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와 연보 (고후8:9-15)
(요약)
십분의 일의 개념은 율법 이전에 있었고 율법에서 십일조라는 명칭으로 명문화 되었다. 십일조는 제사장을 일으켜 신령한 기반을 구축하며, 생활의 평균화를 위하는 것으로, 나의 전체가 주님의 것임을 선언하고 복이 약속된 귀한 은혜이다. 신약에서 활발한 연보는 구약의 연보와 십일조 정신이 합해진 것이다. 즉 자원함의 연보정신에 청지기와 평균화 개념의 십일조가 그것이다. 주님은 십일조라는 명칭 개정보다 그 의미에 관심을 두셨으니 십분의 일에 국한하지 말고 십일조의 정신에 충실하여 청지기 직무를 다하도록 하자.
(설교)
이 시간에는 “십일조와 연보”라는 제목입니다. 성경에는 십일조라는 말이 나오고 연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의 차이는 무엇이며 지금 신약시대도 과연 십일조 생활이 필요하는가 함께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요즘에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는 율법시대의 산물이므로 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서 이제는 감사헌금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십일조에 대해서 세 시대로 구분하여 살펴본다면 먼저 율법 이전시대와 다음은 율법시대 그리고 신약시대입니다. 율법 이전시대에는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드렸다는 기록이 나오고, 율법시대에는 이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제도화시켰고, 신약에서는 연보라는 명칭으로 활발하게 드려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 이전에도 십분의 일을 드린 기록이 있다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도 십일조를 부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 시간에 더 확실한 정리를 위해서 신약에서 시행되었던 연보가 십일조와 어떤 차이가 있느냐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십일조가 무엇인가부터 말씀 드립니다.
1. 십일조란 신령한 신앙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말3:7-8에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하셨습니다.
왜 십일조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십일조를 통해서 제사장 지파들이 살게 되면 이스라엘에 제사가 끊이지 않고 영적 부흥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일조가 드려지지 않으면 제사장들은 자기 살길 찾아 뿔뿔이 흩어져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그의 복에서 멀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신령한 기반?구축하는 목적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2. 십일조는 생활의 평균을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민수기 18장을 보면 이 십일조가 어떻게 사용되어지는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민18:24에 레위제사장을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그런데 26절을 보면“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하시면서 28절에서는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레위지파는 십일조를 받아 그 십일조에서 또 십일조를 떼어 대제사장 족속에게 돌렸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로 백성과 레위지파와 대제사장이 1:1:1로 평균케 되었습니다.
그럼 일반 백성 중에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신26:12에 보면 그 문제 역시 십일조로 채우게 하셨습니다.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십일조는 바로 평균의 원리입니다.
3. 십일조는 나의 전체가 주님의 것임을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십일조만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십일조란 나와 나에게 속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우리가 하나님의 물질 맡은 청지기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은 물론 나머지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쓰는 것이 십일조의 정신입니다. 그렇다고 다 바치라는 거냐? 간혹 특별한 경우는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대부분 먼저 내 부모와 가족과 친족과 또 하나님이 원하시면 사회를 위해서 쓰시길 원하십니다(딤전5:4, 8).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이기 때문입니다(딤후5:8).
4. 십일조는 성령의 은혜로 더욱 풍성해 집니다.
대하31:6-7에 “유다 여러 성읍에 거한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왔고 또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왔으며 그것을 쌓아 더미를 이루었는데 삼월에 쌓기를 시작하여 칠월에 마친지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히스기아 왕 때 백성들이 은혜를 얼마나 받았든지 온 나라에서 십일조가 들어왔는데 얼마나 많든지 삼월에 쌓기를 시작하여 칠월에 마쳤습니다. 왕이 명령 때문이 아니라 은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 율법이라고 강압적으로 된 痼?아니고 은혜 받아야 되더라는 것입니다.
5. 은혜 임에도 성경은 십일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말라기 선지자의 교훈 얼마나 강합니까? 말3:8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이보다 더 강한 표현이 있습니까?
6. 십일조는 축복이 약속된 귀한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말라기에도 있지만 잠3:9-10을 보면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얼마나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가지고 늘 경험케 하십니까? 어렵다고 핑계 대면서 안하면 더 어렵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무슨 일이 터지든 터집니다. 제가 아는 사람도 처음 예수 믿고 직장생활하면서 십일조를 하다 안하다 해보니 안 할 때는 어디서 돈이 비든지 비어서 그 때야 깨닫고 십일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하고도 어려우신 분들 계십니까? 이런 분들은 십일조는 제대로 했지만 십일조의 의미를 몰라 청지기 정신의 결여나 은혜 생활의 부족으로 그런 것이니 이 두 가지를 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기와 자신의 자손들에게 큰 기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럼, 연보란 무엇입니까?
