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강해 1
언약교회 박길현 목사
[ 01:01-02 ] 회막의 하나님
[ 01:03-09 ] 번제
[ 05:14 - 6:7 ] 속건제
[ 06:08-13 ] 헌신된 사람
[ 06:14-30 ] 거룩한 제물
[ 07:11-18 ] 화목제 희생의 규례
[ 10:01-07 ] 다른 불
[ 10:08-11 ] 성과 속을 분별하라!
[ 10:16-20 ] 속죄 제물을 불태운 까닭
[ 11:01-23 ] 구별됨을 확인하라
[ 11:24-47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12:01-08 ] 산고에 새겨진 뜻
[ 12:01-08 ] 출산과 부정
[ 13:01-08 ] 문둥병
[ 14:01-20 ] 문둥병 환처가 나은 뜻은
[ 14:33-53 ] 집에 발한 문둥병
[ 15:01-33 ] 유출병 인간과 하나님의 처소
[ 16:29-34 ]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 17:01-16 ] 먼저 회막문으로
[ 18:01-30 ] 이방 풍속을 쫓지 말라
[ 18:01-05 ]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 19:01-18 ] 너희는 거룩하라
lv010102 LEV. 1:1-2 언약교회, 박길현
회막의 하나님
(1:1-2)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출애굽기의 하나님은 멀리 산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회막을 짓고 완성했을 때 하나님은 회막에 내려오셔서 회막을 자기 영광으로 채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시자 비로소 그 회막은 성막이 되었습니다.(출 40:34-35) 성막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해 있는 곳입니다. ; 성전, 교회, 성도란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멀리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 가운데 하나님을 모신 것입니다. ; 구속의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언약한자의 하나님입니다. 이 성막을 회막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과 백성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한없이 낮아져 오심을 의미합니다. 불꽃과 구름과 우뢰와 번개로 위엄을 보이던 분이 아닙니다. 성막에 맞추어서 자신의 영광을 감추고 작게 하여 오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 편에서 자신을 양보하시고 낮아지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만큼 낮아지심의 증거입니다. 반면 인간은 그 만큼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이런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심은 무엇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구원해 놓고 약속한대로 자기 백성 삼아 놓고는 다 되었다고 내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을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믿음이란 신분 획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습니까? 예수 믿습니다. 되었다 나가 놀아라가 아닙니다. 믿기로 약속하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은 그를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하루, 이틀, 한달, 두달이 아니라 평생토록 붙잡고 가르치기를 시작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배우기를 다하니 죽었고 이삭도, 야곱도 하나님으로부터 배우기를 다하니 죽었습니다. "내 나이 130입니다만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축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되기 위해 평생을 험악한 길을 보낸 사람이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고 천당가면 되었으니 얼마나 좋으냐 하는 것에 들뜨기 전에 대체 천당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천당간다는 것은 내가 원하기 때문에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것을 버리고, 내가 원치 않는 것을 죽으라고 훈련받아야 하기 때문에 사실은 고달프고 힘든 길이요, 남이 안가는 좁은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원치 않는 것을 배우게 하시고, 원치 않던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는 것도 "야! 이거 큰일 났구나. 발목 잘못 잡혔는데, 골치 아픈데."라고 고민을 해야 하고 또 한편 "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어영부영 하다가는 큰 코 다치겠는데." "하나님은 이제 보니 보통 분이 아니시구나. 꾀나 보통이 아닌데. 어수룩한 할아버지가 아니구나! 잘못하다가는 날벼락 맞겠구나!"가 되어야 하나님을 바로 대하고 있는 믿음입니다. 만약 이렇지 않다면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가? 예물 드리는 것을 가르치시고자 하셨습니다.(2) 왜 하나님께서 예물 드리는 것을 먼저 가르치고자 하시는가? 사람은 종교심이 있어서 자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헌금, 기도, 구제, 성경 읽기 등으로 "하나님 이만큼 했는데 왠만큼 했지요? 실수 좀 봐주세요?"라고 합니다. 즉 인간은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습성을 차단하시고 먼저 자기를 바로 알도록 하기 위해서 예물 드리는 것을 먼저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생축의 희생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소나 양의 희생은 하나님의 낮아지심과 희생의 표현입니다. 즉 자기가 제시하시는 제물은 다른 곳에서 자져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희생이란 표현은 우리에게 생소한 느낌을 줍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라 구원하심에는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10재앙으로 쳤고, 홍해를 갈랐다는 것은 전능의 능력으로 하신 것이라는 생각- 그러나 구원 사역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의 내려오심"과 "무장"됨이 있었고, "양의 죽음의 죄"가 있었습니다. 이 죄 때문에 출애굽과 홍해가 있었고 하나님 백성됨이 가능했다.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의 희생이 있으므로 되어진 것입니다. 고로 희생 없는 구원은 마술사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돌로 떡 만들라!, 뛰어 내려라! -이적의 구원 요구- 마귀의 구원입니다.)
희생 제물을 드리라고 한 것은 희생의 하나님을 알라는 것이요 "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라. 하나님의 마음이 네 마음이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가진 것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을 드리는 것을 통해 하나님처럼 희생하는 백성 되도록 하기 위해서 바치도록 하신 것입니다. -편안하기는 글렀다. 죽었다 복창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면 좋아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 베푸셨다고 하면 좋아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너도 하나님처럼 사랑을 베풀고 은혜를 베풀라고 하면 어려워합니다. ; 주여! 주여! 하면서도 네가 선교사로 가라 또는 네 자신이 목회자 부인되십시오 하면 따라 나서는 사람 없습니다. (나는 돈 벌어서 섬기지요 ; 의사하며 돈 보낼게요.-잘사는 사람의 경우 ; 어렵게 사는 사람의 경우는 반대지만) 머리 좋고 똑똑한 아들 - 판검사 시키려고 하지 목사 시키려고 하는 사람 없습니다.
정작 자신이 하나님처럼 희생하라고 하면 싫어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닮기를 싫어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겠다는 계산입니다. 이런 상태의 마음은 부정적인 것으로 만족합니다. 도둑질 안했고, 미워 안했고, 싸움 안했고, 주일날 안 빼먹었고 . 적극적으로 더 하겠습니다가 되지 않습니다. 진짜로 하나님 닮는 희생의 사람되기를 좋아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극적 헌신, 사랑은 희생에서 나옵니다. 희생 없는 헌신, 사랑은 거짓입니다.(희생, 자기 낮춤, 자기를 바로 보는 것이 인간 사랑입니다.)
부부간 : 나 같은 것한테 시집(장가) 오다니!
처녀 총각 : 나 같은 것 좋아하다니! 눈이 멀었어! 그러니 고맙지!
날마다 : 이 정신 가져야 합니다. -아침, 저녁 제사 드리듯이 ; 아침, 저녁 이 마음을 가집시다.
lv010309 LEV. 1:3-9 언약교회, 박길현
번제
지난주 ; 회막의 여호와 : 낮아져 오시되 자신을 생축 즉 희생의 모습으로 제시하시는 여호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내신 것은 애굽을 떠나온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을 닮는 인간되게 하는 작업의 시작임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희생을 닮는 인간이 되어 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희생이 얼마나 철저하며 놀라운 것인가를 보게 됩니다.
먼저 우리는 어째서 생축의 피가 하나님의 희생을 보여주는 것인지를(희생이 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죄인과 함께 거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는 소멸하는 불로써 죄인들은 그의 임재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거하셔도 이스라엘 백성이 죽지 않게 되는 것은 생축의 생명이 대신 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생축의 피는 하나님의 거룩을 만족시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피로 인해 이스라엘이 거룩해지되 하나님 자신처럼 거룩해지므로 이스라엘은 죽음을 면하고 살아남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가 하나님과 동등한 거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등한 거룩을 가진 자가 지상에 있는 동물인가? 지상에 있는 그 무엇도 하나님 자신처럼 거룩한 것이 없고 천상의 어떤것도 하나님처럼 거룩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처럼 거룩한 것은 하나님 자신밖에는 없습니다. 사실 생축의 피가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생축의 피는 하나님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출 34:25은 "너는 내 희생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라고 하면서 하나님 자신과 희생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희생이 이스라엘 중에 반복되므로 이스라엘이 거룩해진다는 것은 생축의 희생이 필요 없게 되는 하나님의 희생이 장차 오게 될 것을 예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생축의 피로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이런 희생을 드릴 때에 생축을 잡는 자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드리는 그 사람 자신입니다. 드리는 그 사람 자신이 안수를 하고, 잡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뜹니다. 제사장은 단지 제물 태우는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왜 이렇게 손수 잡고 가죽을 벗기며 각을 뜨는 일을 하게 할까?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축의 희생을 깊이 체득하며 이해시키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수가 죄의 전가가 아니라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죽음을 실제로 구체화하고 체득하게 하는 것은 잡고 벗기고 각을 뜨고 하는 것으로써 가장 잘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미련합니다. 엄숙하게 "이것이 나의 죽음인데"하면서 잡고 피를 묻히지 않고는 실감도 안나고,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실제 부모의 죽음 : 죽은 즉시는 실감이 안납니다. 그래서 헛 울음을 울기가 일수입니다. 그런데 장례 지내 버리고 돌아와서 빈방을 접하고 있던 사람이 없어짐을 느끼면서 비로소 "아주 죽었구나."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갈수록 그 느낌이 상당 기간 깊어집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란 깨닫기에 둔감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직접 칼을 쥐고 칼질을 하며 피를 묻히는 작업을 하게 하심은 희생 제물의 죽음에 더 확실히 동참시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제물의 희생 곧 하나님의 희생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거룩으로만" 사는 사람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와 같이 자기 백성을 자상하게 교육시키십니다.
3. 이렇게 잡아진 제물이 제사장에 의해 불 위에 올려져서 태워집니다. 뜬 각도 태워지고 머리도 기름도 내장, 정강이도 전부 태워집니다. 온전히 불태워져 바쳐지는 것이 번제의 특징입니다. 사람으로 친다면 뜬 각은 육체를, 머리는 사상을, 기름은 전체적인 건강 상태를, 내장은 마음을(정서, 감정), 정강이는 행함 즉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을 위해 제공하시되 이와 같이 철저히 제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와 같이 자신을 철저히 제공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을 보고 하나님의 희생을 깨달은 사람이 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자신을 주셨으니 너희도 이것을 알고 그 하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을 책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일정한 한계를 두고 섬기려고 합니다. ~만큼은 섬기지만 이것만은 안돼! 하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아예 한계를 설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도 뜻도 생명도 전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만큼이 아니라 자기 전체로, 생명으로, 삶으로 헌신하여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안될 때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제한을 두고 있기 보다 무제한의 사랑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떼 놓고 일부를 받으십시오 하는 마음과 전부를 -온몸으로- 다 헌신하지 못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온몸으로 온 생애로 헌신하고자 하는 사랑으로 참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을 알도록 기도합시다. (불나비, 불사조 = 초대 성도들, 사도들 = 성도들입니다. = 헌신자가 거룩한 헌신자 ;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4. 이렇게 불에 온몸을 불살라 태워짐은 소멸이 아니라 더욱 고상한 형태로 변화시키는 불사름입니다.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9) -불살라짐을 향기 즉 여호와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쉬게 하는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헌신 = 좋은 형태의 변화 : 온전하게 드려져 죽으니 천국입니다. 헌신은 고난이지만 이 고난의 완성을 통해 하나님께 향내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온전한 헌신자가 안되어도 되는가? 일부만 그런 사람으로 추앙되면서 살아야 하는가? 그들에게 주신 은사라고 하면서 . 아닙니다. 모든 성도가 다 온전한 헌신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다 이미 자기를 그리스도께 바친자요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드려지는 거기에서 성도의 생명이, 향기가 나옵니다. 드려진 자이니 드려진 삶을 살도록 합시다.
아낌없이 불태우는데서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납니다. 이것의 완성이 천당입니다.
lv0514-0607 LEV. 5:14-6:7 언약교회, 박길현
속건제
(레5:14-6: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하였거든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너의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수양을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성물에 대한 범과를 갚되 그것에 오분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수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그는 너의 지정한 가치대로 떼 중 흠 없는 수양을 속건 제물로 제사장에게로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부지중에 그릇 범한 허물을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이는 속건제니 그가 실로 여호와 앞에 범과함이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하되 곧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 잡거나 강도질하거나 늑봉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에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빼앗은 것이나 늑봉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얻은 유실물이나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 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 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그는 또 그 속건제를 여호와께 가져 올지니 곧 너의 지정한 가치대로 떼 중 흠 없는 수양을 속건 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어 올 것이요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으리라
지난주에 하나님은 인간이 쌓은 완전함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할 때는 아예 생축의 희생의 피와 기름을 근거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또한 죄는 용납하지 않으시되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진 밖에서 얼마나 철저한가를 보여 주면서 이 죽음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 속죄제사란 것을 말했습니다.
오늘 생각하는 속건제는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이기적이고도 믿을 수 없는 연약한 존재로 보시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인간 속에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착실하게 한다 싶으면 제법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듯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죄와 허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자기는 해당이 안되는 듯이 생각하려는 태도를 가지게 되고, 남의 이야기로 미루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 자신이 바로 그러한 인간임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속건제는 인간 생활에서 일어나는 웃지 못할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성물에 대한 것입니다. 여호와께 드릴 것을 등한히 여겼거나 떼먹었거나 부족하게 했던 경우를 말합니다.(5:15) 또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잡거나 강도질하거나 늑봉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중에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눈까지 속이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돼먹지도 못한 자식들. 그런 놈들도 예수쟁이야? 대학 입학 컴퓨터 조작을 해? 돼먹지 못한 놈들"이라고 하면서 분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는 뭐 별수 있는 줄 아느냐? 너도 똑 같은 인간이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이는 항변하기를 "성경에 범죄하는 경우는 소수의 사람들에 해당되는 기사이지 어디 모두에 해당되는 이야기냐?"고 합니다. 그러나 범죄하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씀이라면 성경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형법에 넣지 성경에 기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도 사기꾼, 강도, 절도 노릇할 수 있는 별볼일 없는 인간으로 취급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서 굴욕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맞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이런 수준의 인간을 자기 백성 삼아 놓고 그래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속에서 일하고 계시며 때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죄(허물)들이 어떻게 죄로 드러나게 되느냐? 고자질하는 자가 있어서 그 허물이 밝혀지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 스스로 뉘우치게 되므로 밝혀지게 되는 것인지를 본문을 얼핏 보아서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좀더 세심하게 본문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선 5:4을 보면 무심중에 맹세했다가 잊어버리고 지냈는데 나중에야 그것이 깨달아 진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죄됨을 깨달아 자복합니다. "이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는 아무일에 범과하였노라 자복하고"(5:15)라고 한 것을 보아 누가 죄를 지적해서가 아닙니다. 스스로 죄됨을 깨달아 자복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5:15은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 하였거든"이란 말이 있는데 여기에 "그릇 범과하였거든"이란 말이 단서는 될 것 같은데 애매해서 그 정황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원문을 참고해 보니 이 말은 "진실되지 못하게, 믿을 수 없이, 은밀하게 죄를 지은 경우"를 말합니다. 제사장에게 드리는 십일조, 첫열매, 희생 제물, 소제물 등의 경우 "진실되지 못하게 또는 은밀하게 죄를 지었다."는 것은 바치는 사람이 아까워서 떼 놓고 일부만 드리든지 가끔 드리든지 하는 경우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죄를 지적하는 것은 율법의 말씀뿐이요, 자복하고 회개할 이도 자기 자신뿐입니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경우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7-19은 죄인 줄 모르고 여호와의 금령을 범하여도 그는 죄를 지었으니 자기 죄를 담당해야(져야) 하는데 속죄를 위해 수양을 제사장에게로 끌고 가서 속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경우는 죄지을 때는 모르고 지어도 그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이 후에 깨닫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깨닫게 되는가는 밝히지 않았지만 본인 자신이 주체가 되어 행동하는 것이 강조되어 나타납니다. 그리고 6:1-5까지는 남의 물건을 거짓으로 맹세하여 자기 것으로 삼아 버린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눈딱감고 거짓말해 버리고 자기 것 만들어 버린 경우입니다. -빼앗거나 늑봉했거나 맡은 것이거나 유실물이거나간에- 그래서 6:5에는 "무릇"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그가 거짓 맹세하여 취했던 모든 것( ??? ??)을 뜻합니다. 자기 양심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고 거짓 맹세하여 취한 것이 죄로 드러나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이 죄를 죄로 깨달았을 경우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물건은 사용하다가 들킬 경우도 있지만 이럴 경우는 불확실한 문제가 생기므로 오히려 싸움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님 자신만이 아는 거짓 맹세는 자기가 죄를 깨달아 회개하는 경우를 여기서 취급하고자 하는 것이 본문의 의도로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민수기 5:5-8에도 이것을 지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나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패역하여 그 몸에 죄를 얻거든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얻었던 그 본주에게 돌려 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도 자복이 나옵니다.
이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때 오래 기다리시면서 스스로 죄를 깨닫고 자복하는 자 되기를 원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물질에 눈이 어두워서 자신의 양심과 하나님을 속이는 믿음 없는 짓을 하면서 남의 것을 빼앗고,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까지도 떼먹고 걸러 먹고 해도 당장 벌하거나 너는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면서 내여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게 되고 신앙이 들어서(성숙하여서) 비로소 죄를 깨닫고 철저히 돌이켜 새사람 되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사람인가? 죄를 깨닫거든 원상 회복을 시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거기에다가 20%를 더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20%를 더하여 돌려주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비슷한 경우에 200%(갑절)을 배상하라고 했습니다. 가져온 것 뿐 아니라 자기 가진 것도 몽땅 붙여 돌려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레위기에서는 20% 하라고 한 것은 200%를 돌려주어야(몽땅) 마땅하지만 사실은 어려우니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200% 받는 셈치고 20%만이라도 받으십시오."라고 하는 의미로 보여집니다. 즉 "죽어도 옳습니다. 입이 열개 있어도 할말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모습, 180도 달라진 사람이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기적이고 자기만 생각하고 사기치던 사람이 죽기를 각오하고 상처받은 사람을 생각하며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되었음을 뜻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새사람이 아니겠는가? 세상과 다른 사람이 아닌가? 작게 주겠다고 안주겠다고 야단하는 세상에 될 수 있으면 주겠다고 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바라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 놓는 일을 누가 하나? 법을 만들어 놓았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지식을 가졌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법알고 지식 있을수록 더욱 지능적으로 뻔뻔스럽게 범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속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 변화는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사람되기를 기대하시고 그런 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 못난 이스라엘중에 함께 계시면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역을 계속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이 율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의지를, 사랑의 의지를 읽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교회를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로 만드실 것이고 지금도 만드시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우신 하나님인가?
