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