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앞에 무능한 인간 (마 26:40-41)
(마 26:40-41)“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가며 핏줄이 터져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애써 부르짖으며 마지막 기도를 드리셨던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말씀하셨을 때 제일 먼저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대답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호언장담했고 다른 제자들로 마찬가지로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끌고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러 다른 제자들은 남겨 두고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만 데리고 올라 가셔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한참 기도를 드리시던 예수님께서는 잠깐 숨을 돌리기 위해 제자들에게 와 보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처절한 모습과는 달리 피곤에 지쳐 깊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마셔야 할 쓴 잔,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기 위해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힘쓰고 애쓰며 처절하게 기도를 드리셨지만 제자들은 너무나 무능하여 예수님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깨어 있어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면 예수님께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을 것입니다만 제자들은 깊은 잠에 취해 있었습니다. 이를 보시고 고독했던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더 고독해지셨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참된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도 받고 죽음까지도 불사를 각오는 있었지만 이를 실천할 능력이 부족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권고는 기도만이 시험을 피할 수 있고 기도만이 고난을 이길 수 있음을 분명히 교훈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은 결코 피곤한 육체의 수면을 취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방심(마음을 잡지 아니하고 놓아버림)하거나 나태(게으르고 느림)했을 때 사단이 여지없이 공격할 것이기 때문에 이를 대비해서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겁니다.
왜냐? 첫째로, 인간은 본성적으로 육신의 무서운 적인 나태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서운 적이 자신 속에 잠재하고 있는 동안 언제나 사단은 나태함을 이용하여 공격할 것입니다. 이러한 공격을 이기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 기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둘째로, 사단은 우리의 모든 행동반경을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벧전 5:8)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들은 깨어 있지 않으면 사단의 가장 좋은 먹이감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말씀의 검으로 무장하고 겸손하다 할지라도 사단은 우리보다 엄청나게 큰 능력과 통찰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사단의 계획을 알아차리거나 공격을 제어하거나 막아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라고 권고하시는 겁니다. 기도만이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힘입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기 때문입니다.
41절 하반절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으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겠다고 하면서도 이때의 제자들의 신앙처럼 마음뿐인 신앙이 오늘날 너무나 많습니다. 마음으로는 항시 기도해야지 헌신해야지 봉사해야지 하면서 실행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 한 구절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려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이제 자고 쉬라’고 하셨는데 자고 쉰 제자들의 모습은 어떻게 됐습니까? 모두 예수님을 배신하고 버리고 도망갔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는 마음뿐인 신앙은 모두 주님을 배신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사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깨어 있어 기도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말씀에서 기도하지 않는 생활은 사단에게 시험과 유혹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가 터진 다음에 ‘주여 도와 주시옵소서’ 하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것보다 평상시에 늘 기도하는 생활을 할 때 사단의 궤계(나쁜 계획)를 깨닫고 대처하여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모든 시험에서 피할 길을 얻고 승리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무능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여 무능한 저희들을 도와 주소서’라고 간구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은 틀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라도 주를 버리지 않겠다’라고 우리말이 맞다고 장담했지만 한낮 제사장의 여종 앞에서 구차한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인하게 됐던 겁니다. 물론 베드로의 마음은 결코 주님을 부인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죽음이 두려워서 부인한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는다면 베드로보다 베드로보다도 더한 배신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기왕에 예수님께서 잡힐 것이었다면 그 때 잡으러 오니까 ‘너희는 먼저 가라’ 그렇게 하시지 않고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는 고난 중에 제자들이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간다고 했지 않느냐 그러므로 너희들이 장담했던 것과 같이 이제 실천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반드시 새벽기도회에 나가겠다’라고 굳게 결심했지만 육체의 나태함으로 자신을 배반할 때 그 의지를 다스리지 못하는 무능하고 무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해야 됩니다. 이를 분명히 깨닫는 자라면 결코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무능하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높인다고 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무능한 사실을 안다면 언제나 무릎을 꿇어야죠. 누구에게도 ‘내가 최고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겁니다.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면 자신을 높이지 말고 누구에게나 진정 겸손해져야 합니다. 겸손해야 한다면서도 겸손하지 못하고 언제나 자기가 최고인양 아는 척하고 친구들을 상처 입히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도우심을 간구하는 겸손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협력하는 입장에서 함께 가자고 하셨으므로 이러한 예수님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 연약한 친구들을 도와주고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사랑으로요. 겸손함으로요.
