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낮은 데로 임하소서 -안요한 **
이 글은 [빛과 소금] 1992년 4월호에 실렸던 안요한 목사님의 간증문입니다. 영화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인 안요한 목사님은 현재 '새빛맹인선교회'를 이끄시면서 시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 및 재활활동을 전개하시고 계십니다.
저는 안요한 목사님을 직접 뵌 적도 없고 '새빛맹인선교회'와 관련도 없지만 아래 간증문을 3회에 걸쳐서 올리고자 합니다. 성령님께서 많은
분들에게 감동을 주셔서 기도와 물질의 후원이 끊이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 김정수(jesus153)
책과 영화를 통해 제 간증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지만 이미 오래 된 일이라 이젠 저를 모르는 사람도 많아요. [낮은 데로 임하소서]가 출간된 지 벌써 10년이 넘었죠. 다녀보면 제 신앙간증을 새롭게 듣는 분들이 꽤 있거든요. 비록 책과 영화를 통해 소개는 되었지만 예수를 만나 새 삶을 시작했던 그때부터 다시 간단히 말씀을 드리지요.
* 뒤바뀌어진 인생
제 아버님은 본래 신앙인이 아니었어요. 세상적으로 사시던 분인데 늦게 하나님을 만나 모든 세상일을 정돈하고 신학을 공부하셨죠. 그때 제가 태어났어요.(1939년 평남 순천) 그런데 아버님은 저를 낳기도 전에 미리 제 이름을 지어놨죠.
아들을 주시면 주의 종으로 바치리라고 믿고 기도하셨는데 기도제목대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요한이라 부른 겁니다. 그런데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이 아들이 반항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저는 하나님이 싫었어요.
다른 애들은 아버지의 직장이 자기의 생활과 관계가 없었지만 저는 아버지가 목사면 그 자녀들도 모두 목사처럼 행동해야 할 것 같은 그 압박이 싫었거든요. 또 개척교회를 하면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생활에 간섭받는, 뭐 이런 가난과 속박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주일날 교회 앞에다 써붙였죠.
"하나님은 없느니라 - 안요한복음 1장 1절 말씀"
어머니는 저 때문에 말할 수 없이 고생하셨어요. 한번은 논 저수지로 나를 끌고 가서 어머니 다리와 내 다리를 끈으로 묶고는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빠져 죽는 게 낫겠다면서 날 잡아 끌었죠. 그때 난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
"어머니, 나는 하나님이 싫어요. 하나님이 밉지, 나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그때 돈으로 쌀 서말 주는 것 가지고 열 식구를 먹여 살리던 어머니, 사실 나는 우리 어머니를 가장 훌륭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 다음에 반드시 돈을 많이 벌어 우리 어머니를 호강시켜드릴 거라고 다짐하고 있었거든요.
그 후 외국어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미 국방성 외국어 연구원, 외국어 교관으로 발탁됐죠. 상당히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합격한 거예요. 이젠 어릴 때 꿈꾸던 대로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된거죠.
그래서 출국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때 제 나이가 서른 일곱이었고 이미 결혼을 해서 두 딸이 있었어요. 이제 살림을 정리하고 떠날 준비를 다 마쳤는데 갑자기 눈이 충혈이 되더니 새까만 먹구름 같은 것이 눈을 가리더군요. 그때의 좌절이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집안에 눈이 나쁘거나 안질이 있던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눈이 안 보이면서 어둠에 갇혀버렸고 동시에 내 삶도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좋다는 것은 뭘 안 해봤겠어요. 엄청난 치료와 고통을 받았지만 결국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한번도 맹인의 고통 따윈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내가 바로 맹인이 됐다는 것을 알게 된거죠. 이렇게 장님이 되고 나니 아이들은 밖에서 놀림을 받아 매일 울고 들어오죠, 돈은 다 날리고 점점 찾아오는 사람들도 발을 끊더군요.
고독이 밀려오고 눈물은 빗물처럼 쏟아지는데 가족들 앞에서 울 수도 없고, 그때는 아무튼 비 오는 날이 제일 좋았어요. 터져 나오는 감정을 감출 길이 없었기 때문에 비 오는 날은 밖에 나가 지치도록 울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친지들은 거의 제 곁을 떠나가고 마침내는 제 집사람마저 나를 떠나고 말았어요. 한 가정을 버리고 떠나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아내를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자식과 부인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말았지요.
그러니 이제 무슨 소망으로 살겠어요. 앞은 캄캄하고 주위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생의 밑바닥을 헤매다가 몇 번씩이나 자살을 기도했어요. 그렇게 죽음을 몸부림치면서 지치고 지친 상황 가운데 하루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아주 놀라운 광채가 내 몸을 둘러쌌고 그 속에서 들려온 말씀이 성경 320페이지였습니다. 여호수아 1장 말씀인데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으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세상 사람들이 다 떠나갔는데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겠다는 말씀이었어요.
(주: 제가 들은 바로는 당시 안요한 목사님께서는 자살을 하려고 줄을 매어 달고 의자 위에 올라가서 목을 걸어놓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요한아..."하고 부르시면서 "성경 320페이지를 보아라"하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래서 무작정 밖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성경 320페이지를 읽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320페이지에는 여호수아 1장 말씀이 기록된 곳입니다. - 옮겨 쓴 이)
"아, 당신은 살아 계셨군요. 살아 계신 하나님!" 하고 외쳐 부를 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앞에 어찌나 부끄러운지. 그 순간 가족들마저도 다 버리고 떠난, 나 같은 죄인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벌떡 일어나서 신앙고백을 하고 부른 찬양이 "세상의 친구들은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시는 이 오직 예수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천지는 버려도 날 버리지 않네"였죠. 이 찬송은 이후 제가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 어려움 속에서 만난 이웃들
그러나 죽음을 떨쳐버리고 막상 일어나긴 했지만 눈이 안 보이니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있나요, 갈 곳이 있나요. 하루는 비가 막 쏟아져 옷은 비에 젖고 앉을 자리조차 없는데 저벅저벅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그렇게 부러운 수가 없더군요.
길 가다가 아이들 소리가 나면 우리 아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건지, 살았을까 죽었을까 궁금하고, 뭐 이런 생각들이 길바닥 생활을 하면서도 제 마음을 울렸어요. 피가 거꾸로 솟는 낙심과 좌절에 빠져 하루에도 수백번 죽고 싶은 마음이었죠.
그러나 그때는 생에 애착이 있어 안 죽은 것이 아니라 이 '말씀' 때문에 못 죽은 거예요.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으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이 들려주신 하나님 음성 때문에 생을 버리지 못했고 그렇게 길바닥을 전전긍긍한 겁니다.
주로 있던 장소가 공원 벤치들, 역 대합실의 의자들... 그런 곳이었어요. 거기엔 구두닦이, 넝마주이, 껌팔이 애들, 무작정 상경한 사람 등 갈 곳 없이 머무는 노숙자들이 많아 그들 속에서 도움을 받고 살았죠.
그들이 화장실 가는 것도 도와주고 먹을 것도 손에 쥐어주고 또 시장 아주머니들은 팔다 남은 음식들을 주기도 하고 그렇게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게 되었어요.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이 뭔가 깨닫게 됐습니다.
구두닦이 아이들이 책을 늘 손에 들고 다니는데 어린것들이 얼마나 배우고 싶으면 저렇게 항상 책을 손에 들고 다닐까 싶었어요. 그들을 대하면서 '내 눈이 온전할 때 나는 한번도 남을 위해서 살지 못했으니 이제 나의 남은 생은 비록 눈은 안 보이지만 남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살게 하옵소서'
이것이 내 기도의 제목이 되었고, 하나님이 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는지 깨닫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 후 재활을 시작했지요. 우리 애들에게 -여기서 말하는 애들이란 함께 노숙하던 구두닦이 소년 등을 말하는 거예요- 이끌려 다니면서 점자를 배우기 시작한 겁니다.
