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리라
본문: 마13: 18- 23
미국 중서부 지방의 황무지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포아풀이라는 식물입니다. 척박한 땅에서도 말라죽지 않고 꿋꿋하게 잘 자라는 이 풀은 높이가 50cm에 불과하지만 뿌리의 전체 길이는 600Km나 됩니다. 포아풀이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비결이 바로 이 뿌리에 있습니다. 깊고 넓게 퍼진 뿌리, 높이와 비교할 수 없이 긴 뿌리가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양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막과 같은 세상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생명력을 잃지 않고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뿌리가 견고히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고 땅위로 드러내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줄기가 부실하고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뿌리보다는 눈에 보이는 줄기와 가지에만 신경을 씁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에 의지하여 외양보다는 뿌리에 신경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것입니다.
"내 손이 저와 함께 하여 견고히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시89:21)
본문은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길가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지 않고 스스로 완고하게 된 마음은 말씀의 씨가 싹트기도 전에 마귀가 빼앗아 가버립니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마음의 소유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흙이 얇은 돌밭과 같아서 씨가 떨어질 때 곧 싹이 나오지만 해가 돋으면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버리는 것과 같은 변화무쌍한 일반 민중, 또는 가시 떨기에 덮여 있는 밭같이 씨가 떨어져도 가시가 그 기운을 막으므로 장성하지 못하고 마는, 말하자면 사회악에 눌려서 기를 펴지 못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인 것들에 집착하여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옥토와 같이 좋은 반응을 일으키는 믿음 있는 무리로 보았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듣는 자요, 동시에 실행하는 자입니다.(눅8:15) 그들은 전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성장하여 믿음으로 결실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비유의 또 하나의 성격은 씨는 그저 뿌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대한 것은 우리가 염려할 바가 아니고, 씨뿌리는 사명을 지닌 자는 그저 뿌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의 또 다른 하나의 성격은 듣는 비유라는 것입니다. 같은 씨라도 듣는 태도 여하에 따라서 그 결과는 크게 달라집니다. 참된 신앙은 잘 들을 줄 아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비유는 세상적인 말로써 하늘의 진리를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토양의 질을 알아내는 작업입니다. 또한 땅이 씨앗을 뿌리기에 적합한가를 알아내고 개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로 씨앗인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기 위해서 이를 심는 밭인 마음이 적합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알아야 신앙생활을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밭인가를 바로 알아 개간하여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씨뿌리는 비유에 나오는 4 가지 땅을 생각해 봅시다.
1. 길가 밭
길가와 같은 굳은 땅입니다. 아마 두 가지 경우에 이런 땅에 씨가 뿌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 땅에 가보면 밭이랑이 좁고, 길고, 밭과 밭 사이에는 작은 길이 있습니다. 길에 서서 씨를 뿌리기도 하는데 씨가 길에 떨어져 자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씨뿌리는 법이 있는데 나귀 뒤에다 씨 자루를 싣고, 자루 모퉁이를 잘라 구멍을 내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며 뿌립니다. 그러니까 자연 길가에도 뿌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길가에 뿌려지면 이 어 새들이 와서 씨를 주워 먹어버리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은 기독교의 진리가 들어갈 수 있는 입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히려 적대시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진리에 아주 무관심합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기독교가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오히려 귀찮은 존재로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의 사는 것이 항상 쉽고 어떤 긴장이나 눈물이 없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동안에 내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떻게 못할 경우, 다른 힘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은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서야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에게는 악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생명의 숨,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브는 뱀을 친구로 사귀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는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합니다.) 죄의 정도는 점점 더 사악해 지게 되고 시대가 지날수록 악한 정도가 점점 더 심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사악한 범죄들은 과거에 저질러져 왔던 것보다도 심한 것을 부인 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돌 밭
