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인생의 축복
시편 51편 23절
< 무엇이 은혜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
가끔 보면 은혜를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병에서 낫고, 문제가 풀리고, 원하던 것을 얻는 것만 은혜인 줄 압니다. 물론 그것도 은혜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얻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선한 열매를 많이 맺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어떤 아내가 남편을 은혜 받게 하기 위해 교회로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말씀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남편은 졸기만 했습니다. 너무 속이 상해서 항상 하던 대로 남편에게 짜증을 냈습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좋은 말씀에 은혜도 못 받아요?" 그러자 남편이 "여보! 은혜 받으면 어떻게 되는데. 당신처럼 되는 것이 은혜 받은 거야! 그러면 나는 그런 은혜 안 받아!"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좋은 말씀을 들은 것을 은혜로 생각하지만 진짜 은혜는 그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이 변화되고, 자신의 생각이 변화되고, 자신의 말이 변화되고, 자신의 얼굴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귀가 즐겁고, 강단이 즐거운 만담으로 가득 차고, 걸쭉한 사투리와 농담으로 재미있게 되는 것을 은혜로 오해한다면 하나님의 진짜 은혜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학에서는 사투리를 쓰는 것도 주의하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언어도 치우치지 말아야 하고, 표준어를 써야 하는 공적인 자리에서도 사투리를 계속 쓰면 '자기 집착이 강한 목회자'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걸쭉한 사투리를 쓰면 재미있어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욕처럼 들리는 말까지 쓰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고 재미있게 된 것을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현대 사회는 쾌락과 재미를 추구하는 사회입니다. 방송국은 작품성보다 시청률을 중시합니다. 아무리 아카데미 작품상을 탔어도 재미없으면 환영받지 못합니다. 교회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교회는 재미로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재미로 따진다면 사이비 교주가 가장 재미있습니다. 매번 코미디보다 더 재미있는 쇼를 하니 참 재미있습니다. 또한 자기들만 구원받을 것처럼 말하는 달콤한 말은 어떤 쾌락보다 더 쾌락적입니다. 그러나 참 성도는 재미와 쾌락을 따르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헌신할까?"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는 재미있고 기발하고 달콤한 말씀을 듣는 것을 은혜로 생각하지 말고, 말씀대로 살고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을 은혜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100가지의 좋은 말씀을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1가지의 말씀이라도 실천하는 사람이 은혜 받은 사람이고, 평범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사람이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은혜는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
우리는 가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은혜 체험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그때 거기에만 있었겠습니까? 가끔 이런 말도 듣습니다. "은혜 체험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은혜가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삶의 곳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미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있는 은혜를 깨닫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체험하고 싶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네 높아진 마음부터 낮추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많이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은혜를 체험하고 싶다!"고 하면서 마치 은혜가 없는 것처럼 말하니 그 높아진 마음에 어떻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그래도 계속 "은혜 체험을 하고 싶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큰 시련과 고통과 병을 허락하신 뒤에 그 문제를 해결해주심으로 은혜를 체험하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은혜를 체험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은혜는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진정으로 부족한 존재인 줄 알면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작아지면 은혜는 커집니다. 자기가 극히 작아진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보다 의로운 존재인 줄 알 때, 그 사람이 정말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은혜는 이미 주어진 은혜를 깨닫고 인정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은혜를 깨닫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받은 은혜를 지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은혜를 받았다고 자랑합니다. 자기가 제일 은혜를 받은 것 같습니다. 병이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5년 후에 그 사람을 보면 그 받은 은혜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은혜는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은 은혜를 간직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은혜가 간직됩니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에게 은혜가 간직되고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은혜 체험을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은 감사를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받은 은혜와 지금도 받고 있는 은혜를 깨닫고 감사함으로 그 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는 환경이 모질고 힘들어도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감사의 문제입니다 >
문제는 "환경이 어떠냐?"의 문제가 아니라 "감사가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요새 살기가 어려워 이민을 가겠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자녀 교육을 위해서 뉴질랜드나 호주로 이민을 갑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대개 그곳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는 모습이 바람직한 모습만은 아닙니다.