(마 26:40-41)“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가며 핏줄이 터져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애써 부르짖으며 마지막 기도를 드리셨던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말씀하셨을 때 제일 먼저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대답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호언장담했고 다른 제자들로 마찬가지로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끌고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러 다른 제자들은 남겨 두고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만 데리고 올라 가셔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한참 기도를 드리시던 예수님께서는 잠깐 숨을 돌리기 위해 제자들에게 와 보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처절한 모습과는 달리 피곤에 지쳐 깊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마셔야 할 쓴 잔,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기 위해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힘쓰고 애쓰며 처절하게 기도를 드리셨지만 제자들은 너무나 무능하여 예수님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깨어 있어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면 예수님께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을 것입니다만 제자들은 깊은 잠에 취해 있었습니다. 이를 보시고 고독했던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더 고독해지셨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참된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도 받고 죽음까지도 불사를 각오는 있었지만 이를 실천할 능력이 부족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권고는 기도만이 시험을 피할 수 있고 기도만이 고난을 이길 수 있음을 분명히 교훈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은 결코 피곤한 육체의 수면을 취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방심(마음을 잡지 아니하고 놓아버림)하거나 나태(게으르고 느림)했을 때 사단이 여지없이 공격할 것이기 때문에 이를 대비해서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겁니다.
왜냐? 첫째로, 인간은 본성적으로 육신의 무서운 적인 나태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서운 적이 자신 속에 잠재하고 있는 동안 언제나 사단은 나태함을 이용하여 공격할 것입니다. 이러한 공격을 이기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 기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둘째로, 사단은 우리의 모든 행동반경을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벧전 5:8)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들은 깨어 있지 않으면 사단의 가장 좋은 먹이감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말씀의 검으로 무장하고 겸손하다 할지라도 사단은 우리보다 엄청나게 큰 능력과 통찰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사단의 계획을 알아차리거나 공격을 제어하거나 막아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라고 권고하시는 겁니다. 기도만이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힘입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기 때문입니다.
41절 하반절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으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겠다고 하면서도 이때의 제자들의 신앙처럼 마음뿐인 신앙이 오늘날 너무나 많습니다. 마음으로는 항시 기도해야지 헌신해야지 봉사해야지 하면서 실행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 한 구절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려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이제 자고 쉬라’고 하셨는데 자고 쉰 제자들의 모습은 어떻게 됐습니까? 모두 예수님을 배신하고 버리고 도망갔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는 마음뿐인 신앙은 모두 주님을 배신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사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깨어 있어 기도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말씀에서 기도하지 않는 생활은 사단에게 시험과 유혹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가 터진 다음에 ‘주여 도와 주시옵소서’ 하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것보다 평상시에 늘 기도하는 생활을 할 때 사단의 궤계(나쁜 계획)를 깨닫고 대처하여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모든 시험에서 피할 길을 얻고 승리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무능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여 무능한 저희들을 도와 주소서’라고 간구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은 틀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라도 주를 버리지 않겠다’라고 우리말이 맞다고 장담했지만 한낮 제사장의 여종 앞에서 구차한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인하게 됐던 겁니다. 물론 베드로의 마음은 결코 주님을 부인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죽음이 두려워서 부인한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는다면 베드로보다 베드로보다도 더한 배신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기왕에 예수님께서 잡힐 것이었다면 그 때 잡으러 오니까 ‘너희는 먼저 가라’ 그렇게 하시지 않고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는 고난 중에 제자들이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간다고 했지 않느냐 그러므로 너희들이 장담했던 것과 같이 이제 실천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반드시 새벽기도회에 나가겠다’라고 굳게 결심했지만 육체의 나태함으로 자신을 배반할 때 그 의지를 다스리지 못하는 무능하고 무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해야 됩니다. 이를 분명히 깨닫는 자라면 결코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무능하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높인다고 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무능한 사실을 안다면 언제나 무릎을 꿇어야죠. 누구에게도 ‘내가 최고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겁니다.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면 자신을 높이지 말고 누구에게나 진정 겸손해져야 합니다. 겸손해야 한다면서도 겸손하지 못하고 언제나 자기가 최고인양 아는 척하고 친구들을 상처 입히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도우심을 간구하는 겸손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협력하는 입장에서 함께 가자고 하셨으므로 이러한 예수님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 연약한 친구들을 도와주고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사랑으로요. 겸손함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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