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1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2003. 6. 8. - 2005. 1. 30.)
目 次
1. 복음을 위하여
2. 부르심
3. 같은 믿음
4. 왜 복음인가?
5. 의인의 삶
6. 하나님의 진노
7. 하나님을 알되
8. 버려두심
9. 판단
10. 행한 대로
11. 송사와 변명
12. 겉과 속
13. 거짓된 사람, 참되신 하나님
14. 인간의 실상
15. 율법과 의
16. 구속으로 말미암아
17. 자랑
18. 율법을 세움
19. 행복하십니까?
20. 할례의 뜻
21. 상속자
22. 무엇을 믿는가?
23. 칭의, 그 결과
24. 사랑의 확증
25. 성도의 즐거움
26. 두 세계
27. 죄가 더한 곳에
28. 은혜의 왕노릇
29. 죄에 대하여 죽은 자
30. 연합
31. 단번에
32. 죽을 몸
33. 죄의 종과 의의 종
34. 하나님의 은사
35. 율법에 대하여 죽음
36. 새로운 섬김
37. 율법의 기능
38. 원함과 행함
39. 탄식과 감사
40. 정죄함 없음
41.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
42. 그리스도의 사람
43. 영의 인도
로마서 1:1-4 복음을 위하여 2003. 6. 8.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1)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2)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동안 사도행전을 통하여 바울사도가 예수님을 핍박하다가 오히려 예수님께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부터 로마서를 보겠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가기 전에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빠르게 읽으면 30분 정도면 로마서를 다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로마서 주석과 강해는 로마서 분량의 수천 배의 주석과 강해가 나와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경우에는 로마서 1장의 강해설교가 무려 5백여 페이지의 책 한권입니다. 로마서 9장까지만 이런 책 아홉 권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복음의 풍성함이 이렇게 엄청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 가운데 로마서가 얼마나 엄청난 일을 감당하였는지는 교회사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마틴 루터가 1,515년 로마 카톨릭의 신부요 신학교수로서 로마서를 강해하다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말씀으로 인하여 루터 자신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온갖 종교적인 선행이나 고행을 통하여서도 얻을 수 없었던 평안과 기쁨을 로마서를 통하여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종교개혁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이 로마서의 말씀을 통하여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기를 소원합니다. 지금도 주님은 살아계셔서 바울사도를 사로잡아 돌려놓았듯이 우리들도 말씀으로 사로잡아 돌려놓으시기를 기대하면서 이 말씀을 대하고자 합니다. 종, 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자신의 신분이 종이라고 합니다. 이 당시의 종이란 노예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스스럼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종이란 자기의 주도권이 없는 것입니다. 자유라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새로운 주인의 종이 된 것이 너무나 기쁘고 자랑스러워 말하는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이 스스로 누구의 종이 되려고 합니까? 모두가 종이 되지 않으려고, 또는 낮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살고 있는 세상에서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은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전에는 누구의 종이었습니까? 마귀의 종이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위하여 열심을 낸다고 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자기를 불러주시고 그의 은혜를 받고 나니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이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오늘 오후에 볼 출애굽기 21:1-6절에 보시면 어떤 종이 칠년을 봉사하고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고서 자녀를 낳았으면 아내와 자식을 상전에게 값을 주고서 데리고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값을 치르지 못하면 자기 혼자 자유의 몸이 됩니다. 이때 종이 상전에게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아니하겠노라고 합니다. 그러면 상전이 재판장 앞에 가서 그 종의 귀를 송곳으로 뚫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가 영영히 상전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종이 자기의 자유를 포기한 것은 왜 그렇게 한 것입니까? 자기의 상전이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종에게 아내도 주시고 살게 하셔서 자식도 낳았는데 이제 자기가 자유 할 수 있다고 해서 혼자 나가는 것이 아니라 평생 상전의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통하여 자유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종교성에서 자유,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처럼 비 진리에서 자유 하는 것은 좋습니다. 바울도 이러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자기의 육체의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13-15절입니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ㄱ)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사도, 계속하여 1절을 봅니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고 이어서 사도라고 합니다. 사도라는 말이 보내심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종이라고 하여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만 사도의 특별한 임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계시를 기록한 것입니다. 물론 사도 중에 계시를 기록한 사도도 있고 그렇지 아니한 사도도 있지만 계시를 기록하는 것은 사도로 제한된다는 의미에서 사도의 특별한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사도성으로 인한 반대에 부딪히면 자신이 적극 사도임을 변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친히 사도로 부름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바울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름을 받은 것은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이란 말은 말 그대로 복된 소식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되고 기쁜 소식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취업, 승진, 합격, 소원성취 이런 것만 기쁜 소식으로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성경에 증거하는 기쁜 소식에 대하여 시큰둥한 반응 같아 보입니다. 이런 저런 사소한 문제들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저 자신도 로마서를 통하여 다시 점검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함께 도대체 왜 복음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복음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런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위하여, 바울사도가 복음을 위하여 사도로 부름을 입었다고 하면서 그 복음을 위하여 자신은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복음이 무엇이기에 자기의 목숨도 복음 앞에서는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로마서 1:16절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구원의 능력이 어디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까? 그 구원의 능력이 복음 안에 있는데 이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시는 것만 있는 나라입니다.
언약의 핵심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서 인간들이 자기 마음대로 떠나서 자기가 하나님처럼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어떤 종교나 선행이나 율법을 가지고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구원이 없습니다. 오직 복음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기쁜 소식이요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누린다고 하여도 이 복음을 모르고 복음을 믿지 아니하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비록 거지 나사로처럼 살았다고 하여도, 강도였다고 하여도 복음을 알았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거지나 강도로 살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거지나 강도같이 실패한 인생으로 보이더라도 복음은 그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세리와 창기라도 복음을 받은 자와 버린 자의 차이란 이만큼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복음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로마서 1:2절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하여금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여 두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약속은 결국 아들에 관한 약속입니다. 이 아들을 믿으라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아들에 관하여 성경이 어떻게 증거 하고 있는지를 간략하게 정리하여 봅니다.
창세기 3:15절에서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후손이 누구인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아니하지만 분명히 약속의 후손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의 후손인 노아에게서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죄로 인하여 수고하는 자들에게 안위를 주리라는 노아입니다. 그래서 홍수의 심판에서도 노아의 방주에 탄 사람들은 살아남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아브라함과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 중에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습니다. 이삭이 약속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없는데서 있게 되었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모습입니다. 이런 식으로 요셉도 계시가 되고 있습니다. 유다도 다말도 결국 어떤 희생을 감당한 한 인물에 대하여 계시하고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시편 2편에서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고 합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다고 하십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철장 권세로 깨뜨리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면, 그를 믿지 아니하면 진노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으면 복, 믿지 않으면 그만 이라면 믿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에 입 맞추지 아니하며 망하는 것입니다.
이 아들로 오시는 분이 이사야 7:14절에서 구체적으로 명시되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이미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이 아들로 오시는 분의 이름과 하실 일에 대하여는 이사야 9:6-7절.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한 아기, 한 아들이 왕으로 다윗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어 내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하신 대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이사야 53장에서 예언된 것처럼 너무나 볼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는 모습으로 오셨기에 아무도 그를 환영하거나 영접하지 아니한다는 예언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멸시와 천대는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대로 신실하게 이루어 내신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마태복음 1:1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에 약속된 아들에 대한 성취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으로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들을 믿는 자는 의롭다 함을 받고, 이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이 아들을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까?
로마서 1:3-4절입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으나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신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되셨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약속대로 오신 분이시고, 거룩한 영으로는 이미 아브라함과 다윗보다 먼저 계신 분으로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11절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살려내신다는 것입니다. 복음만이 죽음의 권세를 이겨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죽을 일들에 대하여 두려워도 마시고 염려도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그 아들 안에서 다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이제 삶으로 꽃 피워지기를 소원합니다.
로마서 1:1-7 부르심 2003. 6. 15.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1)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2)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지난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아니면 걱정과 염려로 한 주간을 지냈습니까? 대부분이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걱정과 염려 불안이 왜 생기는 것입니까? 분명하게 현실적으로 무언가 닥친 것이 없는데도 막연한 두려움, 장래에 대한 염려로 인하여 불안하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불안과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셨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를 늘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소유를 안전하게 보존하고 더욱 늘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은 매일의 삶이 나의 노력과 실력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유지됨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도란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년, 십년, 백년, 자자손손의 양식까지 비축하여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불안이나 두려움을 없애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5:10-17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11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12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13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14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 것도 없느니라 15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16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17 일평생을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이 세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얼마나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삶이 헛되고 헛되다고 솔로몬이 체험적으로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헛됨 속에 또다시 함몰되어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소유의 늘어남이 만족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근심이 더하여 지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넘어가지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저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사는 것은 그저 바람을 잡는 것과 같아서 일평생을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야 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말씀을 매주 들으면서도 우리도 여전히 이러한 삶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왜 입니까? 이것이 해 아래 있다는 것이며, 아담아래 있다는 것이며,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재물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자신의 고유의 창조적인 활동-경제, 과학, 학문, 종교-에 스스로 도취하여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자기 행한 일의 결과에 보람과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나를 위한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환경에 굴절된 생명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헛되고 저주스러운 삶에서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이 자기 의로 달려가던 바울을 부르시고 돌이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종으로 삼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복음이란 성경에 약속된 대로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 아들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주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을 입은 자가 바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전에는 자기가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종이 되었습니다. 그 종이란 이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의도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까? 그로 말미암아, 즉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았고 사도의 직분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분도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는 것은 그 이름을 위하여, 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직분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여러 가지 직분이 있습니다.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고 집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직분이란 무엇을 위한 직분입니까? 자기 이름을 위한 직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한 직분인 것입니다. 자기의 이름을 과시하기 위한 직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게 하기 위한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비록 서리집사로 임명을 받았다고 하여도 그 직분이란 것이 내 마음대로 살기 위한 직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한 직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직분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받은 것이며,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자신이 이방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에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려고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바울이 전한 이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이 따르는 것입니까? 믿어 순종케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이라는 말은 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믿음이란 바른 순종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이 없는 사람을 보고서 왜 순종이 없느냐고 다그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순종이 없다는 것은 무엇이 없다는 것입니까?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생명의 관계이기에 반드시 그에 따른 순종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명의 현상이 잘 나오지 않으니 억지로 행함이라는 열매를 갖다 붙인다고 그것이 생명의 열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식의 열매요 육체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믿어 순종케 된 사실은 어떤 내용입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세상과의 분리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세상은 하나님께로부터 창조가 되었으나 죄로 인하여 이탈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필요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은 육의 세계입니다. 인간들의 세상입니다. 인간들이 주인이고 왕 노릇하는 세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부름을 받으니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에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현실이란 주님의 약속하신 세상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 순종케 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의 부르심이란 바울과 동일합니다. 로마에 있든지 창원에 있든지 직분은 다를지라도 부르심은 동일합니다. 어떤 부르심입니까? 거대한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는 중에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영원한 멸망 길로 더욱 가속을 붙여가면서 달려가는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불러내심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유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내 인생을 나의 것으로 운전하고 가려니 얼마나 분노하고 염려하며 살았습니까? 이제 주인을 제대로 만났으면 그 주인에게 맡기고 시키는 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3:1-7절을 봅니다. “봉독”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너는 내 것이라고 불러내신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을 말씀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계시를 야곱의 생애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계시가 무엇입니까? 소유권 싸움입니다. 야곱이 태어나면서부터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만 태중에서도 서로 싸웠습니다. 서로 나오려고 싸운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서 태어난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차남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은 야곱에게 있습니다.
이 당시에는 장자가 되어야 아버지의 상속권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야곱이 형의 배고픔을 기회로 장자 권을 가로채고, 아버지와 형을 속이면서 축복을 받아낸 사람입니다. 그리고 외삼촌의 집에 가서도 자기의 소유를 늘리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그러는 중에 아내가 네 명이나 되었고 그 아내들의 시샘과 질투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꾀를 사용하여 결국 많은 소유를 가졌지만 그 소유가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한 야곱을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시 가나안땅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얍복강 가에서 불안하여 잠을 자지 못하는 밤에 주님께서 야곱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야곱, 발목 잡은 자, 사기꾼의 이름에서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평생이 험악한 나그네의 세월이었다고 노년에 고백합니다. 왜 그렇게 험악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까? 자기가 지키려고 한 것들이 오히려 빼앗기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고 하다가 오히려 절름발이가 되어서 평생 자기 힘으로 도망도 가지 못할 신세가 됩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너는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줄 알고서 살았던 야곱이기에 험악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나의 소유 지키거나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주인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한 부름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기더라도 결국 주님의 약속 하나 받는다면 이것이 복음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6절입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라는 말씀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름을 입는 것은 로마에서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하여 믿어 순종케 하는 것이란 결국 우리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목적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주인에게 돌려져야 할 것을 돌려주면 얼마나 홀 가분 하겠습니까?
얼마 전 드라마 ‘저 푸른 초원위에’라는 곳에서 주인이 사고로 쓰러질 때 그 집의 머슴이 재산을 가로채서 부자가 되었지만 평생 그것으로 눌려 산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의 딸에게 이실직고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 안하고 숨기고 사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더 괴롭다는 것입니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빈손으로 와서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 살면서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참된 평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즉 주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무엇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7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인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 평안이란 것이 불안이 되고, 불안이 오히려 평안이 되는 이러한 은혜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름을 입은 모든 자들에게 있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19-20절의 말씀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로마서 1:8-13 같은 믿음 2003. 6. 22.
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가고자 하고 이루고자 하는 방향성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런 목적도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런 목적 없이 산다는 그것도 하나의 방향성입니다. 이러한 본능적인 방향성이란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가는 길입니다. 누구나 예외가 없습니다.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 올 자가 없음을 성경은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자로서-도저히 인간의 조건과 근거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기에-때가 되어 주님께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주님과 원수 된 길로 가다가 이제 주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것은 복음을 위하여 주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이 복음은 성경에 미리 약속이 된 것인데 곧 그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아들에 관한 증거입니다. 이 아들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좋게 봐준다고 하여도 그저 한때 잠간 반짝하면서 나타났다가 사라진 뛰어난 선생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아들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요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시요 장차 심판의 주로 재림하실 분이심을 믿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 미련하고 거리끼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를 구원의 능력으로 믿는다는 것이 참으로 기적입니다. 어떻게 이런 믿음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8절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에서 믿는 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아직 로마에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름 없는 누군가 로마에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미 사도행전 1:8절에서 약속하신 바대로 복음이 증거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일하신 결과로 믿는 자가 나왔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그렇게 기쁜 것입니다.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는 로마에 예수 믿는 자들이 있다는 소식이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었는지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여 왔으나 믿는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믿는다고 따라 나섰다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기도 하고, 바울을 버리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1:15절에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16절에도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마에서 믿는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 막혀서 가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꼭 만나보기를 기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출신도 지역도 성격도 취미도 다 다르지만 오직 하나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렇게 보고 싶어 한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고난과 핍박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렇게도 싫어하던 복음을 듣고서 믿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마음이 있습니까? 일주일에 이렇게 한번씩 만나는 것이 기대가 되고 기다려집니까? 예수 믿는 그 형제를 만나고 싶고, 보고 싶고 그렇습니까? 분명히 같은 믿음이라면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데 우리가 그렇지 아니하다면 이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같은 부르심을 입었다면 분명히 같은 믿음이 나오게 될 것이고 그러면 서로 믿음 안에서 교제가 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도 그 안에서 바울을 반대하여 여러 파당이 생기게 되고 바울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울을 버린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관심사가 말씀에 있지 아니하고 다른데 관심사가 있다면, 그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싫어서 떠나든지 하는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같은 믿음이라면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1-6절을 봅니다.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이 하나 됨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몸도, 성령도, 소망도, 주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님도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직접 복음을 전하지는 아니하였지만 로마에 있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들을 그렇게 보고 싶어 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을 만나서 무엇을 하고자 한 것입니까?
첫째로, 11절입니다.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여기서 신령한 은사란 신비한 것을 말하는 것보다 영적인 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의 풍성함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더욱 진리 가운데 든든히 서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에게 기도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알게 되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믿음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믿는다는 그 믿음이 얼마나 엄청난 선물이며 기적이며 축복인지를 알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속한 모든 하늘의 신령한 복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바울은 이미 다 보고 온 사람입니다. 그 은혜의 영광에 대하여 사람들은 무시하고 핍박하고 발로 밟아 버렸는데 로마에서도 믿음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얼마나 감격 하였겠습니까?
사도행전 20:29-32절을 봅니다.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사도가 로마로 가면서 에베소의 감독들에게 부탁을 하는 내용입니다.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능히 든든히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로마의 성도들을 만나 보고자 한 것도 무엇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든든히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보내는 것입니다.
성도란 남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나누어 줄 수가 있습니까? 무슨 신령한 것들을 나누어 줄 수가 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무엇을 주었습니까?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만나면 무엇을 나누어 줄 것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 하실 수가 있습니까? 도대체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무슨 이야기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성경공부를 하고서 돌아서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그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벌써 가물가물하여 져 있습니다. 이러고서도 우리가 믿는 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지난주 목요일에 동아대학병원을 다녀왔습니다. 저의 국민학교, 중학교 동기였는데 암으로 입원하여 있습니다. 한달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금과 은은 없으니 줄 것이라고는 복음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예수를 믿도록 권면하고 영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다른 친구 소식도 들었습니다. 검사가 된 친구인데 서울에 가고서는 연락이 되지 않았는데 지금 창원지검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친구에게도 무엇을 제가 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으라는 이야기 외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지금 죽어 가는 사람에게도, 세상에서 권세와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도 어느 누구에게도 줄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나는 세상이 볼 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보이지만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에게 자기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한 것처럼 성도란 세상 사람들에 줄 것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린도후서 6:1-10절입니다.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가라사대 ㄱ)내가 은혜 1)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으로 부요하게 하는 것입니까? 복음으로 부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복음의 풍성함을 나누기 위하여 그들을 만나 보고자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12절입니다. 너희의 믿음과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이었기에 한번도 낙심이나 좌절이 없이, 사람들의 위로도 없이 복음을 힘 있게 증거 하였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두렵고 떨렸습니다. 약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자주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에게도 성도들의 위로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면 사도의 위로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었습니다. 나도 죄인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렀고 당신도 그러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이것이 안위입니다. 이들 안에서 서로 교제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 위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주고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피차 안위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13절입니다.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원한 열매는 결국 그 아들의 복음으로 인하여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기를 바란 것입니다. 한 믿음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인종과 신분의 지위고하를 무론하고 한 주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성도란 서로 교제할 수가 있으며 그 교제가 기쁜 것입니다.
오늘이 제가 창원에 온지 만 4년입니다. 제가 처음에 여러분을 만났을 때에 여러분이 말씀을 듣기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즈음도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는 반가운 마음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제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증거하고자 하였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죄악의 뿌리 깊은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란 허공중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의 중심에서 일어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 복음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들이 나온다면 이것이 목사의 안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 4년이 지난 오늘 그동안의 모습을 돌아보면 과연 제대로 복음을 전하였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으로 주님 외에 소망이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사이니까 의례히 그러하여야 하고 여러분은 여러분 마음대로 산다면 어떻게 피차 위로가 되겠습니까? 한 믿음을 받았다면 한 소망을 받았다면 세상에 썩어지고 없어질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영원한 복음, 그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언제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로마서를 통하여 다시 복음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도가 말한, 복음 안에서 형제를 만나는 기쁨이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14-17 왜 복음인가? 2003. 6. 29.
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ㄱ)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이 6월 29일입니다. 군부독재에서 민주화를 하겠다고 선포한 날입니다. 지금 정치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구절을 외우기 위하여 예를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후에 주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고서 물었습니다. 영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29절에서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 그저 인간의 가능성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손으로 무언가 만들어 내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하신 일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믿어준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로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기쁜 소식으로 들립니까? 기분 나쁜 소식으로 들립니까? 기쁜 소식으로 들리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인줄 제대로 아는 사람에게는 기쁜 소식이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가능성을 가지고 무언가 할 수 있다거나 무언가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기분 나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언제나 우리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배척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자존심을 채워주는 그런 복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인간이 부족하고 못났으면 하나님께서 대신 일을 다 하셔야 되는가 하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복음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비밀을 계시로 받은 바울 사도는 이 복음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고 그래서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모두 빚진 자라고 합니다. 자신이 복음을 받았고, 또 복음을 증거 하는 자로서 부름을 받았기에 복음에 빚진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다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표현으로 더 강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는 말씀과 같이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표현보다 더 강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복음이 무엇이기에 이 복음에 빚진 자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믿는 자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복음이 무엇인데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까? 먼저, 도대체 인간이 왜 구원되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복음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들은 구원을 여러 가지로 말하게 됩니다. 병이 든 사람은 병 고침, 가난한 사람은 부자 됨, 종은 자유자가 되는 것, 지배받는 나라는 해방되는 것, 싸움이 있는 곳에는 평화를, 미움이 있는 곳에는 용서를, 등을 구원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서로 어울려 사이좋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꿈꾸는 것입니다. 물론 죽고 나서 내세에서 좋은 곳에 가는 것을 구원으로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구원이란 죄에서의 구원입니다. 죄란 윤리에 어긋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주체적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자아를 드러내는 삶입니다. 모든 인간이 이러한 죄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선하고 착하고 고상하고 아름답다고 하여도 결국 인간이란 자아를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남들이 몰라주어도 스스로의 자아에 도취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꿈을 물어보면 자아실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애를 쓰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종교 활동도 자아실현의 폭을 넓힌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우리가 피조물의 위치를 떠나서 자신이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이런 모습이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에서 구원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에서 구원받는 것이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고 그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속하여 지고 의롭다 함을 주시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미 보았습니다만 이 복음이란 그 아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성경에서 미리 약속하신 것인데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지만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입니다. 이 아들을 믿는 것이 곧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의 한 작은 마을에서 자라나시고 30세쯤에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3년간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사람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자 예수님께서 이것을 너에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을 한다면 이것이 바로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왜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까? 왜 다른 것으로는 안 되고 오직 복음 만이어야 하는 것입니까?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나 율법지킴들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면 의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죄인은 그 앞에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지 그래서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의가 나올 수 없는 것임을 구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 계시하시는 방법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 율법을 지키면 의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더 크게 보면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을 율법으로 더욱 확정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행함으로 의를 이루지 못함을 율법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자기 가능성을 포기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투입되자 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율법을 주신 것은 다른 나라사람들은 자격도 능력도 없는 것이고, 오직 우리에게만 이러한 율법을 주셨기에 우리는 얼마든지 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백성, 의로운 나라로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율법을 통하여 얼마나 죄악 됨이 드러나는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여실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출애굽하자 말자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지만 가나안땅에 들어간 사람은 두 사람뿐입니다. 가나안땅에서 이제 여호와가 왕으로 다스리시는데도 이들은 계속하여 우상숭배를 하면서 자기들의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왕을 세워도, 제사장이 있어도, 선지자가 외쳐도 이들의 악함은 계속하여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이 의롭다면서 살았습니다. 율법의 조문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조문을 겉으로는 지키는데 마음으로는 먼 것입니다. 입술로는 존경하되 마음이 먼 것입니다. 강제적인 율법을 지키면 겉으로는 지키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안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무엇을 외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그들의 의가 어떤 상태인지 이사야 선지자는 누더기 옷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의라는 것이 냄새나는 누더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거듭 거듭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할 만큼 모든 율법을 지키는 열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율법을 열심히 지켜나갔는데 그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일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의를 가지고 있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율법을 다 지켜 스스로 의롭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에는 전혀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8절 이하에서 인간의 실상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우상의 모양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전부 자기를 위한 신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내어버린 결과 그 죄악의 모습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어 버려두시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 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그대로 버려두시니 온갖 죄악의 열매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하는 자, 비방하는 자, 하나님을 미워함,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이러한 죄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옳은 일을 한다고 하여도 과연 시기나 자랑이 없습니까?
결국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의를 이루고자 하였지만 의를 이루기는커녕 하나님의 진노만 가득 쌓아 놓은 것입니다. 인간들이 아담의 범죄 이후로 저질러 놓은 일들이 이런 내용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불로 싸 질러 버리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무언가 자기는 바르게 산다고 하는 자들이 결국 하나님의 의를 몰랐던 것입니다.
로마서 10:1-15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그러나 바른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어서 결국 자기 의를 세우고자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따로 있는데 자기들이 의를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인간 안에 이것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이나 남과 비교하여 자기의 나은 점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여도, 전도를 하여도, 복음을 전하여도, 노래를 하여도, 무엇이나 간에 인간은 자기의 의를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는 결국 복음을 듣고서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복음을 듣고 마음으로 고백을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이해하고 입으로만 시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아실 일이지만 그러나 제대로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한 사람이라면 무엇이 무너지는 것입니까? 자기 의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기에 주님께만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14절을 봅니다. “봉독”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함과 믿음을 대비시킵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면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저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가 부정되는 것입니다. 자기 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의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보지 아니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복음입니다.
로마서 1:17 의인의 삶 2003. 7. 6.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ㄱ)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면 의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거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난 자들의 한결같은 고백이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부활승천하신 예수님도 인간이 직접 만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러하였고, 그 사랑받던 제자 요한도 요한계시록에서 주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그 앞에서 살아가려면 의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에게서 그 어떤 의도 나오지 아니함을 성경은 증거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한 것입니다. 사람들끼리 선한 것이라고 좋은 생각이라고 만들어 내어 놓아도 그것은 독사의 알을 품은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러한 의로 만들어 입는 옷이란 거미줄로 짜는 것처럼 불가능한 것입니다. 혹시 만들어 입었다고 하여도 누더기에 불과한 것이어서 주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우리는 한 주간 사시면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몇 가지 질문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1)예수님을 믿고 거듭났으니 나는 의롭고 바르게 살았다. 2)완벽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였다. 3)어차피 죄인인데 내 마음대로 살았다. 4)정말 인간에게서 선한 것이 나오지 아니함을 절감하면서 오직 주님께서 주신 의가 아니고서는 달리 소망이 없다. 몇 번이 나왔습니까?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소망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아니한다는 것이 바울사도의 고백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바울의 고백이 이러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무엇이며, 그리고 그러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1:17절의 말씀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중세 천년의 카톨릭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말씀이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신부요 교수로서 로마서를 강해하다가 처음 이 로마서 1:17절의 말씀을 보고서 절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지키면 그것으로 살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이 말씀을 보고서 의를 하나님의 속성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론 의로우신 분이시지만 그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면 의가 갖추어 져야 하는데 그 의가 복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시니 구약보다 더 나은 의가 나와야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망 가운데서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의를 하나님께서 따로 마련하여 두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로운 행실이나 율법 지킴이나 그 무엇으로도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그 아들에 관한 것인데 이 아들이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으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것은 여자에게서 나셨고 율법 아래 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완성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 나오는 그 의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홀로 율법을 다 완성하심으로 의가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오는 저주도 또한 대신 다 받으신 것입니다.
로마서 3:19-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3)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고린도전서 1:26-31절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ㄴ)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이 두 곳의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주어지는가를 보게 됩니다. 인간은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율법 지킴이나 의롭고 선한 것이나 어떤 다른 사람보다 나은 조건 때문에 의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으로는 오히려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 그것은 의롭게 될 수가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 구약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러한 조건들이 없는, 지혜나 문벌이 없는 사람, 미련하고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을 택하신 것은 어떤 인간의 자랑도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진 자들에게는 자기의 육체를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1:17절을 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인간의 행위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믿음이란 어떤 믿음입니까? 인간이 행위로는 부족하지만 믿어 주는 것으로 말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그러한 믿음이란 또다시 인간의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믿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거나 음식을 먹거나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불안하고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이라는 것은 확률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자동차나 비행기도 사고가 나고 음식도 배탈이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인간의 의지적인 행위나 확률이 아니기에 믿음은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인이 되는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의인이 되었기에 예수님과 상관없이 내 스스로 의를 지키고 유지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주어지지 전에는 자기 의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선물로 주어지고 나서는 이제부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는 최초의 말씀이 하박국서에 있습니다.
하박국 2:1-4절입니다.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1)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 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2)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이 무엇인가 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택한 나라가 세상의 악한 나라에 의하여 짓밟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나라 안에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학대하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속히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고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더딜 찌라도 기다리라고 합니다. 지체되지 아니하고 정녕 응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속히 나타나지 않으니 율법이 해이하여지고 공의가 굽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과 대조되는 말이 교만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교만합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주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힘과 권력을 자기 힘으로 사는 자들을 교만한 자들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교만이란 자기들의 종교적인 열심과 그들의 율법 행함을 자기 의로 여기면 이것 역시 교만이 되어서 주님의 의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란 자기들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된 자들이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며 이들이 의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이란 주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살아가고 있더라도 그러나 주님의 약속을 믿는 의인들은 주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믿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답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가 기도하는 내용이 3장입니다.