흙이 얇은 돌밭 같은 땅입니다. 물론 이 땅은 모두가 돌은 아닙니다. 흙이 얇은 밭에 돌 이 깔려 있는 땅입니다. 갈릴리 지방의 땅이 대개 그렇습니다. 여기 저기 바위가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땅이 씨를 발아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땅이 얇기 때문에 뿌리가 내리지 못해서 양분을 땅에서 흡수하지 못하므로 결국 해가 날 때 말라 버리고 죽고 맙니다. 복음에 대해 감동은 하지만 진실치 못하여 피상적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복음을 듣고 선뜻 신도가 되었지만, 신앙생활에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변절하게 됩니다. 어떤 유명한 전도자가 '1백 명 가운데 5명은 그리스도에게로 완전히 이끌고, 나머지 95명은 교회 안에서 성숙할 때까지 돌보아주어야 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의 생활을 시작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대개가 도중에 넘어집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도중에 실패할 때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 값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했을 때 당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배후의 환경, 즉 기독교인의 생활 내용 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너무 쉽게만 생각하다가 당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일들에 관하여는 묻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 안에 속하여 얼마나 충성을 하고 있는 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어떤 이들은 과거에 자신이 행한 일들에 대하여 자랑을 하면서도 현재는 행치 않는 것을 봅니다. 돌밭은 주로 이러한 자들이 많습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습니다. 앞으로 주의 일에 충성하고, 행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개조되지 않았고, 행함이 따르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되 영적인 믿음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이는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영과 육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결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돌을 우리의 몸 안에서 빼내야 합니다. 주 안에서는 '내가'라는 말은 결실을 맺을 수 없는 가장 큰 장애물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3. 가시 밭
가시로 가득 찬 땅입니다. 팔레스틴의 농부들은 퍽 게을러서 가시 덩쿨을 윗 부분만 잘라 서 불살라 버리기 때문에 얼핏 볼 때는 퍽 깨끗하게 보이지만 땅 밑에는 아직도 가시덩쿨의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때가 되면 가시덩쿨이 다시 성해집니다. 그런데 가시 덩쿨은 곡식의 씨보다 더 빨리 자라기 때문에 씨의 생명을 막아 버립니다. 본문에 보면, 세상의 염려와 근심, 걱정의 넝쿨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로 성장하지 못하고 열매맺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육신에 의한 결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있는 듯 보이지만 믿음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앞서가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 경험, 내 지식으로 살아가서도 안됩니다. 유대인들은 완벽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싹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을 판단하고, 마음대로 무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척 하면서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을 들은 요나는 한참을 생각한 후 니느웨로 사지 않고 욥바로 향해 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바다에 던져 물고기 배에 넣으시고 그가 회개하자 그를 꺼내어 니느웨로 가게 하셨습니다. 왜 불순종했을까요? 자기 생각을 버리고 가야 하는데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은 이처럼 불순종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집에 방문했을 때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했습니다. 목사가 심방할 때 대접하는 것보다 말씀 듣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물질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교회는 물질이 없어 운영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자가 없어 운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여 성령으로 마음을 개간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마음은 묵은 땅이기 때문에 부패될 수밖에 없습니다. 강팍하여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에 익숙합니다. 이 일이 6천년 동안을 거듭해 온 까닭에 딱딱해져서 아무리 씨앗을 뿌리려 해도 심기워 지지 않습니다. 개간되지 않은 땅에는 아무리 좋은 씨를 부려도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묵은 땅을 개간해야만 합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삼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끝없이 마음을 개간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말씀 듣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예배드리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행함이 나타나고, 행함 속에서 온유와 겸손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교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묵은 교만을 좀 더 적극적이고 행함 있는 믿음을 통하여 개간해 가야 합니다.
