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레위기 목차
1-3장
4-6장
6-7장
8-9장
10장
11장
12장
13-14장
15장
16장
17장
18-20장
21-22장
23-24장
25장
26장
27장
레위기 1-3장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자체적인 힘이나 또는 의로움 때문이 아니었다. 순전히 아브라함 언약 때문이었다. 아브라함 언약 때문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편에 조건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편에 조건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가나안 땅에 대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에 가기까지의 모든 주도권도 애굽에서 건져내신 분에게 있다.
아브라함 언약으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건짐받은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의 취지를 그대로 실행하는 나라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신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살아가야 한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됨에 대한 의미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드러내게 될 때에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광야를 걷는 동안 원망과 반역의 연속이었다. 급기야는 애굽에서 자기들을 탈출시켰을 뿐만 아니라 광야 길을 인도하는 주도권을 금송아지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출애굽기에서 반역의 가장 결정적인 사건으로 금송아지 사건을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금송아지 사건이 이스라엘의 반역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지상에서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귀하거나 소멸시키기 아까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계속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해서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중보자에 대한 의미를 확고히 하시는 사건으로 만드셨다. 즉 이스라엘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모세 언약의 의미가 무엇인지 더욱 분명히 밝히신 것이었다. 그 모세 언약 속에는 한 사람이 성막의 위치에 점하고 있는 것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의도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회막으로 불러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레위기의 시작은 이렇게 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1:1).
성막의 의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동행한다는 의미이다. 성막은 이스라엘에게 단순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계시가 주어지고 건립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반역을 동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행이란 화목이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화목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동행할 수 없다. 이 긴장을 해결하는 요소로 제사제도를 제시하고 있다. 비거룩한 백성이 거룩한 백성이 됨에 대한 확인 작업이 제사 제도이다.
출애굽기 24:4-8에 보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애굽에서 꺼내서 이제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맺음으로 비로소 비거룩한 민족이 거룩한 민족으로 전환되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민족이 된 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모세 언약임을 시내산에서 피뿌림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다. 거기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피를 양푼이에 담아서 반은 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들에게 뿌리는 것이다. 누구든지 이 언약대로 시행되지 않는다면 생명을 상실할 것이라는 뜻이다. 생명을 상실한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의미보다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공동체에서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번제와 화목제가 중심이 되어 있음을 주의 깊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먼저 1장에서는 번제에 대하여 3장에서는 화목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제사를 기초로 제사 제도의 문제 대하여 다루는 나가는 것이 레위기이다. 속죄제와 속건제에 대해 거론되지 않는 이유는 아직 여기서 죄 문제에 대하여 부각시켜야 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모세 언약을 세우는 이 장면에서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것은 번제와 화목제이다. 따라서 제사의 기본은 번제와 화목제이다. 번제란 제물을 완전히 태워서 화제로 드리게 되어 있다. 제물을 완전히 태운다는 것은 온전한 헌신을 말하는 것이다. 온전한 헌신(번제)만이 후에 여호와와 화목되어 동행이 가능하다는 뜻이다(화목제). 이것이 여호와와 이스라엘 간의 언약이다. 그러므로 제사 제도는 이렇게 제사를 잘 지내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제사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확인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제사 제도 안에서 무엇을 확인하는가? 그것은 바로 어린 양의 희생이다. 즉 누군가 언약의 실체로 오셔서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어린 양의 피로 표현되는 것이다. 피를 뿌림으로써 희생을 보여준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 쪽에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다 이루신다. 언약 백성이란 하나님께서 다 이루신 약속들을 제사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확인할 뿐만 아니라 보여주고 증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그 확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막연한 제사의 반복이 아니라 1:1에서 말씀하듯이 여호와께서 주신 계시대로 준행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사의 희생물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언급하고 있다(1:9,13,17, 2:2,10, 3:5,16).
구원은 실로 여호와의 말씀에 의한 약속에 있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노아에게 방주에 대한 치수까지 정확하게 주셨듯이 제사 역시 인간이 임의로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결국 레위기는 아브라함 언약의 준수와 성취에 목표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 언약에서 약속된 후손이란 유월절 어린 양의 모습과 같이 희생되어야 한다. 그 희생은 이스라엘에 있는 성막 안에서 매일 매일의 제사를 통해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물을 여호와 앞에 가지고 와서 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함으로 곧 자신이 번제단에서 희생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특히 화목제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제사이다. 곧 자기 자신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죽은 존재로 하나님 앞에 드려질 때에 하나님의 약속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제물에 안수함으로 표시한다. 제물에 안수한다는 것은 제물의 운명과 나의 운명을 동일시한다는 의미가 있다.
자신의 희생 그것은 철저한 죄에 대한 대가이다. 그 대가는 죄의 권세에 매여있는 나로서는 도무지 불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대신 희생제물이 되셔서 언약을 성취하시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언약 백성이란, 예수님께서 희생되신 십자가의 자리에 내가 희생되어 있음을 믿고 또한 그것을 날마다 보는 자이다.
레위기 4-6장
레위기에 와서 출애굽기에서 제시되지 않은 것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속죄제와 속건제이다. 물론 출애굽기 29장에 보면 속죄제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제사장의 위임과 관련될 때에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레 8장). 출애굽기 24장에서 번제와 화목제로 언급되고 있지만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문제를 거론함으로 속죄제와 속건제의 의미가 부가되는 것이다. 물론 번제와 화목제 안에서 인간의 죄를 전혀 묻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결국 번제(소제)와 화목제, 속죄제(속건제)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와 그 죄 때문에 저주와 심판 속에서 누구로 말미암아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지는가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그 범한 죄를 인하여”(2,3절) 제물을 드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앞의 세 가지 제사는 제물이 태워짐으로 하나님께서 그 향기로운 냄새를 받으신다고 되어 있으나 속죄제는 제물의 향기로운 냄새가 없다. 즉 죄를 담고 있는 제물 자체가 하나님의 성소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내장만 번제단으로 가져가고 나머지는 진 바깥 재버리는 곳에서 태우고 피와 기름은 따로 분리하여 취급하고 있다. 피가 제단 뿔에 발려지고 희생의 기름을 태움으로 여호와께 향기롭게 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도 앞의 제사와 동일하게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 제물을 드리는 자가 안수를 함으로 제물의 운명과 동일시 됨을 표시하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용서 속에 있는 것이 확인된다.
오늘날 우리는 무조건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의 예배로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흠없는 제물로 인해 향기를, 냄새를 받으시는 것이다. 자신이 흠없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습을 늘 발견하는 자는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벗어난 자이다. 더 이상 예배를 거룩하게 폼나게 잘 드리려고 하지 말고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면서 십자가의 비쳐진 가치관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거룩이 애굽에서 행했던 옛 생활과의 분리로 보여주는 것처럼 세상에서 분리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거룩이다. 거룩은 흉내내는 것으로 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을 말씀 안에서 늘 확인하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이다.
유대인들이 저주스럽다고 여기고 성밖으로 쫓아내어 죽인 그 십자가 현장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피어나고 있다. 나를 깨끗하게 해서 주님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나의 모습 그대로 받으시고 희생의 피에 잠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맡겨진 자로 살자. 피를 분리하여 제단에 쏟고 뿌리는 그 의식이 우리의 죄를 도말하는 십자가의 사건이 되었다는 이 약속 앞에 할 말이 없는 자가 우리가 아닌가?
레위기 6-7장
1:1에서 6:7까지가 일반적인 제사에 대한 설명이라면 6:8절 이하에는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제사 직무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에 대하여 주신 말씀이다. 제사 제도에서 특별히 구분을 요구하신 것은 피와 기름에 한정되어 있다. 출애굽기 30:30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제사 직무를 수행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창세기 4:4에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다”고 했다. 여기서 특별히 기름을 구분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은 후에 모세 언약 속에서 공개될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11:4에 의하면 아벨이 제사를 드리는 일체의 행위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벨의 믿음이란 어디에 국한되어 있었는가? 그것은 히브리서 전체에서 밝혀주고 있다. 히브리서는 처음 1장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우월성을 강조함에 있어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히 1:9/시 45:7).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름을 부어서 다른 자들(모든 사람들)과 차별을 하셨다는 것이다. 차별된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존재가 아니라 하늘의 존재라는 것이다(히 1:13). 따라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늘의 것으로 하나님의 소유임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꿈을 꾸고 난 후에 돌베개를 취하여 기름을 부은 행위는 그곳이 곧 하늘의 문으로 하늘에 속했음을 고백한 행위였다(창 28:18). 이런 점에서 희생 제물 가운데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오직 기름뿐이다(레 3:16). 속죄제에서도 제물은 진 밖에서 태우지만 기름은 번제단에서 태우게 되어 있다(레 4:8-10). 태워진 기름의 향기가 여호와께 향기로운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제사 의식에 있어서 피는 어떻게 되는가? 피도 기름과 같이 인간이 함부러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름은 연기가 되어 하늘을 향하면서 타올라 가지만(레 6:12) 피는 하나님께 바쳐져서 심판을 위하여 뿌려짐으로 소모적인 측면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기름과 다르다.
피는 생명이다(레 17:11).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히 9:22).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피를 흘리면 죄사함이 이루어지고 생명이 속하여지는 것이 아니다. 기름의 향기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자가 흘리는 피에 한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 기름부음으로 구별되어진 자가 흘린 피에 의해서만 죄사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 당시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 한 둘이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 실로 하나님이 기뻐하신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었다(마 3:17, 17:5). 그렇게 구별된 아들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모든 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모세 언약에서 제사장에게 기름을 붓고, 제사 의식에서 기름을 따로 구분하여 드리도록 한 것이었다. 유월절 어린 양으로 피를 흘리는 희생이 누구로 말미암아서 되는 것인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된다.
결국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에 있어서 피와 기름을 구분하여 바치는 의식은 이 땅의 인물이 아닌 하늘의 인물이 지상에 오셔서 하실 사역의 핵심적인 부분을 말해주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언약에서 보여주는 희생이란 히브리서 9:11-15에서 잘 말씀해 주고 있듯이 기름 부음을 받은 당사자가 친히 제물이 되셔서 피를 흘리는 희생을 함으로 모든 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이 되었다.
