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화

대접에 대한 예화모음

공 상희 2011. 7. 29. 16:13

 

대접에 대한 예화모음

 

가난
손님 대접할 것도 없는어떤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차를 내어 오라고 재촉을 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으므로 참다 못한 주인이 안방에 쫓아오자, 아내가 불평을 쏟아 놓는다.
일년 내내 차 잎새 하나 산 적이 없는데 왜 그리 야단이에요.
그러면 맹물이라도 끓여오지.
땔나무가 있어야 물을 끓이지요.
이런 바보 같으니. 베개 속에 짚이 있잖소! 하고 남편이 소리를 치자 아내도 지지 않고 악을 썼다.
누가 바본지 모르겠네! 글쎄 베개속의 조약돌을 어떻게 때란 말이예요.

 

부지중 천사을 대접한 아브라함
우리는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이 찬사를 대접한 기사를 잘 알고있다.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여 크게 복을 받았다.
(100세때 아들을 얻게 됨) 사르밧의 과부도 주의 종을 대접하여 흉년을 잘 지낼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

 

먼저 존경하고 대접하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옛날에 앤드류와 타머스라는 수도사가 살았습니다. 그들은 사이가 좋아 한 번도 싸운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단조로운 삶에 변화를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싸움을 하기로 했습니다. 싸움의 방법은 빵 한 덩이를 놓고 서로 자기가 먹겠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앤드류가 “
이 빵은 내가 먹어야겠네 !”하고 말하자, 타머스는 『아니, 그 빵은 내가 먹어야 하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앤드류는 “그래 ? 그렇다면 자네가 먹게 ”라고 쾌히 대답을 했습니다. 결국 이들의 싸움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우리는 앤드류와 타머스와는 달리 많은 다툼을 일으키며 삽니다. 형제끼리, 친구끼리, 부부끼리... . 싸움은 자기 것만을 고집할 때 일어납니다. 혹, 다투고 아직 화해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까 ? 먼저 존경하고, 먼저 대접하십시오.

 

남을 대접하라

여호와께서 마므레란 곳의 상수리나무 아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더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자 셋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발을 씻게하고 쉬게하였으며 떡을 갖다 대접한 일이 있었다.
아브라함의 정성에 감격한 하나님의 사자들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하였다.
남을 대접하는 일만큼 인간미 넘치는 일이 없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좋은 일을 하면 양심이 기뻐하고 남을 괴롭히면 양심이 싫어한다.

이씨조선 선조시대의 명의 허준이 아직 명의가 되기전 초보적인 의학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서울 구리개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하루는 남루하게 입은 노인 한분이 찾아와 약국 한모퉁이에 앉아있었다. 사람을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안나타난다는 것이었다.
비좁은 약국인데도 허준은 조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 노인은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사흘이 지나도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허준은 그 노인을 정성껏 대접을 했다. 그 때 산모가 쓰러져 죽게 되었다고 급한 자가 찾아왔다.
허준은 도저히 약방문을 만들 수 없었다. 이 광경을 보고있던 노인이 곽향 정기산을 지어주라고 했다. 그대로 했더니 그 환자가 깨끗이 나았다.
그 노인은 당대의 명의인데 자기의 의술을 전수시킬 사람을 찾던 중 허준과 같은 마음씨 착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즐거워하는 일이니라.

 

거지 대접이 왕 대접됨
러시아 이완 대제 하면 아주 선정을 베푼 유명한 분입니다. 이분은 종종 백성들의 생활을 알기 원해서 은밀하게 민정을 살피곤 했습니다.
한번은 비바람이 요란하게 내리치는 어느 날 밤에 방랑객으로 변장을 하고, 이 집 저 집 찾아 다녔습니다. 가는 집마다 거절을 당했습니다.
이 황제는 아주 참담한 심정이 되어서 도심지에서 벗어난 변두리 집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어느 가난한 농부의 집 대문이 열리더니, 반갑게 그를 맞아 들였습니다. 마침 아기가 순산을 했고, 조리 중 이였습니다.
이 가난한 농부는 짚방석 한 개와 한 덩어리의 빵, 그리고 물 한 그릇 외에는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듭거듭 문전 박대를 받던 그 황제는, 이 마음씨 착한 농부를 만났다는 그 기쁨 때문에, 오히려 흐뭇한 마음에 짚방석에 앉아 평안한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그는 농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그는 황제의 신하들과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호화로운 왕의 행차로서 농부의 집으로 갔습니다.

 

먼저 존경하고 대접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하며”-롬 12:10.
옛날에 앤드류와 타머스라는 수도사가 살았습니다. 그들은 사이가 좋아 한번도 싸운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단조로운 삶에 변화를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싸움을 하기로 했습니다.
싸움의 방법은 빵 한 덩이를 놓고 서로 자기가 먹겠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앤드류가 “ 이 빵은 내가 먹어야겠네 !”하고 말하자, 타머스는 『아니, 그 빵은 내가 먹어야 하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앤드류는 “그래 ? 그렇다면 자네가 먹게라고 쾌히 대답을 했습니다.
결국 이들의 싸움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우리는 앤드류와 타머스와는 달리 많은 다툼을 일으키며 삽니다.
형제끼리,친구끼리, 부부끼리... . 싸움은 자기 것만을 고집할 때 일어납니다. 혹, 다투고 아직 화해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까 ? 먼저 존경하고, 먼저 대접하십시오.
“주님, 저희로 먼저 사랑하고, 먼저 존경하고, 먼저 대접하고, 먼저 화해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


당연히 받아야 할 대접을 받는다고
우스운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착한 이발사가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신부가 찾아와서 이발을 했어요. 이발사의 마음에 '이렇게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주의 종을 이발을 내가 해 드렸으니 오늘은 요금을 받지 않겠다' 생각해서 그저 "그냥 가십시오. 하나님께 봉사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랬어요. 신부가 그냥 집으로 갔어요. 그러나 너무 고마워서 그 다음 날 교회에서 사용하는 기도문 몇 권을 우편으로 보냈어요. 그래서 배달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은 또 순경이 머리를 깎으러 왔어요. 이발을 해 주고 또 그는 말합니다. "저도 좀 지역 봉사를 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냥 가시지요." 돈 내겠다고 하다가 "그러시지요." 그러고 갔어도 또 너무 고마워서, 참 착한 마음이거든요. 그래서 편지 한 장하고 도너스 몇 개를 봉투에 넣어서 그 문 앞에 놓고 갔어요. 그 다음날은 국회의원이 왔어요. 역시 이발을 해 드린 다음에, 돈을 내겠다고 하니까 "아, 내지 마십시오. 저도 국가를 위해서 봉사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고맙습니다." 그러고 갔어요. 그 다음날 이발소 앞에 국회의원들이 줄을 섰더랍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받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혜택을 입었다고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하는데, 국회의원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고 생각한 거예요. 당연히 받아야 할 대접을 받는다고 착각했어요. 이게 바로 문제예요.


남을 대접하라
여호와께서 마므레란 곳의 상수리나무 아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더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자 셋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발을 씻게하고 쉬게하였으며 떡을 갖다 대접한 일이 있었다.
아브라함의 정성에 감격한 하나님의 사자들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하였다.
남을 대접하는 일만큼 인간미 넘치는 일이 없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좋은 일을 하면 양심이 기뻐하고 남을 괴롭히면 양심이 싫어한다.
이씨조선 선조시대의 명의 허준이 아직 명의가 되기전 초보적인 의학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서울 구리개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하루는 남루하게 입은 노인 한 분이 찾아와 약국 한 모퉁이에 앉아있었다. 사람을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안나타난다는 것이었다.
비좁은 약국인데도 허준은 조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 노인은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사흘이 지나도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허준은 그 노인을 정성껏 대접을 했다. 그 때 산모가 쓰러져 죽게 되었다고 급한 환자가 찾아왔다.
허준은 도저히 약방문을 만들 수 없었다. 이 광경을 보고있던 노인이 곽향정기산을 지어주라고 했다. 그대로 했더니 그 환자가 깨끗이 나았다.
그 노인은 당대의 명의인데 자기의 의술을 전수시킬 사람을 찾던중 허준과 같은 마음씨 착한 사람을 만난것이다. 손대접하기를 힘쓰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즐거워하는 일이니라. -아멘-


 19.99달러 점심

   미국 워싱턴의 번화가인 K가에 위치한 이탈리아 음식점 [티베리오](Tiberio)는 정치인, 관리, 기업인, 변호사 등이 즐겨 찾는 고급 음식점이다. 티베리오는 93년 한때 웬만한 고급 음식을 19달러99센트로 즐길 수 있는,  이른바 [윤리 식단](Ethics Menu)이라는 것을 점심때 선보인 적이 있었다.  92년부터 재강화된 미행정부의 공직자윤리규정이 점심 식사는 물론 [20달러(한화 1만5천원)]를 넘는 일체의 향응을  금지 시킨데 따른 고육지책이었다.
이 규정은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미관리들의 원성의 대상이다.
   대접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대접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그럴 듯하게 식사할 수 있는 곳
중에서 20달러 미만의 식단을 가진 음식점을 찾아내 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20달러 규정은 행정부에서 그치지 않고 의회로까지  불길이 번지고 있다. 현재 의회에 계류중인 [로비스트 개혁안]은 의원들이 로비스트로부터 한 회에 20달러, 연간 총 2백달러 이상 넘는 선물등  향응을 받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비슷한 관련 법안이 여러가지 있고 또 공화-민주 양당의 정치적  절충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이 법안의  운명자체는 불투명하지만,  미국관리 또는 정치인이 [죄의식 없이] 공짜로 받을수 있는 [눈 먼 선심]의 상한선이 겨우(?) 20달러라는 점이  놀랍다.
   20달러 윤리규정이 지켜지는지를 일일이 감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안심했다가는 큰 봉변을 치르는 것이 미정치문화다. 뉴햄프셔주 출신의 로버트 스미드 상원의원(공화)은 최근 전혀 예기치 못한 구설수에 올라 곤욕을 치렀다.  그는 얼마전 내년의 재선 선거를 앞두고 {기금모금 전문가 1명을 물색해서 의
원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달라}는 부탁을 한 선거전문가의  전화자동응답기에 남긴 적이 있다. 미의원윤리법이 공적인 업무만을 수행해야 할 의원 사무실에서는 일체의 선거운동과 관련한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점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해명 압력이 거세지자, 스미드 의원은 {의원 사무실에서 전화한 것이 아니라 공화당 상원 선거운동본부에서 했고, 사무실로 곧자리를 옮길 것 같아 그쪽 전화번호를 남겼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이런 지경이니 사무실에서 엄청난 돈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뿐더러,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지 모를 [국민들의 눈길]을 항상  의
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미정치인들이 부정을 저지르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까닭은 바로  그들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엄한 눈초리가 있기 때문인 듯 싶다.


객인 환대(歡待)
서부극(西部劇)은 대체로 낯선 사람끼리의 만남으로 시작되고 있다. 지평선(地平線) 위로 모자를 깊이 눌러 쓴 사나이가 말을 타고 솟아오른다. 이를 목격한 농가에서는 온 식구가 창변에 총을 겨누고 기다린다. 자신들을 해칠 사람이 아닌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총을 거두고, 나는 목축을 하는 토미다, 나는 모피(毛皮) 수집을 하는 뜨내기 지미다 하고 악수를 나눈다. 그동안에도 항상 경계를 하며 지극히 사무적으로 응대한다.
말레이지아의 농촌에 낯선 손님이 오면, 약 10미터 전방에 세워두고 종교를 묻는다. 회교도(回敎徒)라고 하면 일단 맘을 놓고 밖으로 난 사랑채의 베란다까지만 안내한다. 여기에서 제 2의 관문을 거쳐야만 한다. 고추로만 요리된 맵디매운 음식을 먹게끔 강요받는다.  이 음식을 태연히 먹어내면 제1급 손님으로 안방에 안내되어 환대를 받고, 못 먹어내면 제2급 손님으로 베란다 신세를 못 면한다. 이처럼 세상사람들은 낯선 이인(異人)이나 객인(?.人)에 대해 대체로 적의(敵意)와 경계로써 냉대하거나 고된 시련을 부여한다. 한데 우리 한국인처럼 객인을 환대하는 민족은 드문 것 같다.
대원군 때 미국 선박인 서플라이즈호가 철산(鐵山)에 표착(漂着), 선원들이  적의를 품고 무장을 한 채 상륙했지만 철산부사인 백낙연(白樂淵)은 당사자인 미국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했을 만큼 극진한  대접을 하고 이들을 북경에 송환시키는데, 한 사람 빠짐없이 말에 태워 각기  시중하는 하인 하나씩을 수행시키고 있으며, 의주(義州)에 이르러서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융숭한 잔치를 베풀어 주고 있다.  제너럴 셔먼호의 응징을 위해  강화도에 출동, 포격까지 강행했던 미(美) 극동함대의  로저스 제독은 강화유수(江華留守)로부터  `아국(我國)은 타국(他國)을 괴롭힌 일이 없는데,  어쩌다 타국이 아국을 괴롭힘은 무슨 도리인가'하는 일전을 불사한다는 강경한 서한을 받고 있다.
한데 이  선전(宣傳)포고장의 말미에 `만리풍파(萬里風波)에 시달려 시장할 테니 약소하나마 거세(去勢)한 황소 세 마리와 닭 50수, 그리고 달걀 1만 개를 보내노라'고 객인환대의 습성을 못 버리고 있으니 이런 선전 포고장을 동서고금 어느 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이 습성이 이번 중공에서 온 예기하지 않았던 객인들에게도 구현된 것 같아 어딘가 맘 한쪽에 가려움증 같은 것을 불금케 하고 있다.


