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강해 모음

레11장 정결 부정한 음식에 대한 설교

공 상희 2010. 9. 11. 17:42
=본 시리즈 설교는 레11장 정결 부정한 음식에 대한 설교로서 적극 추천합니다.
작성자:한성진 목사(예장합동 총신졸)



1.
제목:정결한 짐승
본문:레11:1-8
초점:말씀생활론

요 약
구약 시대 구별된 식생활은 하나님 백성들의 구별된 삶을 교훈함이다. 정
결한 짐승은 쪽발 가진 것으로 이는 말씀을 순종함과 악성을 버림이요, 또
새김질하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을 사모하며 그 말씀을 늘 묵상하는 생활을
가리킨다. 그러나 부정한 것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으로
이는 말씀을 듣되 행치 않는 것이요, 또 쪽발이지만 새김질하지 못하는 것
으로 이는 알지 못하면서 행하려 함이요, 새김질도 쪽발도 없는 것은 말씀
묵상도 행함도 없는 이방인과 같은 삶이다.

설 명

☆ 하나님 백성의 생활
<특징 1 = 말씀 생활>

1. 말씀 묵상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3절)
<새김질의 의미>
① 말씀 사모 ② 내게 적용

2. 말씀 순종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레11:2-3)
<쪽발의 의미>
① 말씀 순종 ② 죄에 대해 죽음

3. 다음 사항 경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4-6)
→ 말씀 듣되 행치 않는 것
사이비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7절)
→ 알지 못하면서 행하려는 것
이단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생활은 먹어야 할 음식과 먹지 못할 음식으
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령한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한
예표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신약 시대에 와서는 그 규정이 철폐되었습니다.
그 예로 행 10장을 보면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큰 보자기 같은 한 그
릇이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온갖 부정한 짐승들이 있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있
어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베드로는 이 소리를
듣고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
지 아니 하였삽나이다 거부하지만 하늘에서 두 번째 세 번째 소리가 나기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행10:11-15).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안에서 구
분되지 않는 시대가 왔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짐승에 관한 율법의 신령한 의미는 어제나 오늘이나 조금도 변하
지 않습니다. 여기에 담긴 신령한 진리란 바로 하나님 백성들의 구별된 삶에
관한 것입니다. 즉 예수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진리를 교훈합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네 발 달린 짐승을 가지고 그 의
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네 발 달린 짐승 중에 먹을 수 있는 짐승은 약 두
가지의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다른 하나
는 새김질하는 것입니다. 이 정결한 짐승의 조건에서 우리는 은혜 받은 성도
참 성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 은혜 받은 성도는 말씀에 순종함에 열심합니다.

레11:2-3 본문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
희의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그
랬습니다.
쪽발이 무엇입니까? 소나 양처럼 발굽이 두 쪽이 된 그런 발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쪽발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신속하고 멀리 잘 다닐
수 있는 발이라는 점입니다. 대개 초식 동물들은 나면서 바로 걸을 수 있고
몇 시간이 지나면 어미를 따라 달릴 수 있습니다. 그 만큼 다리가 잘 발달되
어 있습니다. 그러나 쪽발이 아닌 짐승들은 대개 그렇지 못합니다. 사자나 개
나 사납기는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야 겨우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식
동물들은 하나님께서 생존을 위해서 다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 곳곳을 보면 초식 동물 특히 사슴에 대해 묘사한 곳이 많습니
다. 사35:6을 보면 저는 자가 사슴같이 뛴다는 말씀도 있고, 합3:19에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
니게 하시리로다" 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 믿음도 이런 발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슴이 낳자 말자 걷고 뛰
듯이 우리 성도들이 예수 믿자 말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순종하고 그 말
씀 따라 열심 내어 달려간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정
상입니다. 은혜 받으면 다 이렇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10년 20년이 아니라
할지라도 곧 순종하게 됩니다. 이게 은혜 받은 우리 성도들의 자화상입니다.

2. 은혜 받은 성도는 죄에 대해서 철저히 죽습니다.

이것이 쪽발의 두 번째 의미입니다. 즉 쪽발은 남을 해칠 수 있는 발이 아니
라는 점입니다. 그 쪽발 가지고 누구를 할퀴거나 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 성도들이 모습입니다. 성도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들로서 원리상 범죄
할 수 없고 남을 해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안의 성도들의 자화상은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사실
입니다. 그래서 롬6:10-12에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
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
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
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쪽발이 되었지만 나도 모르게 언제는 할퀴는 발이 되고 이랬다 저랬
다를 반복하는데 그것은 아직 충만한 은혜 안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은혜
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은혜입니다.

3. 은혜 받은 심령은 하나님과 그 말씀을 사모합니다.

3절에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초식 동물들이 되새김질하는 것을 보셨지요? 저도 어릴 때 소를 풀
먹여 보고 집에서 길렀기 때문에 잘 압니다. 평소에는 풀을 먹지만 밤이나 낮
에 쉴 때는 먹었던 것을 다시 내어 다시 씹는데 꼭 먹을 만큼 입안으로 보내
어 씹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맛있게 씹습니까? 그
런데 소는 위장이 네 개라고 하지 않습니까? 소처럼 쪽발에 되새김질하는 그
모습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결한 짐승을 보면 어쩌면 시편 1편과 동일한지 모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
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
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그러면서 부정한
짐승이 나오듯이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라
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과 그 말씀을 사모하여 되새겨야 합니다. 하나
님의 말씀을 가장 사모한 사람을 들라면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그가 그토록
사모한 이유는 말씀을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
입니다. 얼마나 사모했으면 시19:10에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
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했을까요? 다윗은 말씀만 사모한 것이 아니
라 하나님의 성전도 사모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과 그 성전을 사모했든지 쇠
약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받은 심령입니다. 동물들의 되새김 누
가 시켜서 합니까? 이처럼 은혜를 받으면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4. 은혜 받은 심령은 말씀에 서서 자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이것이 새김질의 두 번째 의미입니다. 우리는 동일한 말씀일지라도 묵상하고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견고히 서고 그 말씀을 내가 경
험하고 그 말씀이 내게 적용되게 해야 합니다. 개인 경험이지만 언제 믿음이
가장 강했는가 보면 성경구절을 암송할 때 가장 믿음이 강한 것 같아요. 매일
같이 성경구절을 적어 가지고 외우고 또 외우고 그 때 바다를 가르고 바위를
가르는 듯한 확신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내 말씀이 되어 다가옵니다.
짐승들이 아무리 꼴을 많이 먹었어도 새김질을 하지 않으면 내 살이 되고 피
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듯 은혜 받은 심령은 늘 말씀을 묵상하여 그 말
씀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유사하지만 먹지 못할 짐승도 있습니다.
먼저 새김질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않는 짐승입니다.