구약의 성도들이 피가 뿌려지고 기름이 태워져 하늘로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봄으로 구원의 증거물로 삼았다. 결국 구원이란 이 땅에서의 행복이 아니라 생명이 대신 속해져서 죄인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그것이 구원임을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제사의식의 반복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희생에만 영광이 돌려지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시 51:17).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상한 심령으로 살아가는 자가 성도이다.
오늘날 교인들은 목사, 장로들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기름부음 받은 종을 잘못 건드리거나 거스리기라도 한다면 천벌을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목사나 장로의 임직 때에 결코 기름을 붓지 않는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모두가 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다. 목사나 장로를 특별히 구별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세상과 구별하신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은 성령을 받은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1,22). 누구나 신자라면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통제를 받고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자이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실 것이다.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게 한 자는 오직 그리스도께 복종하면서 사는 자이다. 그러한 경험이 있는 자가 교회이기 때문에 성도는 목사 한 개인에게나 교회에서 물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에게 복종하는 자가 아니다.
레위기 8-9장
8장은 제사장직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어떻게 세우는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35절에 보면, “너희는 칠 주야를 회막문에 거하여 여호와의 부탁을 지키라 그리하면 사망을 면하리라 내가 이같이 명령을 받았느니라”고 하셨다. 제사장 위임 제사를 드리는 7일동안 회막문을 나가서는 안된다.
이것은 제사장이 어떤 존재인가를 밝혀주고 있는 내용이다. 즉 세상과 단절된 생활이 곧 제사장의 삶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제사장을 중심으로 살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제사장을 세우시고 그 제사장 중심으로 살도록 하신 것은 제사장직 자체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알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 뜻을 아는 자들은 비록 직접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사람은 제사장이다. 그것이 곧 제사장 나라요 이스라엘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제사장들은 오실 메시야를 보여주는 자이지 결코 제사장 자신이 완전히 거룩한 자는 아니다. 때문에 제사장 위임식 제사에서 제사장 자신들을 위한 속죄제가 먼저 드려져야 하는 것이다.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속죄제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매 모세가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그 피를 단의 네 귀퉁이 뿔에 발라 단을 깨끗하게 하고 그 피는 단 밑에 쏟아 단을 속하여 거룩하게 하라”(14,15절)는 말씀대로 9:7에서 “이에 아론이 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잡아” 제사를 드렸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는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히 5:1-3).
거룩하지 못한 죄인들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거룩한 회막의 일에 종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들을 위한 속죄제로 인하여 피흘림이 대신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하여 제사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의미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피를 발랐던 것이다(8:23,24).
그 피흘림은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대속의 죽음에 의한 피흘림이다. 그것은 완전한 제사장이 완전한 자신을 제물로 드린 제사였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7:26,27).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단번에 드린 제사로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 그것을 믿는 자는 단번에 드린 제사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거룩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히 10:10).
여기에 점차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흔히 예수 믿은 이후에 ‘성화(聖化)’라고 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성화란 말이 없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죄인된 모습이 날마다 죽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지 조금씩 거룩하게 되기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죄인은 죽을 때까지 무엇을 행한다고 해서 거룩하게 될 수 없다.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날마다 죽음에 몰아내는 것만 있을 뿐이다. 그것의 반복이 신자의 생애이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단번에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이다. 그것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자는 거룩 안에 있는 것이다. 신자는 주님이 행하신 것을 믿는 자이지 이해하기 위하여 주님에 대해서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연구하는 자가 아니다. 믿어지기 때문에 주님의 더 깊은 은혜를 알아 가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5에 의하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자가 제사장이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제사장이라는 말이 아니다. 신령한 제사라고 하는 것은 자신 전체를 제물로 드리는 것을 말한다. 세상과 단절된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로마서 12:1에서 바울 사도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다. 즉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신령한 제사이고 그 사람이 곧 제사장이다.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세상에서 내 몸을 위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며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을 위해 자신의 몸은 죽어야 마땅한 것으로 알고 사는 삶 자체를 말한다.
제사장 자신들과 백성들을 위하여(9:7) 제사를 드리고 아론이 손을 들어 축복하였다(9:22). 아마 그 축복의 내용은 민수기 6:24-26에 기록된 말씀일 것이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제사에 참여한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결코 이것은 앞으로 이렇게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참여된 것에 대한 선언이다.
오늘날 교인들은 목사의 축도가 복을 주는 행위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어떤 목회자는 잠언 3:16 말씀을 축도와 연결시켜 갖다붙이는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의 성경해석을 하면서 예배를 다 드리고 축도를 받지 않고 간다면 헛된 예배를 드린 것이라고 사기를 치고 있다. 잠언의 말씀은 결코 축도할 때에 두 손을 들어서 하는 행위와 연결할 구절이 아니다.
교회의 목사가 두 손을 들어서 축도하는 것에 대한 의미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여기 레위기에서 아론이 손을 들어 축복한 것에 기인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손을 드는 행위는 복이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로 제사에 참여한 자에게 민수기 6:24-26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영생의 복을 선언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목사가 하는 축도는 복을 오게 하는 행위도 아니고 더더욱 목사에게 축복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복은 저주를 제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복이다. 따라서 오늘날 목사가 하는 축도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에 참여한 자에 대한 복의 선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목사들은 축도할 때에 예배에 참여하지 않은 가족들 또는 직장이나 국가 등에 축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의 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처사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것이 다 드러난 이상 손을 들고 하든 손을 들지 않고 하든 그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을 복으로 알고 그분께 감사하면서 사는 삶인가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행했을 때(8:4,9,13,17,21,29,36,9:10,21)에 9:6에서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리라고 약속하신대로 응답이 나타났다. 그 응답은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르는 것이었다(9:24).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남으로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거꾸러질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는 여호와의 영광으로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거꾸러질 수밖에 없는 자가 성도이다.
레위기 10장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분향하려고 하였다가(본문에서는 나답과 아비후가 분향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실상은 분향하려고 하였을 때를 의미한다) 여호와의 불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그 이유는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려고 했기 때문이다(1절). 왜 하나님은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일하시는가? 제사를 안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분향하기 위해 들어가려고 했는데 다른 불로 하려고 했다면 적당히 야단을 치시면 되지 굳이 죽이실 필요까지 있는가? 우리가 가지는 의문이다. 일반적으로 구약의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심판하시고 벌주시는 하나님이며, 신약의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게 적용시킬 때에만 그렇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왜 오늘날은 즉각적으로 심판하시며 벌주시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런 생각은 나 한 개인의 복수심에서 피어 나오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도록 맡기는 것이어야 한다.
어쨌든 왜 나답과 아비후가 죽어야 했는가? 9장의 상황에서 보자면 지금 제사장 위임식을 시작으로 하여 성막에서 제사가 공식적으로 처음 드려지는 그런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제사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시행되었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 번제단에 떨어지는 일이 있었다. 불이 번제단에 떨어졌다는 것은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의미가 담겨 있다.
신명기 4:23,24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자신을 소멸하는 불이라고 표현하셨다. 즉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이 땅의 모든 것을 소멸하는 심판의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은 처음 제사를 통해 제단에 떨어진 불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했다. 때문에 분향하는 불은 번제단에서 취한 불이어야 했다(레 16:12). 번제단 불은 희생이 있는 여호와의 불이다. 그 불에 의한 분향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이다.
나답과 아비후는 그것을 가볍게 생각했다.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불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분향하려는데 무엇이 나쁜가 라고 쉽게 넘어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여호와께서는 불로 나답과 아비후를 죽이심으로 인간의 생각에 의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나올 수 없음을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즉 인간의 것은 죄된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 앞에서 소멸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철저히 자기 방법을 고수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기 언약대로 일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3절)고 하셨다.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이 백성들 앞에서 여호와의 거룩함과 영광성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서 무의미한 것이다. 이런 중요한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불로 나답과 아비후를 치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모든 방법과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여기에 더 이상 인간의 방법이 가미될 여지는 없다. 오늘날 교회를 키우고자 하는 여러 가지 전도의 방법들, 여러 가지 행사들은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불이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약속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십자가 희생만 드러내는 일이다.
나답과 아비후는 왜 다른 불로 분향하려고 했는가? 9절에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그들은 술에 취하여 정하고 부정하며,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지 못했던 것같다(10절). 제사장은 항상 맑은 정신으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에베소서 5:18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술 취하는 것은 술의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성도는 술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자라는 의미이다. 술을 끊어야 신자라는 말이 아니라, 신자요 성도라면 당연히 성령 충만에 의해 세상을 잊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성령에 의해서만 거룩하고 속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거룩한 것이라고 그리스도 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의 것이 거룩으로 보여지지 않는 그 자체가 죽음이요 저주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이제 정한 것과 부정한 것,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게 된다. 무엇인가 일이 벌어지고 나면 하나님이 그에 따른 어떤 조치를 취하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가만히 두면 죄를 짓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벌어지는 그러한 현상들을 그대로 방치하셔서 인간의 실패를 통해서 계시를 주신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무엇인지 인간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의 율법, 규례는 인간의 죄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명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의 노아나 아브라함의 자리, 아니면 모세나 다윗의 자리에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우리가 가지는 생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 죄인된 인간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철저히 보여주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은 실로 말할 수 없는 큰 은혜이다. 인간은 실패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보지 않는다. 자기의 가능성을 믿는 한 계속적으로 자기 자신을 신으로 남겨두고 싶어한다. 자기 자신을 믿고 있는 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레위기 11장
10장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하려고 하였다가 불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 원인은 술 취함 때문으로 인하여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 대한 구분을 가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게 된다. 11장은 동물의 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하여, 12장은 출산시의 부정함에서 정하게 되는 것, 13-14장은 문둥병의 부정함과 정함에 대하여, 15장은 성적(性的)인 부정함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 대하여 철저히 구분하도록 하신 것은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의 잘못과 관련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에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 대한 구분은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는 의미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로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제사 제도에 있어서 다른 문제들이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문제(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해서만큼은 오해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건강에 좋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율법으로 금해 놓으셨다고 믿는 것이다. 한때는 이상구 박사라고 안식교인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 과학적으로도 맞는 것이라고 하는 이상한 진리에 많은 교회들이 공감하며 박수를 친 적이 있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결코 우리들의 건강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기록된 것이 아니며, 또한 과학적으로 증명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안되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한번 되새기거니와 성경은 과학이나 우리의 건강,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삶의 교과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요 5:39).
