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서신

[스크랩] 로마서 강해 2

공 상희 2009. 5. 6. 12:52

 

 

 

 

 

 

로마서 강해 2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目    次

44. 고난과 영광 
45. 기다림 
46. 연약함을 도우심 
47. 감히 누가! 
48. 끊을 수 없는 사랑 
49. 낯선 사랑 
50. 바울의 큰 근심 
51. 약속의 자녀 
52. 인간행위의 끝 
53. 진흙과 토기장이 
54. 부르신 자 
55. 남은 자 
56. 걸림돌 
57.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58. 믿음의 말씀 
59.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60. 누가 믿었나이까? 
61. 은혜로 남은 자 
62. 구하는 그것 
63. 나는 누구인가? 
64. 접붙임 
65. 비밀 
66. 깊도다! 
67. 영적 예배 
68. 하나님의 뜻 
69. 믿음의 분량대로 
70. 은사 공동체 
71. 은사의 특징 
72. 맡기라 
73. 권세 
74. 사랑의 빚 
75. 자다가 깰 때
76. 받아줌 
77. 사나 죽으나 
78. 자유와 사랑 
79. 믿음으로 하지 않는 죄 
80. 강한 자와 약한 자 
81. 수종자 
82. 자랑하는 것 
83. 충만한 축복 
84. 바울의 기도요청 
85. 영접과 문안 
86. 떠나라 
87. 복음으로 

 

 

 

 

 

로마서 8:18-25  고난과 영광  2004. 4. 7.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봄이 되어 꽃이 피고 새싹이 돋아납니다. 사람들이 벚꽃놀이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겨울인 사람은 봄이 오는 것도 싫고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것도 다 싫은 것입니다. 그저 꽁꽁 얼어붙은 한 겨울로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무심하게도 봄은 변함없이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의 뜻과 포부들이 다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중심으로 돌아가기를 마음 속 깊이 바라고 있습니다. 고난은 피하고 영광은 취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하고 방비한다고 해도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 짜증이나 원망, 불평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도대체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 되었고 그로 인하여 창조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리스도로 통일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내 중심이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부정하고 자기중심으로 살고 있는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 중에 있는 것입니다.

 

 

 

 

시편 90:1-11절까지 봅니다.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1)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인생의 허무한데 그 허무한 인생의 일평생이 왜 수고와 슬픔뿐입니까? 주님의 진노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주를 두려워하며 주의 진노를 알겠습니까? 이러한 주님의 진노가 어디에 쏟아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라면 자신의 고생에 대하여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고생을 하느냐는 항변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항의조차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며, 또한 자기 의가 그 안에 가득하게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로마서 8:1절에서 말씀하였는데 왜 이렇게 고생이 심한 것입니까? 우리는 그동안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 왔습니다. 예수 믿으면 정말 만사가 형통합니다. 그런데 그 만사형통을 역시 자기중심으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나에게 불편하고 고생스러운 것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내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지리라는 것을 만사형통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만사형통은 없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가는 것을 형통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감옥에 가는 것이 형통한 일입니까? 지금은 고생하나 나중에 애굽에 총리가 되기에 고진감래(苦盡甘來)라서 형통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에 형통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시기 위하여 고난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아서 예수님께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 분을 우리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 삶의 자취가 우리에게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애의 자취와 흔적이 나오고야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부터 무엇을 거부하고 시작하였습니까? 빵 문제, 종교적인 기적, 세상의 영광으로 유혹하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면서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께서 물리치신 것을 구하고 있다면 출발도 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마귀의 유혹에 속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공중의 새도 깃들 집이 있고 여우도 자기 굴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벌거벗겨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손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8:33-38절을 봅니다.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종들이 싸워서 유대인들에게 넘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원하는 이 세상의 나라를 주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지르지 않고 그들의 임금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보고서 군중들이 억지고 예수님을 잡아서 그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피하여 가신 것입니다. 세상의 떡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진리를 증거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 진리란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물러가고 다시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을 말한다고 하는데 얼마나 많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주시는 예수님으로 알고 믿고 있습니까? 만약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이런 저런 조건을 지키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받는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주시지 않았기에 세상에서 미움을 받았고 이런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8-24절을 봅니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내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택하였다면 세상이 나를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잘못하여 미움을 받는 것이라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한 것도 없는데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성도는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에게 고난이 임하는 것은 이런 고난을 주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고난이 임하지 아니하면 자꾸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8-9절을 봅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지난주 결론으로 본 말씀입니다만 주를 의뢰하기 위하여 고난이 임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봅니다. 18절입니다. 성도에게 나타나는 이러한 고난을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고 있는 바가 이 영광의 날을 바라고 탄식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바라는 것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만물이 다 탄식하는데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처음 열매가 나오는 것을 보니 다음 열매도 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부활의 영광의 날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이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니기에 고난을 통하여 보이는 소망을 흔들어 버리고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을 붙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믿지 아니하는 자보다 훨씬 고난이 많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삶의 목적과 방향이 눈에 보이는 세상, 장차 썩어지고 망할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그대로 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 자들이기에 눈에 보이는 소망을 따라가지 못하도록 환난이 닥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6-18절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성도에게 환난과 고난이 오는 것은 영원한 영광에 참여시키시기 위한 조치입니다. 그 영광이 얼마나 좋았으면 환난을 통하여 세상의 것들을 버리게 하시고 그 영광에 참여시키겠습니까? 그러므로 양자의 영을 받은 자라면 빈틈없이 완벽하게 아들의 고난에 참여시켜 그 영광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영광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에 이르시게 하시는 그 은혜의 손길이 고난이라면 고난이 영광을 감추고 있는 보자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감사이고, 또한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이 담대하여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8:18-25  기다림  2004. 4. 7.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오늘 우리 자신이 성도인지 아닌지를 무엇을 구별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가를 보면 됩니다. 세상이나 세상이 속한 것을 이루기 위하여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은 다 허무한 것이며 썩어질 것임을 알고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고 더렵혀지지 아니하는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며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신자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기다림에 대하여 오늘 본문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보고자 합니다.

 

 

 

 

19절에서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어 있는 자들이 함께 부활의 영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날을 피조물이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1절에서 그 바라는 것이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이 허무한데 굴복되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인 것입니다. 이 진노 받은 세상에서 구별된 성도라면 반드시 탄식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영원하다고 늘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을 얻으려면 자기에게 절하라고 예수님까지 유혹한 마귀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기에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분이 홈페이지에 질문을 하였는데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과 이 돌에 떨어지면 깨어질 것이요, 이 돌이 그 사람에게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내어 흩으리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물었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118:22절에서 예언된 말씀의 성취입니다. 예수님께서 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악한 포도원의 품꾼들이 종들을 때리고 죽인 정도가 아니라 주인의 아들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진노를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건축자들이란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이지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인생을 건축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모아서 자기 꿈, 자아의 실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예수도 필요할 것 같아서 주워 보았더니 도저히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주님이신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찾고 구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23절을 봅니다. 모든 피조물뿐만 아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들도 속으로 탄식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왜 탄식을 할까요? 이 세상을 살기에 지독히도 어울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눈에 보이는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데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몸의 구속, 부활의 영광을 고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여기서 첫 열매는 나왔는데 두 번째, 세 번째의 열매가 보이지 않습니다. 간혹이라도 죽었다가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믿을 만 하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기에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으로 처음 열매가 나왔으니 앞으로 주님 재림하시면 다 부활하게 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서 봉선화와 채송화 꽃씨를 화분에 심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싹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잘못 심은 것이 아니냐고 누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씨앗을 파내어 보여야 합니까? 기다리는 것입니다. 며칠 더 기다리니 처음 싹이 나오는 것입니다. 처음 싹이 나오는 것을 보니 다음 싹들도 나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곧 싹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만 일어났고 아직 두 번째 열매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니 어떻게 믿고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24-25절을 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여기서 보이는 소망은 우리의 소망의 대상에서 제외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무엇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절에 가든지 교회를 가든지 거저 보이는 것을 구하고 찾고 있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의 내용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을 어떻게 기다리는 것입니까?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기다리라고 하는데 언제까지 기다리라고 하는 것입니까? 기한을 정하여 주시면 되실 텐데 기다리라고 하시고서는 언제 오신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런 약속을 기다리겠습니까? 말세의 특징 중의 하나가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조급함입니다. 도저히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지루하면 당장 채널을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하시고서는 무려 2천년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기다리겠습니까?

 

 

 

 

베드로후서 3:1-15절 상반절까지입니다. “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3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1)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주의 오래 참으심이 오히려 우리의 구원이 된 것입니다. 무려 2천년을 참으셨기에 오늘 우리가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일어나서 종말이 어디에 있느냐고 조롱할 지라도 믿음으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면서 기다릴까요? 주의 죽으심을 주님 오실 때까지 기억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의 부활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에는 심판의 부활이 있고 생명의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예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시는 날까지 우리가 모여서 무엇을 기억하고 기념하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1:23-26절입니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1)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주님 오시는 날까지 주님의 살과 피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찢겨진 살이 우리의 참된 양식이며, 주님의 흘리신 피가 우리의 참된 생명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입니다. 얼마나 처절합니까? 영생을 주시는 일에 왜 아름답고 고상한 방법으로 하시지 아니하시고 살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흐르는 십자가로 하셨을까요?

이사야 53:4-6절입니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의 죄악과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대신 찔리고 상하신 것입니다.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고 울었다고 합니다. 저는 제사장의 입장에서, 빌라도의 입장에서, 매질하는 군병들의 입장에서, 소리치는 군중들 속에 저를 두고서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우는 여자들을 보고서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 버린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을 불살라버릴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무엇을 위하여 울고 있습니까? 불타 없어질 것을 추구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생각하며 감정적으로 울지 말고 예수님을 죽여 버린 이 세상에 임할 심판이 어떤지를 알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로만 우리를 구원하셔야 하는지를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가 주의 죽으심을 증거 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곳에서 해방되어 그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살과 피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26-30  연약함을 도우심  2004. 4. 18.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3)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보이기를 싫어합니다. 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은 감추고 강하고 볼만한 것들을 내세우기를 좋아합니다. 대구에 어떤 교회가 개척을 하면서 노회에 교회 이름을 등록하려고 하다가 거절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무슨 이름인가 하니 ‘연약교회’라고 하였답니다. 교회 이름이 성장, 제일, 부흥, 늘푸른 이런 이름이라면 무리 없이 되었을 텐데 연약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니 받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대기 하나를 빼고서 ‘언약교회’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도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후서 12:5절에서 자기를 위하여서는 자기의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하지 아니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자랑할 만한 것들은 다 주님의 은혜이기에 자기를 위하여서는 약한 것들만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시편 39:4-7절입니다.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자신의 약함을 알고 자신의 허무함을 알고 든든히 선 때라도 허사임을 아는 사람이 소망을 주께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에 약한 것입니까? 소망에 대하여 약한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지난주에 말씀을 보았습니다. 보이는 것이란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는 것이기에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이루어지기 까지 오래참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5:7-11절을 봅니다.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그러나 종말의 특징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을 오래참고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급한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 포도나무 꺾꽂이 하는 것을 보고서 저도 가지 하나를 저의 집안 감나무 아래에 꽂아 두었습니다. 뿌리가 내리고 싹이 나려면 얼마를 기다려야 하는지를 모르기에 날마다 뽑아 보았습니다. 뿌리가 날 조짐은 보였습니다만 그러나 날마다 확인하는 바람에 뿌리가 내릴 틈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란 오래 참고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조짐이 보이는 것이라면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조금씩이라도 무슨 징조가 보이면 기다리겠는데 아무런 징조가 없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에 태풍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고 홍수로 집과 사람들이 떠내려가고 하였다면 몇 사람은 더 타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전혀 그런 조짐이 없었습니다. 방주의 문이 닫히고 나서 7일후에 비가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하늘에서 유황불이 조금씩 떨어져서 집이 몇 채 불이 탔다면 피할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의 가족이 다 나오고 나서야 불에 타버린 것입니다. 언제나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임하시는 것이기에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제대로 기다리고 대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까지만 하시고 그 다음에 믿고 주님의 재림까지는 너희 실력으로 오래 참고 기다려서 맞이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말씀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성취하시기까지 하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리라고 하시고서는 그 말씀대로 기다리기에는 우리가 너무 연약하기에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도우시는 것입니까? 그 도우시는 방법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속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26절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어야 할 바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여야 할 것은 하지 아니하고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은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내용 중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빼내어 버리라면 기도의 제목이 얼마나 남을까요? 거의 기도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 정도로 우리는 기도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성령이 오셔서 성도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27절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께서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내용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기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성경에 수많은 하나님의 뜻이 나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금요성경공부 시간에 두 가지가 나왔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말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요한복음 6장에서 그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있습니다만 오직 하나로 모은다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5:39절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증거한다고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삽니다. 아들을 높이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가 어떻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29절에 보시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 아들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보다는 아담의 형상을 따라 늘 썩어질 것들을 찾아 구하고자 하는 본성을 따라 살려고 하기에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탄식하며 기도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롬8:34절).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기도하시는 효력이 우리에게 나타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28절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소원과 뜻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소원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반드시 일어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연약하여 이룰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 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무조건 선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수님께서 육신에 되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그 십자가로 다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활승천 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성도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와, 그 십자가의 완성을 죄인에게 적용시켜 완벽하게 처리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져서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속죄함을 받고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을 보듯이 믿고 기다리게 된 것이 성령이 임하심으로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이 장차 이루어질 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과거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가 곧 완성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말씀의 능력인 것입니다.

 

 

 

 

29-30절을 봅니다.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완료형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우리가 연약하였으면 모든 계획과 성취를 하나님 홀로 하셔야 하는지 납득이 되십니까?

 

 

 

 

그러므로 성도란 자신의 연약과 부족을 아는 자들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이 이제야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사는 것입니다. 나 혼자 서지 못함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세월 지나 갈수록 주님께 더욱 의존되어 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로마서 8:31-34  감히 누가!  2004. 4. 25.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한 주간 우리의 연약함이 어떠한지를 발견하셨습니까? 자신의 연약함을 모른다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른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로 연약한가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기도라고 하면 자기의 바라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신에게 정성을 바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기도란 자기의 뜻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도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데 이러한 선을 이룬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선입니다. 하나님의 뜻만이 선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맏아들로서 희생함으로 다른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양자로 편입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자신의 언약을 따라 정하신대로 이루어 놓으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노력이나 애씀으로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택할 능력이 없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감사가 나오든지 분노가 나오든지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란 성령의 임재로 인하여 자신의 죄인 됨과 부족과 연약함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의 행위와 상관없이 부르시는 이의 뜻을 따라 된다는 것에 대하여 무한 감사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하는 자들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믿고 가능성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분노하기를 어떻게 사람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로마서 1장에서부터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인간이 어느 정도로 가능성이 없는지를 충분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 상태에서 무슨 수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주님 홀로 일하심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디도서 3:4-7절을 봅니다.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하지지 않습니다. 의가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의 긍휼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가 자신을 볼 때에 의롭고 영화롭게 보시겠습니까? 자기를 보면 아무리 보아도 자신이 없습니다. 양심의 고발을 받습니다. 네가 그런 모습으로 목사냐? 집사냐? 이렇게 소리칠 것입니다. 여기에 주눅이 들어서 우리는 자신 있게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래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느니 차라라 믿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으로 의롭다 하십니까? 그 아들의 피로 인하여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단번에 거룩함을 입었고 단번에 이루신 것을 영원하도록 확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도 끊임없이 대적과 송사와 정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러한 대적과 송사와 정죄를 할 수 없는 이유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누가 대적하리요!
31절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이 일이 무슨 일입니까? 미리 아신 자들을 그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항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으로 임한 은혜이기에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감사 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이 대적할 수가 있습니다. 그 배후는 마귀가 대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대적을 하여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라는 말씀이 마귀를 대적할 능력의 말씀인 것입니다.

 

 

 

 

천지만물이 다 주님의 뜻대로 창조되고 유지되고 주님의 뜻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대적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누 누구도 시비를 걸 수가 없습니다. 혹 우리가 부당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감히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당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결정과 일하심은 모든 것이 다 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반론과 반박에도 대답할 필요가 없이 거룩하고 높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시고자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신 것입니다(롬3:26).

31절입니다.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선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이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아서 주시지 않는 것이 있을 뿐이지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신 분이 성도로 하여금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의 최고의 상급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상이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15장 1절에서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의 지극히 큰 상급이요 방패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으면 그것이 영생이요 상급이요 면류관이며 그 아들의 기업을 함께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상급이요 방패이기에 누구도 대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송사하리요!
33절입니다. 누가 능히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송사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송사는 할 수가 있습니다. 송사는 고소입니다. 누가 고소를 하겠습니까? 율법이 우리를 고소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모세가 너희를 고소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만이 아니라 마귀도 우리를 고소할 것입니다. 마귀의 고소는 참소입니다. 헐뜯어 고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자에게는 그 고소가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송사자체가 요건이 성립이 되지 아니하므로 기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송사를 하는데 이미 죄인을 의롭다 하신 최고의 선언이 하나님으로부터 되었는데 송사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미국에선가 어디에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 수십 명에게 다 들통 났으니 빨리 몸을 피하라고 전화를 하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피하였다는 말을 들어 보았습니다. 모든 불의가 다 죄입니다. 그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송사를 받아 마땅한 자들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송사자체가 성립이 되지를 아니하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송사하는 자를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요한계시록 12:8-12절입니다.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났고 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2)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찐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 갔음이라하더라

 

 

 

 

밤낮 참소하던 마귀가 하늘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지상에서 그 마지막 때가 다 된 줄 알고 활동을 하지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더 이상 마귀의 참소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성도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에 더 이상 참소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몸의 구속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마귀의 송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을 흔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의심하게 만들고 믿지 못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주의 백성들을 감히 누가 송사하겠습니까?

 

 

 

 

누가 정죄하리요!
마귀가 송사를 한다고 하지요 어떤 방법으로 송사하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참소하다가 이제 하늘에서 쫓겨나버린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부활승천 하셔서 하늘보좌에 앉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에서 참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땅으로 쫓겨 와서는 우리의 양심에 정죄하는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용서를 받고 사는데도 계속하여 정죄감에 사로잡혀 살도록 마귀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귀의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전히 결박이 될 것입니다. 영원히 무저갱에 던져지면 더 이상 성도에 대한 참소나 대적이나 정죄를 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성도로서 마귀의 정죄를 물리칠 수 있는 근원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8:1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후서 5:21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예수님에게 정죄를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죄인인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기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죄가 더 이상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지금도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벽하게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자기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는데 누가 정죄하리요! 성도가 이 엄청난 은혜와 능력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참된 복이면 기쁨이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어려운 일들을 봅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삶의 구체적인 현장 속에서도 대적이 없고, 송사가 없고, 정죄가 없는 하늘의 영광을 맛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8:34-39  끊을 수 없는 사랑  2004. 5. 2.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ㄱ)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김은국 씨가 지은 소설 중에 ‘순교자’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한국 전쟁 때를 배경으로 하는 것인데 북한이 쳐들어 왔다가 다시 밀려올라가는 상황에서 첩보부가 먼저 올라가면서 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이 점령한 한 지역에서 순교자들이 나왔다는 것에 대하여 조사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남한으로 피난하지 않고 남았던 목사들을 공산군이 붙잡아 갔는데 두 명은 살아남고 나머지는 죽였다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정신이 이상해졌고 한 사람은 침묵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남은 자들이 배교자이고 죽은 자들이 순교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오히려 배교자라는 이야기인데, 이 소설은 제목이 순교자이지 신앙적인 소설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부재나 신의 죽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위협에 직면하였을 때 과연 부인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환난이 닥치고, 곤고한 일이 닥치고, 말할 수 없는 핍박이 옵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겠습니까?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렇지 아니한데 오히려 예수를 믿는데도 기근이 옵니다.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오는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이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주님을 배신하지 아니할 만큼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이러할 때 대답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힘을 주시면 부인하지 아니하고 순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믿음이 좋은 것인지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주 작고 사소한 이익 앞에서도 안색이 달라지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 아닙니까? 저의 모습을 여러분의 모습과 함께 우리라고 표현하였습니다만 우리의 결단과 결심이 얼마나 쉬이 무너지고 연약한지를 알자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리라는 말씀을 하실 때에 예수님의 죽는 자리에까지 따라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든지 진심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삼년간 따라다니면서 얼마나 엄청난 능력을 보았습니까! 자신도 주님의 능력을 받아서 귀신을 쫓아내며 전도를 하고 물위도 걸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결코 배반하지 않겠다는 말이 진심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모두가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잡히시고 고난을 받는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내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처럼 세 번이나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면 그 능력으로 적들을 물리치실 것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칼을 빼들고 휘두르다가 말고의 귀를 베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칼도 거두라고 하시면서 순순히 잡혀 가시는 예수님, 아무런 기적도 능력도 행함 없이 죽음으로 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동시에 그 수많은 군중들의 추궁 앞에서 부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던 결단과 결심이 하루도 가지 않고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도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이 닥치는 것입니다. 마치 종일 주를 위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는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는데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예수님을 위하여 시간도 바치고 목숨 같은 돈도 바치고 정성을 바치는데 나를 도와주시기는커녕 오히려 환난과 핍박과 적신과 기근이 계속 닥쳐도 주님을 사랑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이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나 오기가 강한 사람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축복을 하시는지 아니하는지 두고 보자는 식이 될 수가 있습니다. 야곱의 기도를 꼭 그런 식으로 해석하여 축복할 때까지 매달리겠다는 오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야곱의 뜻이 꺾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즉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을 야곱에게 남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든가 우리가 주님을 붙든다든가 하는 것은 언제나 연약하고 부족합니다. 우리의 결심과 결단, 죽기까지 충성하겠다는 것도 언제나 제한적입니다. 상황 따라 바뀝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것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이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10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람들이 사랑을 많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우리에게 죄의 댓가를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죄의 삯인 사망의 종이었기에 그 어떤 댓가를 지불할 수가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누구도 우리가 먼저 주님을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나타내시어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들에게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 언제 나타난 것입니까?

 

 

 

 

로마서 5:8-11절을 봅니다.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연약함이나 부족이나 실수로 인하여 취소가 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문제만이 아니라 외부적인 환경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 지라도 주님은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시리라고 디모데후서 2:1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실한 믿음이 없을 지라도 주님은 일향 미쁘시기에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2주전에 성례식이 있었습니다. 유아세례를 세 명이 받았는데 그 중에 한 아이의 이름이 ‘소윤’이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물어보니 적을 ‘소’에 미쁠 ‘윤’이라고 하였습니다. 윤이라는 글자의 뜻이 여러 가지입니다만 미쁨과 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좀 겸손하게 작은 미쁨이라고 지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제 이름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만 한 사람이 학습을 받았는데 세례를 오랫동안 받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런가 하니 세례문답의 내용 중에 교인의 의무를 다 지킬 자신이 없다고 하였답니다. 솔직한 대답이지요! 우리가 세례문답을 하였다면 다 이 질문에 대답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중에 지상교회의 성도의 교회생활의 주제에 대한 문답을 몇 가지 읽어 보겠습니다.

 

 

 

 

55문. 교인은 물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답: 모든 물질은 주께 받는 것이므로 주의 사업을 위해 선용해야 합니다. 56문. 교인은 어떻게 경제적으로 협조해야 합니까? 답: 교회의 모든 경비와 사업비에 성심껏 협조해야 합니다. 57문. 헌금의 표준은 무엇입니까? 답: 십일조와 감사를 표준으로 몸과 마음과 모든 물질을 바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58문. 교인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1)모든 집회 출석의 의무. 2)교회 발전에 힘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의무. 3)거룩한 사업을 위한 경제협력의 의무. 4)성경을 힘써 배워 실천할 의무. 5)진리를 보수하고 교회 헌법에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답을 해야 세례를 받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답 가운데 무엇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습니까? 모든 집회 출석의 의무란 공적인 집회 전부를 말합니다. 주일, 수요일, 금요일, 새벽기도회까지입니다. 지금 이 규정을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세례문답에서 이런 질문을 하니 자신이 없다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겠다고 다짐과 결심을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 마음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 계획하신 일은 바꾸어지거나 취소하거나 실패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하면서 질문을 하니 나 자신은 믿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야 믿지요! 하는 것입니다. 이 대답으로 저는 세례를 준 것입니다.

 

 

 

 

왜 이런 구체적인 내용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란 인간의 조건을 따라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조석지변입니까?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릅니다. 그래서 변덕이 죽 끓듯이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우리의 신뢰와 사랑으로 어떻게 천국을 가겠습니까? 이미 베드로가 인간의 결단과 결심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다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떻게 다시 주님의 사도로서 주님의 사랑을 증거 하게 된 것입니까?

 

 

 

 

누가복음 22:31-34절입니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34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기에 비록 세 번이나 부인을 하였을 지라도 주님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성도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항상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한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며 이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누가 대적하리요! 누가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35-39절을 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이 결코 끊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종일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을 지라도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의 사랑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로 인하여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확신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수동태입니다. 확신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사도, 천사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로마서 8:35-39  낯선 사랑  2004. 5. 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ㄱ)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어제가 어버이날이었습니다. 어버이날이 되면 어버이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가시고기에 대한 이야기를 아시지요! 알이 부화되도록 돌보기 위하여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죽도록 보호하면서 결국 자기의 몸마저 부화한 새끼들의 먹이감이 되는 가시고기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그렇게 자란 가시고기는 또다시 부모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세상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버리기도 하고 자식이 부모를 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버림 받은 부모가 경찰에 의하여 보호소에 수용되면 자기 집 주소도 모르고 자식 이름도 모른다고 한답니다. 그것은 자식의 이름이 알려지면 자식이 부끄러울까봐 그렇게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러면 우리의 가슴이 뭉클하면서 부모에 대한 사랑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월달의 설교는 주로 가정에 대한 설교가 많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금요일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사랑을 도덕적인 것으로 보는 것과 영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도덕적인 사랑은 육적인 것입니다. 남녀의 사랑, 친구의 사랑, 인류애는 육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라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가정의 달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으로 말하여지는 것은 육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사랑이 무엇입니까? 철저하게 성령의 은사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너무나 낯설기에 사람들이 감당을 하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이란 예수님의 생애에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의 가족이란 요셉과 마리아와 그의 아들들 이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계속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요셉은 빨리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가장인 예수님이 30세가 되었다면 가정을 돌보고 어머니를 봉양하여야 할 텐데 가정을 버리고 떠나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마리아가 찾아왔을 때 사람들이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왔다고 말하자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들이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내 모친이여 내 형제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불효막심한 자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새로운 가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아주 낯선 사랑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5-27절을 봅니다. “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부모 아내 자식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미워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까? 자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까? 대부분 자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를 확대하면 부모, 처자식,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고자 따르는 것도 결국 자기 사랑의 결과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낯선 말씀입니까?

 

 

 

 

그러면 자기를 미워하고 예수님만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사랑할만한 분입니까?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전혀 사랑할 만한 분이 못됩니다. 방금 누가복음 한 곳의 말씀만 보아도 당장 돌을 들고 달려들지언정 환영할 수 없는 말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의 확대인 가족과 친척과 사회까지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미워하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이야기 입니까?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따른다는 것은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전도를 한다거나 설교를 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서비스 해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되어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어서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전혀 없었기에 싫어버린 바 된 그 예수님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그와 같은 운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가 나온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선물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자들이기에 이러한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기에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보고자 합니다.

 

 

 

 

말라기 1:2-5절입니다.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2)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찌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랑이란 언약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결과로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으나 다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상황은 곤고하였습니다.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고생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면서 무엇을 사랑한다는 말입니까, 하면서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항의가 없습니까? 환난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 임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과연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어려움들이 닥치는 것입니까? 내가 무얼 그리 잘못했다고 이러는 것입니까? 하는 항의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면서요! 사랑하신다면서 이렇게 해도 되는 것입니까? 하는 항변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때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는 것이 대답입니다. 그러면 누가 더 고생을 합니까? 야곱이 훨씬 더 고생을 합니다. 에서는 세상의 야망을 이루어갑니다. 그대로 성취가 됩니다. 그냥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워하셨기에 그 성취마저도 종국에는 무너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사랑하셨기에 야곱의 야망을 꺾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 나그네 세월을 험악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야곱이 마지막 하나 붙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자신을 묻어 달라는 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복임을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에 대하여 로마서 9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10-13절입니다.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ㄷ)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ㄹ)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이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 다는 이것이 낯선 사랑의 내용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가 확정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내용이란 일방적인 택하심이요 그것은 이미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택하심이기에 그러한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내용입니다.

 

 

 

 

이런 사랑을 세상의 무슨 법으로 세울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사랑이 낯설다고 해서 사람들이 이해할만 한 조건적인 사랑을 이야기 하게 되면 윤리와 도덕이 되고 율법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육적인 사랑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교회로 모여서 사랑을 이야기 하고 무슨 활동을 한다고 하여도 결국 육적인 사랑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뜻으로 세워지는 교회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피로 세워지는 교회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의 뜻으로 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그야말로 전적인 긍휼로만 되어지는 것을 알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얼마나 엄청나고 대단한 위력인지를 세상의 환난 가운데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환난 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큰 것을 보게 됨으로 환난을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곤고 속에서도 핍박 속에서도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앞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합니다. 아니 사랑한다면서 이러한 어려움들은 왜 주는 것입니까? 이러한 어려움들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시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몰라도 그런 어려움이 주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은 아직도 사랑을 제대로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확신되어진 바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더 깊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고진감래가 아닙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살다가 종일 도살당할 양처럼 여김을 받다가 힘없이 말없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망이 그를 붙들어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망마저 이겨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그 안에 있는 무수한 일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사들도, 천사들이 구원받는 자를 돕는 것인데 어떻게 끊고자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즉 마귀도 끊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권세자도, 현재 일이나 장래일도, 어떠한 능력도 끊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시편 2편에서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여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라고 하십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내용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구든지 그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 하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6:22절에서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사랑한다면 이보다 더한 사랑은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9:1-5  바울의 큰 근심  2004. 5. 16.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1)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성령이 충만하였던 바울사도가 그리스도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기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 하는바 큰 근심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동일하게 예수를 믿는다는 오늘 우리의 가장 큰 근심이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도 무관심하게 지나가는 자들에게 대하여 여러분들은 나와 같은 근심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장 큰 근심이 과연 무엇입니까?