호세아 10장 12절에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했습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하십니다. 이 땅은 어떤 땅입니까? 원래는 좋은 땅이었는데 오랫동안 돌보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어서 땅이 굳어지고 잡초가 우거진 묵은 땅이 되었다 고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네 가지 밭은 예배당 밖에서 볼 수 있는 일이고, 사실 예배당 안에는 그것 이외의 묵은 땅 같은 밭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내 마음의 밭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묵은 땅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쓸데없는 땅입니다. 해도, 비도, 이슬도 다 받으면서 아무런 보답이 없습니다. 묵은 땅은 옆 밭에 장애를 줍니다. 묵은 땅과 같은 마음의 밭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오랫동안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는 동안 그 마음이 굳어집니다. 좋지 못한 습관이 하나뿐 아니고 점점 더 생깁니다. 그 습관의 뿌리가 점점 더 깊어집니다. 여러 가지 잡초가 그 마음 밭에 나기 시작합니다. 세상 생각,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교만한 마음, 비열한 마음 등의 모든 잡초가 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묵은 밭 같은 마음에는 하나님의 빛도, 비도, 이슬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도덕적인 교훈을 들어도 그 마음이나 생활에 어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묵은 땅은 어떻게 하라고요? '묵은 땅을 갈라' 고 하였습니다. 무슨 씨를 심기 전에 먼저 예리한 보습을 넣어서 갈아서 굳은 흙을 파고 뒤집어 잡초를 뽑아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얕게 갈지 말고, 깊이 갈아 뿌리까지 뒤엎어야 합니다. 물론 묵은 밭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너무 굳어서 처음에는 힘듭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갈아야 합니다. 아픕니다. 그러나 아파도 갈아야 합니다. 묵은 땅을 갈기 전에 무슨 씨를 뿌릴 수 없습니다. 묵은 땅은 갈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회개라고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마음 밭을 보시고 우리 가운데 다만 몇 사람이라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으면 성령의 보습으로 갈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이 복음 전파할 때 제일 먼저 외친 말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왜 우리가 교회에는 출석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왜 전에는 좋은 열매를 맺었던 분이 요사이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묵은 땅이 되어 버려 그렇습니다. 묵은 밭에 씨뿌려야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애써 씨를 뿌려도 소용없습니다. 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세요! 묵은 땅을 갈라!
4. 좋은 밭
열매 맺을 수 있는 좋고, 깊고, 깨끗한 땅입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세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하나는 이 말씀을 들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마음에 말씀을 들을 준비가 없는 한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 지식, 의견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없기 쉽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으로 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의 몸은 현명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가령 우리 눈앞에 무엇이 스치고 지나갈 때 눈은 자동적으로 감깁니다. 그것을 반사작용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에 원치 않는 무엇인가가 들려질 때에는 자동적으로 우리의 마음 문은 닫혀지고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괴롭힌다면, 이것은 어떤 때 맛없는 약이나 괴롭히는 치료법이라도 우리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꽉 닫아버려 진리가 길가에 떨어지면 이것은 인간에게 비극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말씀을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보면 결실 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와 같이 아주 메마른 땅에서 이런 결실을 얻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크리스천의 생활은 언제나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기독교는 사색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17: 8)
같은 나무라도 어디에 심기느냐에 따라서 그 운명이 달라집니다. 물이 없는 척박한 광야나 사막에 심기면 생명부지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물가에 심기면 그 잎이 청청하며 결실이 그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나무를 의인화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첫째, 물가의 의미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신·구약성경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수와 같은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에는 성부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라 하였고 요한복음 7장 37∼39절 말씀에는 예수님이 목마른 자들에게 생수를 마시게 하신다 하였습니다. 생수는 곧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이라 하셨습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한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물가에 심긴 나무 같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를 의미합니다. 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둘째, 물가에 심긴 나무는 그 뿌리를 강변에 뻗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지(知) 정(情) 의(意)를 갖춘 인격적 존재입니다. 어떤 일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의지는 마음에 움직이는 감동이 있어야 하고 감동을 유발시키는 것은 지식입니다. 누가 여호와를 바르게 경외하며 약속하신 복을 받을까요? 여호와를 바로 아는 자입니다(호 6:3).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부한 자는 건강한 뿌리가 강변에 뻗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그 정신적 뿌리를 청교도 신앙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교도의 중심사상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Faith)에 있고 그 신앙이라는 뿌리에서 4개의 줄기가 나왔습니다. 자유 교육 법 도덕입니다. 이 4개의 줄기는 하나같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요, 그리스도 예수님의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셋째, 물가에 심긴 나무라는 증거는 확실합니다. 가뭄이 닥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험 환란이 와도 여호와를 아는 지식과 성령의 도움으로 능히 이깁니다. 물가에 심긴 나무의 잎이 청청하듯 늘 생기가 넘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을 보아 물가에 심긴 나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아는 것입니다. 온전히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자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합니다.
