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요셉의 두 부친 문제 (눅3:23-24) 요약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두 족보에서 신약 요셉의 두 부친 문제가 나타난다. 여러 학설 중 요셉 부친의 계대 결혼이 더 설득력이 있다. 이처럼 사단의 방해는 계속되어 잠시 종족의 줄기는 끊겨도 하나님의 이어주시는 은혜는 계속된다. 이 계속됨은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가 매사의 삶에 늘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에 다시 회개하며, 나아가 강물 같이 흐르는 성령의 그 능력을 의지하여 예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은 [신약 요셉의 두 아버지 문제]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 연구에서 가장 난해한 점이 예수님의 부친인 요셉은 두 아버지가 있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1:16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 니라" 했습니다. 여기에 분명히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눅 3:23에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라고 했습니다. 즉 누가 복음에서는 요셉 아버지가 헬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과연 한 사람에게 두 아버지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한 사람에게 실재적인 두 아버지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실재 아버지 는 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관점에서 족보를 썼느냐 그 차이일 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약 세 가지의 학설이 있는데 먼저는, 마태는 예수의 왕적 족보를, 누가는 제사장적인 족보를 기록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 나 이 설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을 뿐 더러 예수님은 왕도 되시고 제사장도 되시기는 하시지만 그 러기에 두 아버지여야 한다는 성경적 배경도 없고, 또 아브라함과 다윗 사이의 족보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관성이 없는 설입니다. 또 다른 학설은 마태는 예수의 부친 족보를, 누가는 예수의 모친 족보를 기록했다는 견해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헬리는 요셉의 아버지가 아니라 마리아의 부친이 됩니다. 이 주장을 하는 이유는 메시야가 여인의 후손에서 난다는 예언을 생각해서 한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몇 가지 문제가 생겨나는데 먼저는, 여인의 후손이란 남자 없이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됨을 강조 한 것이지 여자의 족보에서 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리아의 족보를 말 하는 것이라면 두 사람 다 할아버지가 같은 맛닷이니 아주 가까운 가족이 되는데, 그보다 문제는 마리아 할아버지를 요셉 할아버지라고 할 성경적인 근거도 발견되지 않고, 그나마 이 족보가 마리 아의 족보라는 근거조차 발견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학설은 마태의 족보는 법적인 족보요, 누가의 족보는 실재적인 족보라는 설입니다. 이 설 도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는 점에서 다른 학설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경 족보 에서 아버지가 두 사람이 되는 성경적인 예가 여러 번 있으므로 성경적인 배경을 갖는 학설이라 는 점에서 상당한 타당성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 예를 여기에 적용했을 때 조금도 하자가 없습니 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이 마지막 설을 채택하여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아버지를 두 아버지 되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계대결혼입니다. 계대결혼 이란 우리 한국에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만 가령 장남이 아들을 낳 지 못하고 죽으면 차남이 형수를 취하여 아들을 낳되 그 아들은 차남의 것이 되지 않고 장남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재는 차남이 아버지인데 족보상으로는 장남이 아버지가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아버지가 순식간에 두 분이 생깁니다. 성경에서 왜 이렇게 족보의 연결을 중시합니까? 그것은 메시야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에서 나리라는 성경적인 예언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참 메시야를 증명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리고 장차 오실 메시야는 그 조상이 갖는 신앙적인 여러 특징을 띤 그런 완전한 메시야가 온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입기 위해 그러니까 결국 메시야를 설명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요셉의 두 아버지인 야곱과 헬리는 형제지간이었을 것을 봅니다. 둘 중에 야곱이 형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장자권을 이어가야 하는데 어떤 사건으로 장자가 죽습니다. 그러자 동생인 헬리가 계대결혼을 통해 형 야곱의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이 곧 요셉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두 아버지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계대결혼은 그 전에도 이미 예수님의 족보에서 채택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한 예로 룻의 계대결혼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엘리멜렉의 가문이 모두 모압으로 피신을 갑니다. 그런데 모압에서 여자 셋만 남고 가장 엘리멜렉도 두 아들 말룐과 길룐도 모두 죽습니다. 이 때 기론의 아내 오르바는 제 갈 곳 찾아서 갔지만 말룐의 아내 룻은 효심을 다해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늙었고 남편마저 죽었으니 자식이 없으니 룻을 계대결혼을 시킬 수가 있습니 까? 그러나 계대결혼이란 자식이 없으면 이제 그 기업을 무를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로 차례가 돌 아갑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나오미를 가까운 친족에게 시집보내 계대결혼을 시키려고 합니다. 그 런데 그 대상자 중에 첫째 되는 사람은 자기가 아들을 낳아주어 봐야 자기 아들도 안될 것이고 재산마저 그 아들의 것이 될 것 같으니까 포기를 합니다. 그래서 가장 너그럽고 재산 많으며 룻을 사랑하는 보아스가 룻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룻4:16을 보면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라고 말 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오벳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분명 낳기는 말룐의 아내 룻이 나았고 아버 지는 보아스로되 오벳은 엘레멜렉의 아들이 되고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대결혼입니다. 그리 고 이것이 예수님 족보를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근거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사단이 예수님의 가문이 끊어지도록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파란만장한 역 사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짜르고 짜르고 막고 막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결 코 중단되거나 실패하지 않습니다. 어떤 손길이 나타나서라도 그 계대를 이어가도록 하셔서 메시 야의 줄기가 끊기지 않게 하십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에 사단의 역사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예수님이 나시자 말자 헤 롯에 의해 애굽으로 피난 가시고 헤롯에 의해 베들레헴 아이들이 모두 죽었고 그 후에도 시시각 각 예수님을 죽이려고 시험한 그것을 보시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깨뜨리면 다시 이어주시고 또 깨뜨리면 다시 이어주셔서 예수님을 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성경 사상 그대로 계 대결혼을 암시하는 야곱으로 기록했고, 누가는 실재를 강조하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썼으므로 헬 리를 쓴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에게 족보상의 두 아버지가 존재하는 이유를 이해하셨을 줄 믿습니 다. 그럼, 오늘 분문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도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계속하여 이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도 사단이 얼마나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노력합니까? 신앙생활에 좀 열심 내려 하면 사단이 넘어뜨려 놓고 또 넘어지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은혜 좀 받았다 하면 시험이 와서 쏟고 또 쏟습니다. 물론 믿음 약한 우리에게 잘못이 있지만 바꾸어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 은혜 받고 심령에 새순이 좀 난 것 같으면 또 시험 들게 해서 그 순을 끊어버립니다. 이러기를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백 번 아니 천 번 아니 몇천 번도 더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끊어버리면 그 순을 다시 나게 하시고 또 나게 하십니 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순이라고 했습니다. 슥6:12에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 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했는데 그 순이 궁극적으로는 바로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건축은 장차 구속사역의 완수를 시사하며 나아가 우리를 영적으로 온전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시험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께서는 이 순을 통해서 신령 한 하나님의 전을 만들고 마십니다. 사단이 메시야의 계대를 파괴할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이 놀라우신 은혜와 생명 줄기는 이 제는 이어질 정도가 아니라 아무도 막지 못할 더 큰 은혜의 강물이 되어 도도히 흘러가고 있습니 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붙들기만 하면 아무도 우리를 막지 못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 다. 그래서 우리는 상한 갈대 같지만 그리고 꺼져 가는 심지 같지만 온전히 이기게 하시는 그 은 혜가 역사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이렇게 구약의 사건이 신약에서 완전한 복음으로 결론되어집니 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용기를 내어 회개하고 또 다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다 시 회개하시고 일어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무도 막지 못할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 의 형상으로 변화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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