        섬김 거지 대접이 왕 대접됨
  러시아 이완 대제 하면  아주 선정을 베푼 유명한 분입니다. 이분은 종종 백성들의 생활을 알기 원해서 은밀하게 민정을 살피곤 했습니다.
  한번은 비바람이 요란하게 내리치는  어느 날 밤에 방랑객으로 변장을 하고, 이 집 저 집 찾아 다녔습니다. 가는 집마다 거절을 당했습니다.
  이 황제는 아주 참담한 심정이 되어서 도심지에서 벗어난 변두리 집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어느 가난한 농부의 집 대문이 열리더니, 반갑게 그를 맞아 들였습니다. 마침 아기가 순산을 했고, 조리 중 이였습니다.
  이 가난한 농부는 짚방석 한 개와 한 덩어리의 빵, 그리고 물 한 그릇 외에는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듭거듭 문전 박대를 받던 그 황제는, 이 마음씨 착한 농부를 만났다는 그 기쁨 때문에, 오히려  흐뭇한 마음에 짚방석에 앉아 평안한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그는 농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그는  황제의 신하들과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호화로운 왕의 행차로서 농부의 집으로 갔습니다.
  신하를 통해서 이 농부 앞으로 인도함을 받았는데, 황제가 마차에서 내려서 농부의 손을 잡고 '지난 밤에 후한 대접을 감사하다'고 하면서 금 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그 농부는 깜짝 놀랬습니다마는 조금 후에 지난 밤 과객이 바로 이 이완 대제라고 하는 것을 알고 황공하여서 엎드렸습니다.
  그 황제는 그를 일으켜 세운 뒤에 말하였습니다.
  "어젯밤 그대는 나를 걸인으로 영접했지만, 오늘 나는 임금으로서 그대에  게 상을 내리고자 이렇게 왔노라."
  얼마나 장한  일인가? 농부는 아무 보상을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대접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그리스도의 천사
  히 13:2; 딤전 5:10; 벧전 4:9
독일 산골에 가난한  한 농부가 아들과 딸과  같이 살고 있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밤 두  아이는 창 밖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창문을 열어보니  남루한 차림의 한 아이가 "추워죽겠으니 안으로 들 어가게 해주세요."라고 가냘픈 소리로 사정했다.  두  아이는 즉시 문을 열고 들어오게  하여 따뜻한 난로
옆에 앉히고 음식을 그 아이에게 대접했다.
그리고 그 거지 아이를  침대에서 자게 하고 자신들은 마룻바닥에서 잤다.
  다음날 새벽녘 막 해가  돋으려는데 한 무리의 소년들이 금 거문고를 타면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거지  아이를 깨우러 가니 벌써  일어나 침대 옆에서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의  천사다.   세상에 착한 아이를  찾으러 왔다."그 거지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추위나  배고픔을 모르는 떡을 두 아이에게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나 먹자고는 못 살 굴비 자료원 : 한국컴퓨터선교회
  어느 교회 대심방 때만 되면 점심 밥상에서는 반찬얘기로 꽃을 피우곤 한다. 담임 목사님이 영광굴비를 잘잡수신다고 하여 성도님들간에는 영광 굴비는 아니라해도 조그마한 조기를 구워 놓기도 하고 쩌놓기도하여 구색을 갖추곤 한다.
  그러던 어느날 영광굴비 값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굴비값이 요즘은 얼마나 하느냐고 어느 여집사님이 물으니 어느 남 집사님의 대답[말도 마시요. 서울 백화점에 갔다가 굴비코너에서 정가표를 보았더니 작은것이 한짝에 12만원 중간것이 18만원, 큰것은 25만원]이란 소리에 모든 사람이 합창하듯 하품을 하는 것이 었다. 그리고 결론으로 어느 분이 매듭을 짓는다.
 [나 먹자고는 못 살 굴비로구나] 25만원 짜리 굴비 한 마리가 2만 5천원이니 쌀두말 반 값이고 쇠고기 4근 값이니 누가 비싸서 먹겠는가!
 그때 어느 점잖은 집사님이 말씀을 잇는다. [나 먹자고는 못사도 부모님 대접 하기 위해서는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이 말에는 모든 사람이 참 그럴 것이라고 동의하면서 하두 비싸서 부모님 보다도 할머님께 대접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단다.
  신라 헌덕왕 때 손순은 부모님 밥상에 자기 자식이 있어서 누가 된다 하여 갔다 묻고져 땅을 파다 뜻 밖에 발견된 석종으로 인해 그 소식이 왕궁에 들려 효자 효부의 상을 받았다고 했는데 요즈음처럼 효자를 찾기 어려운 때에 영광 굴비가 아무리 비싸도 부모님의 대접을 위해서는 살수 있다고 하니 함께 동석했던 목사님 말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했으니 목사도 기다려 봄직하다고 해서 좌중을 웃겼단다


네 땅에 우거하는 객을 학대하지 말며


 1. 산업재헤 외국인 5천명 이상
 @ 약 10만명의 저개발국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주로  3D  직종(dirydifficult danger0 에서 일하고 있다.
 @ 이들 중의  약  3%정도가  사고를  당하며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약 5,000-10,000명 정도가 산재를 당했다.

 2. 손상되는 국가 이미지
 @ 어떤 네팔 노동자는 오른손을 잘리고 5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형식적인 법 논리를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국가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다.
 @ 다행히도 정부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3년을 소급 적용해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3. 구약의 법 정신
 @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을 학대하지 말며"(신 24:14)
 @ 구약의 법정신은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옹호할 것을 가르친다.

 4. 앞으로의 과제
 @ 교회가 구약의 법정신을 기억하고 현실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개교회 적용지침
 1. 우리 교회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있습니까?
 2.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공부해 봅시다.


"먼저 대접하라"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데 존재의 의미를 두십니다. 따라서 성도가 진 실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즉 이웃에게 주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 7:1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먼저 대접  받으려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탐욕을 가지고 대접
받기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법칙을 거스리는 사람이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과 복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나님께 큰복을 받을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남 대 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우 리니만큼 하나님앞에서 복받을 자질을 갖춘 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민족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크게 부강한 민족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누가복음 6:38)

 

 옛날에 앤드류와 타머스라는 수도사가 살았습니다.
그들은 어찌나 사이가 좋았던지 한 번도 싸운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두 사람은 단조로운 삶에 변화를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싸움을 하기로
했습니다.
 싸움의 방법은 빵 한 덩이를 놓고 서로 자기가 먹겠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싸움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앤드류가 "이 빵은 내가 먹어야겠네!"  하고 말하자, 타머스는  "아니, 그 빵은 내가 먹어야 할 것이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앤드류는 "그래? 그렇다면 자네가 먹게"라고 쾌히 대답을 했습니다. 결국 이들의 싸움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우리는 앤드류와 타머스와는 달리 많은 다툼을 일으키며 삽니다. 형제끼리, 친구끼리,
부부끼리... 싸움은 자기 것만을 고잡힐 때 일어납니다. 혹, 다투고 아직 화해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까? 먼저 존경하고, 먼저 대접하십시오.
"주님, 저희로 먼저 사랑하고, 먼저 존경하고, 먼저 대접하고, ㅁ너저 화해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
 친구나 형제나 배우자나 부모나 자식의 마음을 상하게 했나요? 곧 달려가 화해를 하십시오. "제가 잘못했어요"라는 말 한마디는 당신의 영혼을 맑게 해 줄 것입니다.


 문둥이를 대접한 프란시스
  한 문둥이가 성 프란시스에게 찾아와서 간청하였다. 하룻밤 자고 가게 해 달라는 것이다. 프란시스는 진물  나고, 냄새나는 헌데를 우선 씻어 주고는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방이 없어서 한방 한자리에서 같이 누워 잤다.
  프란시스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방에 와서, 보니  그 문둥이는 없어졌고, 그 누웠던 자리에서 나는 향기는 방안에 가득하였다.
  예수님의 음성에  "대접을 잘 받았노라."
  프란시스는 주님과 잠자리를 같이하였음에 놀래어 감사 감격하였다.


  섬김의 삶

사람은 누구나 높은 사람, 큰 사람, 대접받는 사람, 권세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 하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며 죄인된 우리를 대신해 가장 추악한 죄인만이  지는 십자가를 지셨다.

내가 지금까지 본받으려 노력해온,  그리고 현재나 앞으로도 예수께 본받고 싶은 점은 바로 이'낮아짐'의 도(道)이다. 낮아진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높아지려는 사람이 대부분인 이때, 예수의 "너희도 가서 남의 발을 씻기라"는 말씀은 언제나 내생활 가운데 있다. 섬기는 삶, 낮아짐의 도,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는 제자가 배워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이리라.             


섬김
  가난한 달동네에서 교회를 오래전에 개척하신 목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교회 에 나오는 성도들은 달동네라 생활형편이 지극히 가난했습니다. 성도들의 집안사정 을 속속들이 너무나 잘 아시는 목사님은 심방을 할때 성도들이 없는 가운데 식사 대접을 하려고 하면 언제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라면" 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한동안 성도들의 가정에서는 목사님을 라면으로만 대접하였습니다.
  그후 교회가 크게 부흥을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미국 한인교회에 부흥회를 초청 받아 가시게 되셨는데 부흥회를 인도하는 그 교회에는 예전 개척교회 시절의 여전 도 회장이 있었습니다. 첫날 저녁 여집사님은 자기 집에서 목사님을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작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저녁식사에 초대되어 가보니 라면이 큰 대접에 가득히 담겨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목사님, 라면을 제일 좋아하시죠?  라면 한 박스 사놓았으니 마음껏 들고 가세요."


 톨스토이의 제화공
  톨스토이의 이야기중에 어느 제화공이 있었는데 늘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했다. 어느날 꿈 속에 예수님이 나타나 내일 네 집에 가겠다고 하셨다. 구두장이 할아버지는 대단히 기뻐하며 음식을 차려놓고 예수님을 기다렸다.그러나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한 번은 거지가 오고 또 한번은 청소부 영감이 저녁때는 사과장수 아주머니가 왔다.모두 가난하고추위에 떨고 있었다. 구두방 할아버지는 불쌍하게 생각하며 예수님을위해 준비했던 음식을 그들에게 먹였다.그날 밤 꿈속에 다시 예수님이나타나셔서"나는 오늘 너희집에 세번이나 가서 세번 다 잘 대접받았다참으로 너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네 이웃에 사는 보잘것 업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하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
    종교에도 여권주의 입김, 하느님의 父性 점차 인정 안해 대체로 현대는  아버지가 별로 존경받지  못하는 시대이며 비근한 예로 가장 위대한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하느님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기독교 원리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하느님의 아들에  집착한다. 구원받으려면 예수를 체험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오순절파  기독교도들은 삼위일체의 하나인  성신을 중시한다. 가톨릭 교도들은  성모 마리아를 기독교의 완벽한 표상으로 삼는다. 여러 개신교  주류 종파들은 남녀性 구분을 없애겠다는 일념에서 찬송가와 기도서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부분을  열심히 삭제하고 있다. 뉴에이지사  유대교도들 역시 신성한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에서 남성을 연상시키는 부분을 끊어내고 '야'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추세다. 모든  사람은 천국에서 하느님의 '영적 자식'으로  태어난다고 믿는 모르몬 교도들만이 하느님의 부성을 인정할 뿐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성자와  완전한 동정녀 성모마리아 및 反가부장적인 시대 정신과 어떻게 겨룰 수 있을까?
    성서조차도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에 대해서는 냉담하다.  하느님 호칭면에서 '거룩한 분',  '왕' 혹은 '주님'이라는 표현을 가장 많이  쓰는 것은 헤브루 성서다. 시편의 일부 내용을  제외하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예는  거의 없다. 물론 예수는 자신의 모든  기도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드렸고 제자들에게도 본받도록 가르쳤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람어로 '아빠'와 비슷한  뜻을 지닌 애칭인 '압바'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신약은 대부분의 서구 문학과 마찬가지로  아들의 관점에서 서술됐으며  그의 신성을 찬양하고  있다. 기독교 미술에서  가장 자주 묘사되는 대상은 예수와 성모 마리아다. 어쩌다  성부인 하느님이 등장하는 경우엔 예수나 성령과 함께 묘사된다. 초기 기독교도들은 성부를 성자와 아주  비슷한 젊은이로 생각했다.  후대의 기독교  미술은
성부를 구름 속에서 뻗어내려온 한 개의 손으로 축소했고 15세기에 이르러서는 턱수염을 기르고 르네상스  시대 교황의 복장과 비슷한 옷을 입힌 노인으로 그렸다. 시스틴 성당의 천장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전능한 창조주는 박력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미국 카톨릭신학회 회장인 엘리자베스 존슨 수녀와 같은 여권주의자들은
그런 모습이 현대의 감각으로  볼 때 지나치게 '남성중심적'이라고 본다.
    어떤 종교체제에서든 우주의  창조주를 가부장으로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슬람교의 알라는 전능하고 자비로운 신이지만 그의  호칭 99개 중에 '아버지'는 들어 있지 않다. 힌두교의 창조주는 브라마다. 그러나 인도 전역에서 브라마를 모시는 신전은 불과 몇 개 안되는 데 비해 아들 비슷한  그의 화신들인 비슈누와  크리슈나, 라마를 모시는  신전은
수천 개도 넘는다. 불교에는 창조주가 없다.
    대부분의 기독교들과 유대교들은  아직도 하느님 아버지에게 기도를 올린다. 그러나 여권주의 신학자들의 주장대로라면 그런  날도 많이 남지 않았다. 미국의 여러 명문 신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비유함에 있어서 조심하라고 가르친다.  이제 '하느님 아버지'는 '하느님  어머니'와 대등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었다. 존슨 수녀는  되도록
여성 호칭(She Who Is)을 쓰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性표시 문제를 피하기 위해 단순히 '하느님 자신'(Godself)이란 호칭을 사용한다.
    오늘날 주도권을 행사하며 책임을  지고 자녀들을 위해 싸우며 강한 요구를 내세우고 거절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자녀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벌을 주기도 하는  한마디로 아버지 노릇을 해주기를 하느님에게 기대하는 신학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이제 아버지날(6월16일)에는 틀에 박힌 넥타이 선물은 생략하고 하느님 아버지에게 기도를 드
리든가 건배를 올림이 어떨는지. 