하박국 3: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그러므로 여기에서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여 달라는 내용입니다. 갈대아 사람일 수도 있고,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부흥이 심판의 말씀이기에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면 이스라엘 가운데서라도 남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대답을 듣고서, 그 대답이란 눈에 보이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인들이 믿음으로 사는 자세는 하박국 3:16-19절입니다.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 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심판의 소식이 얼마나 두려운지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오고 몸이 처소에서 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이러한 상황에서라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 아무런 소유가 없다고 하여도 구원의 하나님, 즉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합니다. 자기의 좋은 이력과 경력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집안이나,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무언가 더 나은 점들을 자랑하지 아니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용지물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배설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삶, 이것이 의인의 삶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1:18 하나님의 진노 2003. 7. 13.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지난 한 주간 믿음으로 사셨습니까?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17절의 말씀처럼 복음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복음에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떠한 행위로도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의를 만들어 낼 수 없는데(유대인들이 증거가 됨)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왔으니 그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이 세상을 보는 시각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낙관적으로 보는 시각과 비관적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낙관적으로 보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이 악하다고 하나 그러나 악한 자보다 선한 사람이 많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흉악한 일이 생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말없이 착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 훨씬 많기에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곳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은 교육과 환경을 만들면 훨씬 범죄가 줄어들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환경운동도 하고 생명운동도 하고 민주화 운동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관론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인간의 역사를 보면서 도대체 인간 스스로 만들어 온 역사들이 어떤 꼴이 되었는가를 보면서 비관합니다. 그러한 비관이 강렬하여지면 자살을 하거나 엄청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두 죽이고 나도 죽자는 식으로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특정 다수에 대하여 보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도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졌지만 이루지 못한 상실감이 커서 그런 것이지 세상자체를 포기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또 사람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 말하게 되면 복음이 아닙니다. 반쪽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좋은 것만 좋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무엇을 준다고 합니까? 영생만 준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들을 다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주시기 때문에 다른 신들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더 능력이 많으니 하나님께 빌어야지 더 잘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전도를 하여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서는 거의 숨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지옥이니 심판이니 하는 내용들을 좋아하지 아니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백화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고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온갖 문화상품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백화점에서 아주 실비로 문화교실을 왜 만드는 것입니까? 고객이 와야 장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롯데 백화점과 대동 백화점이 서로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처럼 지역민을 위한 문화교실, 독서실, 결혼식장등을 만들어 개방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유가 있고 남는 공간이 있으면 그렇게 사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한 호감을 주어서 예수 믿기 좋게 만들자는 생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아직도 복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창세기 3장 이후로부터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까?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는 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았기에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죄악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가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불사르기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시편 7:8-17절을 봅니다. “8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9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10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2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13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14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15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16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17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심판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없어서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까?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가 없는 상태라면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며 칼을 갈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은 죄악을 해산하고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러한 의 없음에 대한 심판과 진노를 아는 사람만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면 그저 예수 믿는다고 하여도 자기 편함, 자기 이익, 자기 행복, 자기 마음의 만족만 챙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도 힘들고 어렵고 귀찮은 일들을 모두가 피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 일을 하면 하는 대로 복을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면 아마 이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시편 90:1-12절입니다.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1)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누가 주의 이러한 진노와 노를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인생의 평생이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일평생이 주님의 진노아래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무슨 희망을 가지고 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없는 곳에는 오직 하나님의 진노밖에 나타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고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은 복음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꾸만 엉뚱한데 관심을 둡니다. 예수 믿는 것만으로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허기져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무언가 더 산뜻하고 새롭고 신선한 것은 없는가 하면서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에 나타나는 것입니까? 로마서 1:1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죄라는 기준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떤 종교를 가졌거나 또는 종교를 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감옥에 가두거나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관계에서 법을 어길 경우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는 어디에 나타납니까?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입니다. 우선순위가 하나님께 대한 경건입니다. 두 번째가 불의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말씀을 요약하면 무엇이 됩니까?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경건함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불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경건치 못함과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 외에는 쏟아질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경건치 아니함에 대하여 19-25절에서 말씀하고 있고 불의에 대하여는 26-3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경건에 대한 죄는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아예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 속에서 불의한 일만 없으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불의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몇 가지만 봅니다. 시기, 수군수군 하는 것, 비방하는 것, 자랑하는 것도 다 불의에 속하는 것입니다. 강도나 살인 같은 범죄만이 아니라 사소한 것들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것들도 불의이며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불의의 근원이 경건하지 못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의는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있기에 나오는 사상과 행위들입니다. 이것이 경건하지 않음이며 이러한 불경이 불의를 생산하여 내는 것입니다. 불의가 나오지 않는다고 자신을 의롭다고 할지 모르나 경건치 아니함에 대하여는 생각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기가 불의한 행위가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경건치 못한 것입니다. 이로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것입니다. 진노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2:5절을 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진노를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주님께서 재림하시지 않으신 이유는 아직도 회개할 자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도하여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으로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은 결국 진노를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7-18절입니다.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1)서리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심판이 시작됩니다. 믿는 자에게 먼저 심판이 시행이 된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 마지막이 어떠하겠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복음입니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함이 심판입니다. 그러면 왜 복음을 순종치 아니함이 심판인 것입니까?
로마서 1:17절에서 복음에 무엇이 나타난 것입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지 아니함은 곧 하나님의 의가 없는 상태이기에 경건치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날 유일한 길이 복음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습니다. 진노 아래 있기에 인간의 어떠한 선행과 이성의 능력과 도덕으로 무장을 하여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불살라지기 위하여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시기 위하여 이렇게 오래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도록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8-18절을 봅니다. “봉독” 지금 보이는 하늘과 땅이 불에 타 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습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바라라고 합니다. 불타 없어질 것들을 목숨처럼 붙들지 말고 그 구원이 나타나도록 간절히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의의 나라입니다. 의가 없는 자는 결코 들어갈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지 날마다 더 풍성하게 체험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18-25 하나님을 알되 2003. 7. 20.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3)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어느 목사님의 세미나에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내가 성경을 읽으면 교만하여 지지만 성경이 나를 읽으면 회개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타당한 말이라고 봅니다. 내가 성경을 좀 보고서 구약도 알고 신약도 알고 언약이 무엇이니 율법이 무엇이니 복음이 무엇이니 하면서 이야기 하지만 그것으로 얼마든지 교만하여 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성경이 나를 읽어버리면 내가 말씀 앞에서 죄인임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13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인체의 신비전’을 알리는 메일을 받아 보았습니다. 사람의 신체를 화학 처리하여 플라스틱모양으로 만들어 전시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완전히 해체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경, 힘줄, 핏줄, 뼈 등을 분해하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신체는 몇 센티 정도의 두께로 전부 잘라 놓았습니다. 그리고서는 전시회를 한다는 선전이었습니다.
사람의 신체를 그렇게 해부하여 놓아도 그 마음의 생각과 뜻을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다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수술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제대로 진단을 받아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이 드러나게 되면 우리를 상관하시는 분 앞에서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였음을 오늘도 말씀으로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불의에 대하여 나타나는데 그 불의한 모습 중에 경건치 아니함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모든 이방인에게 다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먼저 이방인의 죄악을 지적하고 나서 그 다음에 유대인의 죄악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죄 아래 갇혀 있다고 전개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모스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기 위하여 주변 국가들의 죄악을 먼저 공격하면서 들어오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도 모르고 우상을 섬기고 있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들려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돼지머리를 두고 고사를 지내고 피조물을 섬기는 그런 것을 우상 숭배라고 여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미신이며 우상숭배라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아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교회 다니기 때문에 그러한 우상을 섬기지 아니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섬기고 경배하는 것이 다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18-20절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좇아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기에 핑계치 못하는 것입니다.
김용옥씨가 세상의 신비란 들풀 하나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들풀 자체의 신비만 보았지 그 들풀을 만드신 창조주를 모르기에 그는 비록 어려서부터 요절을 외우면서 자라고 신학대학을 나왔지만 우상숭배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특별하게 형상물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인간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도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설 것이며 핑계하지 못할 것입니다. 21-22절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여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하는 이유는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나 어리석어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짐승들과 벌레를 형상화 하여 놓고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런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보십니까? 아닙니다. 썩어질 사람을 우상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우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사람의 형상을 동상으로 만들어 절하는 것만을 우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도 얼마든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는 사람의 생각과 사상들이 결국 우상숭배입니다. 인생의 사는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하는데 모든 인생들이 한결같이 자기 영광만 챙기고 있으니 어찌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방인들은 특별계시를 받지 않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제대로 돌렸습니까?
요한복음 5:44절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지금까지 자기들이 쌓아둔 의는 다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영광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인데 그 영광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에 나선 것이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께 불경건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나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24-25절을 봅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그대로 내어버려 두시니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보다 더 사랑하고 있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 피조물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주님보다 얼마다 더 사랑하고 있는지 인식이나 하고 사십니까? 예를 들어봅니다. 청년 때와 결혼하고 나서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결혼 전에는 그래도 주를 기쁘시게 하고자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헌금도 힘써 하고자 하지 않았습니까?-그런 사람도 드물지만-그런데 결혼하고 나니 어떻게 마음이 달라집디까? 어서 빨리 내 집이라도 마련하자는 생각이 우선이지 아니합디까?
지난주일 학생회 시간에 학개서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은 황무하여 있는데 자기 집들 짓기에 바쁘다고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마침 그 시간에 모기가 한 마리 돌아다녀서 시선을 빼앗고 있었습니다. 방충망에 구멍이 나 있어서 모기가 들어온 것입니다. 예배당 건물이 성전이 아님을 이미 알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기 집에 방충망이 구멍이 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더 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홈페이지 ‘복음칼럼’ 란에 교회와 집을 비교한 글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집을 싫어하여 나가는 경우를 여러 가지 말하였습니다. 부모의 지시를 따라야 하고, 가족을 배려하여야 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고, 아무의 간섭도 받기 싫다고 집을 떠나 독립하겠다는 생각을 교회와 비교하여 성도들의 눈치가 싫고, 목사의 운영방침이 싫고, 내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싫고 하는 것으로 비교를 하면서 그래서 교회를 옮긴다는 것을 잘못이라고 봅니다. 그런 자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사람들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기 시작하면 그곳이 우상숭배의 현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자기들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의가 없는 곳에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짐을 알아서 복음 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복음입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의로는 저주와 진노 외에는 받을 것이 없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달리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모인 교회라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교회마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취미단체와 같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구들을 채워주겠다는 것입니다. 취미단체는 어떻습니까? 자기가 선호하는 취미를 따라 등록을 하고 회비를 내면 됩니다. 같은 취미그룹이라도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취미단체에 등록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취미와 기호는 너무나 다양하고 예민하기에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라도 옮길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면 이 교회는 기도가 부족해, 전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면 전도가 부족해, 구제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면 구제가 부족해, 이 교회는 사랑이 부족해 하면서 그러한 곳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러한 부족이 보이면 말없이 충성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은사라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자기만족과 자기 과시가 있는 것이라면 분명히 자기 잘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비판하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보라 성경에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 잘하는 개인적인 취향을 가지고 그것이 전부인양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산 것이 교회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내 마음에 맞는지를 좋은 교회의 기준으로 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한번 와보고는 목사가 아버지처럼 나이도 지긋하고 기댈만한 그런 목사여야 좋다고 하면서 간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이신칭의에 대한 설교를 듣고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해 놓고서 한 일년 정도 다니다가 나가면서는 대표기도 한 번 안 시켜주는가를 말하면서 나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5-6절입니다.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모든 이론과 생각까지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들을 다 부수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지금 주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목사든 집사든 자기의 이론과 생각으로 교회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교만하여진 인간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치 아니함에 대하여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감사치도 아니하는 우리의 모습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향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잡혀져 있기나 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나를 영화롭게 하고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서만 살아가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러면 과연 예수님의 그 공로를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믿고 살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알기를 원하지도 않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도 없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나는 죄인중의 괴수이지만 예수님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것을 가장 복된 소식을 믿고 사십니까?
로마서 1:24-32 버려두심 2003. 7. 27.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8 ○또한 저희가 4)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5)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지금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것을 계속하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지 지난 시간에는 경건하지 못함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감사하지 아니하고 그 생각들이 허망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금수와 사람과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형상이란 꼭 어떤 개인의 숭배만이 아니라 인간의 인격, 자손, 아내, 가정, 민족, 국가. 교회 등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여 있다면 그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이란 신의 일반명칭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만이 참 신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계시는 분으로서 모든 만물의 창조자 시며, 말씀하신 바를 친히 이루어 내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예수님을 성령으로 고백하게 된 것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하신 일을 예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사도들이 구약의 여호와 호칭인 주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 주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아버지의 일을 보고서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고 있는 일입니다. 구약의 여호와만이 하실 수 있는 영생 주시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계시된 이러한 주님을 모르고서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가 자기의 상상에 의한 신이기에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난 경우를 봅시다. 그런 배는 무역선이기에 수 십 명에서 수 백 명이 타고서 바다를 항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나서 모두 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의 신에게 기도하며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물건을 다 버렸습니다. 그들이 믿는 모든 신들의 이름을 다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장이 보니 배 밑에서 누워 자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네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선장은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풍랑을 잠잠케 하여줄 그런 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요나가 이 풍랑이 자신을 인한 연고라고 하면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다가 이렇게 되었으니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와 하나님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이 배에서처럼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의 하나님, 자기의 신들을 다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은 여호와라는 이름도 압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오직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구약의 여호와만이 참 신이시고 신약의 예수님은 피조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라고 이름을 부른다고 하여도 역시 사람들안에 자기들만의 우상이 다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무슨 이름을 부르더라도 자기를 위하여 부르고 있는 신이란 모두 우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우상숭배를 하는 대로 내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어 버려두신 결과가 어떠한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어버려 두신 결과 모든 사람들이 다 우상숭배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이 우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나만 바라보아 달라는 것입니다. 나만 사랑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교회에서든 나를 위하여 주고 나를 알아주고 위로해주고 사랑해주는 가정과 학교와 교회는 좋은 교회인 것입니다. 나를 무조건 사랑하여주는 부모, 선생, 친구, 목사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그대로 내어 버려두신 것입니다.
이대로 내어 버려두시면 이것의 계속된 연장이 그대로 지옥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두신 결과 우상숭배에 이어서 인간관계속에서 어떠한 불의들이 나오는지를 오늘 말씀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록들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입니다. 목록들을 살펴봅니다. 24절에서 우상 숭배하는 인간들을 그대로 내어버려 두신 결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시니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은 26-27절에서 여자나 남자나 그 몸을 순리대로 쓰지 아니하고 역리로 쓰는 것입니다. 이러함으로 그에 합당한 보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성적인 타락은 이미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만연한 죄악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어 단어에 ‘소도미’라는 단어가 동성연애라는 뜻의 어원이 됩니다. 이러한 성적인 타락은 단지 육체적인 동성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모습으로도 변질이 되는 것입니다. 신전에서 신전창기와 미동들이 있어서 이방신의 제사와 함께 성적인 혼음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신 결과입니다. 28절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의 정욕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초적인 죄의 뿌리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 이후로 모든 자연적 출생의 인간은 죄 아래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 죄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그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신 것입니다. 그러자 합당치 못한 일이 인간에게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 목록들이 모든 불의라고 합니다. 모든 불의란 거론되는 모든 불의전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의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목록들이 나에게 해당된다면 나도 하나님의 진노아래 저주아래 있는 것이며 이미 버려진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목록을 봅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 수군수군하는 자, 비방하는 자,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한 자, 배약하는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라고 합니다.
이러한 목록들에 전혀 해당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몇 가지는 해당이 되고 몇 가지는 해당이 되지 않는 분이 있습니까? 전부 해당이 다 되는 것입니까? 살인은 하지 않았습니까? 이 중에 단 한 가지라도 해당이 된다면 우리는 다 범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러한 죄인이면서도 자기 잘난 체를 하고 있습니까? 분명히 이러한 죄들이 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알고 있고 말하고 있으면서 자기도 행하고 그렇게 행하는 남도 옳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행함이 잘못인줄 모르기에 자기들이 하는 일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에서 무슨 일을 의논하고 계획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자기 말이 먹히지 아니하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순복하고 따릅니까? 뒤에서 딴소리 합니까? 자기의 뜻과는 다르더라도 순복하고 따르는 사람보다는 다른 소리 하는 사람이 훨씬 많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주장하는 바가 아무래도 내 생각이 더 옳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면 내 생각이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주장과 자기 합리화로 나가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도 행하면서 그렇게 하는 다른 사람들조차 옳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 우리 안에 여기의 목록 중에 단 하나라도 해당이 된다면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시기가 없습니까?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지 않습니까? 남이 잘되면 은근한 시샘이 나지 않습니까? 똑 같은 일을 하여도 자기가 한 일을 좋게 보면서 남이 한 일은 깎아내리지 않습니까? 비방하지 않습니까? 자랑하지 않습니까? 수군수군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대로 살다가 그대로 영원한 지옥형벌로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안에 가득하면서 천국 보내 달라고 말하겠습니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천국가면 천국이 지옥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내어버려 두신 결과입니다.
케직 사경회에서 어느 교수님이 로마서 1장을 강해하던 중 사람이 쥐와 같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어떤 신사가 대단히 화가 나서 그 말을 취소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때 로마서를 설교하던 그 교수님이 그 사람에게 대답한 말입니다. “당신이 참 옳습니다. 사람을 쥐에다 비한다는 것은 대단히 불공정합니다. 나는 정말 사과합니다. 나는 쥐에게 사과합니다. 쥐들은 쥐가 행동해야할 짓만 하는데 사람들은 사람이 행동해서는 아니 될 그러한 짓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동물이 안하는 짓을 하며 동물보다 더 나쁜 짓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쥐에게 사과합니다.” 라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 이를 알리요? 라고 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지은 인간의 실상이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간이 스스로 개선되거나 구원될 가망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지난주 주일 저녁 11시에 부산에서 전화가 한통 왔습니다. 가끔씩 성경을 보다 전화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자기는 죄 밖에 나오는 것이 없고, 그래서 세상의 악함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죄를 보니 통곡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주님께서 성도의 눈물을 씻어주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어 왔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통 받아서 흘리는 눈물이라면 자기는 그런 고통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보고서 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누가 보아도 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오는 것이 죄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천국은 감히 바라 볼 수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제가 오히려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어떠한 행위로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의논을 하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 전에 이미 하나님 안에서 성부와 성자의 약속 안에서 결정하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를 믿고서 이러한 부분들이 많이 고쳐졌습니까? 아니면 가끔씩이라도 나오고 있습니까? 저는 늘 나오고 있습니다. 전에 컴퓨터 화면의 떨림에 대하여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화면의 떨림이 느리면 떨리는 것을 감지할 수 있지만 더 빠르게 되면 떨리는 지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형광등의 불빛도 파장으로 되는데 너무 빠르기에 모르는 것처럼 우리가 죄악에 푹 젖어서 살고 있으니 죄 인줄도 모르고 서로 옳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길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습니다.
로마서 2:1-5 판단 2003. 8. 3.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오랜 장마에도 불구하고 논에서는 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곧 이삭이 나오고 벼가 여물게 되면 고개를 숙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하면서 인간이 무언가 좀 배우고 알수록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여야 한다는 덕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속담도 알고 그 뜻도 알지만 과연 겸손하여 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이 많아지면 교만할 수도 있지만 성경의 지식이 많아지면 겸손하여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날마다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로마서를 보면서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다시 보게 됩니다. 이러한 죄를 보면서 자기의 죄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남의 죄만 보이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판단 외에는 나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판단을 받고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심판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2:1절에서 “그러므로”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1:1절부터 지금까지의 말씀을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1-18절에서 복음을 요약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잇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19-3:20절까지는 왜 인간이 복음으로만 의롭게 되는지를 논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내용은 인간이 어느 정도의 죄인이기에 주님의 대신 죽으심 외에는 달리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2주간에 걸쳐서 인간의 불의가 무엇인가를 크게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님이란 우상이었으며 그 결과 인간은 모든 불의에 가득 찬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악의가 가득하기에 나오는 것이 악의뿐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의도로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을 죄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서로 옳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쏟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말씀을 인정하십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모든 사상들이 전부 죄임을 인정하십니까? 내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의에 결코 이를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순수하게 하는 것도 있는데 왜 그렇게 말하는가? 인간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가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2:1절에서는 그러한 사람들의 죄악을 또다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을 성경 해석하는 사람들이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가 이방인들로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고 온갖 악한 일을 행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을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아주 고상한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생을 피하기 위하여 몸에 이도 잡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양심고운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난주에 보았던 수많은 목록들과 상관없다고 보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악한 죄를 짓는 사람들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유대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선택받았고, 율법을 받았고, 할례를 행하였기에 구원받은 것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구원이 필요 없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는 사람들이 이정도의 목록이 나와도 나는 그러한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죄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율법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유대인 가운데서도 죄를 많이 지어서 저주를 받은 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자기들은 그런 죄도 없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 축복만 받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메시야기 오기만 하면 온 세상을 심판하고 자기들만이 의롭고 축복받은 민족임을 드러내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싫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는 그들이기에 예수님이 얼마나 싫었으면 그 착한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따라 흠이 없이 살려고 하였고 또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하였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해석이 옳다고 보여 집니까? 1장이 모든 이방인의 범죄라면 2장부터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선택도 없고, 율법을 받지도 못하고, 할례도 없기에 그들은 로마서 1장에 나오는 죄를 짓지만 자기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 가운데 그런 죄인들이 있다는 것은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과 불치의 병자들을 저주받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 무리들을 보고서 율법도 모르는 자들은 저주 받은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요7:49). 그러므로 이방인들에 비하여 자기들은 의롭다고 여기고 율법을 모르고 지키지도 아니하는 그러한 자가 죄인이지 자기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여기는 그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는 판단한다는 이 말씀이 바로 저 자신에게 적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나 흉악한 죄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복음이라고 전하면서 얼마나 많이 판단하여 왔습니까? 여러 교회와 여러 사람들을 판단하여 왔습니다. 물론 복음과 비 복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판단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념과 신앙을 구분하며, 종교성과 복음을 구별하기 위하여 판단하며,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면서 여러 가지 판단과 비판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판단을 하면서도 저도 동일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1-3절입니다. “봉독”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내 자신이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이 재판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정의를 위한다고, 교회를 위한다고, 예수님을 위한다고 소리치며 판단하였지만 그러나 자신도 같은 일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교활한지 그렇게 하고 있는 자신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옳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은 성경적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목사들에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목사들의 고집이 대단한 것입니다. 자기의 뜻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목사들끼리 의견이 제대로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속이 시원하지요! 그렇습니다. 목사들이 문제라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렇게 하는 순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똑같이 판단을 하고 있고 재판을 하고 있으면서 남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저희 교회에 헌신예배 강사가 오시면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들었습니까? 그래 한번 두고 보자, 무어라고 말하는지 하는 자세나 태도는 아니었습니까? 복음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는 복음도 모르면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상대방을 판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판단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판단으로 인하여 자기가 정죄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는 정당하고 옳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3-12절입니다. “3 너희에게나 1)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린도전서 5:12-13절입니다. “12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고 판단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분명한 범죄에 대하여 교회에서 판단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으로 판단을 하지만 얼마든지 정당성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2절입니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어느새 우리가 재판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11-12절입니다. “11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12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가 다 판단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는 성경대로 바르게 판단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자기도 속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불의에 나타나는데 우리의 판단의 삶에도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판단하지 말고 삽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배 후에 누가 어떤 말을 하다가 판단이 나오게 되면 봐라,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판단하지 말라고 했잖으냐, 그러니 판단하지 말아야지 왜 판단하느냐하면서 자신이 이미 판단하고 있고 재판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4-5절입니다. “봉독” 자기 죄를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피하지 못할 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판단대로 주님께서 판단해 버리셨다면 우리는 벌써 끝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직 주님의 진노를 받지 않고 사는 것은 주님의 긍휼과 자비로 오래 참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판단을 많이 하며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 자기 눈에 들보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남의 눈에 티가 보이지 아니합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 것입니다.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이것을 알게 되면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자신이 늘 판단하고 살면서 자기는 옳은 줄로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그 인자하심이 지금 회개하도록 인도하고 계시기에 우리의 판단대로 판단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판단이 임하지 아니한다고 자신이 행하는 판단들이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면서 회개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멸시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여 있습니까? 자기가 옳다고 여기고 남을 판단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의 판단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를 알고 회개하든지 둘 중에 하나 일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그 판단과 비판으로 우리가 판단을 받을 것임을 아는 사람은 늘 회개할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주 교묘하게 판단하기에 자기도 속고 듣는 사람도 속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오늘도 오래 참으시면서 회개하도록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판단으로 인하여 죽임 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날마다 회개하며 주님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2:6-11 행한 대로 2003. 8. 10.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은 보편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것을 거두고,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무언가를 심고 거두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짧은 심음과 거둠이 있고, 긴 심음과 거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오늘 나는 무엇을 심고 있는가를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반드시 한번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8:22절에서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이 땅이 있을 동안에 계속될 일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동안 이 법칙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음과 거둠은 또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갈라디아 6:7-8절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렇게 심고 거두며 살게 되는데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육체를 위하여 심고 거두는 것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인 것 인줄 알고 심고 거두는 사람은 결국은 썩어진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 땅에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존경할 만한 업적을 남긴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썩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다 쇠하여지고 낡아지고 더러워지고 썩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을 전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계속하여 썩어질 것만을 심고 거두기를 반복할 뿐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심고 거둠은 성령을 위하여 심고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위하여 심고 거두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알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원하지도 않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 두 가지의 원리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육체만을 위하여 심고 거두며 살았는지 아니면 성령을 위하여 심고 거두며 살았는지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기준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크나큰 충격입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외적인 조건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특권으로 여긴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받았고,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할례를 행하였고, 율법을 따라 온갖 것을 다 지켜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특권을 전혀 고려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을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군에서 단체 기합을 받을 때에 억울하게 여기는 사람과 같은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하나님께 항의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 말씀을 보는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심고 있는 것입니까? 역시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2:7-9절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합니다. 영생이냐 분노냐 이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하고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며 선이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과 존귀란 세상의 썩어질 것에는 해당사항이 없는 내용입니다. 썩지 아니하고 영원한 주님의 나라와 그 기업의 영광, 주님의 영광과 존귀, 주님이 하신 일의 영광과 존귀입니다. 날마다 이것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가 살고 있습니까? 날마다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하고 있습니까? 직접 기도하여 구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몸의 움직임과 마음의 소원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썩어질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하지 직접 구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마음이 어디로 쏠리고 있습니까? 주님을 아는 일과 그 영광을 구하는 일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돈 버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영생이나 천국이니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란 당을 지어서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 임할 것입니다. 당을 짓는다는 것은 불의를 행하는 일에 동참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만이 불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행하는 불의도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당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당을 짓는다는 것, 온통 당 짓은 것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학연, 인연, 지연으로 똘똘 뭉치는 것입니다. 유유상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 짓는 재미로, 편 가르는 재미로 사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당을 만들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는 무소속이라고 하는 당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당 짓는 일이 어디에서 그 최종적인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면 예수님을 배척하는 일에 드러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로마인들이 마음이 하나가 되고 민중들까지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이라고 몰아 부치는 것이 당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습을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영생은커녕 하나님의 분노를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방인의 죄악도 유대인들의 죄악도 우리에게는 다 나오는 것을 봅니다. 이방인의 죄악인 로마서 1장의 내용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죄악인 로마서 2:1-3:20절의 내용도 우리에게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경건하지 못함과 모든 인간관계속에서 불의만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사람으로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왜 인간이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고 전적으로 구원하시는 분에 의하여 구원이 이루어지는 가를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우리의 행한 대로 갚으신다면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다윗은 복 있는 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오히려 악만 행한 인간이 의롭다 함을 받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나의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오래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어지지 아니할 것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행하는 자들은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모두가 썩어질 것을 구하고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썩어지지 아니할 영원한 나라를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영생을 얻은 자가 이러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에게서 자기들의 의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일의 열매를 나타내게 하신 주님을 사랑할 뿐입니다.
고린도후서 5:8-10절입니다.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각각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심판대 앞에서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주와 함께 살리심을 입은 자라면 떠나든지 거하든지 간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힘쓰는 자들입니다.
디도서 3:1-10입니다. “1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2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8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11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3절에 보시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바울 자신도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하고 속은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함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를 입은 자들은 더 이상 자기 의에 대하여 자기 행함에 대하여 기대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어지지 아니할 것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인간적으로는 결코 성취되지 아니하는 것이기에 오직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외적인 조건을 찾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서 어떠한 선행이 나오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고백처럼 자신이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것은 자기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러한 열매가 나왔다는 것임을 고린도전서 15:11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란 자기에게서 나온 선행을 가지고 남과 비교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다고 말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의 은혜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짐짓 겸손하여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안에서 주님의 은혜가 역사하고 있기에 나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행한 대로 갚으시는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자기 의를 드러내면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죽기까지 충성하고서도 자기가 행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러한 열매가 나왔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러한 기적들이 날마다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로마서 2:12-16 송사와 변명 2003. 8. 17.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한 주간 영생을 위하여 사셨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쌓으면서 사셨습니까? 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하며 사셨다면 영생을 얻을 것이요, 당을 짓고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스스로 썩지 아니할 영광을 구하는 자는 없는 것입니다. 모두 썩어질 영광을 구하고 있었다는 것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고 더렵혀지지 아니하는 영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어는 것이기에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떠한 외적인 조건이나 공로를 따라 취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하여 가장 큰 반발이 일어나는 사람은 유대인들입니다. 개와 같은 이방인들과 동일시 한다는 것에 대하여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우리는 율법을 받지 않았기에 우리는 심판도 받지 아니할 것이라는 생각도 하는 것입니다. 법이 없는데 어떻게 심판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하여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2-13절입니다. 먼저 유대인들부터 봅니다.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율법을 받은 자는 율법을 받고 들을 것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킨 자가 의롭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과연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게 될 자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왜 주신 것입니까? 율법은 범죄함을 인하여 죄로 심히 죄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이방인들은 받은 자격도 없는 것이고 자기들은 특별하기에 주어졌고 그리고 지킬 능력이 있기에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전체에서 드러난 결론은 그들이 율법을 스스로 지킬 수 없다는 결론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야고보서 2:10절에서 율법을 다 지키다가 어느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다 지키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인데 과연 네 이웃을 나의 몸처럼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아니하면서 아무리 율법의 조문을 외우고 다 지킨다고 하여도 그것은 율법을 어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야고보서의 말씀은 이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차별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에서 차별을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서로 서로 차별을 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죄를 알라고 주신 율법으로 자기들을 정당화하면서 남을 정죄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율법의 고발 기능이 있습니다. 율법이 송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받고 율법을 아는 사람일 경우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스스로 변명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율법을 제시하기도 하고 자기 정당화를 위하여 율법을 재해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해석과 적용이 얼마나 엄청난지 탈무드의 방대함을 보면 알 것입니다. 탈무드는 유대인들이 모세오경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책인데 율법의 해석과 적용과 삶의 모든 구체적인 행위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석에 따라 여러 가지 의견이 대립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랍비들이 해석을 함에 따라 어떤 것은 아주 강직한 율법적 해석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관용과 사랑의 해석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라 자기들에게 유리한대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즉 송사와 변명이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인은 어떻습니까? 율법이 없으니 심판도 없는 것입니까? 율법이 있는 자는 율법을 범함으로 심판을 받고 율법이 없이 범죄 한 자는 율법 없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범죄 하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통하여 범죄를 알게 되지만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은 어떻게 범죄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본성과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14-15절을 봅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본성과 양심이 자신의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능으로 인하여 스스로 송사도 하고 변명도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송사 받고 변명을 하지만 이방인은 양심으로 송사를 받고 변명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이방인은 자기 본성에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고, 이방인은 양심을 곱게 쓰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 본문의 말씀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스스로 율법을 지키거나 양심을 지킨다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죄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하면 모두가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학생회 수련회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는 일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자기는 봉고에서 무거운 짐을 날라 왔기에 설거지를 안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학생은 자기는 시장을 봐 왔기에 안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설거지 하라는 송사에 대하여 각자가 변명과 변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정당성과 자기 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른들이라면 속으로 감추기도 하겠지만 아이들이니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내리는 결론이 제일로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하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의 행위에 대하여 끊임없이 송사와 변명을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있는 사람은 율법을 가지고 율법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양심을 가지고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언제나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송사도 하고, 변명도 하고, 재판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있는 자는 율법으로 율법이 없는 자는 자기의 양심으로 송사도 하고 변명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살고 있습니까? 역시나 자기 자신이 스스로 율법이 되고 판단의 기준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에 빠지거나 헌금 하지 못하거나 하면 어떤 송사나 변명이 나오고 있습니까? 전에는 율법의 기준에서 송사를 하고 변명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을 가지고 송사도 변명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언가 속에서 송사를 하지요! 너 예배 빠지고 무얼 했느냐고 누가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스로 합당한 이유와 변명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하지 않을 만큼 정당한 근거를 스스로 변호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가난하다거나 더 급한 필요가 있다는 식입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율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여 송사도 변호도 판단도 하고 있으니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명 중에서 이제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또는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행동하면서 여전히 그 중심은 자기의 이익과 자기의 정당성으로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에서는 끊임없이 송사와 변명이 계속되고 있지만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또는 전혀 그러한 송사와 변명도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모스에 의하면 거짓된 종교적인 확신과 경제적인 안정을 인하여 스스로 든든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회개를 외쳐도 자기와 상관없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마치 양심의 화인을 맞은 사람처럼 송사와 변명도 없이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 살면서도 모르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8-20입니다.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바울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였으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속받았음을 증거 하면서 디모데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파선한 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다음 말씀에서 봅니다.
