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남편들에게(벧전3:1-7)
본문의 내용은 사도 베드로가 당시 어려움에 처한 신앙의 가정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가 남편과 아내의 형평성의 논란을 하기 쉬운데 그것은 남편의 의무보다 아내의 의무를 더 많이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가정들이 아내는 예수 믿지만 남편들은 불신자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쓰여졌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아내의 많은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남편이 신자인 가정들은 대부분 온 가족들이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남편에게 대한 교훈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화목한 가정에 대한 목표도 되겠지만 그러기 전에 남편들이 예수 믿게 되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그것을 한 마디로 사라의 딸이라는 용어로서 설명합니다. 6절에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그의 딸이란 과연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가? 이미 하나님의 딸이 된 성도들인데 남편에게 잘 하므로 되어지는 이 딸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한 베드로의 해석이 아주 독특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본받아 믿음의 자손이 된 것처럼 순종하므로 이제는 순종의 조상인 사라의 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믿음과 순종은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 중요한 신앙의 요소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과 순종이 없어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과 순종은 나만이 아니라 온 가족과 이웃까지도 주님을 받아들이게 하는 중요한 용소입니다. 그러니까 가족을 전도하는 것이란 다른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인이 하나님 앞에서 가족에 대한 자신의 본분에 충실할 때 그들도 마음 문을 열고 예수를 믿지 않을 수가 없다는 교훈입니다.
즉 아내만이 아니라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부모도 형제도 이웃도 각자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 대한 의무를 다 할 때 그들에게 귀감이 되어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자녀들도 공부 잘하면서 전도하거나 성공해서 전도하면 그 부모들도 예수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효도라도 잘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 우리에게 있다고 보고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도의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전도에는 여러 가지 방법론이 있지만 가장 효과적인 전도는 성도의 행위입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행위가 아니고는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1-2절에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했습니다.
이 부분을 현대어 성경에서 보면 “아내들이여,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지금은 아무리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곧이들으려 하지 않던 남편들도 여러분의 늘 경건하고 순결한 행동에 감동을 받아서 장차는 주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생활이야말로 백 마디 말보다도 더 호소력이 있는 것입니다”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 2절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 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은 남편을 무서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너희의 두려워하는 중에서의 청결한 행위를 봄이라” 로서 이것은 다른 누가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에서 나오는 정결한 행위를 말합니다.
이 부분을 더 잘 알려면 1절의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라는 문구를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란 그 앞 부분에서 종들에게 교훈했던 교훈과 같다는 것입니다. 즉 종들이 주인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서 섬겼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을 절대적 개념이라고 한다면 사람 앞은 상대적 개념입니다. 그런데 상대적 개념이 되면 존경할만하거나 잘 해줄 때만이 나도 잘하겠다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에 지속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라는 절대적 개념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3-4절에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하면서 아내들에게 외모적인 단장보다 심령의 단장을 강조합니다.
그럼 여성이 외모 단장하지 않아야 하는가? 언 듯 보면 이 부분이 그러한 뜻으로 비쳐지지만 그러나 본 의미는 아내의 내면적인 단장을 강조한 것이지 외모 단장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금식할 때 얼굴에 기름을 바르라고 하셨고,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제일 좋은 옷에 가락지와 신발을 신겼으며, 마리아가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을 때도 가만 두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너무 사치해도 안되지만 너무 추하게 보여도 안되기 때문에 화장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신부를 흠도 티도 주름잡힌 것도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형으로 보았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 앞에서 아름답게 보여야 합니다. 여성들이 집 안에서 자기 관리에 너무 소홀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본문은 외모만이 아니라 마음의 내면적인 아름다움도 가꾸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4절에서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 숨은 사람이란 품성 인격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숨어 있으니까 이 인격에는 무관심하는데 겉사람도 중요하지만 숨어 있는 인격도 중요시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온유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불신 남편의 부당한 요구와 훼방에 화내지 않고 응수하지 않으며 공손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고요하고 침착한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으로 평안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여자들을 5절에서는 거룩한 부녀들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부녀란 성화된 신앙의 사람을 뜻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모하고 사랑을 행하는 성령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참된 신앙으로 행하게 되며 이러할 때 모두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공식은 유별난 어떤 것이 아니라 먼저 내가 참된 신앙을 갖는 것이고 나아가 내 할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 때 전도의 문은 열려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5-6절에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가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므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그런데 여기 주라는 말이 ‘퀴리오스’로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 주인은 ‘데스포테스’인데 여기 퀴리오스는 예수님을 부를 때 쓰는 퀴리오스라고 한 것은 주권의 합법성과 인정된 권세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용어로 그 앞에 순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선을 행하고’ 역시 순복을 암시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않았다는 말씀은 남편을 주인으로 믿고 편안함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존경하고 신뢰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예수를 주로 삼고 얼마나 순복하고 믿고 안심하며 살고 있는지 반성해 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얼마나 잘했으면 그랬을까요? 과연 아브라함이 남편으로서 몇 점짜리나 될까요? 평소에는 어떠했는지 모르나 자기 목숨 살려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그것도 두 번씩이나 애굽왕에게 한 번 블레셋 왕에게 한 번 시집보낼 뻔했으니 낙제점 밖에는 더 맞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라는 남편을 존경했고 그에게 순복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비유로 어던 불신의 남편에게도 잘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사라를 본받을 때 사라의 딸이라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이제 남편들에게 교훈합니다. 7절에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남편에 대한 교훈이 간결한 것은 앞서 말씀한 대로 남편의 의무가 가벼워서가 아니라 믿는 남자의 가족들은 대부분 온 가족이 믿는 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짧지만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는데, 여기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 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남편의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라고 한 것은 아내를 육신적 심리적으로 잘 이해하라는 의미입니다. 또 ‘생명의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고 한 것은 당시 여성들을 비하했던 풍조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잘못한다면 기도가 막힐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기도가 막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상대하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먼저 신앙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 전도의 비결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 신랑되신 예수님에게도 우리 모두 그렇게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화목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시고 모든 백성들에게 전도되는 아름답고 귀한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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