점자라는 게 손가락이 차가우면 감각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이 입김으로 녹여주기도 하고, 감각이 퇴화하던 나이라 시멘트 바닥에 손끝을 긁어 피가 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때 극동방송 영어프로를 많이 들었는데 거기서 알려주는 선교단체들의 이름과 주소를 모두 적어뒀죠.
재활을 위해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때 미국의 한 선교단체와 목사님을 연결시켜 주셨고 마침내 저는 다시금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됐어요. 제가 1975년도에 실명을 했으니 1년만인 1976년도에 한국신학대학에 편입을 한 겁니다.
하지만 책이 하나 있나요, 기숙사비가 있나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저를 하나님은 소외된 사람들을 통해 도우셨습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아이들이 카드판매도 해주고 자기 용돈 생기면 모아서 주곤 했죠. 집이 없었기 때문에 잠도 그 애들과 함께 다방이나 건물 출입구, 공원 등에서 자면서 그렇게 바깥생활을 하는 가운데 신학공부를 무사히 마쳤어요.
* 새빛선교회를 시작
그리고 졸업 후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야간학교입니다. 마음에 약속했던 대로, 어려운 중에서 나를 도와준 그들에게 배움의 길을 주고 싶었던 겁니다. 미아동에다 애들과 힘을 모아 세평반짜리 방을 하나 구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같이 모여 공부를 시작했어요.
아이들이 불러주는 것을 점자로 찍어 책을 만들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그 애들을 가르쳤지요. 국민학교 과정부터 시작해서 참 피눈물나는 일도 많았지만 오직 우리의 힘은 '사랑'이었어요. 정말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눈물을 닦아주고 상처를 감싸고 서로 먹여주고...
이 세상은 비록 냉정한 곳일지라도 거기는 참 뜨거웠어요. 그렇게 해서 현재까지 약 830 명 가량 검정고시에 합격해, 대학도 가고 신학교도 가고 또 결혼해서 아들딸 낳은 사람도 많아요. 하나님 때문에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그들은 부족한 내 생애에 큰 보람을 느끼게 했죠.
그 무렵 [점자새빛]이라는, 맹인들을 위한 유일한 신앙잡지를 인수했어요. 한국 맹인들에게 무료로 보급하는 월간지였는데 후원처가 떨어지고 발행이 어렵게 되자 제가 맡게 된 겁니다. 이것을 지금도 발행하고 있지만 기사를 작성해서 편집하고 출판을 한다는 게 참 어렵습니다.
(주: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계간 신앙교양잡지 [새빛]은 국내외 약 2,000여명이 구독을 희망하고 있으나 예산문제로 인하여 현재 750부 정도만 제작보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참고로 국내 시작장애인 중 점자판독이 가능한 사람은 약 2만명 가량 된다고 합니다. - 옮겨 쓴 이)
1979년도 당시 영수증 모금이 있었어요. 그것을 모으면 약간의 보상금을 주었죠. 그때 그 돈을 모아 [새빛]을 발행했었는데 아마 지금 [새빛]을 짠다면 피가 뚝뚝 떨어질 겁니다. 눈감고 이곳저곳 다니면서 영수증을 모은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죠.
발바닥에 물집 생기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길에 쓰러진 적이 한두번 아니고 돌부리에 걸려 코가 깨지기도 하고, 정말 [새빛]은 피로써 만들어온 책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발행해 오고 있지요. [새빛] 발행과 함께, 1980년도에 또 하나 시작한 것이 '새빛맹인교회'입니다.
대부분 맹인들이 저처럼 가정에 파탄이 생겼다거나, 형제 친구들을 잃고 갈 곳이 없어요. 그래서 이분들의 영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교회가 세워졌는데 우리 교회는 일반 교회와 달라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어요.
저와 같은 중도실명자들이 많기 때문에 영적 문제 뿐 아니라 그들의 생활까지 보호해줘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동적으로 생긴 것이 '새빛맹인재활원'이예요. 우선 급한 사람부터 숙소를 마련해서 재활교육을 시작했죠.
맹인들의 의식주를 돌보면서 점자지도와 특수프로그램을 진행해 나갔습니다. 안마나 침술, 또 학력미달인 사람들은 야학교를 보낸다든지 일반대학, 신학교를 보내는 등 여러 가지 재활교육을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맹인들이니 대학교육이 얼마나 어렵겠어요. 책을 못 보니까 녹음을 해야 되고 점자책도 만들어줘야 하고 등록금도 대야 하는데 그 뒷바라지도 엄청났죠. 마침 그 무렵 [낮은 데로 임하소서] 책과 영화가 나왔어요.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고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대신 가서 영적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것은 참 좋았지만 그 때문에 오는 어려움도 있었어요. '그 목사님은 그렇게 책과 영화가 베스트가 되고 집회를 많이 다니는 유명한 목사니까 수많은 단체들이 도와줄 거야'라고들 생각해서 실제 도와주는 분이 별로 없었던 겁니다.
도리어 "목사님은 많은 단체에서 도와주실테니 우리를 좀 도와주세요"하며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였어요. 나는 내가 만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걸 증거하는 목사이지 사회사업가가 아닌데..., 참 이런 일이 덕이 안되더군요.
그러한 오해와 편견이 경영하는 데 적잖은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그래도 제게 위로를 준 것은 매주일 예배시간이었지요. 그들이 그렇게 기뻐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찬송 부르는 모습...
세상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그들, 버림받고 갈 곳 없고 어둠 속에서 사는 게 얼마나 불편한데 교회 한번 오기 위해 부딪히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뼈가 부러지기도 하고 긴장을 해서 땀에 흠뻑 젖기도 하고...,
그렇게 힘들게 만나서도 그토록 기쁘게 찬양드리는 모습을 대할 때 저는 새 힘을 얻었습니다. 칠흙같은 어둠을 뚫고 어려움 중에 와서도 그토록 기쁜 찬송을 부르는 것은 오직 예수님 때문이었죠.
한국에 15만 맹인들이 있는데,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해 깊은 좌절과 절망 속에 허덕이는 수많은 맹인들에게도 예수 때문에 생기는 저런 기쁨을 찾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편견과 오해를 받는 일에 마음이 좁아져 가지고 실망하고 좌절할 때가 아니다. 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이 맹인 전도에 용기도 주시고 힘도 주소서. 그리고 맹인 전도하는 일에 후원자도 많이 주시고 능력도 주셔서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라고 기도했지요.
그러면서 우리 성도들이 찬양하는 모습에 제 자신을 회개하고 다시 용기를 얻어 일어났던 기억이 나는군요. 이렇게 해서 우리 기관이 만들어지고 또 운영돼오고 있는데 전체를 통틀어 '새빛선교회'라고 부릅니다.
그 안에 야간학교, 점자새빛, 새빛 맹인교회, 새빛맹인재활원 등 크게 네 파트로 나눠져 있죠. 그렇게 15년간 지켜오고 있는데 돌아보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눈물겨운 일도 많았고 그야말로 한 걸음씩 하나님이 인도하신 거지요.
*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처음에 미아리에서 시작할 때 고은아 집사님이 건물을 얻어주셨어요. 그때가 1980년도쯤 되는데 그때 돈으로 1,500만원을 주셔서 예배 장소가 마련된 거예요. 거기까지가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마지막 배경입니다.
그런데 그 예배당 전세등기를 잘못해 그만 사기를 당했습니다. 그래 돈 한푼 못 받고 쫓겨나게 되어 상당한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떤 장애자 부모를 만나게 됐어요. 아주 가난한 분이었는데 장애자인 아들을 위해 18년간 모았던, 그때 돈으로 1억원을 우리의 딱한 사정을 알고 헌금해주신 거예요.