여기서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도 지금 상태가 이스라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하나님도 안 보이는 것같고 불리하고 위급하면 거짓말하고, 안 본다고 빼앗고 착복하고 절도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이보다 낫다면 물론 감사할 일입니다.) -나는 내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어도 하나님 중심적이고 다른 사람 중심적인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에도 이일을 해 오셨고 지금도 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계속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이 세상이 계속 되는 한 그 일을 계속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연약성을 바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연약을 보고 자신과 남에 대해 낙망하거나 비웃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일하시고 계시는 분을 바라보기만 합시다. 지금 우리에게 일하시는 분은 변화된 우리 인간의 이상형인 예수님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 부름 받은 여러분은 주님이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셨고 또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인간형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잊지 맙시다. 예수님이 우리가 될 사람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갚아야 할 것도 다 갚아 주셨습니다.
lv060813 LEV. 6:8 - 13 언약교회, 박길현
헌신된 사람
(레6:8-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명하여 이르라 번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번제물은 단 윗 석쇠 위에 아침까지 두고 단의 불로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고의로 하체를 가리우고 단 위에서 탄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단 곁에 두고 그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고 그 재를 진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 갈 것이요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지며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지난 시간에는 속건제를 생각했습니다. 특징적인 것은 120% 변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변상하게 하는 것은 자발적인 회개를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을 보아 완전히 변화된 새사람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죄를 용납하지는 않으시지만 대속의 죽음을 기초로 해서 오래 참으시면서 도적이요 강도요 하나님께 바치는 것까지도 잘라먹는 인간을 120%까지 갚아 주는 새사람 만드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인간을 바꾸어 남을 생각하는 인간으로 만드시고자 하셨습니다. 남의 것을 절도하고 강도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던 인간을 주고도 또 줄려고 하는 인간으로 만드시고자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항상 잊지 않고 나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속건제로서 다섯 가지 제사가 끝이 났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5장이 19절로 끝나지 않고 우리 성경의 6:7절까지가 5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6장 8절부터 비로소 6장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여 7장 끝까지 또 다시 번제, 소제, 제사장의 소제, 속죄제, 화목제를 드리는 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 5장까지의 반복같은 느낌이 듭니다만 자세히 보면 단순한 반복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단서가 6:9,25에 있습니다. "아론과 그 자손에게 명하여 이르라."는 것을 보아 제사장이 어떻게 봉사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1:2, 4:2에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고 되어 있어서 제사 드리러 오는 백성들을 위주로 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초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에게 성막에서 섬기는 법을 가르치는 중에 오늘 읽은 말씀은 특별히 번제를 드리는 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이 "단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단의 불은 요즈음 말로 24시간 계속해서 피어 있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12절은 "단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하라는 말은 곧 번제물을 끊임없이 드리라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가지고 와서 꺼지지 않은 불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번제물을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르는 일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살라지는 번제물과 화목제 기름의 재는 단위 석쇠 위에 아침까지 두었다가(9) 새 번제물을 드리기 전에 진 바깥으로 가져가고(10) 그리고는 이어 새 번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의 불이 24시간 꺼지지 않고 번제물이 24시간 드려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밤낮없이 불같이 타는 모습으로 이스라엘 중에 임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아침에도 불, 저녁에도 불 언제나 불같이 이스라엘의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늘 죽고 타고 재가 되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제사장은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하고 백성은 번제물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 된 것을 한시라도 잊어 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헌신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흔히 형식을 갖추어 헌신 예배를 드린다든지 특별히 시간을 내어 봉사를 한다거나 어려운 가운데 큰마음 먹고 헌금을 한다든지, 주일날과 각종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것으로 헌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이 나쁘다거나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을 해 놓고는 웬만하게 했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나의 삶을 살아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통해 사신다"는 생각을 거의 못합니다. "은혜로 산다."는 것을 생각지 못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단위의 불을 꺼 버린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에 쌓여 있습니다. 조그마한 일에 짜증이 납니다.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전부 "내가 어떻게 해야지, 돈을 벌어야지."이지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가?"가 아닙니다. 그러니 불로서 이글이글 타고 계시는 하나님의 무서움도, 희생을 태우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다 잊어버립니다. 살고 있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어려울 때 생각해 보는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내 자신이 주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전한 헌신, 끊임없는 헌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죽은 자로서 늘 있기를 원하십니다. 죽은 자로서 단위에 재가 있을 때에 하나님은 하늘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표가 있습니까? 그 의식이 여호와로, 주 예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 예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편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심을 볼 수 있습니다. 좋을 때는 손뼉을 치고 춤을 추며, 큰북 작은북 치며 여호와를 찬송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슬플 때도 탄식과 한숨과 눈물 속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욥이나 다윗이나 아삽이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나 모두가 여호와로 가득 찬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들도 그 생애가 주 예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관심과 생각이 예수에 대한 관심과 사랑 때문에 성도들을 생각하고 돌아보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난의 길을 갑니다. 육신이 고통스럽지만 예수가 너무 크기 때문에 예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흥해도 예수, 망해도 예수, 죽어도 예수, 일을 해도 예수, 예수 의식 가지고 -예수 생각으로 살다가 죽어 갑시다. 이것이 불이 꺼지지 않는 헌신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봅시다. 물론 사람마다 다 이런 사람으로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실패를 우리는 야곱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믿는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성년이 되고 아버지를 속이고 외삼촌 밑에서 20년간 살아도 그때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외삼촌을 피해 돌아 올 때 형 에서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도 여전히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고 씨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야곱을 패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병신이 된 후에야 비로소 자기의 안전이 자기에게 있지 않음을 압니다. 이때부터 그는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얻어맞고 33장에서 형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34장에서는 딸 디나가 히위 족장의 세겜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이것을 시므온과 레위가 복수를 합니다. 34:30에 보면 야곱이 두 아들을 책망하는 이유가 주위 민족들에게 화를 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창세기49장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알지 못하고 노염과 분기로 가득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저주하고 있습니다.(창 49:5-7) 야곱이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35장에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때에야 그의 가족들이 우상을 버립니다.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지만 하나님을 바로 믿는다는 것이 더딘지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이렇기에 야곱은 사실 여전히 하나님 중심의 신앙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식의 생활이었고 자기 마음대로의 생활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편에서 그를 붙들고 있는 것이지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러니 불신앙이지요!
여러분이 믿는다고 하지만 자만하지 마십시오. 자기를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이 우상이 되어 있고, 하나님은 들러리요, 재미로 믿는 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은 야곱과 같지 않습니까? 실상은 우상이 여러분의 마음에, 생활에 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인간들에게 사용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채찍입니다. 디나를 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부수고 빼앗아 가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상을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이스라엘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인간의 부끄러움을 하나님이 축복해 놓은 이름입니다. 이렇게 얻어맞고 살았기 때문에 야곱은 아브라함이나 이삭보다 더 하나님을 잘 안다고 선언합니다.(창49:26ff)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이요,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자신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단 불을 끄지 않는 사람, 헌신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는 한 버리고 떠나지 않는 한, 여러분이 아무리 어떤 상태에 있어도 하나님은 헌신된 사람으로,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사람으로, 그 영으로 사는 사람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말입니다. 그래야 천국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채찍 맞기를 원하십니까? 몰론 아니겠지요? 채찍 맞지 않는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을 구하여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리하여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십시오. 참으로 헌신된 사람이 되십시오.
lv061430 LEV. 6:14-30 언약교회, 박길현
거룩한 제물
(레6:14-30) 소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단 앞 여호와 앞에 드리되 그 소제의 고운 기름 가루 한 움큼과 소제물 위의 유향을 다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살라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하고 그 나머지는 아론과 그 자손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 회막 뜰에서 먹을지니라 그것에 누룩을 넣어 굽지 말라 이는 나의 화제 중에서 내가 그들에게 주어 그 소득이 되게 하는 것이라 속죄제와 속건제같이 지극히 거룩한즉 무릇 아론 자손의 남자는 이를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서 그들의 대대로 영원한 소득이 됨이라 이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자손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 여호와께 드릴 예물은 이러하니라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을 항상 드리는 소제물로 삼아 그 절반은 아침에,절반은 저녁에 드리되 그것을 기름으로 반죽하여 번철에 굽고 기름에 적시어다가 썰어서 소제로 여호와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라 이 소제는 아론의 자손 중 기름 부음을 받고 그를 이어 제사장 된 자가 드릴 것이요 영원한 규례로 여호와께 온전히 불사를 것 이니 무릇 제사장의 소제물은 온전히 불사르고 먹지 말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 희생은 지극히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희생을 잡을 것이요 죄를 위하여 제사드리는 제사장이 그것을 먹되 곧 회막 뜰 거룩 한 곳에서 먹을 것이며 무릇 그 고기에 접촉하는 자는 거룩할 것이며 그 피가 어떤 옷에든지 묻었으면 묻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빨 것이요 그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릴 것이요 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닦고 물에 씻을 것이며 그 고기는 지극히 거룩하니 제사장의 남자마다 먹을 것이니라 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하게 한 속죄제 희생의 고기는 먹지 못할지니 불사를지니라
지난주에는 24시간 타는 번제단의 불을 생각했습니다. 즉 24시간의 헌신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중심의 사람, 예수의 정신으로 충만해 있는 사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삶과 의식에서 하나님이 들러리요, 필요할 때 청하는 귀신과 같은 대접을 받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살고 있는 삶이 되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내 속에 사는 이가 내가 아니요 예수가 사는 삶이 24시간 계속됨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가 신앙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식을 치고 도전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쯤이야."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쯤이야."하고 양보하고 타협해 버리는 것을 오늘 성경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무엇에서 이것을 볼 수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제사장이 성막에서 제사 의식을 수종들 때에 유의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제물의 거룩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거룩이란 구별 즉 하나님께 바쳐졌기 때문에 특별하게 된 성결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바쳐졌기 때문에 세속이 섞일 수 없는 성질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제사장이 성막 사역을 수종드는데 있어서 가장 유의해야 하는 점은 바로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들에 세속이 섞이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여러 곳에 바로 이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레 6:10-11, 16-18, 23, 26-29, 7:6, 17-18, 19-21등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제사장이 해야 할 일 중에서 절차나 법도가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 바로 제물의 거룩 보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만큼 철저하게 신경을 써서 거룩을 보존해야 하는지를 봅시다. 16절에는 먹을 때는 거룩한 곳 회막뜰에서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먹을 때는 제물일지라도 성막 밖의 식당으로 쓸 천막이라도 하나 치고 편하게 먹어야 할 법한데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곳 회막뜰에서 굳이 먹도록 한 것은 거룩을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18절 끝부분인 "이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하리라."는 말씀이 이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만약 회막 밖에서 먹는다면 제사장 아닌 사람들이 제물이나 제물 먹은 그릇 등을 만질 가능성이 있어서 그로 인해서 바쳐진 사람이 되어 진노를 입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간의 사건에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쳐진 물건에 손을 댔다가 자기도 바쳐진 사람이 되어 바쳐진, 여리고 성과 내용물이 망한 것과 같이 망한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에 가까이 했다가 함께 바쳐지는 위험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27-29은 이것을 좀더 잘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기에 접촉한 사람은 거룩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기에 접촉한 이 사람은 제사장이 아닌 사람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제사장 남자는 다 먹어야 한다고(29) 말했는데 이들이 거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고기에 접촉한 사람은 거룩할 것이라고 한 것은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고기에 접촉했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우 그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는지는 여기서는 알 수 없지만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제물에 접촉하는 것을 금하여 거룩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제물의 피가 옷에 묻었으면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빨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거룩한 곳"이라고 명시하여 "성막"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룩한 피는 빨아서라도 거룩한 곳에 있게 해야 한다는 의미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라고 합니다. 토기가 고기의 성분을 빨아들였기 때문에 그 속에 흡수된 것은 씻어 낼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릇을 깨뜨림으로 그릇이 바쳐져 제물처럼 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고기를 흡수하지 않는 유기는 닦고 씻도록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기의 성품인 거룩을 결단코 다른 것에 빼앗기지 않도록 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일반 백성이 먹을 수 있는 화목 제물도 부정한 사람이 먹으면 이스라엘 백성중에서 끊쳐질 것이라고 했습니다.(레 7:20-21) 끊쳐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하여튼 주의해야 할 경고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얼마나 철저히 거룩하지 않는 것이 거룩한 것과 섞일 수도, 접촉할 수도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지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철저히도 거룩을 지키도록 할까요? 그 이유는 16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누룩 없는 떡은 고난의 떡입니다. 누룩을 넣어 부풀린 맛있는 떡을 먹기 시작하면 누룩 없는 떡이 싫어집니다. "이것쯤이야 괜찮겠지." 하고 양보하기 시작하면 양보한 그 후가 좋아지기 시작하고 점점 그것을 즐기게 되어 집니다. 그리고 고난의 떡은 먹기 싫어집니다. "한잔쯤이야."하고 시작한 술이 아예 술꾼으로 전락해 버리듯이 호기심으로 피어 본 담배가 골초를 만들 듯이 말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타락성은 속된 것을 즐기고 그것에 안주하고 즐기도록 사람을 끕니다. 여러분은 권투를 보고 즐기지 않습니까? 피를 철철 흘리는 것을 보고 잔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것을 즐깁니다. T.V. 드라마를 보며 그것이 세상의 인간사의 산물들임을 알면서도, 별것 아닌 죄악의 문제들임을 알면서도 거기에 심취하여 있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욕망이 그것들에 젖어 있고, 탐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타락성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세속에 문을 열고 한 번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그것을 끊어 버리기는 좀처럼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제물을 속됨과 접촉도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물 즉 거룩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거룩의 본질을 알아야 세속의 본질도 알게 됩니다. 거룩을 보여주는 제물들은 희생과 고난과 죽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요, 십자가 정신입니다. 이 십자가 정신을 기록해 놓은 것, 즉 예수님의 모습을 글로 옮겨 놓은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을 십자가의 연속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따라서 세속이란 십자가와 반대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라는 말은 이 세상 정신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밥 먹고 변소 가는 것이 속된 것이 아니며, 부부 생활하는 것이 속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고난 없이, 고난을 안 받고 살려는 정신, 나그네 의식 없는 정신, 죽음을 의식함이 없는 정신이 속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거룩과 세속이 만나면 세속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이 세속화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교회쪽으로 끌려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쪽으로 끌려 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거룩 즉 성도는 거룩의 공간을, 영역을 확보해 놓아야 합니다. "회막안에서 먹어라." 한 것처럼 "이것쯤이야."하고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안된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막고 지키고 끊어서 회막을 확보하고 그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룩이 유지됩니다. 제사장의 생명은 성막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명은 십자가 안에서 유지됩니다. 이것이 성도의 특성입니다. 교회의 세속화니 따위는 화려하고 먼 문제이니 그만두고 우리 생활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십자가 정신을 따르는 것이며 회막을 확보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예배를 예로 듭시다. 30분 거리에 있는 분이 예배 시간 1시간을 남겨 두면 그 심리는 아직도 30분 여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0분 지나면 "아직 20분, 10분 이 남아 있어."라고 생각하고 머뭇거립니다. 이렇게 시간을 계산하고 식사를 할 수도 있고 신문을 읽거나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거나 다른 잔일을 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이렇게 인색합니다. "10분 먼저, 20분 먼저, 혹은 30분쯤 여유를 가지자."가 안됩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하나님께는 인색하지만 자기와 세상에는 후합니다. 세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쯤 되면 마귀가 불러내기 좋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동원하여 만나자고 연락이 옵니다. 볼일이 생기고 만날 일이 생깁니다. 이럴 때는 교회와도 마음은 붕떠있습니다. 빨리 마치기를 기다리게 됩니다. 결국 껍데기 출석이지 마음은 세상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야겠다는 생각이 없고, 하나님께 마음을 기울이겠다는 태도가 없습니다. 이것이 세속화 아닙니까? 거룩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까?
T.V를 생각해 봅시다. T.V 보는데 흥미와 관심이 큽니까? 성경과 기도에 흥미와 관심이 큽니까? 어느 쪽에 매력이 있습니까? 어느 쪽에 많이 끌려가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과감하게 하나를 좀 잘라 버리고 하나님께 치중할 마음은 없습니까? 돈벌고 일하는 것을 중시합니다. 한다면 안되는 줄 알고들 합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와 주님을 생각하는 것은 중한 일이 아닙니까? 이것은 안하고도 살수 있다는 의식은 은연중에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지만, 우리의 실제 모습이 어떠한지 한 번 반성해 봅시다. 그리고 잃어버리고, 양보해 버린 거룩의 회막을 회복하십시오. 회막안에 있기를 결심하십시오. 속된 것들에서 마음을 좀 돌이켜서 거룩한 것에 집중하십시오. 마음을 거룩의 영역을 향해 좀 넓히십시오. 성도의 생명은 거룩한 회막안에서만이 유지되고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lv071118 LEV. 7:11-18 언약교회, 박길현
화목제 희생의 규례
(레7:11-18) 여호와께 드릴 화목제 희생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만일 그것을 감사하므로 드리거든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 희생과 함께 드리고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 희생과 함께 그 예물에 드리되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그 희생의 고기가 제 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만일 그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제 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못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당하리라
레위기 3장에도 화목제에 대해서 취급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3장에서는 제물을 중심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화목제 희생의 규례를 통해 이 제사의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화목제는 제사장외에 제사를 드린 사람과 참석자들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입니다. 제사장에게 제물의 일부가 돌아가고, 대부분의 남은 제물은 일반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제사가 바로 이 화목제입니다. 마치 제사 후에 잔치를 벌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출애굽기 24장에서 보았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이 한 가족이 되어 즐거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한 가족이 된 사람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를 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첫째. 화목제를 드리는 사람들은 감사에 넘쳐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화목제 희생을 감사하므로 드리거든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 희생과 함께 드리고"(12)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감사에 넘쳐 다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목제는 생축의 희생을 드리지만 여기에 다른 소제물들을 더하여 드리는 것은 감사에 넘쳐 다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애굽에서 노예로서 살던 사람, 고통 중에 부르짖던 사람이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심으로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된 이것이 참으로 감사할 거리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써 살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까? 헌신하여 다 바치고 살고 싶은 감사가 있습니까? 저는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William Black 목사님의 강해 설교 세미나에 참석했었습니다. 범어 교회 청년회 수련회에서 "율법과 은혜"에 대하여 강의를 한 후에 세미나에 참석했었습니다. 거기에서 아침 말씀 읽는 중에 나 자신이 찬양을 한지 오래임을 발견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희미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감정적인 상태를 두고 하는 이야기 입니다마는 이지적인 사랑과 감사를 "죽어도 좁은 길로 가겠습니다."고 다짐하면서도 감정적인 감사와 찬양을 잊고 있었음을 발견하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좀더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비진리와 싸우는 정신 속에서도 교만이 있음도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은 없습니까? 감사를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돌이켜서 하나님의 자녀되어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을 저와 함께 감사하도록 합시다. 그런데 감사는 화목을 누리게 된 상태 즉 좋은 면만을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 희생과 함께 그 예물에 드리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교병 즉 맛있는 떡은 세속성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속성이 바로 우리속에 들어 있는 타락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이 타락성도 감사 거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타락성 때문에 실패도 하고 죄도 짓지만 이것 때문에 은혜를 더 알게 되기 때문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뻔뻔한 소리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신자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실패를 오히려 감사한다."고-
이런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지난날의 실패와 부끄러움이 오히려 감사 거리가 되어 있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안 사람입니다. 실패와 부끄러움이 잘한 것은 아니지만 은혜를 알고 보면 그것도 은혜를 알게 하는 방편이 되고 있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화목의 부요함을 누리고 있습니까?
두 번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고 그날에 다 먹을 것"을 명했다는 사실입니다. 몰론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은 이튿날도 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하루를 더 연장시킨 뜻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선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의 제물은 썩게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우선적 의도로 보입니다. 3일에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제물이 썩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제사란 드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드린 후에 거룩을 유지시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제사 드린 후에 거룩 유지가 화목제의 핵심임을 보여줍니다. "새벽기도 갔다 오면서 호박에 말뚝치는 격"으로 예배하고 나가서는 싸우고, 기도하고 나가서는 욕해 버리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할 신자가 두더지처럼 땅만 판다면, 돈돈 한다면 어디 다른 이와 나누어 먹는 제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거룩을, 은혜를 속화시키지 않도록 주님을 의지합시다.
셋째, 속화시키지 않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감사의 화목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도 당일에 먹을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6) 이렇게 당일에 먹도록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함께 즐기며 나누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실례를 사무엘하 6:17-19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예비한 자리에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덩이씩 나눠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고 했습니다. 법궤를 메고 다윗이 친 장막에 안치한 후에 제사를 드리고 온 백성에게 떡과 고기와 건포도를 나누어주며 즐거움을 나누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화목의 참여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나누게 되면 남을 것이 없습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드렸으면 자기 주변의 사람들과 나누면 됩니다. 그리스도안에 누리는 은혜는 개인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것입니다. 고로 공동체가 함께 즐거워하도록 나누어야 합니다. 은혜를 깨달았거든 그날에 그것을 나누도록 해봅시다. 대화로, 전화로, 또는 나눔의 편지로 -나눔의 훈련이 필요한 것을 느낍니다. "슬픔은 나누면 작아지고 기쁨은 나누면 커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헌금도 나누어야 합니다.(교회밖, 교회안) -소교회간에 이런 것이 가능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벽을 헐어 버려야 합니다. 벽을 가져서도 안되고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 벽이란 모두가 옛사람의 유물입니다. 이런 것을 가진다는 것은 옛 껍질을 그냥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좀 깨어지고 벗어버린 모습을 하는 것이 성도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이럴 때 비로소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남의 것(좋은 것, 나쁜 것)을 자기 것처럼 생각하며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넷째, 이렇게 나누는데는 끝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속해서 그날그날 그때 그때에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것" 우려먹으며 "옛날에는 ~"을 되씹지 말고 그날그날 나누십시오.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지체간에 나누십시오. 감정에 매이지 말고 이지적으로라도, 억지로라도 하십시오. 주의 백성에게는 생명을 찾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을 맺겠습니다.
은혜를 감사하면서 썩지 않도록 나누도록 하십시오.
lv100107 LEV. 10:1-7 언약교회, 박길현
다른 불
(레10:1-7)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모세가 아론의 아자비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아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 밖으로 메어 가라 하매 그들이 나아와 모세의 명대로 그들을 옷 입은 채 진 밖으로 메어 내니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할 것이니라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 나가지 말아서 죽음을 면할지니라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하니라
우리가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참 웬만한 일에는 참으시고 용서하시는 분으로 보통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의 사건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과 전혀 다른 무서운 분이며, 참지 않으시고 진노하시며 즉각적으로 죽여 버리시는 아주 단호한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가를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아론의 큰아들과 둘 째 아들로서 이스라엘 70장로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먹었던 지도적 제사장들이었습니다.(출 24:1) 이런 사람들일지라도 하나님은 단호히 처단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였기 때문입니다."(10:1) 이것이 어떤 죄가 되는지는 3절이 가르쳐 줍니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나를 가까이 하는 사람이 나를 거룩하게 여기지 않으면 온 백성이 어떻게 나를 영광스럽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나답과 아비후를 제사장으로 세워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게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게 하여 백성들도 그들을 본받아 하나님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기 위함인데, 백성들이 잘못해도 뭣한데 나를 가까이 하도록 한 제사장이 나를 무시하는 행위를 하느냐? 는 책망입니다. 거룩히 여긴다는 말은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이요 구세주로서 존중히 섬기라는 말인데, 나답과 아비후가 이 반대의 일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결코 용납할 수 없어서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교육을 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인이 안 알아주어도, 이방 민족이 안 알아주어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만 자기의 백성이, 자기의 제사장이 자기를 대접해 주지 않을 때는 참을 수가 없으십니다. 자기 백성, 자기 제사장은 자기를 알아모시고 존귀히 섬기도록 하려고 택했는데 이들이 자기를 하나님으로 알아주지 않을 때에는 참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즉각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요 사랑입니다. 더 썩기 전에 도려내시고 경고, 예방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은 즉각 징계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백성을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자기를 유일한 여호와로 알아주고 존중히 여겨 주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나를 네 하나님 여호와로 존중히 여기느냐? 나는 다른 사람을 택하지 않고 너를 택했다. 택함 받은 네가 나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고 있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돈보다, 자식보다 네 사랑하는 그 무엇보다도. 이것이 제사장 나라의 제사장과 백성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린 것이 그들을 죽일 만큼 그렇게 심각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는 다른 불이 어째서 그렇게 심각한 것이며, 제사장의 생명보다 더 중한 것입니까? 분향할 때 불은 번제단 불을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레 16:12) 그렇다면 번제단 불과 다른 불이 무슨 큰 차이라도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불이면 다 같은 불이 아니라(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아주 다른 불인 것이 분명합니다.(다른 사람임에 분명하다.)
