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선지서

[스크랩] 요나 강해

공 상희 2009. 6. 9. 16:16

 

 

 

 

 

 

 

요나 강해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


 

 

 

 

 

 

요나 1:1-10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2004. 12. 1.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4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5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수요일은 구약과 신약을 교대로 보기로 하였는데 그동안 히브리서의 본문이 길어서 구약으로 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요나서와 나훔서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나서는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 성에 가서 망한다는 소식을 전하자 회개하여 용서받은 내용이고 나훔서는 그렇게 용서받은 니느웨가 다시 멸망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니느웨의 이야기가 이스라엘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기 위하여 니느웨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요나 속에 이스라엘 전체를 담아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요나 선지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만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계시의 말씀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8-41절을 봅니다.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예수님께서 요나에 대하여 두 가지의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시면서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나의 전도를 듣고 니느웨 사람이 회개하였는데 요나보다 더 크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라고 하십니다. 두 말씀 다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역시 십자가의 표적을 유일한 표적으로 믿지 못하고 다른 표적들을 구하고 있다면 책망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가 무슨 표적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밤낮 사흘을 땅속에서 있으리라는 그 표적을, 그 죽으심을 인하여 죄와 사망에서 해방한 그 표적을 원하지 아니하는 이 세대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리고 복음 전도를 받고도 회개치 아니하는 우리가 심판을 받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요나서를 통하여서도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원합니다.

 

 

 

요나 1:1절입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합니다.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져서 남쪽은 아마샤가 왕이고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왕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여로보암이기에 이 왕을 여로보암 2세라고 부릅니다. 이때 아밋대의 아들 요나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이 열왕기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14:25-27절입니다. “23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십오 년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을 위에 있으며 24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26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27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도말하여 천하에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이스라엘의 왕이 악하여 온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초대 왕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합니다. 그런데도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넓은 영토를 회복하게 된다고 말씀하시고 그대로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보신 까닭입니다. 이스라엘에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가 없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진멸하리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에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잘해서 그렇게 나라가 부강하게 된 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선지자들이 회개하라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그 회개의 요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로보암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는 요나와 아모스이며 호세아는 여로보암 말기의 선지자입니다.

 

 

 

이들 선지자들의 외침이 무엇입니까? 특히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수많은 재난을 주신 것은 돌이키게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이키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제는 마지막 처방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깨닫고 돌아올 것인지?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고발하기 위하여 요나 선지자를 니느웨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멸망받을 나라도 회개하면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이미 그 죄악이 가득하여 하늘에 상달된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그 죄악이 관영하여 하늘에 상달되었으니 심판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지역의 니느웨 성입니다. 니느웨는 북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나중에는 포로로 사로잡아 가는 나라가 됩니다만 그 악이 가득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 전도를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선포의 내용은 이 성이 40일 만에 망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전하기를 싫어한 것은 그 멸망의 소식을 듣고 혹시 니느웨 성 사람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임을 알았기에 미리 피하고자 한 것입니다.

 

 

 

요나 4:1-3절입니다. “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한 것은 니느웨가 회개하여 멸망하지 아니한 것 때문입니다.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합니다. 지금 자기 자신이 회개하여야 하고, 자기 민족이 회개하여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고 자기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인 것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자기의 뜻을 펼치시고 계시는데 요나는 자기의 뜻대로 도망가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여호와의 낯을 피하고자 하는 이 심보를 요나를 통하여 우리에게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요나 1:2-3절입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다시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 끝과 같은 곳이기에 멀리 도망가려고 한 것입니다. 다시스로 가기 위하여 욥바로 갔는데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피하는 일에 일이 잘 풀려간다고 안심할 내용이 아닙니다.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습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배에 올라서 배의 가장 낮은 곳에 가서 잠들고 말았습니다.

 

 

 

지음 받은 피조물이 창조주의 낯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마음까지 통촉하시는 분께서 어찌 숨는다고 숨겨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담의 범죄후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범죄하고서는 부끄럽고 두려워서 피한 것입니다.