하나님은 항상 그렇게 서로 어려운 사람을 통해 저를 도우시더군요. 그래서 그 돈을 가지고 서울 시내 천지 사방을 다녔지요. 제가 또 오해받기 쉬운 게 뭐냐면 '어 방배동이네. 부자동네잖아?'하고 사정 모르는 소리를 많이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고 싼 곳 변두리를 찾아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다가 결국 이곳 낡은 1층 짜리 건물을 사게 된 거예요. 당시는 방배동도 개발이 안된 가난한 지역이었죠. 여기가 원래는 강남지구 불교 포교원 건물이었어요.
어찌나 수리를 안했는지 썩어 내려가 아무도 사지 않는 건물을, 5천만원을 은행에서 융자해 1억5천에 계약을 했죠. 돈이 모자라니 공사는 못하고 대충 수리해서 입주는 했는데 한쪽으로는 우리 사업을 유지해야죠, 하여튼 굉장히 바빴습니다.
1986년도에 이사를 와서 한 4년만에야 빚을 다 갚았어요. 그래서 이제는 우리 일을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했더니 웬걸, 1990년도에는 비가 또 어찌나 많이 왔는지 건물이 워낙 낡아 조금씩 물이 새기 시작하더니만 결국은 한쪽이 무너져내렸어요.
교인들이 크게 다칠뻔 했죠. 한쪽 구석이 무너지는데 이걸 어떡합니까? 남자들은 저쪽 개천 옆에, 여자들은 옆 건물 지하에 싼 방을 얻어 옮기고, 예배실은 예배실대로 또 지하실을 하나 얻고 사무실은 사무실대로 따로, 이래 가지고 풍비박산이 난 겁니다.
급한대로 여기저기 흩어서 옮겨 놓긴 했는데 그렇게 흩어진 채로 살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것을 어떡하나, 정말 앞이 캄캄하고 이젠 몸과 정신도 지칠대로 지쳐 아무런 대책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고민고민하다가 결국 이곳 한국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건강한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하겠지. 큰 교회도 많고 신자들도 많으니까. 나는 너무나 힘이 부쳐 더 이상 이 식구들을 돌볼 수가 없다. 하나님도 참 너무하시다. 외국으로 도망가버리자. 그리고 교포 교회에서 목회나 하고 다시는 골치 아프게 살지 말자.'
그렇게 결심을 하고는 부산으로 잠시 떠났습니다. 그런데 해운대 모래사장을 걸을 때 아이들의 노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모래를 토닥토닥 손에 얹으며 부르던 노래,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께 새집 다오."
눈이 튀어나온 두꺼비한테 헌집 줄께 새집 달라고 하는 아이들 소리가 그 순간 내 마음을 찔렀습니다. '내가 소위 목사인데 전능한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내어놓지 못하고 구하지 못했으니 내 믿음이 얼마나 작은가. 내가 하나님을 두꺼비만도 못하게 여겼구나' 생각하니 어찌나 부끄러운지 이 죄인을 용서해달라고 눈물로 회개했어요.
그리고 교인들 앞에 다시 서서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부끄러운 목사다. 내가 그렇게 믿음이 적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 하나님을 건축위원장으로 세우고 우리 다 건축위원이 되는 거다. '오직 믿음으로' 기도할 때 여리고성이 무너지지 않았는가. 우리 다 함께 기도하자" 외치면서 우리는 다시 일어나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맹인들이 떠나지 않고 다시 눌어 앉는다는 소식에 몹시 못마땅해 했죠. 제발 딴 곳으로 가달라고 수없이 항의들을 했지만 이미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었어요. 우리의 소식을 전해들은 한 성도는 장사해서 남은 수익금을 전해주기도 했고 누구보다도 국민학교 아이들이 돼지저금통을 모아 가장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 20만원 받는 개척교회 전도사 사모가 그 월급을 온전히 보내고, 뭐 그런 식으로 방황하던 시절이나 교회를 세울 때나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아진 2억5천만원의 뜨거운 사랑의 모금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현재 1억5천만월의 빚이 남았죠.
우리에게 2억5천이라 돈은 정상인들의 25조원보다 더 큰돈이고, 나머지 빚도 우리에겐 엄청난 액수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운영하시고 저는 이를 위해 심부름을 할 뿐입니다.
주로 간증집회를 많이 다니고 기업체 강연이나 사회단체 등을 많이 다니고 있어요. 한 달에 30회 내지 50회를 다니는데 이것이 많은 도움이 돼요. 가끔씩 회원들이 가입해주기도 하지만 거의 비정기적 회원들이고 일정 금액이 정해져 있지 않아요.
대부분 어려운 사람들이 사랑을 모아서 보내주는 것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우리 자체 예산이란 전혀 없답니다. 한 달에 네 번 모이니 헌금이래야 얼마 안되죠. 현재 우리 교인수는 맹인이 한 70여명 됩니다. 가르치고 봉사하는 사람이 열댓명 가량, 장애자 가정이 세 가정, 그게 다예요.
맹인들의 연령이 20대에서 50대 사이로 대개 이혼당한 부부이거나 집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라 90%가 가정이 없는 홀몸이죠. 그중 한 30명은 우리 재활원에서 수용하고 있지만, 방이 모자라 나머지는 동서남북 흩어져 있는데 우리 생활시설이 넓어지면 다 모셔야 됩니다.
새로 지은 건물은 5층이예요. 1층은 주방과 주차장이고, 2층엔 사무실과 점자인쇄 시설이 있어요. 여기서 [점자새빛]을 발행합니다. 3층엔 야간학교 및 재활교육실이 있어 안마, 침술, 점자, 타자, 기초재활반, 맹인교육, 점자제작 등 모든 재활시설을 갖추고 있고, 4,5층은 각각 남녀숙소로, 5층은 부분적으로 나눠 선교회 활동을 위해 쓰고 있어요.
새빛노래선교단, 핸드벨팀 등 이들 선교단은 열심히 연습해서 여러 곳을 다니며 선교를 하죠. 그러나 아직도 재활교육시설이 거의 미흡한 상태라 점자타자기, 점자복사기 등 특수시설 확보를 위해 기도하고 있고 또 현상유지도 해나가야 돼요.
한 달에 쌀 400킬로를 먹는데 다 부식비 및 재활 뒷받침이 얼마나 많이 소요되는지 모릅니다. 사실 이러한 경영면이 무척 어려운데 항상 감사하다고만 웃고 다니다보니 실은 이러한 어려운 사정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제일 어려운 일이 살림살이예요.
매달 어떻게 이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할지 그것이 가장 골치 아픈 숙제인데, 우리의 살림은 매달 '징검다리'입니다. 지금 3월이지만 저희는 3월 예산이란 게 미리 책정되어 있질 않아요. 하나님은 한꺼번에 주시지 않고 그때 그때마다 꾸려 나가시는 것을 15년 동안 체험해 오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징검다리 축복이다" 그렇게 말해요. 내 앞에 3월이라는 물이 찰랑 찰랑거릴 때 그 물에 발을 디디면 하나님이 싹 다리를 갖다 놔줍니다. 15년을 그런 식으로 건너왔습니다. 시초엔 직원들이나 우리 식구들 가슴이 조마조마 했었죠.
저도 사실 처음엔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걱정도 되고 그랬는데 그것도 처음 1년뿐이었지 항상 하나님의 한결같은 은혜를 체험하고 살다보니 이제는 좀 대담해지더라구요. 그래서 우리 직원들은 기도할 때 우스갯소리처럼 그러죠.
"하나님 아버지 적당히 꼼꼼하시옵소서."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거든요. 여호수아가 요단강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야, 너 오늘 요단강 건너는 거다" 했을 때 뭐 다리를 놔준 것도 아니고 또 육지가 드러난 것도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여호수아의 믿음을 보세요.
