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부터 회복될 때 어떤 역사가 나타날 것인지에 대한 묘사가 나와 있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에게 몇 가지 깊은 영적인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심판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교훈입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때에. . . . " 여기서 '그때에'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에'라는 말입니다. 그때에 어떤 역사가 벌어집니까?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1절). 그러나 악인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30장 23절). 하나님의 심판에는 이와 같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고 두려운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정말 즐거운 일입니다. 죄악된 시간과 삶을 많이 살았던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두려운 것이고, 기도의 시간, 헌신의 삶이 많았던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즐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다는 사실이 정말 희망적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기쁨과 희망이 있기 위해서는 더욱 기도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꼭 응답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 자체로 우리의 마음에 얼마나 큰 평안이 주어지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우리의 장래에 얼마나 큰 안심과 평강을 주는지 모릅니다. 기도 응답 이전에, 그러한 평강이 바로 기도와 헌신이 주는 유익입니다.
2. 성도의 광야(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교훈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 . " 압제의 칼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바로 축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대개 보면 축복으로 가기 전에 광야의 순간이 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모든 성도님들의 삶을 보면 그 사실을 절실히 느낍니다. 어떤 경우에 성도들이 새로운 각오를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옛날의 잘못된 틀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압제의 칼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와 같습니다. 그런데 칼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바로 축복의 가나안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때 광야의 순간에 처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광야의 순간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 그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2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 . " 하나님의 우리가 광야에 처할 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십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하나님! 그럴 바에야 그냥 광야 없이 안식을 주시면 안되나요?" 물론 하나님은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속성을 너무 잘 아시기에 현재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 축복을 위해 한 번 정도는 광야를 꼭 통과하는 과정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광야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고, 하나님의 인자하신 손길이 배여 있습니다. 3절 말씀이 그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 . "
2) 광야를 통해서 인간은 깨끗해지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감격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 . . . " 하나님은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뭐라 부르고 있습니까? "처녀 이스라엘아!" 어제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구절이 그렇게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고, 복음의 비밀이 들어 있고, 산 소망이 들어 있고 왜 하나님이 광야를 허락하시는지에 대한 진리가 들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냥 가나안을 주시면 모든 사람은 자기가 잘 난 줄 알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영적 처녀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 우리가 진실한 신자라면 이 축복이 어떤 축복보다 소중한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축복 받기를 원하셔서 우리에게 광야를 허락하십니다.
3) 광야는 가나안의 축복의 전주곡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 . . "
4절 말씀이 영적 처녀성의 회복의 축복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5절 말씀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너무 고상한 척 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차원의 축복도 소원하고, 받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런 차원의 포도원이 넘치는 축복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차원의 축복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 . . " 심지 않고 축복만 바라는 것!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정직한 축복이 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심는 작업을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는 것!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축복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정말 축복된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새벽에 가장 소중한 것들을 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벽의 소중한 것을 심는 만큼 세상에서도 최선을 다해 심어야 합니다. 그러한 양쪽을 겸비한 양수겸장의 삶을 살 때 극복하지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3.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6절 말씀을 보십시오.
회복의 역사를 맞이하고 파수꾼이 외칩니다. "에브라임 산에서 파숫군이 외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니라. . . " 오늘 새벽에 정말 하나님 앞에 잘 나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꼭 번성을 주셔야만 나와서야 되겠습니까? 광야가 가진 의미를 알았다면 광야의 순간에도 하나님께 나오고, 더 나아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이 파수꾼의 외침이 여러분들의 외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일어나라. 실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용기를 가지십시오.
2) 시온에 올라가라. 교회를 사랑하고, 예배를 기뻐하십시오.
3)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이 고백이 인생을 성공시키고, 가정을 성공시키고, 교회를 성공시킬 것입니다. 이 파수군의 결단과 고백이 항상 여러분들의 삶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