 

 

 

창세기 3:8절입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스스로 몸을 가리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시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지금 요나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찾아 나서신 것입니다. 도저히 피하여 숨을 수가 없는 분인데 피하여 숨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소치입니다. 아담을 직접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요나를 찾아 나서시는데 간접적으로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1:4-8절입니다. 요나가 탄 배가 바다로 나갔는데 갑자기 대풍이 불어 닥친 것입니다. 배가 깨어질 지경이 되어 가지고 가던 화물조차 바다에 던지며 자기들의 신을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잠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여 주신 잠이 아니라 사망의 잠인 것입니다. 그 요나를 선장이 흔들어 깨웁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깨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여 보라고 합니다.

 

 

 

자기들이 아무리 부르짖어도 되지 않으니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신을 부르면 효험이 있지 않을까 하여 요나를 깨운 것입니다. 그러나 대풍은 계속되고 풍랑은 배를 집어삼킬 듯이 몰려드니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제비를 뽑자고 한 것입니다. 결국 요나가 걸립니다. 사람들이 추궁합니다. 너는 도대체 어떤 자인가?

 

 

 

1:9-10절입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인데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이렇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무슨 범죄를 하였기에 신이 노하여 이렇게 대풍이 불어온 줄 알았는데 요나가 고백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듣고서 그런 능력의 하나님을 어떻게 피할 수 있다고 이렇게 행하였느냐는 말을 이방인을 통하여 듣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가고자 합니까? 나에게 조금만 불리한 말씀 같으면 이 핑계 저 핑계 들이대면서 도망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디로 도망가겠습니까? 도망가면 가만히 내버려 두십니까? 찾아 나서시는 분이십니다. 그 앞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앞에서 노출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가릴 수가 없습니다. 만물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주님 앞에 서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시편 139편에서는 주님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신다고 하십니다. 앉고 일어섬과, 길과 눕는 것을, 모든 행위와 모든 말을 알지 못함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어디로 피하겠는가 라고 노래합니다.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음부에 내려갈지라도, 바다 끝에 가서 거할 찌라도 주님의 손이 붙드신다고 하였습니다.

더 이상 피하여 갈 수 없습니다. 죽음조차 피할 수 없는 그 사랑 안에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나 1:11-17  나를 바다에 던지라  2004. 12. 8.

 

 


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6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요나 선지자는 피할 수 없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다가 여호와께서 보내신 폭풍을 인하여 결국 하나님의 추궁 앞에 설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질문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 선장을 통하여, 제비뽑기를 통하여 꼼짝없이 들추어내시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자신이 여호와의 낯을 피하였기에 이런 폭풍이 온 것이라고 말하자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놀랍니다. 그러나 폭풍은 점점 더 심하여지는 것입니다. 요나를 찾아내시는 것으로 끝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자 배에 탄 사람들이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이 바다가 잔잔해 지겠느냐고 묻습니다(11절).

 

 

 