"자, 하나님이 가라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나를 따르라. 요단강을 향해서 앞으로!" 그들이 갔지요? "오른발이 닿은즉 하나님이 은혜로 밀어 주셔서 강을 건너게 해주었다..." 바로 그거예요. 가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고 붙잡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갈 뿐이예요. 신앙은 모험이거든요. 믿음으로 가는 것, 붙잡는 하나님. 그 관계 속에서 지금까지 지켜주셨으니 지금도 우리 식구들은 모두 가는 거예요. "지금, 다 나를 따르라. 또 4월이 왔다. 4월이란 강에 또 한발을 내디딜테니까 가자. 따라오너라."
그렇게 다 따라오면 하나님은 우리가 갈 수 있도록 은혜로 다 밀어주세요. 어떤 분을 통해서라도. 1년 예산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달 그달 살죠. 돈이 들어오는 대로 생활해나가는 거예요. 저희들은 회원도 정기적으로 관리하고 있지 않아요.
누구든지 아무 때나 보내고 싶을 때 보내요. 은혜로 시작한 것이니까 은혜로 끝나기를 원하는 겁니다. 믿음으로 나가는 것, 저는 그것이 좋습니다. 행정조직과 같은 어떤 구속력을 가지고 일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무슨 팜플랫이라든가 홍보시스템이라든가 이런 게 없었는데 "어휴, 목사님 그래도 목사님을 누구에게 소개하려니까 주보밖에 없잖아요"하면서 주위 사람들이 답답해 하다군요.
사실 주보가 제일 진실하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를 돕는 분들에게 주보만 보내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도 주위에서 답답해하기에 [새빛요람]이라는 걸 하나 만들었지요. 그 안에 후원을 위한 쪽지를 하나 넣긴 했는데 뭐 그것도 한 달에 한 두세장 들어오나 그렇습니다.
사실 돕는 기관이 너무 방대하고 복잡해도 문제가 생겨요. 교만해지기 쉽거든요. 행정이 두꺼워지다보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조직 하다가 말아요. 그래서 저는 큰 것은 좋아하지 않아요. 작지만 알차게 질적으로, 이분들을 맹인답게 돌보고 싶어서입니다.
숫자만 많은 것보다 단 한 명이라도 성심껏 보살펴서 그분들에게 필요한 은혜로 채워주고 구원받게 해주는 게 제게 가장 큰 소망입니다. 제일 중요한 게 천국가게 해주는 것 아닙니까?
* 내 생애의 가장 큰 기쁨
물론 눈감은 채 이 시설을 운영하고 집회를 다니고, 설교하고 행정적인 일들을 처리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말이 그렇지 한 달에 30회, 50회 집회를 다니다보면 거의 뭐 차에서 생활을 해요.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새벽 2-3시이고 또 새벽부터 나가서 전화상담과 함께 일을 시작하는데, 실명 당시 너무나 많은 약을 먹고 수술도 많이 해서 외모는 훤하고 멀쩡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여러 가지 아픔이 많습니다.
피로를 금방 느끼고 몸이 쉬 어지러워져 오래 서있지를 못해요. 또 등에다 어려운 치료들을 많이 해서 등이 늘 아프고 후유증이 아직도 심하죠. 이렇게 연약한 몸과 정신적 부담을 가지고 이 식구들을 다 돌보려니까 내적인 갈등과 기도가 참 많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내 생에서 가장 기쁜 것이 강단에 서서,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던 죄인 중의 괴수 목사가 이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내가 만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증거할 때, 그때 가장 기쁘고 보람있고 생명력을 느끼며 충만해지는 겁니다.
그 시간이 내게 쉼을 주는 시간이라고 생각을 해요. 어차피 내 몸이 연약하다면 내가 만난 하나님을 증거하다 쓰러져 죽기를 원하는 겁니다. 늘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지요. 그래서 저를 돕는다는 것은 다른 것보다 그저 하나님 증거할 기회를 많이 주시는 거예요.
또 그것이 은혜를 끼칠 수 있다면, 그것이 은혜의 길이 되어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바랄 욕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울러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도움을 가지고 되는 것이지 인간의 계획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서로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후원과 뒷받침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리고 도와주는 분들 가운데는 뒤에서 조용히, 그야말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그런 분들이 많아요. 깊은 신앙을 가진 분들에 의해서, 하나님은 그분들을 통해서 이 어려운 식구들을 도와주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들을 위해 기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분들의 이름을 모두 점자로 만들어 그 가족사항, 인적사항을 모두 적어 놓았죠. 제가 차안에서 생활하는 적이 많다보니 그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그 기도제목들을 찾아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 새빛맹인교회에 대해서 무엇보다 기쁘고 또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과정,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 사랑의 뜻을 우리 성도들이 누구보다도 가깝게 느낀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정말이지 이 세상에 살 수 없는 사람들이예요.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이분들이 예수를 만나서 그 감격을 못 이겨 하고 새로 태어나는 삶을 볼 때는 정말 큰 보람을 느낍니다. 예를 들면 중3때 실명한 한 아가씨가 있었어요.
눈이 멀기 전에 주인공이 맹인인 한 영화를 보고 전혀 객관적인 입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었는데 이제는 자기가 앞을 못 보게 되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 아가씨가 나를 찾아와서 우는데 "목사님 나는 이제 앞을 못 봐요. 이제 내게 죽음밖에 길어 없어요. 나같은 게 살아서 뭐해요." 하면서 하염없이 웁디다.
저는 그들의 심정을 알기 때문에 실컷 울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예수를 소개하죠. "세상 사람들은 다 떠나도 예수님은 떠나지 않아. 그래서 외롭지 않지" 하면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그 사랑을 전하면 "정말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요?"하고 반문하죠.
"그럼 사랑하고 말고, 누구보다도. 이 세상에 예수님보다 아가씨를 사랑하는 분은 없을거야." 그 자매는 결국 예수님을 영접했고 신학을 공부해서 주의 여종이 되었는데 그런 분들이 많다는 겁니다.
죽으려고 약 봉지를 손에 쥐었던 사람인데 목회자가 되거나 사모가 되고 또는 그런 분의 결혼식 주례를 하게 될 때, 그처럼 큰 기쁨이 없어요. 한번은 주일날 안내자가 부족해서 한 사람이 넘어져 그만 손가락이 부러졌어요. 그 아픈 손가락을 어루만져줄 때 그 영광스런 감사의 하루란...
주일마다 주의 모된 교회를 열심히 찾아와서 더듬더듬 점자주보를 짚어가며 온 영혼으로 찬양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자체가 바로 감격이고 감사예요. 그들이 믿는 예수는 형식적으로 부르는 예수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주님이며, 바로 생활이 뒤집어지고 죽음에 다다른 사람이 새로운 삶을 얻는 역동적인 믿음입니다.
우리 교회 표어가 요한복음 9장 3절이예요. 우리가 실명한 것은 조상의 죄도 아니요 본인의 죄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죠. 그래서 "우리 하나 하나가 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큰 사명을 가지고 있으니 절대 자학하지 마세요. 새로운 소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역과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주님을 온전히 모시고 그의 나라를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세요." 그렇게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재활교육을 시키고 프로그램을 만들어 뒷받침하는 것이지요. '나는 쓸 데 없다. 버림받은 사람이다. 먼지만도 못하다' 하는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정말 새로운 인생의 보람을 가지고 신앙 안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 이보다 귀하고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 축복은 낮은 곳에
저는 동전닢같이 그렇게 사랑하며 살고 싶어요. 구세군남비에 소복이 쌓여지는 동전닢같이 조용하게, 이슬비처럼 잔잔하고 진실하게 깊숙이 스며드는 사랑을 심어나가고 싶어요. 오직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저는 높은 것이 싫어요. 낮은 곳이 축복을 모으는 겁니다. 높은 골짜기는 무릉띵 흘러내지요. 축복은 낮은 곳에 있어요. 주님은 낮은 곳에 오셨죠.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배경이 로마서 12장 15절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낮고 겸손하게, 이슬비처럼 조용하고 진실하게 쌓여지는 사랑을 베풀며 살 수 있다면, 그런 교회가 되고 그런 모임이 되고 그런 만남이 된다면 이 사회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 그런 사회 그런 삶이 되지 않겠나 싶어요.
