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문 서

시련과 유혹을 이긴 믿음(욥기 2:1-10)

공 상희 2006. 8. 9. 15:37
시련과 유혹을 이긴 믿음(욥기 2:1-10)  

 

시련과 유혹을 이긴 믿음(욥기 2:1-10)


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 2장 1-3절은 지난 시간 생각한 욥기 1장 6-8절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사단은 다소의 사울처럼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고,” 욥을 더 어렵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기 위해 왔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이 욥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욥을 더 미워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욥을 괴롭히고,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게 하며, 하나님과 욥 사이를 이간하고 불화케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습니다.


사실 욥이 당한 어려움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욥이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섰다면, 마귀는 자기가 실패를 인정하고 물러서야 마땅할 것인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그들의 못된 행위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그들 스스로가 파 놓은 함정에 빠졌다고 해도 그들 나름대로 또 변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단이 그가 잘못한 사실을 시인하면서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 것을 기대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기는커녕 사단은 오히려 욥을 더욱 대적할 의도를 품고 나왔습니다. 마귀는 이렇게 악합니다. 그래서 재판장이신 하나님 자신이 욥에 대해서 변호를 합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세요.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하나님은 욥의 훌륭한 점을 더해 주었습니다. 욥은 그의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저주하는 대신, 오히려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믿음이 더욱 필요한 때라는 것을 알고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욥은 형통할 때나 곤경에 처할 때나 한결 같이 믿음을 지켰습니다. 아니, 오히려 어려운 때 그의 믿음이 더 커졌습니다.

알곡과 쭉정이는 키질을 해 보아야 압니다. 까불어 대고 바람을 불게 하면, 쭉정이는 소리치며 멀리멀리 달아나지만 알곡은 키질하는 사람의 가슴으로 파고듭니다. 평안할 때와 모든 것이 잘 될 때는 누가 예수를 신실하게 믿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판가름이 납니다.


정말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고후 4:8-9). 사람이나 마귀가 우리의 재판장이 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옳든 그르든 우리를 망하게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마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지조를 지킨 욥을 칭찬했습니다.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이처럼 욥의 믿음의 시련은 “칭찬과 영광”을 얻기에 합당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6-7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영어 성경 번역에 보면 “오히려”란 말 대신에 “여전히”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욥은 연속적으로 가중된 혹독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본연의 태도를 지켰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단은 욥에게서 그의 성실성을 앗아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것을 계속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신실하고 경건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자신의 성실함을 지켜 나갑니다.

초대교회 때 화형대에 올라간 한 순교자는 “이제라도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유혹을 받았을 때 “만일에 당신이 나의 영혼을 정말 사랑한다면 내게 그러한 유혹을 하지 마시오”하고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는 그 당시 시련을 당하고 있던 성도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굳게 지킬 것을 권면하고 이를 위한 용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서 쓴 편지입니다.

3장 14절에서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하고, 4장 14절에는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10장 23절에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 10장 35절에는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시련 중에 있는 그의 백성의 태도와 행위에 동정심을 가지시고 주의 깊게 감찰하십니다. 시련 중에 있는 그의 백성을 당장 건져내지 아니하시고, 그가 그 고난과 시련을 훌륭히 견디어 낼 때 이를 인정해 주십니다.

세네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악하고 고통스런 때를 잘 견디어 내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사단이 지난번의 시도가 실패하자 어떻게 변명했습니까? 본문 4절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했습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라는 말은 그 당시의 격언적인 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강하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희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사단의 욥에 대한 고발인데, 욥은 이처럼 모든 재산을 다 잃고 그의 10남매의 자녀를 다 잃었어도 자기가 건재하니 견딜 수 있다고 하면서, 욥은 이렇게 주위에 있는 사람이나 자녀에게까지도 무심하고 자기만 아는 사람이라는 고발입니다. 이렇게 사단은 욥이란 사람을 이기적이며 그 자신의 안위와 안전 이외에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으로 표현했습니다.


인간이 자기 보존을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본능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기 보존이라는 것은 이차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인, 복음 전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그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말했습니다(행 20:24).

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다니엘을 보세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보세요. 기독교 박해 때 수많은 남녀 그리스도인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죽음을 면치 아니했습니다(히 11 :35).


그런데 이 간악한 사단의 고발을 들어보세요. 5절 말씀에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육신의 날카로운 고통과 병이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생각을 초조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우리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육신의 가시를 참기 위해 많은 수고를 했고 주님께로부터의 특별한 은총이 없이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단이 욥에게 이러한 시련을 주도록 허락했습니다. 6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을 해하지 말지니라” 하셨습니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네가 행할 수 있는 가장 악한 일을 해 봐라. 그러나 한 가지 단서와 제한이 있다.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라. 그를 마음껏 괴롭히기는 하지만 죽이지는 말라.” 욥은 말할 수 없는 시련을 겪어야 했지만 그의 생명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으르렁대는 사자들을 묶어 두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벌써 삼킨 바가 되었을 것입니다.


욥이 당한 시련을 보세요. 7절 말씀에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고 합니다. 사단은 이처럼 괴롭히는 자로 그 다음엔 유혹하는 자로서 욥에게 역사했습니다.

사단은 먼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혹하여 죄로 끌어들인 후에, 그들을 괴롭게 함으로써 멸망으로 이끕니다. 그런데 욥의 경우는 먼저 환난을 주고 그를 괴롭힌 다음, 그 환난의 영향을 받도록 유혹했습니다. 사단이 노렸던 것은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늙은 뱀은 우리 인류의 조상을 희롱하던 바로 그 수법으로 욥과 하나님 사이가 벌어지도록 그를 유혹하며 그의 순전함을 빼앗으려고 욥을 내려치고 있습니다.


