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선지서

풍성한 은혜를 위한 네 시점 (학 2:15-23)

공 상희 2007. 12. 27. 18:35
풍성한 은혜를 위한 네 시점 (학 2:15-23)

이 시간에 “풍성한 은혜를 위한 네 시점”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오순절에 임했던 그 풍성한 성령의 은혜를 누리길 원하십니까? 우리의 심령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과 그 은혜에 대해서 갈급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만있어도 하루아침에 장맛비처럼 풍성한 은혜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때도 그랬듯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때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18절과 20절에 내가 복을 주리라 하신 구월 이십사일이 어떤 날인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그 경이 이스라엘에 이른 비가 내리는 때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될 때 풍성한 장맛비로 내려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욜 2장을 보면 진실로 회개할 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것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약속입니다. 욜2:23에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여기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바로 풍성한 성령의 약속입니다. 참으로 귀한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신앙의 성전을 잘 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우리를 성전 삼고 내주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풍성한 은혜가 임하는 데는 몇 가지의 통과해야 할 시점이 있습니다. 학개서를 보면 약 네 가지 시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장 1절에는 6월 초하루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날이 하나님의 은혜의 첫 시점입니다. 1장 15절에는 6월 24일이 나오고, 2장 1절은 7월 21일, 2장 10절에는 9월 24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9월 24일이 바로 축복의 장맛비가 쏟아지는 시점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풍성한 성령의 은혜가 넘치는 때가 언제인지 가르쳐줍니다.

그럼 풍성한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어떤 과정이 있어야 할까요?

1. 먼저 비참한 자신의 영적 상태를 깨닫는 때가 와야 합니다.

우리는 학개서 1장에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참한 상태를 발견합니다. 학1:6에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했습니다.

1:9-11에는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때가 학개를 통해 유월 초하루에 주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해도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 원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몇 년 만 비를 주시지 않는다면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된 것은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하나님의 성전부터 짓지 아니하고 자기 집짓기에 바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 심령이 왜 은혜가 없는가? 내 심령에 왜 기쁨이 없는가? 내 삶에 왜 형통이 없는가? 왜 마음은 온통 사막과 같이 메마르고 갈급하고 고통스러운지 속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 욕망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내 육신이 앞서면 복 받지 못해요. 내 욕망 대로 살면 하나님을 바로 경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도 큰 은혜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것조차도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 심령의 비참함과 갈급함을 깨닫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그것을 깨닫게 되듯이 성령의 은혜가 아니고는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풍성한 은혜를 받으려면 자기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깨달아야 합니다.

2. 나아가 회개하며 바른 신앙으로 돌아오는 때가 와야 합니다.

6월 24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을 결단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학1:12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바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을 인함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그랬습니다.

13절을 보면 이때부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시작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회개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성전을 짓자고 백성들의 마음이 뭉쳐졌습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성전은 먼저 예수님이 성전이고, 다음은 우리 자신이 성전이지만, 성전을 건축하자는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갖자는 말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성전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구원의 진리의 토대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의 신앙만 잘 갖추어지면 그것이 바로 바른 성전인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놀라운 부흥의 원동력은 예배 회복에 있었습니다. 말씀 듣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봉사하고 예배의 생활이 충실해지니까 하늘의 신령한 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생활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예배생활 기도생활이 잘 되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심하고 바른 신앙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3. 나아가 시험을 이기고 다져지고 다져지는 연단의 때를 거쳐야 합니다.

7월 21일, 성전 건축을 위해 기초를 닦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학개를 통해 또 임합니다. 2:3에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이 없지 아니 하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는 아직 눈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때입니다. 성전 건축에 한창 힘을 쏟는 데도 현실의 어려움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이 때 백성들은 힘을 잃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계속하여 백성들에게 독려하시며 희망과 용기를 주시고 계십니다. 굳센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4절), "나의 신이 더욱 너희 중에 머물러 있다."(5절), 또 6절에 "조금 있으면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며 또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이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내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9절에서는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고 온갖 아름다운 축복으로 약속하십니다.

왜 이렇게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에게 암담한 터널의 기간을 주시는 것일까요? 2:10-14절에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변하지 않는 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도 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이 내용은 없는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실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돌이켜 경건의 모양을 갖추었어도 얼마나 진실 된 경건인가에 대해서는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이 과정을 다시 말하면 진짜가 되어져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전진하는 길에 시험이 옵니다. 순종했어도 속한 결실이 없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마음은 답답하기만 합니다.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것처럼 답답하고 막막한 순간입니다. 어느 성도가 입신하여 천국을 가는데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더랍니다. 바로 은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런 터널 같은 과정이 있다는 것을 교훈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여 하나님 앞에 나옴과 같습니다. 이 때는 믿음 생활에 재미가 없습니다. 상당히 순종한 것 같은데 결과는 적습니다. 그래서 낙심 되고 의심이 오는 때입니다. 지금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말씀대로 전진하고 있지만 아직 은혜가 쏟아져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여호와께서 독려하시듯 계속하여 말씀에 서서 용기와 희망과 굳센 믿음으로 전진해야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의 약속을 기다린 제자들도 열흘이 걸렸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반드시 열흘 만에 은혜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의 사건은 표적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계시를 주시기 위한 비유와 상징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10은 가득 차는 만수입니다. 우리 믿음이 가득 차야합니다.

우리가 시험을 이기고 전진하고 전진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때가옵니다. 합격의 때입니다. 은혜 주시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더 믿음에 서서 완전한 신앙, 더 견고한 믿음으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터가 잘 닦이면 비로소 은혜의 장맛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 때가 바로 2:18의 9월 24일인 것입니다. 이 날은 우리 신앙의 기초가 잘 다져져서 하나님을 올바로 경외하는 단계가 됩니다.

4. 그런데 더욱 풍성하고 온전함을 누리는 때가 더 있다는 사실입니다. 

학개서의 결론 부분을 보면 시점을 명시하지 않은 또 하나의 날이 예고됩니다. 23절에 “그 날에”라는 말로 나타나는 또 다른 새 날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될 일이 21절부터 나옵니다.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자를 엎드??뜨리리니 말과 그 탄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날은 말세 종말의 날을 가리킵니다. 그 날은 택한 자들을 하늘나라로 취하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우리가 현재 지상에 살지만 성령의 은혜로 온전히 죄악을 이기게 하시고 생명적이고 천상적인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신다는 말씀을 묘사한 것입니다. 성전 기초가 전부가 아닙니다. 성전을 다 지어야 합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삶은 천국 그 자체가 될 것이란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느 시점에 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여서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였습니다. 성령의 풍성한 기름부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기초가 완전히 다져질 때 옵니다. 우리 모두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갈급한 심령으로 회개하고 회개하며 전진하고 전진하여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온전하고 풍성한 성령의 은혜로 가득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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