4절에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약대와 사반과 토끼를 그 예로 들고 있습니
다. 그러니까 부정한 것은 두 가지 다 못하거나 둘 중 하나를 못하는 짐승입
니다.
가령 약대나 사반이나 토끼와 같이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부정합니다. 흔히 토끼에 대해서는 새김질을 못하는 줄 아는데 1882년에야
독일 Grizimek 박사에 의해 토끼가 베설하는 씨코트로프(carcotroph)라는 비
타민 B가 풍부한 알약을 늦은 밤이나 새벽에 다시 먹어 1차 소화시 소화되지
않는 셀룰로오즈를 소화시킴이 밝혀 졌습니다.
그럼 이것의 신령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되 행
치 않는 믿음입니다. 이 얼마나 영적으로 부정합니까? 이것은 분명 잘못입니
다. 그래서 야고보는 교훈하기를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
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
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
에 복을 받으리라"(1:22-25)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것은 죄니라 했습니다. 이것이 새김질은 매일 하지만 행치 않는 삶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럼 반대로 쪽발이지만 새김질을 못하는 짐승도 그렇습니다. 7절에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 고
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말씀을 알지 못하면서 행하려는 사람입니다.
이것 역시 아주 위험한 사람입니다. 지금 이 지구상의 이단 중에 가장 경계
해야 할 이단이 안식교입니다. 안식교인들이 순진하고 자연도 사랑하는 것 같
지만 세상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단들이 대부분 안식교에서 분파 되어 나왔습
니다. 지금 서울 등지에는 안식교의 분파인 안상홍교가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
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토록 터무니없는 이단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빠져들
어 안상홍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알지 못해서입니다. 제가
지난 해에 총신대학에 가서 이 부분을 이수한 적이 있지만 우리 교인들이 다
른 것은 몰라도 이 안식교만큼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깊이 느꼈습니
다. 이단이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대단히 부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쪽
발이지만 새김질을 못하는 부정한 짐승의 의미입니다.

그럼 새김질도 쪽발도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세상 죄인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은 금수나 다름이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말씀도 묵상하지 않고 행하지도 않는 분이 계시
다면 이 시간에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이 세상 불신자와 똑 같은 생활
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영의 음식을 가려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
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마음이 강건해지고 얼굴에 빛이 납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생활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말씀에 순종하고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과 그 말씀을 사모하며 그 진리대로 행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아름다운 성도들이 됩시
다.








정결한 물고기
(레11:9-12)
기도생활론

요 약
수중의 물고기들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들의 생활의 특징이 기도생활임을 보여준다.
여기의 강과 바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상징한다. 정결한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비늘은 기도의 두 기능이다. 즉 지느러미가 자유로운 행동을 위하듯 기도는 하나님
께서 예비하신 은혜와 복락을 마음껏 누리게 한다. 그리고 비늘이 보호를 위한 것이
듯 기도는 침륜에 빠짐을 방지하고 모든 악의 세력을 대적하며 승리하게 한다. 이를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생활의 특징이다.

설 명

☆ 하나님 백성의 생활
<특징 2 = 기도 생활>

상징 이해
강과 바다 =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지느러미와 비늘 = 역동적 기도생활의 양면성

기도란 무엇인가?

1. 약속하신 것을 누리는 은혜
"지느러미 - 없는 것은 가증한 것이라"(10절)

2. 악의 세력을 이기는 영적 무기
"비늘이 없는 것은 가증한 것이라"(10절)


지난 시간에는 정결한 짐승 중에 네 발 달린 동물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요약한다면 하나님 백성의 생활이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행하는 거룩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성
도는 반드시 이러한 특징을 가져야 합니다.
그럼 오늘 수중 생물인 물고기를 통해서 주시는 성경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9절을 보면 먹을 수 있는 정결한 물고기의 두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
시 지느러미와 함께 비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조건 역시 신약시대
에는 문자적으로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금지된 요건은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신령한 교훈이 있습니다. 간략히 말하면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기도에 대한 교훈입니다.

그럼 기도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약속하신 것을 누리는 은혜입니다.

10절에 "무릇 물에서 동하는 것과 무릇 물에서 사는 것 곧 무릇 강과 바다
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했습
니다.
여기 첫째 조건으로 지느러미가 있어야 합니다. 지느러미의 가장 중요한 기
능은 물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기능입니다. 백과사전을 참고하면 지느러미란
수중에서 자세 유지와 이동 등을 관장하는 기관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꼬리지느러미는 추진과 키잡이 역할, 등지느러미와 뒷지느러
미는 방향의 유지, 가슴의 쌍지느러미는 몸의 평형과 키잡이와 저속동작에 필
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느러미가 있는 고기일수록 동작이 빠릅니다. 그
러나 지느러미가 없는 고기는 동작이 둔하거나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강과 바다는 신령한 의미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상징입
니다. 그러므로 강과 바다의 지느러미 있는 고기는 우리가 기도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려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지느러미가 없으면 이것은 가
증한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가 없으면 그 심령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정한 고기의 죽은 것도 부정하므로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
이 기도 없는 심령의 활동은 타인의 심령을 도리어 오염시키고 고통스럽게 합
니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놔두고도
움직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곤하다
고 기도하지 않았던 제자들 보세요. 즉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거나 부인하
고 말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의 심령도 부정해집니다. 가정도 화목하
지 못합니다. 교회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사회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
므로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악이요 문제의 원인이요 시험의 원인이요 그래서
가증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기도 쉬는 죄를 결단코 범치 않겠노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하신 은혜의 강과 은혜의 바다는 누구
를 위해서 존재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지느러미를 활짝 펴고 그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우
리가 은혜를 받고 사는 데 있어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아가서가 주님과 성도의 사랑의 노래이지만 달리 표현한다면 기도의 진리입
니다.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 교수인 유진 피터슨은 " 아가서는 기도의 비유이
며 기도의 백미라"고 했습니다. 아가서의 사랑이 깊어지듯 기도는 성도를 더
욱 깊은 영적인 교제 속으로 인도합니다. 또 신부가 점점 성숙하여 지듯 기도
는 영적으로 변화되게 합니다. 그리고 술람미가 왕궁에서 살듯 기도는 천상의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별된 생활의 특징이 무엇인가 기도의 생활입니다. 어떤
분의 말이 자기 집에는 짐승들만 빼고는 모두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집에 기도가 없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기도와 은혜생활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봅니다. 먼저는 기도하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신4:29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
난다"고 했습니다. 또 구하면 가장 귀한 성령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눅
11:9-13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혹은 필요를 채우십니다. 시81:10에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
셨습니다. 혹은 시145:18을 보면 기도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 했습니다.
사39:19에는 부르짖으면 응답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마18:19에서는 무엇
이든지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
하여 이루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요16:24에는 예수 이름으로 구하면 다 받
으리라고 했습니다. 기타 기도에 대한 은혜의 약속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과 같고 바다와 같을지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다음에, 기도는 악의 세력을 이기는 영적 무기입니다.