디모데전서 4:1-5절입니다.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믿음에서 떠나는 자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이 됩니다.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는 것처럼 여러 가지 새로운 이야기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의를 발로 밟은 행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자기들 안에서 진리다 아니다, 옳다 그러다 하는 송사와 변명이 끊임없이 나오지만 그러나 무엇으로 바른 판단이 나오게 됩니까? 16절입니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사람들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누가 옳은지 그런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판단하면 모든 것이 백일하게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옳다, 그러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은밀한 것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복음은 그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자신이 율법을 지킨다는 사람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모든 사람을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지금 세우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자신의 정당성이 그래도 나오는지 아닌지를 복음을 통하여 지금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지금까지의 자기 송사와 변명이 다 무너지는 사람, 입이 백 개라도 할말이 없는 사람, 아무리 율법을 지키고 양심을 곱게 가지고 살았더라도 십자가 앞에서 지옥가야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성령이 임한 사람이며 복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의 모든 죄악의 지적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아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생기는 자기변명에서 이제는 모든 말씀이 다 자기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여러 가지 구체적인 목록들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사람은 자기변명이나 자기변호를 위하여 말을 만들어 내거나 다른 행위로 대체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자기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에게도 로마서 7장처럼 죄냐 의냐 라는 싸움이 나오지만 그러나 자기 송사와 자기변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결코 정죄함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머무는 것입니다(롬8:1-2).
로마서 2:17-29 겉과 속 2003. 8. 24.
1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1)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ㄱ)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5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사람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사람을 판단할 때 겉과 속이 같은지 다른 지를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늘 외모 중심으로 보기에 그 사람의 속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함께 지내보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모를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왜 스스로의 의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가를 최종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내용은 유대인과 율법을 주제로 말씀하고 있지만 이미 이방인의 한계를 말씀하였습니다. 이방인 가운데 양심 바르게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에 대하여 정절을 지키고 나라의 임금을 섬기면 죽어도 한 임금을 섬기는 충성을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방인의 모습보다 더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늘 다짐하고 새롭게 하는 유대인들은 어떠하였는가를 오늘 말씀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주제로 유대인과 율법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17-20절에 유대인들의 특권과 자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 있어서 율법이란 그들의 최고의 자랑거리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보면,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 하면 율법과 끊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자부심이 율법을 받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율법을 의지합니다. 율법을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기에 율법을 의지하며 그것을 보전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애를 써왔습니다. 율법을 필사하는 서기관들의 정성을 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하고 철저하였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율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박영선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도를 주었는데 유대인들이 소경이라서 지도의 내용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둘둘 말아서 막대기로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율법을 모르는 자들을 패는 몽둥이로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신이 없다는 세상 속에서, 또는 우상을 섬기는 세상 속에서 그들은 그들에게 계시한 하나님을 목격하고 그들에게 말씀주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한 것이 무언인지를 알고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고, 어리석은 자를 훈도하고,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자부심을 가질만한 내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할례에 대하여서도 이들은 포기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예수를 믿어도 할례는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율법과 할례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그들의 겉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름을 자신들이 모른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이들의 겉모습을 예수님께서 얼마나 신랄하게 공격하셨는지 모릅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저주를 퍼부으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율법을 자랑하고 지킨다고 믿고 있는 그들이 또 다른 세력에 붙잡혀 속고 있었음을 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자랑하고 율법을 믿고 가르친다고 하였지만 그러나 율법의 제정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에서 율법을 받았다는 인간조차 어떠한 형편에 있는지를 밝히 보이신 것입니다. 율법을 자랑하고 믿는다는 그들이 율법을 가르친다는 그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죄를 그들이 동일하게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21-23절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도 도둑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도둑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도둑질이 되는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구약에 의하면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제대로 드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들도 간음하는 것입니다. 비록 행위로 나오지 않았더라도 이웃의 것을 탐내었으면 이미 도둑질한 것이요. 마음에 음욕을 품었으면 간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겉모습으로 도둑질이나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안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마음의 할례였습니다.
신명기 10:12-22절입니다.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마음의 할례를 말씀하시면서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두 마음이었습니다. 입술로는 존경하나 마음은 멀다고 이사야 선지자가 탄식을 한 것입니다.
시편 62편 1-4절을 봅니다. “1 나의 1)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2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주만 의지하는 다윗을 공격하는 방법이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인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메시야의 고난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입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알려주어도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지키고 믿고 있으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의 할례를 얼마나 중요시 하였는지 난지 8일이 되면 할례를 하라는 할례의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 안식일을 범하면서까지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할례에 대하여서도 바울사도는 율법과 마찬가지로 표면적인 유대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한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표면적인 유대인인가 하는 것은 결국 십자가에서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다는 이스라엘 백성조차 그 모습이 표면적인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율법이, 할례가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을 율법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롬11:32).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율법을 받았고, 할례를 행한다는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한 것입니까? 이것이 육체의 한계인 것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육체에 한다고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할례는 사람이 할 수 있지만 마음의 할례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예레미야 4:3-5절입니다. “3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말씀을 이미 할례를 받은 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은 자들이 또 무슨 할례를 받는 것입니까?
예레미야 33:31-34절입니다.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2)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돌판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람의 마음에 새긴다는 것이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한 의를 성령이 임하여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빌립보서 3:3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자랑이 빠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육체적인 행위도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주님 홀로 행하신 일에만 기대를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겉모양이 아니라 속이 바뀐 자들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오늘 예수 믿는다는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말할 수가 있습니까? 일요일에 예배당에 오는 것, 교회에서 봉사 하는 것, 직분 받은 것, 대문에 교패 다는 것, 차 뒤에 물고기 모양 붙이는 것입니까? 모두가 표면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면적인 그리스도인, 속조차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로마서 2:29절입니다. 할례는 의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령에 있다는 것은 율법의 문자대로 몸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된 것은 사람의 일로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육체의 할례를 전하였다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라고 갈라디아 5:1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모든 봉사를 성령으로 봉사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자기의 육체의 행위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걸지 아니합니다. 동시에 남에게도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로마서 3:1-8 거짓된 사람, 참되신 하나님 2003. 8. 31.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ㄱ)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함과 같으니라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복음이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의롭게 되는 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고, 이방인이 양심으로 의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을 로마서 1:18-2:29절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데 믿음이라는 것도 인간의 행위가 아닌 그저 주시는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하여 유대인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을 예상하고 바울이 그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 의문이란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할례를 명하시고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이 그 언약대로 이루어 출애굽하고 율법을 주시고 가나안땅에 들어와서 살게 하신 그 모든 것들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는 이방인들과 우리가 어떻게 똑같이 죄인으로 취급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유익은 범사에 많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셋째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 안에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유익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인 것은 로마서 9:4-5절에 의하면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엄청난지를 신명기 4:32-40절을 봅니다. “32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피조물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한 죄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사는 존재가 이제는 들으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참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고 섬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신명기 8:1-4절입니다. “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40년간 광야생활을 통하여 알게 하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하는 것이 살길입니다. 이처럼 엄청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보다 무언가 나은 것이 있어서 받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말씀을 받은 것은 엄청난 일이지만 말씀을 받은 조건이 있어서 받은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가 많거나 더 나은 민족이라서 말씀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7:7-8절입니다.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다른 민족보다 무언가 나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사랑과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자기 언약에 충실하심으로 구원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복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받기를 싫어하며 거부하였는가를 구약 성경 전체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보는 아모스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 땅이 견딜 수 없어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를 막고 돌로 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유대인들에게 의하여 일어난 것에 대하여 인간이 얼마나 거짓되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한 것인지가 오늘 말씀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3:3절입니다. 이렇게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하리요하는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였기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폐하여 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자들이라고 소수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절대 다수가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을 믿지 아니한 것이 구약의 역사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믿은 자는 아주 극소수입니다. 이들도 역시 자기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 절대 다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였으면 하나님은 실패한 것입니까? 거역하였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거부하면 이루어지지 않고 순종하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자기들이 없으면 하나님도 일하지지 못하시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이 일하시지 못하신다. 그러므로 준비된 그릇, 쓰임 받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준비를 갖추어 쓰임 받을 수 있는 그릇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의로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그릇은 진노의 그릇으로 어떤 그릇은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하나님께서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에 대한 특권의식을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신실함에 의존하여 일하심이 아니라 자신의 신실함을 두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렇게 반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은 빈틈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핵심은 메시야 오심입니다. 이스라엘의 거역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홀로 신실하게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신 분이십니다. 로마서 3:3-4절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반역과 불신 때문에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서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일부 거짓 된 것이 아니라 ‘다’ 거짓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믿지 아니하고 반역할 지라도 참되신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논증하기 위하여 시편 51:4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의로운 줄 알았는데, 제대로 된 왕인 줄 알았는데, 자신이 범죄하고도 죄인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다윗에게 선지자 나단이 가서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비유로 다윗의 죄를 지적하여도 자기 인줄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네 놈이라고 하자 그제야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시편 그대로 인용하지 않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시려 함이라고 하는 것은 다윗을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 자신이 의롭다 함을 받고 판단 받을 때에 이기신다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25-26절을 보시면 죄인을 의롭다 하심이 화목제로 인하여 주어지는데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간음자요 살인자인데 이런 자를 의롭다 한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대신 희생당한 꺾어진 뼈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야처럼 거룩한 전쟁에서 희생당하시는 분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방식입니다. 다윗의 불의가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비록 불순종 하였더라도 하나님의 미쁘심은 실패가 없으시기에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언약을 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언약을 성취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여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자기 의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승복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반응이 나옵니까?
5절입니다.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불의한 자들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정당하냐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예상하여 바울이 논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불의함으로 하나님의 의가 더욱 드러난 것이라면 불의한 것이 공로가 되지 아니한가 하면서 자기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7-8절입니다. 율법을 받았고 율법을 지킨다는 유대인이나 율법도 없고 그래서 지키지도 못한 이방인이나 같다면 마음대로 죄 짓고 살면 되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하니 그러면 죄를 더 많이 지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크게 드러내게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내가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사도에게 그렇게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선을 이루기 위하여 죄를 짓자고 하는 놈들이 바울의 일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죄를 지어도 된다고 하더라, 죄를 짓거나 짓지 않거나 똑같이 죄인인데 내 기분대로 살라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결국 자기 의를 포기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가 의를 행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적인 은혜가 싫은 것입니다. 자기의 공로가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랑이 빠져나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보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전적인 죄인임을 모르기에 나오는 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 거짓됩니다. 율법 외에, 인간의 행함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이제는 자기를 믿지 않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짓되나 오직 하나님만이 참되시고 의로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6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그 원인과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자들은 정죄 받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8절). 거짓 된 사람(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을 믿지 말고 참되신 주님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3:9-18 인간의 실상 2003. 9. 7.
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1)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한바 ㄴ)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ㄷ)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ㄹ)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ㅁ)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ㅂ)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ㅅ)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함과 같으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통하여 계시를 말씀하시는데 계시의 말씀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것을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이야기가 됩니까? 건강한 자는 의인으로 비유하고 병든 자는 죄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은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들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원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근원적인 고침을 받아야 하는 병든 자, 즉 죄인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는 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원한다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바울사도는 지금까지의 논증을 통하여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다 죄인이라는 논증을 해 왔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그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과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은 유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받은 것은 인간이 율법을 받았을 때 어떤 반응과 태도가 나오는지를 이스라엘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보이심으로 인간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이 반발하여 그러면 자신들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 것이라면 자신들이 진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자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향하여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자기들이 죄를 짓고 안 짓고 할 능력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보고 있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도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듣는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서는 어차피 죄인인데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는데 마음대로 살자고 하거나, 밖에서는 저 사람들은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 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을 모르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스스로 죄를 짓고 안 짓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죄 아래 있다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오늘 말씀이 증거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모습을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구약의 성경을 인용하여 결론을 내리는데 시14:1절 이하, 시53:1절 이하, 시5:9절, 시140:3절, 시10:7절, 사59:7절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짧은 본문 속에서 인간의 실상을 말하기 위하여 구약의 시편과 이사야에서 인용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입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은 성경을 가지고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을 논증함으로 인간의 실상에 대한 최종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헌법에 문제가 있으면 헌법 재판소에서 최종 결론을 내리듯이 오늘 말씀은 인간의 실상에 대하여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9절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 똑 같음이란 모두가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았다고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다 지켜야 의인이 되는데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벽하게 다 지켜서 의인이 될 수 없기에 율법을 처음부터 받지 않았던 이방인이나 똑 같다는 것입니다. 울산 어느 중학교에서 전교 1등하는 아이를 서울에 보냈더니 서울의 특별고등학교 들어가기 위한 학원의 시험에서도 떨어졌다는 것은 울산이나 다른 지방의 아이들은 그런 곳에 꿈도 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택받았다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그들이 불합격 하였다면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불합격 한 정도가 아니라 시험출제자를 불의하다고 죽여 버렸다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10-12절입니다. 기록한바 즉 성경을 인용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14편과 53편의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살펴보시는데 의인이 있는가 하고 보시니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의인이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깨닫는 자도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기에 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자도 없는 것입니다.
깨닫기라도 하면 의를 달라고 구하기라도 할 텐데 율법이 없는 자는 아무것도 몰라서 의를 구하지도 않고 율법을 받은 자들은 표면적 유대인임을 가지고 의롭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깨닫지를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은 결국 자기들의 소원이나 들어주는 우상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치우쳐 전부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바울자신이 유익하다고 여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대인중의 유대인이요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하였으며 누구 못지않은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무익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것을 모두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무익한 자 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자신이 무익한 줄을 아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그래도 자신이 무언가 유익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유대인들이 이미 착각한 그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착각을 하게 되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 예수님을 믿고 났으니 우리의 착한 행실로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란 자기의 모든 것이 자기 행함의 결과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제대로 나타났다면 그것이 결코 자신의 경건과 권능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된 것임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끼리 서로 서로 경쟁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성령의 열매가 많은가 너희가 더 많은가 하면서 여러 가지 주장들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을 자랑하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자기들이 얼마나 괜찮은 인간 되었는가를 말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러한 교회가 ‘교회완전주의’를 말하는 ‘지방교회’입니다. 자기들 외에는 교회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방교회 외에는 다 가짜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다는 인간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또 다른 자기 의를 만들어 내는 사람, 단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이러한 올무에 빠져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자신이 무익한 줄을 아는 것이 은혜가 임한 자의 모습입니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아담이 범죄하고서 후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아래 모두 죽을 운명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씀과도 통합니다. 우리가 다 해아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무엇이 새로운 것이나 선한 것이 나오겠습니까? 그저 세상에서 살다가 악취만 풍기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가고 있는 인간입니다. 겉으로 아무리 치장을 하고, 인류의 평화를 위하고, 종교적 행위를 하여도 죄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보시기에 죄 뿐인 것입니다. 그 실상을 오늘 말씀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13-14절입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무덤은 땅을 파고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바위굴 같은 곳에 시체를 둡니다. 그래서 살이 다 썩어 내리면 뼈를 추려서 조상들의 뼈를 모아두는 곳에 넣는 것입니다. 그런 무덤이 열려지면 무슨 냄새가 나겠습니까? 그러한 실상이 우리의 목구멍이라는 것입니다. 목구멍에 무엇이 있습니까? 혀가 있습니다. 이 혀로 속임을 베풀고 입으로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인정하십니까?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이러한 자임을 인정하십니까? 이런 모습은 예수 믿기 이전에 그렇고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까?
야고보서 3:1-10절입니다.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마땅치 아니하지만 이러고 있다는 것입니다. 혀로 속임을 베풀고 그 입에 악독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그 입에 독이 가득한 짐승이 무엇입니까? 뱀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던 뱀입니다. 그러면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이 뱀의 권세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는 그 특성이 그대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곧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이 입을 통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율법을 지켜 의인이라고 하는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면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요8:44).
마태복음 23:27절에서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바울사도가 인간의 실상을 말하는 것이 누구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마23:3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고 그 율법을 지킨다는 그래서 가장 의롭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인간의 실상에 대하여 예수님의 평가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십니다.
로마서 3:15절입니다. 입만이 아닙니다. 입에는 나오는 것은 모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사람의 마음은 죄가 권세로서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장악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악을 실행하는 것은 발입니다. 이 발이 얼마나 빠르게 악을 행하는 일에 빠른지 우리의 발이 빨리 움직이는 곳이 어느 곳에 빨리 움직이고 있습니까? 결국 마음과 행동이 다 악할 뿐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16-18절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이러한 인간은 고생과 파멸만 그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이 자기는 마음으로도 행위로도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바울사도는 한명도 없다고 합니다. 모두다 죄 아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영원한 멸망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 스스로는 죄의 권세를 이겨낼 방법이 없습니다. 양심으로 안 됩니다. 율법도 안 됩니다. 그 어떤 인간의 행위로도 죄를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죄 아래 있기에 하나님의 진노만 기다려야 합니다.
그 러 나
로마서 5:8-11절입니다. “봉독” 죄 아래 있을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으로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고 장차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입은 자는 그 어느 것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완벽하게 일하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합니다.
로마서 3:19-22 율법과 의 2003. 9. 14.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율법과 하나님의 의에 대한 분기점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1:1-17절까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요점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1:18-3:19절까지 유대인의 율법 지킴이나 이방인의 양심과 도덕률에 의하거나 간에 어떠한 노력을 하여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이미 인간이 죄의 권세아래 있기에 스스로 그 권세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자신이 죄를 조종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스스로 이길 수 없으면서도 이길 수 있다는 착각을 어떻게 하는가 하면 스스로의 기준을 정하고 목록을 만들고 양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 아래 있는 결과가 어떤 모습으로 나옵니까?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할 뿐입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가득하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일에 빠른 것입니다.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기에 수에 칠 가치도 없으며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 가벼운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율법의 기능과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하는지 율법의 기능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율법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입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아래 있는 자들이 율법을 지켰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할말이 없는 자라면 율법이 없는 자들은 더더욱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모든 입을 막아 버리는 것은 율법을 통하여 인간의 죄가 드러나기에 그런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 버리는 것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입니다. 율법의 문자적이고 외면적인 적용과 지킴이 아니라 그 깊이와 내면적인 적용 앞에서는 그 어느 인간이라도 입을 닫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후에 제일 먼저 기록된 사건이 문둥병자의 치료사건입니다. 레위기에서 문둥병자가 되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입술을 가려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제정자가 친히 율법의 깊이와 내면을 말씀하시면 모두가 입을 가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신은 입술이 부정한 자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아는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입술이 부정한 것을 알게 됩니다. 부정한 입술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그 입이 열린 무덤인 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주님을 만나고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입술이 제단의 숯불에 지져져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만 입을 막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고 나서도 입을 닫게 됩니다.
에스겔 16:60-63절입니다. “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61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접대할 때에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려니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62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니 63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태어나자 말자 탯줄도 자르지 않고 버려진 계집아이를 불쌍히 여겨 씻기고 입히고 공주처럼 키워 놓았더니 온갖 음행을 행한다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인하여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용서는 네 언약이 아니라 내 언약이라고 하심으로 이루어 내시고 그렇게 하심으로 여호와를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용서를 받고 나서는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용서를 받은 사람은 입이 열 개가 아니라 백 개라도 할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용서를 받은 사람은 결코 자기 자랑이나 자기 의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고소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45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유대인들이 믿고 바란 모세가 무엇을 한다는 것입니까? 고소를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고소합니까? 율법으로 고소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로 받아 전한 모든 명령과 규례를 단 하나라도 지키지 아니하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단 하나를 어기면 모두를 어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저주와 심판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심판에서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지니 죄가 무엇인지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7:7-8절입니다.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ㄱ)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율법이 도둑질 하지 말라 하면 오히려 도둑질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죄가 계명을 가지고 인간을 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가입함으로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짐을 인하여 왜 인간이 저주 아래 있는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가를 알게 하시어 입을 닫게 하시는 조치입니다. 재판장 앞에서 너는 죄인이니 입 닫아, 그러는 것입니다. 입 닫으라고 하는데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사람,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도 자신이 죄가 무언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하시는 분은 몇 번이나 확인을 한 내용입니다. 죄란 윤리에 어긋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주체적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자아를 드러내는 삶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죄임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항변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생에 내 자아 하나 위하여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언제 주님을 먼저 생각이나 해 보았습니까? 주님을 말한다고 하여도 결국은 자기의 자아를 위한 들러리로 주님을 이용하였지만 제대로 주님의 뜻에 복종한 적이 과연 있기나 한 것입니까?
이제 우리 자신에게 적용을 합니다. 율법이라고 좁혀 말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넓혀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당당하게 설 수가 있겠습니까? 그 어느 한 말씀인들 제대로 순종한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을 제대로 준행하였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조용히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입을 닫고 조용히 지옥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중요합니다. ‘그러나’가 없다면 모든 인간은 전부 심판에 이르러야 마땅한 것입니다. 로마서 3:21절에 ‘그러나’가 빠져있습니다만 제대로 느낌을 살리자면 “그러나 이제는”입니다. 로마서 1:18절에서 지금까지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죄의 지배아래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죄의 권세를 모르고 자기들이 무슨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의 목표는 율법 외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인간들이 모르게 하고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인간의 가능성을 붙들게 함으로 주님의 의를 받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전에는 죄가 왕 노릇하였는데 이제는 의가 왕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죽음이 왕 노릇 하였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이제 두 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죄 아래 있든지 은혜 아래 있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중간 지대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되심을 믿으신다면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온 세상을 다 주어도 살 수 없는 생명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된 것이 어떻게 일어난 것입니까?
로마서 3:21절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증거하고 선지자가 증거한 것이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그 의가 드디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율법 외에 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신약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한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이라고 하면 모세오경을 말합니다. 그러면 창세기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나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때로부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전쟁을 벌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벨 대신 셋을 주시고 에녹과 노아를 부르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더욱 구체적인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땅과 자녀에 대한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심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였고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선지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한 것입니다. 이사야 61:1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2)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지만 주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옷은 신랑 신부가 단장한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 33:14-16절입니다. “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모든 선지자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22절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의는 우리의 어떠한 조건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율법 외에 주어진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 외에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준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신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행하신 결과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자기의 의에 대하여 자기의 자랑에 대하여는 입을 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그의 하신 일만 증거할 뿐입니다. 여기에 그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로마서 3:23-26 구속으로 말미암아 2003. 9. 21.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3)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이사야 선지자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외치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사야 40:6-8절의 말씀입니다.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이 말씀을 베드로 사도가 인용한 말씀이 베드로전서 1:23-25절입니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ㄴ)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아름다움을 영광으로 말씀을 복음을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문자대로 인용을 하지 않았지만 성경에서 증거하는 인생에 대하여 야고보서 1:9-10절에서 말씀합니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이 세 곳의 말씀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영광이 얼마나 순간적이며 부질없는 것인지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적으로 아름답게 표현이 되어 있지만 인생이란 것이 한 포기의 풀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이 아무리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순간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풀의 꽃과 같은 것입니다. 풀이 시들어 버리면 그 꽃도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광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 인간의 선함, 인간의 진리라는 것이 풀의 꽃 정도이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라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지 이사야 선지자는 더러운 옷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죄 아래 갇혀 있는 것이며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악취만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야 가장 아름답다, 고상하다고 하지만, 화장실의 구더기들이 자기들은 좋은 환경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냄새나는 것과 다름없이 인간의 영광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악취일 뿐입니다.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할 뿐임이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증거하고 있으며 그러한 구약의 증거들을 로마서 3:10-18절에서 이미 밝히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치우쳐서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며 그 발은 피 흘리는 일에 빠르다고 합니다. 이런 인간이 하는 말과 행동이 어떤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인간의 말과 행위들이 만들어낸 인간의 영광이라든가 위대한 문명이라고 스스로 찬양하지만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속히 철거되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내 자신임을 인정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직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인간의 이러한 실상에 대하여 인정하는 자라면 입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데, 그러나, 등으로 자기를 변호하고 옹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증거하는 인간의 실상에 대하여 아멘 할뿐이지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말하는 자들은 율법아래 있는 모든 자들의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그 어떤 가능성도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교육도, 환경의 개선도, 도덕도 인간의 손에서 나온 것으로는 스스로 의에 이를 수가 없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이러한 인식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므로 우리가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주의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면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무엇이겠습니까?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미 죄 아래 있기에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까?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여 인간이 그 대가를 지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의에 이르는 값을 요구한다면 단 한 사람도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값없이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가 되지만 하나님 쪽에서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그 대가가 무엇입니까?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 사망의 대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교회란 예수 믿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의 피와 땀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와 땀을 알고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흘리신 피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25절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을 삼았다고 말씀합니다. 화목제물이란 구약에서 제물을 드릴 때 그 제물 되는 짐승의 머리에 죄인이 안수를 함으로 죄를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짐승이 대신 희생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속죄제인데 속죄제를 지내고 나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에 화목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속죄와 화목제물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인하여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내시는 것이 목표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단지 죄 사함을 받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구원은 은혜로 상급은 행함으로 그런 말을 합니다. 구원과 속죄는 예수님의 피로 성화는 우리의 힘으로 그렇게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이미 단번에 의롭다 함을 얻고 거룩함을 얻었고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또 다른 의를 이루거나, 또 다른 성화를 이루거나, 또 다른 영광을 이루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구속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속으로 말미암아’ 입니다. 구속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구속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여 놓았고 나머지 거룩하여 지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너희들이 알아서 이루어 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 안에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영광이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구속 곧 그 피로 인하여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 어떻게 영광까지 주어지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7:22절과 24절을 봅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를 지신 영광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이 왜 영광이 됩니까?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얼마나 철저하게 심판하시는지를 보이시면서 동시에 자기 택한 백성을 의롭다 하시기 위한 십자가였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로마서 3:26절의 말씀처럼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시면서 동시에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14절에서 무어라고 증거합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증거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후에 사도가 성령을 받고서 기록한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님을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나니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 의롭다 하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모든 것이 어떻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구속은 은혜로 주어지고 나머지는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8:30절에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고, 우리의 거룩이 되시고, 우리의 영광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모든 은혜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구속으로 말미암는 은혜가 계속하여 증거 되지가 않고 ‘구원은 은혜로 상급이나 성화는 인간의 행함’이라는 구호가 끊어지지 않을까요? 인간의 죄인 됨의 근원이 하나님을 떠나 독립적인 인간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존적인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가 주인이 되고 싶어 하지 종이 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지시를 받고 살지만 때만 되면, 능력만 되면,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라도 독립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처 끝까지 은혜에서 은혜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간다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존재가치를 무시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도대체 무어냐는 반문이 자꾸만 일어나서 인간으로 하여금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과 환경 속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거룩함을 얻고 영화롭게 된 자들은 참으로 은혜로 된 자들이며, 이들은 이제 소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영광의 날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 영광이 아니라 온 세계에 다 알려지는 그 영광의 날을 소망하는 것은 그 날에 우리의 낮은 몸도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 3:17-21절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아멘.
로마서 3:27-30 자랑 2003. 9. 28.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있습니다. 자기 자랑거리를 말하고 또 만들어 내는 재미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랑거리가 없어지고 수치가 드러나면 살 마음이 없어지게 됩니다. 부끄럽게 살기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었지 수치를 당하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자살도 결국 자기 사랑의 일종입니다. 토요일 뉴스에 또 일가족이 승용차 안에서 자살한 내용이 나왔습니다. 남편은 회사의 부도로 실직하고, 아내는 학습지 교사를 하고, 자녀는 9,7,4살의 세 자녀를 두었습니다. 친척에게 빚을 지기도 하였답니다. 왜 자살하였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았지만 생활고를 비관하여 자살하였다고 봅니다. 이런 자살이 종종 보도가 됩니다. 그러면 왜 자살하는 것입니까? 멋있고 자랑스럽게 살고 싶은데 상황이 그렇게 되지 않으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아니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도 얼마든지 이런 상황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끄러워 죽겠으니 차라리 죽자고 하시겠습니까? 지난주에 인생이 무엇과 같다고 하였습니까. 풀과 같고 그 아름다움이 풀의 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이 한포기 풀과 같다면 무엇이 잘난 것이 있고 자랑스러운 것이 있어서 죽기까지 하겠습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줄 모르니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자기 자랑하는 재미로 살고 있는 것이지 죄인인줄 안다면 수치를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드러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인이다. 모든 것이 다 죄라고 하니 어떤 오해하는 분들은 그래, 그렇다면 이래도 죄고 저래도 죄이니 내 마음대로 살자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는 죄인이야, 하면서 주눅 들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언가 잘나고 멋있고 아름답고 고상한 것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자기 포장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임을 아는 자에게서 오는 자유입니다. 그동안 자기를 치장하고 포장하느라고 얼마나 힘이 드셨습니까? 그런 헛수고 하지 마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랑할 데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예수를 바르게 믿는지, 아니 믿는지 테스트를 해볼 수 있습니다. 내가 믿고, 믿음으로 무엇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자랑이 나오느냐, 감사가 나오느냐로 테스트 해보시면 구별이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교회로 모여서 예배도 드리고 여러 가지 봉사도 합니다. 이것이 자랑인가 감사인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지 않아도 나는 온다는 것, 다른 사람들은 봉사하지 않아도 나는 잘 한다는 것, 다른 사람들은 복음을 잘 모르는데 나는 잘 안다는 것, 이런 것들이 자기의 자랑으로 나옵니까? 아니면 감사로 나옵니까? 자랑으로 나온다면 아직도 자신의 죄인됨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러면 감사로 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여기서 목사가 여러분 교회의 모든 일은 감사로 해야 합니다, 하면 어떤 일이 생기겠습니까? 그렇지, 교회 일을 자기 자랑하기 위하여, 또는 복 받기 위하여 하는 것은 아니지, 감사로 해야지 하면서 자기 마음을 의지로 굳혀나가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여도 자랑으로 하지 말고 감사로 해야지 하면서 스스로 자기 마음에 다짐에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역시 인간의 행함입니다.
