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전-계시록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행 24:22-27)

공 상희 2009. 6. 9. 11:35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행 24:22-27)


이 시간에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라는 제목입니다. 아일랜드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복음서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우화적인 추리소설을 썼습니다. 예수님 만나 은혜 받은 사람들, 성경에는 그들이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스카 와일드는 그것을 나름대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어떤 곳에서 예수님은 알코올 중독자를 만났습니다. “그대는 누구인가?” “예, 저는 절름발이었는데 주님께서 고쳐주셨지요. 그런데 그 때는 이렇게 저렇게 얻어먹고 살았는데 건강해지고 나니 할 일이 없어요. 누가 환영하지도 않고요. 그래 이럭저럭 하다 보니 타락하고 타락해서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어요.”

또 한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조폭이었습니다. “아니 자네가 어떻게 폭력배가 되었나?” “예수님 죄송하지만 저는 원래 시각장애자였는데 예수님께서 저의 눈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만 눈 감았을 때는 몰랐는데 눈뜨고 보니까 아니꼬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더럽고 치사하고 모순되고 부조리해서 울분이 터져서 주먹을 쓰다 보니 조폭이 되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제 생각에는 주님께 은혜를 받은 자들이었으니 거기에 보답하는 아름다운 스토리어야 맞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깨닫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영육간의 그 귀한 은혜를 받고 아름답게 살아도 부족할 텐데 헛되게 살았으니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어리석고 어리석은 자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그런 사람이 하나 나타납니다. 바로 벨릭스 총독입니다. 자기가 바울에게 은혜를 베풀 수도 있고 또 바울에게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귀한 위치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하며 바울에게서까지 악을 추구하며 자기에게 다가온 은혜를 헛되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자기의 성품 때문에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파직 당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 회개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어떤 것이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까?

1. 칭의를 확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22절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총독은 유대교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유대인들이 왜 바울을 고소했는지조차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소는 재판 건으로 받지 않고 바로 기각시켜야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증인인 천부장 루시아를 들먹일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총독은 유대인들의 반감을 줄이기 위해서 증인 아닌 증인 천부장 루시아를 들먹이며 사건을 질질 끌게 됩니다. 바울을 위한 것 같지만 바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 바울은 여전히 구금상태에서 죄인의 신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의 공로로 의인이지만 어둠의 구금된 죄인의 상태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죄책에 매여 사는 것은 믿음도 아니고 겸손도 아닙니다. 당시 유대교가 바울을 죽이려고 했듯 율법이 우리를 죄인이라 한다고 우리가 죄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를 위한 속죄의 핏 공로를 믿는 자는 의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벨릭스처럼 증인타령하면 안 됩니다. 내가 이렇게도 죄가 많은데 왜 내가 죄인이 아니냐? 그러지 마세요. 나는 날마다 넘어지는데 왜 죄인이 아니냐? 내가 증인 아닌가? 그러지도 마세요. 죄가 있어도 보혈을 바른 집은 죽음의 사자가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면 법적으로 의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보다 더 진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롬4:5-7에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참소는 증거 불문하고 기각시켜야 마땅합니다. 아예 문제로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이 참소를 물리치지 못하고 양심의 법정에서 질질 끌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2. 옛 사람의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23절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우리는 본문에서 특이하고 이상한 죄인을 봅니다. 죄인의 신분이지만 상당 부분 자유를 허용했습니다. 당시 법은 고소당해 조사를 받거나 구금상태일 때는 죄인의 신분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럼에도 총독이 바울에게 많은 자유를 준 것은 바울이 로마시민이고 또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없습니까? 죄인이면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 말입니다.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양심에서 자유를 누리면서도 아직도 옛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칭의만 알고 성결을 모르면 반만 아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영원한 속죄를 받았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면 이단입니다. 성경은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했습니다. 나의 옛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남을 괴롭게 하고 또 나를 복 받지 못하게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칭의를 생활화하는 것도 좋지만 성결의 은혜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는 은혜를 모르고 죄의 종으로 살아간다면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했습니다. 이미 박혔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때 우리 옛 사람이 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성령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 아래 있을 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 생활을 하지 않으면 다시 옛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외면하고 옛 사람으로 산다면 십자가의 귀한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3.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것입니다.

