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렸을 적 많이 불렀던 양주동 작사 이홍렬 작곡의 "어머니 마음"이란 노래는 우리 모두 다 잘 아는 곡입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참으로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잘 표현한 노래입니다. 부를 때마다 코끝이 찡하고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노래입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여러분! 부모님께 효도합시다. 성경은 이것이 옳은 일이라고 하십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노인 천국으로 일컬어졌습니다. 고종황제의 밀사노릇까지 했던 미국인 헐버트는 "이 세상에서 관습적인 노인복지가 가장 완벽하게 된 나라가 조선"이라고 했고, 미국공사를 역임한 샌즈의 회고록에는 "나의 노년을 위해 조선 땅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했으며, 선교사인 알렌도 "노인과 망인 사이가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어 이 세상에서 가장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즐거운 노인천국"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외국인들의 눈에는 우리나라의 노인공경, 부모공경의 전통이 마치 노인천국으로 비쳐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어른 되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는 것이 두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늙으신 부모를 너무나 천대하는 사회로 전락되어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요즘 집에서 많이 키우는 애완 강아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부모들이 많아졌습니다. 개 팔자가 부모 팔자보다 훨씬 나은 것입니다.
오늘날 애완 강아지 이하 취급을 받는 부모들이 130만 명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전체 노인인구 가운데 40%가 홀로 살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노인은 건강도 있고 여건도 좋아서 자진해서 홀로 사는 경우도 있지만, 홀로 사는 노인 가운데 제일 많은 경우는 자식들이 부양을 하지 않아 버림받은 노인들입니다. 두 번째는 같이 사니까 불편해서 홀로 사는 경우입니다. 참 딱한 세상입니다.
옛날에 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어른의 헛기침 소리 "어허! 어험!" 하나에 가정의 기강이 확 잡혔습니다. 목구멍이 막히셔서 기침하는 게 아닙니다. 감기 때문에 하는 기침도 아닙니다. 이 헛기침은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어른의 존재를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방에서 밖으로 나오시며 어허! 어험! 합니다. 어른이 나온다는 신호입니다. 밖에서 방안으로 들어오시며 어허! 어험! 합니다. 어른이 들어온다는 신호입니다. 동네 골목길을 가다가 사람이 보인다 싶으면 어허! 어험! 합니다. 어른이 지나간다는 신호입니다.
이 헛기침 소리 한번에 야단법석을 치며 뛰어 놀던 아이들이 조용해집니다. 부부가 언쟁을 하다가도 "어허! 어험!" 소리 한번 나면 깜짝 놀래서 싸움 끝입니다. 밖에서 어른이 헛기침 한번 하시면 방안에 있던 식구들 다 일어나 나와서 문을 열어 드립니다. 혹시 삼촌이 밖에서 한잔하고 비틀거리며 들어오다가도 안에서 들리는 할아버지의 어허! 어험! 소리 한번에 술이 확 깨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헛기침 한번에 가정의 어지러움이 다 물러가고 질서가 잡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라가 통치력을 상실하여 공권력이 무너지고 질서가 없이 혼란에 빠지면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면 망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헛기침에 질서가 잡혀야 합니다. 그 헛기침 한번에 자녀가 밤늦게 들어오지 못하고, 아이들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정이 소망이 있고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헛기침이 통하던 시대는 어른의 시대였습니다. 어른이 집안의 중심이었고 모든 일을 어른 위주로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아이들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정마다 아이를 하나나 둘을 낳아 놓고는 그 아이들을 집안의 어른으로 모셨습니다. 모든 것이 아이들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부모는 오직 아이들을 위해 일하고 생활합니다. 오늘날엔 아이들이 집안의 왕입니다.
노인과 부모는 더 이상 집안의 어른 취급 안 합니다. 어른들은 이제 골방 신세가 되어 갑니다. 헛기침을 하여 가정의 기강을 잡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되면 그저 조용히 있어야 눈치 밥 안 먹고 밥 한술 얻어먹는 안타까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간간이 이런 신문기사 제목들이 우리를 허탈하게 하고 있습니다. "반찬 투정 꾸짖는 아버지 살해한 20대 긴급체포", "중풍 칠순 노모 살해한 50대 아들 영장", "꾸중들은 손자 할머니 살해", "치매 걸린 아버지 구타 살인", "고부갈등 고민하던 아들 70대 노부모 필리핀 여행지에 고려장", "용돈 거절당하자 어머니 폭행". 참, 기가 막힌 세상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부모는 마땅히 공경 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해야 되는 줄 믿습니다.