45절에 의하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11장 이하에서 말씀하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 대한 모든 기준은 이 말씀의 원리 안에 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대로 되었던 것처럼 “너희도 거룩할지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선언이다.
여기서 이미 하나님께서 구분하여 주신 음식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거룩하여지거나 안거룩해지는 그런 일은 벌어질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구분하도록 하셨는가?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거룩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고 속된 것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지를 보아야만 한다.
45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하기 때문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셨다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건짐 받아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나안 땅, 곧 약속의 땅이다. 그들이 가고 있는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관련되어 있고, 그들이 나온 땅 애굽은 속된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이 건짐 받은 것은 애굽에서 건짐 받았지만 궁극적으로 속된 것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속된 것에서 건짐 받았는가? 그것은 오직 어린 양의 피로 인해서이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속된 것에서 건짐받은 이유를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은 성막에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매사에 구분하여 조심함으로 어린 양으로 말미암아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잊지 말고 계속 확인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무슨 근거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하셨을까 하는 상상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다만 4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하신 그 근거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고 하시면서 45절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구분은 땅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상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에 대한 배경으로 우리는 창세기 3:14을 생각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배로 다니고 흙을 먹는다는 것은 바로 저주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처럼 땅과 땅의 것들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의 상태에 있게 되었다. 그 저주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노아 언약에 보면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에 번제를 드렸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노아는 정결한 짐승을 잡아 번제를 드렸다(창 8:20). 그것은 노아 자신을 포함은 부정한 모든 것이 정결한 것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노아 언약에서의 희생을 모세 언약에 와서는 제사 제도를 통해 그리고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분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 희생은 유월절을 통해 보여주고 있듯이 어린 양의 피흘림이다. 그 어린 양의 피 흘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성취하셨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의 피흘림이었다(고후 5:2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의가 성취되었다.
그 의는 성령에 의해 믿음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주어졌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후 5:17).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처음 창조 상태의 원리 속에 들어 있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음식을 가지고 무엇은 먹을 수 있고 없고 하는 식으로 따져서는 안된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아직도 음식의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일부분은 사도행전 15:20을 근거로 금해야 하는 음식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곧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지금도 음식을 가려서 먹는 율법주의자들이 한국 교회 안에는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먹도록 주어진 것 중에서 우리가 율법으로 금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로마서 14:14에서는 음식을 속된 것으로 여기는 그 사람이 속되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17-20).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나오는 것 중에서 죄악된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인간은 죄의 권세아래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무엇을 하든지 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여 말씀하신 것은 동물이나 식물 그 자체가 더럽거나 부정하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죄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더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음식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또한 음식이나 이 땅의 식물 자체로 우리 자신을 풍족하게 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고전 8: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3:8,9)
따라서 하나님께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나누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과 받지 않으시는 것을 스스로 구분하신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왜 어떤 것은 거룩하고 어떤 것은 왜 속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이 받으시는 것을 땅에 속한 저주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에 있고, 또한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정하셨다는 것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일상 생활의 모든 것에서 이방인과 다르다는 인식이 있어야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방인과 다르다는 인식은 우월감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무시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하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출애굽하였기 때문에 결코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건지신 자를 위해 살도록 새로운 생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서로 음식의 문제와 같은 율법의 문제로 다투는 것을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을 주 예수로 믿고 섬기는 자이다. 그분이 이 땅에 발붙이고 사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떠나가셨다. 그렇다면 그분이 계시는 그곳에 우리의 삶의 목표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단지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두신 것은 나의 생명이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주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분을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신자는 세상에서 날마다 말씀으로 천국과 지옥을 갈라놓는 자이다.
레위기 12장
자녀를 낳는 것이 부정한 것인가? 부정하다면 왜 부정한 것인가? 레위기 12장의 문제는 난해한 것처럼 보인다. 시편에 의하면 자녀를 가지는 것이 즐거움이요(시 113:9),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이며 상급이라고 했다(시 127:3). 뿐만 아니라 상에 둘린 자식은 감람나무 같아서 여호와를 섬기자는 자의 복으로 표현하고 있다(시 128:3,4). 그런데 왜 레위기에서는 출산을 부정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가?
창세기 3:16에 보면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저주를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뱀의 후손을 밟을 후손이 태어나는데 고통을 동반한 중에 후손이 태어날 것이다. 즉 출산의 고통은 출산의 고통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통해서 여인의 후손이 태어나고 그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본래 하나님께서 지으신 질서대로 하와는 아담의 다스림 속에 있어야 하지만 죄로 말미암아 이제부터는 여자가 남자를 다스리려고 하는 그러한 마음이 끊임없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 저주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인물이 누구인지를 기다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출산이라는 고통,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고통을 통해서 그 고통 뒤에 뱀의 후손을 이길 승리자가 오실 것을 늘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곧 저주의 고통을 통해서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였다.
디모데전서 2:11-15에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의 뜻을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하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본래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와는 아담의 다스림 속에 있어야 했었다. 그러나 하와가 아담의 다스림 속에 있지 아니하고 독립하여 있었기 때문에 범죄하였으므로 본래 지으신 그 뜻대로 하나님의 질서를 인정하고 그렇게 남자의 가르침대로(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주님의 말씀의 뜻에 살아가게 될 때에(정절로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즉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는 뜻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 죽음이란 바로 이런 차원에서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구원의 길이 제시되는 것임을 나타내셨다.
출산하여 40일 또는 80일씩을 죄인이 되어 여호와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이스라엘 여인들의 모습은 죄인이 결코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음을 철저히 보여주고 있다. 자녀를 낳음으로 부정한 여인은 결코 여호와 앞에 얼씬할 수도 없는 그것은 곧 후손을 낳으려고 고통하는 하와의 모습이며 교회를 낳으시는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인이 아들을 낳으면 7일동안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하고 또 33일이 지나야(40일) 의식적으로 깨끗하게 될 수 있으며, 또 딸을 낳으면 2주일간 부정하며 66일이(80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의식적으로 깨끗하게 될 수 있다. 40이란 숫자는 고통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 여자 아이를 낳았을 때에 정결의 기간을 남아를 낳았을 때 두배의 기간동안 부정한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범죄가 근본적으로 누구로부터 왔는가 하는 것을 고통의 기간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왜 그런가?
4,5,7절에 보면, 출산을 한 후에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진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아이를 낳은 근원이 더럽다는 것이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미 죄의 권세 아래에 있다. 죄의 권세 아래에서 비록 생명의 출산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죽은 아이를 낳는 것이다. 즉 생명과 상관없는 아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죽은 아이를 낳는 그 근원 역시 부정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근원이 부정하기 때문에 부정한 출산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근원이 부정하도록 만든 궁극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궁극적 책임은 남자에게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의 최종적 책임을 남자에게 물으신 것이다(창 3:17-19). 때문에 남자 아이는 팔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행해야 했다. 이는 이미 아브라함 언약 속에서 밝혀주신 내용이다(창 17장). 이스마엘을 낳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게 하심으로써 인간의 혈통은 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아들이 언약을 성취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따라서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생식기를 잘라버림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혈육을 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근본적으로 산혈을 깨끗하게 하고 할례를 행하는 것을 통해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40일, 80일의 고통을 통해 기대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인이 40일 또는 80일이 지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기간을 지난 후 제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나가면 제사장은 그 제물을 여호와 앞에 드리고 여인을 위해 속죄해야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7절). 번제와 속죄 제물을 드려서 속죄해야만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으시는 것이다. 그럴 때에 그 자녀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고 받으시겠다는 뜻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이 부정하고 가증스럽게 여기는 죄인이다. 성경은 결코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이 긍정적으로 본 것은 인간 스스로에 의해서일 뿐이다. 그래서 무한한 가능성을 집어넣고 희망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가 하기 나름이라고 본다.
지금 한국 교회는 미국 기독교의 선교를 받았고 또한 미국이라는 나라는 기독교 사상이 오래 전에 지배하던 나라이기에 그들이 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들을 보면 거의 다 미국 영웅화이다. 불의와 악이 득세하는 그런 현장에서 한 사람이 살아 남아서 의를 드러내고 영웅 행세를 하는 모습 뒤에는 항상 성조기가 나부끼고 있는 것이 미국 영화의 주류를 이룬다.
미국은 이러한 영화들을 수출함으로 알게 모르게 전세계에서 살아남는 영웅은 미국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성경적 사상이 아니다.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철저한 인본주의이다. 기실 그러한 사상을 한국 교회는 무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긍정적 신앙’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하였다.
신앙에 긍정적 신앙이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더러 늘 꾸짖고 있다. 죄인라고 항상 책망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너희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무시하고 있다. 그렇게 무시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즐겁고 송이꿀 같이 달게 느껴지는 자가 진정 성령 받은 자이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용납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된다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이 있지 않으면 결코 불가능하다. 그 희생을 예수님께서 친히 제물이 되셔서 대속하셨다. 희생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시편에서 자녀가 복이요 즐거움이요 상급이 된다고 한 것은 언약 안에 있는 자를 두고 한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말씀에서 제시하고 있는 희생 제물을 통해서 깨끗하게 된 자를 두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 중요시 여겨야 할 것은 혈육관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믿음의 관계이다. 지상에서의 가족 관계는 고통과 탐욕으로 가족의 사랑이 무너지는 것이 예사이다. 오늘날 교회는 그러한 가족 관계를 바로 세워주려고 한다. 복음에는 관심이 멀어진 증거이다. 세상의 가족 관계를 통해 우리는 이 땅에서의 가족이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주님의 십자가 공로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지상의 혈육관계를 인정하고 부추기는 행사를 열어주어서는 안된다. 세상에는 가족 중의 누가 세상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고시에 합격하면 현수막을 내 걸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잃어버렸던 죄인이 회개하면 현수막이 걸리고 경사가 나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쁨을 아는 자가 신자요 교회이다.
레위기 13-14장
하나님께서는 13-14장을 통해서 문둥병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에게 죄에 대하여,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질병이란 근본적으로 죄 때문에 이 땅에 있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 문둥병(구약 시대에는 병명을 구체화한 그런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문둥병이란 일반적으로 있는 피부병이나 혹은 의복이나 집에 생기는 곰팡이 균에 대한 것을 포함한 것으로 통칭 문둥병이라고 언급하고 있다)이란 피부로 확연히 드러나고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죄인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병이라고 할 수 있다.