12절을 봅니다.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자기의 연고로 폭풍이 온 것이기에 자기를 바다에 던지면 바다가 잔잔하여지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콕 찝어내시니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배에 탄 사람들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히브리인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을 어겨서 도망가다가 이런 폭풍을 보내셔서 찾아내시는 두려운 하나님의 선지자를 혹시 잘못 건드렸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노를 저어서 육지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바다는 점점 더 흉용해지는 것입니다(13절). 이제 선원들이 어쩔 수 없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데 그러나 여호와께 부르짖어 구하고 구하면서 아룁니다.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시기를 구합니다.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것은 자기들이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뜻대로 하는 것이니 무죄한 피를 자기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요나를 바다에 던졌는데 바다는 그 풍랑이 곧 그쳐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그칠 줄 모르든 폭풍, 점점 더 심하여 가던 풍랑이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는 순간 갑자기 잠잠해진 것입니다. 선원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희생 제사를 드리고 서원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서원이란 히브리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기에 그를 섬기겠다는 서원일 것입니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믿고 섬기며 부르짖었던 그 신들은 아무른 응답이 없었으나 요나 선지자의 말대로 바다에 던졌더니 곧 잠잠해짐을 보고서 여호와를 경배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선원들의 두려움과 또 다른 하나는 요나가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한 것입니다. 먼저 선원들의 두려움이 어떤 두려움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단지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고 도망간 죄를 인하여 그렇게 무서운 폭풍을 내리시고 결국 바다에 던지는 것을 보고서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우리가 선원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여호와의 명을 어긴 죄로 그렇게 바다에 던져 죽이는 신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죄란 물어볼 것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학교에 지각한 학생이 교장이나 이사장의 아들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그 지각한 학생을 몽둥이로 거반 죽도록 패버렸다면, 결석한 학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화장실에서 담배 피다가 들키는 학생은 어떻게 되며, 수능시험 치다가 휴대폰으로 컨닝한 학생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에 어쩔 수 없이 던지면서도 여호와께 부르짖어 구하고 구하기를 그 피 값을 자기들에게 돌리지 말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무엇을 간구하고 있습니까? 죄인인 요나의 죽음 앞에서 선원들이 저렇게 두려워 떨고 있는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어떤 자세로 서있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27:24-26절입니다. “24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요나와 함께 배에 탄 이방인 선원들은 요나의 피 값을 자기들에게 돌리지 말기를 간구하였는데, 하나님의 법을 목숨처럼 지키며, 하나님을 섬긴다던 유대인들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 값을 자기들에게 돌리라고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죄 없다고 놓으려고 하였으나 유대인들은 그 피 값을 자기와 자기 자손들에게 돌리라고 할 정도로 자기들은 정당하고 의롭고 예수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알지 못하면 여전히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혀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자기에게 불리하고 손해가 오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할 수 있는가 하면서 항의성 기도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와 함께 탄 사람들은 그 배에다 자기들의 무역품들, 어떤 사람들은 전 재산을 투자해서 장사하고자 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건들을 몽땅 바다에 버리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기는커녕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고 제물을 드리고 서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려운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있기는 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증거되어도 사람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인지를 계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겉옷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가지고, 속옷은 제비뽑아 가지고자 하는 그 군인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나는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살아남아야 된다고 한다면 아직도 자신이 죽어 마땅한 자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방인 선원들이 만난 그 두려움조차도 없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로 보고자 하는 내용은 요나가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선원들을 살리기 위한 희생정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이미 죄인이기에 그의 희생으로 선원들을 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께 항의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니느웨 성에 가서 전도는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가 가지고 있던 신학이며 이스라엘의 신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들을 위한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가 아니고 자기들을 위하는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는 그 약속의 말씀을 보아도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망해야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무조건 세상에서 잘 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기업이 섬기지 아니하는 기업보다 잘 되어야 한다고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도 모르고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세상에서 성공하고 큰소리치는데 그런 꼴을 보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죽으면 죽었지, 망하는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는 말을 하지 않겠다는 고집이요 자기 의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요나가 죽음을 경험하고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나와서도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모습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4:3-4절을 봅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요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옳다는 것이지요!

 

 

 

요나는 니느웨 성이 망하는지 아니하는지 보려고 초막을 짓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 위에 박 넝쿨을 준비하셔서 시원하게 하시니 요나가 아주 기뻐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벌레를 명하셔서 박 넝쿨을 갉아먹게 하셔서 말라버림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보내시니 요나는 또다시 죽기를 구합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 보다 낫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박 넝쿨 때문에 왜 성내느냐고 하시자 성내어 죽기까지 하여도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 요나가 누구 모습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마음에 조금 들면 죽자고 좋아하다가 조금 싫으면 죽자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박 넝쿨 한 포기로 죽고 살고 하는 모습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순전히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요나도, 이스라엘도, 오늘 저와 여러분도 동일한 모습이 아닙니까? 아멘.

 

 

 

하나님도 예수님도 교회도 사회도 가정도 다 나를 좋게 해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 원망의 대상일 뿐입니다. 어떤 분이 자기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하느라고 하는데 남편이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여기는데 왜 남편이 자기 말을 안 들어 주는지 하나님이 원망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얼마나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시는데 우리는 우리의 영광과 우리의 이름을 위하여 살고 있으니 이것이 우상숭배의 모습이 아닙니까?