지난 금요일낮 성경공부반에서 두 시간을 넘게 이 문제로 교제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들의 의지를 동원하여 하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의 의지로 굳혀서 “믿습니다.”를 반복하거나 “사랑합니다.”를 반복하고 세뇌시켜서 믿음이나 사랑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오는 믿음과 사랑이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게 나올 수는 있어도 그것은 육체의 열매이지 성령의 열매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자원하는 영이 임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심령을 주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는 것이라면 어느 누구의 지시나 간섭이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란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할 것 같으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도 나오기 싫은데 체면상, 눈치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면 그만 나오시기 바랍니다. 연보도 아까우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강권하여 네 집을 채우라는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그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이 텅 비었기에 채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성전은 제물과 사람들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채찍을 만들어 좇아내어 버린 것입니다. 새로운 성전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새로운 성전은 성령이 임함으로 자원하는 심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원하는 영이 임하여 감사함으로 되지 않으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되겠습니까? 교회 유지가 되겠습니까? 되지 않으면 문 닫으면 될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곳이 교회입니다. 목사가 있어야 교회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원하는 영이 임한 두세 사람이 모여도 완전한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로 모였다면 그곳에서는 무엇이 없는 곳입니까? 사람의 자랑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만약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서 우리는 기존의 교회와 다르다, 우리는 정말 성경대로 모인 교회이다, 우리는 사람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예수다, 그러므로 우리처럼 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한다면 그곳이 또다시 인간의 자랑이 나오는 곳이 되어 버립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 27절을 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라고 합니다. ‘그런즉’ 이런 앞의 모든 내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앞의 모든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무슨 내용입니까? 인간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죄의 권세아래 있는 인간이 어떤 형편인지를 두 가지로 보여 줍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입니다. 이방인이 본성상 하나님을 찾는다고 찾았는데 그것이 우상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를 위한 신이었기에 자신이 신보다 높고 신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있어야 하는 그런 꼴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을 믿는다고 하여도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당연히 생각하기를 사람이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합니다. 지키지도 못할 것을 주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키지도 못할 것을 주시고 지키지 못하였다고 벌을 준다면 하나님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율법을 받기 전에 죄 아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율법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는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아 죽인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죄인으로 죄 짓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죄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이 의롭다고 하면서 살아간 것입니다. 그렇게 의롭다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뱀, 그러면 유대인들이 얼마나 싫어하겠습니까? 자기들의 조상을 타락시킨 뱀의 자손이라고 하고 있으니 얼마나 화가 났으면, 얼마나 자기들이 자존심에 상처가 되었으면 예수님을 죽였겠습니까?
그러나 율법이 가입한 것은 그들의 죄 아래 가두심으로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우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자랑거리로 여긴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것, 할례를 행한 것, 성전이 있는 것, 안식일을 지키는 등등의 일들이 얼마나 자기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다른 이방인들을 개같이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자랑거리만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자랑거리는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십일조를 하지 않고 연보를 한다, 연보하는 사람 주보에 싣지 않는다, 억지로 하는 일은 없다, 일체의 경쟁이 없다, 건축헌금도 돌려주었다, 선교도 한다는 등등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것을 자랑거리로 삼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또 다른 모습으로 자기 자랑거리를 다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자랑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교회란 처음부터 끝까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께서 관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흔히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 인간의 소리, 인간의 행정들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만 그런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입니다.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사신 자기의 몸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교회들을 보고 교회가 이래서 되느니, 안 되느니 하실 일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생사를 건 교회개혁’이라고 하는 책을 누가 주어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생사를 건다는 것이 위임목사 하지 않고 몇 년에 한번씩 시무투표를 하는 것이 생사를 건 것입니까? 그런 생사를 건다면 임시목사는 매년 생사를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개혁될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개혁되어야 합니까? 그 피의 완정성이 부족합니까? 구속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거룩함을 얻고, 영광스럽게까지 하신 주님의 구속의 능력에 흠이 있습니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금도 놓지 아니하시고 철저하고 완벽하게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늘푸른 교회라고 여러분들이 돈을 내어서 세를 얻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것을 교회로 보지 않습니다. 이런 교회란 태풍에 날아갑니다. 간판 중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늘푸른’은 남아 있는데 ‘교회’라는 간판은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 교회라는 간판이 날아가면서 만약 사람을 쳤다면 흉기가 될 얇은 철판으로 된 간판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날아 가버리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산 백성들만 교회입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는 모릅니다만 그런 사람은 일체의 인간적인 자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잘남도 없고, 다른 사람의 잘남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자랑이 죄임을 아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죄의 목록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30절에서 보시면 자랑이 무엇과 함께 나오는가 하면 교만과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랑이란 인간의 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그 교만이 자기 자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신 모든 것들을 은혜로 받아 사는 것이 싫다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 교만이며 그 결과가 자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대단한가? 나도 대단하다는 것이 인간의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을 유형으로든 무형으로든 만들고 있으면서 스스로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의 솜씨와 행함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신 일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3:21-24절을 보시면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로서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인간의 믿음이 조건이 아닙니다. 그 믿음이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담겨있는 것이 믿음이지 자기의 믿어주었다는 행위가 담겨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믿습니다’는 의지적 결단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피로 화목제물을 삼으시고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선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의로움이 우선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시고 믿는 자를 또한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없는 것입니다. 27절을 봅니다. 왜 자랑할 수가 없습니까? 자기의 행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무엇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 믿음의 실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실 분은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이러한 믿음을 인간이 의지적 결단이나 마음을 굳히거나 반복 학습하여 받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혹시 지식으로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들은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핍박이나 내일의 대한 염려나 재리의 유혹에 다 날아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자기 자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라는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멸하시는 악인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시편 28편에서 다윗이 악인을 멸하시고 주를 의뢰하는 자를 구원하소서! 하는 시편가운데서 저희를 심판하시고 파괴하고 건설치 마소서라고 하는 악한 자들이 누구인가 하면 5절에서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파괴하시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는 것은 여호와께서 친히 행하시고 자기 손으로 지으신 것이 아닌 것, 즉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모든 것들을 다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엇을 이루어 내어서 하나님께 보십시오! 우리가 이것을 해 내었나이다, 라고 말할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윗은 시편 115:1절에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의만 말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6-31절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ㄴ)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은 세상에서 자랑할 것들이 별로 없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혹 자랑할 것이 있는 사람이 오더라도 교회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 왜 그리 자랑이 많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랑하면 별로 알아주지도 않고 먹히지도 않으니 교회 안에 와서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까? 에베소서 2:8-9절입니다.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왜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 것입니까? 여기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자기의 행함이 아님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자기 자랑하지 맙시다, 하는 결론이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계속 자기 자랑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구나하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세상의 자랑들은 다 쓰레기요 배설물입니다(빌3:1-9).
로마서 3:30-31 율법을 세움 2003. 10. 5.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가을 들판에서 추수를 하고 있습니다. 탈곡을 하면서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합니다.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웁니다. 올해는 유난히도 쭉정이가 많습니다. 어떤 논에서는 아예 추수를 하지도 아니하고 갈아 엎어버리는 곳도 있습니다. 교회의 10월 달력에도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내시는 작업을 하시는 분으로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알곡은 곡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3:12).
예수님께서도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시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알곡은 천국창고에 들이고 가라지는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불에 던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인간은 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당장 어떤 생각을 합니까? 어떻게 하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방법을 가르쳐 주면 그대로 지켜 순종하여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거듭남과 죄사함의 비밀’을 알려 주겠다고 텔레비전에서 광고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죄 아래 갇혀 있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행함으로 의에 이를 수가 없는 형편에 처하여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인간의 행함으로는 하나님 앞에 살아갈 자격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로마서 1장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계속하여 보아 왔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반발이 나오지 않습니까? 아니 인간을 어떻게 보고 그렇게 무시하는가 하는 반발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반발을 가장 강력하게 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율법을 받고 율법을 지킨다는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은 의롭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율법을 다 지킨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어라고 반발을 하겠습니까? 율법을 지킨다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셨는가?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우리를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너는 율법을 모독하는 자라고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을 하자 유대인들이 바울도 죽이려고 드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의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킨 그 의로움과 특권이란 다 날아가 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율법이 폐하여 졌는가 하는 말을 바울사도가 미리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폐하여 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율법이 세워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요구가 무엇입니까?
신명기 30:19절을 봅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신명기 28장에서 복이란 여호와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명령과 규례를 다 지켜 행하면 생명과 복이 되지만, 하나라도 어기면 사망과 화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망과 저주를 받지 아니하고 생명과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지켜 행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생명을 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인간은 생명과 사망을 두고서 선택하라고 하여도 생명을 택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미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10절입니다.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ㄴ)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만 어기면 다 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0절입니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ㄷ)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 왜 저주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까?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해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이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고 하나님의 심판아래 가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불 순종아래 가두는 것입니다. 스스로 순종하여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율법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율법의 성취란 모든 인간이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을 다 드러냄과 동시에 율법을 어겼기에 저주가 임하는 것까지 이루어져야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7-20절을 봅니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시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기존의 율법을 지킨다는 유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지켜 행함으로 율법을 지키지 못함에서 오는 저주까지 해결이 되어야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존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율법을 사랑하고 지키는 수준이란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율법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목숨처럼 지키는 율법의 의라는 것도 율법의 완성을 이루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20절 이하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형제에 대하여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고, 형제에 대하여 욕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거든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사화하고 와서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간음도 마음으로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입니다. 도적질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마음에 탐심은 어떻게 합니까? 구제를 하기는 하는데 어떻게 왼손이 모르게 할 수가 있습니까? 결국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로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가 없는 의의 기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나은 의가 나와야 하는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실격하였는데 어느 누가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 주님 앞에 나설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자기는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씀이 통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가 하면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무슨 재미로 산다고 지난주에 보았습니까? 자기 자랑하는 재미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 의 축적에 대한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아십니까?
로마서 10:3절에 보시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있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이를 복종치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피조물로서 창조주로부터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그대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무익한 종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무엇을 행하면 행하는 것만큼 그것을 자기 의로 축적시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9-14절입니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기도란 자기의 부족을 아뢰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마저 자기 과시가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도 사람들이 내 기도를 사람들이 어떻게 들을까를 생각하니 어려운 것입니다. 저도 대표기도를 많이 해보았습니다만 하나님께 대한 간구보다는 사람들을 의식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입니다. 설교인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찬양인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런 우리들이 도대체 무엇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율법의 문자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그 깊이와 뜻에 이르기까지의 순종이란 인간으로는 참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 마음 굳힘으로 지킬 수가 없는 내용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 앞에서 무엇이 드러나는 것입니까? 죄인임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6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제일 우선이 마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기도도 하고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는데 무엇이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율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끌리는 것입니다.
어제 새벽기도회 때에 고린도전서 12:1-3절을 보았습니다. 이방인 때에는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대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우상이 끄는 대로 끌리는 것입니다. 우상이란 헛것입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끌리는데 어떻게 합니까? 거부하지 못하고 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에게 속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주 예수라고 하면서 끌리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 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마음이 예수님께로 끌리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될 일이 아닙니다. 찬송가 135장 2절 가사에 “멸시함을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라고 찬송합니다. 멸시함을 받고 저주를 받은 십자가에 무엇이 있다고 마음이 끌리겠습니까? 이것이 율법의 완성으로 이루어진 기적입니다. 율법의 요구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완벽하게 다 지키면 생명과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라도 어기면 사망과 저주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성취되어야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완성을 누가 이루어 내신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3:10-14절입니다. “봉독”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을 다 완성하심으로 의를 이루셨고, 또한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의롭다 하시고, 대신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믿는 자의 복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로 인하여 이제 믿는 자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도망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망과 저주를 해결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를 인하여 주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나고 또한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4:1-8 행복하십니까? 2003. 10. 12.
1 그런즉 1)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ㄱ)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5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 ㄴ)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함과 같으니라.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작년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이 말한 것을 코미디언이 요즈음도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삶이 없었으면 이런 말이 다 나왔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사람이 사는 목적이 행복하기 위하여 산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과연 행복하십니까?
사람들은 어떨 때 행복감을 느낍니까? 자기의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오랫동안 소원한 것이 이루어 졌을 때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교회 나오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려면 교회 나오는 사람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소원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기도하라. 예배를 잘 드려라. 정성을 다하라. 헌금을 하라면서 소원 성취하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그러면 자기의 정성 바침, 자기 행함에 따라 소원의 성취가 빨리 되기도 하고, 늦게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안되는 사람은 믿음이 부족하다거나 정성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분위기속에서 다른 말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들은 그렇게 수준 낮은 이야기들은 이미 졸업하였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도대체 나를 무엇으로 보고 그렇게 말하는가 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런 것들이 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바른 말씀을 찾아서 복음을 찾아서 왔다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좀더 고상하고 차원 높은 수준이 되자는 것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스스로의 행함으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있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에 불가능하면 인간과 의논하거나 어떤 행위를 요구하기 전에 이미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하여 놓으시고 그 예정된 자들을 찾아 나서시겠습니까?
교회는 자기의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지고 부수어지는 곳입니다. 자기의 소원 성취가 죄임을 알고 나의 뜻이 포기되고 주님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하는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는 자기 소원성취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모였다고 하여도 역시 이름만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만 그 안에는 또 다시 자기의 행함에 가치를 두는 자기 의가 자기도 모르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도대체 어느 정도로 죄인이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다 지킨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나섰겠습니까? 이들이 포기하지 못한 자기 의가 우리 안에도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죄인이기에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기분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일한 것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복음입니다.
4:1절을 봅니다. ‘그런즉’이라고 시작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말씀을 받아서 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할례를 받은 사람이나 받지 아니한 사람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구약의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그들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라고 바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 그러면 대부분 먼저 기가 죽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믿음으로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00세에 낳은 아들도 바치라고 하니 단번에 바쳤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으로 우리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자는 설교를 아주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들린 것은 우리의 종교적 본능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언가 다른 것이 있어야지 복을 받은 사람은 무언가 다른 면이 있었지 그러므로 우리도 그런 사람 본을 받아 복을 받아야지 하는 이야기가 솔깃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하여 로마서 4장에서 계속 말씀하고 있으니 계속 보겠습니다만 그동안 창세기에서 또 ‘신앙클리닉’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많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믿음이 좋아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전혀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믿음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계시입니다. 그 믿음이란 없는데서 생긴 것입니다. 원래 있는 것을 어떻게 손을 써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없는데 새롭게 창조하여 만들어 내시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자신이 믿어주어서 의로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여 내신 것입니다.
4:1절입니다. ‘그런즉’이라고 시작을 하면서 아브라함의 예를 듭니다. 우리 성경에 두 가지 번역이 가능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육신으로 우리 조상되었던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이것을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육으로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육신으로 자기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라고 하지만 후자는 육으로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라고 봅니다. 즉 아브라함의 육체의 행함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번역이 자연스러운 것은 다음 연결되는 2절과 잘 어울립니다.
4:2절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즉 육체의 행위로서 의롭다 함을 얻었다면 자기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자기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의롭다 함이 무엇으로 검정이 된다고 하였습니까? 나는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오늘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 나은 것이 있어서 복을 받고 산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은 자랑할 것이 없는데 오늘날 교인들은 자랑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자랑도 예수님이 아닙니다. 자기들 교회입니다.
4:3절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저의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5:6절의 말씀입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후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창세기 15장은 아직 아브라함의 이름이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후손이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으리라고 하십니다. 그 약속을 믿으니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믿기까지는 애굽에 내려가서 바로왕과의 경험, 자기 조카를 구하기 위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치러온 연합군과의 전쟁의 승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씩 알아간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 후손에 대한 약속을 믿을 정도로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빨리 생기지 않으니 아내의 말을 듣고 이스마엘을 낳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한 후손은 아브라함이 협조하여 나오는 후손이 아니라, 없는데서 있게 되는 방법으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래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나올 후손을 꼭 찍어서 갈라디아 3:1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후손이 나오리라는 것은 단지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녀가 많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도 예수님 안에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를 해석하는 예수님의 해석방법입니다.
요한복음 8:51-59절입니다.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52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보고 귀신 들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예수님께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예수님 안에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시간순서상으로 맞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묵시세계라고 합니다. 시간의 앞뒤가 아니라 주님의 일하시는 차원은 우리 인간의 시간개념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누구를 믿는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말이고 그 약속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태어나심과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하여 계시가 된 것입니다. 마치 이삭이 태어나는 것처럼 없는데서 있게 되었고,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려졌다가 다시 산 것처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방식으로 예수님이 일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바울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4:4절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님을 다시 예로 들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삯을 받는 것은 은혜입니까? 마땅한 댓가입니까? 일하는 사람이 월급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주가 근로자에게 일을 시켰으면 당연히 월급을 주어야 합니다. 만약 월급을 주지 못하면 사주가 근로자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계속 월급 안주면 데모를 하든지 법적으로 사주의 재산을 차압하든지 해서 받아내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자신이 일한 대가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만약에 의롭다 함을 인간의 행위로 받는 것이라면 일하는 정도에 따라서 많이 의롭고 적게 의롭고 하는 차이가 날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천국에서도 데모가 일어날 것입니다. 아브람과 바울 순교자들이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십자가에서 예수 믿고 천국 온 강도와 같이 취급하느냐고 데모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은혜로만 들어가는 나라이기에 주님을 위하여 순교를 하였어도 그것이 자기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된 것 인줄 알기에 주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오직 은혜만 강조하니 한국교회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강조하고 믿는 자의 책임을 강조하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참된 은혜를 입은 자라면 주를 위하여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렇게 된 것임을 고백할 뿐입니다.
야고보서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은 믿음의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믿음이란 세상의 차원을 뛰어넘은 행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아브라함의 행함이 자기의 일한 열매라면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함으로 나타난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행함이 우리에게 나오지 않으니 자꾸 무엇을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하라고 하지 말고 은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마음의 따름이 없이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절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떨어져 있는 가지에다가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고함을 지르니 열매를 돈 주고 사다가 가지에 붙들어 매어놓고 있는 실정이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4:5절을 봅니다. ‘일을 아니할 지라도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을 하여서 의롭다 함을 받으면 그것은 자기의 공로가 되기에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을 아니하고 받는다는 것은 인간이 어느 정도로 무능한가를 알라는 것입니다. 일을 하라고 주면 오히려 망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어려운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덤벼듭니다. 그러면 어른이 무어라고 합니까?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도대체 어느 정도로 불가능한 죄인이면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태어나기도 전에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기도 전에 배 속에 있을 때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 얻고자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 정성을 바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부르시는 자에게 전적으로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울사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가지고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의 사람입니다. 다윗은 율법이후의 사람입니다. 율법 이전이나 율법을 받은 이후나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무엇으로 되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왜 인간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고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의롭다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4:6-8절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의로운 왕이었습니까? 그러나 자신이 살인과 간음을 하여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이런 다윗이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결국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의 가리우심을 받는 사람을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소식이 기쁜 소식이 됩니까? 자기 살길을 다 마련하고 있는 사람에게 복음이 과연 기쁜 소식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살길을 다 마련하여 놓고서 여유가 있어서 종교를 한번 가져볼까 하는 사람은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소식이 별 기쁘지 아니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이 복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죄인인지를 아는 사람은 일한 것이 없이 거주 주시는 은혜가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할 정도로 못난 인간임을 아는 자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복음은 그야 말로 행복한 소식이 됩니다.
로마서 4:9-12 할례의 뜻 2003. 10. 19.
9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10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김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 불법의 사하심을 받고 그 죄악의 가려짐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할 사람을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복을 지난주에 누렸습니까?
이 복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얻는 복입니다. 이 복을 받은 사람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다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을 놓치고 다른 복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거대한 홍수에 떠내려가면서 떠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주변에 흘러가는 여러 가지 물건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사망의 거대한 홍수에 떠내려가면서 스스로 빠져 나올 방법이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택과 긍휼을 입어서 건짐을 받았다면 이것이 참된 복인데도, 물에 건진 사람 내보따리 내어놓으라는 식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의가 없는 상태가 어떤 결과 인줄을 아는 사람이기에 의롭다고 하여주시는 복에 대하여 참으로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쁘지 않는데 기뻐하라고 말해서 기뻐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하지 않는데 행복하라고 말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 되고 오직 주의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런 행복에 대하여 하박국 선지자는 미리 말하였습니다.
하박국 3:16-19절입니다.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 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박국 선지자의 의문은 왜 불의한 자가 형통하고 의로운 자가 고난을 받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런 세상에 대하여 심판이 임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내용인지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뼈가 썩는 것 같고 몸이 처소에서 떨린다고 합니다. 무시무시한 심판 앞에서 무엇이 복입니까? 풍성한 곡식입니까? 수많은 가축 떼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이 많다고 심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구원으로 인하여 기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말씀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불법의 사함을 받고 그 죄악의 가림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에 아멘하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관심사가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입니다. 썩어질 것 없어질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주님의 이런 말씀에 기쁨과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자신의 죄와 비참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이 얼마나 기쁘고 좋은 소식이 되는지 아는 자만 아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 행복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9절에서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 있는가? 무할례자에게 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 복이 할례가 없었을 때 받았는가, 할례를 받고서 받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언제입니까?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서 무려 14년이 지나서 할례를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할례를 받음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약속으로만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과 노력을 동원하여 일하시는 것이 아님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일에 인간이 쓰이는 이유는 인간의 노력과 애씀이 어떤 불순종과 죄악된 모습인지를 드러내시면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나서 할례를 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창세기 15:6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믿고서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 노력이 무엇입니까?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그로부터 14년이나 지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을 이스마엘 식으로 만들어 내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명하신 것입니다. 이미 아담아래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죽은 사람으로 새 사람을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여 내시는 차원에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보이신 사건이 할례를 명한 것입니다.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 끝의 양피를 베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혈통이 아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라도 처음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인데 이제는 폐경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 99세 때입니다. 이 때 할례를 행하고 나서 이삭을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삭이란 할례를 받고 나서 낳은 자식이기에 자기 자식이 아니라, 자기 생식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도식화 해 보겠습니다. 구원이라고 하여도 되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이라고 하여도 되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이라고 하여도 됩니다. 이러한 성경의 약속들이 어떻게 성취되는가에 대한 도식화입니다. (1)전적인 인간의 노력이다. (2)인간의 노력 절반, 하나님의 노력 절반이다. (3)전적인 하나님의 노력이다. 몇 번입니까? (3)번이라고 대답을 하시겠지요? 그러나 (2)번에 대한 미련이 과연 없습니까? 일한 것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창세기 17장을 봅니다. 아브라함 99세 때에 할례를 명하시는데 할례를 행하고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되는 것입니다. 할례와 함께 이름까지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열국의 아비’와 ‘여주인’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 할례를 명하시면서 사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주신다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웃습니다(17절). 사라도 웃습니다(창18:12).
이 웃음이 어떤 웃음입니까? 하나님은 농담도 잘하셔, 하는 그런 웃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경수가 끊어진 사라에게서 나올 자식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뜻이 웃음입니다. 일 년 후에 이삭이 정말로 태어납니다.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 마다 무엇이 생각나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나는 믿지 못하고 웃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참된 웃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일에는 인간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불순종의 터 위에서 이루어지는가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행함으로 인간의 생식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으로 태어나는 자식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바꾸시고 아브라함에게 생식의 능력이 있으니 할례를 명하시고 사라는 경수가 끊어진 때에 태어난 자식이 이삭입니다.
갈라디아서 4:21-31절입니다.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바 ㄱ)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ㄴ)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바 ㄷ)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2)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ㄹ)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이 말씀에서 할례를 행하기 전에 낳은 이스마엘과 할례를 행하고 나서 낳은 이삭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계집종에게서 남=육체를 따라 남=시내산=지상의 예루살렘, 이삭=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남=약속을 따라 남=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육체로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아브라함의 생식의 능력이 포함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잘라내라는 것이 할례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약속으로 나오는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할례란 왜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으로만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확인하는 표가 할례의 뜻입니다.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가 할례인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할례를 오히려 자랑하였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할례는 행하여야 된다고 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11-16절을 봅니다.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새로 지으심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오늘도 이삭이 나오는 방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방법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창조를 하나님 홀로 행하셨듯이 재창조도 하나님 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창조는 인간의 죄악을 드러내시면서 하나님의 홀로 일하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모든 죄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행함도 모두 부인되어지는 현장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당시와 지금도 마찬가지로 육체로 난 자가 성령으로 난자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따란 난 자는 함께 유업을 받을 수 없기에 내어 좇으라고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안에 있는 할례는 무엇입니까? 남보다 나은 무엇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내세울만한 것이 있습니까? 그러나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빌립보서 3:1-3절에서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개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참된 할례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참된 할례당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란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입니다.
로마서 4:13-17 상속자 2003. 10. 26.
13 아브라함이나 그 2)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2)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바 ㄷ)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오늘이 무슨 날인지 달력을 보셨습니까?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여 비텐베르크 성 교회 정문에 95개조의 의견서를 붙인 날을 기념하여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 당시 교회가 베드로 성당을 지으면서 돈이 많이 들게 되고 다른 빚도 많이 생기자 돈을 많이 내게 하는 방법으로 면죄부를 만들어 판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이란 인간의 행위냐 믿음이냐의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돈을 낸다고 죄가 사면되는가 하는 고민에서 루터의 개혁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개혁교회라고 간판을 걸고서도 오직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얼마나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까? 구원자체를 행위로 말하면 너무 표가 나기에 구원은 은혜로 상급은 행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천국에서도 큰 상을 받으려면 헌금을 많이 해라는 식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로마서를 통하여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인간의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다는 내용을 지금까지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계속됩니다. 왜 이렇게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씀이 길어지는가 하면 인간이 자기 행함을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죄인을 의롭다고 하여주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만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또다시 확인하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는 시점이 언제입니까? 할례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할례는 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확인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식의 능력으로 이스마엘을 낳은 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나는 자가 후사가 되리라는 것을 보이는 것이 할례였습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자기의 자랑이 아니라 자기의 부정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말씀이 율법으로 된 것이냐 믿음으로 된 것이냐 하는 내용입니다. 후사라는 말은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상속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씨와 땅입니다. 씨란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같이 많으리라는 것이며 땅은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신 상속의 내용물입니다. 그러면 이 상속을 받는 일에 있어서 율법으로 되었는가? 믿음으로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13-14절을 봅니다. 무엇으로 되었습니까? 율법을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믿음의 의로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아야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것이 율법으로 된다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 진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이 만약에 율법의 행위에 달린 것이라면 하나님의 약속자체가 헛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믿음의 관계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입니까? 15-16절입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범함도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왜 인간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인간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닌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되어야 그것이 은혜에 속한 것이 됩니다. 이 약속을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모든 자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은 자나, 받지 아니한 자나, 율법에 속한 자나, 속하지 아니한 자나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이 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보다 믿음이 좋아서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가를 아브라함을 통하여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은 아브라함과 같은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고백이 17절입니다.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임을 알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식을 놓지 못하는 가운데서 자기 집의 종 엘리에셀을 후사로 생각했다가, 계집종인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을 후사로 생각했다가 모두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후사를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삭의 출생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하고 사라는 죽은 태입니다. 여기서 이삭이 출생함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상속자를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무엇으로 믿게 된 것입니까? 나는 원래부터 믿음의 밭이 좋았다는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모의 공을 말하겠습니까? 전도 한 사람의 공을 말하겠습니까? 씨 뿌리는 자라 물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죄인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것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이 본문의 제목을 ‘믿음은 창조이다’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선행도, 종교적인 경건함도,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적 무입니다. 전적 무능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태초에 빛이 있으리라고 하신 그 말씀의 방식으로 믿음이란 새로운 창조인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방법입니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기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는 방식이며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에게 원인이 없는데 의롭다는 결과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가 아니라 믿어집니까? 입니다. 그러나 믿어지지 않는다면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가려져 있기에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4:1-6절입니다.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ㄱ)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오늘 새벽기도회 시간에 본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알지 못하도록 이 세상의 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6절에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능력으로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알고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서 무엇을 상속을 받은 것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상속을 받은 것입니다만 그 의롭다 함 안에 들어 있는 상속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후손과 땅입니다. 후손은 이삭을 통하여 성취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을 통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약속은 땅의 약속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이 성취가 되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데서 살리시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는 무엇을 받습니까?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으로 그 후사가 된다면 우리가 받은 상속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제가 아는 분은 결혼해서 약 20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아이를 낳게 되자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처럼 후손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땅을 차지한 것처럼 예수를 잘 믿어서 많은 땅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땅들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불신자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믿는 사람들이 다 차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제 복음주의입니다. 자기들이 여호수아와 그 군대처럼 온 세상을 다 정복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복이란 로마서 4:1-3절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봉독”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습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일한 것이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어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후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 후손이 이삭에게 성취되지만 그것은 모형입니다.
갈라디아서 3:13-16절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ㅂ)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ㅅ)아브라함과 그 3)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3)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3)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예수님께서 왜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까?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사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복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처럼, 이제 성도는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습니다. 그 약속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하신 약속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는 그 완전한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땅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받는 땅은 쇠하고, 망하고, 더렵혀지는 이 땅이 아니라 의에 거하는 바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후사가 된 사람들이 받는 복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이 없다고 해서 복을 받지 아니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미 그 안에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속자가 되는 것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자녀인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진노를 예수님이 담당하심으로 의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우리 안에 이런 기적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엡1:15-23)
로마서 4:17-25 무엇을 믿는가? 2003. 11. 2.
17 기록된바 ㄷ)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ㄹ)네 2)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며,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다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믿음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도 밝혀져야 합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가능성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조그마한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을 더욱 향상시키고 능력을 개발하여 자기의 꿈을 이루어내기 위하여 믿습니다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내용이 아닙니다.
어느 여학교의 교문에 ‘언니 믿어요!’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무얼 믿는다는 것입니까? 언니가 수능시험에 좋은 성적 받을 것을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은 아주 정확합니다. 공부한 대로 점수가 나오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는다는 말을 세상에서 통용되는 뜻으로 성경을 보게 되니 믿음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교회 안에서 흔히 믿습니다, 하는 내용들입니다. 주실 줄 믿습니다, 하는 식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소원을 이루는 것도, 교회가 전도의 목표를 세우고,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늘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혹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그것은 누가 봐도 사람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끝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믿음이 부족해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까? 믿음의 내용이 잘 못된 것입니까? 믿음의 내용에 그런 것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자기 개인의 소원이 믿음의 내용에 들어가지 않고, 교회의 욕심이 믿음의 내용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아브라함을 통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된다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모든 사람들의 모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무엇을 얻었다고 합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얻은 가장 큰 선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마서 1장에서 3장까지 계속 보아온 말씀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를 상세히 밝혀놓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거저 나오는 것이 속에서 가득 찬 죄악만이 터져 나올 뿐입니다. 우리 인간이 볼 때는 눈물이 핑 돌만한 감동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을 위하여 재산도 내어놓고, 심지어 목숨까지 내어놓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인간의 의라는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인정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의 의로운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함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갇혀 있기에 그 어떤 인간의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롭다 함이 나온다면 그것이 기적입니다. 17절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는데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의 내용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것을 내용을 받은 것입니다. 그 내용물이 무엇입니까? 이삭입니다.
1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다고 합니다. 바랄 수 없으면 바라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고 하는데 무모하게 도전하는 경우가 혹 있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식으로 일을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신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믿음이라고 선전하는 경우가 많은데 참으로 주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다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을 때 하였다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 것은 아니게 됩니다. 가능성이 조금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도와주어서 일이 잘 되었다고 말하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있는데서 있게 하는 방식이기에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 내용이란 그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그 후손이 많으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늙었고,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이제는 폐경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도 웃었고 사라도 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엉터리 같은 약속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에게 이루어지는 때는 언제나 인간의 비웃음을 사고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노아에게 홍수로 세상이 멸망한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세상이 비웃었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을 때 형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바로 왕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내어 놓으라고 하니 바로 왕이 여호와가 누구관데, 하면서 비웃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아서 골리앗을 물리칠 때 형들의 비웃음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비웃고, 사라가 비웃은 그 비웃음 속에서 약속의 자녀 이삭은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삭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무슨 생각이 나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였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주셨구나! 하는 것이 함께 터져 나오는 것이 이삭을 부르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19절입니다. 아브라함 백세로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고 죽은 것 같음을 알면서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때에 비웃었는데 어떻게 여기서는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 내용입니다. 바랄 수 없는데 바랐다면, 소망할 수 없는데 소망한다면 이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 믿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20절입니다.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영광이 아니라 믿음으로 영광인 것입니다. 그 믿음의 행함이란 것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이 아닌가 할 것입니다. 그 이삭을 바치는 사건이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삭을 바칠 때가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것인지가 계시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히브리서 11:17-19절입니다.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 1)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ㄱ)네 2)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입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받은 자를 드려서 죽이면 하나님의 약속이 파기되는 것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아 나온다고 하셨는데 이삭을 죽여 버리면 하나님의 약속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게 되는 것도 인간이 바랄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러서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없는데서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말씀을 창조하셨지만 새로운 창조,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창조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그의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심으로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창조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없는데서 있게 된 자식, 즉 하나님의 언약으로 주어진 자식이기에, 하나님의 약속은 폐하여지지 아니하기에, 죽더라고 다시 살리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입니다.
