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는 법과 살리는 법 (행 21:27-36)
이 시간에 “죽이는 법과 살리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살리는 법이 있는 나라와 죽이는 법이 있는 나라 가운데 어떤 나라에 살고 싶으십니까? 유치원생 질문보다 못한 질문이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살리는 법을 알지 못하고 죽이는 법 가운데 방황하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고 죽이는 일을 합니다. 본래는 살리는 율법이지만 인간이 율법을 행하기에 불가능하고 늘 범죄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이스라엘이 범죄해도 심판이 없었지만 율법이 주어진 후에는 범죄에 대한 징계가 따랐던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이슬람원리주의가 가장 문제인데 그들이 그토록 백성들에게 학정을 베풀고 외부 세력에게 테러를 가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이슬람 율법 때문입니다. 이슬람교는 우리가 참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호랑이 사자 같은 맹수를 키우고 말지 이슬람은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슬람교는 모든 종교의 적이요, 모든 문화의 적이요, 모든 여성의 적이요, 모든 민주의 적이요, 모든 자유의 적이요, 모든 평화의 적이요, 모든 일부일처제의 적입니다. 이슬람교는 얼굴도 내놓지 못하게 합니다. 어떤 소녀가 검은 수건을 벗고 얼굴을 내놓았다가 사람들에게 집단 폭행 당해 죽었지만 국가는 그것을 보고도 침묵하고 말았습니다. 친미 국가인 사우디에서도 최근 수십 년만에 처음으로 극장에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슬람을 매일 분별 없이 선전하고 있는 mbc를 비롯 우리네 방송사들이 더 이상 어리석음을 범치 않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율법이 발달할수록 그만큼 처벌 받아야 할 일도 많습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유대 율법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바울을 죽이려 했다라기보다 율법주의가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을 거슬리지 말라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바울은 헌신의 상징인 나실인의 결례까지 행하며 최선을 다했지만 결례의 7일째 되던 날 아시아에서 온 율법주의자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알아보고 유대인들을 충동하여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잡아 죽이려고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을 때 마침 로마의 천부장이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보내 바울을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한 가지 더 깨닫는 것은 아무리 율법이 강하다 할지라도 그 율법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또 다른 법이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시간 저는 전자보다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서 율법주의와 그 율법주의에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고자 합니다.
그럼 율법이란 무엇일까요?
1. 율법은 용서가 없습니다.
27절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여기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은 에베소에 살던 디아스포라 즉 교포 유대인들로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아시아이고 바울이 3년 동안 있어 안면이 익숙했고 그들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알아본 것도 그렇고 어느 지역보다 바울을 해하고자 하는 극악한 유대인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때가 오래면 잊을 만도 하지만 그들은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현재 일은 물론 지나간 일에 있어서도 용서가 없습니다. 히10:28에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수많은 일들이 바로 지나간 일들이 아닙니까? 바로 살지 못했던 일, 하나님 앞에 범죄했던 일, 순종함에 부족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던 일 등 지난날의 과오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넌 죄인이야, 넌 복 받지 못해, 넌 사랑 받지 못해, 넌 은혜 받지 못해, 넌 형편 없어, 이렇게 날마다 율법의 구박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거기에 대한 반기조차 들지 못합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저주의 율법주의보다 축복의 예수 복음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는 잊어도 율법은 잊지 않아요. 사후의 세계에 들어갔다 살아난 사람들의 증언을 보면 신자든 불신자든 하나님의 빛 아래서 자기를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 때 예수 피로 씻은 성도들은 그 빛을 받아도 고통을 받지 않고 기쁨이 충만하지만 불신자들은 자기를 가려줄 보혈이 없기 때문에 큰 양심의 고통을 느끼고 스스로 지옥을 택하여 떨어지고 만다고 합니다. 양심 없이 살던 사람도 그 때 만큼은 깊이 가책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사후에도 회개하지 않고 보혈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영원히 율법의 정죄 받아 지옥의 불에 떨어집니다. 지옥의 불이 맹렬하고 영원한 것은 율법의 정죄가 그만큼 맹렬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믿는다면서도 율법의 정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그의 가슴 속에는 활활 타오르는 지옥의 불처럼 답답하고 캄캄하며 절망함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보혈을 모르면 불신자로 돌아가자니 지옥이요 전진하자니 길을 몰라 첩첩산중이라 어떻게 할 바를 몰라 방황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의롭게 하신 보혈의 공로에 견고히 서시기 바랍니다.
2. 율법의 심판은 극렬합니다.
