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사는 지혜 (행 20:1-12)
이 시간에 “세상을 사는 지혜”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임종을 앞둔 늙은 스승이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 제자를 불렀습니다. 스승은 입을 벌리며 제자에게 "입 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물었습니다. "혀가 보입니다." "이는 보이지 않느냐?" "스승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 빠지고 없는데 혀는 남아 있는 이유를 알겠느냐?"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빠져버리고 혀는 부드러운 덕분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그렇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이것이 세상 사는 지혜의 전부이니라. 이제 더 이상 너에게 가르쳐줄 것이 없구나. 명심하거라"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본문은 바울이 3년 동안 에베소 전도를 끝내고 마게도냐를 거쳐 드로아 지방에서 전도하다 생긴 이야기입니다. 전도사역에 어려운 시험이 많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잘 이겨냈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아갈 때 어려운 일이 많지만 잘 이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을 사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 지혜를 본문에서 발견합니다.
그럼 세상을 사는 지혜는 무엇일까요?
1. 세상을 사는 지혜는 가능하다면 피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시험을 만나 피했습니다. 3절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바울은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므로 수로로 가는 계획을 변경하고 육로를 택합니다. 여기 석 달 머문 헬라는 고린도입니다.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지만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눈치 채고 육로로 다시 마게도냐로 갑니다.
이 때 유대인들의 음모는 대단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나오듯 유대인들이 갈리오 총독 때문에 바울 제거에 실패했기에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실패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 방법으로 고소해 봐야 다시 무혐의로 풀려나면 실패하니까 배 안에서 암살하려는 것입니다. 배 안에서라면 법이나 권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인혐의도 감출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바울은 수로를 피해 육로를 택합니다.
이처럼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를 넘어드리려는 세력들이 많습니다. 이 때마다 가능하면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가능하다면 죄를 멀리하세요. 세상을 멀리하세요. 그런 것을 가까이하면서 죄를 이기려고 하면 안 됩니다. 악한 사람도 피해야 합니다. 더러운 오물을 피하듯이 피하세요. 그래야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질병이나 핍박의 세력도 죽이려고 대듭니다. 그러나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하시기 바랍니다.
뽀빠이 이상용씨를 아시죠? 이상용씨가 어릴 때 얼마나 몸이 약했던지 울지도 못하고 아파 사람 노릇할 수 없음을 보고 외삼촌들이 동생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땅을 파고 묻었답니다. 그 장면을 우연히 본 12살 난 이모가 이상용을 파내 산으로 도망 가 목숨을 구해냈습니다. 밥도 잘 먹지 못하고 다섯살 때까지 누워 있었고 6살 때 걸음마를 했고 10살 때까지 앓아 보지 않은 병이 없을 정도였답니다. 가방 들 힘조차 없어서 초등학교 때까지 아버지가 매일같이 가방을 들어다 줬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연히 12살 때 아령을 알아서 운동을 시작했고 점점 건강해지기 시작했고 18살 때 미스터 충남이 됐답니다. 대단한 인간승리입니다. 현재 65세인데도 건강미가 넘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시험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내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속의 십자가였기에 피할 수 없었지 그렇지 않으면 피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지혜로서 피할 수 있다면 피하시기 바랍니다.
2. 세상을 사는 지혜는 오해 받지 않는 것입니다.
4절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바울을 동행한 사람은 모두 일곱입니다. 7은 완전숫자입니다. 그래서 든든한 느낌을 줍니다. 바울에게 여러 지역의 신실한 동행자가 많았던 것은 첫째는 유대인의 위험이요, 다음은 오해를 불식하기 위함입니다. 이때 바울은 민족을 구제할 많은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잘못하면 커다란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지나간 이야기인데 국민의 라면인 삼양라면이 공업용 쇠고기 유지를 썼다고 언론이 퍼뜨려 얼마나 어려움을 당했습니까? 실재는 팝유보다 훨씬 고급인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고급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재판에서 이겨 혐의 없음이 인정되기까지 몇 년 지나는 동안 회사는 이미 기울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상용씨도 장애인기금을 횡령했다는 거짓기사 때문에 무혐의가 인정되기까지 방송 프로그램에서 퇴출되는 등 지금까지도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도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하셨습니다. 오해 받지 않아야 합니다. 불필요한 오해가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기독교 박해의 역사는 오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지금도 기독교는 모든 종교보다 더 사회적 봉사를 하면서도 가장 배척을 받고 있는 것도 오해 때문입니다. 이제는 선행의 등불을 켜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켜야 하겠습니다.