21절입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 확신하였으니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듯이 이루신다는 것을 그의 생애를 통하여 생생하게 체험한 것입니다. 그 고백이 나오기 까지 아브라함의 실패가 함께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일점일획이라도 빠짐이 없이 다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내 소원의 성취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나의 소원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복입니다.
그 복의 실체는 없는데서 있게 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수많은 아브라함의 자손들 중에 꼭 찝어서 단수로 표현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갈라디아서 3:1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보고서 기뻐하였다고 합니다(요8:56).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계시하신 것입니다.
22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을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그 내용물에는 이삭이 태어난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인데 그 약속을 믿은 것이 결국은 누구를 믿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고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23절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일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임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내가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부활로 확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나타난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5:21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9절에서는 ‘저희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예수님을 죄로 삼으신 것은 예수 믿는 자를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이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 복을 받은 사람은 수능시험 전국 일등보다 더 기쁜 소식입니다. 이 복된 소식이 더욱 풍성하게 우리의 삶에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5:1-4 칭의, 그 결과 2003. 11. 9.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1)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2)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1장부터 4장까지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행함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왜 인간의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는가를 아주 구체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이방인이 선한 행실로 의에 이를 수가 없고, 유대인이 율법 지킴으로 의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오히려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목록의 개념이 아니라 권세의 개념입니다. 죄의 권세아래 있기에 나오는 것이 죄 밖에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이 의롭다 함을 받는 길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하여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그 의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차별이 없이 의롭다고 인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죄에 나타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시고 또한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그 결과로 주어지는 복이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5:1절입니다. ‘그러므로’ 라는 말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이제 얻었으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기에 이러한 놀라운 세계가 열리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관계,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였으면 결코 이를 수 없는 놀라운 세계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 복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이 누려지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으니 이제부터 예수님은 제쳐두고 직접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기 전에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였습니까? 원수였습니다. 반드시 진멸되어야 할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이러한 하나님과의 원수였던 관계를 가로 막고 있기에 모를 뿐이지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원수관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였고 진노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고자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틀림없이 자기가 믿어주는 행위를 빌미로 무언가 다른 것을 받아 내고자 하는 욕심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성이 복음 앞에서 고발을 받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증거하여야 할 교회마저 인간의 욕심을 채워줄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면 어떻게 교회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진노를 쌓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서 나오는 그 결과가 과연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화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화평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3:25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화목제물을 삼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화목제물을 마련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피해자인 하나님께서 화목제물을 마련하여 오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죄인 된 인간은 스스로 화목제물을 마련하여 화해를 요청할 수도 없는 지경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을 알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거저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목이 일어난 사람들이 일입니다.
에베소서 1:3-6절을 봅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 복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저 주시는 은혜이기에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2절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게 된 것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관계가 회복되었기에 이제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엡3:12). 은혜를 받았기에 이제부터 우리의 행함만이 남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았기에 이제 더욱 더 넓고 깊은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피조물이 그것도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였듯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 함으로 생명나무에서 쫓겨난 자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을 충만하게 받으면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셋째로, 2절 하 반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성경에서 몇몇 사람들이 미리 맛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변화 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이 순교 중에 하나님의 영광과 그 보좌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바울사도도 삼층 천에 올라갔다 왔습니다. 그 영광이 얼마나 엄청난지 사람의 말로 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지 사람의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도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란 풀과 같습니다. 그 인생의 영광이란 풀의 꽃과 같이 허무하게 지는 것입니다.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이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들이 말하는 인간의 영광이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권불십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취할 영광이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 사람들이 필요 없다고 제거해 버린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런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세상에 자리 잡을 것들을 구한다면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정말 딴 동네 가서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입은 사람이라면 참된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28-30절입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3)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 식의 합력하여 선을 이룸이 아닙니다.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결국은 영광입니다.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완전한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였지만 그 언약의 확실성으로 인하여 확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으로 3절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복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당당히 나아감을 얻고, 그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만이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의롭다 함이 얼마나 엄청난 선물이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원화소복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울림은 결국 자기를 위한 어울림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직장을 가지고, 취미를 가지고, 종교를 가지는 것은 자기 행복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화를 멀리하고 복을 받자고 여러 가지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환난이 닥치는 것을 즐거워한다니 도대체 말이나 되는 이야기 입니까?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복이 얼마나 대단하고 엄청난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여도 그 환난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인하여 받은 복을 빼앗아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그 복을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굳히는 것이 환난이지 그 복을 빼앗아 갈 수가 없기에 환난 중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물론 환난 자체가 기쁘고 즐거울 수는 없습니다. 괴로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에게 환난이 주는 유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안다면 환난도 즐거워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환난을 즐거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환난을 인내를 인내는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인내하지 못합니다. 더더구나 한국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 있습니다. 외국 사람들이 가장먼저 배우는 한국말이 ‘빨리 빨리’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내를 달라고 하면서 빨리 인내를 주옵소서! 한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조급하여졌습니까? 그것은 산업화가 되면서 나타나는 결과만을 중요히 한 우리의 삶의 현장도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러하다면 교회는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는데 교회에서는 오히려 그런 세상에다가 추진력을 더하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망하여 가는 것이며 그 결과를 오늘 우리가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인내라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추방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인내를 스스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환난을 당할 때는 기쁘지 않지만, 징계가 받을 때는 괴롭지만 그러나 그것이 결국 인내하게 됩니다. 인내를 통하여 무엇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입니까? 소망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환난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들이 날아가는 것을 환난이라고 봅니다. 병드는 것, 재산이 날아가는 것, 회사가 부도나는 것, 시험에 떨어지는 것 등을 환난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성도의 환난은 단지 그런 환난만이 아니라 애매히 환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잘못 한 것이 없는데도 환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또 예수님을 미워한 세상이기에 예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라면 반드시 세상으로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환난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결국 헛된 소망, 눈에 보이는 소망을 버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게 만들고 더욱 굳게 붙들도록 만들기에 환난을 즐거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2-4절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을 너희가 앎이라고 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그 결과가 얼마나 엄청난 내용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에 들어감을 얻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고, 심지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능력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결국 우리의 소망이 썩어질 것을 피하여 영원한 소망을 이루시는 것이기에 성도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복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누려지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5:5-11 사랑의 확증 2003. 11. 16.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인간관계 속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무엇으로 확인을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몇 절만 봅니다.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1)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런 내용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다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상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확증이 되었습니까? 5절에서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하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소망이라는 말씀은 4절에서 나타난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이뿐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왜 환난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것입니까? 환난이 인내를 이루고, 인내는 소망을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소망이기에 환난을 통하여 썩어질 소망을 피하여 썩지 아니할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환난으로도 끊을 수가 없는 소망이 성도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5절을 다시 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이 부끄럽지가 않다고 합니다. 복음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역시 복음으로 주어지는 소망도 부끄럽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헛된 소망을 가졌다면 부끄러울 것입니다. 어느 초등학교 6학년이 시를 썼는데 ‘좋은 생각’ 11월호에 나와 있습니다.
목욕탕 계단에 / 돈 천원! / 와 행운이다! // 두리번두리번 살펴보고 / 돈이 보이지 않게 / 신발을 벗어 / 살며시 돈 위에 놓았다. // 주울까 말까? / 내 가슴 / 콩당콩당 / 눈알이 요리조리 // 살며시 주워 보았다. / 아! / 두꺼운 종이로 만든 / 가짜 돈! //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 얼른 계단을 / 뛰어 올라갔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가져도 되는가? 안 되는가? 그러나 기대하고 확인을 하였더니 가짜라는 것입니다. 이때 자신이 돈 천원에 마음이 팔린 것이 부끄럽고 또 진짜 돈이 아니라는데 실망도 되고 그래서 부끄러워 달려간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이런 소망의 내용은 없습니까? 평생 악착같이 이루었다는 꿈과 계획과 인생의 목표들이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그 헛된 욕망에 붙들려 진짜라고 쥐고 보니 막상 가짜였다는 것입니다. 그때의 허무감을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헛된 소망으로 살았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소망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주신 소망은 결코 부끄러운 소망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도 없어지더라고 영원한 소망이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소망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하여 알게 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자기백성에게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니 늘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요즈음 말로 하면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6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그 약속대로 이루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심이, 우리가 연약하여 경건치 아니할 때에 예수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고쳐먹고 이제부터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하는 이런 마음을 먹기도 전에 이미 연약하고 죄인 되어 있을 때에 죄와 허물로 죽어 있기에 하나님에 대하여는 그 어떤 반응도 나타낼 수 없는 그런 상태에 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0절입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죄인이란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입니다. 원수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하나님께서 화목제물을 준비하여서 화목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7절입니다. 의인이나 선인을 위하여 죽은 자들을 혹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며 원수 된 자를 위하여 누가 죽겠습니까? 9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기에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아들의 피를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그 진노를 그 아들에게 쏟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이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 사랑 앞에서 무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11절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의 복입니다. 이 사랑만 있다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께서 그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신 것이 새 언약입니다. 영원하고 온전한 제사입니다.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9절에서 그 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19-20절입니다. “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유월절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자신의 몸과 피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성찬식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살리시는 것임을 신앙고백 하는 것입니다. 성찬식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도 우리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 잘못된 성찬이 행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17-34절을 봅니다. “봉독” 교회로 모이는 것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해롭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분쟁이 있고 편당이 있습니다. 20절에서 너희가 함께 모여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떤 분쟁과 편당이 있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장에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누가 십자가를 졌는가 하면서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편당을 만드는 것은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몸을 나누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목회한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온갖 다툼, 분냄, 당 짓는 것, 중상함, 수군수군 하는 것, 거만함, 어지러운 것, 더러움, 음란함, 호색함 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책망하고 회개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모습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 중에 성찬식과 함께 행하여진 잘못된 일이 무언지를 보고자 합니다.
27-29절을 보시면, 누구든지 자기를 살피지 않고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늘 고민이 있었습니다. 성찬을 받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내가 이래가지고 성찬을 받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이 훨씬 많은데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셔서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다는 말씀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문제로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죄인이기에 더욱 주의 살과 피가 필요하기에 감사함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에서 왜 책망을 받는 것입니까? 초대교회에서 저녁 공동식사와 성만찬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까? 교인들 중에 비교적 유족한 사람들은 저녁 일찍 모여 공동 식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일을 늦게 마치고 공동식사에 참여하니 남은 것을 겨우 먹든지 먹을 것도 없는 반면에 일찍 온 사람들은 먹고 마셔서 배부르고 취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어떻게 성만찬을 행하는가 하는 책망입니다.
20-22절입니다. “봉독”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끼리끼리 모여서 자기들끼리 먹고 마신 것입니다. 나중에 오는 사람들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한 것입니다. 유족한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해 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음식을 제대로 준비도 못하고 늦게 오니 먹을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음식 끝에 마음 상한다는 말을 우리도 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매주 공동식사를 하면서 이런 모습은 과연 없습니까? 자기 친한 사람만 챙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처음 온 사람이든지 누가 챙겨줄 연고도 없는 사람이 점심식사 시간에 편하게 먹을 수가 있습니까? 야외를 나가든지 다른 무슨 일이든지 우리 안에 고린도 교회가 책망 받는 내용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이런 모습이 편당의 모습이고 주님의 몸을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행위입니다. 주님은 자기의 몸을 온전히 헌신하여 화목제물이 되셨는데 그것을 기억하여야 할 교인들은 주님께서 동일한 피를 흘려 값을 주고 사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은 안중에도 없이 자기들끼리 먹고 마셔서 배가 부르고 취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며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31-32절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살핀다는 내용이 무엇인지 이제 분명하여 집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연약한 형제자매를 멸시한 것이 살펴야 할 내용입니다. 이런 판단을 우리도 받아야 합니다. 이런 판단을 지금 받는 것이 유익합니다. 주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래야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습니다.
오늘 성찬을 행하면서 우리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그동안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였습니까? 고린도 교회의 책망이 우리의 책망이 아닙니까? 요한일서에서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죄인이고, 원수였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아들의 피로 인하여 화목케 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부어진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주의 살과 피를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그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을 하든지 예배를 드리든지 무슨 생활을 하든지 주님의 죽으심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5:5-11 성도의 즐거움 2003. 11. 23.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지난주에 이 본문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였습니다. 성찬식으로 연결이 되어서 그 사랑의 확증의 결과로 인한 성도의 즐거움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였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면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가 행복하고 즐겁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비결을 말해줍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변의 작은 것들을 감사하면 행복해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욕심을 버리고 있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고 즐겁게 하고 있습니까?
한걸음 더 나아가서 환난 중에 즐거워합니까? 3절에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난주간에 추수감사절이라고 그런지 방송설교에서 두 번이나 하박국서의 내용을 들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이 되어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겠습니까?
지난주간 오후에 찬양인도자가 감사의 제목을 말하라고 하니 여러 사람이 여러 대답을 하였습니다만 하박국 선지자의 이런 감사와 즐거움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나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러한 찬양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이런 찬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듣고서 얼마나 두려웠는지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뼈가 썩는 것 같고 온 몸이 떨리는 지경에 악인의 형통함과 의인의 고난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즐거움과 기쁨은 여호와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판을 모르면 이런 감사와 기쁨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죄의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은 성경에 약속된 즐거움과 기쁨을 다 놓쳐버리고 썩어버리고 없어질 순간적인 즐거움에 눈이 멀어버리는 것입니다. 평소에 생각하는 자신의 즐거움과 기쁨을 이야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즐거움과 기쁨을 도외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말하고 있는 이 즐거움이 무엇인지 봅니다. 그 내용은 로마서 1장에서 지금까지 계속된 내용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오는 것입니다. 왜 인간이 스스로 의로울 수 없는지는 구약에서 수 천 년 동안 유대인을 통하여 확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가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과 소망이 어떻게 나타난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진 것입니다. 그 사랑이란 우리가 연약하였을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여 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마치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듣고서 여호와의 구원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듯이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소식을 듣고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11절을 봅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과 예수님을 자랑한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신학교 때에 어느 교수님이 장로교에서는 예수님만 이야기해서 부흥이 잘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순복음에서는 성령님을 강조해서 부흥이 잘 된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셨는데 성령님을 기쁘시게 해야지, 예수 예수만 하니까 성령님께서 섭섭하게 생각하신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누구를 영화롭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수요일 히브리서를 시작하면서 아들로 말씀하심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임하시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변화산에서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듣고 누구를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영광 받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에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가운데 아들로 창조하시고 아들로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역시 수요일 저녁에 골로새서 1장의 말씀으로 확인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빌립보서 2:10-11절을 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늘의 천사들도, 땅위 사는 모든 자들도,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예수님입니까?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 예수님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뛰어난 이름을 주심으로 모든 피조물이 다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기쁜 것입니까?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그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도 모두 다 이 말씀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공로를 찬양하면서 그의 긍휼과 자비와 능력을 찬양할 것이며, 지옥에서는 예수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도 지옥도 그 아들의 영광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계시로 알게 하신 것을 믿고 있기에 미리 천국을 맛보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인간의 공로나 행위가 자랑되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높이고 자랑하고 증거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달리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기에 다른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하심의 최종 목표인 아들의 영광을 인하여 우리가 미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내가 평소에 생각한 교회, 평소에 생각한 즐거움과 위안과 기쁨을 찾으려면 행복한 가정생활 세미나에 참석하시거나 아버지 학교에 참석하시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이제부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에 무엇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방금 빌립보서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만 빌립보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있으면서도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온 세상을 하나님의 아들로 재편하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자신의 언약을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이미 기뻐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주시는 그 무엇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로 모인 성도들이 왜 이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아들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것들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기에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자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세상의 자랑거리로 보자면 멸시받고 조롱받은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자랑하고 즐거워하는지가 극명하게 대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들로 기뻐하지 못하고 그 아들로 자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로이든 존스 목사는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아직 이해를 못하였다고 봅니다. 인간의 행위나 노력, 선행을 의지하고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있지 않다고 봅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드러나듯이 한 사람은 자기의 의를 내세웠고 한 사람은 자기의 죄인 됨을 고백한 것입니다. 누가 의롭다 함을 받고 내려갔습니까? 세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서로 자기들의 영광을 취하고 있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유일한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요5:44).
둘째로, 첫째와는 다르게 어느 정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고 어느 정도는 자기들의 공로를 보태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으로 인하여 갈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행위를 의지하는 것을 배척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하는 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의지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자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자기 자신의 검은 마음과 악한 성질을 너무 지나치게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연약과 죄인 됨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늘 자신만 탓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런 자가 오히려 죄의 깊음을 알지 못하고 쾌활하고 피상적인 그리스도인보다 낫다고 봅니다. 이 경박한 사람들의 기쁨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처지가 어떤지 깨닫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 기쁨은 거짓된 것입니다. 자기 죄의 깊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즐거움이란 내가 만들어낸 기준에 의하여 기쁘고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들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란 결국 모든 것을 다 놓아두고 갑니다. 건강, 재산, 명예, 세상의 자랑, 욕심, 모든 것이 다 사라져 갑니다. 하나님의 약속인 그 아들의 나라만 영원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양을 찬양하고 자랑하는 무리 속에 들어가는 것이 성도의 최종 영광이요 즐거움입니다(계5:9-14). 이것을 미리 맛보고 자랑하는 자들이 성도이며, 또한 성도의 즐거움입니다.
로마서 5:12-17 두 세계 2003. 11. 30.
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두 세계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담을 머리로 하는 죄와 사망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의와 생명의 세계입니다. 다른 말로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계와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이 두 세계중 하나에는 속하여 있습니다. 중간 영역은 없습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고 싶은 것입니까? 당연히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에 속하고 싶지요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여 들어갈 입장이 못 됩니다.
성경은 이미 인간이 죄와 사망아래 갇혀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스스로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살릴 수가 없는 것을 보니 사람보다 더 큰 힘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무엇이며 죽음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모르고 어떻게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도 알려주지 않고 회사에서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알려주어야 하는데 교회에서도 사업하느라고 바빠서 그런 것을 알려줄 시간이 없는 모양입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실 때 무엇을 재료로 만드신 것입니까?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의 재료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흙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생기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이 아담에게서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로 에덴동산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자유이나 단 한 가지 금하신 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에 넘어가 따 먹게 됩니다. 이제 아담에게 무엇이 오게 됩니까? 사망이 오는 것입니다.
사망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3: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범죄로 인하여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흙입니다. 아담이라는 뜻이 흙입니다. 그러니 흙에서 취하여 졌으니 흙에서 난 것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망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린 것입니다. 이때부터 태어나는 아담의 후손은 누구의 형상으로 태어나는 것입니까?
창세기 5:1-3절을 보시면 아담이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범죄 한 아담의 모든 후손은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난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 결론이 죽었더라는 것입니다. 무려 천년을 가까이 살았는데도 역시 죽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망의 권세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비록 숨쉬고 먹고 마시며 자녀를 낳고 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만들며 산다고 하여도 그 결국이 죽음입니다. 아무리 스스로 살려고 노력해도 결국은 그 끝이 죽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의 후손의 현실이며 사망이 왕 노릇 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로마서 5:12절을 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한 것입니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아담의 죄가 왜 우리의 죄가 되어야 합니까?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레위지파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을 때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지금 나이를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에 있었습니까? 40세 되신 분이 40년전에 어디에 있었습니까? 부모의 허리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계속하여 올라가면 결국 모든 인류는 한 조상의 허리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하여 아담의 형상, 흙에 속한 형상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난 사람은 천년을 살아도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진선미를 추구하여도 역시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외치고, 사랑을 노래하고, 희생의 미덕을 기린다고 하여도 그것이 결코 죽은 자를 살려낼 수가 없고 죽어가는 자를 죽지 않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 아래, 죄와 사망아래 있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이것을 사망이 왕 노릇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망의 왕 노릇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13절입니다.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죄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죄로 여기지 않았다고 해서 죄의 삯인 사망이 왕 노릇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왜 죽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고 죽을 뿐이었지 역시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자 말자 죽었습니다. 아무른 죄를 지을 틈도 없었는데 왜 죽었습니까? 왜 죽었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이미 사망이 왕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답이 14절입니다.
14절입니다.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즉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에, 아담과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사망이 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죄란 목록의 개념이 아니라 권세의 개념이라고 말씀을 자주 드렸습니다. 스스로 죄를 짓지 않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나쁜 일을 상쇄시키는 방법으로는 사망의 권세를 이겨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 아래 있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사망에서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있다고 하나 스스로 자신을 살려 낼 수가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5:45-49절입니다. “45 기록된바 ㄴ)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여기서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첫 사람은 산 영이 되지만 살려주는 영은 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흙에 속한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십니다. 자신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려주시는 영이 되십니다. 하늘에 속한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골로새서 1:14절에서는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5:14절을 봅니다. 아담이 오실자의 표상이라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표상이 되는 것입니까?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습니다. 아담 때문에 아담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이 사망의 종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벗어나고자 애쓰고 힘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생명이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명을 얻고자 원하여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명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로마서 9:11-16절을 봅니다. “봉독” 에서와 야곱의 행위를 따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부르시는 분 때문에 생명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달음박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김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의 왕 노릇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사람은 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전부 긍휼히 여김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자랑거리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하여 말한다면 자기가 불쌍한 것밖에 말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자랑 거리는 자기를 불쌍히 여기시기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할 뿐입니다. 그러면 죄와 사망의 왕 노릇 하에서 어떻게 의와 생명의 왕 노릇하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5:21-24절입니다. “21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5장의 족보가 아담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후손들이 죽음의 족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가 버린 것입니다. 죽음의 행렬에 돌연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에녹에 동행하여 주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동행하여 주었습니까? 아담의 형상으로 나온 사람은 땅에 속한 형상이기에 땅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동행하여 주시니 하늘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족보에서 생명의 족보로 이동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동행하여 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는 땅에 죽었습니다. 그러면 노아는 하늘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 안에 있으면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언약의 실체가 구약에서 모형으로 제시되고 신약에서 실체로 오셨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를 새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생명의 왕 노릇 하시는 것은 십자가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을 구속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29절을 봅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아담 아래서 죄와 사망의 세력, 마귀의 세력에 꼼짝없이 붙들려서 일평생 죽음의 종노릇하면서 두려워하는 자들은 구속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강한 자 마귀를 결박한 것입니다. 마귀가 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심으로 전리품을 챙겨내시는 것입니다. 그 전리품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맡기신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맏아들 되게 하심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영광이 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려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죄와 사망의 세계에서 의와 생명의 세계로 옮겨진 것입니다. 누구 힘과 능력입니까? 오직 주님의 힘과 능력입니다. 사망에서 스스로 빠져 나갈 수 없듯이 이제 생명에서 스스로 빠져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생명의 지배를 받고 있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아들의 형상을 입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3:1-4절로 말씀을 맺습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로마서 5:18-21 죄가 더한 곳에 2003. 12. 7.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20절에 보시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율법이 가입하지 않았으면 덜 나왔을 죄가 율법이 가입하니 없던 죄까지도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더하여 지는 것입니까? 율법은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율법이 죄인에게 투입되니 어떤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까? 자기들은 잘 지킨다는 것으로 자기 의를 삼는 경우가 나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모습들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하라고 하면 평소에 잘하던 것도 하지 않습니다. 잘하던 일도 멍석 깔아주면 하지 않는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잘하던 일을 하라고 하는데도, 시키니까 기분 나빠서 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지 마라 그러면 더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지 말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을 텐데 하지 말라고 하니 더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게 율법을 가입시켜서 죄를 드러내지 말고 바로 구원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좀더 고상하고 우아하게 보일 텐데 죄가 무엇이 좋다고 다 들추어내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는 의문이 나옵니다. 그 다음 말씀에 보시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합니다. 그러면 넘치는 은혜를 보이시기 위하여 죄가 더하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입니다.
이런 예가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영화나 소설이나 드라마의 경우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언제 다 드러냅니까? 처음부터 다 드러내지 않습니다. 물론 드러낼 의도는 이미 마음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치밀한 구성을 깔아놓고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작가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진행을 시켜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잘 하는 작가가 위대한 작가이고 작품성이 높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에서 가장 최고로 드러나는 것입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바로 예수님이 와 버리시는 것과 구약의 그 많은 불순종의 사건들이 다 터져 나오고 난 후에 오시는 것과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능력의 극대화입니다. 죄를 모르고는 은혜를 모릅니다. 더러움을 모르고 깨끗함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36-50절에 보시면,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초대하였습니다. 한 여인이 와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습니다. 그 위에다 향유를 붓고 그 발에 입 맞추기를 쉬지 아니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고서 만지지 못하게 하셨을 텐데 어떻게 저런 죄인을 그대로 두는가, 하였습니다. 이들의 속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오십 데나리온과 오백 데나리온의 빚을 각각 졌는데 둘 다 갚을 능력이 없어서 주인이 둘 다 탕감하여 주었을 때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시몬이 더 많이 탕감 받은 자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주님 하신 말씀이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여기에 모였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모인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모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누가 가장 주님을 사랑하겠습니까? 많이 사함 받은 자가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할 것입니다. 자기 죄가 무엇인지를 알면 알수록 더욱 주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죄보다 더 크신 주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시몬처럼 자기는 평소에 죄인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이런 이야기는 얼마나 기분 나쁜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동네사람들이 다 아는 죄인이라면 그 당시에 창녀가 아니겠습니까? 그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야 말로 복음입니다. 그 복음의 기쁜 소식 앞에서 예수님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저런 더러운 여자가 어디에 감히 나오는가 하는 힐문도 들리지는 않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더욱 넘치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람들이 다 죄인이라고 하는 한 더러운 여자였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용서의 위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한량없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의 취지가 나타나는 현장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가 죄인 인줄 모릅니다. 이것이 사망의 왕 노릇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도저히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인 이 여인은 의가 왕 노릇하는 하는 세계에 들어왔기에 용서의 기쁨을 누립니다. 그 아들의 피로 의롭게 되는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지를 성경을 보고자 합니다.
출애굽기 4:21-23절을 봅니다.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시면서 자기의 장자 만들기에 나서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어 놓아라 하려고 모세를 보냅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십니까?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모세를 보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바로를 바로 죽여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실 능력이 없으십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아들 그 장자를 빼내어 오시는 일을 그렇게도 복잡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21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강퍅케 하시지 말고 단 한 번 만에 내어보내시면 안됩니까? 열 재앙 중에서 바로의 술사들이 흉내 내지 못한 것이 세 번째 재앙인 이의 재앙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의 술사들이 흉내를 내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바로가 손을 들고 항복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무엇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장자의 죽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가야 합니다. 그래서 열 번째까지 가는 것입니다. 열 번째가 무엇입니까? 장자의 죽음입니다. 중간에 바로가 항복하면 안 되는 것이기에 바로는 장자의 죽음까지 강퍅하여 져야 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열 번째 재앙에서 바로에게 속한 모든 처음 난 것들이 짐승이든 사람이든 다 죽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인하여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출발하는 것이 이스라엘 국가입니다. 그러면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0:1-4절을 봅니다.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홍해바다 건넘이 세례이고, 만나는 신령한 식물을 먹고, 신령한 반석에서 나오는 신령한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 반석이 곧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민수기 14:20-23절입니다. “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21 그러나 진실로 나의 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으로 맹세하노니 22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바로의 강퍅이 열 번을 갑니다. 이스라엘이 열 번이나 반역합니다. 열 번이란 더 이상 없다는 의미입니다.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는 것은 넘어갈 때까지를 열 번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로나 이스라엘이나 똑같이 강퍅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로는 망하고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이 성취되는 일에 어린 양의 희생이 있듯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이며 영광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현장이 바로의 강퍅과 같은 이스라엘의 강퍅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강퍅함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전을 염려하고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는 유대인들에게 나온 것입니다.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악과 강퍅이 드러나게 예수님께서 조치하십니다. 그저 사랑하고 용서하고 그러시는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한다는 자들을 향하여 거침없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합니다. 그러자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종 되었던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을 보니 너희의 아비가 다 마귀라는 증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바로가 그렇게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시행되니 강퍅이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보다 바리새인들이야 더욱 착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니 그들의 강퍅함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언약이 시행되는 곳에 인간의 죄가 드러나고 그 죄로 인하여 희생당하는 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에서 어린 양의 희생이라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바로왕의 강퍅과 어린 양의 희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어져 나오듯이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만들어져 나오는 것입니까? 바로나 유대인들이나 오늘 우리나 다 동일하게 강퍅한 죄인입니다. 자신이 강퍅한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셔서 때가 되어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에스겔 16:60-63절에 봅니다. “봉독” 온갖 죄를 다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용서받고 나니 자신의 죄가 부끄럽고 놀라워서 입을 다물게 됩니다.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집니다. 용서의 위력을 알게 되기에 그 은혜만 자랑하게 됩니다. 그 용서의 세계가 얼마나 엄청나고 놀라운지 에스겔서 47장을 봅니다.
에스겔 47:1-12절을 봅니다. 성전에서 물이 나옵니다. 이 물이 점점 많아져서 강물이 되어 흐릅니다. 이 물이 가는 곳에 죽은 것이 살아납니다. 성전은 언약궤가 있고 속죄의 제사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 본 예루살렘의 성전에는 온갖 더러운 우상들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런 성전은 파괴됩니다. 이제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전이 되셔서 자기 피로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 생명수가 보혈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한량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생명을 소유하고 겨우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생명수가 차고 넘쳐서 그 안에 잠겨버리는 것입니다. 사망이 생명에게 삼켜진 것입니다. 의와 생명의 왕 노릇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는 더욱 넘친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믿고 나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죄보다 더욱 넘치는 것이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를 찬양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5:19-21 은혜의 왕 노릇 2003. 12. 14.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지난주 장안의 화제가 차떼기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배추나 무를 차떼기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현금을 2.5톤 트럭에 차떼기로 넘긴 것입니다. 이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흥분을 합니다. 그러나 150억 부정하게 받은 것과 150원 부정하게 챙긴 것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저는 같다고 봅니다. 왜 같은 것입니까? 둘 다 욕심에서 나왔기에 같은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습니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가 왕 노릇하고 있는 곳에서 도토리 키 재기라는 것입니다. 결국 사망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가 옳고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면 남을 위하여 수백억을 희사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렇더라도 그 선행이 자신을 사망에서 살려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계입니다.