2절에 보면 “사람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딱지가 앉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 피부에 문둥병 같이 되거든” 그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가되 제사장은 피부의 상태를 7일 단위로 확인하고 문둥병이면 문둥병으로 진단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제사장에 의해 문둥병으로 진단이 나면 문둥병자는 이스라엘 진 밖으로 나가서 살아야 했다.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13:45,46)고 했다.
이는 문둥병자가 이스라엘 진 밖으로 쫓겨난다는 것은 버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수혜자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성막) 곳에서 함께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민 5:3).
실로 인간의 비참한 상태는 하나님의 거룩성에서 배제된 상태에 있는 것이지 물질의 부족함이 아니며, 제사지내줄 아들이 없다는 것도 아니며, 의지할 아내나 남편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는 그 자체가 곧 죽음이요 지옥이다. 이 때 제사장은 문둥병이 낳도록 안수를 한다든지 제사장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라고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따라 진단하는 것이다. 이것이 문둥병의 규례에 대하여 제사장이 하는 일이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가 나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이 소경이 소경된 것은 자기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질병이 자기에게 오는 이유는 자기의 죄나 부모의 죄로 인해 징벌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답변은 제자들의 사고방식이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 속에는 없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답변은 자기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고 말씀하셨다.
그 일이란 4절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일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의 일을 하게 하시는 그 일을 나타내시는 것 때문에 소경을 소경으로 지금 예수님 앞에 두셨다는 것이다. 결국 그 소경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드러내는 일에 도구가 되기 위하여 소경의 비참한 상태로 있어야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소경이나 그 부모가 전혀 죄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소경의 비참한 상태가 바로 죄인의 모습이고 그러한 인간들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야만 되었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문둥병자가 있으면 자기 죄 때문에 그렇다고 그 사람을 멸시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저렇게 비참한 상태가 바로 내가 죄인된 모습이요 하나님 앞에 비참한 상태이구나’라고 깨달아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전체가 문둥병자요 모든 인간이 다 문둥병자이다.
문둥병자에 의해 접촉되어진 것은 모든 것이 다 부정한 것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문둥병자는 격리되어 하나님의 거하시는 진에서 쫓겨나야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오늘날 모든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무엇을 할 것이 아니라 진 밖에서 통회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베풀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14장은 문둥병이 나으면 제사장을 불러 정결케 하는 의식을 통해서 이스라엘 진으로 들어올 수 있는 규례를 말씀하고 있다. 문둥병은 제사장이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기도 하시고 고치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어떻게 문둥병이 나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기서 주목할 사안이 아니다. 결국 죄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이 처리하셔야 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인을 다시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아니면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문둥병자가 이스라엘 진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제사장의 진단과 함께 일정한 의식을 치러야만 되는 것이다. 의식을 행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통해 누군가의 희생을 믿는 것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해서인데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희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문둥병자는 오직 피흘림 안에서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이스라엘 진 안으로 들어옴이 용납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것과 산에서 내려 오셔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사건으로 연결해서 마태복음서에 기록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고치실 때에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다(마 8:3). 즉 죄에서 사함을 받는 것은 산상수훈을 예수님이 주신 새로운 율법으로 알고 그것을 잘 지키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뜻이 있어야 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제사장에게 보내서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리라고 했다. 곧 그 문둥병자들은 이적에 의해 자신들의 문둥병이 고쳐졌다는 사실을 볼 것이 아니라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림으로 누군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죄의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결코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새로운 율법이 될 수 없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신 그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산상수훈의 완성 안에 사는 것이 된다. 비록 아직 내가 문둥병자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아직 죄짓고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으로 용납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직도 죄를 짓는 죄인의 모습일지라도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 대해서는 정죄할 수 없는 것이다(롬 8:1,2). 그렇다면 성도란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해야 할 놈(?)이라고 하는 사실을 날마다 고백하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권리 자기 주장하지 말고 주어진 것이 은혜인줄 알고 감사하는 자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성도에게는 자기 권리가 없고 오직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를 드러내도록 증인 역할을 하는 사명만 있을 뿐이다.
14:33 이하에서는 집에 생긴 문둥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집에 무슨 색점이 발생했으면 제사장에게 말하여 진단하게 한다. 이 때 제사장은 일단 그 집의 물건을 다 빼내고 비우게 한 후에 살펴보아야 한다. 부정을 면케 하기 위해서이다. 제사장이 그 집의 색점을 보았을 때에 푸르거나 붉은 무늬의 색점이 있어 벽보다 우묵하면 7일동안 집을 폐쇄한다. 그리고 7일만에 다시 와서 보았을 때에 색점이 벽에 퍼졌으면 색점이 있는 돌을 빼내고, 집안 사면을 긁어내고 긁어낸 흙과 함께 성밖 부정한 곳에 버려야 한다. 그리고 다른 돌과 다른 흙으로 채운다.
그렇게 한 연후에도 역시 그 집에 문둥병이 생기면 집을 헐어서 모든 재료들을 성밖에 부정한 곳에 버린다. 그러나 재발하지 않으면 새를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백향목과 홍색실, 우슬초를 취해 새의 피와 물을 찍어 그 집에 일곱 번 뿌려 정결케 하며, 또 한 마리의 새는 산 채로 성밖 들에 놓아 그 집을 속하는 의식을 치루어야 정결케 된다. 집에 곰팡이가 피었을 때에 이렇게 복잡한 의식을 치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34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에 너희가 이른 때에 내가 너희 기업의 땅에서 어느 집에 문둥병 색점을 발하게 하거든”
이 말씀은 어쩌면 지금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여 집을 짓고 살 때를 말하지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다는 것이 결코 그들에게 참된 행복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다는 것은 그들의 본래적 삶을 잃어버릴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면 틀림없이 자신들이 애굽에서 어떤 상태에 있었으며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잊어버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 집을 짓고 사는 안정되고 평안한 생활이란 여호와를 잊어버리도록 하기에 적합한 생활이다. 성과 집이 주는 안락함에 젖어든다는 것은 더 이상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로 인정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서의 안전과 안락함, 평안함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신앙생활이란 하나의 종교생활로 바뀌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죄악된 인간의 본성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셨다. 하나님은 죄의 본성을 아시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된 때에…” 즉 하나님 편에서는 분명히 자기 언약대로 기업으로 주시리라고 하신 땅에 자기 백성들을 데려다 놓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대로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의 집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요 심판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내가 너희 기업의 땅에서 문둥병 색점을 발하게 하거든…”이라고 하셨다. 집의 문둥병은 우연히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기게 하신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만드시듯이 동일하게 문둥병자와 집의 문둥병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문둥병들을 통해 죄의 권세에 매여있는 비참한 인간의 상태를 보여주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복이나 집에 문둥병이 생기는 것을 통해 인간이 의지해야 할 것은 의복이나 집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외부의 적들로부터의 공격에서 보호를 받는 것은 튼튼한 집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가나안 땅을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애초부터 나그네였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때부터 떠돌이였다. 가인이 에녹성을 쌓았던 것은 자기 보호 본능이었다(창 4:17). 하나님의 보호하신다는 차원에서 벗어난 상태이기에 성을 쌓음으로써 자기가 자신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다. 그러나 아브라함 역시 나그네로 살았다(행 7:5). 그 후손인 이스라엘 역시 나그네였다. 애굽에서도 나그네였고, 광야에서도 나그네였으며 가나안 땅에서 정착하여 집을 짓고 살면서도 나그네임을 잊지 말고 아직도 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이 참으로 거해야 하는 곳은 가나안 땅에 지어진 집이 아니라 문둥병을 발생시키는 당사자이신 하나님이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1-2). 참된 쉼이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 했던 이유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처로 삼은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집을 자신의 안전으로 알았고, 세상적인 것들을 보호막으로 알고 살았었다.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세상에서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신 예수님(마 8:20)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세상적으로 힘없는 예수였기에 로마의 위협으로부터 자기들을 안전하게 하는 일에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이 이미 자기 백성들을 위한 장막이었고(요 1:14), 십자가를 지시는 언약의 성취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의 처소가 되게 하셨다(요 14:1-3). 곧 예수님 자신이 거처가 되신 것이다. 따라서 바울 사도의 고백이 곧 우리의 고백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1-5).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썩어질 의식주(衣食住)를 바라보고 그것을 의지하는 것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영원한 안식처가 되심을 인정하고 사는 것이다.
레위기 15장
유출병이란, 남자든 여자든 몸에서 무엇이 흘러나오는 모든 현상을 통틀어 유출병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피일 수도 있고 몸의 다른 액체일 수도 있다. 정상적인 생리 현상일 수도 있고 병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하나님은 그것을 가지고도 하나님 자신과 베푸신 구원(언약)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다.
32절에 “이 규례는 유출병이 있는 자와 설정함으로 부정을 입은 자와 불결을 앓는 여인과 유출병이 있는 남녀와 불결한 여인과 동침한 자에게 관한 것이니라”고 하신 것을 볼 때에 단순히 유출병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와 연관해서 주어지는 성적(性的)인 문제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출병으로 말미암은 부정함에 대해서는 본문이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유출병 있는 자의 것이나 그것과 접촉된 모든 것이 다 부정하다고 하셨다. 몸은 물로 씻고, 옷은 빨고, 질그릇은 깨뜨리되 목기는 물로 씻어야 한다(3-12절). 그에 따른 속죄의 의식은 유출이 깨끗하게 된 다음에 7일에는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어야 된다. 그리고 제 팔 일에 비둘기 두 마리를 취하여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하나는 속죄제로 하나는 번제로 드려 속죄하게 된다(13-15절).