 

 

 

 

로마서 1-8장까지는 엄청난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였습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엄청난 선물을 받은 자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한다는 말씀을 2주간에 걸쳐서 보았습니다. 환난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이라도 끊을 수 없으며 죽음조차도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이것을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견인(堅忍)이란 굳게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성도가 굳게 참고 견뎌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택한 백성을 끝까지 굳게 하시고 견디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요 변함없으신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신실하신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실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4-5절에 보시면 얼마나 엄청난 혜택이 있습니까?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이렇게 엄청난 내용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이방인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9-11장이 단지 이스라엘의 회복이나 구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크고 높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감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는데 우리가 다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33-3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3)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우리가 로마서 1-8장까지의 복음의 진리를 상고하면서 중간 중간에 복음을 오해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들을 보았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에 그러면 죄를 더욱 지어서 은혜를 넘치게 해야 되겠구나! 하는 오해가 있을 수 있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니 그러면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구나! 하는 오해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꺾어지고 이방인이 편입되어 들어오게 된 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거룩하심과 영광에 훼손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 이방인들에게 대하여 편협함이라는 탄핵을 받을 수 없는 절대 자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결정과 행하신 일은 그 어떤 결정이라도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이 하나님의 택하심과 언약의 성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성취임을 6절 이하에서 남은 자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큰 근심이란 자기 동족이 구원에 이르기를 강렬하게 바란다고 합니다. 자신이 비록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바라는 바라고 합니다. 과연 끊어진다는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가장 큰 고통이요, 저주라고 생각하는 바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 동족들에 대하여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기도가 무엇이었습니까?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시는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한 고통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주를 받아서 버림받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면서 부르짖으시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다 성취하신 것이며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승천 하셔서 그 대속의 은혜를 입을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진정한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천하를 다 얻어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 가장 불행한 것이며 영원한 저주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세상의 끝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비관론적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기에 비관론적 낙관주의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미련이나 낙관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윤리나 도덕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이 발달하여 모든 공해문제 에너지문제 경제문제가 해결되는 그러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의에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교회로 모이는 것은 세상의 끝을 아는 사람들이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계속하여 세상에 미련을 두게 만든다면 본질적으로 잘못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과연 교회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심각하게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인간의 가능성에 미련을 두고 있다면 교회로 모여서도 서로 떠날 준비를 하자고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좀더 나은 우리 교회를 만들까를 걱정할 것입니다.

 

 

 

 

복음이란 이 세상을 분리하고 나누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가장 오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로이드 존스목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란 모든 구분과 차이를 없이하고 누구나 다 예의 바르고 행복하고 기분 좋은 동료의식이나 형제애나 우정을 가지게 하여 서로 간에 다 경우 바르고 모든 일이 다 부드럽게 넘어가도록 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방종 어리고 거짓된 개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10:34-35절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날마다 이 세상에서의 탈출을 도모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보면 날마다 역적모의를 하는 자들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 보이는 것들로 유혹을 합니다. 나에게 절하라 그러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주겠노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세상의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가리고 있기에 보이는 세상만 추구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장차 이 세상이 불에 타서 멸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좋아하든지 아니하든지 간에 이 말씀을 증거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아직도 사람의 도덕성에 가능성을 두고서 세상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이 이런 설교를 듣는다면 아마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 자신도 세상에 대한 미련이 늘 터져 나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저주와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단지 비유의 이야기일 뿐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두 종류로 나누어 질 것입니다. 한 사람은 고통 받는 음부에, 한 사람은 영원한 낙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족함이 없이 호의호식 하면서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서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는 것과 비록 거지로 살았을 지라도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살았던 나사로의 삶 중에 어느 것이 복 있는 삶입니까?

 

 

 

 

세상은 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들이 어떠한 것을 바울사도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도 유대인으로서 바리새파중의 바리새파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특권들을 다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죽인 자입니다. 그러한 자기의 행위가 구약에서 그렇게 약속한 메시아였음을 알지 못하였기에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성경이 새롭게 보이게 되자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예언한 참된 메시아임을 유대인들에게 증거 하고자 하는 안타까움과 근심과 탄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바라는 바라고 할 정도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심정을 모세에게서 봅니다.

 

 

 

 

출애굽기 32:30-32절입니다.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31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주의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지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를 알기에 이런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서도 이러한 고통과 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주님으로부터 끊어지는 것보다 더 한 고통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35-3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 성도의 가장 큰 위로요 복이요 힘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고통이 과연 있기는 한 것입니까? 내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었으니 내가 구원받았으면 되었고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지 모르겠다는 마음이라면 역시 이기적인 개인구원론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개인 구원이라면 혼자 예수 믿고 교회로 모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구원과 심판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영원한 심판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에 여러분 주위의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하여 어떤 마음이 듭니까? 세상에 부족할 것 없이 사는 사람들을 보고서 부러워하십니까? 근심하십니까? 우리의 큰 근심이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보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이나 가족이나 친척이나 주위의 사람들에 대하여 무엇에 대하여 큰 안타까움이 있습니까?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자기 확신이나 안일 속에 있지 마시고 그리스도에게 끊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묵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주님을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르게 아는 자들이며 또 그 은혜를 증거하고 자랑할 것입니다.

  
 
 
로마서 9:6-13  약속의 자녀  2004. 5. 23.


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ㄱ)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ㄴ)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ㄷ)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ㄹ)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지옥을 만들어 놓았을 리가 없다고 합니다. 그저 위협용일 뿐이고 모든 사람들이 다 착하게 살라고 하는 것이라는 식입니다. 가는 길은 달라도 그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 구원이기에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한다는 ‘만민구원설’을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평소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당황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어 버리는 것입니다. 한 쪽은 육신의 자녀로 한 쪽은 약속의 자녀로 나누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접촉점도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걸림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용할 만한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 주일 오후 성경공부시간에 큰 믿음과 작은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였습니다. 큰 믿음, 작은 믿음이 있습니까? 우리는 사람의 성취능력을 보고 믿음이 크다, 작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다고 평가하신 사람은 자신을 개로 여긴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즉 믿음이 크다는 것은 자신이 구원을 받을 하등의 자격이 없는 개 같은 자임을 인식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백부장을 향하여는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이방인입니다. 이들의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알아본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어떤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4-5절에 보시면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야곱이 이름이 바뀌어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름 지어준 나라입니다.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내용들이 다 이방인들이 받지 못한 특혜들이었습니다. 더구나 육신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 난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는 만물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이 엄청난 내용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은 아주 소수이고 이방인들이 믿게 되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의 약속의 폐하여 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고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가 되는데 어떻게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버림받는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사도가 답변을 하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습니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만이 씨로 여기심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로 나누어집니다. 육신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안에 있고 한 아버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여도 오직 약속으로 난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앞부분에서도 이미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2:28-29절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한다면 교회 출석하고 등록하고 직분도 받고 목사의 행세를 한다고 해서 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전제가 되는데 예수를 믿는 자기의 능력을 믿고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이미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예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 성령에 의하여 믿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이후로 모든 인간이 다 육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육체는 육체를 낳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육체가 된 인간은 그 결국이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계획을 따라 하나님의 약속을 담아내는 육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약속의 담지자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 인물 중에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내용이 무엇인지는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러나 둘 다 현실적으로 주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한 땅을 산 것 외에는 단 한 평도 가나안의 땅에 주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능력이 그대로 성취가 되어 여호수아 때에 가나안을 차지하게 됩니다. 무려 5백년이나 걸린 것입니다. 완전히 차지하기는 다윗시대이니까 무려 천년 정도가 되어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후손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의 씨로 후손을 삼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은 자기 집에서 충성스러운 종을 후손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미 사라가 잉태를 하지 못하였기에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하시면서 너의 몸에서 날 자가 너희 후손이 되리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사라의 권유를 따라 종인 하갈에게서 아이를 낳습니다. 아브라함의 씨면 되지 않겠느냐는 인간의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나온 자식이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창세기에서 상세히 본대로 아브라함은 99세이고 사라는 90세로서 처음부터 잉태치 못하는 여인이었으며 이제는 경수도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내년 이맘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도 웃었고 사라도 웃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을 말씀하셔야지 어떻게 경수가 끊어진 여인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당사자였다면 웃을 일이 아닙니까?

왜 이렇게 약속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는 인간의 불신이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아담이후의 모든 인간들이 다 인과율 속에 살고 있습니다. 나에게 원인이 있어야 결과도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세상살이의 지극히 당연한 원리입니다. 그래서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7-8절에서도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세상의 원리에 그대로 적용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말씀에서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육체로 심어서는 영생을 거둘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아브라함이 육체의 심은 씨가 이스마엘입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의 씨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능력과 실력으로 낳을 수 있는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라함의 능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자식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고 나서 재혼하여 다시 자녀를 여섯 명이나 더 낳았습니다만 사라는 처음부터 잉태치 못하였는데 이제는 경수마저 끊어진 상태에서 자녀가 주어진다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란 없는데서 있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씨라고 해서 모두 다 약속의 자녀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이스라엘백성들은 또 반발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마엘의 자손이 아니라 이삭의 자손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데 왜 우리가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인가 할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면 교회 나간다는 대답을 합니다. 또는 예수 믿으십니까, 하면 집사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 교회 나가거나 집사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시냐고 물으면 예수를 믿으니 교회도 나가도 집사도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이제 이삭의 아들의 경우를 보아야 합니다. 이삭도 리브가와 결혼하여 20년간이나 아이를 낳지 못하다고 기도하여 낳았습니다. 기도해서 낳았다는 것은 기도한 조건 때문에 낳은 것이 아니라 자기 실력으로 낳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장가만 가면 아이를 낳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잉태를 하였는데 쌍둥이입니다.

로마서 9:10-13절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야 아내가 둘이었지만 이삭은 한 아내요 쌍둥이인데 하나는 약속을 받고 하나는 약속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차별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이 없다고 하면서 모든 자식은 동일하게 사랑한다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어떻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한 어머니 배속의 쌍둥이를 하나는 미워하고 하나는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도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그렇게 결정하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십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웃을 일입니다. 비웃을 일입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는 그런 신이라면 절대로 믿지 않겠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행한 대로 보상이 주어져야지 어떻게 자기 행함과 상관없이 정하여 버리는 것입니까? 그리고 한번 사랑한다고 정한 자는 미운 짓을 해도 끝까지 사랑하고 한번 미워하는 자는 아무리 예쁜 짓을 해도 끝까지 미워하는 이런 이상한 하나님을 여러분을 과연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를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1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시고서도 아직도 인간의 행위에 무언가 기대를 하시겠습니까? 이 말씀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는지 모릅니다. 도대체 인간을 뭐로 보고 이렇게 심한 말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언제 가장 기분이 나쁩니까? 초등학교 2학년이, 자기가 제일 기분 나쁜 경우는 자기 말을 하는데 잘 들어주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이로는 자기가 꼴찌 아닙니까? 그런데도 자기 말이 무시당하면 당장 안색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어떻게 자기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기에 오직 일방적으로 불러주시는 은혜로만 약속의 자녀가 된다는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알기에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 자임을 아는 사람이 약속의 자녀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만들어진 약속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로마서 9:14-18  인간 행위의 끝  2004. 5. 30.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ㅁ)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ㅂ)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오늘 우리가 모인 이곳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회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하는 질문을 늘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기존의 교회를 전통으로 붙들어 세움으로 살아있는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을 버리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건물 성전을 붙들고 있다가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일과 같은 일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질문합시다. 교회란 도대체 어떤 곳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약속의 자녀가 모인 곳이 교회인데, 약속의 자녀란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없는데서 생긴 자녀들이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나온 자녀들은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주인이며 메시아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똑 같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나왔더라도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고 이삭이 약속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어머니가 다르다고 할까봐서 이삭의 자녀는 같은 배에서 나온 쌍둥이에게서 하나는 사랑하고 하나는 미워하는데 그것을 어떤 선과 악을 행하기 이전인 배속에 있을 때에 이미 정하여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무조건 미워하고 한 사람은 무조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아멘입니까? 의문이나 항의가 일어납니까? 아멘이 일어나는 사람은 자신이 예수 믿고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니 그런 것은 아닙니까? 만약 우리에게 너는 지옥에 가야 마땅하기에 지옥에 가라고 하면 아멘이 나오겠습니까?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어떻게 일방적으로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버리는 것인가 하는 일에 대하여 진심으로 아멘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착하게 살았는데 단지 예수 믿지 않았다는 사실로 지옥가고, 평생 강도짓을 하다가 사형을 당하는 순간에 예수 믿고서 천국 갔다는 이 사실이 여러분은 기쁜 소식으로 들려집니까? 분노가 일어나는 소식으로 들립니까? 분노가 일어난다면 아직도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의 행위와 남의 행위를 비교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자신의 죄와 비참을 알게 하기까지는 인간으로서는 전혀 시인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믿는 자들을 세상은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21-31절입니다.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바 ㄱ)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ㄴ)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바 ㄷ)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2)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ㄹ)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으로 따라 난 자를 그때나 지금이나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모든 인간 행위의 끝이어야 합니다. 더 이상 인간의 행위가 정당화 되거나 찬송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은 인간의 가능성 속에서만 살아갑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 사고방식을 이야기 합니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인간은 무언가 인간이 잘못 형성된 인간으로 보고 인간 세상에서 도태시켜 버리고자 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정신의 흐름은 이스라엘도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언행을 보시면 이 세상에 대하여 얼마나 비관적이며 비판적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자체를 몽땅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아들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의 공로로 만들어진 나라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사람의 뜻으로 세워질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시도들을 해 왔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 한 때도 있었고, 신인협력설이 나온 적도 있었고, 인간의 가능성만 높아진 때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시도들이 있어왔고 지금도 그렇게 돌아갑니다만 그러나 결국은 해 아래 새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것은 새롭다 할 무엇이 있겠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아이디어와 능력과 상관없이 주님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만 세우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9:11절입니다. 그 자식들이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진정으로 믿어지는 사람이라면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어떤 선행도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오직 부르시는 분이 세워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이상의 인간의 행위가 거론될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9:14-15절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께 불의가 있습니까?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버리는 것이 공평하지 못한 처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불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왜 그런가 하는 것을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33:18-23절입니다. “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22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이 말씀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엄청난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맛보고서 출애굽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입니다. 열 가지 재앙을 보았고, 홍해 바다를 건너고,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고 있으면서도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는 40일 기간 중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자기들을 구원하여 낸 신이라고 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여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에 모세가 중보의 기도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면서 가나안 땅에 함께 가지는 않겠다고 하시자 그러시려거든 우리를 올려 보내지 마소서, 라고 합니다. 이 간구도 들어주셔서 함께 가시겠다고 하시자 모세가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는 내용이 은혜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겠다는 말씀입니다. 즉 은혜와 긍휼이라는 말씀이 주어지는 것은 진멸당하여 마땅한 상태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진멸당하지 아니한 이유가 주의 은혜와 긍휼인 것입니다.

 

 

 

 

진멸 당하여 마땅한 인간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있어서 자기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셔서 불쌍히 여겨주심만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의 방식이 인간의 본성상 얼마나 거슬리는 말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목적이 남들에게 업신여김 받거나 불쌍히 여김을 받지 않기 위하여 열심히 사는데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 구원받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치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 앞에서조차 불쌍히 여김을 받고 싶지 않고 당당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방법론이 다 동원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이지만 상급은 행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바울사도는 자신이 그 어떤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만약 자기 행함으로 그러한 열매들이 나왔다면 나중에 하늘나라 가서 자기 공로를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로 되었기에 자기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드릴 뿐인 것입니다.

 

 

 

 

16절을 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인간의 행위가 무엇입니까? 무언가 원하는 바가 있으면 그 원하는 바를 위하여 달음박질해야 합니다. 목표를 설정해놓았다면 요행만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성취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인간이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달음박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고 싶지 아니한 인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원해도 안 되고 울어도 안 되고 그 무슨 행위로도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인간의 행위의 끝인 지점입니다.

 

 

 

 

이세상은 오늘도 인간의 행함으로 살아간다고 믿는 사람들이 거의 다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자기 행함의 능력으로 살아간다고 믿고 있지 은혜로 살아간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마저 인간의 행함만 가득하게 넘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는 설 곳이 없어져 버리지 않았습니까? 이런 세상이 강퍅한 세상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사는 세상이 강퍅한 것입니다. 17절입니다. 바로가 강퍅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긍휼의 그릇으로 택함을 입고, 바로는 강퍅의 그릇으로 택함을 입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모세도 강퍅의 그릇이 될 수도 있고 바로도 긍휼의 그릇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 심한 인간 행위의 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18절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또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는 일에 대어들고 싶은 인간의 본성이 죄입니다. 왜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는지 하는 항의는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 앞에 누가 무릎을 꿇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이 주님 앞에 지금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긍휼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강퍅한 자들은 끝까지 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내가 불쌍히 여김을 받고 구원받느니 차라리 지옥에 가겠다고 발악을 하는 인간들의 세상이 교회 밖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라고 모인 우리 안의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실 것입니다. 아멘!

 

 

 

 

로마서 9:19-24  진흙과 토기장이  2004. 6. 6.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교회란 인간의 행위를 기대하지 않는 곳이라고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원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달음박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인간의 손에서 이미 벗어난 것입니다. 흙에서 나오는 것은 흙일뿐입니다.

 

 

 

 

그런데 구원받고자 하는 욕망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구원을 폭넓게 잡아보면 현재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과 죽어서도 나쁜 곳에 들어가지 않고 행복한 낙원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욕구의 수요가 있기에 수많은 종교서비스업이 성행하는 것입니다. 복 받는 비결, 죄 사함 받는 비결, 구원 받는 비결, 영생의 비결을 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단체에 오면 확실하게 현재의 구원과 장래의 구원을 책임지겠으니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고 선전을 합니다.

 

 

 

 

구원을 인간의 손에서 조작해 낼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사고방식 자체를 정죄하면서 나오는 말씀이 로마서 9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데도 하나님의 긍휼을 보이시기 위하여 긍휼히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보다 훨씬 착하고 양심 바르게 사는 자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보이시기 위하여 강퍅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반발을 합니다. 그러면 강퍅케 되는 사람이 억울하지 않는가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많은 사람들을 공평하게 다루어야지 그렇게 편애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착하게 산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허물을 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발이 일어나고 질문이 일어나는 것은 자신이 피조물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9:19절입니다. 사람의 선한 행위의 결과로 구원과 심판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으로 택하여 놓았다면 그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대답은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로 대답합니다. 인간 스스로는 정당하다는 질문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항의를 하는 것 자체가 죄로 인하여 자기가 주인인양 착각하고 살아온 것이기에 창조주에게 대어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교만이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의 지식과 무슨 일을 이루어내는 능력을 동원하여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전적인 은혜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은 부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구원받는 길만 가르쳐주면 내가 얼마든지 선택해서 구원받는 길로 가겠다는 자신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홍해바다를 바가지로 퍼내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넘쳐흐르는 요단강물을 돌 몇 개로 막아보려고 나서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들을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구스인이 그 피부색을 바꿀 수 있고, 표범이 그 반점을 바꿀 수 있다면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사람의 손에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만 되어질 일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것 자체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고,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20절을 봅니다. 이 사람아! 우리가 흔히 이 사람아, 라고 부를 때는 정신 차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냐고 합니다. 힐문(詰問)이란 따지며 공격적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감히 누가 하나님께 따질 수 있는가 하는 말입니다. 도대체 지음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음 받은 물건임을 인정하십니까? 그것도 흙덩이로 지음 받았음을 인정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으로, 하나는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진흙을 이겨서 밥그릇을 만들든지 똥 장군을 만들든지 만드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똥 장군을 만들었다고 해서 진흙이 나, 똥 장군 안한다고 데모를 한다면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모든 피조물이 그러한 원망을 하지 않는데 인간만이 그런 원망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이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지금 이러한 말씀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택하시고 버리시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진노를 받을 자는 반드시 진노를 받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는 반드시 긍휼히 여김을 받아 하나님의 긍휼의 크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진흙과 토기장이에 대하여 구약에서 이미 많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29:15-16절입니다. “15 ○화 있을찐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하는 자여 그 일을 어두운데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16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이 말씀에 의하면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숨기려고 하는 자, 누가 우리를 보고 누가 우리를 알겠는가 하는 자들이 저주 받을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습니까? 내 마음속에 무언가 은밀히 계획하는 일들과 마음의 생각들을 하나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지으신 분이 총명이 없다, 지으신 분이 나를 모른다고 여기는 자들이 지금 자기가 지음 받은 물건인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릇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사야 30:14절입니다. “그가 이 나라를 훼파하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훼파함 같이 아낌이 없이 파쇄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취하거나 물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자기가 지음 받은 자 인줄 모르고 주인인양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그릇을 부수어 버리듯이 박살이 나는데 한 조각도 쓸만한 것이 없도록 부수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만큼 인간의 능력이 극대화 된 적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인간이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입니다.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창세기에서 쌓았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져버린 바벨탑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탑의 추억이란 ‘자 우리 이름을 내고 우리의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에 대한 미련, 이것이 피조물의 교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창조하셨는데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이 자기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있는 이 교만한 흙덩이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토요일 새벽기도회 때 본문이 출애굽기 20:22-26절입니다.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23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25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26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기념되어져야 하는 장소는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여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정된 장소에서 희생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장소는 성막이나 성전이며 희생제물은 짐승이었습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이름이 기념되는 곳에서 인간의 이름이나 솜씨가 발휘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돌을 쌓되 정으로 다듬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누가 멋있게 다듬었는가 하는 사람의 이름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층계로 단에 오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하체가 드러나는 것을 금한 것은 인간의 생식능력으로 이루어 낼 수가 없는 것으로 봅니다. 사람의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곳에 사람의 이름만 난무하지 않습니까? 누가 개척을 하였으며, 누가 부흥을 시켰으며, 누가 건축을 하였다는 사람의 업적들이 기념되어지는 곳이라면 그곳은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곳이 아니라 우상의 집단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세상은 어차피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자기를 부인하는 곳입니다. 자기의 이름이 부정되어 지는 곳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자기의 이름 하나에 우리 모두가 목숨을 걸고 있습니까? 누가 나를 건드려! 건드리기만 해봐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이 없습니까? 그러므로 심판이란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직도 자기가 지음 받은 흙덩이 임을 알지 못하고 자기가 온 세상의 주인인양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사야 45:9-10절입니다. “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찐대 화 있을찐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10 아비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났느냐 2)어미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낳으려고 구로하느냐 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예수님께서 자주 말씀하신 화 있을찐저, 하는 말씀이 이렇게 자주 나오는 곳이 자신이 지음 받는 진흙인줄 모르고 토기장이에게 다투는 곳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늘 화있을찐저, 라는 말씀을 들어 마땅하지 않습니까?

 

 

 

 

예레미야서 한 곳을 더 봅니다. 18:1-12절입니다.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8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리라 한다고 하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11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베풀어 너희를 치려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 길과 행위를 선하게 하라 하셨다 하라 12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된 말이라 우리는 우리의 도모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실물교육을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고 있습니다. 진흙으로 자기의 뜻대로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게 하시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망하게 하려다가도 그들이 돌이키면 재앙을 거두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헛된 말이라고 합니다. 헛소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도모대로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이 말씀의 해석이 로마서 9:22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보이시고자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는데 그렇다고 해서 진노의 그릇이 스스로 돌아오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쳐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인 것처럼 찍어버린다고 하여도 헛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해서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기는커녕 믿는 자를 핍박할 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진정 자신이 지음 받은 흙덩이임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지으신 분 마음대로 지으심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자신이 진노의 그릇이 되어도 마땅한 자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의 부요함을 드러내시고자 그 영광의 부요함을 따라 택하신 긍휼의 그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긍휼의 그릇이 누구입니까?

9:23-24절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만이 아니라 이방인 가운데서도 부르신 자들입니다. 무엇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까? 복음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복음이란 성경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고 의가 있고 거룩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은 긍휼의 그릇으로 택함을 받아 부르심을 입었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런 자들은 그 긍휼의 풍성함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지 아니합니다. 자기에게 나타난 주의 긍휼과 자비의 풍성함만을 증거 할 뿐입니다. 그 어떤 자기의 공로나 자기 자랑이나 자기 이름이 거론될 자리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서나 주님을 모시고 사는 곳이 천국임을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피조물 됨을 모르고 여전히 자기가 온 세상과 우주의 주인인양 착각하고 사는 자들에 대하여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시편 2:7-12절입니다.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철장으로 질그릇 깨트리듯이 부수실 분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11-16절입니다.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1)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시고 심판하실 주님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주의 긍휼을 입은 자들입니다.

 

 

 

 

로마서 9:24-26  부르신 자  2004. 6. 13.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ㅅ)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ㅇ)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성경에는 딱 두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사람들이 가장 문제로 삼는 것은, 사람들의 선악의 행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택을 따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결정과 일하심에 대하여 사람들은 여러 가지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라면 인간이 선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애버리는 결과가 되는데 그렇게 부조리한 신이 어디에 있느냐고 항의를 합니다. 이뿐 아니라 교회에서 이렇게 설교하면 그것은 믿기 이전의 이야기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설교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교회가 발전하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로마서가 이미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지구의 60억 인구가 항의를 하든 말든 그러한 것에 대하여 한마디로 일축하여 버리는 선포가 지난주에 보았던 20,21절의 말씀입니다. 이 사람에 네가 뉘기에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이 없느냐는 이 말씀입니다. 똑 같은 한 덩어리의 진흙입니다. 재료자체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의도대로 진노의 그릇으로도 긍휼의 그릇으로도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분노와 항의가 일어나면 그것이 진노의 그릇이라고 봅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을 그렇게 처리하는가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아멘 하는 자는 긍휼의 그릇이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됩니다. 그래 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해서 긍휼의 그릇이 되어야지 한다고 하면 이는 또다시 자기 구원중심으로 생각한 것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노의 그릇이란 자기가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마땅하며 그러한 구원의 조건이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도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힘을 써 주어야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어주고 대접하여 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런 진노의 그릇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가 지난주 금요일 사랑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을 보았는데 육적인 사랑이란 남을 위하여 불사르게 내어주고, 자기 자식을 위하여 희생을 하는 부모의 사랑도 결국은 육적인 사랑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나를 구심점으로 끌어당기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에 두고서 무슨 짓을 하여도 그것은 자기 사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이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도 주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어 진노를 부으시고, 긍휼의 그릇으로 만드시어 긍휼을 부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우리가 항의와 불만을 가지는 것이 교만이고 죄인 것입니다. 자신이 피조물이면서도 주인인양 착각하고 살아왔던 것이 드러나는 시점이 복음이 선포되는 현장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시므로 무엇이 죄인지 확연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을 입은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부름을 입었는가? 아닌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부르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어떻게 드러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부름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다든지 나는 이렇게 엄청난 큰일을 하기 위하여 불렀다든가 하는 것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9:24절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부르신 자만 긍휼의 그릇에 해당됩니다. 유대인이라고 자동적으로 긍휼의 그릇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방인이라고 무조건 진노의 그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에 유대인보다 이방인의 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평소에 개같이 여기는 이방인들이, 조상 때부터 섬겨온 자기들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이것을 모독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 자세가 바로 진노의 그릇의 특징입니다. 반면에 긍휼의 그릇은 자신이 택함을 입을 하등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의 일방적인 선물임을 알고 그의 긍휼과 자비의 풍성함을 증거 할 뿐입니다.

 

 

 

 

로마서 9:25-26절입니다. 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주십니다. 첫째 아들은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이 심판을 내포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둘째 딸을 낳았을 때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합니다. 이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셋째 아들을 낳았을 때 ‘로암미’라고 합니다.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호세아 당시의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죄를 범하므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가 되고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심판당하고 버림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이 호세아 선지자의 선포입니다. 그러나 한 날이 이르면 다시 ‘루하마’와 ‘암미’라고 불러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자기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을 하고 나서야 불러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제는 이방인에게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거역으로 잘려나간 자리에 접붙여진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서 유대인의 자격이나 이방인의 자격이 아니라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일단 자기에게서 그 어떤 조건도 나오지 못하는 것임을 먼저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며 우선 유대인들의 경우를 봅니다.

 

 

 

 

 이사야서 6장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런 자들의 눈을 감기고 귀를 막아버리라고 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깨달아 주님께 돌아올까 염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오는 길을 차단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오직 구원이 주님의 손에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인간의 영광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는 이러한 말씀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한 명이라도 더 구원시키자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차단하십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을 불순종아래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1:32절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사람이 스스로 순종하고 나온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깨뜨려버리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오직 그의 긍휼히 여김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우리가 다 판단하고 측량할 수가 있겠습니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하고서 찬송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긍휼의 그릇으로 부름을 입은 자들은 어떤 인식이 있겠습니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자신은 전혀 부름을 입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의 자리에 가야하고, 긍휼을 입지 못하는 자리에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평소에 멸시하였던 세리와 창기와 이방인의 자리에 있는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본질상 진노의 자녀임을 인식시키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5-6절입니다. “5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복음이 어디로 증거됩니까? 이방인도 아니고 사마리아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신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에게 가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모두가 잃어버린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잃어버린 자라고 생각하는 자는 복음이 기쁜 소식이지만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배척하게 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는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신들이 결코 잃어버린 자가 아니라고 하였기에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9-10절입니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그 유명한 삭개오에 대한 내용입니다. 삭개오는 유대인들에게 따돌림 받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아가셔서 그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시고 예수님의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1-2절입니다.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원망이 무엇입니까?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오고, 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면 자기들처럼 율법을 잘 지키는 의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먹어야지 어떻게 죄인들과 어울리는가 하면서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긴다고 힐난한 것입니다. 자기들은 의인이라는 것이지요! 이들이 바로 진노의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들을 향하여 거침없이 저주를 퍼부으신 것인데 그 말씀이 ‘화 있을 진저’입니다.