 프로와 아마츄어 ③   

< "바로 당신이 사역자입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역자' (使役煮)하면 목사님들이나 전도사님, 선교사, 선교단체의 헌신자들만이 사역자인 것으로, 거기서 조금 나아가 지난 두번의 글을 읽으신 분들은 여기에다 성가대 지휘자, 반주자, 성가대원, 주일학교 교사정도까지 포함시켜 '사역자'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그들만이 사역자라고 하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앞에서도 여러번 언급하였지만 '사역자'란 '부름을 받아 일시킴을 당하는 자'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무리가운데서 '특별히 지명되어 불리워낸 자들'을 일컫습니다. 그렇다면 .... 이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다 '사역자'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키득거리며 항변할 수도 있을것입니다. "무슨 소리요? 난 내발로 스스로 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었다구! 부처님과 하나님중에서 하나님을 택한 건 바로 나라구! 이거 왜이래?" 그러나 하나님께선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하여...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요한복음 15:16
- 19)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 처럼 보여도 사실상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이 자리로 부르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십니다. 성경전체가 성도들을 언급할때 '하나님(예수그리스도)으로 부터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도들은 세상속에서 '호출'을 받은 무리라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아니 두 종류라고 하는 것보다는 '두 단계'라고 하는게 더욱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것은 이런 이야기로 설명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국방의 의무를 위해 징집영장 (나라의 부름)을 받는 것은 1차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군입대를 하면 또다시 "누구누구! 너는 1번 소총수다. 누구누구! 넌 전병이다!.."는 식의 두번째 단계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 1차호출을 '구원으로의 부르심'이라하고, 2차호출을 '직분 (혹은 직무) 으로의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크리스챤이면서 이 두가지의 '부르심'을 다 받지 않은 이는 단 한명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곧 누구나 다 '사역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이야기는 명확해집니다. 우리가 지난 두번의 회보를 통해 '사역자는 이러이러해야한다'느니 사역자들에 대해 때리고 차고 엎어지며 어퍼컷과 이단 옆차기를 먹였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우리 모두가 받아야할 훈계였다는 것입니다.

'예수쟁이'로의 부르심은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쟁이란 말이 크리스챤들을 빈정대는 말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우리가 이 호칭에 기죽거나 언짢아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을 섬기며 산다는 것이 그저 대수롭잖은 일입니까? 죄송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선)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세상속에서 별짓을 다한 야비하고 비굴하고 더러운 우리들, 도둑놈, 창녀, 사기꾼, 강도, 살인범, 아무리 잘봐줘도 '거룩한 구석'이라고는 한군데도 없는, 쪼다같은 우리들을 세상속에서 불러다 내놓고 하나님께서 뭐라고 선언하셨는지 아십니까?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며,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며...(베드로전서 2:9-10)"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전능자이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상상해보십시오. 우리가 다리밑에서 사는 거렁뱅이들로 온갖 못된 짓은 다하고, 모이기만 모이면 "대통령 따윈 필요없다. 죽이자!"라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대통령을 모욕하고 정권타도를 외치던 자들인데, 어느 날 누구누구는 나오라 해서 나갔더니 거기에 대통령이 직접 나와 인자한 얼굴들로, "저는 여러분이 그동안 저에 대해서 어떻게 해왔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최용덕, 이재범, 정명옥, 허돈.....그러나 여러분의 과거는 상관치 않겠습니다. 여기 불려오신 여러분들은 이제 장관들로 택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나와 함께 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청와대에서 사십시오"했다면.....뒤로 자빠지지 않겠습니까? 그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아니 어떻게 감히 하나님과 대통령을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아원에서 망나니로 살고있는 나를 대구시장이 찾아와 "이제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부로 내 호적에 오를 것이다. 너는 내 상속자다."라고 해도 기절할 일이거늘....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어라구요? 왕같은 제사장? (고대국가에 있어 정치계의 왕과 종교계의 제사장은 나나라를 다스리는 핵이요 중추였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룩한 나라라구요? (이 말은 우리가 바로 하나님이 다스리실 천국을 이루는 구성언이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라고요? (우리의 소속이 세상이나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받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의 가치를 눈꼽만치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챤'으로 호출이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우리 자신에게) 무슨 감격이니 하는 것이 생길리 만무합니다. 감격은 고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그렇게 시시콜콜 간섭하시고 잔소리하시는지 그 이유조차도 알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니 한다는 소리가 "우리가 당신의 노예입니까?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뭐해라 뭐 하지마라 간섭하지 마십시오" 입니다.
더욱 안타깝고 한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게 '이 땅에서 조금이라도 선하게 살고 착한일 많이하고 살아라'고 부르셨다고 믿는 일입니다. 이것이 어떤 차원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다리밑에서 거렁뱅이로 살고 있는데 어느날 왕이 우리를 데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신하들을 시켜 목욕시키고, 이발시키고, 옷해입히고, 걸음걸이 연습시키고 말씨교정시키고 하자 "야 - 대왕마마께서 우리가 좀 깨끗하게, 교양있게 살아라고 이렇게 하시는가 보다"하고 떠드는 꼴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정도의 차원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정신차려야 합니다. 왕이 우리를 다리밑에서 건져내신 것은, 우리로 교양있고 선한 인간이나 만드시려는 정도가 아니라 그 차원을 뛰어넘어 바로 우리를 왕의 호적에 입적시키고 장차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에까지 우리를 끌어올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정도란 말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이 이야기가 바로 베드로 전서 2:9-10의 '하나님의 백성, 왕같은 제사장....'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은혜앞에 '대성통곡'하며 "내게 베푸신 성은(聖恩)이 망극하여이다"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와 - 땡잡았다"라고 감격하고만 있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정작 나누어야 할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께 「공갈, 협박(?)」을 몇가지 드리려고 합니다. 단단히 긴장하십시오.

군대를 갔다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4주간의 기본교육훈련을 받고나면 긴장된 순간이 다가옵니다. 3년동안 복무해야될 자기의 부대가 결정되는 호명(부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물론 약간 드물겠지만 만약 당신이 평소에 공수특전대원이 되는것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 - 그런데 정말 당신의 이름이 불린것입니다. "으악! - 걸렸다! 으하하하!" 평소에 영화에서 본 공수특전대원의 그 화려하고 용맹스러운 모습이 눈앞에 왔다갔다하며 자신의 모습이 거기에 클로즈업되는데 가슴이 뛰고 흥분까지 됩니다. 자기는 뽑혀서 좋아 죽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사색이 되어 버들버들 떨고있고 어떤 사람들은 질질 울기까지 합니다. '쳇! 바보들! 공수특전대원이 얼마나 멋있는지도 모르나?'
드디어 밤차를 타고 특전부대에 도착하자 부대장이 환영사를 합니다."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자랑스러운 공수특전대원이 된 것에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어쩌고 저쩌고..." 자 - 부대장은 당신에게 "이제 앞으로 공수특전대원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까? "된 것"이라고 했습니까? '된 것'입니다.
과거완료형입니다. 이미 훈련소에서 당신의 이름이 불려진 그 순간에 당신은 대한민국 '공수특전대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영화에서 본 그 멋있고 용맹스러운 특전대원의 환영 (幻影)에만 사로잡혀 감격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영사가 끝나자 마자 '시작'된 것입니다. 무엇 말입니까?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쪼그려뛰기준비! 저기 오른쪽 축구 골대 돌아서 선착순! 실시! 머리박고 두손 등뒤로! 오른 발 들어.....
공수특전대원이 이미 '되었따'해놓고 왜 사람을 이렇게 잡습니까? 공수특전대원은 호명되는 순간에 이미 '된 것'이기도 하지만, '되어져 가야 할 것'이기도 하기때문입니다. 이 이야기가 성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하는 순간)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아니 받았습니다. 그것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군 입대전에는 1Km도 못뛰는 빌빌이에다 팔굽혀펴길고는 겨우 두번도 못했던 물렁살이었다 하더라도 훈련소에서 일단 특전대원으로 호명이 되면 그것이 취소될 수 없는 것 처럼 말입니다.
예수 믿은지 1초도 안되었는데 하나님은 환영사를 이런 식으로 하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소유이며 거룩한 백성이다!" 그런데 옆에서 사탄이 낄낄댑니다. "아유- 웃겨! 저런 엉터리, 놈팽이를 거룩한 백성이니 성도니 할 수 있는거야?" 그러나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름이 불리던 그 순간에 우리의 신분이 판가름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반대로 '하늘나라의 왕자, 공주'의 환영에 사로잡혀 "아이고 - 이제 입장권은 따놓았구나. 이제 마음놓고 개망나니처럼 내 마음대로 이 땅에서 살다가 천국에나 가자!"라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을 작정을 해서도 안됩니다. 왜 입니까? '환영사'가 끝나면 숨돌릴 틈도 없이 시작되는 '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고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이미 '받은 것'도 되지만 '이루어 가야할 것'이기도 합니다. 그 말씀이 사도바울께서 빌립보서 2::12절에서 하신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은 내가 그곳에 있을때 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에도 더욱 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계속 이루어 나가십시오"
훈련소에서 특전부대로 차출이 되어 밤차를 타고 떠나는 '사내'들이 왜 사색이 되어 어떤 이는 질질 짜는지 아십니까? 그들이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보고 '바보들!'했던 당신은 부대장의 환영사가 끝나고 시작된 '사람잡는 뺑뺑이' 를 맛보고야 "우왁! 이게 뭐냐?"라며 공수특전대원이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깨달았겠지만, 그들은 이미 군대에 오기 전부터 '공수특전부대'가 어떤 곳인지 다 알고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하셧는지 아시기나 하는 겁니까? 바보처럼 까불대며 "왕왕왕왕 나는 왕자다, 하나님 나라의 나는 왕자다....공공공공 나는 공주다!.....♬"라는 노래하나
만 알고있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쟁이'가 되었다는 것을,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어졌다는 것을, 천국가는 기차만 타고 있으면 된다는 정도로 생각해선 큰 오산이라는 것입니다.