이것이 물고기 비늘이 주는 교훈입니다. 물고기의 비늘은 고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문헌을 참고하면 그 모양이 방패 모양이거나 둥근 형
혹은 굳은 비늘 혹은 가시가 난 빗 비늘 등 여러 종류가 있고 그 성분은 칼슘
이 많아 강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늘이 있는 고기는 대부분 개펄 속에 들어
가지 않고 홍수나 조류와 싸웁니다. 그리고 물고기 비늘은 일생 벗지 않으며
계속하여 자란다고 합니다. 이처럼 기도는 쉬지 말고 해야 하며 기도할 때 시
험을 이깁니다.
그러니까 기도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도구일 뿐 아니라 원수 마귀의 시
험을 예방하거나 대적하는 신비한 영적 무기도 됩니다. 그래서 엡 6장에 기도
의 무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원자탄보다 더 강력한 것이 기도입니
다. 왜냐하면 기도하면 원자탄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존 녹스가 말했
듯 기도하는 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강한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비늘이 없는 고기는 상황이 악해지면 깊은 개펄 흙탕물 속에 숨어버
립니다. 그러므로 비늘 없는 고기는 가증한 것입니다. 즉 문제를 당하고도 기
도하지 않으면 그 심령이 크게 상하거나 죽게 되며 깊은 낙심에 빠지고 맙니
다. 그러므로 이런 고기는 우리 성도의 예표일 수가 없습니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침륜에 빠져 낙심하고 절망하고 시험듭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
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기도의 비늘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기를 원
하십니다.
그래서 히10:38-39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
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
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
니라" 했습니다. 이런 적극적인 기도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한 성경 구절을 소개하면 기도하면 시험도 미치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32:6에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
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했습니다. 또 기
도하면 환난에서 건져주십니다. 시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눅18:7에는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까지도 풀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벧전4:7에는 "만물의 마
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하였
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1) 하셨
습니다. 요나가 불순종하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나 기도의 폭을 넓혀 가정과 교
회와 세계선교와 친척과 친구와 나라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
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패역한 세상에 기도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음을 늘
깨닫습니다.
여러 명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하기를 "기도는
교회의 강한 벽이고 요새이다" 라고 했습니다. 에드윈 키취는 "기도는 사람의
영혼을 내쉬고 하나님의 영을 들이마시는 것이다" 고 했습니다. 프랭크 라우
바흐도 "세상의 가장 위대한 힘은 기도뿐이다"고 했습니다. 칼빈도 기독교강
요 제 3권 20장에서 "기도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훈련이며 우리는 날마다 이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다" 라고 했습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
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
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고기입니까? 기도의 사람이기를 바랍
니다. 우리 모두 지느러미와 비닐을 가져 은혜를 마음껏 누리고 시험과 역경
을 물리치는 참된 기도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
다.








정결한 새
레11:13-19
정서생활론

요 약
가증한 새들을 통해서 성도의 정서생활을 교훈한다. 먼저 독수리 등의 새
들을 통해서 우리의 정서가 흉폭해서는 안됨을 보여준다. 성도는 하나님을
닮은 자녀이므로 반드시 사랑의 정서여야 한다. 다음은 까마귀나 부엉이 등
의 종류를 통해서 우리의 정서가 어둡고 부정적이어서는 안됨을 보여준다.
성도는 복 받은 자들이므로 항상 밝고 긍정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학과 박
쥐 등을 통해서 불안하고 유약해서는 안됨을 보여준다. 성도는 성령의 능력
으로 항상 안정되고 담대해야 한다.

설 명

☆ 하나님 백성의 생활
<특징 3 = 은혜의 정서 생활>

1. 사랑의 정서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매와 매 종류와"(13-14절)
공통점은 흉폭하다.
→ 이것이 부정하므로 사랑의 정서를

2. 밝고 긍정적인 정서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다호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노자와
부엉이와 따오기와 당아와 올응과"(15-18절)
공통점은 어둡고 슬프다.
→ 이것이 부정하므로 긍정적 정서를

3. 안정되고 담대한 정서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니라"(19절)
공통점은 불안하고 유약하다.
→ 이것이 부정하므로 담대한 정서를


그 동안 우리가 정결한 짐승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들의 생활에 대해서 말씀
을 나누고 있습니다. 잠시 복습하면 네 발 달린 짐승을 통해서는 성도의 말씀
생활을 배웠습니다. 수중 생물인 물고기를 통해서는 기도생활에 대하여 배웠
습니다. 오늘은 공중에 나는 새들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 백성들의 특징 세
번째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가증한 새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성도의 생활이란 과연 무엇일까
요? 그것은 한 마디로 성도들의 정서생활입니다. 우리 하나님 백성들의 중요
한 특징은 마음의 정서에 나타납니다. 그럼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정서는
과연 어떤 것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 여기에 나타난 새들을 특성별로 구별
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 구별해 보면 하나님 백성의 정서는 사랑의 정서여야 합니다.