 

 

 

 

이어서 세 가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양 백 마리 중에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시고, 10개의 동전 중에 잃어버린 하나를 끝까지 찾으시고, 두 아들 중에 잃어버린 한 아들을 기다리시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는 열심히 전도하자는 비유가 아닙니다. 왜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지를 알게 하시는 내용입니다. 자기들은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자들은 심판의 말씀이요, 자신들이 잃어버린 자라는 자에게는 기쁨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단 한 사람도 긍휼을 입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어느 누구도 항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의 부요함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 결과가 오늘 저와 여러분이라면 이 얼마나 깊고 놀라운 주님의 자비입니까? 만 입이 내게 있어도 이 은혜와 긍휼을 말하고 찬송하기에 부족한 자들임을 알고 사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9:27-29  남은 자  2004. 6. 20.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ㅈ)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ㅌ)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성경을 볼 때 제일 방해가 되는 요소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만 이러한 선입견을 바울사도는 고린도후서 3장에서 수건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수건이 가려져 있어서 성경을 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일 역시 주의 영으로 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성경을 보면서 여러 가지 수건과 안경이 가리고 있습니다. 빨간색의 안경을 가지고 보면 온통 빨간 것이고, 파란색의 안경을 보면 온통 파란 색인 것처럼 각자가 모두가 다르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한분이라면 믿음도 하나이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른지를 모릅니다. 그것은 각자가 해석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이 역사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성경을 보면서 내 중심적으로 얼마든지 끌어당기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성경,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구원이 되어버리면 오늘 말씀에 남은 자라는 말씀이 나와도 어떻게 하면 나는 남은 자가 될까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 하고자 하는 바는 누가 멋있게 남은 자가 되어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섰는가를 보이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긍휼과 자비가 아니면 남은 자가 하나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씨를 남겨 두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 남겨진 씨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것이지 나는 남은 자의 특징을 모아서 그렇게 해서 남은 자가 되어야지 하는 것은 이미 자기중심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당연히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나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혹시나 그들에게 구원이 일어난다면 기생 라합이나, 다말이나, 룻 같은 이방인들이 편입되는 경우는 있더라도 자기들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로서 구원은 이미 받아 놓은 것이고 더욱 율법을 잘 지켜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로 말씀을 드리자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누가 뭐라고 해도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에게 오직 하나님께서 남겨주셔야만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요? 나쁜 정도가 아니라 마귀처럼 볼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바울사도는 정말 이단의 괴수로 보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태어난 아브라함의 후손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10:22절을 봅니다. “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것이라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를 몽둥이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심판을 통과하고 나서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는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만 아니라 나중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심판을 당하고 나서 주께로 돌아오는데 바다의 모래처럼 많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라는 것은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공의로 훼멸 받아 마땅하고 포로로 잡혀가서 다 죽어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남아서 돌아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이들이 무언가 다른 사람보다 선하고 의로와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하셔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돌아오는 자들의 모습이 온전치 못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31:7-9절입니다. “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8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9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포로로 잡혀 갔던 자들 중에 남은 자들이 돌아오는데 그들의 모습이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큰 무리를 이루어 오는 것입니다. 남은 자들이 돌아오는 대표하는 자들의 모습이 개선장군의 모습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오지 못하고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돌아올 수 없는 소경이 일순위 입니다. 이들이 돌아오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이 남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들이 무엇을 말할까요?

 

 

 

 

다니엘서 9:1-19절입니다. “1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3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4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5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6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7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데 있는 자나 먼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수욕을 입었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8 주여 수욕이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마는 9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10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11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 가운데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12 주께서 큰 재앙을 우리에게 내리사 우리와 및 우리를 재판하던 재판관을 쳐서 하신 말씀을 이루셨사오니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 임한 일 같은 것이 없나이다 13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14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셨사오니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시나 우리가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15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16 주여 내가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좇으사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 17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이다

 

 

 

 

처절하게 자기들의 죄를 고백합니다. 자기들의 그렇게 포로로 잡혀온 것이 당연한 하나님의 공의라고 인정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70년 만에 돌이키실 뜻을 깨닫고서 기도하는데 우리의 의가 아니라 오직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것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고 필하시고 끝내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9:28절입니다. 이 말씀 역시 이사야서 인용의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그 말씀하신 바를 땅위에서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침표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루시는 일 가운데서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어떻게 해서 남은 자가 되어 돌아오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자를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다면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어떠하였는지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유황불이 비같이 쏟아져서 도시 전체가 진멸된 곳입니다. 진멸 받아 마땅한 곳에서 살아남은 자가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남겨두신 분의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은 결국 창세기로 소급하여 올라가야 합니다.

 

 

 

 

인간의 범죄이후에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움을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기실 것입니다. 옛 뱀, 곧 마귀, 사단을 이길 여인의 후손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가인과 아벨이 태어났으나 믿음으로 산 아벨이 가인에 의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후손은 연결되어야 하기에 아벨 대신 셋을 후손으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자 죄악도 세상에 가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데 물로 심판을 행하십니다. 코로 호흡하는 모든 생물을 다 지면에서 멸하시는데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남은 자가 됩니다. 노아를 남겨두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 씨를 남겨두신 것입니다. 이러한 남겨두신 자의 역사가 이스라엘을 통하여 계속되어 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후손을 끊어버리려고 사단도 여러 가지 발악을 합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만이 성취되어 질뿐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조에서도 왕조가 끊어질 위기에서도 유다지파의 왕은 남겨지는 것입니다. 범죄하여 포로로 잡혀 갔더라도 남은 자가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겨진 씨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후손이 태어나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에서 남은 자의 사상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씨로 모아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들은 ㅅ)아브라함과 그 3)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3)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3)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결국 이스라엘의 남겨진 자들은 그들이 남겨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후손을 위한 남겨진 자들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진정으로 아멘이 되십니까?

 

 

 

 

우리가 아멘하고, 아니 하고와는 상관없이 어떤 자들을 훼멸하고, 어떤 자들은 남겨서 돌아오게 하고,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뜻만 남기시고자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고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그렇다면 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제 진멸 받아 마땅한 자리에서 돌아온 자들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구약에서 포로로 잡혀 갔다가 남겨져서 돌아오는 자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이 의지한 것은 그들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오직 주의 긍휼과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신 결과임을 바라보고 나온 것입니다. 그동안의 자기의 자랑이 포로생활에서 다 날아간 것입니다. 자기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긍휼과 자비만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본 말씀에서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특징은 자기들의 의가 아님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잃어버렸다가 찾아진 자들이었습니다. 자신이 잃어버렸다는 흔적을 지닌 모습이 구약에서는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오는 자들의 모습인데 소경이며 절뚝발이며 잉태한 자며 해산하는 자들로서 혼자서 올 수 없는 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6-31절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ㄴ)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구약에서 남은 자들의 모습이 한결같지 않습니까? 이들에게서 자랑거리는 우리의 지혜와 의와 거룩과 구속함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뿐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교회 와서 자기 자랑하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가장 어리석은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다 못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허물도 용납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잘나고 못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 더 나아 보이겠다는 사람은 이런 남겨진 자, 부르심을 입은 자의 모습이 싫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남겨진 자와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 씨, 그 남겨진 씨로 인하여 모든 복을 받고 사는 것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봅니다.

 

 

 

 

시편 126편입니다.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우리가 교회로 모인 자리에서 누가 어떻고 누가 어떻더라는 이야기는 하등의 중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사 가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만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들의 노아 홍수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이루시고 필하시고 끝내실 주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의 우리 됨이 참으로 주님의 긍휼과 자비로 되어졌음을 인하여 우리의 입에 주님을 찬양함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9:30-33  걸림돌  2004. 6. 27.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함과 같으니라.

 

 

 

 

요즈음 사업하는 사람들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하여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습니다. 고객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사전에 조사해서 최고의 서비스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식당을 하려면 음식의 질과 종업원의 서비스만이 아니라 분위기와 넓은 주차장까지 확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분위기는 어떨까요? 인터넷 기사 중에 이런 기사가 나왔습니다. 전국에 5만여 교회가 있고, 먹고살기 힘들어서 교회로 모이지 않으니 신도들을 모으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교회도 튀어야 산다고 웰빙교회, 서버커뮤니티 교회, 레포츠교회 등의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호응을 할만한 교회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에 오는 일에 걸림돌을 없애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두신다고 하십니다. 너무나 이상한 말씀이 아닙니까? 수많은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바대로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이라도 예수 믿어 영생도 얻고 세상에서도 성공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든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호감을 가지고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들어왔습니다. 과연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지 보고자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범죄이후에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못하도록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인간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달음박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아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자만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남겨두시지 않으셨다면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남겨두신 이유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씨를 위하여 남겨진 백성들이 구약의 남겨진 자라면, 신약에서는 그 씨를 인하여 남겨진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면 그 씨로 인하여 복을 받아 나온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이었습니까? 자기의 자랑거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간에 남겨진 자들의 특징은 오직 그들을 부르신 주님의 긍휼과 자비만이 담겨져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치장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다른 것들로 자신을 치장할 이유가 없이 주시는 긍휼을 입는 것이며, 주시는 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9:30-31절을 봅니다.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면 의롭지 않고는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의롭다 함을 어떻게 받게 되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의 법을 쫓아서 달려간 이스라엘은 의에 이르지 못하고 의를 쫓아가지도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의를 쫓아갔는데 얻지 못하였고, 쫓아가지도 아니하였는데 얻었다는 것은, 의라는 것이 인간의 노력이나 애씀이나 행위로 얻어 낼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의 행위에 나타난 경건한 공적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만 이스라엘은 이 은혜의 선물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 거부의 최종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유대인들이 거부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오늘 말씀에서는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행위에 의지한 것이 의에 이르지 못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위의 반대말이 무엇이겠습니까? 행위 하지 않음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사람의 행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행위와 대비시켜 나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의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행위 하지 않아야 의가 된다는 것이 또한 아닙니다. 복음을 들으면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 무슨 의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믿음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하거나 행하지 않거나 간에 의라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손에 달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주어진 것은 인간 행위의 한계를 알게 하시고 죄 아래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가두어 버림으로 주의 긍휼만 바라보게 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데 오히려 율법 그 자체를 지킴으로 의에 이르고자 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행위를 의지함으로 나오는 것은 결국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따로 마련하신 의를 배척하는 결과가 된 것입니다(롬10:3).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사야 8:14-15절, 이사야 28:16절의 말씀입니다. “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15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이 두 곳의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를 의지하여야 할 백성들이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헛된 것을 의지하고서는 스스로 안전하다 여기는 자들에게 대하여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방법은 시온에 한 돌을 세우시는데 그 돌은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인데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한 돌을 믿어야 심판을 당하지 아니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돌이 어떤 돌입니까? 사람들이 볼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돌입니다.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입니다. 그 돌을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이라 믿으라고 할 만큼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는 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세우신 이 돌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가복음 20:9-19절에서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시편 118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포도원을 잘 만들어놓고 농부들에게 세를 주었습니다. 때가 되어 세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보내자 농부들의 세를 주기는커녕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친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더 많은 종들을 보냈는데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이 아들을 죽이면 그 포도원이 자기들 것이 될 줄 알고 이 아들마저 죽여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포도원의 주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제때에 실과를 바칠 사람들에게 다시 줄 것입니다. 그러자 이 비유의 말씀을 들었던 유대인들이 그렇게 되지 말기를 원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 진멸 받아 마땅한 자들이 자기들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자기들에게 하신 말씀인줄 알고 어떻게 하든지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들의 죄를 지적받았으면 회개하여야 할 텐데 회개하기는커녕 예수를 죽이려고 여러 가지 책을 잡고자 질문들을 하는 것입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모세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들을 가지고 올무에 걸어 처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잡아서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렇게 구원자를 기다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께서 세우신 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보니 도저히 자기들이 소원을 이루어줄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평소에 바라고 원한 메시아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병도 고치고, 기적도 행하니 자기들을 구원한 메시아인줄 알고 따라 나섰는데 갈수록 자기들의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말만 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서 임금을 삼으려고 하니 피하여 가시면서 내가 줄 떡은 먹고 죽는 떡이 아니라 자신의 살이요 자신의 피라고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어렵다고 하시면서 다시는 따라 다니지 아니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고자 나서니 예수님께서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물로 세례를 주다가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님을 증거 한 세례요한 조차 감옥에서 예수님의 행하시는 소식을 듣고서 당신이 오실 그 메시아가 맞는지 아니면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하는지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1:6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이 듣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십니까? 십자가에서 저주받아 돌아가신 그 예수님입니까? 사람들이 모두 다 싫다고 합동으로 대적하여 배척한 그 예수 그리스도 입니까?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나서 증거한 내용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예수님께서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돌아가셨습니까?

 

 

 

 

최고의 고통과 최고의 부끄러움을 다 당하신 것입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아니하고 벌거벗겨져서 아무런 기적도 없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침 뱉고 저주하며 돌아선 십자가입니다. 자기가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고 죽어가는구나! 네가 메시아라면 네 자신이나 구원해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그 멸시와 고통과 수치 속에서 힘없이 죽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지난주에 극동방송에서 나오는 설교를 두 편이나 들었습니다. 일부러 차에서 내리지 않고 설교를 끝까지 들어 보았습니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다 나오는데 그것이 결론이 아니라 결국은 십자가에서 세상의 성공도 나오고 세상의 복도 나오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서 영생은 확보해 두었으니 세상의 성공과 복도 챙겨보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행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걸림돌인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 속에서 함께 버림 받는다는 의식이 없이 십자가를 바라는 보는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같이 죽어가는 강도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그 시험당하고, 버림 받은 그 돌을 믿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평생 강도짓하다 처형당하는 강도, 얼마나 부끄러운 인생입니까? 그러나 예수를 믿는 순간-이것이 인생 최대의 기적이요 은혜요 복입니다-그 강도는 전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낙원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죄인인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10:1-4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2004. 7. 4.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대전에 사는 사람이 서울로 가야하는데 방향감각이 없어서 부산으로 가면서 서울로 간다고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열심이 대단한 것입니다. 앞뒤 돌아보지도 않고 열심히 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당신이 어디로 그렇게 열심히 가느냐고 묻자 서울로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이 당신이 가는 길이 서울이 아니라 반대방향이라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멈추어 서서 듣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자기 확신으로 가득한 사람은 듣지 않고 계속 달릴 것입니다. 옆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향하여 자신이 바르게 가고 있는데 방해하는 방해꾼으로 보고 그런 자를 제거하여야 한다고 볼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달린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사도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열심을 내었는지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달렸는데 그것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핍박한 것이 되었습니다. 율법으로 열심히 달려간 그 끝 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돌이키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복음을 증거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며 이방인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그 거침돌인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임을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열심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의 문제였습니다. 호세아 4:6절의 말씀처럼 지식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망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인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를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면 인간은 자기 의를 세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 의가 있어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의가 없이는 하나님과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의가 어떻데 주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로마서의 대 주제가 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인간의 의와 대비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율법 외에 나타난 의입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인간이 율법적인 행함으로 의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은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의를 좇아간 유대인들은 의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를 좇지도 아니한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란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일방적으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긍휼이며 자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달음박질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만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또 어떤 반응이 어떤 나오는가 하면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의 인양 생각하는 것입니다. 봉사도 하지 않고, 헌금도 하지 않는 것이 의가 되는 양 생각하는데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또 다른 자기 의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자기 열심을 낼 때는 자기의 의가 쌓이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열심이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그것이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자기 의가 정죄 받고 깨어지지 아니하면 평생을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살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종교적인 삶, 자기 의를 세우며 살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로마서 10:1-3절을 봅니다. 바울사도가 마음에 원하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동족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을 의를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도 그렇게 잘못 달려가고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그들이 바른 복음을 알기를 간절히 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자들이 세우려고 한 것이 자기 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의란 율법지킴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고 율법의 규례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죄인으로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지킴으로 되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은 것입니다(갈2:21).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이 여기는 일에 대해서 바울사도는 결단코 타협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5,11절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할례를 전하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을 것이라고 합니다. 십자가가 사람에게 거치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 복음을 받고서 복음 안에서 잘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믿음으로만 의롭다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이 다시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한다면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는 것입니다.

 

 

 

 

할례를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것은 이스마엘을 낳고 난 이후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할례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란 인간의 행위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서 나오는 것임을 보이시기 위하여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님을 보이기 위하여 할례를 명하였는데 오히려 할례 하는 그 행위를 자기들의 의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의에 이르지 못한 것은 자기들의 행함을 의지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 싸움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역사 속에서 계속된 싸움이 이 싸움입니다. 의가 은혜로 주어지는가? 인간의 행위로 주어지는가? 아니면 절충해서 인간과 신의 합작품인가의 싸움인 것입니다. 만약에 의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면 인간 행위의 가치란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복음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자존심이 다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합시다. 의가 하나님의 선물입니까? 인간의 행위로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왜 이 싸움이 자꾸만 나오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자기 의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잘 몰라서 그렇지 가르쳐만 주면 얼마든지 해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가르쳐 주셨습니다. 율법을 백퍼센트 지키면 됩니다. 그러면 의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중에 단 한가지라고 지키지 못하면 모두가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ㄷ)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한다면 저주아래 들어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 저주아래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까? 율법 책에 기록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가 보면서도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자기 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의와 자기가 세운 의가 서로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충돌에서 깨어지고 항복하는 자는 믿는 자가 되는 것이지만 계속해서 자기 의를 고집하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배척하고, 대적하는 교만한 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라는 것이 결국 하나님과 대적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악이 오늘도 늘 도출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의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1:16-17절입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ㄱ)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복음이란 바로 거치는 돌이요, 버림 받는 돌이요, 시험 당한 돌로서 사람들이 믿을만한 돌이 되지를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돌을 믿으려면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지를 아는 사람이 믿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19-28절입니다. “봉독” 의롭다 함이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의로 세우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0: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의는 철저하게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일체의 자기의 의로움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한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날이 갈수록 더욱 절실하여 지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자기 의가 깨어지고 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441장 찬송가 가사처럼 나는 죄와 악함이 가득하게 찼다는 고백을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를 믿고 있습니까? 자기가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는 의를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를 받은 사람이라면 결단코 자기의 의를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 의를 고집하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의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율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율법의 행위나 다른 윤리나 도덕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현저히 욕보이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1-14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하기를 어떤 임금이 자기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풀어 초대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차로 초대받은 자들은 모두가 싫어합니다. 그래서 다시 종을 보내어 초대를 합니다. 그러자 돌아보지도 않고 밭에 간다고, 상업차로 간다고 하면서 거절합니다. 거절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들을 능욕하고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삼국지에도 보니 사신을 보내는데 원수로 여기면 사신을 죽여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임금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진노하여 그들을 죽여 버리고 그 동네를 불살라버렸습니다. 잔치는 준비되어 있으니 나가서 아무나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누구나 불러 모으라고 하셨습니다. 손님이 가득하자 임금이 나와서 보는데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를 향하여 물어도 유구무언입니다. 그를 결박하여 바깥 어두운 곳에 쫓아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자기의 옷, 자기의 의를 입고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보혈의 옷, 은혜로 주신 의의 옷만 입고 나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슨 옷을 입고 있습니까?

 

 

 


로마서 10:5-8  믿음의 말씀  2004. 7. 11.


5 모세가 기록하되 ㄱ)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ㄴ)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ㄷ)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천국에 관심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장에서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어떤 주인이 포도원에 일꾼을 부르기 위하여 이른 아침에 나갔다고 합니다. 이른 아침이면 아침 6시경으로 봅니다. 하루 일하면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서 포도원에 일하러 갔습니다. 오전 9시에 나가보니 장터에서 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원에 가서 일하면 상당하게 주겠다고 보내고, 12시와 오후 3시, 오후 5시에 나가도 여전히 놀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왜 놀고 있느냐고 하니 자기들을 품꾼으로 쓰는 사람이 없어서 놀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도 포도원에 일하러 보내고 오후 5시에도 사람을 포도원에 보냈습니다.

 

 

 

 

저물매 주인이 청지기를 시켜서 품삯을 주기 시작합니다. 맨 나중에 온 사람은 한 시간만 일하였는데도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오후 3시, 12시에 온 사람도 일당을 그대로 받는 것을 보고서 이른 아침에 와서 하루 종일 수고한 자기는 더 주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드디어 자기 차례가 되어서 일당을 받는데 한 데나리온만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여러분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 사람이 주인을 원망하면서 나중에 온 사람은 한 시간만 일하였는데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느냐고 항의를 한 것입니다. 그때 주인이 대답하기를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 약속을 했으니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고 하면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데 내가 선함으로 네가 나를 악하게 보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른 아침에 일한 사람을 누구로 보면 되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율법을 잘 지킨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입니다. 나중에 온 자들이란 세리와 죄인들과 창기들과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을 다 동등하게 대하자 여기에 화가 난 사람들이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이 사람의 생각은 자기 행함이 다른 사람보다 많다고 여긴 것입니다. 자기 일에 대한 양과 가치를 생각한 것입니다. 일할 곳이 없어서 놀고 있던 자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지난주의 제목이 혹시 생각이 나십니까?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의 대립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까? 아담의 범죄 이후로 계속된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자기의 부끄러움을 알게 되자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그리고서는 무화과 잎으로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린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행위로 자기를 가리고자 하는 인간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자기의 행위로 가려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부딪히는 돌이요 거치는 반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율법의 의란 모세가 레위기 18:5절에서 기록 한 것처럼 율법을 지켜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을 지켜 행하면 산다고 하셨는데 그런데 그 율법을 완벽하게 다 지켜야 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야고보서 2: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ㄴ)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율법이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 아래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로마서에서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보아온 것처럼 율법이란 모든 사람의 입을 막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세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율법이 궁극적으로 목표로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율법의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 행함을 의지하는 것이요, 자기 행위에 가치와 의미를 두는 자기 의가 가득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의는 이렇게 말하지 아니합니다.

 

 

 

 

6-8절입니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고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의는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거나 올리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의란 말씀이 가까워서 네 입에 네 마음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이 말씀은 신명기 30:11-14절의 말씀을 자유롭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어렵거나 먼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들리게 한다든가, 바다 밖에 건너가서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바울사도는 말씀대신 그리스도를 대입합니다. 바다 건너를 음부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이렇게 임의로 해석해도 되는 것입니까? 일점일획도 바꾸면 안 되는데 바울사도는 마음대로 바꾸어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의 특권입니다. 아무나 이렇게 하면 이단이 됩니다. 그러나 계시를 받은 사도들만이 이렇게 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른 해석법입니다.

 

 

 

 

신명기는 모세의 율법입니다. 이미 율법 안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모셔 내리거나 올리거나 바다 건너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쳐들어 온 것입니다. 그 아들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그 말씀이 우리의 입에 있고 우리의 마음에 있게 됨으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래서 사람들이 침 뱉고 돌아선 그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라는 것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기도 하고 모셔 올리기도 하겠다는 열심입니다. 하늘까지라도 올라가겠고, 음부까지도 내려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이나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고 모셔 올릴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인간의 의라는 것이 그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그리스도를 모셔 내려오고 음부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릴 정도의 열심이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다고 하면서 서울에서 무려 800억의 성전을 짓고 있는 중입니다. 이 정도로 지어야만 그리스도를 모셔 내릴 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모형이 노아의 방주 모형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노아의 믿음이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로 심판받는다는 것인데 그 방주 모양의 800억짜리의 성전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 심판을 견딜 수 있을까요? 참된 성전이란 성령이 임한 성도가 성전이 되는 것이지 건물이 성전이 되지 아니한다는 기본도 모른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알고도 무시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들의 열심이라면 과히 그리스도를 모려 내려올 만한 열심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교회들을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 합니다. 그러자 어떤 교회는 아예 교회 건물을 가지지 않기로 교회의 법을 만들었습니다. 자체 건물을 가지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헌금이 얼마가 들어오든지 간에 매달 백만 원씩만 남기고 전액 선교나 구제비로 돌리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대한 책이 나오고 교회가 이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이 그리스도를 음부에서 올리고자 하는 열심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지하에 앉아있는 우리는 무언가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건물을 만들지도 아니하고, 구제나 선교를 그 정도는 하지 않지만 우리가 말씀을 안다고 또는 복음을 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또 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할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는 자기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날마다 부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말씀입니다. 믿음의 말씀은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언제나 걸림돌로서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고 올리고 할 정도의 열심이거나, 아니면 그런 모습을 보고 비판이나 하면서 자신은 잘 믿노라고 착각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여지없이 박살내는 것이 믿음의 말씀인 것입니다.

 

 

 

 

조직신학의 교회론에서 참된 교회의 제일 중요한 표지가 ‘말씀의 참된 전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지 않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믿음의 말씀’으로 봅니다. 믿음의 말씀은 모든 인간의 추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소원도 부수어 버리고 교인의 소원과 뜻도 다 부수어 버리는 불이여 몽둥이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23:29-32절입니다. “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3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선지자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런 선지자들의 말을 듣는 자들도 함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부수어지는 시간이며, 동일한 그 말씀의 능력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의라고 생각하였던 것들이 다 무너지고, 새롭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그런 현장이 교회인 것입니다.

루터의 말로 마무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면 그 말씀은 참으로 우리의 느낌과 소원과 어긋나게 온다. 그 말씀은 우리들의 생각을 가장 거룩한 것들 가운데서 확고히 서 있게 놔두지 않고 모든 것을 파괴하고 뿌리 채 뽑아 버리고 흐트러뜨린다.”

 

 

 

 

로마서 10:9-15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2004. 7. 18.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ㄹ)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ㅁ)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ㅂ)아름답도다 1)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의는 하늘에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모셔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무덤에 내려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모셔 올리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그 말씀이 가까워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율법인 신명기와 선지서인 이사야서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율법은 왜 인간이 자기의 행함으로 의에 이르지 못하는 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율법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제대로 시행이 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새 언약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새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이 돌판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기록되는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임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그것을 믿음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의 말씀, 즉 믿음의 내용은 9-10절입니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또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말씀이 심히 가까워 네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고 하였기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의 내용이란 예수님이 주님이시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무엇으로 믿는다는 것입니까?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인으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 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정말 주인으로 믿는지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거저 자기가 관심하고 있는 것만 이루어 달라고 주여! 주여! 라고 부르다면 예수님을 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자기가 주인으로 있으면서 예수님을 자기의 종으로 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알라딘의 램프처럼 주문을 외우면서 슬슬 문지르면 거인이 펑 나타나서 무엇이나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그런 주로 부른다면 말로만 주인으로 부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주인이고 예수님은 거저 자기의 기도나 듣고 응답이나 해주는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사람들에게 거침돌이 되시는 예수님, 그래서 모두가 싫다고 고개를 흔들며 돌아서버린 예수님을 자기의 주로 믿는다는 것은 사람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고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원성취를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원과 예수님의 소원이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그 나라와 그 의가 필요하다고 한 적이나 있습니까? 그 나라와 그 의가 아니라 내 나라와 내 의를 구하면서 살았지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한 적이 한번이라도 제대로 있습니까?

 

 

 

 

언제 자기가 태어나면서부터 죽어 마땅한 죄인인지를 알았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마땅히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온 마음으로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자기가 죄인인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당에 나오게 되면 주여! 주여! 하면서도 주님이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서 세상적인 것을 구하는 그런 유치한 것은 이미 졸업하였다고 여기십니까? 그러나 자기 의라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믿기 전보다 더 나아진 자아상을 또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더 이상 바라볼 것이 없으니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믿고 나서 어느 정도 멋있는 인간이 되었는가를 비교해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고 자기를 치장하는 것만 필요한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순전히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부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믿음으로 주를 부른다는 것은 자기가 얼마나 부끄러운 죄인인지를 아는 사람들만이 부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의가 없기에 부끄러워서 감히 얼굴을 들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0:11절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10:10절을 다시 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결국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의인 것입니다.

 

 

 

 

로마서 4:22-25절을 봅니다.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브라함의 복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복인데 그 믿음의 내용이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범죄를 인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로마서 10:13절을 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제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구원을 얻는 것은 어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인 업적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이름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항복입니다. 자기가 행하는 것이라고는 죄 밖에 없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르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방금 로마서의 말씀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시고서는 예수님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여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요한복음 6:38-40절입니다.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좇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자신이 거대한 홍수나 해일 같은 죄악의 물결에 휩쓸려 지옥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인식하고서 부르는 주의 이름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받을 때에 일어나는 부르짖음입니다. 스스로 죄를 억제하고 의를 만들어내어서 심판을 벗어나보겠다는 선악과를 따먹고 난 이후의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이 죄임을 아는 자는 더 이상 자기 이름에 기대를 걸지 못하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주의 이름만 의지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데 이것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자기 의로 가득 찬 유대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겠지만 그러나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감사하게 와 닿는 복음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하루에 12시간을 일하였든지 한 시간을 일하였든지 차별이 없습니다. 직업이 무엇인지, 과거의 전과가 어떠하든지, 어디에 살든지, 성격이 어떠하든지 간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여야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데 그것은 요엘서 2장에서 이미 예언된 내용입니다. 요엘서 2장에서 예언된 대로 주의 성령이 임한 사건이 말세적인 사건입니다. 요엘서에 말세에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사건이 심판의 상황과 함께 예언되고 있습니다. 불과 피와 연기기둥이 일게 되는 심판의 상황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종말이란 메시아오심을 종말의 사건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승천 하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종말이 왔고 이것이 말세의 사건입니다. 이제 성령을 보내셔서 추수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말씀이 종말의 사건이며 징표가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13-15절을 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하여 믿어야 합니다. 믿으려면 믿음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들으려고 하면 전파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전파하는 사람은 보내심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듣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믿고 아니 믿고의 결정을 그 사람이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한편에서는 전하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올라가보면 무엇 때문에 전하고 믿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보내시는 분이 중요합니다.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복음을 들을 수 있고, 그 복음을 듣고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참으로 주님의 보내심과 부르심이 있기에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이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반드시 자기 부인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도, 듣는 자도 자기 부인이 되어지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성도요 교회입니다.

 

 

 

 

지금이 종말입니다. 지금이 심판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 종말의 때에 아직도 주의 이름이 증거 되고 주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구원받을 때요 은혜의 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의 이름을 부인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며 기적인지를 아시고 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자기가 부인되어지고 오직 주의 이름만이 드러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입이 아니라 발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슬기롭다면, 그 교회는 무엇이 그로 말미암아 결과 되어지든 여하튼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16-21  누가 믿었나이까?  2004. 7. 25.


16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ㅅ)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하였느니라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ㅈ)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하였고 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ㅌ)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하였고 21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ㅋ)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자기의 이름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에서 내려오게 하거나 음부에서 모셔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입에 있고 그 마음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믿어야 합니다. 믿기 위해서는 들어야 합니다. 듣기 위해서는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전파하기 위해서는 보냄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게 된 원인을 추적하여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결국 하나님입니다. 마치 인간의 족보를 역으로 올라가고 올라가면 하나님의 창조가 나오듯이 우리가 믿게 된 원인이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보내시는 분에 있다는 것입니다.

 

 

 

 

17절의 말씀을 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런데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복음서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계시한 내용이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서와 시편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 있습니다(요5:39). 새번역에서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가지고 설교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어야 하는데 그리스도가 증거 되지 아니하고 세상의 성공이나 복을 받는 비결이 증거 된다면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심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긍정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듣는지를 분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8절에서 전파하는 내용이 믿음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의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이 제대로 전파되면 믿는 자가 많이 나오겠습니까?