부정함과 속죄에 대한 하나님의 취지는 31절에서 밝혀주고 있다. “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로 그 가운데 있는 내 장막을 더럽히고 그 부정한 중에서 죽음을 면케 할지니라” 유출이 있는 동안은 부정하기 때문에 누구도 접촉해서도 안되고 무엇도 접촉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 나은 후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제사를 드리게 되어 있다. 즉 유출이 있는 동안은 철저히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거처로 삼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통해 하나님이 거처로 삼은 하나님의 영역이란 부정한 인간이 얼씬도 못한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일동안 몸을 씻고 옷을 빨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서 7일이란 새로운 창조의 형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새로운 날인 여덟째 날을 기다린다. 이 날은 부정함에서 정결하게 되는 날이며, 생명과의 단절에서 받아들여짐이 이루어지는 날이며, 창조의 깨어짐에서 재창조가 이루어지는 날이다. 7일간 씻으면서 이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인간 자체가 부정하기 때문에 그 인간이 피흘리는 것을 비롯하여 인간에서 나오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다. 인간이 흘리는 피나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들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유출병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곧 거기서 나오는 모든 인간적 혈통이 부정하기 때문에 피흘림이 있을 때나 또한 남자의 설정으로 인한 자녀의 생산은 부정함의 반복이며 순환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죄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앞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문둥병에 대한 것이 근본적으로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면 여기서 유출병에 대한 것은 항상 죄를 반복하고, 부부관계에 대한 문제가 일상적인 삶인 것과 같이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 안에 늘 죄가 반복되고, 보여진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한마디로 유출병이란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합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항상 죄 속에서 죄를 먹고 마시며 사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속죄의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피흘리는 희생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흘림으로 말미암아 그 피가 발려진 자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우리를 깨끗게 하시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님을 31절 말씀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다. 31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장막을 더럽히는 문제로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속에 거처를 정하셨기 때문에 부정함을 제거하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성이라는 속성 때문에 인간의 부정함을 용납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이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나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측면에서 먼저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거처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측면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의해 자신의 거처를 깨끗하게 하신다.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의 영역 속으로 불러들이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이나 거룩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었는데 그야말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 자신의 거처에 포함시키셨다는 뜻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절대적으로 내 중심에서 나의 구원의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롬 3:19).
신자란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문제의 근원이 항상 자기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성도는, 인간 본성이 철저히 부패해서 쏟아내는 것이 죄라는 것을, 그래서 도무지 구원할 힘도 구제될 힘도 없는 것이 인간이요 자기 또한 그러한 운명의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상태의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알게 된 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문제의 주체가 항상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불신자들 중에서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할 줄은 안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의 더 나은 자아를 위해 실패를 축적된 힘으로 삼고자 하는 행위에 머물고마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주님의 뒤 편에서 옷가만 만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죄인의 모습인 것을 인정한 상태였던 것이다. 부정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졌을 때에 예수님이 부정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한 여인이 고침을 받고 예수님이 선언하시는 구원 속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의 효과에 대하여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따라서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 거기서 흘리신 피에 접촉되지 않는다면 주님과 상관없는 자이다. 자기를 위해서 살며, 자기 것으로 주님께 헌신하려고 죄인의 것을 떳떳하게 내어놓는 모습이 바로 유출병든 모습이요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나라를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피를 흘리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믿는 자들이 교회이다.
레위기 16장
1절 이하의 말씀이 이렇게 되어 있다.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 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레위기의 중심은 더러운 피와 거룩한 피의 대조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부정하다는 것으로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은 아론의 두 아들을 죽이심으로 하나님의 성소에 누구도 함부러 들어올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나 거기에 덮어주는 피가 있어야 가능하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좀더 극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하여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날을 7월 10일, 일년 일회로 한정하였다. 이 날이 곧 속죄일이다(29,34절).
이 날에는 아론 자신을 위하여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고 수양으로 번제물을 삼으며(3절), 백성을 위해서 수 염소 둘을 속죄제물로 삼고 수 양은 번제를 위해 준비하여야 한다(5절). 이 때 특이한 것은 두 염소를 취한 것에서 드러나고 있다.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8-10절). 아론은 자기를 위한 수송아지의 피와 백성들을 위한 염소의 피를 지성소로 가지고 들어가서 속죄소 동편과 속죄소 앞에 뿌린다. 그리고는 산 염소에 안수하고 그 염소를 광야로 보내는 의식을 행한다.
여기서 피를 속죄소 동편에 뿌리는 것은 피가 보여주는 희생자가 어디로 오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들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하여 쫓겨난 후에 하나님은 에덴의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셨다. 즉 언젠가는 하나님 쪽에서 그것들을 제거하고 동편으로 길을 여실 것이었다. 에스겔 선지자는 여호와의 영광이 오직 성전의 동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겔 10:18,19, 43:4,5). 그러므로 지성소에서 피를 동편에 뿌리는 것은 피의 희생자가 오실 때에만이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한 마리의 염소는 산 채로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내라고 하신다. 아사셀 염소란 무엇인가?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21,22절).
“아사셀”이란 우리 성경 난하 주(註)에 보면 “내어놓음”이라고 되어 있다. 즉 광야에 버림을 당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장막으로 표현하신 것을 생각한다면(15:31) 여기서 아사셀을 위하여 염소를 광야로 보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주하시는 영역과 반대적인 개념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즉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수 있는 것은 희생의 피가 뿌려짐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아사셀 염소에게는 아론이 안수함으로 온 백성들의 죄를 싣고 담은 모습으로 광야에 버려짐을 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에 의해 버려진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아사셀 염소는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혀서 죄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구약의 제사장이나 이스라엘은 인간 중에는 거룩이라는 것이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드러내고 보여주는 자여야 한다. 오늘날 신자라면 바로 이러한 비참한 상태의 죄인의 모습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생명의 은혜를 드러내고 공개하는 자여야 한다. 하나님은 이 날을 “큰 안식일”(31절)이라고 하셨다. 이는 인간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29절)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삶이 유지되는 것을 더욱 분명히 경험하게 됨과 같이 나의 생명이 유지되고 주님의 십자가를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아무 것도 안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 주님께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음을 늘 고백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여줄 때에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레위기 17장
“무릇 이스라엘 집의 누구든지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를 진 안에서 잡든지 진 밖에서 잡든지”(3절)라고 하는 말씀을 볼 때에 레위기 17장은 제사 제물이 아닌 일반적으로 동물을 잡게 될 때를 말씀하고 있다. 동물을 잡는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을 잡게 될 때에 기름과 피의 처리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 때문에 주어지는 규례이다.
그래서 먹기 위해 짐승을 진 안이나 밖에서 잡을 경우에 먼저 여호와께 그 짐승을 끌고 와서 잡아 제사장에게 주어서 피와 기름을 화목 제물로 여호와께 드리도록 하였다. 피는 여호와의 단에 뿌리고 기름은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여야 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스라엘에서 끊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다(4-6절).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7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수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고 한 것을 보아서 광야에서나 들에서 동물을 잡는 것은 마귀에게 제사드리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같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반드시 여호와만을 섬기는 표시로 “회막문 여호와 앞”에서 잡아야 했다(1:5,11, 3:2,8,13, 4:4,15,24,29,33).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과거에 행했던 우상 숭배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규례를 주신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출애굽기 32장에서 행했던 것처럼 동물을 잡아서 화목제와 번제를 드리고서 먹고 마시며 춤추면서 노는 것으로 동물을 잡는 것은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깊게 보아야 할 것은, 먹기 위해 잡는 것도 반드시 먼저 화목제로 드려야 한다는 것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5절). 화목제를 거쳐서 제육을 먹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을 볼 때에 제육이 인간에게 왜 허락되었는가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창세기 9:3에 보면 처음으로 육식이 인간에게 허락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허락하시기 전에 노아가 정결한 동물을 잡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다(창 8:20).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락하시면서 피를 구분하도록 하셨다. 피를 구분한다는 것은 희생을 강조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육식을 하는 것과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사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 레위기에서 먹기 위한 동물을 잡는 것에 앞서 화목제를 드리도록 한 것은, 인간의 죄 때문에 육식이 허락되었고 육식이 허락된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의 의미를 보여주시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언약 속에 베풀어진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오는가 하는 것을 레위기에서 더욱 분명히 밝혀주시는 것이 된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는 피흘리는 희생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11절)고 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라면 피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속죄의 피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그만큼 속죄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게 여기며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예외가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진치고 계신 이 영역 안에 있는 자라면 비록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다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라도 피를 먹지 말라”(10절)고 하셨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피에 대한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밝히신다. “먹을만한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거든 그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지니라”(13절)고 하셨다. 에스겔 24:7 이하에 의하면 “피를 땅에 쏟아서 티끌이 덮이게 하지 않고 말간 반석 위에 두었도다 내가 그 피를 말간 반석 위에 두고 덮이지 않게 함은 분노를 발하여 보응하려 함이로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피를 덮는다는 것은 에스겔서의 상황과는 반대적인 의미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즉 피를 땅에 흘리고 흙으로 덮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피를 간과하시겠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타국인이 사냥한 짐승의 피를 땅에 흘리고 그 피를 흙으로 덮으면서 하나님이 우리들의 죄를 덮어주셨구나 피가 있어도 대속의 죽음 때문에 죄가 없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눈감아 주셨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 피를 흙으로 덮으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짐승을 잡을 때마다 그 피를 가지고 대속을 생각하게 한 것은, 그만큼 인간이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잘 잊어버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철저히 알아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누구 때문에 이런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는가를 늘 생각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의 피흘리심 때문에 생명 안에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음식을 먹어도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놀아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놀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았던 자이지만 지금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천국의 원리와 방식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요 교회이다.
레위기 18-20장
하나님은 레위기를 통해 인간의 죄가 무엇이며 그 죄 때문에 인간의 피는 결코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것임을 낱낱이 말씀하신다. 그것과 더불어 주어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이 들어 있고, 그 어린 양의 희생을 말씀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십계명이다. 하나님은 여기 18-20장을 통해 언약의 말씀인 십계명을 확대해서 보여 주신다.
그러기 때문에 18-20장 말씀들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또는 “나는 여호와니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그냥 쉽게 나는 하나님이니까 나를 믿으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 선언 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유월절 어린 양으로 희생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어린 양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란 피의 대속을 입은 자이다. 다시 말해서 애굽에서 도무지 탈출할 여망이 없었던 자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직접 희생을 치루셨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희생 속에 있다는 뜻이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만 속한 자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건짐 받아서 가나안 땅으로 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나안 땅에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사는 자이다. 하나님 안에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스림을 받는 것을 말한다.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20:22).
