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한 몸
본문 : 고린도전서 7장 2~5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 부부가 지켜야 할 침실에서의 질서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어떻게 성경에 그런 얘기까지 실려 있는가? 어떤 분들은 의아하게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이 성이 얼마나 인간에게 유혹적이고 인간을 무질서하게 하고 인간을 쾌락 속에 빠져들게 하는지 사도 바울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과 재물도 매혹적이고 유혹적입니다. 권력도 유혹적인 것입니다. 성은 어떻게 보면 그런 것들보다 더 유혹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를 일평생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것이 성적인 유혹입니다. 성적인 유혹은 은밀하게 찾아오고 때로는 충동적으로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늑대와 곰이 훨씬 더 위험하지만, 우리가 주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여름밤에 잘 때마다 뜯기는 모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늑대는 돈과 재물의 유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곰은 권력의 유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기는 매일매일 부딪히는 삶의 유혹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특별히 남자들에게 있어서 이 성적인 유혹은 아주 견디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입니다. 머릿속에서 시작되어 구체적인 행동에까지 이르는 유혹이 이 성적인 유혹입니다. 때로는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고 성적 유혹에서 방황하다가 어둠의 쾌락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기도 합니다. 도대체 우리들에게 있어 성이란 무엇일까요? 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 문제를 설교 시간에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 때로는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어디까지 얘기해야 되고 어떻게 이 성 문제를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인으로서 대해야 할 것인가를 얘기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에 대해서 이중적으로 양육 받아 왔습니다.
하나는 성에 대한 부정적인 예입니다. 한편으로 ‘성이란 더럽고 잘못된 것이다. 성이란 억눌러야만 된다. 그래서 성이란, 가급적 억제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이지…….’ 하는 등 성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이 있습니다. ‘성이란, 이제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니다. 성이란, 음지에 가두어 놓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양지로 나가야 된다. 그리고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되어야 한다.’ 특별히 요사이 젊은이들의 성에 대한 이해는 이 후자 쪽으로 많이 기울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을 마치 개인의 취미 정도로 생각합니다. 자기의 취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성의식의 범람이 가장 거룩해야 할 가정의 침실까지 들어와서 침실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부부가 누려야 할 아름다운 성적인 관계마저도 다 무너뜨리고 있고, 가족의 울타리까지도 다 침범하여 쓰러뜨리고 있습니다.
마치 음악 장르별로 대중가요와 클래식이 나뉘어 있다가 요새 ‘열린 음악회’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환호하는데, 그와 비슷하게 성도 ‘열린 성’으로 가야 되고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되며 어린아이부터 어른들, 노인들까지도 이 성이 개방되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성이 무차별적으로 곳곳에 뿌려지고 있습니다. 신문광고 전단도 성의 유혹의 자리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TV나 영화 매체도 성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이 SEX가 마치 사이비 종교처럼 곳곳에서 “나를 숭배하라. 내가 네게 쾌락을 주겠다. 내가 최고의 신이다.”라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이비 종교를 넘어서서 사이버 종교까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인터넷을 하시지 않습니까? 인터넷을 열기만 하면 곳곳에서 이 사이버 성이 우리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메일이 친구로부터 왔는가 하고 열어 보면 그것은 성에 대한 광고입니다. 곳곳에서 성은 시도 때도 없이 장소도 가리지 않고 우리의 삶에서 성이 최고의 신이고 최고의 쾌락을 준다며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탐닉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라고 우리들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런 성의 유혹 속에서 대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성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인 가정 된 부부가 어떻게 성을 함께 즐거워해야 이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성은 창조 질서에 속하는 것입니다. 성은 나쁜 것도 아니고 버려야 될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성을 위해서만 사는 것이라는 ‘성 예찬주의’도 기독교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성적인 기대와 성적 욕망을 갖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피조물로서의 모습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이 성숙하면 이성을 그리워하게 되고 만나기를 사모하게 되며,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랑을 품게 되고 결혼을 통해 하나님께서 복 주신 아름다운 가정을 꾸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도 바울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2절을 보면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말을 합니다. 이 인간이 갖고 있는 성적 욕망이 제어되지 아니하면, 이것을 그냥 방치해 두면 가정을 깨뜨리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의 질서를 파괴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고들을 가지고 있는데 특별히 요새 젊은이들 가운데는 자유분방한 질문들이 나타납니다. “성이란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결혼이란 것, 꼭 해야 되는 것입니까?” “성은 욕구가 생기면 발산하면 되지 않습니까?” “성은 마치 친구들끼리 만나면 악수하듯이, 내가 좋아하는 친구와 악수하듯이 관계를 맺는다고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됩니까?” “식욕이 돋으면 밥을 먹듯이 성적인 욕구가 생기면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무엇이 잘못입니까?” “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다 보여도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정말 성이란 그럴까요? 