3. 세상을 사는 지혜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6절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여기는 수로를 이용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기자가 닷새라고 한 말에 암시하는 바가 있습니다. 5는 고난의 수이기도 합니다. 정말 고난이 컸습니다. 빌립보에서 드로아에 오는 동안 무척 힘들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이 뱃길은 불과 이틀이 채 걸리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닷새가 걸렸다는 것은 그만큼 역풍과 파도로 항해가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백성이 하는 것은 기도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길에 역풍이 불고 강풍이 불어 파도가 칠 때 기도하라는 신호로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하면 실족치 않아요. 기도하면 평안할 날을 주셔요. 기도 많이 하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셔서 용기가 필요할 때는 용기가 생기고, 지혜가 필요할 때는 지혜가 생기고, 삶에 먹구름이 있어도 빛이 비치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4. 세상을 사는 지혜는 조심하는 것입니다.
7-9절에 무리해서 생긴 일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루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강론하는 도중에 유두고가 낙상하여 죽는 사건입니다.
왜 이런 사고가 생겼을까요? 바울의 강론이 계속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이 아니라 밤중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내일 떠나야 하는데 해야 할 말씀은 많고 시간은 없고 그래서 무리했습니다. 유두고 역시 무리했습니다. 유두고라는 이름은 헬라사회에서 하층민들 가운데 흔히 사용하는 이름입니다. 비천한 출신 까닭에 하루 종일 노동에 시달리다가 피곤했던 것입니다. 육체를 너무 무리했어요. 그리고 환경 역시 3층루까지 가득한 것을 보면 사람은 많이 운집해 산소는 부족하고 불등을 많이 켜서 덥고 잠 오기 쉬운 환경이었습니다. 게다가 위험한 창에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조심하고 무리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무리하면 시험이 옵니다.
5. 세상을 사는 지혜는 믿음으로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9-10절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낙상한 유두고를 의사인 누가가 판정하기에는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가 살아난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분명히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인 바울이 보기에는 달랐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죽은 자였지만 바울의 믿음 안에서는 아니었습니다. 부흥회하는 집에 이런 사건이 발생했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도 크게 가리게 되었는데 어찌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아버지의 뜻이 어딘가 있는 것이지요.
간증하시는 김권사님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권사님이 초청 받아 한 주간 집회할 때 강사가 묵고 있는 성도 가정에 아이가 우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배는 물을 먹어 터질듯하고 숨도 심장도 멈추고 몸은 싸늘하여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집도 아니고 강사를 모신 그 가정인데 어찌 죽음을 인정하고프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살려 주세요 하면서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반드시 살려 주셔야만 한다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아이의 손끝부터 부르르 떨리기 시작하더니 눈을 뜨고 일어나 소변 보고 싶다고 하더랍니다. 살아났습니다.
여기에 교훈이 있습니다. 합리적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믿음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대개 영리한 사람이 세상을 더 빨리 포기하는데 육신의 눈만 열렸기 때문입니다. 전문가가 불가능하다 해도 성경의 약속이 변하지 않는 한 가능한 것입니다. 전문가들의 말을 참고는 하되 너무 과신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유두고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을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처럼 엎드려 안았던 것처럼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기도하면 마음을 열게 됩니다. 전도에 사랑 처방보다 더 좋은 것은 없어요. 사랑으로 문을 열지 못한 심령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사랑의 소산이에요. 그러나 육신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사랑할 때 맹수 사자 같은 사람들일지라도 나서서 나를 보호해 주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6. 세상을 사는 지혜는 예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유두고가 살아나서 드로아 부흥회는 초상집에서 잔치집으로 변했습니다. 11-12절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그들은 음식을 먹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야기하며 유두고의 일로 위로 받고 즐거워했습니다. 유두고 사건으로 왔던 잠도 피곤도 사라지고 날이 새기까지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음식은 육신의 즐거움입니다. 육신 너무 학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건강을 위하는 것이라면 쓰세요. 정서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하세요. 육체가 고통스러우면 영혼도 고통스럽습니다. 힘이 없어 기도 못하면 심령도 약해집니다. 그래서 목회는 체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영력으로만이 아니에요. 현재 잘 관리해야 미래도 있어요. 육체를 잘 돌보세요. 육체가 약하면 인생길은 험악해지고 그것이 불행입니다. 전9:9에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예수 안에서 축복 안에서 즐겁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죽은 자가 살아난 일을 말하듯 우리는 예수 구원의 즐거움을 노래해야 합니다. 늘 예배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의 일을 말해야 합니다. 늘 구원을 감사하세요. 간증하세요. 기뻐하세요. 우울하게 살지 마세요. 환경도 밝고 깨끗하게 하시고 건강하게 하세요. 모으려고만 말고 어느 정도 누리고 사세요. 우리가 세상 살면서 영육 간에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럴 때 세상살이가 힘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사는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세상을 다 이기셨습니다. 우리도 예수 안에서 이긴 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란이 닥친다 해도 낙심하지 말고 이김을 믿음과 동시에 지혜로우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지혜롭게 가능하면 피하고, 오해 받지 말고, 기도하고, 조심하고, 무리하지 말고, 믿음으로 사랑으로 행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영육 간의 복을 누리면서 이 험한 세상을 예수님과 함께 무사히 평안하게 승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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