앞으로의 내 삶도 새빛맹인선교회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항상 낮은 곳에 머무를 것입니다.

책과 영화를 통해 제 간증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지만 이미 오래 된 일이라 이젠 저를 모르는 사람도 많아요. [낮은 데로 임하소서]가 출간된 지 벌써 10년이 넘었죠. 다녀보면 제 신앙간증을 새롭게 듣는 분들이 꽤 있거든요. 비록 책과 영화를 통해 소개는 되었지만 예수를 만나 새 삶을 시작했던 그때부터 다시 간단히 말씀을 드리지요.
* 뒤바뀌어진 인생
제 아버님은 본래 신앙인이 아니었어요. 세상적으로 사시던 분인데 늦게 하나님을 만나 모든 세상일을 정돈하고 신학을 공부하셨죠. 그때 제가 태어났어요.(1939년 평남 순천) 그런데 아버님은 저를 낳기도 전에 미리 제 이름을 지어놨죠.
아들을 주시면 주의 종으로 바치리라고 믿고 기도하셨는데 기도제목대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요한이라 부른 겁니다. 그런데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이 아들이 반항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저는 하나님이 싫었어요.
다른 애들은 아버지의 직장이 자기의 생활과 관계가 없었지만 저는 아버지가 목사면 그 자녀들도 모두 목사처럼 행동해야 할 것 같은 그 압박이 싫었거든요. 또 개척교회를 하면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생활에 간섭받는, 뭐 이런 가난과 속박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주일날 교회 앞에다 써붙였죠.
"하나님은 없느니라 - 안요한복음 1장 1절 말씀"
어머니는 저 때문에 말할 수 없이 고생하셨어요. 한번은 논 저수지로 나를 끌고 가서 어머니 다리와 내 다리를 끈으로 묶고는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빠져 죽는 게 낫겠다면서 날 잡아 끌었죠. 그때 난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
"어머니, 나는 하나님이 싫어요. 하나님이 밉지, 나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그때 돈으로 쌀 서말 주는 것 가지고 열 식구를 먹여 살리던 어머니, 사실 나는 우리 어머니를 가장 훌륭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 다음에 반드시 돈을 많이 벌어 우리 어머니를 호강시켜드릴 거라고 다짐하고 있었거든요.
그 후 외국어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미 국방성 외국어 연구원, 외국어 교관으로 발탁됐죠. 상당히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합격한 거예요. 이젠 어릴 때 꿈꾸던 대로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된거죠.
그래서 출국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때 제 나이가 서른 일곱이었고 이미 결혼을 해서 두 딸이 있었어요. 이제 살림을 정리하고 떠날 준비를 다 마쳤는데 갑자기 눈이 충혈이 되더니 새까만 먹구름 같은 것이 눈을 가리더군요. 그때의 좌절이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집안에 눈이 나쁘거나 안질이 있던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눈이 안 보이면서 어둠에 갇혀버렸고 동시에 내 삶도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좋다는 것은 뭘 안 해봤겠어요. 엄청난 치료와 고통을 받았지만 결국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한번도 맹인의 고통 따윈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내가 바로 맹인이 됐다는 것을 알게 된거죠. 이렇게 장님이 되고 나니 아이들은 밖에서 놀림을 받아 매일 울고 들어오죠, 돈은 다 날리고 점점 찾아오는 사람들도 발을 끊더군요.
고독이 밀려오고 눈물은 빗물처럼 쏟아지는데 가족들 앞에서 울 수도 없고, 그때는 아무튼 비 오는 날이 제일 좋았어요. 터져 나오는 감정을 감출 길이 없었기 때문에 비 오는 날은 밖에 나가 지치도록 울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친지들은 거의 제 곁을 떠나가고 마침내는 제 집사람마저 나를 떠나고 말았어요. 한 가정을 버리고 떠나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아내를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자식과 부인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말았지요.
그러니 이제 무슨 소망으로 살겠어요. 앞은 캄캄하고 주위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생의 밑바닥을 헤매다가 몇 번씩이나 자살을 기도했어요. 그렇게 죽음을 몸부림치면서 지치고 지친 상황 가운데 하루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아주 놀라운 광채가 내 몸을 둘러쌌고 그 속에서 들려온 말씀이 성경 320페이지였습니다. 여호수아 1장 말씀인데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으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세상 사람들이 다 떠나갔는데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겠다는 말씀이었어요.
(주: 제가 들은 바로는 당시 안요한 목사님께서는 자살을 하려고 줄을 매어 달고 의자 위에 올라가서 목을 걸어놓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요한아..."하고 부르시면서 "성경 320페이지를 보아라"하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래서 무작정 밖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성경 320페이지를 읽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320페이지에는 여호수아 1장 말씀이 기록된 곳입니다. - 옮겨 쓴 이)
"아, 당신은 살아 계셨군요. 살아 계신 하나님!" 하고 외쳐 부를 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앞에 어찌나 부끄러운지. 그 순간 가족들마저도 다 버리고 떠난, 나 같은 죄인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벌떡 일어나서 신앙고백을 하고 부른 찬양이 "세상의 친구들은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시는 이 오직 예수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천지는 버려도 날 버리지 않네"였죠. 이 찬송은 이후 제가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 어려움 속에서 만난 이웃들
그러나 죽음을 떨쳐버리고 막상 일어나긴 했지만 눈이 안 보이니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있나요, 갈 곳이 있나요. 하루는 비가 막 쏟아져 옷은 비에 젖고 앉을 자리조차 없는데 저벅저벅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그렇게 부러운 수가 없더군요.
길 가다가 아이들 소리가 나면 우리 아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건지, 살았을까 죽었을까 궁금하고, 뭐 이런 생각들이 길바닥 생활을 하면서도 제 마음을 울렸어요. 피가 거꾸로 솟는 낙심과 좌절에 빠져 하루에도 수백번 죽고 싶은 마음이었죠.
그러나 그때는 생에 애착이 있어 안 죽은 것이 아니라 이 '말씀' 때문에 못 죽은 거예요.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으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이 들려주신 하나님 음성 때문에 생을 버리지 못했고 그렇게 길바닥을 전전긍긍한 겁니다.
주로 있던 장소가 공원 벤치들, 역 대합실의 의자들... 그런 곳이었어요. 거기엔 구두닦이, 넝마주이, 껌팔이 애들, 무작정 상경한 사람 등 갈 곳 없이 머무는 노숙자들이 많아 그들 속에서 도움을 받고 살았죠.
그들이 화장실 가는 것도 도와주고 먹을 것도 손에 쥐어주고 또 시장 아주머니들은 팔다 남은 음식들을 주기도 하고 그렇게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게 되었어요.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이 뭔가 깨닫게 됐습니다.
구두닦이 아이들이 책을 늘 손에 들고 다니는데 어린것들이 얼마나 배우고 싶으면 저렇게 항상 책을 손에 들고 다닐까 싶었어요. 그들을 대하면서 '내 눈이 온전할 때 나는 한번도 남을 위해서 살지 못했으니 이제 나의 남은 생은 비록 눈은 안 보이지만 남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살게 하옵소서'
이것이 내 기도의 제목이 되었고, 하나님이 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는지 깨닫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 후 재활을 시작했지요. 우리 애들에게 -여기서 말하는 애들이란 함께 노숙하던 구두닦이 소년 등을 말하는 거예요- 이끌려 다니면서 점자를 배우기 시작한 겁니다.
점자라는 게 손가락이 차가우면 감각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이 입김으로 녹여주기도 하고, 감각이 퇴화하던 나이라 시멘트 바닥에 손끝을 긁어 피가 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때 극동방송 영어프로를 많이 들었는데 거기서 알려주는 선교단체들의 이름과 주소를 모두 적어뒀죠.