성이란 자기 욕심대로 방치해 두어도 되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에 의하면, 성은 아주 중요한 인격과 관련되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은 내 인격 그리고 상대방의 인격과 함께 동반되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기독교적인 성이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은 단순한 물건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품성과 나 자신의 자존감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성입니다. 배고플 때 그냥 식욕 도는 대로 오늘은 비빔밥을 먹다가 내일은 냉면을 먹다가 하는 그런 것이 결코 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금과 여인들이 놓여 있을 때 남자들이 아무것이나 선택하는 것이 성의 바른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성이란, 하나의 인격과 또 다른 하나의 인격이 만나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이 성인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성이 단순한 물건과 같다고 한다면 내가 결혼한 후에, 아니면 내 애인이 다른 남자와, 다른 여자와 함께 살고 함께 성적인 관계를 할 때, 왜 그렇게 마음속에 분노하고 배신감을 느끼고 인간으로서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일까요? 성은 단순하게 돈으로 사고파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 들어 있고 그 사람의 삶이 들어 있고 그 사람의 명예가 들어 있으며 그 사람의 자존감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생기는 갈등의 문제들, 때로는 폭력이 난무하는 문제들 속에 이 성이 갖고 있는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파울로 코엘료가 쓴 『십일분』이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한 창녀가 라틴아메리카에서 스위스까지 가서 창녀 노릇을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소설입니다. 그 소설의 맨 마지막 결론은, 그렇게 수많은 남자들을 육체로 대했지만 그 속에는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인격이 없습니다. 자기를 알아주고 자기를 귀히 여기고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고자 하는 그 모든 생의 모습이 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성을 탐닉하는 것, 성의 쾌락 속에 빠져드는 것은 그 뒷면을 보면 하나님 영혼에 대한 갈망이다. 내가 그렇게 육체적인 쾌락에 빠지는 것은 사실 영혼이 비어 있기 때문에, 영혼이 절망하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 기쁨이 없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 참된 즐거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육체적 쾌락을 행하여 이 인간은 그렇게 돌아다니고 그것을 향하여 추구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이 부분을 주의 말씀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성은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육체는 하나님께서 선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셨고 인간의 이 피가 흐르고 살이 있는 육체를 만드시면서 보시기가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나서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더라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를 자학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체를 버리려고 하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극기주의자도 아닙니다. 육체 자체는 소중한 것입니다. 귀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육체와 육체가 만나는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의한 성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의 첫번째 기적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베풀어 주셨습니다. 당신도 축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꾸미고 성적으로도 하나 되는 것을 귀하게 여겨 주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두 사람이 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는 것은 귀하고 너무 아름다운 것이고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행위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인격을 팔아가면서까지 행하는 그 행위 그것은 곧 음행이요, 음란이요, 간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앙 안에서 내가 사랑하는 내 아내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내 남편과 두 사람의 육체가 하나가 되는 것은 거룩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감히 그렇게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부간에 침실에서 함께 자게 될 때 그 침실은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부부가 함께 하나가 될 때 그것은 거룩한 것이고 그 시간은 거룩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그냥 내 욕망을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내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사랑하는 남편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이 거룩함을 함께 기쁨으로 맛보는 장소가 부부의 침실입니다. 거룩한 자리입니다. 소중한 자리입니다. 깨끗한 자리입니다. 서로 귀하게 여겨 주어야 할 그런 자리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침실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남편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귀한 복이라고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3절에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절에 더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여러분, 이런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까? 