13-14절에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매와 매 종류와" 그랬습니다.
먼저 여기 나오는 새들의 공통점은 모두 육식을 하며 흉폭하고 사나운 새라
는 점입니다. 이렇게 공중의 새에 대해서는 부정한 것들만 열거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이것이 암시하는 역설적인 교훈을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먼저 독수리는 먹이를 습격하는데 빠르고 하늘 높이 날면서도 멀리 보며 주
검이 있는 곳에는 떼로 모여 뜯어먹는 습성이 있습니다. 사막에서 낙타가 쓰
러지면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이 대머리 독수리들이 나타나 순식간에 낙타의
살을 뜯어먹어 백골이 되게 한다고 합니다. 솔개는 역시 하늘로 높게 낮게 원
을 그리며 돌면서 지상 및 수면의 먹이를 찾는 맹금류입니다. 솔개를 나타내
는 히브리어 가운데 '페레스'는 쪼갠다는 동사에서 나온 것으로 이 새는 맹수
가 먹다 남긴 짐승의 뼈까지도 쪼개먹는 대단한 새라고 합니다. 어응은 물고
기를 먹는 새로서 물 속으로 급강하하여 고기를 두 발로 움켜잡아 올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는 시력은 예리하고 영리하여 암컷은 사냥에 쓰여지는 새이
기도 합니다.
이처럼 먼저 열거된 이 새들은 한결같이 모두 사납고 흉폭한 새입니다. 이
새들은 사랑이 없는 마음을 예표합니다. 그래서 이런 부정한 짐승만 열거함은
결코 이와 같은 마음이어서는 안됨을 교훈함입니다. 그러므로 먹을 수 있는
새는 비둘기와 같이 온순하고 악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비둘기와 같이 정
결한 새만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보여주는 하나님 백성들의 생활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
은 사랑의 정서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따뜻한 정서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긍휼이요 관용이요 용서요 동정이요 자비입니다.
이 사랑의 특징은 하나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요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모
습입니다. 그래서 요13:34-35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
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새들은 모두 눈이 유별나게 뛰어납니다. 그래서 욥39:29에 "거기
서 움킬 만한 것을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육 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사랑이
없으면 남을 죽일 허물이 더 잘 보입니다. 사람의 눈은 신기해서 사랑의 눈으
로 보면 모두 아름답지만 미움의 눈으로 보면 모두 가증하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이 새들은 언제나 죽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남을 죽이든지 아니면 죽
은 것을 찾아가서 먹습니다. 이처럼 사랑이 없는 미움은 바로 살인입니다. 이
런 미움은 심령을 죽이고 뼈 속까지도 깊이 아픔을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서는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
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
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
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
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
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
여 기도하라"(마5:38-44)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사랑과 온유와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모세 역시 그 온유
함이 지면에 가장 승했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악인도 회개시키고 무식한 사람
의 입도 막습니다. 성도들이 사랑을 잃으면 그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실재로든 정치적으로든 어떤 면으로든 남을 살려도 죽이는 일은 앞장
서서는 안됩니다. 여기에 미움과 무식이 함께 어우러지면 더욱 흉악해지고 집
단적으로 변합니다. 이 새들을 먹음이 가하듯 사랑 없는 것만큼 악한 것이 없
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랑과 겸손과 온유하며 화목한 정
서를 가져야 합니다.

2. 성도는 항상 밝고 긍정적인 정서입니다.

15-18절에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다호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
와 노자와 부엉이와 따오기와 당아와 올응과" 그랬습니다.
이 새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특징을 가진 새들인가 보면 먼저 까마귀는 검고
사34:11에 황폐한 곳에 산다고 했고 잠30:17에 죽은 자의 눈 때로는 산 짐
승의 눈을 쪼아댄다고 나와 있습니다. 타조는 욥30:29을 보면 거친 들에 살며
욥39:14-16 보면 제가 낳은 알을 모래 속에 파묻은 채 버려 두고 돌아보지
않는 무정 무자비한 새로 나와 있고, 우는소리는 크고 슬프게 들립니다(미
1:8). 다호마스는 쏙독새라고도 하는데 썩은 고기 및 오물을 찾아다니는 새로
이 새는 야행성으로 밤에만 활동하는 새입니다. 갈매기는 험한 폭풍 속에서
고기나 죽은 고기를 먹습니다. 새매는 대형의 매로서 습성은 독수리 비슷히
다고 합니다. 그리고 올빼미나 부엉이는 밤에만 활동하며 들새 들쥐 들토끼
소형 포유동물 뱀 등을 잡아먹는 는 야행성입니다. 그리고 노자는 검은 새요,
따오기는 몸은 희나 부리는 검다고 합니다. 당아는 아래 부리가 큰 펠리칸으
로 고기를 토해서 새끼에게 주는 습성이 있고, 올응은 흰 독수리로서 주로 썩
은 짐승과 송장을 먹는다고 합니다.
이 새들의 특징을 종합해 보면 이들은 대부분 어둡고 검거나 슬픈 소리를 내
거나 무정하고 매우 고독한 새들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에게서 이런 슬픔
과 고독과 어둠과 부정적이어서는 이것은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
리 성도들의 참 모습은 항상 밝고 맑고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움과 소망이 넘
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빌4:4에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했
고, 살전5:16-18에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했습니다. 바
울처럼 능력 받아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어떤 환경에
서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빌4:11-13).
왜 어둡고 고독하게 슬플까요?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복된 자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은 자일수록 그 얼굴이 행
복합니다. 또 성령 충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는 하
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완전한 밝음이어야 합니다. 아
6:10처럼 "아침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
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했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의 모습은 그렇게
밝고 맑고 행복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위로가 되며 소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3. 성도의 정서는 안정되고 담대한 것입니다.

19절에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니라" 했습니다.
여기 약 네 종류의 새가 나오는데 이들의 공통된 특징을 조사해 보면 상당히
약하고 가늘고 소심한 동물들이란 점입니다. 먼저 학에 대해서 사38:14에 학
같이 지저귄다 했듯 상당히 소란한 새입니다. 몸체는 아주 아름답지만 정서적
으로는 상당히 불안정한 새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접근하면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을 칩니다. 또 황새 종류라 했는데 이들은 황새나 왜가리나 백로(해오라
기) 등을 가리킵니다. 이 새들 역시 강하고 담대한 새가 아닙니다. 그리고 대
승은 개똥지빠귀와 푸른 도요새로 번역된 새로서 아름다운 새이지만 역시 힘
없고 작은 새입니다. 그리고 박쥐는 사2:20에 나오는 대로 암혈과 험악한 바
위틈에 숨어사는 약하고 비겁한 동물입니다.
우리 하나님 백성들의 모습이 이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
이 결코 나약하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딤후1:7에 "하나님이 우리에
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오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
라"고 했고, 고전16:13에서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했고, 벧전3:6에는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
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했
습니다. 시31:24에도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했고, 다
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
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 군대가 나를 대적하
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27:1-3)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에게도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고 하셨고,
의인은 사자와 같이 담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
기 백성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사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영적인 군대의 모습을 갖지 못하면 신앙생활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능력 받는 기도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담
대한 사람을 크게 쓰십니다. 조그만 일에도 시험 들고 낙심하고 상처를 받고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고 오래오래 남는 심령이라면 이 시간에 능력을 간구하
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하늘이 무너져도 두렵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만물을 보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은혜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아름다운 정서를 가집시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운
정서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
로 사람에 대해서는 사랑과 화목의 정서를 가집시다. 환경에 대해서는 항상
밝고 긍정적인 정서를 가집시다. 그리고 시험과 사단에 대해서는 강하고 담대
한 정서를 가집시다. 얼굴만 보아도 예수님의 제자인줄 알았듯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천국을 증거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정결한 곤충
레11:20-23
= 소망 생활론 =

요 약
정결한 곤충류에 대한 식용을 통해서 성도의 소망의 삶을 교훈한다. 즉 날
아만 다니는 곤충은 부정하듯 성도의 소망이란 처한 현실을 무시한 그런 도
피적인 것이 아니다. 반면에 기어만 다니는 곤충이 부정하듯 세상의 것을
목표로 삼는 탐욕하는 그런 세속적인 것도 아니다. 가장 합당한 것은 날개
있고 뛰는 다리가 있는 곤충과 같이 어떤 현실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이기며
본분에 충실하면서 거룩한 것을 소망하며 기쁨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우
리 하나님 백성들의 특수한 삶 중에 하나이다.