 

 

 

요나서를 통하여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선지자가 이런 모습이라면 다른 사람은 더하면 더하였지 선지자보다 나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회개케 하시며 오늘 저와 여러분을 회개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를 통하여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죄 없이 희생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너는 어떤 인간인가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아직도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시겠습니까? 요나처럼 나를 바다에 던져 넣어라, 죽을지라도 내가 정당하다고 소리치고 싶으십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대하여 심판을 집행하시는 것입니다. 그 아들의 피로, 복음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7-18절입니다.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그러므로 성도란 회개하는 자들입니다. 회개란 복음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죽어 마땅한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32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요나 2:1-10  물고기 뱃속에서  2004. 12. 15.

 

 


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5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8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다가 하나님께서 폭풍을 보내시고 제비뽑기에까지 걸리게 하셔서 요나를 찾아내셨습니다. 선원들의 추궁에 요나는 자신으로 인하여 폭풍이 일어난 것이니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회개하는 모습이 아니라 반항하는 모습임을 보았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도망하고 죽기까지 자기의 정당성을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은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이 됩니다. 그러므로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패역을 알게 하시고 그들을 어떤 방법으로 구원하시는지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요나는 죽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죽고서 산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의로서는 하나님의 원수가 될 뿐입니다. 그러한 자를 죽음의 경험을 통하여 회개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 현장이 물고기의 뱃속입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죽음의 고난 속에서 드디어 부르짖게 됩니다.

 

 

 

2:1-2절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합니다. 니느웨로 가라고 했는데 다시스로 내려가고 배 밑창까지 내려가고 이제는 바닷속 물고기 뱃속까지 내려갔습니다. 그 깊이를 스올의 뱃속이라고 합니다. 스올은 음부 즉 무덤을 말합니다. 6절에서는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고, 땅의 빗장으로 막았다고 합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무덤과 다를 바 없는 물고기 뱃속에서 드디어 부르짖습니다. 부르짖자 말자 자기의 음성을 주님께서 들으셨다고 하십니다. 바다에 던져져서 죽어야 마땅한데, 준비된 물고기에 의하여 아직도 살았고, 또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이미 응답으로 확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기도는 구원받아야 나오는 기도인 것입니다.

 

 

 

2:3-4절입니다. 바다에 던져진 것이 누구에 의한 것입니까? 사공들이 바다에 던졌지만 그 던짐을 하나님께서 던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다에 던져져서 큰 물이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내 위에 넘쳤다고 합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의 근원적인 문제는 바다에 던져져서 물고기 뱃속에 있는 것보다 성전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성전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성전이란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관되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성전을 향하여 계시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희생제사가 드려짐으로 하나님과의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막혀버린 것입니다. 그 쫓겨남을 심판으로 알고서 요나 선지자는 기도합니다. 비록 성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뻔뻔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은혜입니다. 비록 쫓겨났을지라도 성전을 바라보겠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열왕기상 8:46-50절입니다. “4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47 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48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4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보옵시며 50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저희를 사로잡아 간 자의 앞에서 저희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저희를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성전 낙성식 때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다윗과의 언약을 확실하게 하여달라고 간구하면서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는 내용들 중에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으니 범죄함으로 다른 나라에 끌려간 후에라도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한 내용입니다. 요나가 지금 개인적으로 불순종하여 바다의 포로, 물고기의 포로가 되어 있지만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은 이 약속의 말씀을 따라 한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요나의 기도는 시편의 여러 간구와 거의 일치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그 시편의 말씀으로 기도하고, 비록 성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겠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요나로 하여금 말씀을 기억나게 하셔서 말씀대로 구원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기도가 성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성전에서 쫓겨났을 지라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한 요나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찬송합니다. 아직 물고기 뱃속에서 이미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신실하게 이루실 것을 믿기에 나오는 확신입니다.