가나안 땅에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걸맞는 말씀대로 시행되는 백성이 될 때에만 약속의 땅에 사는 것이 용납되어지는 것이다. 약속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십계명에서 드러나고 있는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희생을 보여주는가? 그것은 기존의 것을 거부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즉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고 거부하시는 애굽과 가나안 땅의 풍속을 좇지 않는 것이다.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18:3-4/ 참고 20:23).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요 유월절 희생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요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겠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거룩이다. 이런 의미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스라엘은 생활 속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18장에서 주어지는 규례도 단순히 사회적으로 성 윤리을 문란하게 만들지 않음으로 건전한 사회를 구현하자는 것에 있지 않다.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를 확인하라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속에 누구의 희생이 들어있는가를 늘 확인하라는 뜻이다.
당시 애굽과 가나안 땅의 풍속은 골육지친을 가까이 하여 범죄하는 풍습이었다(6절). 자식이 어미를 범하는 것(7절), 계모를 범하는 것(8절), 이복 자매(9절), 손녀나 외손녀(10절), 이복 여형제(11절), 고모(12절), 이모(13절), 숙모(14절), 시아비가 자부를(15절), 형수나 제수를 범하는 것(16절) 등이다. 뿐만 아니라 여인과 여인의 딸을 아울러 범하며,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까지 함께 취하기도 하는 것이었다(17절).
아내가 살아 있는데 또 처제를 취하여 분란을 일으킨다(18절). 심지어는 자신의 정욕으로 인해 경도하는 여인과의 관계나(19절) 타인의 아내를 취하는 것(20절), 호모행위, 남색(22절), 짐승과 교합하는 일(23절), 또한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만드는 일(21절)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고대 사회의 이방종교에서는 혼음을 통해 다산 기원 의식을 행했기 때문에 그것은 우상 숭배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었다(출 34:15-17).
이러한 모습이 애굽과 가나안의 풍속이며 또한 오늘날 세상의 풍속이다. 하나님은 근친 관계 속에서 있을 수 있는 모든 관계를 통해 인간의 정욕에 의해 범죄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인간이 얼마나 본능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애굽과 가나안의 풍속만 좇지 않으면 되는가? 그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애굽과 가나안 땅의 풍속을 좇아서 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잠시 자신의 욕구를 억눌렀기 때문에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 속에 있지 않으면 항상 죄의 본성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정상적인 부부간의 결합이란 배필간의 연합이다. 즉 마음과 몸이 한데 뭉쳐지고 인격이 둘이면서도 하나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을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나타내는 것으로 보지않는 한 자기 만족의 수단이 되고마는 것이다.
이것이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의 죄된 모습이요 당연히 멸망되어야 할 모습이다. 그 모습이 바로 애굽의 모습이었고 가나안 족속들의 모습이기에 하나님은 애굽에 재앙을 내리셨고 또한 가나안 족속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가나안 족속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다.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18:24,25).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약속대로만 통용되는 땅이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규례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땅이 토하여 내게 되는 것이다(18:28, 20:22). 결국 이스라엘은 그들이 나왔던 땅이나 들어가야 할 땅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약속을 주신 여호와이심을 알고 그분께 속한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규례대로 사는 것이다.
애굽의 풍속이나 가나안의 풍속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인가 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애굽이나 가나안 땅의 풍속을 같은 것으로 말씀하신다. 하등의 차이가 없다. 다같이 자기 자신의 힘과 정욕대로 살아가는 풍속이다. 세상은 자기 힘과 욕심의 본능대로 살아가는 존재들만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이스라엘은 세상에 기대를 걸지않고 하나님의 약속에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 하나님의 약속은 대신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피가 되기 때문이다.
19:19에 의하면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라,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혼합하면 단순히 좋지 않다거나 생물학적으로나 생활적인 면에서 무슨 문제가 발생될 우려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불이익을 생각하시고 그것을 챙기고자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생활 깊숙히 전반적인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 자신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다. 20장에서 아주 길게 말씀하신 간음에 대한 문제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즉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닌 것은 음행으로서 한 남편에게, 한 아내에게 속한 것을 깨뜨리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우상을 섬기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했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결코 하나님은 세상과 공유될 수 없는 분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죄의 권세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 즉 하나님에 의해 애굽에서 건짐받은 자들은 그 소속이 하늘이라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살게 될 것이지만 실제적으로 사는 곳은 하나님 안이요 희생의 피 안에 사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규례는 제사에 관한 문제와 일반적인 생활에 대한 문제로 구분되어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주어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으로 고상한 삶을 살 것이 요구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삶이 종교적 삶과 일반적인 삶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밝히고 드러내는 하나의 삶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신자의 신앙생활이란, 교회생활이나 가정생활, 직장생활로 나누어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나의 삶의 전 영역이 항상 주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하나의 삶이다.
19:23 이하에서 말씀하시기를 가나안 땅에서 과목을 심어 얻어진 열매는 3년동안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라고 하셨다. 그리고 4년에는 모든 과실을 하나님께 드리고 제 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는 땅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심으로 거룩하게 되는 땅이다. 고로 하나님께서 약속에 의한 은혜의 열매들을 베풀 때에 살 수 있는 땅이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유지되는 땅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가 이스라엘이다.
오늘날 그런 이스라엘의 모습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교회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4-1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분의 성전이 되었다. 곧 그분의 거룩 안에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레위기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거룩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결코 명령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20:8). 거룩케 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규례를 지키는 것 자체가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인들은 Q.T(경건의 시간)를 함으로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 거룩해지려고 한다. 그냥 기도하고 성경읽으면 안되는가? 그것을 왜 꼭 Q.T라는 이름을 붙여서 매일매일 해야 되는 것으로 여기는가?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완벽하게 무엇인가를 해내겠다는 것 자체가 죄를 더하는 어리석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냥 말씀대로 사는 자로서 진짜 세상은 하늘 나라임을 알고, 이 세상은 허상이요 거짓된 것이며, 죄악된 것임을 날마다 폭로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라는 틀 안에서 형성된 문화라고 해서 모든 것이 다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항상 죄된 것으로 주님의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세상의 문화에서 어떤 것이 나은가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다 애굽적인 것이요 가나안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거부하도록 노력하면 주님의 신실한 백성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주님의 백성이라면 세상의 것을 모조건 거부한 상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 나라에 대해 관심 가지므로 세상의 것에 대하여 자연적으로 멀어지는 그것이 성도의 삶이다.
‘술 먹지마! 담배 피우지마! 세상의 오락을 즐기지마!’ 그렇게 한다고 신자다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너무 좋기 때문에 세상과 세상의 것이 싫어지는 삶이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실 때에 이런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항상 생명나무를 먹는 것에 관심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 그런 존재가 주님께 속한 존재이다.
레위기 21-22장
18-20장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은(18:2,19:2,20:2) 이제 21-22장에서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을 향해서 주어진다. 즉 21장은 제사장에 대한 말씀이고 22장은 제사장이 다루어야 할 성물에 대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제사장과 제물은 거룩하고 흠없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기 위해서 제사장은 시체를 가까이 해서 접촉해서는 안되고(1-4절), 이방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되며(5-6절), 기생이나 부정한 여자와의 결혼은 결코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7-8절). 이는 죄로 말미암은 저주와 죄악의 상징이며 이방인들의 풍속을 좇는 것이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철저히 금해야 했다. 또한 제사장은 육체에 흠이 있는 상태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용납될 수 없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장애자는 불가하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단순히 육체에 흠이 있는 상태에서 제사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불편하기 때문에 금하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규례를 가지고 오늘날 목사가 이와 같이 거룩해야 된다거나 혹은 육체의 흠이 있는 자가 목사가 될 수 없다는 식으로 목사에게 한정해서 적용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본문은 결코 오늘날 목사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백성의 어른”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백성의 어른이란 무슨 말인가? 십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 말씀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즉 출애굽 당시에는 부모가 홍해를 경험한 자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구원을 배우고 알기 위해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모는 하나님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사장을 어른이라고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는 자이기 때문에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 역할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구별하셨다. “하나님의 위임한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21:12)는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구별하셨다는 뜻으로 주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어른이란 다스리고 본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나이가 많거나 세상을 오래 살았다고 해서 어른이 아니다. 또한 제사장이 특별한 직책이기 때문에 어른이라는 것도 아니며, 경험이 많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세상의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경험을 의지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세상 경험을 가지고 제사의 직무를 감당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제사의 직무가 수행되도록 하셨다.
따라서 언약의 말씀을 가진 자가 어른이다. 시편 105:22에 보면, 요셉이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요셉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언약을 아는 자가 주관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사장이란 이스라엘의 생명과 사망을 책임진 대표자로 세워진 것이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이미 아브라함 언약에서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라(창 12:1-3)고 약속하신 그 약속을 그대로 이스라엘 속에, 제사장 속에 담으셨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전체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자로 세움 받았기에 산 자의 하나님이요 생명의 하나님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생활 속에서 철저히 구별된 모습으로 흠없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22장에 보면 제사장이 성물을 먹도록 되어 있는데 이 성물은 철저히 흠없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성물이란 무엇인가? 한국 교회에서 성물이란 교회에서 쓰도록 예배당에 있는 것들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제사 제물을 말한다. 번제는 전체를 다 태워서 드리기 때문에 제사장 몫이 없지만 나머지 제사에서는 제물의 제육 일부가 제사장 몫으로 주어져서 제사장 가족의 음식이 되었다. 모든 시체를 가까이 하거나 접촉해서는 안되지만 제물로 드려진 성물은 제사장이 먹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뜻인가?
성물을 먹는다는 것은 헌제자들이 안수하여 제사로 드린 것이기 때문에 바로 죄인의 죽음 자체를 의미한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전체를 죽여서 그 주검을 먹는 자이다. 애굽에서 탈출하여 홍해에서 모두가 죽은 자였고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자들이 이스라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이 이스라엘의 주검을 먹어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임을 늘 확인한다는 뜻이다. 이런 모습을 지닌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며 이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이다.