결혼하게 되면 남편의 몸은 아내가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의 몸은 남편이 주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욕망이 있을 때 강제로 아내나 남편에게 요구한다는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남편의 몸은 아내를 위해서 올바로 쓰여야 되고 아내가 즐겁고 아내가 기쁘도록 내 몸이 사용되어야 되며, 아내는 남편이 즐겁고 남편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놀라운 비밀을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야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으로 자기를 내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몸이, 내 육체가 그렇게 쓰여야 부부간에 그 성생활이 기쁘고 아름답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는 것,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귀히 여기는 것, 상대방의 몸 속에 인격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내 쾌락과 내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서 이성적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을 세워 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신앙인들의 부부 관계의 모습이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이렇게 이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하나님 말씀에 그런 얘기까지 해야 되나?’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성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만남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도 성에 속합니다. 이 성이란? 본래 사랑의 친밀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이든 부부가 그냥 어느 날 공원에서 길을 걸어가는 것도 그것이 성적인 친밀감입니다. 손 한번 잡아 주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랑의 친밀감 속에서 되는 것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독일에서 발행되는 어떤 잡지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생명보험회사가 남자들의 수명이 어떻게 관련되는가 하면서 부인과의 관계를 살펴봤는데, 매일 아침 아내에게 키스를 하는 남편은 그렇지 않은 남자보다 5년 더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5년 더 사시려고 하면……. 이거 예수 믿지도 않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매일 아침 아내에게 키스하는 남편은 자동차 사고를 더 적게 낸다고 합니다. 마음이 편하기 때문에, 신경질을 안 내기 때문에……. 또 매일 아침 아내에게 키스를 하는 남편은 질병에 걸릴 확률이 50%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또 매일 아침 아내에게 키스하는 남편은 다른 사람들보다 20%~30% 더 돈을 더 잘 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반 생명보험회사가 그냥 보통사람들을 상대로 조사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아내의 사랑은 남편들에게 인생을 즐겁게 하고 아내의 마음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남자들은 시각적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서 성적 유혹에 빠져들기 쉬운 것입니다. 특별히 가정에서 주어지는 아내와 남편의 사랑의 기쁨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사에서 부딪히는 모든 성적 유혹에 대해 “아니오!” 하고 선언할 수 있는 힘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도 상당히 많은 자제심이 필요합니다. 자기 통제가 필요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두 가지 비결 중 하나는 목표가 명백해야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self control, 즉 자기 통제가 있는 사람이어야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적 유혹이야말로 우리들에게 이 자기 통제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게으름의 문제에 대해 제가 말씀드렸죠? 그것도 자기 통제력이 부족하면 게으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돈과 재물을 탐하는 것도 자기 통제가 필요합니다. 순결의 문제도 자기 통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성적인 유혹에 대해서도 우리가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시 서야 합니다. 실패할 때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어야 합니다. C. S. 루이스가 성적인 도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순결과 용기와 같은 덕목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내 마음속에 이루고자 매일매일 노력하는 과정은 더욱더 중요하다. 그래서 영혼의 습관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이 과정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해 준다.”
여러분, 실패해도 또 노력해야 됩니다. 실패해도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그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내 안에는 내가 정말 추구해야 할 인간적 자아와 싸우는 두 가지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동물적 자아, 지금 말하는 성적인 유혹과 싸움하는 자아, 또 다른 하나는 악마적 자아가 있습니다. 둘 중에 더 나쁜 것이 동물적 자아보다는 악마적 자아입니다.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냉정하고 독선적인 도덕가가 거리의 매춘부보다 훨씬 더 지옥에 가까울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이 둘 중에 어느 쪽도 되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악마적 자아. 이것을 깨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물적 욕심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이성적인 유혹을 벗어나는 것, 가정을 귀한 줄 알고 우리에게 주어진 내 아내, 내 남편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줄 알고 나만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마음속에 품으면서 이 가정을 꾸려 나갈 때 우리에게 부딪히는 이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넘어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하나님께 용서를 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사랑하는 법을 배워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귀한 뜻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순간순간 성적 유혹에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주님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내게 주신 귀한 아내, 내게 주신 귀한 남편을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임을 알고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가정에서 그리고 성적인 기쁨까지도 누릴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홀로 있는 분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이 모든 어려움에서 이겨나가는 은총도 주님께서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
행복을 위한 감탄사
어떤 부부가 아름다운 부부일까요? 인간의 역사 가운데 언제나 크고 위대한 일은 지극히 작은 것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고 <조그마한 일에도 각자의 도리를 다하는 부부>
는 아름답습니다. 때로 결혼 생활에서 고독감이 밀려올지라도 인간은 어차피 고독한 존재였고 고독에는 멋과 순결, 희생과 봉사, 꿈과 낭만이 있음을 알고 <고독의 순간을 지혜롭게 대처하는 부부>는 아름답습니다.