특수부대요원이 된다는 것은 '전문요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아주 특별한 목적으로 호출되어진 사람들이 이들입니다. 호출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넌 이제 영예로운 특전대원이다"라고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다시 말하면 "이제부터 너를 용맹스럽고, 일당 천의 기백을 가진 훌륭한 특수부대전사(戰士)로 만들어주겠다"는 말입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십시오. 특전부대요원이 아무리 영예롭고 멋있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그런 군인이 되는 것을 아무리 사모하고 기대하였다하더라도, 일단 "넌 공수특전대원이다"라고 훈련소에서 호출이 된 신병은 이제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야 뻔한것입니다. 아뭇소리 못하고 그는 끌려가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부대로 향하는 기찻간에서 단 한가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단단한 각오'입니다. '그래! 죽이기야 하겠나? 까
짓거 아무리 독한 훈련이라도 받아내고야 말리라'는 각오입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부당한 것처럼 여겨지는 명령이라도 순종해야만 한다.'는 각오입니다. '군 입대전에 늘 해오던 생활방식, 습관, 취미생활 따위는 모조리 포기해야 하고, 이제 군대라는 새로운 삶의 법도와 생활방식을 배워야만 하고 배울 수 밖에 없다'는 각오입니다. '그저 군대란 곳은 「내」가 팍 - 죽어야만 살 수 있는 곳이다. 그래! 나는 죽자. 이기심도, 자존심도, 그냥 죽자!'라는 각오입니다. 무엇보다 그가 해야하는 각오는 '아무리 뺑뺑이를 치고 요령을 부리고 별 짓으로 피해봐도 이제 나는 '공수특전대원'으로 만들어지고야 말것이라는 각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시시한 사건이 아닙니다. '천국의 백성'으로 호출이 되었다는 것은 대수롭잖은 호출이 아닙니다. '왕 같은 제사장' 직분이란게 '별 것 아닌'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저 '믿기만 하면 천국백성이 된다니 그거 뭐 아무것도 아니네' 할 게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엉터리 같은 우리를 따로 불러다 놓고 먼저 「너희는 천국의 백성이요, 왕권까지 소유한 제사장이요, 나의 소유다」라는 임명장부터 수여를 하긴 하셨는데.....이제 이건 시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이등병 작대기 하나 달고 훈련소에 도착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특전대원은 이제부터 "만들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동네 야구만 하다가 어느날 해태 프로야구 감독의 눈에 띄어 해태선수로 픽.엎이 되었는데, 스카웃되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이제 다 되었다'라고 큰소리치는 멍청한 선수는 세상에 없을것입니다. 그 유명한 김응룡 감독에게 직접 픽.엎(Pick Up : 부르심)되었다는 것은 세상이 떠들
썩할 만한 사건이요 대단한 영광임에 틀림없지만, 김응룡감독은 엉터리 골목야구 선수를 데려다 놓고선 "넌 이제 프로야구 해태선수다"라고 말만 해놓구 그를 되는대로 내버려둘 리 없다는 말입니다. 이등병 작대기를 달고 특수부대 훈련소에 도착한 '물렁살. 빌빌이'나, 해태 유티폼을 입고 2군 훈련장에 도착한 동네야구 4류 투수나, 그 어느 누구도 예전과 같은 마음자세로 입단식에 임하진 않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이제 시작되어질 '훈련'이 어떠할 것인가를 명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너를 천국의 백성.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나의 자녀로 택하여 부르노라"라는 「부르심」에 응답하신 여러분께 공갈, 협박을 하나 해야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아이고 죽었다!"라고 복창하십시오. (복창 : 따라서 외침)
'그리스도인 (Christian)'이라는 말의 헬라원어는 '크리스티아노스'로 이 말은 라틴어 '크리스티아누스'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이 라틴어의 어미 - ' -- 아누스 (anus)'는 어느 한 집단에 속한 충성스런 무리들을 일컬을때 붙이는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그리스도를 충성스러이 추종하는 사람'에 게 붙이는 호칭입니다. 여러분, '추종'이란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십니까? 히틀러의 추종자들, 모택종, 스탈린의 추종자들.....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追從 : 뒤좇아 따라감) 한다는 것은 그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거나 멀찌감치서 흉내나 내어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살아가신 방법과 그분이 지니셨던 가치관, 사상이 바로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뒤를 좇게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천국을 이룰 구성원으로 선택되어진)에게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인격과 사고방식과 삶의 방법의 '수준'이 그저 착하게 살고 거짓말이나 안하고 남에게 해나 ㅇ히지 않는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지니셨던) 그 정도의 차원까지 끌어올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작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것이 그저 골목 야구팀이나 만들려고 하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해태, 빙그레쯤은 매 게임마다 200:0이나 1000:0으로, 통산전적은 100년연속 2만승 무패의 팀을 만드시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왕 '예수를 따라야 할'사람들로 차출이 된 우리라면「각오」를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어느정도의 각오입니까? '빌빌이, 물렁살' 신병이 공수특전대에 호출이 되어 기차에 실려가면서 가졌던 그정도의 각오면 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보다 백배정도는 더 되는 '무시무시한 각오와 결단'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의 비극이 여기에 있습니다. 공수특전대 호출 신병의 '각오' 백배정도는 커녕 그정도도, 아니 그정도의 백분의 일도 가지지 않고 '예수를 따라가기로' 저마다 나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 각오를 못하면 그것이 절대 요구된다고 가르쳐 주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마저도 없다는데에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겠다'는 것은 그저 한번 '예수에 대해 배워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예수' 혹은 '기독교인'이란 악세사리를 하나 더 달겠다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대전환입니다. 획기적인 U(유)턴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군인이 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옛날 즐겨입던 무릎을 이만큼 짼 청바지 위에다 군복을 입히는게 아닙니다. 훈련소에 들어가자 마자 런닝. 팬티까지 발가벗고 새로운 팬티, 런닝으로 갈아입히는 것입니다. 옛날 사고방식에다 새로운 세련된 사상을 덧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군대는, 세상에서 밤 4시에 자고 아침 11시에 일어나는 잠버릇을 20년동안 해온 사람이라도 밤 10시에 잠이오든 안오든 누워자야하고 아침 6시면 일어나야 하는 곳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아무리 피곤하든 말든 자다가 깨워져 한 시간씩 보초를 서야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쟁이가 된다는 것이 그저 대수롭잖고 만만한 것입니까? 물론 천국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군인이 되기란 쉽습니다. 나이가 되어 지원만 하면 곧장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알건 알고 군인이 되어야 합니다. 군인이 된다
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가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알 건 알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건 한번 해 볼만한 여가생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앞에서 얘기했지만 획기적인 변신입니다. 지금까지 지녀왔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들, 생활습관들을 발가벗겨 세상으로 보내고, 이제 전혀 새로운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으로 옷입어야 하는 곳이 '예수 믿는'자리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가치관을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교체해 가야만 하는 곳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엄청난 결단과 각오가 있어야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따르기로' 했을때 이런 '각오'가 있었습니까? 이런 '결단'이 있었습니까? 먼저 그 길을 갔던 선배들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주었습니까?
대답은 No! 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껍데기만을 소개해주었습니다. 마치 공수특전대원 병장이 얼룩무늬 군복에다 베레모를 쓰고 자동소총을 들고 나타나 '이제 여러분이 우리 부대에 오게되면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 믿으면 복받습니다. 예수믿으면 암이 낫습니다. 예수믿으면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 믿으면 지옥에 안가고 천당에 갑니다. 라는 것만 잔뜩 가르쳐주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었을때 그렇게 되던가요? 예수를 믿어도 사업은 기울고, 감기몸살은 여전하고, 암으로 죽어가고, 골치아픈 일은 여전합니다. 그러자...'에잇! 속았다'하고는 '탈영'을 해버립니다. 그러다 두들겨맞고 또 잡혀오면 죽지못해 교회에 나와 시간이나 때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위에 또 얼마나 많습니가? 바로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인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또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영화로우며 어마어마한 축복인지도 알아야 하지만, 그 신분이 그만큼 영화롭고 거룩하고 고귀하기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받아야 할 훈련이 '예사로운 것'은 아닐 것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다리 밑의 거렁뱅이가 왕의 양자가 되어 장차 나라를 물려받을 '왕세자'로 세워졌다면 그는 그날부터 '혹독한' 왕실 교육과 왕자훈련을 받아야 할 것은 자명한 일 아닙니까? 이 당연한 사실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출발하면서 모르기 때문에 우리에겐 이에 대한 아무런 각오도 다짐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습니까? 교회에 열심으로 다니다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하고는 교회를 떠나갑니다. 교회안에 조금만 무슨 문제가 생기면 기독교에 대해 실망했다느니 하나님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는 보따리를 쌉니다. 훈련받아야 할 이유를 모르는 군인, 훈련받고 싶은 의욕과 각오가 없는 군인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까? 그런 군인은 군대용어로 '죽었다고 복창'해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꼴입니다. 우리는 타이틀은 '예수쟁이'이지만 예수를 따라가고픈 의욕도 예수를 닮아가고 싶은 그 어떤 욕망도 없습니다. 그러니 십년을 예수를 따라다녀도 예수 비슷한 흉내조차 못내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방식대로 살려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고 그들을 향해 고함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것은 동네야구가 아닙니다. 병정놀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입니다. '예수쟁이'라고 할때의 '쟁이'는 우리말로 어떤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붙이는 호칭이었습니다. (대장장이, 멋장이... / 물론 낮추어 부르는 호칭이긴 해도) '예수쟁이'가 된다는 말은 그 삶의 방식과 가치관과 사고방식등이 예수그리스도가 지니셨던 그런것들로 바꾸어 지는, '예수화(化)'의 전문가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했을때 그들의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일일이 그런 항목을 적어놓고 외우게 하고 혈서를 쓰게 했기 때문인가요? 천만의 말입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알았습니다. 마치 징집영장을 받은 사람이 '군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무엇을 해야하며, 무엇을 요구하는지 다 알고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두눈에 불을 켜십시오. 아랫배에 힘을 주십시오.
도대체 오늘날 젊은이들이 교회에 모여앉아 날마다 하고 잇는 '짓'들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연애연습하는 곳입니까? 이 땅에서 어떻게하면 더욱 교양되고 세련되고 멋있게 살 수 있을까 연구하는 곳입니까? 목적도 목표도 없이 모여앉아 히히덕거리고 그 귀한 시간이나 때우는 젊은이들이 어떻게 해서 교회분위기를 장악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목표를 위해 데모를 하고 음모를 꾸미는 운동권보다도 못한 눈빛과 마음가짐들로 왜 그렇게 패기도 없이 빌빌대는 것입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겠다」는 각오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야 말겠다」는 다짐도, 소원도 없는 '녀석'들이 수백명 수천명 교회당에 우글거리면 무엇합니까?
두고보십시오. 아직도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그렇게도 모르고 계시는 여러분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냥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그래 까짓거. 너희 마음대로 해라!"하고만 계실줄 아십니까? 천만의 말입니다. 다음의 '협박(?)'을 받기전에 미리 정신을 차리십시오. 그렇게 뺑뺑이 치지 마십시오. 요령부리지 마십시오. "내가 뭣때문에 여기 나와있지? 내가 뭘해야 하지?" 하는 생각도 없이 그렇게 총을 거꾸로 메고 왔다갔다하며 교회에 문제만 일으키지 마십시오. 에이 - 거 지겹게 기도가 왜 이렇게 기냐? 예배시간 줄이자. 줄여! 야! 예배 마치고 한 담배 댕길까? 그래그래! 맥주나 한잔하고 애들 꼬셔 거기가서 한번 흔들자!"...... 죽을려고 환장하셨습니까? (저의 무식한 표현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하도 안타까워 하는 소립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포기하실 것 같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앞에서는 '물렁살, 빌빌이, 뺀질이, 다리밑의 거렁뱅이 쪼다'들이라고 예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이미 확고히 세워진 '계획'은 우리같은 '별 것 아닌 인생'들을 '천국의 백성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그 훈련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멍청하게 뭐가 천국백성을 만드는 훈련인지도 모른채 있지 마십시오. 당신이 천국백성으로의 호출에 응답한 그 순간, 그리고 훈련부대장의 환영사 ( '이제 너는 ....천국의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가 끝난 순간부터 이미 훈련은 시작되었습니다. 혹시 초장의 '쪼그려 뛰기, 선착순 뺑뺑이'에서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해서 일찌감치 널부러진 신병 그리스도인들은 없습니까? "아이고 - 아이고! 예수믿으면 복받는다더니...이게 뭐야? 아이고 나 죽겠네..나 - 예수 안믿어! 취소야! 취소!" 그리고는 의무실(교회)에서 뛰쳐나와 탈영한 신병은 없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늘나라 백성 훈련소에선 탈영해도 소용없습니다.
부대장 (예수그리스도)께선 전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당신을 찾아내어 다시 끌고오고야 말 것입니다. 왜입니까? 당신이 돌아갈 다리 밑은 죽는 곳이기 ㄸ문입니다. 공수특전부대 부대장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세상엣 1Km 도 못뛰던 '놈'을 완전군장으로 100Km 꼬박 행군할 수 있는 '군인'으로 만들어 놓고야 마는 사람입니다. 일찌감치 우리는 하나님의 '고집'과 '의지'를 눈치채는게 좋습니다. 그렇게 발악하며 죽는다고 고함지르지 마십시오. 이 땅은 훈련장이며, 그리스도인들의 이 땅에서의 삶이 믿지 않는 이들보다 백배나 고달프고 힘들고 어려운 훈련이긴 하지만, 이것은 당신을 '잡자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져 가야만 되는' 그 신분 (천국의 백성)이 그만큼 '가치있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마지막 공갈. 협박을 하나 더 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맞기전에 잘하십시오. 안그러면....터지게 되어있습니다. 저는 이런 '무식해빠진', 그리고 '무슨 깡패같은' 협박을 하면서도 마음이 즐겁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들겨 패시는 것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했을때 맞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고야 마실 것이지만 그보다 더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이 말씀은 앞에서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말씀, "더욱 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계속 이루어 나가십시오"라는 빌립보서 2:12절 말씀에 바로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선한 목적에 따라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여러분 안에서 일하십니다." (빌 2:13)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인격입니다.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 그러기에 어차피 훗날 천국백성으로 사실 몸이라면, 그리고 어차피 천국백성으로서 필요한 자질과 자세를 어떻게라도 가르치고 훈련시키고야 마실 하나님의 무서운 '의지'와 '집념'을 아신다면, 주님게서 '좋을 말 할때' 기쁨으로 순종하고 훈련들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공연히 얻어터지지'마시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우리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어마어마하신지 알기나 하십니까?
믿지 않는 자들은 사기치고 세금 속이고 이중 장부 만들고 별 짓을 다해도 아무 탈 없이 잘 사는데, 왜 이렇게 나는 예수도 믿는데 고달픈 일이 많고 안되는 일도 많고 세무서에 발각도 잘 되느냐고 투덜거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못했을때 매를 맞는 것이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만약 여러분께서 맨날 컨닝하고 속이고 책값 떼먹고 몰래 뒷간에서 담배 피우고 못된 친구들과 어울려 그렇고 그런 짓을 다했는데도 여러분 하는 일마다 다 잘되고 만사형통하거든.... 심각하게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더듬어 볼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이중장부 만들고 남의 돈 떼어먹고 회사공금을 착복하고 가끔 바람도 피우고 했는데도 만사가 형통하시다면 「심각하게」 자신의 영원에 대해 생각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맞기나 한 지 말입니다. '내버려 두신다'는 것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심각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저는 주님을 몹시 사랑하고 그분과 대단히 가까이 지내기는 하지만 저는 그분을 한편으론 무서워합니다. 저의 잘못에 대한 징벌이 너무 즉각적이고 가혹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쉽게 헛된 짓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런 하나님이 두렵지만 그ㄸ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집니다. 그분이 저를 '내 팽개쳐 둘 수 없는'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문득 생각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잘되고 잘 살고 호강하는것, 시기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들이 이 땅에서라도 그런 맛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와 저런 사람한테 벼락 안내리노?' 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죽기전에 매 맞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별짓을 다했는데도 이 땅에 있을때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은 사람은 그 다음에 영원히 계속되는 하나님의 징벌이 어차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회초리를 감사하십시오. 당신이 매를 맞아야 할만큼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연단과 훈련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새하늘과 새땅'에서 필요로 하는 백성들의 수준이 이 땅에서와 감히 비교할 수 없기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훈련계획에 대해 '두려워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맞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타이르셨던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리밑의 동네야구 4번타자로 만드시려는 것이 아니라 프로야구 '해태'팀의 4번타자로 만드시려는, 아니 만들고야 말겠다는 계획이시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훈련이 좀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날'을 바라보며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프로와 아마추어 ⑤