 

 

 

5-6절입니다. 물이 요나를 둘렀는데 영혼까지 둘렀다고 합니다. 깊음이 어느 정도의 깊음인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고 땅의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다고 합니다. 아직 물고기 뱃속에서 있으면서 건지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 말씀을 따라 간구하고 응답을 받았기에 이미 건지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8-9절입니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우상숭배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자들입니다. 그 죄를 누가 지었다는 것입니까? 바로 요나 자신입니다. 요나의 고집이 바로 우상숭배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정당성을 하나님의 뜻보다 우선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5:22-23절입니다. “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사울 왕이 버림 받는 모습입니다.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서 절하는 죄와 같은 것입니다. 이 죄를 요나가 지었고 이스라엘이 지은 것입니다. 요나와 이스라엘이 거역하고 완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뱃속에서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고 구원받습니다. 요나의 이 개인적인 경험은 이스라엘 전체의 경험으로 확대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완고함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예레미야 51:34절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로 빈 그릇이 되게 하며 용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을 용같이 삼켰다고 합니다. 용이란 바다의 괴물, 괴물같이 큰 물고기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 개인이 물고기 뱃속에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그들의 죄악을 깨닫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시편 137:1-9절입니다.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찌로다 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8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9 네 어린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

 

 

 

바벨론의 포로생활 때에 시온을 향하여 울었다는 것입니다. 시온에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시온을 향하여 울 때에 시온으로 돌이켜 주셨습니다. 물고기 뱃속 같은 바벨론에서 돌이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 51:4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벨을 바벨론에서 벌하고 그 삼킨 것을 그 입에서 끌어 내리니 열방이 다시는 그에게로 흘러가지 아니하겠고 바벨론 성벽은 무너지리로다” 요나 선지자의 개인적인 경험이 이스라엘 전체의 경험으로 확대됩니다. 이렇게 하심을 통하여 무엇을 알리시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요나서 2:8-9절입니다. 은혜를 버리지 아니하도록 하시며, 그 은혜를 앎으로 감사로 주님께 제사를 드리고, 구원이 여호와께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때 물고기가 요나를 토하여 내어 놓습니다(10절). 더 이상 물고기가 삼키고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나와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도 다 거역하고 완고한 자들입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자신의 의와 정당성을 요나처럼 큰소리 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거역하고 완고하지 않습니까? 그들을 죽음의 경험인 물고기 뱃속과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됨을 통하여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게 하시고 구원이 오직 여호와께 있음을 알게 하셔서 여호와만을 의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은혜가 주어진 것입니까? 요나와 이스라엘의 경험을 우리가 직접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임하시면 우리가 죽어 마땅한 자임을 알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는 차원에서는 같은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주변의 모든 환경이 마치 요나의 물고기 뱃속처럼 답답함과 우겨 쌈을 당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나는 죽었다, 더 이상 살 소망이 없다는 그런 때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의가 날아가고, 자신의 공로가 무참히 깨어지고, 자기는 정당한데 왜 이런 일이 닥치는가 하면서 항의한 것들이 오히려 회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주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요나의 선포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은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오직 구원이 주님께만 있다고 선포할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게 되면, 구원은 나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을 당하신 것으로 죄와 사망에서 이긴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물고기 뱃속에서 토하여 내어지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토하여 내어져서 주님의 거저 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로 인하여 감사하며 그 은혜를 잊지 아니하고 구원이 주님께만 있음을 증거할 것입니다.

 

 

 

 

 

 

요나 3:1-10  회개  2004. 12. 22.

 

 


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 길이라 4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6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7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합니다. 처음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다가 바다 밑, 물고기 뱃속, 스올의 뱃속까지 들어갔다가 회개하고 3일 만에 토하여 내어진 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임한 것입니다. 큰 성 니느웨로 가서 그들에게 선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아니하시고 그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실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요나 선지자가 순종하지 아니하고 도망가더라도 그 말씀은 성취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의 성취를 위하여 풍랑이 일어나고, 요나가 뽑혀 나오고,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서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선포의 내용은 이 성이 40일이 지나면 무너지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는 요나의 심정은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전에 한번 불순종하였기에 이제는 단 마음으로 순종하여 전하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못해 겨우 전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니느웨 성안에 다 전하려면 3일 길은 돌아다니며 선포하여야 하는데 겨우 하루만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포의 내용도 40일후면 무너진다는 내용만 전한 것입니다. 물론 다른 내용들도 전하였으리라고 보지만 흔히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내용과 너무나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선지자들이 자기 백성들에게 심판을 선포할 때는 왜 심판이 임하는지를 알게 하여 회개하고 돌아서도록 외치는 것입니다.