9장에서 살펴봅시다. 아론이 자신과 백성들을 위해 여러 가지 제사들을 법도에 따라 드렸습니다. 드리기를 다하고 아직도 제물들은 제단 위에서 타고 있습니다. 아론과 모세는 제사 드리는 순서를 마치고 나와서 백성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났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는 여호와 앞에서부터 불이 나와 타고 있는 단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태워 버렸습니다. 이것은 아론이 제사한 그 제사 희생을 여호와께서 받으셨다는 뜻이며, 그 제물을 태우는 불은 사실상 여호와께서 제물을 태우도록 보내신 불과 같은 불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즉 제물을 통해서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이스라엘에 전달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번제단의 불"은 비록 제사장들이 피우는 것일지라도 하나님이 내리시는 하늘의 불을 의미하는 것이요 또 희생의 죽음을 태운 불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늘에서 와서 희생의 죽음을 거친 불이라야 향을 사를 수 있는 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불로써 향을 피워서는 안되지요. 향도 희생이요, 헌신이요, 불도 희생을, 죽음을 태운 불이라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분향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 방법을 고수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방법이 아닌 다른 어떤 방법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해 봅시다.가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끌려 다니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식을 고집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하나님 식으로, 하나님 식을 따르고, 내 방식은 버리고 그 방식에 복종하는 것이지 내 방식, 인간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방식은 단 한가지 희생의 죽음과 관계한 것이어야 합니다. 죽음을 거치고 죽음과 관계 지워진 것이어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성령이라고 죽음을 모르는 성령은 기독교의 성령이 아닙니다. 가장 잘 죽은 자가 가장 성령을 바로 아는 자입니다. 병고치고, 능력 행하고, 이적 기사를 행한다고 해서 십자가를 보여 주지 않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지라도(하시되)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대개는 하나님과 상관없지만) 기독교의 능력은 기적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병치유 받는 자가 "죽어야 옳습니다."고 해야 정상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방법을 고집하십니다. 왜 우리가 대 교회 정신(대 교회가 아니다)을 반대합니까? 십자가 정신과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한 개의 집단으로 단체의 힘을 키우고자 하는 것은 힘을 믿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의 정신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계속 다른 불, 죽은 자와 상관없는 불, 땅에서 자기가 붙인 불을 고집을 합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전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잘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예수님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부리고 군림하고 이적을 부려서라도 교회 키워 주는 지도자를 구합니다.
교회에 와도 가만히 놓아두면 알아주지 않는다고 갑니다. 진리가 아니라 알아주는 것을 요구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교회에 3달만 오지 말고 집에 있어라 하면 불안하고 좀이 쑤셔서 이곳 저곳 돌아다니지 않고는 못 베길 것입니다. 아마 우울증에 빠질 것입니다. -"예수만 있으면 되었다."하면서 "유유자적"할 수 있어야 하는데 .-
죽음을 통과한, 관계 지워진 모습이 못됩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모습을 덧입은 자, 예수와 함께 죽은 것으로 만족하고 예수만 있으면 다른 것이 필요 없다고 하는 자가 되며 가만있어도, 아무것도 없어도, 알아주지 않아도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죽은 예수만 바라보는 자가 되십시오. 천당에는 예수 죽음 외에 다른 것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의 열심도 십일조도, 이적도, 큰 교회도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죽음을 태운 불, 예수의 죽음만 있으면 됩니다.
lv100811 LEV. 10:8-11 언약교회, 박길현
성과 속을 분별하라!
(레10:8-11)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또 여호와가 모세로 명한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지난 한 주간은 저의 생애 중에서 화가 나서 "새끼, xx놈"하고 가장 많은 욕을 했던 주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아마 박목사는 화가 나면 이런 욕쯤은 하고도 남는 사람인줄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누구에게 무슨 일로 욕을 해댔느냐고 물으실테죠? 어떤 목사를 두고 했습니다. 목사가 목사를 두고 이렇게 심한 욕을 했다고 하면 아마 놀라실 테지만 이렇게 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아서 그리고 욕을 해도 당연하다 싶어서 욕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욕을 해준 그 목사는 목사가 아닌 사기꾼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느냐고 궁금하시겠죠? 50여명 모이는 개척 교회인데 쫓겨날까 두려워 자기 이름으로 건물을 얻어 놓고는, 재정장부도 자기가 달라고 해서는 명목도 없이 제 마음대로 돈을 쓰고 어디 썼는지도 모르게 수백만원씩 빚 지워 놓고, 그러고도 교회 집사들 집에 이 집, 저 집 100만원, 200만원씩 빌려서 쓰고는 갚지도 않고 있으면서 내 친구 목사에게도 400만원이나 빌려 달라고 해서 빌려 갔습니다. 친구가 필요해서 돈을 달라고 했더너 노발대발하면서 화를 내고 회계 집사 집에 가서는 교회가 갚아야 할 돈을 자기 마누라 반지 팔아 갚게 되었다고 투덜대면서 친구 목사의 사모와 부 목사로 있는 친구를 면박을 주고 "저런 사모데리고 있는 목사와 같이 일 못한다. 가라"고 호령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결별을 선언하고 제게로 와서 하루밤을 지내며 기도하다가 갔습니다. 이 목사라는 사람은 명색이 선교도 잘하고 계시록을 너무 잘 푸는 사람인데 부흥사 협회 회원으로 1년이면 40주간 이상 집회에 나가고 사례비조로 100만원도 받아 온다는데, 자기는 교회에서 또 사례를 받고 보너스 600%를 받는데 그래도 돈을 빌리고 써 놓고는 교회 위해 썼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개새끼, 도적놈, 사기꾼이라고 욕을 퍼부었지요. 사이비요, 예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 뭐가 무엇인지 모르는(똥, 오줌을 못 구별하는) 군사라서 그랬습니다.
설교 시간에 왜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의 구체적인 실례를 하나님께서 제게 주셨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거룩과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술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성과 속을 분별하라는 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제가 욕했던 사건도 성과 속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건입니다. 옛날만이 아니라 지금도 교회에 목사도 교인도 성과 속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처음에 은혜 안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며, 은혜 모른다는 교인들이 있겠습니까만, 어쨌든 오늘날 성과 속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 오늘 본문 말씀을 현재에 신랄하게 비추어 보지 않을 수 없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분자고 평신도들이고 간에 아예 소경인 상태에 있습니다. 전혀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내에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크고 작은 일들이 거룩하고 속된 것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관계 문제, 인간 재주와 재간의 문제, 정치적인 문제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과 속의 문제라고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제 친구 목사중의 한 사람은 영어 교사를 하다가 목사가된 사람인데 얼마 전에 서울 지방의 모교회로 이동해 갔다가 시무를 못하고 다시 개척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가 고통당했던 문제의 핵심은 정치를 하지 않는 것 때문입니다. 그저 기도하고, 성경 가르치는 것에만 전념하지 선배 목사를 찾아 나서 가까이 하지 않는 것 때문에, 그러다가 보니 소위 정치적으로 이편도, 저편도 아닌 중립 또는 회색의 입장이 되고 마니, 교권을 잡은 자들이 못살게 괴롭혔던 것이죠. 그래서 못 견디고 타지역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면서도 그들은 이일을 인간관계 문제로만 생각하지 성과 속의 문제로, 신앙과 불 신앙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아예 소경이란 말입니다.
또 다른 경우의 사람들은 문제 의식은 느끼지만 완전한데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체념하고 외면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또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는 사람들은 약간 아파하면서도 혹시 벌이나 받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냥 누르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곳을 탈출하여 나가야 하겠다는 사람, 그런 용기를 가지는 사람은 아주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 죽음의 문제요, 생사의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예 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성과 속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생명과 죽음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고"고 합니다. 왜 갑자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이어 즉시 제사장들에게 술에 대한 경고를 하시는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전후 문맥 관계로 보아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린 것이 술에 취해서 몽롱한 상태에서 한 행동이 아니었나 하는 심증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10절은 제사장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혀 줍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이 거룩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임을 생각할 때, 이 두 사람이 술을 먹고 취한 상태에서 회막에 들어 갔었구나고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해 줍니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룩과 거룩치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그것은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오늘날 교회의 세속화는 비교회화, 비 신앙화요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거룩과 세상에 속한 비거룩을 결코 섞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신앙 철칙(원리)"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제사장, 특정인의 주의 사항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제사장의 이 문제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라고(11)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사장만의 주의 사항이 아니라 전 이스라엘의 주의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의 주의 사항이요 명심 사항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거룩과 속된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먼저 교인들의 목사에 대한 인식부터 생각해 봅시다. 목사는 성직자가 아닙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아닙니다. 오늘날 특별한 성직은 없습니다. 목사와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자격의 사람입니다. 목사가 은혜 입었으면 신자도 은혜 입었습니다. 목사가 선지자요 제사장의 자격이 주어졌다면 신자들도 똑같습니다. 목사는 목회에 전문인으로 종사하는 사람이요 신자들은 다른 일에 전문인으로 종사하는 사람입니다. 전문인으로 전공이 다르지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백성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를 특별한 성직으로 생각하며, 특별한 거룩을 주장하는 자가 있거든 그것은 이방 종교 정신인줄 아십시오. 이로 인해 종교적 권위주의와 기독교 미신이 팽배하고 있습니다. 여기 박목사가 그런 주장을 하거든 여러분 손으로 쫓아 버리십시오. 인정 사정없이 쫓아 버리십시오. 성경에 물론 제사장, 선지자, 왕이 있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자일뿐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특별한 제사장, 선지자, 왕을 하나님 앞에 세움 받을 자격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또 목사의 설교를 생각해 봅시다. 지난주에 "지도력이냐? 진리의 인도냐?"를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목사가 성경을 다루는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설교학에서는 설교를 제목 설교, 본문 설교, 강해 설교 등으로 나눕니다. 목사님들이 나름대로의 유형을 가지고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목사님들이 성경 말씀은 잘 분석하고 (소위 "쪼갠다."고 하는데 성경은 장작이 아님) 대지 1,2,3. 소지 1,2,3, . 식으로 나누어서 설교하면 아주 능력 있는 목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성경은 이렇게 쪼개고 재조직하는 것은 별로 좋은 것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다가 보면 본문의 의미를 분해해 버리거나 곡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설교학을 강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설교에서까지도 성과 속을 혼돈하고 있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제목 설교를 하든, 강해 설교를 하든, 쪼개면서 하든, 붙이면서 하든, 웅변을 하든, 공부식으로 하든, 이러한 것들은 방법론이요 기교는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 합니다. 이런 것은 국어 잘하고, 논리적으로 명석하고, 수학적인 치밀성이 있는 사람이 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방법론이지 진리는 아닙니다.
이런 기술로 천당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합니까? 진리가 중요합니다.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기교야 어떻든지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진리를 올바로 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설교자가 진리를 전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만 제가 말하는 진리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정신, 사상을 말합니다. 어떤 방법을 하든지 본문이 의도하고 있는 정신과 사상을 바르게 드러내는 것이 설교자의 할 일입니다. 흔히 "원어를 잘 연구하면 되겠네?"라고 생각합니다만 문자란 의도를 전하는 기호이기 때문에 같은 문자라도 쓰이는 곳에 따라서 의미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앞뒤 문맥과 사건과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반응 등을 잘 살펴서 그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바로 파악하는 것이 설교요, 그 의도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요, 주님의 마음이요, 성령인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나타내거든 성령이구나 생각하고 아멘 하십시오. 어떤 사람은 웅변력이나 달변이나 열정이나, 이런 것에 감명을 받습니다. 이런 것이 있으면 아멘 입니다. 그러다가 그 반대의 경우는 "노-아멘"입니다. 진리에 응답하는 것입니까? 기교에 응답하는 것입니까? 물론 기교들이 갖추어지면 좋습니다. 그러나 기교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이 기교와 진리를 구분하지 않으면 엉뚱하게 아멘 하다가 죽는 길로 갑니다. 그러므로 기교가 어떠하든지 진리에만, 본문의 정신에만 아멘 하는 사람,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또 "감동시켜 주십시오. 그러면 아멘 하겠습니다."도 아닙니다. 본문의 정신이 전해지거든 자기가 감동하고 굴복하고 아멘 하십시오.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 책임입니다. 또 지식과 정신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첫째, 둘째, 식은 "지식 나열식"이지만 정신을 살리는데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억력이란 한 두 가지로 족하며 그것도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정신은 이해이기 때문에 마음에 새겨집니다. 1+1=2와 같은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또 문학적 아름다움 역시 정신과 구별됩니다. 문학적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감격하지 말고 정신에 굴복하고 매료되어 감격하도록 해야지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입니다. 설교 자리에서 감격 안해도 상관없습니다. 목사의 유혹입니다만 상관없습니다.
오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나를 변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욕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무의식에 박혀 있는 속된 것을 잡아내며, 말씀의 정신만이 거룩이라는 것을 바로 알자는 생각이 들어서 말씀드렸습니다. 속되다는 것과 거룩을 구별 못하는 목사를 욕했으니 목사와 직접 관계된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잘 이해하시며 말씀의 정신만이 거룩이며 거기에 아멘 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이것도 저것도 다 하면 좋지만 "저것도" 갖추기를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인줄 알고 이것 때문에 거룩을 분별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lv101620 LEV. 10:16-20 언약교회, 박길현
속죄 제물을 불태운 까닭
(레10:16-20)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즉 이미 불살랐는지라 그가 아론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가로되 이 속죄제 희생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뇨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그 피를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하였으니 그 제육은 너희가 나의 명한 대로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할 것이니라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
지난 주일에는 거룩한 것과 거룩치 않는 것을 분별해야 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에 들어와 있는 세속적인 정신중에 목사에 대한 인식 문제와 목사의 설교에 대해 중점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는 성직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특별한 거룩을 덧입혀서 특별하게 거룩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직무(전공)가 다를 뿐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설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설교란 기교나 방법이 아니라 성경 말씀의 정신, 사상을 바르게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방법이나 기교야 어떠하든지 성경 말씀의 정신과 사상을 바르게 드러내거든 그것에 굴복하고 아멘 하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도 같은 유의 문제점들을 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은 그 날에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아론이 백성의 죄를 위하여 드린 속죄제 염소를 먹지 않고 불살라 버린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모세가 노하였습니다. 천하 모든 사람들보다 온유했던 모세가 노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를 17절을 자세히 생각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17절을 봅시다. "속죄제 희생은 지극히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곳에서 제사장이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먹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단순히 음식으로 먹으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제사장이 먹어야 드리는 자의 죄를 담당하게 되고 또 죄를 속하게 됩니다. 제사장이 제육을 먹는 것은 죽은 짐승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죄를 지고 죽은 짐승의 죄를 담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라고 했습니다. 회중의 죄를 진다는 말입니다. 짐승의 고기를 먹음으로 제사장은 짐승과 하나가 되어 짐승이 대신 진 그 죄를 자기도 지게 됩니다. (???????) 이것이 바로 담당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를 담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큰일이지만 죄 담당자로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니까요. 그러나 속하게 하는 일을 제사장은 합니다. 제사장은 속죄권이 있기 때문입니다.(레 4:20,26,35) 그러면 어떻게 해서 제사장이 속죄를 하게 됩니까? 출 28:36-38에 보면 제사장 이마에 새겨진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정금 패가 붙어 있어서 아론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성물의 죄건을 담당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즉 패 때문에 죄도 사죄가 되고 그래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입혀 주신 거룩으로 죄를 거룩한 것으로 만드는 위치에 있는 자가 대제사장 아론의 위치입니다. 이런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물론 제육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먹음으로써 죄를 담당하는 일과 거룩하게 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한 몸으로 죽음에 참여하여 죄를 담당하는 일과 속죄하여 거룩하게 하는 두 가지 기능을 하는 셈입니다. 이런 일을 제육을 먹으므로 해야 하는데 먹지 않고 불살라 버렸으니 모세가 화를 낸 것입니다.
그런데 아론의 입장에서는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습니다. 13절을 봅시다. "오늘 그들(죽은 두 아들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속죄제와 번제를 드렸어도 하나님이 벌을 내리셨다는 말입니다. 즉 비록 직접 범죄하지는 않았지만도 아론을(제사장들을) 허물 있는 자로 취급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제육을 먹어서 백성을 위해 속죄하며 또 거룩하게 하는 일을 할 수가 있겠느냐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다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라는 구절입니다. 허물 있는 자로 지적 받은 상태에서 중보자의 기능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번제처럼 온전히 불살라 하나님께 바쳤던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한 모세가 아론의 행위를 좋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속죄제는 무효가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아론도 허물 있는 위치에서 스스로 근신하면서 물러간 이상 이제 허물은 대신 죽은 짐승(염소)이 다 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따져 보면 인간 제사장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출애굽 할 때 제사장 없이 어린양의 죽음만으로 출애굽 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만나를 내리고 물을 내시며 인도하신 것은 제사장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어린양의 피, 유월절의 피의 효력이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유월절의 피는 광야 40년 간 계속 효력을 발휘했음을 여호수아 5:10-12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을 왜 세웠습니까? 하나님이 애굽에서 장자를 죽일 때 사실은 이스라엘도 죽은 자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 때문에 살아난, 어린양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자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양의 소유물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양에게 바쳐진 온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 레위인이고, 레위인 중에서 또 바쳐진 사람이 제사장이라면, 제사장은 온 이스라엘의 제물입니다. 애굽과 함께 죽고 어린양의 생명 받아 살게 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여기서 제사장 세운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을 세운 것은 감투나 특권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본래 애굽인과 같이 죄로 죽었던 사람이지만 어린양이 대신 죽음으로 다른 생명을 얻어 살게 된 민족임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짐승의 죽음에 동참시켰다가 또 짐승의 생명 곧 입혀 준 거룩 때문에 죄사함 받고 성결하게 된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사장의 성결과 영광이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린양의 거룩을 가지고 입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론이 허물 된 위치를 깨닫고 물러가도 속죄 제사는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짐승의 죽음만으로도 충분히 효력이 있고 백성이 살수 있는 것입니다. 아론이 속죄제를 불사른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비록 아론이 이런 의미를 파악했는지 못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이 의미를 파악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애굽에서부터 어린양의 죽음으로 출발하여 지금까지 지나온 것을 친히 경험하여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어른이든 아이들이든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이 할 것이 무엇입니까? 대신 죽는 죽음만 알고, 그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만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 때문에 그들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은혜만 아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일입니다. 그들이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기에 오늘 한국 교회를 위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여, 너희가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느니라. 오로지 주님의 은혜만 알아라!" 바로 이것입니다. 이럴 때 아론처럼 "제사만으로 족합니다. 나는 죄스러워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 한국 교회가 그러합니까? 죄스럽고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다고 하는 대신 "우리가 나서겠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겠습니다. 거룩하게 만들어 보겠습니다."고 하는 형편이 아닙니까? 지난주는 목사와 관계된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드러진 병폐중 하나가 목회자들이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의식에 빠져 있습니다. 즉 "교회 부흥시키면 목회 성공이다."는 공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신학 공부할 생각도 안합니다. 성경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할 일이 목회 성공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공하는 방법을 찾습니다. -C.C.C, 네비교육, 각종 성경 공부와 소그룹 운동, Q.T 등등- 하지만 이런 것들로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은혜만 알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신사, 고등 예수쟁이, 허름하던 농사꾼 같은 사람들이 이제는 양복 입고 책 옆에 낀 점잖은 사람, 속에 든 것이 있어 행세할 줄 아는 그러면서도 빤질빤질하게 닳아빠진 장돌뱅이 기질을 가진 신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합니다. 또 총동원 전도 주일 합니다. 세상 장사꾼의 유혹에 빠져 찾아온 사람들이 수천, 수만 와도 그들이 예수 믿습니까? 그런 것으로는 믿는 자 안됩니다. 그래도 당회장 목사는 이런 사람들 관리 잘 못한다고 부교역자들을 무더기로 해고시키고 있습니다. 거기에 장로들은 당연하게 동조합니다. 똑같은 장사속을 가진 주주들이니까! 이게 어디 교회입니까? 세상에서도 안하는 일을 교회가 소위 "주의 이름으로" 자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좀 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사실입니다. 목회 성공이란 교회 우상, 자기 우상을 내 걸어 놓고 십자가도 은혜도 없고 의와 인과 신을 버린 회사나 장터와 같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 아닙니까?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졸업과 동시에 성경 공부에, 신학 공부에 손떼고 우상을 이루기 위한 방법론에 쫓아다니다 보니 알맹이는 다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남았으니 거기에 세상 정신이 꽉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꽉 들어 와 진을 쳤습니다. "꿩 잡는 것이 매" : 부흥만 시켜라 -무슨 정신입니까? 욕심을 이루는데 유용하기만 하면 된다는 "실용주의" 철학의 사고 방식입니다. "하면 된다. 부정적인 소리하지 마라." -세상의 측면이요 심리학입니다. 목사들이 "진리대로 해 봐라. 교회 되는가?"라고 비웃고 있습니다. 사단과 마귀들이 교회에 앉아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두세 사람이라도 은혜만으로 족함을 아는 곳이 교회입니다. 아무리 많이 모여도 은혜만으로 족한 줄 모르는 곳은 교회가 못됩니다. 세상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한국 교회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죽음의 모습, 새 생명의 모습, 은혜만을 보여주지 못하는 곳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형편은 세속화의 단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면서도 아론처럼 깨달아야 할 터인데 그럴 줄 모릅니다. 주님께 왕권을 드리고, 전부를 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거룩이요, 속된 것입니다. 레위기의 구원은 비거룩 즉 세속에서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들이여 나와서 거룩한 자가 되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아론이 제육 먹은 뜻을 아십니까? 은혜만으로 족합니까? "주 예수님만으로 족합니다."를 고백하십니까? 한국 교회와 자신을 생각해 볼 때 아론처럼 깨달아야 할 점은 없습니까?
lv110123 LEV. 11:1-23 언약교회, 박길현
구별됨을 확인하라.