♥ 크리스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라는 말입니다. 크리스챤은, 모든 행동의 동기가 무슨 댓가나 보수를 바라서 하는 것이 되어선 안되기에 그런 면에선 철저히 [아마추어]여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가기 위한(닮으려는) 삶의 자세에서 만은 철저한 [프로]여야 합니다. 여기서 프로란 전문가를 뜻
하는 말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이웃들로부터 이러한 삶의 특성을 가진 자라는, 이 분야에서 만큼은 전문가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특성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가장 큰 특성이었으며 우리에게 "배우라"고 명령하신 자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온유함"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2) "겸손함"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3) "섬김"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섬김"이라고 하는 것 만큼 크리스챤이 지녀야 할 특성인 것도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중점을 두고 친히 가르치신 과목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따라가며 배워야 할 스승께서... 가장 강조하시고 중요시 여기는 '과목'을 알아야 하는 것은 제자로서 상식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큰소리치는 우리 크리스챤 만큼 이 과목을 소홀히 하고 모른체 하는 이들도 드물 것입니다. "섬김"의 과목은 선택과목이 아니라 '전공필수 과목'입니다. 아니 전공 필수 중에서도 '국.영.수'에 해당하는 과목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과목을 얼마나 중요시 하셨는지를 모르는 이는 아마도 드물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섬김'이라는 부분이 얼마나 깊이 스며들어 있는지 알아채지 못할 리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들은 이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의 고등학교들이 음악.미술과목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듯이 말입니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결단한 사람(세례교인)이 가장 먼저 받아든 교과서중의 하나가
'섬김'이라는 책이어야 합니다. 세례를 막 받은 교인을 인수한 교사가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단호한 어조로 분명히 선언해 줘야 할 말은 "이제 당신은 [섬김]의 사람이 되기 위해 남은 생애동안 무섭게 배우고 훈련받아야 할 것입니다. 각오하십시오"라는 말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들은 교인들에게 이등병 작대기(세례교인) 하나 달아주고는 "이제부터 알아서 하시오. 내키는 대로 하시오. 듣고 싶은 과목만 선택해서 들으시오.
나는 모르겠소"해 버립니다. 그러니 "축복"과목이나 "은사"과목이나 "칭찬"과목에는 수강자가 터져나가는데 "섬김"과목에는 수강자가 한명도 없습니다. 그것은 "겸손"과목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얘 교사가 없거나 있더라도 그 강의시간에 들어가 보면 [겸손]과목 교사는 학생 한명을 앉혀 놓고 "에- 나는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거라고는 내가 겸손하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고, [섬김]과목교사는 학생에게 "에- 섬김이란 무엇인고 하니... 야! 너 이리 나와서 내 어깨 좀 주물러!... 그래 그래... 바로 그거야! 그게 섬김이라는 거야! 알겠니? 그럼 다음, 실습으로 들어갈까? 내 다리 좀 주무를래?... 그래 그래. 그게 섬김이야! 알겠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선 자신이 이제 곧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되고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특별한 만찬을 제자들에게 준비시키셨습니다. 이제 열 두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예수께선 결박당하여 끌려가게 되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제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가르칠 수 있는 시간이 불과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남겨 두고 가야할 제자들을 생각할 때 예수께선 마음이
몹시 아프셨습니다. 저마다 큰 소리는 치고 있지만, 주님께선 그들이 불과 몇 시간 후에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들로 전락하게 될 것인가를 알고 계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린다 해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막14:29)라고 호언장담하는 베드로였지만 주님께선 그가 곧 스승을 배반하고 자기 목숨의 안전에 연연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요한11:16)
며 큰 소리를 쳐왔지만, 머지않아 곧 하나도 남김없이 줄행랑을 놓게 될 것이며 그중 하나는 이미 스승을 팔아치우기 위해 작정을 했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께선 또 하나의 사실 앞에서 큰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예수께선 이미 오래전부터 제자들에게 한가지 매우 중요한 하늘나라의 법을 계속 반복하여 가르쳐 오셨습니다. 그것은 어떤 내용보다도 강조한 가르침이었습니다.

● 제자들이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선 어린 아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고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두는데 너희가 변화되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이다"(마18:1-4)
● 얼마후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 가실 때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가 예수께 두 아들을 데리고 다가와 절하며 특별청탁을 했습니다. "주님, 저의 이 두 아들을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듣고 있던 다른 제자들이 화를 내며 어떻게 그 자리가 두 사람에게만 돌아갈 수 있느냐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까이 불러 책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지배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럴 수 없다. 너희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의 종이 되어야 한다.  나는 섬김을 받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나의 생명마저 주려고 왔다. 알겠느냐?"(마태20:20-28)
●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교만을 무섭게 책망하시며 또다시 제자들에게 반복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말만 하고 실천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너희는 그들의 행동을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무거운 짐을 남의 어깨에 지우고 자기들은 손끝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으며, 또 하는 일마다 남에게 보이려고 과시한다. 그들은 잔치자리의 특석과 회당의 높은 자리를 좋아하며, 시장에서 인사받는 것과 사람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는 것을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대접받으려고 그렇게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너희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위선자들에겐 불행이 닥치게 될 것이고 더욱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마태 23:1-14)
그만큼이나 여러번 '겸손'과 '섬김'에 대한 하늘나라의 법을 가르쳤으면 이제는 충분히 알아들을 법도 합니다. 그러나 유월절 만찬 직후 예수께선 탄식스런 광경을 보게 되셨습니다. 성찬식에 대한 가르침이 끝나기 무섭게 제자들 사이에 '열두명 가운데 누가 가장 위대하냐?'는 서열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누가22:24) 그 많은 가르침이 이들에겐 한낱 지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스승이신 예수께선 이제 곧 마지막 죽음의 길을 떠나건만, 제자들은 아직도 식탁앞에서 서열과 자리다툼, 자기 우월성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그들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는 '하나님'앞에서...예수께선 제자들의 모습을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사람들...' 겟세마네 동산에 최후의 기도를 드리러 가실 시간이 겨우 한시간 남았고, 몇시간 뒤에는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셔야 할 예수 그리스도...그러나 주님께선 자신에게 이른 그 고통과 번민의 시간 앞에서도, 곧 자신을 배반하고 도망쳐 버릴 철부지 제자들을 향해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품으시며(요 13:1) 그들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서로 다투는 제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시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누가 더 위대하냐, 누가 누구를 깎듯이 대접하고 섬기는 게 옳으냐며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던 제자들은 갑작스런 주님의 일어서심에 놀라 입을 다물고 주님을 주목했습니다. 예수께선 아무런 말씀도 없이 겉옷을 벗으시고는 방에서 나가시더니 현관입구에 놓여있는 물항아리에서 대야에 물을 떠 들고 들어오셨습니다. 대야를 바닥에 내려놓으신 예수께선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방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제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는 것은 노예(종)들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들고 들어오신 대야의 물과 허리에 두르신 수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채고 '설마?'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설마'가 '사실'로 변하자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 정신이 나간 사람들처럼 멍하니 주님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요한?" 주님께서 대야를 들어 요한 앞에 내려놓으시고는 따뜻한 눈길로 요한을 바라보시며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으신 후 요한의 발을 당겨 대야에 담그고는 말없이 정성껏 씻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이 돌연한 행동에 너무나 놀라 몸이 얼어붙어 주님의 손에 발을 내맡긴채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님을 쳐다 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요한의 발을 다 씻으신 주님께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정성껏 그의 발을 닦으셨습니다.
"야고보야?" "...네....네?"
야고보도 도무지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주님께 발을 내맡길 수 밖에는... 나머지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들도...
베드로는 처음엔 여느 제자들처럼 어안이 벙벙하였지만 자기 순서가 가까와 올 수록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어떤 격렬한 분노같은 것을 참느라 얼굴이 시뻘개졌습니다.
'이 이건 말도 안돼! 이럴 순 없어'왜냐하면, 이스라엘 지역은 몹시 건조하고 바람이 많아 먼지가 많은 터에다 사람들이 신던 신발이라는 것이 앞이 터진 샌달이었기 때문에 집만 나
서면 발이 엉망이 되는 데다 그대로 집에 들어오면 집안도 엉망이 되므로, 언제나 집집마다 문 입구에는 물항아리와 대야가 준비되어 있어 그 집의 노예들이 집으로 들어오는 주인이나 손님들의 발을 일일이 씻기고 닦은 후 새로운 깨끗한 신발을 신겨 집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만찬은 은밀히 예비되어진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기에 주님과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줄 종도 없었거니와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일
을 감히 하려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주(Lord; 主人)요 스승이신 예수께서 친히 대야에 물을 떠오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는 보잘것 없는 천민이요 제자에 불과한 자신들의 발을 씻기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예들 중에서도 하급 노예들이나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 지고 있단 말입니까?
베드로는 주님게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른 제자들이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이 작자들이? 지금 누구에게 발을 내밀고 있는 거야? 저... 저 뻔뻔스런 녀석들! 말도 안돼!'주먹을 불끈 쥐고 이글거리는 분노를 참고 있던 베드로는 "베드로!"라는 주님의 음성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습니다. 어느새 자기 앞에 대야가
놓여있고 주님께서 무릎을 꿇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잡자 베드로는 황급히 발을 뒤로 빼며 소리쳤습니다.
"주님! 지금 주님께서 제 발을 씻기신단 말입니까? 네? 이러실 순 없습니다. 안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조용히 베드로를 쳐다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네 마음을 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여도 후에는 다 이해할 수 있게 될 게다." 베드로는 다시 소리쳤습니다.
"안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주님께서 제 발을 씻기시는 것만은 절대 안됩니다."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래도?" "................. " 베드로는 주님의 이 말씀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씀이란 말입니까? '내 발 씻는 것과, 주님과 나와의 관계문제와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아이구 이런!' 그제서야 베드로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이고 주님! 그.. 그렇다면...제 발 뿐만 아니라 제 손과 머리까지도 죄다 씻어 주십시오. 아니 아얘 목욕까지 시켜 주십시오"주님께선 그저 빙긋이 웃으시며 베드로의 발에 물을 끼얹으시고 정성껏 씻으셨습니다. 그리고 수건으로 베드로의 발을 닦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단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자리에 앉으셔서 제자들을 향해 입을 여셨습니다.
"내가 지금 너희에게 한 일을 이해하겠느냐? 너희는 나를 '스승님' 또는 '주(主)님'이라고 부른다. 너희 말이 옳다. 나는 너희의 스승이고 또 주(主)이며 너희는 나의 제자요 내가 불러낸 종(使役者)이다. 너희 선생이요 너희를 불러내어 선택한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다면... 자! 너희도 기꺼이 서로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생각해 보아라.  종이 주인보다 높을 수 없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높을 순 없다. 너희의 주인이요 너희를 보내는 자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기고, 오히려 너희의 '종'이 되었다면 너희도 서로에게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있느냐?
내가 오늘 너희에게 행한 것은 너희가 나를 본받아 이와같이 실천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내가 기꺼이 너희의 종이 된 것처럼 너희도 서로 기꺼이 종이 되어 서로를 섬겨야 하는 것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실천하면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다."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 13:1∼17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수제자로서 언제나 다른 열한명보다 앞에 나서기 좋아하고 뻐겼던 베드로나, 어머니를 동원해 장차 이루어질 예수의 나라에서 좌의정, 우의정 자리를 확보하려고 주님께 로비활동을 벌였던 야고보와 요한이 받은 충격은 다른 이들보다 배는 더 컸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중에서도 '종', 종 가운데서도 남의 발을 씻기는 최하급 노예의 자리에까지 기꺼이 내려가셔서 자신들을 섬겨 주시는데, 오히려 그 주님앞에서 서로 누가 더 위대하냐, 누가 더 대접받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수없이 다툼을 벌였던 자신들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얼마나 큰 수치를 느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만이 충격을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이 수치와 충격은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가르침은 이 시대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주인이시요, 나를 구원하실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를 따르기로(그의 제자기 되기로) 나선 사람들이라면 말입니다.
더우기 우리가 충격을 받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주님의 이 명령이 주님께서 친히 시범을 보이신 가운데 내려진 명령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눈치를 채야 합니다. 육군참모총장이 논산훈련소 이등병(아니, 아직 계급장도 못받은 훈련병)들 앞에서 새 총검술을 직접 시범을 보이며 "자, 내가 시범을 보였노니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이 될 것이고, 온 육군이 발칵뒤집힐 것입니다. 그날부터 전 군(軍)은 비상이 걸릴 것이고, 육군참모총장이 시범을 친히 보인 새총검술에 대해 밥만 먹으면 훈련을 시키고 또 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수 주일 내로 그 총검술에 대해서 만큼은
전 사병들을 숙달된 '조교'로 만들어 놓고 말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총사령관이신 예수께서 '친히' 시범을 보이셨다
면 우리 쫄병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빨리 눈치를 채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내가 본을 보였으니 너희도 행하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서로의 발을 씻기는 일에 대해서 만큼은 전문가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주님의 선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뭐라구요? 발씻기는 전문가라구요? 아니 그렇다면 주님께선 우리가 목욕탕 때밀이가 되란 말씀입니까? 아니면, 발씻을 세숫대야의 디자인을 연구하고, 비누와 허리에 두를
수건을 연구하고 개발하며, 남의 발을 씻어 줄 때 입을 예복과 진행절차와 기왕이면 다 씻은 후에 바를 향수같은 것을 연구하란 말씀입니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렇다면 우리가 남의 발만 열심히 씻겨주면 뭐가 다 이루어 진단 말입니까? 아무래도 성경내용 대로라면 성찬식과 동일하게 이 '세족식(洗足式)'에 대해 '행하라'고 명하셨으니 지금 당장부터라도 우리는 성찬식과 함께 기를 쓰고서라도 이 세족식을 거행해야 되지 않을까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발을 씻겨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떤 교파에서는 이 세족식을 공식예배에서 성찬식과 함께 거행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도 이제부터 "주님께서 명령하셨다니까 얻어 터지기 전에 우리도 서로 발을 씻어주기로 하자! 순종해야 할 거 아냐?" 해야 옳을까요?