성경에는 보면, 여섯 가지의 부모가 나옵니다. 첫째는 육신의 부모입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입니다. 둘째는 영적 지도자들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나의 자녀들아'라고 불렀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을 보고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셋째는 나라의 왕을 부모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나의 아버지여!'라고 불렀습니다. 넷째는 고용주나 주인에게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종들이 나아만에게 '아버지여!'라고 불렀습니다. 다섯 째는 스승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나의 아버지여'라고 불렀습니다. 여섯 째는 연령상 윗사람들을 아버지 대하듯 하라, 늙은 여자를 어미 대하듯 하라고 하여 부모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부모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더 많은 부모 입장에 있는 분들을 공경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공경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베드"라는 말입니다. 이는 "무겁다"는 뜻입니다. 이 용어는 하나님을 공경한다 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결국 부모를 무겁게 여기라는 말은 부모를 하나님처럼 높여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함부로 대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고, 멸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하나님처럼 존중하고, 어렵게 생각하고 두려워하고, 무겁게 모시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임금님이 행차를 하십니다. 사람들이 길에 서서 구경을 합니다. 이때 유독 임금님의 눈에 띈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병드신 어머니를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임금님 오시는 길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임금님은 행차를 멈추게 하고 그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째서 그 노인을 등에 업고 있느냐?" 청년이 대답합니다. "이 노인은 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임금님을 꼭 한번 뵙고 싶다고 해서 모시고 왔습니다." 임금님은 크게 칭찬하며 후한 상금을 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환궁하기 위해서 그 길을 돌아오고 있습니다. 역시 똑같은 모습을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이 마을에는 효자가 많이 사나보다' 하고 후한 상을 내렸습니다. 이때 구경꾼 하나가 큰 소리로 말합니다. "아니옵니다. 그 놈은 불효자식입니다. 임금님께 상 받으려고 효자 흉내를 냈을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님의 말씀이 기가 막힙니다. "효도는 너무도 귀한 것이기에 흉내라도 내야 하느니라." 이 말에 불효 청년이 깨닫고 진짜 효자가 되었답니다.
맞습니다. 효도는 너무도 귀한 것이기에 억지로 흉내라도 내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하다 보면 진짜 효자가 됩니다. 더욱이 복까지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더 좋은 것입니까? 성경은 약속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땅에서 잘되고 장수한다고 말입니다. 믿으시면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효도할까요? 성경에는 효자, 효부들이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효자, 효부가 요셉과 룻일 것입니다. 오늘은 요셉의 효도를 생각해 봅시다. 요셉은 어려서부터 마지막까지 부모를 잘 공경한 효자 중에 효자였습니다. 과연 요셉은 부모에게 어떻게 효도했을까요?
1. 무엇보다도 요셉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므로 효도하였습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 채색 옷을 입고 편애를 받을 만큼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준 아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하다가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을 22년 만에 만났지만, 보복하지 않고 다 용서합니다. 오히려 두려워하는 형들을 안심시킵니다. 이제는 아버지를 모시고 내려와 자기와 함께 행복하게 살자고 당부했습니다. 이러한 요셉을 볼 때 아버지 야곱으로서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므로, 아버지 야곱의 말년은 아들 덕에 평화롭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실로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크나큰 기쁨을 안겨드렸던 아들입니다.