지난 두 주일에는 제사장이 거룩을 범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했었습니다. 오늘날을 비추어서 특히 목사와 그 설교에 대하여 신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점들을 생각했었죠? 또 모세와 아론의 대화를 통하여 거룩의 정신이 짐승의 희생만으로 족함을 아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 들어와 있는 정신은 이러한 정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예수 십자가만으로가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다른 십자가를 만들어 보려고 하는 정신임을 생각했습니다. 지난주일까지의 본문은 성소내의 사건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안에서의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면들에 대해 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본문이 성소내의 제사장의 범위를 확대시켜서 일반 백성에게까지 다룹니다. 백성들이 생활에서도 그들이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를 대하게 됩니다.
11장은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에 대하여, 12장은 출산시의 부정함에서 정하게 되는 것을, 13장-14장은 문둥이라고 번역된 병의 부정함과 정함에 대하여, 15장은 성적인 부정함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을 생활에서까지 배우며 기억하고 그래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오늘 11장은 이스라엘이 먹을 수 있는 동물의 기준을 가르침과 함께 부정하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할 동물들에 대해 주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러한 본문들은 어떤 관점에서 기록된 것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본문들을 각자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때 이상구 박사라는 사람이 안식교도의 관점에서 의학적으로 이 문제를 설명하여 아주 대단한 사회적 영향을 미친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먹지 말라고 한 "토끼, 사반(토끼만한 너구리 종류), 돼지, 같은 것은 역시 좋지 않더라." 돼지고기는 비계가 많고 콜레스테롤이 많아 각종 성인병을 유발하기에 안성맞춤이더라고 했더니 한 때 돼지 불고기 집이 문을 닫을 지경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과학적으로도 역시 진리더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여기서 우리 생활의 종교 윤리적 모범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토끼는 귀가 크다. 그러니 우리도 말씀을 두 귀 쫑긋하게 해서 듣자.'는 식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빨간 눈, 긴 뒷다리, 뜀박질 등에서 모두 배울 교훈을 찾아내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사반이나 토끼는 새김질을 하지 못하는데 여기 새김질한다고 했으니 성경이 틀렸구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학적으로 본래 건강에 좋은 것, 나쁜 것 또는 종교 생활 내지 윤리 생활의 교훈이나 과학적으로 옳고 그름을 보여주려고 쓰인 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유의 접근으로는 성경의 뜻을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돼지를 먹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식의 질문을 해 오기도 합니다. "과학적으로 틀린다면 성경이 거짓말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묻기도 합니다. 이런 종류의 물음과 성경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고 기록되었습니까? 구약 이스라엘에게는 거룩을 가르치려는 신앙적 목적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즉 신약적으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른가를 가르치려는 목적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는 과학적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토끼나 사반같은 것을 잡아서 해부해 보고 되새김질할 수 있는 위가 되어 있는가? 아닌가? 본 후에 새김질한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겉에서 볼 때 입모양을 자꾸 되씹듯이 놀리는 습성을 그냥 되새김질한다고 생각하고 교육에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이 과학적으로 안 맞아도 신앙 교훈만 되면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특히 먹고 마시는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진짜 신약에 와서 예수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골 2:16-17)
이것을 바꾸어 말한다면 구약의 먹는 것들은 하나님의 구원뜻을 그 당시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나 윤리 생활의 교훈을 배우려는 것도 잘못일 수밖에 없지요 또 먹는 것들을 가지고 가르쳐 주려고 했던 하나님의 구원의 뜻은 예수님께서 다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 구약 시대에 사는 사람처럼 그림자 붙잡고 "먹을까? 말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토끼도, 너구리도, 돼지도, 개도, 미꾸라지도, 뱀장어도, 뱀도 맛있거든 먹으십시오. 아무 상관없습니다. 적당하게 먹고 적당하게 영양을 취하십시오.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됩니다."(롬 14:14) 이것이 창조의 의미와 부합합니다. 창조하신 모든 것이 선하게 지음 받았기 때문에 동물 자체가 스스로 속된 것은 없습니다.
정하고 부정한 동물이 당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먹을 수 있는 짐승은 겉보기에 그 습성과 특징이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11:3) 쪽발이나 새김질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수중 생물중에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9) 여기도 지느러미나 비늘의 특성에 무슨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는지는 아직은 잘 알 수 없습니다. 흔히 이런 것들은 유영을 잘하며 세찬 물줄기를 차고 오를 수 있고 자기몸을 보호할 수 있는데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것은 땅에만 붙어서 구멍을 파면서 미끄러운 몸을 가진 것이 뱀을 닮았으니 부정하고 마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의미가 이런 뜻으로 물속 생물을 정하고 부정한 것으로 구분하는 것인지는 아직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새 종류는 흔히 육식인데다 썩은 고기를 좋아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부정하게 보았다고 하기도 합니다만 이것도 아직은 확실히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그렇다면 창조 질서에도 맞지 않습니다. 날개 없고 기어다니는 곤충은 가증하다고(20) 했는데 왜 가증한지도 아직은 알기가 힘듭니다.
언제부터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성경에 나오는지를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맨 먼저 나오는 것은 노아 때에 그 구분이 나옵니다. 창 7:2에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정결한 짐승은 암수 7쌍을, 부정한 것은 암수 두 쌍을 방주 속으로 들일 것을 명령합니다. 창 8:20에는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립니다. 이 향기를 맡고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이 세상을 땅이 있을 동안 그대로 유지시키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독특한 것은 악한 세상이 저주받아 망해 버리지 않고 유지되기 위해서 모든 정결한 짐승과 새의 일부가 번제물이 된다는 점입니다. 정결한 동물들의 제물로 인해서 악한 세상이 정죄를 면하고 유지된다는 점이 특별한 점이지요. 그렇다면 정결하지 못하다고 분류된 동물들은 정결하다고 분류된 동물들의 희생 때문에 살게 되는 동물들이라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정결하지 못한 동물들은 자기 스스로는 정결하게 될 수 없는 -정결한 동물의 희생을 입어야 살수 있는-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대속받아야 살수 있는 것들이란 말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부정한 동물들을 먹지 못하도록 한 것은 이스라엘은 이미 어린양에 의해, 정한 짐승들의 희생에 의해 대속받아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대속받아야 할 부정한 동물들처럼 대속 받아야 할 처지에 서지 말라는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애굽인, 불신앙자가 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본 환상에서 부정한 짐승과 곤충들이 이방인을 가리켰던 것을 생각할 때에 이러한 해석은 올바른 해석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레 11:44-45도 이 해석을 지지해 줍니다. 그렇다면 부정한 동물들은 먹지 말라고 한 것을 이스라엘에게 애굽인같이 되지 말라는 뜻이요 오늘 우리에게 불신자같이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신자는 불신자와는 달라야 합니다. 불신자에게 없는 주 예수님이 계시고 애굽에서, 세상에서 나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다른 특징과 습관이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애굽사람과 똑같아야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다른 정신, 다른 사고방식, 다른 생활 모습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애굽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하는도다."고 했습니다. 먹을 것 가지고 원망했습니다. 홍해 건넌 직후에 쓴 물 때문에 원망했습니다.(출 15:22-26) 17장에서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아말렉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런 중에서 광야까지 와서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 이제 믿음이 좀 들만도 한데, 모세가 산에 올라 간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애굽신을 여호와라고 생각하면서 섬겼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여호와의 싸우심과 인도를 애굽에서부터 경험하고 출발해서 지금까지 왔었어도 속 사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경상도 식으로 말하자면 눈꼽만큼도 변하지 않고 믿는 구석이 없이 여전히 애굽 사람이었습니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신자가 이런 식의 사람이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애착과 집착에서 좀 벗어나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학생들이 공부를 성실히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성실히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실히 했다고 해서 반드시 1등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1등이 있으면 꼴찌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부정 입학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한 사람들 중에 신자들이 없었습니까? 좀 고생스럽고 부하게 못살아도 욕심을 버리면 감사하며 살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 밥먹을 때 나는 국수 먹어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신자의 구별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살이가 고달파도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니 기도할 수 있고, 소망이 있으니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신자는 그 소속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 사람과는 달라야 합니다. 교회에 오는 목적이 이것 확인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땅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장소가 교회입니다. 오늘 모임도 바로 이것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까? 이러한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lv112447 LEV. 11:24-47 언약교회, 박길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11:24-47) 이런 유는 너희를 부정케 하나니 누구든지 이것들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무릇 그 주검을 옮기는 자는 그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무릇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 쪽발이 아닌 것이나 새김질 아니하는 것의 주검은 다 네게 부정하니 만지는 자는 부정할 것이요 네 발로 다니는 모든 짐승 중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은 다 네게 부정하니 그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주검을 옮기는 자는 그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그것들이 네게 부정하니라 땅에 기는 바 기는 것 중에 네게 부정한 것은 이러하니 곧 쪽제비와 쥐와 도마뱀 종류와 합개와 육지 악어와 수궁과 사막 도마뱀과 칠면석척이라 모든 기는 것 중 이것들은 네게 부정하니 무릇 그 주검을 만지는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이런 것 중 어떤 것의 주검이 목기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부대에든지 무론 무엇에 쓰는 그릇에든지 떨어지면 부정하여지리니 물에 담그라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할 것이며 그것 중 어떤 것이 어느 질그릇에 떨어지면 그 속에 있는 것이 다 부정하여지나니 너는 그 그릇을 깨뜨리라 먹을 만한 축축한 식물이 거기 담겼으면 부정하여질 것이요 그 같은 그릇의 마실 만한 마실 것도 부정할 것이며 이런 것의 주검이 물건 위에 떨어지면 그것이 모두 부정하여지리니 화덕이든지 질탕관이든지 깨뜨려 버리라 이것이 부정하여져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 되리라 샘물이나 방축물 웅덩이는 부정하여지지 아니하되 그 주검에 다닥치는 것만 부정하여질 것이요 이것들의 주검이 심을 종자에 떨어질지라도 그것이 정하거니와 종자에 물을 더할 때에 그것이 그 위에 떨어지면 너희에게 부정하리라 너희의 먹을 만한 짐승이 죽은 때에 그 사체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주검을 옮기는 자도 그 옷을 빨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기는 것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지니 곧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가증함이니라 너희는 기는 바 기어 다니는 것을 인하여 자기로 가증하게 되게 말며 또한 그것을 인하여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 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기어 다니는 것에 대한 규례니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
지난주에 저는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지 못하는 동물을 생각하면서 과학적, 우화적, 윤리적 해석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물들의 특징과 습성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의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컨대 땅에 기는 것을 왜 불결하다고 하시며, 되새김질과 굽이 갈라진 것이어야 정하며 그렇지 못한 것을 불결하다고 했는데 되새김질이나 쪽발이 하나님의 무슨 뜻을 보여주는 것인지 또는 육식성 새들의 육식 성격이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면을 보여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노아 때의 구별을 생각할 때 이것들은 구별을 즉 신자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신자는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한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큰 원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동물들의 특성을 통해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셨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단서가 있습니다. 41-45절이 그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땅에 기는 것과 배로 다니는 것이 왜 가증한지를 말해 줍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땅에 기는 것들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맞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44) 땅에 속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더럽다는 말입니다. 나아가서 땅에 속하였음을 보여주는 이것들은 애굽적 성격을 보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45) 그러니 여기서 땅이란 바로 애굽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굽땅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은 땅이니 부정한 동물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은 애굽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요, 주검(시체) 역시도 애굽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정한 동물들은 거룩한 땅에 속하는 즉 하나님께 속하는 특성을 보여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지금 우리와 같이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고 배울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교육용 실물 교과서로 사용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동물들의 성질을 이용하여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은 새김질하고 굽이 갈라진 동물은 먹으면서 "아하! 우리에게 되새김질하듯이 하나님의 뜻을 되새기며 구별된 생활을 하라 하는구나."하고 생각하게 되고, 비늘과 지느러미 있는 것을 먹을 때는 "물 속에서도 땅에 붙어 구멍을 뚫고 사는(미꾸라지, 뱀장어) 것들과는 달리 땅과는 멀어져야 하는구나." 다짐하게 되며, 날개가 있고 네발로 기어다니는 것은 애매하게 사는 것. 예수쟁이로 보이지만 사실은 땅 좋아하고 땅에 붙어사는 불신자니깐 부정 하구나고 생각해야 하고(20) 반대로 기면서도 뛰는 것은 "땅에 살지 못하겠구나. 어쨌든 뛰면서 떠나자."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신자의 모습이기도 하지요.
주검(시체)은 말할 것도 없이 저주의 죄악의 모습이요 불신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실물 교육 자료이기 때문에 옛날 이스라엘에게 주검을 부정한 것으로 가르치는 재료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땅에 기는 것", "배로 기어다니는 것."(41-42)은 창 3장에서 뱀의 저주와도 연관을 시킬 수 있겠습니다. "저주받아 배를 붙이고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 3:14)고 한 저주대로 저주의 모습이요, 흙을 먹는 모습입니다. 흙을 먹는다는 것은 흙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는, 즉 "흙에 소속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땅에 기는 것들은 바로 땅의 것이요 땅을 생명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저주받은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출애굽 시기에는 애굽으로 대표되어 그 모양이 바뀌어 나타났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애굽에 속한 것들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45)
반면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이 아담처럼 근본 똑같은 흙임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근본 비 거룩을 인정합니다.(창 3:23)- 그러나 아담이 여자의 후손을 생명으로 알고 기다렸듯이 하나님의 거룩을 기다리는 사람이 이스라엘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람들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을 읽어야 합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나의 거룩이 너희의 생명이다. 내 거룩안에 있어라.'는 간곡한 심정을 보아야 합니다.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사랑하심으로 우리의 생명을 위해 애타게 당부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땅에 기는 것으로 더러워지지 말라."는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낮아지심을 본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이라면 이렇게 간곡한 사랑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삶의 터전은 "땅"이 아니라 "약속의 땅"이요 "여호와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당부가 아니라 귀찮은 소리로 들린다면, 잔소리 많은 뒷방 할머니의 소리쯤으로 들린다면, 우리가 수난 당하신 여호와를 무시하거나 사실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지요. 대신에 우리는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여호와 주 예수 대신에 돈이나 지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직장이나 삶이나 이런 것들이 중하고 사랑스럽게 마음속에 들어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하나님과 자기밖에는 알 리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해석해 볼 때 거기서 십자가의 예수가 나와야 천당인데 다른 것이 나올 때는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여러분 마음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한 주간 동안 마음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죽어도 예수, 망해도 예수, 예수 한 분만으로 나를 위해 수난 당하신 그 예수, 부활로서 완전한 거룩을 이루어 주신 그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셨습니까? 지금 이것도 사랑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순수해야 하며 애굽화 되는 것을 막고자 하시는 지를 봅시다. 시체를 만지고 옮기면 부정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24-25) 부정한 주검(시체)이 목기, 의복, 가죽, 부대에 떨어지면 물에 담그라고 합니다.(32) 마른 물건에 떨어졌기 때문에 물로서 씻어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질그릇, 질탕관, 화덕 등에 떨어지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함께 부정하므로 깨어 버리고 내버리라고 합니다.(33-35) 부정이 스며들고 배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마른 종자에 떨어진 것은 정하지만 물기 있는 종자에 떨어지면 부정합니다.(37-38) 물로 인해 부정이 종자에도 옮겨지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철저히 오염을 방지하고자 하십니까? 애굽의 성격, 죄악의 것들과는 어쨌든 혼합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죽먹던 숟가락으로는 다른 죽 그릇에 손대지 않는 법입니다. 아무리 깨끗이 빨아먹어도 그 숟가락에는 침이 묻어 있기 때문에 다른 죽을 삭히고 맙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극성스럽습니까? 그러나 극성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애굽의 것이 매력적이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민수기에 가면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떠나 나온 이방인 애굽의 힘에 복속되어 넘어짐을 거기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극성스럽다는 것은 우리를 위한 극성스러움입니다.(부모의 극성이 자녀를 위한 것이듯) 우리 한국 교회, 언약 교회는 애굽의 힘이 위험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얼마나 애굽을 막고자 하시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지해 있습니다. 예사로 애굽을 도입하고 애굽정신 안쪽으로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극성스럽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것 모두가 우리 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극성스러워도 이스라엘 역사는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거룩을 이루셨습니다. 추호도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극성스런 하나님이 이루어 내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예수님이 이루었다고 해서 적당히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할 수 있는 한 예수님처럼 되고자 소원하고 발버둥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처럼 되고자 소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적당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소원도 잃어버리고 다른 것으로 마음을 채우고 있습니까? 이러한 우상이 깨어지지 않는 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살아나지 않습니다. "내가 왜 이럴까?", "왜 내가 이전과 다를까?"라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 아닌 다른 것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라는 미명하에 우상을 숨겨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전부가 아니라면 다른 것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밀어내었습니다. 예수님은 밖에 서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45)고 탄식하고 계십니다.
주검의 모습을 여러분 마음에서 몰아내십시오. 낮아져 오신, 수난 당하신 여호와, 십자가의 주 예수를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므로 하늘 향해 날며, 땅을 떠나는 자 되십시오. 땅에 머물지 말고 세차게 헤엄치십시오. 소속은 분명히 하십시오. 예수님만을 온 인격으로 가득 채우는 자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여기에 주검의 모습은 들어올 틈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좋아도 예수, 나빠도 예수, 흥해도 예수, 망해도 예수, 부해도 예수, 가난해도 예수만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자 될 것입니다. 이런 소원으로 충만한 자 되십시오. 이것이 바로 거룩의 모습이요, 부활 신앙의 모습입니다.
lv120108 LEV. 12:1-8 언약교회, 박길현
산고에 새겨진 뜻
(레1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 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 륙 일을 지나야 하리라 자녀간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거든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된 어린 양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취하여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자녀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그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성경이 없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를 가르치시는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주도 면밀한 하나님의 아이디어(idea)들을 알면 알수록 더욱더 경탄하게 됩니다. 자기 백성을 가르치시려는 하나님은 기상 천외한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자기의 뜻을 자기 백성들에게 가르치시며, 또 자기 뜻을 드러내는 일관된 체계로(도구로) 삼으십니다. 그중 한 가지를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출산 즉 이스라엘의 여자가 자식을 낳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 백성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출산이란 것을 왜 하나님 뜻을 가르치는 도구로 삼을까요? 고통 중에 아이를 낳고 피를 흘리는 것이 무엇이 좋아서 그것을 교과서로 삼으시려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생리학적 또는 신화적인 문제로 취급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듯이 이것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계시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읽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여인이 아들을 낳으면 7일 동안 경도 할 때와 같이 부정하고 또 33일이 지나야 의식적으로 깨끗하게 될 수 있으며(40일) 딸을 낳으면 2주일간 부정하며 또 66일이 지나야(80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의식적으로 깨끗하게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번제와 속죄 제물을 드리라고 했으니 여자가 아이 낳는 것도 죄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출산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시키기에 알맞은 상징들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사용하시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출산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계시하신다면 먼저 출산이 어떤 구원 계시를 담고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오늘 본문의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창 3:16을 보면 범죄한 여자에게 '잉태하는 고통과 해산의 수고가 크게 더해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5절과 연관시켜 보면 뱀의 후손을 깨부술 여자의 후손을 하와가 낳을 때도 예외 없이 고통하고 수고하게 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출산의 고통은 즉 그 고통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이 나고 또 뱀의 후손이 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좀더 확대시켜 생각해 보면 하와가 아이를 하나만 낳을 것이 아니라 계속 낳을 것인데(???? ???? ) 아이를 낳으면서 고통할 때마다 이번 고통 뒤에 뱀의 자손을 깨부수는 승리가 있구나 하는 것을 거듭거듭 확신하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말씀은 '남편에게 종속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게 되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지음 받은 남편의 다스림 하에 있지 않고 독립하여 있다가 범죄했으니 남편의 통제하에서 보호를 받으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씀들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저주의 고통을 통해서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신약 성경이 바로 이런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딤전 2:11-15에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먼저 지음 받은 자의 다스림을 받으라. 사랑을 구하되)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독립하여 있다가 범죄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남자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도움을 입고, 믿음과 사랑과 거룩한 생활을 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남자들의 다스림 하에서 정절로써 믿음, 사랑,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해산하는 것이다. 이 해산이 바로 구원을 얻는 길이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해산의 수고가 단순히 해산의 고통스러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계시해 주는 것임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즉 고통을 통한 원수 파괴와 여자의 보호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갈라디아서 4:11에서도 바울은 율법의 종노릇하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자유로 돌아오도록 하려는 노력을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창세기 3장의 해산의 고통과 아픔은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기 위한 수고와 아픔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보면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수고와 아픔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출산 즉 교회의 출산을 위해서 당하신 아픔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40일의 금식과 시험, 불신자들의 반대, 배반과 십자가 지시는 사건들이 다 하나님 백성 출산을 위한 해산의 산고들임을 보여줍니다.