유치원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고, 지켜야 할 규율도 훨씬 적고, 벌을 주는 일도 별로 없고, 재미도 있습니다. 견학도 자주 갑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그런 재미는 줄어듭니다. 지켜야 할 것도 많고, 잘못하면 벌을 받습니다. 유치원 때보다 훨씬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그래도 유치원이 좋다고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뉴질랜드나 호주에서 공부하면 스트레스가 없어서 좋아 보여도 그런 모습이 인생 전체에 좋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치열한 경쟁시대입니다. 나약한 정신을 가진 아이들은 도태되기 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창 시절에 당하는 적절한 스트레스는 인생 전체에 있어서 치열한 삶을 지속시키는 보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교육환경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민 간다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왜 뉴질랜드입니까? 선교나 직업에 대한 뚜렷한 비전과 사명이 있다면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뉴질랜드에서 한국으로 와야지, 왜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이민을 갑니까? 살기 좋은 환경이 자신의 영혼이나 자신의 미래에는 좋은 환경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옛말에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 조용히 살려고 하면 낙향해도 좋지만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려면 상경을 해야 합니다. 자녀가 치열한 경쟁시대에서 꿈과 비전을 이루게 하려면 자녀를 선진대국으로 보내야 큰 시야와 생각과 가슴을 가진 자녀가 될 수 있지, 성남시 인구의 3배밖에 안 되는 나라로 가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그래도 영어는 배우지 않느냐?"고 합니다. 물론 국제화 시대에 영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자녀 세대에는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어 조금 잘하는 것과 '넓은 가슴과 큰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을 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언어가 중요해도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실질적으로 대국적인 꿈과 비전과 사고를 가지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굳이 자녀를 유학 보내려면 미국으로 보내십시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왜 유학을 보내고, 왜 이민을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우리 나라 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유학을 보낸다! 우리 나라가 살기 힘들어서 이민을 간다!"라는 것 때문이라면 그런 유학과 이민은 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천국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민 가면 삶의 질은 떨어지고, 사회적 신분도 2-3단계 하락해서 하층민으로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삶이 어려워지면 가정생활과 부부관계에 어려움이 생길 확률이 훨씬 높아지는 것이 바로 이민생활입니다.
이민의 꿈은 가져도 좋지만 여기에서 감사하는 삶을 살고, 감사가 체질화된 사람으로 자신을 만들고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면 힘든 이민생활도 그런 대로 잘 적응하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한국 사회가 힘들어서 뚜렷한 대책 없이 이민 가는 것은 도피나 다름없고, 더 살기 힘들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민을 갈 때 나름대로 새로운 각오를 하지만, 그런 각오를 하면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사하는 사람이 되느냐?"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어디로 가든지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로 가든지 길이 막힐 것입니다.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고, 하나님의 축복도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 감사주일에 드리고 싶은 4가지 말씀 >
오늘은 우리 교회에서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인데, 오늘 다시 한번 감사를 회복하자는 의미로 다음과 같은 4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 실망보다는 감사하는 삶을 사십시오.
어떤 분은 너무 실망을 잘합니다. 실패하면 금방 실망합니다. 그러나 실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실패를 잘 극복하면 우리는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실패 때문에 우리가 겸손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실패했다고 실망하지 말고, 그 실패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실패한 일이 나중에는 성공의 보약이 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코미디언 이주일 씨가 단역으로 활동할 때, 그는 못생긴 얼굴 때문에 항상 시체역할이나 잠깐 스쳐 가는 행인 역할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사가 있는 역이 주어졌는데, 환자의 사망을 확인하는 의사역이였습니다. 난생처음 대사가 있는 역할을 받고 그는 맹렬히 연습했습니다.
드디어 방송이 있던 날, 자신의 출연 차례가 되어 무대로 나갔습니다. 이제 청진기를 환자의 가슴에 대어보고 눈꺼풀을 열어본 후에 심각한 표정으로 "운명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런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환자의 눈꺼풀을 연다는 것이 자신의 눈을 까뒤집으며 "운명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방송사고였지만 시청자들이 "너무 웃긴다"고 하니까, 오히려 그 사고로 이주일 씨가 뜰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못한 일 때문에 더 잘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당해도 지나치게 실망하지 마십시오. 실망은 반드시 절망으로 발전하지만 감사는 반드시 희망으로 발전합니다. 어떤 아내가 남편에 대해 실망해서 "나는 남편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자식이 없이는 못 살 것 같아."라고 자주 말하니까 어느 날, 정말로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실망은 우리의 삶과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지나친 실망에 빠지지 말고 감사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실망을 희망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2. 불평보다는 감사하는 삶을 사십시오.