28절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무리를 충동했는데 그 효과가 얼마나 컸든지 30절을 보면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았다고 했습니다. 그럴 것이 유대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성전을 더럽혔다고 하니 폭탄의 뇌관을 건드리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손에서 바울은 금방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문지기 레위인들은 살인의 피로 성전이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성전문을 신속하게 닫아야 했습니다.
바울이 율법주의자들의 무모한 정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나실인의 서원을 하면서 얼마나 노력합니까? 그렇지 않아도 예수 믿고 성령 받은 사람은 율법의 조항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그 율법을 다 지킨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혜로 마음에 율법의 내용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13:8-10에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을 모함하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100가지 다 잘해도 한 가지만 잘못하면 그 한 가지로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2:10-11) 했습니다. 그러므로 살려면 사랑의 그늘로 가야지 율법의 그늘로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보혈의 그늘로 가시기 바랍니다.
3. 양심율법은 지식에 좌우됩니다.
그래서 잘못이 없어도 지식따라 정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29절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바울이 이방인 드로비모와 성내에서 함께 다니는 것을 보고 저를 성전 뜰까지 데리고 들어간 것으로 짐작하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율법은 증인 없이는 치지 못하도록 했는데 그들은 그것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정죄는 우리가 잘못하지 않아도 옵니다. 자세히 보면 율법의 정죄에 빠진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선량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보면 지나치게 선하게 살려는 사람들, 지나치게 양심적으로 살려는 사람들, 말씀대로 살아보려는 사람들이 율법의 정죄에 더 빠집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나 자꾸 넘어지는 자신을 발견할 때 큰 수렁으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앞을 보아도 어둠이요 옆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위를 보아도 어둠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수렁을 헤쳐나갈 것인지 암담하기만 합니다.
더구나 사람의 양심은 지식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죄 아니어도 죄라고 착각하고 있으면 그 지식으로 인해 정죄를 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먹을 만한 믿음이 있지만 어떤 사람은 양심이 약하여 먹지 못합니다. 죄가 아닌 데도 정죄에 빠질 수 있고 범죄인데도 죄로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성경을 알지 못할 때 무분별하게 정죄하려 달려드는 양심율법이 주는 고통이 참 컸습니다. 잘못하지 않아도 지식의 잘못으로 정죄에 빠지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지식이 필수입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주장이 가납될 수 없는 것은 잘못된 지식을 근거로 된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의 테러도 코란경을 기초로 된 잘못된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살해하고도 알라에게 영광 돌리고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이비종교들의 온갖 만행도 잘못된 지식에 근거한 양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입각한 바른 지식에 토대한 양심이야 말로 귀합니다.
4. 율법을 이기는 법이 있습니다.
31-32절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누구도 말릴 수 없이 살기등등하던 소요가 로마군대 천부장의 개입으로 잠잠해졌습니다. 당시 로마군대는 유월절을 맞아 혹여 있을지 모르는 소요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군영인 안토니아 요새는 바로 성전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즉시 내려와서 개입하여 바울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의 율법이 아무리 강해도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의 법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강할 뿐 아니라 가깝게 있고 가까울 뿐 아니라 비상태세를 갖추었으니 어떻게 해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에게는 율법보다 더 큰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법입니다. 죄인을 죄인이라 부르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으세요. 사43:25에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믿는다면 죄로 인해 하나님을 두려워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 넓으신 사랑의 품 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법입니다. 롬3:24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의롭다고 판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아무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롬8:34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했습니다. 그 피를 믿고 담대히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율법보다 더 큰 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롬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했습니다. 이 법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혜만 받으면 죄의 옛사람은 사라지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5. 항상 살리는 법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35-36절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감이러라” 로마 병정들에게 바울을 빼앗긴 유대인들은 그대로 있지 않고 군병들의 뒤를 따르면서 바울을 없이하고자 외치는 장면입니다. 여기 “따라감”이란 원문은 미완료 시제로 유대인들이 끈질기게 군병의 뒤를 따르면서 바울을 죽일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 되었다 할지라도 믿음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율법은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갈3:23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했고, 갈5:18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말씀 충만 은혜 충만해야 합니다. 항상 살리는 법으로 충만하자는 말입니다. 언제든지 율법은 우리를 자기의 종으로 삼으려고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은혜 아래 왔다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망령된 자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은 주님을 두 번 못박는 일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도 두렵지만 율법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두려운 일입니다.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율법주의자들에게 잡혀 죽게 되었지만 다시 살아난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율법으로는 영원히 정죄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옛 법이 아니라 새 법을 따름으로 마음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죽이는 법이 아니라 살리는 법을 따르세요. 그리고 더욱 성령으로 충만하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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