저는 십일조 반대자에게 십일조하기 싫으면 그럼 연보를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연보는 신약성경에 활발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아무 말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십일조와 연보는 내용이 같을 뿐 아니라 연보의 의미는 오히려 더욱 풍성합니다.
1. 연보 역시 생활을 평균케 함입니다.
고후8:13-14에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2. 연보 역시 신령한 사역자들을 육신의 것으로 섬김입니다.
롬15:27에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마게도냐 교회가 흉년을 만난 유대를 위하여 거액의 헌금을 하였는데 예루살렘 교회가 열심히 전도와 기도를 해 주었기에 그들을 섬김이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3. 연보 역시 자신이 하나님의 것임을 선언함입니다.
그래서 고후8:5에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했습니다. 물질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드리는 즉 내가 하나님의 것임을 선언함입니다. 이 청지기 정신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라면 정한 것 그 이상으로도 드릴 수 있습니다.
4. 연보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 8장 9장에서는 곳곳에서 은혜라는 용어가 무려 8번이나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받아야 기쁨으로 자원할 수 있고 또 성도를 섬기는 것 그 자체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5. 연보가 은혜임에도 바울은 연보를 권하고 가르쳤습니다.
고후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혹은 준비해서 해라, 늘 예배드릴 때마다 모아 두어라, 그러나 강제는 없었고 할당도 없었습니다. 강제라면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은혜의 강제일 것입니다. 은혜 받고는 가만있을 수 없는 이런 강제란 할 만한 강제입니다. 고전16:2에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라는 말을 볼 때 소득의 십일조를 내는 것과도 뜻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사랑 가운데 평소 준비했으니 이것은 마음을 다하는 의와 인과 신의 십일조 정신과 같습니다(고후9:5). 바울이 연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구약에 연보가 그러했듯 자원함을 강조한 것일 뿐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균적 삶을 파괴한 것이 아닙니다.
6. 연보 역시 하나님께 복 받는 것입니다.
고후9:7-9에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했습니다. 이상으로 볼 때 연보는 십일조가 갖는 모든 의미를 고스란히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럼, 십일조와 연보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일조는 꼭 그 분량만 하나님께 드렸지만 연보는 그 분량은 물론이고 청지기 정신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더욱 풍성하게도 드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혹자는 정한 대로 할 것이요라는 문구를 악용하여 헌금 안하는 구실로 삼지만 이것은 십일조 정신을 초월한 구절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선언하는 행위 그리고 하나님의 물질 맡은 청지기라는 고백은 지금도 행해져야 합니다. 이미 율법 이전에도 십분의 일이 드려졌던 것이 그 증거입니다. 나아가 나머지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추가하는 것이 진정한 십일조요 이것이 바로 연보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비록 나그네도 대상이라고 하나 이스라엘 안에서 통용되는 한계가 있었지만 연보는 한 민족은 물론 국가를 뛰어 넘고 민족을 뛰어 넘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연보는 구약의 자원하는 연보 개념에 머물지 않고 더욱 발전된 십일조 정신을 풍성하게 이어 받은 온전한 십일조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보 혹은 십일조는 신구약에서 그 소용을 보여준 대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사랑과 구제와 복지와 선교사역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참으로 모두가 순종하여 십일조의 개념에 맞게 사용한다면 머지않아 한국교회는 지역과 한국과 세계를 사랑으로 정복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선 먹기 곶감이 달다고 우선 경상비에 땅 사고 집 짓는데 쓰고 그러다 보니 그것이 마땅한 줄 알지만 이것은 십일조에 약속된 축복과 부흥의 귀한 복을 교회가 받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라는 세금 조자가 율법 냄새가 나서 아직도 맘에 걸리십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보세요. 우리 주님은 십일조라는 용어 개정에는 관심 없이 십일조의 연속성과 진정한 십일조의 개념과 정신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일조라고 불러도 진정한 십일조 본연의 의미를 생각하며 부른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가령 신령한 제사나 신령한 제사장 모두 구약 용어 가미 아닙니까? 그렇다고 짐승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개념이 중요하지 십일조냐? 십분의 일이냐? 연보냐? 용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잘못된 십일조론에 빠져 귀한 은혜의 사역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심히 슬픈 일입니다. 나의 헌금생활이 십일조나 연보의 개념에 충족한 것인지 살펴 보십시다. 우리는 이제 십일조라는 용어 다툼보다 십일조 진정한 정신대로 순종하며 기쁨으로 주의 일하다가 하나님께 크게 사랑 받고 복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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