여러분,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방법 중에 제일 큰 효도는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큰 효도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3:25)고 하십니다. 불효자식은 늘 부모의 마음에 근심과 고통을 안겨드리지만, 효도하는 자식은 늘 부모님의 마음에 즐거움과 기쁨을 안겨드리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에 노래자는 나이를 일흔 살이나 먹고서도 어린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늙은 부모 앞에서 어리광을 피워서 부모를 기쁘시게 해드렸다고 합니다. 맹자는 다섯 가지의 불효를 말했습니다. 첫째, 게을러서 부모님을 돌보지 아니함이요. 둘째, 도박과 술 때문에 부모님 받드는 일에 게을리 함이요. 셋째, 돈과 처자만 알고 부모님을 받드는 일에 게을리 함이요. 넷째, 눈과 귀의 만족에 급급하여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요. 다섯째, 싸움질 잘하고 성질이 사나와서 부모님을 근심되게 하는 일이 바로 불효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자식이 되어 부모의 마음을 근심시키면 안 됩니다. 좋은 옷, 좋은 음식 사드리는 것만이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데 구경시켜드리고. 용돈 많이 드리는 것만이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가장 좋은 효도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효도는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효도는 시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더 이상 효도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때는 부모님께 더 효도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아쉬운지 모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효도 못한 것 후회하면서 울고불고, 호화스런 묘지를 만들어 드리고 하지말고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기쁘게 해드리십시오.
2. 요셉은 부모님께 순종하므로 효도하였습니다.
요셉이 어릴 때 형들이 자기를 얼마나 미워하고 시기하고 해하려고 하는가 다 압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이 들에 있는 형들에게 점심을 갖다주라고 했을 때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순종합니다. 또 아버지 야곱이 죽으면서 요셉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저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다가 우리 조상들과 함께 장사 지내다오" 합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말씀에 언제나 예! 하고 순종함으로 효도를 다했습니다.
어떤 가정에 고부간의 갈등이 참 많아요. 가만히 이유를 보니까 시어머니의 말에 며느리가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거예요. 시어머니가 "너 시어머니한테 꼬박꼬박 말대답하기냐?" 그럽니다. 그러면 며느리가 "어머니, 이것이 무슨 말대답입니까? 경우를 따지고 이치를 따져 보세요. 이치에도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시니 그렇지요" 하고 말대꾸합니다. 물론 경우를 따지면 시어머니 쪽이 틀려요. 며느리의 경우가 맞아요. 그러나 부모와 자녀 사이에 경우를 따지게 되어 있습니까? 경우를 따지고 시비를 가리면서 효도할 수는 없습니다. 참된 효도는 경우도 이치도 논리도 따지지 않아요. 이치가 맞지 않아도 그냥 순종하십시오. 그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순종은 효도의 첫 걸음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께 절대 순종하셨습니다. 일생동안 한번도 "아니요" 하시지 않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예" 하고 순종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님에게도 순종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 51절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어릴 때부터 순종하여 부모님을 받드신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신문에 보도됐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6.25때 어떤 사람이 부산으로 피난 가서 기르던 아주 영리한 개를 갖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이 영리한 개는 심부름도 혼자 잘했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직후 주인과 함께 시장엘 갔는데 그만 너무 복잡해서 주인과 개가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주인은 며칠이 지나도 개가 돌아오지 않아 포기하고 있었는데 며칠 후 개가 시장 바구니에 썩은 생선을 담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발에는 피가 나고 몸은 먼지로 덮여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개가 시장을 모르니까 전에 피난 가서 살던 부산 시장에 가서 생선을 사 가지고 왔답니다. 수백 리 길을 걸었기에 몸은 지치고 발은 온통 붓고 상처나 얼마 후 죽고 말았습니다.
영리한 개도 주인께 순종할 줄 아는데, 인간 된 우리들이 부모님께 불순종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전답 팔아서 학교 보내 공부시키고 결혼시켜 놓았더니 부모는 무식해서 모른다 하며 대들기나 하지 않습니까?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19남매나 키우면서도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운 분인데, 그분은 자녀들이 어려서 자기 고집을 꺾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야지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부모는 그 자식을 마귀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은 나이에 따라 아버지에 대한 의식구조라 달라진다고 합니다. 4살 때쯤에는 자기 아버지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줄 압니다. 12살쯤 되면 아버지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본격적인 사춘기에 들어서는 14살쯤 되면 아버지는 생각하는 것이 다 구식이라고 생각합니다. 21살쯤 되면 아버지는 골동품이고 미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사회생활을 1년쯤 하면 비로소 "아버지가 그때 그래서 그렇게 가르치셨구나!"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35살쯤 되면 내 문제를 아버지와 상의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 자녀가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인 40살쯤 되면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50살쯤 되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면서 역시 내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었다고 생각하게 되고, 60살쯤 되면 나는 아버지보다 너무 못하다고 생각하게 된답니다.