불평은 어떤 환경도 지옥을 만듭니다. 반대로 감사는 어떤 환경도 천국을 만듭니다. 어떤 분이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에서 죄를 회개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고, 자신이 낮아지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에게 감옥은 더 이상 감옥이 아니라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불평보다는 감사하는 삶을 살면 그곳에서 천국의 삶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불평이 전혀 안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정치를 너무 못하면 정치가들에게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불평만 하지 말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지럽혀져 있다면 "누가 이렇게 했느냐!"고 따지기보다는 내가 쓰레기를 줍고 청소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면 불평과 분노보다는 나의 사명과 책임에 대한 생각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다고 그냥 불평을 쏟아내는 것은 정신이 허약하다는 증거입니다. 때로는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도 자기에게 펼쳐진 환경과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처럼 맘에 들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소모적인 불평을 그치고 내가 할 일을 잘 감당하여 아름다운 삶의 꽃을 피워내고, 신선한 공기를 자기 주변에 불어넣는 사람이 바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불평하는 말은 듣는 사람의 기쁨을 빼앗고, 그 영혼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감사하고 격려하고 칭찬하는 말 한 마디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고, 영혼을 생동감 있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하고 칭찬하는 습관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자산입니다. 이제는 불평보다는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간구보다는 감사하는 삶을 사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의 기도를 보면 감사보다는 간구가 많습니다. 항상 "하나님! 주세요!"라고만 합니다. 초신자 때에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고, 하나님께서 잘 주십니다. 그러나 신앙 연조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간구만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감사할 줄은 모르고 그저 떼만 쓰면서 달라고 합니다. 그래도 부모는 그것을 받아줍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감사하다는 말은 없고 항상 달라고 졸라댄다면 주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고 오히려 야단을 치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고, 항상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간구만 하는 성도를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날 진돗개와 똥개가 주인 얘기를 하다가 진돗개가 말했습니다. "우리 주인은 참 좋으셔! 먹을 것도 주시고, 가끔 쓰다듬어 주셔! 우리 주인은 참 좋으신 분이야! 너무나 감사해! 나는 주인이 없으면 못 살아!" 그러자 똥개는 말했습니다. "우리 주인은 내가 그렇게 좋은가 봐! 내가 멍멍 짖기만 해도 척척 다 주셔! 주인은 나 없으면 못 살아!"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은 똥개가 너무 짖기만 하니까 영양탕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진돗개는 여전히 주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진돗개처럼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더 받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자기가 당연히 받아야 되는 줄 알고, 그래도 부족해서 하나님을 채무자로 여기고 매일 달라고만 합니다. 그런 모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채무자처럼 여기고 간구만 하기보다는 항상 채무의식을 가지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더 넘치는 축복과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4. 기적보다는 감사하는 삶을 사십시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평범한 것에서 감사의 조건을 발견하는 신앙이 진짜 신앙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어떤 것도 당연히 주어진 것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총이고 선물입니다.
병이 들었다가 나으면 감사한 줄 알지만, 사실은 병에 들지 않는 것이 더 감사한 일입니다. 백혈병에서 나은 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백혈병에 들지 않은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것에서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것보다 평범한 삶이 기적임을 깨닫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요새 불의의 사고로 가까운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별한 기적의 주인공은 되지 못해도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기적만 감사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없이 지켜주시는 손길을 생각하면서 삶 자체를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친구의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폭설이 내려 아버지는 가지 말라고 하는데, 아들은 가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할 수 없이 아버지는 허락해주었습니다. 결국 어린 아들은 혼자 길을 나섰고, 쌓인 눈을 헤치고 가까스로 친구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친구 집에 들어서자 멀리서 한 남자가 조용히 뒤에서 사라졌습니다. 바로 그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이고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그 모든 사건을 다 당하게 하시면서도 늘 우리 뒤에서 지켜보시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특별히 감사할 일만 감사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고, 추수감사절에만 감사하지 말고 항상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삶은 감사가 없는 삶이고, 이 세상에서 제일 복된 삶은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삶이고, 그런 삶에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예비하며 사시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시편 51편 23절
< 무엇이 은혜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