 

 

 

 

저희 교회 어느 집사님이 서울에 가서 한 2,000명 출석하는 교회에 참석하시고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 목사님이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시면 얼마나 좋겠는가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야 기분이 좋습니다만 그러나 복음을 전한다고 누가 믿겠습니까? 하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16절을 봅니다.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전한 내용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고 있습니다. 이미 복음이 증거 되었는데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이며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이 복음이 이미 구약에서 증거 되었는데 그러나 그 복음을 과연 누가 믿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복음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복음이 증거된 것입니다(갈3:8). 그런데 그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다 순종치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떤 복음이기에 사람들이 믿지 아니한 것입니까? 복음이란 말 그대로 복된 소식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로마서 10:16절에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라고 하고 있는 이 말씀이 이사야 52: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증거한 좋은 소식을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식이 증거 되어도 믿는 자가 없었다는 것은 믿음이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이 아름다운 소식을 믿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가지고 오는 메시야가 고난 받은 종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2:13-15절입니다. “1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3)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4)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15 후에는 그가 5)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종이 장래에 지극히 존귀하게 되고 열방을 놀래게 할 것이며 열 왕들이 그 입을 봉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그 이전에 오시는 모습은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여 무리가 그를 보고 놀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53:1-12절입니다. “1 우리의 1)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2)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3)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4)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고난 받은 여호와의 종, 너무나 볼품이 없어서 배척받았던 종, 그러나 그의 모든 고난과 죽으심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하여 대신 매 맞음이요 대신 죽임당하는 이 종이 바로 구원을 가져올 메시아의 모습입니다. 누가 이 메시아를 믿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라 구약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에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는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역시나 배척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메시아를 믿고 따르겠습니까?

 

 

 

 

18절을 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듣지 못하여 믿지 못하였다는 핑계가 통하지 아니합니다. 이미 온 세상에 다 증거 된 것입니다. 시편 19:1-4절입니다.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 1)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렇게 온 땅에 다 통하고 이르게 되었지만 들을 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18-23절입니다.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3)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온 세상에 선포된 하나님의 영광과 그 말씀을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습니까?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메시아를 믿는 일에 이르지 못하였습니까? 그들이 그들의 행위를 의지한 까닭에 믿음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 아닌 자로 하여금 시기 나게 하고 미련한 백성으로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고 모세가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신명기 32:21절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구원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최신 유행하는 신들을 좇아 다시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다 선포되었는데도 사람들의 마음이 허망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몰랐고 찾지도 아니한 자들로서 그저 신이라고 부르고 찾는 것은 전부 자기를 위한 신, 즉 우상을 찾아 섬겼던 것입니다. 그 신의 이름이란 어떻게 바뀌든지 내 구원받고, 우리 집안 잘되고, 우리나라 잘되게 해주는 신이라면 부처든지 예수든지 얼마든지 받들어 모시겠다고 섬겨온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너무나 볼품이 없습니다.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습니다. 연약합니다. 질고를 아는 자입니다. 잡혀가실 때에도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조용하게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힘없이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 고난 받는 종을 자기의 메시아로 고백할 자가 누구 있겠습니까? 그 십자가의 죽으심으로만 자기 백성을 의롭다 하시는 길임을 누가 믿었습니까?

 

 

 

 

로마서 10:20절입니다.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문의하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바울사도가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그를 믿으면 믿는 자도 함께 세상에서 버림을 받아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 찾고 문의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 메시아라면 오히려 피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이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기적이요 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 비유를 알아듣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성경에서 증거 하고 있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우리가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았는데 그 복음의 말씀이 우리의 입에 있고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까? 이것이 실로 기적이며 복입니다. 이 무더운 날씨에, 방안 실내온도가 새벽 4시까지 36도가 오르더라도 복음을 듣고 믿게 된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지옥은 불로 소금 치듯 하는 곳입니다.

 

 

 

 

로마서 11:1-6  은혜로 남은 자  2004. 8. 1.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 ㄱ)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ㄴ)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지난주의 제목이 혹시 생각나십니까? 설교 제목은 설교 마치는 순간에 잊어버리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하던데 제목이 중요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누가 믿었나이까?” 이 말씀은 복음이 증거되었는데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왜 그 아름다운 소식을 믿지 아니하였을까요? 소식이 전하여지지 않아서 믿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0:18절을 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듣지 못하여 믿지 못하였다는 핑계가 통하지 아니합니다. 이미 온 세상에 다 증거 된 것입니다. 시편 19:1-4절입니다.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 1)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렇게 온 땅에 다 통하고 이르게 되었지만 들을 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18-23절입니다.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3)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결국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였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인 낮아지신 예수님, 십자가의 달리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메시아는 왔습니다. 왔지만 그 메시아가 너무나 볼품이 없었기에 자기들의 소원을 충족시켜줄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그를 십자가에 메달아 죽여 버리고 매장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제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까? 소망 자체를 죽여 버리고 매장하여 버린 상황에서 무슨 소망을 가지고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은 모든 것을 잃어도 소망을 가지고 있으면 산다고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다른 말로 꿈, 희망, 비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우스가 인간을 저주하기 위하여 판도라에게 상자를 하나 주었는데 그 상자를 열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판도라의 상자에서 온갖 재앙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인간들이 싫다는 것은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자 판도라 상자를 급히 닫았는데 마지막 하나 남은 것이 희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떠한 재앙 속에서도 희망이 있으면 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희망마저 사라져 버린 장소 그곳에 바로 십자가라는 곳입니다. 마지막 십자가의 처형장에서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서 따라 가 보았으나 결국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절규 속에서 돌아가시는 그 자리에서 모두다 희망을 잃어버리고 돌아설 수밖에 없는 자리가 아닙니까?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소망이 없이 완전히 버림받은 것입니까?

 

 

 

 

로마서 11: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바울사도 자신도 이스라엘인이라고 합니다. 자기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지 아니할 뿐 아니라 이단의 괴수로 알고서 그를 믿고 추종하던 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 줄 알고 힘을 다해 그리스도를 대적한 자였습니다. 이런 바울을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우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디모데전서 1:12-17절을 봅니다.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핍박자요 포행자인 바울을 사도로 세우신 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바울은 아주 열심이 있기에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바울 같은 죄인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드러내는 도구로 적합하였기 때문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이 임하셨도다! 여러분 이 말씀 앞에 바울이 무어라고 합니까?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요! 이 소식 앞에서 무어라고 하는 것입니까? 손을 번쩍 치켜들면서 저요! 저요!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아 죽인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는 그를 죽였는데 그는 나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다 불순종아래 가두어버린 것입니다. 스스로 순종하여 나왔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주의 긍휼과 자비로 나온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순종과 자기의 능력으로 나온 사람이기에 주님의 은혜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일관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은혜에서 은혜로입니다. 아브라함을 은혜로 부르시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신 것은 사람이 자기 행위로 의로울 수가 없다는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아브라함 이후 모세시대에 주어지는 것은 왜 인간이 스스로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고 오직 은혜로만 되는 것인지를 알게 하기 위한 장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일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관된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1:2-4절을 봅니다. 오직 은혜로만 남겨진 자를 자기 백성 삼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엘리야를 통하여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어떤 사람입니까?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이라고 하는 아합과 그 아내 이세벨의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부름을 받을 때부터 놀라운 기적과 능력으로 활동한 선지자이며 마지막은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버린 선지자입니다.

 

 

 

 

아합 왕 시대에 북 이스라엘에 나라에서 월급을 주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무려 850명이나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면 저주가 임하게 되어 비가 오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엘리야선지자가 자기의 말이 없으면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의 저주에 따라 그렇게 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이 대단한지 이스라엘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이 불덩어리 같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주는 음식을 먹기도 하고 물이 마르자 사렙다 과부의 기름병과 가루 통에 흉년동안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아니하는 기적과 그 아들을 살리는 기적도 일어난 것입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나타나라고 말씀하시자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를 다 불러 모아서 대결을 합니다.

 

 

 

 

열왕기상 18:20-22절입니다.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으니라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

 

 

 

 

이 대결에서 엘리야가 멋지게 승리를 합니다. 우상 숭배하는 선지자들을 다 잡아서 죽여 버립니다. 이제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비가 오기를 일곱 번 기도하여 비가 오기 시작합니다. 바로의 병거보다 더 빠르게 아합의 성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이제 불로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아합의 성도 불살라 버리는지 보고자 하였겠지요!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은 내일 이맘때까지 엘리야의 목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자기에게 저주가 임하리라는 이세벨이 자기의 신의 이름으로 저주의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무서워서 도망을 갑니다. 로뎀나무 아래 이르러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먹을 것을 주어 기력을 회복하여 호렙산에 이르게 됩니다. 이곳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왜 이곳에 있느냐는 말씀에 엘리야의 대답을 보겠습니다.

열왕기상 19:10-14절입니다. “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엘리야의 이 대답에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고 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을 남겨 두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엘리야 자기 혼자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이 특심인 줄 알았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자기처럼 믿어야 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 자는 자기 혼자뿐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크고 강한 바람으로도, 지진으로도, 불로서도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왜 여기 있느냐는 말씀 앞에 자신만이 남았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이것이 택하심을 따라 남아진 백성들입니다. 이들에게서는 자기의 열심을 내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기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감히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 엄청난 기적과 능력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순간입니다. 입을 닫고서 할 말은 오직 은혜로 남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엘리야의 고백이고,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로마서 11:7-12  구하는 그것  2004. 8. 8.


7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8 기록된바 ㄷ)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1)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가로되 ㄹ)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사람이 살아있는 한 무언가를 구하면서 살게 됩니다. 생존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의식주가 해결되면 또 다른 것을 구하면서 살게 됩니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없다고 해서 문화활동도 하고 또 다른 여러 가지 욕구들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구들은 사람이 무덤에 들어가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러한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사람들이 평생을 살아가는데 이런 과정에서 서로 서로 자기들이 찾고자 하는 것에 대한 우월성을 주장하고 비교 경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추구하는 것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구하는 것을 속물적이고 저 차원의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에 그 사람이 무엇을 구하며 살았는지를 가지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구하면 준다고 하면 사람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찾아 소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주 인기 있는 말씀이 마태복음 7장의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악한 아비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가 하시는 말씀을 가지고 자기가 구하는 것을 그 좋은 것에 대입시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가 구하고 찾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찾고 구하는 그 좋은 것이란 누가복음 11장에 의하면 성령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고 주시는 것이 성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기의 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자기의 죄와 비참함을 알게 되기에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에 보시면 이스라엘이 무엇을 구하고자 하였는데 구하고자 한 그것을 이스라엘이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구하고자 한 사람들이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한다고 다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택하심을 입어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한 것은 적어도 우리가 이해하는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는 그 내용이 하늘의 신령한 것일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구하고자 한 그것이 바로 ‘의’였습니다.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것이란 정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구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다고 하였는데 그런 세상의 것들을 구하지 않고 의를 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그 구하는 의에 이르지 못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욕심과 정욕을 위하여 세상의 것들을 구하면 안 되지만 착하고 바르게 살아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옳게 살아간 사람들을 우리는 의사(義士)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과서에도 의사들의 이야기가 실리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렇게 의에 이르고자 열심히 하나님을 찾아 구하고, 율법을 지켜 행하였는데 왜 그렇게 구하고자 한 그 의에 이르지를 못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착하고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힘을 주고 격려하여서 의에 이르도록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의를 찾아 노력한 사람들이 의에 이르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항의하고 싶지 않습니까?

 

 

 

 

7-8절을 봅니다. 구하고자 한 자들은 얻지 못하였는데 그러나 얻은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입니다. 이들 외에는 완악하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길은 어떤 인간도 스스로 노력한 자기의 행위로 의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보고 듣고 깨달아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29:10절과 신명기 29:4절의 말씀을 자유롭게 인용한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부어 주사 너희 눈을 감기셨음이니”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부어 주사 너희 눈을 감겨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스스로 깨달아 돌아오지 못하게 하신다는 이사야 6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주신 말씀과 같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스스로 진리를 찾아 나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진리를 찾아 나서는 자기의 의도는 선하고 옳은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자들을 속물이라고 하면서 자기는 그러한 물욕적인 사람이 아니라 괜찮은 사람이라는 우월감, 자기만은 하나님을 위하여 바르게 산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는 자기 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람이 지난주에 보았던 엘리야입니다. 자기만이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특심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바알에게 절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 7천명을 남겨 두셨다고 하심으로 엘리야의 입을 닫게 만드신 것입니다. 모든 교만이 다 꺾어지는 것입니다. 엘리야 자신의 열심도 꺾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이 특심이었던 것도 자기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자 일뿐인 것입니다.

 

 

 

 

로마서 11:5-6절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하여 사람의 행위는 빠져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만 남기시는 것이 원칙인데 사람의 행위가 가미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11:9-10절입니다. 시편 69편의 내용을 다시 인용합니다.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항상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라고 한 것입니다. 시편 69편에 메시아의 고난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런 중에 주님께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대신 고난당하심으로 일어나는 구원이지 사람의 일이란 결국 대신 고난당하는 메시아에 대하여 눈이 감겨지고 귀가 막혀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구하고자 한 그것을 찾아 나섰지만 그들이 구하고 찾아 나섬마저 정죄를 당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이 진리를 향한 열정을 가진다고 해서 그것이 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진리를 향한 열정이 그 열심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믿는 일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일, 거룩하고 바른 것을 찾고자 나섬도 공격당한 그 자리에 오직 주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남겨진 자들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9:30-33절입니다. 의를 좇아간 이스라엘은 의에 이르지 못하고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에 이르게 된 것은 믿음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행위에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가 어떤 행위까지 정죄 받게 된 것입니까? 의를 좇아갔다는 것조차 정죄당한 것입니다. 그 의를 좇아간 열심이 오히려 믿어야 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자기 의가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의를 구하고자 좇아간 그 열심의 종착점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리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완전한 절망입니다. 인간이 최고의 선을 추구하여 달려갔다는 그 자리가 하나님의 의를 배척하는 현장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이루고자 한 의를 찾아 나선 정점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진리를 찾아 나서지도 않는데 그래도 나는 진리를 찾아서 이렇게 애를 쓰고 있으니 그런 나는 의롭지 않느냐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른 교회들은 다 시류를 따라 그렇게 흘러가더라도, 나는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고 진리를 따라 간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그런 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택하심을 따라 은혜로 남겨진 자들뿐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완전히 버려진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11-12절입니다. 저희의 넘어짐이 오히려 이방인에게 구원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넘어진 것은 자기들의 행위에 의지하여 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행위도 없는 이방인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을 통하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하여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은 어떤 인간의 행위로 되지 아니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한 그 자리가 예수님을 죽이는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이 실패의 자리에 모든 인간의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 은혜로 의에 이르게 된 것을 통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또다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의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이든 이방인이든 자유롭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쌓기 위하여 열심이 달려간 이스라엘은 자기 의를 구하고 찾으려고 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아니한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하여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간에 오직 은혜로 남겨진 자들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중에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돌아올 때에 무엇으로 돌아오겠습니까? 이제는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자기들이 구하고자 좇아간 의가 아니라 하늘에서 은혜로 주어진 의가 그들에게 찾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의롭게 하시는 주님으로 세워진 것이기에 더 이상 자기들이 무엇을 구하여 받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은혜로 주셔서 받게 되었다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하나님의 일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드러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오늘 성도의 연약과 실패로 인하여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인하여 왜 나는 이럴까하면서 자기를 탓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럴수록 나는 이러니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알지도 못한, 그래서 찾아 구하지도 아니한 의가 선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13-15  나는 누구인가?  2004. 8. 15.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얼마 전에는 도올이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텔레비전에서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 강의에서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조상을 둔 위대한 민족인가를 역설하였습니다. 그러자 젊은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감동하면서 박수를 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즈음 정치권에서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좌파냐 우파냐 중도냐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정체성을 강변하면서 국가의 장래나 이익을 위한다고 해도 결국은 자기 당의 이익을 챙길 뿐입니다.

 

 

 

 

그러면 설교시간은 무슨 시간입니까? 역시나 우리의 정체성을 알아보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을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도 크게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한다고 봅니다. 첫째는 우리가 비록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는 죄인이었지만 이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기에 우리는 얼마든지 위대한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지난주 합동측 신문인 기독신문에서 책 광고가 나왔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 한다”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부제가 SAT만점, 하버드 의예과 전액장학생으로 합격이라는 것입니다. SAT란 우리나라의 대학입학 수학능력시험과 같은 미국에서의 시험입니다. 1,600점 만점에 1,600점을 받은 것입니다. 철저한 신앙교육 속에서 말씀으로 양육 받고 주일성수, 교회 봉사, 이웃 섬김을 하면서도 세상 학생들보다 월등히 우수한 성적을 낸 ‘믿음 학습법’ 대 공개라고 소개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몇 개 모아서 설교시간에 이야기 하면 사람들이 환호할 것입니다.

 

 

 

 

둘째는, 성경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알아봄으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이라는 고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어찌할꼬! 하는 탄식이 나오게 되면 제대로 자기 정체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바울사도처럼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는 고백이 나오면 제대로 된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또한 바울을 감옥에 가두었던 간수장이 자살하려고 하였을 때에 그때에 가장 기쁜 소식이 무엇이겠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발이 없이 구원을 이야기 하게 되면 평소에 자기가 원하는 구원의 상태를 그리게 됩니다. 그러한 구원관도 결국은 자기 욕망일 뿐입니다. 잘못된 구원관의 전형적인 모델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 남은 자들이 있어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계시하였습니다만 절대 다수의 유대인들의 구원관이 잘못되어 있었기에 참되신 구원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히브리서 11장에서 모세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택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능욕 받은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한 것은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더 큰 재물이며 상급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세를 믿었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도 믿었을 것인데 이러한 모세를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믿었던 메시아는 애굽의 모든 영광, 세상의 영광을 버리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믿었던 메시아는 세상의 영광을 주는 메시아였습니다. 이것은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이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싫어하여 십자가에 죽이는 일에 동참한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은 세상의 영광을 오로지 유대인들에게 회복시켜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한다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명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의 골육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을 통하여 이스라엘로 시기가 나서 얼마라도 구원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단지 자신의 민족애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였지만, 그 중에 자기 자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가 이스라엘에게도 일어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보는 이방인들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자꾸만 자신을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에게 대입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로마서 11:13절 이하에서 이방인들에게 자긍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가 잘나서 택함을 입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일부가 교만하여 불순종함으로 꺾여진 자리에 너희가 접붙여 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5-6절입니다. “5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구원이란 이방인도 아니요 사마리아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피가 섞였다고 이방인 취급받은 사마리아인들, 그래서 개처럼 취급당한 사마리아인들보다 더 못한 이방인들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이것을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5:21-28절입니다.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자신을 개로 인정한 이 여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믿음이 크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무엇으로 확인을 하시겠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이런 이방인에 대하여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방인인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을 유대인들에게도 이방인에게도 나타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일부가 꺾어진 것은 자기들의 행위에 의지한 것입니다. 그것이 교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이심으로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일관성이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그의 자비와 무궁하신 사랑으로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인간의 자기 의를 무너뜨리는 예수님이 싫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모든 특권들을 무시하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율법을 지키는 일에 목숨을 바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들보다 세리와 창기가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인 가 하는데서 오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예수님을 제거해버린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주의 긍휼과 자비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자는 반드시 구원하시는데 그것은 넘어지고 실패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게 하셔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역할을 바울사도 자신이 체험하고 나서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이방인의 지역으로 가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언제나 유대인들이 있는 회당을 먼저 찾았습니다. 회당이 없을 시는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만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거부하면 다시 이방인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도의 결론이 사도행전 끝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28:23-28절입니다. “봉독” 바울의 이 복음을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합니다. 그러자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하고 하면서 28절에서 그런즉 하나님이 이 구원을 이방인에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오늘 이방인인 우리가 이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까? 믿었다면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또다시 다른 이방인에게로 복음은 흘러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인간의 자기 행위나 자기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사람을 입어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죄 가운데 있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죄 가운데 있었고,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죄가 무엇인지를 보이시기 위하여 선택한 모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불순종아래 가두어 두심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로마서 11:32절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하심이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긍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긍휼의 구체적인 증거물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2:11-22절을 봅니다.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누구였습니까? 이방인, 무할례당,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자, 하나님도 없던 자, 그래서 멀리 있던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간에 그 피로 그 십자가로 의롭다 함을 입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이 일을 이루어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1:16-24  접붙임  2004. 8. 22.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찌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금메달을 따게 되면 왜 우리가 기분이 좋은 것입니까? 그 사람이 한국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금메달의 영광을 위해서 무려 4년을 밥 먹고 하는 일이 그 일입니다. 엄청난 훈련을 합니다. 인내, 절제를 통하여 그런 메달이 나옵니다. 우리는 텔레비전만 보고 있다가 마치 자기가 금메달을 딴 것처럼 환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분만 잠시 좋아질 뿐이지 그 금메달의 혜택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잠시 있다가 없어질 안개와 같은 영광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 허무하지요!

 

 

 

 

그러나 허무하지 아니한 단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찬양할 내용인 것입니다. 오늘 그 영원한 영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 혜택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16절입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서 토지의 맏물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처음 익은 곡식가루로 떡을 만들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떡덩이가 거룩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 처음 것 즉 맏물을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까? 그것을 드림으로 나머지도 거룩함을 입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11번째 아들인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형제들의 주가 된다는 계시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더욱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팔려간 요셉이 나중에 그 부모형제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요셉의 희생으로 가족들이 살아나게 된 것은 바로 장자의 희생을 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자란 누가 희생하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유월절 밤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장자가 살아남지만 피를 바르지 아니한 집안에는 장자가 다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장자는 어린 양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이나 짐승이나 초태생의 수컷을 하나님의 소유로 정하신 것입니다. 나중에 레위지파를 모든 이스라엘의 장자로 대신하게 합니다. 이러한 뜻들이 곡물에도 그대로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장자로 지목된 자는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다른 형제들에게 그 희생의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29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맏아들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희생으로 다른 형제들이 의롭다함과 거룩하게 됨과 영화롭게 됨을 얻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다시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 접붙임의 비유입니다.

 

 

 

 

16절을 다시 봅니다.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하기에 떡덩이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떡덩이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처음 익은 곡식가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에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들의 열심입니까? 헌신과 인내와 절제와 희생으로 거룩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장자의 희생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한마디로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접붙임에 대하여 알지 못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접붙임은 돌 나무에 좋은 가지를 접붙이는 것입니다. 어릴 때에 밤나무나 감나무에 접붙이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돌감나무나 재래종의 밤나무는 그 열매가 너무나 보잘 것 없습니다. 그래서 개량종의 나뭇가지를 접붙이면 뿌리는 돌감나무인데 열매는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접붙임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도시 출신이라서 접붙이는 것을 보지 못해서 상식에 맞지 않는 이런 말을 했을까요?

 

 

 

 

17절을 봅니다.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돌감람나무란 이방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의 정체성이 이방인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인 우리가 잘려져서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 그 진액을 빨아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뿌리는 참감람나무인데 열매는 돌감람나무의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과일 농사 망치는 것입니다.

 

 

 

 

만약에 좋은 열매를 원한다면 이렇게 접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돌감람나무를 그대로 두고 참감람나무 가지를 잘라다가 접을 붙여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뿌리는 돌감람나무이지만 열매는 참감람나무의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상식에도 맞지 않는 접붙이는 비유를 통하여 무엇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18절을 봅니다. 자긍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방인들이 예수 믿어서 구원 얻게 된 것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의 능력인 것처럼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지가 뿌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가지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란 무엇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까? 뿌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전하여 간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이며 겸손인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왜 일부가 잘려진 것입니까?

 

 

 

 

19-21절입니다. 유대인들은 믿지 아니하여서 잘렸다고 합니다. 믿지 아니함이란 교만입니다. 높은 마음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들의 힘과 능력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인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잘려진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인 너희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진 것은 전혀 너희들의 자랑거리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가지도 아끼지 아니하셨는데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가지를 꺾어버리는 이유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높은 마음을 품는 교만입니다. 이 교만의 원천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이미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하게 지었으나 사단의 유혹을 받은 인간이 높은데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것은 높으신 하나님과 동등 되고자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뿌리를 하나님에게서 잘라내고 스스로 독립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인간이 스스로 독립한 것이 아니라 마귀의 권세아래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로부터 아무리 인간이 자유라고 발버둥을 치더라도 그것은 돌감람나무일 뿐입니다.

 

 

 

 

태어난 인간을 가만히 버려두면 그 열매란 것이 인간세계에서 아무리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영생을 주는 열매가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금메달을 따면서 무어라고 아나운서가 말하고 있습니까? 상대방이 실수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포츠 정신이 어떻고, 하면서 좋은 것으로 말합니다. 스포츠란 인간의 정복욕을 전쟁대신에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 정복욕이란 하나님조차 이겨버리고자 하는 교만입니다.

 

 

 

 

지난주에 민족사관 고등학교 이야기를 잠시 하였는데 그 고등학교 학생들의 기숙사에 이런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에게 복수하자’ 무슨 의미로 그렇게 써 붙여 놓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짐작컨대 자기의 운명을 극복하자는 것으로 보았습니다만 그러나 저의 눈에는 한없는 교만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다고 스스로 돌감람나무의 신세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유대인의 일부를 꺾으시고 이방인의 일부를 접붙이시는 것을 무엇을 보이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2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어떻게 인간이 구원받는가를 이야기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꺾여짐을 통하여 하나님의 엄위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엄위라는 말이 어려우시면 거꾸로 위엄으로 보시면 됩니다. 두렵고 엄하신 분이십니다. 그것을 교만한 이스라엘의 꺾어짐을 통하여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자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부르지도 찾지도 아니한 이방인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도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다시 접붙임을 받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엄위와 인자를 보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인자하심이 어느 정도 입니까?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서 맺는 열매가 무슨 열매입니까? 돌감람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러함에도 왜 붙여두시는 것입니까? 참감람나무의 희생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가지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가지를 보전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열매란 무엇입니까?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다가 잘린 것입니다. 이제는 그러한 자리에서 잘려진 것입니다. 돌감람나무에서 잘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원뿌리에서 잘려진 것입니다. 이제는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져서 그 진액을 빨아먹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주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처럼 가지가 나무에서 끊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라죽는 일뿐입니다. 그러나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과실이 무슨 과실이겠습니까? 흔히 전도, 봉사, 선교, 구제 이런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미 유대인들이 그런 것을 너무나 잘하였습니다. 얼마나 전도를 열심히 하였으면 산과 바닷가도 다시면서 전도했는데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나 지옥자식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주의 인자하심에 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접붙임을 받은 자들은 우리의 본성에서 나온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고 일어난 일입니다.

 

 

 

 

24절입니다.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어떤 사람입니까? 평생 참감람나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액을 빨아먹어야 살아가는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혹 선한 열매가 나오는 것이 있다면 우리의 본성을 거슬러 나오게 하는 주의 일임을 알고 영광을 주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돌감람나무의 열매가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뿌리에 붙어있게 하시는 주님의 인자하심에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11:25-32  비밀  2004. 8. 29.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2)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ㅁ)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ㅂ)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함과 같으니라 28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비밀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비밀이란 아무에게나 알려주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만 알려주려고 비밀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 비밀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글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성경의 비밀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에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만 열려지는 책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는 무엇이 비밀입니까? 우선 32절부터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이것이 말이 되는 것입니까? 순종하려는 인간을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왜 모든 인간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시는 것입니까? 병 주고 약주는 것도 아니고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고서는 긍휼로 구원하신다는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사람마다 하나님을 다 알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신이란 인간의 투사(透寫)’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을 투사시켜서 나오는 상들을 모아놓은 것이 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추면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어떤 교회 앞에 유치원부지가 나와 있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가 설교시간에 저 땅을 보면 목사인 나는 눈물이 나오는데 왜 여러분은 그런 마음이 없습니까? 라고 하였답니다. 그러면 이 목사는 땅에 대한 욕심이 투사되어 나온 것입니다. 기도하고 헌금해서 그 땅을 사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섬긴다면 이 하나님이 바로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우상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우상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참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이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섬기면 반드시 나오는 말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순종해서 이런 복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순종하지 않아서 저주를 받았다고 합니다. 축복과 저주라는 당근과 채찍을 들고서 자기의 욕망을 채워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방금 이 말씀에 아멘이 되십니까? 아니면 화가 나십니까? 아니 인간을 도대체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는가 하고 항의하고 싶지 않습니까? 제일 많이 화가 난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율법을 모르는 자들과 알아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죄인이지만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을 의로운 자라고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생각이 바로 높은데 마음을 두는 것이며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꼭 나오는 질문이 ‘그러면 순종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라고 합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순종이 어느 정도여야 순종이라고 하겠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이렇게 순종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순종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일부가 잘려나감을 통하여 하나님의 엄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순종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교만은 하나님과도 맞먹으려고 드는 것입니다. 이런 교만이 가득한 인간임을 누가 어디에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입니까?

 

 

 

 

자기들은 하나님을 제일로 잘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의 긍휼과 인자에 거하는 것입니다.

 

 

 

 

11:22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고 합니다. 자기들의 실력으로 참감람나무에 붙어있는 줄 착각한 가지들을 잘라내고서 돌감람나무를 접붙인 것은 주의 엄위와 인자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에게서 자기 자랑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긍휼과 자비만이 드러나는 도구들인 것입니다.

 

 

 

 

두 번째 비밀을 보겠습니다. 25-27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잘린 것은 영원히 잘린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일부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되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가운데 잘려진 가지들이 돌아오는 것도 긍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오직 주의 긍휼로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28-31절입니다. 복음으로 하면 이스라엘이 우리 때문에 원수 된 자라고 합니다. 이방인이 긍휼로 돌아오게 되는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더욱 강퍅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가장 넘기 힘들었던 장벽은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와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증거되는 일이 유대인들에게 크나큰 장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원수가 되었지만 그러나 택하심을 말하자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것입니다.

 

 

 

 

그 조상이란 아브라함과 다윗 같은 언약을 받을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언약하신 것으로 인하여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기에 택하신 자들을 언젠가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 부르실 때에는 반드시 긍휼로 나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신 비밀입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고자 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긍휼로 구원하시는데 왜 긍휼이어야 하는가 하면 인간의 배후에 있는 마귀를 멸하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인간에게 심어준 생각은 교만입니다. 다른 말로 자존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얻어먹고 살아야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그런데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렇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긍휼을 배척하는 행위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을 때에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되실 텐데 왜 그대로 두셨을까요? 선악과를 따먹고 난 그들이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가리고 있는 그들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고 창세기 3:15절의 원시복음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뱀의 후손은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여인의 후손의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에 막지 아니하심도 긍휼을 베푸시는 장치가 될 뿐 아니라 그렇게 유혹한 마귀도 멸하시는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마귀를 멸하시는 전쟁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선악과를 따 먹게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조차도 자신의 긍휼을 나타내시는 도구로 사용하시며 또한 마귀를 멸하시는 계기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살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 힘과 실력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 최후의 심판이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미혹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안식과 관련하여 한 번 더 보고자 합니다.

 

 

 

 

천지만물을 6일 만에 창조하시고 인간은 제일 마지막에 창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다음날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의 특징은 노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먹고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로 주어진 것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받고 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삶입니다.