24-25절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총독은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에게 말씀을 들으러 옵니다. 그런데 총독은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강론을 중단시켰습니다.

벨릭스가 말씀 앞에 두려워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성경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 드루실라도 문헌에 보면 기독교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 앞에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은혜만 받고 싶었지 자기에게 적용되는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말씀대로 하자면 남의 여자를 빼앗아 아내 삼았으니 돌려주어야 합니다. 또 포악하게 폭정을 했으니 이제는 겸손히 맘에 들지 않는 자들에게도 선정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가 로마 황실의 왕자 팔라스의 후광을 입어 불법적으로 총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기까지 자기 유익을 위해서라면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정치의 세계를 아시죠? 성공을 위해서라면 배반하고 팔고 거짓말하고 죽이고 모함하고 뇌물이 오가고 온갖 추한 일을 합니다. 그런 음흉한 술수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방은 가라. 나중에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습은 아닙니까? 말씀은 사모하고 은혜와 축복은 받고 싶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관심이 없는가요? 나중에 하겠다고 물리치나요? 세상 욕망 버리십시다. 악한 성품 버리십시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 엎드려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갖은 욕망들이 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엎드리시면 성령으로 다 정리해 주십니다.

벨릭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끝내 회개하지 않다가 포악한 성품이 나타나서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헬라인과 유대인들 간에 가이사랴 시민으로 주도권 다툼 시 군대를 동원하여 유대인들을 보복하다가 네로황제에게 소환 당해 파직되었습니다. 그의 아내 드루실라는 A.D.79년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 때 불에 덮여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말씀의 은혜도 좋지만 그보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참된 복이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4. 잘못 구하는 것입니다.

26절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벨릭스는 바울에게서 돈을 바라고 자주 불러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에게까지 돈을 구하다니 참으로 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연보지 바울의 돈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울에게서 더 귀한 것을 구하지 않고 어리석게도 없어질 것을 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하지만 잘못 구하면 그것이 은혜를 헛되게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을 구할 것이 아니라 더 귀하신 복의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호박이 덩굴채 온다는 말이 있지요. 하나님을 구하면 하나님은 물론 복까지 덩굴채 받습니다. 그러나 복만 구하면 복이 피합니다. 능력을 받으려면 능력의 하나님을 구하세요. 그렇지 않고 능력만 구하면 성과도 없고 도리어 사단의 시험만 다가옵니다. 구할수록 더 시험의 구렁으로 빠져들어 갈 뿐입니다.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사모하세요. 우리의 잘못 구한 것 때문에 얼마나 허송세월하는지 모릅니다.

5. 세상 좋을 대로 사는 것입니다.

27절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당시 로마 식민치하에서 지배를 당한 사람들이 총독에 대한 불만을 황제에게 상소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목적은 총독의 폭정을 방지하고 반란을 줄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제도는 장점과 아울러 단점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총독은 소신껏 일하지 못하고 자기 안위만 생각하는 보신주의에 빠지는 수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죄 없는 바울을 2년이나 구류해 두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총독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비위나 맞추며 2년이 아니라 10년 20년 허송하며 세상 좋을 대로 살고 있습니까? 세상이 두렵습니까? 세상 의식하지 마세요. 세상에 맞추어 살면 세상 사람이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핍박은 있게 마련입니다. 옛날에 주일에 교회 가는 것 때문에 부모에게 핍박받고, 제사 문제로 가족에게 배척받고, 헌금하는 것 때문에 식구에게 핍박받고, 정직하게 살려다가 동료에게 핍박을 받았지요? 세상 좋을 대로 살면 핍박이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천주교처럼 적당히 살면 핍박은 없지만 그렇게 살면 그 심령은 죽은 심령입니다. 주님 오실 때 맞이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우로가 그칩니다. 수십 년 믿었어도 헛것입니다. 벨릭스처럼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늘의 상도 없고 지상의 복도 없습니다. 그렇게 살면 헛된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습니다. 이 은혜를 받아 누려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십시다. 우리 모두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 바른 믿음으로 살아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의 크신 은혜를 온전히 받아 누리시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