이제 21장과 22장을 정리해 보면, 21장은 제사장 본인에 대한 것이고 22장은 성물에 대한 말씀인데 이는 각각 전후반부로 나누어져서 거룩과 흠없는 것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이다. 즉 21:1-15와 22:1-16은 제사장과 성물의 거룩에 대한 말씀이고, 21:16-24와 22:17-33은 제사장과 성물의 흠없는 것에 대한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제사장과 제물이 동일하게 거룩과 흠없는 것으로 일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온전히 성취되는 것이란 어떤 상태인가? 그것은 제사장과 제물의 거룩과 흠없음이 일치되어져서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로 드려지는 상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과연 언약의 성취자인 메시야란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했다. 과연 누가 메시야인가? 지금 제사장으로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아론이 우리의 메시야인가? 아니면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 모세인가? 그 답을 이 말씀을 통해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인간 제사장을 믿을 것이 아니라 거룩한고 흠없는 제사장이 자기를 거룩하고 흠없는 온전한 제물로 일치시켜서 자신을 드릴 때에 그를 언약의 성취자이신 메시야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제사장이 구약에 있었는가? 없었다. 그 제사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제사장으로 흠없는 제물이 되셔서 자신을 단번에 드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만이 우리의 죄사함을 이루는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히 9:11-15).
21:6, 22:2, 32에 의하면 “하나님의 이름”(성호)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곧 인격화되어 나타나실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실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제사 제도를 통해 제대로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장은 거룩함과 흠없는 모습을 통해 온전한 대제사장되시고 흠없는 제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어른인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대제사장으로서 교회의 어른이시다. 이것을 신약에서 바울 사도는 “교회의 머리”(엡 1:22, 골 1:18)라고 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시고 어른이시다. 결코 목사나 장로, 권사 또는 돈의 힘을 가진 자가 머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모두가 다 제사장이라고 선언하고 있다(벧전 2:9).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서 복음을 바르게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 비록 그가 새신자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모두가 다 거룩하고 흠없는 자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면서 사는 존재로 세상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레위기 23-24장
출애굽기 34:18이하에서 무교절(유월절)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21-23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 칠일에는 쉴지니 밭 갈 때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참고 출 23:14-17).
이스라엘의 절기는 세 번의 절기를 주기로 순환한다. 그 사이에 또한 다른 절기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을 레위기 23장에서 기록하고 있다. 본 장은 안식일(3절), 유월절과 무교절(4-8절), 초실절(9-14절), 칠칠절(15-22절), 나팔절(23-25절), 속죄일(26-32절), 초막절(33-44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안식일(3절)-출애굽기 34:21에서 세 절기에 대해 말하면서 안식일을 말씀하고 있듯이 본문에서도 먼저 여러 절기들을 언급하면서 먼저 안식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서두에 안식일을 언급한 것은 모든 여호와의 절기들은 안식일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안식이란 무엇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고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안식하셨다고 되어 있다. 그러면 안식이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상태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상태에서 인간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는데 출애굽 때에 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셔서 기억하여 지키라고 하셨다(출 20:8).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현실적으로는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시고 거기로 인도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가나안 땅이 아닌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안식이다. 그런 점에서 안식일을 기초로 해서 절기들이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이스라엘을 이끌고자 하시는 것이 어디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하겠다. 한 마디로 안식이다. 그것은 먼 미래의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탈출하여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 있는 것이 안식 안에 있다는 것이다. 광야에 있으면서도 안식이다.
이 안식은 처음 창조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상태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관계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다스림을 받는 상태이다. 그 상태는 지금 이스라엘 속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다스림을 받는 상태로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난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죄다. 인간의 죄 때문에 안식의 상태가 될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근거를 보이시는 것이다. 그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해의 시작이 되게 하신 첫 절기를 통하여 보여주신다.
유월절과 무교절(4-8절)-유월절은 1월 14일이고 무교절은 1월 15일부터 7일간 지키도록 되어 있다. 첫 날이 안식일이고 마지막 날이 안식일이다. 즉 안식일로 시작해서 안식일로 마친다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고 무엇 안에 있는가? 혹은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유월절이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어린 양의 희생의 피 때문에 죽지 않고 생명이 보존된 상태로 살아 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안식의 상태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7일간 누룩을 넣지 않은 떡과 쓴 나물을 먹는 것으로 애굽에서 나온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내면서 세상과 구별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유월절로 해의 첫해가 되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출 12:2). 전혀 다른 피조물로 새로운 세계에 산다는 뜻이다.
초실절(9-14절)-초실절이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가서 제사장이 그 단을 흔들어 여호와께 바치면 번제와 소제와 전제의 포도주로 제사를 드리는 날이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10절)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주셨을 때에 지킬 수 있는 절기이다.
그렇다면 그 땅에서 나는 곡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대한 감사이다. 땅의 곡식은 땅을 주셨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땅이 없다면 곡식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초실절을 지키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언약하신대로 이루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절기이다. 결코 곡식 단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얼마나 무엇을 가지고 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인정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는데, 이 본문이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더구나 추수감사헌금을 거두면서 많이 헌금하는 감사가 있어야 한다고 사기를 치고 있다. 본문은 결코 오늘날 추수감사절기를 지키며 추수감사헌금을 많이 드려야 하는 당위성을 지지해 주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이다.
이 절기를 오늘날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으로 말미암은 감사가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에서 난 곡식을 소유한 것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거하게 된 것으로 드린 감사였듯이 오늘날 우리는 내가 무엇을 얼마만큼 소유하였는가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소유당함에 대한 감사가 날마다 있는 자가 성도이다.
오순절(15-22절)-이 절기는 첫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50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에 오순절 또는 칠칠절이라도 부른다. 이 절기는 수확을 공식적으로 마무리짓는 성격의 절기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곡식을 거두게 되었으니 제사를 드리면서 모두 함께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손으로 주시는 식물을 함께 먹는 한 식구라는 것을 확인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러한 은혜의 풍성함은 가난한 자와 나그네까지도 누리도록 하셨다(22절). 이것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습이다. 그것은 구원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 누리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다.
나팔절(23-25절)-7월 1일로 안식일을 삼으며 나팔을 불며 아무 노동도 하지 아니하고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절기이다. 문자적 의미는 ‘기억하기 위한 나팔 소리’라는 뜻이다. 여기서 기억한다는 것은 출애굽기 2:24에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심과 관련된 말이다. 또한 출애굽기 19:16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기 위하여 강림하실 때에 나팔을 불었다고 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루신다는 것을, 이스라엘 속에 항상 강림해 계심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알고 기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팔절이 종교력으로는 7월 1일이지만 민간력으로는 1월 1일이다. 곧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로운 날로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런 점에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나팔 소리로 표현하고 있으나(마 24:31, 고전 15:52, 살전 4:16, 계 8-11장),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이다.
속죄일(26-32절).-7월 10일은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을 위해 속죄하는 날로 곧 대속죄일이다. 이 날에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27,29절:금식), “큰 안식일”(16:31)로 지키며, 대속의 제물을 드리고,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보내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를 기억하여야 한다(16장).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요 속죄함을 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쳐진다고 했다(29,30절).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신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또 다시 제사드릴 것은 없지만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 문제를 더 이상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죄인됨을 깨닫는 중에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는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본성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됨을 알고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데서 십자가의 긍휼과 은혜는 더욱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다.
초막절(33-44절)-7월 15일부터 7일간 나뭇가지로 초막을 짓고 그 초막에서 생활하는 절기로 수장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한다. 이 절기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던 때에 장막 생활했던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 때는 장막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약속의 땅에서 정착된 집에서 살게 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현재 주어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성도란,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은혜로 알고 결국에 모든 것을 주님께로 돌려드리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롬 11:36).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7가지 절기들은 시간 속에 사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영생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를 확인하도록 허락된 절기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을 잊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출애굽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된 것이고, 약속의 땅에 도착한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이며, 농사짓고 수확하게 된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평화를 누리고 속죄가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낮아지시고 희생하심 때문인줄 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절기들은 시간을 초월하시고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흡수되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시간 속에서 지켜야 할 절기들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신자는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그 마음이 하나님과 끊어져서 살 수 없는 민족이다. 오늘날 믿는 신자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의 노력과 계산과 수완으로 사는 줄로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애굽적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주심으로 다시 살게 된 자들이 구약의 이스라엘이며, 오늘날 교회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24장에서 성소의 등불과 진설병에 대한 관리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는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23장의 절기들, 24장에서의 등불과 진설병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사건, 25장의 희년에 대한 말씀이 별로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23장에서 이스라엘이 절기들로 하나님의 구원을 잊지 않아야 되었다면 단순히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년 내내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는 것을 통해 애굽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이스라엘다운 언약정신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성소에 열 두 덩이의 진설병은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 맞은 편에 등대에 불을 계속적으로 밝혀두어서 하나님께서 항상 이스라엘을 밝히 비추시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 애굽에서 건짐받은 이스라엘은 자기의 욕심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늘 하나님께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그 앞에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사는 자이다. 언약대로 산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지 않는다는 삶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걸맞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에 맞지 않는 사고방식이 곧 애굽적 사고방식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지만 그 아비는 애굽 사람인 한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한 사건을 들어서 구원의 의미를 설명하신다.
이런 애굽적 사고방식이 왜 자녀들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그 책임을 하나님은 부모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부모가 부모 노릇을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10절에서 그 부모가 누구인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결국 그 애굽 사람은 자식에게 애굽의 사고방식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애굽적 사고방식이 그들에게 남아 있는 한은 결코 하나님의 안식의 상태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애굽적 사고방식을 가진 자를 돌로 쳐죽임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낼 수 있는 안식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성소에서 등대로 비춰지는 열 두 덩이의 진설병과 같은 상태이다. 성막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안식, 곧 천국의 모습을 그대로 지상에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무엇이 죄악의 길이고 죄악의 길이 아닌지 결코 알 수 없다. 성령께서는 오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서신다. 그래서 십자가의 정신과 반대되는 모든 세상적 정신을 책망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날마다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이다.
레위기 25장
본 장은 희년에 대한 말씀인데 희년의 기초가 되는 안식년에 대해서 먼저 기록하고 있다. 육년 동안은 파종하되 제 칠년에는 땅을 쉬게 하라는 것이다. 2절에 의하면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고 했고 4절에는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안식년은 ‘땅의 안식’이다. 땅의 안식이 왜 있어야 하는가? 땅의 안식이란 이스라엘에게 어떤 의미인가?