녹이 쇠붙이를 부패시키듯이 자기 안락과 게으름은 부부관계를 부패시킴을 알고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위해 <오늘도 수고하는 손길을 늦추지 않는 부부>도 아름답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피곤함을 느끼는데 이러한 피곤을 풀어주는 휴식처와 같은 역할을 하는 <유머와 멋을 아는 부부>도 아름다운 부부입니다. 세상 욕망이 괴롭히는 밤, 그리고 시름이 많은 밤, 밖에 나아가 밤하늘을 쳐다보며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하나님! 순결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겠습니다. 나의 남편을, 나의 아
내를 축복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시시각각 <하나님께 서로를 드리는 부부>의 모습도 진정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김소월은 그의 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려 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 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김소월은 오랜 세월에 걸쳐 밤마다 뜨는 달에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고 하며 달에 대한 그리움을 읊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부들은 결혼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서로에
대해 완전히 파악했다고 하며 서로에 대한 연모의 정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부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날마다 새롭게 체험되어지는 서로에 대한 감탄사가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아내에게, 그리고 당신의 남편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관심을 기울여 보세요. 그러면 감탄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인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성공적인 결혼 생활
의 정답은 이 감탄사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감탄사
어느 날, 미국의 한 여성 동창모임에서 누군가 물었습니다. “너희들 중에 남편만 바라보고 이제까지 정조를 지킨 사람 있니?” 그때 10명 중에 한 명만 손을 들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한 여인이 밤에 남편에게 그 얘기를 하며 자기도 손을 들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정조를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손을 안 들었어?”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부끄러워서요(I was ashamed).”
순결한 삶은 ‘부끄러운 삶’이 아니라 ‘부러운 삶’입니다. 결혼생활에는 열린 마음과 닫힌 마음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배우자에게는 마음을 활짝 열고, 유혹자에게는 마음을 철저히 닫아야 합니다. ‘모두와 더불어 살며 받드는 것’과 ‘모두와 어울려 살며 물드는 것’은 다릅니다. 식당 밥에 고춧가루가 하나만 보여도 그 밥을 거부하는 것처럼 내 영혼에 고춧가루가 하나라도 묻으면 그 영혼은 거부됩니다.
결혼은 외로운 두 척의 부서진 돛단배가 바다 한 가운데서 만나는 것입니다. 부서진 두 배가 사슬을 엮고 거친 바다를 항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상대에게 잘 묶어 더 아름다운 세계로 향하는 것이 결혼입니다. 결혼의 신비에서는 상대에게 묶일수록 더 자유가 생기고, 상대로부터 풀어질수록 더 묶이는 인생이 됩니다. 한 대상만을 향해 드려진 마음은 서로의 관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접착제입니다.
어떤 부부가 아름다운 부부일까요? 크고 위대한 일도 지극히 작은 것에서 비롯됨을 알고 ‘작은 관심을 게을리 하지 않는 부부’는 아름답습니다. 때로 고독감이 밀려와도 인간은 어차피 고독한 존재였고 고독에도 멋과 꿈과 순결과 낭만이 있음을 알고 ‘고독함을 고상함으로 승화시키는 부부’는 아름답습니다. 녹이 쇠를 부패시키듯이 게으름은 부부관계를 부패시킴을 알고 ‘이마에 맺힌 땀을 가진 부부’도 아름답습니다.
무엇보다 밤하늘을 쳐다보며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하나님! 저를 순결하게 다듬으시고 저의 반쪽을 축복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시시각각 ‘하나님께 서로를 드리는 부부’는 아름답습니다.