그러면 은혜로 의가 왕 노릇 하는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평생 헌신하고 순교까지 한 사람과 평생 강도짓하고 살인하다가 죽는 순간에 예수 믿어서 천국 간 사람하고 의롭다 하심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까요? 없을 까요? 저는 없다고 봅니다. 의가 왕 노릇하고 있는 세상에서 역시나 도토리 키 재기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 곳에서는 인간이 무슨 짓을 하여도 죄의 결과인 사망 외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 곳이듯이, 의가 왕 노릇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느 인간도 누가 더 의로운가의 경쟁이 무의미 한 것입니다. 의가 왕 노릇하고 있는 곳에서 누구 의를 말하고 있겠습니까?
이러한 왕 노릇에 대하여 오늘 본문 19절을 봅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다고 합니다.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어느 소속이냐에 따라 죄인이냐 의인이냐의 문제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속을 내가 결정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의와 생명의 권세로 들어오는 것이 인간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인지를 확인하여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목표로 창조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까? 골로새서 1:16절에서 아들의 영광을 목표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떤 피조물은 진노의 그릇으로 어떤 피조물은 긍휼의 그릇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 있는 자들이나 모두가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시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빌2:10-11) 여기서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속죄를 입은 자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굻습니다. 그러나 그 속죄를 입지 못한 자들은 지금 주를 대적하다가 마지막 재림의 날에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그 무릎 꿇음은 심판을 받기 위함입니다. 정말 그러합니까?
요한계시록 1:4-8절입니다.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1)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사도요한이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속히 그대로 시행될 내용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변개함이 없습니다. 그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에 있어서 모든 자들이 다 영광을 돌립니다. 한 편은 그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고, 죄의 권세에서 예수님의 피로 해방시키셔서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 자들입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인데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애곡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결론을 먼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분명한 말씀을 우리가 알고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 아시겠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따라 영벌과 영생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이 모두 무엇을 보여 주는 것입니까? 주님의 은혜가 의로 왕 노릇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왕 노릇,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를 하나님께서 언제 계획하셨을까요? 아담이 범죄하고 나서 부랴부랴 만드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와 상관없이 은혜가 왕 노릇하는 세계, 하나님의 의가 왕 노릇하는 세계를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이 살았던 에덴동산은 의의 상태가 아닙니까? 죄를 짓기 전에는 의가 왕 노릇하는 것이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죄가 없어서 무흠한 상태이지만 죄가 나오고 나서 의가 왕 노릇 하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론적인 말씀인 고린도후서를 먼저 봅니다.
고린도후서 5:21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나오게 됩니까? 19절에 보시면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예수님께서 죄로 삼아버린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심으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벗어난 의가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이것이 의의 왕 노릇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에덴동산의 아담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요한이 가장 큰 자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세례요한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적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천국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그 아들의 피로 구속함을 받아 나온 자들의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전가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의의 왕 노릇입니다.
의가 왕 노릇하는 곳에는 반드시 무슨 상황 중에 있는 것입니까? 죄가 왕 노릇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에 장차 어떻게 은혜가 의로 왕 노릇할 것인가를 보여주신 내용이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입니다.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요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전쟁의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의 원수를 멸하시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요한1서 3:8절에서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마귀를 멸하여 의와 생명의 왕 노릇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 은혜의 왕 노릇이 어떻게 구약에서 펼쳐지는지를 몇 곳을 보겠습니다.
아담의 범죄이후 범죄에도 불구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은 성취가 되어서 수많은 아담의 형상들이 지상에 등장합니다. 인구가 많아지면서 죄는 더욱 관영하여 집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하는 바가 항상 악할 뿐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죄가 관영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 사건이 무엇입니까?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멸되지 아니하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를 만들었기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이 방주를 만들게 한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어 놓았으니 가져가고 가져가지 않고는 너희가 자율적으로 선택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왕의 권세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왕 노릇하기 위한 희생이 있습니다. 그 희생이 정결한 짐승의 희생이었습니다. 은혜가 왕 노릇하기 위하여 은혜를 제공하는 쪽에서의 희생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을 봅니다. 모두가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십니다. 그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십니다. 인자가 아니시니 식언치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생애가 창세기에서 그렇게 많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은혜가 왕 노릇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곳에서 쪼갠 짐승사이로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구경만 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타는 횃불로 쪼갠 사이를 지나가는 것입니다. 언약을 어기면 죽음으로 대신하겠다는 언약 체결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희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과 야곱에게서도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이 무엇 인지를 계시하셨습니다. 야곱에게 일방적인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의 행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얍복강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랑스러운 것입니까? 부끄러운 이름입니까?
자식이 떼를 써서 아버지가 진 것이 자랑입니까? 하나님의 희생이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어느 신이 인간에게 져서 죽는 신이 다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의로 왕 노릇하는 것을 언약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유다가 왕이 나올 것인데 유다의 후손이 어떻게 나옵니까? 며느리와 시아버지 관계 속에서 나옵니다. 유다지파에서 나온 다윗은 어떻습니까? 살인하고 간음하였는데 그 살인한 자의 아내였던 밧세바 사이에서 솔로몬이 나오고 솔로몬이 성전을 만듭니다. 성전이란 인간의 죄로 인하여 희생제사가 드려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의로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죄로 인하여 희생당한 우리야가 있습니다. 다윗은 그 희생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의로 왕 노릇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의로 왕 노릇하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롬5:21).
고린도전서 15:50-58절을 봅니다. 은혜가 왕 노릇하는 최종적인 모습니다.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이김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죄와 사망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의 내용에서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변화무쌍한 자신의 가치관이나 확신이나 감정이나 다른 말들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자에게 이제 더 이상 죽음이 두려움이나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실패가 두려움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남과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죄와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요 의와 생명에 대하여 산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의와 생명을 주신 분에게로 관심이 집중이 됩니다. 은혜가 의로 왕 노릇하는 세계를 더욱더 맛보시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6:1-2 죄에 대하여 죽은 자 2003. 12. 21.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 1장부터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하고 6장을 시작하여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1장부터 지금까지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어떤 정리가 되어 있습니까? 누가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사람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어느 정도로 자기 행함에서 선이 나올 수 없는지를 유대인이나 이방이나 다 죄 아래 태어났다고 합니다.
로마서 3:9-18절을 다시 봅니다. “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1)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한바 ㄴ)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ㄷ)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ㄹ)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ㅁ)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ㅂ)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ㅅ)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을 인정하십니까? 이런 상태가 바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계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에서 인간스스로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인간 스스로 어떤 의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만들어 낸 의, 율법을 지켜서 만들어 내었다는 그 의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배척하였다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인간의 죄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라고 말씀합니다.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니 사람들은 또다시 믿는다는 것을 자기 행위로 대치시키는 것입니다. 나는 믿었는데 너는 왜 믿지 아니하였느냐는 식으로 나온다면 이것은 또다시 믿음을 자기 행함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었습니다. 성경을 보고 듣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고 만복의 근원이시기에 성경을 통하여 믿음을 가지게 되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많은 복을 받고 사는데 나는 왜 복을 받지 못하고 사는가 하는 것을 잘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또다시 자기 행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기에 자기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받은 복이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인데, 이 의롭다 함을 어떻게 받았는가 하면 로마서 4:1-8절을 봅니다. “봉독”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오늘날 믿는 모든 자들이 받는 복인데 그것은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믿음으로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 불의가 사함을 받고 그 죄를 가림을 받고 주님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할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방식, 오직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 방식으로 구원하셔야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사망의 왕 아래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담아래 태어난다고 5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아담의 후손에서 탈출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우리가 연약하였을 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스스로 구원을 요청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신의 언약을 따라 그 많으신 자비를 따라 죄와 사망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창세전에 예정된 자를 구속하여 내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5:20절을 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단지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셔서 은혜와 생명의 왕 노릇하는 곳에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들여 놓으셨다는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반발이 나오는데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것에 대하여 반발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더욱 많이 지어야 되겠네! 그래야 은혜가 더욱 넘치지 않겠는가? 은혜를 더욱 넘치게 하기 위하여 죄를 더욱 많이 짓자, 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들으면서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이 은혜로 되는 것이라면 내 노력은 아무 소용없네! 창세전에 예정되어 있다면 내가 아무리 헌신하고 충성하고 봉사하여도 예정되어 있지 않다면 결국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네! 반대로 내가 아무리 엉망으로 놀아도 예정되어 있는 자라면 반드시 구원하실 것인데 내가 무엇 하려고 이렇게 하는가? 그냥 놀자,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런 반응이 나와야 복음을 제대로 증거한 것이 됩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란 완벽한 것입니다. 얼마나 완벽하였으면 은혜가 왕 노릇한다고 하겠습니까?
이러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울사도가 이미 예상하였고, 또 실제로 이런 말들이 있었기에 오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씀을 1장에서부터 계속하다가 6장과 7장을 보면 사람이 믿고 나서 무슨 성화를 거쳐야 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성령을 쫓아 행하라 육신을 따라 행하지 말라는 말씀이 또다시 우리가 주도권을 가지고 성령을 따라 살든지 육신을 따라 살든지 결정하면서 사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6장이 갑자기 나오게 된 것은 복음을 들은 자들의 반응이 그러면 내 마음대로 죄나 짓고 살아도 되겠구나 하는 자들에 대하여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세계가 어느 정도로 엄청난지 로마서 8장까지 가야 결론이 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로마서 8장을 먼저 보겠습니다. 로마서 8:29-30절입니다.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아신 자들을 의롭다 하실 뿐만 아니라 영화롭게 하셨다고 완료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시비를 걸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신 것을 누가 송사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예수 믿는다고 교회 나온 교인들도 갈등이 되고 목사도 갈등이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갈등은 자기 행함이 부인되어져야 하니 무언가 확실하게 붙들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도 정성도 기도도 헌금도 예배참석도 그 어떤 행위도 부인되어져야 하는 것이 복음의 선포입니다. 또한 목사의 갈등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계속하여 오직 은혜, 오직 믿음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아무도 헌금도 하지 않으면 무얼 먹고 살까하는 걱정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하게 행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복음을 전하면서 인간의 행함을 조금이라도 강조한다면 절대로 나오지 아니할 반발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기도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전도도 하지 말라는 것이고, 헌금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은혜를 넘치게 하려고 죄를 마음대로 지어야 되겠네요! 하는 반발이 나오지 아니할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긍정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곳에서는 그것이 복음이라고 아무리 말하여도 로마서에서 나오는 이러한 반발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제 로마서 6:1-2절을 봅니다. 복음을 들으면 정말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영화롭게까지 되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감사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고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목사님이 계속 그런 식으로 설교하면 사람들이 평소에 자기들이 좋아하는 일에 더 열심을 내고 교회나 선교나 구제에는 관심도 없어지는데 어차피 돈을 쓸 바에야 교회에 바쳐서 예배당도 짓고, 전도도 하고, 구제도 하는 것이 낫지 너무 그렇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하는 자들이 누구겠습니까?
교회에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런 걱정과 염려가 조금이라도 없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담임목사가 되어서 만 4년 6개월을 지나면서 새롭게 결심하고 다짐하게 되는 것은-이것도 은혜로 되는 것이지 나의 결단과 결심이 무어 그리 중요하겠습니까만- 누가 뭐라고 해도 오직 은혜만 증거하여야겠다는 것이 더욱 절실하게 인식이 되어 집니다.
이제 6:2절을 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어찌 그 가운데 거하리요! 라고 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으니 그러면 죄를 더 지으면 은혜가 더욱 넘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사도는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럴 수 없는 것입니까?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안에서 유혹이 일어납니다. 욕심이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납니다. 경쟁심이 있습니다. 수군수군합니다. 현실적으로 죄라는 것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에 대하여 죽었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기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이 말하였습니다. 간략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들이 그 안에 거의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에 대하여 첫째로 완전주의자의 생각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었기에 이제부터는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지난 수요일 저녁에도 잠시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의 생각이나 행동이나 말에서 하나님의 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죄 없이 살아갈 특권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처럼 해야만 제대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단체들과 교파들이 자기들만이 완전하다고 말합니까? 우리 교회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날마다 해체되고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시는 은혜로 사는 것이지 나의 체험이나 전통을 근거로 살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야 살아있는 가지이듯이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어야 지체입니다. 그런데 완전주의자들은 한번 예수 믿는 것으로 더 이상 예수님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살아갈 가능성을 주었기에 완전하게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점점 죄를 적게 짓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를 더 많이 알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죄보다 더 큰 용서를 보게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셋째는, 죄책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기는 하지만 죄의 책임을 우리에게 묻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이보다 더한 세계라고 봅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로 옮겨졌기에 더 이상 죄의 권세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전에는 죄의 권세아래 있어서 그 곳에서 아무리 선하고 착하고 바르게 살아도 죄의 권세로 사망의 열매밖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에 들어 왔기에 이제는 죄의 종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왕이 부실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는 영역이 은혜의 왕 노릇하는 세계입니다.
죄가 왕 노릇하는 세계란 선악체계 속에 사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악을 물리칠 수 있다는 세계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모든 인간에서 동일하게 들어있는 사고방식이요 가치관이요 세력입니다. 이런 세계에서는 절대로 전적인 대속을 믿을 수가 없는 세계입니다. 이것이 죄가 왕 노릇하고 있는 세계입니다. 예수님이 필요 없는 곳입니다. 혹시 필요하다고 하여도 자기의 노력에 조금씩 보태어주는 정도로 필요한 것이지 나의 행한 것을 모두 다 걷어치우고 주님 홀로 일하신 것으로 채우려는 것에 대하여 반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왕 노릇하는 곳에서는 선악체계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죄 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끊임없이 나오는 모습이 선악체계에서 살던 버릇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늘 교회에 빠지지 않고 잘 다니던 사람이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지도 못하고 예배도 드리지 못하면 죄스러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음껏 못하고 찬송도 마음껏 못하니 답답하고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스스로 죄라고 탓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상태라면 내가 무언가 열심히 잘하고 있으면 늘 든든해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선악체계의 버릇이고 습관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죄임을 아는 것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과 악을 챙겨서 영생에 이르고자 하는 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에서는 더 이상 자기의 의를 주장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나 행한 것 죄뿐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내가 의롭다 함을 받고 거룩함을 얻고 영화롭게 된 것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그 아들의 피로 대속하여 은혜의 왕 노릇하는 세계에 들여 놓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왕 노릇하는 세계에서 스스로 탈출 불가능하듯이 의와 생명의 왕 노릇은 죄와 사망의 왕 보다 더 크고 온전하고 완전하기에 더더욱 빠져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그 은혜를 그 사랑을 죽을 때 까지 알아갈 것입니다. 그 세계가 얼마나 크고 넓고 온전한지를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방식으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예화를 하나 들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침대위에서 잠을 잡니다. 자다가 보면 몸부림을 칩니다. 바로 누웠다가 옆으로 누웠다가 엎드렸다가 거꾸로 누웠다가 때로는 위로 튀어 오르기도 합니다. 시몬스 침대가 아니면 옆에 남편이 쿵하고 앉으면 옆의 아내가 붕 떠오르는 것입니다. 아내가 떨어지면 남편이 붕 떠오르는 것입니다. 때로는 침대 밑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디 안에 있습니까? 방 안에 있습니다. 집 안에 있습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얼마나 엄청난지 평생을 헤엄쳐도 그 끝이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21절에서 은혜가 의로 왕 노릇하는 세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이라면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로마서 6:1-5 연합 2003. 12. 28.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오늘이 2003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의 기도나 설교는 대부분 어떤 내용들이 나오는가 하면 누가복음 13장에서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자 주인이 찍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과원지기가 올해만 참아주소서, 다시 잘 가꾸어 보겠습니다. 만약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버리소서라는 내용의 기도와 설교를 많이 들었습니다. 연말에 자기 행함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족하면 새해에는 더욱 잘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를 도출하여 냅니다. 교회에 충성헌신봉사하지 못한 것들을 죄로 만들고 더욱 충성헌신봉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모습입니까? 누가복음 13장의 무화과 비유의 말씀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일과 예루살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사건을 가지고 그들의 죄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여기서 회개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말하는 죄의 개념과 전혀 다릅니다. 유대인들의 헌신충성봉사는 보통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완벽합니다. 그런데 무슨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선악체계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이제 예수를 믿고 나면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견해, 차츰 죄를 덜 짓게 된다는 견해, 죄는 짓지만 죄책이 따르지 않는다는 견해, 죄가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하고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한다는 견해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의 권세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는 죄가 왕 노릇하는 곳에서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신분이 되어 버린 것을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의 왕 노릇하는 곳에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죄가 끄는 대로 끌려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의가 끄는 대로 끌려 갈 수밖에 없는 신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왕 노릇하는 세계입니다.
어떻게 나의 의지나 결단과 상관없이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모두 아담아래 태어나서 이미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계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세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자기의 죄를 모르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 죄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듭나고 보니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에 태어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이 죄이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것이 저주임을 아는 것입니다. 전에는 아담과 연합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지막 아담과 연합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사망이 왕 노릇하는 옛 아담에게서 끊어지고 생명이 왕 노릇하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연합되어 위치이동, 신분변화가 생긴 것은 오직 주님의 언약을 따라 그의 아들의 피로 구속하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되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골로새서 1:13-14절에서는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흑암의 권세아래 있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입니다. 그 체제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들의 나라, 아들의 권세, 그 은혜의 권세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세례란 함께 묶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이미 아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부활에도 참여할 것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은혜의 왕 노릇하는 세계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은혜의 왕 노릇하는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권면이 필요한 것입니까? 죄가 왕 노릇하는 세계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은혜의 왕 노릇하는 세계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여전히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던 세계의 버릇이 그대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버릇이 무엇인가 하면 선악체계입니다. 이 선악체계가 최초의 죄이며 죄의 뿌리입니다. 피조물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스스로 신의 위치에 오르고자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면서 살면 되지 더 이상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체계가 형성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세계 아래서 사는 것을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계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어 있는 세계이기에 누구를 의지한다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인간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조금만 도와주면 자신이 스스로 선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전적 죄인이기에 전적인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 세계입니다.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고 선으로서 악을 제어하면서 살 수 있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 없고 오직 거저 주시는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복음의 선포는 그야 말로 경악스러운 내용입니다. 도대체 인간을 무엇으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대어들뿐입니다.
그러한 반응이 어떻게 나타난다고 하였습니까? 그러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더 많이 지어도 되겠구나 하는 반응인 것입니다. 이 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고방식이 바로 선악체계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고 그 아비가 마귀인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체계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전적으로 예수를 의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선악체계가 그대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하여 선악체계 속에 묶어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행함대로 받는다는 세계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복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 받는다는 것입니다. 권선징악입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학습 받아 온 것입니다.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내재화되어 있는 체계가 더욱 공고화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학습의 내용이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 행함에만 기대를 걸게 만듦으로 일한 것이 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보고, 무언가 자기가 부족하기에 그렇다고 보면서 줏대도 없고 자신감도 없으니 남을 의지하고 신을 의지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에서 은혜의 세계로 스스로 들어갈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왕 노릇이 더욱 힘이 있어 사망의 왕 노릇하는 곳에서 자기 백성을 빼내어 오시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피로 구속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의 왕 노릇하는 세계에 들어와도 여전히 선악체계에 살던 자들이기에 그 버릇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또다시 나오는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육체의 소욕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계속하여 선악체계를 고수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죄인 줄 사망의 왕 노릇하는 세계에서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왕 노릇하는 곳에 들어오게 되니 이것이 죄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옛 습관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겠습니까?
자기들의 의를 축적하는 모습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의를 축적하는 것처럼 은혜의 왕 노릇하는 곳에서 또다시 자기들의 의를 축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도를 평소에 많이 해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어려움이 닥치면 너끈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지금 은혜가 왕 노릇하는 세계에서 주님의 기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자기 기도를 믿고 의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당장 반발이 나옵니다. 그러면 기도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기의 기도가 부인되어 질 것입니다. 얼마나 자기의 뜻과 욕심대로 기도하고 있는지를 알게 됨으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기도와 성도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기도를 의지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왕 노릇하는 세계에서 사는 모습입니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모습입니다. 전에는 기도 많이 하면 그것이 자기 의로 자기 이름을 높이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새인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죄인이 아닌 것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새 생명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연합되어 죽은 자임을 늘 확인하는 것입니다. 기도만 이렇겠습니까? 전도도 헌금도 봉사도 얼마든지 선악체계 속에서 행하던 모습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잘하는가 하면서 서로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잘하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고 나오는 것이 자기의 의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상처를 받는 것은 자신이 부족하고 연약하다고 여기는 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는 늘 완벽하고 잘한다는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고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은 자기의 부족과 연약을 날마다 절감하면서 오직 주의 은혜를 사모하고 기대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더 이상 자기의 행함에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옛 사람, 옛 체제인 선악체계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왕 노릇하는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매일 매일 불쑥 불쑥 솟아오를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몸이 완전히 멸하여질 때까지 계속하여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 산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와 함께 장사되고 그와 함께 살아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19-20절입니다.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서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죽은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었고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 분의 지시와 인도와 능력과 권세아래 사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6:6-11 단번에 2004. 1. 4.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2004년 1월 첫 주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해라고 새로운 결심과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성경말씀은 이러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버리는 것입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아니하는 자나 간에 스스로의 결단과 결심에 의하여 무언가 이루고자 하는 것들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말씀에서 모두가 산산조각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현 상태를 완전하고 완벽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누가 말하기를 미완성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미완성인 자아를 완성적 존재로 만들어 보고자 온갖 심혈을 다 기울입니다. 자아의 실현을 삶의 목표와 방향으로 잡고 있기에 계속하여 자기 자신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좀더 나은 자아의 실현을 해보자고 해맞이도 하고 송구영신도 하고 여러 가지 처방을 내려봅니다만 작심삼일입니다.
이러한 몸부림이 믿지 않는 자나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에게나 모두 다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믿는 자들에게는 어떤 모습이 나옵니까? 새해에는 송구영신하면서 결단을 하지요. 새해에는 기필코 주일성수, 십일조를 제대로 하자. 주일학교 교사로서 지각을 하지 말자. 집사라면 제직회라도 제대로 출석하고 봉사라도 제대로 하자. 그런 수준은 우리가 이미 지났다고 하는 사람은 좀더 거룩하고 좀더 영적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어떤 인간도 이룰 수 없는 일을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시는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신 분이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시되 그것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다 이루심을 가지고 인간에게 들이미는 것입니다. 내가 다 이룬 것을 믿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갈림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 자기의 이룸은 모두 다 부인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가 할 일의 여지를 어느 정도 남겨 두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점점 거룩하여 지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 가미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번에 의롭다 함과 거룩함과 영화로움까지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10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래서 사망이 예수님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셨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셨습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고 그래서 사망이 주장하지 못하고 죄에 대하여서도 단번에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습니다. 이것도 믿으십니까? 예라는 대답이 잘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나의 삶을 보고, 나의 체험을 통하여 볼 때 여전히 연약하고 여전히 죄가 나오는 것을 보게 되기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어라고 하는 것입니까? 내가 믿기는 믿지만 아직도 부족해서 좀더 거룩하고 좀더 예수님을 닮아가서 나중에 내가 예수님 정도가 되어지면 그때는 죄와 사망이 주장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주 겸손한 대답 같지만 예수님의 단번에 이루신 일을 믿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유혹입니다.
지금 본문은 우리가 어떻게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인가를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말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례란 함께 죽고 함께 산 것을 말합니다. 나는 여전히 내 몸을 가지고 살고 있는데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죽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아담아래 모두 죽은 자가 되어 있듯이 이제 예수님 안에서 모두 산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믿게 됩니까?
로마서 8:9절을 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있는지 아닌지는 무엇으로 알게 됩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별명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회개의 영,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역할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에베소서 4:3절에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주님과 하나 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성도와도 하나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것이며 그것을 또한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아니고서는 믿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신실하며 이루지 못하심이 없으신 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 속에 우리를 함께 연합시켜 죽이시고 살리셨다는 것을 믿지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그저 주시는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데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것도 아멘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다는 것은 이제 죄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지만 차츰 거룩하여져야 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그러나 거룩함이 점점 더 채워져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절반쯤 거룩하고 어떤 사람은 거의 다 거룩하여진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거룩함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런 능력이 없는 거룩함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0절을 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분으로 있다가 유출되어 나온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성취는 없는데서 있게 되고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와 약속 밖에 있는 자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약속 안에 있는 자에게 예수님은 그들에게 지혜가 되고 의로움이 되고 거룩함과 구속함이 이미 되신 것입니다. 지혜가 주어졌기에 그 지혜를 이용하여 의로워지고 점점 더 거룩하여 지고 그래서 구속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30절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거룩 정도가 아니라 이미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언제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십자가에서 단번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 안에 부활과 승천과 성령 보내심까지 다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부활, 십자가 없는 승천, 십자가 없는 성령 임함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 믿고 십 분 만에 죽어도 거룩하고 영화로운 것에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그만큼 완벽하고 철저하고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꾸만 단번에 이루신 그 일을 믿지 못하는 것은 우리 안에 논리적인 시간순서의 개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바탕에서 정립된 신학이 조직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조직신학에서 ‘구원의 서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인 순서를 말하는 것이지 시간상의 앞뒤가 아닌데도 사람들은 시간적인 순서로 생각을 합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소명,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수양, 성화, 견인, 영화로 봅니다. 단계별로 점진적으로 생각할 소지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미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11-12절을 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성소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며 창조에 속한 성소가 아니라 영원하고 온전한 하늘의 성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즉 그 피안에 있는 자는 영원한 속죄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일을 주님께서 단번에 이루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2:26-28절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한번으로 족한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처럼 자주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자기를 제사로 드려서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종말입니다. 두 세계가 완전히 구별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세계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계로 나누어져 버린 것입니다.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사람이 다 죽음의 심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이 죽음아래 오셔서 죽음의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리라고 하십니다.
죄와 상관이 없다는 것은 성도가 죄를 짓지 않는다거나 죄가 완전히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죽을 몸이 다하는 그날까지 죄는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권세아래 오셨지만 그러나 사망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신 것입니다. 마귀의 세력을 꺾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 안에 자기 성도를 연합시키신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을 보내심으로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0절을 봅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번에 자기 몸을 드리심으로 성도는 단번에 의롭다 함을 받았고 단번에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이 정도로 완벽한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성경본문에서 자라라, 거룩하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단번에 이루신 그 능력 안에서 살라, 그 은혜를 맛보라, 하는 것입니다. 살면서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자기의 욕심과 죄를 보면서 단번에 이루시지 아니하시면 결코 되지 않는 것을 알게 됨으로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육체 안에서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속죄와 거룩함과 영광스러움을 날마다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최면을 걸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사실을 사실대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인하여 연합되어 있기에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영원히 산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놀라운 일이며 우리의 평생에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다 알아가기에 부족할 뿐입니다.
로마서 6:12-15 죽을 몸 2004. 1. 11.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전도서에서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새것이라고 하여도 이미 전에 있었던 것의 반복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새해라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동해안에 일출을 보러가든, 송구영신과 신년 산상기도회를 가든 그것이 해 아래 있는 사람을 새롭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이 없는데도 자꾸만 새것을 찾아 나서는 것은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계속하여 새것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또는 새해에 닥칠 두려움을 없애보고자 종교적인 행위들로 액땜을 하는 것이 살고자 하는 본능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다 죽음의 공포로 인하여 발생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우리가 미신이라고 하는 종교적인 모습에서 나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얼마든지 육체의 일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2:20-23절입니다.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여기서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에 지혜 있는 모양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조금도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그 지혜로운 모양 같은 것들이 어떤 것들입니까? 16절부터 보시면 먹는 것 마시는 것, 절기 월삭 안식일, 일부러 겸손함, 천사 숭배, 본 것을 의지함, 자의적 숭배, 몸을 괴롭게 함 등이 나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육체 좇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모든 것을 공급하는 머리를 붙들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다 육체의 일입니다. 아담의 후손이 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살릴 수도 없으면서 스스로 자기를 살리자고 열심히 죽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은 일생 동안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종노릇하는 자를 해방시키려고 오셨습니다.
골로새서 2:15절입니다.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 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1)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것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어떤 금욕적인 행위를 동원하여도 스스로 새것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이 되어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에 옮겨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합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났고 하늘에 앉혀진 신분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신분이 바뀌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2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사욕을 순종치 말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는데 어떻게 죄가 다시 왕 노릇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 말씀은 5:20절에서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에 대하여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그렇다면 죄를 더 지어서 은혜를 더욱 많게 하여야겠구나 하는 반응에 대한 답변의 계속입니다. 6:1절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그 신분이 하늘에 앉혀져 있습니다. 골로새서를 방금 보았습니다만 2:15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함께 장사되고 함께 일으켜 졌다고 합니다. 에베소서에는 함께 하늘에 앉혀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를 어떻게 감히 악한 자가 건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가 다시 왕 노릇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너희와 너희 몸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약속 안에서, 묵시 세계 속에서 이미 의롭고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이미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몸의 구속이 남아 있습니다. 이 몸을 죄의 몸이라고 합니다. 죄의 몸이기에 죽을 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죄가 어디에 아직 남아 있는가 하면 우리의 몸에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남아 있는 것입니까? 죽을 때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 까지 죄가 우리 몸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 죄가 우리를 다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으로 끌고 가지는 절대로 못합니다. 이것을 알기에 죄의 몸이 멸하기까지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것이 제일 어렵고 힘든 부분입니다. 평생 싸우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가장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 몸에서 분명히 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너희 몸에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이 죽을 날이 옵니다. 죄의 몸이 멸하여질 날이 옵니다. 썩어질 날이 옵니다. 그동안 죄가 몸에서 기승을 부릴 것이지만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미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14절에서 법아래 있는 것과 은혜 아래 있는 것과 대비를 하고 있습니다. 법아래 있다는 것은 결국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도 자기 행위로 구원을 받을 자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미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법아래 있을 때와 반대의 경우로 똑 같은 것입니다.