가끔 보면 은혜를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병에서 낫고, 문제가 풀리고, 원하던 것을 얻는 것만 은혜인 줄 압니다. 물론 그것도 은혜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얻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선한 열매를 많이 맺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어떤 아내가 남편을 은혜 받게 하기 위해 교회로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말씀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남편은 졸기만 했습니다. 너무 속이 상해서 항상 하던 대로 남편에게 짜증을 냈습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좋은 말씀에 은혜도 못 받아요?" 그러자 남편이 "여보! 은혜 받으면 어떻게 되는데. 당신처럼 되는 것이 은혜 받은 거야! 그러면 나는 그런 은혜 안 받아!"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좋은 말씀을 들은 것을 은혜로 생각하지만 진짜 은혜는 그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이 변화되고, 자신의 생각이 변화되고, 자신의 말이 변화되고, 자신의 얼굴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귀가 즐겁고, 강단이 즐거운 만담으로 가득 차고, 걸쭉한 사투리와 농담으로 재미있게 되는 것을 은혜로 오해한다면 하나님의 진짜 은혜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학에서는 사투리를 쓰는 것도 주의하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언어도 치우치지 말아야 하고, 표준어를 써야 하는 공적인 자리에서도 사투리를 계속 쓰면 '자기 집착이 강한 목회자'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걸쭉한 사투리를 쓰면 재미있어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욕처럼 들리는 말까지 쓰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고 재미있게 된 것을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현대 사회는 쾌락과 재미를 추구하는 사회입니다. 방송국은 작품성보다 시청률을 중시합니다. 아무리 아카데미 작품상을 탔어도 재미없으면 환영받지 못합니다. 교회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교회는 재미로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재미로 따진다면 사이비 교주가 가장 재미있습니다. 매번 코미디보다 더 재미있는 쇼를 하니 참 재미있습니다. 또한 자기들만 구원받을 것처럼 말하는 달콤한 말은 어떤 쾌락보다 더 쾌락적입니다. 그러나 참 성도는 재미와 쾌락을 따르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헌신할까?"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는 재미있고 기발하고 달콤한 말씀을 듣는 것을 은혜로 생각하지 말고, 말씀대로 살고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을 은혜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100가지의 좋은 말씀을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1가지의 말씀이라도 실천하는 사람이 은혜 받은 사람이고, 평범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사람이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은혜는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
우리는 가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은혜 체험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그때 거기에만 있었겠습니까? 가끔 이런 말도 듣습니다. "은혜 체험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은혜가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삶의 곳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미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있는 은혜를 깨닫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체험하고 싶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네 높아진 마음부터 낮추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많이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은혜를 체험하고 싶다!"고 하면서 마치 은혜가 없는 것처럼 말하니 그 높아진 마음에 어떻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그래도 계속 "은혜 체험을 하고 싶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큰 시련과 고통과 병을 허락하신 뒤에 그 문제를 해결해주심으로 은혜를 체험하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은혜를 체험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은혜는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진정으로 부족한 존재인 줄 알면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작아지면 은혜는 커집니다. 자기가 극히 작아진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보다 의로운 존재인 줄 알 때, 그 사람이 정말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은혜는 이미 주어진 은혜를 깨닫고 인정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은혜를 깨닫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받은 은혜를 지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은혜를 받았다고 자랑합니다. 자기가 제일 은혜를 받은 것 같습니다. 병이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5년 후에 그 사람을 보면 그 받은 은혜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은혜는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은 은혜를 간직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은혜가 간직됩니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에게 은혜가 간직되고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은혜 체험을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은 감사를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받은 은혜와 지금도 받고 있는 은혜를 깨닫고 감사함으로 그 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는 환경이 모질고 힘들어도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감사의 문제입니다 >
문제는 "환경이 어떠냐?"의 문제가 아니라 "감사가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요새 살기가 어려워 이민을 가겠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자녀 교육을 위해서 뉴질랜드나 호주로 이민을 갑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대개 그곳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는 모습이 바람직한 모습만은 아닙니다.