설 명

☆ 하나님 백성의 생활
<특징 4 = 소망 생활>

1. 현실을 탈피하지 않으면서
날아만 다니는 곤충은 부정함

2. 그렇다고 세상을 소망함도 아니면서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20절)

3. 현실에 살지만 소망의 생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21절)

4. 소망을 위해서 선한 싸움하라.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5.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15:4)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오늘도 정결한 식물에 대해여 말씀드립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가증한 새
들을 통해서 성도의 정서생활이 어떠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잠시 복습하면 독
수리 등의 새들을 통해서 우리의 정서가 흉폭해서는 안됨을 배웠습니다. 그리
고 까마귀나 부엉이 등의 종류를 통해서 우리의 정서가 어둡고 부정적이어서
는 안됨을 교훈하며, 학과 박쥐 등을 통해서는 우리의 정서가 불안하고 유약
해서는 안됨을 배웠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정상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
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정서 긍정적인 믿음의 정서 능력의 담대한 정
서여야 합니다.
오늘은 정결한 곤충류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곤충 중에도 먹을만한
것이 있습니다. 세례요한도 곤충 먹고 살았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이라 모두
곤충과 관계된 음식입니다. 곤충에 대해서는 식별이 간단한데 즉 날개가 있고
뛰는 곤충은 모두가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머지의 조건 즉 날기
만 해서는 안됩니다. 혹은 기어만 다녀서도 안됩니다. 혹은 날개가 있으나 기
어다녀도 안됩니다. 반드시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 뛰어야 합니다.
이것은 과연 하나님 백성의 생활의 특징의 무엇을 교훈할까요? 그것은 절망
의 지상에 살지만 온전한 소망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만이 갖는 특수한 삶을
교훈함입니다. 고후6:8-10에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
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했
던 바울의 간증과도 같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성도의 소망이란 어떤 것입니까?
1. 처한 현실에서의 소망입니다.

곤충 중에는 부정한 것으로 날아만 다녀서는 안 되는 규정이 있습니다. 가령
파리, 모기, 나비, 말벌, 꿀벌 등과 같이 날아다니는 곤충들은 먹을 수 없습
니다. 실제로 이것들은 먹기에 부적합한 것들입니다. 왜 날아만 다니는 것은
안될까요? 날아 다니는 것은 처해 있는 현실을 외면함을 상징하기 때문입니
다.
이처럼 하나님 백성들은 자신이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을 외면하는 그런 소망
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도 심히 괴로울 때 그런 독백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시55:6에 "내가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그러나
이 말은 자기 말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현실에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
의 삶은 현실을 외면하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롬5:3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
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했습니다. 성도는 살아도 죽어도
소망이 넘칩니다.
그런데 날기만 하는 곤충이 부정하다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가령 환경에서 소망을 찾지 못한다고 가정을 등지거나 사회를 등진다면 하나
님의 영광을 가리는 커다란 실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이런 사상을 가
진 사람들이 얼마나 신앙과는 이탈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습
니까? 이것은 모두는 물론 자신마저 불행케 하는 일입니다.

2. 그렇다고 성도의 소망이 세상의 것일 수 없습니다.

20절에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했습니
다.
정결하려면 일단 날개는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날개가 있고 다리로 뛰어다
녀야지 기어다니면 안됩니다. 혹은 날개도 없이 벌레처럼 기어다녀서도 안됩
니다. 그런데 날개가 있으면서 기어다니는 곤충은 가령 개미나 바퀴벌레 같은
곤충 등입니다. 이런 곤충은 부정한 것들입니다.
여기 기어다님은 흙과 가까이하는 것으로 성경에서 흙은 저주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뱀이 저주받고 배로 기어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기어
다닌다는 것은 세상의 것들을 좇고 소망 삼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
리 성도의 삶일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날개를 가진 소망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앙
망하다가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성도는 하늘의
시민권자들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위에 계신 예수님께 속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소망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골3:1-6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
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하였습니다.
롬8:24에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라고 했
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소망 삼고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절망에 빠졌습니
다. 우리가 고궁이나 왕의 무덤이나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그들이 그 시대에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 모르고 죽었다면 가장 불쌍한 사
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
로이 연락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는 병들어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
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
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의 불꽃 속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이 부자의 최후를 통해서 세상 것에만 소망 둔 한 인생의 비참한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런데 기어다니는 곤충이 부정하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처럼 세상을 소
망하고 세상 것을 사랑하면 그 심령은 죄됨을 시사함입니다. 요일2:15-16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
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
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오 세상
으로 좇아온 것이라" 했습니다.

3. 성도는 현실에 살지만 믿음 안에서 소망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1절에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
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메뚜기나 베짱이나 귀뚜라미나 팟종이 등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이 곤충들은 날개는 있지만 날아만 다니지 않고 현실에 처하면서
그러나 현실에 묶이지 아니하고 높이높이 뛰는 곤충들입니다. 바로 우리 성도
들의 소망의 삶이 그러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즉 성도는 현실에서 살지만
소망을 주님께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시39:7에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했습니
다.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나의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시62:5에도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칠흑같이 어두울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소망
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소망은 마치 닻과 같아서 잡아 다니면 점점 가깝게 옵니다. 그래서 저 영원
한 천국이 바로 앞에 다가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럴 때 죽음의 공포도 시련의
고달픔도 다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위해서 적극적인 선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마11:12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했습니다.
이런 적극적인 자세를 갖지 않고서는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소망을 갖기 위해서 성경과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롬15:4에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
라" 했고 롬15:13에는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
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했습
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특징이 어떤 것인지를 아
셨을 줄 압니다. 우리 모두 세상에 소망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 삼고 살아
갑시다. 우리의 처한 현실이 어떠할지라도 소망으로 충만하여 참고 인내하고
기뻐하며 싸워 나가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결 예법
레11:24-28
= 성결생활론 =

요 약
생물의 사체에 의해 부정을 입었을 때 정결케 하는 예법은 하나님 백성들
의 성결의 원리를 보여준다. 먼저 부정한 것의 주검을 만지기만 해도 부정
하듯 마음으로라도 범죄했다면 회개해야 한다. 또 주검을 옮기는 자가 옷을
빨아야 했듯 심령과 행실이 더럽혔다면 하나님 앞에서 보혈과 성령으로 씻
어야 한다. 그리고 사체가 그릇에 떨어지면 깨뜨려야 했듯 죄악이 지정의
인격에 침투하면 그 자아는 철저히 깨뜨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
장 원하시는 것은 거룩임을 명심하자.