법아래 있을 때에는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하여도 스스로 그 법을 다 지켜서 의에 이를 수가 없었는데 이제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내 노력으로 들어 온 것이 아니기에 아무리 은혜를 거부하려고 해도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고 너희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 신분이 이제 죄에게 드려지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죄가 감히 어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에 죄가 왕 노릇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몸은 악하고 더러운 것이고 정신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그리스철학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게 구별하지 않습니다. 몸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몸에 왕 노릇한다는 것은 몸의 욕구를 사욕을 따라 사용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로마서 6:12절에서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고 합니다. 몸의 사욕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배가 고파 밥을 먹어야겠다는 것이 죄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몸의 사욕이란 김밥 한 줄에 천원이면 충분한데 금분을 뿌려서 한 줄에 오천 원짜리를 먹어야겠다는 것이 사욕입니다. 죽을 몸, 썩을 몸을 위하여만 사는 시대입니다. 얼짱, 몸짱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지요! 전부 썩을 몸, 죽을 몸을 치장하는 말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어떻게 외모를 꾸미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3-4절입니다. “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그러므로 외모에만 관심이 가는 사람이 그 몸의 사욕을 좇아 사는 것이 죄가 왕 노릇하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꾸미지 말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꾸미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다 쇠하여지고 낡아지고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늙는 것이 성경에서는 아름다움입니다. 백발은 노인의 면류관입니다. 그러나 늙지 않으려고 발악을 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믿지 아니하고 보이는 세계만 믿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죄가 얼마든지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죄가 죽을 몸에 왕 노릇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어떻게 손대지 못하지만 죄로 인하여 죽을 몸에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도 몸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죽을 몸을 다르게 썩을 것이라고 합니다. 죽고 부패하고 썩어질 몸만을 생각하지 말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0-54절입니다.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ㄷ)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혈과 육이 썩어질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6,7,8절입니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지금 우리는 주님과 따로 거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령을 받았지만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며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재림과 함께 우리의 낮은 몸도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야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러나 이미 은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기에 죽을 몸에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22-25절을 봅니다. “봉독”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면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좌절하지 않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이 해방하였습니다. 이제 은혜 아래 있기에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가 없습니다.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죽음조차 그 사랑, 그 은혜에서 빼앗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몸을 가지고 있기에 탄식하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에서 일어나는 사욕에 마음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화장품을 바르고 건강식품을 먹고 비싼 의료기를 사용하여도 죽습니다. 죄 아래 있는 자는 죽음이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보이는 몸만 치장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죽음이 사망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이 없습니다. 이들은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생명의 부활로, 홀연히 영광의 몸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 날을 소망하면서 범사에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6:15-18 죄의 종과 의의 종 2004. 1. 18.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1)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 세상의 사람은 두 종류뿐이라는 말씀을 몇 번에 걸쳐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종류는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종류이고, 한 종류는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입니다.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에서는 본인의 의사와 행위와 상관없이 죄의 종입니다. 반대로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에서는 역시 자신의 의사와 행위와 상관없이 의의 종입니다.
복음을 들으면서 가장 황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이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전체를 통하여 이 부분을 증거하고 그 복음에 대한 오해와 반발에 대하여서도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다는 14절의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법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법을 지키지 않으면 죄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런 체제가 법아래 있는 체제입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당장 그러면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되겠구나 하는 반발에 대하여 그럴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어디에서 보았습니까? 5:20-21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죄가 왕 노릇하는 곳에서는 그 결과가 사망으로 가지만 은혜가 왕 노릇하는 곳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오해하고 복음에 대하여 반발하는 자들의 반응이 그러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더욱 지어야 하겠구나! 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6:1절에서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결코 그럴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럴 수 없는 이유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산자인데 어떻게 죄를 짓고자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연약과 부족으로 죄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을 몸을 가지고 있어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이 결코 사망으로 이끌어 가지 못하는 것이기에 그러한 몸의 사욕을 따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신 것처럼 이제 성도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죄가 더 이상 주장하고 관리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아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반발이 나오는 것입니다.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되겠구나! 하는 것에 대하여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16절을 시작합니다. 16절은 왜 그럴 수 없는지를 일반적인 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 자신을 누구에게 드리느냐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종이라면 죄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기에 죄가 시키는 대로 하여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의 종에게 의를 행하라고 한다고 해서 의를 행할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 반대로 의의 종은 의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와 의가 인격으로 드러납니다. 다르게 말하면 마귀의 종은 마귀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종은 예수님께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를 짓자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종으로 사망이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고 합니다. 죄는 사망이고 순종은 생명이라고 해야 하는데 바로 생명이라고 하지 않고 의에 이른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순종으로 생명에 이른다고 하면 지금까지 믿음으로 즉 은혜로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말에 모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순종의 대가로 생명이 아니라 순종으로 의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의에 이른다는 것은 의로운 삶에 들어간 것입니다. 즉 의의 왕 노릇하는 곳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 들어간 것이 우리의 순종인가 하는 것은 다시 17절을 보아야 합니다.
17절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우선 여기서 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노예라고 보면 됩니다. 자신의 권리나 주권이 전혀 없는 것이 노예입니다. 주인의 소유물이 노예입니다. 죽이고 살리는 모든 권한이 주인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예 의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망과 생명을 두고서 인간이 스스로 사망과 생명을 선택할 자유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에라스무스는 은총과 인간의 의지가 결합하여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지만 루터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루터가 노예의지를 말한 것입니다. 인간은 짐을 지고 가는 짐승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위에 누가 타고 가는가에 그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것은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밝히 계시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30:19-20절입니다. “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1)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40년을 지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직전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생사화복이 네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과 복은 여호와를 사랑하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가 처절하게 보여주는 바는 이들이 생명과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화와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죄의 종이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논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야 참 자유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자신들은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자유를 주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을 인하여 그들의 아버지가 마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이라고, 귀신들린 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소리를 들으려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아니하는 사람을 보고서 당신의 아버지는 마귀라고 하면 당장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처럼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자는 자신이 죄의 종임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자유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과 악을 알아서 조절하고 선택하겠다는 생각으로 삽니다. 참으로 고상하고 인간의 인격과 이성의 능력을 존중하는 것 같지만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인간 스스로 생명과 복을 선택할 수 없는 죄의 노예라면 어떻게 의의 종이 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34-36절입니다.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기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의 구체성이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런 죄인은 영원히 집에 거할 수가 없지만 그러나 아들이 자유케 하면 자유하리라고 합니다. 아들이 자유를 주시는 방법뿐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35-40절입니다.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되는 것은 누구의 일입니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일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자신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믿고 사는 것이 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이 의의 종이 됨을 또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종에서 순종으로 의의 종이 되는 이것을 로마서 6:17절에서 한절에 압축하고 있습니다. 시작이 감사한다고 합니다. 죄의 종이 순종으로 의의 종이 되는 것에 대하여 바로 터져 나오는 내용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소식이었으면 다른 그 무슨 이야기보다 감사가 튀어나오겠습니까? 만약에 죄의 종이 의의 종이 되는 일에 인간의 순종이나 애씀이나 노력이 있었다면 이러한 감사가 먼저 나오겠습니까? 그러므로 죄의 종이었다가 의의 종이 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요 감사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전하여준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훈의 본이란 복음의 내용 전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 도리입니다. 이것을 전하여 받고서는 그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다시 내가 순종하여 된 것처럼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서 보면 수동태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복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종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힘이 강력하게 작용하여 복종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에 항복이 된 것입니다.
어느 인간도 스스로 예수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믿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전도가 소용이 없습니까? 전도란 참으로 미련한 것입니다. 전도라는 말이 선포라는 말입니다 설교는 남녀노소 신분의 지위고하 지식의 유무를 막론하고 일방적인 선포입니다. 현대 교육학에서 보면 얼마나 미련한 것입니까? 인간의 발달심리학에 따라 아주 세부적으로 나누어서 연령에 맞추어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볼 때 복음의 선포가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미련한 선포의 방법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씨를 뿌리거나 물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것은 주님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고 물주는 사람은 필요시마다 사용되어지는 도구일 뿐이고 생명을 주시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성부의 계획과 성자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되어지는 일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이 기적이요 능력이요 성도의 감사와 찬양의 제목입니다.
여기서 믿는 자들의 모든 고백이 동일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입들이 막아지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오직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주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고백들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까? 자신이 죄의 종이었던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쉽게, 가볍게 죄를 다루어 버립니다. 죄인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한두 번만 말하고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말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서 빠져 나왔는지 그 죄의 깊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죄보다 더한 은혜의 깊이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너희가 죄의 종이었다가 전하여준 교훈의 본을 듣고서 마음으로 복종이 되어 죄에게서 해방이 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교훈의 본입니다. 본은 흔들리면 안 됩니다. 본이 있어야 그 본대로 모양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는 지옥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다시 죄를 짓자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의의 종, 의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임을 아시고,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6:19-23 하나님의 은사 2004. 1. 25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19절 말씀에 보시면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거룩함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거룩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에 우리에게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거룩함이란 무언가 엄숙하고, 가볍지 아니함, 남자는 무언가 근엄하고, 여자는 웃어도 큰소리로 웃지 않고 조용한 미소를 띠고, 말투도 함부로 하지 않고 은혜로운 말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고향친구를 만나면 어떻게 대합니까? 옛날 말 그대로 인사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하면서 은혜가 어떻고, 사랑이 어떻고 하다가 갑자기 본색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예가 코미디 프로에서 보았습니다. 외길 30년 단 한번도 자세를 바꾸지 않고 30년을 꿋꿋하게 지켜 왔기에 이제 1분만 있으면 세계 기네스북에 오르는 순간인데 그 사람에게 몇 분 남았느냐고 하니 시계를 보면서 자세가 다 흐트러지는 것입니다. 집사, 장로, 목사로서 자기가 만들어 낸 거룩함으로 얼마를 버틸 것 같습니까? 30년, 50년을 버틴다고 그것이 거룩함에 이르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거룩함에 이른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거룩함이란 분리됨입니다. 어떤 분리가 일어난 것입니까? 로마서 6장에서 계속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죄의 종에서 분리가 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9-14절에서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1)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0절에서 거룩함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제물 되심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또다시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상한 문법 같지만 거룩함을 얻었기에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기에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받았기에 의에 종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차츰 거룩하여져서 거룩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차츰 구원을 이루어가서 완전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차츰 의로운 행실로 완전히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은사로 완전한 거룩함과 구원과 의롭다 함을 얻었기에 거룩함에 이르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고 의에게 종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19-21절을 봅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함으로 사람의 예대로 말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데 전에는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합니다. 전에는 죄의 종이었고, 이제는 의의 종이라는 말씀입니다. 전에 죄의 종이었을 때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고 합니다. 죄의 종이었을 때는 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부끄러운 일이고 그 결국은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22절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거룩한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에서 해방이 되어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이제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의와 영생에 이르는 길로 접어든 것입니다. 이제 다시 죄가 왕 노릇하는 곳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죄가 죽을 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가 왕 노릇하기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신분이 의의 종이요 거룩함의 열매를 얻었기에 거룩함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1:2-6절입니다. “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 할 것이며 3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들었으면 그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4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줌으로 그 아내가 자녀 간 낳았으면 그 아내와 그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5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6 상전이 그를 데리고 1)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히브리인으로 종이 되는 경우에 빚으로 종이 될 수가 있습니다. 6년 동안 종으로 섬기다가 7년 째 자유를 주는데 자유를 포기하고 주인에게 영원한 종이 되겠다고 귀를 뚫는 것입니다. 자유를 얻어 나가는 것 보다 주인의 종이 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경우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충분하다면 다시 종이 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불쌍하고 무능한지 거저 상전이 주는 것으로만 감사하는 사람이라면 영영히 주인의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시편 123편입니다. “1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
시편 표제어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부르는 것입니까? 나는 이만큼 잘났으니 성전에 나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보듯이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긍휼히 여기시기를 바라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에 이런 마음으로 모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히브리인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상관이 없이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한 죄의 종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것을 무엇을 위한 해방입니까? 내 마음대로 살라고 해방시킨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6:19-20절입니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제 우리의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죄에서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값을 지불하고 주님의 소유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 구별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것으로 구별하셨기에 거룩한 것입니다. 누가 거룩하지 않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누가 감히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란, 거룩한 무리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피로 값을 주고 거룩하게 하신 백성들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가 왕으로 주권 행사를 못하는 신분이 된 것입니다. 왜 자꾸만 이러한 말씀을 반복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로마서 5:20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씀과 6:14절에서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하심과, 거룩하게 하심과,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반발이 나오는 것입니까? 그러면 죄를 더 많이 지어서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하고,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되겠구나, 하는 자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지금도 도덕론자들은 이러한 복음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의롭다 함과 거룩함과 구원을 사람이 한 것이 없이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게 됨으로 사람들이 자기들이 져야할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게 되고 방종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도 죄가 무언지 잘 모르는 말입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도덕과 바른 삶이라는 것이 겉으로 포장이 되어 있을 뿐이지 영생을 얻는 일에는 전혀 무가치한 것입니다. 그 결국은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이미 선언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함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일이 나타납니다만 오늘은 두 사람의 예를 들고자 합니다. 먼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 다니면서 바란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가 왕으로 등극하면 자신도 한 자리 하겠다는 것입니다. 기적도 보고 자신도 기적도 행하면서 무언가 기대를 가지고 따라 나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라면 다 가지고 있던 민족적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부르심으로 입고 따라 나서면서 그 능력을 보고서 더욱 확신에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 사이에 서로 누가 높으냐는 다툼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충성을 다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버릴 지라도 자신은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였지만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돌아서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찾아오시고 약속하신 성령, 거룩한 영이 임하시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살던 베드로가 사도행전 3장에서 성전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고는 무어라고 합니까? 이 사람이 일어나게 된 것이 왜 나의 경건과 기도의 능력으로 일어난 것처럼 나를 주목하느냐면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그 이름이 이 사람을 낫게 하였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함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하여 구별된 자의 모습입니다.
그 다음은 바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출신이 전통 유대인이며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하고 유대인의 엄격한 바리새파 중에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자랐기에 얼마나 율법에 열심이었는지 자랑할 것들이 너무나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들을 모두 무엇으로 여깁니까? 배설물로 여긴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의롭게 됨이 사람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1-15절을 봅니다. “봉독” 왜 자기의 자랑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간다고 합니다. 의에 잡혔습니다. 거룩함에 잡힌 것입니다. 구원에 잡힌 것입니다. 그 잡힌 것이 너무나 크고 엄청나서 달려가기도 바쁜 것입니다.
이제 6장의 결론을 맺습니다. 6:23절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대가는 사망입니다. 그러면 의를 행하고 거룩하고 순종의 대가로 영생이 주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영생은 어떤 인간의 공로나 선행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은사란 말 그대로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이 영생의 은사가 너무 좋아서 이제 스스로 주님의 종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결론이 두 가지입니다. 죄의 삯으로 사망에 이르고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이 성도입니다.
로마서 7:1-4 율법에 대하여 죽음 2004. 2. 1.
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6장의 결론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의 삯, 죄의 대가, 죄의 결론이 사망입니다. 그렇다면 의롭게 산 결과, 거룩하게 산 결과로 영생이라고 해야 자연스러운 문장입니다. 그러나 만약 영생이 그러한 조건으로 주어진다면 영생 얻을 자는 단 한명도 없습니다. 이미 성경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은사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라고 하시지 않고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 있는 영생을 은사로 주신 것입니다.
이런 복음을 바울사도가 전하고 있으니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 다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율법을 모독하는 처사라는 공격과 그렇다면 자신이 도덕적 책임을 지지도 않아도 되기에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구나 하는 공격에 대하여 로마서 6장과 7장에서 계속하여 그럴 수 없음을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씀과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다는 말씀에 대하여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길게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란 죄가 권세를 가지고 왕 노릇하기에 죄가 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죄에 순종하고 죄에 복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그러나 의의 종이란 의가 왕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왕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은혜란 인간 위에 있는 하나님의 권력입니다. 은혜는 잠잠히 있을 수 없고, 정지 상태에 있을 수 없고, 침묵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죄가 사망에 복종시키듯이 은혜가 생명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둘 중의 하나이지 중간상태는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냐, 사망이냐 이지 생명도 아니고 사망도 아닌 것은 없는 것입니다. 예! 아니요! 이지 중간은 다 악에서 나온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는 한 늘 혼동 가운데 헤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마귀의 유혹이 들어오자 죽을까 하노라고 애매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죽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이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14-18절입니다.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ㄴ)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ㄷ)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하셨느니라 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ㄹ)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ㅁ)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너무 극단적이지요!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도 있는데 완전히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것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에 있어서 치우침 없이 똑바로 순종하라는 말씀이지 중간에 서 있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은 어떤 상태입니까?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라는 이 탄식이 바울의 현재 경험인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인가? 믿음이 연약한 상태인가? 장성한 상태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만 그러나 로마서 7장의 전체 중심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에 대한 오해와 공격에 대하여 그럴 수 없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과 그 한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개인으로는 이미 거듭난 사람의 탄식으로 봅니다. 몸의 구속을 기다리며 탄식하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성도로 부름 받은 자는 무엇 때문에 혼동에 매여 있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1:18-20절입니다. “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바울 사도가 마게도니야 지역으로 갔다가 고린도를 경유하여 유대로 가려고 하였는데 차질이 생긴 것입니다. 그렇게 한 것은 고린도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그렇게 하였다고 하면서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예 되심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되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은사를 입고서 죄의 권세에서 의의 권세로 들어오게 된 것은 전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예로 된 것입니다. 그 순종하심으로 이루어진 일이 무엇인지를 율법에 대하여 죽임 당한 것으로 로마서 7장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7:1-4절은 율법에 대하여 죽임 당한 자가 어떤 관계인지를 남편과 아내의 예를 들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법이라는 것이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만 주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서 법대로 의하면 사형을 시켜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어 버렸다면 사형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남편이 살아있는데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로 가면 음부가 되지만 남편이 죽으면 다른 남자에게 가더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서 자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남편이라 보고 율법을 받은 자가 아내라고 본다면 누가 죽은 것입니까? 율법이 죽은 것입니까? 율법을 받은 자가 죽은 것입니까? 율법이 죽을 리가 있습니까?
마태복음 5:17-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성취가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율법이 죽은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하여 죽어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7:4절입니다. 그러므로, 즉 남편이 죽어버리면 자유하게 되는데 남편이 죽을 수 없으면 아내가 죽어 버리면 그 남편에게서 자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이 남편이라고 비유를 하였는데 어떤 남편이겠습니까? 율법을 다 지키면 의에 이릅니다. 그러나 단 하나라고 어기면 죄가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더 쉽게 예를 들자면 남편이 집에 들어와서 조사를 한다고 합시다. 청소상태, 밥과 반찬의 상태 등을 조사하는데 세부적인 규칙들을 수백 가지를 만들어 두었다고 합시다. 그 중에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죄라고 하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런 남편과 계속 살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남편이 죽든지 자신이 죽든지 양단간에 결정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이혼하겠다고 하든지, 죽는 일까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 믿는 자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자가 되는 것입니까? 4절을 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형제라고 부르는 자들은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하는 말이지요! 그들이 어떻게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는가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적이 없는데, 우리는 늘 율법의 요구들이 일어나는 자들인데 언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가 없으신 분이신데 자기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그는 율법의 요구인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그 요구를 다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해당이 안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법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더 이상 처벌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엄청난 선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기에 자기 백성들을 친히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주로서, 맏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면 한 몸이라고 합니다. 분명히 두 사람인데 어떻게 한 몸이 됩니까? 그것을 관계라 그러지요. 창세기 2:24절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자에게 여자가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뒤웅박신세라고 하지 않습니까? 여자를 비하하는 말이라고 비판을 하시겠지만 율법적인 남편을 만나면 그 여자는 죽는 신세입니다. 그러나 은혜로운 남편을 만나면 그 여자는 사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부부가 한 몸이 되는 것을 교회가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남편이고 교회는 그의 아내입니다. 그러면 전에 남편은 어떤 남편입니까? 율법적인 남편입니다. 누구나가 이 법 아래 태어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아담과 하와 이후의 모든 인간은 죄의 법아래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다만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가입하게 됨으로 죄가 무엇인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이미 죽은 자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심으로 그 안에 자기 백성들과 함께 죽으시고 함께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것을 연합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와 연합됨이요 세례를 받는다는 것도 그와 연합됨이라는 것을 6장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이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자는 다른 이 에게 시집을 간 것입니다. 전 남편에게서 죽고 새 남편을 맞이한 것입니다. 전 남편의 요구가 이제는 더 이상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세계가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의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의 남편이 아니라 은혜의 남편입니다. 무슨 열매가 맺어지겠습니까? 은혜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전에는 율법에 의하여 지배를 받아서 하지 않으면 저주와 심판이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는 않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의무감으로 하였습니다. 때로는 감사함으로 무슨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의 조문을 가지고 하라 말라가 아니라 새로운 남편의 지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의 헛되지 아니함입니다. 많이 사함 받는 자가 많이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사함을 적게 받은 자는 그만큼 자기의 죄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죄가 얼마나 엄청난지 알면 알수록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새로운 남편을 인하여 감사하며 기뻐하며 그를 믿고 사랑할 것입니다.
게시판에 어떤 분이 남편에게 바치는 노래를 올려놓았습니다. 한번 들어보았는데 후렴구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한 사람 하늘같은 당신을 사랑 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한 사람 당신만을 목숨처럼 믿고 삽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산자로서 이런 주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예수님만 사랑하고 예수님만 목숨처럼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7:5-6 새로운 섬김 2004. 2. 8.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율법이라는 남편에게서 죽고 새로운 남편을 맞이한 사람이 성도입니다. 율법이 죽지를 않으니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 하는데 그 죽음을 대신 죽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4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신 분에게 가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이 남편이 되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위한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율법아래 있었다는 것을 육신에 있었다는 말과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육신에 있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포함되는 말입니다. 율법을 받은 사람이나 율법을 받지 않았거나 간에 모든 사람은 죄의 정욕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의 정욕이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사람에게는 자연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식욕이 있고, 수면욕이 있고, 성욕 등이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살아가도록 사람이나 짐승에게 필요한 욕구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스러운 욕구들이 죄로 인하여 잘못되어진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들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도 함께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17:9절에서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누가 알리요 마는,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데 그 죄가 무엇인지를 5절에서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육신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혈과 육에서 나오는 것이 양심이든, 도덕이든, 선행이든, 종교이든 그 어떠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사망으로 향한 열매밖에 맺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장에서부터 이방인의 죄와 유대인의 죄를 함께 말하여 왔던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열정을 가지고 추구하는 그 근본바탕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흉악범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신실한 자도 있고, 경건한 자도 있고, 종교적 영역에서 큰 감명을 받기도 하고,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비우며 다스리기도 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희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일에 브레이크를 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한계가 육신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실존이 아담아래 있는 것이고, 율법아래 있는 것이고, 해 아래 새것이 없는 인간의 상황입니다. 여기서 그 무슨 열정을 품고 새로운 인간이 되고자 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다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죄와 사망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율법에서 예수그리스도로, 육신에서 영으로 옮겨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선을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죽는다는 것은 죄의 삯으로 인하여 죽는 것이기에 당연한 심판이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하여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이 내용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로마서 7:5절을 봅니다. 이제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왜 사망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까?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안에서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죄의 정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정상적인 욕구가 아니라 죄의 정욕이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죄의 정욕이 역사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욕구를 언제나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움과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투입되고 보니 그들도 동일하게 죄의 정욕이 역사하여 사망으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7:7-8절을 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면 탐심이 무엇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탐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법이 없으면 죄가 죄로 인정이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가입되어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에 그 율법에 죄의 정욕이 틈을 타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어떤 방식으로 깔려 있는가 하면 무엇을 하라 그러면 잘 하던 것도 하기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어떤 도덕과 교육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고쳐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으로도 사람을 살려 낼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한계입니다. 정죄하고 심판을 하지만 죄인을 살려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여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서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주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6절을 봅니다. ‘이제는’ 아중 중요한 단어입니다. 완전히 반전이 되는 내용입니다. 성경에서 ‘그러나’ ‘이제는’ 이런 단어를 중심으로 앞과 뒤를 잘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혀 다른 세계가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는’ 언제입니까? 육신에 있을 때입니다. 율법아래 있을 때입니다.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던 때입니다. 그런 때는 아무리 율법을 지킨다고 하여도 오히려 죄의 정욕이 율법을 인하여 틈을 타서 사망의 열매만 맺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벗어난 것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전적으로 주님의 임하심입니다. 그러면 이제 육신에서 벗어나서 영의 세계로 들어왔기에 이제부터 어떻게 섬기는 것입니까? 전에는 문자로 섬겼지만 이제는 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신으로 라는 말과 영으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육신과 영이라는 것을 사람을 영육이원론으로 구분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인간을 말할 때 여러 가지로 부릅니다. 육체, 흙, 살, 바람, 호흡, 영, 혼, 영혼 등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육신과 영이라는 말은 영역개념입니다. 율법아래 있는 자는 육신이라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는 자를 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는 것이고, 육신에 대하여 죽은 자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는 것은 전에 육신으로 섬기는 결과는 결국 죄의 정욕이 역사하여 사망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지만 이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게 되니 영의 역사로 인하여 생명의 열매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이 어떤 섬김입니까?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새로운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섬길 때는 죄의 정욕으로 인하여 그것이 자기를 위한 섬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바울 사도 같은 경우에 자기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육체를 자랑하려면 누구 못지않다고 빌립보서 3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베냐민 지파이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 바리새파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율법으로 열심을 내면 낼수록 어떤 결과가 주어진 것입니까?
로마서 10:2-3절입니다.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께 열심을 내었는데 오히려 예수님을 죽인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정욕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 율법이 완성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이 정죄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런 자들은 어떻게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까? 전에는 자기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의로워지는가?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내가 어떻게 남보다 뛰어난가?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이런 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은 자기에게 관심이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가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누구시기에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하고서 그를 섬기고 믿고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4-6절을 봅니다.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났느니라 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의문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의 직분이 무엇입니까? 새 언약의 일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일군이란 우리에게서 난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로부터 온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는 것은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죄와 사망으로 죽은 자를 자기 몸으로 살려내시고, 자기의 신부로 만들어 주셨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놀라며 감격하는 것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다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섬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면 어떤 신분과 지위가 주어지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누리시는 모든 지위와 신분을 그냥 받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결혼을 하면 성이 바뀌어버리지요! 남자에게 소속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뿐입니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다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리심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혀져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1-3절을 봅니다. “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1)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의문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에 대하여 성령으로 봉사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봉사하기에 자기의 봉사가 자기의 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봉사를 마음으로 계산하여 쌓아두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으로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나오는 봉사이기에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과 가능성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관심이 온통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쏠리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었기에 나오는 영의 새로운 섬김과 육신으로 섬기는 것의 차이는 사망과 생명의 차이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망에 이르게 역사하는 육신의 섬김이 아니라 생명에 이르게 하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한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안에 더욱 풍성하여 져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주님을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7:7-13 율법의 기능 2004. 2. 15.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ㄱ)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9 전에 1)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율법이 없으면 죄도 없을 것이 아닙니까? 율법을 주어 놓고서는 지키지 못하였다고 죄인이다, 하지 말고 처음부터 율법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죄인으로 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왜 선악과를 두셔서 따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따 먹지 못하도록 아예 만드시지를 않던지, 따 먹을 마음도 안 생기도록 하시면 죄를 짓지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 13절에 보시면 율법을 주시고 계명을 주신 것은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하신 것이며, 죄가 심히 죄 되게 하시기 위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나의 금지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금령을 통하여서도 무엇을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입니까? 죄를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죄라는 것이 아담 이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죄의 배후가 누구입니까? 사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단의 정체를 드러내시고 그를 처단하시기 위하여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시는 도구로 율법과 계명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인간을 의롭게 할 수가 없고 율법은 오히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을 확정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또한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게 됨으로 죄가 주관치 못하게 된 사람들이 성도라는 말을 바울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당장 반발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더하도록 죄를 마구 지어야 되겠네! 이제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으니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구나! 하는 반발들을 예상하면서 로마서 6장과 7장에서 율법의 기능과 한계에 대하여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속하여 섬기는 것으로는 결코 의로울 수가 없고 사망을 위한 열매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백퍼센트 완벽하게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에 단 하나의 죄라도 죄의 삯은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스스로 율법을 지켜 벗어날 인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이 그 사람을 지배하는 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하여 죽고 영의 새로운 것을 섬기게 된 것은 죄와 사망의 세력보다 더 크신 분이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자기 백성을 구출하여 내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이란 자기들이 지킬 수 있어서 주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율법을 주시고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못 지킬 법을 주셨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상식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은 지킬 능력도 없기에 주지 않았고 자기들은 특별히 선택받은 민족이기에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할 만큼 율법에 대하여 열심이었고 최선을 다하여 율법을 지킨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의 대표적인 사람이 바리새인인 바울이었습니다.
9절을 봅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이지요! 그때는 자기가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았다는 것은 죄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다 지켰으니 죄가 죽었고 자기는 살았다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을 다 처리하였다고 그래서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계명이 이르매 자기는 죽고 죄가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계명이 이르렀다는 것은 계명의 문자적인 면만 아니라 그 뜻과 정신까지 알게 되니 자신이 죽었고 죄가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을 몰랐을 때에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여겼는데 예수님을 만나고서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나서 그 율법이 자기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율법을 제대로 지켰다고 그렇게 자부심이 대단하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 얼마나 죄에게 속았는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11절을 봅니다. 죄가 계명을 기회로 삼아 바울을 속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속여서 자신을 죽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속고 있었던 때가 율법 외에 나타난 믿음으로 의롭다 함에 대하여서 속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기 속에 탐심을 어찌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7-8절을 봅니다. 율법이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율법이 아니면 죄를 죄로 알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면 탐심이 자기에게 있는지 알지 못하였을 것인데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니 죄가 탐내지 말라는 그 계명을 가지고 기회를 잡아서 각양 탐심을 이루어 내더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사단이 기회를 틈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정말 따먹지 말라고 하더냐는 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십계명의 열 번째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을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탐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들어오니 오히려 탐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죄 되게 하시는 율법의 기능인 것입니다. 그런데 전에 자기가 살아있을 때에는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다 지켜 온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것도 남의 집에 소유를 훔쳐오지 않으면 되는 줄로 알았는데 탐심은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8:18-23절을 봅니다. “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ㄱ)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어떤 관원이 바울만큼 율법에 있어서 자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왜 영생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을까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하여 질문하였을 것이고, 두 번째는 율법을 다 지켰지만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렇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전자로 보고자 합니다. 사람은 질문에도 정말 몰라서 질문하는 경우가 있지만 자기를 과시하기 위하여 질문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기에, 새로운 선생이 나타났다고 하니 자기의 의를 테스트 해보고 싶은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대답은 율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서 일부를 말씀하십니다. 앞의 네 계명은 말할 것도 없이 다 지킨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리고 나머지 부분에서 몇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 가지를 말씀합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그런 정도는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그때 주님께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부자인고로 근심하였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의 소유를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탐심이 아닙니까?
그러면 열 번째 계명이 탐내지 말라고 하셨는데 골로새서 말씀에 의하면 탐심이 곧 우상숭배이기에 문자적으로 하나님 외에 다른 형상물을 섬기지 않는다고 해서 우상숭배가 아닌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은 부족함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감사할 것 뿐 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9-14절을 봅니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바리새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이 말씀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왔는데 처음부터 무엇이 나오는 것입니까?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다른 인간들과 같지 않아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고 십일조를 한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는 것은 계명에서 정한 바가 아닌데도 이렇게 열심이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두 본문에서 바울사도가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부자 관원과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다 지켜서 흠이 없다고 하였을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더더구나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따라다니는 그 이단들은 마땅히 제거하여야 한다는 자기 의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바로 그런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무엇인지를 계시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하여 죄를 더욱 죄 되도록 드러내시면서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죄의 배후세력까지 다 처리하실 것입니다. 죄와 사망을 멸하여 버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왜 구원이 전적인 은혜로만 되는가를 역시 율법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그 방식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율법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율법이 죄를 드러내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는 것입니다(갈3:23-29). 율법에 의하여 처절하게 정죄 당한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저 주시는 은혜가 절대적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오직 의인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7:14-21 원함과 행함 2004. 2. 22.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2)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성경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인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나 성경을 본다고 해서 참 하나님과 인간의 실상을 아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받아야 참 하나님과 인간의 실상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종이에 글자로 기록되어 있어서 누구나 읽어 볼 수는 있지만, 성경을 통하여 참으로 인간이 어떠한 죄인인지를 알고, 인간 스스로에게는 어떤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음을 처절하게 인식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된다면 그것이 성령이 임한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선을 안다고 하고,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하지만 선을 안다고 하는 것도 잘못되어 있기에 행한다는 것도 당연히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다는 히브리인들을 통하여 처절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아서 자기들은 다 지킨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행동한 행동들이 결국 예수님을 죽이고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려고 달려갔던 모습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은 선과 악의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선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선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면 악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셔서 심판을 행하셔서 지옥에 보내셔도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에 선한 것입니다.
