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복음서

나인성의 청년

공 상희 2009. 2. 26. 15:34

나인성의 청년
본문:(눅7:11-17)
주요내용:예수 닮은 사람
생각해보기 - 나인성 사람들은 하찮은 과부 그리고 어린 청년의 뒤를 그토록 따랐는가?

이 시간 여러분과 함께 "나인성의 청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인성에 사는 한 과부의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려주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들을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에서 잘 이해되지 않는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12절에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했습니다.

여기 청년의 장례 행렬에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이 이상하는가 하겠지만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당시 시대적인 배경과 상식을 뛰어 넘는 놀라운 사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죽은 청년으로 보아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결코 이런 장례식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를 든다면 먼저 그는 청년이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참고할 때 그는 아직 결혼하지 아니한 비교적 나이 적은 청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의 장례 풍습으로 보면 어른의 장례일지라도 별로 화려하지 못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에서 보듯이 유대 나라는 열대 지방이기 때문에 죽으면 그 날 메어다가 장례하기 때문에 장례식이 화려할 시간적인 여유조차도 없습니다. 미혼의 청년의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젊은이의 장례는 대개 비밀리에 이루어지며 왕자의 장례식일지라도 그렇게 화려하지 못합니다. 솔직히 이 청년의 장례가 무슨 장례라고 할 수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청년의 장례식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다음 다시 12절에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과부나 고아와 나그네는 율법에도 명시한 특별한 구제대상입니다. 거기다 독자이니 죽은 청년에게는 아버지도 형제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찾아올 수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불쌍히 여기사" 라는 문구가 이 과부의 자식 잃은 슬픔과 아울러 도울 자 없이 살아야 하는 그 어머니의 가련한 처지를 잘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의 관심 밖일 수밖에 없는 청년의 장례였습니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의 뒤를 따르다니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11절과 12절을 보면 두 무리가 나타납니다.

11절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허다한 무리"요, 12절에는 청년의 시체를 따르는 "많은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사람이 밟힐 만큼의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앞에 왠만큼 모여 가지고 많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수백 혹은 수천에 해당하는 무리였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많다면 정말 많은 것입니다. 12절 대로 그 성의 많은 남녀노소가 다 나와서 그의 장례를 따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궁금합니다.

오늘 말씀을 어떻게 풀어야 될까요?

이 시점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답은 단 한 가지 그 청년은 그 성에서 예수를 닮은 청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그와 같은 현상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주의 아들일지라도 그러기에는 불가능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예수님에게나 있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 저 골로다로 올라가시는 청년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뒤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따랐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 받은 잊지 못할 큰 은혜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청년의 특수한 장례 행렬에서 그의 생전의 놀라운 어떤 감동적인 삶과 사건이 암시됨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인성을 소개하면서 그냥 나인성이라고 하지 않고 나인이라는 성이라고 그 성 이름에 의미점을 두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인성의 나인이란 '사랑스럽고, 즐겁다' 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진리를 나타내실 때 비유가 아니면 가르치지 않으셨다는 말씀대로 그 배경을 아주 잘 사용하셨습니다. 즉 이름대로라면 나인성은 지상천국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즉 이 훌륭한 청년, 그리고 지상천국과 같은 나인성을 배경으로 이 사건을 보이시고 계시는 이유는 이런 아름다운 세상이란 그냥이 아니라 변화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생겨진다는 교훈입니다. 즉 이 성 이름에 그 청년의 감동적인 흔적을 엿보게 됩니다.

잠29:2에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이 청년이 그 성의 의인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 16절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는 말씀에서 한 청년의 소생사건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사건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그가 그만큼 그 사회에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온 성이 나설 정도가 되려면 왠만큼 감동적이어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감동적이어도 당사자가 죽으면 냉냉하기 쉬운 것인 사람의 인심입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 감동적인 존재였기에 누구의 강요조차 필요 없이 그의 뒤를 구름떼 같이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이 정도만 된다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세상에 전도가 아니될 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 청년과 같이 감동적인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이 과부의 아들은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와 같은 감동적인 사람이었을까요?