재활을 위해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때 미국의 한 선교단체와 목사님을 연결시켜 주셨고 마침내 저는 다시금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됐어요. 제가 1975년도에 실명을 했으니 1년만인 1976년도에 한국신학대학에 편입을 한 겁니다.
하지만 책이 하나 있나요, 기숙사비가 있나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저를 하나님은 소외된 사람들을 통해 도우셨습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아이들이 카드판매도 해주고 자기 용돈 생기면 모아서 주곤 했죠. 집이 없었기 때문에 잠도 그 애들과 함께 다방이나 건물 출입구, 공원 등에서 자면서 그렇게 바깥생활을 하는 가운데 신학공부를 무사히 마쳤어요.
* 새빛선교회를 시작
그리고 졸업 후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야간학교입니다. 마음에 약속했던 대로, 어려운 중에서 나를 도와준 그들에게 배움의 길을 주고 싶었던 겁니다. 미아동에다 애들과 힘을 모아 세평반짜리 방을 하나 구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같이 모여 공부를 시작했어요.
아이들이 불러주는 것을 점자로 찍어 책을 만들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그 애들을 가르쳤지요. 국민학교 과정부터 시작해서 참 피눈물나는 일도 많았지만 오직 우리의 힘은 '사랑'이었어요. 정말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눈물을 닦아주고 상처를 감싸고 서로 먹여주고...
이 세상은 비록 냉정한 곳일지라도 거기는 참 뜨거웠어요. 그렇게 해서 현재까지 약 830 명 가량 검정고시에 합격해, 대학도 가고 신학교도 가고 또 결혼해서 아들딸 낳은 사람도 많아요. 하나님 때문에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그들은 부족한 내 생애에 큰 보람을 느끼게 했죠.
그 무렵 [점자새빛]이라는, 맹인들을 위한 유일한 신앙잡지를 인수했어요. 한국 맹인들에게 무료로 보급하는 월간지였는데 후원처가 떨어지고 발행이 어렵게 되자 제가 맡게 된 겁니다. 이것을 지금도 발행하고 있지만 기사를 작성해서 편집하고 출판을 한다는 게 참 어렵습니다.
(주: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계간 신앙교양잡지 [새빛]은 국내외 약 2,000여명이 구독을 희망하고 있으나 예산문제로 인하여 현재 750부 정도만 제작보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참고로 국내 시작장애인 중 점자판독이 가능한 사람은 약 2만명 가량 된다고 합니다. - 옮겨 쓴 이)
1979년도 당시 영수증 모금이 있었어요. 그것을 모으면 약간의 보상금을 주었죠. 그때 그 돈을 모아 [새빛]을 발행했었는데 아마 지금 [새빛]을 짠다면 피가 뚝뚝 떨어질 겁니다. 눈감고 이곳저곳 다니면서 영수증을 모은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죠.
발바닥에 물집 생기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길에 쓰러진 적이 한두번 아니고 돌부리에 걸려 코가 깨지기도 하고, 정말 [새빛]은 피로써 만들어온 책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발행해 오고 있지요. [새빛] 발행과 함께, 1980년도에 또 하나 시작한 것이 '새빛맹인교회'입니다.
대부분 맹인들이 저처럼 가정에 파탄이 생겼다거나, 형제 친구들을 잃고 갈 곳이 없어요. 그래서 이분들의 영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교회가 세워졌는데 우리 교회는 일반 교회와 달라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어요.
저와 같은 중도실명자들이 많기 때문에 영적 문제 뿐 아니라 그들의 생활까지 보호해줘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동적으로 생긴 것이 '새빛맹인재활원'이예요. 우선 급한 사람부터 숙소를 마련해서 재활교육을 시작했죠.
맹인들의 의식주를 돌보면서 점자지도와 특수프로그램을 진행해 나갔습니다. 안마나 침술, 또 학력미달인 사람들은 야학교를 보낸다든지 일반대학, 신학교를 보내는 등 여러 가지 재활교육을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맹인들이니 대학교육이 얼마나 어렵겠어요. 책을 못 보니까 녹음을 해야 되고 점자책도 만들어줘야 하고 등록금도 대야 하는데 그 뒷바라지도 엄청났죠. 마침 그 무렵 [낮은 데로 임하소서] 책과 영화가 나왔어요.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고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대신 가서 영적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것은 참 좋았지만 그 때문에 오는 어려움도 있었어요. '그 목사님은 그렇게 책과 영화가 베스트가 되고 집회를 많이 다니는 유명한 목사니까 수많은 단체들이 도와줄 거야'라고들 생각해서 실제 도와주는 분이 별로 없었던 겁니다.
도리어 "목사님은 많은 단체에서 도와주실테니 우리를 좀 도와주세요"하며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였어요. 나는 내가 만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걸 증거하는 목사이지 사회사업가가 아닌데..., 참 이런 일이 덕이 안되더군요.
그러한 오해와 편견이 경영하는 데 적잖은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그래도 제게 위로를 준 것은 매주일 예배시간이었지요. 그들이 그렇게 기뻐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찬송 부르는 모습...
세상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그들, 버림받고 갈 곳 없고 어둠 속에서 사는 게 얼마나 불편한데 교회 한번 오기 위해 부딪히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뼈가 부러지기도 하고 긴장을 해서 땀에 흠뻑 젖기도 하고...,
그렇게 힘들게 만나서도 그토록 기쁘게 찬양드리는 모습을 대할 때 저는 새 힘을 얻었습니다. 칠흙같은 어둠을 뚫고 어려움 중에 와서도 그토록 기쁜 찬송을 부르는 것은 오직 예수님 때문이었죠.
한국에 15만 맹인들이 있는데,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해 깊은 좌절과 절망 속에 허덕이는 수많은 맹인들에게도 예수 때문에 생기는 저런 기쁨을 찾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편견과 오해를 받는 일에 마음이 좁아져 가지고 실망하고 좌절할 때가 아니다. 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이 맹인 전도에 용기도 주시고 힘도 주소서. 그리고 맹인 전도하는 일에 후원자도 많이 주시고 능력도 주셔서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라고 기도했지요.
그러면서 우리 성도들이 찬양하는 모습에 제 자신을 회개하고 다시 용기를 얻어 일어났던 기억이 나는군요. 이렇게 해서 우리 기관이 만들어지고 또 운영돼오고 있는데 전체를 통틀어 '새빛선교회'라고 부릅니다.
그 안에 야간학교, 점자새빛, 새빛 맹인교회, 새빛맹인재활원 등 크게 네 파트로 나눠져 있죠. 그렇게 15년간 지켜오고 있는데 돌아보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눈물겨운 일도 많았고 그야말로 한 걸음씩 하나님이 인도하신 거지요.
*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처음에 미아리에서 시작할 때 고은아 집사님이 건물을 얻어주셨어요. 그때가 1980년도쯤 되는데 그때 돈으로 1,500만원을 주셔서 예배 장소가 마련된 거예요. 거기까지가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마지막 배경입니다.
그런데 그 예배당 전세등기를 잘못해 그만 사기를 당했습니다. 그래 돈 한푼 못 받고 쫓겨나게 되어 상당한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떤 장애자 부모를 만나게 됐어요. 아주 가난한 분이었는데 장애자인 아들을 위해 18년간 모았던, 그때 돈으로 1억원을 우리의 딱한 사정을 알고 헌금해주신 거예요.
하나님은 항상 그렇게 서로 어려운 사람을 통해 저를 도우시더군요. 그래서 그 돈을 가지고 서울 시내 천지 사방을 다녔지요. 제가 또 오해받기 쉬운 게 뭐냐면 '어 방배동이네. 부자동네잖아?'하고 사정 모르는 소리를 많이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고 싼 곳 변두리를 찾아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다가 결국 이곳 낡은 1층 짜리 건물을 사게 된 거예요. 당시는 방배동도 개발이 안된 가난한 지역이었죠. 여기가 원래는 강남지구 불교 포교원 건물이었어요.