이러한 선악의 결정은 하나님만이 하시는데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을 아는 일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이때로부터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며 살게 되었지만 그렇게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며 사는 그 자체가 하나님보시기에 악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인간이 스스로 선을 알고 악을 안다고 하여도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스스로 악을 자제하고 선을 신장시키는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성경에서 어떻게 증거 하고 있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4:4-8절입니다.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2)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자 가인이 분하여 안색이 변한 것입니다. 이것이 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물을 받으시고 받지 않으시고는 받으시는 분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대하여 왜 나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느냐는 것이 선을 행지 아니하는 모습인데, 이것이 죄가 문에 엎드리는 것이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죄의 소원이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하셨지만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인 것입니다. 죄를 다스릴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죄가 문에 도사리며 가인을 지배하려고 하는데 그 죄의 지배를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이후에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받습니다. 그 율법은 거룩하고 선한 것입니다.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면 의롭게 됩니다. 그러나 죄의 세력이 율법으로 기회를 타서 각양 탐심을 일으켜서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이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이라고 로마서 7:13절에서 보았습니다. 이런 죄인 됨을 예레미야 13: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이 정도로 인간이 스스로 선을 행하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율법이 아닌 새 언약을 예언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새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악함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악한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죄의 세력이 얼마나 교묘한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대항하게도 하고, 전혀 관심 없게 만들기도 하고, 율법을 다 지켰으니 나는 의롭다는 착각에 빠지게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사도입니다.
얼마나 율법에 열심이 특별하였는지 빌립보서 3:5-6절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율법에 대한 열심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는 바울이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 믿는 자를 죽였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열심히 지켰다는 사람의 결론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죄 아래 팔렸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14-17절입니다. 율법이 신령한데 우리가 죄 아래 팔렸다는 것입니다. 죄 아래 팔려 있는 상태에서 율법이 투입되니 그들의 상태가 어떤지 드러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선한 것 인줄 알고 열심히 지켰는데 그렇게 행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율법을 다 외울 정도로 엄격한 바리새파이며 그 중에서도 열심인 바울사도가 무식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무식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무지한 것을 말합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한 것인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자기로서는 선한 일을 한다고 하였는데 그러나 선한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미워하는 것을 행한 것입니다. 죄가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18-19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육신 안에 선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은 선한 것을 알아도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을 안다고 해서 선이 아니라 선을 행할 능력이 있어 선한 것입니다. 선을 알아도 선을 행하기는커녕 오히려 악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 아래 율법아래 있는 인간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 이것을 알았을까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만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선을 알고, 선을 행할 원함이 있다고 하여도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원함은 있으나 행함이 없다면 이것은 선입니까? 악입니까? 야고보서 4:17절을 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선이 무엇인지 가장 가까운 본문의 말씀이 앞뒤로 보면 두 가지가 나옵니다.
4:13-16절에서 들으라고 하면서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 도시에 가서 일년 동안 유하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내일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잠시 보이는 안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뜻이면 살기도하고 이것도 저것도 할 것이라고 하여야 하는데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무엇을 자랑하여 살고 있습니까? 자기 인생의 계획과 꿈과 포부를 이야기 하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람과 자랑을 삼지 않습니까? 이러한 계획은 장사하여 이익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도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계획을 하면서 나는 안개라고 생각합니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인줄 모르고 허탄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선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안개임을 알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선인데 그렇지 못하면 악하다는 것입니다.
선을 알고도 행지 아니하면 악하다는 말씀의 바로 뒷부분인 5:1-6절입니다. 역시 들으라고 하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재물을 쌓은 것이 저주라고 합니다.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고 옳은 자를 정죄하고 죽였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말세에 재물을 쌓는 것이 저주인데 이것을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과연 이렇게 행하고 있습니까? 알고는 있지만 행함이 없는 것입니다. 원함은 있지만 행함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자기는 행함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행함의 비교를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성경의 말씀과 비교하시고, 예수님과 비교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의 행함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알고 입을 닫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율법의 기능입니다.
로마서 3:19-20절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모든 입을 막아 버립니다. 심판아래 가두어 버립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로마서 11: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그리고 선을 행한다는 것도 세상의 윤리나 도덕적인 기준에서의 선을 행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행함의 이야기를 두 사람의 경우를 드는데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입니다. 이들의 믿음의 결단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백세에 낳은 아들이삭을 번제로 불살라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선한 것입니까? 옳은 일입니까?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라합은 기생입니다. 몸을 파는 기생이 무슨 선한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정탐꾼을 숨겨준 것입니다. 자기의 조국을 배신한 행위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을 행한다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선하다 악하다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 선한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부닥치면서도 우리가 하는 일을 악이라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마치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과 같은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이라면 자신의 죄와 악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신의 죄와 악함의 처절함을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늘 자기 잘난 맛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을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일인 것입니다(요6:29).
오늘 예수를 믿는다고 여기에 모였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에 대하여 얼마나 실망을 하셨습니까? 자기에 대하여 어느 정도로 처절하게 좌절하였습니까? 원함은 있지만 행할 능력이 없는 모습을 절감하십니까? 시편 65편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1)사하시리이다” 죄악이 나보다 힘이 셉니다. 그래서 죄악이 나를 이겼습니다. 그러므로 주님만이 죄과를 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오히려 죄의 법이 나를 끌어오는 곤고한 모습을 보게 됩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탄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가 나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의 행함에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함에도 별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오직 구원하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7:21-25 탄식과 감사 2004. 2. 29.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는 이 탄식이 중생한 자에게 있는가? 중생하지 못한 자에 있는가 하는 문제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기의 문제인가 하는 것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있을 때의 일인가? 아니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의 일인가? 신앙의 초보일 때의 문제인가, 성숙하고 나서의 문제인가 하는 것들입니다.
우선 로마서 6장과 7장을 로마서 전체에서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까? 로마서 1장부터 5장까지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증거 한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구원의 능력이란 오직 복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오직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증거하면서 인간의 죄를 동시에 말하였습니다.
로마서 5:20-21절을 봅니다.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영생에 이르는 길이란 인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인 되어 버리고,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의인이 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범죄를 더하게 하여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율법도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반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죄를 더 많이 지어도 되겠구나, 하는 반발에 대하여 6장에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다시 그 가운데 살겠는가 하는 것이 6장의 내용이라면 7장은 율법의 기능과 한계에 대하여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선하고 거룩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율법에 죄가 틈을 타서는 오히려 각양 탐심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명은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이라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율법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을 때에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율법을 다 지켰기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부자 관원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는 것처럼 자기를 의롭다고 여긴 사람입니다. 성전에서 자기는 의롭다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어기는 예수 믿는다는 제자들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잡아 죽이기 위하여 달려가든 사람이었습니다. 이때 바울사도의 의에 대한 관점에 율법을 지키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는 그 당당한 자부심, 그 율법을 허는 자들에 대하여 추호도 용서하지 아니 하리는 충성심으로 달려가던 그에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빛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9:1-9절을 봅니다.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기에 자신이 빛이라고 생각하면서 달려가던 그 모습이 캄캄한 어두움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에 대하여 밝히 알고 흠이 없던 자가 율법이 증거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이자 땅에 엎드려지고 눈이 멀어져 버린 것입니다. 3일 동안 보지도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면서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간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를 이단의 괴수라고 여기고 그의 제자들을 잡으려고 달려가던 사울이 부활하신 주님의 빛을 받고나자 율법에 대하여 완전히 새롭게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율법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를 새롭게 보게 되는 것이 성령이 임한 사도들에게서도 동일한 관점이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이나 절기나 성전이나 제사나 무엇이거나 간에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하신다는 요한복음 5:39절의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경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문에 속한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기자고 하는 것이 얼마나 곤고하고 탄식이 나오는 것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탄식이 나오는 것이 중생하여야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탄식이 아니라 율법 지킴에 대한 자랑과 당당한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이제 한 법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21-24절을 봅니다.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알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선한 것이기에 그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기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선한 뜻을 이루고자 하는 원함이 있으나 그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고 합니다.
이러한 탄식이 중생 이전입니까? 이후입니까? 저는 이후라고 봅니다. 그러면 중생하지 아니한 자들도 이러한 탄식이 있지 아니한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죄를 이야기 하고 죄의 값으로 죽는다는 말을 합니다. 그 유명하였던 성철스님도 자기 죄로 지옥에 간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죄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죄 개념이 아니라 세상의 윤리 도덕적인 개념의 죄인 것입니다.
그러한 죄란 결국 자기완성을 위한 기준인 것입니다. 그 기준을 설정하여 죄다, 아니다 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인간 중심의 선악의 결정자체를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 죄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회개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탄식이라도 어떤 탄식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마음의 법으로는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또 다른 지체가 죄의 법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을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사망의 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몸은 죽을 몸입니다. 이 죽을 몸이 생명에게 완전히 삼키게 되는 그 부활의 순간에 이러한 탄식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로서 탄식이 없었는데 주의 영이 임함으로 율법지킴의 한계, 종교의 한계를 보게 되고 그것은 탄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탄식에만 머무르고만 있지 않습니다.
25절을 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 감사가 탄식 중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고, 갈등을 하고 있고, 탄식이 있지만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바리새인의 감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는 죄인들과 달리 의롭기에 자신의 의로움을 인하여 감사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자랑들이 다 배설물로 여기고 해로 여기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탄식하고 있는 모습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이 사망의 몸에서 자신을 충분하고 완전하게 건지실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탄식에서 갑자가 분위기가 감사로 바뀌는 것에 대하여 시편에서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시편에서 탄원을 하다가 갑자기 찬송을 하는데 왜 갑자기 찬송이 나오는지 시편 안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 연구해보고서 몇 가지를 제시를 한 것이 있습니다. 탄식에서 갑자기 감사와 찬양이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구원의 신탁을 선포하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는 자신의 탄식이 실제적으로 해결이 되어서 감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심하고 탄식하는 일들을 가지고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 중에 또는 찬송이나 기도 중에 그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근심과 탄식의 문제들이 그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감사하고 찬송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죽도록 고민한 문제가 말씀 한 구절로 인하여 봄눈 녹듯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어찌 감사하고 찬양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로마서 7장은 율법의 기능과 그 한계를 깨닫고 나니 그 안에서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서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탄식자체가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찌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나 그 탄식은 탄식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감사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믿을 때만이 아니라 오히려 가면 갈수록 더욱더 세밀하여지고 난이도가 높아질 것입니다. 그래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는 그 깊이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처음에 주님을 만났을 때만의 탄식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몸에서 건지실 주님을 더욱 탄식하며 기다리는 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고린도후서 5:1-5절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우리의 죽을 몸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기까지 탄식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보증을 성령을 주셨기에 성령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롬8:26). 로마서 8:22-23절입니다.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몸의 구속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이 있는 한 우리 안에서 갈등은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로마서 8:3절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고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 어찌 찬양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로마서 8:1-4 정죄함 없음 2004. 3. 7.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1)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세상에서 가장 복되고 기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 소식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천하를 주고도 살 수가 없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과연 기쁘고 감사한 소식이 됩니까? 되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처절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는 다른 사람들보다 무언가 나은 것이 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한다든가, 나는 너보다 낫다는 그런 마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이 전적으로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자주 인용하는 말이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런데 허물과 죄로 죽어 있어서 본질상 진노를 받아야 마땅한 그 진노의 상태, 그 정죄의 상태가 어떤 것입니까?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흉악한 범죄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그러한 흉악한 범죄만 허물과 죄로 죽어 있고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렇게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가 하면서 설교시간에 그러한 범죄를 지적하면서 고함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허물과 죄로 죽어 있다는 것은 세상의 흉악한 범죄로 말하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고상하고 가장 거룩하고 가장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죽임 당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허물과 죄로 죽어있는 인간의 처참한 현실입니다. 종교(宗敎)라는 글자가 가장 고상하고 높은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가르침이 종교인데 그중에서도 유대교 같은 종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고 그 놀라운 체험을 한 유대인들의 최종적인 모습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질렀던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거룩하다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주도하에 일어난 일입니다.
‘멜 깁슨’ 이라는 영화배우가 감독이 되어 만든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12시간의 수난 장면을 영화에 아주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고 하는데 유대인들이 이 영화상영에 대하여 반대한다고 하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인식을 심어주므로 종교간 갈등을 일으키고 반유대주의가 확산될 것을 우려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 보도를 보고서 새벽기도 본문인 데살로니가 전서를 보는데 유대인들에 대한 고발이 나오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4-16절입니다. “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하면서 유대인들의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와 선지자를 죽이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대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까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사도가 고발하고 있는 이 유대인들 속에 누가 들어 있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인간의 처절한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유대인의 나라에서 그것도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바울의 절망감과 탄식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렇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하던 그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를 알고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탄식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무엇이겠습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을 때에 백성들은 두려워서 감히 나아가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은 항상 늘 하나님의 거역하였다는 것이 구약의 증거입니다. 이사야를 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그의 탄식이 무엇이었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입술이 부정한 백성가운데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웠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어떠하였습니까? 자신은 죄악 중에 잉태하여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았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 앞에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계시를 받으면서도 그 영광의 주님을 보고서 엎드려져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몇 사람의 예를 들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연약과 부족과 죄인 됨을 알았습니다. 이 순간에 다른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낫다는 생각이 들 틈이 없는 것입니다. 큰일 났다! 이제는 죽었다! 차라리 나에게서 떠나주소서!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된 인간의 실상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상이 어느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처참한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최고의 위로와 기쁨과 감사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에 제단 숯불을 대시면서 내 죄가 사하여 졌다는 선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하여 정죄함이 없다는 소식보다 더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실상에 대하여 들추어내기를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그렇게 무시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도 인간의 순수성이 있지 않는가 하면서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최선을 다하는 것은 봐주어야 하지 않는가 합니다. 어떻게 90점과 10점을 같이 볼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항변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방금 성경의 인물들이 순수하지 않았겠습니까? 최선을 다하지 않았겠습니까? 누구보다 순수하고 누구보다 열심을 내고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하는 말이 화로다 나여 망하였도다! 이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로마서 말씀을 보면서 이러한 탄식이 나왔습니까? 인간의 죄가 어떠한지를 보았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하니 그러면 죄를 마음껏 지어도 되겠네 하는 반발까지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로마서 6장과 7장을 다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다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를 율법이 가입함으로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죄 아래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탈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선하거나 최선을 다하거나 해서 의롭다 함을 받을 인간이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3:19절을 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모든 입을 막아 버리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건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함께 영원하기를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 심판과 그 정죄가 무엇입니까?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지옥 불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불속에 고통을 당하지만 구더기도 죽지 아니하고 불로 소금 치듯 하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지옥의 고통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단지 이 땅에서 살 때만 벌 받지 않고 살다가 죽으면 그만 이라는 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죄는 사람의 죽음으로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으면 다시 살려내셔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죄입니다. 죄가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죄라도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 사망이란 단지 죽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의 형벌인 둘째 사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3:19-27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인 것입니다. 이것을 받은 자의 행복을 아시겠습니까? 로마서 4:1-8절입니다. “봉독”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무엇을 얻었다는 것입니까?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면 무엇아래 있는 것입니까? 그 사람이 세상의 어떤 영광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정죄아래 심판아래 있기에 영원한 지옥형벌이 최종 정죄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우리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일한 것이 없이 그저 받아야만 할 정도로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로마서 8:1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제 이 소식이 정말 기쁜 소식으로 들리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왜 예수 그리스도안에 정죄함이 없는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정죄가 없다는 기쁜 소식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는가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 자랑이나 자기 구원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의 희생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지기 때문입니다. 8:2절입니다. “이는” 즉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로마서를 지금까지 보면서 계속 다루어 왔습니다. 인간은 결코 독립적이지 못하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죄와 사망이 왕 노릇을 하든지 은혜와 생명이 왕 노릇하든지 둘 중에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죄와 사망이 왕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빠져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죄와 사망의 왕을 이기신 분이 와야 해방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 죄와 사망을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셔서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8:3절입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 생명을 얻는 길인데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리게 될 율법이 오히려 사망의 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연약, 우리의 죄가 율법이 투입되고 나니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인간도 율법을 지켜서 즉 자기 선행이나 자기 의로운 행위로 인하여 구원 얻을 자가 없고 오직 정죄만이 기다리고 있는 현실에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그 하나님의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그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가 무엇입니까? 다 지키지 못하면 정죄입니다. 다 지키면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의 요구 두 가지 다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정죄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다 이루셨기에 의를 전가 해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이 길만이 하나님이 하신 정죄함이 없는 길입니다. 다른 정죄함을 받지 아니할 길은 없습니다.
이로 인하여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면 하나님도 의로우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영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돌려지는 것입니다. 이 일에 우리가 긍휼의 그릇으로 택함을 입은 것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과거도 현재도 장래도 정죄가 없습니다. 환난이라 핍박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나 죽음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가 아닙니다. 그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정죄함 없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8:5-8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 2004. 3. 14.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결국 육신의 일로 연결이 됩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행한 모든 육신의 일들이 결국은 사망으로 결론이 납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영의 일로 연결이 되고 결국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그 결국이 사망과 생명입니다. 그러면 사망과 생명으로 결론이 나는 이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기도할 때 하나님 세상의 일만 하다가 오늘 교회에 왔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의 일을 육신의 일로 보고 교회의 일을 영의 일로 보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먹고 살기 바쁘게 산 것이 육신의 일이고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은 영의 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와서 행하는 일도 얼마든지 육신의 일과 육신의 생각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두 곳만 보겠습니다.
골로새서 3:1절에서 6절을 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1)진노가 임하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합니다. 교회 와서도 탐심을 가지고 땅의 것을 찾으면 그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왔다고 해서 안심할 일이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곧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 위엣 것을 찾는 다는 것은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들은 위엣 것을 찾으라는 권면이 은혜로 들리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15-17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서 육신의 정욕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탐심을 따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구하는 것이라면 교회 안에서 육신의 생각과 육신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일은 육신의 일이고 교회서 하는 일은 영적인 일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육신이 되었다, 또는 육체가 되었다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육신의 생각과 일이란 사망에 이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기에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하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육신에 속한 자로서는 그 어떤 생각과 행위로도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사망에 이르는 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인간이 이렇게 되었습니까? 아담의 범죄이후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그래서 생령이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숨길이 들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 함으로 인하여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처럼 죽게 된 것입니다. 그 죽음이 바로 육신이 된 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빠르든 늦든 간에 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신이라는 것은 이제 땅의 형상인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신에 속한 인생의 실상입니다. 이 육신에 속하였다는 것은 아담아래 속한 것이며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하나님을 거역하여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원수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왕 노릇하는 세상에서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있고 자신의 생각과 행위가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3-4절입니다.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가려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범죄 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죽음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담의 형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는 것은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데 마귀가 하는 일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실상을 모르기에 마귀에게 속고 있기에 인간들을 자기들의 생각과 행위를 가지고 무엇이나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을 시키고, 과학을 발전시키고 최종적으로 사망조차 정복하고자 하는 야심에 찬 생각을 행위에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나 인간의 욕망이 사람이 사는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과 일이란 것이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일이라고 해서 돈만 사랑하고 세상만 사랑하고 악하고 방탕한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상하고 우아한 일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문학과 예술을 접하면서 감동도 받고 눈물도 흘립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인간의 최고의 가르침이 종교입니다. 그러한 종교에서 최고의 가르침인 절제와 금욕과 율법의 행함과 지킴조차 육신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같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 온 니고데모는 율법의 선생입니다. 율법을 얼마나 잘 알면 율법의 선생이었겠습니까? 유대인들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정과 회당에서 철저한 율법의 교육을 받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의 기본율법의 실력이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그들의 선생이라면 얼마나 특별한 율법의 선생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니고데모를 향하여 예수님의 말씀은 너는 영으로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육신과 영의 차이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건널 수 없는 심연인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 먹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한 인간의 한계요 육신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일이요. 육신에 속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일이란 하나님 없이 하나님처럼 살고자하는 모든 인간의 시도들이 다 육신의 일입니다. 이러한 육신의 일이란 곧 사람의 일이며 사람의 일이란 곧 마귀의 일입니다. 사람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하는 일조차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고 믿지 못하면 마귀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1-24절입니다.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제자가 스승이 죽는다는 자리에 함께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의리 있고 멋있는 일입니까?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을 이해 못하는 베드로에게 사단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인하여 복이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백조차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의리 있게, 자기가 대신 죽으려는 엄청난 각오에 대하여 사람이의 일이면 사단이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사람들은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 애먹이는 자식을 십자가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는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죽기까지 배신하지 않겠다는 그 결단과 결심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셔야 베드로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막고 있으니 사단아 물러가라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합니다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인하지 않으셨기에 다시 찾아오시고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영의 생각이며 영의 일인 것입니다.
로마서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육신의 생각과 일은 사망에 이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과 일은 생명과 평안에 이르게 합니다. 육신의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이 하는 일은 모두가 죄가 됩니다.
그러면 육신의 생각과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하신 일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만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능성과 능력만을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이것이 아주 당연한 육신의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나서도 계속하여 이러한 유혹과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8:1절을 다시 봅니다.
로마서 8:1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정죄가 없습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의 일이란 자기를 믿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의 일입니다. 자기 자신의 부족과 무능을 아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성령이 임하여야만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성령이 임하여 일어나는 영의 일이란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육신의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생각이 늘 나지만 그것이 육신의 생각인줄 알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생명이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참된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을 하지 않고 영의 생각을 한다는 것은 사람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우리가 영의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참으로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 영의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6:29절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질문에 대하여 이런 말씀이 주어졌습니까? 오병이어 기적이후에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아니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양식은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면서 질문하였습니다. 그 대답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기의 능력을 믿고 사는 것이 육신의 생각이며 그 결국이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일이란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그것이 생명과 평안입니다. 이 믿음조차 은혜의 선물이기에 생명과 평안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8:9-11 그리스도의 사람 2004. 3. 21.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2)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말씀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육신의 일이 나오고 영의 생각으로 영의 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의 생각과 일이 세상을 사랑하고 음란하고 방탕하여 누가 보아도 죄라고 하는 그런 것만이 육신의 생각과 일이 아니라 가장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숭고한 종교적인 모습에서도 얼마든지 육신의 생각과 일이 있다는 것을 니고데모와 베드로를 통하여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무엇으로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요일 날 교회를 간다, 좀더 열심인 사람은 수요일과 금요일 새벽기도도 간다는 것으로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연보도 하고 많은 봉사를 한다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9절을 봅니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는지 영에 있는지의 기준이 무엇에 달린 것입니까?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 그 사람에게 있으면 영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두 가지를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것과 이 영이 사람의 행위로 선택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을 왜 함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같은 영입니까? 다른 영입니까?
사도행전 2:33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이 말씀은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사람들이 술에 취하였다고 하는 말에 대한 베드로의 변론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세에 부어주시기로 약속하신 영을 보내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요엘 선지자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여서 이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그 높아지신 자리에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이 아버지로부터 받아서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영입니다.
그러면 이 영,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 것을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되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온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로마서를 통하여 결코 인간의 육신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그러나 그 영접이 혈통이나 육신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아니하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과 일이란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육신에 속하여 사망을 선택한 결과 사망으로 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태어난 것이기에 내가 선택하지 아니하였는데 육신에 속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육신에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육이 영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성경에서 증거 하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여전히 인간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라고 부추깁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너도 스스로 신이 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신의 능력이 인간 속에 잠재되어 있는데 그 능력을 개발만하면 얼마든지 위대한 신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그 최초의 유혹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서 가장 하나님의 위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인간이 스스로 예수님을 모셔서 영을 소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육신에 속한 인간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기에 자신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영이 필요하다는 그 인식조차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과 영 사이에서 하나는 버리고 하는, 선택하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정하여 놓고서 그 사람을 본받으라고 해서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하고 금식한다고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창세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때가 되어 주의 영이 부어짐으로 인하여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영이 거하는지 아니하는지 정말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로마서 8:15절에서 보시면 양자의 영, 즉 영이 임하시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여기서 그냥 하나님 아버지하고서 부른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영이 임하여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부른 그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입니까?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매다시는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부를 때에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주시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아버지, 그 거룩히 여기심을 위한 아버지인 것입니다.
한 곳을 더 봅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자는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은 나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나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주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살리고 죽이는 것이 나의 손에 있지 아니합니다. 일어서고 넘어짐이 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이 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주면 먹고 주지 않으면 굶고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무익한 종이라고 하는 자가 예수님을 주로 믿는 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또다시 어떤 마음이 듭니까? 그래 이제부터 내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지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무익한 종이라고 해야지 그러면 영의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자기가 주체적으로 무엇을 행함으로 영의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육신에 속한 생각이며 사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영에 속한 사람이란 무엇입니까?
10절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몸은 장차 죽을 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시면 지금 몸이 죄로 인하여 죽은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육신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위가 죽은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너는 죽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는 그 생각이 사람의 일이고 마귀의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면 더 이상 자신의 행위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을 인하여 산 것입니다. 그러면 영으로 산 자는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성전 미문 입구에서 날 때부터 지체 장애가 있어 구걸하는 사람을 일으키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일어나리라는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그저 돈이나 한 푼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향하여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가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니 벌떡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여 봅니다. 그때 베드로의 말이 왜 우리를 주목하는가 하면서 자신들의 경건이나 권능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일어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은 죽은 자요 영이 임하여 산 자의 모습입니다. 바울의 경우는 자기가 살았다고 여길 때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고 나니 자신은 죽고 주님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었다는 것은 자기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공식으로 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 안에 죽음과 삶이 공존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방금 죽었다고 하고서는 또 육체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성령이 임하고 난 이후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자기가 살아 있습니다. 믿는 것도 자기가 믿는다고 하고, 선택도 자기가 한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임하고 나면 자기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죽음의 일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죽은 자로 여기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4-6절을 봅니다.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났느니라 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5절에서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좋은 일이 생기면 그 만족스러운 결과의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습니다. 자신의 정성과 헌신으로 무엇이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이 임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로 온 것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리시는 것입니까?
11절을 봅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 살리신분이 그 영으로 인하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부활도 우리의 육신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의 노력으로 부활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은 것에서는 죽은 것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야 그 영으로 죽을 몸도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며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영이 임함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자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기대하지 않기에 실망도 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에게 무슨 실망할 것이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자이기에 세상의 성공과 실패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성공하였다고 폼 잡을 일도 아니고 실패 하였다고 주눅들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만족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된 것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잘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잘못해서 저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잘해서 복을 받고 예수님께서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저주를 받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것은 이제 자기를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로마서 8:12-17 영의 인도 2004. 3. 28.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하루 죽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죽는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어떻게 하든 자기를 살려보려고 애를 쓰게 마련입니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은 지금처럼 살고 싶지 않고 자기 원하는 대로 멋있게 살고 싶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살고 싶어 한다고 해도 죽음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살릴 수가 없는 이 한계를 로마서 6:6절에서는 '죄의 몸'으로 말하고, 7:24절에서는 '사망의 몸'이라고 하고, 8:11절에서는 '죽을 몸'으로 말합니다. 이런 몸에서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리는 것입니까?
로마서 8:10-11절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우리의 육체의 일로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이 임하여 그 영으로 인하여 살리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12절을 봅니다. “그러므로”는 바로 앞의 말씀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를 형제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빚진 자란 전에는 죄의 종이고 죄가 왕 노릇하는 자였으나 이제는 그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에 더 이상 죄에게 빚진 자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번역에서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도록, 육신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육신에 빚은 진 사람이 아니기에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의 빚을 다 해결하신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한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도 몸을 가지고 있기에 몸의 행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몸의 행실을 따라 살지 말고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합니다.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까? 몸의 행실, 육체의 일이 무엇입니까?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만 육신의 생각과 일이란 것이 다만 악하고 더럽고 추하고 흉측한 일들만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을 금욕적으로 피하고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를 써 왔는지 성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일생을 보면 그야 말로 초인적인 금욕생활을 해 왔습니다. 땅과 떨어지기 위하여 높은 곳으로 찾아 가거나, 사막으로 들어가서 수도원 생활을 하였습니다. 기둥을 세워서 그 위에 올라가서 수도를 하는 주상성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더 높은 곳에 더 세우는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 금욕적인 고행을 한다고 해서 육체 좇는 것을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육체의 일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2:20-23절입니다.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금욕적인 모습이 지혜로워 보이지만 그러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육체를 좇지 않고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까?
골로새서 2:8-19절을 봅니다.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1)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철학과 사람의 유전과 가르침이나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문에 쓴 증서 즉 율법으로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길입니다. 우리 몸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 아니하면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좇아 사는가 아니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서 사는가가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면 육체를 따라 살면 틀림없이 자기의 자랑이 나오게 됩니다. 헛된 영광을 추구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겸손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자기 속으로도 얼마든지 멋있는 자기 모습에 희열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오지 않고 그러한 육신의 일이 나올까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5절입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1)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사도가 두렵고 떤 이유는 자신의 전도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게 하려고 두렵고 떨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알기로 하였다는 것은 바울의 전도와 수고와 희생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인도를 받는 자는 틀림없이 자기를 부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의 인도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로마서 8:1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결국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 된 증거입니다.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사는 것입니다. 언약의 완성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고 마귀의 자식이기에 인간에게서 스스로의 행함이나 능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으로 인하여 양자로 편입되는 길 뿐입니다. 이것이 영으로 인도받는 길입니다.
로마서 8:15-16절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아버지에게로 인도를 받고 사는 것입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보증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보증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이루어 낼 수 있는 일이라면 성령이 임하시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보증이 되시고 친히 간섭하시고 인도하셔서 결국은 영광의 아들의 자리에 이르게 하시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발이 일어납니다. 성령이 다 알아서 하시니 나는 가만히 있어도 되겠구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사람은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후사가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17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후사가 되었습니다.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상속자이기에 그대로 두시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환경과 사건을 통하여 아들의 형상을 닮도록 조치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하심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받지 않아도 될 고난이 성도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인 이곳이 취미단체로 모인 것이라면 고난이란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분위기 좋게 사람들 각자의 기분만 맞추어 주면 될 것입니다. 만약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취미단체를 찾아가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양자의 영을 받았다면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행실대로 살 수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나는 일마다 사건마다 자기가 죽지 못한 모습이 드러나기에 더욱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날마다 고난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후서 1:8-9절을 봅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주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자는 자신을 의뢰하지 아니하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도록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정도로 완벽한 인도를 받고 살기에 양자의 영을 받은 성도는 오히려 기뻐할 수가 있는 것이고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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