김소월은 노래했습니다.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려 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 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소월이 밤마다 뜨는 달에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고 했듯이 밤마다 만나는 상대에게도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부부는 더 파악하고 더 연모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날마다 새롭게 체험되어지는 서로에 대한 감탄사가 필요합니다. 사랑으로 서로를 탐험하면 감탄이 나올 것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인 줄을 정말 몰랐어요!” 그 감탄사에 성공적인 결혼생활과 행복한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본문 : 고린도전서 7장 2~5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 부부가 지켜야 할 침실에서의 질서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어떻게 성경에 그런 얘기까지 실려 있는가? 어떤 분들은 의아하게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이 성이 얼마나 인간에게 유혹적이고 인간을 무질서하게 하고 인간을 쾌락 속에 빠져들게 하는지 사도 바울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과 재물도 매혹적이고 유혹적입니다. 권력도 유혹적인 것입니다. 성은 어떻게 보면 그런 것들보다 더 유혹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를 일평생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것이 성적인 유혹입니다. 성적인 유혹은 은밀하게 찾아오고 때로는 충동적으로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늑대와 곰이 훨씬 더 위험하지만, 우리가 주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여름밤에 잘 때마다 뜯기는 모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늑대는 돈과 재물의 유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곰은 권력의 유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기는 매일매일 부딪히는 삶의 유혹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특별히 남자들에게 있어서 이 성적인 유혹은 아주 견디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입니다. 머릿속에서 시작되어 구체적인 행동에까지 이르는 유혹이 이 성적인 유혹입니다. 때로는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고 성적 유혹에서 방황하다가 어둠의 쾌락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기도 합니다. 도대체 우리들에게 있어 성이란 무엇일까요? 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 문제를 설교 시간에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 때로는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어디까지 얘기해야 되고 어떻게 이 성 문제를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인으로서 대해야 할 것인가를 얘기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에 대해서 이중적으로 양육 받아 왔습니다.
하나는 성에 대한 부정적인 예입니다. 한편으로 ‘성이란 더럽고 잘못된 것이다. 성이란 억눌러야만 된다. 그래서 성이란, 가급적 억제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이지…….’ 하는 등 성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이 있습니다. ‘성이란, 이제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니다. 성이란, 음지에 가두어 놓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양지로 나가야 된다. 그리고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되어야 한다.’ 특별히 요사이 젊은이들의 성에 대한 이해는 이 후자 쪽으로 많이 기울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을 마치 개인의 취미 정도로 생각합니다. 자기의 취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성의식의 범람이 가장 거룩해야 할 가정의 침실까지 들어와서 침실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부부가 누려야 할 아름다운 성적인 관계마저도 다 무너뜨리고 있고, 가족의 울타리까지도 다 침범하여 쓰러뜨리고 있습니다.
마치 음악 장르별로 대중가요와 클래식이 나뉘어 있다가 요새 ‘열린 음악회’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환호하는데, 그와 비슷하게 성도 ‘열린 성’으로 가야 되고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되며 어린아이부터 어른들, 노인들까지도 이 성이 개방되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성이 무차별적으로 곳곳에 뿌려지고 있습니다. 신문광고 전단도 성의 유혹의 자리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TV나 영화 매체도 성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이 SEX가 마치 사이비 종교처럼 곳곳에서 “나를 숭배하라. 내가 네게 쾌락을 주겠다. 내가 최고의 신이다.”라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이비 종교를 넘어서서 사이버 종교까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인터넷을 하시지 않습니까? 인터넷을 열기만 하면 곳곳에서 이 사이버 성이 우리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메일이 친구로부터 왔는가 하고 열어 보면 그것은 성에 대한 광고입니다. 곳곳에서 성은 시도 때도 없이 장소도 가리지 않고 우리의 삶에서 성이 최고의 신이고 최고의 쾌락을 준다며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탐닉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라고 우리들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런 성의 유혹 속에서 대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성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인 가정 된 부부가 어떻게 성을 함께 즐거워해야 이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성은 창조 질서에 속하는 것입니다. 성은 나쁜 것도 아니고 버려야 될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성을 위해서만 사는 것이라는 ‘성 예찬주의’도 기독교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성적인 기대와 성적 욕망을 갖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피조물로서의 모습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이 성숙하면 이성을 그리워하게 되고 만나기를 사모하게 되며,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랑을 품게 되고 결혼을 통해 하나님께서 복 주신 아름다운 가정을 꾸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도 바울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2절을 보면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말을 합니다. 