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부설교

생명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12 : 24 - 25

공 상희 2007. 11. 16. 16:19
생명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12 : 24 - 25
어떤 사람이 자기도 새해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작은것 부터 실천을 해봐야지 하며 굳게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다음과 같이 했습니다. 매일 아침에 성경책을 폈을때(얍!!)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말씀을 읽고 그것을 그날 하루종일 실천을 하기로 작정을 했지요.

하루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말씀을 생각하면서 하루종일 직장에 있는 동료들을 정말로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사도행전 1장 8절말씀'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을 받고는 그날 하루 자기가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했지요.
그리고 그 다음날은 마태복음 7장 12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종일 남을 대접하는대 힘을 쏟았지요.

그런데 어느날 성경책을 '얍'하고 폈는데 마태복음 27장 5절에 가룟유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고는 죄책감에 시달려서 자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5절말씀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목매어 죽은지라.' 그는 얼른 그 말씀을 덮어버리고는 하는 말이 '뭐 이래(뭐 이카노), 목매어 죽어. 애이 제수없어'하고는 그는 다시 성경책을 접었다가 다시 얍하고 폈는데 나온 말씀이 누가복음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길거리에 강도만난자가 누워 있는데 제사장도 그냥지나가고 레위인도 그냥지나쳤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를 돌보아 준 이야기이지요. 여기서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라고 물었을때 그 율법사의 대답이 '강도만난자에게 자비를 베푼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럼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그는 처음에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란 말씀을 듣고 재수 없게 생각하고 다시 말씀을 폈을때 더이상 발뺌을 할 수 없는 말씀이 나와서 그는 그 말씀에 순종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는 믿거나 말거나한 전설따라 삼천리 이야기가 있습니다.

웃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 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는 아마 지금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문자그대로 따랐던 결과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것에 대한 풍자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한다'라는 말씀을 문자그대로 받아들여서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자기 생명만을 사랑하는자' 다시 말해서 하나님 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보다는 자기의 개인적 안녕과 이익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자에대한 경고의 말로 해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6장33절에 나온말씀같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 앞절에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할 밀, 그것은 일차적으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열매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영혼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절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헌신적인 희생과 그 결과를 설명해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헌신적인 희생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자기 목숨을 가치 없게 여겨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욱 많은 열매를 얻기위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우리가 썩여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영어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NO PAIN NO GAIN. 고통없이 얻는것 없다. 그리고 '가시없이 면류관 없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수고없이 결과만 좋기를 바라는 것은 거짓이요 고난 없이 영광만 바라보는 것은 도둑놈 심보이지요. 아니 하다 못해 도둑놈도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합니까. 남의 대문 대신 애써서 담벼락을 넘어야지요. 그것도 한낮이 아닌 한 밤 중에 자기 잠자는 것도 마다하고 그 어두컴컴한 집을 조용히 소리 없이 들어갔다가 소리없이 나와야지요. 보통 힘이 드는게 아닐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가수들이나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을 동경하고 이를 모방하여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현상들을 가끔씩 봅니다.
또 부모님이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성적이 형편없는 것을 보시고는 '내가 너에게 못해준게 무어냐?', 이 따위 성적을 받으려고 학교에 다니냐? 당장때려치우고 나가 뒈져라. 야 이 xxx놈아! 그 소리를 듣고 그 학생이 울면서 집을 나가서는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해서 목숨을 잃었다는 이 시대의 비극적 이야기도 우리는 가끔은 듣곤 합니다.
이건 성경이 말하는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는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지요.

내가 이땅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가운데 귀한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나'라는 존재는 나밖에 업습니다. 이것은 유일 무이한 것이지요. 그러기에 너무나 가치가 있고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어린양 한마리를 구하기 위해 험한 산자락을 헤메는 목자의 심정을 우리는 본받기 이전에 그러한 느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목자는 99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한마리의 양을 찾기위해 험한 산자락을 찾아 다닙니다. 설령 한마리의 양을 찾아서 즐겁게 돌아 온다고 해도 나머지 아흔 아홉마리의 양들 중 몇마리가 그렇게 목자 없는 사이 온 들판을 헤멜 수도 있는 가능성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험한 산을 헤매는 그리고는 결국 찾아서 돌아오는 목자의 그 마음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그것은 산술적이고 수치적이고 경제적인 개념영역 너머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의 미학일 것입니다. 그만큼 한 생명은 중요합니다.

실존철학자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것 또한 쉽게 설명을 하면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차원의 이야기 입니다. '실존'이라는 단어는 어떤 사물이 '눈앞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본질은 '그 사물에서 내적으로 변화지 않는것'을 의미합니다. 바뀌서 얘길 하면 한 사람의 '구체적 있음' 이것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라는 말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의 눈을 빼어주고 자신은 소경으로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자기에게 있습니까? 당신의 귀중한 신체의 일부를 주고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사람은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그 사람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의 사람일까요?
예수님은 바로 나를 살리기 위해 이땅에 오셔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자신의 외아들을 죽이면서 바로 여러분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당신은 어떤 존재일까요? 하나님의 마음에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길래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여러분 한사람 개개인을 위해 죽으시게 했을 까요? 이래도 여러분의 생명이 소중하지 않습니까? 이래도 이 세상에 태어난 자기의 참된 의미를 아직 깨닫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명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생명을 사랑하십니다.
생명,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주위의 모든 생명체에 깃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오늘도 생명을 주셔서 특별히 중등부 수련회를 이곳에서 가질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생명을 사랑하신 예수그리스도란 주제하에 2박 3일 동안 진행되는 모든 순서 위에 주님게서 함께 하시고 우리들이 주님께서 주신 모든 생명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