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라 (말 1:1-5)
1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이 시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으라”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일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 하나님의 말씀과 내가 느끼는 생각이 다르지는 않습니까? 예를 들면 성경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 하셨는데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지는 않느냐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울하며 부정적이고 자기를 불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2절에 보면 완전한 동문서답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그렇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는 그 사랑을 모르니 감사는 고사하고 불만불평의 배은망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배은망덕하지 않으려면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그 사랑을 묵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것은 코앞에 보이는 현실적인 느낌에만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멀리 그리고 넓게 생각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비참한 바벨론의 포로생활 속에서 기적적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착하고 충성된 사람들을 일으켜 주셔서 나라를 재건하게 하시고 그 숙원이던 성전까지 짓게 하신 것을 생각했다면 어찌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우선 당하는 현실만 생각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그동안 크신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그들은 우선 풍족하지 못하고 우선 힘들고 우선 고통스런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서운해 하실 일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의식주가 풍성하고 모든 일이 형통하면 그 때만 사랑일까요?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 때문에 매사가 답답합니다. 좀 깊이 생각하면 좋으련만 너무 쉽게 속단하고 오해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형통하면 하나님이 사랑하고 어려우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단세포적인 생각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할까요? 하나님 사랑을 묵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인들이 자기 소원만 아뢰는데 익숙하지 묵상이 부족한 것 같아요.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해 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원하여 사모하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을 경외함이 달라지고 우리의 행복감이 상승하고 우리의 인생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2. 구속의 은총을 생각해야 합니다.
2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 형제 중에 에서는 버리시고 야곱을 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예정론이 나오는데 이스라엘은 이 선택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무 조건 없는 절대적인 사랑으로 택해주신 그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즉 구속의 은총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칼빈이 예정을 설명하는 것을 보면 우리 구원은 미리 예정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교리가 부당하다고 부정하는데 어찌 됐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은혜 중의 은혜이고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백에 하나 천에 하나 선택해 주셔서 예수 믿게 해주신 은혜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자신으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택하시고 불러 주심은 우리가 영원토록 감사하고 찬양할 제목입니다. 영원 전부터 나를 계획하시고 세상에 나게 하시고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구원해 주시고 성령으로 불러주시고 천국까지 예비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롬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도 놀랍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도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인생 가운데 우리를 불러서 예수 믿게 하시고 하나님 자녀 삼으신 것을 생각한다면 어찌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에서를 버리시기까지 야곱을 사랑해 주신 그 사랑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3. 특별하신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3절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왜 하나님은 에서를 말씀할까요? 에서의 자손과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에서의 에돔 족속도 함께 바벨론에 잡혀갔는데 야곱의 자손들은 해방되어 나라를 재건할 수 있었지만 에서의 후손은 나라를 찾지도 못하고 파멸에서 처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에서와 같이 마땅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에서의 후손과는 전혀 다른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에서의 나라는 여우들이 집을 짓고 여전히 황무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은혜로 포로에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의 바벨론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얼마나 특별은총을 베풀고 계신 줄 아십니까? 그런데 그냥 벗어납니까? 특별한 연단을 통해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고난 속에서 부르짖다 은혜 받아 회개하고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큰 환난에서 나오는 흰옷 입은 무리가 바로 우리 성도들입니다. 이런 특별은총 속에서 다시는 바벨론의 상품을 사지 않는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히12:6-8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온전케 하셔서 귀히 쓰시고 하늘의 온갖 복된 것으로 채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선 고통스런 현실만 생각하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지혜롭고 봐야 합니다. 미련은 그 무엇으로 구제할 수 없어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세요.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징계를 많이 받는 자일수록 더욱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욥이 그랬지요? 욥7:17-18에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욥은 분초마다 징계를 받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크게 사랑하는 사람은 생각만 잘못해도 치십니다. 하루 후에가 뭐에요. 욥의 말이 과장이 아니에요. 분초마다 치셔요. 눈 앞의 고난만 바라보지 마시고 나를 온전한 사람 만들어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사람 만드시려는 그 사랑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4. 장래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4-5절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이 말씀대로 에서의 후손은 희망이 없어요. 에서의 앞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없어요. 그래서 그들의 거듭된 자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기할 수 없는 너무나 비참한 상태를 보고 사람들은 그들이 죄악의 결과라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뭡니까? 그런데 너희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의 앞날은 그들과는 달리 희망으로 가득한데 무슨 하나님 사랑 타령이냐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미래를 생각해 보세요. 왜 하나님의 사랑을 못 느낀다는 말입니까? 에서의 자손 즉 오늘로 말하면 불신자들은 모두 영원한 절망의 지옥에 떨어지는데 하나님 백성들은 그런 심판이 없습니다. 영원한 천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14:1-3에 주님은 다정한 음성으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지않았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5.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롬5:5에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셔서 체험하고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모두 그 사랑에 기뻐 뛰게 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한 유대인들이 아기 예수를 영접치 못했습니다. 이처럼 조금만 더 신앙생활 잘하면 그 사랑을 체험할 텐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2절의 하나님의 사랑은 ‘아하브’인데 그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큰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우선 현실만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감사하지 못하고 찬양하지 못하고 불만 불평한다면 스스로 불행할 일입니다. 이런 현실에서도 그 사랑을 믿도록 우리의 신앙을 훈련하심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에 사는 한 어머니에게 1950년대 한국전쟁에 파견되어 있던 아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 제가 제대를 한 달 후에 하게 됩니다." 어머니는 너무 기뻐서 “그래, 고생 많았다. 빨리 오너라.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단다” 그러자 아들이 말합니다. “그런데 어머니 집에 갈 때 한 친구를 데려 가야해요. 그 친구는 부상 당하여 한 눈이 실명되고 팔과 다리 하나씩이 없는 불구자예요. 오갈 때가 없어 제가 데리고 살까 합니다.” “그래, 걱정말고 데려와. 고생들 했으니 집에 데려와서 한 일주일쯤 푹 쉬게 해 주어라.” “어머니 일주일은 안 됩니다.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설득합니다. “애야, 네가 그 친구를 평생 데리고 산다는 것은 정말 기특하다마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라.” 그러자 아들은 “알았습니다. 어머니”하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 후 일주일, 경찰에서 “당신의 아들이 어젯밤에 센디에고 호텔 12층에서 투신자살을 했으니 사체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놀란 어머니가 부랴부랴 달려가 보니 바로 한 눈이 없고 한 팔과 한 다리가 잘려 나간 그 친구라는 사람이 다름 아닌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그렇게도 모른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신 큰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늘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마음은 더욱 밝아지고 우리 삶은 변화되고 아버지의 사랑의 기적은 더욱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에서만 찾지 말고 좀 더 멀리 좀 더 깊이 좀 더 자세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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