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문 서

존귀한 성도가 됩시다 (시 16:1-11)

공 상희 2008. 8. 2. 10:40

존귀한 성도가 됩시다 (시 16:1-11)

이 시간에 “존귀한 성도가 됩시다.”라는 제목입니다. 이 지구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의 인구는 약 63억이라고 합니다. 조사 기관마다 관점의 차이에 따라 약간씩은 다르지만 미국의 고든콘월 신학교 부설 세계 기독교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2,000년 6월 30일 현재 세계 인구 61억 가운데 기독교인의 수는 인류의 33%인 20억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 가톨릭과 이단을 빼고 나면 우리 개신교는 6억 8천만 명입니다. 세계 인구의 10분의 1이 약간 넘는 수준입니다. 십일조는 되겠지만 참되게 믿으려는 우리 개신교의 숫자가 더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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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이 다 참된 성도일지는 모르지만 성도라고 볼 때 이들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존귀한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 가운데서도 더욱 존귀한 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일까요? 오늘 본문 3절에 땅에 있는 성도라 했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여기 성도는 히브리말로 ‘카도쉬’ 곧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이 카도쉬는 바로 하나님께서 소돔성에서 찾으려고 했던 그 의인을 가리키는데 쓰였습니다. 성도란 넓게는 예수 믿는 모든 자를 가리키지만 좁게는 죄악의 오염에서 벗어난 거룩한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눅15:7에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믿음 지키기 어려운 죄악 많은 세상에서 의인 노아와 같이 물들지 않고 깨어 사명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존귀한 성도는 어떤 성도일까요?

1. 존귀한 성도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1-2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이 구원의 호소 속에서 그가 얼마나 어려운 시험 가운데 처해 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자기의 주되신 하나님께 피하고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나의 주로 삼아야 기뻐하십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면서 내가 주가 되고 내 뜻대로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머슴이 되었으면 나가는 날까지는 주인의 뜻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 뜻대로 살면 쫓겨나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6:46)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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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표현하면 겸손한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큰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이 무엇일까요?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 아시죠?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육신을 입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 때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살리시고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겸손이 이렇게 존귀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2. 존귀한 성도는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4절에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만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예배 잘 드리면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셔요.

그래서 요4:23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 열납하시는 성공적인 예배를 얼마나 잘 드리는 사람인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예배가 있지만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던 그런 충만한 예배라면 하나님게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예배를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고 준비하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인 회중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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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 모든 해결이 있어요. 가인의 제사가 아니고 아벨의 제사여야 합니다. 예배만 성공적으로 드리면 대부분은 거기서 다 해결됩니다.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고, 신앙교육도 거기서 해결 되고, 여러 가지 문제도 해결 되고, 하나님의 일군이 생겨나고, 개인의 축복과 교회의 부흥이 거기서 일어납니다. 지역을 복음화하고 나라와 민족으로 복음화하고 세계를 복음화 할 방법도 예배입니다.

1904년 영국의 웨일즈에 일어난 부흥운동도 예배에 있었습니다. 웨일즈의 부흥을 일으킨 사람은 광부 출신 이반 로버츠라는 청년입니다. 그는 11년간 날마다 부흥을 위해 기도했지만 교회도 없어 자기 시골교회 목사님에게 설교할 기회를 달라고 하고 저녁기도회 후 부르짖고 기도할 성도들만 남으라 해서 17명의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다가 오순절과 같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부흥의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30일 만에 3만 7,000명이 주님께 돌아오고 5개월 만에 웨일즈 전역에서 10만 여명이 예수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부흥의 불길은 영국에서 그치지 않고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전역으로 퍼졌고 우리 한국에도 1907년에 평양에서 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1907년의 대 부흥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길선주 목사도 웨일즈 부흥운동 소식에 큰 은혜를 받고 날마다 예배에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성령이 크게 역사하는 예배만 드릴 수 있다면 하나님의 모든 기쁨과 관심은 거기에 있을 것이고 가장 귀하게 여겨 주실 것입니다.

3. 존귀한 성도는 하늘에 쌓는 성도입니다.