 

 

 

아모스 4:6-12절을 보면, 성읍에 기근을 보내서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게 하시는 것은 주께로 돌아오라는 것인데 돌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온갖 재해와 전염병이 도는 것과 성읍이 불에 타는 것도 주님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인데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포하시는 것은 돌이키게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오지 아니하였기에 결국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 성에서는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저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40일의 기간이 주어진 것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간이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40일 기간을 구약에서 봅니다. 처음 시내산에서 돌 판을 받을 때에 금송아지 사건으로 모세가 깨뜨립니다. 두 번째 돌 판을 받을 때에 다시 40일간을 금식하며 회개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시겠다고 하시므로 모세가 40일을 금식하며 그들의 죄악을 사하여 달라고 간구한 기간입니다(신9:18,25).

 

 

 

그러면 니느웨 성이 40일 지나면 망하리라는 선지자의 선포를 듣고서 어떤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5절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먼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옷을 입은 것입니다. 이 소식이 왕에게 전하여지자 왕이 조서를 내려서 사람이나 짐승까지 무론하고 금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물도 마시지 못하게 하고 짐승까지 굵은 베를 입힌 것입니다. 그리고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합니다. 동시에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라고 합니다. 그러자 온 성읍이 회개하고 용서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니느웨 성이 회개하고 용서 받은 것은 그들의 회개한 행위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비록 철저하게 회개하지만 회개하였기에 당연히 용서하여 주셔야 된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회개는 마땅히 할 뿐이고 용서는 하지 않으셔도 지극히 마땅하십니다, 하는 태도가 회개의 자세입니다. 나 회개하였는데 왜 용서하지 않으시는지를 따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나 10:9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회개한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주셔서 멸망치 않게 해주시는 줄을 누가 알겠느냐고 한 것입니다. 회개하였으나 반드시 당연히 구원하셔야 된다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죽어야 마땅한 자임을 아는 자의 회개의 모습입니다. 요엘 선지자도 이런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요엘 2:12-14절입니다.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14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여기서 니느웨 성과 이스라엘을 비교하여 봅시다. 니느웨 성의 사람들은 선지자 한 사람이 가서 이 성읍이 40일 만에 망하리라는 그 한마디를 듣고서 임금으로부터 온 백성과 짐승에 이르기까지 금식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서 회개합니다. 그 회개가 그들이 용서받는 근거는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자비와 긍휼로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회개 행위를 의지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셔서 그들을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이키지 아니합니다.

 

 

 