이 인간이 갖고 있는 성적 욕망이 제어되지 아니하면, 이것을 그냥 방치해 두면 가정을 깨뜨리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의 질서를 파괴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고들을 가지고 있는데 특별히 요새 젊은이들 가운데는 자유분방한 질문들이 나타납니다. “성이란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결혼이란 것, 꼭 해야 되는 것입니까?” “성은 욕구가 생기면 발산하면 되지 않습니까?” “성은 마치 친구들끼리 만나면 악수하듯이, 내가 좋아하는 친구와 악수하듯이 관계를 맺는다고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됩니까?” “식욕이 돋으면 밥을 먹듯이 성적인 욕구가 생기면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무엇이 잘못입니까?” “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다 보여도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정말 성이란 그럴까요? 성이란 자기 욕심대로 방치해 두어도 되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에 의하면, 성은 아주 중요한 인격과 관련되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은 내 인격 그리고 상대방의 인격과 함께 동반되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기독교적인 성이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은 단순한 물건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품성과 나 자신의 자존감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성입니다. 배고플 때 그냥 식욕 도는 대로 오늘은 비빔밥을 먹다가 내일은 냉면을 먹다가 하는 그런 것이 결코 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금과 여인들이 놓여 있을 때 남자들이 아무것이나 선택하는 것이 성의 바른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성이란, 하나의 인격과 또 다른 하나의 인격이 만나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이 성인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성이 단순한 물건과 같다고 한다면 내가 결혼한 후에, 아니면 내 애인이 다른 남자와, 다른 여자와 함께 살고 함께 성적인 관계를 할 때, 왜 그렇게 마음속에 분노하고 배신감을 느끼고 인간으로서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일까요? 성은 단순하게 돈으로 사고파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 들어 있고 그 사람의 삶이 들어 있고 그 사람의 명예가 들어 있으며 그 사람의 자존감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생기는 갈등의 문제들, 때로는 폭력이 난무하는 문제들 속에 이 성이 갖고 있는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파울로 코엘료가 쓴 『십일분』이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한 창녀가 라틴아메리카에서 스위스까지 가서 창녀 노릇을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소설입니다. 그 소설의 맨 마지막 결론은, 그렇게 수많은 남자들을 육체로 대했지만 그 속에는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인격이 없습니다. 자기를 알아주고 자기를 귀히 여기고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고자 하는 그 모든 생의 모습이 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성을 탐닉하는 것, 성의 쾌락 속에 빠져드는 것은 그 뒷면을 보면 하나님 영혼에 대한 갈망이다. 내가 그렇게 육체적인 쾌락에 빠지는 것은 사실 영혼이 비어 있기 때문에, 영혼이 절망하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 기쁨이 없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 참된 즐거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육체적 쾌락을 행하여 이 인간은 그렇게 돌아다니고 그것을 향하여 추구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이 부분을 주의 말씀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성은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육체는 하나님께서 선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셨고 인간의 이 피가 흐르고 살이 있는 육체를 만드시면서 보시기가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나서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더라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를 자학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체를 버리려고 하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극기주의자도 아닙니다. 육체 자체는 소중한 것입니다. 귀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육체와 육체가 만나는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의한 성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의 첫번째 기적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베풀어 주셨습니다. 당신도 축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꾸미고 성적으로도 하나 되는 것을 귀하게 여겨 주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두 사람이 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는 것은 귀하고 너무 아름다운 것이고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행위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인격을 팔아가면서까지 행하는 그 행위 그것은 곧 음행이요, 음란이요, 간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앙 안에서 내가 사랑하는 내 아내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내 남편과 두 사람의 육체가 하나가 되는 것은 거룩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감히 그렇게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부간에 침실에서 함께 자게 될 때 그 침실은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부부가 함께 하나가 될 때 그것은 거룩한 것이고 그 시간은 거룩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그냥 내 욕망을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내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사랑하는 남편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이 거룩함을 함께 기쁨으로 맛보는 장소가 부부의 침실입니다. 거룩한 자리입니다. 소중한 자리입니다. 깨끗한 자리입니다. 서로 귀하게 여겨 주어야 할 그런 자리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침실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남편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귀한 복이라고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3절에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절에 더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여러분, 이런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까? 