어찌나 수리를 안했는지 썩어 내려가 아무도 사지 않는 건물을, 5천만원을 은행에서 융자해 1억5천에 계약을 했죠. 돈이 모자라니 공사는 못하고 대충 수리해서 입주는 했는데 한쪽으로는 우리 사업을 유지해야죠, 하여튼 굉장히 바빴습니다.
1986년도에 이사를 와서 한 4년만에야 빚을 다 갚았어요. 그래서 이제는 우리 일을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했더니 웬걸, 1990년도에는 비가 또 어찌나 많이 왔는지 건물이 워낙 낡아 조금씩 물이 새기 시작하더니만 결국은 한쪽이 무너져내렸어요.
교인들이 크게 다칠뻔 했죠. 한쪽 구석이 무너지는데 이걸 어떡합니까? 남자들은 저쪽 개천 옆에, 여자들은 옆 건물 지하에 싼 방을 얻어 옮기고, 예배실은 예배실대로 또 지하실을 하나 얻고 사무실은 사무실대로 따로, 이래 가지고 풍비박산이 난 겁니다.
급한대로 여기저기 흩어서 옮겨 놓긴 했는데 그렇게 흩어진 채로 살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것을 어떡하나, 정말 앞이 캄캄하고 이젠 몸과 정신도 지칠대로 지쳐 아무런 대책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고민고민하다가 결국 이곳 한국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건강한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하겠지. 큰 교회도 많고 신자들도 많으니까. 나는 너무나 힘이 부쳐 더 이상 이 식구들을 돌볼 수가 없다. 하나님도 참 너무하시다. 외국으로 도망가버리자. 그리고 교포 교회에서 목회나 하고 다시는 골치 아프게 살지 말자.'
그렇게 결심을 하고는 부산으로 잠시 떠났습니다. 그런데 해운대 모래사장을 걸을 때 아이들의 노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모래를 토닥토닥 손에 얹으며 부르던 노래,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께 새집 다오."
눈이 튀어나온 두꺼비한테 헌집 줄께 새집 달라고 하는 아이들 소리가 그 순간 내 마음을 찔렀습니다. '내가 소위 목사인데 전능한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내어놓지 못하고 구하지 못했으니 내 믿음이 얼마나 작은가. 내가 하나님을 두꺼비만도 못하게 여겼구나' 생각하니 어찌나 부끄러운지 이 죄인을 용서해달라고 눈물로 회개했어요.
그리고 교인들 앞에 다시 서서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부끄러운 목사다. 내가 그렇게 믿음이 적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 하나님을 건축위원장으로 세우고 우리 다 건축위원이 되는 거다. '오직 믿음으로' 기도할 때 여리고성이 무너지지 않았는가. 우리 다 함께 기도하자" 외치면서 우리는 다시 일어나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맹인들이 떠나지 않고 다시 눌어 앉는다는 소식에 몹시 못마땅해 했죠. 제발 딴 곳으로 가달라고 수없이 항의들을 했지만 이미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었어요. 우리의 소식을 전해들은 한 성도는 장사해서 남은 수익금을 전해주기도 했고 누구보다도 국민학교 아이들이 돼지저금통을 모아 가장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 20만원 받는 개척교회 전도사 사모가 그 월급을 온전히 보내고, 뭐 그런 식으로 방황하던 시절이나 교회를 세울 때나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아진 2억5천만원의 뜨거운 사랑의 모금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현재 1억5천만월의 빚이 남았죠.
우리에게 2억5천이라 돈은 정상인들의 25조원보다 더 큰돈이고, 나머지 빚도 우리에겐 엄청난 액수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운영하시고 저는 이를 위해 심부름을 할 뿐입니다.
주로 간증집회를 많이 다니고 기업체 강연이나 사회단체 등을 많이 다니고 있어요. 한 달에 30회 내지 50회를 다니는데 이것이 많은 도움이 돼요. 가끔씩 회원들이 가입해주기도 하지만 거의 비정기적 회원들이고 일정 금액이 정해져 있지 않아요.
대부분 어려운 사람들이 사랑을 모아서 보내주는 것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우리 자체 예산이란 전혀 없답니다. 한 달에 네 번 모이니 헌금이래야 얼마 안되죠. 현재 우리 교인수는 맹인이 한 70여명 됩니다. 가르치고 봉사하는 사람이 열댓명 가량, 장애자 가정이 세 가정, 그게 다예요.
맹인들의 연령이 20대에서 50대 사이로 대개 이혼당한 부부이거나 집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라 90%가 가정이 없는 홀몸이죠. 그중 한 30명은 우리 재활원에서 수용하고 있지만, 방이 모자라 나머지는 동서남북 흩어져 있는데 우리 생활시설이 넓어지면 다 모셔야 됩니다.
새로 지은 건물은 5층이예요. 1층은 주방과 주차장이고, 2층엔 사무실과 점자인쇄 시설이 있어요. 여기서 [점자새빛]을 발행합니다. 3층엔 야간학교 및 재활교육실이 있어 안마, 침술, 점자, 타자, 기초재활반, 맹인교육, 점자제작 등 모든 재활시설을 갖추고 있고, 4,5층은 각각 남녀숙소로, 5층은 부분적으로 나눠 선교회 활동을 위해 쓰고 있어요.
새빛노래선교단, 핸드벨팀 등 이들 선교단은 열심히 연습해서 여러 곳을 다니며 선교를 하죠. 그러나 아직도 재활교육시설이 거의 미흡한 상태라 점자타자기, 점자복사기 등 특수시설 확보를 위해 기도하고 있고 또 현상유지도 해나가야 돼요.
한 달에 쌀 400킬로를 먹는데 다 부식비 및 재활 뒷받침이 얼마나 많이 소요되는지 모릅니다. 사실 이러한 경영면이 무척 어려운데 항상 감사하다고만 웃고 다니다보니 실은 이러한 어려운 사정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제일 어려운 일이 살림살이예요.
매달 어떻게 이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할지 그것이 가장 골치 아픈 숙제인데, 우리의 살림은 매달 '징검다리'입니다. 지금 3월이지만 저희는 3월 예산이란 게 미리 책정되어 있질 않아요. 하나님은 한꺼번에 주시지 않고 그때 그때마다 꾸려 나가시는 것을 15년 동안 체험해 오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징검다리 축복이다" 그렇게 말해요. 내 앞에 3월이라는 물이 찰랑 찰랑거릴 때 그 물에 발을 디디면 하나님이 싹 다리를 갖다 놔줍니다. 15년을 그런 식으로 건너왔습니다. 시초엔 직원들이나 우리 식구들 가슴이 조마조마 했었죠.
저도 사실 처음엔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걱정도 되고 그랬는데 그것도 처음 1년뿐이었지 항상 하나님의 한결같은 은혜를 체험하고 살다보니 이제는 좀 대담해지더라구요. 그래서 우리 직원들은 기도할 때 우스갯소리처럼 그러죠.
"하나님 아버지 적당히 꼼꼼하시옵소서."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거든요. 여호수아가 요단강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야, 너 오늘 요단강 건너는 거다" 했을 때 뭐 다리를 놔준 것도 아니고 또 육지가 드러난 것도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여호수아의 믿음을 보세요.
"자, 하나님이 가라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나를 따르라. 요단강을 향해서 앞으로!" 그들이 갔지요? "오른발이 닿은즉 하나님이 은혜로 밀어 주셔서 강을 건너게 해주었다..." 바로 그거예요. 가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고 붙잡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갈 뿐이예요. 신앙은 모험이거든요. 믿음으로 가는 것, 붙잡는 하나님. 그 관계 속에서 지금까지 지켜주셨으니 지금도 우리 식구들은 모두 가는 거예요. "지금, 다 나를 따르라. 또 4월이 왔다. 4월이란 강에 또 한발을 내디딜테니까 가자. 따라오너라."