미국의 금문교를 만든 사람인 레드우드는 아이디어를 2000년 된 나무에서 얻었다고 합니다. 그가 나무를 보니 세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첫 번째가 다른 나무보다 뿌리가 더 깊이 뻗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나무보다 잔뿌리가 많은데, 잔뿌리가 습기 있는 곳으로 찾아 들어가 수분을 나무로 공급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그 뿌리가 큰 바위를 칭칭 감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2000년 동안 온갖 변하는 환경 속에서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지요. 그래서 금문교를 만들 때 반석이 나올 때까지 깊이 파고 들어가 그 위에 교각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많은 지진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늘까지 건재한 이유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보다 중요한 것이 본질이고 기초입니다. 기초 없이 제대로 성장이 될 수가 없습니다.
메스퀴트라는 넝쿨 비슷한 사막 식물이 있습니다. 메스퀴트는 수많은 뿌리를 갖고 있으며, 사막의 모래 밑 30m까지 뿌리를 내려 수분을 흡수합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작열하는 태양 아래 물 한 모금 발견하기 어려운 사막에서 생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아름다운 식물이라도 뿌리가 약하거나 얕으면 뜨거운 태양이나 약간의 비바람에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누구도 얕은 뿌리로는 작열하는 세속의 태양을 견뎌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메스퀴트라는 사막식물처럼 우리의 뿌리가 영혼의 샘터 깊은 곳까지 내린다면 세상의 온갖 바람과 유혹 속에서도 생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광풍에 휩쓸리지 않는 길은 우리의 뿌리를 든든히 내리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내린 모든 뿌리가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그릇된 토양에 내린 뿌리는 오히려 엉겅퀴처럼 인생을 가로막는 짐이 될 뿐입니다. 탐욕이나 증오에 내린 뿌리는 깊어지고 뻗어갈수록 우리의 삶을 조이고 결국은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여러 해전에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메넨데즈 형제 사건’으로 불리는 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아들 두 명이 백만장자인 부모들의 유산을 빨리 상속받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총으로 집에서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입니다. 아버지가 유서 내용을 고쳐서 자식들에게 물려주려 했던 재산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것을 알고 형제가 모의하여 부모를 살해한 것입니다. 탐욕의 뿌리가 한 가정을 칭칭 감았고 결국은 산산조각 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의 뿌리가 어디로 내리고 있는지 깨어 살펴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속의 광풍에 쓸려가지 않는 또 다른 비결은 서로에게 버팀목에 되는 뿌리가 되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는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약한 그릇 같은 인간이 이 땅에 혼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상부상조의 은혜입니다. 캘리포니아의 삼나무는 130m까지도 자랄 정도로 튼튼한데 비해서 의외로 얕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견실한 이유는 삼나무의 뿌리가 서로 얽혀 강력한 그물망을 이루어 서로에게 튼튼한 버팀목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얕은 뿌리조차도 서로를 세워주는 버팀목이 될 때 세계에서 가장 높이 자라는 든든한 삼나무처럼, 우리가 자신만을 위한 뿌리가 아니라 서로를 위하고 도움이 되는 뿌리가 될 때 세속의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생으로 서로를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온갖 아름다운 것으로 화장한 치명적인 유혹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기는 길은 내면의 뿌리를 깊이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세상의 달콤한 것들에 우리의 눈을 돌리는 순간, 우리의 몸과 마음에 세속의 온갖 끈적끈적한 거머리들이 달라붙어서 우리의 골수를 빨아먹고 결국은 세상의 조그만 바람에도 휩쓸리는 빈 껍데기만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내면의 뿌리를 깊게 하는 길은 이름뿐인 종교인이 아니라 생명수이신 예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리는 명실상부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번 가을이 내면의 뿌리를 깊이 내림으로 세상의 모든 광풍에 맞설 수 있는 영적 근육을 다지는 축복의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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