예레미야 25:3-4절입니다. “3 유다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의 십삼 년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일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 하였으며 4 여호와께서 그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부지런히 보내셔서 돌아오라고 하셔도 돌아오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니느웨 성 사람들의 회개를 통하여 목이 곧고 회개하지 아니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37-39절입니다.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그들이 회개하지 아니하였다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바로 앞 단락의 말씀을 보시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이 지금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지키지 못하여 이렇게 되었다고 보고서 다시 율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를 목숨처럼 지키는 자들입니다. 온갖 율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금식을 두 번이나 하는 자들입니다. 요엘서에서처럼 금식하며 애통하며 주께로 돌아왔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께 왜 책망을 받고 저주를 받는 것입니까? 그들이 마음을 찢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옷은 찢을 수가 있고, 애통도 금식도 할 수 있지만 마음을 찢는 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마음을 찢는 회개란 주의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회개란 자기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기들처럼 열심히 율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들만이 메시아가 오시면 받아줄 자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긍휼이 아니라 자신들이 스스로 주께로 돌이켰다는 자기들의 의요, 자기들의 정당성이었습니다. 모든 자를 불순종 아래 가두어 두시고 오직 주의 긍휼로만 구원하셔서 주의 이름이 홀로 찬송을 받으시는 구원에 대하여서는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니느웨 성의 회개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회개치 아니하는 죄악을 고발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살펴보면 우리의 모습도 역시 함께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들은 이미 여호와께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율법도 지키고, 혹 어길지라도 성전도 있고 제사도 있으니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가짜 평안을 남발하고 있기에 그들도 속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자기들이 비록 부족하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방인들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의입니다. 자기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어떻게 이방인 보다야 못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항 항의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그러한 고민으로 하나님께 항의성 기도를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문제는 여전히 계속될 수 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께로 돌아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잘 다니고 있고, 봉사도 잘하고 있으니 주께로 돌아와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모습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자기 정당성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완벽하게 의롭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만큼 하는 사람도 없는데 왜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항의입니다. 그 불만은 주변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나타나고 하나님께 대하여서도 항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회개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 전도를 받지 못한 모습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선포한 내용, 즉 전도한 내용은 이 성이 망할 것이라는 소식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전도도 역시 같은 선포여야 합니다. 니느웨 성이 망한다는 소식처럼 이 세상이 망한다는 소식이 복음의 전제입니다. 이 세상에 희망과 기대를 주는 선포가 아닙니다. 망한다는 소식입니다. 이 세상이 망한다는 소식이 들려지고 있는 한 아직은 기회가 있습니다.

 

 

 

그 망해야 마땅한 이유가 자기에게 있음을 아는 자가 회개합니다. 마음을 찢고 주께로 돌이키는 회개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노라고 하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 주님 앞에 죽어 마땅한 자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안 것입니다. 그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하여 마음을 찢고 주께 돌이킨 자의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11: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들었습니까? 단 한번 듣고서 회개한 니느웨 성 사람들이 심판 때에 우리를 정죄하지 않겠습니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나 4:1-11  요나의 분노  2004. 12. 29.

 

 


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로 전도하러 가지 않고 도망간 분명한 이유가 오늘 본문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회개의 기도가 아니라 항의데모인 것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감사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지금은 심히 싫어하고 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의 분노는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적이요 악한 이방인이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선지자였습니다.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 정도로 싫은 나라가 회개하고 용서를 받는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는 이스라엘의 근원을 잊어버린 모습입니다. 자신들도 죽어 마땅한 죄인들로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드러내는 도구로 선택을 받았는데 이방인들과 달리 자기들은 의롭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율법을 주셨으니 선택을 받지 못하고 율법도 없는 저런 이방인들이 돌아오는 것은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방인이 돌아온다고 하여도 자기들에게 완전히 종이 되어서 살려만 주소서 하는 자들이 돌아오면 모르겠는데 니느웨 성읍은 자기 나라를 학대하고 수탈해간 나라이기에 그 나라가 망해야 하나님의 공의가 있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읍이 회개하면 망하지 아니할 것이고 그러면 다시 자기 나라에 해를 끼칠 나라이니 망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망해야 하는 나라에 전도를 하라는 것은 아직도 회개할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 선지자는 회개할 기회마저 주지 않으려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감지하고서 도망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에 도망간 것입니다.

 

 

 

4:2절을 봅니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자기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도망간 것이지요! 만약 고국에서 이렇게 분명하게 기도하였다면 도망가지 말고 니느웨로 가게 하셨을 것이니 속으로 그렇게 여기고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이렇게 될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34:6-7절입니다. “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쌔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8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리어 경배하며 9 가로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

 

 

 