 

 

 

 

세 번째 비밀을 봅니다. 26-27절입니다. 26절에서 구원자가 오셔서 야곱의 경건치 아니함을 돌이키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스스로 경건치 아니한 것에서 돌이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스스로 돌이켜 올 수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말씀이 틀린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까? 구스인이 피부색을 바꾸거나 표범이 그 반점을 스스로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9:20-21절을 봅니다. “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0절을 인용하는데 조금 다르게 인용합니다. 야곱의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구원이 임한다는 말씀을 바울사도는 구원이 임하게 되면 야곱의 경건치 아니함을 돌이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비밀입니다. 그것은 21절에서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신과 그 말씀이 그 후손에게서 영영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27:9절입니다.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 죄를 없이 함을 얻을 결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 곳의 말씀을 가지고 바울사도는 복음의 비밀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26-27절을 봅시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자기 백성을 돌이키시고 죄를 없이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여 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주의 언약을 따라 죄 없이 함을 받는다는 이 사실보다 더 큰 기쁜 소식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결심하고 믿어주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긍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순종하여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순종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 그를 믿는 자에게 의롭다고 하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로 주의 긍휼로 되어진 것임을 알고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음을 알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1:33-36  깊도다!  2004. 9. 5.


33 ○깊도다 하나님의 3)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로마서 11장까지의 대단원을 마무리하면서 깊도다! 라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8장까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처절하게 밝히고서 그 죄로 인하여 진노를 받아 마땅한 인간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내용을 증거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일한 것이 없이 그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가 가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느 정도로 죄인인지 그 죄의 깊이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더 깊고 더 높고 넓고 긴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킨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유대인들은 어떻게 되는가를 9-11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꺾어짐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그들에게도 긍휼로 남은 자를 돌이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은 오직 긍휼로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바울만큼 많이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바울도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죄인중의 괴수요 하나님의 원수였지만 복음의 비밀을 계시로 알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직접 받았고, 삼층 천까지 보고 온 자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은 측량할 수 없기에 깊도다! 라는 말로서 마무리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깊도다! 이 말씀 앞에 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봅니다. 그동안 로마서를 증거하면서 얼마나 하나님의 깊음을 드러내었는가를 돌아보면 정말로 부끄러워 숨고 싶은 심정입니다. 설교를 마칠 때마다 제대로 복음을 전했다는 생각이 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좀더 열심히 잘 준비하자는 다짐을 5년 동안 하였지만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는커녕 갈수록 더 어렵다는 생각만 듭니다. 복음을 태산에 비유하자면 조그만 숟가락으로 한 숟가락도 퍼지 못한 느낌입니다. 언제 한번 삽으로 푹푹 퍼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저 답답할 뿐입니다.

 

 

 

 

오히려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가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설교원고를 인터넷에 올리고 음성 설교를 올리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마치 빨가벗는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원고도 음성 설교도 올리고 싶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몇 사람이라도 듣기를 원한다고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깊이가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기에 아는 만큼이나마 증거하고자 합니다.

 

 

 

 

33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 너무나 깊어서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인간들의 측량술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지구를 넘어 은하계까지 측량을 하고 나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과 그의 길은 그 어느 것으로도 가름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측량할 수 없도록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5:15절입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숨어계시는 것입니까? 너무나 커서 측량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무어라고 합니까? 자기가 하나님을 다 아는 양 큰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45:9-1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찐대 화 있을찐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10 아비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났느냐 2)어미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낳으려고 구로하느냐 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오늘날 이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인간능력의 극대화를 추구하고 그것을 찬미하며 사는 시대입니다. 물론 아담의 범죄이후로 계속되어온 역사입니다. 교만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대를 향하여 성경은 화 있을찐저, 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들의 능력으로 인간들의 낙원을 만들어보려는 과학적인 시도, 종교적인 성과물들에 눈이 멀어서 숨어계신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인 것입니다.

 

 

 

 

숨어계시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숨어계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계시하셨습니다. 그 계시는 성경이며 이 성경의 핵심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숨어계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숨어계시는 방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이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가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그 꺼리고 미련한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요 구원의 능력이 됨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8-25절입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ㄱ)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1)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길은 인간이 스스로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그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힘없이 달려 죽어가면서 다 이루었다는 그 예수에게 침을 뱉고 돌아서는 유대인들처럼 돌아서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교회가 세계 제일로 잘 번성하는 나라가 된 것은 왜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아니라고 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의 이야기를 빼버리고 세상이 볼 때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십자가로 변질시켰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지혜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엄위와 인자를 보이시기 위하여 진노의 그릇으로도 긍휼의 그릇으로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34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습니까?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습니까? 이사야 40:13절에서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느냐고 합니다. 바울사도는 주님의 마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2:16절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이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34절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사람이 먼저 주님께 무엇을 드림으로 그 대가로 무엇을 받아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많이 속아왔습니다. 바쳐야 복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복 받을 짓을 해야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들어왔기에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너무 낯선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복은 행함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 어느 정도로 주님께 바쳐서 복을 받아낼 자가 있겠습니까?

 

 

 

 

욥기 41:11절을 봅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욥기의 논쟁을 알 것입니다. 욥이 얼마나 의롭게 살았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몽땅 망했습니다. 몸에 병까지 들고 아내는 욕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때 욥의 세 친구가 와서 너는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망했다고 공격합니다. 욥은 끝끝내 자신이 죄지은 것이 없다고 항변합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런 논쟁 끝에 드디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8장부터 42장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묻는 말에 대답해보라고 하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느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대하여 욥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42:1-5절입니다.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2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우리가 욥보다 순전합니까? 그런데도 욥이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린 것에 대하여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옳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 의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예수 그리스도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절규를 아시겠습니까?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버림받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입을 열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흔히 연보를 하거나 봉사를 하면 내 것을 가지고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온 천하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주님께 드려서 그 것으로 갚음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연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형제끼리 서로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각양 은사를 따라 서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용납되어짐이 참으로 기적이요 감사인 것입니다.

 

 

 

 

아무것도, 인간의 사역이 아무리 가치 있다 해도, 은혜를 받을 만한 가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러하다면, 은혜는 은혜이기를 멈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긍휼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를 알고 믿게 된 것이 실로 주의 긍휼로 된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주님께 먼저 드려서 무엇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만물이 주님께로부터 나왔고 주님으로 유지되고 주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주님께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자신을 자신의 것인 양 살고 있는 것이 죄입니다. 내 인생의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사는 것도 모두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이 은혜를 모독하고 사는 것입니다. 결국 만물이 다 주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온 세상의 시작이며 과정이며 결론입니다. 이를 통하여 영광이 주님께 세세토록 있을 것입니다. 아멘

 

 

 

 

로마서 12:1-2  영적 예배  2004. 9. 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하는 찬송하고 기도하고 연보도하고 말씀도 듣고 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배라고 하지요! 예배란 말 그대로 예를 갖추어 절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예배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정성을 바치자는 식이 됩니다. 그래서 가인의 제사가 되지 말고 아벨의 제사가 드려지기를 원한다는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아주신 아벨은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아니한 가인에 의해 살해당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면 축복을 받아야 할 텐데 바른 예배를 드린 최초의 사람이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가 무엇인지를 오늘 다시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중에 어느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모여서 행하는 일이 예배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이 과연 영적인 예배인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백 년 지켜온 전통에 익숙하여 있으면서 자신은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렸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른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며 이것을 영적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예배가 우리의 몸으로 살아있는 제사를 드리는 것인데 이런 예배가 무엇인지 구약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가 어떤 모습입니까? 시간은 매일 드리는 상번제와 안식일과 각종 절기입니다. 공간은 성전입니다. 제물은 흠 없는 짐승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그들의 죄를 알게 함이며 그 죄를 속하기 위하여 대신 피 흘리는 희생의 제사가 구약 제사의 중심이었습니다. 물론 속죄만이 아니라 감사와 서원의 제사도 있습니다만 속죄가 이루어지지 아니한 상태에서는 다른 예물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그러한 제사를 통하여 무엇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살아가는 것은 자기들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흠 없는 짐승의 대신 희생당함을 통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생제물을 드리고 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절기도 잘 지키고 희생 제물도 잘 드린 자기 행위를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 대신 희생당함으로 나는 살아가구나 하는 의식이 삶을 지배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희생의 피를 뒤집어쓰고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긍휼의 삶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희생으로 살아가기에 삶의 현장에서도 긍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긍휼이 나오지 않는데 단지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고 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헛된 행위이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는 것이 됩니다.

 

 

 

 

이사야 1:10-17절을 봅니다. “10 ○너희 소돔의 2)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3)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절기를 지키고 제물을 바치는 행위가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고 합니다.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수한 제물, 피 흘림, 하나님께 보이고자 오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서 무엇이 빠져버린 것입니까? 긍휼과 자비가 빠져버린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학대하면서 무슨 제사를 드린다는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고와와 과부와 나그네를 통하여 그들 자신이 긍휼을 받고 살아야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6:1-4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1)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전을 지어드릴 수가 있습니까?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요 이 땅이 하나님의 발등상 밖에 되지 않는데 어느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제물을 드리면 됩니까? 어떤 제물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를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절기를 잘 지키고 제물을 잘 드렸다는 사람, 오늘 식으로 예배를 정성을 다해 드렸다는 사람에게 가난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 나오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가 상한 심령인데 자기는 이것을 바쳤네, 저것을 지켰네 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면 나는 이것도 저것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까?

 

 

 

 

예레미야 7:1-11절을 봅니다. “1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8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9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구약의 성전을 부정해 버리는 말씀입니다.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면서 성전에 들어와서 제물을 바치고 우리는 구원 얻었다는 그런 거짓말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성전은 도적의 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실 때에 성전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진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 지킴으로도, 제물 바침으로도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되는 것입니까?

 

 

 

 

시편 40:6-8절입니다. “6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와 예물이 아니라 한 사람이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한 이 한 인물이 누구입니까?

 

 

 

 

히브리서 10:8-10절입니다.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어떤 제사나 희생 제물로도 이룰 수 없는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입은 것입니다.

 

 

 

 

이 말씀이 로마서 1-11장의 말씀의 핵심요지입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거룩함을 얻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거나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러면 우리가 드릴 살아있는 제사, 즉 영적인 예배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12:1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한다고 합니다. 로마서 1-11장에 나온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권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32절에서 모든 사람이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갇혀 있게 된 것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이제부터 무엇으로 살라는 것입니까? 주님의 긍휼로 살아가라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에서는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한계입니다. 분명히 긍휼로, 대신 희생으로 구원받아 나왔지만 그들은 날과 달과 절기와 희생제물을 드리는 자기들의 행위를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구원받아 나온 자들이 계속하여 그의 긍휼과 자비를 드러내는 자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은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예배의 장소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곳도 저곳도 아니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하였습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영적인 예배입니다. 그런데 신령한 분위기가 진정한 정성이라는 느낌이 들어 우리가 온갖 정성을 다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이 말씀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즉 주의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 앞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가 드릴 산 제사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바치는 어떤 것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밥을 먹든지, 물을 마시든지,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잠을 자든지, 아프든지 건강하든지,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살든지 죽든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주의 긍휼과 자비를 오고 오는 세대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7절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로마서 12:1-2  하나님의 뜻  2004. 9. 19.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한 주간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 영적인 예배를 잘 드렸습니까? 특정한 장소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범사에 주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영적인 예배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드리면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지 못하였다. 그러니 영적인 예배를 드리지 못하였구나 하는 생각을 또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영적인 예배가 무엇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꼭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들지요?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면 좋아하시겠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란 첫째,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둘째, 부모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셋째, 자녀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씀을 드리면 아 그렇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영적인 예배이구나 하면서 그 내용을 지켜야 할 규칙처럼 여기고 삽니다. 이것이 과연 영적인 예배일까요?

 

 

 

 

구약에서 이미 이런 일들은 다 영적인 예배가 아님이 검증이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받은 민족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받았다.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만이 지킬 수가 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이 잘못된 이야기입니까? 지키지 않아서 문제이지 잘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이 잘못 된 것입니까?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지키면서 무엇이 빠져 버린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율법을 받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선포하시면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고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빠져버린 제사는 하나님께서 원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 6:4-6절을 봅니다.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에브라임과 유다 즉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고 심판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4절에서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인애로 구원되어 인애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 인애가 아침 구름이라. 이슬처럼 너무 쉽게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제사와 번제를 원하지 아니하시고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십니다. 인애란 긍휼이라는 단어와 같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사용하신 말씀을 신약에서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9:9-13절입니다. “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1)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1)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ㄱ)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율법을 지키며, 죄를 짓지 아니할 뿐 아니라 죄인들과 어울리지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자기들이 죄라고 여기는 것만 골라서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고서 그들이 욕하기를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몸으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는 현장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계시는 그 자리인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긍휼을 마음껏 발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하지 않으시고 긍휼을 원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그것은 다 아는 이야기이고 이제는 일단 믿었으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다 죄이고,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면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성경에서는 율법만이 아니라 바울서신에서도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말씀이 많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도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의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본받지 말아야하기에 이 시대의 사람들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나 예수님 당시에나 아담의 범죄이후의 인간은 사고방식이란 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선을 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하는 일이란 몽땅 죄뿐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선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만이 선하신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일이 선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한탄하신 것입니다. 저주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 생각하고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항상 악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가끔씩이라도 선한 것이 나온다면 그것을 가지고 선한 무엇을 만들어 볼 수 있겠지만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인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모든 시대에 인간의 실상입니다.

 

 

 

 

디모데후서 3:1-5절을 봅니다.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의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세대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생각입니다. 피조물이 마땅히 창조주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데 하나님마저 자기 사랑의 도구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11:36절과 정면으로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만물이 나를 위하여 존재하고 나에게로 목표를 하고 살았으면 좋겠지요! 그리고 내가 뛰어난 영웅이 되어 만물조차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자긍이며 교만이며 훼방인 것입니다.

 

 

 

 

금요일 ‘계시를 따라서’ 성경공부시간에 선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선이란 하나님께서 이루는 것에 드러나는 것이지 인간이 생각으로 추정하여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생각한 선은 인간이 이루어야 하는 부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룬 것이 정말 선이냐 하는 질문도 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으로 선한 삶이 세상에 보인 것이지 사람이 세운 선한 삶의 기준에 예수님이 맞았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예수님이 선한 삶을 사시지 않았기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 시대의 선한 기준에 맞지 않았지만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선한 삶을 살았다고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죽으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아시겠습니까? 그 시대의 정신에 호응하셨다면 죽기는커녕 오히려 영웅이 되셨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이나 죄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지만 구원받은 자기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여긴 그 사고방식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예수 믿고서 거듭났으니 이제부터 내가 책임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보겠다고 나서는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다 시도해본 내용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믿고 사는 것에 대하여 회개하는 것이 마음의 변화를 받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면서 이 세상을 따라 산 것에 대하여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세상에서 더 잘 살아 남으려고 주여! 주여! 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아니하면, 그의 크신 긍휼이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이 세상이 추구하는 영광을 헛된 줄도 모르고 주님을 위하는 것 인양 평생 속고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3:13-17절에 보시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오직 예수님에게만 성령이 임하시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1-8절에서도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시고 모세와 엘리야도 함께 나타났을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라보니 오직 예수님만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일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2:5-11절을 봅니다. “봉독” 그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이미 구약에서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시편 2편에서 기름부음 받은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 하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기뻐하시는 일은 그 아들뿐인 것입니다. 그 아들을 사랑하고 그 아들에게 입 맞추고 그 아들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아들에게 무릎 꿇고 사랑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2:3-5  믿음의 분량대로  2004. 9. 26.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영적예배이며 이를 위하여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는 말씀을 이 주간에 걸쳐서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통하여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하는데 오히려 이 세대를 본받아서 해석을 하게 됩니다.

 

 

 

 

이 세대를 본받는 해석의 대표적인 모습이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은혜로 되지만 그 이후로는 내가 스스로 책임을 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복도 받고 하늘에서 상도 받는데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복과 상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더욱 열성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신앙이 아니라 자기의 신념일 뿐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다 보여주셨습니다. 자기들의 신념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죽을지라도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큰소리치던 베드로는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하여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에 이제는 자기를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란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사셨기에 친히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다 이루심은 속죄만 다 이루셨고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주님오시기까지 증인도 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 이루심 안에는 부활과 승천, 성령 보내심과 재림까지 다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은 주님의 다 이루심이 펼쳐지고 있는 현장입니다.

 

 

 

 

마태복음 28:16-20절입니다. “16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고서는 보라 이제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언으로 우리에게 명령하셨으니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서도 무서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마가 다락방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므로 드디어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명령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루시는 것입니까?

 

 

 

 

사도행전 2:29-33절입니다.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2)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자기 제자들에게 다 맡겨두시고 누가 누가 잘하나 지켜보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친히 성령을 보내시고 지금도 자기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시며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사람의 손에 맡겨두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성령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므로 모두가 은사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한 몸인 것입니다. 성도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인 것입니다. 여기서는 결코 시기와 경쟁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높은지 낮은지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한 몸 안에서 분쟁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사의 구체적은 모습은 다음 주에 보도록 하겠습니다만 오늘은 성령이 임하게 되면 어떤 태도와 자세가 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12:3절을 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한다고 합니다. 바울 자신도 주님께서 주신 은혜로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나 신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성령을 받고서 죄가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를 이제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자기가 최고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나니 그런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함으로 무엇을 알게 되는가 하면 자기의 분수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시대나 지금이나 간에 죄란 인간이 자기의 분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흙덩이로 지어진 피조물이 범죄 함으로 교만하여져서 스스로 창조주의 자리에 오르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 내장되어 있는 사고방식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를 죄 아래 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허황된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초의 죄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었던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와 동등 됨을 취하려고 선악과를 따먹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자기가 최고로 높은 줄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자기의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12:16절을 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이 말씀이 이 시대의 정신과 맞습니까? 틀립니까? 틀리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반대입니다. 이 시대는 어떻게 하든지 높은데 마음을 두라고 합니다. 목표를 높이는 것입니다. 나라의 예산도 올려 잡고, 교회의 예산도 올려 잡는 것입니다. 만약에 작년보다 줄어들면 실패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모습이 이렇지 않습니까? 뜻을 높이 두고, 꿈을 크게 가지고, 그래서 발전하고, 승진하고, 높아지는 것은 복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자기 분수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이 증거되어야 할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늘 무엇을 심어주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 것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이런 말씀이 왜 대부분의 교회에서 증거가 되지 않고 있습니까? 그것은 목사도 문제이지만 그런 말씀을 듣기를 좋아하는 교인들도 문제인 것입니다. 말세의 특징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귀를 즐겁게 해줄 거짓 선생들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와서 들어야 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칼럼’ 란에 짧은 글을 올려놓았습니다.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라는 책에서 여러 사람들의 말을 인용한 것 중에 오늘 한 번 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한 말입니다. “믿는 자들은 모든 설교가 반드시 그리스도를 제시해야 한다고 요구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교인들이 이렇게 요구를 한다면 목사가 성경을 들고서 감히 엉뚱한 것을 설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수요와 공급이란 서로 손발이 맞아야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흐름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하지요! 시장만 보이지 아니하는 손이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보이지 아니하는 손이 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걸림돌이며 거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는 이 세대를 악한 세대로 보게 됩니다. 자신의 욕심이 죄임을 아는 것입니다. 탐심이 우상숭배임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 받는 것이 복인 줄 아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4-5절 말씀입니다.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5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오신 것입니까?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추석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그들에게 가기를 원합니까? 보너스를 두둑하게 받아 선물을 넉넉하게 사서 가고 싶지 않습니까? 아니면 승진의 소식, 합격의 소식을 가지고 가서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까? 무언가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나아진 것으로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모습이 교회에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 누가 ‘높고낮고’가 있을 수가 없는 곳입니다. 4-5절을 봅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다고 합니다. 교회는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몸의 지체끼리 높낮이를 다투지 아니합니다. 서로 몸을 위할 뿐입니다. 교회에서 내가 성도로서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자기를 들어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 특징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자족함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어느 정도입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넘어서는 것은 다 욕심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이런 것으로 만족하다고 여깁니까? 끝없이 발전하고 높아지는 것이 복인 줄 알고 있는 것이 이 세대의 가치관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과 동등하시나 스스로 자기를 비어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은 자만이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고 믿음의 분량대로 자기의 은사에 감사할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의 형편을 사람들이 볼 때 부끄러워 숨기고 싶은데도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연극을 하는데 그 결말을 이미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배역이 어떠하였더라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완성인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하면 자신의 신분이 종으로 있을지라도 상관없다고 바울 사도가 말하였겠습니까?(고전7:20-25) 이 자유가 더욱 풍성케 되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2:6-8  은사 공동체  2004. 10. 3.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사람들은 간섭받기를 싫어합니다. 무언가 일을 맡겨도 자율적으로 알아서 하도록 해주어야 좋아하지 일일이 간섭을 하면 평소에 잘 하든 일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른이 되면 간섭받지 않고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간섭받기를 좋아하는 이상한 단체가 있습니다. 그런 곳에 어디이겠습니까?

 

 

 

 

교회입니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사람의 간섭을 받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야 합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주님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서 일하고 계시는 주님의 간섭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거저 눈에 보이는 사람만 보인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종교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은사공동체입니다. 은혜와 은사란 둘 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은혜는 더 넓은 의미이고 은사는 각 개인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하여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은사 없이 모일 수가 없습니다. 은사가 없는 사람은 교회에 한 몸으로 붙어있을 수가 없는 곳입니다. 마치 죽은 살을 산 살에 붙인다고 산 살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무엇을 억지로 하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끼리 모여서 무엇을 계획하고 목표를 세우고 할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이미 주인이 따로 계시고 간섭하고 계시기 때문에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한다고 목사가 간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사는 받은 은사대로 말씀을 증거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살아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주님의 지시를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증거 할 뿐입니다.

 

 

 

 

이러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 모든 것을 한때의 꿈으로 돌리고 자신은 다시 고기잡이 하려고 갔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면서 내 양을 먹이고 치라는 말씀을 세 번이나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모든 것을 베드로에게 다 맡겨두시고 떠나버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친히 하시는 것입니까? 베드로에게 은사를 주어서 자기 양을 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자기 혼자서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은사로서 하는 것입니다. 은사로 하는 것이기에 베드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인간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범죄 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에 인간과 의논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을 인간과 의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재림을 인간과 의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시면, 베드로가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성전미문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킨 사건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구걸하기 위하여 베드로와 그의 일행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자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기도하고 뛰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베드로를 주목하여 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자기의 이름을 들어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를 받았기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왜 우리 개인의 경건과 권능으로 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자기를 부인합니다. 이 사람이 온전케 된 것은 여러분들이 배척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셔서 그 예수님이 지금 하신 일이며 자신들은 증인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바울사도도 자신이 그 어느 누구보다 교회를 위하여 더 많이 수고하였지만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은혜와 은사를 받은 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이런 은사로 되어진 곳입니다. 고린도후서 4:4-6절 말씀을 봅니다. “1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1)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ㄱ)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기적입니다. 4절에 보시면 이 세상의 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영광의 복음을 받았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그러므로 자신이 전적인 죄인임을 알고 구원이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임을 믿는 자가 교회로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교회가 사람이 세우는 것이라면 세운 사람의 이야기들을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자기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심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라는 말씀을 성취하시던 그 능력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7장에 보시면, 마른 뼈만 가득한 골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니 마른 뼈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게 된 무리가 종말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사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캄캄한 어두움이요, 마른 뼈와 같았던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빛을 주시고 생명을 주셔서 살아난 것입니다.

 

 

 

 

이렇게 모인 자들은 각기 은사가 다르지만 서로 간에 경쟁이나 시기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은혜를 알고 은사를 아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모두가 믿음의 분수대로, 받은바 은사대로 서로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사를 주신 것은 교회를 주님께서 친히 간섭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니 어느 집사님이 그래도 예배 참석하고 헌금하는 것은 목사가 하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그렇게 간섭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주님을 보고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목사 보고서 하는 것이 됩니다. 목사가 그런 말 하지 않고 강조하지 않아서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애초부터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주님과는 상관없이 교회만 들락거린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엇을 하시든지 어떤 봉사를 하시든지 받은바 믿음의 분량대로, 은혜로 받은바 은사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 은사들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7가지가 있지만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9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다 은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들이기에 누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는 없습니다. 물론 많이 드러나 보이고 숨겨져 있고 하는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드러나는 것보다 드러나지 아니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몸의 기능도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6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릅니다. 그 중에서 예언이라면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언이란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시대에는 직접적인 예언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사도시대로 하나님의 계시는 완결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예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드러낼 뿐입니다. 이것도 믿음의 분수대로 하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성경이 증거 하지도 아니하는 재림의 날짜를 예언 한다든지, 성경이 약속하지도 아니한 것들을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일이면 가르치는 일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각자의 은사가 다르니 자기의 일이나 믿음의 분수대로 잘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관장하고 책임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권위 하는 자는 권위 하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권위를 부리라는 말이 아니라 권면하고 위로한다는 말입니다. 구제하는 사람은 성실함으로 하라고 합니다. 구제하는 사람이 자기의 기분 따라 하게 된다면 그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한국전쟁 이후에 수많은 구제품이 한국에 왔을 때에 성실함으로 하지 않고 그것으로 장사해서 부자 된 사람도 많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보았습니다. 그것은 은사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으로 한 것입니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성경보고 기도하고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다스리신다고 하시고서는 왜 다스리는 은사가 있는 것입니까? 이 다스림이란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다스리라고 한 것이기에 주님의 피의 효력이 드러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만이 즐거움이 아니라 모든 은사는 감사와 자원함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의 백성들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봉사란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봉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4:7-10절입니다.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은사를 받은 자는 서로 봉사합니다. 말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합니다. 모든 봉사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도다. 아멘!

 

 

 

 

로마서 12:9-13  은사의 특징  2004. 10. 10.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바울서신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봅니다. 앞부분은 교리부분이고 뒷부분은 실천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도 11장까지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교리이고 12장부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책임지고 실천할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책임지고 실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이 취소가 됩니까? 사람들의 관심이 자기 구원에 있으니 당연히 나오는 질문입니다. 저도 이런 질문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무어라고 답을 합니까? 구원은 취소가 되지 않지만 가난한 신앙생활이 된다고 합니다. 즉 부끄러운 구원이 되고, 이 땅에서 복도 받지 못하고, 하늘에서 상급도 받지 못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런 대답이 너무 유치한지 이런 대답도 있습니다. 어떻게 복 받고 상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아의 완성을 위하여, 좀더 고상한 인격을 갖추기 위해서 실천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바로 이 세대를 본받아 하는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사도가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의 세대는 어떤 세대입니까? A.D 50년 후반에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왜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였습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를 알아보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고발한 직접적인 죄목이 무엇이었습니까? 성전을 파괴하는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이란 유일하게 속죄를 받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을 파괴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불경죄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전을 파괴하고 나면 속죄를 누가 어디에서 한다는 말입니까?

 

 

 

 

참람 되게도 일개 인간에 불과한, 그것도 나사렛출신 예수라는 자가 자기가 속죄하는 권세가 있다고 말하면서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한 세례요한도 성전에서 회개하라고 외친 것이 아니라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외친 것입니다. 성전이 아닌 곳에서 회개를 외치고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도 성전체제를 위협하는 아주 불순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위와 선포는 어떠하였습니까?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들에게 경악스러운 것입니다.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영생이 바로 나다. 나를 아는 것이 영생이며,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그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죽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흉악한 살인강도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은혜로 선택을 받아서 율법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켜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실천한 내용들은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내용들입니다. 율법을 생활 속에 적용하기 위한 규례집을 또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할라카’라고 합니다. ‘미쉬나’도 있고 탈무드도 있습니다. 얼마나 방대한 내용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법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었습니다. 안식일 날 노동하지 말라고 한 것에 대하여 무엇이 노동이며 노동이 아닌지를 해석하고 그것을 다 지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장로의 유전이라고 지적한 것들입니다. 온갖 구체적인 규례들까지 다 지켜온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대도 예수님의 시대나 바울시대나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위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구원받은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여겨서 끊임없이 인간의 행위를 보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인간의 행위를 더 이상 보탤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참된 교회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셔서 친히 자기 몸을 다스리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은사를 베풀고 계시는 것임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들려지는 대부분의 설교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복과 상급을 받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함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성경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행함의 기준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세워놓은 교회라는 조직을 위한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조되는 행함이란 언제나 주일성수와 십일조와 전도와 봉사에 집중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없는 본문에서도 행함의 결론이 이런 것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우리의 의지와 결단으로 행할 수 있는 내용인지 아닌지를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책임지고 행하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성경에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이야기 하지 않고 자기들이 조금만 노력하면 행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하기 힘든 것은 최선을 다하자고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대를 따른 해석입니다.

 

 

 

 

로마서 12:9절입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합니다. 무언가 실천할 부분이 사랑이라면 어떤 사랑이어야 합니까?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거짓 없는 순수한 사랑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 사랑의 비교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비한 사랑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는 베품 자체가 사랑입니다. 내가 널 이렇게 사랑했으니 너는 나를 이렇게 사랑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조건부적인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이란 결국 이기적인 자기 사랑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중에 암논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연애하여 상사병에 들었습니다. 다윗 왕이 아픈 아들을 보러가니 다말이 자기에게 과자를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왕이 허락하자 다른 사람들 나가게 하고서는 강제로 범하고 맙니다. 사랑하여 병이 들 정도였는데 범하고 나서는 그 연애하던 열정보다도 더 미워서 내어 좇아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만 그 안에는 자기도 모르는 죄악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로 자기의 정복욕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누구를 향하여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에 과연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베품만으로 나타나는 거짓 없는 사랑이 나올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남을 위하여 희생한 살신성인의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사랑이란 결국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선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죄인들이 죄인을 위하여 희생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의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적용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지체는 여러 개입니다. 그러나 지체들끼리는 서로 시기 경쟁하지 않습니다. 서로 돕고 서로 섬깁니다. 그것은 다 몸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 받은 것이 맞기는 한 것입니까? 어느 정도여야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사랑입니까?

 

 

 

 

요한일서 3:13-18절입니다.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가 교회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이정도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나는 이만큼 사랑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입을 닫고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이렇게 나만 사랑한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정작 기도할 내용인데 그런데 혹시 정말 그런 은혜가 와서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재산의 절반을 형제를 위하여 내어 놓자고 할까봐 겁이 나지 않습니까? 그런 은혜는 피하고 싶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느니 형제를 사랑하느니 하는 것이 다 거짓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의 내용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이 조금만 노력하면 행할 수 있는 것들을 행하면 복을 받는다고 사기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행함의 말들이 오히려 좋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의 선을 그어놓고서 그것을 행하라는 것이 쉽지 믿음으로 하십시오, 받은 은사대로 하십시오. 이것은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 없고 거저 자기 사랑이나 챙기기 위하여 목사와 교인이라는 단체로 모여 있기에 그것은 다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교회라는 사업체 운영하기 위한 술수인 것입니다.