유치원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고, 지켜야 할 규율도 훨씬 적고, 벌을 주는 일도 별로 없고, 재미도 있습니다. 견학도 자주 갑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그런 재미는 줄어듭니다. 지켜야 할 것도 많고, 잘못하면 벌을 받습니다. 유치원 때보다 훨씬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그래도 유치원이 좋다고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뉴질랜드나 호주에서 공부하면 스트레스가 없어서 좋아 보여도 그런 모습이 인생 전체에 좋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치열한 경쟁시대입니다. 나약한 정신을 가진 아이들은 도태되기 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창 시절에 당하는 적절한 스트레스는 인생 전체에 있어서 치열한 삶을 지속시키는 보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교육환경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민 간다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왜 뉴질랜드입니까? 선교나 직업에 대한 뚜렷한 비전과 사명이 있다면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뉴질랜드에서 한국으로 와야지, 왜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이민을 갑니까? 살기 좋은 환경이 자신의 영혼이나 자신의 미래에는 좋은 환경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옛말에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 조용히 살려고 하면 낙향해도 좋지만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려면 상경을 해야 합니다. 자녀가 치열한 경쟁시대에서 꿈과 비전을 이루게 하려면 자녀를 선진대국으로 보내야 큰 시야와 생각과 가슴을 가진 자녀가 될 수 있지, 성남시 인구의 3배밖에 안 되는 나라로 가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그래도 영어는 배우지 않느냐?"고 합니다. 물론 국제화 시대에 영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자녀 세대에는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어 조금 잘하는 것과 '넓은 가슴과 큰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을 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언어가 중요해도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실질적으로 대국적인 꿈과 비전과 사고를 가지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굳이 자녀를 유학 보내려면 미국으로 보내십시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왜 유학을 보내고, 왜 이민을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우리 나라 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유학을 보낸다! 우리 나라가 살기 힘들어서 이민을 간다!"라는 것 때문이라면 그런 유학과 이민은 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천국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민 가면 삶의 질은 떨어지고, 사회적 신분도 2-3단계 하락해서 하층민으로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삶이 어려워지면 가정생활과 부부관계에 어려움이 생길 확률이 훨씬 높아지는 것이 바로 이민생활입니다.
이민의 꿈은 가져도 좋지만 여기에서 감사하는 삶을 살고, 감사가 체질화된 사람으로 자신을 만들고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면 힘든 이민생활도 그런 대로 잘 적응하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한국 사회가 힘들어서 뚜렷한 대책 없이 이민 가는 것은 도피나 다름없고, 더 살기 힘들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민을 갈 때 나름대로 새로운 각오를 하지만, 그런 각오를 하면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사하는 사람이 되느냐?"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어디로 가든지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로 가든지 길이 막힐 것입니다.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고, 하나님의 축복도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 감사주일에 드리고 싶은 4가지 말씀 >
오늘은 우리 교회에서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인데, 오늘 다시 한번 감사를 회복하자는 의미로 다음과 같은 4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 실망보다는 감사하는 삶을 사십시오.
어떤 분은 너무 실망을 잘합니다. 실패하면 금방 실망합니다. 그러나 실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실패를 잘 극복하면 우리는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실패 때문에 우리가 겸손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실패했다고 실망하지 말고, 그 실패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실패한 일이 나중에는 성공의 보약이 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코미디언 이주일 씨가 단역으로 활동할 때, 그는 못생긴 얼굴 때문에 항상 시체역할이나 잠깐 스쳐 가는 행인 역할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사가 있는 역이 주어졌는데, 환자의 사망을 확인하는 의사역이였습니다. 난생처음 대사가 있는 역할을 받고 그는 맹렬히 연습했습니다.
드디어 방송이 있던 날, 자신의 출연 차례가 되어 무대로 나갔습니다. 이제 청진기를 환자의 가슴에 대어보고 눈꺼풀을 열어본 후에 심각한 표정으로 "운명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런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환자의 눈꺼풀을 연다는 것이 자신의 눈을 까뒤집으며 "운명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방송사고였지만 시청자들이 "너무 웃긴다"고 하니까, 오히려 그 사고로 이주일 씨가 뜰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못한 일 때문에 더 잘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당해도 지나치게 실망하지 마십시오. 실망은 반드시 절망으로 발전하지만 감사는 반드시 희망으로 발전합니다. 어떤 아내가 남편에 대해 실망해서 "나는 남편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자식이 없이는 못 살 것 같아."라고 자주 말하니까 어느 날, 정말로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실망은 우리의 삶과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지나친 실망에 빠지지 말고 감사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실망을 희망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2. 불평보다는 감사하는 삶을 사십시오.