여러분, 지금은 이해 못해도 부모님 말씀에 "예!" 하고 순종하십시오. 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하셔도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순종하여 효도하시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요셉은 부모님을 봉양하므로 효도하였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요셉은 눈물로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면서, 아직 흉년이 5년이나 남았으니 속히 아버지를 모셔오면 자신이 아버지와 가족을 봉양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마음 있는 곳에 물질이 있습니다. 부모님에게 물질 봉양을 잘 하십시오.
요사이 자식이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에 여행 갔다가 부모를 버리고 오는 사건이 일년에 약 800여건이나 된다고 하니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자식이 어렸을 때,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씻어 주었으니 성인이 되면 입장이 바뀌어서 부모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씻겨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늙으면 자식이 부모의 희생과 노고를 알아주기 원합니다. 사실 황새나 까마귀 같은 날짐승도 어미 새가 늙어 날 수가 없게 되면 제 둥지에 데려다놓고 죽을 때까지 모이를 물어다 먹인다고 합니다. 한낱 짐승도 그런 식으로는 어미를 공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효조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부모를 모시고 돌봐드릴 줄도, 봉양할 줄도 모른다고 하면 그 사람은 까마귀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복을 받으며, 무엇을 한들 잘되겠습니까?
디모데전서 5장 8절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4절에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를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가족이나 친족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도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보다도 더 악한 자라고 했는데, 부모를 내버리고 부모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얼마나 더 큰 죄악이겠습니까?
미국의 강철 왕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행상을 했고, 어머니는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남매가 여럿 있었으므로 카네기의 어머니는 아이들의 내의를 저녁에 빨아서 숯불을 피워 말려 아침에 입히는 그런 정성을 보였다 합니다.
카네기가 22살이 되었을 때, 이렇게 우리를 위해 고생하시는 어머님께 해 드리고 싶은 것을 다 해 드리기 전에는 결코 결혼하지 안으리라 결심하고는, 그 결심을 실행하느라고 52세에 결혼하였고, 62세에 첫 아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 자신이 결혼해서 산다면 혹시 어머니에 대한 정성이 부족하게 될까봐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았다 합니다. 이렇게 위대하게 살아갔던 진정한 기독교인들은 한결같이 노부모를 잘 돌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교장인 김평일 장로님은 효도 10계명이란 것을 발표했는데, 거기에는 부모를 봉양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1계명: 신앙을 갖게 해드리는 것. 2계명: 대답을 잘하고 말씀을 잘 들어주는 것. 3계명: 표정을 밝게 하는 것. 4계명: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 5계명: 용돈을 넉넉히 드리는 것. 6계명: 향토적인 음식을 해 드리는 것. 7계명: 외모를 아름답게 꾸며드리는 것. 8계명: 일거리를 찾아드리는 것. 9계명: 친구를 자주 만나게 해드리는 것. 10계명: 등을 자주 긁어드리고 손발톱을 깎아 드리는 것.
여러분, 부모님을 자주 찾아뵈십시오. 부모는 자식이 늘 보고 싶습니다. 자식은 시간을 내어 부모님을 찾아뵙고, 손자 손녀도 보여드려야 합니다. 여행도 시켜 드리십시오. 관광이라는 것은 엄청난 비타민입니다. 관광을 통해서 즐거움을 드려야 합니다. 고운 옷도 해드리십시오. 건강을 보살펴 드리십시오. 맛있는 음식도 대접하십시오.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십시오.
4. 요셉은 형제우애 하므로 효도하였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기들이 팔아먹은 동생 요셉이 애굽의 총리인 것을 알게 되자, 너무 놀랍고 두려워서 요셉이 물어도 아무 대답도 못할 정도였습니다(3절). 원수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격입니다. 그러나 본문 5절에 보면, 요셉은 두려워하는 형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형들은 자기를 노예로 팔아먹은 원수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 형들을 다 용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형들과 그 가족들까지 다 돌보아 주게 됩니다.