금송아지 사건으로 첫째 돌 판이 깨어지고 두 번째 돌 판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반포하신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이스라엘의 공통된 신앙고백이 되었고 선지서와 시편에서 자주 확인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 특히 선지자라면 아주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니느웨 성이 회개하면 용서하실 것을 알고서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분노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대한 분노인 것입니다. 왜 악인이 형벌을 받지 아니하고 다시 용서를 받는가에 대한 항의요 분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신들이 이미 목이 곧은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여 주시지 않으시면 진멸 받아 마땅한 자들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돌 판이 주어지는 것이 이미 그들은 진멸 받아 마땅한 자임이 전제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을 보면서, 요나 자신과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데도 자신이 받은 은혜와 용서는 아랑곳없이 자신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나라는 망해야 하나님의 공의가 선다고 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인간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 선지자를 통하여 다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의 이러한 분노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배척하는 결과가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에 대한 분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천국을 포도원의 품꾼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아홉 시간 일한 사람, 여섯 시간 일한 사람,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품삯을 주는데 제일 나중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일 먼저 온 사람은 자기는 더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역시 한 데나리온만 주니까 원망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루 종일 수고한 사람과 한 시간 일한 사람과 똑 같이 주느냐고 항의한 것입니다. 그 때 주인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 있느냐? 한 데나리온 약속하였으니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고 하시면서 내가 선하므로 네가 나를 악하다고 하느냐고 하십니다.

 

 

 

이 비유에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유대인들 중에서도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온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시각에서 결격사유가 너무나 많은 세리와 창기, 이방인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단지 용서만 받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고 하니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이 악함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죄악이요 우리의 죄악된 모습입니다.

 

 

 

우리라면 이렇게 대하는 주인이 있을 때에 원망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천국의 비유인데 이런 말씀을 자꾸 드리니 우리는 또 이렇게 이용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나 안하나 똑 같을 바에야 나는 열심히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요나의 사고방식이며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이며 우리의 사고방식입니다 아직도 자기가 어떤 죄인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방금 바닷속에서, 물고기 뱃속에서, 음부에서 용서받아 살아나온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유산을 받아 탕진하고서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가 영접하고 잔치를 베풀어 주었을 때 누가 원망합니까? 열심히 집에서 일하고 있었던 큰 아들이 분노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분노가 무엇이었습니까? 죄인들이 용서받는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4:3-5절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베푸심을 인하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니느웨 성 동편에 초막을 짓고 앉아서 성이 무너지는지 아니 무너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 것입니다.

 

 

 

4:6-11절입니다. 요나의 정당치 못함을 끝까지 들추어내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막 위로 박 넝쿨을 준비하셔서 그늘을 만들어 주십니다.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져서 괴로움을 면하게 하시자 요나가 심히 기뻐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벌레를 명하셔서 그 박 넝쿨을 씹어버리게 합니다. 곧 시들어버리는 순간에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십니다. 그러자 해가 그 머리 위에 비취니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간구합니다.

 

 

 

요나가 죽고자 하는 모습을 봅시다. 바다에서 던지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니느웨 성이 회개하고 망하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서 죽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이제는 박 넝쿨 하나가 말라버리자 죽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요나는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다고 합니다.

요나만이 아니라 인간의 원망과 분노가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죽으면 죽었지, 자기의 정당성을 포기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이스라엘의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원망의 모습입니다.

 

 

 

요나의 원망과 분노는 이스라엘 전체의 원망과 분노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의롭다고 하는 자들에 의하여 배척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은 결국 인간들의 자기 정당성의 주장입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를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모습입니다. 그를 죽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라도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것이 옳다고 고함을 지르는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이렇지 않습니까? 너무나 사소한 일로 인하여 죽기까지 분노하지 않습니까? 사소한 말 한마디로 평생 원수처럼 지내는 것입니다. 큰 다툼과 원망과 죽기까지 좋다고 악을 쓰는 그 정당성의 주장에는 무엇이 들어있는 것입니까? 세상이 나를 위하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나를 위하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원망과 불평과 분노의 표출인 것입니다.

 

 

 

4:10-11절입니다. 죽기까지 정당하다는 요나에게 네가 수고도 아니 하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 하나를 아꼈는데 이 니느웨에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은데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요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것으로 요나서는 끝이 납니다.

 

 

 

오늘 우리는 요나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바로 죄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좌우도 분변치 못하는 자, 어린 아이만이 아니라 미련하고 어리석은 죄인들을 오직 주의 자비와 긍휼만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죄와 그 용서를 알 때 입을 막을 뿐입니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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