결혼하게 되면 남편의 몸은 아내가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의 몸은 남편이 주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욕망이 있을 때 강제로 아내나 남편에게 요구한다는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남편의 몸은 아내를 위해서 올바로 쓰여야 되고 아내가 즐겁고 아내가 기쁘도록 내 몸이 사용되어야 되며, 아내는 남편이 즐겁고 남편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놀라운 비밀을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야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으로 자기를 내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몸이, 내 육체가 그렇게 쓰여야 부부간에 그 성생활이 기쁘고 아름답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는 것,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귀히 여기는 것, 상대방의 몸 속에 인격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내 쾌락과 내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서 이성적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을 세워 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신앙인들의 부부 관계의 모습이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이렇게 이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하나님 말씀에 그런 얘기까지 해야 되나?’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성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만남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도 성에 속합니다. 이 성이란? 본래 사랑의 친밀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이든 부부가 그냥 어느 날 공원에서 길을 걸어가는 것도 그것이 성적인 친밀감입니다. 손 한번 잡아 주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랑의 친밀감 속에서 되는 것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독일에서 발행되는 어떤 잡지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생명보험회사가 남자들의 수명이 어떻게 관련되는가 하면서 부인과의 관계를 살펴봤는데, 매일 아침 아내에게 키스를 하는 남편은 그렇지 않은 남자보다 5년 더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5년 더 사시려고 하면……. 이거 예수 믿지도 않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매일 아침 아내에게 키스하는 남편은 자동차 사고를 더 적게 낸다고 합니다. 마음이 편하기 때문에, 신경질을 안 내기 때문에……. 또 매일 아침 아내에게 키스를 하는 남편은 질병에 걸릴 확률이 50%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또 매일 아침 아내에게 키스하는 남편은 다른 사람들보다 20%~30% 더 돈을 더 잘 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반 생명보험회사가 그냥 보통사람들을 상대로 조사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아내의 사랑은 남편들에게 인생을 즐겁게 하고 아내의 마음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남자들은 시각적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서 성적 유혹에 빠져들기 쉬운 것입니다. 특별히 가정에서 주어지는 아내와 남편의 사랑의 기쁨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사에서 부딪히는 모든 성적 유혹에 대해 “아니오!” 하고 선언할 수 있는 힘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도 상당히 많은 자제심이 필요합니다. 자기 통제가 필요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두 가지 비결 중 하나는 목표가 명백해야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self control, 즉 자기 통제가 있는 사람이어야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적 유혹이야말로 우리들에게 이 자기 통제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게으름의 문제에 대해 제가 말씀드렸죠? 그것도 자기 통제력이 부족하면 게으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돈과 재물을 탐하는 것도 자기 통제가 필요합니다. 순결의 문제도 자기 통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성적인 유혹에 대해서도 우리가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시 서야 합니다. 실패할 때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어야 합니다. C. S. 루이스가 성적인 도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순결과 용기와 같은 덕목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내 마음속에 이루고자 매일매일 노력하는 과정은 더욱더 중요하다. 그래서 영혼의 습관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이 과정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해 준다.”
여러분, 실패해도 또 노력해야 됩니다. 실패해도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그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내 안에는 내가 정말 추구해야 할 인간적 자아와 싸우는 두 가지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동물적 자아, 지금 말하는 성적인 유혹과 싸움하는 자아, 또 다른 하나는 악마적 자아가 있습니다. 둘 중에 더 나쁜 것이 동물적 자아보다는 악마적 자아입니다.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냉정하고 독선적인 도덕가가 거리의 매춘부보다 훨씬 더 지옥에 가까울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이 둘 중에 어느 쪽도 되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악마적 자아. 이것을 깨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물적 욕심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이성적인 유혹을 벗어나는 것, 가정을 귀한 줄 알고 우리에게 주어진 내 아내, 내 남편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줄 알고 나만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마음속에 품으면서 이 가정을 꾸려 나갈 때 우리에게 부딪히는 이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넘어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하나님께 용서를 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사랑하는 법을 배워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귀한 뜻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순간순간 성적 유혹에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주님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내게 주신 귀한 아내, 내게 주신 귀한 남편을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임을 알고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가정에서 그리고 성적인 기쁨까지도 누릴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홀로 있는 분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이 모든 어려움에서 이겨나가는 은총도 주님께서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
행복을 위한 감탄사
어떤 부부가 아름다운 부부일까요? 인간의 역사 가운데 언제나 크고 위대한 일은 지극히 작은 것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고 <조그마한 일에도 각자의 도리를 다하는 부부>
는 아름답습니다. 때로 결혼 생활에서 고독감이 밀려올지라도 인간은 어차피 고독한 존재였고 고독에는 멋과 순결, 희생과 봉사, 꿈과 낭만이 있음을 알고 <고독의 순간을 지혜롭게 대처하는 부부>는 아름답습니다.