 

 

 

 

10절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고 있습니까? 서로 우애하여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나만을 사랑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여야 하는데 서로 존경하기는 커녕 무시하고 깔보지는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아니라는 증거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몸이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11절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주님을 섬깁니까? 아니면 부지런히 자기를 섬기고 있습니까?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자기를 섬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한절 한절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케 하고 회개하게 만드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12절입니다. 소망 중에 기뻐한다는 것은 지금 아무것도 없지만 예수님의 약속만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쁨은 나의 소유의 유무에 있지 않습니까? 환난 중에 참습니까? 환난 중에 참는 것은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에 힘쓰고 있습니까?

 

 

 

 

13절입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 손 대접하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이 당시의 성도들의 쓸 것이란 믿음 때문에 쫓겨난 사람들, 또는 가난한 교회들을 위한 연보입니다. 그들도 극심한 어려움가운데서 힘에 지나치도록 연보한 것입니다. 손님이란 순회전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대접하는 일에 힘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말씀이 실천해야할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여야 할 말씀으로 봅니다. 그런 회개조차 성령의 은사입니다만 그렇게 회개한 심령에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게 되면 정말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기 까지 사랑하고서도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라는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매들이 극히 드물게 나타나지만 그러한 성령의 열매만으로 주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 인간이 계획하고 목표하고 자기 뜻들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의 뜻을 도용하는 일에 대하여는 회개할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는 쓸데없이 자기 행함에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이 모여서 할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도 용서 받은 자고, 너도 용서 받은 자이기에 서로 흉허물을 보지 아니합니다. 시기와 경쟁도 없습니다. 용서받은 주님의 몸에 붙은 것만으로 서로 섬기며 사랑하는 것이 몸의 지체처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날마다 회개하고 날마다 새롭게 되는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로마서 12:14-21  맡기라  2004. 10. 17.


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ㄱ)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ㄴ)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18-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예수님을 잘 믿으면 세상에서 인정받고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말을 우리가 많이 들었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히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미움을 받는 것은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을 미워하였습니까? 이 세상을 악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로 악하다고 하셨습니까?

 

 

 

 

로마서 3:9-18절을 봅니다. “ 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1)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한바 ㄴ)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ㄷ)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ㄹ)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ㅁ)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ㅂ)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ㅅ)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함과 같으니라

 

 

 

 

이런 악한 세상에서 어느 누가 자기의 착함이나 의로움으로 나는 바르게 산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속이고 있습니다. 인간이 선에 대하여 무능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선을 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런 가능성을 인정하셨다면 미움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실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선택하셔서 의롭다고 하신 것에 대하여 이 세상은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에 대하여 마귀가 가만히 두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핍박을 가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당연히 세상의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자기가 잘못해놓고서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는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잘못해서 핍박을 받는 것인지 정말 믿음으로 핍박을 받는 것인지 어떻게 알게 됩니까?

 

 

 

 

로마서 12:14절입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핍박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자기를 핍박하는 자에 대하여 저주하지 아니하고 축복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잘못해서 오는 미움이나 핍박은 상대방을 대하여 축복하지 못하고 저주하려고 합니다. 누가 나에게 잘못하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은근히 그 사람이 잘못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것은 믿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사를 한지 4개월이 되었는데 전에 살던 집이 아직 방이 나가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달세 많이 받으려고 집을 나가라고 하였는데 아직 집이 나가지 않는 것을 보고서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집이 빨리 나가도록 축복하겠습니까? 아니면 고소하다는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제는 집이 나가야 할 텐데 하는 마음은 들지만 축복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이 한절의 말씀 앞에서 저 자신이 얼마나 믿음 없는 사람인지 그대로 다 들통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은사를 더하여 주소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내용입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만약 자기의 의지적인 결단으로 한다면 그것은 은사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목사이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한다면 그것은 은혜와 은사를 주신 분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완성과 자기성취를 보이는 것이 됩니다.

 

 

 

 

스데반 집사가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은 향하여 죽어가면서 어떻게 축복하였습니까?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죽었습니다. 이 스데반집사를 성경은 기록하기를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였다,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합니다. 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나온 것입니다. 이럴 때에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를 향하여 저주하지 아니하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무엇을 잘못하여 돌에 맞아 죽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한국 교회에 와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신다는 그런 설교를 하였다면 역시 쫓겨날 일입니다만 정말 믿음으로 인하여 오는 핍박에 저주하지 아니하고 축복하는 것이 이런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이 한절의 말씀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듭니까? 자기 정당성에 대하여 입을 닫고 회개하고 은혜를 더하여 달라고 기도할 것뿐이지 않습니까?

 

 

 

 

15절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하여금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하여금 울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드릴 영적인 예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된 자들을 말합니다. 우리 안에서 누가 울 일이 있으면 측은지심이 나옵니다. 그러나 즐거운 일에 정말 시기질투가 나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 시기, 질투가 난다는 것은 이미 마음을 높은데 둔 증거입니다. 이것이 죄인데도 그것을 죄로 알지도 못하고 서로 경쟁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누가 빨리 더 많은 축복을 받고 성공하고 높아지는 가를 경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빨리 성공하는 비결을 가르쳐준다고 합니다. 그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 원초적인 죄의 본능인데도 그것을 죄로 말하지 아니하는 것은 교회가 이미 세상이 되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 몸을 세우고 있는 증거이지 않습니까? 고린도전서 12: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이런 일은 한 몸이라야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16절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높아지기 위해서 열심을 다하고 있는데 낮아지고자 하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한 것입니까? 높아짐, 거대함, 뛰어난 모습, 성공 이런 이야기들이 환영받는 세상에서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곳에서 만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 세상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환영하고 좋아하는 것들은 다 죽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 것은 마귀가 예수님께 주고자 유혹한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자꾸 세상의 높은데 마음을 두고. 세상의 힘을 가지고자 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있는 것입니다.

 

 

 

 

17-18절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악으로 대하여 올 때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선한 일을 도모하고 모든 사람으로 화평하라고 하십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말하였을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악함으로 지나친 보복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법을 다시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성령을 보내셔서 친히 이루시는 분도 역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예수님을 증거한 것이지 자신이 원수사랑까지 한 능력을 보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9-20절을 봅니다. 원수를 갚지 말고 오히려 원수가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원수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원수 갚으려고 나서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나는 너보다 낫다는 자기의 의가 발동한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이미 재판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는데 조건 없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않거나 잊어버린 사람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시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형제를 용서하는데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됩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상당한 용서이지요! 자신이 그만큼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베드로 자신이 예수님께로부터 한량없는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받아야하는 사람이라면 남을 일곱 번 용서한 것은 말할 것도 못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면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갚을 것이 없어서 감옥에 갇혔는데 임금님이 불쌍히 여겨서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탕감 받고 기분 좋게 집으로 가다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서는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다 갚겠다고 하는데도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는 얼마인가 하면 육천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므로 일만 달란트는 개인이 갚을 수가 없는 액수입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에 가두었을 때에 임금이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에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것이 천국의 비유입니다.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였겠습니까?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혹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은사로 되지 아니하고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해낸 것이라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자기의 의를 드러낼 뿐입니다. 성도란 자기완성의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무엇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만이 선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만이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선한 일을 믿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 선하신 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모든 의무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무언가 부족한 것처럼 맡기지 못하고 자기가 나서야한다는 것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악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며 사는 자는 짐이 가볍습니다.

 

 

 

 

로마서 13:1-7  권세  2004. 10. 24.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6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로마서 12장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가 어떤 은사로 유지되는지를 보았습니다. 로마서 13장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권세에 대하여 어떻게 처신하여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권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며 그 권세를 집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누가 가장 좋아하겠습니까? 권세를 가진 자들이 좋아할 것입니다. 쿠데타를 하였던, 불법으로 권세를 잡았든지 간에 이런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들의 권세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권신수설’을 말하지요! 백성들이 왕에게 복종하는 것이 신에게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자들에게 목사들이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이 본문을 가지고 정당화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법적인 정권은 틀렸다고 말하는 자들은 정부 기관의 사찰을 받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권력에 대하여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한 목사들이 지금의 현 대통령은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하여 정통성이 인정된 대통령인데 그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합법적인 권세는 굴복하고 합법적이지 않는 권세는 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교회와 정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굉장하게 복잡한 논의가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더 이상의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이 말씀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끝없는 논란에 빠져서 스스로의 올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외국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게 될 때 물리쳐야하는 나라가 있고 그 지배를 받아들여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벨론이 쳐들어 왔을 때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매국노로 몰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예언대로 바벨론에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러나 그 포로로 잡아간 나라가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다니엘서에서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열국의 나라들은 세우시고 폐하시는 권세가 하나님께 있음을 밝힙니다. 그 나라들이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2장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는데 꿈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꿈을 알게 하고 꿈의 해석도 보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꿈은 거대한 신상이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아니하는 조그만 뜨인 돌에 의하여 산산조각이 나고 그 뜨인 돌이 태산을 이루게 되는 것을 다니엘이 알려줍니다. 그 신상의 각 나라의 왕들과 그 국가를 말하는데 느부갓네살이 그 신상의 금 머리이고 다음이 놋, 철, 철과 진흙이 섞인 발의 신상에 뜨인 돌이 날아와서 그 신상을 부수고 영원히 망하지 아니하는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권세란 그 권세가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있는가를 알게 하시는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도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권세에 대하여 순종하라는 것은 나라에 순종하고 세금 잘 내면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권세를 누가 주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자기의 권세로 다스리시는데 국가라는 도구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권력만 보게 되는 사람은 불신자입니다. 신자는 국가를 다스리는 주심의 권세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는 것입니다.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리는 것이기에 심판을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권세로 다스리는 것은 그들의 부당한 권력을 마음대로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은 상을 주고 악한 일은 벌을 주는 권세인 것입니다.

 

 

 

 

관원들은 선한 일에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신호를 어기지 않았다면 경찰이 있어도 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호를 위반하고 가다가 경찰을 보면 두려운 것입니다. 그들이 공연히 교통 범칙금 스티커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로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그들의 지시를 받는 것은 벌을 받을까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법은 육신을 묶는 법이 됩니다. 그러나 양심은 법으로 묶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교통경찰의 눈만 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을 보시는 주님 앞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교통경찰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성도란 자기 몸으로 영적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입니다.

 

 

 

 

6-7절입니다. 세금 제대로 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일한다고 합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고, 공세나 국세를 받을 자에게 주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들에게 권세를 주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라고 나오는 것을 보면 의아하지 않습니까? 주의 사자는 누구를 보고 말하는 것입니까? 목사를 보고서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교통순경이나, 검찰직원이나, 세무공무원이 주의 사자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교통순경만 잘하면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권세를 가졌다고 대통령 잘하면 천국 갑니까? 아닙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어야 합니다. 그들도 그들의 권세를 가졌다고 교만할 것이 아니라 참된 권세자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증거하는 참된 권세자가 누구입니까?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기 뜻대로 세우시기도 하시고 폐하시기도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자됨을 인하여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자됨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심판과 생명을 살리는 권세를 예수님에게 다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27절입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2)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의 권세가 예수님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17-18절입니다.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스스로 버리시고 얻을 권세도 있으십니다.

 

 

 

 

요한복음 17:1-2절입니다.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권세를 받으신 것입니다. 죽이고 살리고 심판하시는 권세가 다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13-18절입니다.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우리가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것은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그 아들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모든 것들과 권세들이 다 그에게서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기에 그가 만물의 으뜸이 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그의 피로 화목케 되는 것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예수님의 권세는 지상에서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만 볼 수 있도록 고난과 십자가 속에 감추어두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세상의 권세조차 그 아들의 권세를 증거 하는 권세일 뿐입니다. 성도란 세상의 권세이든 교회에서의 직분이든, 가정에서든, 회사에서든 누구의 권세를 믿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아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는 것이 영적인 예배요 산제사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3:18-4:1절을 봅니다. “봉독”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남편의 머리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남편에게 복종하는 유교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편의 권세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권세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함으로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역시 주님의 권세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며 부모는 자식을 노엽게 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눈가림만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결국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을 통하여 참된 권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과 아버지와 주인은 상전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상전들이 의와 공평을 행하라고 합니다. 너희에게도 하늘의 상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버지의 상전도 역시 하늘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3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권세나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서나 간에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위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로마서 13:8-10  사랑의 빚  2004. 10. 31.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ㄱ)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해마다 이 날이 되면 한번씩 질문한 말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밤이 아니라 ‘종교개혁기념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그 유명한 95개조의 주제를 비텐베르크성당에서 제시하였습니다. 이 95개조는 처음에 학술적인 토론을 해보고자 붙인 것입니다. 당시에 부패한 교회의 상징이었던 면죄부 판매와 고백성사에 관한 문제를 주로 다루었습니다. 이 주제들이 담고 있는 내용들은 폭발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권위, 교황권, 복종의 문제, 성례전, 구원의 교리 등 기독교 신앙의 근본 문제들을 다시 검토하게 된 것입니다.

 

 

 

 

루터가 이러한 개혁으로 인하여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죽음의 위협에 놓이게 되었지만 무엇 때문에 그가 목숨을 건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로마서의 말씀을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죽기 직전 해에 자신의 저서 서문에 밝히고 있는 내용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나는 수도사로서 흠 없이 생활하였지만 내가 극도로 혼란스러운 양심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느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공로를 통하여 달래졌다고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죄인들을 벌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미워하였다... 마침내 하나님의 자비로 밤낮 묵상하는 가운데 나는 그 단어들이 나오는 문맥에 주의를 기울였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거기서 나는 하나님의 의는 이 의에 의하여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바 그 의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여기서 나는 내가 완전히 새로 거듭나서 열린 문들을 통하여 낙원에 들어갔다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서 성서 전체의 전혀 다른 면모가 보였다.”

 

 

 

 

즉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자기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아무리 수도사로서 금욕적이고 경건하게 살아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란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고서는 거듭나서 열린 문으로 낙원에 들어갔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때부터 루터는 성경 전체를 새로운 면모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성서주해의 중심이 그리스도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루터에 대하여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인간의 도덕적인 선행의지를 꺾는 것이라고 하여 이단으로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서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자기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은혜의 선물로 받은 그 사랑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크기에 어떠한 회유와 협박도 통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는 그 사랑에 빚진 자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3:8절입니다.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고 합니다. 사랑의 빚은 져도 다른 빚들은 지지 말고 살아야합니다. 빚을 지면 얼마나 부담이 됩니까? 잠언 22:7절에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빚을 지게 되면 그 빚을 다 갚지 못하는 한 채주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빚을 지고 살면 안 됩니다. 그 빚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빚을 다 갚아버리면 종이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질 수 밖에 없고, 성도라면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사랑의 빚을 갚아 낼 수 있다면, 사랑도 갚아버린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조건이요 거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았습니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갚자고 나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다 갚지는 못해도 만분의 일이라도 갚자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갚으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 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받았기에 빚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랑의 빚은 부담이 아니라 감사인 것입니다.

 

 

 

 

로마서 1:14-17절입니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ㄱ)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사도는 자신을 빚진 자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빚을 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무엇에 빚진 자입니까? 율법의 완성에서 나오는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이 사랑은 영원히 갚을 수가 없기에 주의 영원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로마서 13:9절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하신 모든 계명들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말씀 안에 다 들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러한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오히려 참된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인 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누가복음 10:25-37절에 보시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시험적으로 질문하기를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는가 하는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질문을 하십니다. 율법에서 무어라고 하느냐고 하시자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향하여 네 대답이 옳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자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강도 만나서 다 죽게 된 사람이 있는데 그 곁을 제사장과 레위인이 못 본체 지나가고 사마리아인이 그를 돌보았다고 하시면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강도 만난 자가 누구인가를 좀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강도 만난 자란 우리 주변에 소외되고 가난하게 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영생이라면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강도 만난자의 이웃만 되어주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강도는 누구며 그 강도에게 피해를 당한 자가 누구인가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강도가 무엇입니까?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강제로 빼앗아 가지는 사람을 강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21장, 막12장, 눅20장에 나오는 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있습니다. 주인이 포도원의 소출을 받으려고 종을 보내니 때리고 쫓아버린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아들을 보냈는데 그 아들마저 죽이고 그 기업을 차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포도원 품꾼들이 누구입니까? 율법을 지킨다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죽임당한 아들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인들만이 강도가 아닙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삽니다. 땅도 하늘도 우리의 몸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것을 다 받아쓰고 살면서도 그 은혜를 모르고 사니 전부 강도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5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예수님을 강도 잡듯이 잡으려고 온 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다 강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도 만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이웃인 예수님을 내 몸처럼 사랑하였습니까?

 

 

 

 

율법의 완성이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인데 오히려 우리의 참 이웃으로 오신 분을 우리는 강도가 되어 그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율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가 바르게 선행을 베푼다는 명목으로 죽였다는 사실 앞에서 드디어 죄가 무언인지 속속들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율법이란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사랑 없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자신은 사랑이 없는데 율법을 완성하신 그 사랑을 받고나니 사랑에 빚진 자가 된 것입니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로마서 5:5-8절입니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어떤 사랑을 받았습니까?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그 사랑이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경건하지 아니할 때에, 죄인 되어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자신의 죄가 얼마나 깊고 큰지를 알게 될 수록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거저 주시는 은혜가 더욱 감사한 것입니다.

 

 

 

 

로마서 4:4-5절입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인 삯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로 받았기에 우리가 빚으로 여긴다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저 받은 사랑은 갚을 수 없는 빚이지만 그것이 율법적인 채무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은 자꾸만 자기 편리한 쪽으로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이런 대답으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 바리새인의 집에 예수님께서 식사하러 가셨습니다. 죄 많은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속으로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저 죄 많은 여인이 만지도록 그냥 두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이신 사랑을 하고 계시는데 바리새인들은 이 행위를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질문하시기를 빚 주는 자가 오백 데나리온과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 둘이 있는데 둘 다 갚을 것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다 탕감하여 주었다면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많이 탕감 받은 자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책망하십니다.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저 여인은 눈물로 발을 씻기고, 너는 입도 맞추지 않았지만 저 여인은 발에 입 맞추고, 너는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지만 저 여인은 향유로 부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많이 사함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주님의 용서와 그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이웃을 정죄하지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알게 된 사람은, 그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받았기에 이웃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러운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사랑, 율법의 완성인 사랑, 많이 용서 받았기에 많이 사랑하는 이 사랑의 빚이 있습니까?

 

 

 

 

로마서 13:11-14  자다가 깰 때  2004. 11. 7.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사람들은 인생에서 때를 잘 만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때가 왔을 때는 기회를 포착하여 확실하게 붙들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인지 잘 모르니 사람들이 점을 치는 사람들에게 물으려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미신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하고 자신의 경험을 동원합니다. 또는 전문가들에게 의뢰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펀드 매니저라고 하지요. 이런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경제흐름만이 아니라 온 세계의 경제흐름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고서 온 세계의 경제흐름을 공부하여 예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투자를 하는 사람의 돈을 몇 배로 불려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세상에서 말하는 시기와 때의 이야기입니다. 언제 어디에 투자를 해야지 제대로 이익을 볼 것인가 하는 시대를 읽고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이 다 어두움에 속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무슨 시기와 때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성도는 어떤 시기와 때를 분별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16: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는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한 것을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이 말씀의 비유를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어느 부잣집에 청지기가 있었는데 일을 옳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해고를 시키려는 것을 청지기가 눈치 채고서는 내가 이일을 그만두면 무엇을 해서 먹고살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그래서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서 문서를 조작한 것입니다. 나중에 자기가 해직당하면 좀 도와주겠지 하면서 한 것입니다. 이것이 잘한 일입니까? 잘못한 일입니까?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잘못한 것인데 자기 살기 위해서 한 일은 지혜로운 것입니다. 윤리 도덕적인 기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다 이렇게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힘 있고 권세 있을 때에 한 밑천 마련해 놓자는 것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얼마나 지혜롭게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의 장래를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너희는 도대체 무엇을 준비하며 사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결론부분에서 하신 말씀이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섬기고 있다면 지금 사망의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항의와 반발이 나올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풍년이 들어서 창고가 비좁은 것입니다. 그래서 창고를 늘여서 다시 짓고 소출을 많이 쌓아두었습니다. 이제 든든한 것입니다. 자기 영혼에게 말하기를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너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까마귀가 농사하지 않고 창고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먹이고 기르신다고 하십니다. 들에 피는 백합화가 길쌈하지 않아도 모든 영광으로 입은 솔로몬의 옷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것은 세상의 사람들이나 구하는 것이요 너희 아버지는 이런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세상의 것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이 어느 특정인의 이야기입니까? 모든 사람의 이야기입니까?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어리석은 부자가 무엇을 몰랐습니까? 자기 영혼의 때를 몰랐던 것입니다. 자기의 영혼이 자기의 손에 있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이 한 비유의 말씀이 온 세상 사람의 이야기를 다 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 시기를 안다고 합니다. 그 시기란 구원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가까웠기 때문에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시간적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끝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이 역사의 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서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는 이미 깨어있는 자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지금 열심히 활동하고 있지만 자고 있는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낮에 속한 사람입니다. 잠도 자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이 끝장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결론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모든 세상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삽니다. 미래를 예측하면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하여 죽을힘을 다하여 달려갑니다. 그러나 그 끝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사망이란 단지 목숨이 끊어진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 아래, 아담아래, 시간과 공간 안에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다 헛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이 끝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세계가 영원한 것인 양 보이는 것을 향하여 목숨을 걸고 달려가고 있는 사람이 사망의 잠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다가 깰 때란 이미 도달하여 있는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그 자다가 깰 때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 세례요한이 외친 내용이 자는 사람들을 깨우는 외침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 천국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입니다. 그들의 깊은 잠이란 그들의 오래된 전통과 관습에 굳어져 있는 율법지킴과 성전제도를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든든해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돌멩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찍혀서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 세례요한의 증거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아니하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오히려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자는 자가 아니라 깨어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의 저주를 다 받으시고 그 율법의 공의를 다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신 그때부터 자다가 깰 때가 된 시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다가 깰 때란 앞으로 시간의 끝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니 그때에 정신을 차리고 맞이하자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간이 깨어있어야 할 시기라는 것입니다. 이미 완성품이 있는데 또다시 무엇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에 사람들은 자꾸만 엉뚱한 계획과 비전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완성을 믿는 사람은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이기에 발전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발전하는 재미에 삽니다. 개인이 발전하고, 교회가 발전하고, 국가와 역사가 발전한다고 봅니다. 그러한 발전에 대한 신념은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경제, 문화, 도덕, 과학, 종교들의 발전을 통하여 더욱 나은 인간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발전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치장하는 무화과 나뭇잎에 불과하며,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자 한 바벨탑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벌거벗고 죽으심으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12절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망의 잠에 빠져있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깊은 밤중처럼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보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있다면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일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일이란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 도모하는 모든 것들이 다 어둠의 일입니다.

 

 

 

 

14절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 도모한다는 것은 무언가 계획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것들이 육신의 정욕을 위한 것들을 말합니다. 결국 그러한 것들은 방탕하고 술 취하는 것이며, 음란하고 호색한 것이며, 쟁투와 시기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방탕하고 술 취하고 음란하고 호색한 것은 조금 덜 하고 삽니까? 별 그렇지도 않지만 그래도 조금 나은 면이 있다면 쟁투와 시기는 어떻습니까? 내 안에 시기심이 있다면 다른 방탕한 것을 보고 말할 처지가 못 됩니다.

 

 

 

 

종교적인 업적들도 얼마든지 자기의 정욕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부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자기의 정욕을 위한 것인지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서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인 것과 같은 일들이 다 자신의 정욕을 위하여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자기가 만든 옷을 입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의 행위로 만들어내는 옷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 누더기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우리의 온갖 죄와 더러움을 가려주시는 의의 세마포를 입는 사람이 성도요 그리스도 신부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6:15절입니다.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예수님께서 도적같이 오시는데 깨어서 자기 옷을 지켜서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 옷이란 자기가 만든 옷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은 옷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 옷을 잘 지키고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는데 이들이 입은 옷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이며 이것이 성도의 옳은 행실입니다. 요한계시록 22:14절에서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신부일수록 주는 옷을 감사히 여길 것입니다. 자기 의로 가득한 사람은 주는 옷보다 자기 치장의 옷을 입고 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는 옷을 입지 않으면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 뿐입니다(마22:1-14).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습니까?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14:1-6  받아줌  2004. 11. 14.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삼일 후에 대학 수능시험이 있습니다. 왜 시험을 치는 것입니까? 대학에서 수학할 능력이 있는 자를 가려내기 위하여 시험을 치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류대학생들은 자부심이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서 들어온 사람들이기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때는 중학교 고등학교도 시험 쳐서 들어갈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시험전형이 되었을 때에 일류라는 학교는 몇 회 입학이냐를 따지면서 구별한 것입니다. 나는 너와 다르게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뿐입니까? 직업, 입는 옷, 아파트 평수, 타고 다니는 차종에 따라 차별하는 곳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세상과 다르다는 교회는 어떻습니까? 너희 교회는 몇 명이 모이느냐? 건물은? 재정은? 이런 식으로 평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게 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일하여 모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하심으로 모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사람의 수나 건물이나 재정과 상관없이 완전한 교회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기에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기의 나음을 자랑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만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곳에는 그곳이 교회라고 모였더라도 언제나 시기와 질투가 있어왔습니다. 누가 더 잘하는가? 누가 더 나은 믿음인가 하는 모습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로마의 교회도 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우리교회는 어떠한지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1-2절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가 누구입니까? 고기를 먹지 못하고 채소를 먹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강한 자는 누구입니까? 아무것이나 먹을 수 있다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연약한 자와 강한 자를 차별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연약하거나 강하거나 간에 누구 편을 들지 않기에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에 의하면 정결한 음식이 있고 부정한 음식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그런 법을 늘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서는 그런 법을 지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법들과 전혀 상관없이 살았던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에 이제 교회에서는 누가 무슨 법을 지키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느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무엇을 먹느냐 아니냐의 문제를 가지고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란 어떤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에 따라 자기의 믿음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자기 행위를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자라면 그러한 조건을 보고 받으신 것이 아닌데 아직도 무슨 음식의 규례를 지켜야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아무것이나 먹을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런 규례를 아직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너희가 자유라고 하면서 마음대로 살아도 되느냐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 규례도 지키고 날과 절기도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하다는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3절을 봅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더 낫다는 말씀이 아니라 서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면 그 사람의 먹고 아니고는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용납하는 것은 자신이 어떤 조건으로 용납되어진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15:7절을 봅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받으신 것입니다. 자기 피로 의롭게 하셔서 우리를 받아들인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의로워져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아들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의인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받아들인 사람들을 복음서에서 보면 세리, 창기, 강도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들은 의롭다고 여기는 제사장들과 서기관 바리새인들 율법을 잘 지킨다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받아들인 이 사람들끼리 모여서 무엇을 자랑할까요? 세금 떼먹은 것 자랑하겠습니까? 몰래 성 매매한 것 자랑하겠습니까? 강도짓 자랑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만을 자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꾸만 자기의 행위를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너는 주일낮에만 오느냐, 나는 오후에도 금요일도 수요일도 새벽기도회까지 온다고 하면서 그렇지 못한 자를 업신여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함께 용서 받은 자로서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4절입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 서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그 주인에게 달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을 보면서 자꾸만 교정시켜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특히 목사가 그렇게 잘하지요! 자꾸만 법을 만들어내어서 사람들을 법에 종속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인이 법으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받으셨는데 종이 감히 주인의 의중을 무시하고 법을 만들어 믿음이 약하고 강하고를 판단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증거하는 바울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책망한 일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21절의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그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하여 먹지 않은 채 하면서 물러간 것입니다. 바나바도 여기에 미혹이 되었습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닌데 베드로가 그런 외식을 하기에 책망한 것입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지 아니하는 문제들, 무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문제로 싸우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싸움도 항상 사소한 것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제쳐두고 사소한 것들로 판단하고 편 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는 문제에 마음이 걸리는 것은 아직 믿음이 연약해서 그런 것이니 믿음이 강한 자가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율법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분명하게 믿고 참으로 율법에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 보시면, 율법에서 어떤 음식을 먹고 아니 먹고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이런 원리는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자유하면서 우상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먹을 수 있지만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자는 그것으로 시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 할 수 있는 자가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침이 되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약한 자들을 위하여서도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형제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받으셨는데 우리가 반대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만이요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심하여야 할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서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것도 못하느냐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경험과 체험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의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한다고 그것을 또한 비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주님에게 용납된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봅니다. 한국교회에서 주초문제는 선교초기부터 금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보니 술, 담배가 심각한 문제였기에 금지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이나 법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만 구원받는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오래된 술과 담배가 인이 박혀서 끊지를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직 술 담배도 못 끊었냐고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기호식품에 인박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술 담배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사소한 문제로 인하여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될 때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죄인을 용납하신 주님이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반대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용서받은 자로서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님께로부터 조건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납할 것입니다.

 

 

 

 

5절입니다. 지금까지 먹는 문제였다면 이제는 날짜의 문제입니다. 어떤 날짜를 중요하게 여기느냐 마느냐는 것입니다. 특정한 날짜를 지켜야 구원받는다면 그것은 안식교입니다. 날과 달과 절기를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일요일을 중요하게 여길 수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모든 날들을 다 중요하게 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자기의 마음에 확정하라고 합니다.

 

 

 

 

자기의 마음에 확정하라고 하는 것은 어떤 날짜를 지키고 아니 지키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시킨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확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느 날짜를 더 낫게 여기거나 모든 날을 같게 여기거나 간에 주님을 위하여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편리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한다는 것이 마음에 확정한 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준은 주님을 위하여, 입니다.

 

 

 

 

6절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먹지 아니하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께서 받으신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자라면 나와 다르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은 하나이나 지체가 여러 가지입니다. 강하고 약한 지체들이 다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나와 기호가 맞는 사람만 사귀겠다는 것은 취미단체입니다. 나도 주님의 피로 용납되고 당신도 주님의 피로 용납되었다면 이것 하나만으로 문화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취미와 기호가 달라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로만 받아들여지는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우리의 자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잘났는가를 말하는 곳이 아닙니다. 서로 용납함만이 가득한 곳입니다. 이런 천국을 미리 맛보는 곳이 교회입니다.