모세가 40일씩을 금식하면서 산에서 엎드렸던 것도 이스라엘을 낳기 위한 산고였다는 것을 신명기 9장은 말하고 있습니다.(신 9:9-21) 이런 문맥에 비추어 볼 때 레위기 12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산하여 40일 또는 80일씩을 죄인이 되어 여호와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이스라엘 여인들의 모습은 후손을 낳으려고 고통하는 하와의 모습이요, 이스라엘을 낳으려는 모세의 모습이요, 교회를 낳으려는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이요, 사도들의 모습이며, 예수 안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옛사람이 죽은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디모데전서는 남편 안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여인들로써 여인들에 국한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산할 이스라엘 여인들의 고통을 보십시오. 남자를 낳으면 7일 동안은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한자 취급을 받으며(2) 또 삼십 삼일을 여전히 부정한 피가 흐르는 자 취급을 받습니다. 여아의 경우는 2배의 기간을 부정한 피가 흐르는 자 취급을 받습니다. 이것은 여인이 저주를 지니고 있음을 뜻합니다. 창 4:10-12에는 흘려진 피는 저주의 근원이 됨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피를 흘리는 자로 인정받는 한 그녀는 저주를 뿌리고 다니는 사람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 기간 동안을 어떻게 지내야 합니까? 금고 상태 즉 일종의 갇힌 상태에서 40일 또는 80일 후에 있을 속죄와 헌신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40일의 의미를 굳이 찾는다면 생산을 위해 목숨을 건 기간 즉 죽음을 통과한 기간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속죄와 헌신을 기다리면서 목숨을 건 고통을 겪는다는 의미입니다. 여아의 경우는 범죄의 시작이 여자에게서 되었으니 그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속죄의 날을 더욱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니까요. 수고가 클수록 위로도 커지게 되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상을 바꾸어 말하면 이스라엘 여인들이 겪는 해산의 고통은 제물의 고난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야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고난에 참여시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고통 속에 태어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해산의 수고를, 제물의 고난을, 통해서 형성되는 백성들입니다. 여기는 남자와 여자가 따로 없습니다. 아픔과 고통을 통과한 후 나온 사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교회요 여기에 원수의 깨어짐이 있습니다.
이러한 여인의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여인들을 구속에 참여하도록 하십니다. 산고의 아픔과 죄인되어 금고 상태에 놓여지는 수고를 통해서 속죄를 바라보게 하고, 죄가 클수록 더 큰 은혜를 알게 하여 은혜의 큼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니 생산치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구속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여인들을 계시의 그릇으로 보존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 자신이 구속의 진리를 산고를 통해서 깨달을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 전해 주는 그릇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옛 이스라엘 여인은 단순한 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산에 새겨진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출산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상 천외한 아이디어와 열심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열심으로 오늘 우리도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에 눈을 뜹시다. 눈을 감은 자 되지 말고 뜨고 봅시다.
오늘날 이스라엘 여인들이 누구입니까? 교회를 낳기 위해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다 초점을 맞추어 좋아하는 자가 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근거로 해서 사는 자가 됩시다. 그의 고난이 나의 모태요 근원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 예수님의 속죄 사역이 귀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고난 아닌 예수님의 고난과 속죄 사역을 의지해서 살아갑시다.
lv120108-2 LEV. 12:1-8 언약교회, 박길현
출산과 부정
(레1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 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 륙 일을 지나야 하리라 자녀간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거든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된 어린 양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취하여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자녀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그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지난주에는 이스라엘 여인의 출산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즉 출산의 고통은 교회를 낳기 위한 그리스도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의 설교 내용은 성경 전체적인 맥락에 비추어 본 이스라엘 여인의 출산의 고통이 가지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12장이 이러한 의미를 보여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여인들의 출산시에 겪는 고통의 의미는 레위기 12장의 먼 의미일 뿐입니다. 본 12장의 강조는 출산과 부정함이라는 문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이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의도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면, 출산으로 부정하게 된 여인이 어떻게 정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출산의 부정에서 산혈이 깨끗하게 되는 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요약 할 수 있습니다.(법이라고 하니까 거부감이 생기는가요?)
본문에서 먼저 의문을 가지게 하는 것은 출산 즉 자녀를 낳는 것이 왜 부정한 것인가? 라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부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정하다."(2,5) "깨끗해진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 것과 또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라고 한 것을 보아서 출산이 부정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마치 부정탄다. 더럽다. 얼씬도 하지 말라.'는 투입니다. 아들을 낳았든 딸을 낳았든지 부정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주석가들은 반대합니다. 시편에는 자녀를 가지는 것이 즐거움이요(시113:9),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상급이라고(시 127:3) 했으며, 복이라고(시128:3-4)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 생산이 부정이 아니라 피흘리는 것에 부정의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자녀 생산을 부정하게 보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아예 인간이란 종족의 번식을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38절이 그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이의 양피를 벤다는 것은 생식기를 아예 날 때부터 잘라 버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남자라고 대를 이을 것이라고 좋아하며 미역국 끓이고 삽짝(대문)에 고추 달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대 이을 생각 마라.', '아예 번식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애물단지요, 씨를 말려 버려야 할 기생충과 같은 것이요, 살려 두면 두고두고 후회할 큰일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독사 새끼를 이불에 싸고 키우는 것과 같이 위험한 것이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번식 불가능하게, 독사의 독니를 빼 버리듯이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아이를 생산한 여인의 생식기를 더럽다고 하십니다. "산혈이 깨끗하리니"라는 말은(4,5,7) '그 여자의 피의 근원' 즉 생식기(자궁, 외생식기)가 더럽다는 말입니다.(여자분들께 죄송한 이야기 같지만) 아이 출생의 근원지를 더럽다고 하십니다. 더러운 것을 낳았으니 낳은 근원지까지 더럽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출산한 여인은 하나님 가까이 얼씬도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여인의 자궁을 비오면 똥퍼내는 똥구덩이(변소) 같이 생각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남자들은 좋아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여인의 자궁을 더럽게 만드는 원흉이 남자입니다. 남자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에 8일만에 먼저 남자가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여자는 자란 후 출산의 산고를 겪지만) 타락 후에 책임을 남자에게 먼저 물었듯이 말입니다.
아무튼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죄가 많은 인간입니다. 둘씩, 셋씩 낳았으니 말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긍정하지 않습니다. 부정이요 절망의 눈으로 인간을 봅니다. '휴머니즘'이니, '인간애'니 '자비'니 남녀간의 사랑이니 하는 것들, 소위 인간이 스스로 대단한 체 위대한 체 하면서 자기를 포장하는 것들을 웃기는 것들로 조롱합니다. "웃기지 마라. 씨를 말려 버려야 할 것들아."라고 합니다. 죄악의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보신 것은 물론 타락한 때부터입니다. 그러나 타락 후에 해산의 수고가 더 하는 저주를 통해 구속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듯이, 이스라엘 여인들에게도 해산의 부정 곧 저주를 통해 구속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인의 자궁은 40일 또는 80일의 기간이 지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의 기간을 지난 후 제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나아가면 제사장은 그 제물을 여호와 앞에 드리고 여인을 위해 속죄해야 깨끗하게 됩니다.(7) 여인을 위해 속죄한다는 말은 여인이 여호와께 죄를 지었는데 제물을 드려 갚는다는 말입니다. 갚는 대가는 제물입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드려서 갚아야 그 여인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으시고(번제) 죄 없는 사람으로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속죄제) 제물을 드려 자궁을 깨끗하게 했으니 거기서 난 자녀도 깨끗한 자녀라고 인정하시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배울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혈육을 따라 태어나는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아들도 딸도, 낳는 부모도 모두가 하나님이 너무너무 싫어하시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제물이 그들을 깨끗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제물에 의해서 깨끗해진 사람만이 이스라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하나님입니다. 혈육의 자녀가 아니라 제물을 통해 깨끗해진 사람, 거듭난 사람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통해 깨끗해진 사람만이 번성하기를 원하십니다. 시편에서 자녀가 복이요, 여호와의 주신 상급이요, 즐거움이라고 한 것은 제물을 통해서 깨끗해진 사람들을 두고 한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혈육 관계보다는 믿음의 관계가 더 소중하다는 점입니다. 자녀도 거듭나야 하고 아내나 남편도 예수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을 주신 것은 가정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 되는데 목적이 있으므로 믿음의 가정이 되는 것을 향해 힘써야 합니다. 또 성도간에는 혈육 관계 이상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서면 다 영광스러운 사람이 될 것을 내다보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이러한 인간성에 소망이 있습니다. 반면에 이렇지 못한 인간성에 소망을 두지 맙시다. 판사, 검사되면 경사 났다고 야단이지만 예수 믿는 것은 우습게 보는 것이 우리의 시각이 아닙니까? 예수와 관계가 맺어진 인간만이 번성해야 하고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또한 혈연관계도 초월할 수 있습니다. 네 자식, 내 자식을 초월할 수도 있고, 자녀가 없어도 부부간에 예수 안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세계를 향해 소망하고 가야 합니다. 주님이 오시면 그 세계가 완전히 드러날 것이지만 거기에 소망을 두고 이 인간 세계를 떠나가는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lv130108 LEV. 13:1-8 언약교회, 박길현
문둥병
(레13:1-8)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사람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딱지가 앉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 피부에 문둥병같이 되거든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 자손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처의 털이 희어졌고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문둥병의 환처라 제사장이 진단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칠 일 동안 금고할 것이며 칠 일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의 보기에 그 환처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칠 일 동안을 금고할 것이며 칠 일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처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는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그러나 정결한 여부를 위하여 제사장에게 보인 후에 병이 피부에 퍼지면 제사장에게 다시 보일 것이요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진단할 것이라 이는 문둥병임이니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끔찍스런 방법으로 자기의 백성을 가르치시며, 자기 백성에게 정신을 차리고 제 분수를 잊지 않도록 하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점은 이러한 류의 성경의 본문들을 대할 때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하시려고 이런 것들을 기록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이러한 유의 성경 말씀들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출산을 부정하게 보시고 죄악시하시므로 아예 날 때부터 인간의 씨가 번성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인간은 제물의 희생을 통해 거룩하게 된 인간이었으며, 이스라엘이란 바로 제물의 희생을 통해 거룩하게 된 인간의 공동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출산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13-14장에서 문둥병이라는 무서운 병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계시하시며 또 가르치시고 깨우치시려고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13장을 중심으로 드리겠습니다.
13:2에 "사람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딱지가 앉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 피부에 문둥병 같이 되거든 ."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사는 백성에게 문둥병이 왜 생겨납니까?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문둥병자가 나은 후에 드리는 속건제와 속죄제를 보아서 문둥병이 죄와 관계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병이 각 개인의 죄 때문에 그로 인한 보응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각 개인의 죄로 인한 보응으로 이런 병이 생긴다고 말하고도 있지 않을 뿐더러 병이 갑자가 생겨났다가 또 낫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14:2) 발병했던 문둥병이 낫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임을 보여주는 것이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우연히 되는 것이 없습니다. 특히 문둥병이 낫는다는 것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로서 이스라엘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 이병이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의복과 가옥에도 나는 것을 말씀하면서 이것들을 불사르라고 하시는 것을 볼 때에 이 병이 각자의 죄의 보응으로 오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이상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 병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깨우시며 가르치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문둥병이 나타나거든 이 백성아 깨닫고 정신을 차려라. 내가 너희를 보니 위태, 위태하다. 이것을 본 이 백성아 정신 차려라.'고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문둥병을 앓는 이 사람들은 억울하지 않습니까?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모두의 죄를 대표해서 본보기로 매맞는 사람과 같습니다. 온 학급이 잘못했을 때 급장을 불러 세워 몽둥이로 때려 벌하는 것이나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53:3에는 여호와의 종이 자기는 죄가 없지마는 문둥이 취급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고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 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오늘 레위기 13장에 문둥이 되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유의 사람으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이 이스라엘에 나타났을 때는 '아이구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는고?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런 끔직한 병이 들었는고?'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다 문둥이입니다. 저 사람보다 더한 문둥이 입니다.'라고 하면서 회개해야 하고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훌륭하던 목사가 사고로 죽고, 잘 믿는 아무개가 매맞는 것을 보거든 '아이고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라는 말씀입니다. 남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는 자는 다른 사람 생각할 형편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기에 바쁩니다.
또 우리는 항상 개인주의 사고 방식에 젖어 있다가 보니 '나는 죄를 많이 안 지었는데 왜 이렇게 고난이 많을까? 죄를 많이 지어도 편하게만 살고 원대로 되니 어찌된 일일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공동체적으로 죄에 빠져 있고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공동체적으로 다루십니다. 이런 중에 고난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더 많이 고난받게 하시고, 받아도 먼저 받게 하시므로 세상을 경고합니다. 잘 믿는 자가 고난을 받거든 못 믿는 사람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선택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어려움이 더 많을지도 모르며, 본보기가 되어 매를 맞아도 먼저 맞고, 대신해서 더 맞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각오하셔야 하며, 감사할 수 있도록 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대표 문둥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믿는 자는 대표 문둥이와 같습니다.
이런 문둥이를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면 제사장은 '너는 문둥이다', '아니다'를 진단해 줍니다. 안수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 고쳐 주는 것이 아니라 '문둥이와 문둥이 아닌 사람을 진단해 내는 일밖에 하지를 못합니다. 주어진 말씀에 따라서 진단해서 선언하는 일밖에 하지 못하니 요즈음 같으면 능력 없는 목사라고 쫓겨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그래도 말씀대로 선언하는 것이 제사장이 할 일이지 고쳐 주지 못합니다. 고쳐 주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문둥이라고 판명이 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십시오 45-46절에는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밖에 살지니라."
이 말은 자신이 죽은 자같이 되었으니(축사망) 슬퍼하며 '나는 죽었다. 나는 죽었다. 나는 더럽다 나는 더럽다. 나는 시체같이 되었다.'라고 외치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듣고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있을 때마다 그리고 시체같이 죽은 자 같이 부정하게 되었으므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쫓겨나 진 밖에서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버려짐이 지옥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 문둥이 개인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문둥이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요 원래 의로운 것이란 하나도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문둥이 같은 인간들이요 죄인입니다. 화가 나면 욕설할 때 문둥이 같다고 하지만 화가 누그러지고 나면 문둥이도 아닌데 지나치게 했다고 후회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 바로 문둥이 그 자체가 우리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높은 자 낮은 자 잘 난자 못난 자 할 것없이 문둥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우리들인데 무슨 불만이 있고 잘난 것이 있고 내노라고 할 것이 있습니까? 네 탓, 내 탓, 환경 탓하고 원망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 그저 이런 대로 살게 하신 것을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설사 진짜로 문둥이가 되어 살아 라고 한들 '문둥이 되어도 옳습니다'라고 하면서 살아야 할 사람들이지 나를 왜 문둥이 되게 했습니까? 불공평합니다. 라고 항의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문둥이라고 하시는 것은 은혜 안에 살게 하시려는 배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문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서 죄에 빠지지 말고 은혜 안에서 살도록 합시다. 옛날 불신자들은 팔자 소관이지라고 하면서 어려움(가난, 죽음)을 견뎌 나갔는데 오늘날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이지가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둥이가 우리의 본 모습임을 잊지 말고 은혜 안에서 살도록 합시다.
lv140120 LEV. 14:1-20 언약교회, 박길현
문둥병 환처가 나은 뜻은?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운 분이십니다. 13장에서 선민 이스라엘의 본 모습이 문둥이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선민이라도 별사람이 아니다. 예수 믿게 된 사람이라도 별 것 아닌 문둥이다. 이것을 명심하자. 지옥 가야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14장에 와서는 그러한 문둥이를 어떻게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가를 보여주십니다. 14장이 없다면 얼마나 침울하고 암담하겠습니까? 마는 본 장이 있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큼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란 미련하기 때문에 극적인 대조가 없으면 잘 깨닫지 못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문둥이와 문둥병에서 나은 후의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대조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문둥 환자가 깨끗하게 되는 날이 있을까요? 좋은 약도 없는 그 때에 한 번 문둥이가 되면 평생 문둥이로서 살다가 죽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문둥이도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설교자 노릇하기 때문에 문둥이가 되어서 설교할 것도 있지만 문둥이가 나아서 설교할 것이 더 많기 때문에 하나님이 낫게 해 주시는 때를 기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드디어 문둥병을 낫게 해 주시는 때가 왔음을 깨달은 문둥병자의 경우를 보게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몸에 있던 문둥병 환처가(갈라지고 피가 나고 오그라들었던) 나아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긍휼의 때가 온 것입니다.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아마 본인은 "내 병이 나았다."라고 고함을 지르고 뛰고 야단할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부스럼 나은 기쁨, 무좀 나은 기쁨에 비기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제사장에게 알리게 되고 제사장에게 그를 데리고 가게 됩니다. 제사장은 진 밖으로 나가서 그 사람을 진찰합니다. 진찰해 보니 참으로 문둥병 환처가 나았습니다. 갈라지고 피나고 오그라들었던 환처가 원래대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제사장은 병나은 사건이 지니고 있는 뜻을 가르칩니다. 제사장은 먼저 병나은 사람에게 살아 있는 깨끗한 종류의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합니다.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가 각각 무슨 뜻을 가졌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정결하게 하는데 사용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가져온 두 마리 새 중에 한 마리를 생수가 담긴 그릇 안에서 잡습니다. 이렇게 잡는 것은 새의 피가 생수와 섞여져서 생수가 핏물이 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아마 새의 피가 그렇게 많지 못하니 생수를 섞어서 피 대용으로 사용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피에다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담그었다가 정결하게 되는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립니다. 아마 홍색실로 묶어서 풀 빗자루 같이 된 백향목과 우슬초 꾸러미를 피에 담그었다가 사람에게 툭툭 '치면서' 일곱 번을 뿌리니 온통 피를 덮어쓰는 꼴이 된 듯합니다. 산새도 역시 피에 담그었다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들에다 놓아줍니다.
이것은 바로 문둥이는 새와 함께 죽어서 끝이 나고 피를 덮어쓴 새 생명으로 새로이 살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문둥이는 끝났다. 피를 덮어 쓴 새 생명으로 살게 된다."라고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문둥병을 낫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뜻이 있다는 것을 제사장은 병나은 본인과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피의 생명을 덮어쓰고 살게 될 사람은 옛 모습의 허물을 철저히 벗어야 합니다. 8절에 보니 "그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다."라고 했고 9절에는 7일 후에 또 "그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고 했습니다. 면도칼로 밀고, 떼수건 타월로 닦고 씻어 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뱀허물 벗듯이 허물을 벗는 기간이 지나면 참으로 자기가 덮어쓴 새의 피가 어떤 성결의 피인지를 밝혀 주는 날이 옵니다. 이 날을 맞아야 비로소 이스라엘 공동체 즉 교회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여덟째 날이 바로 그 날입니다.