5-6절에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얼마나 귀한지 6절에 “실로 아름답도다”고 말씀합니다. 이 아름다운 복은 지상의 복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늘의 상을 가리킵니다. 하늘에 쌓는 상이 얼마나 귀한지 쌓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후회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존귀 여기는 성도는 천상에다 쌓는 성도예요. 지상에 아무리 열심히 쌓아도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하늘에다 쌓을 줄 알아야 기뻐하세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6;19-20) 하셨습니다.

 

이러한 성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존귀한 성도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많을 때 하나님의 큰일이 가능합니다. 전적으로 충성하는 사람 몇 사람만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고 큰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도 물질이 있어야 됩니다. 다 자기들만 위해 쌓기 바쁜데 물질을 주를 위해 쓴다면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려운 가운데서 충성할수록 상이 더 큽니다. 황해도 재령읍에 정 찬유 장로라고 있었는데 그는 돈을 잘 벌어서 2층 양옥집을 지으려고 하다가 꿈에 하나님이 책망을 들었습니다. “네 집은 그렇게 화려하게 지으면서 내 집은 어찌하여 양철집으로 내버려두느냐” 깜짝 놀란 장로님은 회개하고 그 설계사를 다시 불러다 설계를 예배당으로 바꾸고 건축했는데 그것이 재령동부교회 예배당으로 당시에는 한국에서는 제일 큰 예배당이었다고 합니다.

 

이 예배당 지으면서 있던 일화가 있지요. 교인들은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 예배당 머릿돌에 "정찬유 장로 기념 예배당."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정장로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나중에 보니까 그는 멀리 떨어진 다른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과 교인들이 놀라 찾아가 이유를 물으니 "제가 지금까지 동부교회에 출석한 것은 그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교회의 주인이 바뀌어서 더 이상 사람이 주인이 된 교회에는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제서야 목사님과 교인들은 그의 깊은 뜻을 깨닫고 즉시 예배당의 머릿돌의 글씨를 지웠다고 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1년에 3천 가마니의 쌀을 드렸고, 수천의 교역자들의 생활비와 신학생의 학비를 은밀히 도왔으며, 교인들이 배척한 담임목사를 65세 은퇴할 때까지 잘 모셨습니다. 그리고 은퇴 10년 전에 배 밭 농장을 만들어 호수를 파고 정자를 만들어 은퇴 후에 그곳에 모셨으며 은퇴교역자들을 위해서 한 달에 쌀 100가마니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교회사가인 박용규 목사가 천국에 갔더니 그 분의 상이 그렇게도 크더랍니다. 주의 일을 하고서 자기 이름 내지 않았기에 상이 있는 것입니다. 지상에 쌓은 것만 기뻐하지 말고 하늘에 쌓이는 상을 보고 실로 아름답도다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존귀한 성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입니다.

8절에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 구절들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말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다윗은 굉장한 영성가라고 말할 수 있죠.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프란시스 같은 백년에 하나 천년에 하나 나올지말지 한 그런 영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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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존귀한 사람은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입니다. 노아처럼, 요셉처럼, 모세처럼, 다윗처럼, 다니엘처럼, 바울처럼, 요한처럼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하나님과 함께 살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동역해야 합니다. 이 땅에 귀히 쓰임 받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운명하시면 참 아쉬운 마음입니다. 저런 분은 더 오래 사시면서 우리에게 더 은혜를 끼쳐주셔야 할 텐데 하는 맘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보물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천국을 보여주었고 구원이 무엇이고 사랑이 무엇이고 능력이 무엇이고 은혜가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가장 귀한 감람나무처럼 성령 받은 사람이야 말로 이 땅에서 참으로 존귀한 사람인 것입니다. 왜 존귀합니까? 이 지상에서는 온갖 방해 세력 때문에 바로 믿음생활하기 어려운데 거기서 승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가장 존귀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죄악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어렵지만 우리들도 이기고 이기며 순종하고 순종해서 참으로 겸손하고, 참으로 예배하고, 참으로 하늘에 쌓고, 온전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령의 사람 되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존귀 여김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