설 명

☆ 하나님 백성의 생활
<특징 5 = 성결 생활>

1. 마음의 범죄도
"이것들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24절)
정결한 짐승의 사체라도 만지면 부정(39절)
참고 : 마5:22, 28

2. 더럽힌 행실은 씻어야
"무릇 그 주검을 옮기는 자는 그 옷을 빨지니"(25절)
참고 : 계22:14

3. 잘못된 자아는 깨뜨려야
"질그릇에 떨어지면 - 그 그릇을 깨뜨리라"(33절)
"주검이 물건 위에 떨어지면 - 깨뜨려 버리라"(35절)
참고 : 고후10:4-6


지난 시간에 정결한 곤충류를 통해서 하나님 백성의 특수한 삶인 소망의 생
활에 대해서 말씀을 배웠습니다. 성도는 이 지상에 충실하면서도 썩고 죽어질
세상에 소망을 삼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소망
이 없는 곳에서도 소망으로 충만한 삶이란 하나님 백성들만이 갖는 특수한 삶
입니다.
오늘은 부정한 여러 종류의 것들로 부정함을 입었을 때 해야 할 정결 예법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부정한 생물들에 접촉했을 때는 반드시
정결 예법에 따라 처리해야 했습니다. 그럼 이런 정결 예법이란 무엇을 교훈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일반적으로 감염을 우려한 위생적인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씻는 예법들을 통하여 죄의 사악함과 가증스러움이 무엇이
며 그리고 악에 물드는 것을 피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결한 삶이 무엇
인가를 인식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육적인 성결을 통해서 영적인 성결
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한마디로 본문은 회개에 대한 구체적인 교훈입니다.

그럼 영적 성결 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1. 마음으로 지은 죄도 회개해야 합니다.

24절에 "이런 유는 너희를 부정케 하나니 누구든지 이것들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했습니다. 그런데 39절에 보면 정결한 짐승일지라도
스스로 죽은 사체라면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 죽은 사체를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함은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그 시대에 위생상 세균의 감염을 막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대
개 병들거나 죽을 때 많은 세균들이 몸밖으로 빠져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은 사체를 만질 때 그 세균에 감염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신령한 관점에서 여기 죽은 사체란 무엇일까요? 영적으로 죄악의 상태
입니다. 이것을 만진다란 마음속에 연상하며 연관짓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
서 보여주는 것이 생각으로 짓는 죄입니다. 생각으로도 죄를 지었다면 지은
것입니다.
마5:22에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미워함도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마5:28에서는 "나는 너희
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지은 것도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6:29에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무릇 그를
만지기만 하는 자도 죄 없게 되지 아니하리라" 했고, 욥31:1-3에는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
느냐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했습
니다.
그런데 마음의 죄의 범주를 잘 알아야 합니다. 잘 모르면 죄 아닌 것까지도
정죄하여 혼란에 빠집니다. 사람의 마음은 스크린과 같아서 여러 가지 것들이
거기 흡수되거나 영상화되어 나타납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생각할 수 있고
혹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스크린을 사용하사 진리를 깨닫게 하실 수도 있고
혹은 사단이 우리 마음의 스크린을 사용하여 유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혹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 유혹을 받아들여 나와 연관시켜
구체화시킬 때 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한결 같이 시험을 받는 자로되 죄
는 없는 분입니다. 우리에게도 떡과 명예와 영광의 시험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 속에 죄의 유혹이 온다해도 물리치면 죄가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여 구체화시키게 되면 죄가 됩니다. 혹은 악념이 오래 머무는
것도 결국은 그 자세 자체가 동의와 추구를 의미하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충만할 때 이같은 것들이 좀처럼 만져지지 않는다는 사실입
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성도의 영적생활의 특징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정
타지 않는 심령이 됩니다. 물론 이상의 말씀은 원리적인 적입니다. 지상에서
성도의 삶이란 신앙의 파고가 있기 때문에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에 거하되 범하는 죄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항
상 성령에 충만하여 강한 면역을 가져야 합니다.

2. 범죄의 행실이 있다면 역시 회개해야 합니다.

25절에 "무릇 그 주검을 옮기는 자는 그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했습니다.
인간생활에서 사체처리는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생물이든지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죽게 되고 누군가는 그것을 처리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옳기는 자는 위생에 주의해야 하는 것은 당
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체를 만지는 사람은 손만 씻고 저녁까지 가면 되지
만 사체를 옮기는 사람은 힘써 사체를 처리하는 동안 부정이 그 옷에까지 묻
게 되므로 더 주의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옷까지 빨라고 교훈합니다. 그러니
까 옮긴다는 것은 만지는 것보다 더 발전된 개념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행함의 죄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죄란 발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약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
라" 했습니다. 시1편에도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 했듯이 마음에서
행함으로 발전되고 행함에서 아주 악인으로 발전되고 고착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란 스폰지와 같아서 늘 무엇을 빨아들여 더러워지기 때문에 늘 씻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보는 것 듣는 것 혹은 사건들을 통해서 얼마나 죄악
이 침투합니까? 벧후2:6-8에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
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
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했
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성령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보고 듣는 모든 것에서 심령이 더
러워집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탐욕이 가득 차고 음욕이 가득 차고 온갖 죄성
이 생겨나는 것을 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여러 영상 매체들로 인해 심령이
많이 더러워지고 있습니다. 좋지 않는 것을 보면 심령이 더러워지고 더 집착
하면 성도라 일컫기 어려울 만큼 한심한 심령 상태가 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
다. 혹시 여러분 심령이 이렇게 더러워져 있다면 죄악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
할 뿐 아니라 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늘 성령 충만하여 죄악에 대한 강한
면역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오늘 말씀드리는 씻는 정결 예법입니다. 이 법대로 심령을 하나님 앞
에 내어놓고 빨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중생했음으로 몸 전체가 씻은
바 되었고 다시 더럽혀질 이유가 없지만 매일매일 묻는 심령의 악은 늘 씻어
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예수님과 관계가 끊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
님 앞에 엎드려서 심령을 씻어 주세요 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보혈과 성령
으로 빨아주셔서 추한 심령은 의의 세마포와 같이 깨끗해집니다. 그것은 죄악
의 상태나 각인의 영적 수준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30분이나 한 시간 정도
기도하면 악성들이 사라지고 의와 사랑과 거룩의 심령으로 됨을 봅니다. 그러
나 가장 정답은 마음속의 악성이 사라지고 거룩한 마음이 충만해 질 때까지입
니다.
이 씻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계22:14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
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
으려 함이로다" 했습니다. 이는 씻어야 만이 예수님과 교제가 성립되고 모든
은혜 생활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는 더러운 심령 그 대로는 하나
님과의 영적 교제도 막혀버리고 맙니다.