그렇게 다 따라오면 하나님은 우리가 갈 수 있도록 은혜로 다 밀어주세요. 어떤 분을 통해서라도. 1년 예산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달 그달 살죠. 돈이 들어오는 대로 생활해나가는 거예요. 저희들은 회원도 정기적으로 관리하고 있지 않아요.
누구든지 아무 때나 보내고 싶을 때 보내요. 은혜로 시작한 것이니까 은혜로 끝나기를 원하는 겁니다. 믿음으로 나가는 것, 저는 그것이 좋습니다. 행정조직과 같은 어떤 구속력을 가지고 일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무슨 팜플랫이라든가 홍보시스템이라든가 이런 게 없었는데 "어휴, 목사님 그래도 목사님을 누구에게 소개하려니까 주보밖에 없잖아요"하면서 주위 사람들이 답답해 하다군요.
사실 주보가 제일 진실하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를 돕는 분들에게 주보만 보내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도 주위에서 답답해하기에 [새빛요람]이라는 걸 하나 만들었지요. 그 안에 후원을 위한 쪽지를 하나 넣긴 했는데 뭐 그것도 한 달에 한 두세장 들어오나 그렇습니다.
사실 돕는 기관이 너무 방대하고 복잡해도 문제가 생겨요. 교만해지기 쉽거든요. 행정이 두꺼워지다보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조직 하다가 말아요. 그래서 저는 큰 것은 좋아하지 않아요. 작지만 알차게 질적으로, 이분들을 맹인답게 돌보고 싶어서입니다.
숫자만 많은 것보다 단 한 명이라도 성심껏 보살펴서 그분들에게 필요한 은혜로 채워주고 구원받게 해주는 게 제게 가장 큰 소망입니다. 제일 중요한 게 천국가게 해주는 것 아닙니까?
* 내 생애의 가장 큰 기쁨
물론 눈감은 채 이 시설을 운영하고 집회를 다니고, 설교하고 행정적인 일들을 처리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말이 그렇지 한 달에 30회, 50회 집회를 다니다보면 거의 뭐 차에서 생활을 해요.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새벽 2-3시이고 또 새벽부터 나가서 전화상담과 함께 일을 시작하는데, 실명 당시 너무나 많은 약을 먹고 수술도 많이 해서 외모는 훤하고 멀쩡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여러 가지 아픔이 많습니다.
피로를 금방 느끼고 몸이 쉬 어지러워져 오래 서있지를 못해요. 또 등에다 어려운 치료들을 많이 해서 등이 늘 아프고 후유증이 아직도 심하죠. 이렇게 연약한 몸과 정신적 부담을 가지고 이 식구들을 다 돌보려니까 내적인 갈등과 기도가 참 많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내 생에서 가장 기쁜 것이 강단에 서서,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던 죄인 중의 괴수 목사가 이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내가 만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증거할 때, 그때 가장 기쁘고 보람있고 생명력을 느끼며 충만해지는 겁니다.
그 시간이 내게 쉼을 주는 시간이라고 생각을 해요. 어차피 내 몸이 연약하다면 내가 만난 하나님을 증거하다 쓰러져 죽기를 원하는 겁니다. 늘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지요. 그래서 저를 돕는다는 것은 다른 것보다 그저 하나님 증거할 기회를 많이 주시는 거예요.
또 그것이 은혜를 끼칠 수 있다면, 그것이 은혜의 길이 되어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바랄 욕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울러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도움을 가지고 되는 것이지 인간의 계획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서로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후원과 뒷받침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리고 도와주는 분들 가운데는 뒤에서 조용히, 그야말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그런 분들이 많아요. 깊은 신앙을 가진 분들에 의해서, 하나님은 그분들을 통해서 이 어려운 식구들을 도와주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들을 위해 기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분들의 이름을 모두 점자로 만들어 그 가족사항, 인적사항을 모두 적어 놓았죠. 제가 차안에서 생활하는 적이 많다보니 그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그 기도제목들을 찾아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 새빛맹인교회에 대해서 무엇보다 기쁘고 또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과정,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 사랑의 뜻을 우리 성도들이 누구보다도 가깝게 느낀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정말이지 이 세상에 살 수 없는 사람들이예요.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이분들이 예수를 만나서 그 감격을 못 이겨 하고 새로 태어나는 삶을 볼 때는 정말 큰 보람을 느낍니다. 예를 들면 중3때 실명한 한 아가씨가 있었어요.
눈이 멀기 전에 주인공이 맹인인 한 영화를 보고 전혀 객관적인 입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었는데 이제는 자기가 앞을 못 보게 되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 아가씨가 나를 찾아와서 우는데 "목사님 나는 이제 앞을 못 봐요. 이제 내게 죽음밖에 길어 없어요. 나같은 게 살아서 뭐해요." 하면서 하염없이 웁디다.
저는 그들의 심정을 알기 때문에 실컷 울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예수를 소개하죠. "세상 사람들은 다 떠나도 예수님은 떠나지 않아. 그래서 외롭지 않지" 하면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그 사랑을 전하면 "정말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요?"하고 반문하죠.
"그럼 사랑하고 말고, 누구보다도. 이 세상에 예수님보다 아가씨를 사랑하는 분은 없을거야." 그 자매는 결국 예수님을 영접했고 신학을 공부해서 주의 여종이 되었는데 그런 분들이 많다는 겁니다.
죽으려고 약 봉지를 손에 쥐었던 사람인데 목회자가 되거나 사모가 되고 또는 그런 분의 결혼식 주례를 하게 될 때, 그처럼 큰 기쁨이 없어요. 한번은 주일날 안내자가 부족해서 한 사람이 넘어져 그만 손가락이 부러졌어요. 그 아픈 손가락을 어루만져줄 때 그 영광스런 감사의 하루란...
주일마다 주의 모된 교회를 열심히 찾아와서 더듬더듬 점자주보를 짚어가며 온 영혼으로 찬양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자체가 바로 감격이고 감사예요. 그들이 믿는 예수는 형식적으로 부르는 예수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주님이며, 바로 생활이 뒤집어지고 죽음에 다다른 사람이 새로운 삶을 얻는 역동적인 믿음입니다.
우리 교회 표어가 요한복음 9장 3절이예요. 우리가 실명한 것은 조상의 죄도 아니요 본인의 죄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죠. 그래서 "우리 하나 하나가 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큰 사명을 가지고 있으니 절대 자학하지 마세요. 새로운 소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역과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주님을 온전히 모시고 그의 나라를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세요." 그렇게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재활교육을 시키고 프로그램을 만들어 뒷받침하는 것이지요. '나는 쓸 데 없다. 버림받은 사람이다. 먼지만도 못하다' 하는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정말 새로운 인생의 보람을 가지고 신앙 안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 이보다 귀하고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 축복은 낮은 곳에
저는 동전닢같이 그렇게 사랑하며 살고 싶어요. 구세군남비에 소복이 쌓여지는 동전닢같이 조용하게, 이슬비처럼 잔잔하고 진실하게 깊숙이 스며드는 사랑을 심어나가고 싶어요. 오직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저는 높은 것이 싫어요. 낮은 곳이 축복을 모으는 겁니다. 높은 골짜기는 무릉띵 흘러내지요. 축복은 낮은 곳에 있어요. 주님은 낮은 곳에 오셨죠.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배경이 로마서 12장 15절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낮고 겸손하게, 이슬비처럼 조용하고 진실하게 쌓여지는 사랑을 베풀며 살 수 있다면, 그런 교회가 되고 그런 모임이 되고 그런 만남이 된다면 이 사회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 그런 사회 그런 삶이 되지 않겠나 싶어요.
앞으로의 내 삶도 새빛맹인선교회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항상 낮은 곳에 머무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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