 

 

 

 

로마서 14:7-12  사나 죽으나  2004. 11. 21.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ㄱ)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1)하나님께 자백하리라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교회 달력에 보시면 추수감사절로 되어있습니다. 미리 아시고 감사헌금 하신 분이 계십니까? 교회에서 목사가 강조하지 않으면 대부분이 모르고 그냥 넘어갑니다. 강조하면 또 헌금하라는 이야기이구나, 하면서 마지못해 헌금을 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감사절 지킴이 의미 없으니 그때 하던 헌금을 모두 구제헌금으로 하자고 의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분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감사절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무어라고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법에 매여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해 동안 주신 은혜를 인하여 참으로 자원과 감사함으로 지킨다면 그것을 판단할 자격이 누구에게도 없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먹는 문제나 날짜 문제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무엇을 먹고 안 먹는 것에 따라 심판이 달라지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은 믿음이 아직 연약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어떤 음식이든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고 감사함으로 받는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받으라고 합니다. 이어서 어떤 날짜를 지키고 안 지킴에 따라 역시 심판이 달라진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도 그림자를 붙들고 있는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을 믿지 못하고 있는 연약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거나 아니 먹거나, 날짜를 지키거나 아니 지키거나 간에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한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과연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순전히 나를 위한 것입니까? 시험 날 미역국 먹으면 시험에 미끄러진다고 먹지 않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손 있는 날 이사하면 해롭다고 그 날짜를 피하고 길한 날을 택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나를 위한 것이지 않습니까? 나를 위한 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성이 성경을 보면서도 그대로 발휘되는 것입니다. 먹는 것과 날짜를 구별하라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보다는 나에게 무슨 이익과 손해가 있는가를 계산하는 것이 우리의 본능입니다. 이것이 살고자 하는 욕구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것 자체가 죄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날을 중히 여기거나 모든 날을 똑같이 여기는 것도 주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거나 안 먹거나 간에 다 주를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7-8절을 봅니다. “우리 중에는”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나 간에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것인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인간이 살고 죽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이고, 또한 그 살고 죽는 문제가 자기의 행위에 달려 있다고 여기는 것이 사람들의 상식이며 본능입니다. 다 먹고 살고자 하는 일이고 좀더 여력이 있으면 영원히 사는 것도 고려하자고 하는 일 아닙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이 사는 일차적인 목표는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여력이 있다면 영원히 살기 위하여 착한 일도 하고, 제사도 잘 지내고, 공적도 쌓고, 종교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살고자 몸부림치는 모습이 하나님께서 보시면 이미 죽은 자의 모습입니다. 해아래 행하는 모든 행위가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행위로도 인간을 살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 생명에서 추방된 상태에서 산다는 것은 죽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조차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세상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살았다는 이름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고자 몸부림치는 자라고 살아있는 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이미 죽은 자임을 아는 자는 하루속히 죽고자 하는 사람이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산 자가 된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자도 살아있는 자입니다. 그 이유는 사는 것도 주를 위하여 죽은 것도 주를 위한다는 것은 이미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 소속인가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주의 것이란 이미 소유권이 자기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고 산 자가 된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요,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산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한이 자기에게 없는 것입니다.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왜 형제 가운데 연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판단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종의 넘어짐과 일어섬이 주인에게 달린 것이고 그를 일으켜 세울 권세가 주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자기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함과 거룩함을 얻었다면 다른 형제의 행위의 문제를 자기가 관여할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절기를 지키는데 너는 왜 지키지 않느냐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안 지키는데 너희는 왜 지키느냐의 말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은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그 은혜란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의 행위가 구원에 이를 행위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완벽한지 사람의 살고 죽는 문제조차도 끊을 수 없는 은혜요 사랑인 것입니다.

 

 

 

 

로마서 8:38-39절입니다.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주의 것이란 죽는 것이나 사는 것이나 간에 그 어떤 현재의 일이나 장래의 일이나 간에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것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주의 것이 되었기에 자기를 위하여 살수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을 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주의 소유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무언가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 자기를 남보다 낫게 여기면 그것은 은혜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고린도전서 4:7절입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나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주님의 소유된 사람들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만이 아니라 은혜와 은사를 다 주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 서로 판단하는 일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교만하여져서 누가 더 나은가를 가지고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남도 판단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누가 더 나으냐 못하냐를 따지고 있다면 아직도 주님의 것이 됨을 모르는 소치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사람, 즉 주님의 것이 된 사람인데 왜 자기가 받지 않은 것처럼 남보다 자기를 더 낫게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최종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죽고 사는 것처럼 싸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최종 심판자가 엄연하게 살아계시는데 스스로 자기들이 옳다고 목숨 걸고 싸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까?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해방시키셨는데 사소한 것들로 발목을 잡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자기를 중심으로 바라보고 있는 태도입니다. 그러한 자신들 각자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최종 권위가 누구에게 있는가를 제대로 알라는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봅니다. “이를 위하여” 즉 주의 것이 됨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사신 것입니다.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님께서 가지신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도 다 주님의 권세아래 있는 것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가 주가 되시는 분임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10절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들이기에 판단은 주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내 자신이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의 판단이 어떠한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타인을 자신의 거울처럼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추어서 먹고 입고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자신은 남의 판단을 받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오직 주님의 판단만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할지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합니다만 형제 가운데 연약함으로 일어나는 문제에 있어서는 그 주인이 따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11-12절입니다. 모든 무릎이 주님 앞에 꿇게 됩니다. 모든 입으로 자백하고 직고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판단할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누가 누구를 편들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심판에 맡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성도 안에서 할 일이란 서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연약함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구하는 자는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허물과 죄가 주님의 은혜로 가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의 허물도 덮어주는 것입니다. 함의 후손이 왜 저주를 받습니까? 하나님의 덮어주심의 은혜를 무시한 것입니다. 노아가 술 취하여 누운 것이 심판이 아닙니다. 그 노아를 덮어주신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을 무시하는 것이 심판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판자는 주님 한 분이십니다. 누구도 그 앞에서 피하지 못합니다. 그분 앞에서 용서를 받은 자라면 형제를 법으로 판단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최종 권세가 주님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다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을 자들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율법의 집행자가 되는 교만인 것입니다. 이제 법이 아니라 왜 은혜로 우리를 살리시는지를 아시고 그 은혜의 증인들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모습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된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14:13-18  자유와 사랑  2004. 11. 28.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2)주의하라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사람들은 자유를 좋아합니다. 수업시간에도, 소풍가서도 가장 즐거운 시간이 자유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사용함에 있어서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내가 기분 좋다고 한 밤중에 아파트에서 큰 소리로 노래 부르고, 발을 쿵쿵거리며 춤을 춘다면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자유를 말할 때는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한 법들이 또 동원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법이 동원되어 강제되는 자유가 아니라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자유입니다. 그러한 자유는 법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일어나는 은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 자유 한다는 그런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교회에서 자유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이 자유인양 여긴다면 자유를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는 자유는 어떤 자유입니까? 잘 아시는 자유에 관한 말씀이 어떤 말씀들입니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많이 사용하면서 자기의 자유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8장에서 이 자유라는 말씀은 이미 모든 사람들이 죄의 종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 자유를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자유 하라고 하느냐의 질문을 합니다. 자기들은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짓지 아니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8:35절에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자유는 사람들이 성취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아들이 자유케 하여야 얻는 자유이며 이 자유가 참된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유란 죄와 사망에서 의와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로마서 6:20-23절을 봅니다.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종은 무슨 짓을 해도 그 죄에서 해방될 수 없기에 그 결국이 사망입니다. 이런 죄의 종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 5:1-16절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봅니다. 1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죄에서 자유란 죄를 정하는 법에서 자유입니다. 모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자기 백성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합니다. 그 종의 멍에가 갈라디아서에서는 할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지금 로마서의 말씀에서는 무엇을 먹고 먹지 아니하는 문제와 날짜의 지킴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또다시 법(할례, 음식규례, 날짜 지킴 등등의 법)으로 돌아가려면,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자유란 철저하게 주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입은 자는 자신이 법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지 아니한 것처럼 다른 형제에 대하여서도 법으로 시비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강한 믿음(무엇이나 먹을 수 있다는)으로, 무엇을 가려서 먹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연약한 자라도, 주님께서 받으신 자라면 네가 무엇인데 감히 판단하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자유를 가지고도 남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자유를 가지고 오히려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3-15절입니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ㄱ)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자유를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는 것입니까? 자기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서로 종노릇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는 또 어떻게 적용을 합니까?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더라는 말을 하게 되면, 옆에 있던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너는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도 못 들었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도 또한 하나의 판단이 되어버리고 법으로 세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갈라디아서 5:16-22절에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 내가 육체의 일인지, 성령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인지가 분별이 됩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로마서 14:13-14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판단하지 말자고 합니다. 이미 판단하실 분으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판단하지 말고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말라고 합니다. 나는 믿음이 강해서 아무 음식이나 먹을 수 있습니다.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먹을 수 있다고 합시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14절에서 사도는 음식자체가 속되거나 속되지 아니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 율법에 의하면 이단의 소리가 됩니다만 성령으로 진리를 알고 믿게 하신 결과 속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속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확신하고 있습니다.

 

 

 

 

15절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자유와 자기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형제를 업신여기고 판단한다면 사랑으로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우상의 제물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지식이 있기에 자유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나의 자유와 나의 지식으로 형제를 실족케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물로 형제가 실족할 일이 있다면 자신은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은사로 나타나는 자유의 참된 모습입니다.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의 선물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선한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방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서 율법과 종교성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헌금 안 해도 된다더라, 전도 안 해도 된다더라, 기도 안 해도 된다더라고 하는, 카더라 방송을 말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을 어떻게 완성하셨으며, 어떻게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인지.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뭐라 카더라 방송만 하게 되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비방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전이란 주의 영이 임한 성도의 몸이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당 건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 압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가 강단에 예쁜 꽃꽂이를 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여기다가 무슨 꽃꽂이를 하고 있느냐고 그 돈으로 구제나 선교를 해야지 하면 그 사람은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란 사랑의 제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제어를 받지 않고 자유를 자기의 지식을 따라 사용하게 되면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이제부터 말조심해야지! 이제는 사랑으로 해야지! 그런다고 됩니까?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 그저 내 하나 구원받으면 되지 뭐! 교회에서 봉사하다보면 부딪히고 문제 생기고하니 그런 것으로 구원 얻는 것도 아닌데 자유하면서 살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자유를 가지고 자기 육체를 위하여 사는 것이지 사랑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면 우리가 얼마나 엉터리인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살지 못함을 알면 회개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하나님의 나라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법으로 이룬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문자는 죽이는 것입니다. 의문에 속한 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알게 됩니다.

 

 

 

 

로마서 14:17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곳이 아닙니다. 무엇을 먹어야 들어가고 무엇을 먹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들 수도 없고 이루어 낼 수도 없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성령 안에서입니다. 의란 우리의 행위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평강과 희락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이 임한 곳에서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는 자기 육체의 기회를 따라 사용하는 자유가 아니라 형제를 위하여 기꺼이 종이 되는 자유인 것입니다.

 

 

 

 

모두가 힘든 일을 꺼려합니다. 교회의 봉사도 힘 드는 것을 피하고 싶습니다. 하고 안 하고는 자유입니다. 무엇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이 누려지는가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먹고 아니 먹고, 무엇을 하고 아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범사에 불평과 원망이 나온다거나, 마지못하여 한다거나, 무슨 보답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신의 죄와 비참함이 어떤지를 알게 됩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하였을 때에 자신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다고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는 사람들에게서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자기들의 나라, 율법을 지켜서 되는 나라를 계속 고수하기 위하여 사도들을 핍박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어찌할꼬! 하는 회개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입니다.

법은 행위를 다스립니다. 그러나 법대로 살았더라도 그 마음은 온갖 악한 것이 가득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진단이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케 합니다.

 

 

 

 

고린도후서 3:17절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그러나 그 자유는 자신의 육체의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종노릇하게 하는 자유인 것입니다. 이것이 의와 평강과 희락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서도 칭찬을 받게 됩니다. 우리 안에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의와 평강과 기쁨으로 나타나는 일을 맛보기를 소원합니다. 그 맛을 본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4:19-23  믿음으로 하지 않는 죄  2004. 12. 5.


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먹고 안 먹고 해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나타나는 나라인 것입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으로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진 평강이요 그 결과로 나타나는 기쁨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며 그 하나님 나라가 임한 자들끼리 모인 곳이 교회이기에 서로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곳은 자신의 행위와 의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은혜로 되어진 것이기에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업, 하나님의 일이란 의와 평강과 희락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무언가 자기의 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것을 하는데 너는 왜 못하느냐? 나는 하지 않는데 너는 왜 하느냐? 하는 일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관심이 그리스도의 피에 있지 아니하고 다른 곳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지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믿음으로 자유 할 수 있는 문제라도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은 형제라면 그 형제로 거리끼게 하지 아니함이 화평과 덕을 세우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자유가 사랑의 제어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다 정하지만 거리낌으로 먹는 그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거리낌으로 먹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23절에 보시면 의심하고 먹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자신의 믿음으로는 거리낌이 있는데 내가 이것을 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믿음이 없다고 할까봐서 무엇을 하게 되는 경우에 그것은 믿음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2절에 자기의 믿음대로 행하되 그것을 책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다음의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0:23-33절입니다.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판단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감사함으로 하는 일에 그 감사함에 대하여 비방을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유란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는 자이며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하는 일의 결론입니다.

 

 

 

 

다시 23절의 말씀을 봅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다고 합니다. 왜 정죄된 것입니까? 믿음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합니다. 로마서 14장의 내용으로 무엇을 먹고 아니 먹고, 무슨 날을 지키고 아니 지키고의 문제가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다 죄인데 믿음으로 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는 고린도전서 10장의 말씀을 결론으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과연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 다 죄이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히브리서 11: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지 무엇을 먹고 아니 먹고 날을 지키고 아니 지키고의 문제만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더 넓게 보고자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믿습니다’하는 결단이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8-9절을 봅니다.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믿음이란 은혜의 선물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이 자기의 행위로 되는 것처럼 믿고 사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틀림없이 자기의 자랑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자기 자랑이 나오면 그것은 믿음으로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죄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하는 일치고 자기 자랑이 나오지 아니하는 행위가 과연 있습니까? 구제를 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합니다. 그게 과연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단지 매스컴에 알리지 않고 구제를 했다고 그것이 과연 왼손이 모를 일입니까? 나는 아무도 모르게 구제했다는 자기 자랑과 자기 보람이 나오는 것은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재미란 자기 자랑하는 재미로 삽니다. 잘난 사람들은 잘난 대로 자기 자랑하며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자기 자랑하며 삽니다. 부자는 자기가 올해 수십 억의 이익을 남겼는가를 가지고 자랑할 것입니다. 거지는 오늘 얼마나 동냥을 잘하였느냐를 가지고 자랑할 것입니다. 축구 국가 대표선수는 국가간 경기에서 몇 골을 넣었는가를 가지고 자랑할 것입니다. 우리는 동네에서 아이들하고 축구하다 골인 넣은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를 하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고, 찬송을 하고, 설교를 하고서도 은근히 자기 자랑이 나오면 그것이 믿음으로 하지 아니한 죄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한 것이라면 은혜로 선물로 된 것이기에 자기 자랑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도록 전도를 하고, 기도를 하고, 전 재산을 헌금해도, 그것이 믿음으로 한 것이라면 결코 자기 자랑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무익한 종이라고 할 뿐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행한 일들 중에 도대체 무엇이 믿음으로 행한 일입니까? 저희 교회 게시판에서 행함에 대한 질문을 하신 분이 계시는데 도대체 자기가 행한 일중에 무엇을 긍정할 일이 있어서 그 행함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까? 오직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이 다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질문하면서조차 자기의 정당성을 챙기고 자기 과시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면서도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13-17절입니다.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이 말씀에서 무엇이 죄입니까?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함이 죄입니다. 그러면 선이란 무엇입니까? 요즈음 새벽기도회에 시편을 보고 있습니다. 시편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선이고 의라고 합니다. 주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기 힘으로 의지하고 세상의 권력을 의지하는 것이 교만이고 악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서 악이 무엇입니까? 자기 스스로 무슨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지금쯤이면 회사나 교회나 내년의 사업계획 구상으로 바쁠 때입니다. 회사는 내년 매출을 얼마로 잡아야 하는가를 회의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도 내년 예산을 얼마로 잡아야 하는지, 부서별로 얼마나 사람을 모아야 할지를 분주히 계획을 세웁니다. 사업계획입니다. 그런데 그런 계획을 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잠간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라고 합니다.

 

 

 

 

안개가 무슨 계획을 세우겠습니까?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데 무슨 일년 후의 계획을 세우고 십년 후의 계획을 세웁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면 꼭 이런 분들이 나옵니다. 우리 목사가 그러는데 무슨 계획을 세우는 것이 죄라고 그러더라, 그러니 되는 대로 살라고 하더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계획을 세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개임을 안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주의 뜻이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것이라고 해야 하는데 자기의 야망을 계획해놓고서 그것을 이루어내는 것을 믿음이라고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다 허탄한 자랑이요 악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허무주의자라고 패배주의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욕망을 미래에 비추어 놓고서는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달려가는데 그것을 꿈이 큰 사람, 미래 지향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자기의 욕망 안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과연 믿음으로 하는 것인지 자기 욕망으로 하는 것인지를 어떻게 분별합니까?

 

 

 

 

로마서 8:24-25절입니다.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 소망이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 사람들이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은 소망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하신 바를 신실하게 이루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고 보니 우리가 그동안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죄밖에 지은 것이 없다는 인식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제는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면 됩니까? 나의 소망은 오직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하면 됩니까? 또 다른 행함의 차원입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요한복음 16:9절에서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함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됩니다. 이런 사람은 우리가 믿지 않음이 죄이고, 믿음으로 행하지 아니함이 죄임을 알고 회개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주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5:1-7  강한 자와 약한 자  2004. 12. 12.


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ㄱ)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강해야 산다!’ 바로 옆의 상가에 있는 태권도 도장에 붙어 있는 글입니다. 강해야 살기 때문에 새벽부터 아이들이 눈을 비비면서 태권도 도장을 가는 것입니다. 정글의 법칙만 통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강함만으로 세상에서 강한 자가 될 수 없기에 오후에는 학원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완벽하게 강한 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의 도움마저 받아서 정말 강한 자가 되려고 교회도 오고 절에도 가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강한 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까? 내가 남보다 강해서 이기면 기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놀이터에서 맞아서 울고 오면 어떻게 합니까? 병원비 물어줄 테니 다음에는 패고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이기고 강해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강자가 되고 승자가 되면 여유까지 부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기고 이겨서 신에게까지 이겨보자는 것입니다. 한국 최고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민족사관 고등학교 기숙사에 ‘신에게 복수하자’라는 글귀를 보았습니다. 결국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기까지 인간은 이기고 이겨서 강한 자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강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강한 자가 되려고 한 것을 회개하고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게 되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 후에 갑자기 심방할 일이 있어서 아이를 데리러 갔습니다. 친구들과 나오더니 한 친구가 우리아이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차에서 무슨 이야기 했느냐고 물어보니 ‘자기가 친구에게 교회에 가자고 했는데 친구는 가고 싶지만 어머니가 가지 말라고 그러더랍니다. 가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교회 가서 아무리 빌어도 이루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듣고서 그 엄마가 바른말 했네, 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에 가서 자기 소원을 빌었는데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절에 가서 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소원이란 강한 자가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강한 자가 되어서 남위에 군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의 제자들을 만물의 찌기보다 더 못한 모습으로 낮추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교회라면 내 소원은 부인 되어지고 주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마태복음 20:25-28절입니다.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제자들은 따라가면서 누가 높으냐를 가지고 서로 시기 질투한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치맛바람까지 일으키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큰 자가 권세를 부리지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섬기셨기에 가장 큰 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주님의 섬김을 받는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주님의 섬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는 주님을 믿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강한 자가 되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 1절에 보시면 우리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강한 자와 연약한 자가 나옵니다. 그러면 강한 자란 믿음이 강한 자인데 어떤 사람이 믿음이 강한 자 입니까?

 

 

 

 

로마서 14장을 함께 보면, 강한 자란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주님의 섬겨주심을 믿는 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음식을 먹고 아니 먹느냐에 따라 자신의 믿음이 달라지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약한 자란 주님의 섬겨주심보다 자기의 행위에 따라 믿음이 좌우되는 것처럼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자란 아무것이나 먹을 수 있지만 연약한 자는 아직도 법에 매여서 무엇을 꺼리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자란 자기의 행위로 잘난 사람이 아니기에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는 것입니다.

 

 

 

 

2절을 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이것이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선과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로 비방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과 덕이 단지 윤리, 도덕적인 내용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기에 비방을 받게 됩니다. 복음이란 자기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내용입니다. 이 복음의 내용이 사람들을 얼마나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인지 아십니까?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에게 당신은 지금 그대로 살면 죽어 마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는 자리입니다. 당신의 어떠한 선행으로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이 소식하고, 당신은 참으로 훌륭하고 멋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더 훌륭하고 멋있는 사람이 됩니다. 종교란 다 사람들이 서로 착하고 바르게 살자고 하는 것인데 그중에 기독교가 그래도 가장 고상하고 좋은 종교입니다. 한번 믿어보시지 않겠습니까? 이 두 이야기 중 소식 중 어느 소식이 복음의 내용입니까? 전자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사람들이 듣고서 비방을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선하고 덕을 세우는 일인데 비방을 받는 것입니다.

 

 

 

 

3절을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런데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시편 69:9절의 말씀인데 시편 69편은 다윗의 시편으로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의 도우심만을 바라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자를 주위의 사람들이 훼방하고 비웃고 말거리로 만들며 핍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대로 성취가 됩니다. 주의 집을 위한 열성이 나를 삼키리라는 말씀이 성전을 청결케 하는 사건에서 성취가 되고, 쓸개로 식물을 삼고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다는 말씀도 역시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비방을 받는 이유는 너희의 행위를 버리고 나를 믿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스스로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나올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자가 자기 소유를 지키고 있을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 강한 자를 결박하면 그 소유를 탈취하여 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강하신 분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강하신 분이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17절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려고 하심인데 그것은 이사야 53장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죽을 때까지 자기 옳은 대로,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아도 자기 옳은 방식대로, 믿는다고 해도 자기 옳은 방식대로 믿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가장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방식대로 따라 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에게서 가장 잘 나오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교회에 오래 다니고 성경을 좀 안다는 사람들, 기도 많이 한다는 사람들, 복음을 안다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모습들이 이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중에 누구라도 주님의 섬김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한 자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그만 저의 연약을 담당하시거나 대신 지시지 마시고 제가 직접 지겠습니다하고 나온다면 자신이 주님만큼 강하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자는 더욱 주님의 섬김을 받아야 하는 자임을 아는 사람이 강한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형제의 연약함을 보고서 윽박지르거나, 무시하거나, 너는 나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서 담당하신다고 하면서 인내하게 하고 위로할 것입니다.

 

 

 

 

4절을 봅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인내와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능력으로 믿음의 걸음을 간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대신 짐을 지심으로 가게 된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보면서 우리의 연약함에 대하여 실망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보면서 구약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도 인내하게 되고 위로를 받고 소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68: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합니다. 바로 앞의 1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주께서 승리하시고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위로가 되십니까?

 

 

 

 

5-7절입니다. 바울 사도는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을 같이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한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조건을 보지 아니하시고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서로 받을 수 있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나 연약한 자나 간에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강한 자는 예수님께서 대신 지심을 더욱 분명하게 알고 믿는 것이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는 그래도 내가 좀 져야할 부분이 있지 않는가 하면서 주님의 대신 지심을 미심쩍어 하면서 스스로 음식도 가려보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중에 누구도 주님께서 짐을 대신지지 않아도 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에베소서 4:1-12절입니다. 시편 68편 18절을 인용하면서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시고 다시 오르신 그 승리하심으로 우리의 죄 짐을 담당하시고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다고 합니다. 몸, 성령, 소망, 주, 믿음, 세례,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은사를 주신 것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은사를 받은 자는 다 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5:8-13  수종자(隨從者)  2004. 12. 19.


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9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ㄴ)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0 또 가로되 ㄷ)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1 또 ㄹ)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2 또 이사야가 가로되 ㅁ)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교회는 예수님의 섬김을 받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섬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3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하면 식사 전에 예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베드로 차례가 되었을 때에 베드로가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는 것입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주시는 이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저의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거절합니다. 발을 씻어주는 일은 종중에서도 낮은 종이나 하는 일인데 주요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나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러자 베드로가 깜짝 놀라서 그러면 손과 머리도 씻겨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목욕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또 다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중에 가룟 유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미 목욕한 자는 발을 스스로 씻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른이 아이들 목욕시켜주면서 발을 네가 씻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목욕한 자의 발을 씻기시면서 그것을 거절하자 그러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베드로가 지금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요 선생이 되어서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나중에 성령이 임하고서야 알게 되는데 발 씻는 것이 무엇임을 알게 되었습니까? 세족식을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늘 주님의 용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8-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1)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 피로 속죄함을 입은 은혜가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3: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그러므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받는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주님의 섬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는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그런 자는 스스로 잘 씻고 다니는 사람이기에 예수님께서 씻어주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머리부터 발까지 다 씻겨 주셔야함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한번만이 아니라 늘 씻겨 주셔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바보입니까? 자기 발도 하나 못 씻는 자들입니까?

 

 

 

 

마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에 바리새인들이 너희들은 왜 손을 씻지 않고 먹느냐고 힐난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속에서 나오는 것들은 악한 생각,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증거, 훼방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나는 한번도 그런 마음을 먹은 적도 없고 그런 행동을 한 적도 없다고 하시겠습니까? 지금 나오지 않는 악들이 특정한 상황이 되면 나에게도 그대로 나옵니다. 누가 누구를 손가락질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교회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께서 씻겨주셔야 함을 믿는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으로 스스로 해결을 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율법에 명한 모든 것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 중에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할례의 언약을 예로 들어봅니다. 그들은 난지 팔 일 만에 꼭 하였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하였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들이 다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몸에 할례를 하여도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았다는 육적인 표시로서는 자기를 구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할례를 하라고 하신 그 뜻이 성취가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신 것은 언약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부인하고 약속으로 태어나게 하심을 보이시기 위하여 99세에 할례를 행하고서 이삭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할례를 명하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란 사람의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임을 보이시는 표가 할례인데 오히려 유대인들을 할례 법을 지키는 그것을 자기들의 의로 여긴 것입니다. 이들의 잘못된 할례의 의식을 예수님께서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5:8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그 입에서 나온 말씀은 단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도록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말씀하셨는데 그들이 행한 할례란 육적인 할례만 행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의 할례가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할례란 약속의 자녀가 되는 표가 되는데 몸에는 표가 있는데 마음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할례의 참된 효력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할례를 친히 받으시고 할례 받은 자들이 마땅히 이루어야할 할례의 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들이 법으로 행한 할례란 육적인 할례뿐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육적인 할례로는 거듭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것입니다.

 

 

 

 

즉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언약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할례만이 아니라 모든 언약을 지키시고 이루어내시는 수종자가 되신 것입니다. 언약을 이루시는 종이 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공로로 인하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종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을 섬겨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종자가 되심으로 유대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견고케 하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긍휼로 부르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5:9절을 보시면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심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도 긍휼로 이방인도 긍휼로 구원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에 우리의 공로가 있다면 우리에게도 노력한 만큼 영광이 주어지겠지만, 오직 주님의 은혜이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5:9-12절까지 구약의 성경 네 곳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9절은 시편 18:49절, 10절은 신명기 32:43절, 11절은 시편 117:1절, 12절은 이사야 11:10절의 말씀입니다. 율법과 시편과 선지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을 말씀하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과 시편과 선지서 에서 나를 가리켜 예언한 것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네 구절의 말씀 중에 공통된 단어가 열방입니다. 열방이란 모든 나라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언약을 완성하시고 이제 높임을 받으셨기에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열방 중에서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긍휼을 입은 그의 백성들은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 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예원이 돌잔치를 하였습니다. 대표기도하신 분이 부산의 어느 교회 장로님이셨는데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을,,, 이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로마서 4장의 본문으로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어린이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돌상을 받는다는 비유로 우리가 아무 한 것이 없이 은혜를 입는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무 한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한 것이 있습니다. 죄를 지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면 돌잔치를 베풀어주는 것보다-다 부모의 기쁨이지요! 아이는 귀찮아서 우는데-그 아이에게 정작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런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돈, 연필, 실, 마우스를 놓고서 선택하면 그것에 따라 의미를 둡니다. 그러나 돌상위에 피를 철철 흘리는 십자가를 놓아두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이 세상에서 죽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죽은 세상 속에서 죽음을 먹고 마시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소망이란 다 썩어질 소망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부탁하기에 무엇을 잡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의롭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잡지 못하게 한다고 해서 예원이가 돈을 잡지 않을 아이가 아닙니다. 실을 잡지 않는다고 오래 살려고 발버둥치지 아니할 아이가 아닙니다. 연필을 잡지 않는다고 공부시키지 아니할 부모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자기가 죽은 자 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수종자로서 그 언약을 완성하시고 그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하신 뜻 안에서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자신의 죄와 비참을 알게 하시기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기에 이런 사람들의 소망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조차 기다리는 성탄절이 아니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연기하고 싶고, 피하고 싶은 그 재림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일이며 그러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수종자가 되셔서 완성하심을 또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더 이상 자기에게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강하냐! 약하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서로 용납이 됩니다. 다 섬김을 받아야 하는 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같은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15:13절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과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왜 인내와 안위가 있어야 합니까? 소망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 소망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소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우리 모두에게도 넘치기를 또한 소원합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멘.

 

 

 

 

로마서 15:14-21  자랑하는 것  2004. 12. 26.