이런 형제우애를 본 아버지 야곱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것이 요셉의 효도였습니다. 여러분 집에 돌아가셔서 부모님께 물어보십시오. 부모님이 가장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틀림없이 너희 형제끼리 서로 우애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님을 호의호식 시켜드려도 형제간의 우애 없이는 절대로 효도할 수가 없습니다.
형제간은 피를 나눈 사이입니다. 옛말에 “다섯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이 보실 때 자식은 모두 똑같습니다.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부모님이 보시는 데에서 자식들이 싸우면 절대 안됩니다. 재산 때문에 다투는 자녀들의 기사가 신문에 나는 것을 간혹 봅니다. 그들 부모님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크나큰 불효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형제간은 화목해야 합니다. 형제끼리 잘 지내십시오. 그것이 효도입니다.
5. 요셉은 바르게 살고 복을 받아 잘 살아감으로 효도하였습니다.
어느 보험회사가 광고를 위하여 신문에 게재한 내용의 글입니다. 한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스물 아홉 살, 열네 시간을 기다려서야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신을 믿지 않았지만 당신도 모르게 기도를 올렸습니다. 서른 일곱, 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가 우등상을 탔습니다. 당신은 액자를 만들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었습니다. 아직도 당신의 방에는 누렇게 바랜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마흔 셋, 일요일 아침, 모처럼 자식과 뒷산 약수터로 올라갔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자식이 아버지를 닮았다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당신은 괜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마흔 여덟, 자식이 대학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당신은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했지만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쉰 셋, 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내의를 사 왔습니다. 당신은 쓸데없이 돈을 쓴다고 나무랐지만 밤이 늦도록 그 내의를 입어 보고 또 입어 봤습니다. 예순 하나,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웃음을 피웠습니다. 당신은 나이 들고서 처음으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오직 하나,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한평생. 하지만 이제는 희끗희끗한 머리로 남으신 당신. 우리는 당신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한 어머니의 고백입니다. 「스물 하나, 당신은 고개를 두개 넘어 얼굴도 본적이 없는 김씨 댁의 큰아들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스물 여섯, 시집 온지 오 년 만에 자식을 낳았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시댁 어른들한테 며느리 대접을 받았습니다. 서른 둘, 자식이 밤늦게 급체를 앓았습니다. 당신은 자식을 업고 읍내 병원까지 이십 리를 달렸습니다. 마흔,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당신은 자식이 학교에서 돌아올 무렵이면 자식의 외투를 입고 동구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식에게 당신의 체온으로 덥혀진 외투를 입혀 주었습니다. 쉰 둘, 자식이 결혼할 여자라고 집으로 데려 왔습니다.
당신은 분칠한 얼굴이 싫었지만 자식이 좋다니까 당신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예순, 환갑이라고 자식이 모처럼 돈을 보냈습니다. 당신은 그 돈으로 자식의 보약을 지었습니다. 예순 다섯, 자식 내외가 바쁘다며 명절에 고향에 못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동네 사람들에게 아들이 바빠서 아침 일찍 올라갔다며 당신 평생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오직 하나,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한평생. 하지만 이제는 깊게 주름진 얼굴로 남으신 당신. 우리는 당신을 "어머니"라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부모님은 오직 우리가 잘되기만을 바라십니다. 요셉은 종살이도 하고 죄수복을 입고 감옥살이도 하며 별별 고생을 다 했지만, 마침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부모님을 황금 수레에 태우고 큰 영예를 돌렸습니다. 특히 요셉은 믿음으로 바르게 잘 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놀라운 효도였습니다. 자녀가 영육 간에 복 받고 잘 사는데 기뻐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부모님은 자식이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영광 드러내며 사회에서 큰 사람으로 살아갈 때 크게 기뻐하십니다.
요셉의 효성은 그와 그의 가문에 복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요셉과 같은 효성으로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잘 공경하고, 또한 육신의 부모께 효도하며, 나아가 부모의 위치에 있는 많은 다른 분들을 잘 공경하며 살아가심으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문에 큰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