창세기 2:2에 보면,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안식이란 단순히 쉰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을 보시기에 좋았다는 개념이다(4,10,12,18,21, 25,31절). 따라서 안식이란 일곱째 날 하루에 관한 것이 아니라 7일 전체가 안식이며 인간의 안식이 아닌 하나님의 안식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들로 인하여 안식의 상태에 거하신다는 뜻이다. 이러한 안식을 ‘7’이란 수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함으로 땅은 저주 아래에 있게 되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비록 저주 아래에 있는 땅이지만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말씀하시고 안식년과 희년에는 그 땅을 쉬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안식넌과 희년을 통해 약속의 땅만큼은 본래 하나님의 안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다.
그러므로 안식년의 7년이 일곱 번 반복하여 강조된 희년이란,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년과 안식년이 일곱 번 반복된 50년째를 희년으로 지킬 것을 말씀하신다. 희년에는 토지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줌으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준 처음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건져내어 여호와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살게 된 존재가 이스라엘이기에 모든 백성들이나 땅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애굽의 품군이 아니라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품군이다. 따라서 어떤 형편에 의해서 종이 되었든지 희년이 되면 해방시켜 주어야 하는 것이다.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어서 처음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것이나 종을 해방시켜 주는 것으로 이스라엘은 구원의 하나님을 늘 기억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기에 희년의 근본적인 취지는 23절과 38절, 55절 말씀 속에 담겨 있다:“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23절),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또는 가나안 땅으로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38절),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55절).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었다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취지를 제대로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약속이 지향하고 있는 바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이다. 즉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 애굽에서 건짐받아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들의 삶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희년이 되면 파종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희년 전에 삼년 쓰기에 족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것이다(21절).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것에 목표를 두고 축적하는 나라가 아니라 세상을 것을 포기하고 나누어 주는 나라임을 하나님께서는 희년이라는 제도를 통해 가르치시는 것이다. 희년이 되어 노예를 해방시켜 줌으로써 하나님 나라는 누가 누구를 지배하거나 군림하는 나라가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나누는 나라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야 했다.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지 아니함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희년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안에서 희년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이사야 5:8에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했고, 미가 2:1,2에서는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니 그들이 사람과 그 집 사람과 그 산업을 학대하도다” 라고 선지자들은 율법의 말씀을 가지고 희년을 무시했다고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했다. 이스라엘은 율법의 말씀을 무시했다. 희년을 비롯한 모든 율법의 말씀대로 사는 것에 실패했다.
이스라엘의 실패 때문에 메시야가 오시지 않으면 안된다. 누가복음 4:16-21에 보면, 예수님은 이사야 61:1이하의 말씀을 인용하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주의 은혜의 해(희년)가 오늘(안식일)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희년이 의미하는 바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임을 주장하셨다(눅 6:5). 그러면 희년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희년이란 누구인가 라고 물어야 한다. 희년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진정한 안식,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 것이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안식 자체이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희년 안에, 안식 안에 있는 자이다. 그 사람들을 교회라고 한다. 그러면 교회란 당연히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자들이어야 한다. 내 것은 없고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에 의해 살아감을 늘 고백하는 모습이어야 한다. 그것은 곧 주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은혜임을 공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교회 많은 목회자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보여주지는 않고 오히려 안식년의 구약 제도를 가지고 7년 동안 목회를 했으면 쉬어야 한다는 핑계로 안식년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안식년이나 희년은 결코 인간이 쉰다는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파종하지 않음으로 땅을 쉬게 한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기 희생이라는 은혜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안식을 맛보는 것이었다. 그 안식은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죄에서 해방되어 땅의 저주 아래에서 놓임받아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보여주며 사는 자가 오늘날 이스라엘로서의 교회이다.
레위기 26장
이스라엘은 희년 공동체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님은 그것을 26장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1-13절은 언약의 말씀이 제대로 시행되어 하나님의 복이 임한 상태를 말씀하시고, 14-46절은 언약의 말씀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 상태를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이라고 해서 무조건 평안히 살 수 있는 안식의 땅이 아니다. 안식의 땅은 하나님의 안식의 상태가 그대로 보존되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서 에덴동산이 하나님의 안식의 상태로 유지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인간들의 범죄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이 안식의 상태로 유지되는 것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시행될 때에 가능한 것이다. 이 말은 약속의 땅에서 안식 할 수 있는 것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조건이 아니다. 조건이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결코 은혜의 약속이 될 수 없다. 조건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는 약속의 말씀대로만 시행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권고하여 나의 너희와 세운 언약을 이행하여 너희로 번성케 하고 너희로 창대케 할 것이며”(9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때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번성하여 충만하라고 하신 말씀은 결코 인간을 향한 명령이 아니라 창세기 1:28 서두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인간에게 복을 준 상태를 일컫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준 상태가 번성하고 충만하게 되는 상태이다. 그것은 인간이 노력하고 그 말씀대로 지켜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에덴의 모든 것들을 누리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복이 온 땅에 흘러 넘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그 종된 것을 면케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너희 멍에 빗장목을 깨뜨리고 너희로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12,13절)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바로 걸을 수 없는 자였다. 하나님의 안식과는 관계가 없던 자였는데 그들의 빗장목을 깨뜨리고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하나님의 안식 안에 있게 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해 희년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게 된 것 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로 돌이키는 자들이 아니라 말씀을 거스리며 거부하는 자들이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냥 두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여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33,34절). 이스라엘을 이방인들의 포로로 만들어서라도 약속의 땅을 안식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는 약속이 지향하고 있는 한 인물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언약을 생각하여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42절)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후에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하지 않으시고 바벨론 포로에서 남은 자로 돌아오게 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언약 때문이었다(44절). 결국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조치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죄 됨을 보시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시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우신 새 언약의 피에 근거한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에 의해 취소되거나 좌절될 수 없는 확실한 구원이다.
레위기 27장
본 장은 서원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가 율법의 문제를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원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해서 결코 서원한대로 반드시 지키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는 반드시 언약의 말씀대로 지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조건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 26장에서 하나님께서 축복과 저주를 선언하시는 이유가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함을 너무도 잘 아신다(창 8: 21)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구원이 있다면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은혜로 말미암은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서원, 즉 인간 편에서의 약속이란 늘 불완전한 것이다. 인간의 서원이 완전하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서원에 대한 각종 조치들을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서원을 했다면 분명히 신실하게 행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반드시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서원에 대하여 무르는 방법을 본 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정가된 대로 돈을 내어야 무를 수 있는데(1-8절), 여기서 사람을 드린다는 것은 제물로 드린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헌신하기로 작정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생축이면 좋고 나쁘고 간에 바꾸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며, 부정한 짐승을 무를 때에는 정한 가격대로 돈을 내되 무르려면 정한 가격에 1/5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내고 무르게 했다(9-13절). 집도 드리려고 했다가 무를 때에는 정한 가격에 1/5을 더하여 내야 되었다(14,15절). 이런 식으로 기업으로 받은 밭에 대해서도 드리는 법과 무르는 법을 가르치고 있으며(16-25절), 십일조를 속하는 법(30,31절) 등을 말씀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께 약속한 것들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원한 것을 무르는 것을 통해 본래 너희들이 누구에게 속했는가를 알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오직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 새끼라 우 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26절)라고 말씀하고 있다. 원리적으로는 모든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다. 이 원리 원칙은 이미 출애굽 할 때부터 초태생은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릴 것으로 말씀하셨다(출 13:1,2).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십일조이다. 십일조란, 단순히 소득의 10%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뜻이다.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리므로 제사장에게 속한 제사장 나라임을 고백하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림으로서 복이 세상의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때문에 서원한 것에 대하여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여 무르려고 할 때에 기본적으로는 말씀에 정한대로 하지만 서원한 자가 가난하여 정가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서원자의 형편에 따라서 제사장이 정하는대로 무르면 되는 것이다(8절). 즉 제사장이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제사장에게 속하여 있는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원한 것에 대하여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였을 경우 물질적인 것으로 대체해서 약속한 것에 대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희생에 이스라엘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표시가 되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애굽의 초태생을 다 죽일 때에 살아난 자들이 이스라엘이므로 이스라엘은 어린 양이 희생된 피의 흔적이다. 그것을 철저히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으로 보여주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이스라엘인 것이다. 결국 본 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서원한 것에 대하여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이스라엘을 속박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희생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주신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오늘날에도 교회에서는 서원을 강요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서원한 것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인들이 하는 서원을 보면 자기 욕심에 이끌려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자 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신학교에 보면 일찍이 부모의 서원으로 인해 할 수 없어서 신학교에 왔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본인도 소위 자신에게 일어난 온갖 실패를 하나님의 회초리로 말하면서 결국 부모님의 서원대로 신학교에 올 수밖에 없었다는 간증들을 늘어놓는다. 사실은 주님과 하등 관계가 없는 것들을 가지고 주님과 연관시켜서 소명을 합리화시키려 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3-37).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했는데 이 땅에 있는 것에 권위를 부여하면서 맹세하며 서원해야 하는 것이 있는가 하는 말씀이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의 머리털조차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옳다, 아니다 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거기에 더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말한다는 것은 죄를 더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 함부로 서원하거나 약속하는 투로 말하거나 기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즉 진리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믿는 자는 진리임을 증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나의 삶 속에 담아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주님께 서원하고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주님을 우습게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다. 혹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에 서원한 것이 있다면 회개하고 그 서원의 속박에서 벗어나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께 사로잡혀 있는 자유함을 누리는 모습이 신자의 모습이지 율법에 얽매이는 모습이 아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레위기 공부를 마치면서…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가 콜라보다 진하지 않으며 그렇게 무가치하고 가소롭더란 말인가? 그렇게 십자가를 믿고싶지 않는가? 레위기는 폼생폼사(폼에 살고 폼에 죽는 것)를 위한 책이던가? 좋다! 이대로 살자! 예수님의 십자가와 피를 무시하는 자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며 사는 것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삶이 아니겠는가? 예수께서 자기 땅에 방문하셨을 때에 그렇게 당하셨으니 내가 그렇게 당하는 것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러니 세상살이에 눈을 부라리며 못에 핏대 올리며 아둥바둥 살지 말고 웃음으로 넘기며 살자꾸나.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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