저도 언젠가 교회와 선교단체의 신앙수련회에 참석하여 한 두번인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겸손과 섬김'을 배운다며 [세족식]을 행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 의식은 제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어느 한 자매의 발을 씻겨 주게 되었는데 양말을 벗겨놓고 보니 하도 깨끗하고 희어서 더이상 씻어 줄 필요도 없는 발이었습니다. 씻어주라고 해서 씻어 주긴 했지만 도대체 세족식이란 게 뭐가 그리 심각하고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으십니까?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세족식' 그 자체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우리로 서로에게 종노륵하게 하는, 정말 현실감있는 '의식'인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행하셨던 의식을 '흉내'낸다고 우리가 서로에게 '종노릇'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시간 [세족식]을 [성찬식]처럼 지켜 행해야 하느냐 행하지 않아도 되느냐를 따지고 논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껍데기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제자들(아니,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라. 내가 본을 보였으니 너희도 행하여라"고 명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으미입니까? '발을 씻기라'는 명령에는 무엇을 배우고 행하라는 주님의 마음이 들어 있는 것입니까?
"너희에게 내가 본을 보였노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라."주님의 이 말씀은 의미를 단순히 '세족식'을 거행하라는 교훈으로 받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이 말씀의 깊은 본질적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우리가 2천년전 그 시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상황을 실감나게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앞에서 장황하게 요한복음 13장을 재구성하여 보았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그 당시의 열두제자들이 받았던 충격과, 베드로가 기겁하여 "안됩니다! 절대로!"라고 고함질렀던 이유가 이해가 되십니까?
발씻기는 전문가라구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그것은 단지 '세족식(洗足式)'에 대한 전문연구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 종이 되라는 말입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섬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섬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종'을 언급하는 것만큼 적절한 용어는 없을 것입니다. '종'은 남을 섬기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고, 남을 섬기기 위해 살다가는 존재이며, 남을 섬기기 위해 죽기까지 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주님께선 제자들에게 시종일관 수도없이 반복해서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고 살 수 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운명(?)'에 대해 가르치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훗날 천국에서의 상급도 바로 이 부분을 통해 평가될 것이란 사실을 간절함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발을 씻기는 일의 전문가(프로)가 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서로를 섬기는 일의 전문가, 서로의 '종'이 되는 일의 전문가로 부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너희도 나와 같이 행하라!"
섬김이란 크리스챤의 의무행위요, 이 땅에서의 전공필수 과목입니다. 그런데 또다른 하나의 문제는, 우리가 남을 섬기는 데 있어 어느 정도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주님께선 이렇게 대답하십니다."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처럼!"
남을 섬기기는 섬기는데 어느 정도의 [수준]을 요구하시느냐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수준까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가운데서도 제일 시시한 '종(노예)'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셔서 우리의 발을 씻기셨다는 것이 너무 차원높은 이야기여서 좀처럼 실감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대단히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이번에 우리나라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신 김영삼 대통령이 매주 이곳 산골짜기 삼도봉 예수마을 최용덕 간사집에 내려오셔서 최간사네 강아지(온유하라) 밥이나 주고 똥이나 치운다고 해봅시다. 그리고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이곳에 와서 개목욕이나 시키고 웬종일 설겆이나 하고, 그러
고도 최간사가 오며가며 심심하면 그를 걷어차고 쥐어박아도 끽소리 못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말도 안되는 소리입니까? 옳은 말씀입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을, 김영삼대통령이나 클린턴 대통령보다 억만배는 더 높고 더 위대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감당하셨다는데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종노릇을 주님께서 친히 감당하시고는 이제 그를 따르는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로 이와같이 실천하게 하려고 내가 본을 보였노니, 너희도 나를 본받아 서로에게 이와같이 섬겨라. 이것을 행하라!"(요한복음 13:15)
명령이란 요구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선 '내가 한 것 같이'라고 하심으로써 섬김이라는 내용뿐만 아니라 그 섬김의 [수준]까지도 요구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섬김! 그것은 기독교의 가장 큰 덕목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섬김'이란 세상에서 말하는 '섬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입니다. 세상에서의 섬김이란 직위가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돈없는 가난한 자가 돈많은 부자에게, 권력하나 없는 하급백성이 권력자에게 굽신거리고 받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섬김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명하신 [섬김]은, 계급과 직분과 학벌을 땅바닥에 내려놓는데서부터 비롯됩니다. 예수께서 행하라고 가르치신 [섬김]은 마지막 남은 한가닥의 체면과 권위까지도 쓰레기통에 집어 넣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친히 본을 보이신 [섬김]은, 내가 상대방의 자리에까지 기꺼이, 아니 그보다도 더 낮고 낮은 '말도 안되는'자리에까지 말없이, 구차한 변명이나 설명없이 기꺼이 내려가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그것이 [시작]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이 첫단계부터 덜컥 걸립니다. 피땀흘려 쟁취한 이 금빛나는 '타이틀'을 내려 놓으라구요? 아니 그걸 쓰레기통에 집어 넣으라구요? 말이 됩니까? 안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내려 놓으라!"고 이 '말도 안되는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신 주님께선 그 다음, 말없이 조용히 일어서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먼저 윗도리를 걷어 부치시고는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우리는 감을 잡
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저같은 사람은 예수를 십년도 넘게 따라 다녔으면서도, 제 눈앞에서 수백번도 더 예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친히 세숫대야에 물을 떠 들고 들어오셔서 제 발을 씻기셨어도 이 가르침에 대해 깨닫지 못했으니 분명히 제 머리가 '돌'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니면 예수님 약올리고 싶어서 환장하였든지 말입니다. 저는 펄쩍 뛰었습니다. "주님! 저보고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타이틀을 내려 놓으라구요? 체면도 자존심도 내려 놓으
라구요? 어떻게 되신 거 아닙니까? 이게 뭐 거저 굴러 들어온 건줄 아십니까? 명색이 그래도 대표라구요. 나이도 제일 많은 왕고참이라구요. 저는 사년제 대학을 졸업했고 꽤 알려진 사람입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그러면 주님께선 아무 말씀없이 조용히 일어나셔서 또 윗옷을 벗으시고는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는 것입니다. 저는 씰룩거리며 속을 투덜댑니다. "우리 주님은 취미도 괴팍하셔. 그 많은 더 좋은 게임을 놔두고 왜 맨날천날 '노예놀이'를 하려 하시지? 할 수 없이 또 발을 내밀어 드려야 겠구만. 안 그랬다간 베드로에게 처럼 한 소리 듣게 될테니. '너는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럼 안되지"

저는 1989년 8월. 3박4일동안 진행되는 어느 훈련프로그램에 특별히 초청이 되어 다른 50여명의 크리스챤들과 함께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훈련모임에서 꼭 불려지는 찬송이 '가서 제자 삼으라'와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인데 사람들마다 도대체 지은이가 누구인지 보고싶다고 해서 나이도 안 되는데 조성래목사님의 추천으로 입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서울 근교 어느 시설에서 그 모임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입소하는 날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입소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저를 데리고 다니며 소개를
시키시는데, 저를 환영해 주는 분들이 모두 유명한 톱.탈렌트들, 톱.디자이너, 교수, 사장님들이신지라 제겐 은근히 우쭐거리는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이 분이 바로 그 노래 지으신 최용덕씨입니까?" "어머나! 최용덕 형제시군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저는 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되는 줄 생각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동료 입소자들은 아직도 제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아 첫날부터 은근히 저는 그들에게 제 자신을 알리려 암시를 하곤 했습니다. 드디어 한 테이블의 어느 전도사님께서 눈치를 채시곤 "혹시...작곡하시..는 분 아니십니까?"하고 물어 오셨습니다. "아니...바로? 이야~ 이거 영광입니다." 도대체 한 두개를 썼다는 게 뭐가 어쨌다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저는 겉으로는 "제가 뭘..." 하면서도 속으로는 "에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분명히 아침에 기상해서 엉망으로 침실을 만들어 놓고 나왔는데 나중에 가보면 누군가 너무나 깨끗이 정리를 해 놓았고, 쓰레기통은 깨끗이 비워졌으며, 아침 세면때 젖은 수건이 어느새 마른 새 수건으로 갈아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하길 '아! 이곳 종업원이 이렇게 해 주나보다' 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대접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훈련 프로그램중엔 똑똑한 척하며 떠들어 댔습니다. 교실안에는 앞치마를 두른 작달만한 어른이 "뭐든 시키십시오. 도와 드리겠습니다."하고 굽신 거리기에 당연한 것처럼 "물 한컵 좀 떠 주시오" 같은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마구 시켰습니다. 그러면 그는 마치 노예처럼 "예예!"하며 부리나케 나갔다 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틀째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오전 일과 때문에 교실에 모였는데 테이블 리더가 우리에게 귓속말로 우리의 '노예'를 가리키며 "저분이 누군지 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연신 굽신굽신거리며 함박 웃음을 머금고 열심히 심부름을 하고 있는 작달막한 어른을 힐끔 바라보며 속으로 '고용인이겠지 뭐! 쯧
쯧! 불쌍한 사람! 저 나이에 이런데서 저런 일을 하다니...'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테이블 리더가 속삭였습니다. "저 분... OO제약회사아시죠? 유명한! 그 제약회사 부사장님이십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망치로 뒷통수를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고 현기증을 일으켰습니다. '서..설마..?' 그러나 사실이었습니다. 그 분은 여전히 "아 예예! 금방 갖다 드리겠습니다"하며 열심히 심부름을 하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뭐가 뭔지 몰랐고 온통 머리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저는 멍하니 넋을 잃고 그 분을 바라보았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큰 제약회사 부사장이나 되시는 분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노예'처럼 저같은 사람 심부름이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정신을 차리고 난 후 저는 제가 안경을 침실에 두고 왔다는 것을 발견하고 양해를 구하고 침실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침실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다가 저는 저의 침실안에 있는 화장실을 보는 순간 온 몸이 뻗 뻗 하게 굳어 버렸습니다. 거기에는.... †

 

프로와 아마추어 ⑥

♥ 크리스챤이란 하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건져 불러낸 '사역자(使役者)'입니다. 사역자란 '불리워 내어져 일시킴을 당하는 자'란 뜻으로 다시 말하면 '종'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종은 결코 댓가나 보수, 보상을 기대하고 일하지 아니합니다. 그런 면에서 크리스챤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이 땅에서의 삶에 있어 철저한 아마추어여야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챤은 '예수를 따르는 자', '예수와 연합된 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말입니다. 제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스승을 뒤 따르고 스승을 닮으려는 뜨거운 열망입니다. 그런 면에서 크리스챤은 철저한 프로(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제자들은 예수께서 지니셨던 삶의 특성들을 동일하게 가지게 됩니다. 그 특성들의 대표적인 것들을 든다면, 우리는,

(1) "온유함"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2) "겸손함"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3) "섬김"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호에 이어 계속> 저는 허겁지겁 침실 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침실입구에 있는 욕실문이 열려 있고 그 안에 인기척이 있음을 느끼고 안을 보다
가 소스라치게 놀라 그 자리에 멈추어 서고 말았습니다. 욕실안에 반백(半白)의 한 사람이 찬송을 부르며 양변기를 비누칠한 손으로 정성스럽게 씻고 있는 광경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저를 보더니 멎적은 웃음을 띄우고는 목례를 하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습니다. 물론 예외없이 이미 저의 침대까지도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습니다. 제가 그토록 놀랐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그 분이 누구신지를 제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어느 대학의 유명한 노교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분이 손으로 남이 쓰는 화장실 변기를 닦으시다니... ! 더우기 제가 불시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저는 영원히 그 일을 누가 했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저는 후들거리는 몸을 주체할 숭 없어 침대옆 방바닥에 털썩 꼬꾸라졌습니다.
지난 이틀동안(아니 지난 생애동안) 타인에게 제 자신을 과시하고, 대접받으려 하고, 무슨 대단한 존재나 되는 것처럼 거들먹 거리며, 제 자신을 알리려 암시하고 또 그에 상응하는 반응에 기분좋아하고 으시댔던 제 자신의 모습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교실에서 우리의 노예처럼 굽신거리며 우리의 잔심부름을 시중들던 유명제약회사 부사장님의 모습과 친히 변기를 손으로 닦으시던 노교수님의 모습이 저의 지난 모습들 위에 클로즙되어 지나갔습니다.

그 수치와 참담함과 당혹감... 저는 이미 터져오른 비통함의 울음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오... 주님... 저는 제 자신에 대한 수치감에 온 몸을 떨며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통곡했습니다. 성령께서 보여주신 저의 죄와 어그러진 심령을 생각하며 저는 가슴을 치며 회개했습니다. 오... 얼마를 그렇게 흐느끼며 있었던가요? 교실에선 안경가지러 간다고 나간 제가 한 시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자 훈련 팀들 사이에 야단이 나서 저를 찾아 나섰고... 겨우 저의 침실에서 침대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고 있는 저를 발견했답니다.
그날 아침의 사건은 제 신앙생활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날 아침 제가 교실과 침실화장실에서 보았던 분은 유명제약회사 부사장님도 아니고 유명대학 노교수님도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셨습니다.