3. 잘못된 자아는 깨뜨려야 합니다.

33절에 "그것 중 어떤 것이 어느 질그릇에 떨어지면 그 속에 있는 것이 다
부정하여지나니 너는 그 그릇을 깨뜨리라" 35절에는 "주검이 물건 위에 떨어
지면 그것이 모두 부정하여지리니 화덕이든지 질탕관이든지 깨뜨려 버리라 이
것이 부정하여져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 되리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채의 부정이 얼마나 악한 것이었으면 이렇게 그것이 떨어지
거나 담긴 그릇이나 화덕까지도 깨뜨리라 하셨는지 짐작이 갑니다. 당시 그릇
이나 화덕은 아주 중요한 생활 도구입니다. 그러나 부정해지면 아무리 아깝지
만 깨뜨려야 했습니다.
여기서 그릇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쓰시는 그릇입니다. 이 그릇이
깨끗해야 하나님께서 쓰시는데 구체적으로 그릇이란 사람의 인격입니다. 인격
에는 지정의 3요소가 있는데 죄악이 지성에 침투하면 그 지성은 가만 두어서
는 안됩니다. 진리란 타협이 아닙니다. 가령 예수 말고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 같은 부정한 이론은 달리 고쳐 쓸 수가 없습니다. 혹은 자기 생각대
로 예수 믿는 사람들 그것은 깨뜨려 버리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후10:4-6에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
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
비하는 중에 있노라" 했습니다.
혹은 화덕처럼 우리의 감정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 역시 깨뜨려야 합니다.
화덕이란 불의 열로 인해 세균의 오염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교훈이
주어짐은 신령한 관점이 더 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잘못된 감정이란 가령 십
자가 지고 가는 것이 영광인데 그것을 슬픔이라고 느낀다면 고쳐져야 합니다.
지성으로는 영광인줄 알면서도 감정으로는 그것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의 임종 역시 기뻐하고 춤을 추어야 할 일인데도 슬픔과 두려움이라면 깨
뜨려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의지도
늘 무뎌지고 약해지고 완고해 지며 교만해 집니다. 그러므로 경건을 연습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근신의 자세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이 죄악이 침투한 지정의 인격을 달리 일컫는다면 자아입니다. 이러한 육적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나를 철저히 내려놓고 하나님을 좇아야
합니다. 마치 옥합을 깨뜨리듯이 자아란 깨뜨려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은 회개를 죄
악을 용서받는 고백 수준으로 하거나 좀 나은 사람은 죄성 씻음 수준으로 했
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혈 수준이 아니라 자아마저도 하나님 앞에서 순복하
도록 처리하는 십자가 부활 수준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정결 예법에서 보듯이 죽은 사체에 얼마나 접촉했느냐에 따라 처리하
는 법이 달라짐을 보았습니다. 그냥 물리치면 되는 수준은 부정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오래 머문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혹은 마음에 세속의
때가 묻어 죄성이 형성되거나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더욱 엎드려서 씻어
야 합니다. 그리고 죄악이 인격화된 자아는 반드시 깨뜨려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결 예법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목회자 여러분!
고전6:16에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
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
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하
셨습니다. 죄악은 만지지도 옮기지도 담지도 마십시다. 오늘 정결 예법을 통
해서 심령 청결법을 깨달아 영적으로 날마다 새로워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목:땅에 기는 것
레11:29-30, 36, 42-47
초점:변화생활론

요 약
땅에 기는 여러 종류의 부정한 것들은 욕망의 발전 과정을 시사한다. 즉 욕망은 먼
저 생각에 머물다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고 결국은 그 인격이 되어 인생의 목적과
소원이 되고 만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에서 상대적으로는 하나님 백성들의 삶이 어
떠해야 함을 엿보게 된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의 은혜로서 욕망에 사로잡히
지 않으며 시험이 와도 마음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나아가 행함에 있어서도 주의
뜻대로 살기를 소원할 뿐 아니라 살아진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

설 명

☆ 하나님 백성의 생활
<특징 6 = 변화 생활>

<관찰>
모두 기어다니며, 다리의 수효가 점증적이며,
다리 수효를 근거로 세 가지로 구별하고 있다.

<해석의 키>
시편 1:1, 약1:15

※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란?

1. 욕망대로 살지 않음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42절)

2. 죄악으로 행치 않음
"네 발로 걷는 것이나"(42절)

3. 세속을 집착거나 목적하지 않음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42절)

★ 부정이 안타는 것(레11:36-38)
① 샘물 - 성령 감동
② 방축물 - 성령 충만
③ 심을 종자 - 말씀 충만


이 시간에는 하나님 백성의 생활의 특징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그 동안 우
리는 하나님 백성의 특수한 삶을 배웠습니다. 즉 새김질과 쪽발 가진 짐승들
을 통해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원리인 말씀생활을, 물고기들을 통해서는 기도
생활을, 새들을 통해서는 하나님 백성들의 사랑과 밝음과 강하고 담대한 정서
생활을, 곤충류를 통해서는 하나님 백성들의 소망생활을, 그리고 오늘도 땅에
기는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들의 특수한 삶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기어다니는 것들을 부정한 식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땅에 기
는 것들에도 세 종류가 나타납니다. 42절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
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했습니다. 이 구절을 관찰해 보면 땅
에 기는 것들의 공통점은 배로 기어다님입니다. 차이점은 발의 수효가 점증적
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어다니는 것들을 발의 수효에 기준하여 분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의 용례로 볼 때 배는 욕망이요 땅은 세상이나 육체나 저주를 가
리킵니다. 그럼 기어다니는 것들의 다리의 증가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욕망의
발전성을 시사합니다. 이것은 발의 수효에 의해 구분했다는 데서 더욱 확실합
니다.
본문을 푸는 열쇠는 시편 1편과 약1:15절입니다. 시1:1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했습니다. 그리고 약1: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
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욕망이 다리의 수효를 증
가시키며 점차 강화되는 현상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상태입니다. 죄인의 마음
의 욕망은 행위를 낳고 나아가 죄의 인격을 만들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상징하는 바가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죄인의 모습을 봅니다. 아울러 그것을 부정하다 하
셨으니 이는 결국 이처럼 살지 않는 하나님 백성들의 성결한 삶을 봅니다. 즉
하나님 백성들은 죄인들과 동일하게 이 세상에 살고 역시 육체를 가졌고 육체
의 본능을 그 욕망대로 살지 않는 특수한 삶입니다. 이것이 어찌 특수한 삶이
아닙니까? 이 인간의 본능은 짐승과 같거나 어쩌면 짐승보다 더 합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욕망대로 살지 않고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 백성
들이 특수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체를 가지고 세상을 사셨습니다. 이 육체는 배고픔도 있고
목마름도 있고 죽으실 수도 있는 우리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히4:15
말씀대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고 했습니다. 이 특수한 삶을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 좀 더 세분하여 그 교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 백성은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42절 상반에 "곧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
이나" 그랬습니다.
여기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은 뱀이나 지렁이나 벌레 종류입니다. 이것은 아직
욕망이 다리를 갖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생각 속의 악념일 뿐
입니다. 죄인들의 악은 이렇게 악념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부정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백성의 삶은 이와는 반대로 그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입니다. 성령 받은 성도는 마음까지도 성결함을 입습니다. 그렇다고 유혹조차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받은 성도도 죄의 유혹이 있지만 머리 속에 좀
스치려다 사라져 버리거나 좀처럼 욕망이 나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점은 악념이 오래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악념의
순간적인 머무름은 물리치면 끝나지만 오래 머물면 그것은 이미 동의를 의미
함이요 죄악을 추구하는 것으로 범죄입니다. 율법에도 알고도 묵인하는 것은
동의로 보았습니다.
성령 충만 받기 전에는 조그만 언짢은 일에도 잠을 못 이루었지만 성령 충만
받은 후에는 그 문제가 나와 관계가 없는 입장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만났을 때 시험에 든다면 스스로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는 점검의 기회로
삼도록 하시는 은혜로 여겨야 합니다. 무엇인가 은혜 생활이 부족하거나 잘못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성령이 나를 지배하실 때 우리의 마음에는 뱀
같은 사악한 악념이 머물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의 백성은 행함에서도 주의 뜻대로 살아집니다.