이날에 피 흘리는 것은 속건제와 속죄제와 번제의 양들입니다. 이 제물들은 모두가 죄를 속하기 위해 죽은 것들입니다. 덮어쓴 새의 피, 문둥이로 죽고 피를 덮어쓰고 새로이 살게 되는 것을 가르쳐 주던 피가 알고 보니 죄 때문에 죽는 희생 양들의 속죄의 피를 가리키는 것임이 밝혀집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속죄의 피를 입고 살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일, 헌금 따위 보다 속죄를 먼저 알아야 예수를 참으로 믿는 것이다.) 한 수양은 속건 제물로 바쳐져 피를 흘립니다.(12) 제사장은 이 피를 가지고 정결함을 받을 사람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 가락과 오른발 엄지 가락에 바릅니다.(14) 기름도 또한 같은 곳에 바르고 머리에도 바릅니다.(15-18) 온 몸이 피와 기름에 푹 잠긴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문둥병으로 더렵혀진 몸이 이제는 피로써 목욕을 한 것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피로써 정결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이런 모습을 했었는지 기억할 것입니다. 바로 제사장이 세워질 때 이런 모습을 했었습니다. 오른 귓부리와, 오른 엄지손가락과, 오른 엄지발가락에 피를 발랐던 것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는 이 사람도 제사장과 똑같은 거룩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사장의 영광스러움에 참여할 거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스라엘의 본 모습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문둥이었습니다. 이러한 문둥이를 희생의 피로써 속죄함으로 그리고 그 피로써 침례를 시킴으로써 제사장의 영광스러움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입니다. 제사장의 중재 아래서 생명을 누리는 것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백성이 제사장의 거룩을 가져야 하고 따라서 그 영광을 함께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본성이 문둥이지만, 남녀노소할 것 없이 문둥이지만, 희생의 피로써 덧입음으로 이러한 영광스러움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속건제 희생제는 사람의 행동으로 범죄한 것을 갚는데 사용되었던 것을 레위기 5:14-6:7의 말씀에서 보았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속건제는 행동으로 지은 죄, 살면서 지은 죄를 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람의 겉모습을 깨끗하게 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죄는 이런 류의 죄만이 아닙니다. 속죄제도 있습니다.(19) 속죄제는 어떤 류의 범죄를 속하는지 레위기 4장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지는 아니하지만 속건제와 구분해 놓은 것을 볼 때 사람의 내면적인 죄 즉 마음으로 범했거나 또 행동으로 지었지만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명령들을 범했을 때에 드리는 제사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정결함을 받는 사람에게 이 제사를 드리도록 하는 것은 내면적인 죄도 사함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속사람까지 새롭게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외면적인 것이든지 내면적인 것이든지 하여튼 사람의 안과 밖을 피로써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문둥이 같은 인간을 제사장 같은 인간으로 재창조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문둥 환자였던 사람이 드리는 속건제와 속죄제라고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속건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이 사람은 이제 옛날 사람이 아닙니다. 안도 밖도 완전히 새롭게 된, 새사람이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요 영광스런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회에, 천당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14절 하반에 "그 후에 번제 희생을 잡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속건제와 속죄제를 드린 후에 즉 안팎이 깨끗해진 새 사람, 재창조되어 갓난아기와 같이 깨끗해진 사람이 된 후에 번제를 드리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교회는 어떤 사람이 모이는 곳입니까? 본래는 문둥이 였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을 받고 피로써 새로이 지음 받은 사람만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골로새서 3:9-11에서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쫓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주전 8C 초엽에 코카시스 지방을 거쳐 근동 지역으로 이동해 온 유목민족)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안에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닌 사람들만으로 형성되는 공동체가 교회란 말입니다. 이것을 갈 3:27이하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즉 그리스도 모습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들을 우리 하나님은 이제 갓 태어나 광야 캠프에 머물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둥병을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웁게 교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까?
여기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은 문둥이와 같고 비록 죽은 자와 같고 태에서 죽어 나온 사산아 같을 지라도 희생의 피를 통해서 영광스런 제사장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광야 시내산 밑에 진치고 있는 이스라엘은 아직도 애굽인이요, 죄인이요, 금송아지를 만들며 법석을 떨던 불신앙자들에 불과합니다. 그런 이들을 하나님은 영광스런 제사장 나라로 만드실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이 때를 바라보고 행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믿음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고 향해 가는 것이 이스라엘의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바라보았던 그 시대가 도래하여 그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거듭남으로 인한 고통의 시기는 끝나고 여덟 째날이 밝았고, 그 날의 은총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시어 기어코 제사장 나라를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그 나라의 제사장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세상 것이 없어서 부족합니까? 모든 것 되시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도 계시며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바로 뜨고 하늘에 계시는 영광의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 분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입혀 주셨음을 기억합시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이 주님을 바라보고 감사하십시다. 세상에 시달리던 눈을 주님을 향해 고정시킵시다. 그 분 안에 안식을 찾고 평안을 찾는 삶이 되도록 모든 불 신앙을 제거하고 그분께 우리 자신을 맡깁시다.
lv143353 LEV. 14:33-53 언약교회, 박길현
집에 발한 문둥병
(레14:33-5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에 너희가 이른 때에 내가 너희 기업의 땅에서 어느 집에 문둥병 색점을 발하게 하거든 그 집주인은 제사장에게 와서 고하기를 무슨 색점이 집에 생겼다 할 것이요 제사장은 그 색점을 보러 가기 전에 그 가장 집물에 부정을 면케 하기 위하여 명하여 그 집을 비게 한 후에 들어가서 그 집을 볼지니 그 색점을 볼 때에 그 집 벽에 푸르거나 붉은 무늬의 색점이 있어 벽보다 우묵하면 제사장은 그 집 문으로 나와 그 집을 칠 일 동안 폐쇄하였다가 칠 일 만에 또 와서 살펴볼 것이요 그 색점이 벽에 퍼졌으면 그는 명하여 색점 있는 돌을 빼어 성 밖 부정한 곳에 버리게 하고 또 집안 사면을 긁게 하고 그 긁은 흙을 성 밖 부정한 곳에 쏟아 버리게 할 것이요 그들은 다른 돌로 그 돌을 대신하며 다른 흙으로 집에 바를지니라 돌을 빼며 집을 긁고 고쳐 바른 후에 색점이 집에 복발하거든 제사장은 또 와서 살펴볼 것이요 그 색점이 만일 집에 펴졌으면 악성 문둥병인즉 이는 부정하니 그는 그 집을 헐고 돌과 그 재목과 그 집의 모든 흙을 성 밖 부정한 곳으로 내어갈 것이며 그 집을 폐쇄한 날 동안에 들어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그 집에서 자는 자는 그 옷을 빨 것이요 그 집에서 먹는 자도 그옷을 빨 것이니라 그 집을 고쳐 바른 후에 제사장이 들어가 살펴 보아서 색점이 집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이는 색점이 나은 것이니 제사장은 그 집을 정하다 하고 그는 그 집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취하고 그 새 하나를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과 산새를 가져다가 잡은 새의 피와 흐르는 물을 찍어 그 집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 그는 새의 피와 흐르는 물과 산새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로 집을 정결케 하고 그 산새는 성 밖 들에 놓아 그 집을 위하여 속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결하리라
몇 일전 우리 집 벽에 생긴 곰팡이를 닦아 내고 락스로 뿌린 일이 있습니다. 벽지를 풀로 바르면 그 풀을 영양분으로 삼아서 벽에도 곰팡이가 번식한다는 말을 아이들로부터 들은 일이 있습니다만 실제로 닦아 내면서 곰팡이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겉면만 닦으면 될 줄로 알았는데 벽지의 겉면이 물걸레에 의해서 벗겨지니 그 속이 새까맣게 되어 있었습니다. 겉면에 나타났던 것은 사실 속에서 터져 나온 것에 불과했습니다. 옷장 뒤에는 얼마나 심하게 서식하고 있는지 온 벽을 새까맣게 만들었고 때로는 둥근 반점을 만들었는데 그 반점 부위를 아주 새까맣게 만들면서 번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닦아 내면서 "아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집에 생긴 문둥병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지난주에는 문둥이에게 제사장의 영광을 누리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했습니다만 오늘은 집의 벽에나 의복에 생기는 문둥병을 생각해 봅시다.
사실 집에나 옷에 생기는 문둥병이라고 성경이 말한 것은 "곰팡이"(mildew)라고 주석가들은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든 종류의 피부병은 문둥병으로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피부에 기생하는 곰팡이 균들이 문둥병균과 사촌쯤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는 전문가가 아니기에 잘 알 수 없습니다만 하여튼 그렇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곰팡이가 옷에나 벽에 생겼을 때 "옷에 생긴 문둥병", "벽에 생긴 문둥병"이라고 한 것이 잘못된 말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 같이 과학적인 분석이 없는 상태에서 그러한 류의 증상들을 통틀어 문둥병이라고 부른 것은 오히려 옛날 사람들의 관찰력이 놀랍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에게 발병하는 것이나 의복과 벽에 발병하는 것이 서로 상통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이러한 것이 의복류에 발병하면 그것을 불태웠습니다.(13:47-52) 집의 벽에 발병했을 때는 집주인이 제사장에게 가서 "내 집에 무슨 색점이 발병했으니 와서 보아주십시오."라고(35) 하게 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네 집에 있는 가재 도구를 일단 다 치우고 집을 비우라.'(36) 합니다. 그리고는 제사장이 가서 그 색점을 볼 때에 푸르거나 누르거나 붉은 무늬의 반점들이 생겨나고 벽보다 우묵하면 일단 7일 동안 집을 폐쇄시킵니다. 칠일 후에 다신 와서 살펴 볼 때에 반점들이 벽에 펴졌으면 색점있는 돌을 빼내고, 또 주변의 흙도 긁어내어서 이것들을 성밖 부정한 곳에(쓰레기장) 내다 버립니다. 대신 다른 돌고 채우고 다른 흙으로 바릅니다. 이렇게 고친 후에 그 병이 다시 생기면 그 집을 헐고 돌, 나무, 흙등 그 집에 사용된 모든 것을 성밖 쓰레기장에 내다 버립니다. 그런데 고친 후에 재발하지 않으면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로 만든 다발을 새의 핏물에 찍어 그 집에 일곱 번 뿌리고 깨끗하다고 제사장이 선언합니다. 그리고 산새 한 마리는 들에 놓아줍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성경을 좀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4절은 어느 때를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지 밝혀 주고 있습니다.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에 너희가 이를 때에 내가 너희 기업의 땅에서 어느 집에 문둥병 색점을 발하게 하거든"이라고 한 것을 보아 광야 여행을 마치고 정착생활을 하게 된 때를 위하여 주시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40-41은 돌로서 견고한 집을 짓고 성을 쌓고 사는 때임을 보여줍니다. 나그네 생활의 고생을 잊어버리고 정착하여 성을 쌓아 보호를 받고 돌집을 견고히 지어 안락하게 사는 때를 위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즉 잘먹고 잘사는 편한 때를 위해서 미리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미리 정착하여 평안을 누리는 때에 대하여 말씀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때의 위험이 크기 때문에 사전부터 주의시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착하여 집을 짓고 성을 쌓고 사는 때의 위험이란 어떤 것일까요? 돌집과 성이란 말이 보여 주는 것은 정착 생활의 안락함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위험임을 말해 줍니다. 돌집 짓고 큰 성을 쌓아 놓았는데 누가 쳐들어 올라고? 벽돌집, 큰집, 20층 고층 맨션에 어느 도적놈이 도적질하러 들어오겠는가? 방법용 전자 경보기 설치해 놓고 수위까지 두었는데 감히 누가 침입하겠는가?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놓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하는 사고 방식입니다. 바꿔 말하면 광야 시절과 어려운 때에 매어 달리던 하나님은 멀어져 버리고 현실의 안락함을 즐기게 되는 성과 집이 주는, 저택과 아파트가 주는 안락함에 젖어 들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살아 왔는 마음은 희미해지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안전과 안락함이 더 큰 것 같이 여겨집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은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귀걸이, 코걸이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성경 찬송은 나중에 찾는 것이 되고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이용물로서 사용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하실 지 모르겠지만 장담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의 안락함은 그 만큼 끄는 힘이 크고 매력적입니다. 인간은 그 매력에 약합니다. 그러므로 사전부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난하던 사람이 가난할 때는 하나님께 매달리다가 돈이 벌리고 부자가 되면 돈방석에 들어 눕는 것이 십중팔구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각종 비리들을 보십시오. 상당수가 기독교인들입니다. 신자들이라도 신앙의 여유가 아니라 부의 여유 배짱이 생깁니다. 배를 내밀고 재게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명이 그에게 역사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이 문둥병 곰팡이를 집의 벽에 생기게 하십니다. "내가 너희 기업의 땅에서 어느 집에 문둥병 색점을 발하게 하거든"(34) 여기서 문둥병 색점을 발생시키는 이가 누구인지를 주목하십시오. 저절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발생시키십니다.
하나님이 문둥병을 주십니다.
이것은 경고입니다. "돌집과 성이 너희에게 안전을 주는 줄 아는 착각에 빠져 있구나. 아니다 그것은 헐어질 수 있고 내버려질 수 있는 것이다. 본래 그것은 부패하는 것이고 썩어지고 영원하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 안주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의복도 집도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받아들이는 말씀이 아닙니다 고생 실컷 해보고 집도 절도 없이 살면서 천당이 있다고 확실히 믿는 사람이라야 "그래 맞아, 세상것 아무것도 아니지."라고 수긍하게 되는 진리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미리부터 말씀하시며 깨닫도록 하시려고 애쓰시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좋은 집에서, 호화 빌라에서 살고, 대 저택에서 산다 해도(집이면 그냥 집인 줄 알았는데 저택은 구조가 아주 큰집을 말한다는 것을 도배하는 분에게서 배웠다. 국어 사전에는 저택을 "왕후의 집, 구조가 큰집"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이런 것들이 천당을 주는 것이 아니고 행복을 주거나 힘을 주는 것이 아니야' 라고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저런 곳에서 한 번 살아 보았으면'이 아니라 생명 없는 것, 쓸려 갈 것이고 불타 버릴 것으로 여기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에게서 보호와 안정을 찾고 평강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입니다. 즉 나그네의 자손들입니다. 아브라함도 약속을 받았지만 땅 한 평도 소유하지 못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행 7:5에는 발붙일 만큼도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약속으로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저와 저의 자손에게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삭도 야곱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고(히 11:13)했습니다. 이러한 나그네의 후손이 이스라엘입니다 애굽에 들어가서는 종살이했었고 나와서는 광야를 지나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나그네로서 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착하면 나그네 생활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정착을 하고 돌집을 짓고 저택을 짓고 살아도 나그네임을 잊지 말고 아직도 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가야 할 곳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이요, 안식할 집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 하나님 안에서 안전을 누리고 쉼을 누려야 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착 후에 얼마 안 있어 이에 실패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안전을 누리고 쉼을 누리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 세상과 타협하고 안주했습니다. 사사 시대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사들을 보내어 구원해 주었지만 곧 다시 불신으로 되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세우시고 다윗왕을 세워서 자기가 이스라엘의 보호자요 자기 안에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실패하였습니다. 열왕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기보다는 타락하여 세상과 똑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치, 권력, 돈, 색, 이름을 위한 우상 섬김으로 자기의 안전을 찾았고 이것들로써 행복을 찾으려 했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이러한 후에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 땅에 대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써 오셨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안전과 편안함을 거부하셨기 때문에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셔서 영원한 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패함이 없는 영원한 집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요, 예수님이 보내시는 성령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리들은 예수님을 우리의 집으로 생각하고 그 말씀을 영원한 생명으로 생각합시다. 이것을 요한복음 14장에는 "내 아버지 집", "거할 곳", "처소"라고 했습니다. 또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로 도금하듯이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이 세상에서 부패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집, 즉 이 세상의 삶을 유지시켜 주는 모든 것 -집, 옷, 직장, 돈, 가족, 밍크코트, 다이아 반지, 보석 목걸이 등등-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보호자와 안식처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은 다 썩어질 것들입니다. 참된 우리의 보호자요 안식처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것들을 신뢰하지 말고 안주하지 맙시다. 사랑하지 맙시다. 썩어질 것임을 바로 봅시다. 예수님만을 영원한 보호자로 삼고 안식처로 삼읍시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이 하늘에 있는 집이 되셨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11:16에서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천당이 되십니다.
lv150133 LEV. 15:1-33 언약교회, 박길현
유출병 인간과 하나님의 처소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2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을 인하여 부정한 자라 3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함이 이러하니 곧 몸에서 흘러 나오든지 그것이 엉겼든지 부정한즉 4유출병 있는 자의 눕는 상은 다 부정하고 그의 앉았던 자리도 다 부정하니 5그 침상에 접촉하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6유출병 있는 자의 앉았던 자리에 앉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7유출병 있는 자의 몸에 접촉하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8유출병 있는 자가 정한 자에게 침을 뱉으면 정한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9유출병 있는 자의 탔던 안장은 다 부정하며 10그 몸 아래 닿았던 것에 접촉한 자는 다 저녁까지 부정하며 그런것을 옮기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11유출병 있는 자가 물로 손을 씻지 아니하고 아무든지 만지면 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12유출병 있는 자의 만진 질그릇은 깨뜨리고 목기는 다 물로 씻을지니라 13유출병 있는 자는 그 유출이 깨끗하여지거든 그 몸이 정결하기 위하여 칠일을 계산하여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을 것이요 그리하면 정하리니 14제 팔일에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자기를 위하여 취하고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15제사장은 그 하나는 속죄제로, 하나는 번제로 드려 그의 유출병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할지니라 16설정한 자는 전신을 물로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17무릇 정수가 묻은 옷이나 가죽은 물에 빨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18남녀가 동침하여 설정하였거든 둘 다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19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 유출이 피면 칠일 동안 불결하니 무릇 그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20그 불결할 동안에 그의 누웠던 자리는 다 부정하며 그의 앉았던 자리도 다 부정한즉 21그 침상을 만지는 자는 다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22그 좌석을 만지는 자도 다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23그의 침상과 무릇 그 좌석에 있는 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24누구든지 이 여인과 동침하여 그 불결에 전염되면 칠일 동안 부정할 것이라 그의 눕는 상은 무릇 부정하니라 25여인의 피의 유출이 그 불결기 외에 있어서 여러 날이 간다든지 그 유출이 불결기를 지나든지 하면 그 부정을 유출하는 날 동안은 무릇 그 불결한 때와 같이 부정한즉 26무릇 그 유출이 있는 날 동안에 그의 눕는 침상은 그에게 불결한 때의 침상과 같고 무릇 그의 앉는 자리도 부정함이 불결의 부정과 같으니 27이런 것을 만지는 자는 무릇 부정한즉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28그의 유출이 그치면 칠일을 센 후에야 정하리니 29그는 제 팔일에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자기를 위하여 취하여 회막문 앞 제사장에게로 가져 올 것이요 30제사장은 그 하나는 속죄제로, 하나는 번제로 드려 유출로 부정한 여인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할지니라 31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로 그 가운데 있는 내 장막을 더럽히고 그 부정한 중에서 죽음을 면케 할지니라 32이 규례는 유출병이 있는 자와 설정함으로 부정을 입은 자와 33불결을 앓는 여인과 유출병이 있는 남녀와 불결한 여인과 동침한 자에게 관한 것이니라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을 우리의 집으로 삼고 살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현재 우리가 이 세상 좋은 집에서 안전하게 살지만 이것들이 우리에게 안전을 주고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보호자요 산성이요 안전을 주는 분임을 알고 세상 안전 기대치 말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살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집 없어 어쩔까? 가 아니라 예수 멀리해 어쩔까?, 예수 없어 어쩔까?, 무시해서 어찌할꼬? 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어제 지난주의 저의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 아멘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진리를 깨닫고 믿게 하신 것을 감사드렸고 설교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을 감사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란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주와는 거꾸로 된 경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난주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집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란 것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31절을 봅시다. "그들로 그 가운데 있는 내 장막을 더럽히고 그 부정한 중에서 죽음을 면케 할지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 중에서 "그 가운데"란 말씀을 "그들 가운데"라는 말로 살짝 바꾸어 놓으면 하나님의 장막이 있는 곳이 땅이나 어떤 장소가 아니라 사람을 가리키는 것임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장막을 치고 계신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장막이란 말은 "처소 혹은 거처"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광야 시대의 장막(tabernacle)을 가리키고 사사 시대는 성소(sanctuary)를 가리키며, 왕정 시대는 성전(temple)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집;초가집, 스레트집, 기와집, 아파트) 가장 기초적인 뜻을 가진 "거처 혹은 처소"라고 할 때 장막도 성소도 성전도 다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사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들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들에 계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장막으로(또는 성소, 성전) 삼고 계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하고 묻는다면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곧 "하나님의 집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그러면 박목사 이상하다 천국이 없다는 말인가? 라고 하시겠지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교회가 천국입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면 인간은 으레히 '하나님의 집은 거룩해야 해, 깨끗하게 해야 해, 기쁘시게 해 드려야지, 대접해 드려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해 드리려고 애씁니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 상태를 종교성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종교성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종교를 부정하는 사람들까지도 부정하는 그 행위를 통해 종교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뒷산에 가끔 가면 산에 물 뜨러 오는 사람들이 산을 향해 또는 절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을 봅니다. 모든 것이 공(空)이요 무(無)라고 하는 스님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살아갑니다. 이것이 모두 종교심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장삼을 입고 염불을 하고, 정신을 모으는 행위 자체가 종교심의 발로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까지도 이러한 종교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무엇인가 해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얘들이 지금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구나. 무엇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구나.'라고 하시면서 보여주시는 것이 유출병입니다. 유출병이란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통틀어서 유출병이라고 합니다. 유출되는 것이 피일 수도 있고 다른 몸의 액체일 수도 있습니다. 정상적인 생리 현상이든지 비정상적인 병적 현상이든지 간에(1-12, 25-30은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유출된 것을 가지고 무엇인가 가르치십니다. 그 가르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인간은 더럽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보통 자기를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밖으로 나온 똥은 더럽다고 야단하면서 그것이 자기 창자 속에, 배속에 들어 있던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이성적 존재', '생각하는 갈대', '지혜로운 존재' 등등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치장을 해댑니다. 똥 먹는 개가 웃을 노릇이요, 돼지가 웃을 노릇입니다. 이러니 하나님께서 "야들아! 네 꼬라지나 좀 봐라. 내놓는 것마다 더럽고 부정한 것뿐이다. 그래가지고 너희가 내 처소 하겠다고? 더럽다 더러워. 설쳐대지 말고 나서지 말라 그래가지고는 내가 집을 삼을 수 없구나. 속속들이 썩은 더러움에 내가 있을 수가 없구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와 같이 더러운 것입니다.