1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여기 죽은 자의 신분이 나타납니다. 그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부를 용어도 많은데 왜 유독히 청년이라고 하셨을까요? 여러분 한 번 대답해 보세요. 왜 예수님께서 그를 청년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청년이니까 청년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청년을 연구해 보면 청년이란 감동적인 존재입니다. 오늘날 가짜 청년들이 많아서 그렇지 진짜 청년만 되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청년의 기질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몸만 청년일 뿐 마음은 청년의 기질이 없다면 그것은 잔짜 청년이 아닙니다. 진짜 청년이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먼저 청년은 불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죄악과 비리에 항거하여 싸우다가 매를 맞고 옥에도 갇히기도 합니다. 임어당 에세이를 보면 중국 사람들은 자기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에 불의를 보아도 못본체 하며 살아가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나라도 청년만큼은 천안문 광장에서 보여준 대로 불의에 항거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청년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혹은 청년은 이기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하여 한 목숨 바치기도 하고 친구를 위해 강에 뛰어들다가 생명을 잃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어쩌다 한 번 좋은 일하다가 죽은 것이 아니고 아마도 그의 선행으로 인해 그 사회에 영웅과 같은 존재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른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모든 사람들이 청년의 선행의 수혜자들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장례 행렬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혹은 청년은 진실하고 예절 바르며 겸손합니다. 혹은 청년은 보다 뛰어난 판단력으로 구태의연하지 않고 날마다 발전하는 진취력이 있습니다. 혹은 청년은 이상적인 꿈과 희망에 불타는 강한 도전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청년은 외모로도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때입니다. 기타 청년을 연구하면 얼마나 감동적인 사항들이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께서 청년아 하고 부르실 인정받는 진짜청년이었다는 것입니다. 좀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비록 불완전하고 예표적이긴 하나 그 청년에게서 바로 자신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우리들은 과연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청년인지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그런 감동적인 예수 닮은 청년이 될 수 있을까요?

시110:3에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아오는도다" 했습니다.
이 구절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예언한 말씀인데 이 때 새벽 이슬같은 청년들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성령의 열매와 청년의 기질은 놀라울 만큼 흡사하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청년은 힘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성령받으면 능력이 생깁니다. 또 청년은 의협심이 강합니다. 이처럼 성령받으면 죄를 회개하고 의로워집니다. 또 청년은 용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을 받으면 담대해집니다. 또 청년은 아름답습니다. 이와같이 성령받으면 그리스도를 닮습니다. 또 청년은 꿈이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받으면 비죤이 생깁니다. 또 청년은 희생합니다. 이처럼 성령받으면 사랑이 넘칩니다. 또 청년은 열정이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사람은 열심합니다. 또 청년은 친구를 사랑합니다. 이처럼 성령받으면 남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습니다. 또 청년은 겸손합니다. 성령 받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청년은 낙천적이고 도리어 고난과 모험을 즐깁니다. 이처럼 성령을 받으면 예수를 위해서 박해를 받고 고난 당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인성의 청년은 청년의 기질, 청년의 기상, 청년의 역할을 그 성에서 아낌없이 발휘한 청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죽었으나 그를 그의 행실을 아무도 폄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이 시대의 교회가 칭송을 잃었다면 왜 그렇습니까? 진정한 예수 닮은 성령의 청년이 부족해서 입니다. 나인성에는 한 사람의 청년이 있었지만 그는 나인성을 감동시켰습니다. 예루살렘에도 120명의 청년들이 있었는데 그 청년들은 단기간에 예루살렘을 복음화시켰습니다.

갈렙을 보세요. 그는 85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푸른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홍해를 건널 때도 청년이었고 40년 후 요단을 건널 때도 청년이었고, 7년 가나안 전쟁 후 기업분배를 할 때도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장대하기로 소문난 아낙자손을 헤브론에서 몰아냅니다. 또 가장 험악한 요새인 드빌을 칩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나안을 주시고, 또 가장 강한 유다지파의 수장이 되게 하시고, 넓은 기업을 선물로 주시되, 이스라엘 족장들의 뼈가 묻힌 장소 이스라엘의 상징 막벨라 굴이 있는 그 땅을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는 용기와 희망과 믿음과 말씀이 넘치는 청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이 그냥 왔습니까? 여기에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삼년 반 동안 말씀과 표적과 모본으로 믿음을 훈련시켜 그들의 잘못된 사고와 감정을 깨뜨리시고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깨닫게 하사 중생시키시고 신앙적인 삶으로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런 다음 성령강림을 약속해 주시고 그것을 믿고 전적인 기도와 찬송을 통하여 능력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 때 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새벽 이슬같은 청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됩니다. 한 마디로 신앙생활을 잘 해야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청년이 됩니다.

아무리 몸이 젊어도 마음이 늙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는 청년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다릅니다. 주님 보시기에는 청년과 육신의 나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후4:16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결론> 사랑하시는 청장년회원들과 모든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영원하신 청년이십니다. 그랬기에 십자가를 진 그 행렬 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무릅쓰고 슬피 울며 뒤따랐습니다. 우리도 은혜 받아 아름답고 감동적인 그리스도의 청년이 되십시다. 그래서 슬픔과 한숨의 이 세상을 사랑과 기쁨의 나인성으로 변화시키는 놀랍고도 아름다운 신앙의 청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