섬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내가 본을 보였노니 너희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명하셨던 바로 그 섬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저는 교회에 나간지 십이년만에야 제대로 깨닫게 되었고 또 직접 목격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한심스럽고 통탄스러운 일인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심령에 제대로 모신 사람에게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특성이 나타나는 데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경기도 남양만에서 철거민들과 함께 살며 사역하고 계시는 김진홍 목사님의 간증을 저는 기억합니다. 김목사님께서 과거 유신체제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감옥생활을 하실 때 옥안에 함께 있는 수인(囚人)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감방에서 제일 포악하고 또 최고참이던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 인생에 모셔들이게 되었습니다. "나도 이제 예수를 믿겠다"고 선언한 그 사람의 삶에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이것입니다. "앞으로 똥통 치우는 거... 내가 할거니까 손대지 마!" 옛 감옥은 화장실이 따로 없고 감방마다 통을 넣어두고 거기에 볼일을 보게 하는데 그 통을 치우는 일은 물론 '신입생(?)' 몫입니다. 그리고 그 통 가까이 자는 것도 서열 순으로 아랫쪽에서부터 눕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 최고참은 스스로 최고 말단이 해야 하는 똥.오줌 치우는 일을 자신이 해야겠다고 결심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가?'의 핵심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그의 영혼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그것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최근, 한 장군의 회심(回心)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부대의 지휘관인 그는 복음을 소개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장군은 부대교회 목사님께 "이제 저도 새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저도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고 싶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시켜 주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군부대 속성상 사령관이 어느 곳에 타나 난다는 것은 '비상'을 의미합니다.
다음 주 주일, 교회를 들어서던 병사들이 믿겨지지 않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사령관이 교회에 나타났다는 자체가 경악할 일이거늘 어깨에 별을 단 정복을 입은 장군이 교회입구에 서서 들어오는 이등병, 일병, 상병, 병장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주보를 나눠주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 장군의 '주보 나누는 안내'는 누이 오나 비가 오나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장군이 이등병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요?그것은 자신의 타이틀을 땅바닥에 내려놓지 않으면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고자 하는 소원과 열망, 결단이 없이는 절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요 주(主)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 아래 꿇어 엎드려 친히 최하급 노예나 하는 일인 남의 발 씻기는 일을 하셨다면, 이 땅에서 잠시 누리는 타이틀에 지나지 않는 스타계급장을 이등병 발 앞에 내려놓고 그들에게 허리굽혀 인사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 장군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섬김과 겸손]의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살아내야만 하는 [섬김의 삶]은 상대방이 어떤 계급, 어떤 신분, 어떤 얼굴, 어떤 학벌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동일하게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버스에서 충격적인 한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느 고등학교 앞 정류장에서 야간 자습을 마치고 귀가하는 여고생들이 지치고 피곤한 얼굴로 버스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경노석에 앉아계시던 한 백발의 노인이 갑자기 일어서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양손에는 도시락통과 과제물 보따리를 든 한 여고생에게 자리를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고생이 놀란 것은 물론이고 버스안의 다른 사람들고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여고생이 "아.. 아닙니다. 전 괜찮아요. 할아버지! 앉으세요! 정말입니다"라며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조용히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닐쎄, 어서 앉게. 하루 종일 얼마나 고생 많이 했누? 난 아직도 거뜬하니까 어서 앉아요. 어서! 자 자... 괜찮대두!"물론 그 여고생은 도저히 앉을 수 없이 오히려 그 노인을 자리로 밀어 앉으시게 했고, 몇번이나 그 청을 거절하시던 노인은 마지 못해 자리에 다시 앉으셨지만 그 여고생의 책가방과 도시락통을 빼앗아 무릎에 올려 놓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족히 일흔은 되셨을 노인... 어린 한 소녀에게 자리를 권하시던 그 장면은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고 또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내리시는 그 노인의 조그마한 손가방에 붙은 작은 십자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예수..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제 눈 앞에서 어린 한 소녀에게 자리를 양보하시는 것을 본 것입니다.

부산 어느 교회, 장로님 한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한 두 달 전에 들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언제나 섬기시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을 모시고 목욕탕에 가서 직접 그 목사님의 등을 밀어 드린다는 것입니다. 새로 부임하신 목사님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고 괴팍하시더라도 이 장로님은 예외없이 그 목사님께도 그렇게 정성스럽게 등을 밀어 드리고 조금도 변함없이 목사님을 섬기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위로부터 '잘 보일려고 아부하는 것'이라는 비난이 빗발쳐도 그 장로님은 조금도 상관않고 지금까지 그 교회를 거쳐가신 목회자를 끔찍할 정도로 잘 섬기셨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섬김]의 자세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이 지녀야만 할 지극히 당연한 태도입니다. 예수의 제조(종)들은 사람을 가려가며 섬기지 않습니다. 그 상대가 내게 어떻게 하였는가에 따라 그 상대방에 대한 나의 태도를 결정짓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그 정도 수준으로 이웃을, 다른 사람을 섬기지 못하고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은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옳으며, 주님께서 그 정도의 수준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적어도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갈망하며 애쓰고 발버둥은 쳐야 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대구 D교회 L목사님은 지금 연세가 50이 넘으셨는데도 직접 밀대와 빗자루를 들고 교회를 쓸고 닦으십니다. 어느 모임에서 봉사자로 참석하셨는데 화장실 청소를 하도 간곡히 자청하셔서 결국 그렇게 하셨습니다. 일부 평신도들은 '목사님이 우리를 감동시키려고 일부러 그러신다'고 빈정대기도 했지만 결국 그 목사님의 평소 삶을 알고는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예수를 닮아 낮아지고 낮아져서 남을 섬긴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게 주님께서 그렇게 행하셨고 또 명령하셨기에 저는 순종하려 합니다"라고 간증하시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L목사님께선 지난 해, 교회 전체 예산의 70%를 선교와 구제비로 사용할 것을 교인들에게 강력하게 권고하셔서 기어이 통과시키기도 하셨습니다.

대구에 있는 장로교 큰 교회의 당회장이기도 하신 J목사님을 가까이서 뵈올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언제나 J목사님은 친히 교인들의 식사 시중을 기꺼이 자청하시며 자상하신 얼굴로 궂은 일을 섬기시는 것이었습니다. 앞치마를 두르신 채 밥주걱과 국자를 들고 성도들을 섬기시는 J목사님...

 지난 1월 말, 예수마을에는 I.V.F(한국기독학생회) 학사(졸업생)중 현직 교사들의 모임인 T.C.F수련회가 3박4일동안 진행되었습니다. 70여명이 수련회에 참석하였는데 이들의 식사를 준비할 마을 아주머니 두분이 갑자기 일이 생겨 못하겠다고 통고해 왔습니다. 그 주간에는 저희 찬미가족들의 합숙 훈련이 막 시작되었기에 찬미가족들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조목사님께서 자청하고 나서셨습니다. 말이 70명분이지 한 두끼도 아니고 말입니다. 게다가 목사님께선 이미 2층 댁을 고스란히 T.C.F에 내어 주고는 네 가족이 아랫층 방 하나로 피신(?)오신 터였습니다.
사모님과 목사님께서 종일 70명 식사를 준비하셔서 끼니때 마다 2층으로 들고 올라 가셔야 했습니다. 웬 아저씨가 츄리닝 차림으로 국 양동이를 나르고 밥통을 나르자 목사님 얼굴을 모르는 교사들은 이 아저씨를 이곳 예수마을 사찰 집사쯤으로 알았습니다. 게다가 제대로 모른 한 임원이 목사님 가족이 피신한 방을 방배치도에서 ‘집사님 방’이라고 표기해 둔 바람에 이틀째 까지도 교사들이 체육복 차림의 목사님을 보고 “집사님! 집사님!”하는 것이었습니다.
기겁한 저희가 목사님께 “아니 목사님! 말씀하세요! 나 목사요 하고 말입니다”하고 소리치자 조목사님, 껄껄 웃으시며 “간사님, 아닙니다. 목사면 어떻고 집사면 어떻습니까? 오히려 집사가 편하지요. 제가 목산줄 알면 제가 밥통 나르고 있을 때 그 분들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어허허허”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내려 온 교사들이 목사님 얼굴을 모르고 집사님 집사님 했지만 나중에 바로 그 ‘집사님’이 자신들이 소속된 I.V.F 대구지부 이사장이시란 사실을 알기나 했을까요? 아니, 꼬박꼬박 먹어치운 몇 날 몇일간의 식사를 바로 그 목사님 내외분서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알기는 했을까요?

중요한 것 하나는, 마지막 한 끼까지 목사님 내외분이 정말 최선을 다해 묵묵히 감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많은 설겆이까지 말입니다.
목사인 자신을 보고 사람들이 계속 ‘집사님, 집사님’하며 심부름 시키고 식사시중을 들게 하는데도 왜 목사님께선 “아이고, 예 예”하시며, 굳이 ‘나는 목사입니다’라고 밝히지 않고 기꺼이 그들을 시중들고 섬기신 것일까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저 같으면 당장 T.C.F  책임자를 불러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된거요? 목사한테 집사라니? 이런 모욕이 어디 있소? 당장 제대로 가르치시오”그러나 목사님은 결코 ‘나, 목사입니다’라고 내색지 않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조목사님은 저보다도 나이가 일곱살이나 위이십니다. 그런데도 한번도 저에게 함부로 대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꼭 “간사님! 간사님!”하십니다. 아시겠지만 「간사」라는 것은 직분도, 계급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인정된 호칭도 아닙니다. 저보고 「간사」라고 부르는 것은 습관성 호칭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목사님께서 저에게 꼬박꼬박 “간사님! 간사님!”하시는 것은 저로선 민망하기 그지없고 송구스럽기 짝이 없는일입니다. 더우기 제가 더욱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은 조목사님이 저의 고등학교 직속 선배님이시란 사실 때문입니다. 뒤늦게 알고 기겁했는데 이미 목사님께선 오래전에 그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한 두해 선배라 해도 벌벌 떨어야 하거늘... 목사님은 까마득한 선배님이십니다. 그런데도 목사님께선 저를 한번도 ‘후배’대우를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런 목사님이기 때문에 저는 목사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어야」합니다. 왜 「없어야」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제가 그렇게 못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앞에서 함부로 눕고, 무례히 행하고, 목사님께 오라가라 부탁합니다. 그런데도 목사님께선 그저 “예 예”하십니다. 「바보」
처럼 말입니다.
예수...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저는 목사님 모습에서 날마다 발견합니다. 우리가 배워가고 닮아가야 할, 우리의 주님 예수...그 겸손하심과 온유하심과 섬김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느 시대에나 예외없이 이와같은 「겸손」과 「섬김」이라는 통로를 통해 전파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복음」입니다.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의 수기에서 읽었는지 다른 책에서 읽었는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공산치하에서 신앙때문에 감옥에 갇힌 한 목사님에 대한 실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다른 두 죄수와 함께 한 감방에 갇혔습니다. 두 죄수는 이 분이 목사란 사실을 알고 끊임없이 빈정대며 모욕을 일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갇힌 감옥은 영하 십몇도나 되는 것이 예사였고 죄수들이 입고 있는 옷은 누더기 여름 옷이었으므로 그대로는 얼어죽기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명은 살아남는 방법을 연구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해 낸 체온유지방법은, 한 사람이 시멘트 바닥에 누워 요가 되고, 그 위에 한 사람이 엎드리면, 나머지 한 사람이 그 위에 다시 엎드려 이불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가운데 사람은 제대로 체온유지가 가능한 것입니다.

시계가 없으므로 똑같은 숫자를 함께 헤아리며 서로 자리를 바꾸기로 했는데 두 죄수는 자신이 시멘트 바닥에 눕게 되면 가능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숫자를 빨리 헤아리려 했고 그 때문에 서로 다투었으며 자기들이 가운데 있을 때면 가능한 숫자를 천천히 헤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목사님께선 반대로 자신이 가장 고통스러운 제일 밑바닥에 눕게 되면 되도록 숫자를 느리게 세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미 셈이 끝났는데도 “오- 형제들이여, 조금만 더 이대로  있으시오”라며 교대를 만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운데 들어갈 차례면 숫자를 되도록 빨리 세었습니다.

두 죄수는 목사님의 그런 행동을 바보같은 짓이라고 빈정대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두 죄수는 목사님의 이러한 모습에 마음이 녹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나도 당신이 믿는 그 예수를 믿고 싶소. 그 예수가 바로 당신같으면 이제부터 나도 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싶소” 예수에 대해 단 한마디도 떠들지 않아도 그 목사님의 겸손하신 ‘종노릇’이 바로 살아 꿈틀거리는‘복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떤 상황에서나 예외가 아닌 것입니다.

저는 한 병사를 알고 있습니다. 한 겨울의 야외작전때면 참호를 파고 나무와 흙, 판쵸위의로 위를 덮은 굴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데 굴 입구쪽은 언제나 제일 쫄병이 눕는 곳입니다. 출입구이기에 제일 추운 곳이고, 보초교대로 들락거릴 때마다 발로 채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병사는 언제나 자신이 그곳을 기꺼이 자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하 이십도의 혹한, 야간 보초근무자중 갑자기 환자가 생겨 펑크가 나면 자신이 기꺼이 그 전우의 몫까지 보초근무를 감당하거나, 한시간동안의 근무시간이 끝났는데도 다
음 교대자를 깨우지 않고 기꺼이 두시간 보초를 자원하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고참이 되어서도 이러한 삶을 살았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어도 수많은 병사들이 예수 앞으로 나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삶이 만약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행동한 것이라면 그것은 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만 「예수님처럼」 살기를 소원했을 따름입니다. 그의 평생을 주님을 닮아가고픈 뜨거운 열망에 사로잡혀 살기를 원했을 따름입니다. 그 병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는 가장 적게 한 사람중의 하나였지만, 그의 주위 다른 영혼들을 가장 많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 계속-

 

프로와 아마추어 7에서 계속

사실상 불신자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하고, 사모하고, 감격하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찾고 찾으시는 사람도 바로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낮고 낮아져서 기꺼이 남들의 종이 되어 그들을 섬기는 ‘예수의 사람들’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땅에서의 사역의 핵심중 하나는 ‘남을 섬기는 사람’을 양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역은 주님께서 친히 그러한 삶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으로 가르치신 과목이었습니다. 직접 시범조교가 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분은 원래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고 계셨지만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의 모든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빌립보서 2:5∼8/ 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따르겠다고 큰소리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받아야 할, 정말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 대접을 기꺼이 포기하시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특권(타이틀, 체면, 권우, 지위)을 다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말도 안되는’낮고 낮은 자리(더이상 내려갈 수도 없는)까지 기꺼이 내려가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쫄병인 우리가 “왜 나한테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느냐?
나를 이 따위로 대접해도 되는 거야? 썅!”하고 떠들 수 있단 말입니까?
스승도 기꺼이 특권을 포기하셨는데 제자라고 떠벌이는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타이틀, 체면, 권위, 지위...)을 기꺼이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보다 잘 났다는 말입니까?