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1)편만하게 전하였노라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 기록된바 ㅂ)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004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한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계획합니다. 지난날의 좋지 않았던 것들은 털어버리고 좋은 것만 남겨서 새해를 맞이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날짜가 바뀌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애를 쓰고 이루고자 하는 일들이 옛날에도 있어왔던 일들입니다. 아무리 그렇게 애를 써와도 인간이 행한 일들이란 헛되고 헛되며 헛된 것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헛되지 아니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다 무너지고 불에 타고 흔적 없이 사라져도 남겨지는 것들이 헛되지 아니한 일입니다. 그런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만이 헛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이루어내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는 일들이란 모두 다 헛된 것 들 뿐이어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시면 바울사도가 자랑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자랑하는 것입니까? 인간이 행한 일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자랑이란 단어를 살펴보면 인간의 자랑이 다 죄악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하면서부터 인간은 자기를 치장하고 자랑하는 일에 사로 잡혀 살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여도 자기 자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한1서 2:15-17절을 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지나가는 것과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것, 그래서 헛된 것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인간 한 평생의 일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그 죄안에 다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지금까지 이 정욕에서 참으로 자유 한 자가 있습니까? 자기를 죽어 마땅한 자로 시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자랑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바울사도는 자랑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 자랑거리가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5:14-15절입니다. 로마교회는 이미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선함이 가득하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확신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 하려고 이렇게 다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까? 로마서 1장에서도 바울사도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 이미 복음을 듣고 예수 믿는 자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하게 대강 복음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왜 복음을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한 것입니까? 로마교회는 복음을 받고서 여러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였다면 당하지 아니할 일들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인한 핍박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무엇으로 위로할 수가 있겠습니까? 복음으로 인하여 집안에서 쫓겨나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무어라고 말해야 합니까? 복음을 위하여 고생했으니 이제 곧 세상에서 높아질 것이라고 성공할 것이라고 그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다시 복음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최고의 기쁨이요 소망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를 하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나면, 들을 때는 알겠는데 돌아서면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온 세상이 은혜로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듣고 말하고 사는 모든 환경이 적자생존의 세계이지 은혜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모이기를 힘써야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날마다 모인 것은 교회성장이나 헌금 많이 거두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나누기 위하여 날마다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도 모이고 오늘도 모인 것은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6-18절입니다. 바울이 받은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군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종이 되고 일군이 된 것이 은혜입니다. 그 전에는 마귀의 종이요 마귀의 일군이었는데 이제 예수님의 일군이 되었으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리고 자신이 이방의 사도가 되어서 이방인 중에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찾아내는 일을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받으심직하게 하려한다고 합니다.

 

 

 

 

제사장이란 구약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흠 없고 정결한 짐승의 피를 흘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하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피 흘림을 인하여 자기들이 죽어야 하는데 대신 피 흘리신 희생을 통하여 자기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날마다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번제가 드려지는 것입니다. 매일 피를 흘려야하는 것입니다. 그 제사장의 직무를 이제 바울사도가 복음의 제사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제사장이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이러한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옴은 바울사도의 의도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이방인들도 주를 찬송하고 주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그 언약의 말씀을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열방이 함께 주를 찬송한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율법과 시편과 선지서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66:18-21절을 봅니다. “18 ○내가 그들의 소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열방과 열족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19 내가 그들 중에 징조를 세워서 그들 중 도피한 자를 열방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열방에 선파하리라 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21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열방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는 문자적인 성취를 지금도 유대인들은 붙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운동이 시오니즘입니다. 그 시오니즘의 일환으로 지금의 예루살렘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취란, 지금의 시간과 공간인 예루살렘의 땅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회복입니다. 이사야 66:22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새롭게 지으실 나라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난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그 제사장의 일을 바울사도가 은혜로 감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7-18절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인 것입니다. 그 일을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그 뜻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시기 위하여 바울사도에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난 일 외에는 자기의 그 어떤 것을 감히 말하지 아니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자의 태도입니다.

 

 

 

 

19-20절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즉 복음 전함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쓴 것은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사도의 관심은 자기가 개척한 교회의 교세의 확장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증거 되고 이방인 가운데서도 복음을 믿는 자가 나오는 것을 보고서 구약에서 언약한 그 일들의 성취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서 너무나 기뻐하고 감사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21절 말씀에서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고 한 이사야 52:15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서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그 하나님의 일을 인하여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유대인이었던 자기 자신도 주의 소식을 받기는 하였지만 깨닫지 못하였던 내용입니다. 그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기에게 주어지고 그것은 또한 이방인들을 주께로 돌이키는 도구로 사용하여 주심에 대하여 그 복음의 위력과 능력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기의 뜻을 완벽하게 이루고 계시는지 알면 알수록 더욱 감격할 수밖에 없고 그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이 기쁨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슨 자랑이 있습니까? 나에게 자랑하는 것이 있다고 말할 무엇이 있습니까? 세상의 헛된 것들에 대한 자랑이 아닙니까? 그러한 허탄한 자랑들이 다 악한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외에는 달리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핍박이 있고, 환난이 있고, 매 맞음이 있고 죽기까지 할지라도 주님의 뜻이 포기되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참예되었다는 것으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3절입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멍에를 멘 자, 복음 전하는 일에 바울사도와 함께 힘쓰던 부녀자들과 그 외의 많은 동역 자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부러울만한 곳에 이름이 없더라도, 연말에 크리스마스카드 한 장 받지 못하더라도, 복음을 알고 그 복음을 믿고 참예되었다면, 그 크신 일을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은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만물을 그 아들을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도 예수 그리스도여야 마땅한 것입니다.

 

 

 

 

로마서 15:22-29  충만한 축복  2005. 1. 2.


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2)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3)확증한 후에 너희 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29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받았습니다. 문자 메시지로, 홈페이지로도 받았습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축복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새해부터 설교를 바꾸기로 작정했나 왜 시작부터 축복을 이야기하는가 하실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만 오늘 말씀 29절에 바울 사도가 로마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고 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이나 세상으로부터 좇아오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안에 예정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하늘에 속한 그 신령한 복이 얼마나 엄청나고 대단한 지를 평생을 통하여 알아가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거대한 선물의 통속에 빠졌는데 그 안에 모든 것들이 다 은혜로 주어지는 복임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난 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성령의 역사로 바울사도가 도구가 되어서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세상의 복을 이야기하지만 교회에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들이 증거 되고 그것을 참된 축복으로 아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3-6절입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축복의 내용이 너무 많아서 조금만 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복이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는데 우리의 뜻대로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신 것입니다. 그 뜻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축복임을 믿으십니까? 바울사도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증거 하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일을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교제란 바울사도가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만나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편지로 복음의 교제를 한다고 하여도 얼굴을 마주보고 그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과 같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사도는 로마의 성도들을 만나보기를 간절히 원한 것입니다.

 

 

 

 

로마서 15:22-24절입니다. 바울사도가 로마교회에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다고 합니다. 이 것은 자기의 뜻대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가 있는 지역에 복음을 다 전하여 일할 곳이 없게 되었고 이제는 서머나, 즉 스페인으로 갈 때에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가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뜻마저도 자기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15:25-28절입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연보를 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에서 전달하고서 로마교회로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로마교회를 방문하려고 하는가 하면, 서바나로 가면서 약간의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로마는 이방인 세계의 중심이기에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은 그곳에서 그 당시의 땅 끝이라는 스페인으로 가고자 한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돈 이야기가 나오면 갑자기 껄끄러운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마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교회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위하여 연보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가 어떻게 받을지가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교회는 주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율법의 규례와 전통이 강하여 이방인을 개같이 여기고 있는데 그런 이방인지역의 교회에서 연보한 것을 과연 기쁨으로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러한 문제까지 복음 안에서 교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복음이 유대의 경계를 넘어서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사도행전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사도들이 직접 복음을 듣고서 믿게 되는 사람들을 직접 목격하게 하고서야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을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의 교회를 위하여 연보한 것은 동일한 은혜를 받았다는 입장에서 한 것입니다.

 

 

 

 

그들도 극심한 가난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힘에 지나칠 정도로 기쁨과 감사함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어떻게 여기는지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았기에 기쁨으로 참여하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보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역시 감사함으로 받아진다면 그것이 성도의 교통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방인 교회에서 연보한 것을 예루살렘 교회가 받음직 하게 되도록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31절을 봅니다.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한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 하게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기근이 와서 심히 어려움 중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방인 교회에서 연보를 한 것을 당당하게 들고 가서 보란 듯이 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연보가 받음직 하게 되어서 그리스도의 축복의 풍성함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드러내고자 조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일을 예루살렘에서 확정한 후에 로마교회를 방문하겠다고 합니다. 로마교회는 이방인 세계의 중심입니다. 그곳에서 그 당시에 땅 끝으로 여긴 스페인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일에 로마교회가 도움을 주기를 원한다고 한 것입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에 연보를 전달하려는 조심성보다 훨씬 솔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복음 안에서의 교제를 인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풍성한 축복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사소한 것들이 무슨 은혜인가 하고 싶으신 분은 아니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간다고 바울사도가 말하고 있는데 그 충만한 축복이 이방인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하고 그것을 기쁨으로 감당하였으며 예루살렘 교회는 그것을 역시 합당하게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축복의 이야기입니까?

 

 

 

 

에베소서 2:13-18절입니다.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상관없이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으신 것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로 한 몸을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일을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제목이 충만한 축복이라고 해서 무언가 다른 기대를 하시지는 않았겠지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이 성령의 역사로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이 영원한 축복입니다. 그러한 복은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아 갈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을 받은 사람이라면 새해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나는 작년에 성공하지 못하였으니 올해는 꼭 성공해야지 하면서 소원을 빌려고 동해안 해맞이하러 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송구영신예배하면서 봉투에 소원 적어서 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다 받았기에 그 복이 무엇인지를 살아가면서 더욱 많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 그렇지만 그것만이 복인가 다른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시는 분이 아직도 있는 줄 압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시편 33:1-22절입니다. “봉독” 이 말씀은 인도에서 지진이 일어난 다음날 새벽 기도회 때 보았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천지를 입 기운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바닷물을 무더기 같이 쌓으시는 분이십니다. 천지를 지으신 분께서 자기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고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십니다. 세상의 나라들이 무슨 사상을 가지고 무슨 계획을 세우겠습니까? 부국강병입니다. 그러나 말의 힘과 용사의 힘으로 구원 얻은 왕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의 나라들을 다 폐하여 버리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만을 영원히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나라들은 오늘도 부지런히 자기들의 사상으로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모두가 모래위에 짓는 집입니다. 아무리 기초를 튼튼히 하여도 이 땅 자체가 물위에 떠 있는 것입니다. 인도의 지진에 대하여 이미 다 보셨을 것입니다. 커다란 널판 같은 것이 물에 떠있는데 그 두 판이 서로 조금 충돌이 일어난 것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우리나라 두 배나 되는 섬이 수십 미터 이동을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받은 사람은 흔들리는 땅위에 영원한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그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간절히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세계에 대하여 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성공한 사람들에게 찬사와 영광이 따르고 실패한 자는 나가 있어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불면증과 스트레스만 쌓여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그 나라를 받았다는 것이 복입니다. 이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나라이기에 어떤 인간의 자랑이나 공로가 끼어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기와 질투와 경쟁이 있을 수가 없는 곳입니다. 의와 희락과 평강의 나라입니다. 은혜와 용서와 사랑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풍성한 축복을 더 많이 맛보아 가기를 소원합니다.

 

 

 

 

로마서 15:30-33  바울의 기도요청  2005. 1. 9.


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찌어다 아멘.

 

 

 

 

바울사도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기도하는 내용을 보기 전에 우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도란 어떤 것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탐심을 위하여 기도하는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지리산을 가고 오면서 보니 산골짜기 마다 기도처라는 간판이 있었습니다. 그런 곳은 대부분 불상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도원이라는 곳도 엄청 많습니다. 이제는 도심지까지 기도원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부처님께 기도하든 자연물에 기도하든 하나님께 기도하든 그 기도의 내용들이 자기의 소원성취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라면 이미 그 사람은 어디에 다녀도 우상숭배자인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우상에게 절하거나 빌지 않으니 우상숭배자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골로새서 3: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서 우상숭배자가 아닌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정욕을 따라, 탐심으로 기도하면 그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특징은 정성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정성이란 목욕재계하고 지성으로 비는 것을 말하는 것은 옛날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다 돈으로 통하는 세상입니다. 금액의 많고 적음으로 정성의 많고 적음을 따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사야 66:1-4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1)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정성을 바치는데 신을 위한 집을 지어드리는 것보다 더한 정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는 소나 양을 바치는 것도 대단한 정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뻐 하시 것입니까?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자를 돌보시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의 말씀을 모르고 자기 소원성취를 위하여 기도를 하러 나온 사람들은 자기가 정성을 바칠 테니 내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기 정성을 바친데 대하여 항의를 합니다. 이렇게 정성을 바쳐도 기도도 들어주지 아니하니 다른 곳으로 옮겨버린다고 신에게 협박하거나 철야 농성을 하거나 금식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태도.


이제는 바울사도가 기도를 요청하는 자세와 동기와 내용을 보고자 합니다. 먼저 기도를 요청하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사도입니다. 유대인들은 별 인정을 하지 않더라도 이방인에게서는 그는 사도의 권위가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주의 계시를 직접 받는 사도인데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도원이라는 곳에는 사람들이 기도를 받으려고 갑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해주는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달라고 한다면 능력 없는 자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나 로마교회 성도나 똑같이 주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도해주는 높은 자와 기도를 받는 낮은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주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목사가 기도하면 효험이 더 있는 양 여깁니다. 이런 것을 종교성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여 달라고 하는 것은 전혀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님의 복음이 증거 되는 일에 자신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로마교회도 동참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동기.


30절입니다. 바울사도가 기도를 요청하는 동기도 자기의 뜻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는다고 합니다. 자기 소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이 성령의 역사로 이런 기도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의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합니다. 합심하여 기도하면 잘 들어준다고 해서 무조건 합심하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이 하나 되는 기도의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기로 기도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의 내용.


30-32절입니다.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에게서 구원을 받도록, 아시아의 성도들이 연보한 것을 예루살렘 성도들이 받음직 하도록 그리고 로마로 평안히 가도록 기도를 요청합니다. 먼저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란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로 보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조차 배척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은 바울사도가 이방인 지역에 전도하러 가는 곳까지 따라다니면서 방해하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자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더욱 많은 곳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에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날지 성령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20:22-24절입니다.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1:10-14절입니다. “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성령의 지시로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당하고 이방인에게 넘겨질 것을 압니다. 그러나 심령에 매임을 받아서 가는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자 말리던 사람들도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서 그칩니다. 즉 기도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가서 죽든지 살든지 주의 복음이 증거 되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기도를 요청함으로 주님의 뜻에 함께 참예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로 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편안히 쉬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자기의 소원이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기가 사용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사람인지라 두렵고 떨리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도하지 아니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자신의 육신의 가시를 제거하여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주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전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대하지 아니하시고 만물의 찌기처럼 천대받는 모습으로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1:8-11절입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 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복음을 전하는데 살 소망까지 끊어질 고생을 시키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뜻은 전도하는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함이란 철저하게 주님의 소관임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이 결코 아님을 알도록 죽을 고생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를 건지시고 앞으로도 건지실 것을 그를 의지하여 바라는 것입니다. 이 일에 기도로 도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대로 사용되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이지 자기의 성공이나 영광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요청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사도가 믿는 형제들에게는 기꺼이 받아들여집니다. 이방인들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을 보고하자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듣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유대의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얼마나 핍박받는지, 유대인들의 반발이 대단합니다.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갔다고 하면서 데모가 일어나고 로마의 천부장이 출동하여 바울을 체포한 것입니다. 심지어 유대인 40여명은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런 상태에서 바울사도가 로마의 시민권이 있으므로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송사 중에도 바울사도는 무엇을 합니까?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로마로 가게 되는데 얼마나 안전하게 가게 되는가 하면 로마군대의 호송을 받는 죄수의 신분으로 가게 됩니다. 그 당시 가장 안전하게 로마로 가게 되는 길입니다. 결국 바울사도는 로마에 가서 연금 상태로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로마 교인들에게 기도 요청한 것이 그대로 응답이 된 것입니다.

 

 

 

 

성도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이루어내시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루어낼 수 있는 것 같으면 기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주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사람은 늘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사람은 늘 평강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바울사도는 축복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있을찌어다 아멘!

 

 

 

 

로마서 16:1-16  영접과 문안  2005. 1. 16.


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1)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2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찌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3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5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6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8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0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11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권속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12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14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15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연말연시가 되거나 명절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로 문안인사를 합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다고 합니다. 부모나 스승, 직장의 상사나 동료 후배들에게도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인사도 공평하지 않습니다. 연하장이나 문자 메시지로 때우는 문안인사가 있고, 선물을 돌리는 경우도 있고,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이런 차별이 나는 것입니까? 모두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차별이 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사귐을 통하여 무슨 덕이 있는가를 계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와 사귀면 어떻게 될까요?

 

 

 

 

고린도전서 4:9-13절입니다.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11:23-28절입니다.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사도가 세상에서 사는 모습이 이런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하고 사귀고 싶습니까? 가까이 올까봐 무섭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사도는 누구와의 사귐이 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믿는다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있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도들과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합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말이 있지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을 사귀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사람됨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귈 자를 가려서 잘 사귀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자녀들이 친구라고 데리고 왔는데 세상의 구경거리요 멸시와 천대를 받는 자를 친구로 데리고 온다면 부모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시락 싸다니면서 말릴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이런 모습을 보고서 그와의 사귐이 있고 문안이 있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무언가 외부에서 대단한 능력이 작동하였습니다. 제 정신으로 바울 사도가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계속적인 사귐을 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사도와 처음에 사귐이 있다가 떠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알고(딤후1:15),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4:10), 이런 말씀들을 보면 바울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버리지 않고 바울과 함께 한 자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피로 새롭게 창조되어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세상의 방식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영접하며 교제하고 문안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혈연, 지연, 학연, 취미와 기호를 따라 이합집산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란 일체 그런 모임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체의 자기 공로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만 모여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 곳이라면 더 이상의 인간적인 차별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16:1-2절을 봅니다. 겐그리아 교회의 일군인 자매 뵈뵈를 천거한다고 합니다. 교회의 일군이란 집사입니다. 지금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여 집사를 천거하면서 주 안에서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라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합니다.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바울사도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어떤 지경에 있는지를 알면서도 바울과 복음전하는 자들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한 주요 한 성령이요 한 몸임을 증거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여자의 신분과 지위란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지 선거권도 없고, 증인 채택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남자들이 기도할 때 여자로 태어나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의 최초의 목격자가 누구입니까?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최초로 증거한 사람이 여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의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16:3-5절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이들은 부부인데 부인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이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남자가 헌신을 하고 싶어도 아내가 틀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가정은 아내가 더 헌신적이니 남편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이름이 아내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가 바울을 향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바울사도의 무엇을 보고서 바울사도 대신에 목숨까지 내어놓을 정도였습니까? 바울과 함께 동역하면서 바울의 당하는 모습을 보았는데도 왜 목숨을 대신 내어놓을 정도로 함께 한 것입니까?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았기에 그 복음이 목숨보다 귀함을 알아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사도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 놓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문안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사역에 대하여서 이방인의 교회들도 감사한다고 합니다. 그리도 이들의 가정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과연 복음을 말하면서 이런 바울의 모습이나 바울의 동역자의 모습이 있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로마서 16장 안에 무려 26명의 이름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름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문안하라는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왜 이들에게 문안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모두가 한 성령을 마시고 한 주를 섬기고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복음의 동역 자가 되어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육신의 혈통이나 이해관계에 있는 자들보다 더 귀한 관계이기에 문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런 문안이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 이름들에 붙는 그 수고가 우리에게 있기는 한 것입니까?

 

 

 

 

16:5-16절에서 여러 이름들을 간략히 봅니다. 에배네도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마리아는 로마교회를 위하여 많이 수고하였답니다.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바울의 친척인데 먼저 그리스도를 알았고 감옥에 함께 갇혔고 사도들에게 유명이 여김을 받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암블리아라고 합니다. 암블리아란 로마의 종들이나 노예들에게 흔한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사랑한다고 합니다.

 

 

 

 

우르바노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동역자라고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라고 합니다. 아리스다불로의 권속들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바울의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단지 자신의 친척이라고 문안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됨을 인하여 하는 것입니다. 나깃수의 권속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권속을 그 집안의 노예들로 보기도 합니다.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베나와 드루보사,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사랑하는 버시,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만큼 바울사도가 도움을 입은 사람이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순그리도 불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 빌롤로고 율리아 네레오와 그 자매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이미 로마교회 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서로 문안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한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동일하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러한 문안이 있습니까? 이런 사귐과 교제가 있습니까? 우리 안에 벽은 없습니까?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신앙고백으로 매주 하고 있습니다만 과연 어떤 성도의 교통이 나오고 있습니까? 거저 사람과 부딪히기 싫으니 예배만 마치면 도망가기 바쁘십니까? 그러나 정작 예배란 성도의 영접과 문안의 말씀을 들었다면 이제부터 성도의 교제와 문안이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 영접과 문안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세상이나 세상의 속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고 사는가를 말하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서 옳다함 얻음은 보혈의 능력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가 무슨 소망으로 살겠는가 하는 위로와 격려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이런 교제 속에서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시기와 경쟁이 나올 틈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다 하려고 해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인사를 하고 있습니까? 거룩한 문안이 있습니까?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무엇을 입었는지, 무슨 머리를 하였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희락과 평강입니다.

 

 

 

 

우리가 정말 지옥가야 마땅한 죄인이 주님의 십자가로 용서를 얻었다면, 그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우리의 평생에, 오고 오는 세대에도 다 말하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바다를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그 사랑이 성도의 영접과 문안 속에서 더 풍성하여 지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6:17-20  떠나라  2005. 1. 23.


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19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지난주의 말씀은 주 안에서 성도를 영접하고 문안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교회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합니다.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의 배만 섬긴다고 합니다. 자기들의 배를 섬기기 위해, 즉 자기들의 욕망을 이루기위해서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서 떠날 때에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17절에서 너희 교훈이라고 합니다. 로마 교회 성도들이 받은 교훈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6:17-18절을 봅니다.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1)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여기서 교훈의 본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우리가 본래 죄의 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본래 죄의 종이 아닌 사람은 자기 자랑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의 가문, 자기의 선행들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보고 우월감을 가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결코 자기를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에는 죄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전에는 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복음이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한 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녀노소 신분의 귀천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보혈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나를 의롭다하여 주신 것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일체 자기에 대한 자랑이 나올 수가 없는 곳입니다. 예수 믿을 처음에만 은혜가 나오고 나중에는 자기의 공로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에서 은혜로, 믿음에서 믿음으로입니다.

 

 

 

 

‘토지’라는 소설에 보면 두만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이 최 참판댁의 소작인으로 있다가 고생 끝에 진주에서 자리를 잡고 제법 재산을 모으게 됩니다. 본처가 있고, 재산이 늘어나자 자기도 행세를 하고 싶은데 옛날 최 참판댁 소작인으로 있었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자꾸만 숨기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고향사람들을 멀리하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옛날에는 최 참판댁에서 소작이라도 주는 것을 감사하였는데 이제는 살만하니 그런 시대는 잊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죄의 종이었던 것을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된 것은,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인 은혜로 된 것이기에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았다는 사실만이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커질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가 있다면 그런 자에게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 배만 섬긴다고 합니다. 자기 배만 섬긴다는 것은 자기의 욕심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배가 신이 되어 버린 자들입니다. 이들에게서 주의 은혜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배만 섬기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좀더 말씀을 봅니다.

 

 

 

 

빌립보서 3:17-21절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바울사도가 눈물로 권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침이 멸망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신이 배라고 합니다. 그 배를 섬긴다는 것은 자기의 욕망을 따라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영광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배를 섬기고 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외국인처럼 살면서 떠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기 배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실상이 이러한데도 우리는 주님을 믿고 있다고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공교하고 아첨의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온갖 교묘한 말로서 자기의 배를 섬기고 있는 것을 정당화해 나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자기 배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자기는 복음을 전하니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 이 사람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배를 섬기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을 듣고서 복음으로 자유 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배를 섬기고 사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을 위하여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당연한 듯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개인적인 욕망을 위하여 사는 것만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집단 욕망을 위하여 살면서도 주의 일이라고 위장할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0절입니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찌라도 너희가 용납하는 도다” 마귀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의 배를 섬기기 위해서 교인들을 자기의 종으로 삼아도 잘 용납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여 집사들이 교회에서 맡겨진 일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목사가 회초리로 종아리를 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교회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커다란 예배당도 짓고 성공한 목회자로서 책도 출판하고 집회의 강사로 다니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 주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5:30-31절입니다. “30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구약에서도 이미 일어난 일들입니다.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무엇입니까? 선지자들이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들이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의 말씀과 같지 않습니까? 종을 삼고, 뺨을 칠지라도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을 백성들이 좋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왜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입니까? 공교한 말과 아첨의 말을 듣고서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에 눈멀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순진한 자들이 그 미혹을 받아서 자기를 깔보던 자들 앞에 보란 듯이 나서고 싶은 것입니다. 비록 자기 세대에서 다 이루지 못하면 자식세대에서는 반드시 성공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안 되면 사후세계에서는 반드시 보상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조직을 위해서 목숨인들 못 바치겠습니까? 이라크의 청소년들이 왜 자살 특공대에 지원합니까? 일본이 전쟁에서 패할 때에 가미가제 특공대가 목숨을 건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민족적인 영웅이 될 뿐만 아니라 사후세계를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지 않습니까?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이 선지자의 탄식이나 바울사도의 염려가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들리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처럼 다 알려진 이단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너무나 교모하기에 미혹당하는 줄도 모르고 미혹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혹의 영을 어떻게 구별합니까? 로마서의 대 주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은 내가 믿어주었다거나, 앞으로 열심히 믿겠다는 말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 홀로 이루어내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은 율법의 저주에서 자기 백성을 속량하실 뿐만 아니라 부활과 승천, 성령, 보내심과 재림까지 다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요한1서 4:1-6절입니다.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5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1)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어떻게 구별합니까? 영이 보이지 아니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구별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육체로 오실 수 있는가 하면서 가현설을 주장한 영지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미혹의 영은 어떻게 구별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이단이 어떤 곳입니까?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카톨릭은 어떻습니까? 이들이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말하거나 믿거나 하지 않습니까? 말하고 믿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지신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우리가 무엇을 보태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쪽만 구원하였으니 참 아버지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며, 예수님은 피조물이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며, 안식일을 지켜야하며, 인간의 선행이 보태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혹의 영, 곧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온갖 방법으로 미혹합니다. 세상의 영광을 약속합니다. 때로는 금욕주의를 주장합니다. 때로는 세상의 쾌락과 방탕으로 유혹합니다. 때로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으로도 미혹합니다. 인간의 행위와 공로를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미혹하여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믿는 자도 미혹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사랑을 입은 자들은 두려워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주님만을 바라보게 되어있습니다. 미혹 받는 자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거짓 표적과 기사와 유혹을 따라가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셔서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를 심판 하시는 것입니다(살후2:9-12).

 

 

 

 

그러므로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악한데 미련하고 선한데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이들의 발 앞에 사단이 굴복하게 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미혹의 영을 영원히 불 못에 던지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을지어다. 아멘!

 

 

 

 

로마서 16:21-27  복음으로  2005. 1. 30.


21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2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23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2)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4 3)(없음)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2003년 6월 8일에 로마서 첫 설교를 하면서 그 제목을 “복음을 위하여” 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하면서 로마서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보게 되는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도 역시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합니다. 복음으로 시작하여 복음으로 마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제목도 “복음으로”라고 잡아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에 비밀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비밀이란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를 사람은 완전히 모르도록 하는 것이 비밀의 기능입니다. 그렇게 비밀로 주어진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 비밀의 계시가 영세 전부터 감추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다고 합니다. 그 나타내어진 비밀의 계시가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구약시대는 이 계시가 비밀로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만천하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드러났으니 다 믿게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복음이 복음답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증거하니 다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도 나오고 믿지 아니하는 자도 나오더라는 것이 바울사도의 증거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이미 선지자들로 예언된 말씀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여전히 비밀인 것입니다. 왜 비밀인가 하면 밀교의 교의처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전수하는 비법이 있어서 비밀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 드러내기에 비밀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28:23-28절을 봅니다. “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ㄱ)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바울사도가 복음을 얼마나 잘 증거하였겠습니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성령께서 이사야 선지자로 예언한 말씀의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나가서 전한 내용이 백성들의 눈을 감기고 귀를 막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스스로 깨닫고 돌아올까 봐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서 복음을 증거하면서 계속하여 드러나는 것은 믿기로 작정된 자만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거나 전도를 한다는 것은 복음이라는 정보를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설득하고 믿게 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예정된 자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복음을 듣고서 자신이 전적인 죄인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면 전혀 구원받을 수없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이라면 있다면 그것이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로마서를 통하여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죄란 하나님 앞에서 의가 없는 것이 죄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만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홍수의 심판은 인간의 죄악의 관영함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의가 없음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의인 10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성은 유황불에 타 버렸습니다. 이 세상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이 임하시게 되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데 죄에 대한 책망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함이고, 의에 대하여 책망함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므로 예수님을 다시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가 되신 분이 아버지께로 가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의가 없기에 심판을 받아서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무엇을 구하는 자들입니까?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자기에게 의가 없음을 알기에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말씀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리고 있습니까? 의고 뭐고 간에 내 몸 아픈 것이나 나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내 사업이나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없습니까? 의고 뭐고 교회나 부흥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교회 부흥을 목사만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로 얼마나 원하는지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주의 성령이 임하여 자신의 죄와 비참함이 어떤지를 알게 된 사람은 복음만으로 기뻐하게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복음에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까?

 

 

 

 

로마서 1:16-17절입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ㄱ)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가 없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하는데 그 의가 어디에 있는가 하니 복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 복음을 받고서는 자기가 지금까지 귀하다고 여긴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 얻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이란 미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배척하게 됩니다. 복음의 내용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내용이기에 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좋아하겠습니까? 그곳에서 세상의 영광이 주어진다면 고생하더라도 고생 끝에 낙이라고 따라가 볼만하겠지만 세상의 영광을 배설물로 여기는 자리가 십자가인데 누가 따라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도 복음은 가려져있는 비밀입니다.

 

 

 

 

고린도후서 4:3-6절입니다.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ㄱ)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복음이 가려져 있는 자가 있고 가려지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그 결정권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신이 복음의 영광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막고 있지만 그러나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창조하시던 그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주 되심을 믿고 전파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26-27절입니다.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복음은 비밀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도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 복음의 비밀이란 성도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이시며 영광의 소망입니다.

 

 

 

 

이 복음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직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오직 성도들만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도 알아들을 사람과 알아듣지 못할 사람을 구별하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의 비밀이 완전히 드러나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0:7절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이 언제 그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14-18절입니다. “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하니 16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 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7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이 약속의 말씀들이 믿어지십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비록 몸이 아프고, 경제가 어렵고, 무언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주신 은혜를 인하여 감사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지난주에 헌신예배를 마치고 청년들과 교제를 하였습니다. 한 자매의 큰 아이가 저의 둘째딸과 같은 나이인데 어릴 때부터 자폐증이 있었습니다. 자폐증이 심하여 24시간 보호자가 있어야 되는 아이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의 얼굴이 얼마나 평안해 보이는지 도대체 자폐증 아이를 키우는 부모 얼굴 같지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현재에 감사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가 오직 자기에게는 사랑만 해 주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더라도 자기에게는 인상도 쓰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사랑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때 제가 한마디 끼어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시는 것으로 봅니다. 왜 우리가 일방적인 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람인가를 알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일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음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견고하게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견고하게 붙드시는 것입니다. 그 견고하게 붙드심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시고 다 찾아내시고 영생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으로 붙드시는 것입니다.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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