사단은 욥을 쳐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의 온 몸에 악창이 나게 하였습니다. 무슨 병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성한 곳이 하나 없이 창질이 생겼습니다. 쓰리고, 아프고, 저리고, 가렵고,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본문 8절에 보니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했습니다.

“재 가운데 앉는 것”은 슬픔을 뜻합니다. 굴욕의 징표였습니다. 욥이 당한 재난은 그에게 수치를 가중시켰습니다.

건강하였는데 갑자기 감기처럼 몸이 아파서 처음에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지 않다가, 여러 날이 지나도 차도가 없어서 병원에 갔더니 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어떤 분이 있으십니다.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살은 빠져 피골이 상접하게 되니, 자기의 고통받는 것이나 못쓰게 된 외양을 남에게 보이기가 싫어서 면회를 사절하는 분도 계십니다.

몸이 정말 어려운 병에 걸리게 되면 수치를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하는 한심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그러나 봅니다.


욥은 이러한 질병 가운데서 이상하게 처신했습니다. 그는 상처를 치료하기는 커녕 깨어진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가려운 몸을 긁고 있습니다.

사람이 병 중에서 고통 당하고 있을 때 자상하고 세심한 간호를 받는다면 어느 정도의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형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의 자녀들과 종들은 다 죽었습니다. 아내가 돌봐 주어야 했는데 상상 밖으로 너무 불친절했습니다. 더구나 그가 번성하며 평안하게 지낼 때 그의 도움을 받은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욥이 이제 더 어떻게 할 수 없는 자리에 이른 것을 보고는 가까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가 모른 체 멀리하고 말았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욥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 그 아내가 돌봐 주었으면 욥에게 상당한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짐작이지만, 욥은 본래 부유한 사람이었고 욥의 아내 역시 부유한 집의 딸로서 욥에게 시집와서 고생이란 것은 전혀 모르고 지내다가 이렇게 갑자기 환난이 밀어닥치게 되니까, 세상이 그저 평안하게만 사는 줄 알았었는데 어떻게 적응할 수 없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운 생각도 들고 당황하게도 되고 원망스러운 생각도 들었고, 또 본래 믿음이 별로 없던 여인이었으니까 남편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은 고사하고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망령된 말을 하게 되었다는 주석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이 말에는 세 가지 유혹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에 대한 유혹, 하나님을 모독하는 데 대한 유혹, 그리고 좌절과 절망에 대한 유혹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이 말은 “당신을 그처럼 혹독하게 대하는 하나님을 포기하고 그와의 관계를 끊으시오”하는 말입니다. 욥의 아내는 사단의 편에 섰습니다. 사단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욥을 충동질했습니다.

사단의 과업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께 대항하고 그를 섬기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큰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약점을 틈타서 사단은 우리에게 강한 유혹의 손길을 뻗칩니다. 그리고 가장 거룩한 성도들은 가장 무섭고 가장 큰 유혹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섰다고 하는 사람들은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욥의 살에는 구더기가 생기고 고름이 흐르고 긁으면 피가 나고 그 처참한 처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욥의 고생은 거지 나사로보다 더했다고 했습니다. 나사로는 개가 와서 헌 데를 핥아 주기라도 했는데 욥은 그것마저 없어서 자기 손으로 기왓장을 들고 긁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있으면서도 욥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말에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뭐, 하나님을 욕하라고?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운 일이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욥은 매우 온화한 태도로 그의 아내와 사리를 따졌고, 그의 아내가 그에게 불친절했을 때에도 마음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라고 할 때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불쾌했습니다. 그래서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고 했습니다.

욥이 아내를 “어리석은 여자”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소치이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 조급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께 대하여 화를 내는 것은 가장 큰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발뒤꿈치로 가시채를 차는 어리석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은 복과 재앙이 서로 대조적인 것이기는 해도 서로 반대되는 근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복에 대해서 감사해야 하고 그 재앙에 대해서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욥은 재앙이란 참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재앙을 받지 않겠느냐?” 왜요? 재앙 없이 너무 형통하기만 하면 “너무 자고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육신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도리어 크게 그 가시로 인하여 기뻐했습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시련과 고난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사랑의 징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우리에게 주는 고통의 막대기에 입을 맞추고 그 막대기를 들고 있는 손에 입을 맞추어야만 합니다.

욥은 모든 정복자보다 위대한 정복자였습니다. 그는 땅의 영웅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영웅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은 큰 재난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로부터 조롱과 유혹을 받았습니다.

욥은 네 가지 고통을 당했는데, 재난으로 많은 재산을 잃은 고통, 귀한 자녀를 일시에 잃은 고통, 몸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그 아내의 비난으로 인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욥은 외적인 고난뿐만 아니라 내적인 고난도 감수해야 했는데, 내적인 고난이 외적인 고난보다 더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정신은 육체적 질병과 고통을 견디어 냅니다. 그러나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잠언 18장 14절에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했습니다.


욥은 이러한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조그마한 의혹도 품지 않았고 어떤 불평도 토로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유혹을 받았으나 유혹에 저항했으며 이겼습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한 자의 성품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시련 가운데서도 “말에 실수가 없는 자”임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어떤 시련이 닥친다고 해도 욥처럼 믿음으로 이기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