얼마나 더러운지 봅시다. 유출 병자가 눕는 상도 부정하고, 앉았던 자리도 부정하고(4), 침상에 접촉하는 자도 부정하게 되므로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어야 하고(5), 병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는 자는 옷을 빨고 몸을 씻어야 하고 종일 부정하게 되고(6), 유출 병자에게 접촉하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고(8), 안장도(9), 그의 몸에 닿았던 것에 접촉해도 부정해진다(10).고 했습니다. 남자들 여자들 속속들이 부정하고 썩었기 때문에 근방에 얼씬거리기만 해도 부정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깨끗한 것 같고 똑똑한 것 같아도 쏟아 놓는 것은 다 더러움이요, 죄입니다. 그 속이 철저히 썩어 있고 죄성으로 차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여기서 나는 안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거든 손들어 보십시오. 지난주 기혼자 공부팀은 공부하는 중 한가지 공통된 결론에 도달한 것이 있습니다. 신랑, 각시가 싸우고 야단을 해도 하나님 앞에 곰곰이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면 원인은 내 죄 때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싸움이 생긴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 비극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이 기독 신자입니다.
기독 신자와 비기독 신자가 다른 점은 기독 신자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문제의 근원이 자기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요, 비신자는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문제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안 믿는 사람 중에는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은 있어도 인간 본성이 철저히 부패해서 쏟아 내는 것이 죄라는 것을 그래서 도무지 구원할 힘도 구제될 힘도 없는 것이 인간이요 자기 또한 그러한 운명의 인간이란 것을 인정하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만일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살수가 없습니다. 자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차마 자결할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이기에 이런 저런 가치를 인간에게, 자신에게 붙여서 "사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어"라는 식의 치장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줄 알면서도 속지 않는 체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북한의 김정일이가 술에 취해서 자기 앞에 춤추며 "위대한 김정일 지도자 동무"라고 아양부리는 여자들을 보고 "다 가짜야 다 거짓말이야"라고 하면서도 그냥 살고 있듯이 말입니다. 불신자들은 이렇게 자기를 속이면서 살고 있지만 신자는 자기가 구제 불능의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삽니다.
이와 같이 썩고 더러운 인간의 죄성을 남성의 유출과 여인의 하혈 등을 교과서로 이스라엘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하필이면 남성의 유출과 여성의 하혈 등을 가지고 가르쳤습니까? 고 묻는다면 이것들은 인간 욕망의 가장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사용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인간은 가장 기초적이고 근원, 근본이 되는 욕망부터가(부부 생활이 이 세상 생의 근본) 죄스런 것으로 뭉쳐졌기 때문에 나머지 하는 것은 안 보아도 뻔하다는 것이지요. 선한 일 한다고 까불어도 죄를 쏟아 내는 것이 뻔하다는 말입니다. 자선을 베풀고, 구제를 한다고 해도 근본 자기 위해 합니다. 안하면 의미가 없고 무가치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해야 자기 마음이 시원하게 되기 때문에 합니다. 인간은 자기 위해 살지 남을 위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 한계를 넘어 설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해라."고 말합니다. 그 배후에는 나는 못했으니 너라도 성공해서 한을 풀어 달라는 뜻입니다. -반대의 경우 ; '오렌지족' -맺힌 게 없으면 방탕해진다.- 이것이 자기를 못 벗어나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 욕망이 얼마나 나쁜 영향을 줍니까? 자녀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웃음을 빼앗아 갑니다. 이기적인 인간, 자기 외에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을 만듭니다. 심지어 자기 부모 형제까지도 적으로 생각하는 인간 적자생존의 인간 진화론을 믿는 인간으로 만듭니다. 은혜와 사랑과 헌신의 인간과는 반대의 사람, 비 신앙의 사람이 되도록 몰고 갑니다. 이것이 모두 인간의 죄성 때문에, 자기 속에 있는 죄성 때문임을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 속에 죄성이 가득차 있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 가장 가까운 가족 하나도 옳게 이끌지 못하는 인간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거처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고 지옥 가야 마땅한 인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사실을 깨닫고 "맞다 나는 죄인이다. 깨끗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쳐가 될 수 없는 죄인이다."라고 하면서 생수에 빨고 씻으면서 7일을 기다립니다. 새로운 날인 여덟째 날을 기다립니다. 이날은 불결에서 정결하게 되는 날이요, 죄에서 사함이 이루어지는 날이요, 죽음에서 생명이, 추방에서 받아들여짐이 이루어지는 날이며 창조의 깨어짐에서 재창조가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7일간 씻으면서 이 날을 기다립니다. 여덟째 날에 무엇이 이루어집니까? 속죄가 이루어집니다. 보잘것없는 비둘기 두 마리가 속죄 제물이 되고 번제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속죄가 이루어지고 그제야 하나님의 처소될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 속죄한다는 말의 기본적인 뜻은 유출병 들었던 그 사람 위에 덮는다는 뜻입니다. 보자기로 덮어 씌워 버리듯이 말입니다. 신약에서는 이것을 "도말 한다."는 말로도 표현했습니다.(골 2:14) 페인트칠해 보이지 않게 하듯이 덧칠 해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속죄의 기본적인 뜻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있습니까? 7일간 씻었던 생수의 실체인 피, 진짜 생수인 피를 덮어쓰고 목욕을 한자, 온몸에 피가 발린 자만이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있습니다. 더럽고 속속들이 썩은 인간 이스라엘이지만 그 위에 피만 발리면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이 피가 누구의 피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발린 자가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되는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정성도, 돈도, 적선도, 기도도 그 어떤 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 믿고, 그의 죽으심을 믿는 것만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와 함께 죽었음을 아십시오. 피아래 있음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피아래 있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으로 두지 마십시오. 다른 욕심 내지 마십시오. 인간에게 나오는 더럽고 추한 것(출세, 1등, 부자됨)에 연연하지 말고 피아래 있어서 하나님의 집이 되는데 만족하고 집중하십시오. 좁은 길을,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이것만이 하나님이 함께 사는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lv162934 LEV. 16:29-34 언약교회, 박길현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레16:29-34)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 월 곧 그 달 십 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그 기름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아비를 대신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는 제사장은 속죄하되 세마포 옷 곧 성의를 입고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며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제사장들과 백성의 회중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이는 너희의 영원히 지킬 규례라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하여 일년 일차 속죄할 것이니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오늘 말씀은 우리들로 하여금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만 믿고 나면 마음도 몸도 깨끗해 졌고 따라서 내 자신이 행하는 신앙 행위가 거룩한 것이라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 찬양, 기도, 헌금, 봉사 등등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받으십시오. 기뻐하십시오."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사고 방식에 본문 말씀은 쐐기를 박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유출병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속에서 쏟아 놓는 것마다 더럽고 불결한 것인데 이러한 인간이 피로써 정결해지므로 하나님의 처소가 된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은 인간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었으면 그렇게 된 것이 피 때문인 줄 알아야지 자기 자신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 줄로 착각하거나 이제 나는 깨끗한 사람이야 라면서 교만해지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세상에는 거룩한 것이 없습니다. 거룩한 사람도, 거룩한 물건도, 거룩한 장소도 없습니다. 아론 자신이 비록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성소 안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만약 아론이 세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 있다면 법궤 속죄소 앞에 들어간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 시간에 그것도 1년에 단 한차례에 하나님이 입혀 주시는 거룩한 차림을 하고 자신을 위하여 수송아지로 속죄 제사를 드린 후에야 들어 갈 수 있습니다.(11-14) 이것은 아론 자신은 비록 제사장이지만 자신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믿는 자가 되었다고 죄인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성과 타락성은 그대로 있습니다.
또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택되어 하나님의 구름 기둥으로 인도를 받고(2) 있지만 백성 역시 죄 가운데 있습니다. 이 백성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성물까지도 다 오염을 시킵니다. 그러므로 수양의 피로써 뿌려 그것들을 깨끗케 해야 합니다. 15-16에는 속죄소가 있는 지성소도 피를 뿌려 속죄해야 하고 -'이스라엘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라고 했으며- 18-19절에는 단도 속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의 부정 가운데 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죄악 때문에 단이 더러워 졌고 지성소도, 회막도 더러워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거룩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소위 믿는다는 사람도, 휘황찬란한 교회당도, 예배도 ,찬양도, 구제도, 헌금도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거룩한 것이 단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양의 피입니다. 피가 발려질 때에 사람도 물건도 거룩하게 됩니다. 예수의 피만이 거룩한 것이요, 그 피아래 있을 때에 그 아래 있는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지는 생활을 하지 않고도 거룩이 유지되고 계속 거룩한 사람, 천당의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에서 유일의 거룩한 피가 어떤 성질을 가졌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오늘 본문에는 레위기 외에는 구약에서 나오지 않는 속죄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즉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두 마리의 수염소가 사용됩니다. 제비 뽑아서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쳐지고 또 한 마리는 아사셀에게 바쳐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제비 뽑는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아사셀을 위해 제비뽑는 다는 말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사셀"이란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들이 구구하고 많습니다만 저는 여기서 말하는 "아사셀"을 근대 어떤 학자와 마찬가지로 광야에 산다는 귀신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9절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라고 해 놓고 10절에서는 또 한 마리의 염소는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았다고 했으니 9절에서 염소를 희생으로 받은 분이 인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면 10절에서도 염소를 받는 이가 인격자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아사셀'을 '보내기 위해 준비된 염소'라는 뜻을 해석합니다만 그렇다면 10절 끝의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는 말이나 21절 끝의 '광야로 보낼지니.'라는 말과 맞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사셀'이란 말을 인격으로 보아 광야에 산다는 귀신의 이름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한 듯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귀신들이 산다고 생각한 흔적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신 32:17)
위와 같이 생각하고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지고 두 마리의 수염소가 희생이 되는데 한 마리는 하나님 앞에서 죽고 다른 한 마리는 광야 귀신 앞에 죽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희생자인 하나의 양이 하나님 앞에서는 피흘려 죽음으로 이스라엘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고 귀신에게로 가서 죄를 진 것 때문에 귀신의 밥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20-22) 물론 광야 무인지경에 놓인 염소는 짐승들에게 잡아먹히게 되겠지요마는 이렇게 짐승들에게 잡아먹히게 되는 것을 귀신에게 먹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사나운 짐승이 귀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희생의 염소가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죽고 광야로, 지옥으로 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1년에 한 번씩 이 행사를 가지므로 자신들이 얼마나 철저히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으며 또한 죄를 대신 지는 희생자가 지옥의 고통을 겪는가를 이해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본래 거룩이 없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대신 희생하는 피만이 거룩하며, 그 희생자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고 버림을 당했고 음부에, 지옥에 버려지는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대 속죄일을 정해 놓고 이런 행사를 가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날마다 피 아래서 속죄의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야 마땅한 인간들이지만 너무나 쉽게 자신들이 죄인이요 죄를 먹고 마시며 성물에도 신앙 행위에도 오염시키고 있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대 속죄일을 정해 놓고 속죄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쳤던 것입니다. 인간이란 이렇습니다. 자기의 본성을 잘 잊어버립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죄를 쉽게 깨닫습니까? 바늘에 살짝 찔려도 아프다고 야단이지만 마음이 죄를 향해 가고 있어도 그것이 죽는 길인줄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 마음이 아프다고 야단을 하면서도 주님이 이 죄 때문에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성소와 회막과 제단은 우리의 죄악으로 오염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예배 모임이 야유회 가는 것보다 즐겁습니까? 찬송 부르는 것이 백일섭씨의 '홍도야 울지마라' 같은 노래보다 더 의미가 있습니까?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친구와 커피 한잔 놓고 정담을 나누고 의논을 하고 친한 사람과 의논하는 것보다 의미가 더 없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성물들도 죄성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십중팔구 그렇겠죠?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별수 없을 것이니까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똑같은 인간입니다.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성경은 이런 인간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29절에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 31절에 "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고 했습니다. 영원히 지킬 규례라고 2번이나 강조했는데 무엇을 어떻게 지키라고 합니까?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일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이구 잘됐다. 만세, 얽매였던 굴레를 이제야 벗었다. 기뻐하고 기뻐하자."가 아니라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말은 '겸비해져라. 교만하지 말라.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입니다. 잘못될 가능성이 항상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교만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들뜨고 바람 탄 민들레 씨처럼 죄악의 바람, 세상 바람 탈까 조심하십시오. 그럴 가능성은 항상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성입니다. 이 죄성을 부정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지금까지 성경을 듣고 외우기도 하고 열심히 한다고 해도 자신 속에 죄성이 가득차 있다는 것을 실감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죄성으로 인해 고민해 보고 아파하고 울어 보고 혹은 병이 나 본적이 있습니까? 교만하지 마십시오. 자기의 위험성을 바로 보고 깨닫도록 주님을 믿거든 기도하십시오. 누구나 다 똑같은 인간이기에 누구나 자기에게서 자신의 죄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 자기를 꾸미려고 하지 마십시오. 안 그런 체 하지 마십시오. 믿음이 없거든 없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십시오. 꾸미려고 하는 것 때문에 병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피 흘려 죽으셔서 우리 죄를 드러 보이지 않게 해 주셨고, 또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음부에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을 생각하고는 자기 자신에 대해 좀 진지해지십시오. 무거워지십시오. 자기의 죄성에 따라 날리지 말고 좀 무거워지십시오. 그리고 죄성을 부인하십시오. 자기의 죄성을 부인하는 의미로서 행하는 것이 아니면 모든 것이 죄악일 뿐입니다. 공동체의 모임도 세상보다 천국을 사랑하는 것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면 그 뿌리가 죄악에 놓여 있고, 섬김과 봉사가 자기는 죽은 자요 주님의 은혜로 하는 것이 되지 않을 때는 그것 역시 인간의 죄성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한다는 모든 것이 '주님이 사는 것이요 주님이 하신다.'는 중심으로 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죄악일 뿐입니다.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만이 거룩할 뿐이며 십자가 정신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처소로 만들어 줍니다.)
인간이란 믿는다 해도 죽는 날까지 죄악의 뿌리는 그냥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보다는 "홍도야 . "가 먼저 나오고 기도보다는 한숨과 원망이 먼저 나오고 성경 보기보다는 T.V보고 만화보는 것이 재미가 있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거부하십시오. 성령에 복종시키십시오. 이것을 로마서 6:12 이하에서는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했으며 또 8:12-14에서는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지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레위기 16장에서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 자신의 본성을 바로 봅시다. 가벼워지거나 교만해지지 맙시다. 스스로 괴롭게 하여 육신을 죽이고 성령에 복종시키도록 합시다. 성령에 복종시키기가 싫고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요 불신자입니다. 저는 믿는다는 여러분에게 말씀 드립니다. 대속죄일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육신의 정과 욕심을 못박은 자임을 기억하고 죄성을 거부하십시오.