사도 바울을 통해 주님께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라디아서 5:13)다른 번역에는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친히 그들의 발씻는 일을 통해 제자들이 이땅에서 서로 「종노릇」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치시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 명령을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매질을 해 가면서라도 가르쳐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종 양성소』입니다. 교회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서로에게 종노릇하며 섬기는 일”을 가르치고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노예전문학교』인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노예전문학교....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주님을 섬긴다]는 말의 개념입니다. 물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신뢰와 인정과 예배, 찬양}등의 행위를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 외의 또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선 마태복음 25장에서 장차 이루어 질 [천국]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특별히 마지막 심판때에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오른쪽편과 왼편으로 나누어 각각에게 천국입성과 지옥행을 선고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무서운 사실 하나늘 발견하게 됩니다. 오른쪽편 사람과 왼쪽편 사람에게 꼭같이 적용된 기준은 "너희가 나(주님)를 이 땅에서 어떻게 섬겼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주님께선 "너희가 예배에 몇번 빠졌느냐? 십일조를 얼마나 안
떼먹었느냐? 성가대에 얼마나 충성했느냐?"라고 묻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주님께선 '얼마나 주님을 잘 섬겼느냐?'의 여부를 무엇으로 판정을 내리십니까?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이들 내 형제중에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일이다"(마태복음 25:40)

우리가 기겁해야 할 것은,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잘 섬겼느냐 하는 것의 증거가 "우리가 이웃(타인)들을 얼마나 잘 섬겼느냐?"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이 행위로냐에 관련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이야기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언급할 기회가 있기를 원합니다. *)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 결코 옆에 있는 이웃들을 잘 섬기지 못하기란 불가능하다 라는 것을 의미하는 지도 모릅니다. 크리스챤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요"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저주하거나 박대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 심각하게 묵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 크리스챤들이 서로에게(이웃에게) '종노릇'해야만 하는(=섬겨야 하는) 이유는, 명령이니까 마지 못해서 꾸역꾸역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주님을 예배하는 일로 하늘나라에서 평가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섬기는 것이 곧 하늘나라에선 주님을 섬긴 것으로 판정이 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자존심, 권위, 체면, 그럴듯한 타이틀까지 땅바닥에 내려놓고 스스로 남들의 종노릇하는 것이 그토록 억울하고 원통할 이유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크리스챤'입니까? 그렇다면 명심하십시오. 주님께선 당신을 이 땅에서 '섬김'에 있어 프로(전문가)를 만드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섬김'의 영어단어는 Service(서어비스)입니다. 다다시 말하면 주님께선 우리 [크리스챤]들은 [서어비스]의 전문가로 만들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남의 종'이 된다는 것은 예수께서 친히 최하급 노예가 하는 일인 '남의 발을 씻기는 일'을 기꺼이 감당하셨던 것을 좇아 우리도 기꺼이 그 자리까지 내려가서 그런 일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이 하는 일은 대부분 남들이 하기 싫은 일들, 냄새나고 힘들고, 해도 표시도 나지 않고 별다른 칭찬이나 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일들을 기꺼이 맡아 해 치우라는 어명이 떨어졌습니다.

학생이십니까? 동료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들이 무엇입니까? 쓰리기통 비우기? 화장실 청소? 칠판 닦기?...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들을 기꺼이 자청하여 감당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동료학우들, 선생님께 '서어비스'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연구하십시오. 당신은 그 방면에 평생 '프로'로 살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직장인이십니까? 마찬가지이겠지요? 남이 모르게 매주 한 번씩 꽃을 꽂아 주는 건 어떨까요? (그렇습니다. '종'은 자기가 한 일을 결코 떠벌리지 않습니다. 그럴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저와 매우 가깝게 지내는 대구 S여고 교사 한 분이 계십니다. 그는 근래에 '정말 주님을 따른다는 게 무엇일까?'를 깨달은 후 자신이 삶속에서 당장 실천해야 할 항목들을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미술교사인 그에게는 미술실과 그에 딸린 별도의 조그만 작업실이 주어져 있는데 그동안은 으례히 이곳의 청소와 쓰레기 비우는 일을 학생들에게 시켜왔습니다. 그는 이것이 크리스챤으로서 제자들에게 본이 되는 스승의 모습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가장 먼저 미술실의 쓰레기통 비우는 일부터 자신이 감당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다음해, 그는 매주 토요일 오후면 동료교사들이 다 퇴근한 교무실에 일부러 들러 책상 아래에 있는 쓰레기통을 일일이 다 비운 후 물로 깨끗이 씻고 닦은 후 갖다 놓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두 말할 나위없이 그는 이런 모습을 철저히 감추고 남몰래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내 주위 사람들을 잘 서어비스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수한 '일거리'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자기 회사 사원들의 구두를 직접 닦아주는 사장님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분은 모교회 장로님이셨습니다. 그것이 단지 내 보이기 위한 허세가 아니라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겸손과 사랑 때문이었기에 그의 회사는 일단 입사한 사원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인이 되기 마련이고, 진심으로 사장님을 사원들이 존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최고 경영자가 자기 수하의 사원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섬겨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나, 주님게선 우리에게
"너희가 진정으로 하늘나라의 백성이라면 그런 자세야말로 지극히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혼한 부부사이에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매우 조심스런 이야기입니다만(워낙, 교회에 대한 비판에 다들 과민반응을 보이시는 탓에...), 앞서 말씀드렸듯이 교회는 {종 전문학교}, [종 훈련센타]입니다. 당연히 교회안의 여러가지 직분 앞에는 '종노릇의...'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과목의 전문학교에서 직책(직급)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조교,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 학생보다는 조교가 그 분야에 있어 전문가라는 뜻입니다. 조교보다는 조교수가 더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것은 상식이고, 조교수보다는 부교수, 부교수보다는 정교수가 그 분야에 탁월해야 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만, [종(섬기는 사람)전문학교]인 교회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과목이 {남에게 대접받는 법}이 아니고 반대로 {남을 섬기고 대접하는 법}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종전문학교에서 이수해야 할 전공필수과목이 다름아니라 온유, 겸손, 섬김, 순종 같은 과목뿐이라는데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여러학교는 '대접 제대로 받고 군림하는 법'을 가르치므로 가르치는 사람들고 그런 방면에 전문가가 되어 있는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제자학교- 종훈련센타: 교회]에서는 반대로 '이웃을 제대로 대접하고 섬기는 법'을 가르치는 만큼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런 방면에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의 직책이 무엇입니까? 서리집사, 안수(장립)집사, 구역장, 권사, 장로, 전도사, 부목사, 목사...! 계급입니까? 서열입니까?
그것이 계급이어도 좋고 서열이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세상학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제자학교]에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여러 타이틀 앞에는 이런 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종노릇에 있어...', '겸손함에 있어...', '섬김에 있어...'무관(無冠?)의 평신도보다는 '서리집사'라는 타이틀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종노릇; 온유, 겸손, 섬김, 순종'에 더 전문가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서리집사 보다는 안수집사가 더 겸손해야 하고 더 잘 섬기고 더 잘 이웃을 대접해야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직분이란 그만한 자격이 인정되어 지는 사람
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안수집사님이 겸손과 종노릇과목에 60점이라면 장로님은 최소 70점은 되셔야 합니다.(이 말이 어느 계층을 비난하고 책망하려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고 계십니까?) 평신도의 우두머리(?)인 장로님들이 '겸손'과 '종노릇'에 70점이어야 한다면 평신도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장교님들(목사님, 전도사님)이 '겸손'과 '종노릇'에 몇 점이 되셔야 하는지는 언급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한 가지는, 교회안의 직분이나 직급을 마치 세상에서의 직급처럼 여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현상이, 지급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지시하고 호령하고 고함지르고, 대접(대우)받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사탄이 지배하는 세계에선 이것이 '상식'입니다. 회장은 부회장에게 지시하고 명령하고, 부회장은 총무, 서기 위에서 으시대고 잰 채 합니다. 세상에선, 학교 선후배 사이에 입학, 졸업년도를 따지고 따져 서열을 매겨서 선배는 후배들 위에 군림하고 대접받
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크리스챤의 세계, 교회에서는, 거꾸로입니다. (오- 정말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뼈에 사무치도록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세계에서는 서열이 올라가고 직급이 올라간다는 것은 곧 '남의 종노릇'하는 삶의 성숙도가 높아진다는 것(높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서의 서열은 다름아닌 '종노릇'의 서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종노릇'과목을 가르치는 전문학교에서 학년이 올라간다
는 것은 그 과목에 그만큼 '프로(전문가)'가 되었다는 뜻 아닙니까?

그러므로 교회에선 서열이 높아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과 영적인 부담을 가져야만 합니다. 교회에서 '장(長)'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장(長)자리에 앉는 것과 정반대인 것입니다. 학생회장, 청년회장, OO부장, 성가대장, 구역장, 전도회장, 당회장...! 장(長)은, 대접받고 군림하고 거들먹거리며 지시하고 명령하라고 주어진 직분이 아니라, 그 조직의 구성원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섬기는 데에 1등하라고 주어진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제일 낮아지고 겸손하고 노예노릇 해야하는 사람은 서열 1위인 사람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목회자 세계에서 신학교 선후배관계를 세상못지 않게 따지고 계산하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입니다.)
기억할 한 가지는, 이런 법칙은 비단 교회안에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승진'될 때 마다 그만큼 더 부하직원들을 섬기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등병때 보다 일병때, 일병때 보다 상병때, 상병때 보다 병장 때 더 잘 전우들, 후배들을 섬기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챤 병장들이여! 일어나서 기꺼이 이등병들을 섬기십시오.이런 때에 머리가 모자라는 쫄병 그리스도인들이 꼭 나섭니다. "얏호! 계급이 올라 갈 수록 종노릇에 대장이 되어야 한댔으니... 이제 우리교회, 내무반 변소청소는 당회장 목사님, 장로님, 병장님들 몫이올시다. 자! 우리들 좀 잘 섬겨주십시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신분이 노예의 노예라는 것도 모르는 바보입니다. 이런 사람은 많이 맞는 길 외엔 정신차릴 방법이 없습니다. 제 정신이라면 주님께서 친히 세숫대야와 수건을 들고 자신들의 발을 씻기실 때 감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상 그 사건은 비극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직접 나서셔야 했겠습니까? 쯧쯧...

우리는 장차 가서 살게 될 하늘나라의 법(法)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 나라에서 제일 큰 법이 '하나님과 함께 네 이웃을 극진히 섬기라'(마 22:36∼)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 뿐만 아니라 사람을 섬기는 데에도 전문가(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사실을.산을 오르는 사람은 무턱대고 산을 오르지 않습니다.
'목표'가 어딘지는 알고 오르는 법입니다. 가다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굴러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가 있는 사람은 다시 일어나 그 산을 오르기 마련입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도중에 조금 힘들면 중턱에 퍼질고 앉아 아예 눌러붙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앞서 올라왔다고 "자, 이 정도면 나는 됐다"라고 소리칩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기껏 산기슭일 수도 있습니다.

혹 어떤 이는 "일단 예수만 믿으면 그 다음 그 사람에 대한 성장과 성숙은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 적절하게 훈련도 시키고 매질도 하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성장을 위해 애쓰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만 있어도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목표대로 만들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에는 의문이 많습니다. 성경에서 주님께선 당신의 백성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의지적 결단과 각오'에 대해 수도없이 반복하여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석수장이 앞에서의 돌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선 사람을 인격체로 만드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선 우리를 다듬으시고 훈련시키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곧 우리가 저절로 성숙된 천국백성으로 만들어 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훈련과 다듬으심에 대해 우리의 인격을 통해 허용해 드려야만 합니다.
예수를 믿은지 10년, 20년이 되고 장로, 목사가 되어도 그분들 중에는 그 인격적 성숙이 '어린아이'수준에 머물고 계신 분들이 허다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아니 우리 자신입니다) 포기하셨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훈련과 다듬으심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의지로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뭔가 호되게 맞긴 맞았는데 그것이 자신의 어떤 부분에 대한 훈련인지를 알지도 못할 뿐더러 알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혹은 알았어도 무시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더 이상 어찌 하실 수 없다는 말입니다.
'프로(the proletariat; professional)'란 끊임없이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프로'는 결코 지금의 수준에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않습니다. 더 높은 수준, 더 나은 수준을 향하여 오늘도 내일도 최선을 다해 위로 오르는 사람을 '프로'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권면하고 명령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을 찾으십시오"(골 3:1)

'찾으라'는 말은 '추구하라'는 뜻이니다. 위의 것이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위의 것'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우리의 인격적인 의지와 결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위의 골로새서 3장 1절 이후에 계속 이어지는 명령 수십가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구원, 천국'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숙된 인격'까지도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성숙된 인격이 '구원'의 조건인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선 '성숙된 인격'이 절대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나라에서의 '상급'과 절대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프로'로서 자신이 걸어 온, 또 걸어 갈 자세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얻었다는 것도 아니며 완전해 졌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 마련하신 그 상을 받으려고 계속 달려가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한가지 일만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두 이와같은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는지 지금까지 따른 법칙에 따라 계속 그대로 살도록 합시다"(빌 3:12∼16)
그리고 에베소서 4장에서 이렇게 명령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엡 4:15)

이러기 위해선 우리속에 철저한 '프로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첫 걸음 때부터 말입니다.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나 신기한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지금까지 '전문가'라는 의미로 사용해 온 '프로(profissional)'라는 단어의 어근인 'profess, profession'이 바로 기독교에서의 '신앙고백, 서약을 통해 종교단체에 들어 감'이라는 뜻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말이 곧 프로(전문가)가 되었다는 말과 같을 수 있다는 이 사실은 우연의 일치일까요?
당신은 크리스챤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프로'여야 합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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