불평은 어떤 환경도 지옥을 만듭니다. 반대로 감사는 어떤 환경도 천국을 만듭니다. 어떤 분이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에서 죄를 회개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고, 자신이 낮아지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에게 감옥은 더 이상 감옥이 아니라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불평보다는 감사하는 삶을 살면 그곳에서 천국의 삶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불평이 전혀 안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정치를 너무 못하면 정치가들에게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불평만 하지 말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지럽혀져 있다면 "누가 이렇게 했느냐!"고 따지기보다는 내가 쓰레기를 줍고 청소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면 불평과 분노보다는 나의 사명과 책임에 대한 생각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다고 그냥 불평을 쏟아내는 것은 정신이 허약하다는 증거입니다. 때로는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도 자기에게 펼쳐진 환경과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처럼 맘에 들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소모적인 불평을 그치고 내가 할 일을 잘 감당하여 아름다운 삶의 꽃을 피워내고, 신선한 공기를 자기 주변에 불어넣는 사람이 바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불평하는 말은 듣는 사람의 기쁨을 빼앗고, 그 영혼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감사하고 격려하고 칭찬하는 말 한 마디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고, 영혼을 생동감 있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하고 칭찬하는 습관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자산입니다. 이제는 불평보다는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간구보다는 감사하는 삶을 사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의 기도를 보면 감사보다는 간구가 많습니다. 항상 "하나님! 주세요!"라고만 합니다. 초신자 때에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고, 하나님께서 잘 주십니다. 그러나 신앙 연조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간구만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감사할 줄은 모르고 그저 떼만 쓰면서 달라고 합니다. 그래도 부모는 그것을 받아줍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감사하다는 말은 없고 항상 달라고 졸라댄다면 주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고 오히려 야단을 치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고, 항상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간구만 하는 성도를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날 진돗개와 똥개가 주인 얘기를 하다가 진돗개가 말했습니다. "우리 주인은 참 좋으셔! 먹을 것도 주시고, 가끔 쓰다듬어 주셔! 우리 주인은 참 좋으신 분이야! 너무나 감사해! 나는 주인이 없으면 못 살아!" 그러자 똥개는 말했습니다. "우리 주인은 내가 그렇게 좋은가 봐! 내가 멍멍 짖기만 해도 척척 다 주셔! 주인은 나 없으면 못 살아!"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은 똥개가 너무 짖기만 하니까 영양탕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진돗개는 여전히 주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진돗개처럼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더 받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자기가 당연히 받아야 되는 줄 알고, 그래도 부족해서 하나님을 채무자로 여기고 매일 달라고만 합니다. 그런 모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채무자처럼 여기고 간구만 하기보다는 항상 채무의식을 가지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더 넘치는 축복과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4. 기적보다는 감사하는 삶을 사십시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평범한 것에서 감사의 조건을 발견하는 신앙이 진짜 신앙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어떤 것도 당연히 주어진 것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총이고 선물입니다.
병이 들었다가 나으면 감사한 줄 알지만, 사실은 병에 들지 않는 것이 더 감사한 일입니다. 백혈병에서 나은 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백혈병에 들지 않은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것에서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것보다 평범한 삶이 기적임을 깨닫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요새 불의의 사고로 가까운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별한 기적의 주인공은 되지 못해도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기적만 감사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없이 지켜주시는 손길을 생각하면서 삶 자체를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친구의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폭설이 내려 아버지는 가지 말라고 하는데, 아들은 가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할 수 없이 아버지는 허락해주었습니다. 결국 어린 아들은 혼자 길을 나섰고, 쌓인 눈을 헤치고 가까스로 친구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친구 집에 들어서자 멀리서 한 남자가 조용히 뒤에서 사라졌습니다. 바로 그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이고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그 모든 사건을 다 당하게 하시면서도 늘 우리 뒤에서 지켜보시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특별히 감사할 일만 감사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고, 추수감사절에만 감사하지 말고 항상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삶은 감사가 없는 삶이고, 이 세상에서 제일 복된 삶은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삶이고, 그런 삶에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예비하며 사시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성 문 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136:1-7) (0) | 2006.11.18 |
---|---|
제 목 : 나는 왜 감사해야 하는가? (0) | 2006.11.18 |
추수감사]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시 136:21~26) (0) | 2006.11.18 |
[추수감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감사 (시 69:30-31) (0) | 2006.11.18 |
감사는 하나님을 춤추시게 한다 (시 50:22-23) (0) | 2006.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