42절 중반에 "네 발로 걷는 것이나 -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가증함이니
라" 했습니다.
여기 네 발로 걷는 것은 배가 땅에 닿은 상태에서 네 발로 걷는 것을 가리킵
니다. 여기에는 쥐 족제비 두더지 고슴도치 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는 것
은 같으나 발이 달려 활동력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뱀이나 지렁이나
벌레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활동성이 뛰어납니다.
성경에도 발이나 날개가 붙으면 몹시 빠른 것입니다. 그래서 롬3:15에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했고 잠23:5에도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한 것이나 다니엘서 7장에도 나오듯 표
범 등위에 날개란 매우 날새고 빠름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욕망이 이제 행동화하는 단계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약1:14-15절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
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했습니다. 이 과정은 사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조상 하와도 뱀의 말을 듣고 그의 마음이 선악
과에 끌리자 실과를 따먹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죄의 길에
행하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들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원칙적으로 범죄하지 않
습니다. 그래서 요일5:18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
도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네 발 가지면서 기는 것들이 보여주는 역설적인 교훈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교훈하셨습니까? 마5:38-48에 "또 눈은 눈
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
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
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
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너
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
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
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천국민의 특수한 삶을 가능하
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3. 하나님의 백성은 생명을 바쳐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42절 하반에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가증함이니
라" 했습니다.
여기 여러 발 가지면서 기는 것은 거미 지네 노래기 같은 종류들입니다. 이
것들은 앞의 것들보다 더욱 많은 다리를 가졌습니다. 백과사전을 보니까 지네
의 다리는 최하 15쌍에서 170쌍까지 있다고 합니다. 왜 그토록 많은 다리가
필요한지는 창조주 하나님만이 아시겠지만 이것이 교훈적으로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다리의 개념은 이동성은 물론이고 집착성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몇 번의 실수나 호기심이 아니라 이제는 더 발전되어 죄악이 그 인격화됨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죄악이 인격화되면 반복적인 범죄를 하게 되고 심지어는
그것이 간절한 소원과 목표로 바뀝니다. 이것이 죄인의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부정하다 하심은 하나님 백성들은 이렇게 살지 않음
은 물론이고 나아가 사나 죽으나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삶을 시사합니다. 그
래서 바울은 빌1:20-21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백했고, 살전5:9-10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죄
악을 향한 많은 다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나님을 위
한 많은 다리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 그럼 전천후 부정을 방지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레위기 11장에는 접촉하거나 위에 떨어져도 부정하게 되지 않는 예외 세 가
지가 있습니다. 36-38절에 "샘물이나 방축물 웅덩이는 부정하여지지 아니하
되 그 주검에 다닥치는 것만 부정하여질 것이요 이것들의 주검이 심을 종자에
떨어질지라도 그것이 정하거니와 종자에 물을 더할 때에 그것이 그 위에 떨어
지면 너희에게 부정하리라" 했습니다.

1. 샘물은 부정하여지지 않습니다.

이 샘물은 은혜의 샘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우리 인격에서 흘러나와 앞서 행
할 때 그 심령은 어떤 부정에도 오염되지 않고 도리어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갈5:16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2. 방축물도 부정하여지지 않습니다.

여기 방축물은 저수지를 가리킵니다. 저수지는 많은 물을 저장하고 있기 때
문에 자체정화현상이 있습니다. 이는 성령 충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샘물과
방축물의 차이는 저장성의 차이입니다. 샘물은 많은 물은 저장하고 있지 않지
만 흘러나오기 때문에 깨끗합니다. 그러므로 아직 성령의 충만에 이르지 못했
어도 성령의 감동에 사로잡히면 죄악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방축
물은 이 샘물이 모아져서 충만 상태가 된 것이므로 능히 이김을 경험하게 됩
니다. 그래서 욕망의 지배를 받지 않고 죄악에 부정 타지 않으려면 샘물이나
방축물 즉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3. 심을 종자에 떨어져도 부정하게 되지 않습니다.

여기 종자는 보통 씨가 아니고 종자로 쓸 씨입니다. 여기 씨는 말씀이요 종
자는 심기움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식 정도에 머뭄이 아니라 마음에
심겨진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과 성령으로 된 말씀 충만이어야 합
니다. 즉 말씀으로 충만할 때 욕망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살전1:5에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
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
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
식이 충만할지라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와 반대로 성령 충만을 추구하나 말씀이 잘못되어 있으면 부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종자에 물을 더해 불릴 때는 부정한 것이 떨어지면 부정하
게 됩니다. 그것은 수분으로 병균이 번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무리
좋은 말씀일지라도 거기에 인간의 생각과 세속 사상이 가미된다면 세상의 죄
의 부정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사8:20-22에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
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그 주릴 때에 번조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
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
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하셨습니다. 그
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잘못된 사상이 가미되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야 합니
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정한 식물을 통해서 욕망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의 은혜에 젖어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넘어져 이 죄악
의 수순을 밟게 됩니다. 참으로 세상을 살고 육체를 가졌지만 그 욕망대로 살
지 않는 특수한 삶이 성령 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그래서 모두 주
님의 은혜 안에서 더욱 변화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칭찬 받는 귀한 성
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