lv170116 LEV. 17:1-16 언약교회, 박길현
먼저 회막문으로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해하고 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받는 것, 믿고 따르는 것, 고백하는 것, 고백하고 자기를 맡기는 것 등등으로 대답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는 믿으면 되지 믿는 것을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느냐고 반론을 펴기도 합니다. 아무튼 다양한 대답을 만난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이 간단하게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실 믿음이란 간단한 것 같지만 너무나 넓고 방대한 부분에까지 미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만큼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믿음이 우리 인간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가를 일부분적으로 보여 준다고 하겠습니다. 동시에 잘못된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소나 양이나 염소를 잡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3) 그런데 잡는 곳이 "진 안"도 될 수 있고 "진 밖"도 될 수 있는 것을 보아 단순히 제사용으로 잡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용이라면 "회막문 여호와 앞"에서 잡아야 하는 것이 법인데(레 1:5,11, 3:2,8,13 4:4,15,24,29,33)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것은 먹기 위해서 잡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12절도 역시 생축을 먹는 경우를 말하고 있고 13절도 새나 짐승을 먹기 위하여 사냥한 경우를 말하고 있으며 14절은 먹을 수 있는 모든 짐승의 경우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아서 본 레위기 17장은 제사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짐승을 먹는 경우를 다루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먹기 위해 짐승을 진 안이나 밖에서 잡을 경우에 먼저 여호와께 그 짐승을 끌고 와서 잡아 제사장에게 주어서 피와 기름을 화목 제물로 여호와께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피는 여호와의 단에 뿌리고 기름은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여야 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스라엘에서 끊쳐 진다고 했습니다.(4-6)
이렇게 하도록 하시는 이유가 7절에 밝혀져 있습니다.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수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이는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라고 한 것을 보아서 전에 섬기던 우상 숭배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짐승을 잡아먹는다고 해서 반드시 우상 숭배로 돌아가게 되느냐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 전에 우상을 섬기며 짐승을 잡은 것이 어떠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 32:6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일찍이 일어나 그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놀더라'고 했고 17-19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껄이고 떠들며 노래하고 춤추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레위기 17장에서 짐승을 잡는 것은 우상 섬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고 춤추며 뛰놀기 위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짐승 잡아서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며 뛰놀기 시작하면 그로 인해 전에 섬기던 우상 숭배로 돌아 갈 위험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에 이것을 막으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상 숭배하던 버릇대로 돌아가면 그로 인해 우상 숭배를 끌어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깨 들깨는 노는데 아주깨(아주까리)는 못노냐?'라고 하면서 먹고, 춤추고, 짓기 시작하면 그 죄스런 육신의 재미에 빠져들게 되고 이것이 바로 육욕의 만족이라는 우상 숭배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옛 버릇대로 하지 말고 새롭게 하라고 하십니다. 믿는다면 짐승을 잡아먹어도 믿는 식으로 먹으라고 하십니다. 먼저 여호와 앞에 끌고 와서 피와 기름을 여호와 앞에 화목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 덕분에 잘먹고 잘 살게 되었느냐? 먹어도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고 놀아도 여호와 앞에 참여하며 놀아라'는 말씀입니다. 전의 행위는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계시니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줄 알고 그렇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너희 생명 위해 다른 생명이 죽었다. 그래서 너희 죄가 속해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대신 죽은 이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라도 피를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즉 너희 위해 대신 죽은 희생자를 기억하고 그 속죄의 피를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속죄의 피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그만큼 속죄를 감사히 여긴다는 말씀이요 속죄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13절에서는 " 먹을 만한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여 잡거든 그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지니라."고 했습니다. 피를 흙으로 덮는다는 말은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에스겔 24:6-9은 이와는 반대의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피를 쏟아서 말간 반석위에 두고 덮이지 않게 함은 분노를 발하여 보응하려 함이로다.'고 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피를 땅에 흘리고 흙으로 덮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피를 간과하시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타국인이 사냥한 짐승의 피를 땅에 흘리고 그 피를 흙으로 덮으면서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덮어 주셨구나 피가 있어도 대속의 죽음 때문에 없는 체 눈감아 주셨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 피를 흙으로 덮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짐승을 잡을 때마다 그 피를 가지고 대속을 생각하게 한 것은 그 만큼 인간이 악에 물들어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기를 잘하는 믿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후에 모세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우매 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신 32:5-6)고 탄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만하지 맙시다. 나는 자신 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먹고 마시며 노는 행위를 좀더 생각해 봅시다.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나쁘다는 말입니까? 그들의 정신 가장 깊은 곳에 대속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의식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 리 없습니다. 따라서 찬양할 수도 없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 따위는 물론 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없는 생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짐승 잡아먹고 즐거워하는 것은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오늘날 이 세상이 조장하고 추구하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미쳐 따라 가고 있습니다. TV show나 인기인들이 나오는 프로들을 보십시오. 그것들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빠져들고 있고 웃고 울고 야단합니다.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어떻게 인생을 즐겨 볼까? 하는 정신입니다. 인류 태초에나 지금이나 이것은 다름이 없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후손들에게서 우리는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수금과 퉁소를 만들어 불고 즐기는 인간들을 볼 수 있습니다만 그런 인간은 오늘날 어디에서나 봅니다. T.V나 신문 잡지나 인간이 사는 곳 어디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 만족을 위해, 인생을 즐기기 위해 몸부림입니다. 먹어도 이것을 위해서, 마셔도 이것을 위해서, 화투를 밤새워 치고 마약을 맞아도 이생의 만족을 위해서 입니다. '노새 노새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
이것이 전 인생의 노래가 아닙니까? 왜 이런 노래가 나옵니까?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소망이 없기 때문에 나옵니다. 절망 속에서 자기 만족을 찾고 허무를 좀 즐겁게 극복해 보고자 하는데서 나오는 절규들입니다. 이들은 인생을 이렇게 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허무와 멸망에서 벗어나 소망이 있으며 사는 것이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 준 것은 예수님의 희생입니다. 이 안에서 산다는 것은 '뛰고 굴리며 먹고 마시는' 스타일이 아니라 '감사하며, 찬송하며, 의지하며, 기도하는' 스타일입니다. "울어도 예수 앞에서, 웃어도 예수 앞에서'입니다. 자기 추구와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과 신뢰를 둡니다. 인생은 절망 내지 즐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속죄와 구원으로 보기 때문에 경건과 절제 속에서 경외감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지요. 옛날처럼 하고 싶은데 차마 믿는다는 것 때문에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춤을 추고 엉덩이를 흔들어 보십시오. 이전과는 달리 어색하고 부끄럽게 여겨진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안해도 마음이 차고 견딜 만하며 기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에서 야유회에 가게 되면 남자고 여자고 간에 차에서 뛰고 놀면서 신풀이 할 것을 잔뜩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놀아 주는데 응해 주지 않겠다 싶은 목사는 같이 가자 소리도 안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요즈음 신자들의 신앙이 감사와 자유와 사랑이 아니라 굴레요 억지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신앙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요 진짜 즐거움은 뛰고 굴리는데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위선입니다. 거짓된 신앙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이것보다 더 못한 상태에 있었겠지요? 그러니 그들은 옛 습관대로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숫염소 섬기듯이 난장판이 될 것이 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막으시고 구속받았으니 구속받은 식으로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고 새 사람되어 새롭게 살아간다는 사람이라도 옛 생활 그대로 자꾸 따라 한다면 옛 사람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성이 살아나서 새사람도 지배해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들어가는 대로 나옵니다. 많이 보고들은 것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신자의 것을 많이 보고 들으면 죄성이 살아납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을 사망의 몸이라고 했으며 육신이라고 했습니다.(롬 7:24-25)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옛 사람의 성품을 죽이고 성령에 순종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새롭게 되었다면 새롭게 된 삶을 추구하십시오. 예수의 대속을 기억하고 그 은혜의 피 아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은혜 아래 거하므로 죄가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성령은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능력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내 형편 되어 봐라는 핑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을 의지하고 그 능력을 덧입으십시오. 아멘
lv180130 LEV. 18:1-30 언약교회, 박길현
이방 풍속을 쫓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가장 철저히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임을 알고 계시며 그로 인해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 심연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는지를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인간 타락성이 보여주는 가장 깊은 욕망이 무엇임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욕망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적 욕망입니다. 이 욕망은 인간 모든 욕망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다른 모든 욕망들도 이것을 생각하듯이 주의하고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대표되는 성적인 문제를 가지고 말씀하신다는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요한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총 집합해서 오늘 본문에서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짐승을 잡아먹고 놀아도 예수의 피를 기억하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즉 구속을 받았다면 구속받은 자의 삶을 살기에 힘쓰라는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 자리에까지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시며 하나님의 백성이 조심하고 주의하도록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애굽땅의 풍속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땅의 풍속을 쫓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를 행하지 말고"라고 한 것을 보아 애굽땅의 풍속이 앞으로 들어가서 살게 될 가나안의 풍속임을 알 수 있습니다. 풍속은 애굽이나 가나안이나 꼭 같다는 말입니다. 이 풍속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애굽의 풍속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애굽의 풍속이 어떠합니까? 골육지친을 가까이 하여 범죄하는 풍습입니다.(6) 그 실상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자식이 어미를 범합니다.(7) 친어머니가 아닌 계모를 범합니다.(8) 이복 자매를 범합니다.(9) 손녀나 외손녀를 범합니다.(10) 이복 여형제(11), 고모(12), 이모(13), 숙모(14)를 범합니다. 시아비가 자부를(15), 형수나 제수를 범합니다.(16)
근친 관계 속에 있을 수 있는 모든 관계 속에서 인간의 정욕을 따라 범죄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인간이 얼마나 욕망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남자가 한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을 아울러 범하며 여인과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를 함께 취하기도 합니다.(17) 인간이 얼마나 탐욕적인가를 보여줍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무슨 일이든지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내가 살아 있는데 또 처제를 취하여 분란을 일으킵니다.(18) 인간의 정욕은 여인의 고통도 고려할 줄 모릅니다.(19) 나아가서는 남의 아내까지 범합니다. 이것을 통간 또는 간통이라고 부릅니다. 즉 결혼하여 각기 남편과 아내가 있는 사람이 남의 남자와 여자를 좋아하여 범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둘이 서로 눈이 맞아 범하는 죄이기 때문에 둘다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20)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했다고 했는데(21) 자녀를 불살랐다고 하기도 하고(렘 7:31) 불로 통과케 했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하여튼 이런 행위를 하면서 그 드리는 부모들이 남녀 창기들과 음란히 관계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게 볼 때 미신적인 정욕에 빠진 인간들이 정욕을 채우면서 갖은 거짓말에 홀려 자녀까지도 죽는데 내어 주고는 자기는 정욕을 추구하는 짐승보다 더 못한 짓거리들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이성 없는 짐승보다 훨씬 더 악해집니다. 그러니 요즈음도 남자든지 여자든지 바람이 나면 아이들이야 어떻게 되었든지 내몰라라하고 버리고 뛰쳐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모 행위들과 수간이 옛날부터 성행했습니다.(22-23) 지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가 망했던 죄악입니다. 영어로 남색 즉 남자 호모 섹스를 소도미라고 하는데 바로 소돔의 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죄로 치달아 가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고 끝이 없습니다. 죽어야 끝이 나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씨를 말려서라도 가나안 땅에서 멸절시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애굽이나 가나안 풍속을 쫓지 말고 나의 법도를 쫓으며 나의 규례를 지키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인간의 정욕이 무서운 것인가를 여러분은 오늘 본문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이 이렇게 타락할 수 있고 욕망에 사로잡힐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더러워지면 땅도 더러워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옵니다. 애굽이 이것 때문에 망했습니다.(27) 가나안도 이 때문에 심판을 받았습니다.(24-25) 이스라엘도 이렇게 되면 망하게 됩니다.(28)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쫓음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30) 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인간이 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을 부부간의 연합의 표현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 주실 때는 서로서로 사랑하고 돕는 배필로서 짝을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자기를 위해 있는 자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 있는 자들입니다. 상대방 속에 자기가 있지 자기 속에 자기가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둘은 연합할 수 있고 서로 깊이 헌신할 수 있으며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적인 연합이란 배필간의 연합을 즉 마음과 몸이 한데 뭉쳐지고 인격이 둘이면서도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연합을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은 이러한 인격적인 연합과 헌신이 전제되지 않는 자기 만족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성을 이와 같이 자기 만족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타락한 결과이며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에서 여자의 방종을 막기 위해 남편을 사모하며 남편의 다스림을 여자가 받도록(창 3:16) 하셨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애굽과 가나안은 성을 자기 만족의 도구로 생각하며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욕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거룩하게 헌신하고 배필에게 연합해야 할 인간이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인간, 배필을 떠나서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변해 버렸을 때 마침내 그 욕망이 인간 전체를 잡아 먹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욕망의 천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소돔도 애굽도 가나안도 그리고 지금의 이 세상도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옵니다. 소돔이 심판을 받았고 애굽이 심판을 받았고 가나안이 심판을 받았고 마침내는 온 세상의 심판이 임할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상이 이러한 것이 죄악이요 멸망의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것을 죄악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멸망의 길이라고 생각하기는 더구나 하지 않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모든 문제가 이러한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데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발산시키는 것이 인간이 살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정신병 의사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기독교인들이 정신병이 많은 이유는 죄를 가르치므로 욕망을 지나치게 억제하다가 보니 정신병이 생기니 신앙에 너무 심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생각하게 된 것은 물론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철학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이들은 인간을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불신 심리학자는 아들이 어머니를 사랑해 아버지를 질투하는 욕망의 덩어리로 인간을 보기까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어야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길을 모색합니다. 이러한 이론을 따라서 유흥업소가 번창하고 술집과 사창가가 필요하다고 해서 번창합니다. 낯뜨거운 영화들과 비디오들이 이러한 구실 하에 필요성을 인정받아 번성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자들이나 지도층들이나 국민들이 한결같이 이렇게 생각하는데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말로 필요악이지만 없다면 이 세상이 더 엉망이 될 것이므로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는 욕망 하는 인간 자체가 죄악의 덩어리며 따라서 그것을 부정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밖에 있습니다. 자기의 정당한 문제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환경과 사회와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고 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는 정당한데 주위 환경이 나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탓하고 남을 원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현세계가 생각하고 있는 인간 철학입니다. 여러분은 얼마 전에 여의도 광장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차를 몰고 돌진한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향해 돌진하는 심리는 이 사회 전체에 대한 원망의 표현입니다. 자기는 문제가 없고 사회가 자기를 못살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특정 다수를 향해 복수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릇된 인간관이 보여주는 열매입니다.
이러한 열매는 다른 방향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린이의 성폭력 현상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고 더구나 점잖은 사람들이 가까이 아는 사람들 그 중에는 김보현양 사건과 같은 의붓아버지에 의해 일어나는 경우 외에도 근친 성폭력 사건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이러한 것들에 대한 원인을 인간 자기 속의 죄성에서 찾지 아니하고 복잡한 사회 생활에서 일어나는 스트레스 같은 데서 찾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기 모순적인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인간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 자신 속에 있으며 따라서 그 모든 책임도 자기에게 있음을 가르칩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자신의 욕망을 자기가 죽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더구나 그렇습니다. 배우자와의 인격의 연합과 헌신의 정신에 입각하지 않는 욕망은 말할 것도 없이 방종이요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단호히 죄라고 해야 하고 그것을 부정하고 시초부터 끊어 버려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애굽땅의 풍속을 쫓지 말며"(3)라는 말씀은 오늘도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한 욕망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발산"의 대상이 아닙니다. 통제와 절제의 대상입니다.
성도는 이것을 깨닫고 따르는 자가 성도입니다. 이것이 죄인 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것을 좋아 할 수 없습니다. 그 밑에는 마귀의 마수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이런 것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련을 두고 있고 사랑하고 있고 마음으로 원하고 있으며 그러한 욕망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끊어 버리지 못합니다. 여전히 연연해 하다가 다시 빠져들어 갑니다. 마약 환자가 황홀경에 대한 매력을 버리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 가듯이 서서히 죄악 속을 빠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도라고 하면 타락한 욕망이 죄악인줄 알고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미워하고 싫어하십시오. 이런 것들은 아무리 내버려도 손해 볼 것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할 것은 이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주님의 법도를 쫓으며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고 한 것과 같이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이 계명을 마음에 두고 이 계명의 인도를 따라 가십시오. 율법에서 자유했다고 해서 율법을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의 가르침을 마음에 두고 채워서 즐거움으로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거룩이 유지가 되고 육신의 욕망이 달아나게 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성경보고 찬송하고 소위 은혜의 방편이라는 수단들을 잘 이용하십시오 성령님은 이런 것들을 이용하셔서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 따르겠다는 여러분의 믿는 마음이 곧 성령이 주신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고 하늘 나라를 다시금 소망하십시오. 이것이 희미해지면 세상에 빠지게 되지만 이것이 분명해 지면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은혜의 방편이자 우리에게도 은혜의 방편이지만 율법의 완성인 부활의 예수님보다 더 큰 은혜의 방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를 생각하고 세상을 이기십시오. 예수님은 지금도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lv180105 LEV. 18:1-5 언약교회, 박길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18장에서 육신의 정욕은 얼마나 인간성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그로 인해 항상 범죄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임을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애굽과 가나안 즉 세상은 그것을 자극하고 진작시킨다는 것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진작, 자극의 대상이 아니라 통제, 절제의 대상임을 그리고 성령을 쫓을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혹자는 "나는 안 그런데, 그렇게나 인간이 될 수도 있는 모양이지?" 또는 "사람 중에는 그럴 수도 있는 모양이야, 나는 그렇지 아니하니 기분이 좋다. 제법 괜찮은 대단한 사람이야"라고 말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속으로 비슷한 생각은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성경을 잘못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성경은 개인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나은 사람도 있고 못한 사람도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니는 좀 큰 잘못을 범했으니 나쁘고 나는 적은 잘못을 했으니 그래도 좀 낫다'는 식으로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정욕적이라면 모든 사람이 다 정욕적이라고 말합니다. 단지 경우가 다를 뿐이지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한 사람은 먹는데 욕심이 많습니다. 입는데 자는데 보고 즐기는데는 별로 생각이 없는데 먹는데 만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노는데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하고 화투치고 밤샘을 하고 술을 먹으면 1,2,3차 가면서 그것이 재미가 있어서 집에 들어오는 것을 잊을 정도입니다. 한 사람은 돈이면 쩔쩔 맵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많이 가졌는데 점포에서 나오는 세만 받고 써도 다 못쓰고 살판인데 그래도 쇠고기 한 근 사는 것이 아까워 '2천원치 주이소'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당뇨가 걸려 먹고 싶어도 못 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참 불쌍한 사람이구나'하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 속에 있는 죄악의 뿌리가 사람에 따라서 나타나는 경우가 다를 뿐 모든 사람이 똑같은 죄악의 뿌리인 육신의 정욕을 가지고 있더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혹은 자식에게 혹은 가족에게, 공부에, 일하는데, 출세에, 명예와 영웅심에, 자기 보호에 나타납니다. 궁극적으로 자기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인간은 똑같은 인간들이요 낫고 못하고가 없고 죄인과 죄인 아닌 사람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는 성경 많이 읽는데 너는 왜 적게 읽었노?' 하면서 잘잘못을 비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는 여건에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많이 읽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무래도 힘듭니다. 목사는 목사, 소아버지는 소아버지, 목수는 목수이기에 서로 비교를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이런 것 가지고 잘 하고 못하고를 따질려는 것이 인간이지만 이것은 따지고 보면 인간의 육신의 정욕입니다.
사람이 우열을 가리고 장단을 가리려고 하는 것 자체가 타락 후의 죄성에 뿌리하고 있습니다. 타락 이전에는 이런 것이 인간에게 없었습니다. 인간은 이런 것을 알지도 못했고 별세계의 것이었습니다. 창 2: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고 했고 16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먹지만 않으면 죽는 것이나 좋고 나쁜 것의 분별에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 나무 실과로 생명만 넘치도록 하고 더 풍성히 될 것입니다. 생명 나무는 생명의 풍성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사랑하며 누리도록 하기 위해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사랑하며 살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천당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이 때는 선악은 인간밖에 있었고 접촉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나니 인간들 바깥에 있던 죄악의 뿌리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인해 분별해야 하는 입장, 타락 상태를 알게 된다는 것은 죄의 근원이 자기 속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 인간 속에 거주하게 되었고, 생명 나무는 폐쇄되어 버린 것입니다. 즉 멀어져 버렸습니다. 폐쇄는 생명과 관계가 끊어졌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창3:22). 대신 다른 세계, 죄악의 세계에 처하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우열 장단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식을 가지는 자체가 모두가 똑같은 죄아래 있다는 것이요, 죄의 욕망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첫 창조 때의 생명 나무는 폐쇄되었지만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생명 대신 이스라엘에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4-5에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켜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애굽과 가나안의 풍습 즉 선악과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신경 쓰고 보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이니까!" 유혹을 받습니다. 선악과 죄악의 뿌리는 누구에게나 있고 자기의 내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경 쓰지 말고 생명 과일 따 먹는데 만 신경을 씁시다. 즉 주신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데 신경을 씁시다. 그리하면 생명이 자꾸 풍성해집니다. 주님을 생각하고 그 분이 이루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부활과 새 세계를 생각합시다. 이를 위해 성경도 보고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합시다. 할수록 생명이 풍성해집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 나무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은 완전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습니다. 행함의 의가 아닌 믿음의 의입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율법이고 최고의 행함입니다.(롬 10:5 이하) 예수 안에서 우리는 예수의 것을 덧입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우리가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데 힘쓰는 것은 예수 안에서 그 풍성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오해가 생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만으로 풍성한데 풍성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약간 이해를 바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행한다는 것은 예수의 생명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산사람이 숨쉬듯이 예수 생명 얻은 자가 예수의 정신을 따르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그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를 사랑합니다. 예수를 생명처럼 압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삶을 행하려고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이 행하기를 소원하는 것이 당연한 모습입니다. 바울도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17-19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 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이런 소원을 가진 것처럼 저도 여러분이 이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율법과 법도를 행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풍성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lv190118 LEV. 19:1-18 언약교회, 박길현
너희는 거룩하라.
(레19:1-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헛것을 위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열납되도록 드리고 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제 삼 일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제 삼 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가증한 것이 되어 열납되지 못하고 그것을 먹는 자는 여호와의 성물 더럽힘을 인하여 죄를 당하리니 그가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 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신앙이란 교회 안과 밖이 구분이 없습니다. 사회, 학교, 공장, 목장, 시장 등 모두가 신앙 생활의 터전입니다. 이것은 삶 전체가 신앙적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 분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사는 삶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신앙은 억지가 아닙니다. 사랑이요 자원해서 하는 것이 신앙임을 오늘 읽은 성경은 보여줍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라는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되는 인간이 범죄 하므로 애쓰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으로 변해 버렸음을 에덴의 상태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지켜 행하려고 하는 사람으로 인간을 대표해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 분을 믿음으로, 지켜야 사는 부담은 없어졌지만 그분이 지켜 놓은 것을 그의 백성이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고 이루어 놓았으니 에라 이제는 마음대로 하자가 아니라 오히려 이루어 놓은 그것을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자원해서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도 같은 맥락으로 말씀을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늘은 자원해서 신앙으로 사는 삶이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전체 생활이 그렇게 되어야 함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은 "나 여호와는 너희 하나님이라."(7회) 또는 "나는 여호와라."(8)는 말씀이 도합 15회나 나오는데 이것은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는 너희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역으로 말하면 '너희는 이제 나의 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이 마당에서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약속 한대로 이루어졌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말씀은 너희들은 이제 하나님 여호와를 본받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너희는 거룩 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2) 고 한 대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다르기 때문에 구별될 수밖에 없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과 다릅니다. 따라서 타락한 애굽과 다르며 가나안과 그들의 신들과 다른 분입니다. 애굽 사람은 애굽 신을 닮고 가나안 사람은 가나안 신들을 닮지만 이스라엘은 이제 여호와를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애굽과 다른 것같이 이스라엘은 애굽과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과는 다른 생활 즉 여호와 닮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친 것이 율법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 율법을 생활로 구체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본문에서 찾아보면 1,2 계명은 4절에 나와 있고, 3계명은 12절에, 4,5계명은 3절과 30절에, 6계명은 16절에서 18절에, 7계명은 29절에, 8,9계명은 11절에서 16절에, 10계명은 16절에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계명이 생활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계명이 하나님의 모습인데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 하나님의 모습이 생활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생활에서 나타나야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좀 자세히 살펴보면 1,2계명과 4,5계명이 3절과 4절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5계명이 먼저 나오고 4계명과 1,2계명이 따라 나옵니다. 이것은 생활에서 부모가 하나님을 가르쳐 주고 그 계명을 전수해 주는데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대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 경외하는 듯이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3계명은 도적질과 거짓말에 대한 가르침이 이어 나오는데(11-12) 사람이 도적질하다가 속이고 거짓말도 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다가도 하나님 앞에서까지 거짓말하는 자 되지 말라는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즉 사람은 속이는 일이었다가도 하나님 앞에서는 회개하고 새 사람 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도적질과 거짓말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약해져 인간간에는 그런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최후 보루로 삼고 부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 앞에서 돌이켜 새 사람 될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돌아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없는 사람은 불신자임으로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의식하는 자는 믿음이 씨앗처럼 있다고 할 수 있다.)
6계명과 10계명이 어우러져 있는데 16절에서 18절을 주의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살인하고 거짓 증거하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마음의 문제까지 나아가십니다. 미워하지 말고 이웃이 잘못이 있거든 선한 마음으로 책망하여 고치며 원수를 갚지 말고 동포를 원망하지 말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니 나는 살인하지 않았네라고 할 것이 아니라 6계명의 정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9절 이하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9절과 10절을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십니까? 하나님의 자비를 본받아 이스라엘도 자비를 생활 틈틈이에서 보이는 자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문자적으로만 지키려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그 정신을 이해하고 문자가 말하고 있는 이상을 행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를 말했으면 둘, 셋, 열까지라도 어쨌든지 행하려고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10리를 가고 겉옷을 원하는데 속옷까지도 줄 수 있는 정신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지못해 억지로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억지로 해야 한다면 참으로 피곤하고 고달파서 할 수가 없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게 되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변화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십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헌신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그가 사는 전 생활에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학교나 공장이나 일터나 가정과 시장에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노력해서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변했기 때문에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언약 교회 몇 안되는 사람들아, 너희가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가?"라고 물으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변화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일을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른 아무것 없지만 단 하나 자기 백성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율법으로 나타내셨지만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비입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두지 말며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가 바로 이런 분이니 약한 이웃을 압제하지 말고 못 본다고 장애물을 파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째서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애굽에 있을 때 즉 믿지 않을 때 자기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자기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은 불쌍히 여겨 그러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보통 선행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이스라엘이 이렇게 하는 것은 요즈음 말로서 전도 차원에서 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받은 구원의 모습을 전해 주는 차원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우리가 받은 구원을 전하는 의미에서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몸같이 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하는 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닮아 온몸으로 사랑하며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이 정신으로 사는 사람, 이런 사랑을 향해 노력하는 사람, 발버둥 하지 않을래야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을 닮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애굽의 신, 가나안의 신은 자기 욕심을 채우는 신입니다. 이들을 닮은 사람은 자기를 채우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희생하려고 하며 버리려고 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간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자기에게서 확인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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