녹이 쇠붙이를 부패시키듯이 자기 안락과 게으름은 부부관계를 부패시킴을 알고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위해 <오늘도 수고하는 손길을 늦추지 않는 부부>도 아름답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피곤함을 느끼는데 이러한 피곤을 풀어주는 휴식처와 같은 역할을 하는 <유머와 멋을 아는 부부>도 아름다운 부부입니다. 세상 욕망이 괴롭히는 밤, 그리고 시름이 많은 밤, 밖에 나아가 밤하늘을 쳐다보며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하나님! 순결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겠습니다. 나의 남편을, 나의 아
내를 축복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시시각각 <하나님께 서로를 드리는 부부>의 모습도 진정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김소월은 그의 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려 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 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김소월은 오랜 세월에 걸쳐 밤마다 뜨는 달에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고 하며 달에 대한 그리움을 읊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부들은 결혼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서로에
대해 완전히 파악했다고 하며 서로에 대한 연모의 정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부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날마다 새롭게 체험되어지는 서로에 대한 감탄사가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아내에게, 그리고 당신의 남편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관심을 기울여 보세요. 그러면 감탄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인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성공적인 결혼 생활
의 정답은 이 감탄사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감탄사
어느 날, 미국의 한 여성 동창모임에서 누군가 물었습니다. “너희들 중에 남편만 바라보고 이제까지 정조를 지킨 사람 있니?” 그때 10명 중에 한 명만 손을 들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한 여인이 밤에 남편에게 그 얘기를 하며 자기도 손을 들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정조를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손을 안 들었어?”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부끄러워서요(I was ashamed).”
순결한 삶은 ‘부끄러운 삶’이 아니라 ‘부러운 삶’입니다. 결혼생활에는 열린 마음과 닫힌 마음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배우자에게는 마음을 활짝 열고, 유혹자에게는 마음을 철저히 닫아야 합니다. ‘모두와 더불어 살며 받드는 것’과 ‘모두와 어울려 살며 물드는 것’은 다릅니다. 식당 밥에 고춧가루가 하나만 보여도 그 밥을 거부하는 것처럼 내 영혼에 고춧가루가 하나라도 묻으면 그 영혼은 거부됩니다.
결혼은 외로운 두 척의 부서진 돛단배가 바다 한 가운데서 만나는 것입니다. 부서진 두 배가 사슬을 엮고 거친 바다를 항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상대에게 잘 묶어 더 아름다운 세계로 향하는 것이 결혼입니다. 결혼의 신비에서는 상대에게 묶일수록 더 자유가 생기고, 상대로부터 풀어질수록 더 묶이는 인생이 됩니다. 한 대상만을 향해 드려진 마음은 서로의 관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접착제입니다.
어떤 부부가 아름다운 부부일까요? 크고 위대한 일도 지극히 작은 것에서 비롯됨을 알고 ‘작은 관심을 게을리 하지 않는 부부’는 아름답습니다. 때로 고독감이 밀려와도 인간은 어차피 고독한 존재였고 고독에도 멋과 꿈과 순결과 낭만이 있음을 알고 ‘고독함을 고상함으로 승화시키는 부부’는 아름답습니다. 녹이 쇠를 부패시키듯이 게으름은 부부관계를 부패시킴을 알고 ‘이마에 맺힌 땀을 가진 부부’도 아름답습니다.
무엇보다 밤하늘을 쳐다보며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하나님! 저를 순결하게 다듬으시고 저의 반쪽을 축복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시시각각 ‘하나님께 서로를 드리는 부부’는 아름답습니다.
김소월은 노래했습니다.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려 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 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소월이 밤마다 뜨는 달에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고 했듯이 밤마다 만나는 상대에게도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부부는 더 파악하고 더 연모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날마다 새롭게 체험되어지는 서로에 대한 감탄사가 필요합니다. 사랑으로 서로를 탐험하면 감탄이 나올 것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인 줄을 정말 몰랐어요!” 그 감탄사에 성공적인 결혼생활과 행복한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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